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6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11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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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1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5.10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9월 18일 수요일

어젯밤 손자 믿음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보통 때보다 아주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그런지 오전 4시 20분이 되어서야 눈이 떠졌고, 언제나처럼 기상전의 몸과 마음의 운동을 마치고 화장실에 갔는데, 변이 완전히 막힌 것을 알게 되었다.

생활환경을 바꾸거나 음식이 많이 달라지면 드물게 일어나는 고통스런 증상이다. 2회의 관장과 여러 가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대처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목욕을 하며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기로 했다.

인내심을 갖고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오전 8시 50분에 드디어 해결이 되었다. 심한 고통이 시원한 쾌감으로 근본전환 되는 순간이다. 그동안 계속해온 양생실천이 어떤 상황적 변화 때문에 발생한 내장환경의 악화와 거기에 따른 병리증상에 대해서 자력으로 대처하고 잘 극복할 수 있는 자연치유력을 키워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끔하게 씻어지고 비워진 내장 상태에서 오전 9시 50분에 계피+생강+코코아+레몬+올리고당차, 오전 11시 55분에는 섭씨 60도의 온수+레몬즙 한 컵을 마시며 빈속을 안정시켰다.



잠자리가 달라지고 물과 공기와 음식이 크게 달라지면 젊을 때보다 더 민감해진 노경의 내장감각이 더 심각한 위험을 경고해주는 것 같다. 항상 조심해야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장내의 적폐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재조정이 필요했다. 나이들면서 두뇌의 지식보다 내장의 지혜에 더 자주 의지하게 되었다.



9월 19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가천대 객원교수이며 전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 김주미씨를 초청해서 한국노인교육의 현주소와 향후방향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듣고 유성종 동양포럼위원장과 김용환 충북대교수와 함께 넷이서 Q&A와 깊은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김주미씨는 △100세 노인시대의 양질의 삶 영위를 위한 노인교육의 필요성 △노인교육과 한국인문학의 현주소 △인문학을 대표하는 역사와 문화 △인문학을 통해 인간문제와 노인문제의 답을 찾자 라는 4가지 소제목으로 그동안 대학이나 문화원등에서 노인교육을 담당해왔던 경험과 고민과 개선방안들에 대한 소견을 발표했다.

그리고 김용환 교수의 코멘트가 있었고 유성종선생의 동양일보사 ‘장수사회 철학하는 삶’ 공개강좌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나 자신의 소감은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오늘의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인교육은 예체능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양질의 인문학적 교양을 공유하는 공동학습이 보충, 보완 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함께 확인 할 수 있었다. △양질의 인문학적 교양의 내용이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는 21세기의 인문학이 미래학적이며 비교문명론적인 상상력, 사고력, 실천력 함양을 중심과제로 하는 인문학의 구조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고전학습의 필요성은 여전하지만 훈고학적, 자구 해석적 독법은 인공지성의 몫으로 전환하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의 도래에 적절히 대응, 대처, 진화할 수 있고 자기와 타자의 미래공창적 상화력, 상생력, 공복(共福)력의 원천으로 삼고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읽기를 과감하면서도 슬기롭게 체득해나갈 필요를 절감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문학적 교양은 인생 50년 시대를 위한 지식과 기능과 능력을 기르는데 중심이 놓여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생 100년 시대에 걸맞는 인문학적 교양은 지식과 기능과 능력을 AI에 맡기고 AI에게는 인연이 먼 지혜와 경륜과 내공을 길러가는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9월 20일 금요일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인교육은 주로 중장년 세대(40·50·60대)가 노숙년 세대(70·80·90세대)에게 제공하는 것은 오락‧위로‧격려의 서비스프로그램으로 되어 있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중장년세대 중심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의 일방적 메시지 전달이다.

그것은 청소년세대(10·20·30세대)에게 제공되는 교육프로그램 역시 중장년세대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에 기초한 지식과 기능과 능력을 주입, 전달, 계발하려는 것과 거의 같다. 그래서 계획적으로 중장년세대 중심의 인간, 사회, 국가를 정착시키려는 것이다. 교육이란 주도세력의 가치의식에 맞게 개인과 집단을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중장년 세대가 청소년 세대와 노숙년 세대를 가르치고 키운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한다. 3세대의 공동학습, 상호학습, 발달학습으로의 발상전환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중장년 세대는 일찍이 청소년 시기를 경험했지만 노숙년 시기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올바른 인식, 이해, 파악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르치기 보다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배운다는 생각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교육이 아니라 학습이다. 강연이나 강의가 아니라 대화가 주축이 되어야한다. 3세대 공동학습사회를 이룩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9월 21일 토요일

이번에는 26일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3일째 된 오늘, C씨와 J씨를 만나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우정 어린 담소를 나누었다. C씨는 3개월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고 머리도 아주 하얗게 변했다. 걸어 다니는 데도 몹시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연했다.

누구나 80대가 되면 그렇겠지만 정말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지금같이 이렇게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을 수 있다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J씨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했는데 좌골에 이상이 생겨서 여러모로 불편하고 가끔 통증이 심한데 여러 가지로 대처하고 정기적으로 약물치료도 받고 있는데 어느 시기까지 견디다가 결국 수술 받아야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고령기를 살아가는 노년기의 아픔과 괴로움은 공통체험이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화두가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옮겨졌다. C씨는 요즘 죽음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어렸을 때 예배당에서 주일학교선생님에게 들었고 그 후에 목사님의 설교나 자신이 직접 신구약성경을 읽고 믿게 된 영생관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어 두렵지는 않지만 혹시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과정을 오래 겪게 되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면 몹시 걱정이 앞선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J씨는 기독교적 영생관과 불교적 열반관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솔직한 입장을 말했다. 내 생각은 어떠냐는 질문이 있었고 두 친구들의 진솔한 자기 고백을 들었기 때문에 현재의 나의 소신을 말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우주생명이 개체생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개체생명이 본래의 우주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일생, 생애, 수명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기독교적 영생관의 ‘영생’이나 불교적 열반관의 ‘열반’이나 내가 체감, 체험, 체인 하는 ‘우주생명’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서로 건강을 염려했고 살아있는 동안 아픔과 괴로움보다는 기쁨과 즐거움이 많기를 기원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재회를 다짐하면서 헤어졌다.



9월 22일 일요일

어렸을 때와 젊었을 때 제대로 배우고 익혀두었어야 할 바른 자세와 습관 기르기를 소홀히 한 탓으로 나이 들어 겪게 된 아픔과 괴로움을 통해서 많은 반성을 하는 나날이다. 늦게나마 삶이란 자기수련이요 자기계발이요 자기개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더도 말고 아주 기본적인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경제적 자립과 지적활동을 유지, 계속, 전개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내 나름의 생활 규칙을 세우고 준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1. 아침에 온수 두 컵, 정오에 온수 한 컵, 저녁에 온수 한 컵을 레몬즙을 넉넉히 섞어서 마신다.

2. 다행히 식욕은 왕성하지만 과식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식사시간을 엄수한다. 아침식사 오전 7시 30분, 점심식사 낮 12시, 저녁식사 오후 6시.

3.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4.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오후에 30분, 자기 전에 30분 걷는다. 가슴을 펴고 어깨를 세워서.

5. 항상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려본다.



9월 23일 월요일

나는 틀림없이 85세의 늙은이=노인이다. 고령자라고해도 좋고 장수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나이든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말뜻은 같은데 느끼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나는 어느 말도 특히 선호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나의 관심은 나 스스로가 어떤 늙은이냐라는 데 있다. 남이 규정하기 전에 나 스스로가 꼼꼼히 생각해 보았는데 기인한 현상에 상도했다. 나라는 한 노인이 때에 따라 곳에 따라 여러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모두 ‘나’라는 한 노인이라는 것이다.

특히 요즘들어서 자주 체감되는 모습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을 추려서 라틴어와 한자와 우리말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Senex cogitans─思老 ─생각하는 노인

2. Senex indignans─憤老─분노하는 노인

3. Senex felix─福老─행복한 노인

4. Senex curans─慮老─ 염려하는 노인

5. Senex sperans─望老─ 희망찬 노인

6. Senex ludens─遊老─ 노니는 노인

7. Senex amans ─愛老─ 사랑하는 노인

8. Senex generativus─産老─생산적인 노인

9. Senex locutus─言老─말하는 노인

10. Senex cantabundus─歌老─노래하는 노인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하나로 수렴되는가 싶으면 여럿으로 확산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폭을 지니는 가운데서 유연한 불확정성, 불확실성, 비결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 (=桓=汗=韓 :한국의 고유의 사상적 핵심개념)이 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얼을 통해서 늙음=나이듦=노화=고령화가 결코 ‘일이관지(一以貫之 :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곬으로 이어지는 것)가 아니라 다양한 변화와 예기치 못한 굴곡으로 흥미롭게 전개되는 경이로운 과정임을 보여줌으로써 한 철학적 자각에 이르는 단초가 되는 것 같다.



9월 24일 화요일

왠지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Nella Fantasia’라는 노래가 내 노년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맴돈다. 최성봉씨와 바다해씨, 사라 브라이트만, 그리고 많은 유명한 국내외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면 매번 그 감동이 새롭다. 한국의 현실과 내가 그리는 우리나라의 모습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는 내 나름의 필사적 노력이 하나의 외국 노래에 대한 애착으로 농축 되는 것 같다.



Nella fantasia io vedo un mondo giusto

(환상 속에서 나는 하나의 정의로운 세계를 본다.)

Lì tutti vivono in pace e in onestà

(모든 사람들이 평안함과 정직함 속에서 살아가는)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Come le nuvole che volano

(막힘없이 떠돌아다니는 구름처럼)

Pien d'umanità in fondo all'anima

(영혼 속 깊은 곳까지 인간애로 충만한)



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노래를 몇 십 번 들으면서 이탈리아어 가사에 담긴 뜻을 깊이 살피는데 열중 몰입했을까?

기회는 평등하고 절차는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힘주어 말했던 지도자의 선언이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주어진 기회와 자기진영에 속하는 자들에게만 공정한 절차와 불의, 불신, 불법으로 얼룩진 사회, 그래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괴상망측(怪常罔測)한 나라로 전락한 우리의 현실의 한가운데서, 그래도 내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어머니나라요, 아버지나라이기에 내가 거기서 영혼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세계–나라–사회를 상상하는 데서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기대하는 힘을 얻으려는 몸부림이다.

흔히 젊은이는 미래를 꿈꾸고 늙은이는 과거를 추억한다지만 나는 단연코 No!라고 말한다.─늙은 나는 젊을 때보다 훨씬 더 미래를 그리며 살아간다고.

오늘도 Nella Fantasia의 노래 말이 나의 삶에 싱싱한 생명력을 보태어 준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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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10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4.26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9월 7일 토요일

나는 문재인과 그의 정치적 동지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남북통일이라는 구실로, 무조건 아부하는 태도가 역겨운데, 북한 쪽의 오만과 대응이 반감을 증폭시킨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당시에는 6.25남침이라고 불렀다.─ 때 피난을 못가서, 반년 정도 북한 지배하의 생활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아도 입만 열면 이데올로기 타령을 하고, 과격한 선전 선동에 신물이 나는 나날이었다. 지금 TV 화면을 통해서 보는 오늘의 북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중국은 자주 동서남북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고, 교수・ 학자들이나 관료들과 공공철학의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다언무실(多言無實=말은 많은데 내용이 없다)이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소감이다. 자기주장만 장황한 반면 남의 말을 경청하려는 자세가 미흡하다. 러시아는 과거의 문학이나 예술이나 철학에는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현재의 러시아에는 몇 번을 가보았으나, 전연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문재인 정권과는 국제 감각이 아주 다른 것 같다.



9월 8일 일요일

나는 문재인 정권이 언제나 어디서나 소리 높여 강조하는 공명・공정・정의라는 정치 경제 사회적 가치를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수용할 수 없다. 문재인이 주장하는 바를 잘 살펴보면 정의를 전적으로 공권력=국가권력의 행사를 통하여 실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독재=정의가치 실현을 위한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은 정의는 개개인의 자유(自由)와 자성(自省)과 자제(自制)가 그 기본전제가 될 때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적 사태발전 때문에 개개인의 자유와 자성과 자제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게 될 때에 한해서, 국민적 합의에 의하여 제정된 법적 절차에 따라서 적절하게 대처하여야 하는 것이다.

공권력의 행사는 집권세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행사되면 사권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공권력은 자의적인 인치(人治)의 위험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철저하게 법치(法治)의 원칙을 충실하게 준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는 이러한 의미의 법치감각이 희박한 것 같다.



9월 9일 월요일

조동삼 교수가 카카오톡으로 보내준 이원오의 ‘황혼(黃昏)-3’이라는 시(詩)가 마음에 든다.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이 마음과 같이 않고

方向感覺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不安한 마음에

멍하니 窓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好奇心과 希望이 있었고

젊어서는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切實하고

애틋한 親舊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보면

或是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老慾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所望하면서

黃昏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丹楓처럼

해돋이보다 아름답다는 해넘이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9월 10일 화요일

외국에 와 있는데도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보통사람의 상식적 판단과 너무나 어긋나기 때문에, 국내외의 조롱과 비아양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나라사랑이 입은 상처가 심하게 아리다.

온갖 비리와 부정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을, 절대적 다수의 반대를 묵살하고 법무장권에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국민이 극심하게 분노하고 있다. 대한민국 ‘法務部’가 무법자의 장관임명으로 말미암아 ‘法無部’로 전락되고 말았다는 데에 대한 분격이다.

법질서 위반자를 법질서에 따라 심판대에 세우는 일은 검찰총장의 몫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겪게 되는 비상사태가 발생되었다. 현역 법무장관이 현역 검찰총장과 정면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조국과 절대로 갈라질 수 없는 아주 특수한 공동이해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능력과 책임수행 여부가 우리 모두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9월 11일 수요일

일본인의 한국 인식은 원래 별로 좋지 않다. 배용준・최지우 주연의 ‘겨울연가’라는 드라마가 한때 일본 여성들의 뜨거운 열중물입으로 한일관계와 대 한국인식을 상당한 정도까지 개선시켰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천황이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자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이 있을 후에, 급격히 냉각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비우호적 대일 태도 때문에 긴장관계가 계속되다가, 미국의 끈질긴 종용에 의해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국가가 기본양해가 이루어져 약간의 호전을 보이는가 싶었는데, 문재인 정권의 극단적인 반일감정 외교로 인해서 더 이상의 우호국이 아닌 적대국 관계가 되고 말았다.

한국을 비아냥하고 비판・ 매도・ 악담・ 냉소・ 무시・ 경멸하는 책자도 많이 나왔고, 잡지나 주간지의 기사도 넘쳐난다. 염한・ 반한을 쓴 것이면 무조건 잘 팔린다는 출판사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근의 염한론의 홍수는 비정상적이다.



9월 12일 목요일

오전 11시 30분, 우메다 3번가 17층의 우메노마라는 일식식당에서, 후지가미 회장, 우에모토씨, 야마모토 사장과 함께 점심을 하면서 담소하였다. 우선 토비오카 켄씨를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는 데에 대하여, 나도 그분에게는 도움을 많이 받았고 배운 바도 많았던 잊을 수 없는 일본인의 한 사람이라고 호응했다.

