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8

하경숙 - 음양오행은 동양의 원(圓)인 태극도(太極圖)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접근 방법

(6) 하경숙 - *우리들의 둥근 원 우리들의 경전에 "음양상균 수백천 만물화출 어기중"을 수록케 하신 대신사님의 깊은... | Facebook
*우리들의 둥근 원
우리들의 경전에 "음양상균 수백천 만물화출 어기중"을 수록케 하신 대신사님의 깊은 뜻을 차차차차 헤아려 봅시다.
동양의 원(圓)인 태극도(太極圖)입니다.
태극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일전네 어느 대학 교수 한 분이 외국에서 개최되는 학술 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연회가 베풀어졌을 대, 각국의 학자들은 자연스레 어울려 담소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합석한 벽안의 한 학자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은 한국에서 오셨는데 불교와 동양
사상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그 교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난처해져서
"저는 서양 학문을 전공한 사람이라 동양
사상은 잘 모릅니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자 서양 학자는 벌떡 일어나며
"동양인이 동양 사상을 모르고 서양 학문을
하다니! 당신의 학문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다름없소." 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위에 그려진 태극도는 동양의 원입니다.

우리는 태극도에 대하여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요?

서양은 물질문명의 반성과 그 해결책으로 동양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다가올 21세기에는 동양의 정신문화와 서양의 물질문명을 대통합하여 신문명(新文明)을 창조해야 합니다.
{!특히 앞으로 범지구적 인류의 새문명이 될 "동학"에 대해서는 더욱 창조적으로 배워야 함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신문명 창조의 주역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정신문화는 바로 우리가 주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기 것도 모르면서 남의 것만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것을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남들과 동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원은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굴리시던 드높은 정신의 굴렁쇠입니다. 그리고 그 원은 오늘이 지닌 물질문명의 폐해를 해결하여 보다 나은 내일의 정신적 바탕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며, 소중한 선조의 유산인 동양의 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음양오행은 동양의 원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접근 방법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자연의 둥근 원을 걸어가 봅시다.
(대신사님께서는 "차차차차"라는 언어 표현과 무극대도는 또한 "자연"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해 봅시다.)
어윤형 전창선 공저 <음양은 뭘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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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찬
    많이 배우고 갑니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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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젊은 한의사가 쉽게 풀어 쓴 음양오행 어윤형,'전창선'

알라딘: 검색결과 '전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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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하는 사람들 | 어찌 하다보면 21자 동학주문의 내용들은 퍼즐 맞추는 작업처럼 느껴질 것이다

동학하는 사람들 | 어찌 하다보면 21자 동학주문의 내용들은 퍼즐 맞추는 작업처럼 느껴질 것이다 | Facebook

동학하는 사람들
하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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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하다보면 21자 동학주문의 내용들은 퍼즐 맞추는 작업처럼 느껴질 것이다. 다음 글들은 화이트헤드의 철학 개념 중 더욱 주목되는 구절을 나열해 본다. 이 구절들을 퍼즐 맞추듯이 자기
     철학관에 도입해 보시기 바란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철학관에 직접적으로 경험적 느낌을 주는 요소를 파악하게도 될 것이다.

" "과정들의 역동성"(!!21자 동학주문도 과정적 철학임을 염두에 둘 것)은 반전 보다는 오히려 연장의 근거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연장과 생성 간에 있는 ''긴장''(!!우리들의 삶 역시 항상 '긴장'의 연속이지 않는가?)에 대한 화이트헤드적 해결의 첫 번째 요소이다. 양식을 갖는 일들은 공간과 시간에 전혀 실제적으로 위치해 있지 않고, 그것의 관계들의 망이 공간과 시간으로 자라도록 하는 구체적인 과정들 안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ㅡ한센

" 또한 나에게 '세계'란 나의 신체의 활동이 그것을 나의 경험을 위해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세계"는 그러한 활동들 내에서 전체적으로 분별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지식은 그 활동성에 대한 분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신체'는 우리의 것이요, 우리는 우리 신체 내에 있는 "활동"이다. 모호하지만 이 관찰의 사실은 세계의 관계성의 근거이고, 그리고 그것의 질서의 형식의 전달의 근거이다. "

" "나는" 본질적으로 나 자신을 '정서', '향유', '희망', '두려움', '비탄', '대안'에 대한 가치부여, 결단 등의 통일체로서 발견한다. 그들 모두는 나의 본성 속에서의 환경에 대한 능동적인 주체적 반응들이다."

" 양자역학의 요구는 공허한 가능성의 현실태로의(! 주문 속의 "천주'도 현실존재임을 유의할 것!)진화가 아니라 현실적 사실과 그들과 관련된 가능성의 진화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어떤 의미로 '지식'은 "지혜"가 성장하는 만큼 수그러든다. 세세한 것들은 원리 속에 삼켜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세부적인 지식들은 직업을 수행하면서 특별히 익히게 되겠지만, 그러나 충분히 이해된 원리의 능동적인 활용 습관은 "지혜"의 중국적 소유 형태이다."

""존재('있음')"는 늘 미래로 바뀌어 들어가는 "활동성"이다. 철학적 이해가 겨냥하는 것은 활동의 맹목성을 그것의 초월적 기능들과 관련하여 꿰뚫고 들어가는 '지향'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에서 출현하는 많은 자기 조직적 체계들은 과학자들의 인식에 의해 관찰되도록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여기 있어요!" 라고 그들은 말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한 소량의 인식을 주장하고 있다.

 경험을 위한 능력은 유물론적 과학에 의해 연구되는 완전히 현실화된 체계들에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과학적 유물론주의가 수 세기동안 연구해 왔던 자연으로부터 실제로 '부재'한 것이다.  ㅡ이상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몸학이야기>밴드에서 ㅡ만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