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하는가 / 이중표 | ||||||||||||||||
[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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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불교1)란 무엇인가 불교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또 여러 지역에 전해졌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불교를 분류할 때 시대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불교를 시대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고, 지역에 따라 분류하면 인도불교, 남방불교, 티베트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각 지역의 불교도 시대적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는 시대에 따른 분류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분류는 단순히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것이 아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상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석가세존이 처음 깨달음을 이루어 세상에 가르침을 폄으로써 불교는 시작된다. 세존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에 의심이나 논란이 있어도 세존을 통해 의심과 논란을 해소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단은 통일과 화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존이 열반한 후 불교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고 승려와 신자들의 수가 양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교단이 분열하게 되었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분열을 막기 위해 수차의 결집회의를 하였지만 교단의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교단의 분열은 계율 해석상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지만 교단이 분열되자 경의 해석에도 부파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각 부파는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에 따라 아비달마(abhidhamma)라 불리는 독자적인 교리해설서, 즉 논(論)을 편찬하였다. 아비달마란 세존이 설한 ‘법(dhamma)에 대한(abhi) 해석’이라는 의미이다. 이들 논서(論書)를 통해 각 부파는 자신들의 해석이 진정한 세존의 뜻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분열 대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파에 의해 분열 대립하게 된 불교를 부파불교 또는 아비달마불교라고 부른다. 불교가 이렇게 분열된 것은 불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세존은 모든 대립과 모순을 떠난 중도(中道)에서 연기법(緣起法)을 설했다. 모든 존재현상은 연기하고 있으므로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모든 대립은 존재현상의 실체가 없음(空)을 알지 못하고 실체를 찾으려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불교는 중도와 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체를 문제삼음으로써 대립하게 된 것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이들 부파불교의 대립을 소승(小乘)이라고 비판하고 불교의 본질이 중도와 공이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대승불교의 초기경전인 반야부(般若部) 경전의 공사상(空思想)은 바로 이러한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초기불교는 불교가 분열하기 전의 불교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의해 소승불교로 비판받았던 부파불교와 초기불교는 엄연히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초기불교를 소승불교로 오해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대승불교가 전해진 중국과 우리 나라를 포함한 북방불교권에 보편화되어 있는데 그 원인은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을 아비달마불교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불경에는 세존의 가르침을 전하는 근본경전과 대승불교의 발흥과 함께 나타난 대승경전이 있다. 근본경전은 북방불교권에 전해진 한역(漢譯) 《아함경(阿含經)》과 남방불교권에 전해진 상좌부 전승의 《빠알리 니까야(Pa?i Nika?a)》를 가리킨다. ‘아함(阿含)’이란 범어(梵語) ‘A?ama’의 음역(音譯)으로서, 본 뜻은 ‘전승(傳承)’인데,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전승되어 오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리고 ‘빠알리(Pa?i)’는 성전(聖典)을 의미하고 ‘니까야(Nika?a)’는 수집(收集)을 의미하므로 ‘빠알리 니까야(Pa?i Nika?a)’는 ‘성전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란 ‘니까야’에 사용된 고대 인도어로서 성전을 기록하고 있는 언어라는 의미이다. 《아함경》은 4부로 되어 있고, 《빠알리 니까야》는 5부로 되어 있는데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한역 4아함경 《장아함경(長阿含經)》 《중아함경(中阿含經)》 《잡아함경(雜阿含經)》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16권의 분량에 364개의 경이 수록됨.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이 밖에도 이역(異譯) 《아함경》과 《아함경》에 속한 수많은 개개의 경이 단행본으로 번역 출간되었음. 빠알리 5니까야 D沖gha-nika?a(長部) : 3vagga(編) 34sutta(經). 《장아함경》에 상응함. 이들 근본경전은 부파불교의 소의경전이기 때문에 대승불교권에서는 소승경전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해 왔다. 