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마하트마 간디 - 물소리 오강남의 간디 이야기 : 네이버 카페



마하트마 간디 - 물소리 오강남의 간디 이야기 : 네이버 카페




마하트마 간디 - 물소리 오강남의 간디 이야기 | 자유게시판


2018.12.21. 18:50




soft103a(soft****)
나눔회원


https://cafe.naver.com/yooyoonjn/1602

















마하트마 간디

-불살생-비폭력으로 사랑 일깨운 현대 인도의 아버지




“눈에는 눈이라면 온 세상이 다 눈이 멀게 되고 말 것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 중 하나인 간디(1869~1948)를 보통 ‘마하트마 간디’라고 하지만 본명은 모한다스 K.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였다. ‘마하트마’는 ‘위대한maha’ ‘영혼atman’이라는 뜻을 가진 존칭으로서, 일반적으로 타고르가 처음으로 간디에게 사용한 칭호라고 한다. 간디 스스로는 자기가 이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거북하게 여겼다.




간디의 초기 생애는 그의 『자서전: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에 잘 나와 있다. 간디는 1869년 10월2일 현재 구자라트 주의 해안 도시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지방 정치 지도자였다. 부인들이 난산으로 잇달아 죽어가, 네 번째로 얻은 부인의 넷째이자 막내 아이가 간디였다. 어린 간디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원칙에 엄격했던 아버지와 쉬바 신을 섬기는 경건한 어머니와(어머니가 자이나교 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음) 그 지방 주 종교로 불살생不殺生을 최고로 여기던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가 나중에 주장하고 실천한 아힘사, 채식, 단식, 관용의 정신 등은 이런 영향 아래서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간디가 어릴 때 어느 친구가 인도인이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인도인들이 고기를 먹지 않아 허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같이 고기를 먹기로 하자고 했다. 둘이서 강가로 가서 염소를 잡아먹었다.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하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가 잤다.밤새도록 염소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자기 어머니에게 거짓말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앞으로 결코 고기를 먹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 읽은 인도의 고전 『마하라즈 하리쉬찬드라』에 나오는 영웅담도 그의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 이야기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나는 셀 수 없이 여러 번 내 스스로 하리쉬찬드라의 역을 해보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진리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마음이 굳어졌으리라 볼 수 있다.




간디는 그 당시 풍속대로 열세 살에 열네 살 된 신부를 맞았다. 그는 부인을 사랑했다. 그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 누웠는데, 밤마다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하루는 주물러 드리는 일을 마치고 부인하고 자고 싶어 쏜살같이 부인 방에 찾아 갔는데, 조금 있다가 하인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정욕이 나를 눈멀게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하는 괴로움에서 나를 건져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간디가 열다섯 살 때 첫 아기가 태어났지만 며칠 못 가서 죽었다. 그 후 네 명의 아들을 얻었다.




간디의 학교 성적은 보통이었다. 지방 대학에 들어갔다가 유학을 위해 중도에 그만 두었다. 1888년9월 4일 열아홉 생일 한 달 전, 영국으로 법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본래 간디의 집안 어른들은 간디가 서양식 풍속에 오염되는 것을 염려하여 그의 런던 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자이나교 승려 앞에서 고기와 술과 여자, 세 가지를 금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조건으로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런던에서는 영국 신사가 되기 위해 양복도 입고, 실크 모자도 쓰고, 가죽 장갑도 끼고,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고, 댄스 교습도 받고, 바이올린, 웅변술 레슨도 받았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원숭이처럼’ 영국신사 흉내 내기를 그만두고 인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고,그 이후 더욱 더 인도적으로 되었다.




런던에 살 때 채식 식당을 찾아 먼 길을 오갔는데, 그 때 다리운동으로 다리가 튼튼해졌다고 한다.런던에서 사귄 채식가들 중에는 힌두교와 불교 연구에 전념하던 신지학회Theosophy Society 사람들이 있었다. 간디는 그때까지만 해도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신지학회 사람들의 권유로 그들과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를 함께 읽으며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힌두교와 그리스도교 경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1891년 6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 2년 8개월의 영국 생활을 접고 인도로 돌아갔다. 가서 보니 자기가 런던에 있을 때 어머니가 이미 별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업에 지장을 줄까 통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향과 뭄바이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몇 가지 다른 것도 시도해 보다가 1893년 남아프리카에 있던 인도 상사에 일자리가 있다고 하여 1년 계약직으로 남아프리카에 가기로 했다.




남아프리카로 가는 기차에서 일등실 표를 사가지고 있었지만, 삼등실로 옮겨 가라는 요구를 받고 거절했다가 어느 역에서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사건은 영화 『간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목적지로 가는 도중, 그리고 거기에서 살면서 받은 인종차별의 경험을 통해 불의에 항거하는 사회 운동의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간디는 인도인들의 투표권 박탈을 입법화하려는데 반대하는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남아프리카에서의 계약기간을 연장시켰다. 그리고 비록 법안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인도인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그는 1894년 나탈 인도인 의회를 창설하고 인도인들의 정치적 힘을 집결하였다. 그 후 남아공의 여러 가지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끄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남아공에서의 인권운동으로 유명해진 간디는 1915년 인도로 돌아와 인도와 인도의 독립을 위한 지도자가 된다. 영국 식민지배 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도인들과 황폐된 농촌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을 규합하여 마을을 깨끗이 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에 스스로 앞장설 뿐 아니라, 마을 지도자들을 일깨워 이런 병폐와 질곡에서 벗어나는 데 힘쓰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운동을 전개하는 중, 그가 사회 소란죄로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이 때 수많은 군중들이 감옥 앞에 모여 그의 석방을 요구하고, 그 결과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많은 사람들의 지원을 엎게 된 간디는 농민들을 착취하는 지주들과 영국 식민지 정부를 향한 저항운동을 지도했다. 1930년의 그 유명한 ‘소금 행진’ 등 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통해 1947년 8월 15일 드디어 인도의 독립을 가져오게 했다.




독립은 했지만, 인도는 결국 이슬람 교인이 압도적인 파키스탄과 힌두교인이 주를 이루는 인도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던 간디는 그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은 힌두교 과격파 인물에 의해 암살당했다.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5분이었다. 죽으면서 최후로 한 말은 “헤 람(오, 신이여)”. 네루는 라디오 방송으로 그의 죽음을 알리면서 “빛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고 어디에나 어둠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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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행동을 움직인 사상과 원칙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라면 아힘사ahiṃsā와 싸탸그라하satyagraha였다. 

아힘사는 보통 ‘비폭력’이라고 번역되지만 일체의 생명에 해를 주지 않는 것,생명을 ‘살림,’ 생명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눈에는 눈이라면 온 세상이 다 눈이 멀게 되고 말 것”이라고 하며, 진리와 사랑이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샤탸그라하는 진리파지眞理把持라고 번역하는데, 우리의 행동이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현실을 진정으로 꿰뚫어 본’ 결과에서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함으로 인도 사람들만 비인간화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비인간화하는 영국 사람들도 똑같이 비인간화되는 것이니 인도의 독립은 감정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인도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 다 같이 인간화의 길을 가는데 불가결한 일이므로 이를 성취해야 한다는 식이다.

