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야규 마코토.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야규 마코토. Show all posts

2023/06/26

지구는 인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다 - 오마이뉴스

지구는 인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다 - 오마이뉴스

지구는 인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다책 '인류세의 철학' 통해 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
23.06.26 08:43l최종 업데이트 23.06.26 
박길수(ubomanri)

후쿠시마 원전 핵 오염수 방류를 둘러싸고 일본보다 한국 사회에서의 갈등과 긴장이 더 고조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원인이 된 동일본 대지진은 사실 우리가 '인류세'라고 하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 중의 하나이다.

시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음, 조성환 외 옮김, 모시는사람들 펴냄, 2022)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새삼스럽게 '인간 존재와 생존의 조건'을 탐구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인간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읽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 "인간의 조건"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펼쳐진 폐허 위에서, 인간의 조건을 새삼스럽게 새로이 인식하는 과정을 담아 내며, '인류세'에서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 박길수

관련사진보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이 말은 영화 <부당거래>에서 양아치 같은 '주양 검사'(류승범 粉)가 내뱉는 대사다. 영화에서 주 검사는 경찰의 눈치를 살피는 검찰 수사관(공 수사관, 정만식 粉)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라고 찰지게 돌려까기 한다.

물론, 주 검사의 경우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을 악용하고 남용하고 오용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양아치 주' 검사의 오용 사례를 경계하는 것과 별개로, 인류 사회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매우 큰 문제다.

인류세의 관점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인류 거의 전부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이 누리는 자연(지구)의 호의를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자연의 호의를 인간의 권리로 알다

오늘의 시기를 '인류세'라는 지질학적인 용어로 부르기 시작한 지 20년이 지나는 시점이다(2001년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처음 제안했다). 학술적으로 용어를 공식화하기 위한 움직임도 최근에 시작되었다.

현재 공식 지질 시대 명칭인 '홀로세'가 시작된 것이 1만 년 전이므로, 현생인류는 '지질 시대'가 바뀌는 것을 '직관(直觀)'하는 최초의 인간-인류가 될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가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는 티켓일 뿐이라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자연'이나 '지구'를 무한 에너지, 무한 원재료 공급처로 간주하며 살아왔다(아니,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편의상, 그리고 이익을 위해 모른 척하고 내처 달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성장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해 왔다).

최근 들어 '인간중심주의'를 자성(自省)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것을 '천부인권'이라 부르며, 인간이 누리는 자유, 소유, 향유의 권리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라고 구가(謳歌)해 왔다.

당대의 것뿐이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베풀어질 호의까지도, 마구잡이로 가불해서 흥청망청 소비해 왔다. 경고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왔지만, 폭탄 돌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아니었다.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자연(지구)은 그동안 자신이 빌려준 것들의 목록을, 그 이자까지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돌려받는 방식을 아주 거친 것으로 예비해 놓고 있었다. 자비란 없다. 애초에 호의가 없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인류세'를 맞이하여, 인간은 그동안 누려온 것을 모두 토해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당대에 누린 몫뿐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땅속에 묻힌 사람들(최소 200년 전까지 소급해서)이 누리고 간 것까지, 모두 뱉어내야 한다(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그중 일부라도 상환을 미루는 것이다. 리볼링! 그리고 실제로 지금 인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지구'의 시간이다. 시시각각 다가드는 지구 차원의 불길한 예후들(기후재난과 코로나19 펜데믹 등)을 접하며 인류 대중은, 그동안 일부 선각자들이 소리 높여 외치던 바 "인간은 지구 전체의 만물과 세세히 연결된 존재다. 더불어 사는 길을 택하지 않으면, 파멸, 공멸, 전멸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점점 실감하며,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부제가 붙은 <인류세의 철학>은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말미암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펼쳐진, '인간 생존의 조건'이 파괴된 폐허지 위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지를 보면서 쓴 책이다.

저자는 대지진에 의해 여지 없이 파괴된 인간 삶의 조건(문명으로 구축한 시설물, 사회구조)들을 보면서, 인간이 '사물로서의 행성'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실감하였다고 고백한다.

인간 생활은 그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과 활발하게 관련되는 것인 한, 언제나 다수의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물세계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생활은 이 세계를 떠나는 일도 없고 초월하는 일도 없다.
시노하라가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한 이 대목은 인간 삶이 사물(지구도 하나의 사물이다) 세계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의 호의라고 생각하며 남용한 지구의 자연 사물은 실은 인간 자신의 살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은 지금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현장에서 들려주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구로부터 날아드는 청구서


▲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 비인간 동물, 비인간 사물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이제, 겸손해져야 한다. (사진은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
ⓒ 박길수

관련사진보기

문제는 깨달음/회개보다 청구서가 먼저, 이미 들이닥쳤다는점이다. 그것이 이른바 '인류세 담론'이다. "빚쟁이가 몰려온다!"고 외치는 것이다! 시베리아(2019), 호주(2019-2020), 유럽(2021)에 이은 올해(2023) 캐나다의 대화재 그리고 그 어간의 중국과 유럽의 대홍수 등은 모두가 지구가 그동안 베푼 호의를 회수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올해와 내년에 걸친 '울트라 폭염' 등으로 청구서는 계속해서 날아들 것이다.

