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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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작성자 바보새 16-01-28 09:32 조회1,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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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거룩하신 능력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억센 팔을 가진 자야, 다시금 나의 지극히 높은 교훈을 들으라. 네게 유익이 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너에게 내 그것을 말하리라.
 
2. 천신의 무리도 대성자들도 내가 어디서 났음을 알지 못하나니, 나는 모든 점에서 천신, 대성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3. 나를 남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누리의 대창조주로 아는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모든 죽을 인생 속에서 미혹에 빠지지 않고, 일체의 죄악으로부터 해탈됨을 얻을 것이니라.
대창조주 마헤슈바라(Maheshvara)
죽을 인생 응사자(應死者).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Parabrahman), 혹은 거룩하신 주는 천신들이 있기 전부터 있었고, 천신들은 그후에 와서야 생겼다는 사상은 이미「리그 베다」의 나사디야 수크타(Nasadiya Sukta)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하자면 서론이고, 크리슈나는 이제 자기가 어떻게 모든 세계의 창조주 이슈바라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틸라크
우리가 모든 것을 홀로 하나인 초월적 실재에서 갈라져나온 것으로 볼 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모든 더듬고 헤맴을 면하게 된다.―라다크리슈난
 
4. 이성, 지식, 혹하지 않음, 참음, 참, 자제, 안정, 즐거움, 괴롬, 있음, 안 있음, 두려움, 안 두려움,
이성 부디 (buddhi)
지식 즈나나(jnana).
혹하지 않음 아삼모하이(asam-mohah),의심 없음.
참음 크샤마(kshama), 관대함(forgiveness)
참 사챠(satya), 진실.
자제 다마(damah) , 감정 조절(control of the senses).
안정 샤마(shamah), 기분 조절(control of the mind).
있음 바바(bhavah), 태어남(birth).
안 있음 아바바(abhavah), 죽음(death).
 
5. 불살생, 평등심, 만족, 고행, 자비, 명예, 불명예는 다 나에게서만 나가는 산 것들의 가지가지 특성이니라.
불살생 아힘사(ahimsa),비폭력.
평등 사마타(samata).
고행 타파(tapah).
자비 다나(dana).
특성 바바(bhavah),성질, 천성(nature),
바바(bhavah)란 말은 상태(condition), 상황(state), 또는 성격(temperament)을 뜻한다. 삼캬 철학에서는 이성(reason)의 바바들과 몸(body)의 바바들을 구별해서 말한다. 삼캬에 의하면 정신(spirit)은 활동하지 않는 것이고 이성은 프라크리티에서 변하여 나오는 것이므로 그들은 말하기를 속몸(subtle body) 속에 있는 이성의 가지가지 상태 혹은 바바들은 그 속몸들 이 탸가지고 나게 되는 새니 짐승이니 하는 가지가지의 출생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위의 두절에서 말하는 바바들은 아무래도 그런 의미에서 쓴 말일 것이다. 그러나「베단타」에서 말하는 대로, 있는 것은 파라마트만(paramatman)의 형체로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영구불변의 원리뿐이다,
그 파라마트만은 물질과 정신을 다 초월한 것이므로. 그리고 이 볼 수 있는 전우주는 나사디야 수크타에 있듯이 파라아트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창조욕의 결과로 나온 것이므로 베단티스트들이 말하듯이 마야 속에 나타나는 이 세계의 모든 창조물은 다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의 정신적 바바들이다. ―틸라크
 
6. 옛날의 일곱 대성인들과 또한 네 마누들도 나의 바탈로 됐으며 나의 마음에서 나간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창조물은 다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니라.
대성인들 마하르샤야(maharshayah).
마누(Manu) 인류의 조상이라는 사람, 마노왕(摩奴王).
세계 로카(loka).
이 절에 씌어있는 말들은 쉬운 것이나 이 속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많다. 특히 그 ‘옛날’ 이라는 단어 또 ‘네’ 라는 단어를 어디다가 붙여서 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일곱 대성인 즉 일곱 사람의 위대한 리쉬(Rishi)는 누구나 잘 아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브라마데바의 칼파(kalpa)는 14만반타라(manvantara)로 되어 있는데, 그 각 만반타라의 마누 신과 일곱 성인들은 각각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주석가들은 그 ‘옛날’이라는 말을 일곱 성인에 대한 형용사로 보고 이 절을 해석하기를 이 일곱 성인은 현재 우리가 사는 바이바수바타 만반타라(vaivasvata manvantara) 전에 있었던 차크슈샤(Cakshusha) 만반타라의 일곱 성인이라고 한다. 그 일곱 성인이란 곧 브리구(Bhrigu), 나바(Nabha), 비바수반(Vivasvan), 수다마(Sudhama), 비라쟈(Viraja), 아티나마(Atinama), 사히슈누(Sahishnu)인데,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문맥으로 보아서「기타」를 말해준 것이 우리가 사는 현재의 바이바수바타 만반타라 전의 만반타라 일곱 성인에게 한 것이라고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성인은 현재의 만반타라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름들은「마하바라타」에 있는 산티파르바(Santiparva) 속의 나라야니요파캬나(Narayaniyopakhyana)에 이렇게 씌어 있다. 마리치(Marici), 안기라사(Angirasa) 아트리(Atri), 풀라수챠(Pulastya), 풀라하(Pulaha), 크라투(Kratu), 바시슈타(Vasishtha)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이 절에서 말하는 일곱 리쉬들일 것이다. 왜냐하면,「기타」가 지지하고 있는 것은 나라야니야, 즉, 바가바타 신앙과 그 의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담은 ‘옛날의 네’ 라는 말을 ‘마누’ 에 붙여보려는 해석은 어느 정도로 옳으냐 하는 것을 보기로 한다. 만반타라는 전부 해서 열 넷인데, 거기 열 네 마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두 조로 갈려서 각각 일곱씩으로 되어 있다. 그 첫 일곱을 슈바얌부바(Svayambhuva), 슈바라치사(Svaracisa), 아우타미(Auttami), 타마사(Tamasa), 라이바타(Raivata), 차크슈샤(Cakshusha), 바이 바수바타(Baivasvata)라 하는데, 그중 여섯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 일곱째 바이바수바타 마누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끝나면, 그 다음 오는 마누들은 사바르니 마누들이라 하는데 그 이름은 이렇다. 사바르니(Savarni), 다크샤사바르니 (Daksha-Savarni), 브라마사바르니(Brahma-Savarni) 다르마사바르니(Dharma-Savarni), 루드라사바르니(Rudra-Savarni),데바사바르니(Deva-Savarni), 인드라사바르니(Indra-Savarni)다. 각 조마다 일곱 마누가 있다면「기타」가 각 조에서 처음 넷만을 든 이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브라만다 푸라나」의 기록에 따라 사바르니 마누 중 첫 마누 다음의 네 마누는 동시에 지어졌기 때문에 「기타」가 말하는 넷이라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거기 대하여는 또 이런 반대가 있다. 즉, 사바르니 마누들은 미래에 올 마누들인데 이 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들이 지어졌다고 과거사를 썼으니 그것을 거기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네’ 라는 말은 어느 다른 네 리쉬들이나 혹 다른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러면 그 넷이 누구냐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사나카(Sanaka), 사난다(Sananda), 사나타나(Sanatana), 사나트쿠마라(Sanatkumara)의 네 리쉬를 들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은 또 그들은 출가승으로 태어나서 후손을 두기를 거절했으므로 브라마데바의 분노를 샀으니, “모든 창조물이 그들에게서 나갔다는 말을 적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그 ‘옛날의 넷’은 누구냐? 내 의견으로는 그것은 바가바타 신앙의 전통에 의해서 풀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수데바(Vasudeva)와 삼캬르사나(Samkarsana)와 프라줌나(Pradyumna)와 아니룻다(Aniruddha)다. 이것을 합하여서 차투르뷰하(Caturvyuha)라고 한다……
이 넷은 언제나 독립해 있지 않다. 그 네 뷰하(Vyuha)는 독립한 최고 주재의 네 바바들, 네 상태다. 그 최고의 주재는 곧「기타」7장 19절에서 말하는 바수데바다. 이렇게 풀어보면 ‘옛날의 넷’이란 바가바타 신앙에서 말하는 일곱 대성인 전에 있었던 차투르뷰하 등 네 뷰하를 가리키는 것이다. ―틸라크
이것들은 세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천을 맡아가지고 있는 힘들이다. 마누는 전설에 의하면 새 우주가 시작될 때마다 있는 맨 처음의 사람이다. —라다크리슈난
크리슈나는 여기서 우주 인종의 보계의 개요를 말한다. 브라마가 히라냐가르바(Hiranyagarbha)라는 지극히 높으신 주의 능력에서 탄생된 맨첨의 조상이고, 그 브라마에서 일곱 대성인이 나왔고, 그들보다 전에 사나카, 사난다, 사나타나, 사나트쿠마라의 네 성자가 있었고, 그리고 마누들이 나타났다. 이들 25 명의 성자들을 전우주 생류의 족장들(Partriarchs)이라고 한다. 각개의 우주 안에는 무한수의 우주와 무한수의 천체들이 있으며 각 천체는 각종각색의 생류로 가득 차 있다. 그 생류들은 다 이 25족장에서 나왔다. 브라마는 천년 동안 천신들에게서 고행을 닦은 후 크리슈나의 은총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 창조의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런 다음 브라마에서 사나카, 사난다, 사나타나, 사나트쿠마라가 나오고, 그 다음 루드라가 나오고, 그 다음 일곱 성인이 나오고, 그렇게 하여 모든 브라만족, 크샤트리야족이 지극히 높으신 신성(神聖)에서 나왔다. 브라마를 피타마하(Pitamaha) 곧 할아버지라 부르고, 크리슈나를 파라피타마하(Parapitamaha) 곧 할아버지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7. 나의 이 영광과 능력을 참으로 아는 자는 누구나 흔들림 없는 요가로 (나와) 하나됨을 얻을 것이니, 이것은 다시 의심 할 여지가 없느니라.
영광은 원어로는 비부티(vibhuti)인데 이를 라다크리슈난(glory), 간디(immanence), 틸라크와 마하데브 데자이(manifestation)는 각각 다르게 번역 했다. 라다크리슈난의 경우는 무한히 나타내는 풍부의 영광을 뜻하는 것이고, 간디의 경우에는 그것이 무한히 내재하는 힘이라 해서 그 말을 택했으며, 틸라크와 마하데브 데자이는 그 나타난 것을 두고 그렇게 했다. 특히 마하데브 데자이는 비부티를 단수(power 혹은 immanence) 때와 복수(manifestation) 때를 각각 다르게 했다. 다까구스(高楠順次郞)는 능력이라 번역하고 그 다음의 요가(다른 이들이 power 라 번역하는 것)를 환력(幻力)이라 했다.
정신적 완성의 절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가지가지의 풍성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정성된 섬김은 불가능하다. 일반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어떻게 위대하시냐 하는 것을 사실로 안다면 자연히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 정성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어야만 능히 그 바탈을 다할 수가 있으며, 능히 그 바탈을 다할 수 있으면 능히 사람의 바탈을 다할 수가 있고, 능히 사람의 바탈을 다할 수 있다면 능히 몬의 바탈을 다할 수가 있고, 능히 몬의 바탈을 다할 수 있다면 능히 하늘 땅의 변화하고 나게 함을 도울 수 있고, 하늘 땅의 변화하고 나게 함을 도울 수 있으면 하늘 땅으로 더불어 셋이 될 수 있느니라. (唯天下至聖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賛天地之化育 可以賛天地之化育 則可以與 天地參矣) ―「중용」
 
