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0

The Four Feathers (2002 film)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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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r Feathers (2002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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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r Feathers
The Four Feathers 2002 movie.jpg
Theatrical release poster
Directed byShekhar Kapur
Screenplay byMichael Schiffer
Hossein Amini
Based onThe Four Feathers
1902 novel
by A. E. W. Mason
Produced byPaul Feldsher
Robert Jaffe
Stanley R. Jaffe
Marty Katz
StarringHeath Ledger
Wes Bentley
Kate Hudson
Djimon Hounsou
Michael Sheen
CinematographyRobert Richardson
Edited bySteven Rosenblum
Music byJames Horner
Production
companies
Miramax Films
Jaffilms[1]
High Command Productions Ltd.[1]
Distributed byParamount Pictures
(United States)
Buena Vista International (International)[2][note 1]
Release date
  • 20 September 2002
Running time
130 minutes
125 minutes (TIFF)
CountriesUnited States
United Kingdom
India
LanguageEnglish
Budget$35 million[3]
Box office$29 million

The Four Feathers is a 2002 war drama film directed by Shekhar Kapur and starring Heath LedgerWes BentleyDjimon Hounsou and Kate Hudson. Set during the British Army's Gordon Relief Expedition (late 1884 to early 1885) in Sudan, it tells the story of a young man accused of cowardice. This film, with altered plot events, is the latest in a long line of cinematic adaptations of the 1902 novel The Four Feathers by A.E.W. Mason. Other versions of the story have been set in the 1890s, with different battle events.

Plot[edit source]

Harry Faversham, a young British officer completing his training, celebrates his engagement to Ethne, in a ball with his fellow officers and father. When the Colonel announces that the regiment is being dispatched to Egyptian-ruled Sudan to rescue the British General Charles "Chinese" Gordon, young Faversham has serious ethical reservations about the war, and resigns his commission. Harry's father disowns him. Perceiving his resignation as cowardice, three of his friends and his fiancée each give him a white feather, the symbol of cowardice. Ethne breaks off their engagement.

Harry learns that his best friend Jack and his former regiment have come under attack by rebels. Undertaking the perilous journey into the Sudan alone, he strikes up an alliance with Abou Fatma, a mercenary warrior. Harry disguises himself as an Arab. Harry and Abou Fatma follow a group of army workers he believes to be Mahdi spies, and reach the garrison of Abu-Klea, which they realise has been overrun. Harry begs Abou Fatma to warn his friends that their destination is under siege and an attack is likely.

The regiment stopped its march to bury a group of British killed by the Mahdi. Abou Fatma is captured by Egyptian soldiers; believing he is an enemy scout, they bring him before the British officers. He tells the British that he has been sent by a British officer to warn them of the Mahdi's attack. He says that Muslims always bury their dead and that of the enemy, but that these bodies have been left to keep the British occupied. Faversham's comrades are worried, but ultimately they disregard Abou Fatma's warnings and he is flogged as a suspected spy.

The British and Egyptian troops are not prepared for battle. The Mahdi rebels attack with spearmen, riflemen and cavalry, while the British forces form a defensive square. Firing volley after volley, the British repel the initial Mahdi assault just as they spot British cavalry reinforcements in their distinctive red uniforms. A force of skirmishers is sent to pursue the retreating Sudanese, but they are ambushed by Mahdi rebels and forced to fight on foot. Soon the British discover that the cavalry who they thought were reinforcements are Sudanese disguised in British uniforms. Among them is Faversham. The British square reorganises and fires a few volleys, in the process killing several skirmishers who have not yet returned to the square, including Edward Castleton, who had earlier given Harry a feather. Jack attempts to rescue Castleton in the process but is blinded when his rifle misfires. The British issue an order for retreat.

Harry finds Jack during the battle and protects him after he was blinded. Harry finds letters from Ethne to Jack, but cares for his friend without identifying himself. Never knowing his rescuer, Jack is transported to England. He asks Ethne to marry him, but she does not answer and discusses it with Harry's father.

Tom, another officer, arrives to tell Jack that Harry had visited him in Sudan. During the encounter, Harry confirms that he had sent Abou to alert the British of the Mahdi attack, and is bitter that his friends ignored the warning. Abou tells Harry that he believes Trench lives on in the notorious Mahdi prison of Omdurman. Upon learning this, Harry says he is determined to rescue him. Abou advises Harry against this venture, which is all but certain to lead to his death. Undeterred, Harry allows himself to be captured and imprisoned at Obdurman.

In the prison, Harry finds Trench. They suffer greatly as they are starved and subjected to hard labor. After a failed escape attempt, they concede the hopelessness of their situation. Later Abou rescues Harry and Trench by giving them a poison to fake their deaths. A suspicious guard follows the removal of the bodies, along with three other guards. Harry and Abou kill the four. Abou returns to the desert, and Harry escorts Trench back to Britain. Harry is acknowledged by his father and Ethne reclaims her feather, as Harry has proven his bravery. She has become engaged to Jack.

Jack learns that Harry was his rescuer when he happens to touch his face; he releases Ethne from their engagement. After a ceremony of remembrance, Harry and Ethne hold hands and are engaged again.

Cast[edit source]

Production[edit source]

Three supporting artists were injured in an accident on set during filming in Greenwich.[4]

Release[edit source]

The film opened in North American cinemas on 20 September 2002 and grossed $6,857,879 in its opening weekend, making number 5 at the US box office. The Four Feathers ended up making $29.8 million worldwide, failing to bring back its $35 million budget.[5]

In 2003, it was issued as a Special Collector's edition on DVD. ISBN 0-792-18961-2

Reception[edit source]

The film received mixed reviews from critics. On the review aggregator website Rotten Tomatoes, the film holds a 41% approval rating, based on 150 reviews, with an average rating of 5.39/10. The website's consensus reads, "Though beautiful to look at, The Four Feathers lacks epic excitement and suffers from an ambivalent viewpoint."[6]

See also[edit source]

Footnotes[edit source]

  1. ^ Since the acquisition of Miramax by ViacomCBS, Paramount owns the worldwide rights to the movie.

