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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1110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 마성스님 글에 대한 문제제기 백승권 _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 불교포커스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마성스님 글에 대한 문제제기
백승권 _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
승인 2011.10.12 16:24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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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이 지난 10월 10일 기고한
'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와 관련해 
조계종화쟁위원회에서 반론글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전문을 게재합니다.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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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이하 선언)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이 선언을 기초한 화쟁위원회 입장에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판이 때론 서운하기도 하지만 이 선언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을 돌아보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이 선언의 품질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이를 통해 대중공사의 전통을 갖고 있으나 토론문화의 실종을 걱정해야 하는 불교계에 오랜만에 큰 이야기판이 벌어진 것은 뜻밖의 소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비판이 다 정당한 것은 아니다. 어떤 비판적 주장을 펼쳤을 때 그 근거는 반드시 사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초가 부실하다면 그 주장은 그야말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격일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기 위해 타당하지 않은 근거를 동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10월10일자 <불교포커스>에 실린 <‘아쇼카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마성스님)>라는 글은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외면한 글이다. 바로잡지 않을 수 없어 글을 쓴다.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외면하는가

첫째, 원로회의 관련한 내용이다. 마성스님은 「시간에 쫓기지 말고 보다 신중히 문안을 다듬을 것과 불교계 내부의 문제와 관련해 보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것을 주문했다」는 원로회의 관련 <불교닷컴>의 보도를 인용하며 「이제 아쇼카선언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교닷컴> 보도의 어떤 부분이 마성스님으로 하여금 그런 엇나간 판단을 하게 만들었는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원로회의 보고 과정에 배석했던 필자가 생각하기엔 그 자리에 참여했던 어떤 사람이 마성스님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생뚱맞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성스님은 설상가상으로 터무니없는 소설까지 쓰고 있다. 「원두스님(조계종 전 종정비서실장 겸 원로회의 사무처장)이 <현대불교> 10월 5일자 1면에 “조계종 화쟁위원회 종교평화선언과 관련, 불교도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라는 광고를 게재했다. 이 광고에 의하면, “동 선언은 조계종과 한국불교계에 대재앙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광고 때문인지, 10월 6일 개최된 제38차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종교평화선언과 관련하여, 원로의원들은 화쟁위를 대표해 취지를 설명한 원택스님에게 심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마성스님의 주장은 추측과 가정을 사실과 혼동하고 있다. 마성스님에게 되묻고 싶다. 94년 종단개혁 과정에서 멸빈을 당한 원두스님의 주장 때문에 원로회의가 선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상식을 벗어난 판단이다.

멸빈자의 비판 광고에 원로회의가 선언을 질책했다?

둘째, 명칭에 관한 내용이다. 마성스님은 「이 선언의 초안은 분명히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첫 번째 지적이후, 슬그머니 ‘종교평화선언’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라는 부제도 슬쩍 빼버렸다. 무슨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평화선언’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선 말문이 막힌다. 언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인가? ‘종교평화선언’은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의 약칭이다. 약칭 사용을 개칭으로 둔갑시켰다. 그것도 자신의 「첫 번째 지적이후」라는 단서를 달아서. 심각한 아전인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성스님은 개칭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전제 위에서 「‘종교평화선언’이라면 그 주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합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종교평화선언’을 조계종 화쟁위에서 주도한다면, 기존의 초안 내용을 완전히 폐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작성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2002년 7월 12일 태국에서 창립된 UN 산하 ‘세계종교지도자회의(The World Council of Religious Leaders)’의 모든 문서에는 특정 종교의 고유명사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처님’, ‘연기적 세계관’, ‘인다라망’ 등과 같은 용어는 일체 들어갈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그 위에 가정의 가정을 펼친다. 이렇게 되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부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현실이 된다.

‘종교평화선언’ 약칭 사용을 개칭으로 둔갑

셋째, 사부대중토론회 관련한 내용이다. 지난 9월19일 사부대중토론회에 대해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화쟁위에서는 처음부터 초안을 고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변명만 늘어놓았을 뿐, 반대자의 의견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 자리는 선언에 대한 의견수렴의 자리다.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고 이후 최종안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이 이 선언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마성스님은 자신의 논문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반대자의 비판에 대해 논거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도 않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성하고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겠는가?

넷째, 불교계에 대한 폄훼다. 마성스님은 선언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밝힌 불교계에 대해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불교신문에 실린 각종 기고와 장영섭 기자의 칼럼을 화쟁위의 「전형적인 언론 플레이」라고 강변한다. 지난 9월22일 교구본사주지협의회의 긍정적 반응에 대해선 「“과연 참석한 19명의 교구본사 주지 스님 중에서 이 선언의 초안(9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스님이 있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라고 매도하고 있다.

선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지 않은 스님, 재가자, 불교학자들에 대해선 「전국의 스님 중에서 이 선언의 초안(9쪽)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본 분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재가자들이 승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선언을 보고 침묵하는 것은 지나친 보신주의가 아닐 수 없다.」고 주관적 잣대로 재단한다. 선언에 대해 마성스님과 같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모두 양식 있는 불제자고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무지하거나 로비를 받았거나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란 주장이다.

그러면서 「기독교계의 ‘바르 선언’은 물론 종교평화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에게 조계종 화쟁위에서 ‘아쇼카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콧방귀를 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마성스님은 불교계의 선언을 부정할만한 대단한 근거로 기독교계 학자의 콧방귀를 제시하고 있다. 그 학자의 정체도 의심스럽지만, 평소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 그 기독계 학자의 주장에 춤을 추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긍정적 입장 가진 불교계 인사는 싸잡아 폄훼

마성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했던 첫 번째 글에서 제기했던 건설적 조언을 필자는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이 글에선 그런 자취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사실을 왜곡하고 의도적 곡해를 되풀이하고 있다. 왜 토론하는가? 토론을 통해 토론하기 이전보다 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토론을 승패가 갈리는 게임으로 생각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상대방을 제압하고야 말겠다고 작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토론은 실종되고 말을 도구로 삼은 싸움판만 남을 것이다. 토론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상대방의 의도나 글의 진의를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화쟁위는 거친 비판에 대해서도 그 비판의 정치적 배경, 감정적 앙금을 배제하고 그 문제제기의 정당성과 타당성만을 오롯이 판단해 반영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부디 문제제기를 해놓고 며칠도 되지 않아 왜 문제제기를 수용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주장의 합리성을 비교하고 문제제기를 면밀하게 검토하기 위해선 당연히 합당한 절차와 시간이 걸리지 않겠는가. 토론도 부처님 법대로 하면 된다. 금강경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어떻게 남을 위해 설명해줄 것인가? 설명해준다는 관념에 집착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설명해야 한다.'


반론ㆍ정정ㆍ추후 보도를 청구하실 분은 이메일(budgate@daum.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생산한 저작물은 누구나 복사할 수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센스 2.0: 영리금지 개작금지'에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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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관련기사icon‘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和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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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위가 2011-11-05 00:44:08


불자가 스님을 향해
언어폭력을 행하는 거 같음
좋은 표현도 많을 텐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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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 2011-10-22 12:43:19


화쟁위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면
핵심적인 분들이 모여서 토론하되 도법스님 등의 화쟁위와 마성스님 법응스님 이학종기자 등이 모여서 끝장토론 하면서 인터넷으로 생중계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마음은 없는 것 같군요.
종회나 원로위원들만 찬성하면 된다는 것인지 뒤로 작업하는 것 같군요.
진리를 찾는 종교가 이렇게 뒤꿍꿍이 같은 짓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영원히 불교의 힌두마구니 같은 소리 듣지 않으려면 공정한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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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화 2011-10-21 10:36:28


그대가 재가불자가 인가?
부처님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지은바 대로 받는대고 하셨으니,
만약 내가 구업은 지었다면 그것은 내가 그 업대로 받게 될 것이오.
그대 또한 재가불자임을 밝히며 이렇듯 구업을 짓고 있으니
당연히 그 업은 그대가 받으면 될 것이고...

건전한 토론은 상호 이해와 존중이 필요함을 내 어찌 모르겠소?
내 언설이 그대가 보기에
"건방지고 안하무인"하고, "가당찮은 헛소리"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그대 생각이고 견해이니 내 뭐라 탓할 말은 없겠으나,
그대야 말로 감정적으로 상대를 토론의 "토"자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으로
무조건 비방하고 매도하고 있음을 깊이 반성해야 될 듯 싶소!
아무튼 우리 모두 구업을 반성하고 참회 합시다....

나무석가 모니불..._()_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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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 2011-10-20 23:19:16


스님...스님 글이야말로 "건방지고 안하무인"이네요.
백승권 국장의 글은 토론을 하려면 사실에 기초해 논의하자는 이야기죠.
"가당찮은 헛소리"는 그만하시고, 사실에 기초한 토론을 하는데 집중하시죠.
괜한 추측과 감정으로 좋은 토론거리를 편가르기하지 마시고요....
재가불자들은 감히 토론도 못하겠네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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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2011-10-17 23:20:06


조계종 새총무원장이 젊어서 개혁적으로 일 할 것을 기대한다고 한 것이 엊그제인데, 어떻게 자승이란 자는 하는 일이 불자가 원하지 않는, 개독들이 원하는 일만 하는지?
자승은 중옷 벗고 조계종에서 꺼져라! 너의 무리들까지 데리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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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처럼 2011-10-17 21:09:15


한때,색깔만 입히면 만사여의하던 때가 있었다. 용공,반미,반정부,의식화.....
그 수법을 악용한는 사람이 있다.
멸빈자가.......근본주의자가........
멸빈인사가운데는 진실한 불자가 있고, 승승장구하는 자중엔 은처승 폭력승도 있다.
멸빈어쩌고, 근본주의 어쩌고 하는 짓은 구태일 뿐이다.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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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사 단현 2011-10-17 13:17:08


화쟁위가 불교를 망치고 있다
도법스님과 어용교수들 기독교목사 등이 규합되어 만든 종교평화선언
일부 멋모르는 스님들이 극찬하면서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진상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결국 신이나 기복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부처님 가르침이
믿기만 하면 복 준다는 기독교의 잘못된 면만 쫓아 가다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도법스님 조성택교수 등이 지난 1월 27일 기독교의 목사 이찬수를 화쟁위 기획위원으로 영입해서 그들과 짜고 종교평화선언을 만든 것입니다.

불교와 타종교가 다르지 않다’
기독교도 진리다,
불교가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겠다,
타종교인에게는 전법도 하지않겠다,
제발 앞으로는 잘 지내자는 성명을 발표하는 항복선언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뱃고 있습니다.
이천수 목사가 불러주는 그대로 받아 적으셨군요.

이런 종교평화선언을 도대체 왜 하는 것입니까?
할일이 그렇게 없습니까?
화쟁의에서 하는게 도대체 뭡니까?
자승이 자신의 방패막이로 아주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 몇 스님들과 어용교수들을 모아 만든 것이 화쟁위 아니던가요?

1년에 몇십억 원 보시가 나오는 강남 제일 사찰 통장을 재가자들의 모임인 신도회에 되돌려 주신 명진스님을 잘라내기 위해서
뭔가 합의를 도출해 낼 것처럼 하다가 결국 봉은사 직영하고 명진스님을 강원도로 내치는 명분만 만들어 주신 분들이 화쟁위 아니었던가요?

그런 못된 짓은
누구든지 사찰 금고열쇠를 재가자에게 내 준 주지들은 무조건 강퇴시킨다는 확실한 본보기로 명진스님 한 분 내쳐서 본을 보였으면 충분합니다.

자승스님.
부처님 뵙기 부끄럽고 재가자 앞에 민망하지도 않습니까?
이제 또 다시 우리 한국 불교를 망치는 짓은 제발 그만두십시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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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사 단현 2011-10-15 15:44:59


삼법인이 불교의 근간입니다.
제법이 무아인데 무슨 참나 진아 주인공 하나 유식 전오식 말나식 자성 불성 영혼이 가능할까요?
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가 있나요?
왜 힌두교 아트만을 가져와서 갖은 소리로 영혼이나 영원히 존속하는 절대개체를 만들려고 합니까?
불성 본성을 단정하니 여호와 성령이 비슷하거나 궁극이 같다는 소릴 하는 것입니다.
근본을 벗어났다면 불교라고 하지 말든지...

천주교와 개신교는 의식만 다를 뿐 교리는 100% 같아도 공존하면서도 싸웁니다.
아일랜드와 영국은 성공회와 개신교간에도 100년 이상 전쟁을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근본불교와 대승불교가 싸울 일이야 있겠습니까만 아뢰야식 여래장 불성 영혼사상은 힌두교이지 불교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불교기초교리조차 모르는 선방에만 들어앉아 있던 양반들인지, 도통 말귀가 없어요.
그 속에 불교기본교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허황된 소리는 차마 쓸 수 없을을 거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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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화 2011-10-14 23:44:11


화쟁위 사무국장이면 삼보에 귀의한 불자의 한 사람일진데.
어찌 어투가 이리도 건방지고 안하무인격인가?
그리고 마성스님이 지적하고 문제제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과 해명없이
말꼬리만을 트집잡아 무조건 마성스님을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몰아부치며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를 해대는가?
그대가 생각하는 불교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사견으로 부정하셨던 유일신교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타 종교인에 대한 개종을 목적으로 한 불법의 전교를 포기한다는 그대들의 헛된 망상과 행동들만이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는 참된 불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만약에 그대가 마성스님을 불교의 근본주의자라고 몰아부치면,
그동안 여러 매채와 토론회를 통해서 이번 선언에 대해 문제제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법응스님, 이학종 기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 역시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몰아부칠셈인가?
나 또한 수행승으로써 법응스님, 마성스님, 이학종 기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당연히 이번 선언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까닭에 당장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만약에 이번 선언을 제대로 읽어보고 분석헤 보지도 않고 무조건 화쟁위편을 들어
찬성하는 출가자나 재가자가 있다면 한국불교 역사에 크난큰 과오를 범하는 것인 줄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_()_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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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書 2011-10-14 22:10:58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불교에도 근본주의자가 있을까. 이제까지 기독교근본주의자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는데, 이제 새로운 용어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그런 불교근본주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화쟁위 실무자의 행보를 보면

최근 교계인터넷신문에서 마성스님이 ‘21세기 아쇼카선언’에 대하여 여러차례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 중에 가장 최근에 반론한 것이 ‘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 되었다.

