2021/07/22

카를 바르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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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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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바르트
Karl Barth
출생1886년 5월 10일
스위스의 기 스위스 바젤
사망1968년 12월 10일 (82세)
스위스의 기 스위스 바젤
성별남성
국적스위스
직업교수신학자
배우자넬리 호프만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년 5월 10일 ~ 1968년 12월 10일)는 스위스의 개혁 교회 목사이자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꼽힌다. 

예수를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인 인간으로,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기록으로, 윤리적인 지침서로 이해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으로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그의 계시관과 역사관은 차이점을 보였기에 그의 이러한 신학적인 성격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폴 틸리히에밀 브루너와 루돌프 불트만과 함께 20세기 초 개신교 신학계를 주도했다.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독일어 판 Kirchliche Dogmatik

생애[편집]

목회경험[편집]

신학자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의 장남인 카를 바르트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베른에서 보냈으며, 1904년 베른 대학교, 베를린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학생 카를 바르트는 교수들의 영향으로 당시 유럽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1911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의 교회에서 개혁교회 목사로 목회하면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써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본가들로부터는 '빨갱이 목사'(Red Pastor)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부 공장주들은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교파를 바꾸는 일도 있었다 한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편집]

그는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 설교하지 않으며 성경을 윤리책으로 오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4년 8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이 전쟁을 지지한 '어둠의 날'은 그에게 자신이 배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반박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카를 아담은 '카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유럽신학계의 충격은 컸는데, 카를 바르트 자신도 '나는 우연히 잡은 교회종의 줄을 잡아당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게 한 사람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전통에서 길을 찾다[편집]

카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한 후 자신이 속한 개혁교회(Reformed)의 전통에서 길을 찾았다.그는 개혁교회 신학의 뿌리인 장 칼뱅울리히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사상 및 제2 스위스 신앙고백등의 교의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바르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 곧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기독교 사상의 열매를 맺게 했으며,신학무용론이 지배하는 반지성적인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과 성직자들에게 신학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반 나치 운동[편집]

카를 바르트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기독교인들과 개신교 신학생들까지도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고,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면서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하자, 나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고백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히틀러의 나치즘운동이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요, 유대인집시등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대중강의와 설교를 통해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반 나치이념의 특징을 보여주는 문헌은 《바르멘 선언》이다. 바르멘 선언은 1934년 독일 바르멘에서 친나치적인 독일 교회에 반대하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인들이 모여서 발표한 反 나치 신학선언으로, 하나님의 말씀(Logos)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으며, 자신을 길이요, 진리로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도, 설교의 주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주요주제이다.

결국 그는 나치 독일의 탄압으로 독일밖으로 영구추방당하여, 스위스 바젤 대학교로 이직했다. 카를 바르트의 나치반대운동은 카를 바르트연구의 핵심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폴 틸리히디트리히 본회퍼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었다.

전후활동[편집]

전쟁이 히틀러의 패망으로 끝난후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1948년에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 헝가리를 방문, 헝가리 개혁교회와 대화하였다. 또한 1948년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결성된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성립과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주요 활동은 저술활동으로 《교회교의학》을 저술했으며, 인생의 말년인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는 자신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개신교 신학입문》을 저술하였다. 이중 《교회교의학》은 1968년 바르트의 죽음으로 일부내용이 저술되지 못한 미완성작품이며, 한국어판은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번역,출판 중이다. 현재 4권까지 출판되어 있다. 1968년 별세 전날 20세기의 대표 신학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1]

종교 사회주의 운동 참여[편집]

카를 바르트는 1911년부터 스위스 공단지역인 자펜빌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억압과 착취를 받는 현실을 보았으므로 현실참여적 성직자가 되었다. 바르트는 1913년 스위스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당시 유럽 교회가 관심을 갖고 있던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도 중심인물로 참여하였다.