References[edit source]

External links[edit source]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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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이 글은 몇 년 전, 강원 원주시에서 있었던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현판식 기념 강연 내용을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

제가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때 집사람이 80년부터 사북(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83년에는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부론중학교, 85년에는 원주 시내에 있는 학성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그때부터 저도 자연스럽게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5월 광주항쟁(1980년)을 겪었습니다. 그 때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단 사령부 벙커에서 연락 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사단장님이 출근하면 그 전날부터 새벽까지 일어난 일을 브리핑하는 게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나오는 커다란 지도(地圖) 앞에 서서 2미터 넘는 지시봉을 들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날짜별 시간대별로 브리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81년 6월말에 제대(除隊)를 하고 나오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우리 국군이 정반대로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부터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을 학살하는 군대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81년 9월부터 전북 익산시에 있는 원불교중앙총부에서 처음으로 교역(敎役)에 임했지만 마음은 늘 “왜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나는 그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82년부터 ‘삼동야학(三同夜學)’이란 야학교를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야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학운동을 하면서 80년 5월의 광주학살의 문제는 어떤 개인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및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광주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야학운동을 병행하면서 1983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원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어 83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東學)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1986년 봄에 연구자 중에서는 최초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에 대한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도중이었는데요.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교로 계셨던 최성현 선생(<<좁쌀 한 알>>의 저자)으로부터 우연히 해월 선생과 동학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하시는 도사님 한 분이 강원도 원주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사회를 변혁(變革)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두들 동학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에 대해서만 주목하던 시절이었는데, 해월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도사님이 계신다니 저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사님 소식은 접했지만 어떻게 연락드릴 길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기억해 두고는 그만 몇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주에 내려갔더니 집사람이 무위당 선생님께서 참여하고 계신 어떤 모임에서 나온 소식지를 가져와 보여주더군요. 그때 저는 “아 그렇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염원하면 서로서로 기운이 통하여 만나게 되는 수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소식지를 보고 바로 연락을 드린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때 무위당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해 주신 분이 당시 강원도 원주시에서 ‘천하태평’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계셨던 선종원 선생님이셨습니다. 선 선생님을 통해 연락을 드리니 “어디어디로 나와라”하는 연락이 바로 왔습니다. 약속한 날, 약속된 장소로 나갔더니 박준길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미리 와 계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C도로 근처 2층 횟집으로 기억되는 데요. 생선회를 진수성찬으로 차려 놓고 미리 오셔서 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처음 뵌 순간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물으셨던 첫 질문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얘 맹수야! 넌 다른 놈들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되었냐?” 이 질문을 몇 번이고 저에게 물으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놈이 그때의 시류(時流)와는 다르게 해월 선생을 연구한다는 말씀에 대단히 기분이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가 선생님 앞에서 말이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를 서너 시간 가량을 떠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다 들어주셨던 것이 저 뇌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고, 바로 그것이 선생님에게 사로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이렇게 선생님과 인연이 돼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원주에 내려오면 반드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해월 선생에 대한 연구만 했지, 사실은 군대 안에서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덩어리’ 그 자체였어요. 무엇이고 만나면 온통 다 태워버릴 기세의 ‘불덩어리’말입니다. 작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더 큰 폭력으로 민중을 압살하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근본적으로 엎어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원생 신분이었는데도 굵직굵직한 시위나 정치적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어요. 그런 저를 보실 때마다 선생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주셨던 말씀이 “전두환을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 말씀이셨어요. 군대 안에서 광주의 비극을 직접 겪었던 제가 어찌 전두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니,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그렇게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과는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만 반대 방향으로만 달려갔습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수원과 익산 등지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데모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천사태’ 당시에도 가두시위에 참가했고,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을 결성하여 활동했습니다. 198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노조 발기인이 되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어서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데모를 주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학원에서 저의 목을 조여 오는데, 처음에는 지도교수를 바꾸라 하더군요. 지도교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바꾸는 것은 대학원 규정에 없어 못 바꾸겠다고 했더니, 그럼 자퇴해라 그러더군요. 제가 어용교수로 지목했던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부임하여 그런 압박을 가해 오니 어쩔 수 없이 자퇴를 결심하고 가슴에 벌겋게 불이 난 상태로 원주로 내려 왔습니다. 그때 저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시험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고, 데모 주동자라는 낙인 때문에 시간 강사 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시절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간행된『조선전사』보급 책임을 맡아 연구자들에게 보급했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안기부 수배 리스트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 저에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혁명가의 로망(낭만)’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난을 한 점 쳐 주셨어요. “낭만주의자여야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로망(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면서 “내유천지(內有天地)하면 외무소구(外無所求)니라”를 화제(話題)를 써서 주셨어요. “안으로 천지, 즉 온 우주를 가지고 있으면 밖으로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느니라.” 네 안에 바른 중심만 서 있으면 바깥 일이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당시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저에 대한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화제가 쓰인 난 한 점을 주시면서 “절대로 니가 먼저 자퇴하지 마라, 버틸 때까지 버텨라” 하시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퇴하지 않고 10년을 버티었습니다. 10년을 버틴 끝에 박사 과정에 입학한지 꼭 10년째 되던 1996년에 가까스로 해월 선생님에 관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나간 80년대를 돌이켜 보면, 무위당 선생님께서 계시지 아니했더라면 저의 동학 공부는 진즉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선생님의 뜨거운 격려에 힘입어 10년을 버티면서 돈이 조금 생기면 해월 선생 은거지 답사를 계속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원주에 오는 날이면 꼭꼭 선생님을 찾아뵙고 결과 보고를 드리곤 했지요. 그런 과정에서 선생님께서는 수시로 해월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고, 시(侍)에 대한 말씀도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선생님과 저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더욱이 무위당 선생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경륜을 생각할 때 저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 존재였지만, 동학을 좋아하시고 해월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겁도 없이 이것저것 참 많은 질문을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시게 되었습니까?” “한국전쟁 무렵, 여기 원주에 오창세라는 친구가 있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했지”라고 하시면서 그 친구로부터 동학을 알게 되고, 수운과 해월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동학, 천도교 쪽 분들이 ‘민족자주’를 기치로 했던 혁신 정당이었던 근로인민당에 많이 가입했는데, 보도연맹사건 때 억울하게 학살당하셨다고 증언해 주셨어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순간이었지요.

제가 한 30년 동학(東學) 공부를 하긴 했는데요. 아직도 동학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주저주저하곤 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동학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 발과 제 힘,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특정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제 결대로 제대로 사는 것을 지향한 ‘생명사상’, 바로 그것이 동학의 진정한 면모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창도(創道) 당초부터 제 힘으로,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을 지향했기에, 동학이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한결같이 ‘민족자주’를 고민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죠. 바로 이것 때문에 동학은 외세(外勢) 및 그 외세와 결탁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합니다. 오창세라는 분도 그런 가운데 희생되신 분이지요.

강원도 원주는 해월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땅입니다. 두 군데 유적이 있는데, 1898년 6월에 체포되신 호저면 송골이라는 곳과 1890년대 후반 몇 개월간 은신해 계셨던 수레너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레너미는 원주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버려 갈 수가 없습니다. 횡성에서 안흥을 거쳐 들어가는 길만 있어요. 어느 날 제가, 횡성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수레너미까지 답사를 간 적이 있었어요. 답사를 마친 뒤 선생님을 뵙고 산세가 이렇고 저렇고 라고 말씀드렸더니 “앞으로 거기다가 한살림 수련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호저 송골에 해월 선생님 추모비를 세울 적에는 원주에서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치악동우회’ 회원들의 합력이 컸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경남 하동에서 올라온 해월 선생님 후손인 도예가 최정간 선생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 묘비 제막식