그런 지경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라니! 인간은 자연(지구) 앞에서 겸허해져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그동안 갑질한 것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물론 그렇다고 빚이 탕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 값은 치러야 한다. 지구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더불어사는 공생체(共生體)라는 걸 깨닫고, 거기에 갚하는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아직도 대다수의 인간이, "지구가 베푸는 호의는 덫에 가까운 고리채"인 줄 모르고 여전히 흥청망청 소비하고 있다는 데 있다. 현대인은 그렇게 소비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도록 길들여져 왔다.

혹은 이렇게 사는 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기세뇌를 거듭한다. 이제,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을 때만큼의 고통스런 금단현상을 각오하고, '마약과도 같은 빚지는 인생-성장주의'를 끝장내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는 그 첫단추다. 첫단추를 잘 끼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단추를 끼워 가야 하고, 그 단추의 크기도 점점 크질 것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같은 건 애당초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에도 일부 수정하여 공유합니다.
- 이 글을 쓴 필자는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 '인간의 조건]을 발간한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인류세의 철학 -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

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은이), 조성환, 이우진, 야규 마코토, 허남진 (옮긴이), 모시는사람들(2022)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태그:#인류세, #호의, #후쿠시마, #지구인문학, #지구

2023/06/20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관리자 2017.07.25
첨부파일0추천수0조회수701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에 대하여2 MONTHS AGO BY 무영 정 IN 다시 개벽이다 TAGGED: 개벽, 개벽신문, 개벽신문 63호, 개벽하는 사람들, 원광대학교, 콜로키움


* 이 글은 개벽신문 6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제5회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

야규 마코토(柳生眞)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3월 17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제5회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이 개최되었다. 이번 콜로키움에서는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文化內開花)의 시도>라는 제목으로 일본 난잔대학(南山大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김승철(金承哲) 교수를 발표자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이찬수 HK연구 교수를 토론자로 모시고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 학파인 교토학파(京都學派)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일본에서의 토착화, 일본 문화와 기독교 사상과의 조화·융합 시도, 기독교와 불교사상 혹은 자연과학과의 대화에 대해 논의했다.

교토학파(京都學派)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활약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와 그의 제자들로 서양의 사상·철학·종교와 동양(혹 일본)의 융합을 시도한 학파로 잘 알려져 있다. 교토학파는 크게 그 내용이 다양하고 종교색이 강한 우파(右派)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한 좌파(左派)로 나뉘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교토학파 우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상의 일본 토착화,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적·철학적 융합 시도에 대해 다루어졌다. 김승철 교수가 발표에서 문화 내 ‘개화(開花)’라고 쓴 것은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바깥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씨앗’을 어떻게 뿌리내리게 하고 키우고 꽃피우게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 기독교의 특수성
일본의 기독교 포교는 1549년 성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전국시대 일본에 와서 로마가톨릭 선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금교령을 내린 이래로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시대를 통틀어서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국가와의 외교·통상 관계를 전면 금지시키고 철저한 기독교 탄압정책을 취했다.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의 내항으로 인해 도쿠가와 일본이 개국했다. 그 이후 일본에 오는 서양인이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믿거나 서양인끼리 성당·교회를 가지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일본인이 기독교를 믿거나 일본인에게 포교하는 것은 계속 금지되었다.

심지어 유신 초기의 메이지정부(明治政府)도 애당초 기독교 탄압 정책을 계승했고 가쿠레 키리시탄(숨은 기독교신자. 몰래 가톨릭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서양 각국의 압력과 비판을 받고 메이지정부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한 후에도, 또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공포, 1890년 시행)으로 신앙의 자유(제국헌법제28조)가 보장된 이후에도 일본 기독교는 늘 반일본적이고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이유로 사회 지도층, 보수층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사이에 기독교에 입신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일본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게 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의 패전 후 일본국헌법에서는 “국가의 안녕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이라는 규정이 없어지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일본국헌법 제20조 제1~3항). 그 후 옛날과 같은 기독교에 대한 시기와 적대감, 경계감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기독교(가톨릭, 성공회 등도 포함해서) 신자 수는 일본 인구 약 1억2천만 명 중 불과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혼합적인 일본의 풍토를 가리켜 흔히 “일본인은 연초에 신사(神社)에 참배하고, 기독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절에서 장례식을 지낸다.”고 농담처럼 말해진다. 기독교가 운영하는 학교나 대학, 병원도 많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기독교 유래의 연중행사가 정착된 지도 오래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오늘날 일본에서 기독교는 표면적, 주변적, 부수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가장 핵심적인 유일신(唯一神) 신앙, 혹은 하나님과 1대1로 맞서는 강렬한 자아의 개념은 여전히 서양적인 것, 또는 비일본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면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계 내에서는 다수파의 일본인에게 어떻게 유일신 신앙을 수용시키느냐가 계속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 일본을 거울삼아 기독교 스스로를 보았을 때,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너무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이어서 다른 문명·문화·종교와에 갈등, 대립을 빚지 않았을까, 다종교·비기독교문화에 대해 너무 억압적이고 패권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으로 임하지 않았을까, 너무 인간중심주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도 제기되었다.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의 종교와 사상, 특히 불교와의 대화는 그러한 기독교의 자기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토학파의 기독교와의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추진해 온 신학자인 얀 반 브라흐트(Jan Van Bragt)는 기독교가 불교와 대화해야 할 동기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는 토착화의 동기, 즉 너무 서구 기독교를 직수입한 일본 기독교를 “일본인의 마음의 금선(琴線)에 와 닿는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알리게 한다는 동기이다. 가톨릭 문학자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인 기독교도로서 영성, 죄와 구원, 그리고 “예수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려 했다. 최근에 영화화된 『침묵(沈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 탄압을 견디지 못해 후미에(踏畵)1를 밟고 기교(棄敎)하려 한 선교사로 도리고 신부 앞에 예수가 나타나 “밟아라. 너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왔다.”고 말한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에는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대화의 동기, 즉 소수파로서의 기독교인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불교도와 대화하고 신학적 통로와 중계를 마련하려는 동기이다.

