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인류세.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인류세. Show all posts

2020/02/19

한 윤정 –아름다움과 생태문명의 창조 -[1-14]



한 윤정 – 다른백년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14] 아름다움과 생태문명의 창조한 윤정 2020.02.17 0 COMMENTS


우리가 생태문명의 비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반드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가치도 그 비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삶의 중심에 있는 가치이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의 핵심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자기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관계적 관점에서 세계를 설명했으며 이런 관계들이 “아름다움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13]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한 윤정 2020.02.10 0 COMMENTS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강도”(intensity)라는 용어가 맡는 역할에 가장 상응하는 용어는 “아름다움의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적 성질이나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경험이 갖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 주요성분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비록 감각이 감정의 깊이에 명백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 화이트헤드는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12]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한 윤정 2020.02.03 0 COMMENTS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11]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한 윤정 2020.01.27 0 COMMENTS


문제는 경제다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것은 정보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문제이다.” 오래 전 책을 읽다가 메모해둔 구절이다. 작가는 문학작품에 대해서 한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해당하는 말이고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환경, 생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와 문화적 인식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미국 예일대의 문화인지 프로젝트) 결과에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10]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한 윤정 2020.01.20 0 COMMENTS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 1972년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이후, 경제성장 위주로 달려오던 현대 문명이 지속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이 더는 인류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면 인류가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의 보고서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9] 생태교육을 위한 패러다임 재구축한 윤정 2020.01.13 0 COMMENTS


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교육의 시급성 최근 수년간 급격한 기후변화와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류는 불안한 마음으로 디스토피아가 다가옴을 지켜보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과학기술 낙관주의에 빠져있다. 현 인류가 처한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극적인 처방은 과연 있는 것인가? 지구 환경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적 노력과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조직체들의 활동으로만 충분한 것인가?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8] ‘자연’과 ‘과학’의 관계를 재정의하기한 윤정 2020.01.06 0 COMMENTS


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READ MORE


기획칼럼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7]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한 윤정 2019.12.23 0 COMMENTS


대학의 탄생과 변화 대학은 1000년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기술도 거의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지상에서의 존재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라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대학도 중세에서 현대, 후현대로의 역사적 변천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현재 세계의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6]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한 윤정 2019.12.09 0 COMMENTS


근대적 사고와 화이트헤드 철학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은 내 삶의 심장과 같은 주제이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만나면서 인생의 무의미함에서 탈출했다. 그의 철학은 근대적 사고를 무조건 규범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내 경험상 근대적 사고는 늘 니힐리즘으로 귀착된다. 무엇이 옳은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통찰이었다. 나는 화이트헤드를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5] 후현대화와 두 번째 계몽한 윤정 2019.12.02 0 COMMENTS


중국이 현대화의 곤경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내총생산(GDP)의 빠른 성장이 보여주듯 중국 현대화의 성과는 탁월했으나 그 대가 역시 매우 혹독했다. 그 대가는 환경문제, 점점 커지는 빈부격차,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상실 등이다. 중국 현대화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누가 이런 곤경을 책임져야 할까? 이런 곤경에서 중국이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한 윤정 2019.11.25 0 COMMENTS


현재 인류는 자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구헌장(Earth Charter)을 여는 글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서 있다. 지금은 인류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지구와 호혜적 균형을 이루면서 평화, 아름다움, 창조력, 물질적 만족, 그리고 영적 풍요라는 오랫동안 부정돼온 인간의 꿈을 이루는 것은 우리 인간의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3]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한 윤정 2019.11.18 1 COMMENT


생태계 파괴는 산업문명의 후유증이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산업문명은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된 문명 형태가 아니다. 16세기 유럽에서 근대적 사고방식이 시작된 것을 기점으로, 이후 과학과 기계기술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확산된 삶의 방식이다. 산업문명은 인류에게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산업문명에도 부작용이 생겼다. 첫째는 구조화된 빈부차이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가능해진 물질적 풍요가 모든 사람에게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2] 생태문명이란 무엇인가한 윤정 2019.11.11 0 COMMENTS


문명은 타인,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란 맥락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대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문명은 농업부터 경제, 거버넌스, 교육, 종교, 교통, 의학, 건축, 예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타인, 그리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이 필요한) 현재 우리의 문명은 ‘현대문명’ 혹은 줄여서 ‘현대성’으로 불린다.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READ MORE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열린광장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의 장을 열면서한 윤정 2019.11.04 0 COMMENTS


편집자의 글: 올해도 예외 없이 기후변화에 따른 온갖 재난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모두를 열거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현상들이 해가 갈수록 정도를 더하고 있고, 연전(年前)부터 국제회의마다 기후변화를 넘어서 생태위기와 인류세의 멸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무감하고 무책임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에너지 과소비의 산업구조, 일인당 폐비닐 배출 세계 1위 국가, 탄소배출량을 감소하기는커녕 화석연료발전소 […]READ MORE

2020/01/22

1903 조성환 삼일절 200주년을 준비하며 The Future is Gaebyeok!


조성환/이병한의 [개벽파 선언]
종료된 기획칼럼
삼일절 200주년을 준비하며조성환 2019.03.08 0 COMMENTS


The Future is Gaebyeok!

