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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0

이은선 - 토마스 베리

(2) 이은선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6.10(토)> -횡성으로의 서재 이사와 토마스 베리- 지금까지 횡성과 서울... | Facebook

이은선
14 m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6.10(토)>

-횡성으로의 서재 이사와 토마스 베리-

지금까지 횡성과 서울 부암동으로 오가며 살았는데, 이제 횡성에 더 많이 있기 위해서 서재를 횡성으로 옮겼습니다. 글쓸 일이 있으면 서재가 있는 곳에 머무르며 그곳에 주로 있었는데 이제 그 서재를 횡성으로 옮겼으니 이곳이 더 집이 될 것같습니다.
그동안 손주들에게서 옮긴 감기가 잘 낫지를 않아서 고생했습니다. 병원약이 독해서 그런지 약먹고 더 힘들어서 남편과 나는 약을 끊고 비타민 씨와 유산균 등으로 열심히 노력했고, 이제 거의 물러갔습니다.

횡성 집의 여러 군데를 수선하고, 이층을 서재로 하기 위해 책장도 더 마련하고, 그 가운데서 지난 11월회 국제 퇴계학회 발표문, "퇴계 사상의 '信學'적 확장-참 인류세 시간을 위한 토대 마련하기"라는 글도 수정 보완이 끝나서 이제 곧 나오게 됩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누라는 심사자들의 권고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횡성에 와서 첫번째로 읽게 된 책이 토마스 베리의 평전이네요. 두 여성 제자가 쓴 평전에 
그가 어떻게 어린 시절 깊은 자연의 경험 속에서 먼저 세계 다양한 종교와 문명에 관심하게 되었고, 그것이 지구 전체의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확장되었는지를 밝혀줍니다.
 '위대한 과업 (great Work)'에 대한 의식을 떼이아르 드 샤르뎅으로부터 얻고, 그 실현을 위한 사명감으로 지구와 인간을 다시 이어주고자 94세까지 지구학자로 산 이야기입니다.

제국주의 착취와 아메리컨 인디언 학살의 서구 미국인이 아닌 동아시아 종교 문명권의 한국인으로서 인류세와 그것의 정의로운 방향, 그에 대한 두렵고도 떨리는 성찰을 한국학으로 하는 일이 저의 관심입니다. 

마침 작년 변선환 출교 30년을 맞아 있었던 행사에 이어서 한국의 거의 모든 종교와 교파의 벽을 넘어서 40여 분의 사유가들이 함께 쓴 책이 나왔습니다. 남편 이정배 교수가 그 책을 받으러 어제 먼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또 하나의 위대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장벽을 이겨내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종교와 문명의 갈 길을 40여명의 다양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으니요!

아침 일찍 산책하며 새소리와 벌레 소리, 나무 사이와 풀섶을 걸으며 앞으로의 시간과 있을 일들을 생각합니다. 사람에게서의 변화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곳에 와서,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줄 다른 자연의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도하며, 그동안 변화의 일을 친구들께 잠깐 보고드립니다. 이사와 정리에 힘을 보태준 동생과 여러 인부들, 이웃들께 감사합니다.
이제 손주들도 커가니 그들이 부모와 떨어져서 스스로 이곳에 머무르며 자연을 사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오래전 세종대의 한 제자가 선물한 저의 학문적 첫사랑 테이아르 드 샤르뎅의 사진을 다시 횡성 서재에 걸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위해 기도합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한국염

토마스 베리에 대해 어디선가 회자되어 짧게 읽은 적이 있는데, 전기가 있군요.

2023/05/24

"타자를 악마시하는 개신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정배 교수 독서 여정①

"타자를 악마시하는 개신교는 살아남을 수 없다" < 기독 지성에게 듣는 책과 인생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타자를 악마시하는 개신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인터뷰] 이정배 교수 독서 여정①
기자명 강동석
승인 2017.07.20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거리의 신학자', 이정배 교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 교수로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다 지난해 초 은퇴했다. 정년을 다 채우지 않고 은퇴한 것은 학교 밖을 교회 삼아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세월호 이후 집회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각종 행사와 집회에서 기도하고 설교했다. 2015년에는 감신대 정상화를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뒤로멈춤앞으로

이정배 교수는 누구보다 '토착화 신학의 산실' 감신대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신학자다. 윤성범 박사, 변선환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토착화 신학의 맥을 잇기 위해 바젤로 유학을 갔고, '개신교와 유교'를 공부했다. 같은 신학자인 아내 이은선 교수도 함께였다. 이미 30년 전부터 개신교 신학과 생태학, 과학, 이웃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글을 써 왔으며, 늘 한국적 신학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의 관심 분야는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개신교 신학자로서 대안을 만들고 길을 내는 일로 수렴된다. 다양한 주제로 수십 권의 책을 펴냈다.

이어지던 빗줄기가 잠시 잠잠해진 7월 11일, 서울 부암동 현장아카데미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쉰 목소리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는 또렷이 살아 있었다. 오늘날 이정배 교수를 만든 사유의 궤적을 두 차례 인터뷰로 나눠 싣는다. 먼저 신학교에 들어가고 유학을 갔다 온 뒤 '한국적 생명신학'을 논하기까지의 여정을 듣는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글쓰기와 설교, 종교개혁 500주년과 세월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눌 것이다(2부 인터뷰 바로 가기). 2시간여 대화를 정리했다.

서울 부암동 현장아카데미에서 이정배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평소 책을 어떻게 읽나.

다독(多讀)하는 편이다.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빠르게 1번 읽는다. 내용의 대강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읽더라도 1번 읽으면, 머릿속에 내용이 어느 정도 남는다. 그러면 2번째 읽을 때 어떤 책인지 알고 읽게 되니까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책은 되도록 한 번에 읽으려 한다. 1,000쪽 정도 되는 책도 3~4일이면 읽는다. 열흘이나 보름 넘게 읽으면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더라.

대부분 책은 빠르게 한 번 읽고 말지만, 10권 중 3권 정도는 깊게 숙고하고픈 책이 있다. 그런 책은 읽으면서 노트에 정리한다. 요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정리하는 것이다. 논문이나 글을 써야 하니까 이런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요즘에는 졸업논문을 안 쓰고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으나, 우리 때는 무조건 논문을 써야 했다. 400자 원고지 50매를 채워야 했는데,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학사 논문을 쓰면서부터 내용을 정리하며 독서하게 됐다.

- 어렸을 적부터 책을 많이 읽었나. 독서 습관을 들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는 독서의 즐거움을 늦게 알았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은 대학교 1학년 때다. 의사이자 소설가인 조지프 크로닌(Archibald Joseph Cronin, 1896~1981)이 쓴 소설 <천국의 열쇠>(바오로딸)를 읽고부터였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신부가 등장한다. 주변에서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부와, 그와 대조적으로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실하게 소명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치숌이라는 신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흥미롭게 읽었다. 처음으로 독서의 즐거움을 준 책이다. 신학도로서의 소명을 깊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당시 200원이면 문고판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었는데, <천국의 열쇠>를 읽은 이후로 당장 읽지 못해도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웬만하면 다 사 모으려고 했다. 책을 발견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사는 것은 하나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책과의 만남을 귀하게 생각했다. 현재는 감신대에 종교철학과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대신 종교철학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을 비롯해 유명 철학자들 책을 친구들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 기독교 학교인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안다. 그 시절 읽은 책 중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나.

고등학생 때 읽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의 생애에 대한 책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였지만, 당시에는 잘 모르고 읽었다. 학교에 액자로 걸려 있는 위인 중 한 명으로 슈바이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림의 성자', 의사인 줄만 알았다. 그때는 안창호와 슈바이처의 삶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특별한 소명이 있었던 것인가.

특별한 소명이 있어서 신학교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식구들이 충북 보은으로 이주했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 어머니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했다. 아버지는 유교인이었고, 어머니는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토속신앙인이었다. 기독교 배경이 없는 집안에서 기독교 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 시절 6년간 아주 열심히 활동했다. 종교부장을 비롯해서 학교 임원, 학생회장까지 맡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영락교회 중등부에서 3년간 생활한 것도 큰 추억거리다.

고등학교 입학 후 평동교회를 다니면서 평생의 스승 장기천 목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나중에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낸 분이다. 아주 올곧은 분이셨고, 이분이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모습과 평소 행실을 보면서,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하는 저런 삶이 목사의 삶이라면 나도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신대에 진학했다.

감신대에 들어와서는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다. 감신대를 다니고 있을 때, 감리회 감독 선거가 있었다. 목사들이 모여서 160번 넘게 투표를 했다. 투표를 할 때마다 다 같이 기도했다. 기도하고 투표하고, 기도하고 투표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렇듯 목사들이 기도했는데 한 사람 마음도 움직여지지 않아 표가 그대로였다. 단 1표도 요동하지 않았다. 감독은 결국 그 자리에서 뽑지 못했고, 감리회는 양분됐다. 그 모습을 보고 심한 회의를 느꼈다. 기도가 거짓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 군대나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친구와 군대 가기 전에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 그 친구는 군대를 갔는데, 나는 안 갔다. 그때가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변선환 교수가 부임해 왔다. 그분과의 만남이 신학교에 계속 남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총학생회장도 맡고, 변선환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이다.