간디는 이 외에도 브라흐마차랴의 실천자였다. 36세에 부인의 동의를 얻어 금욕적인 삶을 산 것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면 해혼解婚한 셈이다. 그의 성생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또 ‘아파리그라하’ 곧 무소유의 단순한 삶을 원칙으로 하였다.채식 뿐 아니라 나중에는 과일만 먹는 과식주의자果食主義者, fruitarian였다. 머리도 스스로 깎고, 빨래도 손수 했다. 그의 아슈람이 설립되었을 때 불가촉천민만이 할 수 있는 뒷간 청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 중 하루는 묵언黙言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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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모든 종교 전통이 한 분 신의 각기 다른 표현이라 믿고 모든 종교에 대해 관대하였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자비, 불살생, 황금률 같은 진리와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힌두교인이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인, 이슬람교인, 불교인, 유대교인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을 좋아하고, 그 중에 악을 대적하지 말라든가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는 대목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Christ는 좋아하지만 당신들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은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간디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큰 예가 1960년대 미국 인권운동을 지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여성 지도자로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웅 산 수치 여사(최근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남아공에서 흑백 차별 반대 운동을 지도하다가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데스몬드 투투 주교, 남아프리카 전 대통령으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이다.

그 외에도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다가 사형 당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영국의 가수 존 레논, 환경운동으로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 전 부통령 알 고어, 한국의 류영모, 함석헌 선생님 같은 이들이 간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상원의원 시절 “나의 전 생애를 통해 나는 언제나 마하트마 간디를 하나의 영감으로 우러러 보았다.”고 하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어느 고등학교에서 행한 강연에서 그가 누구와 밥을 같이 먹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고, 서슴없이 “간디!”라고 대답하면서 “그는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준 분”이라 했다.

간디는 1930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1999년에는 ‘세기의 인물’ 중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지목되었다. 간디의 생일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임은 물론, 2007년 유엔 총회에서는 ‘국제 비폭력일International Day of Non-Violence’로 선포하기도 했다. 이런 인물이 출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인류를 위해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삶과 가르침 앞에 다시 한 번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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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Satyagraha? | FAQs - Myths about Mahatma Gandhi



What is Satyagraha? | FAQs - Myths about Mahatma Gandhi
https://www.mkgandhi.org/faq/q17.htm



What Is Satyagraha ?

Gandhi called his overall method of non-violent action Satyagraha. This translates roughly as "Truth-force." A fuller rendering, though, would be "the force that is generated through adherence to Truth."

Nowadays, it's usually called non-violence. But for Gandhi, non-violence was the word for a different, broader concept-namely, "a way of life based on love and compassion." In Gandhi's terminology, Satyagraha-Truth-force-was an outgrowth of nonviolence.

It may also help to keep in mind that the terms Satyagraha and nonviolent action, though often used one for the other, don't actually refer to the exact same thing. Satyagraha is really one special form of nonviolent action-Gandhi's own version of it. Much of what's called non-violent action wouldn't qualify as Satyagraha. But we'll come back to that later.

Gandhi practiced two types of Satyagraha in his mass campaigns. 

The first was civil disobedience, which entailed breaking a law and courting arrest. When we today hear this term, our minds tend to stress the "disobedience" part of it. But for Gandhi, "civil" was just as important. He used "civil" here not just in its meaning of "relating to citizenship and government" but also in its meaning of "civilized" or "polite." And that's exactly what Gandhi strove for.
We also tend to lay stress differently than Gandhi on the phases of civil disobedience. We tend to think breaking the law is the core of it. But to Gandhi, the core of it was going to prison. Breaking the law was mostly just a way to get there.

Now, why was that? Was Gandhi trying to fill the jails? Overwhelm and embarrass his captors? Make them "give in" through force of numbers?
Not at all. He just wanted to make a statement. He wanted to say, "I care so deeply about this matter that I'm willing to take on the legal penalties, to sit in this prison cell, to sacrifice my freedom, in order to show you how deeply I care. Because when you see the depth of my concern, and how 'civil' I am in going about this, you're bound to change your mind about me, to abandon your rigid, unjust position, and to let me help you see the truth of my cause."

In other words, Gandhi's method aimed to win not by overwhelming but by converting his opponent - or as the Gandhian say, by bringing about a "change of heart."

Now, to many people, that sounds pretty naive. Well, I'll let you in on a secret. It was naive. The belief that civil disobedience succeeded by converting the opponent happened to be a myth held by Gandhi himself. And it's shared by most of his admirers, who take his word for it without bothering to check it out.

As far as I can tell, no civil disobedience campaign of Gandhi's ever succeeded chiefly through a change of heart in his opponents.

But this doesn't mean civil disobedience didn't work. As a matter of fact, it did work. The only thing off-kilter was Gandhi's explanation of how and why it worked.

Let me give a general description of what seems really to have happened when Gandhi and his followers committed civil disobedience:

Gandhi and followers break a law-politely. Public leader has them arrested, tried, put in prison. Gandhi and followers cheerfully accept it all. Members of the public are impressed by the protest, public sympathy is aroused for the protesters and their cause. Members of the public put pressure on public leader to negotiate with Gandhi. As cycles of civil disobedience recur, public pressure grows stronger. Finally, public leader gives in to pressure from his constituency, negotiates with Gand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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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the general outline. Notice that there is a "change of heart," but it's more in the public than in the opponent. And notice too that there's an element of coercion, though it's indirect, coming from the public, rather than directly from Gandhi's c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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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campaigns of Gandhi's show a variation on this model. Sometimes Gandhi's opponents had superiors who wound up pressuring them or even ordering them to negotiate with Gandhi.
These superiors might have been influenced by Gandhi's campaign, or by pressure from their own public-for instance, when British citizens pressured government leaders in Britain to intervene in affairs of their colonial government in India.
But the basic principle was the same: Gandhi's most decisive influence on his opponents was more indirect than direct.

Gandhi set out a number of rules for the practice of civil disobedience. These rules often baffle his critics, and often even his admirers set them aside as nonessential. But once you understand that civil disobedience, for Gandhi, was aimed at working a change of heart-whether in the opponent or the public - then it's easy to make sense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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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ule was that only specific, unjust laws were to be broken. Civil disobedience didn't mean flouting all law.
In fact, Gandhi said that only people with a high regard for the law were qualified for civil disobedience. Only action by such people could convey the depth of their concern and win respect. No one thinks much of it when the law is broken by those who care nothing for it anyway.

Other rules: Gandhi ruled out direct coercion, such as trying to physically block someone. Hostile language was banned. Destroying property was forbidden. Not even secrecy was allowed.
All these were ruled out because any of them would undercut the empathy and trust Gandhi was trying to build, and would hinder that "change of heart."

The second form of mass Satyagraha was non-co-operation.

