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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기자명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입력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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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무한의 길을 걷는 우주를 한 불사조에 비 할진대, 우주 자체나 한 마리의 새나 한 사람의 영혼이 무엇이 다르리오. 한 생명이 굴러 나감에 거긔에는 반다시 선과 빗과 소리가 잇슬 것이다.

시인 조명희(1894~1938)의 시집 <봄 잔디밧 위에>(1924) 머리말이다. 3·1운동에도 동참했던 조명희는 1928년 소련으로 망명했으나 일본 첩자라는 누명으로 총살된다. 그는 1920년대 비중 있는 작가였음에도 소련 망명 문학인, KAPF 문학인이었다는 이유로 특별히 조명을 받지 못한 비운의 시인이다. ‘개벽학당’이 아니었다면 이 시인의 시집을 찾아볼 일도, 이 글에서 동학과 개벽의 내용을 발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개벽학당에 오기까지
이화학당, 배재학당은 들어봤어도. ‘개벽학당’이라니 낯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개벽학당 개강 파티에서 당장 이병한 교수는 ‘학교는 근대의 산물이며, 서원, 서당은 조선시대 유학을 배우는 곳이었다면 학당이 그나마 우리의 배움을 설명하는 적합한 명칭’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40대에 접어든 나는 어쩌다 개벽학당에 오게 됐고 대부분이 20대인 친구들과 ‘개벽’에 대해 공부하게 됐을까? 이 이야기는 여러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몇 번의 외국 여행경험으로 내가 갖게 된 고민에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는 동남아시아, 서유럽, 일본의 각각 두 곳을 여행했다. 여행 중에 각 나라의 다른 문화, 자연환경을 살펴보고 즐기면서도 다른 한편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다른 경험, 다른 감정이었지만 정리해보면 피부색으로 드러나는 국가 간 경제 격차, 지구 안에서의 불평등, 그 불평등 때문에 내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다.

100여 년 전, 동남아 국가를 식민지 삼았던 유럽인들이 여전히 그들의 나라보다 가난한 그곳에서 휴양을 즐기는 모습, 오래되고 낡아 보이지만 근대를 선도했고 그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도시의 모습. 그곳에서 기초 노동력을 제공하는 유색인종. 동남아시아보다는 경제적으로 앞섰고 서구의 문화를 선진화의 목표로 보고 달려왔던 한국인으로서, 지구적 불평등 사이에 낀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여행지에서 늘 느끼는 것이다. 정점은 일본이었다. 올해 초, 일본 여행 중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곳을 둘러보았다. 17세기 막부시대 일본인들이 네덜란드·포르투갈인들을 인공 섬에서 생활하게 하고 교역을 했던 ‘진짜’ 데지마는 사라졌지만 복원해 박물관,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선도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이 초기에 서양의 문명을 거부했을 때,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이유가 궁금했다. 함께 한 여행자는 이 물음에, ‘당시 조선과 중국이 왕권 중심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었던 반면 막부시대의 일본은 더 큰 힘을 갖기 위해 경쟁했기에, 외부세력과 손을 잡는 것을 이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오~ 이건 『총·균·쇠』의 저자 제러드다이아몬드식 해석인데?”라며 웃었지만 이렇게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엉뚱하게도 근대의 개인주의를 일본이 전혀 체현하고 있지 못하며 그래서 과거를 반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뻗어 나갔다. 외압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 과정, 포스트모던 시대에 ‘통일’ 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 이런 것들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서구 중심의 문명과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국가, 인종 간 불평등이 싫지만, 우리가 후발주자인 것 같은 열등감도 싫은,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묻어두고 생활하던 중 개벽학당의 소식을, 정확하게는 개벽학당의 ‘한국 사상사 강의’ 소식을 접했다. 아마도 ‘개벽학당’이라는 말부터 처음에 들었다면 흔히들 가지고 있는 ‘개벽’이라는 단어의 종교적 이미지 때문에, 한국사상사 강의도 듣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국 사상사 강의에 살짝 일어난 호기심이 개벽학당 수강 신청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강의를 맡아준 선생님과 함께 소개된 책 『한국 근대의 탄생』(조성환) 때문이었다. 강사에 대한 정보가 내게 없으니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책을 소개하는 내용들이, 정리하지 못한 나의 고민에 일격을 가한 느낌이었다. ‘내가 여전히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구나.’ 개벽학당 소식을 알게 된 건 우연이지만, 이 강의를 듣는 것은 내게 필연인 것 같았다.

과거-현재-미래가 대화를 나누는 개벽학당
개벽학당은, 일주일에 한 번 오전에는 한국 사상사 강의를 오후에는 주제에 맞는 책을 한 권씩 정해서 읽고 집중 세미나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사정상 오전 강의에만 참여했다. 한국 사상사 강의를 함께 듣는 이는 ‘한국만의 사상이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에서 한국의 자생적 근대의 흐름을 찾고 그 가치를 개벽에 둔다는 것은 ‘개벽학당’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을 어떻게 잡아갈지 궁금할 뿐이었다.

오전 강의가 과거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사상의 특징을 찾아내는 작업이라면 오후는 현재로부터 미래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라이프 3.0』, 『휴먼 에이지』 등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며 인공지능, 환경 문제 등에 인간사회가 어떻게 대처하며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 갈지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벽학당에서의 하루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미래에 대한 모색의 시간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세미나는 참여할 수 없어서, 개벽학당 카페에 올라오는 ‘벽청(개벽하는 청년)’들의 크리틱을 읽으며 내용을 좇아가 보기도 했다.

‘개벽’으로 보는 한국사상사
다양한 시간들이 개벽학당을 이루고 있지만 ‘나’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시간이, 내게는 가장 기초작업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 사상사 강의는 서구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 동아시아 안의 우리 사상의 개성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시간이었다.

연구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사상사를 접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정규교육에서는 고등학교 윤리시간이 전부이다. 요즘에는 ‘윤리와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 동양, 서양, 한국의 사상사를 다루고 있다. 윤리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중국의 영향 아래, 조선 건국을 전후로 불교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으며, 원효, 퇴계와 같이 몇몇 특징 있는 인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름 이 시간을 재미있어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을 통해 나에게 남은 인상은, 우리는 강국으로부터 외침뿐만 아니라 사상적 영향도 늘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조선까지는 중국의 성리학을 따르고 현대에 와서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그나마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민중들의 끊임없는 역사 참여였다.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섰던 의병, 보국안민의 기치를 건 동학농민항쟁,3·1 만세운동, 4·19, 5·18, 87년 6월 항쟁 등 민초들이 만들어 온 역사였다. 2017년 촛불 항쟁까지. 여전히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했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함께하는 힘이 있다는 건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라 생각했다.