- 시기별로 전환점이 됐던 책을 소개해 달라.

먼저 대학교 때 읽었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철학적 신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을 들 수 있다. 야스퍼스는 이 책에서 '차축 시대' 개념을 이야기한다. 보통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절대적인 한 점으로 인식된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것으로 광명이 찾아온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가 오기 전까지 이 땅을 총체적 어둠이라 여겨 왔다.

칼 야스퍼스는 이런 기독교 계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예수가 오기 전, 다른 종교들이 싹텄던 기원전 8세기부터 2세기까지의 '차축 시대'를 이야기한다. 갑작스럽게 홀연히 한 빛이 비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계사적으로 제(諸) 문화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종교성이 발현되는 응축적인 시기가 있었다. 기독교 역시도 '차축 시대' 종교의 발전적 양태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당시 예수를 믿어 구원받지 않으면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간다는 신앙 이해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다른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기독교에 입문하지 않은 가족들이 지옥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야스퍼스는 철학에도 신앙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계시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신념 때문에도 죽을 수 있는 신앙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주장해 종교재판을 받았다가, 그 자리에서 지동설을 부인하고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과학자인 갈릴레이뿐 아니라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신부도 재판을 받았다. 수학자면서 신부였던 브루노는 갈릴레이와 달리 지동설에 대한 주체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하나의 객관적 지식으로 봤다. 지동설이 이미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사실관계는 바뀌지 않으니 살아남기 위해 지동설을 부정한 것이다. 브루노는 철학(주체)적 신념을 지키려고 지동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도 순교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야스퍼스는 주체적 자기 확신도 신앙의 영역에 편입시켰다. 이것 역시도 기독교 계시 신앙만큼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은 학사 논문의 주제였다. 대학원 시절에는 야스퍼스 철학을 신학화한 프리츠 부리(Fritz Buri, 1907~1995)를 공부했다. 당시 변선환 교수는 바젤대학교 프리츠 부리 교수 밑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온 상황이었다. 프리츠 부리 교수의 신학은 칼 야스퍼스와 슈바이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부리 교수는 슈바이처에 대한 존경 때문에 신학 공부에 뛰어들었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 이해인 '철저 종말론'를 논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철학자 야스퍼스를 교회의 교사, 교부 반열에 세울 정도였다.

다시 말해 칼 야스퍼스는 기독교 계시 신앙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실존에 근거해 '철학적 신앙'을 이야기했고, 부리 교수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토대 위에서 슈바이처의 신학을 연결 지었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예수는 실제로 종말이 곧 올 것이라고 믿었으나 종말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곧바로 오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인식이 아닌 '의지의 권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의 의지와 내 의지가 결합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존재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슈바이처에게서는 이것이 생명 외경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슈바이처 본인이 아프리카로 향한 것은 이 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부리 교수는 동양 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슈바이처가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주제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저마다 생명 외경을 말한다고 믿은 탓이다. 하지만 동양 종교들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계시 신앙 차원에서가 아니라 윤리의 철저성 여부에서 비롯했다.



한쪽 서가에 자리한 때 묻은 책들. 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과 프리츠 부리 교수의 저서가 섞여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감신대에서 석사를 마친 우리 부부에게 변선환 교수가 윤성범 박사의 토착화 신학(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의 맥을 이으라며 유학을 권해 바젤로 유학을 떠났다. 토착화 신학을 할 수 있는 신학 방법론을 부리 교수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바젤은 유럽에서도 특수한 곳이다. 모두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를 정신 나갔다고 믿었을 때, 니체에게 강단을 내줬고, 칼뱅(Jean Calvin, 1509~1564) 당시 제네바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을 지켜 준 도시다. 그런 의미에서 휴머니즘의 도시라 일컬어진다.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협조하지 않고 도망친 칼 야스퍼스를 대학교수로 세웠다. 티베트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유럽 도시로도 유명하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바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당시에 대세였다. 그가 물러난 이후 바젤에 세 가지 흐름이 생겼다.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 동양 종교와의 대화, 전통 교의학이었다. 내가 유학 갈 당시 프리츠 부리 교수는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 1929~2013)와 더불어 동양 종교와 대화에 관심이 있는 70대 학자였다. 앞서 변 교수를 통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방법론을 알고 있어서 우리 부부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려움 없이 6년 안에 박사를 마칠 수 있었다.

프리츠 부리 교수는 칼 바르트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때, 바젤대학교에 와서 고유 영역을 개척했던 사람이다. 칼 바르트는 프리츠 부리 교수가 바젤에 오는 것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바젤은 프리츠 부리를 초빙했다. 우리 부부는 유학 생활 대부분을 신학자인, 칼 바르트 둘째 아들 집에서 지냈다. 신학적 이해가 다른 우리 부부를 일원으로 받아 준 것이다.

나는 '토착화 신학의 관점에서 본 신유학과 신개신교 간의 공동의 구조와 문제점 탐색'이라는 박사 논문을 썼다. 유학자 3명(주희, 퇴계, 율곡)과 신학자 3명(슐라이어마허, 헤르만, 트뢸치) 총 6명을 다뤘다. 유교와 기독교가 다른 종교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과 인식론 그리고 윤리를 말하는 과정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그 구조를 탐색한 논문이었다. 논문 평가도 까다로웠다. 유학자 1명과 한글과 한문을 아는 외국 학자 1명이 추가로 참여해 평가했다.

박사 논문을 썼다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박사 논문이 아니라 그때부터 무슨 책을 읽고 어떻게 뻗어 가느냐다. 그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 이 시절, 내가 배운 제일 중요한 점은 기독교는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적 에토스를 배웠다. 이 배움이 내 삶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86년, 한국에 들어온 뒤 제일 먼저 나한테 영향을 줬던 책은 물리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Carl Freidrich von Weiszacker, 1912~2007)가 쓴 <시간이 촉박하다>(대한기독교서회)이다. 1990년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서울 세계 대회를 앞두고, JPIC를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쓴 책이다.

그는 세계의 분배 불균형과 핵무기 과다 보유, 지구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 JPIC 문제들을 책임지지 않으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멀었다고 지적했다. JPIC 문제가 세계와 자연 생태계에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 종말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오늘날 세계가 굉장한 환경 위기에 처해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JPIC에서 Justice(정의)는 1세계와 3세계 간의 문제다. Peace(평화)는 핵무기의 문제다. 1세계와 1세계의 문제인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Integrity of Creation(창조질서의 보존)을 이야기하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전 세계 공통 문제인 탓이다. 이때 토론 과정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생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생태학을 하다 보니, 자연과 여성의 운명이 거의 동근원적으로 인식돼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연은 늘 여성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고대에는 어머니, 중세에는 마녀, 근대에는 창녀 이미지로. 여성 인식도 그렇게 변했고, 자연 이해도 그런 메타포로 바뀌었다. 근대에 와서는, 남성이 돈으로 사서 마음 놓고 짓밟고 유린할 수 있는 존재(창녀)로 이해된 것이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같은 사람이 창녀 메타포로 자연을 이해했다.

그러다 보니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생태여성학)도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과 종교의 주제가 신학계에 널리 확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학사나 과학과 종교에 대한 책을 몇 권 번역하면서 생태학에 대한 관심이 여성학에 대한 관심으로,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JPIC를 근간으로 이쪽 분야 독서량이 늘어나면서 관심이 많아졌고 논문도 많이 써 냈다.

내가 번역한 것 중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책 두 권이 있다. 먼저 데이비드 린드버그(David Lindberg, 1935~2015)가 쓴 <신과 자연: 기독교와 과학 그 만남의 역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이다. 신과 자연은 기독교 계시의 두 지평이었는데, 기독교는 자연을 잃어버리고 신만의 종교가 됐다. 따라서 기독교는 다시 자연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과학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엔트로피>(세종연구원) 저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의 <생명권 정치학>(대화출판사)이다. 이 책은 로즈마리 루터(Rosemary Ruether, 1936~)를 비롯한 기독교 여성 신학자에게 신학 콘텐츠를 많이 제공했다. 이 두 권을 번역할 때 제자 박일준 박사 도움이 컸다.

생태학 문제는 결국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려면 현대 과학의 흐름을 잘 알아야 한다. 물리학자들이 자기 영역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종교적이 되어 가는 현실을 봤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은 종교와 다른 종교의 만남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 흔히 양자 간에 공명론(consonance)적 방식이 통용된다.