코마쓰시와 코마니 회사의 협력 사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국제도시 코마쓰 10년 계획이 양쪽의 합의에 의해서 공동추진하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노년철학과 제론토피아 구상도 포함하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말도 있었다.

야마모토 사장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미래공창신문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데 공감을 나누었다.

노년철학 대화모임을 확장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방자치단체들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구체적인 협조방안을 강구해 보겠다는 말도 있었다.



9월 13일 금요일

일본에 있는 동안에 즐길 수 있는 것은, 매일 아침에 신선한 여러 종류의 야채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고, 소금버터식빵, 치즈, 소시지, 그리고 밀크 티가 모두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맛이 있다. 양질의 마도 갈아먹는데, 모든 것이 선도가 높고 가격이 저렴하다. 한국보다 싸다.

점심에는 연어, 고등어, 가자미, 도미가 맛있게 구어 포장된 것도 그냥 사다 먹으면 되는데, 내 입맛에 딱 맞는다. 시금치나 무나, 특히 양배추와 두부를 넣어서 만든 된장국이 구미를 돋운다. 낫또와 일본간장의 배합, 거기에 약간의 와사비를 섰으면 그야말로 진미다.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모즈크라는 해산물이 있는데, 그것도 나는 좋아한다.

저녁에는 가볍게 소화 잘되는 것을 먹는데, 우메보시나, 쓰케모노류를 발효보리를 섞은 밥과 함께 먹는다. 식사 때마다 식후에 아마자케(甘酒)와 요캉(羊羹)을 먹는데, 한국의 감주나 식혜 그리고 양갱과는 아주 다르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일본 것이 더 맛있다.

그러나 나는 일본에 있을 때는 일본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먹고, 한국에 가면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먹는다.



9월 14일 토요일

오사카의 우리 집은 작은 아파트지만 살기에 편안하고, 여러 모로 편리해서 좋다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전차역이 걸어서 2분 정도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온갖 생활필수품을 고르게 갖춘 슈퍼마켓이 여러 곳에 있으며, 다양한 전문분야의 병원이나 진료소, 약국 그리고 나이 들면 때때로 찾게 되는 정골원, 지압과 안마와 침구의 시술소 등등이 모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특히 내게는 그 어느 것보다 꼭 있어야 되는 크고 작은 서점들이 가까이 있어서 아주 좋다. 그때그때의 신간서적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서점에서 점검할 수 있고, 더 깊고 넓은 정보, 지식, 지혜를 위해서는 전차 타고 15분 정도를 가면 규모가 크고 구색도 충실한 대형서점이 여러 개가 있어서, 한 바퀴를 돌아보고 오는 것도 힘은 들지만 내게 있어서는 더 없이 행복한 일과가 된다.

세계에 여러 나라들의 여러 도시를 다녀보았지만, 언제나 제일 먼저 찾는 곳은 예외 없이 서점이었다. 서점이 없는 도시는 내게는 사막처럼 느껴진다. 좋은 서점이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었다.



9월 15일 일요일

오사카의 우리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조촐한 행복은 아침 일찍─계절마다 다르지만, 요즘은 오전 5시 30분에서 6시 사이─ 일어나 세수, 세면, 세족, 세심을 마치고, 왕복 1km의 오솔길을 걷는 것이다. 한쪽에는 넉넉한 흐름이 심신을 정화시켜주는 강이 있고, 또 한쪽에는 곳에 따라 키 작은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혼과 영을 미화시켜주는 강변의 소로다. 길은 더 멀리까지 펼쳐 있지만 내 체력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500미터를 돌아온다. 아침걷기를 하는 동안에 하루를 시작하는 몸과 마음과 얼을 정리하는 귀중한 1시간이다.

젊은 남녀, 중년의 남녀, 그리고 노년의 남녀가 한결같이 편안한 표정으로 산책하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더러는 인사말을 나누고, 더러는 말없이 목례를 나누고, 더러는 그냥 조용히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모두가 이른 아침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청신한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고 심・신・혼을 말끔히 정화시키는 것 같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기쁨이 불특정다수 타자들의 기쁨과 어우러지는 묘미를 충분히 음미하는 철학의 오솔길이 바로 가까이 있어서 오사카의 우리 집이 좋다.



9월 16일 월요일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에 상관없이 새벽 3시 전후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일어나자마자 올리브유로 입안 청소를 하고─25분간─, 양치를 하고 온수(+레몬즙) 두 컵을 마신다. 1시간 후에 계피+생강+코코아+레몬+오리고당차. 또 1시간 뒤에 프로바이오틱스 한 알. 세수, 세면, 세심을 통하여 심・신・혼을 세척한다. 평균 3회 배변과 배뇨.

말끔히 비워진 몸과 마음과 얼에 새날의 새 공기를 한껏 채우고, 낡고 상한 공기를 남김없이 밖으로 내보내는 나 나름의 호흡조절운동을 한다. 험한 날이면 방안에서, 그러나 웬만한 날씨면 되도록 밖에 나가서 바깥공기를 호흡하도록 한다. 한국에서는 미세먼지, 초미세먼지와 공기의 질 좋다, 보통이다, 나쁘다는 둥의 기상정보를 일일이 확인해야하기 때문에 대단히 번거롭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걱정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하루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

오늘 오후 7시 50분발 제주항공 편으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는 한국 나름의 삶을 통해서 노년철학 대화를 계속한다. 한국에서 찾는 행복은 일본에서 찾는 행복과 같을 수는 없지 않는가?



9월 17일 화요일

다시 한국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새벽 2시 40분 잠에서 깨었다. 이것은 오늘의 아침을 나열한 것이지만 보통 매일 나의 아침은 이런 루틴으로 시작된다.

깊은 심호흡으로 하루 시작─내장 깊숙한 곳까지 새 공기가 들어가서 묵은 공기를 밀어내고 내장 안팎의 공기순환을 열 번 반복한 다음, 스트레칭─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시에 움직이고 밤새 굳어진 것을 연화시키며 허리를 좌우로 흔들고 팔다리를 위로 펼쳐 올렸다 내렸다 열 번씩 되풀이했다.

그러고 나서 기상!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로 입안을 청소, 소금으로 양치, 곧바로 섭씨 60도의 온수+레몬즙 두컵, 내장상태에따라 3~4회 배변과 배뇨, 몸안과 마음속을 말끔히 비우고 씻어내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면) 계피가루+생강+코코아가루+레몬즙+올리고당을 섞어 만든 계피차 한컵을 마시고 40분 정도의 신문, 유튜브, TV, 프로바이오틱스 한알

오전 6시 오늘은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상태가 좋고 맑은 날씨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집밖으로 나가 1 km정도의 아침산책 후, 샤워하거나 세수, 세면, 세족을 끝내고 세심(마음을 씻음)

오전 7시 요쿠르트+견과류+사과 반쪽

오전 7시 30분 기주떡 한조각+야채+식혜 한컵

85세의 내게 있어서 하루의 시작은 다소 복잡하고 주의 깊은 매일 진행되는 루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병원신세 안지고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현재의 노년기 문제인 배변과 배뇨의 이중 장애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한 양생실천이고 천천히 좋아지는 것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부작용 없이 노년철학대화활동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이 소박한 일상의 행복이며, 이런 삶을 오늘 이 순간까지 이어오게 된 것에 그저 감사 할 따름이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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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9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4.12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8월 26일 월요일

미래공창신문사 주최 제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를 일본 교토에 있는 칸사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개회하였다.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저녁 6시까지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발제와 토론이 전개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오전오후의 세션이 끝난 다음에, 카마타 토지 교수가 한국인 학자들을 위해서, 노오(能)을 직접 연출해 줌으로써, 일본전통문화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 노오는 죽은 자아 산 자, 저승과 이승이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일본사람들의 사생관 타계관을 잘 보여주는 연출물이었다.

카마타 교수는 내가 일본에서 29년간 철학대화활동을 해오는 동안에 만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소위 르네상스적 인간─만능의 천재─의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 일본인 학자다. 오늘 밤에도 세 종류의 피리와 기타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면서, 자작시를 낭송하고 스스로 작곡한 노래를 불러 죽은 자와 산자를 상봉케 하고 이승과 저승을 매개하면서 전후 최악의 한일관계의 한 가운데서도 진정한 한일양국의 우호와 번영을 기원하는 제전을 펼쳐보였다.



8월 27일 화요일

어제에 이어 국제회의가 계속되었다. 오래간만에 시마조노 스스무 교수와 만났고, 그의 발제를 들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원혜영 선생의 ‘반출생주의와 중유(中有)’에 관한 이야기와, 김영미 선생의 ‘아름다운 나이듦과 죽음’의 발제였다. 발출생주의는 어떤 인긴 또는 인간집단이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사고경향을 말하는데, 왜 나를 마음대로 낳아서 이렇게 고생하게 만들었느냐고 항변하는 젊은 세대의 출생부정적 문제 제기이다. 여기에 중장년세대나 노숙년세대가 진지하게 대답할 책임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을 화두로 삼은 것이다. 반응은 아주 좋았다.



또 ‘아름다운 나이듦과 죽음’도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카마타 도지 교수가 아름다움을 조화와 평화에 연결시키고, 시인을 조화와 평화를 조장하는 힘을 가진 자라고 말한 데 대하여,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갈등과 대립과 교통을 감내하면서도 그것을 정화・승화・미화시킬 수 있는 힘이며, 그런 힘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일 간의 진지한 철학대화를 살리기 위해서 이견을 제시했다.



8월 28일 수요일

국제회의 마지막 날, 오전회의에서는 유성종 선생 다음에 이어진 오오하시 선생의 발언, 노년철학은 ‘노인의, 노인을 위한, 노인에 의한 철학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노인철학’이 아니라 ‘노년철학’이라는 명칭을 택했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었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들어, 일찍 죽는 경우가 아니면 누구나 자연수레 노년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청소년세대(10, 20, 30대)와 중장년세대(40, 50, 60대)와 노숙년세대(70, 80, 90대) 사이의 상화(相和)・상생(相生)・공복(共福)이 이루어지는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미래공창적 철학대화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었다.

일찍이 인류가 경험한 적이 없었던 대중 초 장수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와 경륜과 용기를 키워나가는 시민주도의 상호각성운동이라는 자각을 갖자고 호소했다.

발제자들만 아니라, 참가자 전원의 발언을 들면 뒤에, 발제자들에게 마무리로 한마디씩 말하게 하고서 3일간의 포럼을 닫았다.

미래공창신문사 주최의 제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는 성공적이었다는 참가자들의 의견이 많았다. 한층 더 노력할 필요를 느꼈다.



8월 29일 목요일

하라다 회장과 야마모토 사장의 주선과 안내로, 유성종 선생, 진교훈 교수, 김용환 교수, 김영미 시인, 원혜영 박사, 그리고 야규 마코토 박사와 함께 교토 관광명소 몇 군데를 다니고, 점심을 같이하고 헤어져서 그들은 강항으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유성종 선생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미래공창신문사가 주최한 제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와 야마모토 사장을 위해서 혼신의 협력을 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오구라 기조 교토대학 교수를 오찬장에서 만났고, 건강을 회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유성종 선생은 오구라 교수와의 재회를 기뻐하며 일행 아홉의 점심값을 지불했다.

하라다 켄이찌 회장과 야마모토 사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해서, 한국 측 참가자들을 편안하게 일본 체재를 마치고 귀국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마음 써주었다.

좋은 이웃과 만나서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8월 30일 금요일

미래공창신문사 제1회 노년철학 국제화의를 통해서 제기・ 논의되었던 문제 중에서, 10월에 여는 보은군 주최 제6회 노년철학 국제회의에서 심화・ 발전・ 공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교육개혁과 미래공창과 신문명론에 관한 인식조정이다.

인생 50년 시대에 마련된 교육론이나 사회복지와 같은 기본적인 제도・ 장치・ 정책은 인생 100년 시대에는 창조적인 기여・ 공헌・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누구나 태어나서 나이 들어 병도 나고 아픔도 겪으면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죽음에 이르는 가정을 50년 단위로 생각하는 것과 100년 단위로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이제는 일찍이 아무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주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새로운 삶의 의미와 보람과 역할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이 노년철학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인생 50년 시대의 문명이 인생 100년 시대에도 그대로 인간과 사회와 세계의 향상・ 발전・ 진화에 미래공창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명개벽이 필요하지 않을까?



8월 31일 토요일

한국의 보은군이 주최하는 제6회 국제회의는 ‘노년철학과 미래공창: 새로운 과학기술과 미래공창과 새로운 문명’이라는 주제로 3세대─청소년세대와 중장년세대와 노숙년세대─사이의 함께 배움과 서로 가르침을 통해서 인생 100년 시대의 시대적・ 상황적 요청에 궁극적・ 적극적으로 기여・ 공헌・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11월에 개최 예정인 일본 시즈오카 현과 비교문명학회가 공동주최하고, 일본의 제1회 장수철학 국제회의에서의─장수철학과 비료문명─ 발제와도 연결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면 지속적인 사고발전을 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세 분의 발제자에게 제안했다.

김용환 교수: 장수철학과 문명의 대전환

김영미 시인: 로마와 경주에서 찾아오는 장수의 의미

원혜영 강사: 젠더(남녀)와 에이징(나이듦)



9월 1일 일요일

오후 4시에 김태정 교수와 그의 아들 김석철 강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지난 번 교토의 간사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있었던 미래공창신문사 주최 제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에스의 김석철 강사의 발제강연이 훌륭했고 반응이 좋았던 것을 치하하고, 내상 때문에 참석치 못한 김태정 교수에게 자상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한국에서 온 김영미 시인이 김석철 강사와 협력해서 일본의 와까(和歌)를 한국에로 번역해서 한국인에게 알리고, 한국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일본인에게 알리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 합의를 아룬 것 같다는 것도 지적했다.

좋은 만남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치적으로는 1965년의 한일수교 이후 최악의 상태에 있는 한일관계이지만, 뜻있는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이 보다 바람직한 관계발저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뜻을 김태정 교수와 김석철 강사에게 전하고 격려했다.



9월 2일 월요일

어제부터 무릎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오늘 새벽에는 격통 때문에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 누워 있으면 아픔이 더하여 일어났다. 일본에 오기 전 한국에서는 옆구리가 아파서 고생했는데, 그때도 누워 있으면 더 아파서 일어났었다.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를 찾아온 손님을 정중히 모시고, 나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옆구리가 아팠던 것은 오랫동안 계속된 나 자신의 잘못된 자세와 습관에 연유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었다. 그래서 자세와 습관의 교정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무릎이 아픈 것은 무슨 까닭일까?

국제회의 참석자들이 야마모토 사장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오늘 새벽에 뜯어보았는데 야마모토 사장과 내가 함께 한국의 참가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치토세기쿠(千歲菊)’라는 이름의 양갱을 보고 감회가 깊었다. 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인데, ‘엔넹(延年), 치요미쿠사(千代見草), 요와이쿠사(齡草)’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여, 불로장수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겨져 왔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아달라는 야마모토 사장과 내가 정성을 담아서 마련한 선물이었다. 야마모토 사장과 나의 그러한 섬세하고 정성된 마음 씀이 참가자들에게 전해지고, 맛있게 자시고 오래 살아서 노년철학을 제대로 담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9월 3일 화요일

오전 11시, 우메다 기노쿠니야서점 앞에서 오구라 기조 교수와 야마모토 교시 사장을 만나, 곧장 요도바시카메라 6층의 중화식당에 가서 점심을 함께하면서 담화를 즐겼다.