정규 교육을 벗어나, 사상사 전체를 다루는 것은 어렵지만 간혹 철학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공자, 노자, 니체, 스피노자, …. 누군가 해석해놓은 책을 보지만 우리나라 철학가, 사상가는 없다. 한동안 ‘핫’했던 강신주, 도올 등의 철학책도 결국은 서양 철학자, 중국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보는 것들이었다. 물론 고전이라는 것은 지역과 경계, 시대를 넘어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고전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 사회와 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가능하다면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 것으로 우리를 보는 성찰은 없지? 우리 것은 무엇이지? 이런 물음이 도돌이표처럼 맴돌 때가 있다. 이 물음을 자각하지 않을 때가 더 많기도 하다. 이 의문은 은폐되고 묻혀 있어, 그냥 우리는 늘 앞서 있는 누군가를 따라만 가는 존재라는 무의식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상태로 있음에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왔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상사 강의는 중국의 유·불·도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시작으로 했다. 중국의 것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우리만의 개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른 우리의 특성을 찾는 작업에도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중국 철학을 기준으로 우리 사상사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외부의 기준을 벗어나 우리의 관점으로 중국의 유·불·도가 한반도에 와서 어떻게 적용되고 영향을 미쳤는지 보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은 무엇일까? ‘개벽’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개벽’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가면 이 이야기는 흥미가 줄어들 수 있다. 한국 사상사 강의 또한 그러했다. 물 흐르는 듯 가보니, 개벽과 만났다.

치열한 자기 인식의 사상가들
지금도 명실상부 동양의 고전으로, 많은 이가 원문보다는 전문가의 해석으로 읽는 『논어』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로 동아시아의 특징을 읽었다. 공자가 말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공자 ‘자신은 새로운 것을 창조[作]하지 않고 고대의 모범을 해설[述]했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논어』의 구절 중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이야기하며 때에 맞는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많이 접했지만 ‘술이부작’은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강의를 맡은 조성환 선생님은 “창조하지 않는 학습”으로 동아시아의 특징을 명명했다. 중국 성인을 롤 모델로 삼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지 않는 것이 마치 규범처럼 돼버렸던, 중화사상으로 점철됐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이해하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作] 없는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으나 발전과 진보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作’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창조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자기에 대한 치열한 인식을 바탕으로 나에게 맞는 무엇을 찾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자기 인식을 했던 사람들이 우리 사상사에서 있었나?

신라의 최치원, 원효, 조선 초기 사대부, 조선의 세종, 퇴계, 다산 정약용, 동학을 만든 최제우, 최시형, 원불교의 박중빈, 한살림의 장일순까지 그들이 남긴 기록과 글들을 살피며 치열한 자기 인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우리 사상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읽어 내려갔다. 원불교의 박중빈과 한살림의 장일순을 제외하면 보편적으로 모두 아는 인물이지만 개벽학당에서 살펴본 이들은 좀 낯설었다. 보지 못했던 면을 보았기 때문이고 보던 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9세기의 최치원을 7세기의 원효보다 먼저 살펴보았다. ‘한국 철학의 첫 페이지를 무엇, 어디에서부터 설정할 것인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최치원이라는 문제의식에서였다. 섬으로서 격리돼 있던 일본과 달리 지리적으로 중국과 붙어 있던 우리가 중국의 앞선 문명과 철학을 수용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 같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가운데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는 강의 중 이야기는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듯 심각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당나라 유학을 하고 그곳에서 성장했음에도 최치원에게서 주체적 수용과 동인東人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태도를 그가 남길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최치원은 중국을 ‘서국’, 신라를 ‘동국’으로, 공자, 노자, 석가를 단순한 직책으로 표현하며 중국을 대국으로 모시는 입장에서 벗어나 주체적 사고를 드러낸다. 그는 <난랑비 서문>에 “포함삼교包含三敎”라는 표현으로 신라가 중국의 유·불·도를 ‘포함’했다고 한다.유·불·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신라의 정체성에 맞게 포용·수용했다는 의미로 ‘포함’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동인의식’ 때문이다. 최치원의 ‘동인의식’은 중국이라는 대국과 비교한 열등감의 결과가 아니라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의 결과임이 그의 글 곳곳에서 묻어난다.

다음으로 치열한 자기 인식의 사상가로, 세종을 들수 있다. 조선의 왕이었던 세종을 사상가로 보는 입장은 이제까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개벽학당에서 우리는 한글 창제를 비롯해서 백성들과 함께하려 했던 그의 정신과 실천이,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해석에 동의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음악과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업적, 창조성을 추동했던 힘은 중국을 기준으로 조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는 삶을 백성과 함께[與民] 살고자 했던 ‘주체성’이었다. 그렇기에, 중국 문자의 ‘술述’에 머물지 않고 한글이라는 ‘작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학의 최제우. 시대를 한참 뛰어넘었다. 강의 순서는 이와 달랐지만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중심으로 두고 이야기해본다. 우리 ‘사상’의 첫 ‘창조’였다. 우리의 토착적 풍토와 어울리는,사람을 하늘로 보는[人乃天] 사상. 비단 사람에 머물지 않고 우주 안의 생명에 모두 하늘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사상이었다. 최제우의 뒤를 이어 동학을 확산시킨 최시형은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인간관을 정립하는데, 하늘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존재한다는 이것은 자유의지를 발현하는 독립된 자아로 인간관을 정립하는 서구의 관점과 많이 다르다. 인간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 등 ‘조화’의 인간관을 지닌 ‘천인상여’ 사상은 평화와 생명의 사상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한살림의 장일순에게 계승된다.

동학까지 가기 전에, 강의에서는 우리의 ‘하늘’에 대한 관점과 지향도 살펴봤다. 조선 초기 사대부 권근의 <천인심성분석지도>, 퇴계의 <천명도설후서>, 다산의 상제上帝인仁에 대한 재해석이 그 자료들이었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하늘이었다, 동학의 하늘님이 그냥 불쑥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대한 우리만의 철학적 사유가, 사상가들의 개성과 함께 진행돼 왔다.

중국보다 ‘天’을 사용하는 횟수가 많은 조선의 ‘하늘’은 왕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였다. 중국의 ‘天’과 달리 때로는 어느 순간에나 함께 하는 인격적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하늘과 가까워지고자 부단히 자신을 수양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그러다 동학에서는 사람과 만물이 모두 하늘님이 되는 것이다. 대반전이다. 그래서 사람을, 생명을 모시는 태도로 존중하고 귀하게 대하는 것이 하늘님인 인간의 덕목이며 실천 과제이다.

15주의 강의마다 사상과 인물에 대한 정보, 지식을 알아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태도와 새로운 인식을 얻었다. 마음이 열리고 나와 세상을 다시 보는 개벽이구나. 느지막이 생각해본다.

‘다시 개벽’ 안에 다 있네.
1894년 갑오농민항쟁으로, 동학도들은 거의 목숨을 잃거나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 그 사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갑오년에 태어난 조명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태어난 해의 항쟁을, 거기에 스며들었던 사상을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듣고 생활에서 느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진천에서도 농민의 저항과 투쟁이 있었기에 더더욱.

동학의 정신이 어떻게 3·1운동으로 이어지는지 이야기하기에 나의 지식은 짧지만, 1919년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조명희에게는 자신이 세상의 빛을 본 해에 있었던 역사에 대한 뜨거운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의 시집 머리말에 동학의 사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주도, 새도, 사람도 그 영혼이 다르지 않다는 글귀는 모두가 한울님이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구한말 즈음에 탄생한 ‘민족종교’로 규정되는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등은 모두 ‘개벽’을 말한다. 유학의 시대가 끝나가던 조선 말기, ‘천주’를 믿는다는 서양 세력의 횡포를 보면서 탄생한 신생 종교들이 모두 개벽을 말한다는 것은 ‘개벽’에 우리만의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개벽’은 무엇일까? ‘내가 변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개벽’이며 ‘내 안의 하늘을 자각해서 다른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는 것이 개벽’이라는 강의 내용에 밑줄을 긋는다. 혁명과 개벽이 다른 것은 외부의 변화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에서 시작해서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다시 개벽‘을 말한다. 그것은 또 다시 우주의 섭리로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의 개벽, 문명의 개벽이다. 그동안 불평등하고 부조리했던 인간 사회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주의 생명이 모두 한울이며 하늘님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시 개벽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깥으로 향해 있던 관점을 나에게로 돌려놓고 ‘나’의 시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 ‘다시 개벽’”이다. 강의록의 이 문장을 읽는데 마음에서 쿵 소리를 낸다. 우리가 최치원으로 시작해, 세종, 최제우, 그 밖의 개벽종교를 살펴본 이유이다.