세 번째는 탈 서양적 형이상학의 동기이다. 이것은 지상적 존재를 정초(定礎)하려고 형성된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종교적 사실, 특히 셈족(유태)적 사고방식에 그 근원을 둔 기독교를 표현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각과 함께 그 희랍적 범주나 논리를 가지고 표현된 신학(과 그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앙과 이성”의 대립)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적 기독교 신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신앙과 자유와의 갈등, 대립을 불교철학의 논리를 도입함으로써 풀고자 하는 것이다.

혼다 마사아키(本多正昭)는 기독교인으로서 불교의 “즉(卽)의 논리”와 만나면서 기독교에의 입신이 단순한 불가역성(不可逆性)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신뢰와 사귐은 가역성의 지평에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에 저 불가역성이 이러한 가역성의 인(因)이라고 해야 된다고 말했다. 또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노데라 이사오(小野寺功)는 가톨릭 신학과교토학파의 총수인 니시다 기타로 철학의 “장(場)의 논리” “절대무(絶對無)의 장소”를 접목시킴으로써 일본적 영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니시다의 ‘장소’론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가 거기에 있는 장소’(三位一體のおいてある場所)로서 파악할때, 실로 의미 깊은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적 영성의 실존적 자각의 논리인 ‘절대무의 장소’의 사상과, 성서와 교회의 신앙적이고 계시진리의 근본적인 논리 구조를 나타내는 삼위일체론은 가장 깊이 상접(相接)하는 하나의 진실의 사태가 된다.”고 말했다.

오노데라는 일본적 영성(靈性)을 “대지적 영성”, “대지성(大地性)”이라고 설파한 불교학자이자 일본 선불교와 선문화를 영어로 외국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도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우리들의 이성에 있어서 절대무인 근원은 기독교적인 신앙 의식에 있어서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취한다. 그리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절대와 상대가 교류하는 장소, 또는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이 탄생하는 ‘장소’인 어떤 대지적(大地的) 영성(靈性)의 이념화의 시도이고, 성경의 ‘거기에 있어서 있는 장소’로써 절대자의 자기사영점(自己射映點)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절대무의 근원이 기독교적인 신앙의식으로는 삼위일체론이 되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대지적 영성의 이념화임과 동시에 절대자가 스스로를 투영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가톨릭 신학과 니시다 철학, 스즈키 다이세츠의 철학을 아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자인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도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를 배우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구원이란 인간의 개인적·사회적인 본래성, 전체성의 회복이고, 그 중심은 원래 자기·자아인 인간이 자기·자아로써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지만, 이 ‘자각’은 기독교적 메시지의 중심임과 동시에 불교적 깨달음(覺)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또 야기는 “… 예수는 사람이 어떠한 교단에 속하는 어떠한 교의를 받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방식이 사실상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가가 문제라고 가르쳤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했다.

교토학파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철학자·신학자·사상가들의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접목 시도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한 반 브라흐트나 종교다원 주의를 주장한 존 힉(John Hick)과 같은 기독교 절대주의와 배타성에 반대한 종교 철학자·신학자와도 호응하면서 니시다의 “절대무의 장소”,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覺)의 논리 등을 통해 기독교 신학과 불교와의 접목, 서구기독교의 배타성(排他性)·독선성(獨善性) 배제, 그리고 일본의 지적 풍토에의 기독교 토착화를 시도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보는 교토학파와 기독교와의 대화
일본이 근대화한 이래로 기독교 또는 서양문명·철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응·대결할 때에는 불교사상 중에서는 특히 선불교(그리고 그것에 유래하는 니시다의 장소론,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론)를 내세웠다. (유교사상을 내세울 때는 양명학(陽明學)을 내세워 기독교나 독일관념론과 대비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김승철 교수는그 배후에 서구 근대적 사유의 근간이 되는 근대적 자아에 대한 일본 지식층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한다.