아주 잘못된 만남의 결과물로 창조과학이 있고 그것이 발전한 형태가 지적설계론이다. 이 두 가지는 과학도 종교도 아니다. 지적설계론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설계됐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무수한 장애인과 동성애자가 신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는 말인가. 너무 가혹하다.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축복일지 모르겠으나, '정상'을 벗어나면 그처럼 가혹한 일도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이 기독교(창조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동성애 문제도 신앙이나 종교나 기독교 문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과학의 문제다. 자연 생태계에는 동성애 성향을 지닌 생명체가 8~10%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자연 생태계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다는 것이 생태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 1940~)의 말이다. 이들을 부정하고, 잘못된 시각으로 동성애자들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어둠으로 내몰린다. 그렇게 내몰고 있는 역할을 기독교인이 자처하고 있다.

천동설·지동설 문제가 성경 구절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동성애도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계속 성서 구절 문제로만 본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종교를 해방할 수 있다. 물론 종교가 과학을 해방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 인공지능이 존재하고 기계와 인간이 섞이는 시대가 됐다. 이것도 사실 유전자 조작 문제와 관련 있다. 유전자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과학에 대해 신학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은 과학의 개벽을 정신의 개벽이 못 따라가는 상황이다. 과학의 개벽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신학자들이 논의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외계인도 신학의 주제가 될 것이다. 한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가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 우주 전체의 크기를 비교하면서 든 비유가 있다. 지리산 크기가 전 우주의 크기라고 한다면, 태양계는 지리산 자락에 떨어진 인간의 눈썹 한 가닥 정도의 크기라는 말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지구와 인간 중심적인 사유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태양계와 같은 은하수가 수십억 존재하는 대우주를 발견했기에 신학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자꾸만 편협한 자세를 취한다면 신학은 점점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스스로 위태롭고 무너질 것 같으니까 바깥에 적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 신학과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슬람, 동성애, 종북, 좌빨이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자기 영역을 좁게 만들고 타자를 악마시하고 있다. 그렇게 한다면 앞으로도 기독교인 수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세월호 관련 서적들(위)과 이정배 교수의 저서와 역서 일부(아래). 뉴스앤조이 최승현

토착화 신학을 공부해 왔지만, JPIC 영향으로 서양의 생태학, 여성학,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공부하다 보니 우리 것에 대한 관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뿌리 깊이 깨달았다. 서양의 자연, 서양의 생각만 공부하지 않고, 동양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좋겠는가, 고민이 다시 생겼다. 생태학적 지평에서 토착화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토착화의 지평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예컨대, 윤성범 박사가 조상의 효, 하늘의 효를 말했다면 나는 생태학 관점에서 땅에 대한 효(地孝)를 생각하게 됐다. 풍수지리설에 대한 생태신학 연구도 이때쯤 시작했다.

그때까지 서양 것에 대한 공부(생태학, 페미니즘,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고, 이를 토착화 신학의 내용으로 동화했다면 이후에는 민중신학의 정치적 토착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가 시대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민중신학이 관심을 보이고 있던 동학에 대해 여러 편 논문을 쓴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후 유교 전통을 진일보시켜 대중화·서민화한 동학에 대한 관심이 점전 커졌다. 그렇게 동학, 민중신학을 공부했다. 다석 유영모와 바보새 함석헌에 대한 글도 그 연장선상에서 여러 편 생산했다.

그런데 당시의 2세대 민중신학은 안병무 교수와 서남동 목사의 영감이 넘치는 1세대 민중신학과 달랐다. 마르크스적인 민중신학이 주된 흐름이었던 탓이다. '과학적 민중신학'이라는 이름하에 1세대에 비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했다. 토착화 신학 전통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수용하고, 서구 생태학을 아시아적 토양에서 다시 논하는 방식으로 '한국적 생명신학'이라는 화두를 만들어 냈다. '한국적 생명신학'은 토착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민중신학과 생태신학과 문화신학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사유의 틀을 가지고 서양 생태신학 개념을 담았고, 민중신학도 수용할 수 있었다. 이로써 변선환 교수의 종교해방신학이 말하는 해방의 차원을 우주 생태적 지평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런 결과물이 1996년 <한국적 생명신학>(감신)으로 출판됐다. 민중신학과의 갈등과 투쟁, 서양 신학을 넘어 보겠다는 토착화 의식의 결과물이다.

거듭 말하지만, 2000년에 접어들면서 유영모, 함석헌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학창 시절은 물론 교수 초년 시절에도 다석 유영모를 배워 본 적 없었다. 마침 다석의 제자 김흥호 목사가 이화여대를 은퇴하고 감신대 명예교수로 오면서, 그분과 독대하며 다석 사상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공부해서 출간한 다석 유영모에 관한 책이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사람들), <빈탕한데 맞혀놀이>(동연)다.

나는 다석 유영모의 예수 이해를 케리그마 이전 예수, 곧 역사적 예수가 불교의 삼재론(三才論) 틀에서 토착화한 것으로 풀었다. 서구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도 동양적 사유로 기독교를 이해했던 다석 같은 사상가가 얼마나 귀한지 다시 알게 됐다. 신학을 하는 데 있어 다석 유영모를 알게 된 것은 또 하나의 패러다임 시프트였다.(계속)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동석 (기자에게 메일 보내기)다른기사 보기

2021 최성수 | 통전적 신학에서 ‘통전’ 개념의 의미와 그 기제(mechanism)에 관한 연구

  장신논단 Vol. 53 No.1

〈한글 초록〉

본 논문은 신학함의 한 방법을 규정하는 “통전(統全 holistic)” 개념의 다양한 용례에 따른 의미를 파악하여 통전의 기제(機制 mechanism)를 밝힘으로써 통전적 신학의 외연 확장에 공헌하고자 한다. 

신학과 교회에서 ‘통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위일 체’처럼 특정 의미를 전달할 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의미 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통합, 종합 등의 의미로 혼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관건은 무 엇을 말하려고 ‘통전’을 만들어 사용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종합 혹 은 통합의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먼저 통전 개념을 이해하는 두 가지 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전

제한다. 신학 방법론으로서 구속력 있는 의미를 얻기 위해 ‘통전’의 성경적 용례를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여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과 또 “통전적 신학”을 처음으로 주장한 이종성의 용례에서 통전의 전형적인 의미를 확정하고 상술하려는 것이다. 이런 시도로 통전 개념의 의미가 어느 정도 조명되는 건 사실이나 전형적인 의미 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이미 이종성 이전에도 사용된 적 이 있고 또 오늘날까지도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 다. 개념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확정하기 전에 다양한 용례들에 대한 비판적인 고 찰이 선행해야 한다.

본 논문을 통해 필자는 먼저 철학과 신학에서 사용된 ‘통합’과 ‘종합’의 의미

의 한계를 지적하고 신학적 방법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통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밝히고자 한다. 통전의 기제를 밝히지 않으면서 통전을 신학적 방법론으로 삼는 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전의 구체적 작용 방식을 밝히기 위해 한의학자로서 동서양 융합의학 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고 또 의학적 신학(medical theology)의 구성에 전념하면서 통전 이해에서 주목할 만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 는 최서형의 견해를 소개할 것이다. 


주제어*

통전, 통전적 신학, 통전의 기제(기전), 페리코레시스, 유기적 관계

최성수 | 통전적 신학에서 ‘통전’ 개념의 의미와 그 기제(mechanism)에 관한 연구 DOI: 10.15757/kpjt.2021.53.1.005

Ⅰ.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은 신학함의 한 방법을 규정하는 “통전(統全)” 개념의 신학적 지형도 를 밝히고 이것의 다양한 용례에 따른 의미를 파악하여 통전의 기제(機制 mechanism)를 밝힘으로써 통전적 신학의 외연 확장에 공헌하고자 한다. 

‘통전’이 신학과 교회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 영어 (w)holistic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 역시 다른 용례인 integrity의 번역어 로 ‘통전’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 정확하다 볼 수 없다. 처음부터 특정 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 사용한 조어인지도 확실치 않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은 개념이라면, ) “통전”은 ‘삼위일체’처럼 특정 의미를 전달할 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일종의 전문용어이기에 불투명한 단어 자체의 뜻을 밝히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다양한 맥락의 용례를 살펴서 종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권장한다. 이것은 먼저 통전 개념을 이해하는 두 가지 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전제 

한다. 곧 신학 방법론으로서 구속력 있는 의미를 얻기 위해 ‘통전’의 성경적 용례를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여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이나 ) 또 “통전적 신학”을 처음으 로 주장한 이종성의 용례에서 통전의 전형적인 의미를 확정하고 상술하려는 것이

다. 이런 시도로 통전의 의미가 어느 정도 조명되는 건 사실이나 전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앞서 각주 1)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이종성 이전에 이신(본명 李萬修, 1927~1981)이 사용했고 또 오늘날까지도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통전’ 이해의 철학적 맥락을 기술하고, 신학에서 사용된 ‘통전’ 

개념의 다양한 의미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끝으로 신학함의 방법론으로 적합하 다고 여겨지는 통전 개념의 실천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특히 통전 개념이 신학적 맥락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 그 기제를 밝히기 위해 필자는 융합의학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고 의학과 신학의 관계를 정립하려 노력하는 최서형 )의 ‘통전’ 개념을 통전적 신학의 한 방법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그동안 통전적 신학 연구에서 특별히 주목하 지 않았던 통전의 기제, 곧 통전이 하나의 원리로 현실 문제 해결에 구체적으로 어 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히는 일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전 개념의 외연을 넓 힐 뿐만 아니라 또한 통전을 실제적인 신학 방법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목할 가치 가 있다고 생각한다. 