이렇게 무위당 선생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출범한 ‘한살림’이 서울로 올라가고(박재일 회장님이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린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 쪽으로는 ‘한살림모임’의 주도로『한살림선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뵈오니,『한살림선언』이라는 작은 책자 한 권을 주시면서 “이것 공부해라. 네 생각이랑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살림모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살림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는 꿈에도 그리던 김지하 시인을 비롯하여, 박재일 회장님, 김민기 선배님, 최혜성 선생님, 서정록 선생, 윤형근 선생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돈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인 김지하’님께 몇 번이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인 김지하’ 선생님에게 밥 얻어먹은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시절 그다지도 염치가 없었던 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저는 지금도『한살림선언』을 처음으로 접했던 순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이란 무어라고 할까, 제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바로『한살림선언』을 처음 접했던 순간입니다. 저의 인식의 대전환은 무위당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결정적인 대전환은 바로『한살림선언』을 손에 넣고 읽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언을 읽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동학이 바로 이거야”였습니다. “동학이 바로 이거야”란 동학이 새롭게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한살림선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한살림선언)이 해월 선생께서 38년 동안 조선팔도를 전전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알려주고, 깨우쳐주시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게 무위당 선생님께서 평생토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했던 바로 그 (생명)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에 제가 그대로『한살림선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 내가 미친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선배와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금 생존해 계신 진보적 역사학자로 유명하신, 상지대 총장님도 역임하셨던 강만길 교수님께 어느 학회 모임에서 1893년 보은취회에서 해월 선생님이 하신 역할을 얘기했다가 엄청 얻어맞은 적이 있었어요. “역사학은 학문의 골키퍼인데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라면서 저를 엄청나게 꾸짖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강만길 선생님은 당시만 해도 역사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문제,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계셨죠. 그런 선생님 앞에서 전봉준 대신에 해월 선생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사상과 정신 문제를 말했으니 혼이 날 법했죠. 그런 강 선생님도 지금은 완전 달라지셨지요. 그리고 1998년 1월에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札幌市)에서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따뜻하게 저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여튼 사회경제적 문제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 내내 저는 학회에서 ‘미친 놈 아니면 조금 모자라는 놈’ 취급을 당했고,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나 해월 선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발언은 언제나 반대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의 벌떼 같은 공격으로 초토화되곤 했었습니다. 그런 삭막한 상황 속에서 해월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신 무위당 선생님을 뵙게 되고, 그리고 동학의 핵심 사상을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해 낸『한살림선언』을 읽었을 때, “아! 내가 80년 광주학살 이후 그토록 찾고자 했던 동학의 핵심 사상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40여 년에 이르는 해월 선생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고 이렇게 부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하였고,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나사가 몇 개 빠진 모자란 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아 헤매며 해결하고자 했던 주제= 해월 연구가 결단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확신이 들고, 그렇게 확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동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원불교 교단에서 ‘영산원불교대학’이라는 대학을 신설하게 되는데, 저는 그 대학 창립 멤버로 포함되어 강원도 원주를 떠나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때 제가 “영산원불교대학 창립 멤버로 발령이 나서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벌써 소식을 들으시고 “일체중생 하심공경 시수행인 청정심야(一切衆生 下心恭敬 是修行人 淸淨心也)”라는『육조단경』말씀을 화제(話題)로 써서 주시더라구요. 이 글이 어디에 나오는 글귀이고 너에게 왜 준다는 그런 내용이 담긴 편지까지 미리 써서 준비해 두셨더라구요. “모든 중생(사람 뿐 아니라 벌레 한 마리와 같은 미물 곤충까지도 포함)을 하심(下心)을 해서 늘 공경을 해야 그게 종교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니가 이 경구대로만 살면 아마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후학(後學)을 기르기 위해 떠나는 저에게 무한한 신뢰와 격려를 실어 주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큰 사랑을 입은 저로서는 이 경구가 영원한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학살 이후에 동학, 그 중에서도 해월 선생님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무위당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원불교라는 신생종교의 교역자 신분의 종교인이지만 ‘혁명’을 하고 싶었고, ‘혁명’을 하면서도 종교적인 심성, 영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자 고민이었어요.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제 삶으로 통합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해월 선생님 연구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다시 무위당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두 분 모두 영성과 혁명을 탁월하게 통합한 어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박사 논문에서 해월 선생님이 바로 혁명과 영성을 통합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아무도 인정해 주시지 않습디다. 박사논문 심사를 받을 당시에는 관련 기록이 김구 선생님 자서전인『백범일지』에만 나왔기 때문이예요. 전봉준 장군(혁명)과 해월 선생(영성)이 손을 잡고 혁명을 하는 기록이 백범 선생님 자서전에서만 나오니 심사위원들께서 근거가 약하다며 인정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하고 있다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일본 측 자료를 널리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한국 학자로서는 최초로요. 4년 동안 일본 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찾아보니 해월 선생께서 전봉준 장군과 협력하여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1차 사료(史料)들이 10여 개 이상 나오더군요. 두 분이 비밀 연락 루트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구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결론을 얻었냐 하면, 동학혁명 당시에 영성과 혁명이 통일되어 있던 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시고, 그런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해월 선생님을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의 참 모습, 즉 영성과 혁명을 당신의 인격 안에 온전히 통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본어로 써서,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여 일본 교수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평생의 화두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1년 4월에 일본어 박사 논문을 들고 귀국하자마자 원주로 편지를 드리고, 다음 해 5월에 무위당 선생님 묘소에 논문을 올리고, 그리고 술 한 잔을 올리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지난 1백 년의 비참했던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회한과 슬픔, 분노의 눈물인 동시에, 제 인생 전체를 걸고 고투했던 화두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해월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님의 크신 가르침과 삶의 모범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온통 어우러진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생전의 무위당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언제나 100년 전의 해월 선생님께서 부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해월과 무위당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라 늘 한 분이셨어요. 100년 전의 무위당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현재의 해월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이셨지요. 그런데 그 두 분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풀뿌리 민초(民草)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무한한 관심 그 자체 말입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봉산동에 있는 댁을 나오셔서 시내로 오는 길은 천천히 걸어야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두 시간 넘게 걸려서 시내로 나오시곤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두 시간 동안 내내 걸어 나오시는 동안 길거리에서 좌판 장수를 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시고, 리어카 끌고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와도 장사 이야기 나누시느라 그러셨다지요.








