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장자.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장자. Show all posts

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6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작성자 바보새 16-01-20 07:21 조회1,663회 댓글0건

 
제3장 카르마 요가
 
 
 
 
카르마(karma) 행동 혹은 행작(行作).
이 장은「기타」의 짬 되는 가르침의 열쇠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행동의 정신과 성격을 남김 없이 온전히 밝혀서, 참된 지식이란 어떻게 그 자체를 무사(無私)한 봉사의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 간디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오, 쟈나르다나시여, 이해함이 만일 행동함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라면 저에게 이 끔찍한 행동을 하라 명하심은 무슨 뜻이시옵니까? 오, 케샤바시여.
쟈나르다나(Janardana) 크리슈나의 명칭의 하나. ‘사람을 괴롭히시는 이’라는 뜻을 가짐.
케샤바(keshava) 크리슈나의 이름의 하나. ‘긴 머리털을 가지신 이’ 라는 뜻.
아르쥬나는 결과를 바라고 하는 행동은 집착이나 욕망을 떠나서 하는 행동보다는 못하다는 가르침을 오해하고, 크리슈나의 생각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을 일하는 것보다 더 높이 보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럼 지식을 행동보다 높다고 하신다면 나더러 이 무서운 행동을 하라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2. 당신께서는 보기에 혼란된 말씀을 가지시고 저의 이성을 미혹케 하시는 듯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지선(至善)에 이를 수 있는 길을 하나로 결정하여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아르쥬나보고 마음이 약해졌다고 책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행동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에(2: 49∼50) 아르쥬나는 크게 미혹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보면 분명해진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3. 죄 없는 자야, 내가 일찍이 말했듯이 이 세계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느니라.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지식의 길과 행동하는 사람을 위한 행함의 길.
생각하는 사람(sankhyanam) 이론파 사람들.
행동하는 사람(yoginnam) 요가 곧 무사(無私)한 행(行)의 길을 닦는 사람들.
스승은, 현대의 심리학자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도자를 두 종류로 구별하고 있다. 즉, 내향적인 사람(introvert),곧 정신적인 내적 생활의 길을 찾으려는 경향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extrovert), 곧 활동적으로 외적 생활을 따르는 경향을 가지는 사람이다. 거기 따라서, 깊은 정신적 사색을 찾는 사람에게는 지식의 요가의 길이 있고, 활발하게 사랑의 활동을 원하는 성격에게는 행동의 요가의 길이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향 외향의 두 가지 경향을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기타」의 자리에서 보면 행동의 길은, 해탈을 위해서는 지식이나 마찬 가지로 유효한 방법이다.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마하바라타」에는 “그와 같이 두 가지 방식의 생활이 있다. 둘 다「베다경」에서 가르치는 길이다. 하나는 능동적인 길이요, 또 하나는 내버림의 길이다”라고 했다. 두 방식의 생활은 꼭 같이 값어치 있는 것이다. 스승은 즈나나(Jnana) 곧 지혜는 카르마, 행동과 서로 같이 서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샹카라(Shankara)는 행작(行作)은 깨달음(enlightenment)과 서로 양립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행작을 지혜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 대한 하나의 표본으로 취하는 것이다. 깨달은 이의 행함 안에는,「기타」의 스승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라는 의식이나 보수를 기대하는 생각이 들어 있지 않다. — 라다크리슈난
 
4.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그것을 내버림으로써 완전의 지경(成滿位)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행동의 얽어맴 생사의 바퀴(sansara).
나이슈카르먀는 행동의 영향을 입지 않는 지경이다. 제가한 행동의 결과로 얽어맴을 당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거기 대한 반동을 받는 법이요, 그러기 때문에 영혼을 변천하는 세계에 내 주어서 얽매임을 당하게 하는 근원이 된다. 그리하여 영혼이 이 세계를 초월해서 지고자와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행작의 포기가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의 포기다.⎯라다크리슈난
‘행동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행동의 얽맴에서 해방된다는 말이다. 이 자유는 모든 행동을 내버림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사물의 성질상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기 이를 수 있을까? 다음 절이 그것을 설명해준다.⎯간디
 
5. 어떤 사람도 비록 한 순간이라도 무위로 있을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천성에서 나오는 충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성 프라크리티 혹은 자연.
충동 글자대로 하면 구나(gunas), 곧 3성.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이상 일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일하지 않으면 생을 유지할 수 없다. 아난다기리는, 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3성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몸과 감각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3성에 몰려서 행동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한 말 속에는 자연히, 해방된 혼은 일하지 않는다는, 모든 일은 지고의 지경에서는 떨어진 것이라는, 그것은 무지에 돌아감이라는 견해를 물리치는 뜻이 들어 있다. 생명이 있는 한 행동은 불가피하다. 생각함은 하나의 행동이다. 삶은 하나의 행동이다. 그리고 이 행동들이 갖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음이,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오는 망상의 지배를 받지 않음이 진정한 무위지, 결코 육체적으로 활동을 피하는 것이 그것은 아니다. 해탈한 사람에게서는 일이 떨어져나간다 할 때 그 참 의미는 그는 이 이상 더 개인적인 일의 필요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의미는 그가 행동에서 도망가서 복된 무위 속에 피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같이 일한다. 어떤 필요에 얽매임 없이, 무지의 강요를 당함도 없이, 그리고 일을 하는 가운데도 거기 빠져듦이 없이 한다. 그의 이기심이 없어졌을 때 행동은 깊은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이요, 그 심령 속에 그윽이 자리잡고 있는 지고자의 지시에 의해서 된다. 욕망과 집착을 내버리고, 모든 생명체와 하나 되어, 그는 자기 속생명의 무한한 깊음에서부터 행동하고 그의 영원하고 거룩하고 지극히 높은 자아의 주재 밑에서 하게 된다. — 라다크리슈난
성인은 제 마음이 없이 씨의 마음을 가지고 제 마음을 삼는다(聖人無己心 以百姓心爲心). — 장자
 
6. 행동의 감각기관을 억제하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감각의 대상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미혹된 혼이니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 부르느니라.
혀에는 재갈을 물리면서도 마음으로는 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위선자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 신체는 자유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 세우는 육체의 통제는 정신적 통제의 선행조건이다. 신체의 통제는 온전히 스스로 세운 것이어야지 밖에서 가져다씌운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다시 말한다면, 무서운 생각으로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업신여겨 마땅하다 하는 위선자란 자제를 하기 위해 애쓰는 겸손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절이 말하는 것은 마음으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몸으로는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 재갈을 물리는 사람,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몸으로도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음 절은 그것을 뒤집어서 하는 말이다. — 간디
 
7. 그러나 아르쥬나야, 마음으로 모든 감각기관을 통제하고, 집착을 떠나, 감각기관들을 카르마 요가에 쓰는 사람은 뛰어 났느니라
마음과 몸이 잘 일치되어야 한다. 마음을 아무리 통제한다 하더라도 몸은 이 길로도 나가고 저 길로도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참으로 잘 다스린 사람은, 예를 든다면, 나쁜 소리에는 귀를 막고 다만 하나님이나 선한 사람의 찬양을 듣기 위해서만 연다. 그는 감성적인 쾌락에 대하여는 아무 맛을 가지지 않고 혼을 빛나게 하는 일에만 전념할 것이다. 그것이 행동의 깊이다. 카르마 요가는 자아를 몸의 얽맴에서 건져내는 요가(방법)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방탕의 여지가 없다. — 간디
인간의 의지는 법의 딱딱함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잃어진 안정, 우리의 잃어진 지성, 우리의 잃어진 순진을 도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물을 참(real)의 나타남으로 보아야지 붙잡고 가져버릴 물체(對象)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러한 물건에 대한 무집착(無執着)의 태도를 기르려면 명상이 절대로 필요하다. 6절에서 크리슈나는 외적인 포기를 말했고 이 절에서는 진정한 대적 때버림의 정신을 가르친다. ⎯라다크리슈난
 
8.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行)은 비행(非行) 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9. 쿤티의 아들아, 희생을 위한 행동을 내놓고는, 이 세상은 모든 행동으로 얽매여 있다. 집착을 떠나 이 희생을 위한 행동을 하라.
‘희생을 위한 행동’ 이란 하나님께 바치는 무사(無私)한 봉사이다. — 간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해 봉사 정신으로 해야 한다. 미맘사(Mimamsa, 글자의 뜻으로는 깊은 생각, 혹은 해석. 六派 철학의 하나)가 행동은 희생을 목적으로 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면서,「기타」는 우리더러 그러한 행동을 어떠한 갚아줌을 바라는 마음 없이 하라고 가르쳐준다.
그러한 경우 그 불가피한 행동은 아무런 구속력도 가지지 않는다. 희생(sacrifice) 그 자체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는 낮은 마음을 높은 마음에다 희생(바쳐)해야 한다.「베다」의 신(神)들에 대해 행해지는 종교의식은 여기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이름으로 하는 창조의 봉사가 된다. — 라다크리슈난
 
10. 맨첨에 조물주께서 사람을 희생과 함께 지으시면서 말씀 하셨다. “이로써 너희는 번성할지어다. 이것이 너희 모든 소원의 카마두크가 될지어다.”
카마두크(kamadhuk, 如意牛) 무엇이나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주었다는 인드라 신의 신비스런 암소.
조물주(Prajapati) 창조주(The Lord of Creatures),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 모양으로 순 영의 절대적인 신이라기보다는 모든 생명질(生命質) 생명력을 포함하는 것의 인격화된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충동 때문에 창조를 했다고 한다.
하나는 외롭고 가난하고 무서워서, 또 하나는 제 본체가 넘치고 싶은 갈망에, 그래서 “내가 번성할까, 내가 만물을 낳아놓을까!”(May I give increase: may I bring forth Ceratures?) 했다고 한다.
 
11. 이로써 너희는 신들을 공양하라. 신들 또한 너희를 공양 할 것이다. 그와 같이 서로서로 공양함으로써 너희는 가장 높은 선에 이를 것이다.
신들 여기와 다음 12절에 있는 신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전창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모든 창조에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봉사함이요, 또 그것이 곧 희생이다. — 간디
사람은 공양드린다 하여도 아무것도 제 것으로 할 수가 없다. 하나님 혹은 신들에게 속하는 것을 가지고 바친다. 이 희생이란 우리가 자연과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 것뿐이다.
 
