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이찬수.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이찬수. Show all posts

2021/07/15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 종교는 성경(의 영성)을 구심점으로 역사를 추동한다 이호재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 - 에큐메니안
“성경은 기독교가 아니다”종교는 성경(의 영성)을 구심점으로 역사를 추동한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12.22 16:50

종교는 권위를 잃었다: 성경은 신학과 교학을 통해 형성된 제도종교와는 다르다

<표 1, 새 축 시대의 구도자의 강령>
명제 1 : 바르게 알았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앎이다.
명제 2 : 바르게 믿었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
명제 3 : 바르게 깨달았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다.


구도자는 성경의 황금률을 귀감삼아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며 제도종교의 원천적 영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직업종교인은 위계적 조직화, 교리와 교학체계 정비, 구제(원)신앙을 종교적 기제로 종교조직을 유지하고 확산시킨다. 이 양자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무너지는 큰 원인은 제도종교의 성장의 핵심이었던 ‘교리와 신학, 교학, 유학과 도학’의 해석학적 전통과 의례체계가 영성의 원천인 성경의 생명을 ‘동맥경화’시키는데서 기인한다. 제도종교는 세속화의 원심력에 의해 형식화, 형해화되면서 종교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현대는 축 시대의 종교적 언어가 가진 종교적 영성이 역사의 추동력을 상실하고 있는 시대이다. 성경의 영성과 제도종교의 문화의 ‘영성적 거리’가 회복불능의 단계까지 벌어진 ‘말기암’증상을 보이고 있다. 제도종교가 낡은 문명의 차별적인 사유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건물성소를 맹신하고 자본신앙과 기복신앙에 함몰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1) 동시에 과학적 유토피아가 선전하는 초과학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포스트 휴먼시대라는 신조어에 주눅이 들어 권위의 원천이었던 종교는 새 축 시대의 한 차원 높은 문명사적 지향점을 설정하지 못한채 과거의 영광을 찬미하는 복고풍의 소리만이 들린다.

종교혁신은 구도자적인 정신을 가진 종교인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순교적인 수난과 성경해석전통의 대전환을 통해 성경의 종교영성을 되살린다. 건물성소 중심의 종교문화의 극복과 종교 간의 융합과 회통, (초)과학의 지도적 영성의 확보는 새 축 시대의 종교가 지향해야 할 삼대과제이다. 새 축 시대는 종교 간의 분별과 차별의 시대가 아닌 다양성을 바탕으로 융합과 회통의 시대이자, 초과학을 포용한 초종교의 시대이다.

새 축 시대는 천문학의 발달에 따른 거시세계의 확장과 이론물리학이 가져다준 미시세계의 발견에 따른 공간확대의 혁명, 통신과 교통의 혁명으로 인한 우주가 축소되는 시간혁명,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결합 등으로 새로운 인간유형의 혁명을 예고한다. 축 시대에 형성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개념자체가 획기적으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임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필자는 ‘새 축 시대’라고 제안한 바 있다.(2) 바야흐로 종교성과 영성을 다시 회복해야 할 새 축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새 축 시대에 종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포용해야 할 대상은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다. (초)과학은 이미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생명창조와 같은 창조주의 창조성을 모방하려는 차원까지 다가왔다. 과학도 분명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마치 인간 이성이 제시하는 합리성과 논리성의 가치척도라는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수학에서는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말하고,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고 아인쉬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말하고 있다. 수학세계와 관찰세계는 상대적이며,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인간 이성의 결론이다.

종교적 인간은 인간이성의 한계, 과학기술의 한계, 자본의 한계를 가진 과학적 유토피아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인은 종교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과학을 배타적으로 배척하지만, 우주의 공간이 확대되고 우주시간의 거리는 오히려 축소되며, 생명에 대한 제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직업종교인과 종교영역에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눈앞의 도전이다.

변찬린은 1985년 초에 그리스도교가 제도종교로서 형해화되어가는 시점에 과학적 유토피아가 선전하는 내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37년 전의 기록이지만 문명패러다임 전환점에 대한 적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 변찬린, 『요한계시록 信解』, 1985년 2월 22일 탈고 [원고 복사본] , 1986년 5월 25일 초판, 1992년 12월 25일 개판, 2019년 5월 18일 개정신판.