나의 시점으로 나를 보는 것, 늘 타인을 비교 대상을 두고 달려왔던 이들에게(내 생각에 한국 문화는 이 문화가 무척 강하다. 나라와 나라의 비교, 사람과 사람의 비교) 다른 누구의 눈으로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모든 생명에 하늘이 있으니 귀하게 모시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자고. ‘다시 개벽’ 안에 평등,평화, 생명존중, 페미니즘이 다 ‘포함’돼 있다.

개벽학당에서 만난 사람
개벽학당을 여는 날, 놀라웠다. 나는 어쩌다가 이곳에 온 것 같은데 그곳에 온 20대 청년들은 스스로를 개벽하는 청년(벽청)이라 칭하며, 적극적으로 그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벽청들 중에는 자발적 고졸의 삶을 선택하며, 통과의례처럼 사회에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대학 입학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들도 있다. 물론 아무런 방황과 갈등 없이, 신념에 넘쳐 그런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고, 고민도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 한 명, 한 명이 빛났다. 단지 청춘이어서 빛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벽청이라 이름 짓기 전에, 이미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만들며 ‘다시 개벽’하는 중이었다.

벽청 중에는 ‘공공公共하는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청년들도 있다. 삼포 세대, 오포 세대라는, 기성세대의 규정에 머물지 않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청년들이었다. ‘렛츠 피스’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그들만의 색깔로 삶의 공공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벽청들, ‘공공公共하는 청년’들 심각하게 멋지다.

개벽학당 이후 …
‘분단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인 나를 바라본다. 우리가 서구 근대화를 정신없이 따라간 시간만큼 분단과 전쟁으로 대결과 위협의 시간을 보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얼마나 다른 길을 걸어왔나? 그 차이가 너무 크니 탈분단 상태에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의견도 많다. 통일은 어떤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북이 더 개방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진보적 북한학, 통일학자들은 말한다. 북만 변하면 될까?우리는 이대로 이 모습대로 있으면 될까? 아이들에게 혐오가 놀이가 돼 버리고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이 모습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어느 일방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함께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그 변화의 가치에 개벽이 있어도 좋겠다. 남북이 함께 서구의 근대화 물결을,자본주의, 사회주의 방식으로 좇았던 역사를 평가해보고 치열한 자기 인식에서 출발한 토착적 근대화에 대해 토론한다면 어떨까? 물론,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북과 토착적 근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기준으로 사상사를 다시 평가하고 우리의 근대성을 찾아보자고 한다면 그들의 ‘주체’와도 만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개벽’의 가치에서 통일 사회의 공통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끝내고 생명과 평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의 중심 가치가 ‘개벽’이면 아주 괜찮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분단을 끝내는 일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전쟁과 대결의 분위기로 더욱 공고해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개벽은 어떤 모습일까. ‘모심’의 철학, 모두가 모두를 하늘님과 같은 태도로 대할 수 있다면 여성을 비롯한 역사의 소수자들도 자기의 언어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화제를 몰고 있는 ‘검블유’ 임수정, ‘녹두꽃’의 한예리, 역사에서 묻혀 있던 여성의 서사가 드러나는 과정을 환영하며 자기 언어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양반과 선비의 전유물이었던 ‘학學’을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들이 할 수 있었던 ‘동학’도 민중이 자기 언어를 갖는 과정이었구나. 퇴계, 다산과 같은 훌륭한 철학가가 있었음에도 처음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쓰인 『용담유사』(최제우의 말을 최시형이 옮긴 책)는 사상의 첫 창조물이자, 역사에서 소외됐던 민중이 자기 언어를 갖는 계기였다. 그 언어에도 시대적 결핍으로 여성과 소수자의 이야기가 적을 수 있다.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 만들어나가면 될 것이다.

종강 자리에서 한 학기의 소회를 나누며 벽청들은 개벽을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자신들을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이에 비유했다. 개벽은 절대적 이상으로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삶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기 언어로 말하는 과정에서 ‘개벽’이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리라. 나는 그저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나를 보고 싶어서, 서구 근대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개벽학당에 왔는데 나름의 미래까지 개벽과 함께 그리고 있다.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2021/09/01

[북 리뷰 044] 백낙청 도올 김용옥 박맹수 세계사상으로서의 동학 논한 거장의 대화 - 창작과비평 2021 가을호 특별좌담


[독서생활]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백낙청, 도올 김용옥, 박맹수 원광대 총장의 '특별좌담'이 나온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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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걸 읽으려면 창비 잡지의 전자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다. 좌담의 영상이 나오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잡지의 글은 좌담 후에 글을 더 부첬다고 한다.
- 그런데 좌담의 영상은 아니지만, 맛보기 같은 20분짜리 영상 리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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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이 리뷰 만을 보고 말하자면,
1] 동양 사상이 서양 사상을, 그리고 동야 문명이 서양 문명을 능가하는 세계사적 터닝 포인트에 와 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2]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 동학의 수운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도올의 <동경대전>의 재조명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같다.) 그 만큼 한반도의 위치가 중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3] 그리고 종교로 보아서는 당연히 서양 사상, 서양 문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기독교의 위치가 내려가는 한 면, 올라가는 종교가 한반도의 동학인데, 동학을 이어가는 주체는 천도교나, 증산도가 아니라 원불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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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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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도올의 <동경 대전>은 지난 1월달에 구입하여 다른 책들과 함께 선편으로 부치려고 부산에 종이 상자에 담겨저 있는데, 우체국에서

2021/07/21

현대 한국의 안티 종교운동 강돈구



J. Daesoon Acad. Sci. 2017; 29:241-278

pISSN: 1598-3439

DOI: https://doi.org/10.25050/jdaos.2017.29.0.241
Article
현대 한국의 안티 종교운동
강돈구
1 , * , †
Anti-religious Movements in Contemporary Korea
Donku Kang 1 , *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

Received: Oct 12, 2017 ; Accepted: Oct 30, 2017

Published Online: Dec 31, 2017
초록


이 논문은 한국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의 대대적인 표출 현상(안티 종교운동)을 정리하고 유형화한 뒤 그 의미를 분석한 글이다. 이를 위해 먼저 현대의 범세계적인 종교변동부터 살폈다. 세계종교는 지구촌 의식 출현에 영향을 받아왔다. 그 결과 그들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한 채 여러 종교의 공통 기반 위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하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려들거나, 전통을 재창조하려하거나 혹은 현대에 맞게 변용시키거나, 혁신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거나, 민족주의와 결탁하거나 하는 여러 유형으로 중첩되어 나타나곤 한다.