싱가포르에서 접하셨다는 “The Future is Asian”이라는 책 제목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식대로 바꾸면 “The Future is Gaebyeok!”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벽파를 자처했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개화학이 아닌 개벽학에서 찾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학술대회를 디자인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화마당을 만들어 간다면 지금처럼 생기 없고 늘어지는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학술대회 자체를 개벽해 나가면 되니까요.토착적 근대화 학술대회

그래서 오는 8월 15일-16일에 열릴 한일공동학술대회 「지구적 근대와 개벽운동」은 오랫동안 실천 현장에 계셨던 분들도 모실 예정입니다. 협동조합운동의 이남곡 선생님, 공동체운동의 유상용 선생님, 한살림운동의 김용우 선생님 등이 참여하시기로 했습니다. 이번 학술행사는 2017년 가을부터 원광대에서 시작된 ‘자생적 근대와 개벽사상’ 학술대회의 시리즈로, 벌써 4회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대중의 관심과 논의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고요.

이번에는 지난 2년간의 축적을 바탕으로 익산을 벗어나서 서울에서 판을 벌일 생각입니다. 일본에서는 기타지마 기신, 오구라 기조, 가타오카 류 교수님을 비롯하여 총 다섯 분의 발표자를 모실 예정인데, 모두 한국사상과 개벽사상에 조예가 깊은 ‘지한파’ 학자들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경희대 김상준 교수님의 「후기근대에 다시 보는 동학혁명과 개벽사상」을 비롯하여, 『소태산평전』의 저자 김형수 작가님의 「신동엽이 노래한 자생적 근대」, 『정지용의 시와 주체의식』의 저자 김영미 선생님의 「정지용의 자생적 근대문학」, 그리고 선생님의 「중국의 ‘개벽파’, 량수밍의 향촌건설운동」 등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습니다.하자센터 삼일절 행사은빛순례 매듭마당

이번 기획은 작년 학술대회가 끝난 직후부터 6개월 동안 준비하였는데, 발표자들이 하나같이 ‘개벽’에 공감하고 계시는 분들이라 한층 더 심화된 학술마당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제 개인적인 바람인데, 내년 학술대회 때에는 개벽포럼에 연사로 오시는 은빛순례단의 도법스님이나 ‘다른 백년’의 이래경 이사장님, 하자센터의 공공하는 청년들도 발표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론과 실천, 대학과 현장의 소통과 연대를 쌓아나가면 개벽학의 얼개가 조금씩 잡혀지겠지요.

그래서 하노이의 북미회담 결과에는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총애를 받으나 욕됨을 당하나 놀란듯이 하라”(寵辱若驚)고 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묵묵히 가면 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 밝히신 향후의 계획에 크게 공감하고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연구자의 자세로 올해 ‘범개벽파’의 집합지성이 쏟아낸 각종 3.1혁명론을 요령껏 갈무리”하는 일이야말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고,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

“삼일절은 개벽절이다!”는 선언은 대단히 통쾌합니다. ‘개벽’으로 한국 근대를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생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일만세운동은 ‘동학농민개벽’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치 80년대에 전대협이 전국의 대학생 조직을 규합하고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는 경험을 해 보았듯이, 1894년에 한국인들은 이미 전국적으로 판을 짜 본 것입니다. 그래서 25년 뒤에 재현하기가 수월했을 것입니다. 이 양자에 걸쳐 있는 인물이 손병희입니다. 손병희는 동학을 재건한 최시형의 제자이자 천도교의 창시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아직까지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각 종교계는 물론이고 학계와 정치계에서 다양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동학농민운동과 삼일만세운동의 연관성>에 대해서 ‘사상사적’ 맥락에서 접근한 연구는 못 본 것 같습니다. 3.1운동은 천도교가 주도했고,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이며, 동학농민운동과 3.1만세운동은 모두 비폭력평화운동을 지향했다는 정도의 연관성만 지적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실 ‘자생적 근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삼일만세운동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의 곳곳에서 개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프롤레타리아작가로 분류되는 포석 조명희(1894~1938)의 시어(詩語)는 생명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차 있는데, 저는 이것이 동시대의 일본이나 인도의 생명주의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동학‧천도교의 영향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생명의 수레>라는 시에서는 ‘우주생명’이라는 동학‧천도교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1925년에는 『개벽』지에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조명희는 단순한 ‘프로작가’라기보다는 동학‧천도교의 생명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개벽적 프로작가’ 정도로 분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더 쉬운 예로는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나 <금강>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동학사상을 담은 개벽문학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한 ‘개벽’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흔히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시인 정지용도, 김영미 선생님의 해석을 참조하면, <향수> 같은 작품에서 천지인(天地人)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 점으로 보면 ‘코리안 모더니즘’이나 ‘자생적 근대문학’으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전통적인 천지인의 세계관을 서양의 모더니즘이라는 양식에 담아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들은 오는 8월 학술대회에서 자세히 논의되리라 생각하는데, 이와 같이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되어 왔던 개벽사상이나 자생적 근대의 흔적들을 드러내는 작업이야말로 개벽학의 기본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3월 1일은 개벽의 날

저는 이번 삼일절에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양식 신정도 아니고 중국식 구정도 아닌 한국식 삼일절을 실질적인 새해의 첫날로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아마 100주년이라는 특별한 시점이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은데, 뭔가 한 해를 여는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00년 전에 만세운동에 동참했던 한국인들도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3월 1일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자는-. 그래서 3월 1일은 한 해를 시작하는 ‘개벽의 날’로 삼기에 충분합니다.3.1백주년 만북울림

실제로 지난 3월 1일에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만북울림 행사에서 낭독된 <만북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에는 ‘개벽’이라는 말이 아홉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가히 ‘개벽선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일운동을 개벽운동의 일환으로 보겠다는 관점과, 개벽정신을 이어서 한국을 개벽하자는 의지가 담겨 있으니까요. 불교계에서도 비슷한 관점이 나왔습니다. 법륜스님은 삼일절을 앞둔 인터뷰에서 삼일운동을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개벽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동학의 연장선상에서 삼일운동을 보고 계신 거죠.