12. 희생으로 공양을 받으면 신들은 네게 바라는 바 복락을 줄 것이다. 그 선물을 받아쓰면서 그들께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도둑이다.
희생(yajna) 아름다움과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식과 경험이 자람에 따라, 또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뜻은 자라고 변하기 쉽다.
야즈나(yajna)는 글자 그대로는 예배(worship)란 뜻이다. 거기서 희생이란 뜻이 되고, 거기서 희생적인 행동 혹은 봉사적인 행동을 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대는 제 독특한 야즈나를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 — 「청년 인도」
또 야즈나는 남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이 일시적이었거나, 또는 정신적인 성질의 것이었거나간에, 아무 보수를 받음도 없이 또 바람도 없이 행해진 행동을 의미한다. ‘행동’이란 말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사상과 말까지도 포함되어야 하고, ‘남’이란 말은 인류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인류에게 봉사할 목적으로라도 하등동물을 희생했다면 그것은 야즈나가 될 수 없다.
이 세계는 이런 의미의 야즈나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기타」는 제2장에서 참 지식에 관해서 말을 한 다음 제3장에서 거기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을 끄집어내서, 많은 말로 야즈나는 창조 자체와 더불어 왔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몸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으로 모든 일에 봉사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때문에 또「기타」는 야즈나를 바침이 없이 먹는 자는 도둑한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한다. 정결한 생애를 살려는 사람은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야즈나의 성격으로 되어야 한다. 야즈나는 우리의 출생과 더불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일생을 빚진 자요,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우주에 대해 봉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씨종이 제 섬기는 주인에게서 밥과 옷과 그밖의 모든 것을 받듯이 우리도 이 우주의 주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 「에라브다 망디르」
“네 이마의 땀으로 네 먹을 것을 벌라” 하고 성경은 말했다. 희생에는 이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하나는 밥 버는 노동일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제 빵을 위해 일하고 그 이상 더 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을 위해 넉넉한 빵과 넉넉한 여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잉 인구의 소리도 병소리도 우리 주위에 보는 그런 비참의 소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노동 가장 높은 형태의 희생일 것이다. 사람은 제 몸이나 마음을 가지고 물 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겠지만 그것은 다 노체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노동이 될 것이다. 사람은 제 밥을 지식적인 노동으로도 벌 수 있지 않느냐고? 아니다. 육체의 필요는 육체로 공급하여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게로 돌려라” 하는 말은 아마도 이러한 경우에 꼭 맞는 말일 것이다. — 하리잔
 
13. 선한 사람은 희생에서 남은 것을 먹고 모든 죄에서 해방 되지만 악한 자는 자기를 위해 밥을 짓고 그 죄를 먹는다.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저만 먹는 사람은 죄를 먹는다. — 「베다경」
자기만을 위해 밥을 짓는 자는 죄를 먹고, 희생을 바친 후에 남는 음식은 선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음식이다. — 「베다경」
그의 몸인 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은 채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11:29)
 
14. 모든 산것은 밥에서 나오고, 밥은 비에서 나오고, 비는 희생에서 나오고, 희생은 일함에서 나온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빵 노동(bread-labour)라고 했던 육체 노동을 주장하는 말이다. 그것을 남을 위해 무사(無私)한 마음으로 할 때 야즈나 곧 희생이 된다. 비는 지식의 잔치로는 오는 법 없다. 다만 육체노동으로만 온다. 산에 나무가 없어 헐벗으면 비가 아니 오고, 나무를 심으면 비를 끌어 식물이 느는 것에 따라 강우량이 올라간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과학적 사실 아닌가? 육체노동을 그만둔 때문에 일어나는 도덕적 신체적 모든 나쁜 결과를 다 알 사람이 누군가? — 「에라브다 망디르」
같은 뜻을 열자(列子)는 도둑질이라는 말을 가지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국씨(國氏)는 큰 부자고 향씨(向氏)는 큰 가난뱅이인데 향씨가 국씨 보고 부자 되는 방법을 물었더니 국씨 대답하기를 도둑질을 해서 됐노라고 했다. 향씨가 들은 대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죄를 짓고, 있던 것까지 뺏기고 분해 국씨한테 가서 질문을 했더니, 국씨가 말하기를 “너 어떻게 도둑질을 했느냐” 했다. 향씨는 제 한 대로 대답했더니 국씨는 듣고 말하기를 “도둑질하는 도를 그렇게도 모른단 말이냐? 내 일러줄 터이니 들어보아라. 하늘에 시(時)가 있고 땅에 이(利)가있다. 나는 천지의 시, 이, 구름, 비, 산과 못의 나고 자라는 것을 도둑해서 내 곡식을 키우고, 내 집을 짓고, 뭍에서는 새, 짐승을 도둑하고 물에서 고기를 도둑해서 산다. 도둑질 아닌 것이 없지. 그것이 다 하늘이 낸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네가 도둑했다는 금은옥백(金銀玉帛)은 사람이 모아놓은 것이지 하늘이 준 것 아니다. 죄 얻어 마땅하지 않느냐?” 했다. 향씨가 그 말을 듣고도 알 수 없어 동곽(東郭)선생한테 가서 호소했다. 동곽선생은 대답하였다. “네 한 몸부터 도둑질한 것 아니냐? 음양의 화(和)를 도둑해서 네 생을 이루고 네 몸을 담았는데 하물며 그 밖엣 것이겠느냐?……국씨의 도둑질은 공도(公道)다. 그러므로 재앙이 없고, 네 도둑질은 사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진 것이다. 공사(公私)가 있다는 놈도 도둑이요, 공사가 없다는 놈도 도둑이다. 공(公)을 공으로 하고 사(私)를 사로 하는 것이 천지의 덕이다. 천지의 덕을 아는 사람을 누가 도둑이라 하겠느냐? 누가 도둑 아니라 하겠느냐? 一열자(天瑞)
 
15. 알지어다. 행동은 브라마에서 나오고, 브라마는 불멸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것 속에 두루 들어 있는 브라마는 언제나 희생 위에 안주해 있다.
브라마라는 말이 좀 불편하게 쓰인 탓으로 15절을 해석하는 데 많은 불필요한 곤란이 생긴다. 첨의 두 브라마는 프라크리티를 의미하는 것이고, 셋째와 넷째의 것은 창조 전체에 편만하는 불멸자, 무한을 의미한다. 그 뜻은 희생은 창조의 원인이요 또 결과라는 발이다. 톨스토이는 같은말을 희생의 원형의 사슬에서 그 연결하는 고리를 빼버리고 더 간단한 말로 해 버렸다. “일은 밥을 낳고 밥은 일을 낳는다. 그것은 끝없는 원이다. 서 토가 저쪽의 원인인 동시에 또 결과다.” 이것은 브라우닝으로 하여금 “죄와 고통의 이 무서운 기계”(This dread machinery of sin and sorrow)라고 노래하게 했던 희생의 영원한 과정이다.
 
서로서로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창조적이면서 또 자기희생적이면서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 같음에.
(Love in turn, and be beloved,
Creative and self-sacrificing too,
And thus evertually God- like)
— 마하데브 데자이
 
행동은 불멸자 안에 뿌리박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행동이 아니면 세계는 망해버리고 만다. 세계는 하나의 큰 희생이다. 「리그 베다」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한 푸루샤가 희생으로 바침이 되어 그의 사지가 허공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큰 희생으로 세계의 구조는 유지되어간다. 행동은 모든 생명 가진 것의 도덕적 또는 육체적 요소다. — 라다크리슈난
 
16. 오, 프리다의 아들아,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살며 감각의 쾌락에 빠져, 이와 같이 돌아가는 바퀴를 따르려 하지 않는 자는 쓸데없이 사는 것이니라.
이 절들에서는 희생을 신과 사람 사이에 서로 주고받음 하는 것이라는 「베다」의 사상을 더 큰 규모로 펴서 우주적으로 모든 생명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 하고 있다. 희생의 정신으로 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은 모든 희생을 누려 받으시는 이다. 희생의 최고자다. 또 그 것은 생명의 법칙이다. 개인과 우주는 서로 의존한다. 인간 생명과 우주 생명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류가 되고 있다. 자기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산다. 세계는 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협동 때문에 돌아가고 있다. 희생은 신들에게 바쳐질 뿐만 아니라 또 지고자(至高者)에게도 바쳐진다. 신들은 그이의 가지가지의 나타남이다. 4장 24절에는 행동과 희생의 자료, 주는 자와 받는 자, 희생의 목적과 대상이 다 브라만이라고 하고 있다. — 라다크리슈난
 
17. 그러나 즐거움을 아트만에만 구하고, 아트만에만 만족하며, 아트만으로만 좋다 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아서 아니 될 일이 없다.
그는 의무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그가 일하는 것은 의무라는 생각에서 하는 것도 아니요, 자기의 존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의 완전한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 라다크리슈난
이 간단한 한 절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이것은 불멸의 즐거움의 변함없는 근본을 보여주는 것이요 앞의 절에 있는 육욕적인 생각의 사람과 정신적인 생각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그 즐거움이 어디서 오느냐에 따라 사람은 달라진다”고 했다.
육욕적으로 된 사람은 희생을 바치는 것도 없이 감각에만 빠져들면서 헛된 생을 보내므로, 그 하는 활동은 갈수록 더 죄와 얽매임에만 빠져들게 하지만, 정신적으로 된 사람은 그 눈을 안으로 돌려 모든 즐거움의 불멸의 근원, 곧 아트만을 찾는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에 행동에서 해방됨을 얻는다.
이 절 뜻은 그에게는 모든 행동이 끊어지게 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얽어매는 행동에서 해방됐다는 말이다. 자주(自主)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와 하나되게 했기 때문에 그는 소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아트만 곧 대아를 위해 산다. 그 대아는 곧 우주의 대아와 한 대아다.「우파니샤드」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진실로 위에도 아트만, 아래도 아트만, 앞에 도 아트만, 뒤에도 아트만, 오른편에도 아트만, 왼편에도 아트만이다. 그는 이것을 보고, 이것을 믿고, 이것을 깨달았으므로 아트만을 배불리 먹고, 아트만으로 더불어 놀고, 아트만의 동무가 되고 그의 모든 기쁨을 아트만 안에 찾아, 스와라쟈(swarajya)를 얻었다. 그는 삼계(三界)에 자유자 재함을 얻었다.” — 마하데브 데자이
 
18. 그는 이 세상에서 제가 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이(利)라 생각하는 것이 없고,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 없다. 일체의 산 것 중에 어느 것에도 그의 이가 달렸다고 생각 하는 것은 없다.
 
19. 그러므로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하라.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르기 때문이다.
 