다만 종교다원주의의 사상적 전통과 시도는 일본만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도, 중국, 한국 등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던 범아시아적인 사상적 맥이다.
동서양의 사상적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때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어떤 사상이 주로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를 맞이할 “호스트” 역을 맡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승철 교수는 불교의 경우 한국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내세웠고, 중국에서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이찬수 교수는 “김 교수님의 발제 내용은 한국적 상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논평하면서 “두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했다. 하나는 교토학파의 니시다의 수제자이자 니시다철학의 비판자인 타나베 하지메(田邊元)의 사상이다. 타나베는 니시다의 “즉(卽)”의 논리에게는 “매개”가 결여되고 있어서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적에 공(空)을 색(色)과 “즉(卽)”하게 해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매개를 중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무가 자기를 한정해 사물의 세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식의 근저에서 “인식하려는 의지(Willezur Erkenntsis)”가 도덕적 실천을 통해 인간적 오성과 신적 직관을 연결하는 매개로 적용한다고 지적했다.

타나베는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사상을 들어서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그 본원(本願), 중생의 신심(信心)의 세 가지를 중요한 요소로 요약할 때 “신심”은 바로 매개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극락정토에 인도하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본원을 세우셨고, 아미타불의 은총과 중생의 신심은 별개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신심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을 구체화시켜주는 매개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신심이 없는 중생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없다). 타다베는 신란의 사상에서 니시다가 보지 못했던 “매개”의 구조를 발견한 뒤 이것을 진리 체험의 타력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교토학파이면서 니시다적인 “절대무의장”이론에 부족한 “매개”에 주목하여 독특한 구제론(救濟論)을 전개한 것이다.

또 이찬수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서 양자 사이에는 서로 겹치는 공통성의 겹치지 않는 문화적 차이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에도 역시 일종의 도그마성이 있고, 또 불교 자체가 기독교나 서양철학과 만나서 변화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문화내(文化內)”가 아니라 서로가 문화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할 거라고 덧붙였다.

남은 과제들
종합토론에서는 “왜 한국 사람으로서 종교다원주의라고 말하고 종교회통주의(宗敎會通主義)라고 말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 나왔다.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하나의 신성(神性)이 다양한 모습(종교)으로 표현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다원(多元)”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것보다 오히려 원효(元曉)의 화쟁회통(和諍會通) 이래 흔히 쓰여 온 “회통”이라는 말이 더 바람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조선 시대에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에서 많은 서학(西學) 서적들을 가져와 동서 회통을 시도한 적이 있고, 19세기의 최한기(崔漢綺)와 같이 자타(自他)의 통(通), 동양전통의 기철학과 서양과학과의 통, 정치의 통, 사회경제의 통, 심지어는 교(敎)와 교 사이의 통까지 포괄적으로 논리화한 사상가도 있었다. 그리고 동학(東學)의 최제우(崔濟愚)는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라고 하는 기독교와도 불교, 또는 유교와도 완전히 다른 영성론을 주장했다. 이렇듯 한국에는 깊고 오래된 사상적 전통이 있고 서구 기독교와의 대화도 충분히 가능한 역량과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이번 회의에 청중으로 참석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26년간 교토포럼을 주재해 온 경험에서 “대화할 때 대화자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가장 일본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일본과 대화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내 개화”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일본은 외부의 문화·사상을 받아들여서 자기 토양 속에 끌어들여서 “개화”시키는 것은 잘 해왔기 때문에 이제 문화의 문화 사이의 “문화 간 개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교토포럼을 하면서 교토학파의 학자들과 늘 논쟁을 벌여온 것이 바로 니시다 철학의 “절대모순(絶對矛盾)의 자기동일(自己同一)”의 논리였다고 한다. 이 논리는 필경 동화(同化)의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은 한사상·한철학이 지니는 “절대모순의 자타상생(自他相生)”의 논리, 즉 자기와 타자가 모순이 있어야 오히려 서로, 함께 산다는 논리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석
1 후미에는 예수 또는 성모마리아를 부조한 동판을 가리킨다. 에도시대에 몰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천

柳生真 - 최한기의 사회관

(6) 柳生真 - <최한기의 사회관> 최한기는 “사람, 집안, 나라, 가르침은 그 일을 가리켜 말하면 (사람의) 많고 적음,... | Facebook