반면에 20여 년 전인 1999년에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주최로 열린 3.1운동 80주년 행사에서 낭독된 <삼일정신현창선언문>에는 ‘개벽’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벽’에 상응하는 “새 하늘 새 땅”, “신천지(新天地)”, “새 세상 새 문명”, “생명과 영성”이라는 말은 나오고 있습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해월신사법설』의 「개벽운수」에서 “新乎天, 新乎地”를 말하고 있는 것과 상통합니다. 아마 다양한 종교단체들의 모임이라서 ‘개벽’이라는 용어를 피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이 20년간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자각적 근대”라는 표현을 빌리면, 이번 <만북선언문>은 일종의 ‘자각적 개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개벽’이 자각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무의식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셈입니다. 그래서 삼일만세운동도 개벽운동의 일환으로 보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 촛불시민혁명도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운동가 스티브 비코(1946~1977)가 ‘흑인자각론’과 ‘흑인의식운동’을 전개했던 것처럼, 지금의 개벽바람은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던 ‘개벽의식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근대

동학‧천도교 연구자인 정혜정 교수님은 천도교의 근대를 ‘번역의 근대’가 아닌 ‘해석의 근대’라고 하였습니다. 서양 근대사상을 동학‧천도교의 틀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선생님이 언급하신 오상준의 『초등교서』를 들었습니다. 저는 ‘해석의 근대’라는 표현에 무릎을 쳤습니다. 천도교의 사상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오문환 교수님이 주목하신 오상준의 ‘공개인(公個人)’ 개념은 동학적 공인(公人)과 서학적 개인(個人)을 절묘하게 조합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학‧천도교에서는 모두가 전체의 하늘(한울)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을 모시고(侍天主) 있다는 점에서는 독립된 ‘개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따로 또 같이”와 같은 인간관입니다. 이 중에서 ‘따로’ 부분을 서양적인 ‘개인’ 개념으로 표현하고, 그 의미를 강화한 것이지요. 그래서 ‘공개인’은 동학의 천인(天人)적 인간관으로 서학의 근대적 인간관을 ‘해석한’ 개벽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의 진화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 지난 2월 21일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3.1혁명과 대한민국의 탄생」이란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이날 발표자이신 한림대 신주백 교수님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1910년) “사회진화론을 극복한 평화론”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탈(脫)진화론적 동양평화론이 양육강식에 입각한 이토 히로부미 식 동양평화관과 충돌하였다고 분석했습니다. 저는 이날 토론자로 참가했는데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서양의 진화론은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었는데, 이러한 세계관에 거부감이 있는 한국인들은 평화사상에 바탕을 둔 ‘한국적 진화론’을 전개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1916년에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은 “강자·약자 진화상(進化上)의 요법”을 설파하여 강자와 약자가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진화론을 전개합니다. 강자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약자를 보호해 주고 진화시켜야 영원한 강자가 될 수 있고,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 배우고 힘을 길러야 강자로 진화하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마치 맹자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즐기는 것이고(樂天),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畏天)”고 한 것과 유사합니다.

마찬가지로 천도교 이론가인 이돈화도 󰡔신인철학󰡕(1930)에서 서양의 ‘과학주의 진화론’과 대비되는 ‘수운주의 진화론’을 설파하였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약육강식의 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동학’사상에 의탁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서구 근대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한 ‘해석의 근대’라고 볼 수 있겠지요.풍물마당



유학의 개벽

이런 개벽파의 ‘해석’ 정신이 요즘에 ‘다시 개벽’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이 ‘개벽’의 관점에서 삼일운동이나 량수밍을 이해하고 있고, 인류세나 포스트 휴먼을 내다보는 것도 그런 일환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량수밍이라는 학자의 존재는 제가 중국유학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에서는 향촌교육을 하는 유학자는 들어봤어도 향촌운동을 하는 유학자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량수밍은 이론실학자가 아닌 실천실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보면 간척사업과 협동조합으로 시작한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과 비슷합니다. 지적하신 대로 진정한 생명유학, 생태유학의 개척자입니다.

량수밍은 대학원 과정에서 잠깐 배운 적은 있지만 ‘개벽’의 눈으로 다시 보니 완전히 새로운 사상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풍우란이나 모종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현대 신유학자입니다. 19세기 말의 량수밍에서 오늘날의 원테쥔에 이르는 계보는, 한국으로 말하면 19세기 말의 최시형에서 20세기의 윤노빈-김지하-장일순으로 이어지는 원주의 생명학파에 비견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유학이 진정으로 개벽되려면, 또는 ‘해석의 근대’와 같이 ‘해석의 유학’으로 거듭나려면,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사이에 ‘공공(公共)’을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신-제가-<공공>-치국-평천하” 이런 식으로요-. ‘공공’은 당연히 시민사회나 공공영역에서의 실천윤리를 가리킵니다. 달리 말하면 가족과 국가 사이에 시민이라는 공공집단을 넣어서 양자를 매개하는 거죠. 제 생각에는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아직 이 영역이 철학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채워 보려고 노력한 것이 천도교나 원불교라고 생각되고요. 천도교의 ‘공개인’ 개념이나 원불교의 ‘공공’ 개념이 그러한 증거입니다. 개화파는 처음부터 수신(修身)에서 시작하지는 않을 테니까요.태극소녀