해월 최시형



100여 전의 해월 선생님도 무위당 선생님처럼 민초들에 대한 시선이 똑 같았어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소개하지요. 해월 선생님 제자 중에 서장옥(徐璋玉)이라는 이가 있어요. 서인주(徐仁周)라고도 합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서장옥은 의협심이 대단히 강해서 불의(不義)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도 약간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아요. 그런 서장옥의 눈에 동학(東學)을 ‘한다’는 죄목 때문에 동지들이 무수하게 잡혀가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참다참다 못해 항의를 하다가 관에 잡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 때가 1880년대 말엽 아니면 1890년대 초엽의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해월 선생께서도 신변이 위태로워져서 강원도에서 충청도 쪽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종일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밤이 되어 어느 이름 모를 주막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졌는데도 해월 선생께서 주무시지를 않습니다. 옆에 모시고 있던 제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쭙습니다. “종일 비를 맞으셔서 감기가 들지도 모르고 피곤도 하실 텐데 왜 주무시지 않습니까?” “장옥이가 지금 동지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데, 내가 어찌 이만한 일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편한 잠을 잘 수 있겠느냐”하면서 꼬박 밤을 지새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가슴 찡한 이야기 아닌가요. 해월 선생께서는 또 “내가 젊었을 때 남의 집 머슴살이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머슴 놈, 머슴 놈’ 하면서 멸시를 하곤 했을 때 참 가슴이 많이 아팠느니라.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너희들은 사람 모시기를 하늘님 모시듯이 해야 한다”고 평생토록 강조하셨다고 익산 출신 동학 접주이자 해월 선생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지영 선생이『동학사』에다 써 놓았습니다. 이 모두 해월 선생님 역시 민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자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꿈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팔도(八道)가 마음 을 합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義)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塗炭)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기로써 맹서(盟誓)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 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太 平聖代)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위 내용은 문맹률이 80-90%가 넘던 시절인 갑오년(1894) 음력 3월 20일경에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걸고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팔도를 향해 포고(布告)한「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꿈이 너무나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동학군들이 어찌 폭도(暴徒)요 비도(匪徒)란 말입니까? 저는 바로 이런 민초들의 모습을 가장 절절하게 이해하시고, 가장 깊게 사랑하신 분들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무위당 선생님이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칼럼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 동양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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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칼럼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7.18 19:05

김양식 청주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김양식 청주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동양일보]최근 우리 사회의 큰 이슈 가운데 하나는 1894년 9월 이후 전개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할 것을 요구하는 관련 단체와 개인들의 움직임이다. 현재 일부 인사들이 국회와 보훈처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가 하면, 전국의 여러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에서도 해당 보훈지청 앞에서 시위를 하거나 현수막을 게시하여 정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국가에서 정한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한 마디로 충분한 법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현행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독립유공자는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분들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은 실제 1894년 6월 경복궁 무력점령부터 시작되므로, 그에 맞서 9월에 총봉기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국가에서 정한 독립유공자로서 예우를 받을 법적인 정당성과 자격이 있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 1894년 9월 이후 충북 옥천에 머물던 최시형 등이 총지휘한 동학농민혁명은 전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항일의병전쟁’이었다. 동학농민군 스스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기를 든 의병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1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과 피비린내는 전투를 벌여 수십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동학농민군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의로운 죽음으로 시작된 일본제국의 조선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동학농민군은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것은 역사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역사상과 법적인 해석의 문제이다.

현행 국사 교과서에 기술된 근대 역사상은 개화파와 의병 중심의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화운동은 무조건 높이 평가하는 반면, 사회 혁신을 통한 자주적 근대국가를 지향한 동학농민혁명은 평가절하되고 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선 독립운동의 시작도 1895년 을미의병으로 보기에, 동학농민군의 항일의병전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전근대적 사고로 일제와 싸운 의병은 독립유공자로 예우를 받는 반면, 동학농민군은 자주적 근대국가를 세워나가는 역사의 여정에서 외면받은 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상과 법적 적용은 20세기 식민지 트라우마와 컴프렉스에 빠진 역사상이자 시대 착오적인 고정관념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진정한 독립은 무엇인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부자유와 불평등으로부터의 인권 독립이 아닐 수 없다. 3·1운동 당시 그들이 외친 ‘대한 독립 만세’는 일제 지배로부터의 독립 외에 비인간적인 삶으로부터의 독립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독립운동이며, 그래서 3·1운동의 역사적인 가치는 소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신분제와 왕조의 틀 안에 인간을 가둔 봉건악습으로부터의 독립과,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로부터의 자주적 독립을 지향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도 1/4이나 흐른 지금, 20세기 후반에 고착된 고정관념과 법률 적용에서 벗어나야 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운동가로 서훈하는 문제는 단지 그들을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는 차원을 넘어서 근현대 역사상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존재가치를 역사속에서 다시 자리매김하는 의미도 있는 만큼 열린 시각에서 새롭게 접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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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임자의 철학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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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임자의 철학

강주영

2021. 7. 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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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집강소강의록



- 동학 어떻게 읽고 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 임자의 철학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만민편등을 바란 동록개의 꿈이 있는 원평집강소, 지척에 10대의 전녹두와 전창혁 선생이 살던 황새마을이 있고 김필상 그러니까 김덕명 선생이 사시던 원평에서 여러분과 대화를 하게 되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0대 후반 전녹두는 이곳 황새마을에서 봉남으로 글을 배우러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스승에게 글을 그만 배우겠다고 했답니다. 그때 스승이 너는 내 이름도 마을 이름도 잊으라고 했답니다.

난세에 한쪽에서는 동학사상이 자라고 다른 쪽에서는 동학과 무관하게 혁명조직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조직이 서로 다른 경로로 자라고 만나서 1894년의 동학혁명이 났다고 봅니다.

지금 시대의 고통은 1,800년대보다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습니다. 분단, 지구대분할, 기후위기, 코로나 괴질, 디지털 빅브라더, 지역 소멸 방식의 지구자본화, 나라와 나라•사람과 사람의 극심한 빈부 격차, 자본주의형 사람만을 기르는 교육 등은 과연 우리가 지구공동체의 주민인가 의심에 의심이 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철학 또는 사상 동학을 하는 까닭입니다. 철학 또는 사상은 무엇을 정의正意하는 게 아니라 고통과 폭력을 없애는 일입니다.

오늘 동학에 관한 말은 신앙으로서의 동학이 아닌 사상으로서 동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동학의 말씀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중요한 말은 한자를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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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東學은 어떤 사상인가

여러분 동학하면 무슨 말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동학은 사람이 사람답게, 자기통치(줄여서 자치, 지방자치의 자치가 아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살리며 삶을 살아내는 생성生成(기르는)을 하며,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을 물리치자는 사상입니다. 사람답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람은 살리다 살다에서 온 말입니다.

동학은 나를 살림으로서 세상을 살리자는 사상입니다. 동학은 나를 나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지구를 지구답게 하자는 사상입니다.

2. 심학心學과 몸학

해월의 길과 전녹두의 길 이 두 경로가 동경대전 읽기, 동학하기의 바탕이라 생각합니다.

비유하면 해월은 성자요, 전녹두는 혁명가입니다. 해월의 길과 전녹두의 길은 다르지 않습니다. 두 분다 혁명 품은 개벽꾼입니다.

굳이 말하라면 해월은 심학이요. 전녹두는 몸학입니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둘은 서로가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며 보완하는 동이상보同異相輔요. 서로 가르치며 서로 크는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사이입니다.

심학心學은 마음공부, 마음 수련을 말합니다. 몸학은 생성生成과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흔히들 믾은 분들이 동학은 기氣

주체 심학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현대 최신 양자역학과 생물학에 의하면 마음과 몸은 따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몸은 마음의 거처요, 마음은 몸의 생령生靈이요, 몸의 기운입니다. 마음이 거처를 잃고 떠돌면 떠도는 유령이나 도깨비불이 됩니다. 마음은 곧 기이도 한데 마음 또는 기운이 거처를 잃으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릅니다.

