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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4

‘내가 본 함석헌’ | 우리 말과 글이 있다는 것, 언제나 내 마음의 기쁨 !

‘내가 본 함석헌’ | 우리 말과 글이 있다는 것, 언제나 내 마음의 기쁨 !

‘내가 본 함석헌’

[월요인터뷰] ‘내가 본 함석헌’ 펴낸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중앙일보|기사입력 2006-03-19 20:40 |최종수정2006-03-19 20:40
사용자 삽입 이미지[중앙일보 배영대.김성룡] “요즘 들어 함석헌 선생님의 존재가 더욱 그립고 또 그렇게 커보일 수가 없어요.” 팔순을 앞둔 노학자 김용준(79) 고려대 명예교수가 최근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을 펴냈다. 올해는 함석헌옹의 탄생 105주년. 김 교수는 20대 초 청년이던 1949년 봄 어느 일요일 우연히 함석헌 선생의 YMCA 강연에 참석했다. 첫 만남에서 함 선생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에 있는 사단법인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내 전공인 유기화학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함 선생님께 배웠다”고 말했다.
-요즘 왜 함 선생이 더 그립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글쎄, 이해찬 총리의 골프 말이에요. 처신이 그게 뭡니까. 운동권 출신으로 서울대 앞에서 서점을 운영해 생계를 꾸려가며 많은 이의 촉망을 받던 그 이해찬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겁니까. 이해찬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이 비판해 온 독재정권 사람들과 뭐가 다릅니까. 황우석 사건도 그렇고, 도대체 나라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 경박해요. 진득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어요. 큰인물이 자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야. 함 선생님처럼 사회 각 분야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어른이 없으니까 더 그렇다고 봐요. 어찌 보면 국민이 제일 똑똑한 거 같아.”
(김 교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70~80년대 두 번의 해직과 복직을 경험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김 교수는 핵심 인물들이 많이 관여해 있던 한국기독학생운동총연맹(KSCF)의 이사장이었다. 민청학련을 주도한 제자와 후배들의 병풍 역할을 한 셈이다. 그들 가운데 현 정부의 요직을 맡는 등 관련 인물이 많기에 실망이 더 큰 듯했다.)
-현 시점에서 함 선생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함 선생님은 한마디로 ‘순수한 사람’이었지요. 내가 함 선생님께 붙여준 별명이 ‘글쎄’예요. 무슨 질문을 하면 ‘아 글쎄’만 하시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적이 많았어요. 함 선생님은 팔십세가 넘은 어느 날 노자 강의를 하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제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누가 와서 한마디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얻은 결론이 ‘기다려라’였답니다. 저 역시 낙관주의자예요. 함 선생님은 역사의 주인의식을 늘 강조했어요. 함 선생님이 내면의 성찰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했던 점도 혼돈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되새겨봐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
-‘내가 본 함석헌’이란 책 제목에 무슨 특별한 뜻이 담긴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는 거요. 내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은 함석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내 서재에 걸려 있는 함 선생님의 전신 사진과 글씨를 바라보고 ‘내가 본 함석헌’을 기리고 살고 있습니다.”
-함 선생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일부에선 여자관계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여자관계 얘기를 80년대 독재정권이 함 선생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만 말하진 않겠습니다. 책에도 그런 얘기를 썼어요. 함 선생이 천안의 씨알농장에 계실 때 한 여대생이 정말 끈질기게 쫓아다녔어요.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함 선생님이 성자(聖者)는 아닙니다. 결코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함 선생도 많이 후회하고 반성했어요. 세상을 보는 눈을 그냥 좁혀서 너는 틀렸다, 너는 맞았다 식으로 좀 그러지 말자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함 선생님이 참 시원하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죄는 없습니다’라고 했지. 죄가 없으니까 구원이 있다는 뜻인데, 참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요.”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을 놓고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 현 정부 들어 각종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도 활발합니다. 과거사 논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나는 1927년에 태어나 소학교와 중학교(5년제 경기중학)를 모두 일제시대 때 다녔어요. 내 또래 사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어. 일본어로 일본 역사를 배웠지. 황국신민(皇國臣民) 선서를 외우고 천황이 계신 곳을 향해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며 일과를 시작하던 시절입니다. 완전히 일본인으로 일본 문화에 젖어 살았던 거지. 책에도 썼는데, 사람들이 소설가 춘원 이광수를 친일파라고 욕해도 나는 그렇게 말 못해요. 나는 일제시대 때 춘원의 소설을 읽으며 한국인이 되어가기 시작했어. 중학생 때 지금은 사라진 종로의 화신상회 자리에 있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춘원이 쓴 ‘그의 자서전’이란 소설집을 발견하게 됩니다. 애정행각과 도피 얘기니까 별 거 아니죠. 그런데 도망간 곳이 간도(間島)야. 독립군들이 많던 곳이잖아. 황국신민으로 살던 내가 볼 때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 거죠. 이후 이광수의 소설은 모두 사서 읽습니다. 나에게 이광수는 흠모의 대상입니다. 이광수를 욕할 수만은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특정한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권력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 해선 곤란해요. 과학도 한 패러다임으로 다 재단이 안 되는데 어떻게 역사를 그렇게 보려 합니까.”
-과학도 한 패러다임으로 재단이 안 된다는 말씀을 좀 더 부연 설명해 주시죠.