8,나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느니라. 지혜 있는 자는 그것을 알아 마음을 온전히 해 정성으로 나를 예배한다.
 
9. 마음을 내게 모으고 목숨을 내게 바치며 서로 일깨워주고 서로 내게 대하여 이야기하면 언제나 만족하고 즐거움에 차 있게 되느니라.
 
10. 그 정신이 언제나 통일되어 사랑의 기쁨으로 나를 예배하는 그들에게 나는 이성의 요가를 줄 것이니 그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게로 와 이를 것이다.
이성(理性)의 요가 부디요가(buddhi-yoga), 지성적 요가(yoga of reason, yoga of intelligence)
여기서 부디요가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제2장(39절)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는 가운데 부디요가의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한 말이 있는데 이제 여기서 그것을 설명한다. 부디요가는 크리슈나 의식 속에서 하는 행동이다. 그것의 최고의 지성이다.
부디는 지성(intelligence)이란 뜻이고 요가란 신비적 행동, 혹은 신비적 올라감이다. 사람이 본향,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힘써 정성된 예배 가운데 온전히 크리슈나 의식에 이르면 그 하는 행동이 부디요가다. 말을 바꾸어 한다면, 부디요가란 이 물질세계의 얽매임에서 빠져나가는 길이다. 나가는 목적은 크리슈나에게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와 진정한 정신의 스승의 결합이 필요하다. 먼저 목적이 크리슈나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길은 서서히 그러나 점점 나아가는, 오르는 방향으로 열린다.
만일 인생의 목적은 알면서도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고 있으면, 그는 카르마요가(karma-yoga)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크리슈나인 것은 알면서도 크리슈나를 깨닫기 위해서 하는 명상에만 빠져 있다면, 그는 즈나나 요가(jnana-yoga)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알고 온전히 크리슈나 의식과 헌신하는 믿음에서 크리슈나를 찾는다면 그는 바로 박티요가(bhakti-yoga) 곧 부디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요가다.
만일 진정한 스승도 있고 정신적 단체에 속해 있기도 하면서도 진보할 만한 지식이 부족한 때는 크리슈나는 속에서 그에게 교훈을 주어 어려움 없이 궁극의 목적을 지향해 나아가게 한다. 자격은 다만 언제나 크리슈나 의식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또 사랑과 헌신으로 모든 봉사를 해야 한 다는 일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11. 나는 오직 그들에 대한 자비의 마음에서 그들의 바탈 속에 머물러 있어 빛나는 지혜의 등불로 무지에서 나오는 어두움을 깨쳐준다.
‘그들의 바탈 속에’(atma-bhavastho)라는 귀절을 라다크리슈난은 “나의 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라고 해서 “그들의 깊은 바탈 속에 머물러 있어” 하는 다른 사람들의 번역과 반대되는 듯이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참 바탈은 브라만이 지닌 마음의 참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서 보면 내 바탈이지만,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면 그가 자기의 참을 나타내시는 것이 곧 우리가 우리의 바탈을 보는 것이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12.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이요 지극히 높으신 거처시며, 지극히 높으신 정결자시고, 으뜸이요 초월적인 인격이요, 나시지도 않고 두루 뚫어 계시는 맨첨의 주이시라고,
지극히 높으신 브라만 파라브라만(parabrahman)
지극히 높으신 거처 파라다마(paradhama).
지극히 높으신 정결자 파비트라 파라마바반(pavitra paramabhavan).
맨첨의 주 아디 데밤(adi-devam).
 
13. 모든 성자들이 당신에 대해 말했으며, 나라다, 아시타, 데발라, 브야사 같은 천신 성자들도 그렇게 했고, 또한 당신 몸소께서도 지금 그렇게 선포하셨사옵니다.
나라다(Narada), 아시타(Asita), 데발라(Cevala), 브야사(Vyasa)는 천신들.
 
14. 오, 크리슈나시여, 저는 당신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것을 모두 다 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하오나, 오, 바가반이시여, 당신의 나타나심은 신들도 귀신들도 모릅니다.
바가반(Bhagavan) 신성(神性)을 의미함.
 
15. 오, 으뜸이신 분이시여, 참으로 당신 몸소께서만이 당신을 당신에 의하여 아시옵니다. 만유의 근본이시요, 모든 산 것들의 주시요, 신 중의 신이시요, 우주의 주이신 이시여.
으뜸이신 분 푸루쇼타마(Purushottama).
우주의 주 자가트파테(Jagat-pate).
 
16. 당신의 참으로 검스러운 그 능력을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주시옵소서. 당신은 그 능력으로 이 모든 우주를 뒤덮으시고 그 속에 머무시오니.
 
 
17. 오, 요가의 주시여, 제가 어떻게 하면 당신을 알 수 있습니까? 또 제가 어떻게 가지가지의 당신 모습에서 항상 당신을 생각할 것이옵니까. 오, 거룩하신 주시여?
요가의 주 요긴(yogin).
창조주로서의 덕에서 볼 때 크리슈나는 지극하신 요긴이다. 아르쥬나는 자연의 어떤 모양 속에 크리슈나의 모습이 더 자세히 나타나 있는가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가 거룩하신 주의 가지가지의 나타남의 모양에 대하여 물은 것은 그 가지가지 나타남 그것에 대해 명상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 모든 가지가지 나타남을 모든 것을 뒤덮은 최고 주재로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크리슈나는 이미 다른 데서 정성된 신앙의 길에서 볼 때는 어떤 곳에서나 최고의 주재는 오직 한분이시라 믿는 것과 최고의 주재의 가지가지 나타남의 모습을 보아 서로 다른 신으로 보는 것과의 사이에는 참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틸라크
 
18. 오, 쟈나르다나시여, 당신의 능력과 나타나심을 다시 더 자세히 일러주시옵소서. 저는 참으로 넥타르 같은 당신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쟈나르다나(Janardana) 무신론자를 죽이시는 이, 크리슈나의 칭호의 하나.
넥타르 암리탐(amritam, 감로(甘露), 생명을 주는 말씀.
「기타」는 브라만과 세계 사이, 말로 할 수 없는 실재와 불완전한 그 표현 사이에 반대되는 대립을 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주 포괄적인 정신적 견해를 준다. 그것은 물론 결정지어 설명할 수 없는 것, 나타나 뵈지 않는 불변의 것,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절대적이어서 모든 경험적 결정을 뛰어넘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이를 예배하는 것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궁극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하는 것이 보다 더 쉬운 일이요, 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궁극자는 다방면적인 자연의 작용을 감찰하며 개개의 피조물의 혼속에 거해 계시는 인격적인 주시다. 최고의 브라만(Parabrahman)이 최고의 주재자(Paramesvara), 즉 사람의 속과 우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그의 바탈은 가지가지의 성장적(becomings)인 것으로 가리워 있다. 사람은 자기와 하나님이 하나인 것, 또 그의 만유와도 하나인 것을 발견 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9. 그렇다. 내 네게 참으로 나의 거룩한 나타나 뵘들을 말하리라. 그러나, 쿠루족의 으뜸가는 자야, 그것은 주요한 것뿐이니라. 나의 풍성함에는 한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 주재자 형상에 대한 묘사는「아누 샤사나파르바」(Anu shasanaparva, 14:311∼321)와「아누 기타」(아슈바 43~44)에도 나와 있다. 그것은 대체로 여기 나타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기타」의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것들과는 다른 어떤 것에서 옮겨 쓴 것일 것이다. 가령 예 든다면, 같은 묘사가「바가바타 푸라나」15장에 거룩하신 주가 우다바(Uddhava)에게 말해주는 데 나와 있고, 거기에 그것이 이 장에 묘사된 것과 같다는 말이 적혀 있다. ―틸라크
크리슈나의 위대와 그의 풍성을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의 감각이나 혼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크리슈나의 일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정성된 신앙 있는 사람들은 크리슈나를 그래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원리에 의하여서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생활 상태에서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크리슈나의 문제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그들에게는 감로(甘露, 넥타르)같이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맛을 본다. 크리슈나의 풍성한 성격과 그의 가지가지의 능력에 관해 토론을 하는 가운데 그들 정결한 헌신자들은 초월적인 희열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기 관해 듣고 토론하기를 원한다. 크리슈나는 목숨 가진 것들은 자기의 풍성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기 능력의 주요한 나타냄만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비인격신론자(非人格神論者)나 범신론자(汎神論者)는 지극히 높으신 주의 예외적인 풍부나 그의 거룩하신 능력의 나타남을 이해할 수 없다. 물질계에서나 영계에서나 그의 능력은 가지가지의 현상 속에 골고루 퍼져 있다. 이제 크리슈나는 이 아래 있어서 보통의 인간으로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해준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0. 구다케샤야, 나는 모든 산 물건들 피조물들의 속에 있는 자아요, 나는 또 모든 산 물건들의 맨첨이요 중간이며 또 나중이니라.
구다케샤(Gudakesha) 머리터럭 짙은 이, 아르쥬나의 칭호의 하나.
 