3. 생성生成과 조화정造化定

동학에는 조화정과 불연기연不然其然이 있습니다. 저는 불연기연을 뭣뭣다움너머(불연, 원평다움너머, 사람다움너머), 뭣뭣다움(기연, 원평다움, 사람다움)이라고 풉니다. 여기서는 기연이요, 저기서는 불연입니다. 생성은 기연과 불연이 갈아드는 과정입니다.

동학사상가 이돈화는 불연기연을 '반대일치의 논리'라고 하였고 김지하는 '아니다', '그렇다'의 '혼돈'과 '질서' 카오스모스 Chaosmos라고 하였습니다. 코스모스는 cosmos 질서가 가득한 우주입니다. 카오스모스와 코스모스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질서와 혼돈의 평형 상태가 사물 또는 생명이고 이 평형이 깨지면 사물 또는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이 차원이동을 사람들은 진화進化•진보進步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귀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귀하기에 진화진보는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닙니다.

차원 이동은 이쪽에서는 죽음과 파괴요(불연), 저쪽에서는 생성과 자람입니다.(기연) 동학의 말로는 이천식천以天食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입니다.

4. 생성과 창발創發 - 엔트로피entropy와 진보

물리학 복잡계이론은 차원이동을 '창발'이라고 합니다. 창발은 창조와 달리 과거로부터 온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창발적 진화'創發的進化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명은 단백질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생명은 단백질에서 온 것은 맞지만 생명과 단백질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단백질 50조 개(우리 몸 세포 수)의 합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부분들의 단순 합이 아닙니다.

거처 잃은 마음, 기운을 서양말로 하면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무질서도)라고 합니다. 동학은 이것을 혼원지기(渾元之氣)라고 합니다. 혼원지기 또는 엔트로피는 같은 계, 고립계에서는 무질서도이지만 열린계(지구와 태양)에서는 쓸모 있는 기운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나무도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전체를 하나의 고립계로 보면 엔트로피, 혼원지기는 증가하기 때문에 멸망은 필연의 일이 됩니다.

엔트로피법칙은 진화•진보의 끝은 멸망이기에 진화•진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보'라는 관념이 지구와 사람을 망치는 폭력입니다. 진보의 다른 이름은 우승열패 약육강식입니다.

5. 기氣, 이치理致, 접신강령接神降靈

기란 우리 말로 하면 숨, 기운 서양 말로 하면 에너지입니다. 동학에서는 혼원지기, 기 이렇게들 말합니다. 이 기가 움직이는 것을 '이치'라고 합니다. 동학에서는 그 이치를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道라고 합니다. 기가 무위이화의 이치로 움직이는 것을 '기화'氣化 또는 "기화지신' 氣化之神이라고 합니다. 이 기화가 어느 날 문득 우리가 통찰이라고 부르고, 절집에서는 '한소식 들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얻을 때 '접신강령'했다고 합니다. 접신강령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잡신강령雜神降靈인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 동학이 아닌 개동학도 있습니다. 돈벌이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잡신강령의 대표적인 경우가 민주당 대선주자 9명의 출마선언문입니다. 농사의 농, 기후위기의 기, 생태의 생자 한 마디도 없습니다. 제대로 접신강령한 대표적인 경우는 나락 크는 소리를 듣는다는 여름지기(농사꾼의 우리말)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 사람과 만물을 기르는 생명의 천지부모 지구마음이야말로 접신강령일 것입니다.

6. 산알, 복승(複勝), 주파수

북한의 김봉한이라는 분이 1960년대에 동의학에서 말하는 경락, 즉 기의 실체를 과학적 실험과 관찰로 증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의 원조는 단백질이 아니라 '기'라는 것입니다. 세포를 생성하고 조절하는 기를 김봉한은 '산알'이라 이름했습니다. 산알이 다니는 길이 경락이요, 침자리입니다.

​이 기운의 입자와 파동이 곧 마음입니다. 우리가 빛을 입자와 파동이라고 하잖아요. 엄마의 마음이 아기에게 가면 아기가 방긋 웃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보기만해도 엔돌핀이 납니다. 라디오 주파수가 있습니다. 아기와 엄마, 연인들끼리는 서로 주파수가 맞습니다.

그것을 때맞춤(동기화同期化)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주파수와 나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 동기화하는 것,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것이 곧 심학이요. 몸학입니다. 이 주파수를 맞추는 것, 산알이 움직이는 것은 생성입니다. 생성은 '복승'(複勝)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것은 숨어있는 차원에서 문득 솟아오르는 근원적 우주 생명의 솟음입니다. 김봉한(金鳳漢)의 '산알'입니다. 이것이 동학 주문의 조화정입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면 저와 주파수가 맞아서 당신 마음의 입자는 제 가슴에 꽂히고, 파동은 제 심장을 뒤흔들 것입니다.


7. 동東은 무엇인가?


여기서 동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없습니다. 동은 해동성국할 때의 동이지 서양의 서에 대칭•대립되는 말로 좁혀 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 땅에서 나고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道인즉 천도天道이나 학學인즉 동학東學"이라는 말은 지구와 우주 곳곳에 천도는 있으나 조선에서 천도를 모시는 방법 혹은 체계를 말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우분투ubuntu가 있습니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뜻의 우분투가 남아공의 동학입니다.

세계를 동과 서로 나눌 까닭은 없습니다. 동양, 서양은 없고 지구와 우주만 있습니다. 동학은 서학에 대립하여 생긴 것만은 아닙니디. 그렇다면 지구적 보편성이 없습니다. 그것도 1860년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여건의 특수성에 갇히게 됩니다.

천도란 지구학이자 우주학이며 나의 마음학이요 몸학입니다. 지구란 것도 결국은 내가 담는 것입니다.

8.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동학에 말 중에 보국안민이 있습니다. 흔히 듣는 말입니다. 흔히 듣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보국안민에서 국을 지구나 우주로 바꾸면 혹은 나로 바꾸면 어떤가요. 세상은 "공유된 불안'에 갇혀 있습니다. 억압, 폭력, 불평등이 넘칩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우주여행을 합니다. 세상은 온통 폭력이 가득합니다.

폭력을 없애고 사람과 지구를 평화롭게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동학입니다. 그런 뜻에서 '동'은 밝을 동으로 읽어도 되겠습니다.