세계종교에서 살필 수 있는 이러한 변동들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관찰되는가? 대체로 현 시대의 한국 종교상황은 개신교에 대한 비판이나 혁신 요구, 소수종교에 대한 공격, 학계와 언론의 종교 개혁 요구, 종교무용론 전파, 유튜브 등 인터넷과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종교 비판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교 비판은 안티 종교운동으로 읽혀진다. 종교 외적으로는 서구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종교무용론이나 과학 또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종교 비판 이론이 서점을 중심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종교 내적으로는 개신교를 중심으로 자신의 내부를 반성하고 새로운 초종교적 영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과거에도 물론 종교 일반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그 내용과 맥락에서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 운동은 분명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개신교가 주요 대상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변동을 살필 수 있는 주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classify broadscale anti-religious movements in Korea based on critical public sentiment and analyze the meanings of these movements. To carry out the research, global religious changes that have occurred in modern times were closely looked into first. The world religions have had an influence on the world’s religious awareness. As a result, they intend to acquire universality on their own individual grounds while keeping consistency with the past. This phenomenon used to appear to retain the identity, recreate tradition, transform itself to fit in the present times, pursue innovation, or even become overshadowed by other forms of thought such as when religions have collided with nationalism.

How does Korean society perceive the changes that emerged in world religions? In general, the circumstances that Korea faces in this era tend to manifest themselves via the Internet, multimedia, and Youtube wherein they sound off on religion and this includes criticism of Christianity, demand for reformation, attack on minor religions, pro-reform academic circles and media, and the propagation of anti-theism. Criticism of religion is interpreted as an anti-religious movement. The secularism and anti- theism brought up by some Western scholars and critical theories of religion from scientific or historical perspectives are being spread through bookstores. Christianity is prone to reflecting on itself and trying to emphasizing a meta- religious spirituality. This in short, characterizes anti-religious movements in Korea.

Indeed, criticism against particular religions has also emerged in the past. However, anti-religious movements that have recently come into existence in Korea are in some regards unprecedented when compared to that of the past in terms of their patterns and context. Especially, the active anti-Christianity movement in general is definitely a new phenomenon. This research mainly focused on Christianity, but on-going anti-religious movements will be a major topic for further research that aims to understand the religious changes unfolding in Korea.


Keywords: 종교변동; 종교비판; 종교 대안운동; 종교 개혁운동; 무종교; 안티종교; 무신론; 진화론; 종교권력
Keywords: Religious change; religious criticism; secular-humanist movements; the Reformation; irreligiousity; anti-theism; atheism; the theory of evolution; religious authority/power

Ⅰ. 머리말

본 논문의 목적은 미디어와 책자 등을 통해서 현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의 대대적인 표출 현상을 살피고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웃 종교들 사이의 상호 비판적인 견해의 표출, 특정 종교의 자기 개혁적인 견해의 표출은 이전 시기에는 그다지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교 유입 때 신라에서 있었던 전통 종교와의 갈등,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 전 시기에 있었던 불교에 대한 유교 측의 비판, 조선 후기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유교 측의 비판, 20세기 초 유교 전반에 대한 비판, 1920년대 사회주의 측의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다. 그리고 개신교 유입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보이지 않는 상호 견제와 비판이 있었고, 이후에도 개신교의 전통종교와 소위 이단에 대한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 분위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양과 질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수준에 있다. 20~30년 전에만 해도 전혀 있을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개신교를 ‘개독교’로 지칭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 그리고 ‘가나안 성도’1)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개신교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전반적인 개혁 의지 또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유럽과 영미권에서도 이미 살필 수 있다.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보면 종교 전반에 대한 비판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이 유럽과 영미권에서도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종교 전반에 대한 비판 서적들은 대체로 영어권에서 발간된 책들의 번역본인 점을 감안해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종교 비판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경우도 함께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일단 국내의 경우만을 살피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자 한다. 차후에 다른 나라의 경우를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우리나라의 경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티 종교운동’이라고 하면 도킨스(R. Dawkins) 등의 무신론 운동이나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티 개신교2) 운동을 주로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들 이외에 종교 일반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과 특정 종교에 의한 자기 개혁적이고 대안적인 종교 내적 비판, 그리고 특정 종교가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이웃 종교에 대한 비판 운동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안티 종교운동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범세계적인 종교의 변동 추세를 개괄적으로 살필 것이다. 그리고 Ⅲ장에서는 본 논문의 주제를 염두에 두고 보다 좁혀 우리나라의 종교계의 현실을 개괄적으로 살필 것이고, 본 논문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Ⅳ장에서는 안티 종교운동의 내용을 유형별로 정리해 볼 것이다.

Ⅱ. 종교변동의 세계적인 추세3)

이제는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그 어느 나라의 종교도 세계적인 변화 추이와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종교의 변동에 대한 인식은 세계종교의 변동을 아울러 고려할 때 보다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종교의 변동 가운데 특히 우리는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종교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상 변화는 항상 있어 왔으며 21세기 초반부인 현재도 예외는 아니다. 단지 요즈음의 변화는 대체로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전방위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변화의 양상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현재에는 그 이전 시기와 달리 생태, 핵전쟁, 인구, 식량, 빈부의 차 등 그야말로 전지구적인 위협에 전면적으로 대처하여 그 해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의식이 증대하였다. 따라서 현재는 지구상의 그 어느 구석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지구적인 시각에서 그 발생 원인을 찾고 해결 방안을 강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지구촌 의식의 출현은 세계종교의 변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지구촌 의식의 출현과 함께 이제는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려는 경향도 동시에 증대하고 있다. 최근까지는 서구와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종교간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느 종교도 우위적이고, 강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다. 서구도 이제는 여러 지역 가운데 하나로, 그리고 기독교도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점차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에는 세계종교(world religions)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대교, 힌두교 등으로 분류되었으나 이제는 중국종교와 일본종교가 포함되어 적어도 종교와 관련해 볼 때 동아시아가 보다 주목을 끄는 관심 지역이 되었다.4)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가 이제는 서구권이 아니라 제3세계에서 더 영향력이 커가고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를 특징짓는 또 다른 개념으로 우리는 여전히 근대성(modernity)과 탈근대성(postmodernity)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근대성과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논쟁을 소개하거나 또는 그러한 논쟁에 끼어들고 싶은 의도는 없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종교와 근대성’, 그리고 ‘종교와 탈근대성’이라는 주제 아래 요즈음의 세계종교의 변동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종교와 근대성의 관계를 친화성(embrace), 비친화성(ambivalence), 배타성(exclusion) 가운데 어느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세계종교의 변동에 대한 인식은 각기 다르다.5) 그리고 현대종교의 변동을 탈근대성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현대종교에 대한 이해도 서로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새로운 종교운동의 출현을 탈근대성의 증후로 설명하든지, 또는 특정종교의 입장에서 탈근대성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스스로의 종교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 등으로 전개될 수 있다. 비록 최근에 근대성과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세계종교의 변동 추이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비생산적이라는 지적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6) 이러한 담론이 세계종교의 변동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현재 기독교는 거의 모든 나라에, 불교와 힌두교는 80여 개 국에, 유대교는 110여 개 국에, 그리고 이슬람교는 160여 개 국에서 활동하고 있다.7) 과거와 달리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종교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또는 다른 종교의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 보다 쉽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다른 종교를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간 상호 이해의 증진이나 교류, 그리고 생태, 인권, 평화 등을 위한 공동 모임이나 기도회의 개최 등을 현대 세계 종교상황의 특징으로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사상적인 면에서도 과거에는 특정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제는 여러 종교의 공통 기반 위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스미스(W. C. Smith)8), 힉(J. Hick)9), 슈온(F. Schuon)10), 길희성11)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이유로 인해 현재 세계종교는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한 채 다양한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종교의 이러한 변화 양상은 아래와 같은 유형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주변 상황의 변화를 완전히 외면하고 자기 종교전통의 테두리 안에 끝까지 머무르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종교이다. 서구 기독교와 이슬람교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본주의 운동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리고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종교(cult, sect 등)와 우리나라 개신교의 대부분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둘째, 전통을 창조적으로 복원하려는 양상을 보이는 종교이다. 대체로 이들 종교도 역시 보수적이고 우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전통의 재창조라는 측면에서 별개의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현대 힌두교운동과 개혁적 유대교운동, 그리고 불교에서 성지를 복원한다든지, 또는 수행 방법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셋째, 주변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사상이나 의례, 조직 등을 적절히 변용시키는 종교이다. 여기에 포함되는 종교는 물론 다른 종교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천주교가 미사에서 라틴어가 아니라 해당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생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교리에서 생태 관련 부분에 주목하는 것 등을 이 유형에 포함시킬 수 있다.