반론자는 화쟁위에서 일하는 ‘백승권사무국장’으로 되어 있다. 화쟁위의 실무를 전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백사무국장의 행보에 대하여 인터넷검색을 하여 보았더니 화쟁위의 활동이 있는 곳에 반드시 그의 발언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백국장이 한 가장 최근의 발언은 아쇼카 선언과 관련된 것으로서 “시민사회, 학자 등 다양한 견해를 듣고 선언을 발전시킬 선언의 완성안이 돌출되길 기대한다(BTN뉴스, 2011-09-22)”라고 말함으로서 그가 실무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뿐만아니라 화쟁위가 활동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예로서 작년 봉은사 사태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기 위해 면담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상호 의견을 나누고자 자리가 마련됐다(주간불교)”라고 설명하였고, 금년 초 김진숙 한진중 노조위원의 농성에 관하여 화쟁위원장이 노동부를 방문하였을 때 푸대접 받은 것에 대하여 “전경련, 상공회의소, 민노총, 한국노총 등은 성의있게 조치를 취하는데 노동부만 거절했다”면서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무성의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그가 실질적으로 화쟁위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불교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런 백국장이 마성스님의 반론에 대하여 재반론 형식을 글을 같은 매체에 남겼는데, 그가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마성스님은 불교계의 선언을 부정할만한 대단한 근거로 기독교계 학자의 콧방귀를 제시하고 있다. 그 학자의 정체도 의심스럽지만, 평소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 그 기독계 학자의 주장에 춤을 추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백승권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불교포커스 2011-10-12)



마성스님이 제기한 ‘아쇼카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에 대한 글에서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기 식의 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불교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에 반론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불교 근본주의자로 보는 시각을 갖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화쟁위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지난 해 총무원장 직속으로 출범된 조직이다. 주로 종단과 사회 현안을 불교의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다루고 그 해법을 찾자는 취지로 발족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단과 사회문제가 발생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갔는데, 작년의 경우 ‘봉은사 사태’와 ‘사대강사업’, 금년의 경우 ‘한진중노조사태’에 관여 하였고, 현재 가장 논란거리인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선언을 발표하면서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 할 수 있도록 전격적으로 발표 한 것에 대하여 일종의 ‘불교쿠데타’이자 사회와 기독교에 대한 ‘언론플레이’임을 여러차례 블로그에 글로서 올린 바 있다. 더구나 충격적인 사실은 선언문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기독교 ‘목사’도 참여 하였다는 사실이다.

지난 1월에 구성된 화쟁의 내부의 ‘기획위원회’에 기독교신학자 ‘이찬수목사’가 명단으로 올라간 것을 교계 인터넷신문의 기사에서 확인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더 놀란 것은 그 목사가 불교평론에 발표한 글과 이번 선언문의 내용이 너무나 흡사한 내용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쟁위에서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한 해명은 없고 마성스님이 제기한 글에대하여 사실에 기초한다는 명목으로 글의 내용 중에 일부를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기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화쟁위가 생각하는 불교근본주의자

이처럼 화쟁위의 선언문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는데, 대체 화쟁위가 생각하는 불교근본주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같은 화쟁위 멤버인 조성택교수가 남긴 글에서 잘 설명된 것으로 본다.



기독교가 그러니 우리 또한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패배주의자의 넋두리일 것이다. 민족불교를 얘기하고 한반도에서 17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가 먼저 올바른 포교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궁금하다. 이 또한 ‘싸우면서 닮아가는“ 또 다른 모습일까 걱정스럽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09.15)



위 조성택 교수의 글을 보면 화쟁위의 선언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의가 잘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불교근본주의자들을 기독교근본주의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문자에 집착하여 바이블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실천함으로서 갈등과 긴장을 야기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서 불교근본주의자들 역시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쟁위 연기관을 보면

부처님의 법대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처럼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다. 또 포교를 위하여 남을 귀찮게 한다든가 심지어 총과 칼로서 개종을 강요한 적도 없다.

부처님의 법대로 사는 불자들에게 “싸움하면서 닮아가는가”라며 있지도 않은 표현을 사용하여 비판하였다면, 이는 부처님을 능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능멸스런 표현은 선언문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선언문의 표기된 다음과 같은 연기관이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이것이 화쟁위에서 만든 연기관에 대한 것이다. 이 연기관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용중에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에서 주어를 바꾸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놀라운 내용으로 바뀌고 만다. 바로 이런 연기관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자신의 글 말미에 “누구를 위한 선언인가”라고 깊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로버트 바스웰(Robert Buswell)교수의 특강에서

선언문에 실려 있는 연기관은 매우 생소하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연기관이다.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보통불자가 보기에 국적불명의 연기관이라고 글을 쓴 바 있는데, 사실 국적이 있는 연기관임을 알았다. 그것은 불교TV 사이트에서 본 ‘로버트 바스웰(Robert Buswell)교수’의 특강(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8회 )을 듣고 나서부터이다.

바스웰 교수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UCLA교수이다. 현재 동국대 학술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바스웰 교수는 한 때 출가수행자로서 삶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이 방장으로 있을 때 외국인 스님으로 약 5년간 살았는데 외국인 1세대 출가수행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바스웰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면 아쇼카선언문에 실려 있는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알 수 있었다.



중국에서 불교가 공격을 받은 이유

중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 된 것은 후한시대 68년에 백마사가 건립되고 나서부터이다. 이후 중국인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불교는 몇 백년이 지나지 않아 ‘비판’ 받게 된다. 이유는 “불교가 중국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불교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으로서 중국인들의 민족적 가치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불교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써 먹는 보편적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중국의 경우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유교와 도교라는 고도의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된 이국종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문화적 우월감과 자주성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고 본다.

또한 불교의 가치관이 중국인들의 현세적 사고와 맞지 않은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경우 세간의 일 보다 출세간적 가치를 더 크게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점이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현실주의자들과 많은 상충을 일으킨것이다.



중국의 3무 1종 법난

그 결과 여려차례 법난이 일어 났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 3무 1종 법난’이라 한다.



중국의 3무1종의 의한 법난

No
3무 1종
법난 내용

1
북위 제3대 태무제

(423~452년 )법난
440년에는 공식적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명령을 내려 많은 승려들을 살해하고, 사원, 불상, 경전 등을 불살라 버림

2
북주의 무제

(560~578년)법난
무제는 유교를 신봉하여 불교와 도교를 폐지하고 많은 승려를 환속시킴

3
당의 무종

(841~845 )법난
도교를 신봉한 무제에 의해 외래종교인 불교에 대한 비호감으로

4
후주의 세종

( 954~956)법난
국가의 재정난과 승려들의 풍기문란에 대처하기 위해





이 중 두 번째인 북주의 ‘무제’에 의한 법난이 561년에 일어났는데, 이 때 유교를 신봉하던 무제에 의하여 수 천명의 승려가 승복을 벗었고 또 환속하기를 강요 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수백개의 사찰을 파괴 하였으며, 수 천개의 불상, 특히 금이나 동등으로 만들어진 불상을 녹여 황실재산으로 귀속시켰다.



불교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

이렇게 불교가 공격당하게 되자 불교계는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대응책을 찾아야 했다. 일종의 ‘살아남기위한’ 전략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에서 천태종, 선종, 화엄종과 같은 토착적인 불교전통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토착불교전통들의 특징은 중국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반영하여 중국인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불교로 발전하였다. 그래야 이국의 종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불교에서 말하는 출세간적 전통에 대하여 무가치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 살아 남기 위한 대응법이라고 볼 수 있다.또 성불은 영겁이 걸린다는 인도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지금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종파들은 어떻게 진화해 갔을까.



인도불교와 등을 돌리고

북주의 무제에 의한 561년의 훼불사건이 나기 전까지 중국의 종파들은 대부분 인도의 유사한 종파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중국인들이 불교를 인도적 관점을 통하여 보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토착 종파들이 생겨 나면서 이들은 인도적으로 해석된 불교와 ‘등을 돌리고’ 만다. 중국인들이 불교를 이해하는 스스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더 이상 인도에서 발생한 주석서라는 중간매체에 의존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인도의 사상체계에서 등을 돌리고 직접경전을 읽어내어 중국만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만든다.그래서 이들 토착종교들은 주요경전에 대하여 ‘재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화엄경’이다.

이렇게 경전에 대하여 창조적 재해석을 통하여 교리적 권위도 확보하고 동시에 중국의 문화와 현실이 반영된 새로운 해석도 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해석학은 인도학파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중국인들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해석방법에 있어서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단일 촉매제를 찾아서

보살도라 불리우는 인도불교의 여러 수행단계들을 ‘압축’시켜 좀 더 단순한 수행체계를 만들필요가 생긴 것이다. 중국인들은 갑작스런 깨달음, 소위 ‘돈오’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은 즉각적, 순간적 경험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지난한 수행과정 대신 깨달음의 통찰을 가져다 줄 ‘단일 촉매제’를 찾아 나섰다. 중국인들은 ‘이것만’ 찾으면 나머지는 쉽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것이란 무엇일까.

먼저 보살도에 대하여 탈신화화하였다. 이는 52단계에 이르는 수행법을 압축하여 하나의 단계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만 하면 즉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단일 수행법은 없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이 많은 토착불교종파의 목표이었다. 무수한 생을 거치지 않고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화엄종에서 깨달음이란?

그 방법은 “깨달음은 새로이 성취된다기보다는 원래 타고난 것을 발견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깨달은 존재가 아니라는 잘못된 믿음만 제거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토착불교종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목표이었고, 특히 화엄종이 이런 특성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화엄종의 소의 경전인 화엄경은 인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다수의 개별경전을 대승이라는 사상아래 일종의 문집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화엄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로스웰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십지품과 입법계품과 같은 몇몇 산스크리트 원전이 있는 품이 있긴 하지만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 편찬된 것으로 본다.

이처럼 화엄경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에서 화엄종이 발생하였는데, 화엄종에서는 이 화엄경에 대하여 ‘급진적인’ 재해석을 하게 된다. 화엄경의 상징과 비유를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중국적 사상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 통일신라의 고승 의상대사도 참여하게 된다.



화엄경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

화엄종에서는 인도사상가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 세상을 더럽고, 타락하고, 무상하고, 고통에 가득 찼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 존재 자체로 깨달음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그믈을 형성하며, 그 그믈 안에서 각 부분들은 모두 연결되어 거대하고 완전한 전체, 일체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의 근간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된 상입, 혹은 완전한 융합, 즉 원융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근본개념은 이 상호관계가 개별성을 정의한다는 갓이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상호 작용을 통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지는 상호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산물로 보는 것이다.

대체 이런 사상은 어떤 사상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인도의 ‘공’에 대한 통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인과에 대한 화엄의 새로운 정의는



중론학파의 공사상에 따르면 만물에 고정된 타고난 성품은 없다는 것이다. 만물에 고정된 성품이 없으니 맺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수는 무한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맺는 관계의 산물인 것으로 본다. 마치 집에 가면 아버지라 부르고, 회사가면 사장님이라고 부르듯이 어느 하나가 우리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을 정의하는 것은 매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이 광대한 상호관계의 그믈로 보는 것이다. 화엄의 관점에서 보면 공성의 의미는 만물은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론적으로 보는 관점을 인도에서 강조된 인과와 결합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 이에 대하여 로스웰교수는 “각 개인은 세상의 다른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또 그들에 의해 창조된다”고 말하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와 연결된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인과는 일방이 아니라 무한대의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에 대한 화엄의 새로운 정의라고 한다. 그래서 인과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우주는 스스로를 재창조하며 만물이 서로를 창조한다”는것이다.



‘벽돌쌓기’식의 수행을 거부하고

이러한 인과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수행에 대해서도 새로운 개념을 낳게 되는데, 그것은 “발심할 때 이미 깨달음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깨닫겠다고 발심을 하는 자체가 완벽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의 시작과 끝은 똑 같다고 말한다. 보살도 52단계 중에 어떤 단계라도 성취되면 나머지 51개의 단계가 모두 성취 된 것과 같다는 말이다. 하나만 제대로 하면 , 그 하나가 깨달음의 발심이라고 할지라도 수행의 전 단계를 완성한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이를 바로 내안에 있는 ‘깨달음의 잠재력을 깨닫는 순간’으로 설명한다.

이런 개념은 매우 혁명적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먼 미래의 수행의 전과정을 미루면서 까지 불과의 증득을 미루고 육바라밀을 닦아 성불을 미루면서 까지 육바라밀과 52단계 수행과정을 거쳐야 되지만 화엄종의 화엄경에 대한 재해석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여러 단계를 거치는 것도 화엄종에서는 관심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보살도는 ‘벽돌쌓기’식의 수행이기 때문에 현실에 바탕을 둔 중국의 토착불교의 목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증득이 아니라 수행한다는 자체가 목표라고 버스웰 교수는 설명한다.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연기관

로스웰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토착불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태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몇 차례 법난을 겪고 난 중국불교가 중국의 문화에 중국인들의 현세에 대한 갈망을 무시할 수 없어서 인도불교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경전에 대한 재해석으로 인한 영향이 크다. 특히 화엄경을 재해석한 화엄종학파의 경우 수행이나 깨달음에 대한 개념도 인도불교와 전혀 다르게 개념을 정립하였다. 이런 다른 모습은 ‘연기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으로 대표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등 불교의 핵심교리는 모두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에서 시작되는데,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연기법은 이와 다르다. 그것을 로스웰 교수는 ‘법계연기’로 설명한다.