축 시대의 관성에 빠진 제도종교는 과학의 공세와 종교적 영성의 고갈로 무기력에 빠져 있다. 양식 있는 종교인은 현대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말법시대’이고 ‘종말론적인 운세’임을 직감하며 끊임없이 경고음을 내고 있다. 종교인이야말로 과학을 배우고 과학적 유토피아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나가야 할 시대적 책임이 있다. 새 축 시대의 종교인에게 과학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지도(指導)의 대상이다.

위대한 종교인은 새로운 차원의 ‘종교(으뜸가는 가르침)’를 지향하며 종교관리자가 아닌 영원한 구도자의 길을 가면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낡은 문명의 사유체계를 넘어 새로운 문명의 차원을 제시하여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종교는 ‘宗敎’(=‘으뜸가는 가르침’)(3), 즉 시대의 화두, 역사의 공안, 혼돈의 문명에 대한 나침반과 등대불의 역할을 하는 시대적 언어이다. 종교적 영성을 체득한 구도자는 축적된 종교정보와 혼돈의 현실정보를 융합하고 회통하여 미래의 갈 길을 밝히는 목소리를 낸다. 혹자는 호교론적인 신앙의 울타리에서 안주할 줄 모르지만 구도자는 ‘불확실성의 시대’와 포스트 휴먼시대 등의 시대적 개념의 출현, 호모 데우스, 호모 이후의 호모 등 인간 자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동 시대에 출현한 것 자체가 새 문명의 전조를 알리는 상징적 표식임을 직감하고 있다.

그럼 한국 그리스도교는 새 축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한국 종교가 새 축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종교조직은 사회적 기능조직 가운데 가장 생기를 잃은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역사 속에 작동하는 종교는 위대한 종교인과 각성된 민중들에 의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에 불과하였던 유대교는 예수와 바울에 의해 세계 종교인 그리스도교로서 재탄생되고, 중세 가톨릭은 존 위글리프, 얀 후스, 마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이 주도한 가톨릭 혁신운동으로 탈바꿈되었다. 개신교의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형성된 것도 결국은 성서텍스트의 정신을 당대에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의 일환이다. 이는 신유학, 양명학, 선불교의 전통 등 역사 속의 다른 종교도 위대한 종교인의 혁신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구촌 사유가 합류하는 시점에 유대교는 유대인의 민족종교로서 이스라엘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는 가톨릭(로마 가톨릭, 동방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나뉘어져 있다. 문명전환기에 과연 그리스도교가 창교목적에 합당한 본질적 정신을 역사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예를 들면 개혁교회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개혁을 시대의 언어로 삼아 대중에게 호소하여 성장한 교회이다. 만약 개혁교회가 개혁을 중단하면 개혁교회의 역사적 실험은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교회사가들이 후세에 기록할 것이다.

그럼 서학으로서의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한국 그리스도교는 어떠한 길을 걸어왔을까? 한마디로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는 서구 신학의 연장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리전이다. 마치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정통으로 삼아 선맥(僊脈)과 무맥(巫脈) 등 한국의 종교문화를 ‘이도(異道)’ 취급을 하던 역사적 데자뷰이다.

이찬수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은 어쩌면 한국에서 한국 천주교와 한국 개신교를 동시에 균형 있게 비평한 거의 ‘유일한’ 책이랄 수 있다. 그는 한국에는 아직도 한국 천주교사와 한국 개신교사가 통사적 관점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관계자가 잘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토착화 신학’을 말하기에 앞서 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교회 분열사가 한국 교회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종교현상에 대해 깊은 반성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답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이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특수성을 가지면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이찬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어찌 되었든 그리스도교적이면 충분하지 굳이 한국적일 필요가 있느냐고 …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정답의 절반만 들어있다. ‘한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논의는 두고두고 진행되겠지만 그리스도교가 한국적이라는 말속에는 그리스도교가 더 그리스도교적다워야 한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적이면 충분하다는 말 역시 지역적 특수성 – 이 글의 맥락에서는 한국 문화-이 반영되고 있을때에만 그리스도교도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특수성을 통해서만 성립된다.(4)