실은 지난 3월 1일에 삼일절 행사를 보러 광화문에 갔는데, 대규모 태극기부대의 집회 광경에 놀람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치적 구호도 구호지만, 무엇보다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 사람 얘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광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법적으로 보장된 집회를 하는 것은 좋지만 공공장소에서는 타인을 배려하면서 자유를 행사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교토포럼의 공공철학은 실로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사이에서 공공(公共)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접한 이남곡 선생님의 『논어: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도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해석한 『논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공유학’이나 ‘개벽유학’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런 식으로 유학이 개벽되지 않으면 오늘날에 뿌리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학자가 향촌으로 뛰어드는 중국은 역시 유학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00년 후의 삼일절

마지막으로 삼일절 200주년을 공공(公共)하며 이번 답신을 마칠까 합니다. 선생님이 이사로 계신 ‘다른 백년’의 문제의식은, 그 이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100년 후의 삼일절을 준비하는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학이라고 할 수 있고요. 지난주에 ‘다른 백년’의 이래경 이사장님을 만나 뵐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흔히 대학에서 만나는 교수님이나 미디어에서 접하는 경영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일종의 ‘영성적 경영인’이라고나 할까요?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이상적인 경제 원리로 생각하고 계셨는데, 동학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도상(道商)’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백년의 연장’이 아닌 ‘백년의 개벽’을 준비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한국사회가 조금씩 개벽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 들었습니다.(좌)개벽학당, (우)개벽포럼에의 초대

개벽학은 삼일절 200주년을 준비하는 ‘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라지지만 그다음 세대, 그다음 다음 세대를 위한 ‘공공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공공’의 차원이자 ‘세대 간의 공공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달부터 <개벽학당>과 <개벽포럼>이 시작됩니다. 이것만으로도 2019년은 ‘개벽학 원년의 해’라고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100년이 쌓이면 삼일절 200주년이 되겠지요.

100주년
3.1절
FEATURED
개벽
개벽포럼
개벽학당
근대
삼일절
유학
학술대회

글 탐색
PREVIOUSPREVIOUS POST:

하노이회담을 깨뜨린 책임은 트럼프식 분열 정치였다

NEXTNEXT POST:

주권을 유린당하는 베네수엘라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을 썼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번역하였다. 지금은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2020/01/18

1901 또 다시 개벽 – 조성환/이병한의 [개벽파 선언]



또 다시 개벽 – 다른백년

조성환/이병한의 [개벽파 선언]
종료된 기획칼럼
또 다시 개벽

인류세의 시대정신이병한(다른백년 이사) 2019.01.18 1 COMMENT


1. 자생과 자각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연신 끄덕거리다 말미에 갸우뚱 물음표가 돋았습니다. 저 또한 메이지유신 150주년(2018)을 기해 일본에서 나온 서적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문명개화’, 그간의 개화사 150년과는 다른 결의 서사가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동북지방의 안도 쇼에키까지 거슬러 올라 개벽의 단서를 찾는 것은 쉬이 수긍하기 힘듭니다.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을 “성인의 이름을 빌려 무위도식하는 도둑놈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하셨죠. ‘성인 중심의 지배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한 동아시아 최초의 사상가’라고 추키셨습니다. 글쎄요. 저로서는 문장의 들머리 ‘당시의 사무라이 지배층’이 더 도드라집니다. 18세기에도 여전히 일본은 무인이 다스리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유학적 소양으로 단련된 사대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조선, 월남이 구현했던 문치주의 유교국가와는 일선을 긋는 동아시아 문명의 주변부였죠. 최근에는 메이지유신이야말로 그 기저에 유교화=중국화=근대화의 동력이 작동했다는 독법마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무라이에서 사대부로, 무사에서 문인관료로 지배층의 세련화(=文化)가 천년이나 가로 늦게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씨를 따지지 않는 전통은 동아시아에서 제법 오랩니다. 씨갈이, 역성혁명이 거듭되어 천자를 갈아치웠습니다. 그럼에도 만세일계 천황이 존재한다는 점이야말로 일본의 예외성입니다. 즉슨 성인 중심의 유교문명을 비판했다 하여 ‘개벽파’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유학국가를 온전히 구현해본 적이 없는 일본서는 자칫 허수아비를 때리는 꼴입니다. 물론 중국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 모두가 성인이다.’ 하였던 15세기의 왕양명을 개벽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수운 최제우

개화파와 척사파의 갈림길, 그리고 개벽파의 새길 내기는 적어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는 19세기 이후의 사태입니다. 이른바 ‘서구의 충격’, 자본주의 세계체제와의 조우라는 역사적 맥락을 소거하면 개벽파의 독창성과 독보성을 도리어 제거해버리고 맙니다. 자칫 여기저기서 시시때때로 개벽파가 출몰할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 충만했던 서구의 중세가 개벽기도 아니며,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범신론적 사유를 개벽과 직접 결부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동학혁명이 그 이전의 숱한 민란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 또한 지배층에 대한 민중 반란이라는 흔하고 빤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충격’이 촉발한 전대미문의 천하대란에 임하여 문명적 각성을 예리하게 품어내었던 것입니다. 개벽을 개벽답게 만드는 티핑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벽파의 역사성에 대한 적확한 인식은 엄밀한 용어 사용과도 직결됩니다. ‘토착적 근대’라는 말이 저는 여전히 말끔하지 않습니다. 내재적, 내발적, 자생적 이라는 수사 또한 깔끔치가 않습니다. 죄다 자족적인 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타를 나누고, 내/외를 가르는 발상입니다. 세계사 다시 쓰기, 소위 글로벌 히스토리는 서구적 근대조차 내발적이고 자생적이고 토착적이지 않았음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에도 아랍과의 교류, 아시아와의 교섭, 아프리카-아메리카와의 교역이 중요했음이 나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에 ‘몽골의 충격’과 한문으로 쓰인 동방경전의 알파벳 번역이 있다하여 그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토착적이고 내재적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세계적이어서 소중한 것입니다. 내발론의 강박이 18세기 조선에서 서구적 근대의 맹아를 억지로 추출해내는 실학 담론의 패착을 낳았음을 통렬하게 비판한 점이 <한국 근대의 탄생>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자폐적인 내발론과 자멸적인 외발론을 동시에 극복합시다. 선후(先後)를 따지기보다는 박후(薄厚)를 살펴봅시다.