폭력으로부터 바로잡자는 학이 동학입니다. 보국안민의 보는 지킬 보保가 아니라 바로잡을 보輔입니다. 나 너머 나라와 지구까지 바로잡을 계책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9.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道 - 생명의 자기 발현

보국안민에서 민은 사람을 말합니다. 민은 인과 달리 지배받는 사람 또는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연과 만물은 서로가 자기본질을 발현하며 산다는 뜻에서 자연自然한 존재들입니다. 자연하다는 말은 어떤 조작이나 변형없이,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않는 삶입니다. "자연한 가운데 화해 난다"는 동학의 말은 다윈의 말처럼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경쟁과 다툼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꿀벌이 수분작용을 도와 꽃이 핍니다. 자연의 생존체는 단지 생존의 필요로만 먹이 사슬을 구성합니다. 자연은 먹이사슬 전체로 보면 상호부조 협동과 환대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이화의 삶이며, 자연한 삶입니다. 함이 없다는 것은 이치를 좇아 이치에 더하는 조작의 함이 없음이요, 함이 있다는 것은 이치를 좇는 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연한 이치가 사람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 있고(시자侍者는 내유신령內有神靈) 그 만물은 서로 상호부조로 엮여져 있으며(외유기화外有氣化) 이 협동의 망에서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지불이各知不移)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10. 사람은 최고령자最高靈者

- 동학은 사람을 바로잡는 학

​생존이 아닌 탐욕과 쾌락의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고통받게 나아가 지구까지 아프게 하는 것은 만물 중에 오직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신령스럽다는 수운의 말은 사람만이 위대하거나 고귀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제일 신령스럽기에 제일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신령하되 사람만이 유독 만물을 괴롭힐 수 있는 존재라는 경계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잘 쓰면 사람과 지구를 살리나 잘못쓰면 사람과 지구를 죽이는 독입니다.

보국안민을 보민안민으로 바꿔 읽으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사람을 바로잡아서 모든 인류와 지구까지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인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는 "사람만이 고통의 근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큰 마음 먹고 바로잡으려 생각했는데 곧 좌절에 빠집니다. 핵, 기후위기, 전쟁, 폭력, 빈부격차, 온갖 불평등과 차별, 코로나 대유행...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크고 많은데 나는 너무나 작고 힘이 없습니다. 당장 내 눈 앞의 삶도 버거운데 핵이며, 기후위기, 사회불평등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나 거창하고 멉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든데 뭘 할 수 있겠어. 맞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라도 내 가족만이라도 잘 먹여 살려야지. 맞습니다. 그것이 모심, 모실 시侍입니다. 내 새끼들을 위해 이 한낮의 뙤약볕 속에서도 일을 합니다. 저녁에 가족과 삼겹살을 함께 먹을 생각을 하면 엔돌핀이 솟습니다. 성경신誠敬信! 내 가족에 정성을 다하며, 내 가족을 공경하며, 내 가족에 거짓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로빈슨크로소처럼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크로소는 선주민 이름을 유럽식으로 바꿔 부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수탈입니다.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내 가족에게는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사기, 권력 등 억압을 합니다. 익명의 수용소인 도시에서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이웃과 상호부조하고 서로 모시는 우정과 환대의 마을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80년대 초까지만해도 농사는 두레라는 협동망 없이는 농촌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횃불은 세상을 태워서 바꾸고, 촛불은 영성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영성은 우정과 환대로 모시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크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만큼의 크기로만 있습니다. 나, 가족, 집, 집강소만하게, 황새마을만하게, 원평만하게, 금구, 김제, 전라북도, 대한민국, 아시아, 유라시아, 지구, 우주...눈을 감고 잠시만 생각해봅니다. 어디까지 보입니까? 보이는 만큼만 사랑하시면 됩니다. 애써 대한민국까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통령 바꾸면 기분만 좋지 바뀌는 것은 거기서 거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허구헌날 대통령은 누가 누가 좋아 하는 분들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나를 가족을 마을을 대한민국을 지구를 담는 것도 결국은 나입니다. 내가 지구이고 내 마을이 지구입니다.





생태계니 핵이니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만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바로잡히면 지구도 건강해집니다.





이것이 동학하는 마음입니다.









11. 자치自治•자급自給•자연自然 - 동학의 생성론





기계의 타율성이야말로 인간 자율성과 자기생성을 억압합니다. 즉 트랙터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트렉터를 지배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렉터 주인은 철저하게 기계적 법칙에 자신의 의지를 맞추게 됩니다. 하늘의 주파수가 기계의 주파수로 동기화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동귀일체 방향은 불행히도 천지인의 한살림 연결이 아니라 인공생명=인공지능로봇=AI입니다.





이렇게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됨으로서 기계는 인간을 대리자로 하여 자기증식하게 되고 인간은 더더욱 기계에 종속된 타율적 존재가 됩니다. 기계는 이제 사물연결망 사물인터넷을 통하여 지구적 연결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낙관과 비관이 엇갈립니다. 인류 오만 년의 지식을 단 몇시간에 저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구글 ,아마존, 알리바바(년간1400조 매출, 한국 2020년 GDP 실질 1,836조 8,811억 원 ) 같은 소수의 과두 지배자를 만들기도 하지만, 지구마을 전체로 영성있는 사람들의 연대망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 한 명은 5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활공동체입니다. 이 50조 개의 세포는 그 각각이 신경계, 소화계, 호흡계, 근골격계, 생식계, 면역계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50조 개 인간의 주인인 셈입니다. 이 몸의 원리를 가족, 마을, 나라, 지구로 확장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살을 빼려고 합니다. 내 몸의 비만은 몸이라는 50조 개의 세포공동체가 만든 잉여의 축적물입니다. 비만이라는 잉여를 내 몸에서는 다이어트라며 돈을 써가면서까지 없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잉여는 그 잉여를 독차지하기 위해 소수지배의 폭력을 낳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생존의 기본 바탕도 없어서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이 폭력입니다.





자치•자급•자연은 소농 삶이나 윌든의 오두막 같은 낭만적 말이 아닙니다. 자치는 폭력과 수탈이 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자급은 자치할 수 있는 삶의 바탕이 물질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자연은 지구를 말하기도 하지만 지구와 사람의 삶이 서로 어우러지며, 스스로 그러한 생명의 발현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12. 하늘의 마음 임자의 마음





하늘은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이라며 자기 마음을 수운에게 줍니다. 많은 분들이 하늘마음=사람마음이라는 수평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늘이 수운에게 주었던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도대체 하늘은 무엇 때문에 자기 마음을 사람과 만물에 주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개벽 이래 5만 년 동안 뼈빠지게 하늘이 일하였으나 이룬 게 없다고, 노이무공勞而無功하였다고 하늘은 탄식합니다. 하늘이 탄식하는 그 마음은 곧 수운의 마음일 터인데 그 마음은 온갖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과 만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일까 합니다.





이제 하늘은 수운에게 말합니다. 수운 너와 더불어 이제 다시 이루려 하니(다시개벽) 기분 좋다고 합니다. 이루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 버려진 사람들, 이루지 못한 만물에 대한 안타까움의 절절한 무궁하고도 무극한 하늘의 마음 앞에서 고맙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경천敬天입니다.