로스웰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화엄종의 인과에 대한 설명은 매우 독특하다고 한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를 이용하여 현실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인과에 대한 설명은 초기불교와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인과가 ‘선형적으로’ 설명된다. 근본원인이 있고 부수적인 조건들과 합쳐져서 결과가 나오는 식이다. 주변조건이 갖추어 지면 원인이 과보를 맺는 것이다. 씨앗을 비유로 들 수 있다.

인도인들은 이 인과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만물은 모든 조건이 들어 맞아야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조건들이 제거되면 모든 만물이 소멸할 것이며 따라서 만물이 무상한다고 믿는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인과에 대한 개념, 성기(性起)

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우 선형적인 인과의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중론학파의 경우 인과가 ‘공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말은 “만물에 타고난 고정된 본성이 없다”라는 말과 같다. 이를 ‘무자성’이라 한다. 그런데 만물이 무자성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여러가지 형태를 띠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공성이 인과를 정의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 매우 급진적인 개념의 진화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인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말한다. 깨달음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과에 대한 개념을 중국에서는 ‘성기(性起)’라고 불렀다.

여기서 성은 불성을 의미한다. 이 성은 공성, 여여, 불성등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이런 불성은 중생의 마음이 깨달은 부처의 마음과 똑같다고 ‘정당화’하는데 사용하였다고 버스웰교수는 말한다.

이는 인과가 구원론적 측면에서 재해석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론이란 불교에서 해탈의 과정에 대한 이론을 말한다. 왜 이렇게 보았을까. 그것은 유정이라는 특질자체가 불성의 ‘현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처가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만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립된 존재로 우리 주변의 만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착각만 내려 놓는다면, 우리의 불성이 회복되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본 모습이 부처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성기의 개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영겁의 세월동안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 마음이 지닌 본연의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정을 지니고 의식이 있는 매 순간마다 우리의 불성이 구현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이것이 전부이고, 이것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화쟁위와 연기관과 법계연기

그런데 화엄종에서 다루는 연기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그것을 ‘법계연기’라 하는데, 법계자체가 연기라는 말이다. 사사무애적 관점, 즉 단일현상과 다수현상간의 상호침투의 관점에서 인과를 보는 것을 말한다. 단일현상과 다수현상이 동시에 서로를 창조하고 서로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는 더 이상 선형이 아니고, 인과는 다층적인 것이 되고 만다.

하나가 이것을 만들고, 이것이 저것을 만들고, 저것이 또 이것을 만들며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서로를 만들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단일한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연기관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관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조계종 화쟁위의 아쇼카선언문을 보면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화엄종의 연기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연기법이 아닌 토착화된 중국식 불교의 연기관에 따른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기독교와 불교를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고, 서로가 서로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교근본주의자는 나쁜 것일까

이런 논점에 대하여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비판하면 불교근본주의자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화쟁위 사무국장인 백승권 국장의 말대로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죄악시 하고 있는 화쟁위의 분위기로 보아서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초기불교신봉자들은 모두 불교근본주의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문자에 집착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와 호전적인 ‘이슬람원리주의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불교펑론가 홍사성님은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불교평론에서 기술하였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 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 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 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홍사성 위원,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 불교평론 2003)



유일신교의 근본주의가 말도 안되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교리에 집착하여 이제까지 범죄행위를 저질러 왔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기독교와 반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멀리하여 비불교적이고 반불교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 본질과 멀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에 근거한 근본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멀리하면 할 수록 좋지만, 불교의 근본주의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슬픈 역사적 사실을 알고

처음 아쇼카선언의 연기관을 보았을 때 매우 생소하였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와 같은 연기관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연기관의 주어 부분에 불교와 기독교를 대입하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는 놀라운 결론이 도출되었는데, 과연 이런 정체불명의 연기관이 어디서 유래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이런 국적불명의 연기관에 대하여 의문을 품던중 마침 불교tv사이트에서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보게 되었다. 그 강의로 인하여 그런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슬픈’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쇼카에서 사용한 연기관은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법계연기’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변형된’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중국에서 몇 차례에 걸친 법난등으로 인하여 불교가 심하게 탄압을 받아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궁여지책이 아쇼카선언문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조계종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아마도 후세사람들은 한국불교에 슬픈역사가 있었다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부처님을 능멸한 화쟁위

화엄교학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현재 문제되고 있는 아쇼카선언문의 열린진리관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열린진리관에 따르면 유일신교의 교리에 대해서 열린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에게는 ‘닫힌 자세’로 일관하여 불교근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조성택교수의 글에서 “싸우면서 닮아간다”든가 “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 가는가”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또 화쟁위의 실무자인 백승권 사무국장은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서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를 불교근본주의자로 ‘폄훼’ 하면서 부처님을 ‘능멸’하였다. 정말 불교근본주의자는 위험하고 나쁜 사상을 가진 자들일까.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홍사성님의 글에 따르면 “불교 근본주의는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지 말장난이나 하는 희론(戱論)이 목적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 졌을 때 불교가 왜곡되고 변질되었고, 그에 따라 자기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온갖 요란한 수사와 변명으로 호도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 중의 하나가 21세기 아쇼카쇼선언에 사용된 연기관일 것이다.

길을 잃고 헤메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그 방법은 하나 뿐이다. 처음으로 돌아 가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또 목적이 어디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왜곡되어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근본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2011-10-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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ㅗㅗㅗㅗㅗㅗㅗㅗ








2020/11/24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흙속의연꽃

2015. 10. 20.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한국불교에서 이상한 풍조가 있다. 그것은 불교와 과학을 접목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공즉시색’을 양자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책을 탐독하였다. 현대물리학자 프리쵸프 카프라 교수가 지은 이 책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70년대 말에 출간 되어 80년대 많이 익혔던 책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검증되어 스테디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여러 번 읽었다.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던 시절 서양의 종교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현대물리학이 동양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에 관심이 컸다. 더구나 이어지는 카프라 교수의 저서에서는 미래에는 동양사상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이에 크게 고무 되기도 하였다.

더 이상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의 접목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였기 때문이다.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 원음을 접하다 보니 색즉시공공즉시색이 양자역학과 유사하다는 공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괴로움의 문제에 대한 해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와 과학의 접목

과학과 불교를 접목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 주로 학자들이다. 그것도 과학에 기반을 둔 자연과학자들이다. 그래서일까 불교방송사이트에 가 보면 수 많은 강연을 볼 수 있다.

이미 종영 된 것이지만 사이트에 보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불교와 과학의 만남, 초끈이론과 화엄사상 박문호특강 <137억년 우주의 진화> 등 이 있다. 심지어 어느 원로의원 스님은 ‘힉스’발견에 대하여 “그 힉스라는 소립자는 그냥 공이 아니고 이 공은 다른 에너지를 만난다든지 하면은 물질화 되는 공이에요. 이런 공은 여태 이야기 안했어요. 불교말고는 안했어요. 그래서 소위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화 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있는 이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자성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하고 거기 언젠가는 발견이 되겠지요.” (고우스님, 백년의 가르침 성철스님 백일법문<법사 고우스님>, 제2회 1.불교의 본질-깨달음의 종교2, 불교TV 2013-02-25) 라고 말한 바 있다. 더구나 원로스님은 힉스발견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면서 반야심경에 표현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가르침을 증명해 줄 것이라 기대하였다. 과연 과학불교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 줄까?

등따습고 배부른 자의 환망공상

불교를 과학과 접목하려는 시도는 요새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 교수는 ‘진화연기론’을 들고 나왔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대하여 진화론적 관점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 하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 작성된 환망공상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자연과학과 인문과학)과 다른 사상과 남의 종교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깊이 사유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에 걸리지 않으며, 이미 걸렸다면 깨어날 수 있다. 거룩한 모습을 한 종교인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의 마음은, 사실상, 황량한 바람이 마른 땅을 훑으며 모래를 퍼 올려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환망공상의 사막이다. 인간은 누구나 삼장법사 현장스님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건너간, 악령이 들끓는, 고비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지밀(至密)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어떤 괴물이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당사자도 모른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이 위대한 이유이다.

(족외혼: 정신적 유전자의 혼합,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70. 불교닷컴 2015-10-19)

한마디로 등따습고 배부른 자의 환망공상이라 볼 수 있다.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근본주의라는 말이다. 이 근본주의에 대하여 광신이라는 수식을 하였다. 그렇다면 광신적 근본주의는 어느 종교를 지칭하는 것일까? 주어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종교가 해당 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명확하다. 그것은 초기불교주의자들을 말한다.

뭐? 광신적 근본주의자라고?

초기불교주의자들은 철저하게 경전을 기반으로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 다른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경전위주이다. 그런데 강교수 마치 초기불교 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주의 딱지를 붙이는 것 같다. 그것도 광신적 근본주의라 한다.

근본주의는 나쁜 것일까? 타종교의 근본주의를 보면 악한 것임에 틀림 없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근본주의 특징은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수 많은 정복전쟁을 통하여 칼에 의하여 전파 하였다.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근본주의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유일신교에나 적용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마치 불교에도 근본주의자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것도 광신적이라 한다.

강교수가 말하는 불교근본주의자들은 어떤 것일까? 이는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이라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근본주의자들은 경전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바이블의 한구절 한구절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초기경전 한구절 한구절을 믿는 것이 나쁜 것일까?

경전을 믿고 따르는자 들은 기본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경전, 특히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 불교근본주의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근본주의자들은 위험한 것일까? 강교수 말대로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라고 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이슬람이나 기독교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비판의 대상이다. 이는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에 따른다. 그러다 보니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이 수 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다. 그렇다면 불교근본주의자들도 유일신교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까? 아쉽게도 강교수는 동일시 하는 것 같다.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열렬한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면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처님의 가르침이 평화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 역사적으로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전도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칼로서 또는 폭력으로 개종 시킨 적이 없다. 왜 그런가? 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다. 그 어디에도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어떤 근거로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이라거나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라는 말을 하였을까? 더구나 “어떤 이들은 전 세대가 뱉어낸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 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 환망공상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능욕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강병균 교수는 빠알리니까야를 읽어 보기나 하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왜 필요한가? 이에 대하여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2015-06-02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을 올리게 된 동기는 어느 법우님이 “연꽃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가끔은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있는 것같기도 합니다. 경전은 100% 옳지는 않습니다.”라는 글을 보내 왔기 때문이다.

조성택교수 말하기를

한글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또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뺄 수도 없다. 그럼에도 경전적 도그마에 빠졌다느니 경전을 맹신한다는 자들의 말을 이해 할 수 없다. 과연 한 번 읽어 보기나 하고 하는 말인지 의문이다. 그럼에더 “전 세대가 뱉어낸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라는 말은 그야말로 등따습고 배부른 자의 환망공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회의론자들은 의심으로 경전에 대하여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선별해서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러다 보니 경전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심지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불교철학자라 말하는 조성택 교수도 그런 케이스이다.

불교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불교학자 조성택 교수는 경전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다. 특히 빠알리니까야에 대하여 그렇다. 조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라 하였다. 심지어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라 하여다. 일부는 동의할 수 있지만 모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전의 전통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종교창시자들은 일반적으로 글을 남기지 않는다. 말을 하면 제자들이 기억하였다가 전하는 방식이다. 8만 4천 법문이라는 방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구전 된 것이다. 그러다 후대에 문자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후대에 편집되었다느니 조작 되었다느니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는 것은 가르침을 대하는 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존재론에 기반을 둔 과학불교

대체로 학자들은 경전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경전에 의지 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로 몰아 세우고 경전을 광신한다고 폄하한다. 한마디로 그들의 눈에는 초기불교주의자들은 광신적 불교근본주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에 과학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른바 과학불교를 말한다.

과학불교를 말하는 자들은 불교를 과학적으로 재해석한다. 과학적 지식으로 불교를 까발려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대표적으로 진화연기론 같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과학불교는 ‘존재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과학 자체가 물질을 기반을 둔 존재를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론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온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부처님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십이처와 십팔계의 가르침을 말하였다.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의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강교수류의 과학주의자들은 우주를 도입하고 식물이나 광물을 끌어 드린다. 또 지렁이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강교수의 환공망상 시리즈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물질-정신현상 외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말룽끼야뿟따가 우주에 대하여 물어 보았을 때 침묵한 것이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물질에 기반을 두고 존재론에 기반을 둔 과학으로 불교를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인식의 지평을 열어야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오온에 대한 탐구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다른 아닌 인식론이다. 오온을 탐구하여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로 귀결된다. 이는 인식의 확장이다.

불교는 인식론이다. 왜 인식론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접하면 인식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접하기 전에는 오로지 자신의 세계밖에 몰랐지만 가르침을 접함에 따라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이는 사성제의 진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불자중에 사성제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것은 초기경전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이 생노병사 등 여덟 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부처님이“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하였을 때, 누군가 “아니요,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괴로움의 진리를 말하였을 때 누구나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수레 바퀴는 콘단냐의 깨달음이후 지금까지 굴러 왔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요약 되어 있는 것이 ‘초전법륜경(S56.11)’이다.

반야심경 대신 초전법륜경을

초전법륜경을 법회시간에 독송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대승불교의 정수 반야심경 을 초기불교의 정수 초전법륜경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은 초전법륜경에 실려 있는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가르침이 방대한 빠알리니까야를 압축적으로 표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대승경전의 정수라 한 것은 대승경전 전체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초전법륜경은 초기경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초전법륜경을 늘 수지독송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강교수는 “어떤 이들은 전 세대가 뱉어낸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 라 하였다. 과연 초기경전을 읽어나 보고 한 소리인지 의문이다.

백인백색의 불교

초기불교경전 즉, 빠알리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이다. 그럼에도 후대에 편집되고 조작된 것이라 하여 불신하는 회의주의자들이 있다. 특히 좀 배웠다는 학자들이 그렇다. 스님들과 함께 불교의 기득권 세력이라 볼 수 있는 학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폄훼하고 능멸하는 것이다.