13세기 몽골이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이루었던 것처럼, 19세기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구를 석권했습니다. 다만 그 편입과정에서 문명마다 나라마다 여러 갈래의 대응이 등장합니다. 한사코 거부했던 세력이 척사파입니다. 척사파의 양태는 중국에도, 인도에도, 심지어 서유럽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반대편에서 무조건 수용코자 했던 세력이 개화파입니다. 이 또한 여러 나라 여러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옛 것을 고수한 척사파와 새 것을 추수한 개화파의 충돌이 보/혁 갈등으로 치달았습니다.

‘제3의 길’도 있었습니다. 낯익은 전통을 타파하면서도 낯선 현실의 혁파 또한 겸장했던 개벽파입니다. 자기 고집도 자기 상실도 아닌 자기 혁신을 도모했습니다. 척사파가 무책임하고 개화파가 무절제했다면, 개벽파는 응시하고 응수하고 응전했습니다. 척사파가 시대의 물결에 조응하지 못하고 조선의 적자에서 적폐로 떠밀려갔다면, 개화파는 서세동점의 파고에 휘말리고 휩쓸려서 조선을 배반하고 매국의 독배를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척사파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면, 개화파는 깜빡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개벽파는 반짝반짝 눈을 부릅떴습니다. 서늘한 눈으로 천하대세를 직시하고 빛나는 눈으로 나라다운 새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각적 근대’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즉 근대 세계체제는 단일합니다. 다만 그 근대세계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의 차이로부터 학파와 정파가 분기합니다. ‘서구적 근대’라 해서 개화파 일색이 아닙니다. 그렇게 쓰인 서구사=개화사조차도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서구에도 척사파와 개화파와 개벽파가 길항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비서구적 근대’라고 하여 개벽파가 돌출했던 것도 아닙니다. 작위적인 지리적 구획을 복제하기보다는 사상적 지향에 방점을 두는 편이 이롭습니다. 제가 동학을 높이 치는 이유 또한 묵은 유학을 맹신하지도, 설은 서학을 맹목하지도 않은 탁월한 균형 감각 때문입니다. 구학을 답습하지도, 신학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서구의 충격에 대한 가장 창발적이고 주체적인 응답(Response+Ability)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동학은 ‘자각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개벽은 ‘자각의 탄성’이었습니다. 깨어나고 깨우치고 깨달아서 19세기의 유레카, ‘다시 개벽’을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개벽을 모르고서 한국의 근대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말에 십분 공감합니다. ‘개벽을 누락한 한국의 근대에 관한 모든 논의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넌센스, 비상식과 몰상식이 판을 쳤습니다. 무식하고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근저에서 무심했습니다. 그 무심과 무지와 무식의 소산으로 쌓아올린 탑이 ‘실학’ 연구였습니다. 실학에서 동학으로의 회향, 개화에서 개벽으로의 회심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헌판을 갈고 엎어 새판을 짭시다.인류세 전시작품(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



2. 서세동점에서 인류세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애써 이틀을 썼던 문장을 싹둑 지워버렸습니다. “실학과 동학”으로 써내려갔던 내용을 통째로 덜어냈습니다. 지금 이곳은 수운회관 15층입니다. 1월 15일 오전 9시 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부쩍 창밖이 뿌옇습니다. 희뿌연 미세먼지가 시야를 온통 가립니다. 인왕산은 희미하고 청와대는 흐릿합니다. 왜 한국의 근대를 실학이 아니라 동학에서 구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글이 어쩐지 한가해 보입니다. 갓 50일이 된 아들래미 얼굴이 떠올라 더더욱 답답해집니다. 개벽사 쓰기 또한 자칫 먹물의 고질병, 책상물림의 직업병일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입니다. 현장감이 덜한 것입니다. 이번만큼은 에둘러 가지 않기로 합니다. 고준담론은 잠시 미루어두고 왜 또 다시 개벽인가,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습니다. 절박하고 절실하고 절절한 제 마음을 고스란히 옮겨봅니다.

거듭 강조컨대 더 이상 서구와 비서구를 나누기 힘듭니다. 20세기형 인문학의 낡은 관습일 뿐입니다. 북반구(선진국)과 남반구(후진국)를 쪼개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20세기형 사회과학의 후진 습관일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제3세계론이나 세계체제론에서도 별다른 자극과 영감을 받지 못합니다. 동도와 서도를 견주고 서세에 동세를 맞세우는 것 또한 철지난 발상이라고 여깁니다. 목하 한치 앞도 가리어버린 저 기후변화는 동/서와 남/북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의 지구가 있을 뿐입니다. 그 둥근 지구, 하나의 하늘 아래 동서남북은 갈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온누리와 온생명과 한살림이 있을 뿐입니다. 동도(東道)와 서도(西道)의 소모적인 논쟁을 뒤로하고 천도(天道)와 대도(大道)와 일도(一道)를 탐구합니다. 세계체제론(World System)의 국가간 경쟁을 훌쩍 뛰어넘는 인류와 지구의 공진화, 지구체제론(Earth System)을 모색합니다.