넷째, 현재의 세계적인 상황이 매우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비록 과거의 전통과 단절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좀 더 혁신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이러한 혁신적인 변혁을 추구하기에는 성격상 어려움이 많은 종교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 예수 중심주의에서 신 중심주의로 신관을 혁신시키려는 움직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실패에 그치기는 하였지만 유교의 종교화 운동12)을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다섯째,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해서 기존의 종교전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이다. 아프리카의 수 천 개의 독립교회(African Independent Church), 일본의 신종교, 기독교 컬트와 섹트, 그리고 서구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종교가 이 부류에 속한다. 새로운 종교는 역사상 항상 있어 왔지만 근래 세계적인 상황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종교의 발생 빈도는 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여섯째, 지구촌 의식의 증대로 종교간 교류가 활성화되는 한편으로 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면 종교의 토착화, 지역화, 지방화 현상을 모두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그 지역에서 종교와 민족주의의 결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과 여러 소수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중국 등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세계종교의 변동 유형은 엄격히 구별된다기보다는 중첩적이다. 따라서 한 종교전통 내에서도 여러 유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위에서 제시한 유형들을 중심으로 세계종교는 과거 전통과의 연속선 위에서 나름대로 변화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종교도 대체로 위에서 제시한 유형을 중심으로 그 변동의 추이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현대 한국종교계의 또 다른 현실

일반적으로 최근 한국종교계의 현실로는 신도 수의 변천을 중심으로 개신교와 불교가 쇠퇴하는 반면 천주교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거나, 또는 개신교 교회의 대형화 추세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밖에 현대 한국종교계의 또 다른 현실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몇몇 현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에도 이광수 등에 의해 개신교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으로 예를 들어서 한국 교회가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고, 목사들의 교육 수준이 낮으며,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의 내용들이 많다는 등의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기는 하다.13) 그러나 개신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은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그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특정종교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해도 공개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부터 개신교의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에 의해 일제하의 친일 문제, 그리고 이승만 정권 때의 정교유착 등이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이러한 지적은 학문의 울타리 내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현재 안티 개신교 사이트와 서적 등을 통해서 제기되고 있는 바이블과 교리, 조직 등 개신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개신교 내부의 개혁적이고 대안적인 방안이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지금까지 개신교는 성장 위주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한완상, 오강남, 길희성, 김용옥을 위시해서, 이제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을 중심으로 개신교 전통 교리의 재해석뿐만 아니라 소위 대형교회의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개신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실험적인 교회 운동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소위 소수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비판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다른 나라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개신교와 유사성이 있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개신교 중심의 집요한 공격은 몇몇 잡지와 목사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물론 과거와 달리 공격을 받는 소수 종교의 입장에서 현행법에 의거하여 방어를 하고 있어 개신교 중심의 공격은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개신교와 유사성이 있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비판적인 입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소수종교의 탈퇴자들에 의한 해당 종교에 대한 비판도 역시 해당 종교의 현행법에 의거한 방어와 해당 종교의 적극적인 대처로 인해 그 양상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종교 관련 학자와 언론인들이 한국종교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제는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14) 과거에는 적어도 종교학자들은 종교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예를 들어서 ‘종교 권력’이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종교 전반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학자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종교학자들도 이제는 종교에 대한 애정을 지니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종교들이 그야말로 종교다워지도록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하기는 하나 특히 앞으로 점차 제도종교가 쇠퇴하게 될 것이라는 우혜란의 주장은 이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만 하다.15)

다섯째, 종교무용론을 주장하는 영미권 서적들이 국내에 다량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구에서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창조론를 반대하고 진화론을 옹호하는 도킨스, 해리스, 히친스 등이 종교의 비합리성과 해악성을 논하는 전투적 무신론 관련 책들을 출간하였다. 이들의 책이 최근에 국내에 다량으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성격의 책들이 독자들로부터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나, 근래에 이들 책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니체, 러셀 등 개신교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 서적들도 여전히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영화나 유튜브가 많이 만들어지고 유포되고 있으며, 안티 종교 사이트가 성행하고 있다. 영화는 외국16)뿐만 아니라 국내17)에서도 만들어지고 있고, 유튜브는 주로 미국 쪽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대체로 각 종교에서는 자신들을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홈페이지는 주로 각 종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에 비해 안티 종교 사이트에서는 각 종교의 비공식적이고, 비판적인 자료들이 소개되고 있다. 과거에는 각 종교에 대한 지식이 주로 공식적인 홈페이지나 또는 각 종교의 성직자나 관련 학자들이 쓴 책자 등을 통해 유통되었으나, 요즈음은 안티 종교 사이트를 통해 각 종교의 부정적인 모습도 여과 없이 유통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종교에 대한 어찌 보면 조잡하고 왜곡된 지식이 무분별하게 유포되고 있다는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 본 논문과 관련해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세계 종교변동의 상황과 아울러 한국 종교 상황의 또 다른 현실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아래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Ⅳ. 안티 종교운동의 유형별 고찰

1. 종교 일반 비판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서구에서 제기되었고 따라서 주로 신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신론’ 또는 ‘종교무용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학자가 쓴 무신론을 소개하는 글이 있기는 하나18),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종교무용론 관련 서적들은 거의 외국 서적의 번역본들이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유통되고 있는 서적들을 중심으로 종교 일반의 비판 내용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합리적 비판