강교수는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라 하였다. 강교수 말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망상일까?

한국불자들은 불교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경전을 믿지 못하고 경전을 무시하고 경전을 부정하다 보니 백인백색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인에게 백가지 불교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불교는 스님 수 만큼이나 불교가 있고, 학자 수 만큼이나 불교가 있다.

어떤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힌두교 교리를 듣는 것 같다. 또 어떤 스님은 부처님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로 치환하면 교회에서 목사들이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한국불교는 복홥화 되었다고 한다. 우스개 소리로 한국불교힌두종 또는 한국불교기독종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을 무시하고 자기이야기만 하다 보니 백인백색의 불교가 되었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불교에서는 자기이야기 하는 사람을 인정해 준다. 경전에 근거해서 말하는 사람을 덜 깨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소식 했다는 사람들의 법문을 들어 보며 모두 자기이야기이다. 거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매우 다양한 불교가 등장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강병균교수의 진화연기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왜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불교가 평화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바이블을 맹신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는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평화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가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자들은 경전에 의존해야

불자들은 경전에 의존해야 한다. 아무리 깨쳤다 해도 경전에 쓰여 있는 가르침을 능가할 수 없다.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

경전에 의지하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진다. 그런 초기경전은 방대하다. 그렇다고 다 읽을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초전법륜경에서와 같이 사성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발자국안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포섭된다. 마찬가지로 사성제는 팔만사천 법문을 모두 포괄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에서 사리뿟따존자는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네 가지는 어떠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M28)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성제 하나만 이해해도 팔만사천 법문을 아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럼에도 강교수는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라 하였다. 대체 사성제를 알고나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경전을 읽어나 보고나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다.

초기경전을 멀리함에 따라

불교근본주의자들은 철저하게 경전에 의존한다. 그런 경전에는 평화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불교근본주의자가 된다고 하여 이슬람원리주의자나 기독교근본주의자를 연상케 하는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표현은 무지의 극치이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는 자의 환공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백인백색의 불교가 된 것에는 경전을 무시해서 발생한 것이다. 경전을 폄하하고 무시하다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힌두교인지 기독교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부처님이 한번도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기도가 성행하는가 하면 돈으로 매수 하는 듯한 천도제가 유행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부스님들의 막행막식은 도를 넘었다. 스님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은처하는 등 온갖 범계행위가 만연 되어 있다. 이렇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그것은 경전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가르침을 망상으로 여기는 한 한국불교는 진화연기론 같은 혼란으로 빠질 것이다. 경전을 멀리 하였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담마위자야(Dhammavijaya)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불교가 평화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소까 대왕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전륜성왕이라 불리는 아소까대왕이 있다. 아소까대왕은 깔링가전투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한 후 전쟁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담마에 의한 정복을 추진하였다. 그것이 담마위자야(Dhammavijaya)이다. 왜 담마에 의한 정복인가?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진정으로 평화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아소까대왕은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였다. 불국토로 만들기 위한 동기는 첫째로 온 세상을 전쟁 없는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셋째로 이웃나라와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함이었고, 넷째로 세상의 평화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동기로 담마위자야 즉,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추진하였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지금까지 굴러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전차부대, 보병부대 이렇게 막강한 사군을 거느린 군대가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의 거룩한 진리이다.”“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여 네 가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이를 부정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 왔다. 그래서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은 가능하다.







Dhammacakka


우리는 왜 담마의 정복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이다. 다음과 같은 아소까비문으로 알 수 있다.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아소까 바위 칙령13)


2015-10-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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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이쁜하마2015.10.20 10:44

불교를 과학적 시각에서 본 것은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적어도 큰스님의 입에서 불교의 과학적 분석이 거론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달라이라마 같은 경우도 불교를 최신과학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연구하는데 아주 호의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티벳스님들의 명상상태를 심리학 뇌과학의 입장에서 연구하는 논문이 적지 않게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나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에서는 윤회의 과학적 근거로서 서구에서 환생했다고 자처하는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 등을 거론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불교에서의 윤회의 근거가 니까야 경전 도처에 존재하고 주석서에서는 아주 많이 거론되는데 굳이 서구의 환생스토리를 성철스님께서 얘기하신 것은 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큰스님 조차도 초기불교 니까야 경전을 잘 모르고 계셨다는 반증이 아닐까 해서 그렇습니다.

아뭏든 불교를 과학의 토대에 올려놓고 해부하고 분석하는 것은 저 개인적으론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교학적 지식이나 수행의 경험이 있지 않은 범부가 오로지 자신의 과학적 견해와 타이틀 만을 믿고서 가타부타 하는 것은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에 때를 묻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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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2015.10.20 11:17

왜 부처님 원음말씀이 들어있는 근본불교경전들이 있는데.. 어려운 한자로된 대승경전류로 불교를 말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읽으면 너무나 쉬운 초기근본경전들이 있는데 근본경전을 무시하고 뭐를 하자는 건지.

금강경의 공사상 중생구제(제도) 또한 12연기, 사성제 팔정도 수행정신에 다 녹아있다 생각되며 사성제 팔정도 수행과정속에 실현되는 문제이지 근본을 무시하고 중생구제를 대승의 전유물인양 인식하며 부처님 원음말씀을 소승이라 폄해하는 한 한국불교는 더욱더 부처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천도제나 지내면서 복을 비는 종교로 떨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좋은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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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화지혜2015.10.20 12:09


가장 오해받고 잘못 쓰이는 말이 근본주의입니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든
종교의 근본인 진리와 선,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경전에 매여 어떻게 광신자가 될수 있나요?
오히려 모든 종교는 진리와 선, 조건없는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늘 되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오해하고 잘못 생각하기 쉬운 대상은
경전이 아니라 자기견해입니다.

경전이 수많은 사람의 검증을 거친 일종의 집단고백이라면
자기견해는 검증을 거치지 않고 무지와 편견에의한
독단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종교의 근본을 항시 생각하고
경전의 가르침을 분명히 알고
수행과 실천을 통해 정진하는 가운데
올바른 자기견해를 정립해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른 종교관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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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2015.10.20 16:04 신고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입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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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티2015.10.20 17:06 신고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사성제 하나만 진리로 받아들여도

부처님의 8만 4천법문을 모두 인정할 수 있습니다.

육도윤회,천신 등의 개념도

사성제 논리로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당연한 논리입니다.

다만 후대 주석가들이 법구경을 설한 인연과 같은

설화이야기는 표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사성제의 틀에서 벗어난 가르침은 없습니다


즉 사성제만 인정하면 되는데

대부분의 한국 불자들은

'공'사상을 불교의 핵심교리로 보기 때문에

윤회도 공덕도 부정하고, 단멸론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게 아닌가 합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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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sha2015.10.21 09:42 신고

사두__()__사두__()__사두__()__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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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10:38

비밀댓글입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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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2015.10.21 16:05


가보세요. ~ http://cafe.naver.com/jetavana/702

초전법륜경 독송용 파일과 mp3파일의 첨부파일들을 다운 받을 수가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은 니까야 경장 속에 들어 있는 경입니다.

지금 이 사이트에서 초전법륜경으로 검색을 하시면 관련 글들을 읽으실 수가 있으며

네이버 검색으로도 초전법륜경 단독으로 출간된 책들이 몇 권 있는 것을 찾을 수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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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바다2015.10.30 06:40 신고

질문하나
연기와 무아인데
고정되지도 영원하지도 않는 무아 어떻게 윤회가 성립됩니까?
궁금합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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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30 06:41

비밀댓글입니다답글

===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댓글 5  진흙속의연꽃

2015. 6. 2.
http://blog.daum.net/bolee591/16156400
--
근본주의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주로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다보면 흔히 듣는 말 중의 하나가 경전을 맹신한다는 비판이다.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주셨다.

“연꽃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가끔은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있는 것같기도 합니다. 경전은 100% 옳지는 않습니다.”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충고의 글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가 100%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녹음해 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빠알리 니까야를 100% 확신하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단어하나, 문구 하나, 문장 하나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경전적 도그마에 빠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학자들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다. 2011년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초안을 주도 하였던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최초 경전 편찬은 문자의 영향, 조성택교수, 법보신문,2009-09-30) 

 대체로 학자들은 경전 전승과정에 의문을 표현한다. 학자로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나 경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교수는 21세기에 맞는 대승경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깟사빠존자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 하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라고 하여 결집을 주도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대중들이 합송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빠알리 니까야가 성립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담마 아닌 것이 섞여 들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로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문자로 보전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전승과정에서 편집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이 니까야 저 니까야에 부처님의 말씀이 종횡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담마 아닌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짜여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빠알리 니까야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 열반후에 500명의 아라한이 합송한 것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부터 이미 제자들에게 암송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남아 있는 ‘사띠’의 뜻이라 볼 수 있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녹음기도 없었고 필기구도 없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이를 되새겨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수행방법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45년 동안  부처님 재세시 제자들은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되새기고 사유하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좋은 예가 숫따니빠따의 제4장(Aṭṭhaka Vagga)과 5장(Pārāyana Vagga)을 주석한 닛데사(Niddesa)를 들 수 있다.

닛데사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이자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 존자가 주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처님 재세시 폭 넓게 암송 되어 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이전에 이미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되새기고 사유하고 암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대에 편집되거나 조작 되었을 것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늘날 한국에서 불자들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불교가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알리 니꺄야 원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단어 하나, 구문 하나, 문장 하나에 이르기 까지 원문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여기에 다른 해석이 달라 붙으면 안된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경전적 도그마라고 해도 상관 없다. 왜냐하면 경전에 의존하면 할수록 부처님의 원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원음을 멀리 함으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되어 왔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비불교적 행위나 사상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멀어진 결과이다. 따라서 불교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들이지만, 불교근본주의자들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충실하기 때문에 가장 평화로운 자들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빠알리 니까야가 번역되어 많이 읽혀지고 있는 시대에 니까야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별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전승과정에서 다른 사상이 혼입 되었다든가, 편집자의 생각이 실렸다든가 하여 100% 부처님의 원음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자신의 깜냥으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내용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의론자들의 말대로라면 니까야에서 이것 저것 다 빼고 나면 수행과 관련된 몇 개의 경만 남는다. 또 회의론자들이 늘 하는 말이 “부처님은 현세의 가르침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였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윤회와 업에 대하여 서슴없이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 내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물론적 단멸론자들이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경전을 신뢰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적 근거 없이 남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모두가 빠알리 니까야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2015-06-01

진흙속의연꽃


좋아요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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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海山 김 승규
2015.06.02 13:34 신고
깊은 성찰의 글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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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화지혜
2015.06.02 15:23
[세존]

수행생들이여,
세상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경, 응송, 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같은 가르침을 두루 배우지만,

그 가르침을 배워서 그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고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아서 성찰을 얻지못하고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배우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가르침은 자신들에게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생들이여 가르침에 대하여 잘 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세존]

수행생들이여,
세상에 어떤 훌륭한 사람들은
경, 응송, 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같은 가르침을 두루 배워,

그 가르침을 배워서 그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잘 규명하고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여 성찰을 얻고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배우지 않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배우지 않으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한다.

그들이 잘 파악한 가르침은 자신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생들이여 가르침에 대하여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M 1-3 뱀에 대한 비유의 경


오늘도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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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sa-soo
2015.06.03 00:59 신고

1700 여년전 중국을 거쳐 이땅에 들어온 붓다의 가르침이 이제 비로소 지난 일이십년 동안 전해진 붓다의 가르침과 "같다 할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니까야를 읽어 나가면 나갈수록 매우 다르다 .. 극명하게 다르다 라는 사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한사람의 가르침이라 할수 있을런지 회의하게 합니다

백가지 이야기중에 매우 중요한 핵심이 열가지이고 아흔가지가 주변이라 할때

그 주변 아흔 가지가 같을 뿐 중요한 핵심 열가지가 다르다면 그것을 같은 것이라 할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그 둘이 다 맞든 또는 둘다 틀리든 아니면 어느 하나가 맞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근본 교의상의 차이점이 있는 두 가르침이 둘다 맞든 둘다 틀릴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논점 ..혹은 종교적 교의..가르침의 핵심에서 빈번하게 180도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에 경악하였습니다

저의 이러한 개인적 소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시거나 혹은 강하게 비난하실 분들이 꽤나 있으실줄 압니다만 저의 경우에는 1700년전 전래되어 현재에 다다른 붓다의 가르침과 이십년전부터 전래된 붓다의 가르침 그 둘을 병립하고 병존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가르침에 회색은 있을 수 없으니 그 둘을 임의로 섞어 놓아서도 않되는 것이며 이것도 불완전하고 저것도 불완전하니 그런 시시비비랑은 말고 그냥 좋게 묻어 가자는 말들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20년간 읽어 왔던 중국을 통하여 전래되어 온 붓다의 교설이 담긴 책들을 송두리채 뒤로 미루고 이제 당도한 일이십년 상간의 붓다의 교설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일로 매진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입니다

늘 연꽃님의 친절한 가르침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늘 경안하십시오 ..감사합니다 ()...