20. 쟈나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완전에 이른 것도 행함에 의해서 된 것이다. 너도 이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자나카(janaka) 미틸라(Mithila) 나라의 어진 임금, 그 이름은 인도에서는 언제나 자기 실현을 완전히 하고, 쉬지 않고 무사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는 ‘내 것’이란 생각을 완전히 없이했기 때문에 그 왕성에 불이 붙는다는 말을 듣자 “미틸라가 다 탄다 해도 내 것이 탈 것은 하나도 없다” 했다고 한다.
세계의 유지(lokasamgraha) 세계의 하나 됨, 사회의 서로 연결됨을 목적해서 하는 말이다.
세계가 만일 물질적 불행, 도덕적 타락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공동살림이 정당하고 품위 있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종교적인 도덕이 사회활동을 다스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의 목적은 사회를 정신화하고 지구 위에 동포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상을 현실 제도 속에 구현할 수 있다는 희망의 영감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인도 세계가 그 젊음을 잃었을 때 그것은 저 세상적으로 기울어버렸다. 늙어 지치게 되면 포기와 인내의 복음을 취하는 법이다. 희망과 정력이 넘치는 때에는 현실 속에서 봉사의 활동을 하고 문명을 구원할 것을 강조하게 된다. 보에티우스(Boethius)는 “혼자서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에 못 간다”고 잘라서 말했다. — 라다크리슈난
 
21. 무엇이거나 어진 사람이 한 것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는 법이다. 그가 모범을 세우면 세상은 그것을 따른다.
위에 좋아하는 이가 있으면 아래는 반드시 더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오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矣 君子之德風也 小人之德草也 草尙之風 必偃) — 맹자(膝文公上)
보통 사람은 잘난 이가 세운 표준을 배워서 한다. 데모크라시는 위인에 대한 불신임 때문에 당황하고 있다.「기타」는 위대한 사람이란 뒤엣사람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개척자란 것을 지적해주고 있다. 빛은 대개 일반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선 개인을 통해서 온다. 그들은 뒤따라 오는 사람들이 아직 아래 골짜기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산꼭대기에서 빛나는 불빛을 벌써 보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한다면, 인간세상의 소금이요, 누룩이요, 빛이다. 그들이 그 빛나는 불빛을 보고 외칠 때에 알아듣는 사람은 극히 적은 수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뒤늦게야 차차 깨닫고 그를 따라간다. — 라다크리슈난
그러나 데모크라시의 약점이 위인에 대한 불신임에 있다고 할 때 그 잘못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할까? 물론 씨 자체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도리어 그 위인이란 사람들이 높이 외로이 서서 씨 속에 뛰어들지 않는 데와, 또 그 두 사이에 서서 일부러 계획적으로 막고, 왜곡시키고, 이간시키는 중간 지식인들의 장난에 있지 않을까? 실지로 사회 밑바닥의 씨들은 예수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간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에 말한 맹자의 가르침도 이것과 합한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 할 때, 그 풀과 바람은 하나다. 초상지풍(草尙之風)이라, 풀 위에 바람을 더한다. 풀 속으로 내려가는 바람이 풀을 눕게 하지 하늘 공중에 부는 바람, 혹은 직대기는 폭풍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러기 때문에 노자의 말이 참이다. “성인은 제 마음이란 것이 없다. 씨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聖人無己心 以百姓心爲心) 또 “스스로 보는 이는 밝지 못하다”(自見者不明) 했다. 정말 어진 이는 전체의 눈으로 보고 전체의 귀로 듣고 전체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사람의 하는 일을 씨이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는가. — 함석헌
 
22. 오,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는 이 삼계 속에서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아무 일도 없고, 또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삼계(三界) 천(天), 공(空), 지(地).
혹시 이런 반대를 듣는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 아니시니 물리적으로 일을 하신다 할 수는 없고, 썩 잘 한다 해도 정신적으로 일하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해, 달, 별 등등의 운동은 곧 하나님이 일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적 활동이 아니고 물리적 활동이다. 하나님은 비록 형상도 없고 사람 같은 인격은 아니지만 마치 형상이 있고 몸을 가지신 것처럼 일하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일하고 계시면서도 일에 얽매이심이 없다. 그 영향을 입지도 않으신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마치 자연의 모든 운동이나 변천이 기계적이기는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지혜 혹은 뜻에 의하여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처럼 사람도 제 하는 날마다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규칙적이고 정확한 데까지 내려가도록 해야지만 또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일이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기계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자동기계에까지 내려가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 뒤에 하나님의 지도가 있는 것을 알아 자기도 깨달음으로 따라 하는 데 있다. 누구나 다만 자기를, 그리고 행동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기계적인 정확뿐 아니라 어떠한 닳아짐도 떨어짐도 없는 안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사람은 제 마지막 날까지 씩씩하고 꿋꿋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 그 몸은 때가 이르면 떨어져나가겠지만 그 혼(魂)은 주름살 하나 없이 흠집하나 없이 늘푸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간디
하나님의 삶과 이 세상 삶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 라다크리슈난
나의 만유(萬有)의 주 되는 이름 안에서 나는 온 세상을 위해서 종처럼 일한다.(In the name of my lordship, I slave for the whole world.)一「마하바라타」
내 아버지께서 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입니다.—「요한」(5:17)
 
23. 내가 만일 피곤한 줄 모르고 일하지 않는다면, 오, 프리다의 아들아, 사람은 언제나 나 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
크리슈나가 어떤 집착도 없이 일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마치 이러는 것 같다.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 제자가 되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마태」(11: 29〜30)
사람이 애착의 맛에서 물러설 때 모든 일의 멍에는 편하고 모든 짐은 가벼운 것이 돼버린다. 마치 지구의 인력이 없어질 때 몸이 그 무게를 잃는 것과 같다. —마하데브 데자이
크리슈나의 생일에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 “크리슈나는 일생을 씨에 봉사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씨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쿠르크쉐트라에서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보다 아르쥬나의 차부가 되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의 전생애는 하나의 끊임없은 카르마의「기타」였습니다……그는 어릴 때 소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고팔라(Gopala)라 부릅니다만 그것은 소몰이꾼이란 뜻입니다. 크리슈나는 잘 줄을 몰랐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뜬눈으로 세상을 지켰습니다.” — 「청년 인도」
 
24.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이 세계는 망해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끊어짐 없는 일하심으로 인해 이 세계는 유지되고 비존재 (非存在)에 떨어짐을 면한다.
성 토마스는 말하기를 “어떤 것이나 그것이 존재 속에 나온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같이, 그것이 보존되어가는 것도 그의 뜻에 달렸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만일 자기의 활동을 만물에서 거둬 가신다면 만물은 무(無)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했다. — 라다크리슈난
 
25. 바라타의 아들아, 지혜 없는 자가 제 하는 일에 집착함으로써 일을 하듯이 지혜 있는 자는 마땅히 집착함이 없이 세계의 질서를 붙들어가기 위해 그와 같이 일해야 하느니라.
광명에 집중되는 혼은 이미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거룩하신 이가 하듯이 자기도 우주적인 활동에 더불어 참여하여야 한다. 그때 그의 행동은 지고자의 광명과 희열에 감동되어서 하는 것일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중화(中和)를 이루면 하늘 땅이 제 자리를 얻고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용」
오직 천하에 지극한 정성이어야 능히 그 바탈을 다할 수 있는데 그 바탈을 능히 다하면 사람의 바탈을 능히 다할 수 있고, 사람의 바탈을 능히 다하면 몬의 바탈을 능히 다할 수 있고, 몬의 바탈을 능히 다하면 하늘 땅의 치고 기르는 일을 능히 도울 수 있고, 하늘 땅의 치고 기르는 일을 능히 도울 수 있으면 하늘 땅으로 더불어 셋|치고 기느니라(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賛天 地之化育 可以賛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 「중용」
 
26. 깨달은 자는 깨닫지 못하여 행동에 집착하는 자의 마음을 뒤흔들어서는 아니된다. 깨달은 사람은 도리어 모든 일을 요가의 정신으로 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자연의 힘에 대해 절을 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잘못된 것을 숭배하고 있으며 신성(神性)의 보다 큰 통일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의 자그만 자아는 아닌 어떤 것에 대해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조잡한 생각이라도 그 속에는 바르게살기를 원하는 지아비 지어미들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무엇이 들어 있다. 역사적 의미를 갖는 전통적 의식 속에는, 잘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무언중에 하는 확신이 담겨 있다. 그 근본이 종교적인 것이냐 아니냐는 그 대상이 아니라 그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사람이 다 가장 높은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대단히 느린 걸음으로 되는 것이지 갑자기 일약(一躍)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종교 견해는 우리 힘으로 선택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과 자라남과 전체적인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업신여겨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단순한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이지 결코 허투로 해서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단순한 신앙은 실천의 값어치와 영적 호소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근래의 인류학은 우리가 토착민들을 발달시키자는 욕심에 그들의 무해한 오락, 그들의 노래와 층, 그들의 잔치와 축제를 없애버려서는 아니 된다고 경고를 해준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간 우리는 그것을 사랑과 존경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들의 제한 된 이해를 보다 큰 관점에 이르는 계단으로 삼지 않으면 아니된다.
맑은 물을 얻기 전에는 더러운 물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만신당(萬神堂) 안에는 군중들이 섬기던 가지가지의 신들이 다 모시어져 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시내와 숲의 신, 먼 옛날의 전설의 신, 부락 수호의 남신 여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된 확신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조화시켜 보자는 생각에, 그것은 자신 속에, 형형색색의 요소와 동기를 다 포함하는 하나의 엄청난 종합에 도달하게 됐다. 종교 안에 깜깜하고 원시적인 미신이 씨글거리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一라다크리슈난
하나님 동산의 연한 풀을 짓밟지 말라. — 조지 폭스
 
27. 모든 행동은 자연의 성(性)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나라는 생각에 자아를 어지럽힌 사람은 “그것을 하는 것은 나다” 하고 생각한다.
자연 프라크리티.
성(性) 구나.
우리의 의식적인 존재는 여러 가지 면을 가지는데, 이기적인 자아는 행동이 자연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그 힘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기타」에 의하면, 이기적인 자아가 완전히 자연의 지배 밑에 있을 때 그것은 자유로 행동할 수가 없어진다. 몸과 목숨과 마음은 환경에 속해 있는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28. 그러나, 오 마하바후야, 이 성(性)과 그 활동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성이 성에 대해 작용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거기 집착하지 않는다.
마하바후(Mahabahu) 큰 팔을 가진 이, 곧 아르쥬나.
숨쉼이나 눈깜짝임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제가 한다고는 생각 않는다. 다만, 병이나 그밖의 어떤 방해로 그것을 할 수 없어진 때에만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행동은 그 능력을 우리 자신의 것인 듯 가로챔 없이 자동적으로 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가 자비를 행하는 줄 알지도 못한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무집착(無執着)은 꾸준한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된다. — 간디
프라크리티와 성(性)은 인간의 자유의 한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유전이나 환경의 압력 같이 경험적인 자아는, 마치 모든 우주적인 힘들이 다 원인의 결과인 것같이 여러 가지 활동의 결과다. ᅳ라다크리슈난
모든 일의 몫이 결정되어 있으니 생각해보면 명(命)으로 되는 것이지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萬事分已定 算來由命不由人). — 「명심보감」
지혜있는 이는 명(命)으로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법(法)으로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이(理)로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세(勢)와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智者不與命闘 不與法闘 不與理闘 不與勢闘) — 「여숙간」
이 말을 받아서 석계도(席啓圖)가 뒤집어서 말하기를, “명을 아지 못하는 사람과 싸우지 않으며, 법을 아지 못하는 사람과 싸우지 않으며, 무리한 사람과 싸우지 않으며, 세력 없는 사람과 싸우지 않는다”(不與不知命者闘 不與不知法者闘 不與無理之人闘 不與無勢之人闘) 하였다. —「축덕록」
 