 

Ⅱ. 본론 

1. 통전 개념의 철학적 맥락

진리를 직관하는 일과 통합적 사고에 익숙한 동양과 달리 분석적 사고를 선호 하는 서양은 세계의 단절과 지식의 파편화를 막기 위해 종합을 철학의 과제로 삼 았다. 여기서 거대 담론 혹은 대서사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표방하며 ) 절대적 의 미의 진리를 부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큰 장애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진술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것의 기술적 사용에 관심을 두는 사조로 본다면, 이는 무엇보 다 불변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의 전통과 철저한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 학이 겪어야 할 혼란은 컸다. 따라서 그 적절성에 관한 논의는 지금까지도 각 분야 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 강조되는 통합 연구, 융합 연구, 학 제 간 연구 등의 경향을 생각하면, 현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거대 담론의 필요성이 다시금 제기되는 건 아닌지 싶다. 따라서 통전의 신학적 이해를 위한 철 학적 배경을 살펴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철학은 경험 세계에서 현상과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 다. 현실에서 관찰한 것을 분석하고, 또 분석한 것을 종합하여 실재를 인식 혹은 포 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는 ‘보편’, ‘원리’, ‘존재’, ‘본질’ 등의 의미에 가깝다. 부분이 아니고, 나뉘지 않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전체’ 이미지에 가깝다. 철학을 세계를 보는 관점 곧 세 계관(worldview)과 같은 의미로 보는 까닭이다. 플라톤에서부터 현대철학에 이르 기까지 숱한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지금까지 실재를 인식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는 변증법적 (dialectic)이었다. 변증법은 이분법적 현실에 직면해서 정과 반의 갈등 구조를 거 쳐 제3의 길을 지양하는(aufheben) 방법이다. 틸리히는 실재(God)에 대한 이해 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실재의 현실 관련성(relevance)을 설득할 의도에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 시작하는 사유 방식을 계발했고, 여기에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변증법과 차별화했으 나, ) 철학적(실존론적) 질문과 신학적(존재론적) 대답은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서 거듭 또 다른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져 실재에 대한 이해에 근접한다는 점에서 변 증법의 한 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 

과학사가 쿤(Thomas Kuhn) 역시 과학사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의 구조를 설명

하면서 변증법 대신에 “패러다임 전이”(paradigm shift)를 말했다.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정한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시기를 거친 후에 급격하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과학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것 역시 겉보기에는 변증법과 다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무에서 유의 창조는 가능하지 않으며, 사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전 패러다임은 새것의 형 성 과정에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는 정과 반의 상호작용을 거쳐 종합을 지향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에서 역사란 절대정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이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만일 절대정신이 더는 갈등이 없는 자기 자신에 이르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맞는다. 이것이 화해이며, 이것의 온 전한 형태를 그는 기독교 성육신에서 본다. 

절대정신이 이성을 통해 자기를 조금씩 드러내면서 이념을 현실화할 때, 헤겔

은 기독교에서 그 절정을 보았으나 그 역시 자기 논리의 일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곧 정신에 우위를 두는 그의 관념론은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 다. 특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와 마르크스(Karl Marx)로 이어지는 유 물론적인 전복은 아이러니하다. 이는 마르크스에게도 해당한다. 곧 변증법적 유물 론의 역사를 정치 경제학의 관점에서 조망하면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 아 독재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다. 자기를 변증법적 궤도 밖에 두고 전체를 인식하 려는 시도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실재나 관념보다 생의 의지에 더 많은 관심을 둔 니체는 헤겔 이후 철학의 물 길을 바꾸었다. 그는 도덕적 실재인 신을 초인으로 대체하고, 진리를 이념을 현실 화하는 힘으로 정의하였다. 그의 독창적 생각은 역사적으로 두 개의 큰 흐름을 일 으켰는데,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전체주의를 등장케 하는 근거를 제공했 다. 전체주의는 이념을 실현할 전권을 국가에 귀속함에 따라 나타난 결과였다. 다 른 한편으로는 절대 진리는 없고 다만 힘의 각축장으로서 관점에 따라 다른 진리 주장만 있을 뿐이라고 보는 소위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다원주의를 출현시 켰다. 이것은 오늘날 상대성, 대중성, 다원성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각인한다.

이는 과거에 비해 실재를 인식하는 관점에서 나타난 큰 변화다. 실재가 무엇

인지 알 수 없으며, 실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실재에 적합한지 결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인간은 다만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고 그리고 서로 다른 진리 주장 사이의 논쟁에 참여할 뿐이다. 실 재는 인간학적인 한계로 언제나 파편의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이런 까닭에 철학은 실재를 인식하거나 현실화하는 노력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런 배경 에서 철학의 과제는 다만 실재 이념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데 있을 뿐이라고 주장

하는 비판 이론(kritische Theorie)이 등장하였다. ) 

실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소망은 무엇을 근거

로 가능한가? 몰트만은 이 질문을 신마르크스주의자인 블로흐(Ernst Bloch)의 책 “희망의 원리(Prinzip der Hoffnung)”에서 취해 신학적 종말론의 틀에 놓고 또 그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으로 “희망의 신학”을 집필하였다. 그가 종말을 말하면서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의 전통에서 벗어나 유독 소망의 이유를 밝히는 데에 집중한 까닭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헤겔의 전통을 이어받아 다시금 역사 안에 내재해 있는 보편적 의미를 밝혀내는 보편해석학을 주장했는데, 신학의 언어로 말하면, ‘현실을 규정하는 힘’으로서 하나님 관념(Gottesgedanke) 이 세상과 역사를 어떻게 각인했는지를 밝히고 또 종말론적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 의 부활에 근거하여 미래의 힘으로서 실재를 이해하는 일에서 선취의 가능성을 보 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실재에 관한 철학적 관심에서 관건은 형이상학적 실재의 본질 을 밝히려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이성, 경험, 언어, 세계 관에서의 한계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 부딪혀 인간은 현실에서 실재를 일종의 실 존 경험 혹은 현실 경험을 통해 부분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이며, 관건은 한계 안에서 어떻게 실재를 인식할 것인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에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철학이 훗설 (Edmund Husserl)의 현상학이다. 그렇다고 본질 인식이 포기된 건 아니다. 왜냐하 면 현상학은 현상을 판단중지(epoche)의 태도로 기술하고 분석함으로써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이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곧 그는 현존재(Dasein) 분석을 통해 존재(Sein)를 인 식하는 가능성을 성찰하였다. 물론 나중에는 실재를 인식하는 일에서 시적 통찰력 혹은 예술적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존재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셈 이다.

다원주의적 혹은 포스트모던 사회는 실재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지식의 적합 성과 유용성에 관심을 둔다. 이성적 신뢰를 위해 진리를, 감성적 신뢰를 위해 사랑 을, 그리고 영적 신뢰를 위해 생명을 추구한다. 무엇을 근거로 혹은 누구를 신뢰하 며 살 것인지를 알기 위해 인간은 다만 적합하고 유용한 인식을 얻으려 노력할 뿐 이다.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관심에 따라 현상을 연구 한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확실성에 관한 관심을 신에서 인식하는 주체

인 인간에게로 돌렸다. 그 후 세계는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됐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양자에 대한 인식방식의 구조적 차이를 받아들였다. 뇌 과학이 밝혀내기까지 철학 은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상호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서로 구분하여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기독교 믿음을 통한 실재의 인식을 부정하였고, 오직 감각기관을 통한 관찰과 이 성적 추리를 통한 인식의 가능성만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후에는 이성의 작용 역 시 기계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고 또 합리적으로 추 리 가능한 주장 곧 자연과학적 인식만을 확실한 것으로 여겼다. 어떤 인식이든 방 법에서 과학적이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로 인해 인문학 역시 과학의 모양새를 갖추어야 했다. 딜타이(Wilhelm Dilthey)의 해석학으로서 정신과학과 분석적 탐구로서 자연과학으로의 구분은 그 결과이다.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m)는 경험 과학의 토대에서 철학을 재구 성하려 했다. ) 비록 논리와 언어의 기초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해 결과적으로 실 패했으나 ) 유사한 시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사회생물학자 윌슨은 통섭(統攝) )이라는 방법론으로 생물학적 연구 기반의 학문을 재구성할 것 을 주장했는데, 이것의 연장으로 최근에는 “창의성의 기원”을 통해 자연과학 특히 신경생물학 등의 생물학에 기초한 인문학의 융합이 인류에게 새로운 계몽운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뇌 과학 혹은 인공 지능 기반의 인문학을 구성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등장은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는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의 사고를 논리에 기초하려고 했던 논리실증주의처럼, 인간의 사고를 뇌의 기계적 모 듈 기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을 기계적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은 강 인공 지능(strong A.I.) 개발을 위한 노력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포스트휴머니 즘의 출현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고 있다.