<최한기의 사회관>
최한기는 “사람, 집안, 나라, 가르침은 그 일을 가리켜 말하면 (사람의)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으나 점차 통하게 되면 그 내실은 한결같다(人家國敎。指事而言。雖有多寡大小之分。漸次通之。其實一也。――『神気通』巻三・変通「除袪不通」)라도 말했다. 즉 그는 개인, 가정, 국가, 문화권을 개체, 가족공동체, 국가공동체, 종교공동체로 모두 규모의 차이는 있어도 하나의 유기체로 본 것이다.
◇◇◇
『동의보감』에도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通則不痛, 不通則痛)”라고 하는 것처럼 동양의학에는 몸속의 기가 두루 통하면 건강하고 기가 부족하거나 과다하면 병이 생긴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있다.
최한기는 그러한 동양의학적인 인간관을 발전시켜서 사회, 세계, 우주 전체에 적응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가 스스로 자기 사상의 기원을 밝힌 글은 없지만 그의 대표적인 호인 ‘혜강(惠岡)’은 그가 중년기에 서울 혜민서(惠民署) 근처에 살았으므로 “혜민서 언덕”이라는 뜻으로 호를 그렇게 지었다는 설이 있다.
◇◇◇
그리고 또 하나, 최한기가 기철학을 처음으로 확립한 『신기통』『추측록』을 쓴 바로 그 해에 그는 둘째 달을 14살로 여윈 것이다. 그가 딸을 애도하는 아버지의 비통한 마음이 담긴 축문이 혜강 증손가에서 발견된 초고 중에 들어 있다.
차녀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아버지 최한기는 혜민서의 의원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고, 스스로도 딸의 병을 고치려고 의학서를 섭렵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통/불통’을 중시하는 동양의학의 사상에 주목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다만 당혹스러운 사실은 국가를 한 몸 또는 한 집안으로 비유하는 국가유기체론, 가족국가론은 근대에서 권위주의체제, 전체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근대 정치사상의 국가 유기체론은 의학적으로도 잘못된 인체 인식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이론은 국가/정부/임금이 생각하고 명령하는 두뇌, 국민이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수족이라는 ‘주인-노예 모델(Master-Slave model)’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전제적,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인체 시스템과 견강부회했을 뿐, 실제 뇌신경계의 구조와도 맞지 않는다.
◇◇◇
최한기가 오히려 외부에서 자극을 받고 그것을 저장(기억)하고 생각하며 외부로 시행하는 뇌신경계의 구조, 다양한 기관들이 각각의 개성을 발휘하면서 조화하고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인체의 작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가 “사람, 집안, 나라, 가르침은 …… 그 내실은 한결같다”라고 말한 것도 ‘통/불통’을 논하는 문맥에서이다.
결국 개인이나 크고 작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나 상관없이 자기만 알고 남의 일을 모르면 반드시 자기들이 잘났다고 여기고 남을 무시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협소해지고 해치게 되는 병폐라는 것이다.
그 병을 고치려면 텅텅 비우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많이 보고 듣고서 남의 좋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남과 나(우리)에게 서로 통용하는 떳떳한 도리를 얻으면 서로 참여해서 인도가 바로 선다고 말한다.
◇◇◇
다시 말하면 (서양근대적) 국가유기체론에서는 국가=두뇌와 국민=수족의 지배-복종 관계가 기축이 되고 기껏해야 국가의 지배 아래 각 기관(관공청과 민간, 국내의 각 단체, 신분, 직업, 계급 등)이 조화를 이룬다는 일군만민(一君萬民) 체제의 찬양밖에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최한기의 경우는 서로 다른 타자들의 상호 이해와 협력이 기초가 된다. 이것은 집안, 나라, 문화권 차원에서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오히려 잘났다고 자기 것만 내세우고 남을 무시하는 것은 개체 또는 공동체의 ‘불통(不通)의 병’인 것이다.
All reactions:
You, 박길수, Sunghwan Jo and 3 others

알라딘: 인류세의 철학 -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 | 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은이),조성환

알라딘: 인류세의 철학


인류세의 철학 -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 | 지구인문학총서 2
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은이),조성환,이우진,야규 마코토,허남진 (옮긴이)모시는사람들2022-08-31






























Sales Point : 1,049 

 10.0 100자평(4)리뷰(0)


책소개
지구인문학총서 2권. 인류가 새롭게 맞이한 인류세에 즈음하여 한나 아렌트가 제기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철학적 물음을 재조명한다. 아렌트의 견해에 인류세를 인간사와 자연사의 얽힘으로 이해한 차크라바르티의 견해를 더하고,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이나 티모시 모튼의 객체지향철학 등이 제기한 ‘사물’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경유하여, 동일본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체험과 연결시키면서 재구성하고 있다.

인류세란 “산업혁명 이래의 인간의 활동으로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붕괴되고, 그로 인해 인간의 조건이 위협받는 시대”이다. 이에 즈음하여 근대문명이 구축해 온 인공세계는 자연세계 위에 놓인 것이며, 자연 세계는 연약하고 깨지기 쉬우며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 책은 인류세에 즈음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수용하며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인간이 붕괴의 길로 추락할 것인가, 성찰을 바탕으로 자연세계와 화해하고 붕괴 이후의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지향할 것인가를 묻는다.