종교와 관련해서 이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학자로 우선 니체와 러셀을 열거할 수 있다.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는 원래 1895년에 출간된 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4년(나경인 옮김, 이너북) 그리고 2016년(두행숙 옮김, 2016)에 각각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의 말미에는 니체가 직접 작성한 ‘그리스도교 탄압법’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이 책이 여러 차례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책은 니체 자신의 종교 편력, 그리고 니체가 책을 쓸 당시 유럽의 종교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니체가 아무리 저명한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종교 관련 주장이 보편적인 주장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셀은 1956년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글을 포함해서 15개의 종교 관련 글들을 묶은 책을 발간하였다.19) 그는 이 책에서 종교가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주었고, 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해롭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종교로 인한 폐해는 없어질 것이고, 무엇보다도 열린 가슴과 열린 정신을 가지도록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20) 러셀의 이러한 견해는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자의 종교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책으로는 해리스21)와 히친스22)의 책을 열거할 수 있다. 해리스는 기성종교가 비이성적이고 편협한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였고, 히친스 역시 종교의 독선과 불관용의 측면을 비판하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선택한 문화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종교보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합리주의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2) 진화론적 비판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비판의 전형적인 예는 도킨스의 책23)에서 찾을 수 있다. 도킨스는 유전자에 토대를 둔 생명의 진화를 탐구하는 동물행동학,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그리고 발생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The God Delusion』이라는 이 책의 영어 제목에서 살필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망상은 모순되는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정신장애의 일종인데 신에 대한 믿음이 바로 망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종교의 해악과 무용성을 설파하고, 종교보다 이성과 과학을 신뢰하고 신을 버려야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고, 종교의 대안으로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무신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현재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Richard Dawkins Foundation)’24)을 설립, 무신론자들을 규합하여 무신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도킨스의 또 다른 책들로는 『눈 먼 시계공』 (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조상 이야기 –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이한음 옮김, 까치, 2005), 『지상 최대의 쇼』 (김명남 옮김, 김영사, 2009),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ㆍ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2010),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 종교ㆍ신화ㆍ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 (김명남 옮김, 김영사, 2012),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ㆍ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바다출판사, 2012), 『에덴의 강』 I (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4),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이한음 옮김, 바다출판사, 2015), 『무지개를 풀며 – 리처드 도킨스가 선사하는 세상 모든 과학의 경이로움』 (최재천ㆍ김산하 옮김, 바다출판사, 2015), 『확장된 표현형 - 이기적 유전자, 그 다음 이야기』 (홍영남ㆍ장대익ㆍ권오현 옮김, 을유문화사, 2016),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 생명의 역사, 그 모든 의문에 답하다』 (김정은 옮김, 옥당, 2016),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1, 2』 (김명남 옮김, 김영사, 2016) 등이 있다. 한 사람의 책이 이렇게 꾸준히 그리고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도킨스의 주장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이 우리나라에 꽤 많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웨이드의 『종교유전자』25)는 영어 제목 『The Faith Instinct: How Religion Evolved and Why it Endures』(2009)이 암시하고 있듯이, 종교는 인간의 진화적 성공에 필수적이었고, 종교행위는 진화적으로 형성된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보이어는 『종교, 설명하기』26)에서 종교는 정상적인 인지능력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부산물이고 신은 결국 인간이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노렌자얀은 보이어와 유사하게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7)에서 종교는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탄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역사적 비판

종교 일반에 대한 역사적 비판은 주로 기독교의 예수를 대상으로 제기되고 있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예수 관련 이야기가 당시에 주변 지역에 존재했던 여러 신화적 이야기들이 유대식으로 각색된 것에 불과하며, 예수는 따라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8) 이들에 의하면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 기독교 초기에는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예수의 역사적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게다가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대세였고, 바울도 원래는 영지주의자였으며, 따라서 바이블의 꽤 많은 분량이 영지주의 입장에서 이해할 때 비로소 의미가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나아가서 문자주의 기독교가 역사적 거짓말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토대는 조만간 반드시 전복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9) 오강남이 예수 관련 이야기를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영웅 신화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오강남의 견해는 이들의 주장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30)

루벤슈타인은 이와 달리 오히려 나사렛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었는데, 4세기의 가톨릭교회가 예수를 신과 가까운 위대한 인간이라는 아리우스의 입장 대신에 예수를 신과 동일 본질이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을 선택하면서 비로소 예수가 신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31)

이 밖에 예수는 로마군인 판테라의 사생아라거나,32) 또는 예수는 13세부터 29세까지 인도에서 활동했다거나,33) 그리고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거나,34) 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반쯤 죽은 상태에서 끌어내려졌다고 주장하는 책35) 등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예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4) 비판에 대한 반박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박은 주로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 진행되고 있다. 2007년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국내에 소개되자 이 책은 국내에 반기독교적 정서를 부추기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자 몇몇 개신교 관련 학자들이 종교무용론자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개신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종교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도킨스의 생각이 환상적이라고 주장하는 맥그라스 부부의 『도킨스의 망상』36)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도킨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소개되었고 이어서 국내 학자들에 의해서도 도킨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김균진은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이 러셀의 과학적 실증주의와 유사하며 별로 새로운 점이 없다고 지적하고, 도킨스의 책이 사려 깊은 학자의 깊이 있는 전문 서적이 아니라 저널리스트의 대중 강연 원고들을 묶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도킨스가 신학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고, 종교의 모든 긍정적인 기능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문제점만 지적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37)

박일준은 도킨스의 종교 비판이 인격신과 기복적인 믿음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이고, 도킨스가 자연주의적이고 범신론적인 신앙을 옹호하고 있어서 오히려 도킨스의 주장 또한 자못 종교적이라고 말하고 있다.38) 김경재는 니체, 프로이드, 맑스, 도킨스와 윌슨의 종교무용론 및 폐기론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살피고, 이어서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개신교가 권위적 가부장문화에 침윤된 전통종교 모습에서 탈바꿈하여, 자비와 긍휼심을 핵으로 하는 모성적 종교의 영성에로 전화되어야 하며, 권력지향적 국가종교 이데올로기로부터 스스로 해방하여,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해방시키는 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39)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명』40)이 2010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서구에서 도킨스가 인터넷을 통해 무신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면, 암스트롱은 역시 인터넷을 통해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종교를 통해 인류의 화합을 도모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41) 그녀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이 신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특정의 신 개념에 대한 부정이었다고 하고, 알카에다와 같은 근본주의자들과 도킨스와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 모두를 비판하면서, 이성과 신앙이 모두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현재 도킨스 등의 종교 비판에 대해 일견 무기력하게 대응해 왔던 국내의 신학자들이 암스트롱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다시 소위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42), 암스트롱의 또 다른 책들43)이 꾸준히 소개되어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적인 정보를 수정, 보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암스트롱의 견해를 수용한 김진호는 비교적 최근에 도킨스 등이 비판한 종교가 유일신에 한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 비판 대상도 ‘잡설’에 불과한 창조론이나 창조과학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내 놓았다.44)

2. 종교의 내적 비판

위에서 살펴 본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이 대체로 종교무용론과 종교폐기론에 가깝다면 여기에서 살피려는 종교의 내적 비판은 종교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여, 종교가 앞으로 진면목을 갖추게 하자는 점에서, 그리고 대체로 종교 내부의 신자들에 의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비판은 종교무용론이나 종교폐기론과 그 성격이 다르다. 여기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개신교 내부의 비판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개신교에 대한 개신교 내부의 비판으로 우선 개신교 사학자들의 비판을 살필 수 있다. 김승태는 일찍이 일제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친일 협력 사실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일본 개신교가 1967년에 2차 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실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전혀 반성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45) 근래에 제기되고 있는 개신교 내부의 비판은 특히 개신교의 친정권적 행태에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해방 공간에서 개신교는 반탁과 단정 수립 노선을 충실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거나,46) 서북 출신 개신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기회로 남한에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 과정에 주목하여 현재 개신교가 보수 반공주의의 주요 담당세력이라는 점을 지적하거나,47) 또는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등 특히 친개신교적 정권과의 야합을 지적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이들은 한국 사회의 숱한 병리 현상의 배후에 한국 개신교가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48)