21. 나는 아디챠들 중의 비슈누요, 나는 광명 중의 이글거리는 태양이요, 나는 마루타스들 중의 마리치요, 나는 별들 중의 달이다.
아디차(adityas) 아디차는 해라는 말인데「베다경」에는 열두 해가 있다 했다.
마리치(Marici) 천계(天界)를 다스리는 신.
마루타스(Marutas) 바람 신들. 일곱, 혹은 마혼 아홉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22. 나는「베다」중의 사마요, 천신들 중의 인드라요, 감각 중의 마음이요, 산 물건 중에서 생각이다.
사마(Sama) 사마(沙磨) 유명한 4베다 중의 하나인데 이것을 주로 든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노래이기 때문인 듯.
감각 눈, 귀, 코, 혀, 살갗, 마음.
생각 체타나(cetana), 생물 속에 있는 생기의 움직임, 사상, 의식.
 
23. 나는 루드라들 중의 삼캬라요, 야크샤와 라크샤사들 중의 쿠베라요, 바수들 중의 아그니요, 산봉우리 중의 메루다.
루드라(Rudra) 황신(荒神).
삼캬라(Samkara) 시바(Shiva), 파괴신(破壞神).
야크샤(Yaksha) 야차(夜叉).
라크샤사(Rakshasa) 나찰.
쿠베라(Kubera) 보신(寶神).
바수(Vasu), 세천(世天).
아그니(Agni) 화신(火神).
메루(Meru) 그 속에 보물이 많이 묻혀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 수미산(須彌山).
 
24. 프리다의 아들아, 알아들어라. 나는 사제들 중의 머리인 브리하스파티요, 군대 장관 중의 스칸다요, 강과 바다 중의 대양이니라.
브리하스파티(Brihaspati) 기도주(祈禱主).
스칸다(Skanda) 위태천(韋駄天).
 
25. 나는 위대한 성인들 중의 브리구요, 소리 중의 외마디 낱말 ‘옴카라’요, 희생 중의 침묵 희생이요, 움직이지 않는 것 중의 히말라야며,
성인 마하리쉬(maharishi).
브리구(Bhrigu), 일곱 성인 중의 하나.
옴카라(om-kara), 암(掩).
침묵 쟈파(japa), 침묵명상.
히말라야(Himalayah) 히말라야 산, 거대함을 나타냄.
“나는 희생 중의 침묵 희생이요” 하는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아누 기타」(Anu-gita)에 이런 말이 있다. 모든 희생(yajna) 중에 ‘하비’(불 속에)로 하는 희생이 가장 귀중한 것이다. 베다의 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심의 길에서는 나마 야즈나(nama yajna), 즉 침묵희생(japa-yajna)이 하비르 야즈나(havir yajna)보다 더 귀중한 것이므로「기타」에 “모든 희생 중의 침묵 희생”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마누는 어떤 곳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어떤 일을 했거나 말았거나, 그는 자파(침묵명상)에 의하여서만 해탈에 이른다.
자파는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 외는 일이다. 헌신적인 신앙을 말하는 이 대목에서「기타」는 하나님의 이름을 외는 희생을(간단하게는 찬송의 희생이라 한다) 가장 좋은 길로 가르치고 있다. ―마하데브 데자이
 
26. 나는 모든 나무 중의 아슈바타요, 모든 성도 중의 나라다요, 간다르바 중의 치트라라타요, 싯다들 중의 카필라 무니니라.
아슈바타(ashvatta) 보리수(菩提樹).
나라다(Narada) 모든 리쉬들 중가장신심이 깊은 성자로 알려져 있는 이.
간다르바(Gandharva) 악신(樂神).
치트라라타(Citraratha) 가장 노래 잘하는 신.
싯다(Siddha) 완전한 지경(成滿位)에 간 사람.
칼리파 무니(Kalipa Muni)는 은둔해 있는 성자를 가리키는 칭호인데 일반으로 크리슈나의 화신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의 교리는「슈리마드바가바타」속에 나와 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또 다른 칼리파로서 유명해진 사람이 있으나 그의 교리는 무신론적이므로 이 칼리파와는 아주 반대 되는 입장에 서 있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7. 나를 말 중의 웃차이슈라바스로 알라. 그것은 바다를 흔들 때에 났느니라. 나는 왕코끼리 중의 아이라바타요, 사람 중의 왕인 것을 알라.
웃차이슈라바스(uccaihshravas, 天馬)는 인드라신의 말인데, 신들이 아므리타(amrita,죽지 않게 하는 효력을 가진 神酒 혹은 甘露)를 얻기 위해 바다를 흔들어 저었을 때에 나온 열 네 가지 물건 중 하나다. 아이라바타(airavata)도 그중의 하나다. ᅳ마하데브 데자이
신심 깊은 천신들과 아수라들이 한번 여행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여행 중 넥타르와 독약이 터져 나왔다. 독약은 시바신이 마셨고, 그 신주에서 여러 가지 산 물건들이 나왔는데 그중에 웃차이슈라바스라는 말이 있었고, 또 다른 동물이 하나 나온 것이 아이라바타라는 코끼리였다. 이 두 동물은 신주에서 나왔으므로 특별한 뜻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 크리슈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 중에서는 왕이 크리슈나를 나타내는 것이다……마하라자 유디슈트라, 마하라자 파리크시트, 주 라마 같은 이들은 언제나 백성들의 안녕만을 위해 걱정한 의로운 왕들이다.「베다경」에서는 왕을 하나님의 대표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종교의 부패로 인하여 왕조는 타락하고 다 무너졌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8. 나는 무기 중의 벼락이요, 소 중의 여의우요, 생식케 하는 힘 중에서 사랑의 신이요, 뱀 중의 바수키다.
벼락 바즈라(vajra), 금강저(金剛杆)
여의우(如意牛)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주는 암소.
사랑의 신 칸다르파(Kandarpa), 카마(Kama), 애신(愛神).
바수키(Vasuki) 바수길룡(婆修吉龍).
 
21 나는 용족 중의 아난타요, 물 속에 사는 것 중의 바루나요, 조상들 중의 아리야만이요, 제어자(制御者) 중의 야마다.
용족(龍族) 나가(nagas), 하늘에 있는 뱀들, 용(龍).
아난타(Ananta) 무종용왕(無終龍王), 나가들 중 가장 크고 위력 있는 것.
바루나(Varuna) 수천(水天), 모든 해신(海神, 바다에 있는 뱀) 중 가장 크고 무서운 것.
야마(Yana) 야마천(夜摩天).
바수키를 뱀의 왕이라 하고 아난타를 용 중의 왕이라고 하는 말은「아마 라코샤」(Amarako놈)나「마하바라타」속에 나와 있다. 그러나 뱀과 용의 분명한 구별은 없다.「마하바라타」의 아스티코파캬나(Astikopakhyana)에는 둘을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슈리다라」(Sridhara) 주석서에는 뱀은 독이 있고 용은 독이 없다고 했다.「라마누쟈바샤」(Ramanujabhashya) 속에는 뱀은 머리가 하나지만 용은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별들은 내게는 다 옳지 않아 보인다.
어떤 데 보면 용들 중에 큰 것을 들 때 아난타도 바수키도 다 나와 있고, 또 둘 다 머리도 여러 개고 독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아난타는 붉은 빛깔이라 했고 바수키는 누런 빛깔이라고 했다. ―틸라크
 
30. 나는 귀신들 중의 프랄라다요, 헤아리는 자 중의 시간이요, 짐승 중의 수왕이요, 새 중의 금시조다.
귀신 다이챠(daitya) 악마(demon)
프랄라다(Prahlada) 신심 깊은 신자로 크리슈나를 대표함.
수왕(獸王) 므리겐드라(mrigendrah) 사자.
금시조(金翅鳥) 바인나테야(vainateyah), 힌두교 전설에서는 이 금시조가 그 날개 위에 비슈누신을 태우고 있다고 한다.
디티(Diti)와 아디티(Aditi)는 두 자매였는데, 아디티의 아들들을 아디타야라 불렀고 디티의 아들들은 다이타야라 불렀다.
아디타야들은 모두 신앙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이타야들은 모두 믿지 않았다. 프랄라다는 다이타야 가정에 났으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열심있는 신자였다. 그러한 신앙으로 인해 그를 크리슈나의 대표자라 한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프랄라다는 신앙의 모범으로 온 인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는 아버지가 노(怒)를 발하는 데도 불구하고 신앙을 버리지 않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이겨냈다. ―마하데브 데자이
 
31. 나는 정결케 하는 자 중의 바람이요, 무사(武士) 중의 라마요, 물고기 중의 마카라요, 흐르는 강물 중의 쟈나비다.
마카라(makarah) 마갈어(摩竭魚), 상어, 악어(alligator).
쟈나비(jahnavi) 갠지즈 강.
 