아주 오래간만에 만났기에 나눌 이야기가 많았지만, 노년철학을 함께 정립해보자고 제안했고, 오구라 교수도 함께해보자고 응답했다. 마음이 든든했다. 오구라 교수의 대학원 수업에 참가하는 다국적 젊은 세대의 생각과 관점과 주장을 포함할 수 있으면 세대간 상화・상생・공복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참신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오늘의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너무 정치적으로 이념화되고 양극화되어 있어서 정치이념이나 정권에 대한 편향에서 자유로운 철학대화운동을 함께 펴나갈 수 있는 젊은 동지를 찾기가 심히 어렵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은 문재인정권의 정치노선을 지지할 수 없다. 일본인 학자들과 한일간 철학대화를 통해서 바람직한 미래공창─gerontopia 건설─을 공동 실현시키려 하는 것이 진정한 보국(輔國)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일=애국・ 친일=매국을 표방하는 문재인정권과는 코드가 안 맞는다.



9월 4일 수요일

외국에 나와 있으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자국에 있을 때보다 국가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더하게 된다. 나는 솔직히 대한민국에 대한 애착은 있으나 문재인에 대해서는 호감이나 존경이 생기지 않는다. 그가 조국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다.

그래서 그가 최고통치자로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이 심하게 손상된 상태에 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대한민국은 내 조부모나 부모나 형제자매의 나라이기 때문만이 아니고, 내가 거기서 나서 자란 곳이어서만도 아니다. 역사나 전통이나 문화에 애착을 느껴서만도 아니다.

내가 나의 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아끼고 거기에 충성심을 느끼고 나의 인간적 자기정체성의 근원으로 삼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나타나 있는 국가이념이─자유・ 법치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과 생명・ 인격의 존엄성・ 시장경제・ 개방적 국제주의─ 나의 신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9월 5일 목요일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보아도, 문재인정권의 정치노선을 지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민이 많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내 나라의 대한 애착과 충성은 나의 조국 대한민국 국민의 다수가 뽑은 대통령에 대한 애착과 충성을 포옹하는 것이 당연한데, 지금의 대한민국이 놓인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과 충성이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동반자들에 대한 반감과 저항을 포용하지 못해서 고뇌와 갈등이 심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은 대한민국 국민과 문재인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집권세력을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존재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유하는 바가 없고,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자기네들과 생각이 다르면 격렬하게 매도하고, 자기들과 같은 편이라고 여겨지면 무조건 감싼다. 문재인 편에 서는 것이 애국이고, 반대편에 서는 것이 매국인 모양인데, 그런 애국관을 나는 용인할 수가 없다.



9월 6일 금요일

왜 문재인과 그의 집권동반자들은 일본을 그토록 싫어할까? 나는 일본을 좋아하는데, 나의 대한민국 사랑과 일본사랑은 상호보완적이다. 나의 한국사랑은 일본 사랑으로 보완되고, 나의 일본사랑은 한국 사랑으로 보충된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만큼 일본도 사랑한다.

나는 한국과 일본만 사랑하는 게 아니고 미국도 사랑한다. 한국은 내가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내 영혼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국가이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 일본은 솔직히 나의 철학적 열정을 고스란히 불태울 수 있는 곳이었고, 지금도 철학 대화활동의 공도추진자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끈질기게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조국인 일본을 그들과 함께 사랑한다.

미국은 나의 젊은 시절의 꿈을 마음껏 펼쳤던 곳일 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선택했고 존자가 거기서 태어나서 자란 고장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사랑한다. 미국이 내세우는 국가이념도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8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6.07 21:08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24 20:17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1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10 19:4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10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26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9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12 20:1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8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3.22 19:28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7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1.12 20:07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6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22 19:2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5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08 20:3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24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10 21:12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0.27 20:12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8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3.22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8월 18일 일요일

어떤 독자가 8월 17일에 올렸던 글 속에 나오는 ‘활명연대(活命連帶)’라는 말의 뜻이 대강 짐작은 되지만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세 종류의 국어사전을 뒤져 보았으나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아서 직접 물어보기 위해 내게 전화를 했다.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가 생각해 온 바를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활명(活命)’이라는 말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조어(造語)이기 때문에 사전에 나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철학대화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아니고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낯선 어휘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철학운동에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말이 필요하고 그래서 기왕에 있는 말을 새롭게 뜻풀이 하던가 아니면 아예 새로운 말을 말들 수밖에 없다.

활명이라는 말의 뜻은 기왕에 태어난 목숨 = 생명은 어떤 조건, 상태, 현상이 건간에 태어났다는 사실자체를 축복하고 감사하고 존중하고 온전하게 다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사상, 견해 등에 전면으로 대치되는 관점, 입장, 주장이다. 개인에 대해서도 그렇고 국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지만 극단화, 절대화, 독선화 되지 않도록 신중한 균형감각을 상실하지 않도록 늘 스스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될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한국과 일본은 노년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어린아이의 출산율이 감소하는 저출산, 저성장, 초고령사회화라는 전대미문의 대변혁을 겪으면서 새로운 생명관‧ 생사관‧ 인간관의 재조명‧ 재조정‧ 재정립이 시급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와 같은 시대의 요청에 창조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30년 전부터 앞서서 다양한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대책을 간구했던 경험과 대책과 성패가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일철학대화의 효용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일간 시민주도의 활명연대를 통해서 슬기롭고 구체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공동대응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더 없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활명”이란 중명(重命=주어진 목숨을 중히 여기다)이고, 존명(尊命=주어진 목숨을 존중한다)이고, 귀명(貴命=주어진 목숨을 귀하게 여긴다)이고, 전명(全命=주어진 목숨을 끝까지 다한다)이다. 이것은 생명철학적 지상명령인 동시에 노년철학적 대전제이며, 3세대의—청소년세대, 중장년세대, 노숙년세대— 상화‧ 상생‧ 공복 실현을 위한 공통최우선과제이다.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한다.



8월 19일 월요일

오늘에서야 옆구리 아픔이 실감될 만큼 경감되었다. 나이듦에 따르는 자연스런 증후이며 또 다른 형태의 아픔이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 올 것이다. 기피하거나 제거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친숙해지고 아픔을 통해서 무통 평안할 때 소홀히 여겼던 일들을 다시금 꼼꼼하게 되새겨 보는 기회로 선용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지난 일주일 동안, 특히 아픔이 심해져서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밤중에, 그리고 새벽녘에 몇 번이고 머리에 떠오르고 가슴에서 체감되고 뼈를 통해 팔다리로 내려가는 진지한 자문자답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얼마나 더 나이 들어갈지 알 수는 없으나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까? 나는 과연 어떤 나이듦을 바라는가? 아름답게 그리고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것? 아니면 슬기롭고 점잖게 나이 들어가는 것? 그것도 아니면 건강하고 풍요로운 나이듦?

내가 원한다고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몸이 몹시 아픈데도 마음은 나이듦의 갖가지 모습을 계속 그려간다.

나이 들어도 낡지 않고 시들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삶.

나이 들어도 싱싱하고 펄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삶.

나이 들수록 더 멋스럽고 더 점잖고 더 깔끔한 삶.

죽는 순간까지 설렘을 잃지 않는 나이듦.



8월 20일 화요일

HY야, 80대 중반까지 살아온 내가 심정적으로 가장 깊은 공감을 느끼는 시 한수를 고른다면 누가 쓴 어느 시라고 말하겠느냐고 물었었지?

그때는 내 옆에 앉아있던 기성시인이 어떻게 느낄까가 마음에 걸려서 즉답을 못했었지. 그리고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어서 잊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에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진솔한 물음에 진솔하게 대답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져서 자백할까.

85세의 내게 가장 진한 감동을 주고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해주는 시는 놀랍게도 27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의 “서시(序詩)”인데 노경(老境)의 심심(深心)을 그만큼 나이 들어보지도 못한 젊은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도 영롱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의 한없이 맑고 깨끗한 시심(詩心)‧ 시혼(詩魂)‧ 시영(詩靈)이 어우러져서 출산한 생명의 절규였을 거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中>



젊은 한때 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를 “별을 헤이는 마음”으로 고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바꾸어서 “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고쳐서 그것을 내 삶의 지표를 세웠었지.

중장년기에는 주로 일본에서 일본인 벗들과 공공철학대화운동에 몰입열중하고 있었을 때 어쩌다 마음이 허전한 밤이면 정말 뜻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맥주라도 마시면서 되는 이야기,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본 땅에서 한국인인 내가 철학대화운동을 해가는 데서 예상 밖의 온갖 왜곡, 오해, 중상, 모략, 폄하에 부딪히고 상처를 입을 때마다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나는 괴로워했다”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심상풍경(心像風景)이었어.

그러나 이제 나도 명실이 함께 노숙년기에 접어들었어. 내게 주어진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나도 이윽고 그들과 하나가 될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남은 나에게 주어진 길을—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표표하게— 걸어가야겠다.”는 윤동주 시인과 나 자신의 상호영통(相互靈通)을 이루게 해주는 시이기 때문에 “서시”는 내게 더없이 귀한 거야.



8월 21일 수요일

오전 10시 이스터항공 ZE 7201편으로 청주 출발, 11시 30분 오사카 도착, 일본 생활 시작.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나는 일본을 좋아하는데, 왜 문재인정권은 일본을 미워하는가? 반일이 곧 매국이요 따라서 친일은 매국이라고 강변하는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영락없이 매국노가 되는데, 나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나는 문재인정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강변하건 간에 지일이 애국이라고 생각하고 내 생각에 따라 한일철학대화를 끈질기게 계속해 왔고 앞으로도 그대로 이어갈 것이다.

특히 노년철학을 정립하고 의미 있게 노년을 맞이하고, 노년에 이르러야 비로소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삶의 맛과 멋과 보람을 젊으신네들과 공감하고 싶다. 그리고 나이듦이야말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늙으신네들이 자각하고 본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야마모토교시 사장과 내일 11시 30분, 기노구니야서점 앞 관장에서 만나기로 약속.



8월 22일 금요일

오전 11시 30분, 기노구니야서점 앞에서 야마모토 교시 사장을 만나, 늘 같이 가던 중화식당에 가서 25일부터 열리는 미래공창신문사 주최 제1회 노년철학 국제회의의 운영에 관한 세부사항을 협의했다.



1) 한국 측 참가자에게는 숙식비 외에 균일하게 항공료 3만 엔+참가비 3만 엔을 합하여 6만 엔을 지급한다.

2) 김석철 군의 참가는 1일간 예정에서 3일간 참석으로 변경한다.

3) 유성종 선생이 희망한 정통적인 오뎅 석식은 마땅한 데가 없어서 포기한다.

4) 논문집은 일반인에게는 무료 배포한다.

25일 행사장에 갈 때, 교토 다이마루백화점 일구에서, 야마모토 사장과 11시에 만나, 한국 측 참가자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중식을 같이 하고 행사장으로 가기로 약속하다.



8월 23일 금요일

오전 10시, 안마를 받음. 온몸에 안 앞은 데가 없다. 그동안 여러모로 무리가 쌓인 것 같다.

모처럼 이발하러 갔더니 정감 있는 인사로 반긴다. 일본사람들의 손님 관리는 정말 철저하고 섬세하다.

오후 3시에, 안과에서 눈 상태 검진, 이상 없음. 안구피로증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 받음. 안약을 받아 귀가하다.

森次郞 지은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한 진화의학 입문(人生を生き抜くための進化医学入門)’ (포리쉬워크Polish Work: 2016)을 완독. 진화의학의 사고방식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강문제나 사회문제에 대하여, 인류 진화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그런 문제들이 존재하는 이유의 본질을 알게 해준다.

진화의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시간’이라는 좌표축을 더해서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학문이다. 요컨대 삶이란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이란 다름 아닌 나이듦을 뜻한다.

그리고 노화나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병=질병이 아니라 생명의 정상적인 생리현상일 뿐만 아니라 생명진화에 필수불가결의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진화의 과정의 한토막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나 노화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나 인생 그 자체도 진화의학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8월 24일 토요일

26일부터 시작되는 미래공창신문사 주최 제1회 노년철학국제회의에 임하는 나 자신의 노년철학을 생사관과 의철학에 관련시켜서 정리 요약하면 다음 6개의 라틴어 문장으로 명제화 할 수 있다.

1) Nascor, ergo morior.(I was born, therefore I die.)

2) Vivo, ergo senesco.(I live, therefore I age.)

3) Senesco, ergo sapio.(I age, therefore I awake.)

3-1. Senesco, ergo deleo.(I age, therefore I pain.)

3-2. Deleo, ergo sapio.(I pain, therefore I awake.)

4) Mors est initium novum.(Death is a new begining.)



이것을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라틴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한문으로 바꾸어 놓으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出生則入死.

2) 生存則加齡.

3) 加齡則質醒.

3-1. 加齡則感痛.

3-2. 感通則質醒.

4) 死終則新始.



마지막으로 우리말로 요약한다.

1) 나는 태어났으므로 죽는다.

2) 나는 살아 있으므로 나이 든다.

3) 나는 나이듦으로 깨닫는다.

3-1. 나는 나이듦으로 아프다.

3-2. 나는 아픔으로 깨닫는다.

4) 죽는다는 것은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8월 25일(일요일) 21:10

칸사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오래간만에 미야모토 히사오 교수를 만났다. 그동안에 여기저기서 일본어로 타자론이나 아우슈비츠에 관해서 말했던 것을 일본어와 프랑스어로 재정리하고 그것을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출판하는 수고가 많았다는 것 같다. 내용에 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표현상의 차이를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김용환 교수가 ‘장수시대 장수윤리’라는 책을 충북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동양일보에서 매월 두 번씩 열고 있는 공개강좌에서 강연하고, 앞으로 강연할 예정인 ‘장수윤리론’을 책으로 정리해 놓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하라다 켄이찌 회장이 안내하여준 순일본적 식당에서, 유성종 선생, 진교훈 교수, 야마모토 교시 사장, 하라다 회장, 나하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담소하였다.

유성종 선생이 일본의 진짜 오뎅을 맞보고 싶다고 해서 유명한 오뎅집에 갔었는데, 손님이 초만원이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칸사이 세미나 하우스에 돌아와 보니, 키타지마 기신 교수와 오오하시 켄지 선생, 시바타 구미코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내일부터 시작한 학술회의를 성공시키고 싶다는 말을 하고서, 쉬도록 했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7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6.07 21:08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24 20:17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1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10 19:4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10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26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9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12 20:1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8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3.22 19:28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7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1.12 20:07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6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22 19:2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5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08 20:3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24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10 21:12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0.27 20:12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7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1.12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8월 12일 월요일

잠견자박(蠶絹自縛:누에가 자기가 만든 고치안에 갇혀서 밖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말이 생각난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 최초의 나라인 북위(北魏)의 고승 담란(曇鸞, 476-542)의 ‘논주(論註)’라는 책 속에 나오는 말인데 자기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 갇혀서 외부세계의 들어야 할 말을 들을 수 없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 무이인(無耳人:귀가 없는 사람)이 되고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거나 보려 하지 않는 무안인(無眼人:눈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변태인간의 경우를 지칭한다.