오심즉여심은 이제 나(하늘)와 더불어 이루자 하는 주체실현, 자기생성, 자기창발의 선언입니다.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는 것은 생명의 자기발현 자기통치가 아닙니다. 오심즉여심은 뭔가 잘못 가고 있는 문명에 대한 통렬한 전복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동학의 놀라운 실천성, 현실성을 봅니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 수운은 아주 뚜렷하게 아주 간단히 말합니다. 동학의 주문에 있는 "조화정"을 이루라고 합니다. 사람과 하늘,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의 하늘로의 조화(생성)를 이루라고 합니다. 여기서 조화정은 造化定이지, 잘 어울린다는 조화調和가 아닙니다. 동학의 선배님들은 하늘모심을, 하늘생성을 한 이를 '신인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조화정을 무위이화라고 수운은 말합니다. 한자를 글자 그대로 풀면 함이 없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절로, 그냥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함이 없으나 혼원지기(우주생성의 기운)가 하늘의 함으로서 내게 있으며, 성경신誠敬信의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함을 다하면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생물학에서 단백질이 생명현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단백질과 생명현상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새로 생성된 것은 이전의 어떤 요소로 환원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생성물은 어떤 요소들의 단순합이 아닙니다.





단백질에서 생명으로의 질적인 전환, 생성의 차원 이동은 하늘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지극한 모심의 함으로 하늘이 감응하여 하늘의 함이 있어 새롭게 이루니 하늘이 하는 일은 내게는 무위이화입니다. 수운의 무위이화의 주체는 생명과 기운으로 가득찬 영성적 실재로서 노자의 자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무위이화는 결국 주체의 자기실현입니다. 하늘인 나로서의 자기실현에 헛되이 함(돈, 명예, 권력, 지배욕, 소유욕, 폭력 같은 하늘마음 아닌 것을)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의 생성체의 본질로서 스스로 그러함을 하라는 말입니다. 동학은 사람과 만물은 스스를 구원함으로서 일체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요, 하늘님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함이 없이 되는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지극한 농부들은 나락이 익을려고 발싸심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나락도 지극한 함이 있습니다. ( 이 지극한 농부들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자들입니다. 요새 능력주의 논쟁은 참 웃기는 논쟁입니다.) 무위이화란 결국 하늘이 함이요, 나 또한 성경신誠敬信으로 지극한 함을 하면 이룬다는 주체의 자기생성입니다.







13. 동학 자기생성론 - 오심즉여심





동학은 "자기생성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성을 우리말로 하면 '새끼를 낳다'의 '나다'란 말입니다. 이 '나다'는 나가 나지 뉘여 할 때의 '나다' 즉 '생성물'입니다.





'낳다', '나다'를 줄이면 '남'인디 이 말이 참 그렇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할 때의 '남'이잖아요. 이때의 '남'도 결국에는 '낳은 것'입니다.





동학은 '남사상', '나다사상', '낳다사상'입니다. '남', '나다', '낳다' 한자를 써서 '자기생성론'이라고 이름해 봅니다.





그럼 동학이 어찌서 생성론이냐? 수운이 그랬습니다. '오심즉여심"이라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하늘 마음이 네 마음이다. 그런데 하늘마음이 어떻게 내 마음이 되는가?





그것이 '무위이화'로 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기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심즉여심이란 말입니다. 그 마음과 몸을 기루는 것이 곧 자기생성입니다. 나를 기를려면 끝도 없이 하늘과 내가 기화를 해야합니다. 무궁무극한 하늘 마음과 내가 끝도 없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동귀일체' 란 말이니 그것이 곧 오심즉여심이란 것입니다. 오심즉여심은 한 번 그런게 아니고 무궁하고 무극한 일입니다. 오심즉여심은 늘 '다시개벽'의 과정이란 말이지라.





원광대 조성환 선생은 이것을 움직말(동사) '하늘하다'라고 찾아냈지요.





"나에게는 이기적인 나와 공공적인 내가 있으니, 이기적인 나를 끊은 연후에 내 마음을 천하고 내 기운을 천한다.

我有私我公有私我니 絶其私我然後에 天我心天我氣야 守正之積이 始著니라"

<천도교회월보 제2호> 1910, 09, 15





조성환은 위 문장을 발굴하고 천아심천아기天我心天我氣에서 천을 "하늘한다"는 움직말로 하자고 했습니다.

하늘한다는 것은 즉 동학한다는 것은 곧 하늘을 낳고 기루(양천)는 것, 늘 다시개벽의 오심즉여심입니다.





마음이 사람에게만 있겠습니까? 것들(물건)에도 있습니다. 돌에도 물에도 나무에도 있습니다. 하늘이 사람에게만 오심즉여심하겠습니까?





"모든 것들에 하늘이 있고 (물물천物物天) 모든 일마다 하늘이 있다(사사천事事天)"는 해월 - 이천식천 편의 말씀은 만물생성과 기룸(변화)의 말씀입니다.





수운이 논학문에서 말하기를 "일마다 하늘이 있으며, 일마다 하늘이 이뤄준다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사불명 無事不命)"는 말은 돌덩이에도 지구에도 하늘 마음이 있다는 오심즉여심인 것이지요.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며(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즉 나는 너를 낳고 기루고 너는 나를 낳고 기른다는 말입니다. 이는 태어날 때 한 번이 아니고 자라는 것이 곧 '낳음-생성"의 연속 과정 늘 다시개벽입니다. 해월이 "나는 나로서 내 마음을 고마워해야 하늘이 기뻐한다. (아심아경 천역열락 我心我敬 天亦悅樂 -해월 수심정기 편)" 이야말로 생성의 기쁨입니다.





동학인들은 '믿는다'하지 않고, '동학한다'로 말합니다. 이는 '사인여천'이나 '인내천'에서 보는 것처럼 내가 하늘이고 하늘이 나이기에 나와 동떨어진 절대자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늘과 나의 역동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학한다'는 '하늘한다'와 같은 말입니다. '하늘한다'는 곧 날마다 새로운 하늘을 여는 다시개벽이자 나아가 자기 개벽성이 발현하는 즉 동학의 표현으로 말하면 '외유기화'이고 만인만물의 이천식천으로서 날마다 우주를 '다시개벽' - 생성하는 일입니다.









14. 나는 국민이 아니고 나의 임자(주체)





수운의 하늘은 나를 따라댕겨라 안 그럽니다. 내가 너희들을 부려먹지(지배) 않을 테니 너희들도 당하고 살지 말아라 이럽니다. 사람도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도, 직장에 가도, 심지어는 가족들끼리도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것이 갑질이잖아요. 수운의 하늘은 갑질이 없습니다. 그 하늘은 참 순하고, 정 많고,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다고 수운의 하늘은 사람과 만물을 가만두지는 않습니다. 너희들 안으로 나를 모셔라 그래요.(내유신령) 그런데 사실 모실 것도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무위이화의 기화로서 이미 내 안에 깃들어있습니다.





동학의 전부라 할 모실 시侍는 내 안에 이미 깃든 하늘을 나의 '함'으로서 자각하고 자기생성하라는 임자(주체)의 말입니다.





수운의 하늘은 개벽하고 오만년 동안 힘써 일했으나 공이 없다고(노이무공勞而無功) 폭폭하다고 투덜댑니다. 아니 아주 겸손하다고 해야 맞겄네요. 그러면서 너를(수운) 만나 성공하니 너도 좋고 나도 좋다고 합니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용담가) 참 순박합니다.