This is just what it sounds like. Non-co-operation meant refusing to co-operate with the opponent, refusing to submit to the injustice being fought. It took such forms as strikes, economic boycotts, and tax refusals.
Of course, non-co-operation and civil disobedience overlapped. Non-co-operation too was to be carried out in a "civil" manner. Here too, Gandhi's followers had to cheerfully face beating, imprisonment, confiscation of their property-and it was hoped that this willing suffering would cause a "change of heart."
But non-co-operation also had a dynamic of its own, a dynamic that didn't at all depend on converting the opponent or even molding public opinion. It was a dynamic based not on appeals but on the power of the people themselves.
Gandhi saw that the power of any tyrant depends entirely on people being willing to obey. The tyrant may get people to obey by threatening to throw them in prison, or by holding guns to their heads. But the power still resides in the obedience, not in the prison or the guns.
Now, what happens if those people begin to say, "We're not afraid of prison. We're even willing to die. But we're not willing to obey you any longer."
It's very simple. The tyrant has no power. He may rant and scream and hurt and destroy-but if the people hold to it, he's finished.
Gandhi said, "I believe that no government can exist for a single moment without the co-operation of the people, willing or forced, and if people suddenly withdraw their co-operation in every detail, the government will come to a standstill."
That was Gandhi's concept of power-the one he's accused of not having. It's a hard one to grasp, for those used to seeing power in the barrel of a gun. Their filters do not pass it. And so they call Gandhi idealistic, impractical.

Source: Mahatma Gandhi and His Myths- By Mark Shepard

2018/12/23

Opinion | Trump’s Decision to Withdraw From Syria Is Alarming. Just Ask His Advisers. - The New York Times

Opinion | Trump’s Decision to Withdraw From Syria Is Alarming. Just Ask His Advisers. - The New York Times



Trump’s Decision to Withdraw From Syria Is Alarming. Just Ask His Advisers.

This isn’t the first time the president and his administration have sent mixed messages.


By The Editorial Board


The editorial board represents the opinions of the board, its editor and the publisher. It is separate from the newsroom and the Op-Ed section.
Dec. 19, 2018









It was less than three months ago that John Bolton, the national security adviser, declared an expanded objective for American troops in Syria.

The goal is not just defeating the Islamic State, but also ensuring that Iranian forces leave the country, he told reporters in what seemed like an authoritative statement of official policy.

Only, as is so often the case with Donald Trump’s chaotic presidency, it apparently wasn’t.

On Wednesday, Mr. Trump summarily overruled Mr. Bolton and the rest of his national security team. He ordered the withdrawal of all 2,000 American ground troops from Syria within 30 days.

That abrupt and dangerous decision, detached from any broader strategic context or any public rationale, sowed new uncertainty about America’s commitment to the Middle East, its willingness to be a global leader and Mr. Trump’s role as commander in chief.


Soldiers have a duty to follow their leader and carry out lawful orders. But success depends on trusting that the leader knows what he’s doing and where he’s going.

Sending conflicting orders to soldiers on the battlefield, as Mr. Trump and his administration are doing, not only hampers morale and undermines allied forces like the Syrian Kurds, it could also risk getting American soldiers killed or wounded for objectives their commanders had already abandoned.


You have 5 articles left.Subscribe to The Times.



Even some of Mr. Trump’s most ardent supporters were alarmed. “It is a major blunder,” a Republican senator, Marco Rubio of Florida, wrote on Twitter. “If it isn’t reversed it will haunt this administration & America for years to come.”

Senator Lindsey Graham, Republican of South Carolina, who generally supports Mr. Trump, said he and others in the national security establishment were “blindsided” by the announcement. He called for congressional hearings on the decision.

This isn’t the first time the president and his administration have sent mixed messages. During the 2016 campaign, Mr. Trump promised to withdraw troops from Syria and has been looking for a way do it ever since. In April, he gave the Pentagon more time to complete the mission, which since the Obama era has been strictly focused on finishing off the Islamic State. Then Mr. Bolton arrived on the job and declared that “we’re not going to leave as long as Iranian troops are outside Iranian borders, and that includes Iranian proxies and militias.”


As late as Monday, James Jeffrey, the State Department’s Syria envoy, told the Atlantic Council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stay in Syria until ISIS was defeated, Iranian influence was curbed and there was a political solution to the Syrian civil war.

But on Wednesday, Mr. Trump undercut his advisers, and American interests, by reversing course and declaring in a tweet, “We have defeated ISIS in Syria, my only reason for being there during the Trump Presidency.”

There was no attempt to use the leverage of an American withdrawal to achieve any specific political or military goal.

Mr. Trump’s assertion that the Islamic State is defeated is absurd. “We have won against ISIS,” he boasted in a video. The ability of the terrorists to strike has been significantly degraded and much of the territory they claimed for their so-called caliphate has been liberated. But the group still retains a pocket of land on the Syria-Iraq border and has roughly 20,000 to 30,000 fighters, according to military researchers. As Mr. Jeffrey said Monday, “The job is not yet done.”

No one wants American troops deployed in a war zone longer than necessary. But there is no indication that Mr. Trump has thought through the consequences of a precipitous withdrawal, including allowing ISIS forces to regroup and create another crisis that would draw the United States back into the region.

An American withdrawal would also be a gift to Vladimir Putin, the Russian leader, who has been working hard to supplant American influence in the region and who, on Thursday, enthusiastically welcomed the decision, saying, “Donald’s right.” Another beneficiary is Iran, which has also expanded its regional footprint. It would certainly make it harder for the Trump administration to implement its policy of ratcheting up what it calls “maximum pressure” on Iran.

Among the biggest losers are likely to be the Kurdish troops that the United States has equipped and relied on to fight the Islamic State in Iraq and Syria. Turkey’s president, Recep Tayyip Erdogan, considers many of the Kurds to be terrorists bent on destroying his country. In recent days he has vowed to launch a new offensive against them in the Syrian border region. Mr. Trump discussed his withdrawal decision in a telephone call with Mr. Erdogan on Friday.

The American withdrawal worries Israel, anxious about Iran’s robust military presence in Syria, and Jordan, which bears a considerable burden from Syrian refugees who fled the fighting across the border. While Israel withheld criticism of Mr. Trump’s decision, Prime Minister Benjamin Netanyahu said his government would escalate the fight against Iranian-aligned forces in Syria once the Americans leave.

Decisions of such consequence normally are thoroughly vetted by a president’s national security advisers. But congressional lawmakers said there were no signs that any process was followed, and a senior White House official, refusing to discuss internal deliberations, said Wednesday, “The issue here is the president made a decision.”

It’s hard not to wonder whether Mr. Trump is once again announcing a dramatic step as a way of deflecting attention from bad news, in this case a torrent of legal judgments that are tightening the legal noose around him.

That would be the worst rationale for a commander in chief sworn to protect the nation and to honor the men and women who serve in uniform.

Opinion | Trump’s Decision to Withdraw From Syria Is Alarming. Just Ask His Advisers. - The New York Times



Opinion | Trump’s Decision to Withdraw From Syria Is Alarming. Just Ask His Advisers. - The New York Times
Trump’s Decision to Withdraw From Syria Is Alarming. Just Ask His Advisers.

This isn’t the first time the president and his administration have sent mixed messages.


By The Editorial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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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9, 2018









It was less than three months ago that John Bolton, the national security adviser, declared an expanded objective for American troops in Syria.

The goal is not just defeating the Islamic State, but also ensuring that Iranian forces leave the country, he told reporters in what seemed like an authoritative statement of official policy.