한편 한국의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서구에서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토착화를 추진하였을까? 김경재는 『해석학과 종교신학』에서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문화에 적응하는 개신교의 모델을 범주화하여 비평한다. 즉 보수주의 신학의 파종모델, 진보주의 신학의 발효모델, 자유주의 신학의 접목모델, 민중주의 신학의 합류모델이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어떠한 모델에 해당할까? 이정배는 정약용, 유영모, 함석헌을 사례로 하여 『토착화와 세계화 – 한국적 신학의 두 과제』 등에서 “탈민족, 탈기독교적 기독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한국문화신학회에서는 최병헌, 유동식, 유영모, 최태용, 함석헌, 김교신, 윤성범, 서남동, 안병무, 이정용 등을 『한국신학, 이것이다』라는 주인공으로 내세워 조명한다. 그렇다면 천주교인 가운데서는 어떤 종교인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한국 천주교에서는 “한국 신학은 이렇다”라는 주제의 글은 거의 보이지 않고 다른 종교와 대화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천주교의 이런 입장은 보편교회를 표방한 제국종교의 관성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의 위계질서속에 정양모, 심상태, 김승혜, 박일영 등의 학문적 성과는 기억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드문 의문은 장 칼뱅, 존 웨슬리 등 교파교회를 계승한 한국 개신교는 교파교회가 만들어진 역사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다원적 종교적 문화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 교회’는 발생할 수 없는지 궁금하다. 서구의 교파교회만이 왜 한국 개신교 전통이 되어야만 하는가? 한국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그리스도교’가 새롭게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문제제기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자, 천도교학자, 원불교학자 등이 모여 원불교, 천도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의 한국종교를 “종교답게 하기 위한 애정 어린 비판들”이 『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 책은 결국 성경에 근거한 종교적 신앙과 이를 상실한 종교문화의 괴리로 인해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게 만드는 종교현상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5)

변선환은 “아시아 종교들이 텍스트가 되어야 하고 서구 신학적 내용들이 각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촉구하고 나선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아시아 종교들이 텍스트가 되고 서구 신학적 내용이 각주가 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어디에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교 문화의 근저인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관점에서 ‘도의 신학자’인 김흡영은 한국 개신교에서 벌어지는 서구 신학의 대리담론에 각성을 촉구한다. 즉 한국 개신교는 서구신학의 구원론, 원죄론, ‘말씀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논쟁’, ‘번역신학의 경향’, 로고스신학과 프락시스 신학의 이원화‘, 교회론적, 인식론적 수준의 신학“은 재고되어 한국의 주체적인 신학하기를 주장한다.(6) 이를 위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할 작업은 무엇일까?

필자는 새 축 시대를 준비하는 한국 그리스도교는 

1) 성서를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의 맥락에서 형성된 ’교리와 신학‘에서 탈피하여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에서 새롭게 읽기, 
2) 성서를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으로 회통적인 성서해석을 하기 
3) 성서와 제도그리스도교의 괴리된 ’영성적 거리‘를 축소시키기 위한 종교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금도 일부 직업종교인은 한국 종교계의 혁신을 위한 종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을 위한 운동‘인 종교이벤트행사가 아니라 핵심담론을 포함한 지속성이 담보되는 종교운동이어야 한다. 핵심담론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사참배의 역사적 참회, 그리고 성전매매와 성전세습의 근절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두 과제는 실추된 제도종교의 종교적 권위를 일거에 회복할 수 있는 종교적 행위이다.

새 축 시대는 성경을 읽고 실천하는데서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의 성경읽기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변찬린은 ‘교리와 신학’에 의해 왜곡된 그리스도교 문화의 본질적 훼손을 ‘성서’를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서구신학의 바탕이 된 성서해석을 텍스트로 삼고, 이로 형성된 서구 ‘신학과 교리’가 각주로 된 그리스도교 문화가 한국 종교문화의 맥락에서 소화도 되지 않은 채 이식되었다고 한다. 변찬린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의 근간을 이룬 성서해석 자체에 대한 해석학적 전환을 시도한다. 즉 성서를 새롭게 읽어 교리화된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해 보자는 것이다. 성서를 텍스트로 삼아 다종교적 언어의 전통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성서’를 새롭게 읽어 새 문명의 사유체계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종교혁명의 대선언이다. 그 종교적 주장이 “성경과 교리화된 기독교를 혼동”하는 데서 탈피하자는 선지자적 목소리이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과 ‘교리와 신학’에 의해 형성된 제도종교 문화와의 영성적 거리를 좁히는 첫 걸음이다.