29. 자연의 성(性)에 미혹하는 사람은 성의 작용에 집착한다. 그러나 전체를 아는 사람은 전체를 모르는 둔한 사람을 흔들어 주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자연의 충동에 따라 행하는 사람을 흔들어주어서는 아니된다. 그들은 자아와 자연에 속해 있는 이기적인 자기를 혼동하는 그 잘못에서 서서히 건져나옴을 입어야한다. 참 자아는 거룩한 것이요 온전히 자유하고 스스로를 안다. 거짓 자아는 자연의 한 부분인 이기적인 나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의 작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삼캬의 설명으로 한다면 프라크리티가 능동적인 대신 참 자아는 비행동적이요, 푸루샤가 프라크리티의 작용과 일치할 때에 능동적인 인격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기타」는 완전한 비행동(非行動)에 의하여 푸루샤는 프라크리티에서 물러나게 된다는 삼캬론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알아봄(識別)은 비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되 해방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아트만 곧 참 자아는 공명정대한 한 증인이란 것을 안다면 우리가 비록 불완전과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가 하나 되기 위해서 하는 큰 싸움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어떤 행동도 우리를 얽어맬 수는 없을 것이다.—라다크리슈난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가리지 말고 그를 반가이 맞으십시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그 반대로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 「로마서」(14: 1~3)
 
30. 네 모든 일을 내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바라는 것도 없이, 나란 생각도 없이, 속탐을 내버리고 싸워라.
가장 높은 자아 아쟈트마(adhyatma), 개인 자아의 근본이 되는 보편적인 영혼의 지경. —바네트
우주의 존재와 그 모든 활동의 주재가 되시는 주에게 우리 자신을 바쳐 버리고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당신 뜻대로 되어지이다”가 모든 일에서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우리는 주의 종이라는 생각으로 일하여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지극한 사람은 저가 없고, 검스러운 사람은 제 공이란 것이 없으며,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다.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 장자(逍遙遊)
 
31. 나의 이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불평함 없이 지켜 행하는 사람도 또한 일함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느니라.
 
32. 그러나 나의 이 가르침을 트집하고 따르려 하지 않는 자는 모든 지식에서 어둡고 생각이 없는 자다. 알지어다, 그는 망했느니라.
 
33. 비록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제 성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 모든 산 물건은 각각 제 성에 따라 한다. 무엇으로 그것을 누를 수 있느냐?
이것은 2장 61절과 63절에 있는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 아니다. 스스로 억제함은 구원에 가는 길이다(6:35,13:7).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힘을 기울여서 스스로 온전한 억제에 이르려 힘써야 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 강제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절의 말씀은 스스로 억제함을 제해버리는 말이 아니라, 다만 성을 이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이것은 나는 할 수 없다, 내 천성에는 그것은 없다” 하는 사람은 그 절을 잘못 읽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천성을 모른다. 그러나 습관이 천성은 아니다. 나아가고 물러서지 않는 것, 올라가고 내려가지 않는 것이 영혼의 천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워서 물러서지 않고는, 내려가지 않고는 못견딜 것 같아도 버티어나가야 한다. 다음 절은 그것을 잘 가르쳐준다. —간디
자연은 혹시는 숨는다. 이따금은 저버린다. 아주 없어지는 일은 별로 없다. 무리로 하면 그 값으로 더 사나와진다. (Nature is often hidden, sometimes overcome, seldom extinguished. Force make the nature more violent in the return.)-베이컨
사람의 성질은 선천적 조건과(과거의 행동과 유전을 포함해서) 후천적 조건(물리적 또는 문화적 환경을 포함해서)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렇게 의미된 것들의 일부는 불가피한 것이고 그것을 눌러버릴 수 없다. 그러나 그대부분은 통제할 수가 있다. 사람의 할 일은 자기를 잘 살펴서 그 불가피한 것과 고칠 수 있는 것, 에픽테투스(Epictetus)의 말을 빌어 한다면, “분내(分內)의 일과 분외(分外)의 일(The things in his power and the things not in his power)”을 아는 것이다. — 마하데브 데자이
프라크리티는 과거의 행동의 결과로 우리가 날 때에 타가지고 나온 정신적 준비다. 그것은 제 갈길을 간다. 샹카라는 하나님조차도 그 하는 것을 멈추지는 못한다고 한다. 과거의 행동으로 하여금 그 자연적인 결과를 내게 한 것은 바로 그의 명령이다. 행동은 프라크리티의 작용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고 자아는 다만 치우침 없는 증인이기 때문에 누름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절의 뜻은 영혼에 대해 성(性)은 전능적인 힘을 가지는 것을 알려주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성 곧 우리 존재의 원리에 따라 행할 것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온갖 충동대로 맘대로 하란 말은 아니다. 우리의 생명, 참을 찾아 그것을 나타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것은 설혹 우리가 억누르려 한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시당한 자연은 복수하는 법이다. — 라다크리슈난
 
34. 모든 감관에는 그 대상에 대한 좋아함과 싫어함이 붙어 있다. 누구나 그 지배 아래 들어서는 아니 된다. 그 둘은 가는 길의 방해꾼들이니라.
사람은 반드시 부디(buddhi) 혹은 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충동(衝動)의 하자는 대로만 한다면 우리 살림은 동물과 한가지로 목적도 없고 뜻도 없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만일 그냥 내버려둔다면 좋고 언짢고가 우리 행동을 결정해버릴 것이다. 어떤 것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언짢기 때문에 저렇게 하는 한 우리는 우리 행동에 얽매이고 만다. 그러나 그 충동을 이기고 우리가 만일 의무감 밑에 행동한다면 우리는 프라크 리티의 장난에 희생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자유의 실행은 자연의 필연에 의해 조건이 붙는 것이지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 — 라다크리슈난
 
35. 잘하지 못하면서라도 제 의무를 하는 것이 남의 의무를 잘하는 것보다 낫다. 제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이 좋으니라. 남의 의무는 무섭기만 할 뿐이다.
의무 다르마, 불교 경전에서 번역할 때 법(法)이라고 하는 말이다. 대단히 넓게 쓰이는 말로서 모든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다 포함한다.
옛날 인도 사람은 인생에 네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째는 아르다(artha)요, 둘째는 카마(kama)요, 세째가 이 다르마(dharma)요, 마지막은 모크샤(moksha)다.
아르다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아마 우리말로 한다면 세간살이라 할 때에 세간에 해당하는 것일 것이다. 본래 글자 뜻으로는 아르다는 물건이란 말이라는데, 인생 목적의 첫째로 꼽을 때는 어려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질적 소유를 말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 경제도 있고 정치도 있고 기술도 필요하다.
카마는 즐거움, 사랑의 뜻이다. 서양의 큐핏(Cupid) 모양으로 카마는 꽃활에 꽃살을 메워 가슴을 향해 쓴다. 그래서 사람의 가슴속에 사랑과 가지가지의 욕망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그 지배를 받지 않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랑의 신, 쾌락의 신이었다.
모크샤는 또 아파바르가apavarga) 니르브르티(nirvrtti, nivrtti)라고도 하는데 그 그 다 떠난다, 버린다, 놔준다, 구월한다 하는 뜻이다. 보통 열반(涅槃)이라 하는 말그 물론 니르브르티의 음역(音譯)에서 온 것이다. 사람은 행복한 세간살림도 하고 사랑도 하고 쾌락도 누리고, 또 올바른 사회인으로 도덕 종교의 의무도 다하며 살아야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 완전히 정신적으로 자유하는 지경에 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인생관이었다.
여기서 다르마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사람은 다 제 다르마가 있다. 제 의무, 제 법, 쉽게 말해서 제 종교가 있다. 그 제 일을 하는 것이 종교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제것’ 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득(自得), 체험이다. 아무리 진리라도 제가 몸소 해서 얻지 못하고 남의 한 것을 모방만 해서는 참 자유하는 즐거운 지경에 이를 수 없다. 내가 참 하고 싶어서 하면 십자가를 져도 즐겁지만, 좋다고 하기 때문에 남을 따라서 하려면 마침내는 천당엘 간다고 해도 무섭고 괴로울 것이다. 확신이 없으므로, 무엇이 어떻게 되나, 어디로 가는 건가, 그러다 잘못되면, 하는 불안이 늘 있기 때문이다.
군자가 깊이 이르기를 도로써 하는 것은 그 스스로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으면 있는 것이 평안하고, 있는 것이 평안하면 무엇이나 자료하기를 깊이할 수 있고, 자료하기를 깊이하면 좌에 취하거나 우에 취하거나 그 원(근본되는 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 自得之 則居之安 居之安 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 맹자(離婁下)
우리는 다 꼭 같은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다섯 탤런트를 받았느냐 다만 한 탤런트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맡겨진 것을 어느만큼 충성되게 했느냐 하는 데 있다. 나는 크든 작든간에 사내답게 내 노릇을 해야 한다. 선(善)은 순전(純全)함에 있다. 내 의무가 아무리 맛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라도 거기 충성되어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어떤 정신으로 했느냐 하는 데 따라 심판을 받지, 그 일의 성질에 따라 되지 않는다. 일은 그것이 무슨 일이거나간에 거기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온전히 바친 마음으로 행한 사람에게 구원의 자격이 있다.—간디
제 이웃에 대한 순수한 봉사가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하여 봉사하지 않음이 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반대일 것이다. 먼데 뵈는 모양사리에 눈이 어리워서 봉사하기 위해 땅 끝을 헤매는 사람은 제 욕심을 채우지 못할 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다. 스와데시는 스와다르마를 자기 직접 신변 환경에 적용한 것이다. 一간디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4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제 2장 삼캬 요가 (1)
 