Only, as is so often the case with Donald Trump’s chaotic presidency, it apparently wasn’t.

On Wednesday, Mr. Trump summarily overruled Mr. Bolton and the rest of his national security team. He ordered the withdrawal of all 2,000 American ground troops from Syria within 30 days.

That abrupt and dangerous decision, detached from any broader strategic context or any public rationale, sowed new uncertainty about America’s commitment to the Middle East, its willingness to be a global leader and Mr. Trump’s role as commander in chief.


Soldiers have a duty to follow their leader and carry out lawful orders. But success depends on trusting that the leader knows what he’s doing and where he’s going.

Sending conflicting orders to soldiers on the battlefield, as Mr. Trump and his administration are doing, not only hampers morale and undermines allied forces like the Syrian Kurds, it could also risk getting American soldiers killed or wounded for objectives their commanders had already abando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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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 some of Mr. Trump’s most ardent supporters were alarmed. “It is a major blunder,” a Republican senator, Marco Rubio of Florida, wrote on Twitter. “If it isn’t reversed it will haunt this administration & America for years to come.”

Senator Lindsey Graham, Republican of South Carolina, who generally supports Mr. Trump, said he and others in the national security establishment were “blindsided” by the announcement. He called for congressional hearings on the decision.

This isn’t the first time the president and his administration have sent mixed messages. During the 2016 campaign, Mr. Trump promised to withdraw troops from Syria and has been looking for a way do it ever since. In April, he gave the Pentagon more time to complete the mission, which since the Obama era has been strictly focused on finishing off the Islamic State. Then Mr. Bolton arrived on the job and declared that “we’re not going to leave as long as Iranian troops are outside Iranian borders, and that includes Iranian proxies and militias.”


As late as Monday, James Jeffrey, the State Department’s Syria envoy, told the Atlantic Council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stay in Syria until ISIS was defeated, Iranian influence was curbed and there was a political solution to the Syrian civil war.

But on Wednesday, Mr. Trump undercut his advisers, and American interests, by reversing course and declaring in a tweet, “We have defeated ISIS in Syria, my only reason for being there during the Trump Presidency.”

There was no attempt to use the leverage of an American withdrawal to achieve any specific political or military goal.

Mr. Trump’s assertion that the Islamic State is defeated is absurd. “We have won against ISIS,” he boasted in a video. The ability of the terrorists to strike has been significantly degraded and much of the territory they claimed for their so-called caliphate has been liberated. But the group still retains a pocket of land on the Syria-Iraq border and has roughly 20,000 to 30,000 fighters, according to military researchers. As Mr. Jeffrey said Monday, “The job is not yet done.”

No one wants American troops deployed in a war zone longer than necessary. But there is no indication that Mr. Trump has thought through the consequences of a precipitous withdrawal, including allowing ISIS forces to regroup and create another crisis that would draw the United States back into the region.

An American withdrawal would also be a gift to Vladimir Putin, the Russian leader, who has been working hard to supplant American influence in the region and who, on Thursday, enthusiastically welcomed the decision, saying, “Donald’s right.” Another beneficiary is Iran, which has also expanded its regional footprint. It would certainly make it harder for the Trump administration to implement its policy of ratcheting up what it calls “maximum pressure” on Iran.

Among the biggest losers are likely to be the Kurdish troops that the United States has equipped and relied on to fight the Islamic State in Iraq and Syria. Turkey’s president, Recep Tayyip Erdogan, considers many of the Kurds to be terrorists bent on destroying his country. In recent days he has vowed to launch a new offensive against them in the Syrian border region. Mr. Trump discussed his withdrawal decision in a telephone call with Mr. Erdogan on Friday.

The American withdrawal worries Israel, anxious about Iran’s robust military presence in Syria, and Jordan, which bears a considerable burden from Syrian refugees who fled the fighting across the border. While Israel withheld criticism of Mr. Trump’s decision, Prime Minister Benjamin Netanyahu said his government would escalate the fight against Iranian-aligned forces in Syria once the Americans leave.

Decisions of such consequence normally are thoroughly vetted by a president’s national security advisers. But congressional lawmakers said there were no signs that any process was followed, and a senior White House official, refusing to discuss internal deliberations, said Wednesday, “The issue here is the president made a decision.”

It’s hard not to wonder whether Mr. Trump is once again announcing a dramatic step as a way of deflecting attention from bad news, in this case a torrent of legal judgments that are tightening the legal noose around him.

That would be the worst rationale for a commander in chief sworn to protect the nation and to honor the men and women who serve in uniform.

2018/12/22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 (한국퀘이커)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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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구월산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구월산지구

조선의 중서부 해안지구에 면하고있는 구월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광지, 피서지이다. 명승들뿐아니라 안악3호무덤을 비롯한 력사유적들도 적지 않다. 평양을 가까이 하고있어 평양에 체류하는 손님들이 하루이틀 피서지로 리용할수도 있고 등산, 참관, 해수욕도 할수 있는 리상적인 관광지구이다. 가지가지 재미나는 전설도 많이 깃들어있다.






구월산



구월산은 조선의 6대명산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9월의 단풍이 류별나게 아름답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였다. 구월산의 총면적은 110㎢이다.

구월산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정력적인 령도와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의하여 인민의 휴양지, 관광지로 훌륭히 꾸려졌다. 구월산에는 100여㎞의 탐승도로들과 수십개의 정각, 부감대들, 등산길들이 있다.

구월산관광지구에는 절승경개들뿐아니라 구월산성, 삼성사, 월정사, 안악3호무덤을 비롯한 많은 력사유적들이 있다.

평양과 가까이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등산, 참관, 해수욕을 하는 훌륭한 관광지이다.

평양에서 구월산까지는 약 100㎞이다. 남포시를 거쳐 서해갑문을 지나 륙로로 가는것이 편리하다.




구월산성



고구려시기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둘레길이는 5. 23㎞, 높이 3. 5~5. 2m이다.

성을 보위하는데 리용된 무기고, 식량창고, 병영 등의 터가 있으며 자기를 구워낸 가마터도 있다.

평양에서 구월산까지는 약 100㎞이다. 남포시를 거쳐 서해갑문을 지나 륙로로 가는것이 편리하다.




단풍골



구월산 서쪽비탈면을 따라 펼쳐진 명승구이다. 맑은 시내물이 쏟아져내리다가는 바위돌에 부딪쳐 무수한 물안개를 일으키는데 노을빛이 비끼면 령롱한 무지개색을 반사하여 마치 구슬을 뿌려놓은것 같다.

원래 옥류골이라고 하였는데 단풍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단풍골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구월산에서 제일 깊고 이름난 골안이다. 등산로정은 5km인데 차를 타고 유람할수도 있다. 단풍골에는 마당소, 삼형제소, 뱀장어소, 차대폭포와 같은 명소들뿐아니라 월정사와 같은 력사유적들도 있다.




월정사



구월산 아사봉을 배경으로 단풍골에 자리잡은 고구려시기 절이다.