혹자는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을, 부파불교에 의해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세존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부파불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논서를 통해 드러내려 했지 불경을 변조하면서까지 대립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부파가 있었다면 다른 부파들로부터 불경을 변조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아함경》과 《니까야》는 서로 다른 부파에서 전승된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근본경전을 부파불교에 의해 변질된 것으로 보거나 소승경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2) 초기불교는 근본경전에 나타난 불교를 의미하며, 대·소승을 포함한 모든 불교의 뿌리이다. 후대의 불교는 모두 초기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흔히들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은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위해 설한 소승경전이기 때문에 세존의 깨달음을 완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존이 직접 설한 가르침은 근본경전이며, 세존께서 아껴두거나 감추어 둔 가르침은 없다. 다만 중생들의 근기가 낮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주지하듯이 대승경전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한 경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승경전이 불경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대승경전은 결코 근본경전을 부정하지 않고 있으며, 근본경전에 나타난 세존의 가르침을 바르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불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에서 비판하는 소승불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국불교에서는 대승경전을 위주로 공부하는 가운데 초기불교를 소승불교와 동일시했다. 천태(天台)와 화엄(華嚴)의 교상판석(敎相判釋)에 의해 불경의 경중이 가려졌다. 그 결과 세존이 직접 가르친 초기불교는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한 수준 낮은 가르침으로 인식되었다. 중국과 역사적,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우리 나라는 이러한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다. 《화엄경》과 《법화경》은 최고의 경전으로, 근본경전인 《아함경》은 가장 수준이 낮은 경전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왜곡의 결과는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마저 왜곡시켰다.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의 뿌리이기 때문에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대승불교는 결코 바르게 이해되지 않는다. 용수의 《중론(中論)》은 대승불교사상의 근본으로 평가되며, 난해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금을 통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나왔지만, 주석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중론》을 보면, 결코 난해하지 않다. 왜냐하면 《중론》은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수립하려고 지은 책이 아니라,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기 때문이다. 《중론》의 ‘팔불중도(八不中道)’는 《중론》의 요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팔불중도’의 해석을 일례로 대승불교의 이해에 초기불교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만물이 대자재천(大自在天)에서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 자연(自然)에서 생긴다는 말도 있고, 미진(微塵)에서 생긴다는 말도 있다. 이런 잘못으로 인해 무인론(無因論), 그릇된 인과론(因果論), 단멸론(斷滅論), 상주론(常住論) 등의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나’라느니, ‘나의 것’이라고 갖가지로 설하며 정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여러 가지 사견(邪見)들을 끊고 불법을 알게 하시려고 우선 성문법(聲聞法) 중에서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이미 수행을 하고 큰 마음을 갖추어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대승법(大乘法)으로써 연기(緣起)의 상(相)을 설하셨던 것이다. 이른바 “일체법이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일불이(不一不異)하여 필경공(畢竟空)하니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반야바라밀경에서 설하는 다음과 같은 얘기와 같다.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도량에 앉아 있었을 때 십이연기가 허공과 같아 다함이 없음을 관(觀)하였느니라.’”3) 청목은 부처님께서 근본경전, 즉 《아함경》에서는 12연기설을 이야기하고, 중도와 공은 대승의 《반야경》에서 이야기했으며, 《중론》은 대승 《반야경》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십이연기설은 낮은 근기를 위한 가르침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일불이(不一不異) 등의 중도와 공은 대승의 수승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아함경》은 중도와 공이 연기설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빠지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빠진다. 의미 있고 진리를 이야기하는 주장은 이들 두 모순 대립(二邊)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 법이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남이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니라.4)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들 주장은 결론은 한 가지인데 서로 다르게 주장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이 육신과 다르다고 해도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를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중도로 향할지니, 그것은 현성이 세간에 나와 전도되지 않고 여실하게 바로 보아 알아낸 것이다. 