개신교 사학자들의 비판 이외의 개신교 내부의 비판은 다시 크게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신학적 반성과 조직을 비판하는 목회적 반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신학적 반성은 대체로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하고, 신격화된 예수보다는 역사적 예수를 선호하고, 종교라는 제도보다는 소위 초종교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길희성은 현재 강화도에서 ‘길희성과 함께 하는 공부와 명상의 집’이라는 심도학사를 운영하고 있다.49) 그의 주장 가운데 우선적으로 관심을 끄는 주장은 대속(代贖)이 아니라 대고(代苦)라는 주장이다. 내가 죄인이고, 정작 나 같은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 나 대신에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았다는 대고의 개념으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저 높은 곳에 두고 우러러 섬기는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예수의 신앙, 예수의 삶을 따르는 개신교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묻지마 신앙’을 넘어 진정성 있는 신앙을 위해 고민하는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50)

오강남은 2009년에 도마복음 관련 책을 발간하였다.51) 그리고 그의 『예수는 없다』는 2001년에 발간된 뒤 40쇄를 거쳐 2017년에 개정판이 발간되었을 정도로 독자층이 나름대로 두터운 편이다52) 오강남의 주장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길희성과 비슷하게 역사적 예수를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내 안에 신의 나라가 있고, 내 안의 ‘참나’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용옥이 구약을 폐기하고 원죄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도마복음」의 역사적 예수를 역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용옥도 길희성이나 오강남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53) 도(道)의 신학을 주창하는 김흡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며 인간이며, 동시에 우주적 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54) 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개신교가 앞으로 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 신 중심주의로 바뀌어야 한다는 폴 니터의 주장을 상기시키기도 한다.55) 길희성, 오강남, 김용옥, 김흡영은 모두 유교, 불교, 도교 등 동양종교에 조예가 깊고, 개신교와 동양종교의 회통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과거 유영모나 함석헌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측면이 있다.56)

이들과는 달리 한국 개신교의 구원론에 대해 ‘아르뱅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신광은의 주장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57)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아우르는 신광은의 신조어이다. 신광은에 의하면 개신교 각 교파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주권) - 극단적/급진적 칼뱅주의 – 온건 칼뱅주의 – 수정 칼뱅주의 – 웨슬리식 아르미니우스주의 – 자유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 – 펠라기우스주의 – 과정신학/열린 유신론 - (인간의 자유)>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58) 우리나라 개신교의 경우 예를 들어서 장로교는 칼뱅주의, 감리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 그리고 침례교는 양쪽 모두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 개신교는 ‘아르뱅주의’에 의해 왜곡된 구원론을 신자들에게 교육시키고 있다. 왜곡된 구원론은 무슨 짓을 해도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이고, 나의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고 안전하며,59) 신자 자신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에 대한 철통같은 보장은 결국 윤리적 추진력을 소멸시키고, 나아가서 살인 면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60) 신광은에 의하면 아르뱅주의는 주창자가 없는 신학으로, 대중의 취향에 맞추려는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공동으로 참여해서 만들어 낸 ‘유사신학’에 불과하다.61) 비록 신광은은 구체적으로 새로운 대안신학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침례교에 몸담고 있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주로 신학적 성찰에 의한 반성으로 주로 개신교의 구원론과 관련이 있다면, 제도적, 목회적 측면에서의 반성을 담고 있는 책들은 주로 개신교의 교회론과 관련이 있다. 교회론을 반성하는 책들은 그동안 의의로 많이 출판되었다.62) 류상태는 천주교인이 비판하는 개신교인의 모습이라는 전제 아래, “하나같이 종교적 교리로 중무장한 아집 덩어리들, 언제든지 싸움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전사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성서를 외우고 공부하며 임전의 그날을 위해 교리의 칼날을 벼르고 있는 상종 못할 싸움꾼들, 평소에는 착하고 모범적인 친구이자 친지들인데, 종교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괴물처럼 돌변하는 무시무시한 싸움꾼들”63)로 개신교인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류상태의 이러한 묘사에서 현재 개신교인들의 전형적인 부정적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사실 교회론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개신교의 모습을 반성하는 내용들은 과거 1917년에 이광수가 지적한 문제점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류상태가 언급하고 있는 천주교인에 눈에 비친 개신교인의 이러한 모습이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태여 여기에 덧붙여서 말한다면 대형교회를 비판하면서 150여 명의 신자로 구성되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교회가 적절하다거나,64) 아니면 반메가처치 선언을 해야 한다는 주장65), 또는 제도에 얽매이기보다는 개신교가 소위 영성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 정도가 우리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주장들이다.66)

개신교 내부의 위와 같은 성찰적 반성에 대해 여전히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몇몇 사람들이 재반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대체로 이들은 개신교 내부의 이러한 성찰적 반성들이 주로 인본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마디로 소위 ‘잡탕 영성’을 도모하는 것으로, 겉모양만 개신교인 ‘짝퉁 개신교’일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67)

이상의 내용은 주로 개신교 내부의 발언이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 개별 종단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성찰적 진단도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오만과 편견, 배타주의, 타자의 악마화, 권위주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 종교권력 등이 주로 지적되고 있다.68) 종교연구는 지금까지 종교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우선적으로 지향해 왔기 때문에 사실 개별 종단의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일을 삼가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교들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이들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종교들이 그야말로 종교다워지도록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야한다는 종교연구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현상은 아니다.

3. 이웃 종교 비판

여기에서는 주로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이웃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에는 대순진리회나 증산도 등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이제 좀 열기가 식은 듯하다. 해당 종단에서 적절한 대응을 한 탓도 있고, 또한 해당 종단이 이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는 시선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탈자들에 의한 이전 소속 종교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열기가 식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천지, JMS, 단월드 등에 대한 개신교 측의 비판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으며, 이들 이외에도 근래에 중국에서 들어온 전능신교, 동방번개, 파룬궁에 대한 비판도 적극적으로 행해지고 있다.69) 개신교 측에서 보면 소위 이단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에서 비롯한 새로운 종교들은 끊임없이 개신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것이다. 물론 종교사가 증명해 주듯이 새롭게 등장한 종교들이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면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최근에 ‘전국신천지피해자연대(전피연)’를 중심으로 ‘유사종교 피해방지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전피연은 이 특별법의 대상으로 문선명(통일교), 박태선(천부교), 최태민(영세계), 조희성(영생교), 유병언(기독교복음침례회, 구원파), 이만희(신천지), 안상홍(하나님의교회), 정명석(기독교복음선교회, JMS)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전피연 관계자들도 이 특별법의 제정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개신교 측에서 이러한 특별법의 제정을 위해서 현 시점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자체가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얼마 전부터 등장한 안티 개신교인들에 의한 개신교 비판은 미디어에서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다. 개신교에 대한 이러한 집중적인 비판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튜브를 통해 스탠딩 코미디언 조지 칼린(G. Carlin)이 기독교를 풍자하는 영상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그러나 조지 칼린의 이러한 기독교 풍자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종교적 상황으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이런 내용의 풍자가 얼마 전까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기독교의 숨겨진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국내 제작 동영상을 인터넷 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70)