철학은 이처럼 서로 구분된 세계에서 원리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현실을 통합 하여 본질 혹은 전체를 인식하려 한다. 이는 분화된 학문이 세계의 분할로 이어지 는 부조리함을 자각한 결과이다. 파편화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체를 포괄적으 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얻는 것, 혹은 최소한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 상호작용 을 가능케 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중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철학은 학제 간 연 구, 통합 연구, 융합 연구 등을 위한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비록 학문 영역이 나뉘 어 있으나 원리에서 상호작용을 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및 인식의 방식 이다. 포괄적 인식을 위한 노력은 실재와 현상, 인간과 신, 물질과 정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여자와 남자, 삶과 죽음, 진보와 보수 등 모든 영역과 주제에 걸쳐서 나타 나고 있다. 

이러한 연구 및 인식의 방식은 특히 인간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 간을 영과 혼과 육으로 혹은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관습 을 지양하고, 오히려 인격으로 혹은 몸으로 혹은 전체로 곧 심신합일체로 보는 관 점이 지배적이다.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철학에서는 통합이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점이지만, 서구 철학에서는 다른 연구 영역에서보다 특히 인간을 영·혼·육으로 분리하지 않고 전체로 이해하면서부터 통전적 방법의 의미가 크게 부각하였다. 물론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세계 안으로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도 통전의 노력으로 이해된다. 세계를 좀 더 포괄적으로, 적합하 게, 또 유용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학제 간 연구와 통합 및 융합 연구가 빠르게 확산 하고 있다.

2. 신학에서 통전 개념 이해

1) 이종성의 통전 이해

(1) 통전의 기제

통전적 신학의 효시로 알려진 이종성이 언급한 통전적 신학으로 시작해보자.

“통전적 신학이란 다음과 같은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첫째, 신학의 각 분야를 단독으로 이해하지 않고 각 분야에 공통되는 점을 모색한다. 둘째, 삼위 일체론으로 신학의 각 분야를 관통시킨다. 셋째, 우주계를 태양계로 국한할 것 이 아니나 성운계까지 확대해서 이해한다. … 넷째, 모든 종교나 학문을 복음에

로의 준비과정(praeparatio evangelica)으로 수용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범종교계를 인정한다.”  ) 그는 wholistic )를 ‘통전’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는데, 인용한 글에서 통전의 

기제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신앙을 공통분모로 삼는 일관성15), 공동의 근 거로서의 상호연결성, 보편성,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포괄성이다. 실제로 통전의 관점에 따른 그의 연구 방법을 분석하면, 통전이란 첫째, 상이하고 심지어 갈등하 는 이론과 방법론의 장단점을 비판적으로 살핀 후 얻은 것을 둘째, 교회가 인정하 는 범위에서 또 현실에 맞는 해석을 통해 종합하여 셋째,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작 업이다. 통전을 해석학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다른 글에서는 인 식론적인 측면을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종합적이고,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지식을 가 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식과 일반계시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즉 통전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16) 

그가 통전의 방법을 신학적 해석을 위해 사용한 의도는 신학 이론 간 상호 연

결 관계를 밝히고, 또 일반 지식과의 관계에서도 복음 및 기독교 신학의 보편성과 포괄성을 드러내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창조주로서 세계를 다스 리시는 하나님과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이해가 전제해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그는 통전적 관점이라 했다.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그리 스도 중심주의이다.

(2) 통전전 신학의 정체성 

그러나 본래 의도와 달리 이종성은 외국에서 유입한 신학 이론들로 가득한 한 국 신학계의 현실에서 통전적 신학을 ‘교회가 인정한 신학’의 범위에 제한함으로 써 결국 ‘교단 신학’의 한계에 머물렀고, 이로 인해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신학을 지 향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현실로 옮기지 못했다. 특히 철학이나 과학 등 타 학문과 신학의 관계에서 타 학문을 신학을 위한 ‘예비학문’으로 보고 ‘기독교 신학 중심적 

 

내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발음대로 표기할 것을 제안했는데, 소기천은 Tong Chun, 김명용은 TongJun으로 제안하였다. 소기천, “생명 선교를 향한 예수의 시험이야기 새로 읽기: 통전 신 학을 제안하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0 (2003), 183-209. 

15) 백충현은 이종성의 삼위일체 신학이 한국 신학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백충현, “춘계 이종성의 삼위일체론이 한국신학 안에서 갖는 위치와 의의,” 『장신논단』 49-1 (2017), 

283-306.

16) 그의 『신학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68. 

통합’을 말했는데, 이것은 그가 말하는 통전이 윌슨의 “통섭”에 근접한 의미로 사 용되었음을 보여준 한 사례이다. 양자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심지어 여러 신학 이론의 공과를 따져가며 소개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

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면서 건강한 신앙을 위해 꼭 알아야 할 기독교 교양을 얻고 또 전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김명용이 그의 신학을 “신학과 사상의 백과사전”  )이라고 평한 이유가 없지 않다. 이는 한편으로는 장로교 분열의 현실 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척박한 한국 신학의 현실 에서 무차별적으로 수입되는 외국 신학이 범람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외국 신학 을 한국교회와 신학 현실에 적합하게 해석하여 사용할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그가 인정하지 않은 복음의 토착화를 대신하여 주장한 신 학의 토착화의 한 방법에 따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곧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은 다양하고 풍성한 신학 지식이 필요한 현실에서 주로 한국교회 상황에 맞는 지 식을 집대성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3) 통전적 신학의 한계?

문제는 그의 연구가 원래의 취지대로 한국 신학을 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 지 않은 것이며, 또한 신학의 주요 경향에 대해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해석을 하지 않 고 ) 다만 외국 이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종합하는데 머문 것이다. 게다가 이론 을 평가하는 기준이 교회가 인정하는 교리의 범위에 제한함으로써 내용이 아무리 포괄적이라 해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논의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는 혹시 ‘통전적 신학’이 신학적 교양의 차원을 넘어 신학 이론을 생산하고 구성하며 또 검 증하는 방법론으로 삼기에는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기획이었던 까닭은 아닐까? 

2) 통전 개념에 관한 연구의 다양한 스펙트럼

한동안 장로회 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대학교의 신학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해석학 전통에서 통전적 신학을 규정하는 노력이 있었다.20) 통전적 신학의 정체성 을 규정하고 또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장신대 소속 교수들은 세 차례의 신학 성명 )과 일련의 연구에서 ) 통전을 주 로 통합과 종합의 의미로 파악하고 ) 드물게 통전의 기제로서 상호연결성을 지적 했고, 일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종성 신학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밝혔다. ) 처음에는 이종성의 신학을 조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통전적 신학함의 전통을 찾는 연구가 있었고, ) 이 과정에서 한국 장로교 초기부터 분열의 

20)  김이태의 ‘중심에 서는 신학’으로부터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그리고 김명용의 ‘온 신학’ 에 이르는 과정을 탐구하였다. 특히 통전적 신학에 관한 연구는 “춘계신학 강좌”로 2002년에 시작하여 2019년(2008년과 2011년에는 개최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총15회 진행되었다. 여 기서 발표된 논문 가운데 1, 2회가 다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종성 외 3인, 『통전적 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다음을 참고: 이혜정,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교 단정체성에 관한 시론,” 『종교문화연구』 25 (2015), 183-215.

과정을 거쳐 김이태의 ‘중심에 서는 신학’과 이종성의 ‘통전적 신학’ 그리고 김명 용의 ‘온 신학’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다. 이종성의 한계를 넘어 신학함에서 통전 의 성격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전개되었음을 밝히는 연구였다. 그간의 연구를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이태는 1981년 개교 80주년 기념행사를 기해 발표한 논문에서 “포괄적”이고 “긴장 속에 있고” “선풍적이 아닌 점진적” 성격의 신학을 강조하면서 소위 “중심에 서는 신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통합의 이름에 맞는 신학을 과제로 삼았다.26) 

맹용길은 장신대 정체성을 공거성(共居性)과 타자성 그리고 포괄성을 특징으

로 하는 “통합신학”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개요를 제시했다.27) 

김도훈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의 역사 자체가 통전적 신학 전통에 있 다고 보고 뿌리를 찾기 위해 한경직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의 특성을 역사적으로 탐 구하였다.28) 그는 통전을 통합하는 해석의 원리로 전제하고 사용하였다. 

윤철호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통전적 신학 방법론을 설명하면 서 온전성에 관심을 두었는데, 특히 그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에 대 한 대답을 역사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통전의 기제라 볼 수 있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성을 언급한 것은29) 통전의 역학을 규명하는 일에서 있어서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전의 기제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으로 이어지 지 못한 건 아쉽다.