목차


한국어판 저자 서문
프롤로그 『인류세의 철학』은 어떻게 탄생했나?
해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론

제1장 인간과 자연의 관계
· 인공물과 자연 · 인공물로서의 경계
· 인간의 세계·경계·자연과의 만남 · 인간의 세계와 그 붕괴
· 인간세계의 한계로서의 경계 · ‘아우라의 붕괴’에서의 양의성(兩義性)
· 자연 이해의 어려움 · 세계의 사물성
· 상호연관의 펼쳐짐

제2장 인간세계의 이탈
· 인간이 아닌 것의 세계 · 인류세
·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 · 인간의 조건의 사물성
· 이탈하는 인간세계 · 인간세계를 교란시키는 자연

제3장 인간세계의 취약함
· 인간세계의 과학기술화 · 지구로부터의 인간 이탈
· 인간의 조건의 붕괴 · 환경 위기와 인간 소멸
· 무용해지는 기분과 인공세계의 구축 · 생태적 현실로

제4장 생태적 세계
· 데이터로 본 현실의 충격 · 데이터가 제시하는 현실의 역설
·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 유체적(流體的) 사고에 대한 비판
· 인간은 자연 속에 살아 있다 · 인간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의 사이
· 취약성의 현실성

제5장 사물의 세계와 시적 언어의 가능성
· 사물과의 상호교섭 · 과학기술화 과정에서의 주체성 상실
· 시적으로 말하기 · 사물의 응시
· 정신의 극복 · 사물이 만나고 모이는 장소
· 과대 도시화와 공업화의 결말

제6장 생태적 공존
· 현전(現前)의 공간과 그곳으로부터의 제거
· 인간 아닌 것의 힘들과의 접촉 · 인간의 유한성
· 혼돈공간의 발생 · 확산에서의 연관
· 파편과 함께 있다는 것 · 빛과 어둠의 경계
·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된다

결론
접기


책속에서


P. 42아렌트는 근대 이후의 인간 생활의 문제를 ‘인간의 조건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린 문제’로 생각하고자 하였다. 『인간의 조건』 제2판(1998)에 실린 서문에서 마거릿 캐노번(Margaret Canovan, 1939~2018)은 아렌트가 인간의 영역인 공적 세계에 대한 고찰을 지구라는 행성, 즉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렌트는 1957년의 인공위성 발사를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파악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지구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즉 “지구에서 하늘로 달아나고, 핵기술과 같은 실험을 통해서 인간 존재는 자연의 한계에 도전해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4 아렌트는 인간의 영역이 지구에서 이탈하여, 그 자체로 자족하게 되는 징조를 인공위성 발사에서 감지했다. 접기
P. 90인간 생활의 조건이 취약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인간 생활의 조건이 인간적인 의도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공 공간만으로는 완결되지 못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지탱해 주는 자연과 만나는 곳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모튼이 “사물에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은 인공과 자연이 은밀하게 만나는 곳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인간 생활에서는 사물의 기묘함을 대체로 의식하지 못한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에 사는 데 익숙해지게 됨에 따라, 그 이외의 세계, 즉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세계는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 아닌 것’으로 지각되고, 거기에서 감각이 닫히고 사고도 멈추기 때문이다. 접기
P. 127차크라바르티는 기후변화와 함께 일어나는 사태를 둘러싼 사유를 펼쳐나가는 일을 야스퍼스의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한 의식”에 관한 검토에서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기술화가 인간 생활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현실은 전문적으로 분화된 개별 지식의 테두리에 머물러서는 사유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인간이 지구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뿌리 없는 풀과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자각을 촉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사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접기
P. 153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사물성(事物性)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물을 두 가지 상태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인간적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된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바깥으로 내몰려 서로 무관한 것들이 퇴적되어 있는 상태이다. 인간 존재를 조건 지우는 상태에 있는 사물은, 인간 생활이 영위되는 인간적 세계의 영역 안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되고, 인간 생활을 현실에서 뒷받침하는 것으로 감지되며 인식되고 있다. 이에 반해 인간적 세계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은 명확히 ‘세계 아닌 것’(non-world)으로 불리고 있다. ‘세계 아닌 것’이란 인간 생활과 무관하고 인간 생활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인간 생활로부터 방치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접기
P. 182오노의 시는 공업화된 장소를 사물성에서 포착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균질 공간의 확장과 그 확장에 대한 대항이라는 관념적 도식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모튼의 표현을 빌리면, 오노의 시는 “인간이 구축한 장소보다 훨씬 더 거대한 장소에 우리가 있음을 발견한” 시로 읽을 수 있다. 거대한 장소에 있을 때 인간은 바람과 연기를 느끼며, 풀과 광물의 현실성을 느낀다. 이 드넓은 펼쳐짐 속에 들어감으로써, 인간이 문화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장소가 협소하고 제한적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환영이나 정신으로 가득 찬 번화가와는 다른 ‘갈대밭’이라고 하는 변경의 정적 속에 몸을 두는 것이 요청된다. 접기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시노하라 마사타케 (篠原 雅武)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교토대학(京都大学) 총합인간학부(総合人間学部) 졸업. 교토대학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박사. 현재 교토대학대학원 총합생존학관(思修館) 특정 준교수. 저서로『공공공간의 정치이론(公共空間の政治理論)』(人文書院, 2007), 『공간을 위하여(空間のために)』(2011), 『전-생활론(全-生活論)』(2012), 『살아진 뉴타운(生きられたニュータウン)』(2015),『복수성의 에콜로지(複数性のエコロジー)』(2016), 『‘인간 이후’의 철학(‘人間以後’の哲&... 더보기