소위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5) 위의 두 경은 각각 단상중도(斷常中道)와 일이중도(一異中道)를 이야기한 것이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영혼과 육신에 대한 일원론과 이원론의 모순대립은 연기의 실상을 알지 못해서 생긴 사견이다. 따라서 버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상부단(不常不斷)이며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할 뿐 자성이 없으므로(無我) 생멸(生滅)의 주체는 있을 수 없다. 주체가 없다면 생멸(生滅)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불래불출(不來不出)도 마찬가지다. 초기불교를 통해 팔불중도(八不中道)를 보면 이렇게 의미가 명쾌하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불교의 이해 없이 불생불멸 등의 중도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생멸(生滅)이 없는 출세간의 경지(열반)로 해석할 수 있다. “세간은 생멸(生滅)이 있으나 출세간은 생멸(生滅)이 없다. 《중론》의 팔불중도(八不中道)는 이러한 열반의 경지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팔불중도는 신비주의 교설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우리는 세간을 떠나 생멸 없는 세계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용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6) 용수는 중도실상의 세계(열반)가 중생의 세계과 멀리 떨어진 별세계가 아니라 모순대립하는 사견을 떠나면 세간이 곧 열반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십이연기설에서 무명이 멸하면 생사가 멸한다는 이야기와 추호의 차이가 없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지면 관계상 간단한 일례로 대승불교의 이해에 초기불교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했지만, 필자가 본 대승불교는 거의 모두가 초기불교를 떠나서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우리가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불교의 출발점이며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불교가 주목받아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 세계의 석학들은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상으로 불교를 주목하고 있으며, 불교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불교를 요청하고 있고, 그 요청에 의해 불교는 세계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초기불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 기술에 의한 산업사회의 위기를 한 번 사용한 에너지는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변한다는 열역학 제2의 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하고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기계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한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I》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나 도교의 신자는 예로부터 에너지의 흐름을 적게 하는 데서 가치를 찾고 있었다. 명상이란 바로 에너지를 경감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에너지를 최저한으로 억제하고 외적 및 물질적 생명을 유지함으로써 비로소 니르바나, 또는 도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8) 에너지의 소비를 적게 하는 것이 최종적인 도덕 규범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고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자유로 전개될 수 있게끔 사랑을 가지고 약속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가장 숭고한 사랑은 자기 희생, 즉 자기 삶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의지, 또는 필요한 경우 다른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을 바쳐도 좋다는 의지이다.9) 그는 인간이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서 정신적인 열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보살의 자비가 인류를 구원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①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것. 이상의 네 가지 조건은 불타의 가르침의 기초를 이루는 네 가지의 진리(四聖諦)와 부합한다.10) 이와 같이 프롬은 인류가 사성제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새롭게 출현해야 할 새로운 인간의 성격구조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형태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 프롬이 이야기하는 인간은 불교에서 지향하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탐진치를 여읜, 지혜와 자비를 성취해 가는, 끊임없이 정진하는, 참된 자기를 찾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 프롬이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인 것이다. 정신이나 종교의 가치보다 경제 성장 쪽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불교경제학의 연구를 권하고 싶은 것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과 장래의 예상을 고려해서이다. 문제는 ‘근대적 성장’과 ‘전통적 정체(停滯)’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바른 경제 성장의 길, 유물주의자의 무관심과 전통주의자의 침체 사이의 중도(中道), 즉 팔정도(八正道)의 하나인 ‘올바른 생활(正命)’을 발견하는 일이 문제인 것이다.1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은 선각자들이 인류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불교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불교는 인류 생존의 희망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이 세계는 탐욕과 질투와 어리석음의 불길에 휩싸인 문자 그대로 화택(火宅)이며 고해(苦海)이다. 