현요한은 한국적 신학의 한 형태로 통전적 신학을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어 원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한 하나님 신학에 근거한 생명 및 평화의 신학으로서 통전 적 신학을 제안하였다.30) 그의 ‘하나님 신학’은 통전적 신학의 신학적 토착화를 시

 

심에 서는 신학에서 변두리에 머무는 신학까지,” 『장신논단』 50-3 (2018. 9), 201-33.

26) 김이태, 『중심에 서는 신학: 김이태의 신학세계』, 故 김이태 교수 저작 출판위원회 편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4), 209-40. 그리고 다음의 논문을 참고: 김명용, “이종성의 통 전적 신학,” 112-14; 신옥수, “중심에 서는 신학, 오늘과 내일 - 장신신학의 정체성 형성에 관 한 소고,” 앞의 같은 글.

27) 맹용길, “통합신학 - 개요,” 『교회와 신학』 18 (1986), 30-76.

28) 김도훈,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통전적 신학>적 정체성과 <온신학>의 과제,” 『장신논 단』 48-1 (2016), 115-44.

29) 윤철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통전적 예수 그리스도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54-56.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적하고 더는 발전시키지 못한 까닭은 통전이 해석학적 원리로만 이해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0) 현요한, “하나님의 평화로운 생명,” 『통전적 신학』, 269-311.

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종성이 언급만 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일을 과제로 삼은 것이다. 후속 연구가 기대된다. 

김명용의 “온 신학” )은 통전적 신학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는

다. ) ‘통전’의 연장선에서 혹은 발전 과정에서 ‘온’ 개념이 등장했고, 비록 한글의 영문 표기로 TongJun을 사용하고 있으나 공식적인 영문 표기(holistic) 역시 같으 며, 또 그 내용을 살펴보면 통전의 정신을 이어받아 외연을 넓히면서 발전시키려 는 의도에서 제기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지 종합한다는 의미의 ‘통’보다는 오히려 전체로 본다는 의미에서 ‘통’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부분들로 나뉜 것들 을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온’에 방점을 둔 신학이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 역에 대한 포괄적 인식과 온전한 표현을 지향하는 신학의 과제로 이해한다. ) 

이종성이 사용한 개념이 하나님과 복음의 온전성을 학문적으로 인식하고 표 현하려는 의도에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미 잠재해 있는 통합 교단의 신 학적 정체성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내용적인 측면에서 스펙트럼을 넓힌 온 신학은 무엇보다 신학적 구속력을 얻기 위해 성경적/신학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의미를 규정하는 노력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이건 통전적 신학의 스펙트럼이 무한정 확 산해 아무 신학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예방책이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적 어원 연구를 통해 통전을 이해한 다렐 구더(Darrell Guder)와 기존의 통전적 방법론을 비판하고 삼위일체 신학으로 ‘통전성’을 설명 한 전철민의 논문 )이 눈에 띈다. 여기에 더해 융합의학자로서 의학적 신학을 시도 하면서 통전을 말한 최서형도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3) 통전 개념의 다의성

(1) 통합적(integral)과 통전적(holistic)

통전의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기 위해 무엇보다 ‘통전’과 ‘통합’의 구분이 필요 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용례를 보면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혼용되고 있 기 때문이다. 언어의 혼용은 아직 의미에 관한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단적 인 예이다. 

구더(Darrell Guder)는 ‘통전’이 오해가 많은 단어임을 인정하면서도 holos (wholeness)에 대한 성경적 어원 연구를 바탕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행위의 영역이 우주적이고 모든 것으로 포용하고 포괄적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습 니다.”35)라고 말하였다. 김명용의 “온 신학”은 비록 다렐 구더를 인용하고 있지는 않아도 그의 통전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통전적 신학을 정의하는 김명용의 말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방법적인 면에 서 통전적 신학은 “편협함을 극복하고, 중요한 정신과 관점들을 소홀히 하거나 간 과하지 아니하고 가능한 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 는 신학이다.” 이를 통해 통전적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을 바 탕으로 “완전한 복음”과 “교회와 사회와 역사와 피조 세계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전체를 온전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신학이다.”36) 주장으로만 남아 있을 뿐 온 전한 의미에서 통전적 방법으로 신학함을 제대로 보이지 못한 이종성의 한계를 넘 어서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명용이 지경을 넓히면서 온전한 의미의 통전적 방법으로 신학하고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단 통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한 성찰이 부족하다. 곧 포괄적 인식과 온전한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통전이 구체적으로 어 떻게 작용하는지 등 이에 관해 밝힐 내용이 없는 것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다. 

 

75. ‘통전적(holistic)’이란 말은 헬라어 ‘holos(전체)’에서 유래한 형용사다. 성경에서는 이 말이 110차례 사용되었다고 한다(145).

35) D arrell Guder, “Towards a Holistic Theology of Mission: World, Community, Neighbor,” 『선 교와 신학』 15 (2005), 153-77, 155. 

36) 김명용, “통전적 신학이란 무엇인가?,” 『통전적 신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53-81, 54.

예컨대 최근에 출판된 글 )에서 그는 창조론을 온 신학의 관점에서 전개하고 

있는데, 창조 신앙과 관련해서 과학과 신학의 갈등 관계를 염두에 둔 서술이긴 해 도 그것이 하나님에 관해서 얼마나 포괄적 인식인지, 또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온전한 표현인지를 보여주는 논증인지는 의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해가 교리 에 매이지 않은 점은 높이 살 만한 해도, 포괄적 인식과 온전한 표현을 인지할 만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합은 흩어져 있는 개별자들을 일정한 원칙과 원리에 따라 전체 안으로 모아 

일관된 의미에 이르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흩어져 있으나 서로 의미가 통하는 것 을 한 그릇에 모은다, 혹은 서로 의미가 통하도록 하는 원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이 해할 수 있다. 혹은 코와 눈과 입과 귀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얼굴이라는 틀 안에서 함께 보는 것을 통합이라고 한다. ) 이런 의미의 통합은 장신대가 교단 신학의 정 체성을 규정할 때 사용하였다. 에큐메니즘과 복음주의의 대립 상황을 극복하지 못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이 분열할 때 보수의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움직임(예 장 합동)에 반하여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전략적 의미에서 ‘통합’을 표방한 것이 정체성으로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종성은 통전적 신학을 말하면서 통전을 주로 통합의 의미로 사용했 지만, 전철민은 양자를 구별하여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통전적 시각이 오직 하나 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열린다고 보는 ) 전철민은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 holos의 용례를 밝힌 후 이 말이 “어느 시간의 처음부터 끝까지와 어느 공간 전체와 어느 영역 전반, 그리고 짜깁기하지 않은 통일된 하나를 나타내고 있다.” )라고 보고 이 것을 통전의 의미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통전은 부분을 전체와 관련해서 보면 서 동시에 부분을 전체를 위한 필연적 계기로 볼 때 사용되는 말이다. 전철민은 혼 합주의의 위험이 있는 통합 )과 구분하여 말하면서 통전을 “전체적인 안목에서 출 발하여 어떤 부분이나 개체가 본래 그 전체의 어느 부분에 속하여 위치하고 관계 하느냐를 밝혀서 부분과 개체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규명하는 방법” )으로 이해 한다. 이것은 해석학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결국 그는 양자를 구분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통전을 종합적 해석의 의미로 이해했다고 여겨진다. 

(2) 통전적 방법의 실제

통전적 신학을 말하기는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통전의 

기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은 찾기 어렵다. 그래도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 과 같다. 

이종성에 따르면, 통전적 방법이란 서로 다른 이론들,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것이라도, 현실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기에 상황에 맞는 해석을 통해 장단점을 잘 살펴서 오늘의 교회 현실에 맞도록 종합하여 새롭게 구성해내는 해석과 종합의 작업이다. ) 이 점은 통전적 방법론을 포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한 윤철호에게서 잘 드러난다.