사인(私人)의 경우에는 사정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오로지 자기 소신에 따라 자기만의 세계안에 칩거하여 곁눈질을 하지 않는 고고(孤高)한 삶을 견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인(公人), 그것도 한 국가의 최고위 공직자의 경우에는 용납될 수 없다. 다양한 가치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 자유로운 국민의 삶을 각자의 자주성, 독립성, 차이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것을 국가 전체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과 행복추구를 가능케하는 종합예술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위 공직자와 그를 보좌하는 핵심공인들에게는 잠견자박은 본인의 정치윤리적 책무이행을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위탁된 국민전체의 주권을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전체를 자기들이 빠져있는 누에고치안에 가두려는 처사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매우 심하거나 매우 나쁘거나 하여 어이가 없어 말로써 나타낼수가 없는 일)이다.

국민을 반일애국이라는 틀에다 묶으려는 것은 반시대적 잠견자박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8월 13일 화요일

어떤 한국인 여성학자의 학문적인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되도록 널리 알리고 싶어서 조그마한 국제회의에 모시고 의견을 피력하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했었다.

20여명의 국내외학자들이 노년철학에 관해서 자유롭고 활발한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런데 마침 내가 사회를 보던 세션에서 그분이 나에게 노년기의 사고와 인식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몇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질문은 가짜뉴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과 어긋나는 뉴스라고 대답했다. 평범한 상식인의 입장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분은 “주로 누가 가짜뉴스를 퍼뜨린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다시 질문했다. 나는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 이야기하자면 여당도 야당도 그리고 심지어 청와대도 각자의 이해타산으로 가짜 뉴스를 열심히 생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잠시후 둘째 질문을 했다. Me Too 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지나치게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들이 여러모로 고생이 심했고 억울한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진정으로 여남평등이 실현되는 쪽으로 사회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겪어야할 발달과제로써 필요하고 중요한 뜻이 있다고. 그러나 작금의 사태진전을 주의 깊게 보아오면서 과장과 왜곡과 날조의 위험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나의 솔직한 감회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질문은 “촛불집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라고 던졌다.

나는 학자사이의 진지한 의견교환이라는 입장에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많은 사람들–특히 젊은 남녀들–이 촛불을 들고 정치적 소신을 공개적으로 표시, 주장, 관철하려는 집단행위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의 발동이기 때문에 그 뜻을 소중하게 존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태극기집회도 열리고 촛불집회와는 다른 정치적 소신을 표출, 주장, 관철하겠다는 집단행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참가자수가 더 많으냐라는 측면을 고려하면서도 똑같은 기본권의 발동이라는 점에서 차별해서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와 같은 질(質)의 응답형식의 대화가 있고 나서 얼마후에 어느 지방신문에 게재된 그분의 글 가운데 이날 함께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요약해놨다.

그리고 나에 대해 몇 마디가 적혀있었다. 그 내용은 내가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지 한국인식이 잘 되어 있지 않고 한국을 폄하하는 보수적이 노인이고 자기는 언제까지나 보수화되지 않고 늘 진보적이 인식과 입장을 지니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글쎄, 나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80대의 중반을 살아가는 나로써는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이고 보수와 진보의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게 살아오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리고 학문적인 입장에서 했던 이야기를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이 참 유감이었다.



8월 14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타케나카 히데토시(竹中英俊 전도쿄대학출판회 상무이사, 편집국장)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쿄토포럼이 내가 자진해서 그만둔 후 4년 동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말부터 도쿄대학의 나까지마다카히로(中島隆博 중국철학과 프랑스철학을 아우르는 비교철학분야의 제1인자)교수를 내 후임으로 영입해서 세계철학대화를 본격시동하게 되었고 지난달에 그 첫째모임을 가졌었다는 최신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해 네 번정도 소인수로 수준높은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고 나중에 그 성과를 정리해서 책으로 엮어서 출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우선 쿄토포럼이 제대로 방향설정을 하게 되어 안심할 수 있고 더구나 내 다음 쿄토포럼의 학술활동을 주관할 사람이 다름 아닌 나까지마다카히로교수라면 그의 인간적 품성이나 학문적 능력을 잘 알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크고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뜻도 전해달라고 말했다.

나 자신은 국가와 개인, 시민사회와 기업, 지역간, 남녀간, 문화간, 종교간 등등 소위 일국내 공공성(Intranational Publicness)을 중요과제로 삼았었고 거기서 생겨나는 갈등구조의 해소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사이를 넘어서는–between&beyond-공공(公共)의 지평을 열어가는데 심열을 기울였다.

일본에서 여러나라 사람들과 함께 시민주도의 철학대화운동을 통하여 성취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여러가지 이유와 조건과 사정 때문에 전 세계적인 스케일의 공공철학을 구상할 수 있는데 까지는 가지 못했었는데 이제 학문적이고 실천적인 기반이 만들어졌으니 전 세계적인 스케일의 공공철학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단계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걸맞은 유능한 사람이 참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며 쿄토포럼의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이루지 못했던 과제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이 세대간의 공공성의 문제다. 나까지마교수가 공공성의 새로운 차원을 공간적확충–국가에서 세계로–에서 찾으려는데 대비해서 나 자신은 한국을 중심으로 청소년세대와 중장년 세대와 노숙년 세대의 상화(相和), 상생(相生), 공복(共福)을 공동구축하는 철학을 새롭게 엶으로써 공공성의 세대계승생생 (generativity)에 재도전해보려는 것이다.

일본에서 나까지마 교수가 그리고 한국에서 내가 언제나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발전하는 공공(하는)철학을 한층 더 심화, 고양, 확충 할 수 있게되어 기쁘다.

한일간 관계가 정치적 차원에서는 전후최악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일본에도 많이 있지만 연구하는 시민, 철학하는 시민, 대화하는 시민이 주축이되어 보다나은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의 이런 심경을 타케나카히데토시 씨에게 토로했고 뜻을 같이하는 철학대화의 벗들에게도 꼭 전해달라는 말로 반가운 전화한담을 아쉽게 끝냈다.



8월 15일 목요일

오늘은 74번째로 맞이하는 광복절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정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 곧 8월 15일이라는 것이 광복절의 국어사전적의미이다. 그리고 광복은 과거에 잃었던 국권을 도로 찾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동아새국어사전 제1판 두산동아).

일본어 사전에는 어떻게 뜻풀이하고 있을까? 대표적인 일본어 사전인 정성판일본국어대사전에는 우선 광복을 1.부흥하는 것,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 2.일본의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지칭한다.로 뜻매김 되어 있고 광복절에 대해서는 (조선어 Kwangbokchol) 대한민국의 축일의 하나,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경축하는 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기념일이라고 해설되어있다.

한일양국간의 광복적인식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에서 거행된 74회 광복절 기념 행사에 즈음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를 주의 깊게 듣고 나서 느끼는 솔직한 소감은 문재인 대통령의 사고와 인식과 입장이 아직도 해방 전의 독립운동적 발상에 머물고 있고 너무나 과거에 얽매여 있어서 한국과 일본과 세계의 미래구축에 한국적 기여를 구상하고 그것을 관계당사국과 더불어 전향적으로 협력해나간다는 포부와 도량이 전혀 들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과거에만 매달리고 과거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현재로부터는, 미래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 21세기의 한국이 대웅, 대결, 대처해야 할 발달 과제가 너무나 많은 이 때에 우리나라의 최고위 공직자의 역사인식과 미래전망이 너무나 빈약하고 비현실적이어서 한사람의 관심있는 시민으로써 자못 걱정스런 염려를 금할수 없다.

정치적으로 해방되고 법적으로 자주독립국가로써의 기틀을 갖추었고 경제적으로도 기적적인 성장발전을 이루어 낸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영혼이 아직도 충분히 탈식민지화, 탈영토화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서 그의 국정운영이 자못 불안하다.



8월 16일 금요일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하는데 1945년의 시점에서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일제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자유회복기념일이다.

그러나 해방되고 자유를 찾았다고는 해도 거의 무정부상태였다. 내기억으로는 감격과 불안이 혼재하는 혼돈의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의 시점에 이르러 되찾은 국권이 정돈되고 나라의 기틀–국민, 영토, 주권+국제적 승인–을 제대로 갖춘 반공자유민주주의헌법에 기반을 둔 국가건설을 국내외에 선포하게 됨으로서 건국기념일이라는 뜻이 보태어졌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자유를 되찾고 나라가 세워지고 가꾸어지는 가운데도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측면에서 서서히 주권국가의 구성원으로써의 긍지와 명예와 책임의 성장, 성숙이 정치발전과 경제성장과 문화창달을 균형잡고 조화롭게 꽃피워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의식을 2016년 8월 15일의 시점에서 영혼의 탈식민지화, 탈영토화를 자성, 자인, 자각하는 계기로 삼자는 뜻을 담고 한일양국의 관심공유자들 사이의 진솔한 대화의 광장을 마련했었다.

동양일보가 기획하고 동양포럼이 주관하는 국내외회의를 몇 차례 개최했고 거기서 나누어진 대화내용을 여러번에 걸쳐서 동양일보에 게재함으로써 널리 일반시민들에게 공개한 바가 있다.

나는 사람이나 나라나 나이 드는 존재–시간적 존재(時存)–라고 생각한다. 나이듦이란 기본적으로 나이에 따른 의식과 무의식과 전의식의 변화, 성장, 성숙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8월 15일의 의미도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뜻이 새로워지고 그렇게 새로워진 뜻이 새로운 인간과 국가와 세계의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데 적극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도량과 포부를 길러 갈 수 있는 계기로서 뚜렷하게 뜻매김 할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2019년 8월 15일 뜻풀이는 한일노년철학 대화를 통해서 생명개벽을 상호자각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활명연대성(活命連帶性=Global Web of Mutual Enlivening and Conviviality)을 함께 진솔하게 심사숙고해보고 필요한 실천활동을 시작해 보는 계기로 삼는데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일본 쿄토에서 제5회 한일노년철학포럼을 일본의 미래공창신문사주최, 동양포럼협찬으로 개최(8월 26~28일)하게 된 것이다. 활명연대라는 개념은 2015년부터 다양한 장소와 기회에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새시대의 새로운 한일관계의 발전방향으로 설정하고 한일양국의 관심공유자들과 논의 해 왔던 핵심과제의 하나였으나 2019년 8월 15일을 시점으로 보다 깊은 의미탐구와 시민주도의 연대활동으로 이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8월 17일 토요일

8월 15일에는 적어도 광복절과 건국절이라는 두개의 뜻풀이가 필요한데 문재인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집권 엘리트들은 한사코 건국절이라는 뜻을 거부, 부정, 말살하려 한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관한 반출생주의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래서 될수있는대로 빨리 철저하게 존재의 흔적을 없애고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국가–반(反)대한민국적인 국가상–를 세우려고 역사와 체제와 이념을 완전히 바꾸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과 거기에 속하는 대한민국의 반출생주의자들에게 항거하고 그들이 기획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거부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친출생주의 라는 입장을 준수한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민족의 위대한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동안의 곤란(困難)극복과 성장발전을 예찬한다. 그래서 광복절이라는 의미이상으로 건국절이라는 의의를 기리고 값지게 기억하려한다.

이것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그리고 한국인을 철저하게 이분화시키고 타협불가능한 극한 대립, 갈등, 분열을 촉발시키고 있다. 특히 세대간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국가의 출생자체가 민족불행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Hell Korea가 당연한 현실인식일 수밖에 없겠지. 해방 후의 혼돈기를 몸으로 체험했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나같은 노년기의 인간에게는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탄생은 커다란 기쁨이고 희망이고 긍지였는데….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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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6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2.22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8월 4일 일요일

젊어서는 머리가 몸을 다스린다고 생각해서 철학을 머리로 했었다. 마음이 머리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학생일때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선교사부부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들이 살던 양옥집에서 양식식사를 처음으로 대접받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던중 마음(mind)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대뜸 “Where is your mind? (네 마음은 어딨니?)” 라고 물어서 “It’s here(여기요).”이라고 대답하면서 손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Your mind is up here.(네 마음은 여기 위에 있어)” 이라며 머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 정확히 어디서 배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은 가슴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수 없어서 머리마음(head-mind)과 가슴마음(heart-mind)이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선교사부인이 “Wonderful!” 이라며 좋은 생각이라고 나를 격려해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다. 마음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있다. 나중에는 마음은 두뇌작용에서 나온다는 학설도 듣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아마 70대에 들어서면서– 머리가 아니고 몸으로 철학하게 된 변화를 자각하게 되었다. 이론인식이 아니라 신체감각이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아니다. 내장감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내장감각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아픔이다. 아플때 내장감각이 작동한다.



내가 가족들의 권유에도 거스리면서 병원에 가지않고 고집스럽게 옆구리아픔을 견디고 있는 것은 그 통증을 끝까지 온전히 앓으면서 아픔의 모습을 직시, 직감, 직고함으로써 내장감각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철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 청소년 철학이나 중장년 철학과 다른, 그러면서도 3세대상화, 상생, 공복(共福)의 공동실현을 통해서 바람직한 미래공창(未來共創–co-creating futures) 함께 이루어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노숙년철학이 될 것 같아서이다.

나이들어 겪게되는 여러모양의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을 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 대처, 대결하면서 그 뜻과 보람과 새열림을 함께 체감, 체험, 체득해 나가자는 것이다. 오래살다보니 여러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그다지 싫어할 일이 아니라 값진 기회라고 생각하고 긍정적인 가치부여를 하면서 친숙해지고 싶다.



8월 5일 월요일

우리말의 아픔에 해당하는 영어는 Pain 인데 그 어원은 라틴어의 Poena와 그리스어의 Poine인데 처벌 또는 대가(代價: 어떤 일을 함으로써 생기는 희생이나 손해 또는 그것으로 인하여 얻어진 결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요 며칠동안 나를 괴롭힌 아픔을 곰곰이 살펴보면 나의 과거의 잘못된 습관 또는 자세에 대한 교정(矯正: 좋지않은 버릇이나 결점 따위를 바로잡아 고침)적 처벌인 동시에 그것들에 대해서 이미 주의를 기울이고 시정할 필요성을 충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부려온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다는 점을 통절하게 반성하고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각성이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온갖아픔을 겪었지만 거의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남을 탓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팠기 때문에 내 분수를 알고 부질없는 무리를 삼가했으며 되도록 매사에 신중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넜다. 그래서 어렸을때나 젊었을때나 중장년때나 아플때가 많았는데도 나이들수록 건강이 오히려 더 좋아졌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 건강이 균형잡혀감을 실감한다.

나는 아픔을 통해서 깨닫게 된 내 나름의 철학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알아야 산다” “아파야 안다” “앓아야 아프다” 아, 그것보다도 거꾸로 말해야 할 것 같다. “앓으면 아프다” “아프면 안다” “알면 산다” 라고.



8월 6일 화요일

어떤 사람이 내게 말했다. “서로 자립하기로 했으니 따로따로 가자” 고.나는 생각이 다르다고 이렇게 말했다. “서로 자립하기로 했으니까 자립한 자리에서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 지지 않겠느냐?”