붓다가 염려하고 경계했던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인 삼독(三毒)의 불길이 온 세상을 불태우고 있다. 이제 인류는 자연과 인간을 모조리 불태우고 있는 무서운 삼독의 불길에서 벗어나는 생존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사상은 과학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 가장 위대한 과학 사상이라도 작업 가설에 지나지 않으므로, 특정한 연구 목적에는 유용해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 하는―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냐 하는―문제에는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다. …… 과학은 자연계나 공학적 환경 속에서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며 작용하느냐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며, 인간의 소외감이나 내면의 절망을 치유해 줄 수는 없다.13) 마음과 영혼이 결여된 19세기의 형이상학 대신 무엇을 가져와야 할 것인가? 우리 세대의 임무는 형이상학을 다시 구축하는 일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 우리의 병은 형이상학적인 성질의 것이므로, 치료법도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다.14) 슈마허의 지적과 같이 인류 생존의 길은 과학에 있지 않다. 마음과 영혼의 형이상학이 인류 구원의 길이다. 세존께서는 그 길을 잘 가르쳤다. 우리는 이 가르침에 의지하여 인류의 삶의 토대가 될 형이상학과 윤리를 구축해야 하며, 초기불교는 이러한 작업의 토대가 된다. 세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새롭게 깨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현실은 매우 암담하다. 본 고장인 서구사회에서 퇴조하는 기독교는 융성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는 미신과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당의 푸닥거리를 돕는 사람을 법사라고 부르고, 사람들은 점쟁이의 권유로 사찰을 찾아 액땜과 복을 빌며 기도한다. 그런가 하면 수행승들은 세속을 등지고 깊은 선방에 들어가 면벽 참선하면서 견성 성불을 추구한다. 불교를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은 갈 곳이 없고, 이들을 바르게 인도할 사람도 없다. 육조 혜능의 돈오(頓悟)돈수(頓修)와 간화선의 우월성만을 내세우면서, 차근차근 배우는 것은 점수(漸修)라고 깔보고,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교종(敎宗)이라고 비웃는다. 남방불교는 소승이라고 얕보고, 우리는 대승, 최상승이라고 우쭐댄다. 그러나 그렇게 뽐내는 한국불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막상 이러한 물음에 당면하면 뚜렷이 대답할 내용이 없다. 과연 한국에 진정한 불교가 있기나 하는 것일까? 필자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초기불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육조 혜능의 종지를 추종하는 종단이다. 만약 조계종이 혜능의 가르침만을 따른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혜능교다. 그러나 조계종을 혜능교라고 부르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까닭은 혜능이 불교도이기 때문이다. 혜능을 불교도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혜능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불경 속에 있다. 육조 혜능을 따르는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육조단경》을 보면 혜능은 자신의 이야기가 불경의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론(經論)의 이야기는 가벼이 여기고 선사들의 어록(語錄)만을 봉지(奉持)하는 것이 과연 혜능을 따르는 일인가? 혜능은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15) 이렇게 혜능이 입으로 다투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 수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종과 교종을 나누고,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분별하여, 선후를 다투면서 간화선만을 제일로 삼고 여타의 수행을 무시하는 것이 진정한 조계(曹溪)의 법통(法統)인가? 모든 경서 및 문자와 소승과 대승과 십이부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의 성품에 연유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我)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이 본래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16) 돈오란 일체의 만법이 자신 가운데 있음을 한 생각 깨치는 일이요, 돈수란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돈오에서 강조하는 것은 스스로 깨침이지 수행 없는 깨침이 아니다. 즉 단박에 깨침이란 스스로 깨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와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에 스스로 깨친 이라면 밖으로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밖으로 선지식을 구하여 해탈 얻기를 바란다면 옳지 않다. 자기 마음 속의 선지식을 알면 곧 해탈을 얻느니라.17) 여기에서 혜능이 강조하는 것은 언어적인 이해가 아닌 깨달음이다. 혜능은 깨달음이 언어적인 지식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돈오(頓悟)라고 표현한 것이다. 선지식은 스스로 깨치도록 돕는 자이지 깨달음에 대한 지식을 주는 자가 아니다. 깨달은 자는 선지식을 의지할 필요도 없다. 《벌유경(筏喩經)》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신 부처님의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돈수(頓修)란 단박에 닦아 수행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돈수는 불교의 수행에 목적이 따로 없음을 의미한다. 즉 목적을 설정해 놓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대로 사는 것이 그대로 수행이라는 의미에서 돈수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의 행이 곧 부처님이다.