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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8

[곽병찬의 향원익청] 연해주의 별, 최재형

[곽병찬의 향원익청] 연해주의 별, 최재형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연해주의 별, 최재형
등록 :2017-02-28


그는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19세기 말 연해주 한인 마을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여행기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위축된 특징이 이곳에서는 솔직함과 독립심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비숍이 여행했던 1890년 중후반은 러시아 귀화인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도헌(읍장)으로 있을 때였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 구사했던 최재형의 성실성과 능력을 높이 산 러시아인들은 그에게 통역, 도로 및 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의 군납을 맡겼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도올 김용옥이 ‘동양의 카네기’에 비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네기처럼 돈벌이에 중독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쳤다. 내륙의 한인들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할 수 있도록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들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쌍수로 환영했다. 한인들이 그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런 최재형에겐 천형과도 같은 낙인이 있었다. 그의 아비는 함경북도 경흥 송 진사 댁 노비였고, 어미는 빚에 팔려 간 기생이었다. 러시아로 귀화했지만, 조선 양반들에게 그의 가족은 여전히 종놈의 집안이었고, 그는 노비였다. 그는 9살 되던 1869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 형 부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 지신허에 정착했다.
지신허엔 착취와 억압은 없었다. 그러나 헐벗고 굶주림은 여전했다. 최재형은 11살 때 무작정 가출했다. 항구도시 포시예트 부둣가에 쓰러져 있던 그는 천우신조로 무역선 빅토리아호 선장 부부의 눈에 띄었다. 이들의 배려로 최재형은 무역선에 올라 7년 동안 포시예트에서 일본,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탄자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를 거쳐 네바강을 거슬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두 차례 왕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선장으로부터 비즈니스를 배우고, 선장 부인으로부터 러시아어와 문학 역사를 배웠다. 선장 부부가 무역을 청산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르스키 무역상사에서 3년간 근무했다.
1881년 가족을 찾아 연추로 갔다. 한인들은 여전히 궁핍했다. 그는 기회가 보장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지 않았다. 연추에 남아, 한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벌고, 함께 마을을 가꾸고, 함께 아이들을 가르쳤다. 도헌이 되기 전 니콜라옙스코예소학교를 사재로 지었고, 도헌이 된 이후 한인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웠다. 도헌 월급은 모두 장학금으로 출연했다.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 북경의 외국 공관들까지 공격당하자, 러시아는 이를 핑계로 만주에 20만 대군을 진주시켰다. 최재형의 군납사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 무렵 간도관찰사 이범윤이 찾아왔다. 그는 최재형을 보자마자 자신이 왕실의 일족임을 내세우며, 고종이 내린 마패를 꺼내 보였다. “이 마패를 지닌 사람은 황제 폐하를 대신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당신도 나를 무조건 도와야 하오.” 고압적이었다. 최재형이 노비 출신인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다. 그 조선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그 부패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양반들이었다. 그런 양반 가운데 한 사람이 러시아에선 개뼈다귀만도 못한 마패를 들고 위세를 떨고 있다. 돈 내놓으라고 호령한다. 최재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두말 않고 자금을 건넸다. ‘간도의 호랑이’ 이범윤의 사포대는 그렇게 창설됐다. 그런 이범윤이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사포대와 함께 연추로 이주했다. 정부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러시아 편에서 일본과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보살피고 지원하는 건 최재형의 몫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러시아의 허무한 패배로 끝났다.
이범윤 부대에는 양반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노비 출신 최재형’을 얕잡아 보았다. 툭하면 명령하듯 다그쳤다. 무기를 사와라, 의병을 모아라, 군자금을 모아라 지시만 하려 했다. 그들은 양반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초조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양반’도 있었다. 안중근 신채호 이상설 등은 특별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최재형은 1908년 5월 해외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총장 최재형)를 창립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만3천루블, 이위종의 부친(이범진 전 러시아 공사)이 전해온 1만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천루블을 기금으로, 6월 이범윤 총대장에 안중근을 참모중장으로 한 연추의병을 창설했다. 연추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전투에서 대패했다.
연추의병이 해체되자 1909년 최재형은 주 2회 발행하는 <대동공보>를 인수해 운영했다. <대동공보>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투옥됐던 장지연이었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수행원들이 쓰러졌다. 안중근의 권총은 최재형이 건넨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이었다. 각종 정보는 <대동공보> 편집장 이강이 제공했다. 당시 안중근의 신분은 <대동공보> 특파기자였다.
일제는 집요하게 ‘배후’를 캤다. 안중근은 한사코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며 총독은 김두성이라고 우겼다. 의병장 유인석이니, 고종이니 혹은 최재형이니 구구했지만 ‘김두성’을 앞세워 안중근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순국 후 최재형은 그의 가족을 보살폈다. 최재형은 또 <대동공보>에 400루블을 따로 보내, 안중근 순국에 관한 특별판을 제작하도록 했다.
조선의 병탄 뒤 연해주 상황은 바뀌었다. 러시아는 일제의 압력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지사들을 혹심하게 탄압했다. 유인석 등이 추진하던 13도의군이 좌절됐으며, 지휘부 40여명이 체포돼 8명이 추방됐다. <대동공보>도 폐간됐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최재형이 아니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지사의 집결지였다. 최재형은 이들과 연해주 한인을 망라한 단체를 조직했다.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하는 것을 표방한 권업회였다.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체제로 출범한 권업회는 1914년 강제로 해산당할 때 회원이 무려 8579명에 이르렀다.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은 신채호였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재형은 또 선택해야 했다. 그에겐 이념이 없었다. 조국만 있을 뿐! 어느 쪽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인가? 혁명군인가 반혁명군인가. 일본은 반혁명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환갑의 나이에 항일 빨치산 전선으로 나갔다. 큰아들은 이르쿠츠크 전선에서 전사했다. 둘째 아들은 연해주 빨치산 참모장으로 싸우고 있었다.
1920년 4월4일 밤 일본군이 전면적인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불탔고, 한인 300여명이 학살당했다(4월참변). 그날 밤 최재형은 가족을 지키려 우수리스크 자택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누나들은 아버지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망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 모두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들은 더 살아야 한다.’ … 다음날 새벽 열린 창문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다섯째 딸 올가의 회상)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인섭 등과 함께 학살당했다.
매년 4월5일이면 우수리스크의 ‘영원한 불꽃 추모광장’에서는 지방정부 주관으로 4월참변 추모제가 열린다. 왼쪽엔 한인 희생자, 오른쪽엔 러시아인 희생자의 위패가 놓이고, 중앙엔 최재형 초상화가 놓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4592.html#csidx3ab04903d458a8b9a8358230e10d949 