그는 또 말했다. “그러면 다시 의존관계로 돌아가게 되니까 따로따로 감으로써 자립을 지킬 수 있다.”

나는 말했다. “그것은 자립이 아니고 의존공포다”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진정한 자립은 대화를 위한 상호의존을 두려워하지않는다”라고.

일본을 미워하고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립한 자주적 주체로서의 한국이 일본과 서로 필요로 할때 제대로 상호의존의 길을 열어가는 마음자세를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한 자립과 자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제까지 영혼의 탈식민자화, 탈영토화를 이루지 못하고 일본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을 것인가?



8월 7일 수요일

오늘날 우리의 나라꼴을 한자 네글자로 요약표현하면 “국병민고(國病民苦: 나라일을 책임진 위정자들이 병들어서 국민이 괴로워하고 있다)가 딱 들어 맞는다.

내가 나라안팎에서 30년동안 펼쳐온 공공(하는)철학에서 쓰는 어휘로는 다름아닌 “공환사통(公患私痛: 공직자들이 온통 중병에 걸려있어서 개인들이 심한 아픔을 겪고있다)이다.

그래서 당장 필요한 대처방안은 “국병민치(國病民治: 나라 병을 국민이 치료)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공공(하는)철학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민산국환(民刪國患: 국민이 수술칼을 들어 나라의 환부를 제거)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치공병(私治公病: 개개인이 정신차려서 집권자들의 병을 고친다)이다.

그렇다면 국민이 믿고 국정의 책임을 위임했던 최고 책임자와 그를 보좌하는 고위공직자들이 걸린 이 질병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중증 반일강박신경증 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극심한 합병증으로 반미와 친북의 이상심리증후근이 수반되어있는 병리상태다.

문제는 개인의 사적인 정신질환이라면 개인적으로 대처하면 남이 감놓아라 대추놓아라 간섭할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 국정의 최고책임자와 그를 보좌하는 자들이 집단적으로 보여주는 공적인 병리상태가 장기간 호전될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어 간다면 언제까지나 수수방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개탄할 일이다.



8월 8일 목요일

세대간 대화를 주제로 하는 모임에 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참석했었다. 20대 남녀 각각 한명씩 두사람, 30대여성 두사람과 남성 한사람, 40대와 50대 여성 두사람, 60대 70대 남성 두사람,

그리고 80대 남성 한사람이 원탁을 둘러싸고 서로 마주보면서 허심탄회하게 하고싶은 말을 주고받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20대와 30대–남녀불문–와 60대 70대–여성은 없었지만–사이에 현실인식의 격차, 대립, 갈등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엄연한 사실앞에 마음이 아팠다.

60대와 70대와 80대–남자들뿐이었지만-는 그저 할말을 잃고 슬픈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장 심한 대립은 문재인 정권의 지지기반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는 촛불집회와 박근혜전대통령에게 동정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태극기 집회에 대한 찬반에 관한 것이었다.

20대 30대의 단호한 견해는 촛불집회를 폄하하고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보수골통하고는 대화자체가 성립불가능이고 그럴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충격적인 것은 대일인식의 극단적인 단절이다. 20대 30대 40대 50대 까지도 반일감정에 있어서는 일치동조현상이 뚜렷했다. 70대 80대는 일본을 무조건 증오의 대상으로 볼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어른스럽게대할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으나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그렇게까지 일본을 미워하는 걸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다가도 반일감정만은 놀랍게도 모두들 하나되게하는것을 보면서 오늘의 한국사회는 반일증오만이 최소한의 공동체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들어 진한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랑이나 희망이나 상생의 공동체가 아니라 증오와 반감과 원한으로만 존립가능한 공동체로 굳어져가는 것 같아서 처절한 심정이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오랜만에 돌아온 조국의 현실이 비통하구나. 되돌아보면 우리나라는 단 한번도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는 태평하고 국민은 평안하다)을 만끽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국난민산(國難民散: 나라에 난리가 나서 국민이 산산히 흩어질 수밖에 없다)의 반복이었다.



8월 9일 금요일

대학시절에 라틴어강좌를 함께 들었던 친구를 오랜만에-적어도 60년이상의 세월이 흐른후- 아주 우연히 만났다. 우리는 대학시절 경쟁적으로 라틴어학습에 열을 올렸고 2년째 되던 때부터는 서로의 생각을 우선 짧막한 라틴어로 간결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영어로 토론을 하곤 했었다. 지도교수님이 미국인 여성이었는데 지금생각해도 그분의 교수법이 탁월했던 것 같다. 덕택에 영어와 라틴어를 동시에 숙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둘다 홍차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근사해 보이는 찻집을 찾아 홍차를 함께 즐기면서 젊은 시절에 열중몰입했었던 라틴어로 서로의 인생살이에서 느끼고 깨달았던 것을 말해 보기로 했다.

그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20년 전에 정년퇴직하고 지금은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데 잠시 일이 있어서 한국에 왔는데 예기치 않게 나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는 85년의 세월을 되돌아보고 한마디로 “Vivereestcogitare(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Vivereestsenescere(산다는 것은 나이든다는 것)”이지만 세마디를 덧붙여야 그동안의 삶을 그려볼 수 있다고 했다.

즉 “Senescereestmaturescere(나이든다는 것은 무르 익는 다는 것)”이며 “Maturescereestfructificare(무르익는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며 “Fructificareestretrocere(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의 “Fructificareestretrocere(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가 특히 마음에 든다면서 뉴질랜드에 돌아가면 내가 제시한 네개의 라틴어 문장에 담긴 속뜻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나름의 생사관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도 했다.

서로가 멀리 떨어져 살아왔지만 그리고 정말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이지만 젊은 시절의 배움을 함께 했던 기억을 새롭게 체감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행복하라고 마음으로부터 기원하면서 헤어졌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다시 만나거나 연락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말을 남겨놓고 힘주어 악수를 하고 그는 떠나갔다.



8월 10일 토요일

시내에 나갈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다. 타자마자 운전기사가 말문을 열었다.

“요즘 살인적인 더위때문에 짜증이나는데 꼴보기 싫은 인간들 때문에 짜증이 두배, 세배로 심해집니다” 내가 물었다. “어떤 인간들이 그렇게 꼴보기 싫으십니까?”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친북반일을 외쳐대는 인간들이지요. 그들을 몽땅 북한으로 보냈으면 좋겠는데”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가 말을 했다. “요즘 나랏꼴이 엉망이지 않습니까? 관민(官民)이 하나되어 일본의 경제 침략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데 어떤 미친년이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총리에게 사과하고 하야하라고 개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그게 어디 제정신입니까?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토착왜구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고 친일잔재를 싹쓸어 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이는 비슷하게 보이는 택시운전기사 두사람이 정반대의 현실인식을 피력(披瀝)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착찹했다. 나는 한국전쟁때 피난을 못가서 북한식 공산주의를 체험해 보았다. 일본에서 살면서 새로운 철학을 함께 펴보자고 여러나라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서 일본인학자, 언론인, 사회지도자들 그리고 젊은 남녀들과 다각적인 친교도 맺어왔다.

한국과 일본의 가장 좋은 점들을 함께 살려서 바람직한 미래공창(未來共創: 미래를 함께 열어감)에 30년동안 전력투구해 왔는데 막상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심한 대일감정의 양극화현상을 직접 겪게 되니 침통한 심정이다.



8월 11일 일요일

2019년 8월 현재 대한민국에는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일본관이 우리의 인식과 태도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하나는 문재인 정권의 집권 엘리트들이–그 중에서도 특히 조국 (전청화대정무수석서울대교수, 법부부장관 후보자)씨가 앞장서서–주장하는 반일애국, 친일매국론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영훈(전서울대교수, 이승만학당교장)씨가 몇사람의 동료와 함께 펴낸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속에 담겨진지일애국(知日愛國=일본에 관계된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똑바로 알고 어른스럽게 일본에 대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이라는 반론이다.

반일애국론은 친북, 친중을 동반하는 반일, 반미전선을 형성한다. 한미일동맹을 해체하고 북한, 중국, 러시아 경제권에 들어가 반자유, 반자본, 반시장의 경제권형성을 지향한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기상천외의 신체제구축을 구상하고 있다. 반공자유민주공화국으로 탄생, 성장, 발전해온 대한민국의 전통성을 부정하고 인민사회주의공화국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일, 친미, 친서구를 주축으로 삼은 인식과 태도선택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체제밖에 밀려나 있으며 야당이거나 재야일 수 밖에 없다.

너무나 당연했던 합헌적인식과 태도가 어느새 반체제 이단사상으로 격하된 셈이다. 문재인정권이 시작된지 2년밖에 안되었는데 너무나 많은 것들이 크게 달라졌다.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와 평온한 노년을 보내려했는데 반시대적 이념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어 노년의 심기가 너무나 착잡하다. “Quo vadis, Korea?”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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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5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2.08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7월 27일 토요일

한 사람이 탄생한다는 것은 우주생명이 특정개인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태어난다는 것 (birth)-이고, 죽는다는 것은 다시 우주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귀환, 귀향(return)-이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사이를 한 삶, 일생, 생애 (Life)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거기서 와서 거기로 돌아가는 본디, 근원, 본원을 노자는 '도(道)'라 했고 장자는 '원기(元氣)' 라 했고 최재우는 '하늘님(天主)'이라고 하고 '지기(至氣)'라고도 했으며 기독교에서 '하나님(오직 한분이신 절대신)' 이라고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불려왔으나 각각의 속뜻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처럼 인격적 존재로 파악하는 경우와 노자나 장자처럼 비인격적 작동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요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동안 살다가 마침내 죽어서 이세상을 떠나게되는 이치를 요약해서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유사점이 있다.

이것을 다시 애초의 생명언어로 정리하면 우주생명이 어느 한사람의 몸을 빌려 이세상에 태어나서 일정기간 개체생명으로 차원전환 한것이며 마침내 죽어서 이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사망, 사멸, 사거로 보는 관점과 귀천, 귀원, 귀환으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본디로 돌아가서 어떤 형태가 될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모든 것이 끝나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차원의 생명이 시작된다고 본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서로 다른 점이다. 나는 죽음=새로운 시작이라는 관점을 견지해왔다.



7월 28일 일요일

나는 자신이 그 동안 나라안팎에서 펼쳐온 '공공(公共)'하는 철학 대화운동의 입장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일정기간 살다가 마침내 죽어가는 점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 라는 생사관(生死觀)을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주로 나 홀로의 문제로 생각하는 입장인데 그것은 '사(私)'적인 생사관이다.

둘째 유형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가를 위한 출생과 생명과 사망으로 뜻매김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공(公)적인 생사관이다. 한때 젊은이들이 국가를 위해서 죽는 것을 산화(散華=꽃잎처럼 아름답게 사라져간다)라고 미화한 적도 있었다.

셋째 유형은 사람과 사람사이-개인간, 가족간, 남녀간, 공동체 구성원간, 세계시민간-의 문제로 보는 입장이다. 그것을 나는 '공공(公共)'적인 생사관이라고 정의해왔다.

근대화의 역사는 국민국가형성의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를 위해서 태어나고 국가를 위해서 살다가 국가를 위해서 죽은 것을 찬양, 고무, 숭상하는 생사관이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성숙하면서 국가보다는 개인의 의미와 가치를 중심으로 인간의 탄생과 생명과 사망을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공적도 아니고 사적도 아닌 공공(公共)적 생사관의 수립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것의 간략하고도 의미가 분명한 표현을 라틴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라틴어표현으로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다 (Inter hominesesse)' 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음을 끝낸다(Inter hominesdesinere)'로 각각 표현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나 자신의 라틴어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사람이 태어는 것을 '사람과 사람사이에 나타난다(Inter hominesapparere)' 라고 하면 출생과 생명과 사망을 아우르는 공공(公共)적 생사관의 라틴어적 표현의 구색이 맞추어진다.



7월 29일 월요일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 영국 경험철학의 시조)이 했다는 말을 되새겨본다. "오래 될수록 가장 좋은 것이 네가지가 있다. 오래된 장작은 가장 잘 타고, 오래 숙성시킨 포도주는 마시기에 가장 좋고, 오래 사귀어 온 친구는 가장 믿을만하고, 오래산 작가가 쓴 책이 읽기에 가장 편하다"

나는 85년이나 살았으니 잘타는 장작이나, 고아(高雅)한 풍미의 포도주나, 삼익우(三益友)같은 친구나, 노련한 작가의 명작과 같은 삶의 진미(珍味)를 만끽 할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나자신의 오랜 삶이 누구에게 그 중의 하나라도 제공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스카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영국의 극작가, 소설가)는 "노년의 비극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젊음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라고 잘 알려진 장편소설 ‘도리언그레이의 초상화(The Picture of Dorian Gray)’에서 말하고 있다.

나의 젊은 시절은 너무 어렵고 어두운 시대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만한 좋은 일도 없었고 그저 일상적 생활이 힘들고 버거웠다. 그 젊은 한때는 세상이 빛났고 삶이 행복했었는데 이제 나이들어보니 세상이 빛을 잃고 삶이 불행하다는 비교감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여러측면에서 심사숙고해 보아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젊은 시절보다는 노년의 몸과 마음과 얼이 그런대로 집착에서 초연할수 있는 지금이 좋다. 와일드가 천재적인 문필력을진 지니고 있었지만 80년이 넘도록 인생을 살아보지는 못하지 않았는가? 직접 살아보아야 이 맛을 알 수 있다.



7월 30일 화요일

시(詩)와 대화는 노년기를 살아가는 나의 절친한 친구다. 세대간, 남녀간, 지역간, 전문영역간 대화를 펼쳐 오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눌때 사람과 사람이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무엇인가 서로 통한다는 느낌을 공유하게되는 관계-독일어만이 갖는 특이한 표현으로 ‘Mitmenschlichkeit’-가 형성되기도 하고 왠지 서로 어긋나고 부딪힌다는 느낌을 공분(共分)하게 되는 관계-독일어로 ‘Gegenmenschlichkeit’-가 조성되기도 한다.

공감촉진적 인간관계와 대립강화적 인간관계라고도 말할수있을 것이다. 너무 자기방어적으로 상대를 설득시키려는데만 주력하다보면 때로는 공연한 논쟁-원효가 말하는 '화쟁(和諍)'의 정반대-만 불러일으키게 되어 공감형성이 어렵게된다.

법률이나 정치의 세계에서는 필요한 일이겠지만 오늘의 동양포럼처럼 시를 통해서 다양한 역경에 처해서 아픔을 겪고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시를 함께읽으면서 정신신체상관적 치유효과를 높여보자는 뜻으로 모인자리에서 시가 가진 탁월한 정감성이 주시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노숙년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 사람으로써 시에 기대하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보다는 상관연동적 공감성이 아닐까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심신이 곤핍하고 영혼이 외로울때 아름다운 시 한수가 얼마나 풍요한 감동과 감격과 감사의 힘을 우리에게 선사하는가?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그립다.



7월 31일 수요일

내가 최근에 만난 시인들 가운데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시를 쓰신 분은 80대의 평범한 주부시인 이월순씨다. 동양포럼의 유성종 운영위원장소개로 알게된 이 분은 교회목사님의 사모님이시고 한 수필가의 어머님이시기도하다. 이 분의 많은 시들 중에서 특히 '미련없이가리라'라는 시가 잔잔하면서도 짙은 감동의 파동을 일으킨다.