신학의 특징들[편집]

  • 말씀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명제를 가지고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높이고, 존중하는 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사람으로 오신 말씀(Logos)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므로, 바르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말한다. 그는 신학의 출발점과 귀결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기복신앙[2]과 윤리를 가르쳐 온 일부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 교회중심의 신학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실천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즉,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교회에게는 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학의 지혜에 따라 교회를 이끌 책임이, 신학자에게는 교회에 대해 생각하고,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 예언자적 신학

바르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인도해야 한다고 보았다.그래서 바르멘 선언을 형제교회 성직자들과 함께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의 방법[편집]

바르트의 신학적 구분법은 루터와 칼빈의 전통적 구분법인 원형/모형을 따르지 않고, 칸트의 현상적(phenomenal)/본체적(noumenal)의 구분을 따랐다. 그 뿐만 아니라, 비록 그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 반대각을 세웠지만, 슐레이어마허의 주관적인 관점을 받아들였다. 결국에는 바르트에게 성경은 객관적인 역사에 기초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실존적으로 만나는(existential encounter) 가능성을 뜻하였다.[3]

그리스도 일원론 (Christomonism)[편집]

바르트는 성경전체를 신구약성서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언약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서, 부적절한 강조라고 코닐리어스 반틸은 말한다.[4]

카를 바르트 관련 도서 목록[편집]

  • 《칼 바르트》, 에버하르트 부쉬 지음, 손성현 옮김, 복있는 사람, 2014
  • 《위대한 열정》, 에버하르트 부쉬 지음,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
  • 《칼 바르트 말씀의 신학 해설》, 정승훈 지음, 새물결플러스, 2017
  • 《칼 바르트의 신학》, 김명용 지음, 이레서원, 2007
  • 《칼 바르트와 동시대성의 신학》, 정승훈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2006
  • 《칼 바르트 - 말씀하시는 하나님, 응답하는 인간》, 마이클 레이든 지음, 윤상필 옮김, 비아 (출판사)
  • 《로마서》,칼 바르트 지음, 손성현 옮김,복있는 사람, 2017년 : 1922년에 칼 바르트가 주석한 로마서.
  • 《왕양명과 칼바르트》,김흡영 지음, 예문서원, 2020년
  • 《설교자의 기도》,칼 바르트 지음, 박정수 옮김,비아, 2019년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현대 신학 이야기》-카를 바르트:하나님 말씀의 신학자/박만 지음/살림출판사, 23쪽.
  2.  신학자에 따라서는 기복신앙을 바알 신앙, 번영신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3.  Clark, R. Scott (2008). 《Recovering the Reformed confession : our theology, piety, and practice》. Phillipsburg, N.J. 2501/9975쪽. ISBN 978-1-59638-773-7.
  4.  Van Til, Cornelius (2007).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 prolegomena and the doctrines of revelation, scripture, and God》 2판. Phillipsburg, N.J.: P & R Pub. 16쪽. ISBN 978-0-87552-789-5.

일선님 '야마기시즘 실현지' 산안농장 방문 1991년

 나단청

친구요청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정보가 페이스북에 별로 없어서..

자진 신고합니다.😊

저는 유상용씨와 동갑내기 이면서 산안농장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은 경상남도 진주에 살고 있고 지리산 고운동에서 이남곡 선생님과 인문 수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산안 농장 있을때 선생님 어머님께서 농장으로 7박8일 특별강습연찬회 오셨지요.

캐나다에서..

오래전 일이지만 열정이 대단하신 할머니로 기억 됩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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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ent Yesterday at 11:09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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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7

You sent Today at 11:57

저의 어머니 일선님이 산안농장에 가신 것이 몇년도였던가요? 어머니 일기에서 한번 찾아보려고요. 그리고 그때의 어머니 기억에 대해 기억나시는 것을 조금 더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아 잘 모르는 어머니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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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

나단청

단청 sent Today at 15:02

1991년경인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멀리 토론토에서 ?  를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그게 '행복'  이었는지 '자유'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특별강습연찬회 감상문이 아직 남아있는지 유상용씨가 농장에 연락해본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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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ent Today at 15: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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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물, 땅”의 생태여성적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 풍수우주론으로부터 생태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삼위일체론

Korea Open Access Journals

“바람, 물, 땅”의 생태여성적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 풍수우주론으로부터 생태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삼위일체론

신학사상

약어 : 신상

2017, no.179, pp.117 - 154

DOI : 10.35858/sinhak.2017..179.004

발행기관 : 신학사상연구소

연구분야 : 기독교신학

Copyright © 신학사상연구소

강현미1
1University of Exeter (UK)