(卽佛行是佛)18) 이와 같이 그에게 부처는 존재가 아니라 본성대로 사는 삶이다. 그렇다면 진여 본성이란 무엇인가? 혜능이 이야기하는 자성(自性)은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며, 만법 그 자체이다. 즉 주객의 분별을 떠난, 연기하는 법계가 자성이다. 무아(無我)와 공(空)과 연기(緣起), 이것이 혜능이 말하는 본성이며 자성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함께 연기하는 한 몸이며 한 생명이다. 이러한 사실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견성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변에는 몸 속에 있는 마음 찾는 것을 견성(見性)으로 착각하고, 앉아서 마음 찾는 사람들이 많다.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움직이지 않는 이라면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나니,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화두를 참구하여 견성하는 일을 마치 과거에 급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는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다. 화두 참구는 성불(成佛)의 지름길이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미천한 신분이지만 급제하는 순간 신분은 급상승한다. 견성하기 전에는 미혹한 중생이지만 견성만 하면 한 순간에 모든 사람의 존경과 숭배를 받는 부처가 된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듯이, 견성하기 위해 선방에 앉아 면벽한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화두에 매달리지만 한 순간 깨치면(돈오) 부처가 되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게 된다(돈수). 혜능이 그렇게 가르쳤는가? 만약 뒷 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 ……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 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21) 혜능이 이야기하는 성불은 탐진치 삼독심을 지혜롭고 평등하고 자비롭게 변화시키는 일이다. 중생의 마음인 탐진치가 없다면 부처의 마음인 지혜와 자비도 없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의해 중생과 부처가 구별될 뿐, 중생과 부처에 어떤 차별도 없다. 차별이 없기 때문에 돈오 돈수라고 한다. 만약 차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망상이다.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자는 망상 속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혜능의 가르침은 결코 선가(禪家)만의 가르침이 아니다. 삼독심을 없애고 지혜와 자비를 실현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추호의 차이도 없다. 그런데 입으로는 혜능을 추종하면서도 마음과 몸이 어긋나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한국불교는 조계종인가? 이중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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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5
왜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하는가 / 이중표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 Bodhi, Bhikkhu: 9781928706021: Amazon.com: Books
2020/12/24
코로나도 증명해준, 법성게가 말한 세상의 실상은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코로나도 증명해준, 법성게가 말한 세상의 실상은
등록 :2020-12-23
[짬]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
치과의사에서 불교학자로 변신해 일가를 이룬 김성철 동국대 교수를 지난 18일 서울로7017 부근에서 인터뷰했다. 사진 조현 기자
‘하나 속에 모두 있고, 모두 속에 하나 있네’, ‘한 점 크기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담겨있네’라는 <법성게>는 오랫동안 뜬구름 잡는 소리나 은유적 시구절 정도로만 여겨졌다. 코로나19라는 티끌보다 작은 바이러스가 이 세상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불경의 왕’이라는 60권본 화엄경을 의상대사가 7언30구·한자 210자로 요약한 <법성게>는 팔만사천경의 고갱이라고들 한다. 이를 해설한 <화엄경을 머금은 법성게의 보배구슬>(도서출판 오타쿠 펴냄)을 최근 낸 김성철(63)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불교학회 명예회장)를 18일 만났다.
‘한 점 티끌 속에 온 우주 담겨 있네’
뜬구름 잡는듯 은유적 시구 7언30구
의상대사 요약한 ‘법성게’ 해설서 내
“스마트폰이 전지전능 화엄시대 열어”
부친과 교유한 탄허 스님 모습 감명
치과의사 그만두고 불교학에 심취
“탄허 스님(1913~83)이 앞으로 초등학생도 화엄경을 공부하는 화엄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을 때 ‘설마 그럴 리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마트폰 하나에 세상이 들어온다. 세계가 회통하고 있다. 화엄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알려주기 이전에 정보통신혁명으로 ‘우주 법계가 나와 다르지 않은 화엄의 세계를 열었다’고 그는 말한다. ‘화엄’은 워낙 방대해 자칫 뜬구름 잡는 관념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그의 책은 수학과 과학까지 동원한 체계적 길라잡이다. 불교학자로서는 드문 이과 출신답다.
김 교수는 치과의사 출신이다. 서울대 치대를 나와 치과의사를 하다가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불교를 전공했다. 같은 치과의사인 부인에게 “2년만 불교책을 원 없이 보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떠난 길이 본업이 돼 이제 정년을 2년 앞두고 있다. 그는 불교 공부를 하게 된 공을 부인에게 돌렸다.
‘불교학’은 그에게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서울대 사대 학장과 서울대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를 지낸 선친 김종서 교수가 가끔 모시고 온 탄허 스님을 어린 시절 집에서 만나곤 했다. 성인의 풍모지만 겸손하기 그지없이 ‘하심’(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으로 일관했던 탄허 스님의 모습은 어린 그에게 깊게 각인됐다.