미련없이 가리라.

주님 가만히 손 내밀면난 그 손에 내손얹어살며시 미소지으며 일어서리

이제 그만 가자하시면뒤돌아보지않고 따라가리내 사모하는 아름다운 그나라

보고팠던 엄마도 계시고그리웠던 동생도 있는데 나 얼싸 일어서 주님 손잡고 가리

고난 많고 굴곡 많은 세상사조금도 미련없어요.툭툭 다 털어버리고 가리라.내 늘 소망하던 저 좋은 하늘나라

이월순 신앙시집 '왜 나는 그를 사랑하나' (청주: 대한출판 2016) p. 95



8월 1일 목요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강단시인들의 시론에는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은 생활시인들의 삶에서 빚어진 체험-슬프고 기쁘고 아프고 보람있었던-의 응어리 알갱이들이 수식없이 영롱하게 녹아 스며있는 시에 접하게 될때 시인의 시혼(詩魂)과 나의 생혼(生魂)이 서로 울려서 삶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시란 내게 있어서 과연 무엇일까? 진지한 물음 앞에서 진솔한 응답을 찾는 나에게 평범한 주부 이월순시인이 64세 되던 해-아마도 정식절차를 밟아 시인으로 공인 받고나서-썼던 '시'라는 시가 내게는 어느 유명한 전문가 시인들의 시론들보다 나이듦에서 오는 정겨움을 공감하게 해준다. 난삽한 전문 철학자들보다도 일상에서 철학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친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처럼.




시는 나의 대변자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빠져 있을 때 시는 어머니처럼 다가와 나를 일으켜 달래 주었습니다.

시는 베개 위로 흐르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속박 감에 자유를 부르짖을 때 시는 해방으로 다가와 나를 탈출 시켜 주었습니다.

이유 없는 호통 속에 나는 기죽어 여자임을 한탄하고 울고 있을 때

시는 나에게 다가와 이런 때는 시를 써서 네 설음을 토해 내라고 권면을 합니다.

이월순 '내 손톱에 봉숭아물' 64세의 한 여인이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쓴 이야기 시집 (서울: 삶과 꿈) P. 129



8월 2일 금요일

며칠째, 아니 몇밤째, 옆구리가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약국에서 근육통의 일종이라고해서 한방파스를 부치고 기다려 보았지만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 나이듦에 따라 전에 없었던 아픔의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각오하고 있지만 그래도 옆구리가 아파서 잠도 제대로 자지못하는 아픔은 처음 겪는 일이다.

특히 어제와 오늘은 새벽 1시반에 통증이 아주 심해져서 누워있기가 어려워 일어나서 파스를 갈아부치고 손끝에 힘을 모아 눌러보기도 하고 열심히 안마도 해보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아픔은 나의 모든 경감을 위한 시도를 소용없는 꼼수라고 꾸짖으면서 그저 조용히 참아 내라고 훈계하는것같다. 그리고 정확한 원인도 모르면서 무식한 고집으로 제멋대로 처방을 내리고 통증을 학화 시키지 말고 병원에 가서 겸손하게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간다고 해도 옆구리가 아플때는 내과에 가야하는지 아니면 외과에 가야하는지 아니 그보다 앞서 어디에서 누구에게 가서 이런경우에 어느병원에 가야 하는지 물어보아야 되는가?

아픔이 심해진다. 견디기가 몹시 힘들다. 똑바로 앉아 눈을 감고 아픔의 진행상황을 지켜본다. 몹시 아팠다가 조금 덜해졌다가 또다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온다. 같은 자세를 계속 할수없게된다. 그래서 앉아있다가 걸어보기도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픔은 아주 심해졌다가 조금 덜해졌다 끝도없이 반복된다. 다행히도 가족들이 모두 평안하게 자고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심한 고통때문에 잠못이루는 사람들-특히 노년남녀들-이 많이 있을 거야. 눈으로 볼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수있는 고통의 공동체-아픔을 함께하는 자들의 동시적 연대-의식같은 것이 있어서 혼자서 견디어 낼 수 밖에 없는 고독속에서도 결코 처절하게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라는 실존적 진실을 실감한다.

이 실감이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고 아픔을 견디면서 새 아침을 기다린다. 아픔의 암흑이 진할수록 아픔이 완화되는 새벽노을이 그립다. 아니다. 더이상 안아픈 새 아침이 열릴 것이다. 아니다. 더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는 새아침을 열어야 한다. 오전 3시, 아직도 밖은 칠흙같이 깜깜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격통이 진정되는 밝은 동이 트일것이다. 동이트면 새날의 기쁨이 아픔을 이겨내는 새삶이 시작된다.



8월 3일 토요일

기왕에 옆구리아픔이라는 손님이 찾아왔으니 똑바로 마주해서 제대로 앓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현재시간은 새벽 1시 40분. 어제에 이어서 나흘째. 우선 아픔에도 몇가지 종류가 있고 번갈아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면서 각각의 존재와 특징을 알려준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쑤시는 아픔-疼痛–을 견디다보면 어느새 무지근한 아픔-鈍痛–으로 바뀌고 다시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아픔-極痛–으로 바뀐다. 그리고 아주 잠시동안 아픔이 아픔을 진정시키는 듯한 무통–아니 통증이 감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듯한–의 순간이 다가온다.

그래서 짧은 잠을 자게 되지만 이내 뼈속까지 침투하는 격통때문에 길고긴 불면의 시간을 견딜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픔은 잔인한 손님이다. 이쪽의 성의나 호의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래서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85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아픔을 여러번 겪었고 이제 다시금 전에 겪었던 것과는 다른 아픔을 겪고 있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아파야 하는 걸까? 라고.

그러는 동안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길고긴 심통(深痛)과 짧고 짧은 무통(無痛)의 반복순환을 감내하는 가운데서 마침내 체득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명제로 압축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나는 지금 살아있다. 고로 나는 지금 아프다 (Vivo ergo doleo = Now I live, therefore now I pain.)” 아니다. 더 절실하게 깨달은 바를 직설하면 이렇게 명제화 하는 것이 정직할 것 같다. “지금 나는 아프다, 고로 지금 나는 살아있다. (Nunc doleo, ergo vivo = Now I pain, therefore I live.)” 그렇다. 만약 지금 내가 죽었다 (= 죽어있다)면 아프지 않을 것이다. 몸이 아플때 살아있음을 분명하게 직감한다.

‘사람’이란 ‘삶의 뜻을 아는 존재.’ ‘알다’는 ‘앓다’와 그리고 ‘앓다’는 ‘아프다’와 속뜻이 서로 통하는 한글말들이다. 결국 인간은 자각하거나 무자각이거나 아픔을 견디는 존재(homo patiens)이며 그래서 서로 아픔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존재 (homo curans)이다. 아니다. 그냥 존재나 실존이 아니라 각존(覺存=아픔을 깨닫는 존재)이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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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1.24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7월 9일 오전 9시 32분

공자가 말했던 불혹(不惑)은 나 자신의 체감, 체험, 체인한 바에 따라서 영혼이 자유롭게 되는 시기라고 뜻풀이 한데 대해서 30세(나에게는 50세)에 확립한 자기관점과 입장에서 흔들리거나 방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맞는 말이다.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혹’(惑)이라는 한자를 ‘땅에 금을 긋고 줄을 쳐서 구획하고 그것을 무기로 지키는 마음가짐’이라는 원래의 뜻에다가 아니 ‘불’(不)이라는 글자를 첨가해서 이루어진 뜻글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특정이념, 사상, 학설의 테두리 안에 굳게 갇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과감히 탈출하여 활짝 열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 성숙, 진화되는 과정의 시발점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중장년에서 노숙년으로 바뀌는 시기(공자40세, 나의 60세)에 일어나는 각성체험의 특징으로 뜻풀이한다. 바로 이 시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다음에 이어지는 노숙년기(70, 80, 90세)의 각성과 자각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만약에 이 전환기의 특징을 ‘흔들림이 없는 관점과 입장의 확정’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게 되면 노숙년은 그렇게 확정된 관점과 입장에 따른 자기통합, 자기실현, 자기완결을 매듭짓는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과정으로 여기고 거기에 진력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느낌과 생각은 다르다. 내게는 이 전환기(공자의 40세, 나의 60세)가 자기중심에서 자타상생으로 삶의 기축이 전환되는 시기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이듦의 과정이 자기개방, 자기탈출, 자기초월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닫고 얼을 통해서 내 목숨이 하늘 목숨에 이어져서 마침내 거기에 돌아가게 되는 단계다.

삶의 차원이 훨씬 더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혀지는 것이다. 불꽃을 마지막에 또 한 번 피우는 (최종의 자기실현의)시기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의 불꽃을 온전히 사르어서 생명자체의 향상, 진화, 개벽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기다.



7월 10일 오전 9시 26분

공자는 50세가 되어 하늘의 명하심을 알았다고 했다. 대다수의 유학자 또는 논어 주석가들이 하늘의 명하심(天命)을 도덕적 최고선 또는 도덕적 지상명령으로 해석, 해설,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70대에 들어서 몇 번 극심한 병고를 겪은 바 있는데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괴로움 속에서 나 자신의 목숨=개체생명을 넘어선 아주 커다란 생명과 그 놀라운 힘=우주적근원적 생명에너지가 나의 살고 죽는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치, 진실,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그때 어려서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던 하늘의 명하심이라는 것이 내 목숨이 하늘 목숨과 서로 통하게 되어있는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의 진실을 몸으로 깨닫는 것이 '하늘의 명하심을 알다'(知天命)의 참뜻이 라는 각성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의 명하심을 도덕적 최고선=지상명령이 아니라 생명철학적 공동선=지상명령이라고 뜻풀이하고 ‘안다’를 ‘서로 통함을 깨닫는다’는 말로 바꾸어서-지천명을 통천 명으로 바꾸어서-노년기에 들어서는 처음단계=초로(初老)의 각성특징으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공자의 짧지만 고농도의 자기이야기(self-storytelling)에서 특히 50세에 이르러 알게 되었다는 천명을 도덕철학적 해석과 관점과 입장이 아닌 생명철학적 의료철학적 해석과 관점과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의 의철학적 사고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중장년기에서는 주로 도덕철학적 자기정체성의 탐구와 확립과 완성을 추구했으나 노숙년기에 들어서면서 나이듦의 의미와 가치를 생명철학적 의철학적 자기재점검을 통해서 자기라는 틀을 풀고 열어서 남들과 서로 잘 통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자타상화, 자타상생, 자타공복을 함께 이루어가는데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공자가 50세에 알게된 도덕적 각성체험이요 내가 70대에 들어서 깨닫게 된 생철학적, 의철학적 각성체험의 실상이다.



7월 11일 오전 6시 49분

나는 지나간 85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아픔을 겪었다. 몸의 아픔, 마음의 아픔, 그리고 영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내가 겪은 모든 아픔의 근본원인은 거의 예외 없이 ‘불통(不通)’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국의학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허준(許浚: 이조중기의 한의학자 1546-1615) 저 ‘동의보감’에 나오는 “통하면 안 아프고 통하지 못하면 아프다 (通卽不痛 不通卽痛통즉불통 불통즉통)”라는 구절에 접했을 때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통하면 안 아프고 안 통하면 아픈 것은 적어도 나 자신이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달은 바로는 ‘기(氣)’다. 기가 통하면 심신이 온전하고 기가 안 통하면 심신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 나이듦의 과정에서 빈번하게 반복된 체감이요 체험이다. 그것은 ‘기통(氣通)’이며 ‘기식(氣息)’이다. 즉 호흡이다. 숨쉬기다. 바로 목숨이다.

나 자신이 여러 가지 아픔을 통해서 스스로 알게된 바에 의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본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살아 있게 하는 ‘기’가 나라는 존재 속에도 들어와서 함께 살아있는 생명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기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에너지(生氣)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물질에너지(元氣)이며 또 모든 살아있거나 살아있지 않는 존재자들이 올바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지켜주는 위상에너지(正氣)이기도 하다.

그것은 살아있고 움직이고 역전되기도 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나하나의 생명체의 안에서 죽은 기를 밖으로 배출하고 밖-하늘과 땅-에 충만한, 살아있는 기를 흡입하는 것이 숨쉬기이며 호흡이며 기통(氣通)이다.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이 몸과 마음과 얼의 기본적인 건전, 건강, 건녕(健寧)이며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통, 병고, 병환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통=기의 유통순환=숨쉬기=호흡이 완전히 멈추어서 기가 하늘과 땅으로 널리 퍼져서 사라지게 되면 죽게 되는 것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하늘 목숨이 내 목숨이 되어 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이 일생, 생애, 인생이고 그것이 끝이 나서 내 목숨이 하늘 목숨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이것이 최한기(崔漢綺: 구한말의 과학철학자 1803-1879)의 ‘기통론(氣通論)’과 연결되는 데서 나 자신의 기통의 철학적 생사관과 노년철학적 인간이해가 어우러져서 기통의 철학적 노년인문학의 단초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7월 12일 오후 2시 18분

나는 여간 해서 병원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게 될 때마다 의사들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나 일본의 병원에서 만났던 의사들은 환자인 나와 얼굴을 맞대고 나의 표정을 자상하게 살피면서 나의 말=증상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우선 환자의 기를 살리는 말을 했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1970년대 초기에 내가 독일에서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고 어느 날인가 갑자기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었는데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나서 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입안과 목과 혓바닥을 본 다음에 배 언저리를 눌렀다 놓았다 하고 나서 청진기로 몸 안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 의사의 태도로 보아 환자의 기분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좋아질 거라면서 별 탈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서 당분간 음식 조심하라는 조언으로 끝났다. 약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 의사가 말하기를 최상의 치료는 ‘Mundtherapie(Mund=입+Therapie=치료)’이고 영어로는 ‘Dialogical Therapy’라고 자기 나름으로 번역해서 독일어를 잘 모른 사람들에게도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려서나 젊은 시절 그리고 중장년 시절에 만났던 의사들은 대체로 그런 치료를 했었다. 한마디로 대화치료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자신이 본격적으로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어쩌다 병원신세를 지게 될 때 거기서 만나게 되는 의사들은 대체로 환자의 얼굴은 보지 않고 컴퓨터화면만 보고 사전에 받게 한 검사결과의 숫자를 살펴보고 진단결과를 통보하고 약국에 가서 약을 타가라는 말이 거의 전부다.

사전에 예약을 하고 가도 한 시간 이상 기다리고 나서 진작 의사의 진단과 상담을 받는 시간은 10분 내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Numeral Therapy=수치치료 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수치치료에서 검사결과에 나타난 수치에 의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환자의 기분이나 설명이 거의 필요 없다는 태도다. 그 곳에서 환자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기가 완전히 죽게 되고 특히 노년환자의 경우에 기가 살아서 힘을 발휘하는 자연치유력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가기 싫은 것이다. 서양의학의 훈련만 받은 요즘의 의사들은 환자, 특히, 연로한 환자의 경우, 기를 살리느냐 죽이느냐는 대단히 중요한데 그것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기통의철학적교양(氣通醫哲學的敎養)’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7월 14일 오전 1시 2분

기통의 철학적 교양의 필요성을 강조했더니 조금만 더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어느 생명부지의 의사로부터 받았다. 반가웠다. 철저한 무관심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흐뭇했다.