우리는 이날까지 성경해석을 서구 신학자들의 방법을 무조건 답습(踏襲)했고 모방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신학과 교리를 소화도 하지 못한 채 포식(飽食)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서양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교리만이 진리의 전부요 성경 해석의 방법이지 그 밖의 것은 이단으로 정죄하고 타매(唾罵)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서구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입한 교리와 교파의 잘못된 선입관념을 버리고 빈 마음자리에서 성경을 다시 읽자. 우리는 성경과 교리화된 기독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 = 기독교라는 등식에서 빨리 해방되는 길만이 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성신과 해후할 수 있는 첩경임을 대각(7)해야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486.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 속에서 쓴 〈성경의 원리〉 상·중·하 세 권은 두 사이비 종교 (기독교와 맑스교)의 괴뢰로 전락된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제출한 나의 피 묻은 각서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한국신학연구소, 2019, 10.


위의 발언에 대해 ‘성서’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이해관계자는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교학, 신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은 학문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의 비평과 텍스트로 인해 형성된 텍스트문화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터 위에 지식의 고고학을 형성한다. 비평이 없거나 비평을 허용하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다. 동시에 성경의 정신과 상당한 영성적 거리를 가진 종교문화를 비평하는 것은 해당 종교의 건전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교 종교문화는 건전한 비평과 진실된 종교선전이 균형을 이루기보다는 호교론적이고 선교론적인 글이 넘쳐난다.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화될 수 있는 우월성이 가려져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의 본질과 정신이 서구 신학에서 ‘교파와 교단과 교리’를 통해 고착되어가는 그리스도교 문화와의 괴리현상에 대한 비평은 한국 그리스도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8) 특히,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의 역사적 과오와 교회매매와 교회세습은 이 시대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신앙의 근저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성모독을 한 한국교회가 진정한 참회없이 어떤 종교적 권위로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또한 기복신앙과 자본신앙에 경도된 그리스도교의 종교문화는 성서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현상임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혁신의 목소리가 한국교회에 작동하고 있는지 여부는 교계 내부에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순교의 정신과 고난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로 성장할 때 종교적 영성의 상징이었다.

주류 직업종교인은 ‘교리와 교학’을 통한 정교한 의례체계로 제도종교의 유지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창교자의 언행이 종교문화에 생동하고 있지 못한 현실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그럼 어떻게 새 축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새롭게 읽어야 할 때이다. 변찬린은 성서와 그리스도교 문화에 국한하여 이렇게 진단한다.
무출구(無出口)의 현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 시대를 뚫어보는 깬 자라면 마땅히 산으로 퇴수해야 한다. 현대의 산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올라야 할 산은 히말라야산도 시내산도 계룡산도 아니다. 성경은 상징의 아아(峨峨)한 영산(靈山)이다. 이 산에 입산하여 서양의 지혜에 의해 잘못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풀어야 한다.
(중략)
예수가 승천하고 사도들이 순교한 후 진리의 정맥은 지하깊이 스며들고 역사의 지표에는 연원을 잃은 온갖 교파들이 백강(百江)의 흐름처럼 아집과 독선의 탁류(濁流)를 일으키면서 도도(滔滔)히 흘러갔다.
생명수의 뿌리를 잃고 온갖 교리로 절단된 삽목(揷木)들이 나라와 민족과 풍토와 습관에 따라 심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의 진리가 로마에 이식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곡해되고 헬레니즘과 혼음한 후 기독교(가톨릭) 라는 옷을 입고 서양화된다. 모든 고등종교는 동양에서 발아(發芽)되어 정과(正果)를 맺었다. 성경도 동양의 심성 속에 계시된 평화의 문서인데 피묻은 서양의 가위로 오리가리 재단(裁斷)되어 사과(邪果)를 맺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길 원했으나 쓸개 포도가 된 것처럼….
그리하여 성경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착각이 2천 년 동안 지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이 엄청난 미망과 허위와 독단을 타파해야 한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한국신학연구소, 2019, 9-10.