김종랑
2015.06.14 19:36 신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방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방편이 너무 난무를 하면은 부처님의 기본 사상과 배치가될 위험성이 큽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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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sha
2015.10.21 17:36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댓글입니다

답글

2020/11/06

어떻게 살 것인가 (개정판) - 성장하고 치유하는 삶을 위한 근원적 질문 2016

 알라딘: [전자책] 어떻게 살 것인가 (개정판)


[eBook] 어떻게 살 것인가 (개정판) - 성장하고 치유하는 삶을 위한 근원적 질문  epub 

고은,석영중,손봉호,용타,한명기,박승찬,황현산,이강호,김상근,최인철,조성택,차드 멩 탄 (지은이)21세기북스2016-10-07 

전자책정가  12,800원

판매

 종이책 페이지수 312쪽, 

책소개


존재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잇는 근원적 물음,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황폐화와 사회 가치의 퇴색, 현실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의 부재로 현대인들은 인간과 삶,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 물음 끝에 탄생한 이 책은 2014년 가을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최한 동명의 대중강연을 엮은 것으로, 누적 6만 명 이상 청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부에서 김상근, 한명기, 조성택, 석영중, 황현산, 고은은 인류의 역사 속에 우리 삶의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을 통해 너를 살피고 나를 다스리는 지혜를 설파한다. 2부에서 손봉호, 박승찬, 차드 멩 탄, 최인철, 용타, 이강호는 상처를 견디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고민을 통해 삶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삶과 행복의 기본과 원칙이 현실에 닥친 슬픔과 혼란을 극복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며, 황폐해진 개인의 삶과 희미해진 사회적 가치를 극복할 수 있는 해답임을 역사와 철학, 종교와 문학 등 인문학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증명한다.

목차

발간사 / 흔들리는 세상에 맞서서, 어떻게 살 것인가


1부 너를 살피고 나를 다스리다


아포리아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 김상근

지금 대한민국은 아포리아의 시대

황금만능주의가 불러온 몸짱 열풍

캐묻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이상적인 국가 건설은 가능한가

통치자의 지혜


『징비록』 과거를 경계해 훗날을 대비하다 / 한명기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징비록』을 통해 본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

류성룡의 끝나지 않은 고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화쟁,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사는 지혜 / 조성택

‘어떻게’라는 질문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요구한다

화쟁론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화쟁은 대화의 철학이다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 석영중

톨스토이, 마음을 바꾸다

톨스토이, 불륜을 말하다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톨스토이, 소통을 말하다

톨스토이, 죽음을 말하다


시와 타자의 목소리 / 황현산

당신의 사소한 사정

얼굴과 뒷모습

주체인 나와 타자인 나

시에는 극단적인 무엇이 있다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내 안의 광야, 노래의 씨를 뿌려라 / 고은

폐허 시대의 허무 의식

죽음을 딛고 삶을 노래하다

삶은 상처이자 자유다

세계사적 의미의 새로운 통합

희망의 노래


2부 삶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아프게 하는 사회,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 / 손봉호

고통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책임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 박승찬

고통의 미학, 고통의 의미

고통에 대한 다양한 구분

에피쿠로스의 철학

왜 선한 사람이 고통받을까

인문학의 위안

사랑하시오, 그리고 원하는 것을 하시오

홀로서기와 함께 걷기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 차드 멩 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행복을 위한 연습, EQ 트레이닝

마음 근육 키우기

삶을 바꾸는 자기 인식의 힘

행복을 위한 건강한 습관들


행복은 몸에 있다 / 최인철

신나게, 의미 있게, 몰두하는 삶

행복이 위험해지고 있다

사랑하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처럼

움직이고 걷고 달려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환경이 마음을 지배한다


행복한 삶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 용타

행복한 삶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존중과 교류의 가치관

나는 누구인가

비전을 향해가는 방법


글로벌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 이강호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라

꿈꾸고 배우고 소통하라

꾸준히 최선을 다했는가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가치관을 세워라

기본과 원칙이 안전과 여유를 보장한다

인생을 바꾸는 순간들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접기

책속에서

P. 14 만약 인문학적 성찰이 ‘나는 누구인가’에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매우 이기적인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문학은 자기 성찰에서 출발해 이웃과 세상 사람들, 그리고 사회 속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작업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반드시 두 번째 질문인 ‘어떻게 살 것인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P. 31~32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란사입니다. 제목인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 이비후환(豫基懲 而毖後患)”, 즉 내가 경계함은 후환을 삼가기 위함이라는 구절에서 한 글자씩 따왔습니다. (…) 그는 임진왜란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난이 일어나기 이전의 일도 기록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려고 했습니다.  접기

P. 97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세상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인문 정신이며 시민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볼 때, 논쟁이 화쟁적 대화로 이어질 때, 갈등과 분쟁은 더 이상 문제 상황이 아니라 더 큰 진리가 드러나는 에너지요, 기회가 될 것입니다.

P. 99~100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게 되는데요, 그 답은 바로 ‘성장’입니다. 성장이란 인간이 끊임없는 성찰과 학습을 통해 자기완성에 도달하는 과정입니다. 톨스토이는 성장에 대해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P. 135 개인의 사소한 사정은 더더욱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연대도 가능하고 협력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문제는,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가 불가능하고 협력도 어렵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다리를 놓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문학입니다. 또한 그것들을 표현할 말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세계를 개발하고 또 그것들을 전파할 수 있도록 약속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그리고 그 문학의 전위가 바로 시(詩)이며, 시가 바로 그 일을 합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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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고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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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8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8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수도생활을 하던 중 1958년 『현대시』『현대문학』 등에 추천되어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피안감성』(1960)을 펴낸 이래 고도의 예술적 긴장과 열정으로 작품세계의 변모와 성숙을 거듭해왔다. 연작시편 『만인보』(전30권), 서사시 『백두산』(전7권), 『고은 시전집』(전2권), 『고은 전집』(전38권), 『무제 시편』, 『초혼』을 비롯해 16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고, 1989년 이래 영미ㆍ독일ㆍ프랑스ㆍ스웨덴을 포함한 약 20여개 국어로 시집ㆍ시선집이 번역되어 세계 언론과 독자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한국문학작가상 단재상 유심작품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오상순문학상 등과 스웨덴 시카다상, 캐나다 그리핀공로상, 마케도니아 국제 시축제 ‘황금화관상’ 등을 수상했으며, 세계시단의 주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버클리대 한국학과 방문교수, 하버드 옌칭연구소 특별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이며, 서울대 초빙교수 및 단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라 일컬어지는 연작시편 『만인보』는 시인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서 수감되었을 때 구상한 것이다. 1986년 1권을 출간한 이래 25년 만인 2010년, 전30권(총 4,001편)으로 완간된 『만인보』는 한국문학사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념비적인 역작이다. 2012년 10월, 55년간 써온 작품들 중 240편을 모은 대표 시선집 『마치 잔칫날처럼』을 출간했다. 접기

수상 : 2015년 심훈문학대상, 2014년 공초문학상, 2014년 스트루가 황금화환상, 200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7년 영랑시문학상, 2004년 단재문학상, 1999년 현대불교문학상, 1993년 대산문학상, 1989년 만해문학상, 1974년 한국문학작가상

최근작 : <어느 날>,<시요일 스페셜 (시요일 APP 1년 이용권 + 특별 한정판 시집 5종)>,<고은 깊은 곳> … 총 198종 (모두보기)

석영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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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슬라브어문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지속적으로 도스토옙스키 강의를 해왔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인간 만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읽기』,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우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가난한 사람들』, 『백야 외』(공역),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공역),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 자먀틴의 『우리들』, 마야콥스키의 『마야꼬프스끼 선집』,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등이 있다. 푸시킨 작품집 번역에 대한 공로로 199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2000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다. 2018년 고려대학교 교우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접기

최근작 : <매핑 도스토옙스키>,<고전 강연 7>,<인간 만세!> … 총 81종 (모두보기)

손봉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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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경북 포항 출생. 고신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나눔국민운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세계밀알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서울영동교회, 한영교회, 다니엘새시대교회 협동 설교자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 윤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함을 전하는 특별한 사역자이며 철학자이자 윤리학자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다.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지냈다.

저서로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오늘을 위한 철학》, 《기독교적 관점에서》, 《꼬집어 본 세상》, 《윗물은 더러워도》, 《별수 없는 인간》, 《고통받는 인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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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사랑의 9가지 습관>,<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나는 누구인가> … 총 59종 (모두보기)

용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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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륜불교문화재단 이사장, 귀신사 회주, 재단법인 행복마을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동 대학교에서 「불교의 선에 관한 연구」로 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4세에 청화 대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승려 신분으로 10여 년의 교직 생활 후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하였다. 저서로는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10분 해탈』 『공(空)』이 있다.

최근작 : <이야기로 풀어낸 용수 중론(中論) 상편>,<어떻게 살 것인가>,<용타 스님의 행복노트> … 총 12종 (모두보기)

한명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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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외국어대, 가톨릭대, 한신대, 국민대에서 강의했으며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2013)를 썼고, 그 밖에 여러 저술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다. 첫 책인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로 2000년 제25회 월봉저작상을,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로 2014년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접기

최근작 :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최명길 평전>,<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총 38종 (모두보기)

박승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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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에 중세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현재는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중세 철학사’ 강의는 2012년 11월에 SBS와 대학교육협의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대학 100대 명강의’로 선정되었다. 또한 SBS-CNBC ‘인문학 아고라’ 「어떻게 살 것인가」, EBS 특별 기획 「통찰」 등의 TV 방송 출연, 한겨레신문 연재, 다양한 강연 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중세에 대해 갖는 편견을 깨고 중세 철학이 지닌 매력과 그 깊이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서양 철학 이야기 2: 중세-신학과의 만남』(책세상, 2006),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누멘, 2010), 『철학의 멘토, 멘토의 철학』(공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전2권, 가톨릭출판사, 2015), 『서양고대철학 2』(공저, 도서출판 길, 2016),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가톨릭출판사, 2017)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라틴어 원문에서 번역한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아카넷, 2002), 『신학요강』(토마스 아퀴나스, 나남출판, 2008), 『대이교도대전 Ⅱ』(토마스 아퀴나스, 분도출판사, 2015),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레오 엘더스, 가톨릭출판사, 2003)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중세의 재발견>,<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 총 36종 (모두보기)

황현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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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목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기욤 아폴리네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프랑스 현대시에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연구하며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우물에서 하늘 보기』 『밤이 선생이다』 『잘 표현된 불행』 『말과 시간의 깊이』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아폴리네르의 『알코올』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동물시집』, 말라르메의 『시집』,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보들레르의 『악의 꽃』 『파리의 우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등이 있다. 팔봉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번역비평학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18년 8월 8일 별세했다. 접기

수상 : 2012년 대산문학상, 2012년 팔봉비평문학상, 2011년 서정시학 작품상

최근작 :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잘 표현된 불행> … 총 57종 (모두보기)

이강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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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G(Predictive Management Group), 프런티어 코리아(Frontier Korea) 회장. 37년 동안 글로벌 기업, 한국 기업, 뉴욕 현지 법인 등의 CEO로 활동해왔다. 2014년, PI 인성경영 및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업하였다. ‘사람 생각(Think People)’이라는 미션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인성경영’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전파하고 있다.

37년간 경영자로 일하면서 개인과 기업이 지속가능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의 가치를 알고 중요시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 책에는 그 깨달음이 있기까지의 인생 경험, 글로벌 무대에서 체득한 것들, 저자에게 울림을 준 사람이나 기업의 사례, 고대 선인들의 지혜를 담았다.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의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다수의 기업체, 2세 경영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에 대한 강의와 코칭을 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 대통령표창, 덴마크 왕실 훈장을 수훈하였다. 공저한 책으로 《젊은 심장, 세계를 꿈꿔라》, 《나의 꿈은 글로벌 CEO》, 《아름다운 유산Beautiful Legacy》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사람 생각>,<어떻게 살 것인가>,<인문학 아고라 시리즈 세트 - 전3권> … 총 13종 (모두보기)

김상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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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이며, 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미국 에모리 대학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와 명나라 말기의 종교 교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작 《르네상스 창조경영》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서 창의적 사고와 르네상스 시대를 연결시켰고, 화가인 카라바조와 엘 그레코,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의 전기를 썼다. 피렌체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한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는 SBS 특집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다수의 EBS <인문학 특강>과 <세계테마기행>,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하여 인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고전 독서 모임인 ‘루첼라이 정원’에서 그리스, 로마, 독일, 인도,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유대문학과 셰익스피어의 명작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작으로는 삼성전자 권오현 회장과의 대담을 정리한 《초격차》가 있으며,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시리즈 첫 번째 책인 《나의 로망, 로마》도 출간했다. 접기

최근작 : <삶이 축제가 된다면>,<나의 로망, 로마>,<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 총 59종 (모두보기)

최인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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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동대학교 행복연구소 센터장, 듀오 휴먼라이프연구소 책임교수로 있다. 국내 심리학자 최초로 국제학술지의 편집위원장(Associate Editor)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적인 학술저널에 수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2003년에는 한국심리학회 소장학자상, 2007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우수 연구교수상, 2008년 서울대학교 교육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굿라이프》《프레임》 등이 있으며, 역서로 《생각의 지도》《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있다.

최근작 : <공존과 지속>,<ABOUT H : 대한민국 행복 리포트 2019>,<심리학 프리즘> … 총 45종 (모두보기)

조성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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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으며, U.C버클리에서 인도 초기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비교종교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위원회 상임위원 및 위원장을 지냈다.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이자 고려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불교와 불교학: 불교의 역사적 이해』, 공저로 『인생교과서 부처』, 『석전과 한암,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말

하다』가 있다.

최근작 :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지금, 한국의 종교>,<어떻게 살 것인가> … 총 13종 (모두보기)

차드 멩 탄 (Chade Meng T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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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최고의 인기 직원 교육 프로그램 ‘내면검색Search Inside Yourself’의 개발자

구글의 107번째 엔지니어 출신으로, 초기 구글의 모바일 검색엔진 개발을 주도했다. 구글에서 엔지니어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마음챙김 명상을 더 널리 전파하고자 스탠퍼드 뇌과학자들과 심리학자, 선승 들을 불러모아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한 감성지능 강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내면검색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도 구글 최고의 직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긴 대기자 명단을 가지고 있으며 이 교육을 받은 이들 대부분이 이전보다 감정조절이 쉬워지고 더 행복해졌으며 자신감이 높아지고 인간관계와 리더십이 향상되는 효과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내면검색 프로그램의 효과가 확인되자, 이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쓴 첫 책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Search Inside Yourself》는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켰다.