32. 아르쥬나야, 나는 창조에 있어서, 그 맨첨이요 나중이며 또 그 중간이요, 밝힘 중에서 자아에 대한 밝힘이요, 변론자들에 있어서 올바른 대화이며,
밝힘 비쟈(vidya), 명(明), 과학(science), 학문.
자아에 대한 밝힘 아쟈트마비쟈(adhyatma-vidya), 내명(內明).
올바른 대화 바다(vadah).
학문 중에서 나는 자아에 대한 학문이다. 자아에 대한 학문은 최고선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적 활동이나 사회적 모험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깊은 종교적 확신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자아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뚫어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무지를 극복하게 한다. 그것은 플라톤의 말로 하면 보편적인 학문이다. 그것 없이 단순히 부분적으로 하는 학문은 미혹케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말했다. “일반적으로 학문은, 그 속에 만일 최고의 것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이익이 되는 일은 별로 없고, 도리어 자기를 해치는 일이 많다.” ―라다크리슈난
 
33. 나는 글자 중의 ‘아’자요, 합성에 있어서 드반드바요, 불멸의 시간이요, 그리고 나는 두루 사방에 얼굴을 향하고 있는 창조주니라.
아자(字) 산스크리트 글자 중 첫 자.
합성(合成) 두 말, 혹은 두 물건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일.
드반드바(dvandva) 둘이 합하되 어느 하나가 우세하고 다른 것이 열세한 것 아니라 꼭 같은 자격으로 합함.
 
34. 나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죽음이요, 또 모든 것을 나게 하는 근원이다. 나는 여성에 있어서 이름남이요, 아름다움이요, 말이요, 기억이요, 지성(知性)이요, 정절이요, 참고 견딤이니라.
 
35. 마찬가지로 나는 노래 중에서 브리하트사마요, 찬미 중에서 가야트리요, 달 중에서 마르가슈르쇼, 계절 중에서 꽃피는 봄이다.
규격을 맞춘 시 중에서 가야트리 만트라(Gayatri mantra)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상당히 숙련된 브라만이어야만 부른다. 가야트리 만트라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주를 나타낸다. 그 만트라는 영적으로 깊은 지경에 이른 사람이어야만 부를 수 있고, 그것을 불렀을 때 그는 초월적인 경지에 들 수 있다. 그 만트라를 부르려면 우선 물질세계의 법칙에 의하여 완전한 지경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베다 문명에서 가야트리 만트라는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그것을 브라만의 소리로서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인도에서는 동짓달 섣달(marga-shrsho)에 모든 곡식을 거둬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때를 가장 즐거운 시기로 알았다. 봄은 덥지도 춥지도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꽃이 만발하고, 봄에는 크리슈나를 기념하는 의식이 많다. 그러므로 가장 즐거운 때요, 지극히 높으신 크리슈나를 드러내는 때라 믿었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36.나는 부랑자의 도박이요, 번쩍 하는 자의 광명이다. 나는 승리요, 결정이요, 선한 자의 선이다.
 
37. 나는 브리슈니족의 바수데바요, 판두족의 아르쥬나며, 성자 중의 브야사요, 시인 중의 우샤나다.
크리슈나는 지극히 높으신 신의 본체시고, 바수데바(Vasudeva)는 크리슈나의 직접적인 발현이다.
판두족 중에서는 아르쥬나가 가장 잘났고 용맹이 있었으며 인간 중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를 대표한다.
「베다」경전을 통하는 무니 중에서는 브야사가 가장 훌륭하다. 그는 이 칼리 시대에「베다경」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여 보통 사람이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크리슈나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카비(kavis)는 무엇이나 통달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 카비들 중에 우샤나(Ushana)는 귀신들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성이 지극히 높고 통찰력이 있고, 정치적이요 또 영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크리슈나의 대표자다.
 
38. 나는 다스리는 자의 징벌이요, 승리자의 좋은 계책이요, 비밀의 침묵이요, 지혜자의 지혜니라.
 
39. 아르쥬나야, 모든 창조물에 씨가 있다면 그것은 나요, 움직이는 또 움직이지 않는 모든 물건 중에 나 아니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
 
40. 위대한 적을 정복하는 자야, 나의 거룩한 능력의 나타남에는 끝이 없느니라. 내가 지금 여러 가지로 설명한 것은 다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니라.
 
41.어떤 것이거나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능력있는 것이 있거든, 그것은 내 광명의 단편으로 된 것이다.
 
42.그러나 아르쥬나야, 이 많은 것을 네가 다 알아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이 온 누리를 내 한 조각으로 뒤덮어 지지 하고 있느니라.
한 조각 에캄쉐나(ekamshena), 한 부스러기, 단편.
하나이신 하나님이 산산조각이 난단 말 아니다. 이 우주는 무한의 부분적 계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요, 그의 영광의 한 가닥 광채로 비쳐진다는 말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초월적인 빛은 이 우주를 뛰어넘어, 시간 공간을 뛰어넘어서 충만하고 있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에 이르는「우파니샤드」의 제10장 거룩하신 능력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 있어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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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작성자 바보새 16-01-23 07:47 조회2,7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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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프리다의 아들아, 마음을 오로지하여 내게 매달리고 나를 의지하여 요가를 닦으면 네가 어떻게 철저하게 의심없이 나를 깨닫게 되는가를 들을지어다.
 
2. 내가 이 지혜와 아울러 지식을 남김없이 네게 이르리니, 네가 그것을 알면 이 세상에서 다시 더 알 것이 없으리라.
지혜 즈나나(jnana), 정신적 지식.
지식 비즈나나(vijnana), 분별적 지식.
즈나나, 비즈나나 하는 낱말은「기타」의 가르침 속에 다섯 번 여섯 번 나오는데 샹카라(Shankara)는 언제나 그것을 지식(knowledge)과 체험(experience)(자아실현의 의미로)으로 번역한다. 그렇지만 즈나나도 다름 아닌 자아의 실현이다. 그러고 보면 즈나나와 비즈나나라고 하면 같은 말의 중복이 돼버린다. 다른 번역자들, 예를 든다면 틸라크(Tilak) 같은 이는 비즈나나는 물질세계에 대한지식이라 한다. 라다크리슈난 박사는 그것을 존재의 세세한 면을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것이라 하고, 즈나나는 존재의 공통적인 밑바닥을 옹근 채로 아는 것이라 한다. 내 생각에는 그 설명은 삼캬(samkhya, 理論派)에서 쓰는 관례에 따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거기서는 즈나나는 자아의 체험이고, 비즈나나는 자아를 자아 아닌 모든 것에서 구별해서 보는 분별적인 지식이다. 삼캬파의 카리카(Gaudapada Karika)는 “모든 고통에서 해방이 되려면 오직 나타나 뵈지 않는 것과, 나타나 뵈는 것과, 그것을 아는 이와를 분별할 줄 아는 지식이 있어야만 될 수 있다”고 했다.「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을 보고 듣고 생각하여서, 자아 아닌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을 때는 이 분별적인 지식을 두고 한 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즈나나는 지혜로 번역되는 것으로 직접적인 영적 광명을 말하는 것이고, 비즈나나는 존재의 원리에 대한 자세하고 합리적인 지식을 말한다. 우리는 상대를 초월한 절대를 알아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가지가지 나타남도 또한 알아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사람 안에도, 자연 안에도 계신다. 그것들이 그이를 한정지울 수는 없지만. —라다크리슈난
크리슈나는 이미 제3장에서 아르쥬나에 대해 욕망이니 노염이니 하는 우리의 대적은 우리의 감각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리의 영적 지식(즈나나)과 개별적인 지식(비즈나나)을 다 망쳐버린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우선 감각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감각의 제어가 필요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는 또 앞장에서 요가를 성취한 사람은 감각을 제어하고 난 후 즈나나와 비즈나나로 만족함을 얻어(6:8), 모든 피조물 속에서 최고의 자아(parameshvara)를 보며, 최고의 자아 속에서 모든 피조물을 본다는 것을 말해주었다(6:29). 그러므로…… 그는 아르쥬나에게 즈나나는 무엇이며 비즈나나는 무엇임을 설명해줄 필요가 있게 되었고, 또 최고의 자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게 하는 카르마 요가의 방법을 그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게 되었다. (틸라크는「기타」의 목적을 카르마 요가를 가르쳐주는 데 있다고 아주 잘라서 강조한다). 만물을 뒤덮는 그 유일 불멸의 최고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즈나나요, 그 영원한 최고의 자아에서 어떠한 길을 밟아서 억만 가지의 유한한 만물이 나와서 존재하게 되느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비즈나나다.(13:30)
……그러나 최고의 자아는 비록 하나라 하더라도, 예배의 자리에서 볼 때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진다. 느껴 알 수 없는 것 즉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과, 느껴 알 수 있는 것 즉 경험적인 것이며 실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최고의 자아를 이성에 의해서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으며, 그 느껴 알 수 없는 것을 느껴 알 수 있는 형상을 예배함에 의해서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게 되느냐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가 열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 두 길이 자동적으로 동시에 감각의 억제와 최고의 자아에 대한 깨달음의 두 가지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이 두길, 즉 지식의 길과 신앙의 길은 해탈의 공부에 있어서 파탄잘리 요가보다 더 우승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주의할 것은, 이 모든 설명들은 카르마 요가를 설명하기 위한 한 부분이지 그 자체로 독립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기타」를 세 편으로 나누어서 처음 여섯 장을 카르마에 관한 것으로(倫理品), 다음 여섯 장을 신앙에 관한 것으로(神理品), 그리고 나중 여섯 장을 지식에 관한 것으로(心理品)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온당한 것이 되지 못한다. —틸라크
 
3. 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겨우 완전(成滿位)에 이르기 위해 노력할 줄을 알며 그 노력하여서 완전에 이른 천 사람 중에서도 나를 참으로 아는 자는 겨우 하나뿐이다.
천 사람 중에 다른 번역에는 ‘천 명의 노력하는 사람 중에서’로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에 이르고 싶어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전통이나 권위의 명령에 따라 더듬을 뿐이다. 진리를 발견하고 그 목적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자 중에서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하는 것이고, 발견한 자 중에서도 그 본대로 움직이며 사는 것은 하나도 이루기 어렵다. —라다크리슈난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어려우며, 그대로 살기도 어렵고, 정법(正法)을 얻어듣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우며, 깨닫는 자로 태어나기는 더욱 희귀한 일이다. —「법구경」(182)
싹이 나고도 이삭이 패지 못하는 것이 있고, 이삭이 패고도 알이 들지 못하는 것이 있다(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논어」
나서 살고, 들어서 죽는데, 사는 것들이 열에 셋이고, 죽는 것들이 열에 셋이고, 사람이라고 나서 움직이다 죽을 데로 가는 것들이 또 열에 셋이다. 왜 그러냐, 그저 삶을 살기를 두텁게만 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動之死地者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노자
 