노이무공은 사람과 만물은 신의 지배물도, 신의 창조물도 아니요, 신과 평등한 것도 아니요, 도리어 사람과 만물을 하늘보다도 먼저 내세우는 말입니다. 사람과 만물은 신의 앞잡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임자(주체)와 자기생성의 기화지신(氣化之神)입니다. 자기생성의 기화지신이 곧 내유신령이란 것입니다.





노이무공은 확 뒤집는 전복의 선언입니다. 임자(주체)가 되어 스스로 자기생성, 자기통치하라고 신과 만물의 관계를 아주 쎄게 전복합니다. 수운의 하늘은 나타나면서부터 만물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개벽"해냅니다. 그러고는 수운의 하늘은 당신을 몽땅 사람에게 줍니다. 그 선언은 이렇습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오심즉여심 吾心卽汝心 동경대전 논학문 6절)





수운의 하늘은 자신의 일을 함이 없는 무위이화로 하기에 사람과 만물이 임자(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위이화의 일은 형상은 없으나 자취는 있습니다. (천도자 여무형이유이유적 天道者 如無形而有迹, 동경대전 논학문 1절)





그러니 만물은 자기의 임자(주체가)가 되고 자기의 생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만물이 자기생성자, 자기통치자, 자기임자(주체자)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람은 국가라는 신을 모시는 국가의 머슴인 국민이 아닙니다. 사람은 민족으로서 민족에 갇힌 경계인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지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더 더구나 인종의 흑인,백인, 황인도 아닙니다. 노동에 지배 당하는 노동자도 아니요, 무산자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며. 교회의 신자도 아닙니다.





여기서 요새 유행하는 '공동체' 말씀 좀 드립니다.





서로 무위이화의 조화로서 이천식천 외유기화하는 협동과 상호부조망은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공동체의 국민이데올로기, 민족공동체, 노동공동체, 학교공동체, 교회공동체, 직접민주공동체, 대안공동체는 모두 어떤 생각과 가치를 내려 꽂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어떤 공동체에 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민처럼 내가 원하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인다는 머슴 같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 나는 개인주의할 때의 개인과 같은 말은 아닙니다. 우리말 '나'는 태어나다 할 때의 '나다'. 새끼를 낳다의 '나다'에서 온 말입니다. '나'는 곧 나를 낳는 임자이지 국가의 자배를 받는 국민은 아닙니다.





나는 곧 내유신령해서 만물이 화해 낳는 (만물화생 萬物化生, 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 편) 생성의 기화지신을 가진 생성자입니다.







- 끝 -



사진 박홍규 작 <새날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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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영

건축기술사, 기후난민, 노동난민, 신동학, 한옥, 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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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aldwin 1979 20/20 Interview Surfaced for the First Time - Why ABC Buried James Baldwin Interview

James Baldwin 1979 20/20 Interview Surfaced for the First Time - Why ABC Buried James Baldwin Interview



Watch a Never-Before-Aired James Baldwin Interview From 1979
https://vimeo.com/561405000

Buried by ABC at the time, the segment reveals a unique glimpse into Baldwin’s private life—as well as his resounding criticism about white fragility, as blisteringly relevant today as it was in 1979.

By Adrienne WestenfeldJun 15, 2021


JULIO DONOSOGETTY IMAGES


In 1979, up-and-coming television producer Joseph Lovett scored the opportunity of a lifetime. Just a few months into his stint at 20/20, ABC’s upstart television news magazine, Lovett was assigned a profile of James Baldwin, pegged to the publication of Baldwin’s nineteenth book, Just Above My Head. Lovett was “beyond thrilled” to tell the titanic American writer’s story—but it’s taken until 2021 for that interview to see the light of day. Buried by ABC at the time, the segment has resurfaced over four decades later, revealing a unique glimpse into Baldwin’s private life—as well as his resounding criticism about white fragility, as blisteringly relevant today as it was in 1979.

When Lovett received the assignment, he was excited to meet one of his heroes: “I had been reading [Baldwin] since I was a teenager. I thought he was brilliant and brave and speaking to the moment of history that we were all living in. I was thrilled; I was beyond thri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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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tt and his crew arrived early, woke Baldwin, shared breakfast with him, and rolled the cameras before Baldwin, a heavy drinker, had a chance to imbibe. “He hadn’t had a drop to drink and he was brilliant, utterly brilliant,” Lovett said. “We couldn’t have been happier. He was such an eloquent, masterful speaker, with such a great mind. It was such a privilege.”

Conducted by the late Sylvia Chase, the interview took place at 137 West 71st Street—the Manhattan apartment building Baldwin bought for himself and his family in 1965, following the success of his early books. It showcases rare footage of Baldwin relaxed and gregarious at home, surrounded by a large and close-knit family. In a private conversation with Baldwin’s mother, Emma Berdis Baldwin, in the kitchen of her apartment, Chase asked if she always knew that her son would be a wildly successful writer; Baldwin's mother responded, “I didn’t think that. But I knew that he had to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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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gment also takes viewers behind the scenes of Baldwin’s play, The Amen Corner; during a rehearsal for the Lincoln Center production, Baldwin is shown beaming as he watches the performers. The production was produced and directed by Val Gray Ward, founder of Kuumba Theater, who is featured in the clip along with her Kuumba cast. To see Baldwin laughing and smiling in the thick of rehearsal is a welcome, joyful sight. Yet it’s his words about white fragility and white fear that rise above the 1979 milieu, remaining achingly relevant all these years later.


“White people go around, it seems to me, with a very carefully suppressed terror of Black people—a tremendous uneasiness,” Baldwin said. “They don’t know what the Black face hides. They’re sure it’s hiding something. What it’s hiding is American history. What it’s hiding is what white people know they have done, and what they like doing. White people know very well one thing; it’s the only thing they have to know. They know this; everything else, they’ll say, is a lie. They know they would not like to be Black here. They know that, and they’re telling me lies. They’re telling me and my children nothing but l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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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r-ranging interview was a resounding success, and Lovett was eager to see it air. Yet as he was called away on other assignments, including interviewing Michael Jackson, nothing came of the Baldwin segment. When he inquired about the delay, ABC reported that it had been scrapped, because, “Who wants to listen to a Black gay has-been?”

“I was stunned,” Lovett said. “I was absolutely stunned, because in my mind, James Baldwin was no has-been. He was a classic American writer, translated into every language in the world, who would live on forever, and indeed he has. His courage and his eloquence continue to inspire us today.”

In a portion of the segment filmed at the Police Athletic League’s Harlem Center, Baldwin addressed a group of student reporters, telling one young student, “Nobody wants a writer until he’s dead.” Uncovering this interview over forty years later, Baldwin’s unnerving words seem frighteningly prescient. Lovett will discuss the 20/20 segment further on June 24 at 8:00 PM, when he moderates a free virtual panel titled James Baldwin: Race, Media, and Psychoanalysis, featuring psychoanalysts Annie Lee Jones and Victor P. Bonfilio, as well as Aisha Karefa-Smart, Baldwin’s niece. RSVP here to help Baldwin’s legacy live on.
Adrienne Westenfeld Assistant EditorAdrienne Westenfeld is a writer and editor at Esquire, where she covers books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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