2021/04/30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
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마리산인
2006. 12. 18. 14:26댓글수0공감수0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사상연구회 월례발표회(2004년 9월)
<씨알의 소리> 2004년 11,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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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
박 재 순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함석헌은 20세기가 시작되는 해에 태어나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일찍이 기독교 신앙과 근대적 교육을 하는 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평양고보 3학년 때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민족과 민중의 하나 되는 감격을 경험한 후 오산학교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배웠다.1) 40세까지 서구적인 학문과 문화, 기독교 신앙에 심취했다. 유영모의 영향으로 그리고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불경을 비롯한 동양경전에 깊이 몰두하면서 기독교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었다.2)

함석헌은 남강 이승훈의 독립정신과 민족애를 물려받고,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신앙에서 순수하고 자립적인 깊은 신앙을 배웠으며, 유영모로부터 동양·한국적인 정신과 기독교사상을 결합하는 깊은 정신과 사상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은 치열한 삶과 투쟁 속에서 인간과 역사, 신앙과 우주에 대한 독창적이고 활달한 사상을 형성했다.




1. 함석헌 사상의 핵심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 함석헌이 닦아낸 사상의 핵심은󰡐스스로 함󰡑이다. 그는 특권을 누리지 않는 보통 사람을 씨로 표현했다. 그의 사상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씨사상은 풀뿌리 민주 철학이다. 씨은 나라와 역사의 주체이다. 씨 하나 속에 수억 년의 과거가 담겨 있고, 앞으로 펼쳐질 수억 년의 미래가 들어 있듯이, 한 인간 속에는 과거 역사와 미래 역사가 담겨 있다. “너는 씨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지나 간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3)




씨 속에 하늘의 생명기운이 맺혀 있듯이,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수천 년 동안 온갖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민족의 삶을 지탱해온 민중 속에는 큰 힘과 지혜가 숨어 있다. 함석헌은 “민중의 본바탕을 밝혀내기만 하면 큰 기적을 행할 수 있다.”4)고 했다. 모든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는 민중을 가르치기 전에 민중에게 겸허히 배워야 한다. 민중과 유리된 정치는 반드시 타락하고 민중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둘째, 생명 평화의 철학이다. 씨의 생명활동은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이 함께 어우러져 벌이는 생명의 춤이고 잔치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울리고 서로 느끼는 생명 축제이다. 한 알의 씨처럼 한 인간이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 서서 자신을 비우면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늘나라의 생명잔치가 시작된다. 씨(民)의 삶 속에서 자연생명과 역사와 신앙이 서로 어우러지고 서로 통한다. 생명의 자발성과 사랑에 근거하여 비폭력 평화의 사상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셋째, 믿음(종교)과 생각(과학)이 통일된 철학이다. 함석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줄기차게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마음의 일차적 기능이다. 생각에는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靈感)이 있다. 생각하면 생각(영감)이 난다. 󰡐하는 생각󰡑으로 󰡐나는 생각󰡑을 얻고, 󰡐나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5) 생각은 믿음(영감)에 이르고 믿음은 생각을 깊게 한다. 신앙과 과학이 충돌하거나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이 발달하면 신앙은 과학 위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앙의 세계가 요청된다. 현대문명의 근본 문제는 신화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떠난 데서 생겨났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스스로 하는󰡑자율성의 영역이 급속히 확대된다. 유전자 조작과 생명 복제와 같은 문제는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주체적이고 성숙한 책임성은 깊은 믿음과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함으로써 운명적인 삶에서 󰡐스스로 하는󰡑주체적인 삶으로 바뀐다.