4.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 에테르(空), 마음(識), 이성, 나(我執, 自我意識), 이것이 내 바탈의 여덟 갈래다.
바탈 프라크리티(prakriti), 자성(自性).
이것들은 나타나 뵈지 않는 바탈, 곧, 프라크리티가 나타나 뵈게 될 때 가지는 모양들이다. 이것은 초기의 분류이고, 후에는 더 자세하게 되어 스물네 가지로 분류된다. 13장 5절을 보라. 감각(色, 聲, 香. 味. 觸)과 마음(識)과 이성과, 5근(indriyas, 眼, 耳, 鼻, 舌. 身)과 마음(manas)과 부디(buddhi, 感覺分別力)는 낮은 것, 곧 물질적 바탈이다. 왜냐하면 삼캬 심리학에 의하면, 그것들은 다만 감각의 대상과의 접촉을 할 수 있게 해줄 뿐이요, 의식이 성립되는 것은 정신적인 주체, 곧 푸루샤가 그것을 비쳐주어서만 되는 것이기 때문인데, 베단타에서는 그 설명을 받아들인다. 자아가 비쳐줄 때에야 감각과 마음과 이성의 활동은 지식의 과정으로 변하여 대상물이 지식의 대상이 된다. 아함카라 혹은 자아의식은 대상(境) 쪽에 붙어 있다. 그것은 나(ego)가 대상을 제 자신에다 가져다 붙이는 법칙이다. 그 결과 몸과 정신적 주체를 하나로 보게 하는 잘못이 생기고 거기 따라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5. 그렇지만 마하바후야, 그것은 나의 낮은 바탈일 뿐이니라. 너는 나의 다른 더 높은 바탈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얼이라고 하니 이 세계가 그것으로 버티어 있느니라.
얼 지바(jiva), 생명의 정수(vital essence).
이 우주의 인격적인 주재자를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그는 의식적인 얼(ksetrajna)과 무의식적인 성격(ksetra) 둘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 들을 그의 높은 모습과 낮은 모습이라고 부른다. 그는 만물의 생명이요 또 형식이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그 낮은 천성 속에 무의식적인 것의 전부를, 그 높은 천성 속에 의식적인 것의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 얼이 우리 몸, 목숨, 감각, 마음, 이성 속에 들어 있어 우리에게 나(ego)라는 생각을 주고, 그 나가 저 물질적인 배포를 그 활동의 무대로 쓴다. 모든 개인은 다 얼과 모습, 즉 크세트라즈나와 크세트라의 두 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슈바라의 두 바탈이요, 그는 이 둘을 다 초월하고 있다. 구약은 창조가 없음 속에서 나왔다고 가르쳐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시적인 물질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하나님이 거기 형식을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창조자이기보다는 제작자 혹은 건축가라고 생각했다. 원시적인 소질은 영원한 것이고 지어진 것이 아니며 오직 그 형식만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의 사색가들에게는 하나님은 미리부터 있던 물질을 가지고서가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질과 형식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그와 비슷한 견해가 이 절 속에 나타나 있다. 지바(영혼, 얼)는 최고자의 한 부분적인 나타남밖에 되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이의 옹글고 갈라지지 않은 참이 다수한 얼의 갈라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된 것이 참이고 다수는 그것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낮은 참이지, 환상이 아니다. ⎯라다크리슈난
 
6. 알지어다. 모든 만물이 이 둘에서 나왔느니라. 나는 이 세계의 근원이요 또 그 풀어짐이니라.
길 길이라 할 수 있으면 떳떳한 길 아니, 이름 이름할 수 있으면 떳떳한 이름 아니, 이름 없음이 누리의 비롯이요 이름 있음이 모든 것의 어미(母)다. 그러므로 늘 하고자 함 없어 그 묘(妙)를 보고 늘 하고자 함 있어 그 교(徼)를 본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이 다르니, 다 까맣다 할 것이다. 까맒의 또 까맒이 뭇 묘의 오래니라.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徼 常有欲以概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7. 오, 다난자야야, 나보다 높은 이는 아무도 없느니라.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구슬꿰미가 실에 꿰여 달려 있듯이 내게 달려 있느니라.
다난챠야(Dhananjaya) 가멸음(富)의 정복자, 아르쥬나를 가리킴.
위의 네 절 속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결론적인 설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다음 절들에서는 그 같은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삼캬 철학의 설명은 이렇다. ① 이 우주에는 서로 독립된 두 개의 원소가 있다. 즉 첫째, 무생(無生) 혹은 거친 물질(prakriti)과 둘째, 생각하는 정신(puru놈)이다. ② 모든 것은 이 원소로써 만들어졌다. 그러나 「기타」는 이원론은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를 같은 파라메슈바라의 두 나타남으로 보는데, 그중에 프라크리티, 곧 물질은 낮은 나타남이고 푸루샤, 곧, 정신은 높은 나타남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정신의 형태를 갖는 가장 높은 프라크리티가 곧 아트만이라는 것을 13장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남는 거친 물질에 관해서는,「기타」는 그것을 독립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나 모든 창조물이 다 파라메슈바라의 감찰 아래 거기서 지어져아트워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기타」는 프라크리티 거친와 같이 독립한 것으로 보지는 않으면서, 삼캬론의 프라크리티의 분류를 다소 차이를 두고서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기타」는 물질이 생긴 이후 무명(無明) 곧 마야(maya)로 인해 파라메슈바라에서 만물이 나오게 됐다는 삼캬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삼캬론에 의하면,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로 되는 원소가 합해 스물다섯인데, 그중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 스물셋이고, 그 스물셋 중 5대(五大. 地 水 火 風 空)와 열 감각과 마음, 합하여서 열여섯은 나머지 일곱 원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원소를 말할 때는 그 열여섯은 고려 속에 두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기본적인 원소는 일곱뿐이다. 즉 마하트(mahat, 知性의 근본)와 아함카라(ahamkara, 個性의 근본)와 다섯 탄마트라(tanmatra, 色 聲 香 味 觸의 본질)다. 이 일곱을 삼캬론에서는 프라크리티 비크리티(prakriti-vikriti)라고 부르는데,「마하바라타」에서 이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기본적 프라크리티를 합해서 여덟 가지 프라크리티라고 부른다. 그러나「기타」는 기본적인 프라크리티를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한 열에 놓은 것은 마땅치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기본적인 프라크리티가 있고 거기서 변화하여서 일곱이 나온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류에 대하여서는「마하바라타」와「기타」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다.「기타」는 일곱 프라크리티 비크리티와 마음을 합해서 프라크리티(自性)의 여덟 갈래라고 한다. 간단한 말로,「기타」는 삼캬론의 독립된 프라크리티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후 프라크리티의 성장에 대한 설명은 양쪽 다 근본에서 같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틸라크
 
8. 쿤티의 아들아, 나는 물에 있어서 그 맛이요, 해와 달에 있어서 그 빛이며, 모든「베다」에 있어서 그 ‘아옴’이니라. 나는 공중에 있어서 그 소리요, 또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그 바탈이니라.
‘아옴’(aum)이란 힌두교나 그밖의 종교에 있어서 신성한 낱말이요, 진언(眞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는 말이다. 이것은 ㅏ,ㅜ,ㅁ 세 음이 한데 합해져 있다. 산스크리트말에서 모음 ㅏ와 ㅜ는 마지막에 ㅗ와 합해져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아옴(aum)이라는 말은 (혹은 om으로 쓰기도 한다) 여러 가지 세트리를 대표하는 말이 된다. 가령 예한다면, 하늘, 땅, 허공의 삼계, 브라마, 비슈누, 시바의 삼신,「리그」「야쥬르」「사마」의 베다 3경 같은 것이다. 이리해서 ‘아옴’은 온 우주의 짬을 포함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기도나 찬송이나 명상의 시작과 끝에 이것을 외고, 불교나 쟈이나교의 의식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6세기 이후로는 어떤 경문의 시작의 표시로 이것을 사용하게 됐다.⎯「대영백과 사전」
 
9. 나는 흙에 있어서 그 맑은 향기요, 또 불에 있어서 그 불꽃이니라. 나는 모든 생기 있는 것들에 있어서 그 목숨이요, 또 고행자에게 있어서 그 고행이니라.
 
10. 오,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나는 모든 산 물건의 ‘영원 한씨’임을 알라. 나는 지성(知性) 있는 자의 지성이요, 광명 있는 자의 광명 이니라.
 
11. 바라타족의 임금아, 나는 힘센 자의 힘이지만 욕망과 애착은 없으며, 산 물건 속에 있어서의 욕망이지만 올바름에 거슬린 것은 아니니라.
 