그는 전 세계의 리더들이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통찰을 얻기 시작하면 세계 평화가 올 것이라 얘기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비영리조직인 '내면검색 리더십 연구소Search Inside Yourself Leadership Institute’를 창설, 구글 직원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내면검색 프로그램을 좀 더 쉽게 접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현재 노벨평화상 후보에 일곱 번이나 오른 ‘10억 개의 평화 운동One Billion Acts of Peace’의 공동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기쁨에 접속하라Joy on Demand》는 그의 두 번째 책으로, 내면검색 이후 마음챙김 명상으로 내면의 행복과 기쁨을 발견하는 쉬운 방법을 특유의 재치 있는 글 솜씨로 유쾌하게 소개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기쁨에 접속하라>,<어떻게 살 것인가>,<인문학 아고라 시리즈 세트 - 전3권> … 총 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문학의 두 번째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고은, 용타, 김상근, 최인철, 차드 멩 탄…

최고의 지성 12인의 상처를 극복하고 공생하는 방법!


존재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잇는 근원적 물음,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황폐화와 사회 가치의 퇴색, 현실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의 부재로 현대인들은 인간과 삶,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 물음 끝에 탄생한 『어떻게 살 것인가』는 2014년 가을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최한 동명의 대중강연을 엮은 것으로, 누적 6만 명 이상 청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부에서 김상근, 한명기, 조성택, 석영중, 황현산, 고은은 인류의 역사 속에 우리 삶의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을 통해 너를 살피고 나를 다스리는 지혜를 설파한다. 2부에서 손봉호, 박승찬, 차드 멩 탄, 최인철, 용타, 이강호는 상처를 견디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고민을 통해 삶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삶과 행복의 기본과 원칙이 현실에 닥친 슬픔과 혼란을 극복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며, 황폐해진 개인의 삶과 희미해진 사회적 가치를 극복할 수 있는 해답임을 역사와 철학, 종교와 문학 등 인문학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증명한다.


상처 입은 사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공생하는 삶에 대한 12가지 실천적 철학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현대인들이 잊고 살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개인의 삶이 점점 황폐해지고 사회 가치가 희미해지는 요즘,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은 우리 삶에 더욱 중요해졌다. ‘인간’을 탐구하고 ‘인생’을 공부하는 학문인 인문학 열풍이 거세진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그 물음 끝에 탄생한 『어떻게 살 것인가』는 2014년 가을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최한 동명의 대중강연을 엮은 것으로, 누적 6만 명 이상 청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눈앞에서 듣는 것처럼 고은, 용타, 김상근, 최인철, 차드 멩 탄 등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 12인이 전하는 삶의 지혜와 인문학적 통찰이 뜨거운 감동과 함께 생생하게 전달된다. 우리 일상에 맞닿은 사례들을 중심으로 삶의 본질을 탐구하며, 위대한 고전과 사상가들의 핵심 메시지를 깊이 있고 흥미롭게 분석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흔들리고 방황하는 삶에 용기와 철학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삶을 향한

역사, 철학, 종교, 문학의 성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질문은 반드시 ‘행복’이라는 대답으로 이어진다. 역사, 철학, 종교, 문학 등 다양한 시각으로 삶의 방법을 분석한 우리 시대 최고 지성 12인이 상처를 극복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개인과 사회가 서로 신뢰할 때 우리의 삶은 여유로워지고 사회는 안전해진다.

1부에서는 인류의 역사 속에 우리 삶의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을 통해 너를 살피고 나를 다스리는 지혜를 배운다. 대한민국 사회를 ‘아포리아’ 시대로 규정하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은 김상근, 『징비록』에 담긴 역사적 기록을 통해 세계 격변의 시기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고민하는 한명기, 원효의 화쟁사상을 통해 시민의 지혜와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조성택,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바탕으로 몰입, 소통, 죽음 세 단계의 성장하는 삶을 이야기한 석영중, 주체로서의 나와 타자로서의 나를 소통시키는 시(詩)의 힘을 통해 잘 사는 법을 전한 황현산, 극심한 갈등 속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의미의 통합을 이룰 것을 주장한 고은 시인을 통해 산다는 문제가 공생에 관한 논의로 확장되는 것을 경험한다.

2부에서는 상처를 견디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고민을 통해 삶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로 지나친 경쟁심과 불공정한 규칙을 꼽으며 정직하게 나와 타인의 행복과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자존심이자 원칙이라고 전하는 손봉호, 나의 ‘홀로서기’와 타인과의 ‘함께 걷기’를 통해서 고통을 넘어서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 박승찬, 감성지능을 개발하기 위한 세 단계인 주의력 집중, 자기 인식, 정신 습관을 통해 행복의 비법을 전한 차드 멩 탄, 행복을 마음이 아닌 몸과 연결 지어 일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최인철, ‘나, 모두의 행복, 마음 천국, 관계 천국, 세상 천국’이라는 다섯 가지 원리를 통해 나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세계 평화가 시작함을 이야기한 용타, 준비하고 실행하는 삶, 주인공이 되는 삶,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고 만남을 소중히 하는 삶이라는 삶의 다섯 가지 실천을 제시한 이강호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인지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된다.

인문학의 목소리로 전하는 인간의 삶과 행복, 기본과 원칙은 현실에 닥친 슬픔과 혼란을 극복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전한다. 황폐해진 개인의 삶과 희미해진 사회적 가치를 극복할 해답을 인문학에서 찾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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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주제의 책과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그러나 언제나 나를 뒤돌아보게하는 시간을 가질수 있어 좋다. 

부다붐 2018-10-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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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새창으로 보기

'나는 누구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 중에서 어느 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더 근원적인 질문일까?


어느 것이 먼저이고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양립적이면서 병렬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살 것인가' 책은 후자에 집중한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인문학이 되는 것이고, '나는 누군인가'라는 성찰 다음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인문학 성찰의 가치가 증대된다고 한다.


엊그제 회사 워크샵을 다녀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일하기 위해서 사는가? 살기 위해서 일하는가?'


나는 당연히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살기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군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말 살면 살수록 고민하게 되는 질문이다.




이 책은 2013년 가을에 고려대에서 열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강연 내용을 모은 책이다.


여러 강사의 강연 모음집이기 때문에 저자는 철학자, 역사가, 종교인, 문학가, 사업가 등 여러 사람이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강연한 인문학 강의 내용이어서 한 편의 강의를 듣는 듯 내용은 압축되어 있었고, 강의에 담긴 전달력은 강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어보니 지난해에 읽었던 21세기북스의 '인문학명강-서양고전'이 생각났다.


그 책도 여러 학자와 교수들이 서양 인문학 내용을 요약하여 압축적으로 전달해주어서 짧은 시간에 서양 인문학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고, 서양 인문학 공부에 대한 자극을 주기도 하였다.


이 책도 그런 느낌과 효과를 주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총 12분의 강연자께서 강연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여러 강사의 강연 중에는 지난해 한국사회를 비통함과 분노에 빠지게 했던 세월호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지금의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고,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에 접근하는 인문학적인 방법을 이 책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다.


한국은 고도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반대로 특정 분야에는 특혜를 주어왔으며, 결국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의 대부분은 최근에 갑작스럽게 발생했다기 보다는 우리 사회가 수십년간 만들고 숨기고 감추고 짊어지고 온 폐해들이 송두리째 한꺼번에 노출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도 우리나라와 같은 과정을 우리나라보다 약하게든 아니면 더 심하게든 거쳐왔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망을 인문학에서 찾고자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책에 열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지금 계속하여 노출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폐해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그 속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참되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고 그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책이다.


 


김상근 교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아포리아로 규정하였다.


아포리아는 통로나 수단이 없는 상태 또는 해결 방안이 없는 심각한 난관을 뜻한다고 한다.


아포리아에 빠진 대한민국에게 주는 대답이 바로 인문학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테네를 떠난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고민했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통치자는 지혜를 추구하고, 수호자는 용기를 가져야 하고, 시민은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더불어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혜, 용기, 절제가 세 집단의 성격에 맞게 필요하고, 세 집단이 각각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한다.


그리고, 교육은 혼의 지적 기관을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전향시키는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니라고 말했다.


교육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찾는 것이다.


동굴 안에 있는 이들이 교육을 받고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보는 것이 교육이다.


안경을 쓰거나 시력교정술을 받는 것이 교육이 아니다.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마주하는 과정이 내가 누구인가를 성찰하는 과정이고, 그 다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둡고 추운 동굴 속으로 다시 내려가 그 안의 고통과 명예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라고 한다.




인문학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만이 나오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제자에 대한 재미난 대화가 웃음과 교훈을 준다.


제자 : 선생님, 사모님은 너무 잔소리가 많습니다.


소크라테스 : 물레가 돌아가려면 소리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가 참야야지.


잠시 후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 아내가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끼얹는다.


소크레테스 : 이보게, 천둥이 있었으니 비가 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큰 관심을 준 인상적인 부분은 한명기 교수의 징비록에 대한 내용이었다.


요즘 드라마에서 징비록을 방송하면서 징비록과 관련된 책들도 여러 권이 출간되고 있어 마치 징비록 유행시대 같다.


나는 징비록을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한명기 교수의 징비록에 대한 강연 내용에서 징비록에 큰 매력을 느꼈다.


나도 아마 조만간 징비록을 읽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징비록에 대해 자세한 내용과 함께 임진왜란 전후의 역사 그리고 한명기 교수의 탁월한 역사적 해석을 접할 수 있었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이다.


징비는 시경의 '예기징 이비후환 (내가 경계함은 후환을 삼가기 위함)'이라는 구절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류성룡은 성리학, 양명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병학, 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추천한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임진왜란을 '삼한정벌'로 부르다가 1910년 이후 부터 '문록·경장의 역(전쟁)'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강제 병합에 대한 명분을 위해서 과거 정벌이라는 이름으로 했던 침략 전쟁을 은폐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라고 한다.


일본인의 참으로 치밀한 성향이 나타나는 역사 왜곡이다.


이런 식의 치밀한 말바꾸기는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자행되면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아무리 개혁적인 세력이나 인물도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변질된다.(p.37)'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선의 원인으로 조선의 건국세력인 신진사대부의 변질을 지적했다.


조선은 세조의 즉위 이후 정쟁과 부패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때 일본에는 포르투칼 사람들이 오가면서 조총이 전해졌다고 한다.


조총은 날아가는 새를 맞춰서 떨어트린다는 의미인데, 일본에서는 조총이라는 중국말 대신 철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철포의 일본식 발음이 뎃뽀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무데뽀라는 말이 뎃뽀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16세기 중반 무렵에 일본은 총을 든 보병 위주로 군대가 바뀌었고, 스페인에 이어 세계 두번째 은 생산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과는 이미 차원이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역사였다.


한명기 교수는 이순신은 조선 사람 같은 않은 조선 사람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책임감의 화신으로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이순신만큼의 책임감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임진왜란이 패전으로 결론나는 것을 막은 이순신을 선조는 전쟁의 영웅으로 우대하기 보다는 육지에서도 왜군을 무찔러달라는 무리한 지시를 하였고 ,이순신이 이를 거부하면서 선조로부터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말 알면 알수록 부끄러운 어처구니 없는 역사의 기록들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마자 이순신은 일본군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고 백응종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파놓은 함정에 대해서는 이 책에 설명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조선의 간신들과 일본의 합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 때는 우리는 힘없이 전쟁터만 내어주고 피해만을 당하고 전쟁에 대한 협상은 명나라와 일본의 차지였다.


한국전쟁과 흡사한 모습이다.


어쩌다 우리 역사는 항상 이런 모습을 그리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임진왜란 당시의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 과정에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들이 펼쳐졌었다.


약소국의 슬픈 역사였다.




한중일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것도, 중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을 도운 것도 중국 자국을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끝없이 만주 벌판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는 것보다 국토의 7할이 산악지역인 조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진정한 베풂과 협조는 참으로 드문 것 같다.


모두 자기의 실리에 맞을 때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손길을 뻗치는 것 같다.




조총 기술은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손재주가 뛰어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금새 조총 기술 실력을 높이게 되었다고 한다.


대포 기술을 가진 명나라에게 기술 전수를 요청했지만, 명나라에서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명나라는 진정한 지원군이 아니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나라 영토를 전쟁터로 빌린 국가라는 생각이 드는 내용이었다.


이런 명나라를 숭상한 조선의 관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도 국익과 백성보다는 자신의 욕심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명분을 위한 성리학을 빙자한 정치 행위가 아니었을까?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을 따라온 명나라 상인들은 하동, 구례에 자생하는 녹차를 보고서 그걸 따다가 팔면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조선인들은 맨날 돈이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것이 조선에서의 녹차의 상업화의 시작인 것 같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열다섯 번이나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거짓 제스처를 취한 무능한 왕인 선조의 모습은 그 당시 조선의 나약한 모습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징비록에 담긴 교훈을 계승하여 미랠르 대비하고 있을까 하면 한명기 교수는 질문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우리가 일본에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양재동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관리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곰팡이가 슬고, 유물들이 썩어가고, 지하에는 물이 들어찼다고 한다.


우리의 자화상이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청일전쟁이라는 소설에서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찾아가 만날 사람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나 중국의 이홍장이 아니라 한국의 전봉준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을 만나러 찾아다녔지만, 이들은 조선의 애송이 혁명가인 김옥균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역사소설가가 말하는 이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큰 내용이다.


만약에 김옥균과 전봉준이 힘을 합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명기 교수의 이력을 보니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이시며, '임진왜란과 한중 관계', '광해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병자호란' 등을 저술하셨다고 한다.


이 책에서 관심이 가는 역사학자 한 분을 더 알게 되었다.




'성장을 말하다.'