한살림 선언(1989)과 <녹색평론>(1991)도 이제는 어쩐지 미진한 감이 듭니다. 언젠가부터 동어반복의 식상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학은 여전히 지상(地上)과 천하(天下) 사이에 주력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의 길, 천지인의 근대화, 천인합일의 현대화를 천착합니다. 지하(지질학)와 천상(천문학)까지는 아우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물질대사는 물론이요 우주의 물질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이미 오래인데도 혁신과 갱신에 게으릅니다. 인류사와 지구사가 합류하여 도달한 인류세(人類世)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 ‘다시 개벽 2.0’을 갈구합니다.

생태적 사유는 한사코 인간의 능력을 축소시키려 듭니다. 포스트휴먼, 만물 가운데 하나로 강등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구 위에 등장한 그 어떠한 생명도 지구와 우주의 행방에 영향을 미칠 만큼 능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습니다. 실로 획기적인 사태입니다. 가히 유례없는 사건입니다. 선천개벽 창세기(홀로세, Holocene)와 후천개벽 인류세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신의 뜻이나 자연의 법칙에 버금갈 만큼 인간의 역량이 증대된 것입니다. 45억년 지구사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의지가 깃든 행동이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의지는 자연의 힘(force)과는 달리 억제되고 절제될 수도 있는 힘(power)이라는 점에서 절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즉 서구의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여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인간 중심적이지 않아서 문제인 것입니다.

지구는 갈수록 인류의 이 집합적 의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힘의 행사 여부를 선택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정신개벽)이야말로 인류를 고유한 생명체로 우뚝 서게 합니다. 지구를 변화시키는 인간의 고유한 힘이 절정에 치달은 바로 이 순간에 인류의 고유한 특성을 외면하는 생태론이 갑갑하고 어색한 까닭입니다. 포스트휴먼을 궁리할 것이 아니라 네오휴먼을 연마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신인간(新人間)=신인간(神人間)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경쾌한 유발 하라리를 따라 라틴어로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라 하겠습니다. 묵직한 의암 손병희에 기대어 한자로 풀면 인내천(人乃天)이 가장 적절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사람이 즉 한울인 것입니다.

160년 전 노이무공(勞而無功), 아무리 노력해도 헛되었노라, 하늘의 탄식을 들은 이가 최제우입니다. 유학의 천인합일에서 동학의 천인합작으로 도약하는 비상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작하는 인류세의 비전을 이미 내장하고 있던 것입니다. 제가 1848년 <공산당선언>이 20세기를 추동했다면, 1860년 <동경대전>은 21세기를 격동시킬 것이라고 호언하고 다니는 연유입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턱없이 모자란 발상입니다. 만인과 만물이 얽히고 섥히는 21세기, 경천(敬天)과 경물(敬物)과 경인(敬人)의 삼경사상야말로 자유-평등-형제애를 능가하는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자유-평등-형제애’라고 해보았자 ‘경인’ 단 두 글자로 족합니다.토론토 세계종교의회

그러함에도 동학과 개벽은 여태 수줍습니다. 지난해 11월 토론토에 다녀왔습니다. 세계종교의회의 말석을 지켰습니다. 겨우 한국과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만 동학과 개벽 얘기가 나지막이 오고갔습니다. 한국 연구자와 한국의 종교인들만 단출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크게 안타까웠습니다. 깊이 아쉬웠습니다. 딱하다는 생각마저 일어났습니다. 애가 탔습니다. 속이 쓰렸습니다. 입맛이 쓰디썼습니다. 세계종교의회 행사를 맞춤하여 토론토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전시회 주제가 바로 ‘인류세’였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다인종, 다종교, 다국적 인류를 지그시 바라보며 “신동학이 인류세의 학문이요, 또 다시 개벽이 인류세의 시대정신이라”,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온타리오 호수를 산책하다 곰곰 궁리하노라니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 또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퍼뜩 일어났습니다. 서세동점, 20세기의 수세적 입장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류세에 맞춤하여 문장의 앞뒤 순서를 바꾸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신을 개벽하야 물질을 개벽하자’고 말입니다. 자각하여 구세하자고도 고쳐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를 갈고 닦아 인물부터 사물까지 만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편이 인류세에 임하는 인류의 태도에 한층 더 부합하지 싶습니다. ‘다시 개벽’이 19세기의 자각이었다면, 21세기는 ‘또 다시 개벽’의 유레카를 외칠 만 한 것입니다. 고로 개벽파는 코즈모폴리턴, 세련된 세계시민마저 돌파합니다. 국경을 가로지르는 글로벌 엘리트들의 허위의식을 넘어섭니다. 개벽인이야말로 진정한 지구인이며, 하늘과 더불어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개벽꾼이야말로 참말로 하늘사람입니다. 국민(國民)에서 천민(天民)으로, 국가에서 천국으로. 그런 기상과 기개가 있어야 기미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해년의 ‘선언’(Manifesto)에 값할 것입니다.온타리오 호수에서 본 토론토 시내



그래야 개벽파를 한낱 학술 유행의 신종 아이템으로 회수하려는 각종 유혹과 회유를 떨쳐낼 수도 있습니다. 부디 동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신동학을 합시다. 신동학을 살기로 합시다. 앎의 전환에 그치는 탁상공론이 아니라 삶의 전환을 수반하는 수련과 수행을 수반합시다. 그래야만 민심의 감화를 이루고 천심의 감동을 일으켜 포교와 포덕 또한 가능해질 것입니다. 일파만파 지구에 파동을 일으키고 우주까지 파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야 이 탁한 세상에 맑은 하늘을 되돌려줄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태어난 후세들에게도 푸른 하늘 은하수를 되물려줄 수 있습니다. 꼬장꼬장, 깨작깨작, 자꾸 논문과 비슷해지려던 문장을 몽땅 지워버린 까닭입니다. 후련해졌습니다. 속이 다 시원합니다.