“신과학에 대한 소개를 내가 비교적 많이 한 편이에요. 신과학은 비주류 학설이죠. 과학의 주류는 물론 뉴턴의 패러다임입니다. 내가 해직당하지 않았으면 나도 신과학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을 테고 돈도 많이 벌었을지 몰라요. 내 전공이 유기화학인데 그게 신약 개발과 관련되거든요. 혹 항암제라도 개발했을지 모르잖아요. 해직되고 실험실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다양한 분야의 책을 뒤적이게 됐는데 그때 신과학의 세계에 접하게 됐어요. 예컨대 이런 거예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용어 중에 ‘가역성(可逆性)’과 ‘비(非)가역성’이란 말이 있어요. 뉴턴의 역학은 가역성을 전제로 한 설명이지요. 이를테면 우리가 KTX를 타고 부산을 갔다 그대로 역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역성이라 하지요. 그렇지 못하면 비가역성이고요. 그런데 자연현상에는 비가역적인 것도 많아요. 이 책상에 놓인 종이를 태워보세요. 그걸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비가역성입니다. 생물학 분야에선 특히 그렇습니다. 인간의 뇌는 거의 비가역성의 영역이에요. 뉴턴 역학으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푸는 방향으로 과학은 진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뉴턴 역학이 없어지진 않아요. 가역성을 전제로 한 뉴턴 패러다임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비가역성에 대한 설명이 강화되는 쪽으로 과학이 발전하겠지요. 신과학이란 말, 20세기에 처음 생긴 말이 아닙니다. 갈릴레이 때도 신과학이란 말이 있었어요. 과학도 진화하는 거지요.”
-과학자이자 교육자로서 황우석 사태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 교수는 이 질문에 목소리를 높였다) 학문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딨어. 말이 안 돼요. 박기영 전 청와대 보좌관도 그렇고, 우리나라 과학계에 그렇게 사람이 없습니까. 박기영 (당시) 보좌관이 황우석 교수 논문 공동집필자로 들어가 있는 것 보고는 안되겠다 생각했지요. 김대중 정부 이후 정치권력이 대학과 학계에 너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학문하는 사람들이 학문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게 되지요.”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의 친형이시죠. 도올이 최근 새만금 사업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는데.
“일반 관객 입장에서 용옥이를 보면 ‘괜찮은 놈 나와서 잘 논다’고 재미있게 구경할 수도 있을 거예요. 형의 입장에서 용옥이를 보면 참 아쉬워요. 자기의 가능성을 낭비하고 있는 거 같아섭니다. 용옥이가 30년 전에 대만.일본.미국을 돌며 동양학을 공부했잖아요. 동양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대학에 재직하면서 후진도 많이 양성하고 제대로 펼쳐보였으면 하는 것이 저의 원래 바람이었어요. 만나면 이런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런지 잘 못만나요. 바쁘기도 하겠죠. 그런데 새만금 관련해선 용옥이 얘기가 맞아요.”
만난 사람=배영대 문화부문 차장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 ‘생각하는 인생’ 이어온 류영모 – 함석헌 – 김용준
함석헌(1901~89)은 21세 때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한 뒤 ‘생각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라는 걸출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다석은 함석헌이 편입할 무렵 교장으로 부임했다. 훗날 그는 “내가 오산에 온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봐”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압축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단절된 전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성사 면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다석과 함석헌의 철학이다. 다석의 사상은 유교.불교.도교라는 동양의 전통 3교를 두루 섭렵한 철학 위에 서양의 진보적 기독교를 결합한 독특한 사상 체계다. 21세기 동서양 문화 융합의 원류를 추적할 때 피할 수 없는 인물이 다석이다.
함석헌이 생명사상에 눈을 뜨고 노자와 장자 이야기, 그리고 일본 무교회주의 선구자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 등을 알게 된 것도 모두 다석을 통해서였다. 다석은 28년부터 YMCA 연경반(硏經班.각 종교의 경전을 연구하는 모임)을 지도하며 대중 가르침에 나섰고, 함석헌도 다석에 이어 YMCA에서 강연했다. 그리고 49년 봄 청년 김용준은 우연히 종로를 지나다 함석헌의 강연을 듣고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김용준은 경기중과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수재로, 미국 텍사스 A&M 대학에서 유기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자연과학자다. 하지만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등을 함 선생한테 배웠다고 고백한다. ‘생각하는 인생’을 배웠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 교수 역시 과학자이면서도 동서양 사상을 두루 꿰는 보기 드문 지성인이다.
배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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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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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咸錫憲
Hamseokheon in his youth.jpg
출생1901년 3월 13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평안북도 용천군
사망1989년 2월 4일 (87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
필명호(號)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
직업사회운동가, 언론인, 종교인, 작가, 저술가
국적대한제국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평안북도 용천 덕일소학교 수료
평안북도 용천 양시보통학교 졸업
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 중퇴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역사교육학과 졸업
장르저술
부모함형택(부)(1880-1941), 김형도(모)
친지함석혜(누나)
함석란(누이동생)
함석창(남동생)
함석보(누이동생)(1910-2002-)
함일형(5촌 숙부)
함석은(6촌 형)(1892-1928)
배우자황득순(1902-1978)
자녀함국용(장남)(1918-1985)
함은수(장녀)
함은삼(차녀)(1926- )
함은자(3녀)(1929-)-최진삼(1921-)/최응일(1947-)
함우용(차남)(1931-)/함정해
함은화(4녀)
함은선(5녀)(1940-)-장기홍(1934-)
종교기독교-장로교 → 퀘이커
웹사이트
씨알의 소리
함석헌(咸錫憲, 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