석영중 교수가 강연하신 톨스토이에 대한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톨스토이의 저서 중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있듯이 톨스토이는 어떻게 쓸 것인가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고민한 작가였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서 인생에 있어서 성장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톨스토이는 백작 가문의 자제였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유명 인물의 유형에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며 깊이 파고들어 명료하고 통일된 비전으로 모든 것을 통합화하는 고슴도치형 인간이 있고, 다채로운 경험과 현장의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며 다양한 시각을 즐기는 여우형 인간이 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고슴도치가 되고자 했던 여우형 인간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군대를 가기도 하고, 외국 여행도 즐기고, 문학·철학·역사·종교·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사냥도 즐기고, 피아노도 잘 치면서도 모든 체험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통일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톨스토이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은 그의 저서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의 책은 내용은 길지만 그 내용에 복잡하거나 현란하지 않고 단순하다고 한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안나 카레니나의 시작말)'


욕구에서 출발한 사랑은 성장할 수 없다고 한다.


욕구에서 시작된 사랑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집착하게 되고, 그 집착은 소유로 이루어지고, 그 소유는 증오로 변질된다고 한다.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장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감이 되는 말이다.




'어떤 일에 완전히 빠져 있을 때 흔히 마음을 비운다고 표현한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는 일이 잘 된다. 저절로 된느 느낌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무아지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잘하려고 한다든가 앞의 사람을 쫓아가려고 하면 갑자기 일이 어려워진다.(p.113) '


안나 카레니나의 명장면인 레빈의 풀베기를 통해서 무아지경의 효과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석영중 교수가 말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은 성장이다.


'자기의식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자기의식을 해방시키고 더 많은 타자와 세상과 굥감하고 교감하는 것이다.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그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며,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p.122)'


그것은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고, 죽음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대신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원효대사의 화쟁 사상, 시에서 찾는 인문학적 성찰, 행복, 고통, 윤리 등에 대해서 다루어지고 있다.


저명한 학자들의 강연에는 역시나 인상적인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었다.




'어느 절에 귀한 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도둑이 그 종을 훔치러 갔다. 매달린 종을 떼려하자 자꾸만 댕그렁댕그렁 소리가 났다. 도독은 솜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종을 훔쳤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종소리가 안 날리는 없었다. 결국 도둑은 붙잡혔다. 고통은 부인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맞닥뜨리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p.167)




'행복과 고통의 차이는 행복은 지속될수록 무뎌지지만 고통은 계속되어도 강도가 줄어들지 않는다.(p.169)'




'암스테르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당하지 않아 좁은 길에 본래의 옛 모습이 남아있다. 로테르담은 엄청난 폭격을 당해 넓은 길에 현대식 건물이 늘어선 신도시로 재탄생했다. 고통이 반드시 고통만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p.173)'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인간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다.(토머스 홉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끔직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본 어느 할머니는 편지에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라고 적었다고 한다.(p.177)'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도덕적이 되기 어렵다.(라인홀트 니부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중)'




'윤리에는 동기윤리와 책임윤리가 있다.'




'윤리에는 작위와 부작위라는 개념이 있다. 작위는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말하고, 부작위는 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p.183)'




'뇌물은 가난한 사람의 돈이 부자에게 직행하는 것이다. 뇌물이 빈번한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진다.(p.185)'




'조선사람들은 도둑질을 매우 잘하며 속이거나 거짓말도 잘한다, 그래서 조선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다.(하멜표류기 중)'




'우리나라의 탈세율은 26.8%로 그리스나 스페인과 비슷하고, 보험금의 13.9%가 보험사기로 지불되고, 교통사고 입원률은 일본의 9.5배에 달한다.(p.187)'




'비인불인 불인비인(非人不忍 不忍非人), 참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면 참지 못한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가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러면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냈더라면


나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허락했더라면'




'구글의 20퍼센트 시간, 구글 엔지니어들은 근무시간의 20퍼센트, 즉 일주일 중 하루는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넬슨 만델라)'




'의미있게 살기 - 가치 있는 삶, 헌신하는 삶, 목적이 이끄는 삶'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70세 생일에 그리고 80세 생일에 그리고 2014년 90세 생일에도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여 성공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설명해줄 수가 없다.


한여름만 살다가는 곤충에게는 찬 얼음에 대해 설명해줄 수가 없다.


편협한 지식인에게는 진정한 도와 세계를 설명해줄 수가 없다.(장자)'




인문학을 이해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론내리고 확정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어쩌면 평생동안 함께 해야 할 숙제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사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한 고민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징비록과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문학적 성찰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많은 가르침과 자극을 준 좋은 책이다.




※ 어떻게 살 것인가 독서 후기 포스트는 21세기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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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처럼 2015-03-08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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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공존을 위한 인문학 특강!^^ 새창으로 보기

[어떻게 살 것인가]공존을 위한 인문학 특강!^^


 


삶에 정답이 없다지만 누구나 원하는 삶은 인간다운 삶, 나누며 공존하는 삶,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삶일 것이다.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이기에 공존, 공유, 공감 등은 공동체의 필수요건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늘 인문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살지만 늘 부족한 삶이다. 해서 제대로 살기 위한 인문학적 통찰은 내게도 늘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이 많은 나에게 온 선물이다. 앞서간 인물들을 통해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는 성찰을 돕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인문학적 성찰은 더 큰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나의 문제에만 집중한 인문학은 정신적·물질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호사가 될 것이고, 자기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또 다른 술책이 될 것입니다.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없는 인문학은 교묘한 지배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5쪽)


 


플라톤 이야기가 몹시 인상적이다.


플라톤이 길이 막힌 아포리아(통로와 수단이 없는 상태)를 극복할 방법으로 내세운 것은 교육이었다. ‘동굴의 비유’에서 본질인 이데아를 보지 못하고 환영인 그림자를 보는 동굴 속 갇힌 인간이 깨어나는 것은 동굴 밖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이란 무지한 인간에게 밖으로 나가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진정한 교육이란 동굴 밖으로 나가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길이 없는 아포리아의 현실에서 교육을 통해 서로 손잡고 함께 가는 길을 모색했다. 플라톤의 주장은 동굴 안에 머무르지 말고 선을 향해, 이데아를 향해 방향을 잡고 계속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선을 향해 머무르지 말고 나아가라,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경우엔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 삶의 자세였다. 캐묻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던 논변의 시대에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을 발견한다. 몸짱이나 성형 등에서 오는 외모에서의 탁월함이 아니라 절제와 헌신, 정의의 실천, 지혜의 추구가 진정한 탁월함임을 깨달은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깨달음에는 늘 질문하고 답변하는 문답법과 산파술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다. 질문하고 성찰해서 자신의 무지를 알라. 나 자신을 알기가 참으로 어려운 법인데......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진한 감동이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의 전시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우리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해 쓴 책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역시 임진왜란의 기록이다.


 


임진왜란을 보는 조선과 명나라, 일본의 입장 차이가 흥미롭다.


일본은 임진왜란에 대해 1910년 이전엔 ‘삼한정벌’로 바꿔 부르게 된다. 정벌은 상대방의 잘못을 정당하게 손 봐 준다는 의미다. 하지만 1910년 이후엔 삼한정벌 대신 ‘문록·경장의 역’이라는 중립적인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강제병합 이후 한반도의 역사가 왜곡되기 시작한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이 전쟁에 10만의 대군을 보내 8년 이상 일본군과 싸우거나 대치하게 했다. 중국에서는 임진왜란을 ‘항왜원조’라고 한다. 원조라는 의미가 조선을 도왔다는 베풂의 뜻이다. 하지만 이미 왜군이 침략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명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보호 차원에서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조선이 왜에 뚫리면 이웃나라인 명의 피해도 만만찮을 테니까.


 


임진왜란 패전과 승전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일본군은 날아다니는 새도 맞춘다는 조총이라는 신무기와 전국 통일의 과정에서 전투 경험이 많은 전사들이 있었다. 은과 조총(데뽀)을 바탕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키운 일본은 정명가도의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명나라를 칠 테니 조선은 그냥 길만 내달라는 것이다. 그에반해 조선은 싸울 군사력도 미약했고, 당파싸움으로 정치 혼란 가중과 민생 파탄 등 조선 내부의 문제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격적인 일본군과 방어에 나선 조선군의 전쟁이었으니 누가봐도 승패는 뻔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할수록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임진왜란과 『징비록』 이야기다. 참고로, 조총(데뽀)에서 ‘무데뽀’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명나라에선 1570년 경, 장거정의 대대적인 재정개혁으로 재정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는 대군을 보낼 여력이 있었다. 장거정의 등장은 명나라의 수명을 72년 정도 연장한 효과가 있었다는 평판을 들을 정도로 명의 재정상태를 견고하게 했으니까. 장거정의 개혁이 조선의 입장에서도 명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은 행운을 준 셈이다.



이순신의 해전에서의 승리는 언제나 전율이 일 정도로 짜릿한 승리들이다. 이순신의 바다에서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서해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으니까.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승리는 서해를 살리고 전라도를 살렸기에 결국 조선을 살리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보여준 이순신의 책임감과 류성룡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살린 힘이 이순신의 책임감과 류성룡의 통찰력 덕분이었기에 늘 감사하게 된다.


 


책에서는 김상근의 ‘아포리아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한명기의 ‘『징비록』 과거를 경계해 훗날을 대비하라’, 조성택의 ‘화쟁,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사는 지혜’, 석영중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 황현산의 ‘시와 타자의 목소리’, 고은의 ‘내 안의 광야, 노래의 씨를 뿌려라’, 손봉호의 ‘아프게 하는 사회,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 박승찬의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차드 멩 탄의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최인철의 ‘행복은 몸에 있다’, 용타의 ‘행복한 삶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이강호의 ‘글로벌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이 있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은 언제 들어도 상쾌함을 선물한다. 때로는 공허하고 막막한 인생길에서 삶에 대한 통찰을 선물하는 인문학 강의이기에 유쾌함을 선사한다. 알토란같은 조언들이 가득한 책을 통해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찾아가게 된다. 삶에 대한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여행을 돕는 유익한 인문학 특강이었다.


 


삶에 대한 고민이 많은 이들을 위해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2013년 가을 학기에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고 한다. SBS의 <삶>에서도 방송되면서 화제가 된 강연이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넘은 ‘어떻게 살 것인가’, ‘더불어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고 고민을 담은 책이다. 공생공존을 위한 인문학 특강이다. 혼돈의 시대에 내게로 온 소중한 책이다. 올리뷰 이벤트로 받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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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덕 2015-04-06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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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는 길이 정답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새창으로 보기



인문학 강의가 곳곳에서 열린다. 3월 봄 시작으로 인문학 강좌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고 알려 온다. 무료로 시작하는 곳도 있고, 유료로 시작하는 강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인생 공부 확실하게 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것들을 이미 오래전에 했던 철학가, 사상가들의 책과 생각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법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을 내가 가보지 않은 것들을 쉽게 알 수 있는 도구들이 많아졌다. 




인터넷이 그중 하나다. 그러나 그 보다 생생한 것은 현장 강의에 참가해서 직접 듣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독서다. 독서를 통해서 사람을 알고 세상을 느끼고 삶의 방식을 터득할 수 있다. 저렴한 비용으로 편리한 시간에 우리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바로 우리 시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하고 문제 해결을 도와줄 지식인들을 통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편리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현장 강의를 듣는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 있은 느낌이 드니 말이다. 




겨우내 쳐졌던 기운이 따뜻한 햇살로 일어난다.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은 책 속 문장 한 줄 한 줄이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 녹아 있는 문장은 어지러운 세상에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이정표다. 누구에게든 배울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스승이다. 우리 시대 우리가 간절히 필요한 것은 삶의 방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회의 어른이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바른길로 가야 한다고 외칠 수 있는 교수가 필요하다. 얼마나 그런 사람들, 용기 있는 사람들의 외침이 있는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하지 못해 자신의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 우리는 어떻게 지켜보고 해결해야 할까? 지혜를 모아야 한다. 방향을 제대로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모두 같은 범위에서 경쟁하려고만 한다. 위험한 곳으로는 안 가려고 한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곳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없다. 왜 한 번 뿐이 인생을 모두 똑같이 살아야 할까, 왜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갈까. 




"또한 인문학은 세상을 '이어줍니다', 서로 다른 사람, 지역, 계층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위아래, 남과 북 서로 다른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흔히 좌우, 진보와 보수, 왼쪽과 오른쪽은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다르면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의 오른손과 왼손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몸입니다. 태극의 음양도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96페이지 중에서




최근에 나온 책 중 유유 출판사에서 '공부해서 남 주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는 에릭 호퍼를 비롯 모두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지식인으로서 대중과 함께 지식을 공유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자신들이 배우고 익힌 것들을 어려운 책 속에서 건져내 쉽게 전달하도록 노력했다. 1900년 대 후반 특정인들의 지식으로만 머무를 수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어 대중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노력했다. 모티머 애들러는 독서의 기술을 쓴 저자로서 고전교육 강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우리 시대의 삶과 행복, 기본과 원칙을 말하다'라는 취지로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로 나온 '어떻게 살 것인가'도 2014년 하반기 대중을 향한 강좌 내용을 엮은 것이다. 고은, 손봉호, 황현산 등 우리 시대 학자, 분야별 전문가 12명이 나와 전한 삶의 방식을 소개한다. 




"이는 우리에게 부분적 진리만 있으니 모두 겸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내가 만진 것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경험과 지식만이 진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도 진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원효의 개시개비 핵심은 누구도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으니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곧 화쟁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민주 사회의 걸림돌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로의 출발점입니다."-87페이지 중에서.




가야 할 길이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길만 정답이라는 생각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모두가 가는 길이라 그것이 정답이고 바른 길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다른 길이 보일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거려는 주는 마음의 울림이 있다. 불행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행복을 위해 가져야 할 생각들,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하나둘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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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jan 2015-03-15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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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어떻게 살 것인가 _ 개인과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 새창으로 보기

♡ 어떻게 살 것인가 ♡


 


 


 




 


 


『책에서 마주친 한 줄』


 


통치자에게는 "나라 안의 특정 요소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 관해 결정하되, 대내적으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전문 지식 (…) 소수의 수호자들이 가져야 할 지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통치자는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이 곧 통치자의 지혜라는 말입니다.