지금의것은 조선봉건왕조초기에 다시 지은것이라 한다. 월정사란 월정대사에 의하여 세워진 절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만세루, 명부전, 수월당과 기타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건축형식이 독특할뿐아니라 주변경치 또한 매우 아름다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팔담골



관광도로를 따라 안악군 월정리 방향으로 내려가느라면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팔담골에 이르게 된다. 500m의 구간에 8개의 맑은 담소가 차례로 놓여있다고 하여 팔담골이라고 한다. 맑은 물우에 무도장, 휴식터도 있다.




삼성사



팔담골입구에서 2km정도 내려가면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고려말기에 세운 절인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삼성이란 단군의 할아버지 환인과 아버지 환웅, 단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 서, 남쪽에 3채의 주요건물과 보조건물이 있다.




은정호



팔담골에서 1. 5km 들어가면 은정폭포가 있는데 그우에 자리잡고있다. 협곡의 시내물이 모여 형성된 산중호수이다.

깊이가 약 5m되는 호수는 물이 맑아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며 물밑에는 마치 살아움직이는것만 같은 세마리의 돌사자가 있다.




안악3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자리잡고있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이다.

4세기 중엽에 건설되였는데 규모가 크며 특별히 화려하고 내용이 풍부한것으로 하여 고구려벽화무덤가운데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문화유산으로 되고있다.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력사와 건축, 회화, 음악, 춤, 무술, 음식차리기 등을 알수 있다.

안악3호무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산성혁명사적지





구월산성중심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아버님이시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걸출한 지도자이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 주체10(1921)년 11월 이곳에 오시여 이 지구 반일조직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오직 무장투쟁으로써만 반일투쟁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방침을 제시하신 력사적인 곳이다.

《조선의 오늘》서부지역 사리원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사리원지구

평양으로부터 65k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리원시를 측으로 하여 이루어진 관광지이다.

사리원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정방산이 있는데 그 주변의 산들이 시의 북부를 둘러싸고있어 도시의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가장 볼만한 곳은 사리원시내에 있는 민속거리이다. 력사유적들도 적지 않다.

이 지구는 평양-개성고속도로의 중간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있어 개성으로 오갈 때 휴식의 한때를 즐길수 있는 리상적인 곳이다.




사리원시

황해북도의 소재지이며 평양의 남쪽관문도시이다.

해방전 순수 상업소비도시였던 사리원은 해방후 현대적인 공업과 발전된 농촌경리를 가진 지역으로 전변되였다. 새로 진행된 토지정리로 미곡협동농장을 비롯한 농장벌들의 면모가 일신되였다. 사리원은 포도생산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것으로 만든 경암포도주는 시의 특산이다. 시에는 계응상사리원농업대학을 비롯한 10여개의 대학과 병원들, 현대적인 사리원경기장과 력사박물관이 있다. 시의 북쪽에는 정방산유원지가 있으며 시안에는 경암산을 중심으로 아담하게 꾸려진 유원지가 있다. 력사유적들도 있다. 시에는 큰 강이 없고 하천들만 있으며 서흥강을 막아 건설한 큰 규모의 운하가 있다. 년평균기온은 10℃, 년평균강수량은 937. 8mm이다.




사리원시민속거리



시리원시민속거리는 경암산기슭에 자리잡고있다.

평양에서 차를 타고 1시간정도 달리면 와닿을수 있다. 80여정보의 부지에 꾸려진 민속거리에는 민족적향취가 짙게 풍기는 조선식합각지붕의 살림집들과 민속음식점들, 정각들과 다리들, 편의봉사시설들, 력사박물관과 거북선, 첨성대, 측우기 등을 재현한 력사문화유적유물들이 있다. 민속놀이장의 한쪽면은 우리 민족의 건국력사를 보여주는 모자이크벽화들로 꽉 차있다. 민속오락장에서는 장기, 윷놀이 등 민속오락경기들을 할수 있으며 민속식당에서는 찰떡, 지짐, 막걸리 등 민속음식들을 맛볼수 있다. 경암산려관에서는 국내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해주고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반일투사들을 키워내시던 장소, 민속놀이터 무대와 경암루, 룡조각, 민속차집 등이 경암산기슭에 위치하고있다. 민속차집에서는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 있으며 경암산 마루에 있는 선군정에서는 사리원시내를 한눈에 부감할수 있다.

명절이면 화려한 민족옷차림을 하고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녀성들의 모습이 거리의 흥취를 돋구어준다. 녀성들의 민족옷자랑무대도 볼만 하다. 학생소년들의 연띄우기며 제기차기, 줄넘기 등 민속놀이도 사람들에게 웃음과 랑만을 더해준다. 또한 민족옷차림의 떡메군들이 큼직한 떡메를 휘두르며 먹음직스러운 찰떡을 쳐대는 풍경은 명절분위기를 이채롭게 장식한다.




정방산



사리원시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다.

산마루들이 서로 잇닿아 정방형을 이루고있다 하여 정방산(높이 481m)이라고 부른다. 산세는 험준해보여도 곳곳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아득히 높은 기암절벽들, 울창한 수림으로 하여 볼수록 장쾌하다. 봄철이면 살구꽃, 벗꽃, 배꽃들이 한데 어울려 황홀경을 펼쳐놓는다. 꽃이 얼마나 많고 화려하였던지 저녁해가 져도 어두워지지 않는 특이한 절경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정방산에는 560여종의 식물들이 있다.

또한 딱따구리를 비롯한 온갖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은 참관자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경치도 좋지만 유적들이 많은것으로 하여 더욱 인기를 끌고있다.




정방산성



정방산중턱에 축성된 고려시기의 산성이다.

둘레가 12km이며 동, 서, 남, 북에 성문을 세우고 그 우에 문루를 만들었다.

성안에는 병실터, 무기고터, 식량창고터가 남아있다. 옛날 성안에는 48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고려시기의 유명한 불교절인 성불사와 돌탑이 남아있을뿐이다. 또한 조선봉건왕조시기 극도로 문란해진 나라의 정세속에서도 정방산성을 지킨 성장 김성업을 추모하여 세운 비석이 보존되여있다.

오늘 정방산은 피서지로, 즐거운 휴식터로 되고있다.




성불사



정방산성안에 있는 불교절이다.

898년에 처음 세운 절인데 지금의것은 고려말기에 다시 지은것이다.

성불사는 5층돌탑을 중심으로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등 6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고려시기의 건축형식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경암산



사리원시내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경암산은 자연의 조화로 이루어진 여러가지 형태의 바위들과 갖가지 식물들이 어울려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봄철에는 꽃속에 묻히고 가을에는 붉고 누런 나무잎들이 산을 이채롭게 장식한다. 산의 높이는 140m이다.




경암루

1436년에 세워진 경암루는 경암산에 위치하고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봉산군수가 있던 관청의 루정이였다.

루정에 올라서면 정원처럼 꾸려진 경암산이 사리원거리들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은정축산전문협동농장



수곡차집에서 평양으로 올라오면서 오른쪽으로 약 10km되는 지점에 자리잡고있다.

농장에서는 축산과 함께 벼, 강냉이, 콩을 비롯한 알곡과 남새들도 재배한다. 12 000정보의 면적을 차지한 목장구역에는 7개 호동의 염소우리들과 젖가공설비, 자연갱도식랭동고 등이 있다. 요그르트, 빠다, 치즈 등을 생산한다. 무연하게 펼쳐진 풀판을 따라 산보도 할수 있고 참관자들의 요구에 따라 농장원들의 흥겨운 봉산탈춤을 관람할수도 있다.