이력[편집]

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민권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운동가문필가 활약한 그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 당한 후,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교육, 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 이후에는 성서 강해 등을 하다가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 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 등을 하였다.
그의 종교는 초기에는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였다가 중기에는 퀘이커였으나 후기에는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게 된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생애 초기[편집]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당숙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한학 서당인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덕일소학교(德一小學校)에 입학, 1914년에 덕일소학교를 수료하고 그 해에 양시공립소학교에 편입하였다가 1916년 양시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7년에 황득순과 결혼하고, 1919년 평양 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에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6촌 형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3·1 운동에 참가한 후,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되어 2년간 학업을 중단한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

청소년기[편집]

왼쪽이 류영모, 오른쪽이 함석헌
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이때 안창호이승훈이광수조만식 등과도 알게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유석동(柳錫東), 양인성(楊仁性)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친구이자 동지인 김교신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역사과 수석)과 동시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1934년~1935년에 동인지 《성서조선》에서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한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1]
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언론, 문필 활동[편집]

《성서조선》 창간호 멤버. 뒷줄 오른쪽이 함석헌.
1940년 평안남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남도 대동경찰서에 체포, 유치장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초 풀려났다. 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聖書朝鮮) 제 158호(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
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평하였다.[2][3]

광복 이후 활동[편집]

해방 직후[편집]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4]
1947년 3월부터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고, 이후 성서 강해와 신학,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만식의 추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편집]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상경하였다. 이후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견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평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칼럼 하나는 화제가 되었다.
전쟁이 지나가면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쌈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 진 것 아닌가? 어떤 승전축하를 할가? 슬피 울어도 부족한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로자는 전쟁에 이기면 상례로 처한다 했건만. 허기는 제이국민병 사건을 만들어내고 졸병의 못 밥 깍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께 바래기가 과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인가?
 
— 사상계 1958년 5월호
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또 1959년 6.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제2공화국 시절[편집]

1961년 2월 국토건설단 수료식
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있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해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정치평론인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하여 군정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62년 미국 국무성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특별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파(Quaker敎派) 인사들과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돌아왔다.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편집]

반독재 민주화 운동[편집]

제3공화국 출범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67년 장준하의 국회의원 총선거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독재정권 시절부터 반독재 야당 운동에 참여하여 3선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1970년에는 정치, 시사평론을 실은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후 씨알의 소리의 발행인, 편집인, 주간 등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등 재야 언론인들을 필진으로 영입하고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신진 문인들을 발간하였으며,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5]
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1980년 1월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1980년 신군부 즉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어 2011년 7월 현재 217호까지 출간되어오고 있다.