 


수호자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용기란 일종의 보존이다. (…)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욕망이나 혹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소신을 버리지 않고 온전히 보존한다는 뜻이다." 담력이나 체력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고 보존하며 원칙을 지킬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몸짱이 되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절제하고 헌신하며 정의를 실현하고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탁월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상황을 직접 겪었던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보여준 덕목은 리더에게 필요한 능력과 책임감 그리고 비전이었습니다.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유산인 징비의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를 잊지 않아야겠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니까요.


 


오늘날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힘도 커지면서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아야 하고, 그 결과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입니다. 그러려면 선한 동기만이 아니라 지식도 있어야 하고,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 책과 마주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기 이전에 지금 어떻게 살고있나, 우리 모두 안녕한가,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있나,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고민들이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부와 명예에만 기울여있고 지혜·진리에는 최선의 상태가 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양쪽에 추를 매단 상태에서 '안정감'이 목표라면 양 추의 무게는 동일해야 한다.


아직도 생각하면 슬프고 비극스러운 세월호 사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배를 잘 만드는 나라지만 안전에 있어서는 세계 최하위임을 입증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해경들이 바다로 갔을 때, 배는 침몰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연히 TV를 켜서 뉴스를 보고 있는데 세월호 첫 속보를 접했다.


'전원구조'부터 시작해서 '오보'라는 말과 함께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 눈물과 기도로서 뉴스를 바라볼 수 밖에 없던 그 때였다.


 삭막해지고 피폐한 사회속에서 개인들의 삶도 점차 삭막해지고 피폐해지고 있다. 바람 잘 날이 없다라는 말처럼 하루하루 사건·사고들이 주를 이룬다.


 


책 속에서는 류성룡의 징비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류성룡은 말하고자 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절대 잊어서는 안 되며 잘못된 점을 시인하고 파악하여 다시는 재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기본정신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큰 사건·사고들은 기본정신을 지키지 않은 허술함에서 드러났다.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기본정신을 지킨다는 것은 쉽다고들 생각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본정신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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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책장 2015-03-10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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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로 경험을 쌓고 자신의 성장과 대면하는 삶을 위해 ! 새창으로 보기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답하는 석학들의 강연 속에 일깨우지 못한 우리들의 미욱함을 뉘우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어떤 방향을 추구하며 살아야할지 고민하게 된다. 불황의 늪 속에서 헤어나기 힘든데다 내우외환의 위기가 깊어지는 때 총체적인 난국을 헤쳐 나갈 지혜를 얻는 일은 쉽지 않을진대 12명의 지성인들의 글을 통해 현안을 해결해 갈 물꼬를 트고 자신의 상황에 부합하는 선택과 결정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가야할 숙명이 내려졌다. 


   의견을 드러내다 보면 상충하여 갈등할 때가 있는 우리 사회는 그것을 분열로 몰고 가서는 흑백논리로 치닫고 말아 화합과 상생의 조합과는 요원한 길을 걷는 경우가 허다하다. 원효는 화쟁론에서 모든 경전을 인정함으로써 개별적 다양함을 살려내 나의 경험과 지식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도 진리임을 인정해야 함을 밝혔다. 내가 옳음을 입증하는 논쟁에 비해 대화는 상대방의 옮음을 발견하는 과정인 만큼 경청을 통해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일부터 시작할 일이다. 조성택 교수는 세상의 아픈 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인문학이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작용할 수 있는 시민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시 총사령관격인 영의정 겸 도체찰사였던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온몸으로 겪은 후 집필한 전란의 기록인 <<징비록>>을 통해 한명기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적 과오를 응징하여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는 지혜와 통찰을 구하려고 하였다. 임진왜란 동안 15회나 물러나겠다고 선수를 쳤다가 철회한 선조를 다독여 종묘사직을 유지하였던 영의정 류성룡의 고달픈 임무를 떠올리며 최고 지도자에게 필요한 능력과 책임감이 막중함을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가 컸다. 국정 최고의 요직에 있으면서 전란의 현장에서 조선의 재건을 위해 류성룡은 상업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식으로 외교나 교섭의 힘은 한 나라가 갖고 있는 능력과 힘에 비례함을 간파하였다. 


   자기 안의 언어가 저절로 커서 자연스럽게 폭발하여 표현된 시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잘된 작품이라는 글을 통해 힘을 배는 작업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견고한 성처럼 자리한 주체성이 비껴난 자리 밑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힘을 내게 하는 시를 통해 자신 안에 깃든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일흔인 학자는 잘 살기 위해서 시를 읽으며 말귀가 밝아질 수 있도록 힘쓰고, 관용의 정신을 기름으로써 외롭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도 잘 사는 방법 중 하나라 일컬었다. 격동의 시대를 보낸 고은 시인은 많은 죽음을 목도하면서 생존자로서 애도해야 할 의무를 안고 살아가는 원죄를 말하며 폐허 위에 삶을 노래하며 궁극적으로는 통일된 세상을 바라는 시로 갈무리하였다. 


   ‘쾌락이야말로 최고선이며 고통과 불행은 최고 악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게 행복이라고 보았지만 관능적인 쾌락이 주는 행복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욕구를 끌어 올리다 보면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고 욕구를 낮출 때 행복은 우리 가까이 있게 됨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는 정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철학적인 성찰을 나누면서 책을 읽는 즐거움에 빠질 때 행복했다고 회고하였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빅터 프랭크는 니체의 구절을 가슴에 새기며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게 한 희망의 전언이었다. 고통은 홀로 맞서야만 하는 주관적인 체험으로 홀로서기를 통해 극복 가능한 것이지만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는 말에 공감하며 타인의 상처를 섣불리 아는 것처럼 나서서는 안 됨을 절감한다.


   특정한 방식과 목적을 갖고, 비판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10초 동안 호흡에만 집중할 때 감성지능은 높아지고 마음의 고요는 들어앉아 열락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명상법을 차드 멩 탄은 소개하였다.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내면을 살핌으로써 자기 인식 능력을 발전시켜서 번뇌로부터 벗어나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습관이 자리할 때 세계 평화로까지 확대해 나갈 수가 있다. 돈을 어떻게 써야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 고민할 때 서슴지 않고 여행 경비와 문화생활을 위한 관람료 지불 등을 꼽는다. 재화는 남지 않지만 남는 경험으로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해야 무엇이든 이루며 살 수 있는데 지난해에는 건강한 생활을 위해하는 요소들이 불거져 온 가족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내야 했다. 여전히 안고 가야 할 일이지만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건강한 신체에 의미 있는 내용을 담아 가는 평생 학습을 잇고,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를 대비해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이강호 교수는 글로벌 시대의 필수 과제로 보았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지 않아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월호 사건을 통해 안전한 생활을 담보할 수 없는 나라의 우울한 자화상이 떠올라 숙연해지고 만다. 130년 째 건설 중인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에는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가운데 제대로 된 성당을 완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경계의 벽을 허물고 호기심을 품어 변화를 추구하며 무엇인가에 도전하며 살아갈 때 그 생활에 깃든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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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15-03-1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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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로살자 - 조성택 교수의 글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두 가지...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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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로살자
17 March 2014 at 14:55 ·
조성택 교수의 글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두 가지 경우를 보자.


사례 1.
식물의 생식 기관으로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와 색채가 매우 다양하여 각각 그 특징이 있
으며, 구조상으로는 필수기관인 꽃술과 보조기관인 화피(花 被)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꽃술은 수술과 암
술이 있는 데 이를 모두 가진 것을 양성화(兩性花), 하나만 가진 것을 단성화(單性花)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에서 요약발췌)]
사례 2. [김춘수 ‘꽃’ 그리고 ‘꽃 1’에서 각기 발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 中에서]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微笑)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꽃1>中에서]
두 경우 모두 꽃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사례 1은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설명의 경우다. 이는
곧 꽃에 관한 지식이다. 따라서 정확성 여부가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한편 사례 2는 꽃에 대한 ‘이야
기’들이다. 여기에서 꽃은 사물화(事物化)된 객관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이야기를 통해 ‘꽃’은 의미를 발생시키
는 매체이자 의미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의미의 세계’에서 꽃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사례 1의 경우처럼 사물에 대한 지식은 ‘사실’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한 사물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지
식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한 사물이 드러내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단 하나의 의미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그
래서 삶이란 늘 익숙한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란 그 발견의
의외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의 목적은 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위의 두 가지 경우에 빗대어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한국불교인들의 일반적인 불교 이해는 사례 1에서와 같은 지식적인 이해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계종단에서 일반신도들을 위한 기본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불교개론』을 보면
고성제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인간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色)’이란 몸을 이 루고 있는 물질 일반을
말한다. ‘수(受)’란 ... 감수작용이다. ‘상(想)’이란 ... 지각하는 작 용이다. ‘행(行)’이란 ... 결심·노력 등을 말한다. ‘식
(識)’이란 ... 판단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고 실
체화하며 고정 화 시킨다. 그럼으로써 고통이 발생한다. 그것이 오취온고의 의미다.
[『불교개론』,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2012년, 114-115쪽에서 요약 발췌]
오온에 대한 위 인용문의 설명이 정확하냐의 여부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위 설명문을 인용
하는 이유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교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위 불교 공부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를 단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위 인용문이 잘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불교는 ‘불교적 지식’을 통
해 불교를 교육하고 또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이 개론서의 목적이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지식화하여 전달하는 것
에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개론서 자체에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을 중심으로 불교를 공
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불교에 대한 공부방식이라는데 있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지식
중심의 불교관을 가진 사람들이 전통적인 기복신앙에 젖어있는 소위 ‘보살들’을 비판하고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식불교의 폐해는 기복불교의 폐해보다 결코 적지 않다. 지식불교의 관념성은, 의식적이
든 무의식적이든, 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종교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지 때문이다.
사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큰 흐름중의 하나는 불교의 ‘지식화’였다. 현재 종단의 출재가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보더라도 불교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불교의 지식화’는 한편으로 조
선 오백년의 ‘산중불교’를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불교 선각자들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교의
지식화는 근대 식민주의의 한 부산물인 근대불교학이 추동해온 세계불교사의 한 흐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근대
불교학이 직접 혹은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한국근대불교가 원하는 불교지식의 주 공급원이 되었던 것은 자
연스러운 일이었다.
근대불교학은 잘 알려진 대로 교리와 역사를 통해 불교를 재구성하였다. 이는 유럽의 발달된 문헌학과 역사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근대불교학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와 그 역사에 대한 ‘사실’과 객관적 ‘지식’이었다. ‘의미’는 근
대불교학의 일차적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 결과 불교는 과거의 전통으로 그리고 ‘텍스트’로 환원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불교는 지식으로 박제되고 관념적인 철학체계로 변하고 말았지만 동양의 근대불교 선각자들은 개의치 않았
다. 아니 오히려 반겼다. 막 밀려들기 시작한 기독교의 교세에 대항 할 수 있는 불교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지식’으
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의 근대불교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전근대적 ‘무
9+ 17 붓다로살자 - 조성택 교수의 글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
11/6/2020 붓다로살자 - 조성택 교수의 글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두 가지...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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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eung Shin
공유합니다~ ^^ _()_
심백섭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Chin Bae Cho
좋은 관점입니다. 도움이 됩니다.
지’ 그 자체였다. 지식이 아니라 신앙을, 역사가 아니라 신화를 내 세운 전근대적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기독교의 현실적 힘은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전 인류의 그리스도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이 아
니라 예수의 삶을 인류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은 ‘이야기’를 설명하는 체계일
뿐이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은 예수의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이지 이야기에 대한 ‘설명’은 아니
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요체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 신학에 있지는 않다. 바이블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이야기
들’이 기독교의 요체다. 해방, 사랑, 구원, 용서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고 있으며, 바이블의 이야기는
예수 이후 이천년이 넘는 현실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로 변용되고 활용되어 왔다.
반면 불교는 적어도 근대이후 지금의 불교는 관념적 교리와 역사로 구성된 ‘과거의 전통’일 뿐이다. 불교 경전에
산재되어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냥 ‘꾸며낸’ 혹은 방편적인 장치로서만 이해되고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불교경전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화소(話素) 즉 이야기의 요소들은 ‘이야기’로서 재구성되거나 활용되고 있지 못
한 채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교가 담론으로 구성되지 못하고 ‘날 것’ 그대로 교리로서만 논의되고 통용되고 있는 것은
불교에 관한 지식을 곧 불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관념일 뿐이다. 지식이 현실의 삶에서 힘을 발휘
하기 위해서는 담론화 되어야 한다. 담론이란 곧 이야기다.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 서사 담론의 모든 형태가 이야기다. 이야기를 통해 지식은 비로소 ‘의
미’를 발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도 밝고 교리에 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역사와 교리를 통해 불교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생애가 어떻
게 뭇 생명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이야기로 재구성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다. 교리와 역사로서 충
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지식이 곧 불교는 아니다. 그리고 지식은 실천을 담보하지 못한
다.
지금의 한국불교에서 감동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교리만 있을 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꽃에 관한 지식이 우
리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불교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김춘수의 시가 그러한 것처럼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이다. 사물에 대한 지식은 ‘단 하나의 사
실’을 추구하지만 사물에 대한 의미는 다양하며 늘 새롭게 발견된다. 불교에 대한 지식은 과거의 전통을 ‘재생’하
고자 한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를 ‘재현’하고자 한다. 재생과 재현의 차이는 지식과 의미의 차이이
자 과거와 현재의 차이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재생은 삼인칭의 일이지만 재현은 바로 ‘나’
일인칭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시를 쓰는 일과 마찬가지로 ‘부처로 살자’는 모방(mimesis)을 통해서다. 따라서 ‘부처로 산다는 것’은 부처님의 삶
을 ‘이야기’로서 재현하는 것이며 그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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