그는 고교 2학년 때까지 그림에 심취해 미술반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서는 밥 먹고 살기 어렵다. 치과의사는 몇 시간만 일하면 나머지는 원하는 불교책도 원 없이 읽고, 참선도 할 수 있다”는 어른들 말에 치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래서 치대를 다닐 때도, 치과의사로 일 할 때도 틈만 나면 불교책을 보고 참선을 했다. 그렇게 열망했던 공부이기에 그는 삶을 위한 ‘불교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의 중관학으로 석·박사를 했다. 용수는 그에게 직업인으로서 불교학자가 되기에 앞서 삶의 길을 제시해줬다.
“처음엔 나도 불교 공부를 하면 일부 선승처럼 막행막식을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술도 많이 마셨다. 그런데 용수의 ‘대지도론’을 6개월간 필기를 해가며 읽다 보니, 불법엔 진제만이 아니라 속제, 즉 절대불변의 진리인 진제와 세속적 진리인 속제 둘 다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을 알았다. 진제만 추구하면 사견에 빠져 가치판단을 상실하기 쉽고, 속제만 추구해 계만 지키고 착한 일에만 집착하면 성불할 수 없다.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 둘 다 챙겨 이웃도 내 자식을 보살피 듯 보듬고, 공(空)에 대해서도 자각해야 한다는 게 용수 보살의 안내였다.”
그는 한 때 ‘뇌 과학’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뇌 과학은 불교적 깨달음이나 임사 체험조차 뇌가 일으키는 반응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전에는 모든 것을 아는 마음이 뇌에서 작동한다고 여겨 뇌가 삶의 구심점인 줄 알았는데, 뇌 역시 모든 현상을 만드는 다양한 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불교학 연구 열정을 불태워 가산학술상, 불이상, 청송학술상, 반야학술상 등을 휩쓸었다. 또 원효보다 150년이 앞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상가로 꼽히는 고구려 승랑 스님에 대한 연구로 ‘한국연구재단 10년 대표연구성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2000년부터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로 재임하며 불교문화대학장,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티벳장경연구소장,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이번 ‘법성게 해설서’는 그의 연구와 활동의 결집체라 할 수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인공지능 등 4차 산업 문명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의 실현이다. 숨어서 성폭력을 행사하거나 동물을 학대해도 다 드러나는 시대다. 전지와 전능이 현실화하는 셈이다. 화엄장 세계의 비밀인 법성게는 어느 곳에 있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누구나 주인공이 되도록 깨닫게 하는 길잡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well/people/975666.html?fbclid=IwAR12AhWiIuQbAG2aPUklOwvuoAtegLQ0L95N3cJkrbUEsiO3W_kc-ocnVaQ#csidx3e0ee03612eced88599987da8f24595
2020/11/25
포교사 포교도 이제는 전문가 시대입니다
포교도 이제는 전문가 시대입니다포교사 · 불교어린이지도사 고시 |
‘포교사’의 현황 및 활동 포교사 제도는 출가자를 보조하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지종통에 입각한 다양한‘포교’영역을 유지 관리 혹은 확대하는 한편, 포교 활동에 부족한 인력을 능동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제도로써 1980년 3월경부터‘법사’, ‘상임포교사’(출.재가자가 함께 포함됨)의 명칭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총 7800여 명의 포교사가 배출됐으며, 이 가운데 1995년 포교사 선발 제도 변경 이후 자격 취득자는 약 4000여 명(재가자)이다. 현재 포교사에 대한 관리는 포교법과 설치령에 의하여 포교원 포교부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더욱 체계적인 활동과 관리를 위하여 2000년 3월‘포교사단’을 설립하고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포교사는‘포교사단’에 소속되도록 정하고 있다. 