최근작 : <인류세의 철학> … 총 16종 (모두보기)

조성환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조교수.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원광대학교에서 역사와 종교를 공부했다. 20대에는 집합론과 대수학에 빠졌고, 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 철학을 공부했다.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사상과 개벽파를 연구했다. 최근에는 1990년대에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2019년에는 이병한과 함께 사단법인 다른백년 홈페이지에 칼럼 〈개벽파선언〉을 연재했고, 2022년에는 단독으로 〈K-사상사〉를 연재했다.
지은 책으... 더보기

최근작 : <K-사상사>,<동북아, 니체를 만나다>,<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 … 총 19종 (모두보기)

이우진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왕양명 공부론의 교육학적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Korean Edcuation : Thought, System and Content』 등이 있고, 역서로는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야누시 코르차크 : 정의를 위한 교육』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신유학의 아동교육(1~2)」, 「Changes in the image of the ideal teacher in Korea」 등이 있다.

최근작 : <하와일록>,<독도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일제강점기, 저항과 계몽의 교육사상가들> … 총 6종 (모두보기)

야규 마코토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일본 오사카(大阪) 출생. 강원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일본 KYOTO FORUM 특임연구원, 중국 西安外國語大學 및 延安大學 일어전가(日語專家)를 역임했다.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저서로 <崔漢綺氣學硏究>(경인문화사, 2008), <東アジアの共通善─和・通・仁の現代的再創造をめざして─>(岡山大学出版會, 2017, 공저), <지구인문학의 시선>(모시는사람들, 2022, 공저), 역서로 <일본의 대학 이야기>... 더보기

최근작 : <한국과 일본, 철학으로 잇다>,<공공철학 이야기>,<최한기 기학 연구> … 총 6종 (모두보기)

허남진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종교학을 공부했다. 현재 기후위기 시대 인문학을 모색하기 위해 지구인문학, 인류세 철학 등에 관심이 많다. 지은 책으로는 『개벽의 사상사』(공저), 『지구적 전환 2021 -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개벽의 사상사>,<한국 종교교단 연구 XIII>,<한국의 신종교 성지>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아시아 최초의 ‘인류세 철학서’
붕괴 이후의 인간의 조건을 사물철학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한다
죽어갈 것인가, 살아볼 것인가?