삼캬(samkhya 혹은 sankhya) 이론이란 뜻.
요가(yoga) 한자로는 유가(瑜伽).
요가는 통일의 뜻으로 쓰이는 말로서 가장 넓은 의미로는 마음과 몸의 통일 즉 의근(意根)과 작업근(作業根)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고, 보통은 마음의 통일을 말한다. 그래서 객관(客觀)에 중점을 두면 오감(五感)의 통일이어서 숨을 고르게 하고 의지를 집중시켜서 오감으로 하여금 외계에 붙어버리지 않도록 해서 마음 하나인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통일이라고 한다. 주관(主觀)에 중점을 둘 때는 나의 통일이 되는데 나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넓게 볼 때는 오감(五感), 오기(五氣), 의지(意志), 이성(理性), 즉 자아를 만들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리키게 된다. 그때의 나의 통일(atma-yaga)이란 자아의 통일이다. 그러나 좁게 볼 때의 나는 몸 마음을 차지하는 주되는 중심 나만을 가리잤고 한다. 그때의 나의 통일은 나에 의하여 내근(內根)을 통일한다는 뜻으로 나를 주로 한 통일이 된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것은 이성을 주로 하는 부디 요가(buddhi-yoga), 선정(禪定)에 의한 쟈나 요가(dhyana-yoga), 지식에 의한 즈나나 요가(jnana-yoga), 신념에 의한 박티 요가(bhakti-yoga), 이욕(離欲)을 주로 하는 산야사 요가(sannyasa-yoga), 실수(實修)를 주로 하는 아뱌사 요가(abjuasa-yoga), 이론을 주로 하는 삼캬 요가(samkhya-yoga), 실행을 주로 하는 카르마 요가(karma-yoga)가 된다. 안팎 어디로 보든지 다 마음의 통일 아닌 것 없기 때문에 일반으로 요가라면 마음의 통일로 번역함이 적당하다. 마음의 통일이라는 뜻을 주로 하게 될 때는 마음이 한 방면으로 집중되는 것이므로 경향(傾向), 주의(主義), 신앙(信仰), 교의(敎義) 하는 뜻이 된다.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요가는 대개 그런 뜻이다. ① 마음의 통일이 향하는 상태를 주로 할 때는 수행(修行), 수양(修養), 실수(實修), 상유가(常瑜伽) 하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다. 제 5장에서 말하는 요가는 그런 것이다. ② 마음 통일의 방법을 주로 하게 될 때는 행법(行法), 관법(觀法), 상응법(相應法), 유가법(瑜咖法) 하는 말로 할 수 있다. 이것은 ②,④와 서로 통하고 한다. 쓰인 예는 적지만 제 8장 12 같은 것은 여기 속한다. ③ 마음 통일의 결과 즉, 실지(悉地 곧. 成滿位)를 얻은 과상위(果上位)를 또 요가란 말로 표시할 수도 있다. ④제2장, 4장에 그 예가 많다. 마음의 통일로 얻은 힘 즉, 실지(悉地)를 얻은 사람의 현력(現力)을 자재력(自在力), 환력(幻力), 유가력(瑜伽力)이라고 하고도 한다. 제 11장, 18장에 그 예가 있다. ⑤ 그리고 마음 통일을 향하고 있는 사람, 혹은 그것을 이미 얻은 사람을 요기(yogi)라고 하는데 그것을 행자(行者) 혹은 유가행자(瑜伽行者)라고 번역한다. 제6장에 거기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⑥ 마음 통일이 된 사람을 특히 육타(yukta) 혹은 요가 육타(yoga-yukta)라 하고 그 현재 동사를 요감 유지(yogam yuj)라고 해서 ‘마음을 통일한다’ 혹은 ‘요가를 닦는다’ 하는 뜻으로 쓴다. 제 5장, 6장에 가장 많이 쓰인다. ⑦ 전체 18장 700절 중에 요가란 말이 쓰인 것이 157개나 되고 보면 이 책이 스스로를 요가 교전(yoga-sastra)이라고 한 것은 과연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 — 「세계성전전집」
그릇된 생각으로 인하여 사람은 비(非)를 시(是)로 알게 된다.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아르쥬나는 친족과 친족 아닌 사람을 차별하게 됐다. 이것이 쓸데없는 차별이란 것을 밝히기 위해 크리슈나는 몸(자아 아닌 것)과 아트만(자아)을 구별하고 몸은 항구하지 못하고 여럿인 데 대해 아트만은 항구하고 하나인 것을 알려준다. 힘씀은 사람이 다스려가는 속에 있지 거기서 나오는 결과에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것은 오직 그 결과에는 관심말고 제 행동의 방향 혹은 의무를 결정하는 데 있다. 집착 없는, 혹은 무사한 정신으로 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 간디
 
산자야 말하기를
 
1. 그와 같이 불쌍히 여김에 잡혀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낙망하는 그를 보고 마두 귀신을 죽여버리시는 이(크리슈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르쥬나의 ‘불쌍히 여김’은 거룩한 자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자기 아첨이다. 제 사람을 죽여야 하는 행동에 신경이 쭈그러들어서 하는 것뿐이다. 아르쥬나는 제가 해야 할 일에서 감상적인 자기 불쌍히 여김 때문에 꽁무니를 뺀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스승은 그를 책망한다. 아르쥬나는 카우라바스가 제 친족인 것을 전에도 벌써 알고 있었다. —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오, 아르쥬나야, 이 위급한 때에 네게 그러한 망령된 생각이 일어남은 웬일이냐? 이는 마음이 높으신 이들이 품지 않으셨던 바요, 하늘에 이르게 할 수도 없고, 더러운 이름을 가져올 뿐이니라.
마음이 높으신 이들 직역하면 아리안적이란 말이다. 인도 사람의 선조는 아리안 인종이라는데 그 아리안의 뜻은 용맹과 고상(高尙)과 강직(剛直)과 겸양(謙讓)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3. 푸리다 부인의 아들아, 사내답지 못함에 빠지지 말라. 이것은 네게 합당치 않다. 오, 대적을 억누르는 자야, 가엾은 비겁을 떨어버려라. 그리고 일어나라!
 
아르쥬나 말하기를
 
4. 오, 마두 귀신을 죽이시는 이여, 제가 어찌 싸움터에서 공경할 만한 비슈마와 드로나에게 화살을 겨눌 수 있사오리까?
 
5. 이들 존경할 스승들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빌어먹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네 이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제 스승입니다. 저는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 세상에서 피에 물든 복락을 누릴 뿐이옵니다.
피에 물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립 해방의 전쟁이란 것까지도 넣어서, 전쟁치고 피와 원망으로 물들지 않은 것이 있을까?
 
6. 또 우리가 그들을 정복하든 그들이 우리를 정복하든, 그 어느 것이 과연 나은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죽인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없는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들이 저기 진을 벌이고 서 있습니다.
 
7. 제 목숨은 슬픈 심정에 오금이 저리고, 제 마음은 어지러워 제 할 의무를 가려낼 수 없습니다. 당신께 묻자옵니다. 확실한 말씀으로 일러주옵소서. 어느 것이 합당하옵니까? 저는 당신의 제자이옵니다. 당신께로 피하여 돌아왔사오니 가르쳐주옵소서.
확실한 아르쥬나는 절망하고 격정하고 의심할 뿐 아니라 또 확실한 것을 간절히 찾고 있다.
스스로 무리인 줄 아는 것은 이성으로 향해 나가는 발걸음이다. 불완전을 의식하는 것은 혼이 살아 있는 증거이다. 살아 있는 한 상하거나 병신 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산 몸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의 목숨은 위기를 통하여서 보다 높은 지경으로 나갈 수 있다. 구도자(求道者)가 다 같이 경험하는 것은 빛의 문턱에 가서도 의혹과 어려운 문제의 엄습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혼도 그 속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둠을 자극해서 맞서 일어나게 한다. 아르쥬나는 친척 친구의 반항이니, 의심이니, 두려움이니, 애욕이니, 욕망이니 하는 안팎의 난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을 다 제단 위에 바쳐 지혜의 불로 태워버려야 한다. 어둠과의 싸움은 빛이 그 사람의 전체를 채울 때까지 계속된다. 아르쥬나는 불행의 습격을 받고 정의와 사악을 분별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제 스승, 자기와 같이 계시는 거룩한 이로부터 오는 빛과 인도를 자기의 자아 속에 찾는다. 사람은 제 하는 방법에만 내맡겨두어서는 아니된다. 제 세계가 온통 파멸된 담엔 사람은 다만 안으로 돌이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은혜 속에 밝혀주심을 찾는 수밖에 없다. 아르쥬나는 지식의 탐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찾는 것 아니다. 행동인으로 행동의 법칙, 자기의 다르마, 곤란 속에서 자기해야 할 것을 찾는다. “주여,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르쥬나와 같이 제 약함을 알고 제 무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열심으로 바라서 그것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8. 저는 제가 비록 이 땅 위에서 비길 수 없이 부요(富饒)한 왕국을 얻으며 천신(天神)들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얻는다 할지라도 제 오감을 다 말리어버리고야 말 이 고뇌를 무엇으로 몰아낼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산쟈야 말하기를
 
9. 구다케샤, 파란타파는 흐리쉬케샤, 고빈다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저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잠잠해버렸습니다.
파란타파(Parantapa) 대적을 억누르는 이, 아르쥬나,
고빈다(Govinda) 모든 것을 아시는 주(全知), 크리슈나.
아르쥬나는 스승의 말씀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기는 하면서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니 스승의 일은 더 어려워졌다. — 라다크리슈난
 
10. 오, 바라타시여, 흐리쉬케샤는 두 군대 사이에서 그와 같이 낙망하는 그를 보고 도리어 빙긋이 웃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웃으심 아르쥬나의 속을 뚫어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1.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말을 했다. 어진 이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는다.
‘지혜의 말’을, 라다크리슈난은 “카쉬미르(Kashimir) 번역에는 ‘너는 분별있는 사람처럼 말하지 못했다’로 되어 있다”고 했으며 간디는 “그러면서 너는 지혜의 빈 말을 했다”로 번역했다.
이 아래 30절까지의 말이 곧 삼캬(samkhya)의 이론이다.
 