새 축 시대의 성경읽기는 글의 맨 앞에 제시된 [표 1, 새 축 시대의 구도자의 강령]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성경은 구도자의 입장에서 본향을 찾아가는 문서로서 읽혀져야 하며, 제도종교는 성경의 정신을 공동체성으로 구현하는 지향점을 가질 때에만 존재근거가 있다. 만일 그 심각한 부조화의 간격을 극복하지 못하는 제도종교는 역사의 유적으로 남을 뿐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의 정신과 제도종교문화의 영성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건강한 종교적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코로나 판데믹 시대의 제도종교가 관습과 관례의 굴레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는 역사적 고아로서 후세는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의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운동의 기수로서 기록될 것인지는 이해관계자의 실존적 결단에 달려있다.

새 축 시대의 종교인은 혼합과 융합, 혼잡과 회통을 혼돈하는 지점에 배타적인 종교담론을 형성하지 말고 ‘포월적 상생’할 수 있는 포용의 준거점을 설정하는데서 새 축 시대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이다.

미주
(미주 1) 이 글의 논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길희성은 탈종교시대가 지향해야할 바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길희성, 『종교에서 영성으로』, 북스코프, 2018.
(미주 2) 이호재, 『한밝 변찬린(한국종교사상가)』, 문사철, 2017. 이 책의 제1편에서 개념을 도입하여 이런 맥락하에서 본문을 전개하고 있다.
(미주 3) 서양 종교문화에서 종교를 지칭하는 religio’는 신과 인간사이에 단절된 관계를 연결시켜 준다는 그리스도교적 환경에서 만들어 졌으나, 이 ‘religio’가 1869년 독일과 일본의 두 나라가 통상협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종교라고 번역되었다. 종교는 벽암록에서 첫 출전을 보이며 ‘중요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학자들은 종교를 능가경의 싯단타(siddhanta), 즉 ‘성취하여 완성하다’는 싯다(siddha)와 ‘끝내다’라는 안타(anta)의 뜻을 차용하여 번역하였다. 
최종석,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 민족사, 2017, 5-8.
(미주 4)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11.
(미주 5) 사실 한국종교가 가진 다양한 문제점에 대한 글은 호교론적인 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건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 글들은 건강한 종교문화가 형성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을 참고할 것: 
  • 김근수 외, 『지금, 한국의 종교』, 매디치미디어, 2016; 
  • 김광식, 『새 불교운동의 전개』, 도피안사, 2002; 
  • 이정배, 『두 번째 종교개혁과 작은교회운동 : 종교개혁 500년 이후, 기독교의 한국적 재주체화를 위하여』, 동연, 2017; 
  • 이오갑, 『한국 기독교 개혁의 태마 20』, 한들출판사, 2002; 
  • 김영철, 『목회자가 사는 길: 하나님 앞에 선 노목사가 후배 목회자들에게 전하는 애끓는 당부』, 아바서원, 2013.
(미주 6) 김흡영, 『도의 신학 Ⅱ』, 동연, 2012, 27-41.
(미주 7) 인용글의 고딕체는 필자가 강조를 위하여 표시함.
(미주 8) 이호재, 〈한국교회에는 올바른 교회론이 있는가-건물 교회에서 인격 교회, 인격 공동체로〉, 《뉴스앤조이》, 2019, 11.5; 같은 필자, 〈한국교회, 새로 시작해야 한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새 문명을 선도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하여〉, 《뉴스앤조이》, 2020, 11.2.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2021/06/28

알라딘: 평화와 평화들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 이찬수

알라딘: 평화와 평화들
평화와 평화들 -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평화교실 1  
이찬수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6-05-28

책소개


평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다르다 보니 갈등이 싹트고 이러한 갈등은 때로 폭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저자는 개인 또는 집단이 각자 정의 내리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는 평화가 제각각인 것을 긍정하고 이를 조화롭게 다져나가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 책은 평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다양성이 갈등이 아니라 조화로 나아가도록 하는 탄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인문학자로서 평화인문학의 여섯 가지 실천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 비평화적 구조와 상황 속에서 받은 상처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해명이다. 둘째는 비평화 내지 폭력으로 인한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의 심화이다. 셋째는 성찰과 소통 능력의 강화를 통한 윤리적 실천, 넷째는 폭력 축소를 위한 평화학자로서의 윤리적 책임이다. 다섯째, 오랜 갈등으로 인한 상처와 증오, 분노를 치유하는 데 기여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학문적 시도가 미래의 평화질서와 현실적 형화공동체를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데 밑그림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 평화문맹의 시대 - 평화인식론과 평화다원주의
- 평화인문학을 위하여