제5공화국 시절[편집]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에 위촉됐다. 또한 동아일보로부터 제1회 인촌상을 수여받았다.

만년[편집]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민주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89세였다.

사후[편집]

장지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의 가족산에 매장되었다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 수훈 이후 묘소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과 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6]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일대기로 《내가 본 함석헌》, 《함석헌 평전》이 있다.

사상과 신념[편집]

무교회주의[편집]

그는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귀국 후에도 무교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후 줄곧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논란[편집]

사회진화론 추종자 논란[편집]

2010년 함석헌이 사회진화론 추종자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을 두고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09년 3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한길사에서 30권으로 발간한 ’함석헌 저작집’에 실은 글 '함석헌 저작집 발간에 부치는 말'에서 그가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이던 김영호는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로 소개하며, 함석헌 사상에서 거듭 반복되는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들었다.[7]

반론[편집]

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10년 1~2월호에 반론인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실어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7] 김상봉 교수는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7]
이어 그는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 사상은 ’힘의 철학’이 아니라 '사랑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7] 김상봉은 이어 함석헌이 ’생명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김상봉은 함석헌이 평소 민족이기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함석헌에게)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7]
2010년 김영호는 3월 16일 열린 함석헌학회 창립총회 기념 학술발표에서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을 재반박하고 나섰다. 김영호 교수는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자신이 쓴 '사회 진화론'을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에는 김상봉 교수가 받아들인 '사회다윈주의'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일반론이 있다고 하였다.[7] 그는 함석헌이 쓴 “지금까지 생각의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이 전체사회, 곧 인류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진화를 통찰했다고 강조하였다.[7]

투사론에 대한 반론[편집]

함석헌은 '누가 나처럼 수줍은 놈을 미친놈을 만들어 놓았느냐'라고 하기도 했다.[8]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 김용준은 함석헌이 철학자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선생님한테 배웠다고.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야. 그건 함선생님의 일부분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맸던 구도자[8]"라고 하였다.

기타[편집]

  •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전쟁을 예상하였다 한다. 김용준에 의하면 '6.25 바로 일주일 전에 함석헌이 “이 백성들이 왜 이러지. 지금 밑에서는 용암이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그 위에 살짝 덮힌 암반을 마치 만세반석처럼 여기고 까불고 있으니 이게 언제 터질지 몰라” 하고 말씀을 하시더라[8]'는 것이다.
  • 1979년1985년 등 2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세계 봉사회가 함석헌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AFSC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래로, 노벨 평화상 후보추천규정에 따라, 해마다 후보를 추천해오고 있다.[9]

방송 출연[편집]

같이 보기[편집]

저작[편집]

저서[편집]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948
  • 인간혁명, 1961
  • 역사와 민족, 1964
  •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67
  • 통일의 길, 1984
  •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1984
  • <함석헌 저작집> , 2009
  • 시집, 수평선 너머, 2009.

번역서[편집]

사진[편집]

각주[편집]

  1. 이동 함석헌 기념사업회 (2008년 11월 13일). “함석헌 선생의 생애”. 함석헌 기념사업회. 2008년 11월 13일에 확인함.
  2.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37쪽.
  3. 이동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2003) 394쪽.
  4. 이동 이후 조만식을 회고하여 “‘아니’ 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라며 조만식을 칭송하기도 했다.
  5. 이동
    [길을찾아서] 인혁당 가족 돕자 시작된 미행과 도청 / 문정현, 한겨레신문, 2010년 6월 15일자, 2011년 1월 22일 확인.
    이동↑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되었나-함석헌 선생의 수필
    이동:가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 학계 논란 조선일보 2010.04.16
    이동:가 “물건의 과학보다 ‘人間性의 과학’ 발전시켜야지”
    이동↑ 인터뷰 노벨平和賞(평화상)후보에 추천된 咸錫憲(함석헌)옹 "힘이 正義(정의)가 아니라 正義(정의)가 힘"

외부 연결[편집]

함석헌 기념 사업회
바보새 함석헌
함석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려움에 처할수록 씨알은 더 옹골차진다”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 학계 논란 조선일보 201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