범안양어장



황해북도 서흥군 범안리에 위치하고있다.

34정보의 부지면적을 가진 양어장에는 48개의 못이 있는데 이곳에는 칠색송어, 잉어, 기념어, 메기 등이 자라고있다. 양어못들과 농촌문화주택, 축사들, 범안발전소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범안리는 오늘날 《선군8경》의 하나로 불리우고있다.




사리원 3. 8려관



사리원시 신양동 경암산기슭에 위치하고있는 4층짜리 려관이다. 려관은 크지 않으나 큰 호텔들에서는 느낄수 없는 평온과 집에 있는듯 한 감을 손님들에게 안겨준다. 수용능력은 60명이다.

방수:29개(1등실 1개, 2등실 3개, 3등실 25개)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남포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남포지구

조선서부 대동강하류연안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남포를 중심으로 한 관광지구이다.

와우도를 비롯한 명승지들과 강서세무덤과 같은 력사유적들, 서해갑문과 공장들, 농장들을 비롯한 수많은 관광대상들이 있다.

이 지구의 강서약수와 신덕산샘물이 유명하다.

지구에는 산지대의 식물로부터 간석지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퍼져있다. 산림속에는 메돼지, 노루, 여우 등이 있으며 야산지대와 공원들에는 꿩, 딱따구리, 종달새 등이 많다. 청산벌을 비롯한 논벌들과 간석지, 대동강하류일대에는 왜가리나 백로와 같은 철새들이 많이 날아든다.

평양에서 남포까지는 55km 이다.




남포시

조선의 중요한 공업기지일뿐아니라 조선서해의 이름난 항구문화도시이다.

기후는 조선서해와 대동강의 영향을 받아 내륙지대보다 겨울철에 따뜻하고 여름철에는 서늘하다. 년평균기온은 9. 9℃, 년평균강수량은 880mm이다.

이 지구는 경제발전에 유리한 자연환경과 자연부원을 가지고있다.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있다. 시에는 여러개의 대학들을 비롯한 교육기관들이 있으며 문화시설들과 체육시설들, 병원들이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서해갑문



항구려관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서해 8km의 날바다를 막아 건설한 거대한 갑문이다. 주체70(1981)년부터 주체75(1986)년까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건설되였다.

갑문에는 2천t~5만t급까지의 배들이 드나들수 있는 3개의 갑실이 있고 언제우에는 기차길, 자동차길과 걸음길이 있다. 갑문이 건설됨으로써 서해지구의 농경지들에 물을 대주고 공업지대와 주민지대의 공업용수와 음료수가 해결되였다. 또한 배통과능력이 높아지고 교통문제도 원만히 해결되였다. 서해갑문이 건설되기 전에는 남포에서 은률까지 200km를 돌아가야 하였지만 지금은 8km를 가면 된다.

또한 대동강하류의 풍치가 더욱 아름답게 변모되였다.




태성호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30km가량 가면 해발 200~300m의 낮은 산들로 둘러싸인 인공호수가 있다.

둘레가 30km가 넘는 산중의 바다를 련상시키는 호수이다. 호수의 기본수원은 대동강이다. 관개용저수지로 건설하였다.

풍치아름다운 호수가를 따라 소년단야영소와 휴양소, 평양골프장이 자리잡고있다.

호수가에서 낚시질과 뽀트놀이도 할수 있다. 그 주변에서 어죽을 쑤거나 불고기를 하면서 자연을 즐기는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평양골프장



태성호기슭에 자리잡고있다.

수려한 풍치에 잘 어울리게 들어앉은 골프장은 약 120정보의 부지면적을 가지고있다. 잔디면적은 45정보이고 그 연장길이는 7km정도이다. 골프장은 18개의 홀로 되여있으며 매개 홀은 호수가를 따라 특색있게 이어져있다.

하루에 100여명이 경기를 할수 있도록 기재들과 봉사인원들이 충분히 준비되여있다. 건물안에는 식당, 상점, 한증탕, 휴식실 등 봉사시설들이 편리하게 꾸려져있다.

경기를 하지 않는 방문객들은 멋있는 환경과 푸른 태성호를 굽어보며 기분좋은 산책을 하는것으로만 만족을 느낄수 있다. 당일려행으로 리상적인 명소이다. 또한 청춘거리의 서산호텔옆에는 30개의 타석을 가진 평양골프련습장이 자리잡고있다. 골프련습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골프장까지 갈 시간이 넉넉치 못한 사람들에게 알맞춤한 곳이다.

주변에 호텔들도 있어 짧은 기간에 골프를 배우기에는 이 련습장을 리용하는것이 좋다.




와우도유원지



남포시중심에서 서남쪽으로 10km가량 가면 자그마한 산을 보게 된다. 이것이 한때에는 섬이였던 와우도이다. 바다에 소가 누워있는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산마루에 정각이 있고 앞에는 배놀이장과 해수욕장, 백사장, 물놀이장, 낚시터, 휴양소, 화초원 등이 있으며 배구장, 롱구장, 탁구장 등 체육시설들도 꾸려져있다. 뒤에는 와우도회관이 특색있게 꾸려져있다.

회관에는 오락장, 무도장을 비롯한 봉사시설들이 그쯘히 갖추어져있다. 일요일에 이곳은 남포시뿐아니라 평양에서 온 휴양객들로 차고넘친다.




강서세무덤



강서구역 삼묘리에 위치하고있는 7세기중엽의 고구려벽화무덤이다.

이 무덤들은 오늘까지 조선에서 알려진 100여기의 고구려벽화무덤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벽화인 사신도(백호, 주작, 현무, 청룡)가 있는것으로 하여 주의를 끌고있다.

사신도의 백호그림은 세계 명화중의 하나로 꼽히고있다.

주체93(200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였다.




덕흥리벽화무덤



강서구역 덕흥리에 자리잡고있는 덕흥리벽화무덤은 고구려24대왕인 광개토왕시기(408)년에 만든 무덤이다.

무덤안에는 무덤의 년대를 가늠할수 있는 600여개의 글자가 씌여져있으며 강성한 고구려를 보여주는 벽화들이 그려져있다. 주인공이 벼슬을 지낼 때 13군태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무사들의 그림, 고구려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한 그림 등으로 벽화가 형상되였다.

주체93(200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등록되였다.




룡강온탕원



조선의 중서부에 위치하고있다.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을 리용하여 고혈압, 관절염, 신경통이나 수술후유증, 부인성질환, 만성위염, 만성대장염, 피부병 등을 치료해주는 시설이다.

룡강온천은 조선의 온천가운데서 광물질이 제일 많고 브롬이온과 라돈이 들어있어 질병치료에 특효가 있는 매혹적인 온천이다. 이곳에는 라돈가스욕, 온몸치료욕, 국소치료욕, 물맞이치료욕, 내복치료 등을 할수 있는 시설들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온탕원에서는 음료수와 생활용수를 예성산샘물로 리용한다. 소화기에 좋은 이 물을 마음껏 마시면서 온천욕을 하고나면 10년은 더 젊어지고 청춘의 정력을 되찾을수 있다.