FEATURED
개벽
서세동점
인류세
자각적 근대
한국 근대의 탄생

글 탐색
PREVIOUSPREVIOUS POST:

주거권을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영국의 밀레니얼 세대

NEXTNEXT POST:

두 도시 이야기: 뉴욕 vs 서울 (3)

이병한(다른백년 이사)


다른백년 이사, 원광대 동북아연구소 교수, 유라시아 문명사학자. 저서로 『반전의 시대』, 『유라시아 견문』3부작이 있다.

2019/09/06

알라딘: 생명의 해방 by 찰스 버치 / 존 캅 (지은이) / 양재섭 / 구미정



알라딘: 생명의 해방 by 찰스 버치 / 존 캅 (지은이) / 양재섭 / 구미정




생명의 해방 - 세포에서 공동체까지
찰스 버치,존 캅 (지은이),양재섭,구미정 (옮긴이)나남출판2010-04-06
원제 : The Liberation of Life (1981년)




정가
30,000원
판매가
30,000원 (0%, 0원 할인)


568쪽
152*223mm (A5신)
795g
ISBN : 9788930084666

--------------------------------

책소개
과학으로서의 생물학에 확고히 기반하고 있으나, 동시에 생물학의 지배적인 모델인 기계론이나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생태학적 생명 모델”을 지지한다. 이 새로운 생태학적 모델은 물질주의가 줄 수 없는 윤리적, 철학적, 그리고 인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생물학자와 신학자인 저자들이 양 방면에서 쌓아온 일생동안의 경험과 지혜에 근거하며 강한 설득력과 긴박함을 가지고 우리시대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말한다. 생물학자와 신학자의 공동 작업이었듯이, 번역 또한 생물학자인 양재섭 교수와 신학자인 구미정 교수가 함께 뜻을 모았다.

------------------------------
목차


한국어판 머리말 / 존 캅
옮긴이 머리말

서론

제1장 분자생태학ㆍ개체생태학ㆍ집단생태학
바깥에서 안으로 들여다보기
분자생태학(Molecular Ecology)
개체생태학(Organismic Ecology)
집단생태학(Population Ecology)
생명의 그물과 ‘자연의 균형’
결론

제2장 진화
우연과 돌연변이
자연선택
목적을 향하여
인간의 진화
결론

제3장 생명의 모델
모델의 기능
기계론적 모델
생기론적 모델
창발적 진화론 모델
생태학적 모델을 향하여
실체적 사고에서 사건적 사고로
경계가 없는 생명
결론

제4장 인간과 자연
인간 실존의 생태학적 모델
인간의 조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
상향 타락
동물들도 경험을 하는가?
경험의 진화
결론

제5장 생명 윤리
왜 하필이면 윤리인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윤리
동물권
인권
생명권(生命圈, Biosphere) 윤리
결론

제6장 생명 신앙
창조된 산물과 창조적 선
믿음이 있는 사람
생명을 믿는다는 것
우주적 힘인 생명
생명과 악 309
생명의 하느님 313
결론 321

제7장 인간 생명의 생물학적 조작
생명 윤리
희소한 의료자원의 사용에서 정의의 문제
인간 경험의 조작
소극적 우생학과 적극적 우생학, 그리고 복제
유전공학
결론

제8장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세계
정의
지속가능성
지속불가능하고 불의한 세계
무한성장의 이데올로기
결론

제9장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는 경제개발
지배적인 모델
생태학적 모델
사회주의 경제와 시장 경제
결론

제10장 생태학적 관점으로 본 시골과 도시의 개발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농업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여성의 역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운송수단과 도시 거주
결론

옮긴이 해제
참고문헌
찾아보기
약력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찰스 버치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1983년 호주 시드니대학교에서 은퇴한 후, 현재 동 대학교 명예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자연과학자이면서도 생태철학과 생태윤리 및 생태신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1990년도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일컬어지는 템플턴(Templeton)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밖에 호주 과학학술원 특별회원, 로마클럽 회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자신의 전공분야 외에도 과정사상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관련학회에서의 철학활동 및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종교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저작으로는,《자연과 하느님》(Nature and God, 1965),《미래 대응》(Confronting the Future, 1976),《생태 그물》[The Ecological Web, 앤드류어서(H.G. Andrewartha)와 공저, 1984]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와 출판물을 낸 바 있다. 접기


최근작 : <생명의 해방>

존 캅 (John B. Cobb) (지은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교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예수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분이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복무를 마친 후,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배운 후, 과정신학의 개척자가 된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32년 동안 30여 권의 매우 중요한 저술들을 발표했다.