“통전적인 신학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신학의 주제와 내용 자체의 통전적 전체성에 근거한다. 기독교 신학의 통전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실 재성에 근거한다. 즉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보편적 하나님으로서 모든 실재 와 진리와 의미와 관점을 자신 안에 포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서가 증언하 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자체가 통전적인 인간의 구원 과 창조세계의 완성을 지향한다. 즉 기독교의 복음은 영혼과 육체, 개인과 공동 체와 역사, 인간과 자연과 우주 전체의 통전적인 구원과 화해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통전’은 전체를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한다는 뜻이다. ‘통전’은 좌와 우, 아래와 위, 긍정과 부정, 개별자와 보편자, 특수성과 일반성, 그리고 믿음과 지식과 실천을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하고자 한다. 통전적 신학은 이것들을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함으로써 단지 절충주의나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성(wholeness)을 지향한다.” )

이 인용에서 통전은 종합적 해석의 원리로 이해되고 있다. 전체를 온전성으로 

이해한 점에서는 통합과 구분한 것 같으나, 통전과 통합의 의미가 엄밀하게 구별 되지 않은 건 아쉬운 점이다. 게다가 윤철호는 ‘보편자’라는 철학적 개념을 동원하 여 통전을 해석학적인 통합 원리로 보았다. 이것은 판넨베르크의 보편해석학적인 관점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이해는 ‘통전적’이란 형용사를 붙여 신학적 주제를 상술한 다른 논문들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대개 상반된 주장이나 이 론들을 일정한 관점에 따라 종합할 목적을 추구한다. 심지어 칼뱅의 신학 방법론 을 통전적이라 규정한 글은 통전적이란 말을 ‘중도의 길’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했

다. ) 김명용의 통전적 신학으로서 온 신학은 단순한 해석을 넘어 신학을 생산하는 방법론적 원리로서 통전을 이해한다. 곧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특정 관점 에 매이기보다 “가능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한다. 달 리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구원 사역의 폭넓음을 인식하면서, 완전한 복 음과 인간과 교회와 사회와 역사와 피조 세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사역의 전체 를 온전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 

전철민은 통전 이해를 삼위일체 신앙에서 출발하고 또 통전의 근거로 삼위일 체의 상호교류(perichoresis)를 말했다. ) 통전의 기제는 “삼위일체적 삶”으로 표 현했다. 삼위일체적 삶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인격적 으로 만나서 그 아름다운 관계를 말씀과 성령으로 깨닫”고 살아가는 삶인데, 이것 은 현실에서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권위와 질서를 사랑과 자유 가운데 지키며 각자의 개성과 전체적인 공동체가 동시에 역동적으로 아름답 고 영광스럽게 [사는 삶]”으로 나타난다. ) 그는 삼위일체적 통전성의 세 가지 원 리 )에 근거하여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곧 통전의 기제를 “자기부인과 타자긍정의 원리”로 표현한다. )

“모든 학문은 삼위일체의 통전적 관점에서 항상 전체(holos) 안에 개체

(pas)가 부품이 아니라 전체의 필연적 개별자로서 인식하여 그 학문 자체 안의 개별자들을 대하고, 타 학문 영역과 자기 영역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또 하 나의 개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학문해야 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각 학문 분야 는 자기부인과 타자긍정에서 역설적으로 자기 존재가 타자 안에서 빛을 발하 는 원리를 삼위일체 안에서 터득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상으로 통전적 방법의 실제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서로 구분되어 있고 심 지어 상반된 것을 오늘의 현실이라는 틀에서 해석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또 구 성하려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런 의미라면 굳이 없는 말을 새롭게 도입하여 ‘통전’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 왜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온 전히 이해하고 또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역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한 목적을 지향하 지 않는 신학은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견해의 차이는 다만 이를 위한 노력에서 인 간학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이들의 노력은 ‘의미를 얻 으려 해석을 통해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심지어 상반된 것들을 통합하다’ 혹은 ‘포 괄적인 인식을 통해 온전하게 표현하다’라는 의미를 얻기 위함이다. 처음부터 통 합은 서로 이질적인 것, 상반되는 것, 서로 대립하는 것을 전체로 보면서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또 어떻게 해서든 오늘날에 유용한 의미를 얻기 위해 종합하는 데에 집중한다. 통전의 기제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3. 생명의 통전성과 통전의 기전(機轉 mechanism) )

1) 최서형의 통전 이해

최서형은 융합의학자로서 생명의 통전 원리를 바탕으로 신앙의 원리를 탐구

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의학적 신학 )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랜 임상 경험을 통해 발견한 “담적증”55)의 신학적인 함의를 한국교회의 위선적 현실을 진 단하는 데 응용해서 각종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56) 이런 노력에서 출발 점에 해당하는 그의 통전 이해는 종합적 해석으로 포괄적 의미에 이르려는 노력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치료를 통해 영·혼·육의 온전한 생명을 구현하고 또 이웃 사랑을 통해 실천적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57) 대체로 해석 이론에만 머

 

학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 포함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의학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계에 아직은 낯선 ‘의학적 신학’은 의료 윤리에 관해 신학적으 로 성찰하는 관습을 넘어 — 물론 이것도 포함한다 — 의학적인 원리의 신학적인 의미를 탐구 한다. 이와 관련해서 최서형이 말하는 핵심 진술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나 사회도 사람처럼 유기적 생명체여서 그 내부에서 진행되는 질병 패턴이 인간에게 진행되는 병리와 비슷한 양상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때,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질병의 패턴을 분석하는 의학의 치료방식을 활용하면 보다 확실한 결과를 얻게 될 것으로 사료된다.” 최서형, 『한국교회에 한방을 먹이다』, 6.  

  유 럽과 구미에서는 이미 고통, 질병, 죽음, 치료 등 다양한 주제들이 “The Theology of Medicine” 혹은 “Theologie und Medizin”이란 맥락에서 다뤄졌다. 참고: Thomas S. Szasz, The 

Theology of Medicine (New York: Harper Colophon Books, 1977); Peter Stulz (ed.), Theologie und Medizin-Ein Interdisziplinärer Dialog über Schmerz und Leiden, Heil und Heilung 

(Zürich: Chronos Verlag, 2004). 한국에서 이정배는 민족의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기독교 인 간 이해를 추구하였는데, 이런 시도 역시 의학적 신학의 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다음을 참고: 이정배, “기독교 인간이해에 대한 한국적 성찰 - 민족의학과의 만남의 시각에서,” 『신학과 세 계』 29 (1994), 103-39.

55) 최서형, 『한국교회에 한방을 먹이다』, 13. 이곳의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담적증은 뱃 속에 딱딱한 덩어리가 생기는 적취(積聚)와 달리 위장에 특별한 증상은 없는데도 몸에서는 큰 병이 진행하도록 유발하는 위장 장애 상태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담적증은 담적증후군의 약자로 위장 외벽에 담(음식 찌꺼기가 부패한 물질로 플라크와 비슷하다)이 라는 독소가 다량으로 축적되어 위장 외벽이 굳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명치 끝 통증, 경련, 팽 만감, 속쓰림, 트림, 구토와 오심, 역류, 체중 등 다양한 증상을 일으킨다. 동의보감과 청나라 때의 의편과 명나라 때의 증인맥치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동안 적취로만 알려져 있었고, 또 담적이란 말은 나오지만, 담적증후군은 현대에 재발견된 질병이다. 이 담적증후군이 최서형 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져 현대에 재발견되기 전까지, 이것은 증상만 있고 원인은 없는 신경 성 위장병 취급을 받아왔다. 담적증 발견 과정과 치료에 관한 글은 다음을 참고: 『담적』, 『밥 통 대반란』, 『치료혁명』. 

56) 최서형은 『한국교회에 한방(韓方)을 먹이다』를 한국교회의 위선적인 모습을 지적하고 치료 를 위한 대안을 제시할 목적으로 집필하였다. 이분법적 사고의 폐해가 위선으로 나타나고,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선 통전적 사고를 갖추어 생명의 통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위선의 본질을 밝히면서 교회론, 신앙론, 신앙감정론, 기독교 교육, 기독교 인간학, 그리고 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57) 최서형, 『한국교회에 한방(韓方)을 먹이다』, 76.

물러 있는 통전적 신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병을 치료하는 의료 인의 실존적 관심이 반영된 관점이다.

최서형 역시 통전과 통합을 구분한다. 통합은, 그가 평생 과제로 삼고 있는 “통 합의학” )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시너지 효과를 높 이는 일이다. 이에 비해 통전은 생명의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현실에서 구분되 어 있고 심지어 상극의 것이라도 전체로 볼 수 있는 이유이며, 또한 그들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성과 일치를 발견하는 노력이며 관점이고, 그리고 유기적 관계 가 건강하게 작용하도록 노력하는 일 역시 포함한다. ) 부분들을 종합하는 노력 에만 머물지 않고 융합의학적 원리에 힘입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부분들 사 이에서 일어나는 상호관계의 기전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에서 간과한 상호 연결성을 구체적으로 상술한다. 곧 상호호근, 상생상극, 상호융합(相互互根, 相生相剋, 相互融合) )을 말한다. 교회 구성원들의 일치를 유기적 관계로 설명하고(고전 12:4~27, 롬12:3~21) “서로 같이 돌봄”의 원리(고전12:25)로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 수도 사랑할 것(고전13장, 롬12:9~21)을 말한 사도 바울처럼 최서형은 그 유기적 관계와 돌봄의 원리 그리고 사랑을 생명의 통전을 매개로 상술한 셈이다. 생명의 통전성, 곧 유기적 관계의 통전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생명은 육적 측면, 영적 측면, 정신적 측면의 3요소로 구성된 셈이 다. 이 영역들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면서 상호융합 작용을 통해 온전한 생명현 상을 발현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인체를 이루는 3요소의 관계성은 육(물질)은 영과 정신에, 영은 육과 정신에, 정신은 영과 육에, 서로 뿌리를 두고(상호호근 관계) 절묘한 조화와 균형과 합력(合力)의 기전을 통해 진행된다. 또한 3요소가 조립 형태가 아닌 각각은 전체 표현되고, 또 전체는 하나로 발현되는 상호융합 의 합력 형태이다. 마치 삼위일체적 형상과 상통하는 통전적 인간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창조주의 사람 창조 섭리 덕분에 인간의 모든 생, 병리, 행동 양태, 언어, 체질, 생각, 품성 등의 모든 생명현상은 이들 3요소가 상호 연계되는 통전 기전에 의해 발현한다.” )