7개의 호동으로 된 온탕원의 매 방(총 28개방)에는 치료실, 침실 등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종합봉사건물에는 화면반주음악실과 연회장, 당구장을 비롯한 각종 봉사시설들이 꾸려져있다.

온탕원의 정원가까이에 있는 호수가에서 잉어, 숭어를 직접 낚아 맛있는 료리들도 해먹을수 있다. 온탕원에서 맛볼수 있는 조선서해대합조개불고기는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령남배수리공장 2호도크



령남배수리공장에 현대적으로 일떠선 배수리기지이다.

수만t급배 여러척을 동시에 수리할수 있을뿐아니라 운영을 콤퓨터화한 대형도크가 새로 건설됨으로써 배수리능력이 훨씬 높아졌다. 여러개의 수리부두와 종합수리직장, 수백세대의 살림집 등 많은 대상들도 동시에 건설되였다.

집체같은 대형짐배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도크와 수리시설들, 조종실, 전망대, 풍력발전기 등을 볼수 있다.




남포육아원



주체84(1995)년 10월에 개원한 남포육아원에서는 남포시안의 세쌍둥이들과 어머니가 없거나 부모들이 장기환자인 4살까지의 어린이들을 키우고있다.

주체93(2004)년에 개건되였다. 3층으로 된 육아원에는 해빛쪼임칸과 호실들, 지능놀이실, 종합놀이장 등이 있다.




청산협동농장



청산협동농장은 평양에서 28km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있다.

청산리는 벼를 비롯한 알곡을 재배하는 농업생산기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49(1960)년 2월 이곳을 현지지도하시면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창조하시였다.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은 조선로동당의 전통으로 되여있는 혁명적군중로선을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현실에 맞게 구체화하고 발전시킨 대중지도사상, 대중지도방법이다.

청산리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이곳을 사회주의농촌의 본보기농장으로 전변시키신 령도업적이 깃들어있는 뜻깊은 곳이다.




김응서집



남포시 룡강군 애원리에 있는 이 집은 김응서가 1564년에 출생하여 20살까지 살던 집이다.

김응서(1564-1624)는 임진조국전쟁시기의 애국명장이였다. 1592년 왜적들이 평양성을 일시 강점하자 그는 부대를 지휘하여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바치였다. 원상그대로 보존되여있는 집은 본채와 부속건물, 1791년에 세운 충렬문, 1819년에 세운 충렬사 등으로 되여있다. 충렬사는 김응서와 그 조상들의 제를 지내던 사당이다. 충렬사에서 100m정도 올라가면 휴식터가 있는데 야외식사를 하기에 맞춤한 장소이다.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해주지구



《조선의 오늘》




서부지역





해주지구

조선서해의 해주만기슭에 자리잡고있는 해주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광지구이다.

이 지구에는 서부벌방지대의 《계곡미의 녀왕》으로 알려진 장수산과 같은 명산들이 있으며 부용당, 수양산성, 해주석빙고, 해주5층탑 등 력사유적들이 적지 않게 보존되여있다.

신천박물관을 비롯한 참관지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손꼽히는 명승구는 석담구곡과 바다에 솟아있는 형제섬이다.




해주시

황해남도의 도소재지이며 조선서해의 주요항구도시이다.

해주시 면적의 90%이상이 200m미만의 구릉 및 벌지역이다. 상업 및 소비도시였던 해주시는 오늘 현대적인 항구문화도시로 발전하였다.

해주항은 예로부터 평양, 개성 등 국내의 주요도시들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을 발전시켜온 력사가 오랜 무역항이다. 시에는 10여개의 대학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교육기관들과 문화기관, 체육기관, 보건기관들이 있으며 공원과 유원지 등 봉사시설들도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또한 부용당, 사미정, 해주성개측비 등 력사유적들이 보존되여있다. 예로부터 해주배가 유명하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거리는 140km이며 년평균기온은 14. 7℃, 년평균강수량은 1 147. 5mm이다.




장수산



황해남도 재령군과 신원군의 경계에 있다.

예로부터 이 산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좋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오래오래 살았다고 하여 장수산(해발 747m)이라 이름지었다.

《황해금강》으로 불리우는 아름다운 산으로서 선조들은 《장수산은 서부벌방지대에 혜성같이 나타난 계곡미의 녀왕》이라고 하였다.

제일 높은 봉은 환희봉이며 동서길이 10km, 북남길이 8km이다. 장수산유원지는 열두굽이계곡으로 이루어졌다.

계곡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명소들과 천연기념물들이 재미나는 전설들과 어울리고있어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여섯굽이에 있는 300년수는 건강장수에 특효가 있을뿐아니라 예로부터 조선력사에 이름을 남긴 고구려 고국원왕, 장수왕, 황희장군 등 왕들과 명장들이 마신 소문난 약샘이라고 한다. 장수산에는 산성과 현암사, 묘음사와 같은 력사유적들도 보존되여있다.

또한 희귀한 식물들과 여러 종의 동물들이 있는데 특히 꿩이 많아 예로부터 일명 《치악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장수산의 제일 아름다운 계절은 서리꽃핀 겨울철이다.




수양산



해주시와 신원군의 경계에 있다.

해발 946m로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설류봉, 장대봉을 비롯한 우아한 산봉우리들이 솟아있어 더 높아보인다. 동서길이 12km, 북남길이 10km이다.

산의 남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암절벽들이 천태만상의 산악풍치를 펼치고있다. 폭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수양산폭포가 유명하다.

또한 수양산성을 비롯하여 해주석빙고, 해주5층탑 등 력사유적들이 있다.




석담구곡



해주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석담천의 중류에 있다.

돌못과 아홉골짜기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산꼭대기의 큰 바위가 갓처럼 생겼다 하여 관암(1곡), 온 바위가 꽃으로 덮인다 하여 화암(2곡),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우에 록음이 우거진다 하여 취병(3곡), 늙은 소나무들이 벼랑우에 우거진다 하여 송애(4곡), 구곡의 으뜸이라 하여 은병(5곡), 약 1km 올라가면 맑은 물이 흰 모래우를 흘러 벼랑으로 떨어져 고인 넓고 깊은 못인 천연의 낚시터가 있다 하여 조협(6곡), 기암이 절벽을 이루고 가을이면 온 골짜기가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진다 하여 풍암(7곡),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거문고소리같다 하여 금탄(8곡), 주위가 고요하여 글읽기 좋은 곳이라 하여 문산(9곡) 이렇게 석담구곡은 저저마다 독특한 미를 자랑하는 아홉골짜기로 이루어졌다.

은병(5곡)에는 조선봉건왕조시기 교육기관이였던 소현서원 등 옛 건물들이 자리잡고있어 이곳의 품위를 한결 돋구어준다.

석담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수양산성



예로부터 황해도 3대산성의 하나로 일러오는 고구려시기 산성이다.

서쪽에 높이 솟은 장대봉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련결한 큰 산성이다. 성벽은 대부분 바위우에 쌓았는데 평균높이가 6~7m이다. 산성의 동, 성, 남, 북에 각각 문이 있는데 남문 가까이 성벽의 너비는 14m나 된다. 장대터와 많은 집터들이 보존되여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업적이 깃들어있다. 오늘 수양산성은 명승지로 훌륭히 꾸려져 문화휴식터로 널리 리용되고있다.