12. 나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때가 없으며, 너도 저 왕들도, 또 이 앞으로도 우리가 있지 않게 될 때는 없을 것이다.
주석가 샹카라(Shankara)는, 여기에 복수를 쓴 것은 그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른 우리 육신을 두고 하는 것이요 보편적이며 하나인 대아(大我, Self)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고, 라마누자(Ramanuja)가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와 왕들을 구별해 말한 것은 각 개인의 혼은 불가멸(不可滅)의 것이므로 전우주와 한가지로 영원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절대적인 영(靈)의 영원성이 아니고 경험적인 자아(ego)의 전생(pre-existence)과 후생(post-existence)에 대해서다. 자아가 복수인 것은 경험적 우주 안의 사실이다. 각 개인은 처음의 비존재에서 완전존재로 올라가는 운동 곧 비유(非有, asat)에서 유(有, sat)로 올라가는 운동이다. 삼캬론(samkhya論)에서는 혼(soul)의 복수를 가정하는 데 반해 「기타」에서는 그것을 절충해서 우리는 하나인 크세트라즈나(ksetrajna) 안에 살며, 움직이며, 존재를 가진다고 본다. 브라만은 만물의 근본이지만 그 자신 하나의 물건은 아니다. 브라만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시간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자아는 시(始)도 종(終)도 없다. 혼들은 브라만과 같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브라만이다” “네가 곧 그것이다(That art thou)” 하는 말들 그대로다. 수소(Suso)의 말대로 하면 “모든 피조물은 거룩한 본질 속에 그 모형으로 영원 전부터 있었다. 그것들이 거룩한 이상과 일치하는 한 그것들은 창조 전부터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이다.” “인격 신 곧 창조주는 경험적인 우주와 한가지로 영원히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는 경험적인 존재의 총체다. 생명의 주는 자궁(子宮)들 속을 다니신다. 그는 나시는 일이 없으시지만 가지가지 모양으로 나신다.”
샹카라는 말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유일의 전생자(轉生者)시다(transmigrant). 파스칼이 그리스도는 세계 마지막 날까지 고난을 겪으실 것이라고 했던 말과 비교해보라. 그는 인류가 주는 모든 상처를 다 받으신다. 그는 창조된 모든 존재의 상황을 다 견디어보신다. 해방된 혼들은 현재의 생활에서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고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가서야 평화에 들어간다. 다만 인격적 지존자(至尊者)는 자유로 제한을 당하시는데 우리는 처를 없이 제한을 당하는 것뿐둴 존재의가 만일 프라크리티(prakriti) 연극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그 연극에 속한 것들이 존재무지는 개인 영혼은 괴롭힐를 다있지만 저 보편적인 영은 어떻게 못한다. 우주의 끝이 올 때까지 개인 영혼들은 서로 다른 질의 내용을 가지고 복수로 계속질의나갈 것이다. 그 다수성(多數性)을 이 우주에서 뗄 수는 없다. 해방된 혼은 참을 알고 그 안에 살 수 있는데 해방되지 못한 것들은 업(業)의 끈에 붙들려매여 생(生)에서 생으로 굴러 간다.” — 라다크리슈난
 
13. 이 몸의 주인은 여기서 어린이와 청년과 어른의 시대를 지내듯이, 그렇듯이 또 다른 몸을 가지는 날이 온다. 어진 이는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다.
 
14. 쿤티의 아들아, 감관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오, 바라타의 족속아.
감관(感官) 감각을 차지하는 기관, 관(官)은 차지한다는 뜻, 우리 몸에 그것이 다섯이 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그래서 보통 오감(五感) 혹 오관(五官)이라고 한다. 그것이 작용함으로써 감각이 생긴다. 빛, 소리, 냄새, 맛, 살갗에 닿는 느낌이다. 그러면 이에 따른 쾌, 불쾌의 감정이 생기고 그러면 마음이 갈라지고 평안이 깨진다.
이 서로 대립되는 것들은 모두 유한하고 일시적인 원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브라만에서 오는 즐거움은 보편적인 것이요, 자존(自存)하여서 모든 특수한 원인이나 대상에서 독립하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분체(不可分體, 떼어놓을 수 없는 몸)가 있어서 복잡한 우주와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이기적인 존재의 기쁨, 슬픔의 변화를 가능할 수 있도록 붙들어준다. 그 쾌락, 고통의 태도는 습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공을 반드시 기뻐해야 하고 실패를 반드시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없다.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꼭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있다. 기쁨, 슬픔을 당하는 것은 사아(私我) 곧 의식 때문에, 그것이 생의 습관과 몸에 달려 있으면서 거기 붙어서 지식과 행동을 하고 있는 이상은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한번 자유를 얻어 거기 대한 관심을 내버리고 신비의 가라앉음 밑에 빠져들게 되면, 즉 그 의식이 밝아짐을 얻으면 그런 것들은 오고가는 것이지 그 자신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그 다음에 어떤 것이 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 라다크리슈난
 
15.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사람아, 그런 것들을 견디어내고 쾌락과 고통을 꼭같이 보는 사람, 그런 어진 이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이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음과는 다르다. 몸을 가진 자는 다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직도 슬픔(悲歎) 아픔(哀痛)의 지배를 받고, 물질적인 사건의 시달림을 받으며, 마땅히 뚫고 나가야 하는 의무의 길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가 아비쟈(avidya) 곧 무지에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 라다크리슈난
 
16. 비유(非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이 유(有) 아닐 수 없다. 이 둘의 궁극(窮極)은 참다움을 본 이에 의해서만 보일 수 있다.
원어(原語)를 모르고 다른 말로 옮겨진 것들만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번역할 수 없다. 영어로 하면 이그지스턴스(existence)와 빙(being)을 어떤 뜻으로 쓰느냐 하는 문제요 한문으로 하면 유(有)와 존재(存在)의 문제다.
참고로 간디 번역에 있는 마하데브 데자이의 보주(補註)를 여기 인용한다.
이것은 모든 것의 불변의 기초가 되는 것(being)과 사라지기 쉬운 것(becoming)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H.P. Blavatsky)는 그 빙(being)이라는 말 자체부터 잊고 있었으며 장차 있을 그것을 표시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대신 ‘비니스’ (be-ness)라 하면 어떠냐고 하기까지 했다. 모든 비커밍, 모든 이그지스턴스(out-being)는 항구불변으로 있는 것에서부터 솟아나온다.
한문의 유(有)와 재 (在)는 비교하면 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유부형재(有父兄在)라 하면 부형이 있어서 있다. 첨의 유는 좀더 근본적이고 재는 좀더 현실적 구체적이다. 유부형이라 하면 때와 곳의 제한 없이 내게 부형 되는 이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재라 하면 여기 집에 지금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은 서로 바뀌어 쓰이기도 한다. 우리 말로는 다 ‘있음’이니 참이라는 말이나 붙여서 구별할까? 그때그때의 어감 문제다. 그런 때는 실재라 하면 그만이었는데 그것이 꼭 맞는 것 같지 않아 실존이라 해봤지만 존(存)과 재(在)에는 그 구별이 될 아무 근거도 없다. 이그지스트(exist)가 더 깊은 것 일까, 빙(being)이 더 깊은 것일까? 그러나 그 절 전체의 의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보면 짐작할 만하다. 참과 참 아닌 것에 대해서.
샹카라는 사실적(real, sat)인 것은 그것에 대해 우리 의식이 잘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고 비사실적(unreal, asat)인 것은 거기 대해 우리 의식이 잘못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물체에 대한 우리 의식은 다르지만 그 존재에 대한 의식은 다를 수 없다. 비사실적인 것 즉 이 세계의 지나가는 모습들이 언제나 분명한 실재의 모습을 가리고 있다. 라마누쟈는 비사실적인 것은 몸이고 사실적인 것은 영혼이라고 했다. — 라다크리슈난
 
17. 너는 알라, 이 모든 것 속에 속속들이 들어 있는 것(遍滿)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물건이다. 그 변할 수 없는 것을 아무도 꺼버릴 수 없을 것이다.
편만(遍滿) 속속들이 들어 있다(pervade). 삼투(渗透)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속속들이라고 했다. 마하데브 데자이(stretched, spread out)는「이사야」 42장 5절의 “하늘을 창조하시며 펴시고” 하는 말로 자기 번역을 뒷받침했다.
 
18. 영원 불멸이요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이가 몸을 쓰고 와 계시는 이 몸들은 끝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족속아, 싸워라.
영원불멸 이 말을 쓴 것은 변경시킬 수도 멸망시킬 수도 없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요, 헤아릴 수 없다 한 것은 또 설명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도 좋다. 그 어떤 두 가지 뜻이 다 맞는다. 우리 참 자아는 자명한 것이어서 증거도 증명도 소용이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자아는 모든 증명과 측량의 기본이 된다.
 
19. 이것을 죽이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이것을 죽임을 당하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다 같이 참을 모르는 이다. 이는 죽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느니라.
이것 아트만, 자아, 현신자(現身者), 몸의 주인, 이것은 삼캬에서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를 구별해서 하는 말이다.
 
20. 그는 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으며, 일찌기 나타난 일이 없으므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불생(不生)이요 상주(常住)요 항구(恒久)요 태극(太極)이다. 몸이 죽임을 당하는 때에도 그는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다.
 
21. 프리다의 아들아, 사람이 만일 이것은 무너뜨릴 수도 없고, 영원이요 불생이요 불멸인 줄을 안다면, 누구를 능히 죽이며 누구를 능히 죽일 수 있게 하겠느냐?
이것을 안다면 어진 이는 천하에 적대하는 사람이 없다(仁者無敵於天下),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할 때의 인(仁)은 이것 아닐까?
 
22. 사람이 마치 낡은 옷을 버리고 새것을 입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이 몸으로 사시는 혼도 낡아버린 몸들을 버리고 다른 새것으로 옮겨가신다.
옮겨간다 영원한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일이 없지만 몸을 가지고 사는 혼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그럴 때마다 출생하고, 그 과거의 진화와 미래의 필요에 응하여서 자연 속의 물질로부터 마음과 숨과 몸을 꺼내어 자신에 모아가진다. 그 영적인 것(psychic)은 비즈나나(vijnana)요, 그것이 몸(anna),숨(prana), 마음(manas)의 세 겹으로 나타남(三重顯現)을 지지해준다. 이 거친 육신이 떨어져나간 때에도 생기적(生氣的, vital), 또는 심정적(心情的, mantal) 껍질은 아직도 영혼의 탈 물건으로 남아 있다. 다시 태어남은 자연의 한 법칙이다. 생의 가지가지의 형식 사이에는 한 객관적인 관련이 있다.「카다 우파니샤드」(Katha Up.)에는 “마치 곡식알같이 이 유한한 것 (mortal)은 익는 것이고, 또 곡식알과 한가지로 그것은 난다” 했다. 몸으로 삶은 영혼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몸을 죽이는 것이 어찌 옳을 수 있을까? 이 구체적인 존재의 세계는 한 의미를 가진다. — 라다크리슈난
 
23. 칼이 그것을 찍을 수 없고, 불이 그것을 태울 수 없고, 물도 그것을 적실 수 없으며,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24. 찍을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도 없으며 말릴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영원이요 두루 차 있음(遍滿)이요 불변이요 부동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이다.
 
25. 그는 나타나 뵈지 않는 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요 변함이 없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이인 줄 알진대 너는 근심하지 말라.
여기 말한 것은 온전히 삼캬에서 말하는 푸루샤지「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만은 아니다, 푸루샤는 모든 형상과 생각과 변화를 뛰어넘은 지경이다. 마음이나 숨이나 몸은 달라질 수 있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크리토(Creto)가 “소크라테스여,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을 장사하랍니까? 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대답하기를 ‘어떤 방식이거나 너희 하고 싶은 대로다. 그러나 너희는 우선 나를, 참 나를 붙잡아야지. 걱정 말라, 내 사랑하는 크리토야, 그리고 너희는 내 몸만을 장사한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이거나 보통 하는 대로 너희 생각에 좋은 대로 하여라’” 했다. — 라다크리슈난
 
26. 네가 설혹 그것이 끊임없이 나고 끊임없이 죽는다 생각 하더라도 너는 걱정해서는 안된다, 이 억센 팔 가진 자야.
 
27. 난 자는 반드시 죽는 것이요, 죽은 자는 반드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는 근심하지 말라.
「리어 왕」안에서 에드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견딜 줄을 알아야 한다.
세상올 때에 그러했던 것같이, 갈 때에도 또한.
(Men must endure. Their going hence, even as their coming here.)
 