최근작 : <예수의 아바 하나님>,<영적인 파산>,<민중신학, 세계신학과 대화하다> … 총 15종 (모두보기)

양재섭 (옮긴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와 동 대학원을 거쳐 인류세포유전학으로 이학박사를,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생명윤리학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덧붙여 취득하였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환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대구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과 대학원장을 거쳐 현재는 생명과학과 명예교수이다. 한국유전학회 회장, 한국생명윤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윤리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생명과 평화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공저로《분자세포생물학》,《과학의 역사적 이해》 등이, 공역으로《필수유전학》,《왓슨 분자생물학》,《기초생명윤... 더보기


최근작 : <생명을 나누는 타원형교회>,<도시재생정책의 국제비교 연구> … 총 11종 (모두보기)

구미정 (옮긴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림 신청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를 거쳐 기독교윤리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계명대학교 초빙교수와 대구대학교 필휴먼(Philhuman)생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 숭실대학교 외래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여성과 자연,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삼고 다양한 인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중이다. 저서로《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한 글자로 신학하기》,《야이로, 원숭이를 만나다》,《호모 심비우스: 더불어 삶의 지혜를 위한 기독교윤리》,《핑크 리더십: 성경을 통해 깨닫... 더보기


최근작 : <구약 성서, 마르지 않는 삶의 지혜>,<두 글자로 신학하기>,<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 총 2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예언자적 예지가 빛나는 생명의 길잡이

“당신은 눈이 뜨이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책 한 권을 읽고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되짚어 봐야 겠어!’ 만약 당신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내가《생명의 해방》을 읽고 느낀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Alternative Futures)

“최고의 책이다.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의 문헌에서 고전이 될 만하다.”(The Christian Century)

“당신이 1달러당 얼마의 아이디어가 들어 있는가로 책을 평가한다면, 이 책을 사는 것은 아주 드물고 귀한 거래가 된다. 생태학적 모델의 개념 위에 소중한 아이디어들이 삶에 대한 지혜의 그림을 수놓는다.”
(Christianity and Crisis)

“《생명의 해방》은 우리 시대의 중심적 문제들을 통해 세포로부터 시작해 공동체로 나아가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여행이다.”(The Ecologist)

-------------------------

무엇의, 무엇을 위한 해방인가?

이 책은 우선적으로는 생명 개념의 해방에 관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의 생명의 해방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과학으로서의 생물학에 확고히 기반하고 있으나, 동시에 생물학의 지배적인 모델인 기계론이나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생태학적 생명 모델”을 지지한다. 이 새로운 생태학적 모델은 물질주의가 줄 수 없는 윤리적, 철학적, 그리고 인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이 모델은 과학, 윤리학, 철학, 종교, 사회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을 모두 아우르며 유전공학, 낙태, 안락사, 보존, 경제, 여성해방, 성장의 한계, 그리고 지구사회의 미래 지속가능성이라는 현 시대의 이슈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새로운 전기를 제공한다. 생물학자와 신학자인 저자들이 양 방면에서 쌓아온 일생동안의 경험과 지혜에 근거하는 이 책은, 강한 설득력과 긴박함을 가지고 우리시대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말한다.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찰스 하트숀의 신학이《생명의 해방》으로 거듭나다

이 책은 생태윤리와 생태신학의 초석을 다지고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찰스 버치와 과정신학과 자연신학에 정진하여 ‘가교 신학자’라는 별명을 얻은 신학자 존 캅의 공동 기획의 산물이다. 그들은 공히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그 제자인 찰스 하트숀에게 영향을 받은 과정사상가들이기 때문에 함께 이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 공유하는 철학이 달랐더라면 학제간의 경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이런 유의 책은 나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그들은 과정사상을 통해 과학, 윤리, 신학, 사회이론, 공공정책을 통째로 보는 법을 배웠기에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면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으며 생명의 새로운 모델, 생명 윤리, 그리고 생명 신앙으로 나아가는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생명에 관한 논의가 진화론과 창조론 등으로 너무 단순화되어 자칫 과학과 종교의 어리석은 충돌만 야기되는 상황에서 환원주의적·기계론적 생명관을 극복하고 생태학적 생명관을 제시함으로 생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만약에 진화론자들이 생태학적 생명관을 채택하게 된다면 과학과 종교의 오랜 대립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이 책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저자들은 이러한 경험이 한국의 상황에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생명의 비전, 우리 시대의 하느님을 찾아서―생태학, 진화, 인간과 자연, 생명 윤리,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세계를 탐구해가는 학제간 연구의 전형

이 책은 한마디로 생명에 대한 학제간 연구의 전형을 보여준다. 두 저자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평생 동안 학제간 다리 놓기와 통전적 학문의 추구라 할 수 있기에 이 책은 좁게는 생물학과 신학, 넓게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대표하는 두 학자가 만나 빚어내는 우주적 대화로 가득 차 있다. 생태학적 모델에 입각하여 과학을 바라보고, 윤리와 신학, 사회이론과 공공정책을 바라보며, 이들은 하나의 새로운 신앙, 곧 ‘생명 신앙’의 깊이로까지 함께 나아간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의 가능성을 꿈꾸게 한다. 글자 그대로 ‘세포에서부터 공동체까지’ 다양한 수준과 차원의 생명을 폭넓게 이해하고 나면, 어느새 생명의 해방을 위해 나름대로 헌신하고자 하는 결단에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쓰여진 30년 전에 비해 구체적인 통계나 시대상황이 변했어도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 저자들의 일관된 생명관은 21세기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이 책이 생물학자와 신학자의 공동 작업이었듯이, 번역 또한 생물학자인 양재섭 교수와 신학자인 구미정 교수가 함께 뜻을 모아 작업했다. 역자들은 이 책이 번역 출간됨으로써 이른바 ‘죽임의 문화’가 지배적인 이 시대에 ‘살림의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순수한 생명의 용틀임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실용주의를 내세워 경제 제일주의로 치닫고 있는 세태에서 조금이나마 연약한 생명을 보듬으며 탐욕을 뿌리치는 마음을 자극할 수 있다면 더할 수 없는 보람이 될 것이라고 밝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