이 책은 2018년에 교토대학의 시노하라 마사타케(篠原雅武, 1975~ ) 교수가 쓴 『人新世の哲学: 思弁的実在論以後の ‘人間の条件’』(東京: 人文書院, 2018.01)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서 〈人新世(인신세)〉는 anthropocene의 일본어 번역으로, 한국에서는 ‘인류세’로 번역되고 있다. 〈思弁的実在論(사변적 실재론)〉은 speculative realism의 번역어로, 최신 철학의 한 흐름이다. 〈人間の条件(인간의 조건)〉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다.
‘인류세’는 2000년에 네델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Jozef Crutzen)이 사용하여 널리 알려진 개념이고, ‘사변적 실재론’은 프랑스의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2006년에 쓴 『유한성 이후(Apres la finitude)』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인간의 조건’은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1958년에 쓴 저서 제목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을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생각한다”가 된다.
‘인류세 철학’은 아직 국내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서양에서도 인류세를 ‘철학적’ 관점에서 사유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인류세 철학”이라는 제목의 책이 처음 나온 것이 2016년이기 때문이다. 이 해에 덴마크의 철학자 Sverre Raffnsøe가 쓴 『인류세의 철학(Philosophy of the Anthropocene): 인간적 전환(The Human Turn)』(Hampshire: Palgrave Macmillan)이 출판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8년에 ‘마침내’ 비서구권에서도 “인류세의 철학”을 제목으로 한 단행본이 간행된 것이다.
저자인 시노하라 마사타케는 일본에서는 인류세 철학의 최고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 국내에도 번역되어 유명해진 『지속불가능한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의 저자 사이토 고헤이(斎藤幸平)와 『현대사상』에서 대담을 나눴고(「ポスト資本主義と人新世(포스트 자본주의와 인류세)」, 『現代思想』, 2020년 1월호),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philosophy)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 1968~)과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자신의 책 『複数性のエコロジー(복수성의 생태학)』(2016)에 수록하였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제기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철학적 물음을 ‘인류세’ 시대에 다시 생각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이미 시카고대학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가 2009년에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라는 논문에서 제기한 바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세의 의미를 인간사와 자연사의 얽힘으로 이해하였다. 저자는 여기에다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이나 티모시 모튼의 객체지향철학 등이 제기한 ‘사물’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추가하고, 그것을 고베지진이나 동일본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체험과 연결시켜, ‘일본인’의 관점에서 인류세 철학을 재구성하고 있다.
‘인류세의 철학’이라는 논리와 개념이 함의하는, 그리고 이로부터 출발하는 사유의 지평은 긴박하고도 광범위한 문제를 포괄한다. 저자는 인간의 조건 문제를 특히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우발적(?) 자연재해와 그로 말미암은 쓰나미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진 세계상이라는 지엽적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은 그 이전 반세기나 한 세기로 소급하고(1958년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출간), 또 그 이후로는 티모시 모튼,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등과의 만남을 포함하여 미래로 ‘열린 구조’를 갖고 있으며, 생물 대멸종을 포함하여 인간의 조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매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폭염, 폭우, 가뭄, 초대형 산불 등의 재난이 일상적이며 연례적인 사태로 전개되고 있다. 게다가 북극 해빙이나 북구 만년빙하의 급속한 해동, 그리고 시베리아 영구동토의 해빙으로 말미암은 재난과 재앙도 인류 역사와 사회변화의 상수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탄소중립 일정표 문제나 플라스틱을 포함한 각종 쓰레기의 유출 등등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인간 조건의 문제가 범세계적이며 전 지구적인 현재진행형의 과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으로, 이러한 자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비롯한 사물 세계의 인간 세계로의 진격과 혼섭(混涉) 또한 인류세 시대에 인간의 조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되고 있다.
다시 원론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면 인류세란, 차크라바르티의 개념 정의를 참조할 때 “산업혁명 이래의 인간의 활동으로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붕괴되고, 그로 인해 인간의 조건이 위협받는 시대”로 요약될 수 있다(『인류세의 철학』 2장 1절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 여기서 ‘인간의 조건’은 인간 자신을 제외한 인간 활동의 산물(인공물)과 동식물이나 광물, 나아가 바다나 대기와 같은 자연물과 최종적으로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 ‘행성 지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인류세’란 바로 이러한 ‘행성 지구’ 이하의 인간의 조건이 격변하고 급변하는 와중에 구온난화 사태의 경우에서 보듯이 인간의 생활은 물론 생존과 생명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 시대를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타고, 녹아내리고, 멸종하고, 숨 막혀 죽어 가는 이 인류세의 실제상황 시대에 ‘철학’을 이야기하는 이유와 의미와 여지는 무엇인가. 이제야말로 인간이 이 자연 세계, 인간의 조건의 주인이 아니라 일개 거주민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결코 인공 세계(문명)만으로 생존하고 생활해 나갈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인간이 자연(동물~바이러스)에 너무 깊숙이 침입하는 바람에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은 바로 이러한 인류세라는 거대 구조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진 파노라마의 도입부였던 것이다.
인류세 시대에 철학적으로 고찰하고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인공의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자연이야말로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인간의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그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그로부터의 해방이란 것도 원천적으로 환상, 환몽,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근대 이후로 건설된 인간의 인공세계는 자연세계 위에 겹쳐지고 포개지듯이 성립하였고, 따라서 대단히 연약하고 깨지기 쉬우며, 자연재해나 기후변동으로 인해 쉽게 붕괴될 위험이 있다. 인류세의 철학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세는 인간세계가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고, 쉽게 붕괴될 수 있으며, 이러한 불안정 상황이 지속되는 시대를 말한다. 근대라는 안정된 시스템이 ‘붕괴’되는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을 절망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이를 사물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기회로 삼아 성찰하고 자연세계와의 화해와 만남,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추구할 것인가?

한마디로 “죽어갈 것인가, 살아볼 것인가?”를 묻는 것이 바로 ‘인류세의 철학’이다.

■ 지구인문학총서
기후변화, 인류세, 팬데믹과 같은 지구위기 문제들을 한국사상과 비서구적 관점에서 사유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총서에서는 인간과 유럽 중심의 근대 인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와 만물까지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 인간과 지구가 공생할 수 있는 다양한 논의들을 모색한다. 접기


평점 분포
    
10.0

    


‘인류세‘ 개념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내서이다. 티모시 모튼이나 차크라바르티와 같이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한,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인류세 철학자들의 생각을 알기쉽게 전달하고 있다. 기후변화 시대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성찰하게 해주는 책이다.  
한서원 2022-08-26 공감 (7) 댓글 (0)
Thanks to
공감


    


인류세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에서도 이런 흐름이 있는 줄 몰랐네요.. 특히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인류세 담론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듯한데..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이 책으로 인해 주말이 지루하지 않을 듯합니다. 
책돌이 2022-08-26 공감 (5) 댓글 (1)
Thanks to
공감


    


아시아 최초의 ‘인류세의 철학’? 거기에 ‘붕괴된 <인간의 조건>‘이라?. 이 책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지구를 지배함을 상징하는 인류세는 <인간의 조건>의 붕괴를 말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기후위기의 시대, 이 책은 우리가 삶의 방향 혹은 사유의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라고 요청한다. 
지니 2022-08-26 공감 (4) 댓글 (0)
Thanks to
공감


    


국내에서 소개되고 있는 서구의 인류세 담론들 외에 또 다른 무언가를 찾는 분이 있다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시면 감탄을 계속 하게 됩니다! 우선 저자의 탁월한 식견에 놀라게 되고, 번역자들의 풍부한 지식에 바탕한 번역에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Brain Lee 2022-08-27 공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