Korea Citation Index
인용한 논문 수 : 2 서지 간략 보기

초록
본 논문은 현대 한국교회 저변에 만연한 성차별(sexism) 의식과 자연, 생태, 생명 인식의 결여로(eco-antipathy) 억압받는 여성과 자연의 해방을 도모하는 생태여성적(eco-feminist)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을 풍수우주론으로부터 제시한다. 한국 토착적 시각으로부터의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의 제시는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적 기독교가 여성과 자연을 소외시키고 억압했다는 비판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결책으로, 풍수우주론으로부터 은유의 상징 언어를 통해 생태여성신학(eco-feminism)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은 전통적 기독교 언어의 해석학적 신학의 범주를 넘어 한국의 토착적이며 생태여성신학의 시각에서 새로운 재해석을 통해 탈 가부장적 기독교 신학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은유”(metaphor)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해석학적 도구로 사용되며, 역(IChing)을 기반으로 한 풍수우주론의 음양론과 기론을 바탕으로 한국교회 여성들의 경험을 포함하는 생태 여성적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을 제시한다. 새롭게 제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의 세 위격(hypostasis)은 풍수(風水)의 어원적 속성과 여성적 속성을 가진 은유, 즉 ‘풍(바람/기)’을 해방의 성령으로, ‘수(물)’를 구원의 그리스도로, ‘땅’을 창조주 어머니로 재해석 한다. 풍수우주론으로부터 재해석된 우주론적이며 포괄적인 생태여성적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은, 이원론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적 기독교의 남성적 언어와 해석학의 범위를 넘어 패러다임의 전이를 통해 일원론적, 비위계적 사유로의 재해석으로 부터 억압받고 소외되어온 여성과 자연의 해방을 이루게 할 것이다.

키워드
풍수우주론, 생태여성 하나님 모델, 삼위일체, 은유, 해석학적 재구성

정경옥 - 나무위키 1903 감리교 목사 신학자

정경옥 - 나무위키
정경옥
최근 수정 시각: 2020-01-08 14:35:29


분류 감리회진도군 출신 인물1903년 출생1945년 사망
정경옥(鄭景玉, 1903. 5. 24~1945. 4. 1)[1] 은 감리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전남 진도군 진도면[2] 교동리 123번지에서 출생했다. 진도소학교를 거쳐 서울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며 기독교에 심취하게 된다. 출옥 후 상경하여 서울YMCA 영어과를 수료한 후, 1923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同志士大学)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2학기 개강을 앞둔 그 해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사건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편입하고 1927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27년 9월 도미,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 있는 개렛(Garrett)신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미국 사상계를 휩쓸던 자유주의 신학자 롤(H.F. Roll)의 지도를 받아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석사(B.D) 학위를 받았다. 1929년 9월 계속하여 같은 지역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로 1931년 5월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계속하여 박사 과정을 밟으려 했으나, 모교의 부름을 받고 1931년 귀국하여 협성신학교 조직신학 전임강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한편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3년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정교수가 되었으며, 1937년까지 협성신학교[3] 교수로 재직하면서 명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다.[4]

그는 교수 취임 이후 강의에도 주력했거니와 집필에도 힘을 기울였다. 협성신학교 교지인 〈신학세계〉의 주간을 맡으면서 1932년에서 1936년에 걸친 5년간, 무려 60여 편의 신학논문을 발표했고 한 권의 저서(《기독교의 원리》, 1935)를 내놓았다. 이 외에도 YMCA에서 발간한 〈청년〉지, 류형기 박사가 주간으로 펴낸 〈신생〉지에 여러 논문과 일기, 수상, 설교 등을 발표했다. 

한편 열정적인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된 그는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2년간 고향인 진도로 내려가 요양을 하였다. 이 기간중 그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설교집 《그는 이렇게 살았다》(1938)와 조직신학 개론서인 《기독교신학개론》(1939)을 집필하였다. 

요양을 마친 후 1939년 모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가, 1941년 3월 만주로 건너가 사평가(四平街)신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던 중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요양하게 되었다. 1942년 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이후 한국인 친미파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친미파로 지목되어 8개월간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여기서 일제는 그에게 일본적 기독교의 논리적 구성을 강요하였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논리와 문장이 유독 어려운 "일본적 기독교론"을 쓰게 된다(이 논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국 일본적 기독교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천배, "고 정경옥 교수의 편모", 〈기독교사상〉, 1958. 5). 