올해로 창단 9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포교사단은 현재 종단 포교 조직 역량의 주요 골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안정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어린이, 청소년, 대학, 청년, 군, 교도소(소년원), 경찰, 장의, 자원봉사, 상담, 사찰안내, 소년소녀 가장돕기, 직장직능 등 다양한 팀 활동을 통해 약 300여 곳을 포교 현장으로 삼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9년도 포교사 고시의 방향 현재 포교사 제도에 대하여 가장 많이 제기되는 문제는 포교사 배출과 활동이 지역의 현장이나 사찰과 연계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포교원에서는 2008년부터 포교사 고시 과정을 1차 필기고사와 2차 연수 평가로 나눠 시행하고 있다. 필기고사 점수로 1차 합격자를 선정한 뒤 약 2개월간의 연수 과정에 대한 평가를 반영하여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고 자격을 품수하는 것이다. 2차 연수 과정에는 지역 사찰에서의 봉사 활동이나 지역 사찰 포교국장 스님의 면접 평가를 주요 평가 기준으로 배정함으로써 신행 자세와 사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조치다. 이에 따라, 올해도 2차 연수 과정이 매우 중요하게 운영 및 평가될 것임을 응시자들은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1차 합격자들의 편의를 위해 중앙 단위의 교육 과정은 최소화하고 가능한 지역 단위의 교육 연수로 진행할 계획이다. 2009년도 포교사 필기 고사는 오는 2월15일 전국의 8개 지역에서 동시에 실시되며, 12회.13회 기출 문제는 제외하고, 기본 불자신행을 점검할 수 있는 문항을 다수 배치하며, 불교대학 교재에 충실한 문제 출제 등을 원칙으로 정했다. 제3회 불교어린이지도사 고시 조계종 포교원에서는 어린이 지도자 양성을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7년부터 불교어린이지도사 고시를 실시하고 있으며, 200여 명의 어린이지도사가 배출되었다. 불교어린이지도사는 포교원에 매년 활동보고서를 제출하는 등의 집중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도교사가 필요한 사찰 어린이법회와 어린이 포교활동이 준비되어 있는 지도자간의 효율적인 연계를 통해 법회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그간 배출된 어린이지도사들을 대상으로 꾸준한 인력계발을 위해 지난해 ‘제1회 어린이지도사 연합연수’를 실시한 바 있으며, 연수를 정례화해 어린이지도사들의 활동력을 강화시켜 활발한 어린이포교활동을 도모하고 있다. 제3회 불교어린이지도사 고시는 오는 2월28일 오후2시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과 부산 대한불교교사대학 강의장에서 동시에 실시된다. [불교신문 2496호/ 1월28일자] |
포교사단 제1차 임원 및 운영위 회의 개최 | |||||||||||||||||||||||||||||||||||||||
조계종 포교사단(단장 강홍원)은 지난 17일 보은 속리산유스호스텔에서 불기 2553년 제1차 임원 및 운영위원회 회의를 개최했다. <사진> 임원 및 운영위원 30여 명이 참여한 이날 회의는 기축년을 맞아 새로운 각오로써 불법을 홍포할 것을 다짐하고 새해의 중요안건을 심의했다. 특히 ‘운영위원 및 중앙교육위원 임면의 건’ 심의를 통해 군경분과위원장에 김영희 포교사를, 사찰문화해설분과위원장에 정목희 포교사, 종교편향위원장에 이근착 포교사를 새롭게 임명했으며 대구경북특별위원장과 통일분과위원장, 2명의 중앙교육위원에 대한 사임안을 원안대로 처리했다. 또한 임원, 운영위원, 홍보위원 및 사무국 연수를 집행부에 위임했으며 출범 9주년 기념법회 포상을 위해 지역단 운영위원회 회의록을 첨부한 포상추천자 공적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어 ‘제7차 8재계수계실천법회의 건’은 오는 2월 개최되는 임원회의로 이월했으며 ‘교구본사 신년하례의 건’은 각 지역단의 일정에 맡기기로 결의했다. 또한 효 문화실천특별위원과 포교회관건립추진위원, 국제이주민팀원 등에 대한 명단을 오는 30일까지 제출하도록 공지했다. 강홍원 단장은 인사말에서 “포교사단도 어느덧 창립 10주년을 눈앞에 두게 됐다”면서 “종단에서 포교사를 배출한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불교신문 2496호/ 1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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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귀한말 몇자적어 보았습니다
핵무기 할때 핵 한자 부수 속에는 돼지해자가 부수로 들어 있습니다 .