비구니 포타카라(Potacara)가 자식 잃은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말.
 
울지 마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요,
가고 싶어 가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라, 네 아들은 이 땅 위에 살려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이 짤막한 생을 살려고,
한길로 왔다가 또 다른 길로 가는 것을……
이 생이 그러하면 저 생도 그러하다. 울 것이 무엇이냐?
(Weep not, for such is here the life of man
Unasked he came, unbidden went he hence
Lo! ask thyself again whence came thy son
To bide on earth This little breathing space
By one way come and by another gone……
So hither and so hence-why should ye weep?)
 
나는 들으니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뭍으로 다녀도 호랑이나 물소를 만나는 일이 없고, 군(軍)에 들어도 칼날이나 갑옷을 피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 물소도 그 뿔을 내댈 곳이 없고 호랑이도 그 발톱을 박을 데가 없으며 칼도 그 날을 들이밀 데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 그러하냐, 그 죽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兕虎 入軍不避兵甲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夫何故 以其無死地) ᅳ노자
지극한 속이 있는 이는 불로 뜨겁게 할 수가 없고 물에 빠지게 할 수 없으며 춥고 더운 것이 해할 수도 없고 날짐승 들짐승도 상처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弗能賊 弗謂其薄之也 言察乎安危寧於禍福 謹於去就 莫之能害也) ᅳ 장자
 
28. 모든 산 것의 모양이 그 처음에는 나타나 뵈지 않고, 그 중간에는 보이고, 그 끝에 가서는 다시 뵈지 않는다. 오, 바라타의 아들아, 거기 무엇이 한탄할 것이 있느냐?
 
29. 한 사람은 그것을 보고 놀라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놀랍다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듣고 놀라와한다. 그러나 듣고 나서도 아무도 그것을 참으로 안 자는 없다.
자아의 진리는 만인이 누구나 다 찾을 수 있지만 거기 도달하는 것은 극히 소수이다. 즐겨서 어떤 대가라도 내며 자기단련을 해서 흔들림과 애착이 없는 지경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이지만 대개는 그것을 찾으려는 열심이 없고, 그 열심은 가지면서도 의혹과 우유부단 때문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고, 또 의심치 않아도 난관에 부딪쳐 나가버린다.⎯라다크리슈난
 
30. 모든 몸 속에 들어 계시는 그이는 영원하고 상함을 입는 일이 없으신 이다. 그러므로 바라타의 아들아, 너는 산 물건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이 아니니라.
그와 같이 해서 크리슈나는 순전히 이성에 터잡는 강론으로 육신은 연약한 것이지만 자아 곧 아트만은 영원한 것으로, 설혹 어떤 사정으로 육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수가 있더라도 카우라바스들은 내 친척이기 때문에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망상이란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 다음은 아르쥬나의 크샤트리야(Kshatriya)족으로서 할 의무를 사명한다. ⎯간디
 
31. 또한 너의 마땅히 할 의무를 생각해서도 네가 겁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크샤트리야족으로서는 의무인 싸움을 하는 것에서 더한 선행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샤트리야 왕족이라 번역한다. 네 계급 중의 하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며, 필요에 의해서는 전쟁을 해서라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
 
32. 오, 파르다(아르쥬나)야, 그러한 싸움이 구함 없이 오는 것을 만난 크샤트리야는 행복하다. 하늘 가는 문이 열렸다.
하늘 가는 문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오, 사람 중에 으뜸인 자야, 태양의 성좌를 뚫고 브라만의 지경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요가에 정통한 출가승이요 또 하나는 싸움을 하다 쓰러지는 무사다.”
 
33. 그러나 네가 만일 이 정당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너는 네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는 것이요 죄를 얻게 될 것이다.
 
34.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은 언제나 네 불명예를 말할 것인데, 지위 있는 사람에게 불명예는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다.
 
35. 큰 장수들은 네가 겁이 나서 싸움을 피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니 그러면 너는 전에 존경을 받던 모든 이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다.
 
36. 네 원수들은 가지가지의 더러운 말로 너를 평하며 너를 능력없는 자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아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37. 네가 죽으면 천당을 얻을 것이요 네가 이기면 이 땅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일어나라, 쿤티의 아들아, 싸우기를 결심하여라.
크리슈나는 먼저 가장 높은 진리, 곧 아트만은 영원한 불멸체라는 것과 육신은 지나가버리는 것임을 일러주고, 다음 아르쥬나에게 원하지 않고 닥쳐오는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크샤트리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는 그 가장 높은 진리와 의무의 실행은 또 저절로 좋은 것이 따라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제 그 다음 「기타」의 중심적인 교훈을 비치기 시작한다. —간디
형이상적 진리를 보거나 사회적 의무를 보거나 우리의 길은 분명하다. 보다 높은 지경은 우리의 의무를 바른 정신으로 다함으로써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다음 절에서 크리슈나는 그 정신을 말한다. — 라다크리슈난
 
38. 쾌락 고통을, 이득 손실을, 승리 패배를 하나로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어라. 그리하면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절들에서 크리슈나는 불명예와 하늘의 상과 땅의 통치를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세상적인 고려를 하라고 그와 같이 가르치고 나서는 평등관(平等觀)을 가지고 전쟁을 하라고 명령한다. 달라지기를 바라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지지 말고,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감정의 희생이 되지 말고, 우리의 놓인 상황에 의해서 우리게 지워진 일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우리가 영원한 것에 신앙을 얻고, 그 실재를 체험하게 될 때. 이 세상의 괴로움은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된다. 루터는 말했다. “저들이 내 생명과 재물과 명예와 자녀와 아내를 다 뺏아간들,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모든 것은 다 사라질 것이나됬다.뀠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제 참 목적이 무엇임을 알고 거기다가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사람, 그는 위대한 나됬다다. 비록 그가 다른 모든 것을 빼앗겨버리고 헐벗고 주린 몸으로 홀로 거리를 걸을지라도, 비록 .뀠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눈동자 속에서 이해해주는 빛을 찾아볼 수 있는 눈이 이려 없을지라도,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제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속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 라다크리슈난
맹자가 이르기를, “모든 몬(物)이 내게 갖추어져 있으니 스스로 돌이켜서 정성되면 즐거움이 이에서 더할 것이 없다”(萬物皆備於我 反身而誠 樂莫大焉)고했다.
 
39. 이것은 삼캬에 의해서 너에게 주어진 깨달음이다. 이제 요가에 의한 그것을 들어보라. 오, 파르다야. 네가 만일 이것으로 네 마음을 닦는다면 너는 카르마의 얽맴을 벗어버릴 것이다.
삼캬(samkhya) 한문으로는 승법(僧法), 혹은 수론(數論), 이론. 간디는 여기서는 지식(knowledge)이라 번역했다.
요가(yoga) 에브리맨스 문고판에는 규칙(rule)이라 번역했고 세계성전전집에는 실수(實修)라 했다.
깨달음 지혜(wisdom), 이해(understand).
마음을 닦는다면 간디는 ‘마음가짐에 의지함’(resorting to this sttitde)으로, 라다크리슈난은 ‘지성으로 받아들임’(intelligence accepts it)으로, 일본어역에는 ‘이 각오로 마음을 통일하면’으로 돼 있다.
카르마 업(業, work, action)「노자」「장자」에서 하는 말로 한다면 유위 (有爲)에 해당할 것이다.
바네트(L. D. Barnett)는 말하기를「바가바드기타」는 개인을 초인간적인 능력의 외로운 나라 속에 두어 고립시키자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사뭇 거룩한 사랑의 가슴속으로 이끌어 들이자는 것이다. 대체로 말해서, 그리 잘됐다고는 할 수 없으나, 두 가지의 요가 혹은 규칙(rule)을 구별해 말한다. 즉 지식의 요가(jnana yoga)와 실수의 요가(Karma yoga)다.
아트만이 불멸체임을 아는 지식은 한탄이 쓸데없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행동은 지식이 그것을 풀지 못하는 한 얽어매고 있다. 아르쥬나는 취하라고 가르침을 받은 그 무서운 행동의 달림 길에서 어떻게 하면 해방이 될 수 있을까? 이제 행동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과 자유하게 하는 지식에 이르는 두 가지를 다 하게 하는 열쇠를 아르쥬나 앞에 보여준다. 그 것이 요가다. 무집착(無執着) 혹은 무사(無私)의 태도(attitude)다. 요가는 태도라는 뜻으로도 행동이라는 뜻으로도 씌어있다. — 마하데브 데자이
「기타」에서 삼캬는 보통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철학의 체계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요가도 파탄잘리 요가(patanzali-yoga)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삼캬의 설명은 분명한 푸루샤(自我)와 프라크리티 (非我)의 이 원론인데「기타」에서는 만유의 주인 ‘지극히 높으신 자아’의 실재를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고 있다. 삼캬는 불변하는 ‘하나이신 이’ 에 대한 직관을 지적으로 설명해준다. 그것은 지식의 요가이다. 행동의 요가는 카르마 요가이다. 지금까지 말해온 지식은 말로 하거나 학문적으로 토론 할 것이 아니다. 내적인 체험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기타」에서는 삼캬는 지식과 욕망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고, 요가는 실행을 강조하고 있다. 자아와 몸과는 서로 다른 것이고, 자아는 이 세계에서 되는 일로는 불가 멸이요 부동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 스승은 부디 요가(buddhi- yoga) 혹은 부디의 통일, 즉 이해의 통일을 설명해준다. 부디(buddhi)는 단순히 개념을 만들어내는 능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 인지와 분별의 작용도 한다. 이해 혹은 부디는 달관, 불역(不易), 지관(止觀, samata)에까지 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manas)은 감관에 연결될 것이 아니라 마음보다는 높은 부디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부디와 연합돼야 한다(buddhi- yuka).「기타」의 시대에 형성되고 있었던 삼캬론의 영향이 여기 있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 의한다면 푸루샤는 비활동적이요 그러므로 얽매임이나 해방됨이 실지로 거기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24우주 원리의 하나인 부디에서 오는 것이다. 프라크리티에서는 물질의 5요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공(空)과 물질의 5 근(根)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과 부디 혹은 지(知)와 의(意)의 분별 원리인 마하트와 아함카라 혹은 자기 감각, 마음과 그 열 개의 감각 능력, 다섯 지식, 다섯 행동이 차례차례로 나온다. 해방 은 부디가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를 분별하게 될 때에 이루어진다.
이 견해가「기타」유신론 속에 받아들여져 있다. 부디는 차부고, 몸이 차고, 감관이 그것을 이끄는 말인데, 그 말을 어거하는 것이 마음(manas)이다. 자아(self)는 부디 위에 있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중인이다.「카다 우파니샤드」에는 부디가 차부로서 마음을 통해 감관을 통제하여서 자아를 알 수 있게 한다. 부디가 만일 자아의 의식에 의하여 비쳐줌을 입어서 그것을 제 일생의 빛과 주가 되게 하면 그 인도가 우주 목적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만일 아트만(atman)의 빛이 부디 위에 적당하게 반사된다면, 다시 말해서, 부디가 만일 모두 어둡게 하는 경향을 깨끗이 벗어버린다면, 그 빛이 일그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부디는 영과 연합이 될 것이다. 사아(私我)의 생각과 분리가 조화의 비전에 의해 사라져버리고 개개가 전체요, 전체가 개개이게 될 것이다. 삼캬와 요가는「기타」안에서는 서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같은 목적을 가지면서 서로 다른 방법을 가질 뿐이다. — 라다크리슈난
 
40. 여기는 힘써서 헛된 법이 없고 잘못에 빠짐도 없다. 이 법(다르마)을 조금 지킴으로써만도 너를 큰 두려움에서 건져줄 것이다.
 