Ⅰ부 평화 개념의 해체와 재구성

제1장 평화라는 말의 심층
- 개념의 바닥까지 내려가라 - 평화 규정에 평화는 없다
- 정의로 평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 주어는 술어에 종속된다
- 평화는 술어다
- 주어와 술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제2장 평화와 평화들, 인식의 다양성과 평화다원주의
- 평화는 복수다 - 평화다원주의
- 자기중심적 평화주의 - 평화들 사이의 문
- 평화를 위한 덜 폭력적 수단

제3장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
- 사회적 비도덕성의 이유 - 폭력으로 폭력을 줄이기
-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 - 폭력을 줄이는 동력, 공감
- 활사개공의 평화 - 공존과 비빔밥 평화
- 참여적 객관화

Ⅱ부 인간적인 평화와 평화인문학의 길

제1장 동서양의 평화론
- 평화의 개념화 과정 - 정의의 구현과 대동사회

제2장 인간다움을 위한 학문
- 휴머니티스, 서양의 지성적 인문주의 - 人文學, 동양의 도덕적 인문주의
- 아프리카적 인간성, ‘우분투’

제3장 인문학의 저자와 독자
- 전문가주의의 위험성 - 쉽고 깊은 글쓰기
- 삶에 대한 비평 - 평화인문학의 복합성

제4장 평화인문학의 실천적 과제
- 상처의 원인에 대한 해명 - 아픔에 대한 공감력의 심화
- 비판적 성찰과 공감적 실천 - 폭력 축소를 위한 윤리적 개입
- 증오의 치유와 학문의 구도성 - 다원적 평화공동체의 구상

제5장 녹색평화와 목적론적 평화인문학
- 목적론적 평화인문학 - 녹색으로서의 평화인문학
- 한반도발 평화인문학

접기
책속에서
P. 12 진먼다오(金門島)는 중국 대륙과는 불과 2km, 대만 본섬과는 200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대만에 속한 섬이다.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만 당시 중공군이 무려 47만 발에 이르는 포탄을 이곳에 쏟아붓고도, 결국 중화민국군과의 전쟁에서 패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중공군은 1978년까지 이곳에 포탄을 퍼부었다. 그때 떨어진 엄청난 탄피들이 지금은 주방용 칼로 변신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가공할 폭력을 넘어 평화를 이루어 갈 수 있을까. 살상용 탄피를 모아 음식을 조리하는 칼을 만들어 내는 진먼다오의 칼 공장은 이러한 물음에 희망적으로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접기
P. 29 이슬람에서『꾸란』의 의미를 ‘읽기’로 해석하는 것도 혁명은 언어와 개념의 바닥까지 내려간 곳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일본의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佐?木中)가 혁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읽기, 쓰기라고 밝힌 바 있거니와 평화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의 기초도 ‘평화’라는 언어, 기존의 개념 혹은 관념의 바닥까지 뚫고 들어가는 시도와 함께 다져지고 형성된다.  접기
P. 73~74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려고 할 때, 남도 그것을 원하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상호성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나의 사랑을 너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하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남한이 바라는 것을 북한도 바라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상대가 나의 희망과 기대에 맞춰 줄 것을 바랄 수는 있지만, 어떻든 지나치면 폭력이 된다. 이른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상호성을 의식하며 서로의 바람을 수용하면서 평화의 기초가 형성된다는 말이다.  접기
P. 97~98 ‘우리’는 개체들 하나하나가 살아나면서도 공통성의 공유를 통해 승화된 공동주체이다. 밥, 나물, 채소, 고기, 갖은 양념들이 저마다 굳어진 자기동일성에 머물지 않고, 상호 수용과 조화를 통해 개별적 자기정체성을 뛰어넘을 때, 맛있는 비빔밥이 되는 이치와 같다. 비빔밥은 ‘우리’의 존재원리를 비유적으로 설명해 준다. ‘우리’에는 우리를 구성하는 개체들과 이들이 같이할 공통의 그 무엇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주제와 연결 짓자면 그것은 평화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 더보기
최근작 : <통일로 가는 보훈>,<보훈의 여러 가지 얼굴>,<사회는 왜 아픈가> … 총 5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많은 이들이 평화를 원하지만 우리 사회가, 더 나아가 이 세계가 평화로웠던 적은 없다. 왜일까? 자신이 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평화롭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원하는 평화는 저마다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듯 평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다르다 보니 갈등이 싹트고 이러한 갈등은 때로 폭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저자는 개인 또는 집단이 각자 정의 내리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는 평화가 제각각인 것을 긍정하고 이를 조화롭게 다져나가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 책은 평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다양성이 갈등이 아니라 조화로 나아가도록 하는 탄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면서 이 땅에 평화인문학의 포문을 여는 데 일조하고 있다.