12. 또 모든 착한 성질과 사나운 성질과 게으른 성질의 물건들은 다른 것 아니고 오직 내게서 나가는 것임을 알라. 내가 그것들 안에 있지는 않으나, 그것들은 내 안에 있느니라.
욕망, 애착(kama-raga)에 대해 샹카라는 카마(kama)와 라가(raga)를 구별하여서, 카마는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고, 라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애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의 욕망은 죄악은 아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망은 뿌리뽑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죄가 아니다.「찬도갸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으로 참되면서(satya) 참되지 못한 것(anrita)에 가리워져 있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이나 행동은, 우리 안에 있는 영(靈)의 발표이기만 하면, 그리고 참된 영적인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기만 하면 거룩한 뜻의 순수한 넘쳐흐름이 될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묻는다. “이른바 도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장자가 대답한다. “없는 데 없지.” 동곽자 말한다. “어디라고 딱 집어서 말씀을 해야지요.” 장자 말한다. “도르래, 개미에 있지.” “왜 그렇게 아래로 내려갑니까?” “가라지, 피에 있지.” “왜 점점 더 그렇게 내려가십니까?” “개와장 조박에 있지.” “거 왜 그렇게 점점 더 내려가십니까?” “오줌, 똥에 있다.” 동곽자가 아무 소리도 아니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장자가 말한다. “당신의 묻는 것이 어찌 그리 알맹이가 없는가? 정획(正獲,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의 일을 맡아 하는 벼슬아치)이 제사에 쓸 돼지에 대해 감시(監市, 돼지 사는 것을 맡아보는 사람)에게 돼지 밟아보는 것을 물을 때에 그 밟는 것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짐작이 가는 법이다. (살이 얼마큼 졌는가 알려면 될수록 발끝 같은 아랫부분을 밟아보는 것이 쉽다. 발쪽 같은 아랫부분에 살이 있으면 등심이나 엉덩이에 살이 많을 것은 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대로(도를) 어디라고 한정해놓고 말할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어떤 물건이라도 없는 데는 없다. 지극한 도란 그런 것이다.⎯장자(知北遊)
‘그들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그들 안에 있지 않다’는 말의 뜻은 매우 깊다. 첫째로는 즉 가장 넓은 의미로는, 만물이 지극히 높은 자아(parameshvara)에서 나왔으므로 지극히 높은 자아는, 마치 모든 구슬이 실에 매달려 있듯이, 바탕의 형식으로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으로 지극히 높은 자아의 널리 퍼지고 스며드는 성격은 그것으로만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은 자아는 그 모든 것을 뒤덮고도 남는다. 그래서 그 의미가 후에는 “나는 다만 내 자신의 한 부분을 가지고 전우주를 점령했다” 하는 말로 나타나게 된다.(10:42) 그러나 그밖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삼계로 구성되는 이 우주의 여러 모양의 성격이 내게서 나온 듯이 뵈지만, 그렇지만 그 여러 모양의 성격은 바탈 없음(nirguna)의 ‘나’의 형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뜻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그래서 후에 가서는(13:14~16) 지극히 높은 자아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여러 가지 서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둘째 의미의 기초가 된다. 말하자면 9장 4절, 5절은 같은 말이다. 그와 같이 만일 지극히 높은 자아의 편만성(遍滿性)이 우주보다도 큰 것이라면. 우리가 지극히 높은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마야의 우주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13절 이하다. ⎯틸라크
‘착한 성질, 사나운 성질, 게으른 성질’ 등 힌두교 철학에서는 만물과 사람이 가지가지의 성질을 가지는 것은 구나(gunas)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구나를 한자로는 성(性), 영어로는 네이처(nature 혹은 mood)로 번역한다. 그러나 그 성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중용」의 이 성은 차라리 성경의 “하나님이 자기 모습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혹은 “코에다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했다” 혹은 “말씀으로 모든 것이 지어졌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생명이 사람에게 있어서 빛이러라” 하는 것과 같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나는 순전히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온다. 구나를 셋으로 나눠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라 하는데 그것을 각각 선성 (善性, goodness-mood 혹은 harmonious mood), 동성(動性, 혹은 riery-mood 혹은 passionate mood), 암성(閣性, gloom-mood 혹은 slothful-mood)이라 번역하고 있다. 어떤 물건도, 어떤 사람도 그 세 가지 성질을 다 가지지 많은 이는 없다. 그러나 그 비례는 천차만별이다. 거기 따라 제각기 특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 자아 곧 영혼은 아니다. 이를 나의 참 바탈이 아닌 줄을 깨달아 거기서 해방이 되는데 참 자아 곧 아트만이 있다.
힌두교에서 프라크리티니, 마야니, 구나니 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을 기독교 신학에서 찾아본다면, 사탄이니, 타락이니, 원죄니 하는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인데, 그 둘의 설명 방법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나 체험 혹은 계시가 나오는 경로는 비록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그런 설명의 근본이 되는 사실에서 서로 다른 둘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설명 방법의 차이라고 알고 그것을 이해하여서 하나로 통하게 하는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행동을 주로 하는 셈적인 자리에서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고, 사탄이 유혹을 했고, 아담이 범죄해서 그것이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원죄가 됐다. 그러나 명상을 주로 하고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를 목적하는 인도식으로 하면 맨 첨은 첨 없는 첨에서 누구라고 이름할 수도 없는 영원의 진화하는 과정을 따라 물질이 나오고 생명이 나오고 사람이 나오고 선악이 나왔다. 거기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논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카르마라 했을 것이고,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높은 차원의 정신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없다 하여서 모크샤니 니르바나니 했을 것이다. 이 우주는 복잡하다. 우주 자체가 그런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이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은 그렇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라지만,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배타적으로 내쫓아가지고는 성질상 도저히 불가능하고 다만 분별없이 옹근 채로 하는, 혼연일체하는, 통전하는 태도로만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큰 것보다 뵈지 않는 작은 것, 유익한 것보다 아무 소용없는 것, 나와 가까운 것보다 먼 것, 정반대에 선 듯이 피는 것이 더 중요하고 고마운 것이다. 무한 작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 무한 큼이 있고 지극히 미운 것을 이해하는 데 지극히 어짊이 있다.
사탄이다 타락이다 원죄다 용서다 할 수 있다면, 또 프라크리티다 자연이다 법칙이다 이해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사꾼이 반드시 먹어봄으로써만 이해하는 능금이지만 그가 시인이라면 왜 나무에 달린 채 두고 무한히 바라봄으로써 못하겠는가. 만물을 엿새 동안 다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안식에 드셨다는 하나님이 왜 “그 착한 것, 사나운 것, 게으른 것이 다 내게서 나갔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내 안에 있어도 나는 그들 안에 있지 않으니라” 하지 못하겠는가. ⎯함석헌
이 말의 저자는 프라크리티는 독립자존 한다는 삼캬의 주장을 반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는, 모든 만물이 세 구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해서 자존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홀로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만물을 포괄하고 포함하지만, 만물은 ‘그’를 포함 포괄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차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들이 어떤 변동을 일으켜도 거룩한 이의 항구한 모습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모든 것이 다 그의 밑에 속해 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라다크리슈난
 
13. 이 세 가지 구나의 나타나는 꼴에 매혹되어서 온 세계가 저희들을 초월하고 불멸인 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타나는 현상이 ‘그’ 때문인 것은 우리가 12절에서 본 대로다. 그러나 사람은 ‘그’ 와 현상 두 사이에 서는데 그 현상이 사람의 눈을 안개로 가리고 빛으로 어지럽게 한다. 그리하여 미혹된 사람은 ‘그’를 등지고 서게 된다. 성 어거스틴이 말한 그대로다. “나는 빛을 등지고 빛에 비쳐진 물체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빛에 비쳐진 그 물체를 보고 분별하고 있는 내 얼굴 자체는 빛에 비쳐짐을 받지 못했다.”⎯마하데브데자이
우리는 변하는 현상을 볼 뿐이요 그 영원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플라톤의 동굴 속에 있는 사람이 벽 위의 그림자를 보고 있듯이, 우리는 흔들리는 형상을 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그림자들을 생겨나오게 하는 그 빛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라다크리슈난
보아도 뵈지 않으니 그것을 이(夷)라 할까,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그것을 희(希)라 할까, 잡아도 잡히지 않으니 그것을 미(微)라 할까. 이 셋은 따져 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왼통으로 하나로 할 것이다. 그 위라야 환한 것도 아니요 그 아래라야 껌껌한 것도 아니어서 줄줄이 잇닿았건만 이름 할 수도 없어, 다시 몬 없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러 꼴 없는 꼴 그림 없는 그림이라는 것이요, 이것을 일러 얼떨이라는 것이다. 마주 가도 그 머리를 못보고 따라가도 그 뒤를 못 보는데, 옛 길을 잡아 이젯 있음을 이끌어가니 능히 옛 비롯을 아는 이다. 이를 일러 길날이라 하느니라. (視之 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ᅳ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兮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 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노자
 
14. 이 구나로 이루어지는 나의 거룩한 마야는 뚫기 참 어렵다. 그러므로 내게 온전히 돌아오는 자만이 이 마야의 건너편으로 뚫고 건너갈 수 있느니라.
마야(maya) 곧 무명(無明)은 힌두교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 낱말이다. 특히 정통적인 베단타(Vedanta) 교리의 비이원론(非二元論, advaita) 파에 있어서 그렇다. 마야는 본래는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환상을 믿게 만드는 그 마술적 능력을 가리키는 말인데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가지게 된 거짓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비이원론자들에게 있어서 ‘마야’는 무한한 브라만을 유한한 현상의 세계로 나타나 보이게 하는 우주적인 힘이다. ‘마야’는 개인적인 지경에 있어서는 참 자아의 성격에 대한 무지(ajnana, ignorance)에 의해서 반영된다. 그러나 참 자아는 사실로는 브라만과 한가지인데 사람은 그것을 자기의 경험적인 자기(ego)로 오해한다. ⎯「대영백과사전」
이러한 빛이니, 더우니, 추우니 하는 경험들은 다 ‘구나’에 의한다. ‘구나’는 전에도 말한 대로, 어원적으로는 “밑에 들어 있는 것”(subordinate), 혹은 “(죽을) 인간적인 기구(mortal instrument)라는 뜻이다. 우리의 감각은 몬일(事物)의 낮은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는 그 근본적인 것은 우리에게 뵈지 않도록 해버린다. 즉 참은 숨기고 참 아닌 것을 보여준다. 피히테가 말했듯이, “우리의 봄 그자체가 물체를 우리에게서 숨겨버린다. 우리 눈 그자체가 우리 눈을 가린다”이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뵈는 것은 실체는 아니고 그 실체의 그림자뿐인데, 그 뒤에 숨어 있는 것, 즉 실재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정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자아 속에 앉아 계시는 ‘그’를 보는 것은 도를 닦아 능히 자기를 억제할 줄 아는 수도자(yogi)뿐이다. 자기통제를 못하는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기타」가 그 말썽 많은 ‘마야’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마야는 우리들 실재에 대하여 미혹케 하고 속게 한다. ‘마야’ 는 환상이나 신기루가 아니요, 실재를 가리는 장막 혹은 장애물이다. 우리 속에 있는 ‘거룩하신 이’를 둘러싸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두꺼운 층이다. 우리 속의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요, ‘진리’의 얼굴을 가리는 황금 덮개다. 우리의 안, 우리의 밖에 있는 ‘구나’ 혹은 ‘프라크리티’ 가 우리 눈을 부시게 하고 캄캄케 하여 우리로 하여금 두루 헤매게 하는 것이 마야다. 겉에 두루 휘감음과, 서로 떨어지게 함은 이 ‘마야’ 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다. ⎯마하데브 데자이
브라우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창조는 ‘그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나는 말하거니와, 그것은 될수록이면 ‘그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Some think Creation's meant to show Him fouth
I say it is meant to hide Him all it can.)
 