이 공로로 풀려난 그는 1943년 2월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특히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토"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자기 방에서 10명 남짓한 남녀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는 1945년 3월, 두 차례나 수술받은 복막염이 악화되어, "곧 날이 밝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그 해 4월 1일, 불과 광복을 4개월여 앞두고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42세,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그의 천재적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언명하였듯이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의 주된 저서에서 즐겨 인용한 신학자들은 역시 슐라이어마허, 리츨, 바르트 등이다. 특히 "위기의 신학"(1932), "위기 신학 사상의 연구"(1936) 등에서 바르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한편 성서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당시 고도로 발전되었던 역사적, 문학적 비판연구를 채택했다. M. 디벨리우스와 R. 불트만의 형식 비판연구를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한 이도 바로 정경옥이었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고 역사나 과학적 지식을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안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성서가 인간의 책이요, 종교문학에 속하는 것이라 했다. 즉 한 민족과 개인이 하나님을 찾고 이에 복종하는 생활의 경험을 역사, 율법, 편지, 시가 등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성서이기에, 마땅히 문학적, 역사적 연구 등을 통해 그 진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어떤 통일된 신학체계나 학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항상 새롭게 형성해 가는 것이 개신교의 원리라고 보는 신학적 경향이다. 이런 점에서 정경옥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또한 그의 신학적 공헌은 무엇보다도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을 정립했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의 원리》 서론의 요점만을 간추려 보면, 그는 먼저 조선 감리교회의 교리적 특질을 두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하나는 종교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선교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다. 전자를 경건주의라 한다면 후자는 복음주의다." 또한 "교리는 구원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아니한다." 즉 감리교 교리적 선언은 우리가 믿는 바를 선언한 것이요, 결코 우리 교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교리적 경험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함과 그를 따르려는 결심뿐이다." 누구든지 경건한 삶을 영위하는 이상 "개인 신자의 충분한 신앙 자유를 옳게 인정한다." 

-저서:《기독교의 원리》, 감리교신학교, 1935;《그는 이렇게 살았다》, 평양애린원, 1938;《기독교신학개론》, 감리교신학교, 1939;《감리교교리》,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1939;《신비경험의 가치》, 삼각산기도원, 1939.

[1] 감리교회 역사 자료 검색 서비스
[2] 현 진도읍
[3] 현 감리교신학대학교이다. 협성대학교가 아니다!
[4] 그가 기독론을 강의할 때에 학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다문화시대 새로운 신학…이정용의 `주변성 신학`] - 매일경제

[다문화시대 새로운 신학…이정용의 `주변성 신학`] - 매일경제

[다문화시대 새로운 신학…이정용의 '주변성 신학']
입력 : 2014.12.03 06:00:32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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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였던 고(故) 이정용(1935∼1996) 전 미국 드루대 교수는 스무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살았던 그는 주변부 사람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다른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신학의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마지널리티: 다문화 시대의 신학'(포이에마 펴냄)은 평생을 주변부 사람으로 살았던 저자가 백인 남성과 유럽 중심의 서구 신학이 아닌, 북미라는 다문화 사회에서 주변부 사람이라는 자신의 삶의 정황을 토대로 모색한 '주변성 신학'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주변성과 중심성의 개념을 연못의 물결로 설명한다.

연못의 중심에서 퍼져 나간 물결은 연못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 다시 중심을 향해 되돌아가듯이 중심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가장자리 주변 때문에 결국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성의 관점에서 신학을 생각한다.

주변성은 신학에도 많은 함축성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주변부 사람들은 학자나 교회 당국자라는 지배 집단 밖에 있었던 탓에 성서 해석이나 교회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주변성은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것이다. 아시아계-미국인이 아시아계와 미국인 어느 한 쪽에만 속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두 세계 모두에 걸쳐있는 것과 같은 성격이다. 이런 점에서 '다소 배타적이고 대립적으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선명하게 둘로 나누는 대부분의 해방신학적 접근 방식'과 주변성 신학은 다르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새로운 주변부 사람이다.

지배 집단인 바리새인과 서기관, 로마인들은 그를 거부했고 주변화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 세리, 이방인은 친구가 됐다. 미혼모의 아이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나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 그를 따른 제자들 역시 주변부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주변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죽음은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지만 부활은 반대로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도 주변성 신학에서 중심적인 사건이며 하나님의 동시적인 초월과 내재 역시 주변부적 사유방식에서 표현될 수 있다.



1995년 미국에서 'Marginality: The Key to Multicultural Theology'라는 제목으로 영문으로 출간됐던 책을 저자의 제자인 신재식 호남신학대 교수가 옮겼다.

신 교수는 '옮긴이의 글'을 통해 "최근 다문화가 화두가 되면서 한국 사회와 한국 그리스도교가 이제는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둘 때가 됐다고 본다"면서 "많이 늦었지만 어쩌면 다문화 사회와 한국 신학, 개혁을 요청받는 한국 교회 상황에서 보자면 시의적절한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