여러 가지 일들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의사들에게 기통의 철학을 새삼스럽게 공부하고 전문지식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환자를 접하는데 있어서 정상치에서 벗어난 장기기능과 그 정상회복을 위한 치료와 약물처방이나 조치 이전에 기본적인 인간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는 의료현장에서 느꼈던 나 자신의 체감을 말한 것뿐이다.

특히 나이든 환자의 경우에는 인간적인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말하자면 치료, 치유적 효과를 더 올리기 위해서 고려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노파심을 말해본 것이다. 기통의 철학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은 과학적으로 확증된 데이타-수치데이타-를 중시하는 현대의 과학에 환자의 인간적 생명현상의 실상에 대한 기본 이해를 보완하는 현장의 지혜가 치료, 치유효과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환자로서의 기대다.

그렇다면 기통의 철학적 인간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세가지를 유념해두면 도움이 될 것 같다.

1. 인간은-어린이나 젊은이나 나이든 이를 막론하고-기가 모여서 태어나고 기로 살다가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

2. 기란 기운이며 그것은 인간이 살아 움직이도록 삶을 받쳐주는 힘=근원적 생명에너지이다. 느낄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는 흐름이다. 생기(生氣), 기력(氣力), 정기(精氣)라는 말들로 거의 같은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3. 특히 나이든 환자의 경우에는 복잡한 원인, 이유, 사정으로 생기(生氣=살려는 의지)가 약해지고 의기(意氣=적극적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기개)가 꺾여 있으며 그것이 기력(氣力=삶을 이어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힘)이 감퇴 있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기운을 돋우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 한마디가 기운을 돋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기통의 철학적 인간이해의 최소치(Minimum Essential)이다. 나는 나 자신이 실제로 겪은 여러 가지 아픔과 그 치유과정을 통해서 절감한 진실의 한 가지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약발보다 말발이 더 잘 듣는다”고.



7월 25일 목요일

작가 켄트 너번이 전한 한 아메리카 인디언 원로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을 길게 뻗은 선으로만 보고,양쪽 끝에 있는 어린이와 노인은 약하고 가운데 있는 사람만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만 중요하다고 하면, 어린이와 노인 속에 감춰진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만다.어린이와 노인이 공동체에 보탬이 안 된다고 해서 그들을 선물이 아니라 짐으로만 여기고 마는 꼴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노인은 서로 차원이 다른 선물이다. 노인에게는 경험에서 얻은 지혜가 있다.인생의 먼 길을 여행해 왔기에 우리 앞에 놓인 길에 관한 지혜를 들려줄 수 있다. 우리가 막 배우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이미 삶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나이든 이에게 선물이고,나이든 이도 어린이에게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가? 아침과 저녁이 하루를 완성하듯이 어린이와 노인이 인생의 여정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재고하게 된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기 12:12)

오늘날의 노년에게서 지혜를 기대하고 장수자에게서 명철을 감득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과 만나서 기탄없이 대화를 나누어보면 나이 듦이 고루한 생각을 굳히고 장수가 시대착오적인 집착을 강화할 뿐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아서 불통을 개탄한다.



7월 26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동양일보사 3층 회의실에서 충북대학교 지역교육연구소 연구원 김혜련 박사의 하곡정제두의 노년기 사상을 주제로 유성종 운영위원장 · 김용환 교수와 네 사람이 오붓하게 철학대화를 나누었다.

우선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사람치고는 놀라운 장수(88세)를 누렸고 오늘의 화두가 되었던 <심경집의」(心經集義)>는 그가 63세 때 저술하고 79세 때 최종적으로 수정한 것이어서 가히 하곡 노년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김혜련 박사의 발제로부터 나 자신이 듣고 생각해본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진리와 물리와 생리 중에서 특히 생리를 양명학적 양지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것을 ‘인(仁)’과 결부시키고 다시 남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에 감통하는축은지심의 근거로 삼았다.노숙년에 이르면 감통하는 생리와 물리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

② 한국사람과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이학적 사유보다 심학적 대응이 더 강하다.어떻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느냐보다 어떻게 피부로 느끼느냐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두드러지다.특히 작금의 현실상황을 신중하게 볼 때,이학적 사유의 냉철함으로 사회적 광기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정제두의 이학이 오늘의 현실이 갖는 의미를 재삼 상고해볼 필요가 있다.

③ 무엇보다도 나이 들어갈수록 공자의 ‘사절(四絶)’이 필요함을 하곡과 함께 오늘날의 우리들도 늘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무의(毋意)-사사로운 뜻을 고집함에서 벗어남.

둘째 무필(毋必)-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뜻에 너무 집착하지 않음.

셋째 무고(毋固)-고집불통인 상태에서 벗어남.

넷째 무아(毋我)-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음.



오후 6시부터 7시 10분까지 우민아트센터에서 중원포럼 주최의 중국철학과 인생이라는 주제로 한국외국어대학 박정근 명예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주역(周易)>에 담긴 역철학(易哲學)의 핵심이 되는 ‘역(易)’을 만물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살아 있는 것-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으로 풀이하고 생명적 우주관을 제시하는 그것을 기본을 하는 인생론을 폈다는 점이다.

그래서 토론과정에서 삶이 나이 듦이며 나이듦이 낡아짐(老古)이나 쇠약해짐(老衰)이나 추해짐(老醜)이 아니라 새로워짐(老新)이며 무르익어감(老熟)이며 멋있어짐(老美)이라고 노년관 혁신의 또 하나의 동양철학적 전거(典據)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역시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한 가지 논의된 것은 박 교수가 죽음을 ‘입사’(入死=죽음에 들어감)라는 말을 써서 노자의 죽음관을 설명한 데 대해서 오히려 노자의 ‘귀원’(歸元 =본디로 돌아감)이 나의 죽음이해 -즉 죽음=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감)-과 서로 통하는 바라 있어서 더 선호하다고 말했더니 자기 생각도 다르지 않다고 해서 대화가 기분 좋게 끝났다.

다만 노자에게 있어서의 본디(元=始元=根元)는 어디까지나 ‘도’(道)인데 비해서 나의 경우에는 ‘기’(氣 =元氣 =生氣 =宇宙生命)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구태어 부언하자면 생사관에 있어서는 노자보다는 장자 쪽이 나 자신은 더 친근감을 느낀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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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3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1.10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7월 4일 오전 10시 18분

생사(生死)라는 말이 있다. 1. 삶과 죽음 2.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동아새국어사전 제4판).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견해로, 생사(生死)는 태어남(=탄생, 출생)과 죽음으로 보고 삶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기간 - 생명, 생존, 수명 - 이라고 보아야 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태어남(탄생, 출생)은 삶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보는 것이 철학적 사고를 해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태어남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어떻게 뜻매김 할 수 있을까? 내개인적인 소견으로 ‘삶’은 살다+알다 의 합성어로 보고 ‘삶의 뜻을 앎’-자각된 생명, 생존, 수명-이라고 뜻매김 한다.

그렇다면 삶의 뜻을 안다고 할 때 삶의 뜻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역시 나 자신이 85세가 되기까지 살아오면서 체감, 체험, 체득한 바를 표백하자면 삶이란 첫째로 살(나이)을 더해온 - 나이를 먹어온 - 나이가 들어온 과정이고 둘째로는 태어날 때 하늘과 땅과 어버이로부터 받은 목숨=근원적 개체생명력(의 불꽃)을 고스란히 사르는 과정이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함께 생명력의 불꽃을 사르느냐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진솔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생긴다. 첫째로 삶을 시작부터 끝으로 향해서 볼 것이냐 끝으로부터 시작으로 향해서 볼 것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이 세워질 수 있다. 앞의 관점은 생사관이 될 것이고 뒤의 관점은 사생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 관점은 어떻게 다른가? 삶의 시작에 중점을 놓고 보는 입장에서는 삶의 전 과정이 무한히 열려진 가능성의 지평 위에 항상 새로운 시도와 모험이 이루어지겠지만 불안을 안고 가는 것이 되겠고 끝에 중점을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뚜렷하게 정해진 확실성=죽음을 향한 삶이 펼쳐지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있으나 불안은 없을 것이다. 결국 잘 살 수 있기 위해 잘 죽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잘 죽을 수 있기 위해서 잘 살기를 바라느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7월 4일 오후 11시 53분

나는 젊었을 때도 그렇고 나이든 지금도 그러한데, 끝맺음보다는 새로운 시작에 더 힘을 기울이는 삶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따라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었던 남들이 하지 않은 일 또는 아직까지 없었던 일을 새로 시작해 보는 데서 흥도 나고 신도 나고 열도 생겼다. 많은 기억들 가운데서 한두 가지만 들어본다. 내가 충북대학교에서 젊은 학생들과 학문을 함께하게 되었을 때(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젊은 패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자유선택 교양과목으로 ‘인류문화와 지구사회’라는 강좌를 개설하고 당시의 충북지역사회는 물론 한국전체사회에서도 엄두내기 어려웠던 모험을 시도했다.

선배 교수들의 질책과 압력을 많이 받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2년째 되던 때부터는 매 학기의 수강생이 3백 명에서 5백 명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가장 많을 때는 8백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혼자 감당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시간강사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했으며 나중에는 신임후배교수에게 물려주고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대학교양과정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후에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입이 불거(立而不居 = 일단 이루어 남에게 물려주었으면 거기에 머물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다)의 입장을 견지했다.

50대 초반에 한국의 대학에서의 학문하기에 더 이상의 열의를 내기가 어렵다는 깊은 폐쇄감과 좌절감을 부등겨안고 고뇌의 나날을 보내다가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과 함께 아주 새로운 학문하기를 시도해보기로 결심하고 도쿄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절을 두고 자주 독립적 철학대화활동을 일본국내외에서 전개했고 나중에는 뜻있는 기업들의 재정적지원도 받게 되어 그때까지 제대로 틀이 잡힌 전례가 어디에도 없었던 공공하는 철학대화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국내외에 걸쳐서 커다란 관심을 일으켰고 학문적이면서 현실적인 영향도 다양하게 끼치게 되어 지금은 젊은 학자, 언론인, 기타 여러 분야에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형태로 계속 발전, 진화되고 있다.

3년 전부터 나는 일단 주관하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지금은 아주 새로운 ‘나이 들어 철학하기’를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새로운 모험에 도전 하고 있다.



7월 5일 오후 6시 39분

나는 ‘끝이 좋으면 모두가 좋다’라는 독일속담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있지만 ‘시작이 반이다’라는 한국 속담의 참뜻을 더 소중히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의 끝으로 보는 죽음도 나는 새로운 시작으로 뜻매김 한다. 나는 인간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죽음으로의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한 세계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확실한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확고한 목표가 정해진 행정(行程)을 직선으로 감으로써 도중의 일탈과 미달과 착오를 최소화하고 마침내 깔끔하게 끝막음을 하게 되는 교과서와 같은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솔직히 그런 삶을 선호할 수 없다. 그것은 개신(開新 -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는 것)을 개체생명의 일회성 안에 가두어 버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란 처음의 시작=태어남, 출생, 탄생으로부터 죽음=끝, 사망, 사멸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새밝, 새엶, 새앎의 체화(體化), 심화(心化), 영화(零化)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죽음도 모든 것이 끝나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개체생명의 차원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훨씬 크고 넓은 생명=우주생명으로 돌아가서 아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으로 뜻매김 한다.

새밝, 새엶, 새앎은 근원적 우주생명력의 작동원리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개인의 개체생명 안에 폐쇄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기 보다는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일시적으로 나의 몸과 마음과 일의 형태를 입고 나타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젊을 때는 온전히 내가 내 삶을 산다는 생각이 강했다.

가끔 심한 병고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내 삶이 내 뜻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더 큰 것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다음 순간 또다시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가 70대에 들어서면서 내가 온전히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이 뜨기 시작했다.

새로운 생명차원에의 개안(開眼)이요 각성이요 ‘깨달아 얻음’이다. 개체생명의 여정을 끝내고 나면 이르건 늦건 간에 생명의 본향으로 되돌아가서 또 다른 생명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는 기대와 희망에 가슴이 설렌다.



7월 6일 오후 7시 11분

성공적 노화, 고령화 또는 나이듦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써 삶의 마지막을 꽃피우는 것으로 뜻풀이하고 있다. 또 노년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성공적으로 늙어가야 한다는 말도 있다.

성공적인 노화를 적극적으로 선양하는 것은 긍정적 노년상을 진작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 노인상이 강조되면 될수록 실패의 노인상이 연상되고 성공기준에 미흡한 수많은 노년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세상사와 인간사를 성공이라는 척도로 가늠하게 되면 오늘의 한국에서 해마다 늘어나는 노년인구의 몇 퍼센트 정도가 성공적 노화를 기준대로 이룰 수 있을까?

아주 소박하게 생각하면 성공이란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실패란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뜻이라는 것이 아주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출세나 양명 또는 돈벌이가 압도적인 선호 추세인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중장년 세대의 성취 지향적 가치관에 편향된 판단 기준으로 바람직한 노년상을 의도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노년세대에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냐 라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80대 중반(명실공히 노년기)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개인적 체감이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노년기의 삶은 출세나 양명이나 축재라는 기준에서 볼 때 성공적이라 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하늘과 땅과 어버이로부터 부여받은 귀중한 목숨(=살아있기 위한 힘의 바탕이 되는 것, 동아새국어사전 제4판)의 불꽃을 온전히 사르는 데서 보람을 느껴왔다.

내 삶의 전성기는 60세에서 75세 (어느 유명교수의 말)가 아니라 80세로부터이고 여기까지 나이 들어온 것이 삶의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인생의 절정기(다시 유명 교수의 말)가 아니라 목숨의 불꽃을 다음세대의 보다 나은 새로운 지평, 차원, 세계를 함께 엶으로써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고장과 나라와 누리를 세우기 위해서 남김없이 사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삶이라기보다는 마지막까지 불꽃을 온전히 사르는 삶이기를 염원한다는 것이다.



7월 7일 오후 7시 21분

나는 한국인의 노인상을 앞서간 분들의 언행에서 찾는다면 성호 이익(조선후기 실학자, 1681~1764)의 부정적인 것과 다산 정약용(조선조 실학의 집대성자, 1762~1836)의 긍정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 두가지 관점이 지금도 대체로 통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호는 ‘노인의 열 가지 좌절’을 언급하면서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는 눈물이 없다가 웃을 때는 눈물이 나오며 30년전 일은 모두 기억하는데 눈앞의 일은 금방 잊어버리고,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 없이 모두 이빨사이에 끼며 흰 얼굴은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진다’고 한탄했다.

다산은 71세때 지은 ‘늙은이의 통쾌한 일’이라는 시에서 노년의 유쾌한 일은 여섯 가지로 들고 있다.

“노인이 되어 대머리가 된 것, 이가 모두 빠진 것, 눈이 어두운 것, 귀가 먹은 것, 마음 내키는 대로 미친 듯 시를 쓰는 것, 때때로 벗들과 바둑을 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대머리가 되어 머리를 감거나 빗질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이가 모두 빠져 치통이 사라졌고, 눈이 어두워 책을 보거나 학문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고, 귀먹어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성호적 노년관과 다산적 노년관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있다. 구태어 거론하자면 명분론은 성호적인 것으로부터 다산적인 것으로의 대전환을 창조하고 있지만 심정론은 압도적으로 성호적인 것에 갇혀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노년층의 대우가 각광을 받고 있다. 신노년층 이라느니 액티브 시니어라느니 몇 가지 신조어가 난무한다.