괴테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어서 바로「기타」의 말 그대로로 ‘마야’를 그려내고 있다.
 
대낮에도 신비는 있어
자연은 그 너울을 벗지 않는다.
우리가 아우성을 치건만,
그가 좋아 자진 보여주지 않는걸
지렛대로, 나사로. 망치로
억지로 뺏을 수는 없지 않으냐.
(Mysterious even in open day
Nature retains her veil, despite our clamours;
That which she doth not willingly desplay
Cannot be wrenched from her with leavers, screms and hammers.)
⎯마하데브 데자이
 
15. 어리석어 악을 행하는 자들은, 인간 중에서도 최하에 속하는지라, 그 지각은 ‘마야’로 망가져버리고, 악귀는 버릇에 빠져 내게로 돌아올 줄을 아지 못하느니라.
악을 행하는 자가 지극히 높은 지경에 이르지 못하고 마는 것은 그 마음과 의지가 영의 기구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작은 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친 본능을 길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라쟈스 즉 암성의 하자는 대로 돼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착한 성질(사트바)을 활동시켜 그것을 억제하면, 우리 행동은 올바르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 애욕과 무지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 3성을 초월하려면 우선 선성을 닦아야 한다. 우리는 영적이 되기 전 먼저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 단계에서 우리는 이원(二元)의 세계를 지나 ‘영’의 빛과 능력 속에서 행동하게 된다. 그때에 가서 우리는 나의 좋고 언짢고에 따라 행동치 않고, 오직 ‘거룩한 이’의 기계로만 행하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지극한 사람은 저란 것이 없고 검스러운 사람은 제 힘이란 것이 없으며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느니라(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장자(逍遙遊)
 
16. 오,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 아르쥬나야, 경건하여 나를 믿는 자 중에는 네 가지 사람이 있으니, 고통하는 사람, 지혜를 찾는 사람, 물질적 복을 찾는 사람, 그리고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그것이다.
고통하는 사람 아르다(artha).
지혜를 찾는 사람 지즈나슈르(jijnasur).
물질적 복을 찾는 사람 아르다아르디(artha-arthi).
지혜를 가진 사람 즈나니(janani)
 
17.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내 안에 있어 외곬으로 믿는다. 참으로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다.
스스로 찾는 자일 때까지는 아무래도 이원(二元)의 세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지혜에 도달하면 이미 둘이 아니다. 깨달은 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이 ‘홀로 하나이신 자아’(The One Self)와 하나된 가운데 있다. ⎯라다크리슈난
 
18. 이들은 물론 다 고귀한 사람들이지만, 그 지혜를 깨달은 사람을 나는 정말 바로 나 자신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온전히 요가를 닦는 그는 나만을 가장 높은 구경의 지경으로 알아 그 안에 머무른다.
우리가 설혹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든지 기도를 날마다 하는 하나의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복을 받기 위한 부적 같은 것으로 알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서 종교적 신념이란 참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자는 노력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는 우리에게 응답해주시는 어떤 이가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얻어진다. 기도를 늘 끊지 않고 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의식 속에 어떤 광명을 얻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리석은 교만과 이기적인 탐욕과 두려움과 희망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인격, 즉 몸과 마음과 정신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방법이다. 기도는 하나의 생활방식이다. 차차 해가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의 길이 된다. 이것이 곧 즈나나, 곧 통전(統全)된 지혜, 곧 거룩한 생명이다. 즈나니(지혜를 얻은 이)는 하나님을 그의 계신 모습대로 아는 이이므로 그는 하나님을 그의 계신대로 사랑한다. 그는 그 거룩하신 이 속에서 산다. 그가 하나님에게 소중하듯 하나님은 그에게 소중하다. 처음 세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나름의 이상대로 이용해보려고 하지만, 깨달은 자는 하나님이 그 뜻대로 자기를 이용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그가 그 넷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다. 우리가 심한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온전히 외곬이 된 마음으로 열심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기도가 들어주심을 얻는다면 그것은 우리 어두운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을 작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지혜에 도달한 이는 그 심정이 정결하고 그 의지가 통일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경륜을 능히 알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되어지이다.” ⎯라다크리슈난
 
19. 지혜를 가진 자는 허다한 나고 죽음을 거친 후에, 바수데바는 모든 것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게로 돌아오느니라. 그러한 위대한 혼은 매우 드무니라.
바수데바(Vasudeva) 모든 근원의 근원, 바수천왕(婆蔽天王), 지극히 높으신 이, 그의 다시 태어난 몸(後身)이 곧 이 말을 하는 크리슈나다.
모든 것 일체(一切)의 존재.
돌아온다 귀의(歸依), 피난하다, 항복하다.
위대한 혼 마하트마(mahatma)
‘허다한 나고 죽음을 거친 후’ 라고 한 것은, 진리의 실현은 세월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경험의 깊은 밑을 충분히 살펴보기 전에는 그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려면 시간이 든다. 하나님은 어떤 식물도 제 나름대로의 걸음으로 자라게 두신다. 태아가 완전히 자라려 해도 아홉 달이 드는데 정신으로까지 자라려면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은 물론이다. 자연 전체가 변화하려면 길고 긴 과정이 필요하다.
‘바수데바는 모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수데바는 모든 것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주임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두 성격의 힘으로 모은 것이다. 라마누쟈(Ramanuja)는 이 귀절의 뜻을 이렇게 본다. 즉 “바수데바는 나의 전부다.”(Vasudeva is my all.) 이것은 겸손하게 신뢰하는 신자의 마음에 느껴진 하나님의 불멸의 장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부이시고 우리는 없음이다. 모든 만물이 다 그런 것처럼 사람은, 또한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의지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그의 손에 바치며 그가 전부이시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겸허한 의식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시며, 하나님은 참으로 계신다.
마드바()는 말하기를 “바수데바는 만물의 근원이다”(Vasudeva is the cause of all) 라고 했다.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설명, 기도도 다 의미가 없지 않다. 그것들은 제 나름의 상급이 있다. ⎯라다크리슈난
 
20. 그 마음이 가지가지 물욕으로 인해 비틀린 것들은 각각 제 성질에 이끌려 제각기 제나름의 의식을 지키며, 다른 신들을 섬기느니라.
마음 즈나나(jnana), 지식(knowledge). 지(智).
의식 니야맘(niyamam), 계행(戒行)
신들 데바타(devatah), 천신(天神)들.
바가바타 신앙(비수뉴를 최고의 주재자로 믿는 종파)에서는 지성(知性)의 정도가 낮아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물질적 욕망의 만족을 위해서 다른 신들에게 귀의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절대 높으신 주재자한테로 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무지, 애욕 같은 어떤 특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 따라 가지가지의 신들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여러 신들의 공경자들은 낮고 작은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구경의 지경을 지향할 줄을 모른다. 다만 최고의 주재자를 믿는 자만이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없다.「베다」경전 안에는 가지가지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가지가지의 신을 믿을 것을 권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에 최고의 주재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주재자보다 다른 여러 신들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순수한 신봉자는 지극히 높으신 주 크리슈나야말로 만유의 주인임을 안다.「차이타냐 차리타므리타」(Caitanya-caritamrita)에는 오직 지극히 높으신 신, 크리슈나만이 주시요 그 나머지는 다 그의 종이라 했다. 그러므로 순수한 신앙자는 절대로 물질적인 것의 만족을 위해 천신(天神)들한테로 가지 않는다. 순수한 신자는 무엇이나 ‘그이’ 가 주시는 것으로 만족한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1.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케 해준다.
지극히 높으신 주는 각 사람의 신앙을 알아주시고 각 사람이 원하는 대로 거기 응답해주신다. 그 영혼이 어느만큼 분투해서 일어섰느냐 하는데 따라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허리를 구부려 그와 만나신다. 가오타마 부다나 샹카라같이 명상력이 그렇게 풍부한 이들도 여러 신들을 믿는 통속적 신앙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초월적 신성(神性)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고, 동시에 무한 가지의 나타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표면의 모든 흙은 지심(地心)에서 나오는 것이고, 모든 그림자는 그 물체의 성질을 드러낸다. 그럴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 존경하는 것이 무엇이었든간, 그 존경이 진지한 것이기만 하다면,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나밖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기독교 신관(神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아마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 것이다. 또 반대로 인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유일신의 배타적인 생각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니 만큼 정말 긴요한 것은 그 사이에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데 있다. 기독교도는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신들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들을 일으켰으며 가장 악랄한 제국주의를 행했다는 것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고.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란 것을 믿는 인도 종교는 자기네가 세계에서 가장 부끄러운 계급주의를 유지해 왔으며 가장 비겁한 식민지 백성 노릇을 최근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은 사색과 행동이라는 두 쌍동이 때문에 나오는 피치 못할 문제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서로 부족을 보완해줌으로써만 온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장자의 말을 빌어보자.
소지 (小知. 적은 앎)가 대공조(大公調, 큰 하나됨)에게 물었다. “마을의 말씀(丘里之言)이란 무엇입니까?” 큰 하나됨이 대답한다. “마을이란 것은 열 가지 성 백 가지 사람이 모여 한 풍속을 이룬 것이다. 다른 것을 모으면 한 가지가 되고, 한 가지를 흩으면 다른 것이 된다. 이제 말〔馬〕의 각 부분을 보면 말이란 것은 없어지지만, 그래도 내 앞에 선 것을 보고 말이라 할 때는 그 여러 부분을 하나로 세워놓고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산이란 낮은 것이 쌓여서 높아진 것이고 강이란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커진 것이다. 큰 사람은 모두 한데 어울러서 하나됨(公)을 하는 이”(大人合 併而爲公, 장자, 則陽)다. ⎯함석헌
 