41. 쿠루의 아들아, 여기서는 결정적인 태도가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결정적이 되지 못하는 생각이란 가지가 많고 끝이 없는 법이다.
여기서 이 요가에서는, 혹은 이 일에서는. 참고로, 세계성전전집에서는 ‘현세에서는’이라고 했다.
인생의 실현은 거룩한 계명이 지시해주는 목적에 대해 자기를 온전히 받침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무한한 가능성들을 무턱대고 추구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점에만 집중하는 것은 수양해서만 가능하다. 이리저리 헤매는 것은 자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지만, 거기서 벗어나서 자유로와지려면 그것은 자연 혹은 성, 인종 혹은 민족적 신비주의로 될 것이 아니라, 참(reality)에 대한 순수한 체험에 의해서만 될 수 있다. 그런 체험을 기초로 하는 전심(專心)이야말로 최고의 덕이요, 그것은 결코 광신으로 빗나가는 일이 없다. — 라다크리슈난
중용(中庸)의 중(中)이 곧 이것일 것이요, 공자의 오도(吾道) 일이관지(一以貫之)도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저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요, 하나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라, 그 중(中)이 어디냐, 그 일(一)이 뭐냐 가 문제다. 그것은 어디도 아니요 무엇도 아닌 데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노자 장자는 허무, 적막, 염담(恬淡), 무위를 강조했고, 불교에서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을 말한다. 유대교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만을 섬기라고 하면서 자기는 이름이 없다 했고,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42,43. 프리다의 아들아, 아지 못하는 것들은「베다」만을 좋아하면서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했고, 애욕을 자기로 삼고 천당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그들이 가지가지의 꽃다운 말을 하며, 향락과 권력을 위해 가지가지의 특별한 의식을 보여 주었으나, 그 말은 결국 행동의 결과에는 전생(轉生)에 이를 뿐이요,
 
44. 향락과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말에 미혹되어 시비 판단의 지혜를 잃어버리고 확고한 결정이 없기 때문에, 최고의 통일지경에 이를 수가 없느니라.
스승은 여기서 진정한 행동과 의식적인 경건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다. 「베다」의 제사의 목적은 물질적인 갚아주심을 얻는데 있지만「기타」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행동을 다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생활 전체를 제물로 삼아서 진정으로 바치라고 한다. ᅳ라다크리슈난
「베다」의식과「기타」가 가리키는 요가를 대립시켜서 하는 말이다.「베다」의식은 천당과 거기 이르는 공덕을 얻기 위해 수많은 예식, 의식을 명한다. 그런 것은「베다」의 짬(眞髓)에서는 먼 것이요 그 공덕은 오래 가지도 못하는 것이므로 쓸데없다. 一간디
「문다카 우파니샤드」(Mundaka Up.)에는 이런 말이 있다. “희생을 바치는 의식만이 효력이 있고 그밖의 것은 아무것도 효력이 없다는 이들 어리석은 자들은 천당에서 행복을 다 누리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베다」시대의 아리안들은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같이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인류의 청년시대를 나타낸다. 그들의 생활은 아직도 가지가지의 미혹시키는 꿈으로 더러워지지 않은, 청신하고 매력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성년(成年)의 균형 잡힌 지혜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기타」의 저자는 그 주의를「베다」의 카르마칸다(karmakanda)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베다」의 교훈의 전부는 아니다.「베다」는 갚아주심 (그것이 일시적인 천당의 것이었거나 또는 새 몸을 타가지고 나는 생활의 것이었거나간에)을 바라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는데 부디 요가 는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어준다. — 라다크리슈난
 
45.「베다」는 삼성을 그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아르쥬나야, 너는 삼성을 초월하라. (대립하는 두 반대의) 쌍에서 빠져 나오라. 영원한 참에 굳게 서라. 얻음 지킴을 생각지 말라. 자 아를 가져 라.
삼성(三性) 선성(善性, sattva) 동성(動性, rajas), 암성 (暗性, tammas).
성(性) 구나(gunas).
자아 보통 우리들의 의식이 나다 하는 것은 소아(小我) 혹은 거짓 나(self)로 쓰고, 거기 대해 참 깨달음에 의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 나 혹은 대아(大我, Self)로 쓴다.
자아 가짐 아트마반(atmavan).
자아를 가짐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 아파스탐바
출생도 사멸도 없는 영, 곧 불멸의 영을 깨닫는 일, 우리가 알 수 없는 ‘그이’ 를 알게 되는 일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다. — 「우파니샤드」
46. 홍수가 났을 때에 우물이 사람에게 소용이 되는이만큼, 깨달은 브라만에게 모든「베다」가 소용되는 것은 바로 그만큼 하다.
브라만(braman)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브라만은 깨달은 사람, 혹은 자아의 실현을 한 사람.
이 절에 대해서는 주석자 사이에 논쟁이 많다. 어떤 이는 깨달은 사람 에개는「베다」는 조금도 소용이 없다 하고, 어떤 이는 홍수가 났다 하더라노 우물이 어떤 한정된 소용이 있을 수 있듯이「베다」도 깨달은 자에게 소용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베다의 의식을「베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존재의 필요는 없어진다. — 마하데브 데자이
강에서 물을 길어 쓰는 사람은 우물을 그리 가깝게 알지 않듯이 어진 이는 의식 행함에 아무런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의식을 지킴이 아무 가치가 없다. — 「마하바라타」
 
47.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말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 유명한 절 안에는 무사(無私) 원리의 짬이 들어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일을 할 때, 가령 밭을 갈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를 때에, 명예나 이득이나 그런 딴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무사에서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그 선한 뜻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성공실패는 그 개인만이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요소에도 달려 있다. 기요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말했다. “나는 싸웠다. 그거면 다다. 승리는 운명의 손에 달렸다.”(I have fought, that is much, victory is in the hands of fate)―라다크리슈난
제갈양(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제 몸을 굽혀 다 지치고 부스러질 때까지 하다가 죽은 담에 말 뿐이지, 지고 이기고, 날카롭고 무디고(利害) 하는 데 이르러서는 제 지혜를 가지고 능히 미리 알 바가 아닙니다.” (臣 糊躬盡疼 死而後己 至於成敗利純 非臣之明 所能逆親也)
이것을 목적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또 해서도 아니된다. 기독 신자라면 곧 그런 반대를 할 것이다. 최고의 목적은 인간 앞에 벌써 놓여 있다. 자아의 실현, 또는 자유다. 모든 행동의 결과를 생각지 말라는 것도 이 목적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뜻이 톨스토이의 신앙 고백 속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본다. “결과 포기의 신앙은……우리는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럴 권리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해서는 아니된다. 그는 자기가 누리고 있는 평안 때문에 언제나 빚을 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가 없다. 이 봉사나 자기 생활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도 다 같이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결과를 바라서는 아니되기 때문에 결과를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결과를 포기하기 때문의 궁극의 결과는 더욱더 확실해진다.”
코란은 같은 생각을 다시금 다시금 강조한다. — 마하데브 데자이
우리 행동 뒤에 사욕적(私欲的)인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행동의 결과 생각을 떠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내버린다는 말도 아니다. 떠난다는 것은 미리 생각한 결과가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미리 생각한 결과가 적당한시기에 가면 틀림없이 온다는 신앙이 확실하다는 증거다. ᅳ간디
 
48. 부의 정복자야, 너는 집착을 내버리고, 요가에 굳게 머물러 서서 되고 안되고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요가라 하느니라.
부(富)의 정복자 아르쥬나를 가리킴.
요가에 굳게 머물러(yogasthah) 굳게 속이 가라앉은 마음.
평등으로 보는 마음(samatvam) 속에 균형잡힌 마음.
평등으로 보는 마음, 이것은 자기극복이다. 노여움, 고민, 자랑, 야심 을 극복한 것이다. 속의 법칙의 힘에 의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선다. — 라다크리슈난
 
49. 부의 정복자야, 단순한 행동은 이성의 요가보다는 훨씬 떨어진 지경이다. 이성 속으로 피하라. 가엾은 것은 결과를 동기로 삼는 자들이니라.
단순한 행동 자기를 위한 행동, 결과만 보는 행동.
이성(理性)의 요가 부디 요가.
이성 속으로 부디 요가를 닦음으로써.
 
50. 이성의 요가를 닦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능히 선행과 악행을 다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어나 요가에 힘을 쓰라. 요가는 행동의 훈련이다.
 
51. 어진 이는 이성에 의한 요가를 닦음으로써 행동에서 오는 결과를 버리고 생의 얽맴에서 벗어나 모든 고통이 없는 지경고 쟝른다.
모든 고통이 없는 지경 해탈, 혹은 모크샤.
 
52. 네 이성이 미망에서 오는 혼란을 넘어설 때 너는 이미 들은 것과 장차들을 것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관계하지 않게 될 것이다.
 
53. 네 이성이, 비록 많은 들음으로 인해 미혹되면서도, 부동 불변으로 사마디에 머무른다면, 그때 너는 요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들음 「베다」로 해석하는 이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도 있다.
사마디(samadhi) 한문으로는 삼매(三昧),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장 높은 종류의 의식을 갖는 지경이다.
정신이 통일되는 그 대상은 거룩한 자아(Dvine Self)다. 부디 요가는「베 다」의식을 뛰어넘어서 우리 의무를 행동의 결과에 대한 아무런 집착도 없이 할 수 있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방법이다. 행동 아니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등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행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 어떤 정신으로 행동 하느냐가 문제다. — 라다크리슈난
노자의 “함 없는 행위이며, 말씀 아닌 가르침”(無爲之行不言之敎)이라든가 예수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도, 행동 아니 하고 말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하되 ‘나’라는 의식을 초월해서, 도(道) 자체, 성령 자체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54. 케샤바시여, 이 튼튼한 지혜의 사람, 삼매에 머무는 사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생각이 결정된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며, 어떻게 앉으며 어떻게 걷습니까?
케샤바(Keshava) 크리슈나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