나무목자도 들어잇습니다 . 해석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 사약에 재료를 만드는 독초 나무 끌인약물과 돼지고기 속에 서식하고 있는 세균과 합하면 돼지고기속에 들어있는 세균이 본래 뜨거운 물질속에 들어가면 온도가 높을 약초물속에나 또는 온난화로 인해서 더우면서 오염도가 높으면 세균이 강해지면 서 세균이 탁구공처럼 동그란 모양에다가 송충이 처럼 털이생기면서 털끝에서 세균에 새끼가 한 마리씩 떨어져나오면서 기아급수적으로 번성을 합니다 ‘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오염된 수돗물돠 지하수물속에서 살고있는 세균과 같은 세균입니다 .제가 tv에서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악성세균이 아메바처럼 생겨서 털이 없었습니다. 금년들어서 tv뉴스에서 보면 털이 생겨서 털끝에서 세균이 한 마리씩 떨어져나오는걸 볼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적에 송충이털이 팔살에 박혀서 가려우면서 자꾸 살속르호 파고들어가면서 안빼내면 털이 박힌 부이에 물집이 생기면서 염증이 생기는걸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세균이 털이 없을때는 인체내에 장속에나 머리에서 발끝까지 돌아다녀도 살속에 뇌속에 장속에 박히지안았으면서 인체내 쌓인 포화지방산 기름속에서 서식을 하면서 염증을 유발시텨서 염증이 암으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 지금은 강해져서 살속에 박혀서 절데로 빠져나오지안으면서 번성을 하면서 고열을 나게해서 살을 썩게 하면서 썩은 부이가 자꾸 늘어나게 합니다 . 격암유록에 나 정도전 정감록에 보면 물ㄱ이오염되고 바이러스 세균 때문에 2016년부터 2017년안에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10집에서 9집은 죽어버린답니다 참기름은 포화지방산 기름과 불포화지방산 기름이 반반희석되어있답니다 불포화지방산 기름은 인체내에 쌓이지안습니다 . 등푸른 생선기름과 올리브유 들기름은 불포화지방산 기름입니다 불포화지방산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드시면 인체내에 쌓인기름을 녹여서배출을 시킴니다 . 인체내에서 살고있는 악성세균을 죽일려면 올리브잎 끌인물을 하루종일 마시거나 올리브잎끌인물로 커피를 타서 마시거나 올리브잎을 음식마다 너어서 조리를 하셔서 드셔야 됨니다 . 올리브잎은 인류 평화에 상징이라고 유엔깃발에 있습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암병으로 극심한 통증을 느낄때 드시면 몸이 평화롭다해서 평화에 상징입니다 저는 뜨거운 자판기 커피에도 올리브잎을 잘게 부셔서 너어서먹습니다
올리브잎은 특별한 향이 없어서 아무음식에나 너어서 드셔도 요리에맛이 변하지안습니다.
머리두 한자 콩두자와 일백백자가 들어있습니다 콩을 먹으면 머리가 건강해지면서 백년을 살수잇다는 뜻입니다 제가 식당에서 뚝베기 혼자 200백개와 딸린그릇들 200인분 드신그릇을 설거지를 혼자다하고나서 저녁에 씻고 잘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기운이 없으면서 죽을것같은 순간 커피를 마시고나니 기운이 머리에 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머리;가 편하지안고 아프거나 열이나거나 할때 저는 커피를 마시고 잠을 잘잠니다 악성세균이 만성으로 돼지. 소. 닭. 몸속에 번성이 되어야 병들어 죽습니다. 만성이 아니면 병이 안든것처럼 보입니다
스님들께서는 암병으로 많이 아프시다가 돌아가신답니다 . 사리는 본래 암덩어리입니다
가수 송대관씨 어머니께서는 심장이 아파서 수술을 하셨는데 다이아몬드와 같은 돌들이 많이 박혀있더랍니다 담석증 할때 석자는 돌석자를 씀니다 올리브잎은 당진 올리브농장에 팝니다 싼값에 인터넷에 전화번호는 010 8366 0343
악성 세균은 끌일수록 구울수록 열을 높은 온도에서 가할수록 악성으로 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