22. 그러한 신앙이 주어짐을 얻어 그는 특정한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고, 그리 함으로 말미암아 제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득은 나만이 주는 것이니라.
스스로 하는 법칙으로 움직이는 현상계의 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은 원 인과 결과의 관계고, 뜻의 세계에서 보면 하나도 하나님의 주시는 것 아닌 것 없고, 토론의 지경을 벗어나면 일신(ᅳ神)도 다신(多神)도 범신(汎神)도 없는, 오직 믿음이 있을 뿐이다. ⎯함석헌
 
23. 그러나 그러한 직은 지혜의 사람들이 얻은 결과는 유한하고 잠깐인 것이니라. 천신들을 공경하는 자들은 천신의 하늘로 갈 것이지만 나의 신자는 내게로 온다.
오이 심으면 오이 얻고 콩 심으면 콩 얻는다. 하늘 그물 넓고 넓어 성기면서도 빠져나가는 것 없다. (種瓜得瓜 種豆得豆 天網恢恢 疎而不漏)
초월적인 신성을 쉽게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초월자의 가지가지 모습에 의해서 그를 예배한다. 우리가 우리의 찾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초월자가 우리 이상의 불안전한 것을 아시고 길이 참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어느 만큼 가까이 갔나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을 들어주신다. 어떤 정성도 보람 없지는 않다. 비록 무식한 신자라도 차차 자라 거룩하신 이 안에서의 자기의 최고의 선을 구하여 자라게 될 것이다. 모든 점을 다 포섭하고 초월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경에 올라간 이는 최고의 지경, 곧 원만한 생명, 완전한 지식, 절대적인 사랑, 부족이 없는 의지를 실현 성취한다. 그밖의 모든 선은 부분적이요 유한한 것이요 발전의 낮은 지경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라다크리슈난
이런 설명은 반드시 오해되게 마련이다.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은 세상 말을 쓰지만 그 뜻은 자기가 체험한 정신세계의 것인데, 듣는 사람은 보통의 의식을 가지고 듣기 때문이다. 의식구조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와서 말을 걸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벽두에 “새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여러 신이요, 천신이요, 천신의 하늘이요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우주의 어느 구석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자라는 정신세계의 어느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드시 제 나름의 해석을 한다. 그렇게 해서 미신이 생긴다. 그러나 그럼 영은 어떻게 받나? 영의 말을 듣지 않고는 아니된다. 그래서는 순환론에만 빠질 것 같다. 거기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위에서 한 말에 “진지한 태도로 하기만 하면”이란 말이 있었다. 진지란 참인데, 참은 다른 것 아니고 자기와 자기의 모든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함이다. 그러면 지식이나 경험이 모자라 혹 마음에 가리워진 것이 있어 잘못 알았던 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깨달아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것이 ₘ“내가 그 믿음을 튼튼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예배냐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무식한 인간의 찌꺼기인 사마리아 윤락 여성보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 참이란 말을 더 넣은 것이 중요하다. ⎯함석헌
 
24. 깨달을성 없는 사람들은 나의 불멸, 무상(無上)인 최고의 지경을 알지도 못하고 나타남이 없는 나를 인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형상 없는 이에다가 여러 가지 형상을 가져다 씌우는 것은 우리의 부족 때문에 되는 일이다. 우리는 궁극의 실재에 대해서 하던 명상을 내던지고 상상으로써 재구성해낸 것들에 정신이 쏠리고 만다. 나타나 뵈지 않는 유일 영원하신 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들이란 것은 다 우리가 ‘그이’ 위에 가져다 씌운 형상들이다. 하나님은 여럿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는 항상 변하는 무수한 것들 뒤에 계시는 ‘하나이신 분’이요 변동의 불변의 중심, 모든 형상 너머에 서 계시어 끝없는 변동에서 부동의 중심이 되시는 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의 번역에 대하여는 여러 주석가들의 의견이 구구하다. 샹카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지극한 자아로서의 최고의 지경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은 나를 이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지금 바로 나타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광명의 주재자다.” 힐(Hill)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전수히 프라크리티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동조하고 있는 바네트(Barnett)의 말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오해하는 사람들은 우주의 밑바닥이 되는 저 지극히 높으신 이를,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어서 가능적(可能的)으로 결정할 수 있는 아박타(avyakta)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실지로 결정적인 아뱍타의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근본적으로 절대요 비물질적이다.
간디의 번역은 틸라크의 것과도 라다크리슈난 박사의 것과도 서로 합한다. 나는 그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 말하는 것은 프라크리티에 관한 것이 아니고 6장, 7장, 8장이 다 같이 나타나지 않으신 형태로서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대해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 뵈지 않는 형태에 대한 것이다. 이 절은 그릇된 길에 빠져 여러 가지 신들을 정말 있는 것처럼 믿고 예배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절은 9장 10절과 같이 읽어야 한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일신관이다. 10장에서 12장에 이르는 부분은 일반으로 하나님의 나타나신 형태에 대해 예배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타났거나 아니 나타났거나 ‘그’는 최고 불멸의 하나이신 존재다. 즉, 나타나지 않는 혹은 비인격적인 존재로는 초월적인 브라만이시고, 나타나신 혹은 인격적인 존재로는 주요, 지지자시요, 통치자시요, 아버지요, 어머니요, 창조주시다. 그렇지만 하나이신 하나님과 예배를 같이 나눠 받을 여러 신 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여럿이 있는 줄로 믿는 사람들은 잘못 안 것이고 미혹된 것이다. 그것은 앞에 있는 절들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한 편에는 이슬람같이 그것을 미혹이라 할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라고 저주하는 종교도 있지만,「기타」는 그들에게도 한 자리를 허락하고 다만 “그들이 얻는 보응은 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와 그 목적이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25. 나는 내 요가마야에 의하여 가려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뵈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미혹된 세계는 나를 알지 못한다. 이 불생불멸의 나를.
요가마야(yogamaya) 유가(瑜咖)의 환력(幻力)
 
26. 아르쥬나야, 나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생명과 현재에 있는 것과 또 장차 올 모든 것을 다 알건만 아무도 나를 아는 이는 없느니라.
생명 부타(bhuta), 생류(生類), 피조물.
 
27. 바라타의 아들아, 오 대적을 정복하는 자야, 일체의 산 것들이 좋다 언짢다의 두 갈라짐에 이끌려 나면서부터 미망에 빠졌느니라.
샹카라에 의하면 ‘나면서’(sarge)부터 좋다 언짢다의 애욕이 모든 생류속에 미혹을 일으킨다. 그렇게 미혹된 것에게는 현세의 참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참 자아에 대한 참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생기 있는 것이 나면서부터 이 마당에 잡혀 있고 그것이 그 심정을 아트만 곧 참 나에게서 떠나 속세로 기울어지게 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28. 그러나 모든 죄를 벗어버린 경건한 사람은 상대의 미망에서 벗어나 굳게 맹세를 지켜 나를 믿느니라.
죄란 것은 법을 범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부족, 즉, 무지와 자기주장의 중심적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자아는 남을 해하면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이 죄를 벗을 때, 이 무지를 극복했을 때 우리 생활은 하나이신 이를 섬기는 데 쓰인다. 그러는 동안에 신앙은 더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올라간다. 그리하여 나중에 십방(十方)에 두루 계시는 ‘하나이신 자아’를 보는 데 이른다. 그것이 영원한,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이다. 투카람(Tukaram)은 이렇게 부른다.
 
내 속에 있는 나는 죽고
그 대신 당신이 그 자리에 앉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나, 투카는 증거합니다.
이제 이미 ‘나’ 도 ‘내 것’ 도 없습니다.
(The self within me now is dead
And thou enthroned in stead
Yea, This I, Tuka, testify,
No longer now is ‘me’ or ‘my’)
⎯라다크리슈난
 
29. 늙음, 죽음의 해탈을 얻으려고 내게 귀의하여 힘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 브라만을 바로 그대로 알고 자아의 바탈 전체와 또한 카르마의 모든 것을 아느니라.
늙음, 죽음의 해탈(jaramaranamokshaya), 늙음(jara), 죽음(marana), 해탈의 목적(mokshaya) 즉 다시 나고 다시 죽는 생사의 바퀴를 벗어나려는 목적.
자아의 바탈(adhyatmam) 개개 자아의 밑바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양의 말로 하면 성(性), 곧 바탈, 그 바탈의 전체라고 하면「역」(易)에서 말하는 “이치를 다하고 바탈까지껏 하여 그로써 말씀에 이른다”(窮理盡性 以至於命)에 해당할 것이다.
 
30. 나를 모든 물질적 나타남의 속, 모든 신적 존재의 속, 또한 모든 희생의 속인 자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통일 된 정신을 가지고 비록 떠나는 순간에도 나를 알 수 있느니라.
우주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의 갈피갈피 속에 들어 있어 그 근본 원리가 되는 힘. 노자의 도(道), 덕(德)의 덕에 해당한다 해야 할 것이다. 유교에서 한다면 도라 할 것이다. 노자는 도에서 덕이 나온다 했고, 유교에서는 하늘의 말씀하신 것이 바탈(性)이요, 바탈대로 하는 것이 길(道)이요, 길 닦음이 가르침(敎)이라고 했다.
희생은 물론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기타」에서는 그것을 굉장히 넓게 해석하여 우주의 근본원리라고 하니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라 하면 어떨까? ⎯함석헌
이 절은 우리더러 임종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에서 만든 특정한 교리를 기억해야만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도 모든 면에서 ‘그’를 알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예배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더러 새 말들을 썼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아르쥬나가 거기 대한 설명을 묻는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그 본체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 자연 속에 있어서의, 객관적 또는 주관적 현상 속에 있어서의, 행동과 희생의 원리 속과 속에 있어서의 ‘그’의 나타남에 있어서도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스승은 그것을 다음 장에서 모두 간단히 설명해준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