2) 이분법적 사고와 하나님의 생명 섭리

통전의 기전으로 밝히고 있는 상호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시종 비판하 고 또 통전에 반대되는 현상으로 여기는 ‘이분법’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에게 ‘이분법적 사고’란 생명 요소에 있는 기능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알지 못하고 분리해서 생각하는 관습적 태도를 의미한다. ) 이분법적 사고로 선과 악을 구분하 려는 마음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도 그 흔적이 나타나 있을 정도로 인간 의 본질적 속성이라 볼 수 있다. ) 이런 사고는 타락 후 인간에게 고질적인 성벽으 로 자리 잡고 있어서 사회의 갈등과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 또 교회가 “세상 변화 능력”을 상실한 “근본 이유”로도 작용한다. 근원적인 치료가 필요하며, 심지 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한다. ) 이분법적 사고가 지닌 문제의 심 각성은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의 위선을 조장한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이분법적 사고는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는 거기서 배제하여 안 그런 척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통전은 “생명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보지 않고 전체로 인식하는 데 있다.” )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전한 생명의 상태를 얻기 위한 온전한 치료를 지향한다. ) 그는 이것을 “통전 생명관” 혹은 “하나님의 생명 섭리” )라 말한다. 하 나님의 창조는 생명의 유기적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 도인의 생각과 삶은 온전한 생명을 위해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나 반드시 통전적 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창조된 생명의 속성인 통전은 인간은 물론이고 교회와 사 회의 건강을 위한 당위적인 요구이다. 교회와 사회와 세상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상호작용의 원리로 작용하기에 성령을 따르는 순종을 통해 통전이 이루어진다. 이 런 결론은 그의 의료적 임상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을 하나님의 생명 섭리로 설명

하여 얻은 것이다. ) 

3) 통전의 실제로서 미디에이터

이것을 확장하여 신학함의 방법론으로 삼는다면, ‘통전적’이란 설령 현실이 나뉘고 분리되어 보인다 해도 이것을 당연시하지 않는 관점이다. 오히려 전체로 보면서 하나님의 생명 섭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유기적 관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 안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도록 중재자 역할을 함으로써 현실을 더욱더 풍성하게 또 유기적으로 작용하도록 구성하여 온전케 하는 방법론적 원리 이다. 곧 상극 관계에 있는 존재 사이에서 각자가 서로를 인지하고, 또 각자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여 타자에게서 도움과 비판을 받으면서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이 일 어나도록 하는 중재자 역할이 곧 통전이다.  ) 

최서형은 이 일이 하나님의 생명 섭리에 따른 것으로 신앙과 신학에서 당연하 게 따라야 할 일이지만, 그것의 온전한 실현은 인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 다. 그래서 통전의 궁극적 실현을 성령의 사역으로 본다. 이는 곧 통전의 현실이 인 간의 눈으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의 온전한 현실화는 인간의 한 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통전을 하나님의 섭리로 말했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령의 온전케 하는 사역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것은 생명의 영(롬8:2)이고 진리의 영(요14:17)이며 중재자(보혜사, 요16:7)로서 성령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맞닿아 있다. 

최서형은 통전의 기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을 제안한다. 곧 통전의 실제에 서 핵심은 통전의 의미를 강조하기보다 이질적인 것, 심지어 상극적인 것 사이에 서 실제로 유기적 상호관계가 일어나도록 매개하는 데에 있다. 인간의 몸에서 생 명과 관련해서 작용하는 통전의 원리를 하나님의 생명섭리로 설명하였다면, 현실 에서 통전은 제자로 훈련된 사람의 순종에 의해 중재되어 성령에 의해 현실이 된 다고 본다. 최서형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는 핵심 방법이 “사랑”이며 )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통과 유기적 관계를 중개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디에이터”

(mediator)라 한다. 

일종의 ‘작은 예수’ 혹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 이해할 수 있는 미디에이터

는 “서로 다른 것을 이분화하지 않고, 상호 소통과 융합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통전생명관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 “갈등과 분열된 사회(공동 체)를 온전케 하며 생명력 있게 만드는 인물”이다. ) 

미디에이터는 이분법적 사고에 매인 인간이 치유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예수님의 도구”와 “성령의 그릇으로 거듭나서” 교회와 사회의 유기체 적 관계가 가능하도록 통전 기전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 

미디에이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이며, 제자로서 사역자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부름을 받아 사역을 감당하는 중간 매개자다. 곧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에 전인격적으로 반응하도록 돕는 사역자이며 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은 사역자이다. 최서형의 관점에서 통전 생명관에 따라 사는 미디에이터의 자세를 바울의 언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 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 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

(고후63~8a)

Ⅲ. 나가면서

철학과 신학에서 통전은 종합적 해석 방법이며, 이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통합

을 지향한다. 통합은 전체의 맥락에서 부분을 보거나 각 부분이 공유하는 의미를 통해 전체를 이해하는 노력이며 관점이다. 이런 관점의 통전적 신학이 해석 이론 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이에 비해 최서형은 통합의 필요성을 넘어 융합의학적 임상 경험에서 얻은 치료 방법을 매개로 그것의 기전을 밝혀 통전의 실천적 의미를 부각했다. 또한 한국교회 문제를 생각하면서 통전의 원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 제시하였다. 

최서형의 통전은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상호관계하는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로 보게 하는 관점이다.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또 전체의 유기 적 작용을 가능하게 하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말하도록 하 는 관점이다. 통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보게 하는 원리이면서 또 신앙의 순종을 통해 그 현실을 선취하여 경험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통전’은 세상을 이해하는 해석학적인 관점을 넘어 기존의 인식과 인식 방식(이분법적 패러다임) 을 비판하는 원리이고, 비록 서로 다른 것이라도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결합하는 원 리이며(협업과 융합), 또한 그동안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유기적으로 이 해하고 또 건강한 유기적인 현실을 밝힌다(개혁). 그러므로 통합은 넓은 의미에서 통전에 포함할 수 있으며 통전의 전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최서형은 이런 관점을 제자 및 영성 훈련을 통해 체득하여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을 미디에이터라 명명한

다. 신학자들이 통전의 신학을 주장하면서도 통전의 기제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점을 생각한다면, 최서형의 통전 이해에서 통전 신학의 실천적 가능성을 볼 수 있 다. 이에 따른 통전 패러다임은 하나님과 인간과 교회에 관한 각종 신학 이론은 물 론이고 통전적 목회를 지향하는 현장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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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Abstract>

A Study on the Various Meanings of  

‘TongJun’ and Its Mechanism

CHOI, Sung-Soo (Dr. theol.)

Assistant Pastor

Systematic Theology

Eunhyun Church

South Korea

This thesis aims to identify various meaning of “TongJun” that prescribes a theological methodology and to reveal the mechanism of it to expand the extension of the holistic theology.

It is not clear since when “TongJun” was used in theology and churches, but it can be seen as a concept composed for the purpose of conveying a specific meaning, such as ‘trinity’. The problem is that the meaning of it is unclear and is used in the sense of ‘integral’ or ‘comprehensive’. The key is to understand what is meant to be spoken by ‘TongJun’.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take a glance at some philosophical tendencies that prefer the meaning of ‘integral’ or ‘comprehensive’.

This thesis lies on the critical reflection of two cases trying to understand the notion of wholism. One is compromising the biblical usage of ‘wholism’ to obtain senseful meaning as a theological methodology, and the other one is settling and describing the typical meaning of wholism based on the example of Rhee Jong Sung who claimed ‘holistic theology’ for the first time. It is true that they have brought the notion of wholism into light, but understanding it in the typical way is not convincing enough. This is because, most of all, it was already used even before Rhee Jong Sung and there are still ongoing attempts to figure out new ways to understand it. Before confirming the meaning of a notion arbitrarily, a critical consideration of various examples needs to be preceded.

In this thesis, the author reveals the limit of the meaning of ‘integral’ and ‘comprehensive’ used in philosophy and theology, and how TongJun takes place which is adequate to be a theological methodology. This is because the mechanism of TongIun needs to be clear in order to use it as a theological methodology or to examine whether it is theologically proper or not.

Especially, Choi Seo Hyeong will be introduced, who has been nominated as a New Korean Intellectual for his contribution to East-West Convergence Medicine and devoted to the construction of medical theology, presenting a unique perspective that is remarkable for holistic theology.

Keywords *

 

TongJun, holistic theology, mechanism of TongJun, perichoresis, organic interrelation

•투고(접수)일 : 2021. 1. 5  •심사(수정)일 : 2021. 2. 4  •게재확정일 : 2021. 2. 6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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