평화의 바닥까지 내려가다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는 당시 권력화한 교회 제도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 바닥까지 들어가 보는 과정에서 성서의 언어와 맞닥뜨렸다. 그는 성서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으면서 기존 관념을 꿰뚫어 그 바닥으로 나아갔고 결국 세계 질서를 전복시키는 동력을 그곳에서 찾아냈다. 저자는 스스로 인문학자임을 자각하면서 평화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기존 경계를 넘어 가능한 한 그 바닥까지 천착해 들어갔다. 하지만 저자는 평화에 대해 명확히 개념 짓는 그 어떤 규정도 발견하지 못했고 평화를 설명하기 위해 결국 폭력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평화에 대한 서술은 가능하며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평화인문학의 존재이유이자 이를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의 영원한 숙제라는 것이다.

평화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이다

저자는 평화의 개념을 찾는 과정에서 평화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인간은 서로 다른 환경과 지평 속에서 상이한 해석의 틀을 지닌 채 살아왔고 어쩔 수 없이 평화에 대해서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보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그 의도와 내용과 지향점은 다르다. 저자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경험하는 평화들을 모두 긍정한다. 또한 이들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조화시켜 나가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평화는 일방적일 수 없으며, 쌍방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평화 경험이 다른 사람의 평화 경험과 공유되고 평화 연구가 학제적으로 융합되는 것에서 평화는 싹튼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공유되고 교류하지 않는 평화란 없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평화인문학이 해야 할 일

인간의 삶 전반이 더 인간다워질 수 있도록 하려는 학문이 평화인문학이다. 저자는 인문학자로서 평화인문학의 여섯 가지 실천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 비평화적 구조와 상황 속에서 받은 상처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해명이다. 둘째는 비평화 내지 폭력으로 인한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의 심화이다. 셋째는 성찰과 소통 능력의 강화를 통한 윤리적 실천, 넷째는 폭력 축소를 위한 평화학자로서의 윤리적 책임이다. 다섯째, 오랜 갈등으로 인한 상처와 증오, 분노를 치유하는 데 기여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학문적 시도가 미래의 평화질서와 현실적 형화공동체를 구상하고 만들어 내는 데 밑그림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평화로울 수 없는 한반도적 상황에서 평화는 결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 것임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바닥까지 내려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주어지는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접기

2021/05/30

한국영성예술협회 산하에 [종교평화원](원장 손원영 교수)이 설치






손원영
1tm mfSlpaAonptrisorlecimd ·
(사)KASA_종교평화원 소식-제1회 레페스 콜로키움 개최
올해부터 (사)한국영성예술협회 산하에 <종교평화원>(원장 손원영 교수)이 설치되었습니다. 
종교평화원은 한국사회의 종교 간의 갈등을 줄이고 종교평화를 이루기 위한 일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많은 응원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우선 2021년도 첫 사업으로 <레페스포럼>(대표 이찬수 박사)과 협력하여 매달 한차례 온라인으로 <레페스 콜로키움>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레페스는 "종교"(religion)와 "평화"(peace)를 합친 말로서, 
레페스 콜로키움은 매월 둘째 주 월요일 오후 7시, zoom에서 갖습니다. 
따라서 이번 4월 첫 번째 콜로키움은 아래와 같습니다. 종교평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아래
일시: 2021.4.12.월.오후7시
접속: zoom (ID: 380-389-5679)
주제: 평화와 평화들
강사: 이찬수 원장 (보훈교육원 원장)
참고도서: 이찬수, <평화와평화들: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모시는사람들, 2016)

참가비: 없음 (종교평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

종교평화원장 손원영 올림
#종교평화, #레페스콜로키움, #종교평화원
Paul Dongwon Goh, 이찬수 and 96 others
6 comments
6 shares
Like
Comment
Share

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