개신교를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여러 개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편이다.71) 비판의 내용은 앞의 4장에서 정리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72) 대표적인 개신교 비판 모임인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은 흥미롭게도 ‘바이블 19금 지정 촉구를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정도이다.73) 개신교를 비판하는 서적도 근래에 꾸준히 출판되고 있다. 저자들은 친개신교인이거나 탈개신교인, 그리고 가명을 쓰기도 하는데, 몇몇 책은 제목만 보더라도 개신교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주된 내용일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게 할 정도이다.74)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의 저자 쥐뿔개뿔은 소위 ‘반기독교선언’에서 개신교와 천주교 등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를 비판한다고 하면서,75) 동시에 대순진리회나 증산도를 기독교의 아류로 아울러 비판하고 있다.76) 그러면서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야웨가 아니라 우리 한국 전래의 하느님이라든가,77) 과거에 우리 한민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그 하느님은 어떤 외적 형상도 없이 우리 한민족 모두의 마음 안에서 지난 만 년 간 존재해 왔다거나,78) 단군 시조의 역사는 밝혀지는 중이요, 일본 식민사관을 벗어난 학파들이 지금 자료를 모으고 연구중이라거나,79) 개신교의 단군상 철거 운동을 비판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보면 특정 종교에 소속된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이진구가 안티 개신교 진영의 비판 논리가 ‘문화적 민족주의’와 ‘세속적 휴머니즘’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 점을 아울러 감안하면 필자의 이러한 추측이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80)

물론 안티 개신교 운동에 대해 개신교 측의 대응 방안이 꾸준히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81) 그러나 이전 같으면 적극적이고 전반적으로 그 대응 방식이 제시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안티 개신교에 대응할 ‘인터넷 선교사’를 양성하자는 등 현재로서는 소극적이고 부분적인 대응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이제열이 그간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서 『불교, 기독교를 논하다』82)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유일신, 창조, 섭리, 원죄, 악마, 내세, 천국, 지옥, 율법, 성서, 성령, 삼위일체, 구원, 회개, 부활, 재림 등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들을 불교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고찰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오르려는 산 자체가 다르다고 하고, 불교적 관점에서 기독교 교리를 분석하여 불교의 위대성을 알리고자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83) 『법보신문』은 불교 신자들을 위한 신문이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법보신문』에 게재되었을 때는 그다지 문제가 생길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성격을 지닌 책의 발간이 일회적일지 아니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글이 책으로 묶여서 불교 신자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 일반 사람들까지 볼 수 있게 된 상황은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을 살펴보았다. 과거에도 물론 종교 일반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그 내용과 맥락에서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 운동은 분명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개신교가 주요 대상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변동을 살필 수 있는 주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추측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개신교는 급격히 변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인터넷 등 미디어에 대한 손쉬운 접근으로 인해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개신교의 부정적인 측면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으면서, 이제부터는 개신교가 누려왔던 무소불위의 특권이 서서히 해체되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좋든 싫든 앞으로 일반인들과 이웃 종교들의 개신교에 대한 여러 인식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아울러 개신교의 이웃 종교들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도 상당 부분 줄어들고, 따라서 소수 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자세도 서서히 바뀔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 연구를 업으로 삼는 필자로서는 안티 종교운동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물론 어느 한 편을 지지할 수 있으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편치 않은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민하면서, 끝으로 안티 종교운동 관련해서 필자의 몇몇 견해를 제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종교관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 비판이 이루어지는 곳과 때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니체와 러셀의 종교 비판은 니체와 러셀이 살던 곳과 때의 종교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그들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 비판자들은 대체로 자기 종교, 또는 자기 교파 선호적 입장을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도 아울러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비판의 내용만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우선 상대방의 신앙 이력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종교에 대한 비판이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 신앙을 밝히면서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도 비판의 내용이 적절한지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따지기보다는 비판자의 신앙을 먼저 전제하고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둘째, 종교 비판의 대상이 어느 종교인지를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종교 일반 전체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개신교나 천주교, 불교 등 특정 종교가 대상인 경우가 많다. 천주교는 하나의 종단으로 활동하지만, 개신교와 불교는 여러 교파나 종파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가 비판의 대상인 경우에도 구체적으로 장로교인지 감리교인지, 그리고 나아가서 장로교나 감리교에서도 어느 교단인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불교의 경우에도 불교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조계종이나 태고종, 천태종 등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어느 종단이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이 초, 중등, 대학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국가의 관련 기관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종교에 대한 지식은 개별 종교단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종교 인구를 전체 인구의 대략 50% 정도라고 했을 때 이들은 많게는 1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종교교육을 받고 있다. 현재 국가가 공무원을 대상으로 종교편향 방지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에는 인터넷 등 미디어를 통해 종교에 대한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 일반이나 이웃 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소위 이단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비판의 내용이 다양해진 반면 비판의 수준은 대체로 피상적이고,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비판은 견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의 내용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 비판은 조롱, 또는 공격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비판이 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권 교육에서 그러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종교 관련 법규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가칭 ‘종교법인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된 적이 있었으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종단들의 반대로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재정비된 종교 관련 법규를 통해 종교 비판이 종교 갈등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서 제도적으로 종교 전문 법조인과 공무원을 만들 필요가 있으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종교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술기관도 신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가칭 ‘종교헌장’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5월에 ‘문화헌장’을 공표하였다. 문화헌장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내용은 “모든 시민은 … 종교 등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없이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 “사회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삶의 토대가 될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늘 확인하고 존중해야 한다.”, “문화다양성은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과 자주성의 토대이고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다원성의 원리이며 평화와 공존의 기틀이다 … 시민은 나라 안팎의 다양한 문화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여 세계의 문화 다양성과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한다.”,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문화적, 종교적 소수자와 소수집단은 자기 의사에 반하는 문화 정체성을 강요받지 않는다.” 등이다.

문화헌장 가운데 ‘문화’를 ‘종교’로 바꾸어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우리나라의 종교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종교학계가 주축이 되고, 관련 기관이나 유관 단체, 그리고 종교계의 의견을 수렴해서 가칭 ‘종교헌장’을 제정, 공포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Footnotes


1. 교회에 ‘안 나가는’ 개신교인을 지칭하는 용어.


2.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신교를 기독교로 지칭하기도 하나, 종교학에서는 여전히 기독교를 천주교와 개신교를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이 부분은 강돈구, 「세계종교의 변동과 한국종교의 미래」, 『계간 사상』 44 (2000), pp.100-104의 내용을 보완한 것임.


4. 비록 영국에서 발간된 책들이기는 하지만 Jean Holm이 편집해서 출간하고 있는 주제별 종교연구(themes in religious studies)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의 목차는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시크교, 중국종교, 일본종교로 구분되어 있다. Jean Holm, ed., Attitudes to Nature (London: Pinter Publishers, 1994) 등 참조.


5. 종교와 근대성이 친화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로는 T. Parsons와 R. Bellah를, 그리고 비친화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로는 P. Berger를, 그리고 서로 배타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로는 B. Wilson을 열거할 수 있다.


6. James A. Beckford, “Religion, Modernity and Post-modernity” in Religion: Contemporary Issues, ed. by B. Wilson (London: Bellew Publishing, 1992), pp.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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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90년대 중반에 공자를 교조화하고, 의식과 조직을 일반 종교와 같이 정비하려고 하였던 유교운동. Kang Don-ku, “Traditional Religions and Christianity in Korea”, Korea Journal 38-3 (1998), pp.110-1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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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같은 책,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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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김선주,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서울: 삼인, 2009); 양희송, 『다시 프로테스탄트』 (서울: 복있는 사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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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같은 책, p.99.


77. 같은 책,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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