요는 ‘젊은 노년층’이라는 이미지 조작을 완성한다. 그야말로 노년의 독자적 존재의미와 생명가치가 주로 중장년에 의해서 탈주체화 되어 가는 것이다. 나이듦의 깊은 뜻을 그것대로 살피고 알고 깨닫기 보다는 젊음의 상실과 삶의 퇴화라는 쪽으로 편향 이동시키고 그 틀 안에서 젊음의 유지나 회복을 바람직한 노인상의 판단기준으로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젊은 노년이 아니라 노년다운 노년이 노년에 이르러 노년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자각이 되는 것이 청소년과 중장년과 함께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보다 나은 사회건설을 위한 공동주관적 기초가 되지 않을까? 청소년이나 중장년에 일방적으로 맞추는 삶이 아니라 서로의 삶의 질을 함께 높여가는 일이 필요하고도 중요하다.



7월 8일 오전 9시 33분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갑자기 논어 ‘위정편’에 있는 공자말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는 스스로 섰으며, 40세에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게 되었고, 50세에는 하늘의 명하심을 알았고, 60세에는 귀가 순해졌고, 70세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지금부터 약 2500년전 고대중국(춘추시대)의 공자에게 있어서 40세(나에게는 60세)은 중장년기를 끝내고 노년기로 접어드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50세부터 70세까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70대 80대 90대의 노숙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공자의 말씀을 나 나름으로 읽어내서 동아시아의 고전적 노인상의 실상을 그려보려 한다. 종래의 중국고전전문학자들의 독법이나 주석, 해설, 해석과는 다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점이 있을 테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의 바탕이 그들의 것과는 달라서 그렇다고 너그럽게 이해해주기 바란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배우는 과정을 잘 수행하면 어느 시기(15~30세)에 가서 어느 정도 스스로 터득하고 나름대로 깨닫는 바가 확실하게 될 것이다.

어려서 열심히 배우면 젊어서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입장과 관점이 잘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가는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50세부터는 노년이 처음으로 시작된다는 뜻에서 초로 또는 시로라고 부르고 거기에 이어지는 직전의 단계=전환기 또는 준비기간의 자각특성인 불혹(不惑)이라는 한 문자에 대한 뜻풀이를 한중일의 대다수 전문학자들이 ‘미혹하지 않는다=뚜렷한 자기소신이 확립된다’는데 중점을 두는 경향에 비해서 나는 스스로의 배움을 어느 틀 안에 가두어 고정시키지 않는다=영혼의 탈식민지화, 탈영토화를 통해서 명실공히 자유로운 자기형성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시기라고 뜻매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모처럼 스스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자기가 특정이념이나 사상의 테두리 안에 갇혀지고 그것이 굳어지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닫혀진 자기가 아니라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활짝 열린 자기가 될때만, 오직 그런 상태에서만, 나이듦의 다음단계 - 50세(내게는 70세)=초로-에 이르러 하늘의 명하심을 제대로 체감, 체험, 체득 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닫힌 얼과는 하늘의 뜻도 통할 수 없다. 하늘의 뜻과 잘 상통할 수 있게 되면 하늘, 땅, 사람의 온갖 소리를 잘 듣고 잘 가름할 수 있는 유연한 삶의 태도도 가지게 될 수 있겠다. 그렇게 해서 나이를 더해 가보면 년공(나이에 따라 깊어가는 내공 )이 무르익어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해도 사람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어서 장로(長老) 또 숙로(宿老=경험(經驗)이 많고 사물(事物)을 잘 헤아리는 노인(老人)) 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노인상이라고 본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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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2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0.27 
[동양일보]노철개벽 일기(老哲開闢 日記)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 2



6月25日 23:12

일본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먼저 놓고 죽음과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30년이나 일본에서 살고 공공철학 교토포럼을 중심으로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들의 견해도 그랬고 또 많은 책들을 읽는 가운데서도 대체로 같은 성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죽음-삶-죽음 또는 무-존재-무 라는 이미지다. 그래서 사생관(死生觀) 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내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거나 아니면 써 놓은 글이나 책들을 살펴볼 때 압도적으로 삶-죽음-삶 또는 존재-무-존재라는 사고방식이 일본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강한 것 같다.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속한다는 생각이 있다.. 기독교인은 영생이라는 신념으로, 그리고 뚜렷한 종교가 없는 사람도 윤회전생 - 반드시 불교에 귀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 과 같은 것을 믿는 것 같다. 내가 직접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본 일본인의사는 허무에서 나와서 다시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삶이며 그것이 깨끗하고 산뜻한 사생관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나의 견해를 알고 싶다고 해서 나는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 – 개체적 근원적 생명력 –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라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은 사람이 죽으면 허무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다 – 무가 된다 - 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주생명이 나라는 한 몸과 마음과 얼에 들어와 그것들을 살려서 다양한 활동을 하게하다가 어느 기한이 지나면 몸과 마음과 얼이 유기적 상관연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서 마침내 개체생명은 끝을 내고 본래의 우주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다만 사람에 따라서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을 인격화해서 하느님, 하나님, 하늘님이라고 말하기도하고 원기, 지기, 생기라고 호칭하기도 한다고.

요즘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도 허무이고 죽은 다음에도 허무라고는 생각치 않고 태어나기 전이다 죽은 후에 우주생명이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하는데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태어나서 얼마동아 살아 있다가 다시 왔던 곳 - 생명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는 극히 자연스런 일인데 다만 사람에게는 인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태어남을 기뻐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가까이에서 살고 여러모로 닮은 데가 많은데 삶과 죽음 - 아니 일본식으로는 죽음과 삶 - 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생각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아마 일본사람들은 오랫동안 무사들이 지배했고 무사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과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늘 죽음에 대한 각오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이 일반적인 사회의식의 심층에 침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6月25日 23:23

continued from the previous post....

한편 대표적 한국인은 선비였고 그들에게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 값지고 귀하게 갈고 닦아서 바람직한 사람됨 - 인격형성 - 을 이루느냐에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먼저 생명의 본원으로 돌아가신 선조들이나 앞으로 태어날 후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의 모습이요 뜻이요 가치라는 의식이 강했고 그런 의식이 일반 민중속에도 침투 된 것이 아닌가 싶다.



6月26日 17:50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소위 노년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에 관한 논의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뚜렷한 추세는 "건강한 노년"으로 수렴되고 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는 "무병장수"가 있다. 극히 상식적인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 - 노년세대 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나 중장년 세대까지도 -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 유일한 노년상인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건강한 노년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허무하고 지겹고 서러운 나날을 보내느라 힘겨워하고 있다는 데 있다. 쉽게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거나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상의 생활 자체가 여유롭지 못한 가난한 노년의 고통과 비애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어두운 측면이다.

바람직한 노년상은 건강, 무병, 재산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보람과 뜻과 기쁨과 설레임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행복한 노년"이다. 그래야 다른 모든 조건들 - 좋은 조건은 물론 나쁜 조건까지 - 이 긍정적 상승 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젊을 때에는 불운과 불행과 역경을 이겨내서 삶의 질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의지와 여유와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나이듦에 따라 그런 것들이 약해지고 작아지고 희미해진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나이 듦과 거기에 따른 불편, 고통, 비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고 나름대로의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느냐는 개개인의 마음가짐과 뜻세움과 행복 찾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건강한 노년, 무병한 노년, 풍요로운 노년 - 다 바람직한 노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 보태서, 아니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행복한 노년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떨까? 행복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주관적인 체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신중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인 접근이나 연구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지하게 철학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6月28日 9:06

오랫동안 장수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재난으로 여기는 풍조가 거세다.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삶 자체가 기적이요, 축복이요, 따라서 그저 감사, 감동, 감격할 일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반드시 태어나서 85년씩이나 살게 되어야 했다는 이유나 근거나 가치가 없잖은가?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일찍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중병을 앓은 적도 있고 전쟁을 겪기도 했고 6.25 전쟁 때는 피난 가는 길에서 북한인민군에게 체포당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남았다.

아픈 때도 있었고 괴로운 때, 슬픈 때, 답답한 때도 있었다. 기쁜 때, 즐거운 때, 가슴이 벅찬 때도 있었다. 오랜 삶을 통해서 체험, 체면, 체득한 바가 너무나 많고 귀하기 때문에 그저 무조건 고마울 뿐이다. 이 값진 삶의 기회가 이렇게도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데서 하늘의 특별한 배려를 체감 할 수밖에 없다.

오랜 삶은 커다란 축복이기도 하지만 엄중한 명령이기도 하다. 도덕을 지상명령으로 본 철학자도 있었지만 나는 삶이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한다. 도덕도 삶이 있고나서 비로소 성립 가능한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말에 100% 공감 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나이 들어간다. 고로 나는 깨닫는다.” 라고.

젊어서는 열심히 배우고 새로운 것에 대한 지식이 늘어난다. 그러나 오래 살다 보면 몸과 마음과 얼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아무리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나이 듦을 통해서만 감득 할 수 있는 것을 선취할 수는 없다. 태어날 때가 있고 자랄 때가 있고 무르익을 때가 있는 데 품질이 좋다고 해서 무리하게 때를 앞당기면 설익거나 일찍 고사하고 만다.

삶이란 탄생과 사망사이에서 몸과 마음과 얼이 부르는 노래다. 속삭이는 이야기다. 읊조리는 시다. 우열을 따질 수 없이 저마다 유일무이한 삶의 참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오랜 삶은 살아온 만큼의 내용이 담긴 것이 될 테니까.



6月29日 22:40

장수(長壽)는 제3의 개벽이다. 우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 그때부터 새로운 하늘과 땅과 사람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인간탄생이 제 1의 개벽이다. 인간이 어느 정도 성장해서 법정연령이 되면 개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교육을 받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고 学과 習과 思와 行의 과정에 들어간다. 여기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새로운 자리매김과 뜻매김이 이루어진다. 제2의 개벽이다.. 그리고 오래 살다보면 아주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됨을 실감하게 된다. 제3의 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벽이란 새로 열린다, 또는 새로 연다는 뜻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인 동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또는 그런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혼란, 혼돈, 혼잡을 수반하게 된다는 뜻도 된다. 개벽은 개신이요 새밝힘이다. 장수는 아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몸과 마음과 얼이 근본적으로 재조정되는 것이다 큰 변화가 일어나고 또 일으켜지게 된다. 물론 아픔과 괴로움과 쓰라림을 겪게 된다. 몸과 마음과 얼이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아픔이요 괴로움이며 쓰라림이다.



6月30日 9:36

청소년 시기는 주로 선배세대의 "가르침"에 따라 배우고 익히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름을 알고 거기에 나타나는 모습과 뜻을 점진적으로 깨닫게 되어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시기다. 이것이 제 1의 개벽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活学開闢 - 배움을 살려서 세상을 여는 - 시기다. 배우고 익힌 바를 잘 응용함으로써 하늘과 땅과 사람을 나름대로 새롭게 살리는 것이다. 중장년 시기는 체험, 체득, 체인된 앎 - 識-을 활용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새롭게 뜻매김,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것이 제 2의 개벽이요, 活識開闢이다. 장수는 식(識)이 열어놓은 것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가는 시기다. 이것이 제3의 개벽이요, 오랜 삶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게 된 근원적 생명력이 내면의 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과 사람의 근본적 변혁을 이루어 가는 活壽開闢 이다. 그래서 장수는 제3의 개벽이라고 하는 것이다.



7月1日 8:54

오늘의 한국사회는 노년을 폄하하는 폄노의 사회이며 노년을 업신여기는 모노의 사회이며 노년을 죽이는 시노의 사회이다. 그것은 오늘에 이르는 오랫동안 많은 노년들이 인색한 노년이었고 완고한 노년이었고 시들고 쇄약하고 민망한 노년이어서 그저 짐만 되고 괴롭히고 짜증나게 하는 노년이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나 중장년세대를 탓하고 섭섭해 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모두가 경축할 노년이 되고 어디서나 덕이 되는 노년이 되고 삶이 저주스럽기보다는 축복임을 느끼게 하는 노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그래서 노년이 특히 유념해야할 점은 속 좁은 노년이 되지 말고 보기 추한 노년이 되지 않으며 고루한 노년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혐오감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근대화초기에는 노년세대와 청년세대사이에 대립, 갈등, 분쟁을 원동력으로 삼아 구시대의 사회의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했다. 그래서 근대화,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 합리화, 경제중심화, 황금 만능화를 강화 발전시켜오는 동안에 백인청년남성중심의 가치관, 세계관, 인간관이 압도적인 인식과 실천의 판단기준이 되고 그것이 점차적으로 여성과 아동과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파급, 공유되는 가운데서도 노년만은 차별, 소외, 방치되어왔다. 노년이 청년을 지배하고 청년이 노년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인간적 미덕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허울 좋은 도덕적 명분일 뿐 실상을 캐보면 철저하게 차별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골치 아픈 문제로 처리되었다는 것이 여러 방면에서 확증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긴급한 과제는 급속도로 늘어나는 노년을 사회경제적 부담이 아니라 활용가치가 높은 고품질의 자원, 자산, 동력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 지혜, 안목, 도량을 기르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숙년 세대의 년공 - 나이듦에 따른 내공 - 의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기풍이 조성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



7月2日 0:10

나는 어렸을 때의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나하고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젊어서도 삶이 즐거웠다는 말이 안 나온다. 내게 있어 인생은 늘 힘들고 버거웠다. 뜻밖의 행운이나 굴러들어온 복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순조롭게 되거나 힘 안들이고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반드시 거기에 맞는 노력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은 것이다. 한마디로 힘겹게 살아왔다. 그래서

건강도 재산도 명예도 크게 이룬 것이 없어 아주 평범한 삶을 이어왔을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너무나 의외의 사건이다. 어쩌다보니 여든다섯이 되도록 살아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나는 지난날의 어느 시기 - 청소년기나 중장년기 - 보다 신체적, 정신적, 영성적 건강이 좋고 현재의

생활에 충실하고 밝은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삶이 활기차게 된다.

조금 더 소상하게 이야기하면 50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일본사람들과의 협력을 중심으로 세계를 다니면서 장래세대의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 현재세대가 무엇을 어떻게 할 필요가 있는가를 함께 생각하고 실천과제를 설정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실행에 옮기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60대에 들어서면서 공(公)과 사(私)와 공공(公共)의 문제에 대한 문제관심을 공유하는 일본사람들 - 학자, 언론인, 종교인, 시민운동가, 경영인 등등 - 과 함께 공공철학대화운동을 전개하고 그 결과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미래세대에 대한 현재세대의 세대계승적 역할과 책임을 다하자는 뜻에서 공공철학 교토포럼을 개최, 운영, 확장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는 동안에 80세에 이르렀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 사람이 칠십까지 사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 라는 말에 비추어 보면 틀림없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 값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나이 듦의 의미와 가치와 사회적 기여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청소년세대와 중장년세대와 함께 뜻과 힘과 열을 다해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장수의 보람을 실감하는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