성안에 유명한 수양산폭포가 있다.




수양산폭포



수양산성안에 있다.

사계절 경치가 뛰여난 장쾌한 폭포(높이 128m)로서 해주8경의 하나로 일러온다. 폭포는 2단으로 흐르는데 중간에 넓다란 바위와 깊은 소가 있다.




해주석빙고

해주시 옥계동 수양산기슭에 있다.

고려초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돌로 만든것이다. 화강석을 다듬어 남북으로 길게 무지개형으로 쌓은 다음 흙과 석회를 다져서 덮고 그우에 잔디를 입혔다. 지금의것은 1735년에 보수한것이다. 길이는 28. 3m이며 높이는 약 6m, 너비는 5m이다.




해주5층탑

해주시 옥계동 수양산기슭에 있는 고려시기 돌탑이다.

2층으로 된 기단우에 탑몸을 올려쌓고 탑머리를 놓은 정방형평면의 화강석탑이다. 지붕돌의 네귀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가까이에 해주석빙고와 고려시기에 지은 사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소현서원



석담구곡의 5번째 골짜기인 은병에 있는 조선봉건왕조시기 사립교육기관이다.

조선봉건왕조중엽의 유학자 리이(1536-1584년)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저술사업을 하던 건물인데 후에 서원으로 꾸리였다. 선행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던 사당집인 정묘와 강의를 하던 청계당이 있다. 청계당에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수군을 이끌고 왜적을 쳐물리치는데서 위훈을 세운 리순신(1548-1598년)장군이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연구하였다는 력사적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조선전쟁시기 파괴된것을 전후에 옛 모습그대로 복구한 조선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부용당



해주시 부용동에 있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루정이다.

1500년에 련못북쪽언덕가에 루정 한채가 있었는데 련꽃(부용)같은 루정이라는 뜻에서 부용당이라 불렀다.

1526년 물속에 26개의 기둥을 박고 정각을 한채 더 짓고 련못가의 루정과 다리로 련결시켰다. 못가와 못안의 루정이 하나로 이어진 아름다운 자태를 물우에 그림자로 비치던 부용당은 《련당청우》(련못루정에서 비오는 소리를 듣는것을 즐기는 일)로 유명하였다.

조선전쟁시기 파괴된것을 원상그대로 복구하였다. 여기에는 흥미있는 전설도 깃들어있다.




계남목장



황해남도 신원군 계남리에 위치하고있다.

계곡이 많다고 하여 계남리라고 부르는 곳에 자리잡고있는 젖과 고기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목장이다.

석담구곡에서 목장까지 20km이다. 15정보의 부지면적에 4개의 분장으로 이루어진 목장에서는 젖소, 돼지, 염소, 토끼 등을 방목하고있다.

목장의 매 분장에 있는 젖가공실들에서는 치즈, 빠다, 케피르, 요그르트 등을 생상하고있다. 목장은 특색있는 살림집들이 아담하게 늘어서있어 풍치가 좋다.




신천박물관

신천군 소재지에 있다. 조선전쟁시기 미군이 감행한 야수적학살말행자료들이 전시되여있다.

박물관부근에는 미제의 죄행을 고발하는 5 605명 애국자묘와 원한의 밤나무골, 화약창고, 화약창고에서 학살된 사백어머니묘와 백둘어린이묘가 있다.




형제섬

해주시 중심에서 서남쪽으로 9km 가면 바다가 시작되는데 배를 타고 또 6km정도 가면 자그마한 두개의 바위섬이 있다. 이것이 형제섬이다.

조선서해는 밀물과 썰물차이가 심하므로 형제섬에 이르러 조금 있으면 주변바다가 무연한 백사장으로 변한다. 이때 백사장과 군데군데 이루어진 《호수》들에서 미역도 감고 일광욕도 하면서 조개나 게잡이를 할수 있다.

밀물때가 되면 배를 타고 부두로 돌아온다.




해주다라니석당



해주시 해청동에 있는 고려시기 석당이다.

다라니석당이란 불교경전인《다리니경문》을 기둥곁면에 새겨서 세운 절의 돌시설물이다. 받침돌의 둘레에 탐스러운 꽃잎이 아름답게 새겨져있다.

해주다라니석당은 날씬하면서도 장중한 감을 준다.




해주려관(4급)



해주시 영광동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연회장과 안마실을 비롯한 여러 봉사시설들이 갖추어져있으며 식당에서는 해주교반과 서해수산물료리(해삼, 생복, 광어, 피조개, 바스레기, 대합 등)를 기본으로 한다.

방수:21개(1등실 2개, 2등실 2개, 3등실 17개)

Spiritual Life Takes Courage - Jack Kornfield

Spiritual Life Takes Courage - Jack Kornfield



Spiritual Life Takes Courage

Equanimity is not indifference, and compassion is not pity. True spirituality  requires us to be fully present for life. For us to begin to look directly at the world situation is not a question of ceremony or of religion. Meditation helps us to look deeply at the sorrow that exists now in our world, and to look at our individual and collective relationship to it, to bear witness to it, to acknowledge it instead of running away. Without mindfulness and compassion the suffering is too great to bear. We close our minds. We close our eyes and our hearts.
Yet opening ourselves to all aspects of experience is necessary if we want to make a difference. To look at the world honestly, unflinchingly, and directly requires us to also look at ourselves. We discover that sorrow and pain are not just out there, external, but are also within ourselves. We have our own fear, prejudice, hatred, desire, neurosis, and anxiety. It is our own sorrow. In opening ourselves to suffering, we discover the great heart of compassion.
In the heart of each of us, a potential exists for experiencing this compassion and wholeness. The problem is that we becomes so busy and lost in our own thinking that we lose connection with our true nature. When we reconnect with our wholeness, our being naturally expresses itself both in meditation and through sharing ourselves with others.
I spend most of my time teaching meditation. Years ago, when many thousands of Cambodian people were fleeing violence in their homeland only to face starvation and disease in refugee camps in Thailand, something in me said, “I’ve got to go there,” and so I went. I knew the people and a few of the local languages. After being there trying to assist, I returned to this country to guide intensive meditation retreats. I did not deliberate much at the time about whether or not I should go to work in the refugee camps. I felt that it had to be done, and I went and did it. It was immediate and personal.
In year following I have done work in Palestine and Burma, in prisons and local hospitals, and with kids in street gangs. This is what I have been called to do alongside my meditation teaching. This has been my way. But it is not right for everyone. Some monks spend their lives in caves in the Himalayas ceaselessly radiating compassion for the world. Others run orphanages for children whose parents have died of AIDS. Which is the right way? The spiritual path does not present us with a prescribed, pat formula for everyone to follow. It is not a matter of imitation. We cannot be Mother Teresa or Gandhi or the Buddha. We have to be ourselves. We must discover and connect with our unique expression of the truth. We must learn to listen to and trust ourselves.
This excerpt is taken from the book, “Bringing Home the Dharma: Awakening Right Where You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