넷째, 동서문명의 종합을 추구한 통일 철학이다. 함석헌은 서구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태어나 개인의 인격과 영혼을 쇄신하는 기독교 복음과 신앙에 깊이 들어갔고 서구의 현대학문으로부터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정신을 익혔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서 지구화가 이루어지고 동서문명과 정신의 융합 및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 서구의 기독교 신앙과 비판 정신이 배어 있으며, 그 속에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정신과 문화가 살아났다. “우리 역사, 우리 문화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사회의 문화가 󰡐한󰡑(크고 하나임)에서 나왔고 󰡐한󰡑을 목표로 하고 나아간다.”6)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을 세계통일의 근거와 목표로 제시했다.




함석헌의 사상은 씨(民)을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놓고 씨을 하늘처럼 섬기는 풀뿌리 민주 철학, 모든 문제와 일의 중심에서 󰡐나󰡑를 문제 삼는 주체 철학, 겨레의 얼과 혼을 추구한 민족 철학, 한국․동양의 정신문화와 서양의 정신문화를 융합하려는 세계 철학이다.7) 그의 사상은 생각(과학)과 믿음(종교), 몸(육체)과 영혼(정신), 삶(실천)과 이론(학문), 남한(자본주의)과 북한(공산주의)의 통일을 추구하고 국가와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세계정부를 꿈꾸는 통일 철학, 기독교에 바탕을 두면서도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서 유교․불교․도교․힌두교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진리의 자유로운 세계를 열었던 종교다원주의 철학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명예교수인 유동식 박사는 <대표적 한국인>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와 율곡과 함석헌을 꼽았다. 이 세 사람은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기 종교의 울타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서도 󰡐큰 하나됨󰡑(한)을 추구한 종합적인 사상가들이고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고 행동한 사상가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동식은 세 사람 가운데서도 동서문명이 만나는 세계적인 지평에서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사상을 펼쳤다는 점에서 함석헌이 가장 위대하다고 보았다.







2. 시대적 성격과 내용적 독창성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은 매우 역동적이고 종합적이며, 날카롭고 깊다. 그의 이런 사상은 다석 유영모의 깊은 사유와 체험적 깨달음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심오함은 역사와 민중에 충실했던 자신의 치열한 삶과 경험에서 그리고 삶과 역사의 한 가운데서 초월과 절대(하나님)를 만나는 깊은 체험과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1) 시대의 성격과 동서정신의 창조적 융합




지난 500년의 역사는 서세동점의 역사이면서 동서문명이 충돌하고 결합되는 세계화의 과정이었다. 동서문명이 충돌하고 결합되는 세계사의 과정에서 두 문명이 가장 깊고 창조적으로 만난 자리가 한국 근현대의 역사와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서구문명의 진출과 침략, 팽창과 확대로 이루어진 동서문명의 만남과 충돌의 자리는 동양과 제3세계였다. 미국과 유럽의 서구에서는 동서의 만남이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인과 미국인은 동양정신과 문화를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지하게 경험하지 못 했다. 이슬람 문명권은 서구문명과 배타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사회적 근대화가 충실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통문화와 서구근대문화의 결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도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주변적인 종교이며 엄격한 신분제도에 매인 전통사회와 종교문화가 온존하고 있다. 남미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전통문화가 압살되고 정복자의 문화가 지배했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적 만남과 융합은 동북아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구문화의 도전과 충격으로 동양정신과 문화가 깨어났고 사회적 근대화와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은 사회경제적 근대화와 민주화를 달성했으면서 동양적 전통과 정신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공산화되면서 전통문화는 억압되고 서구정신(기독교)문화는 배제되었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에 의해 천황제와 전통종교 신도를 바탕으로 서구기술문화와 결합하여 군사제국주의로 치달음으로써 일본민족과 서구정신문화의 깊은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조선왕조가 붕괴되면서 민중이 민족사의 전면에 나섰고, 한국민족(민중)과 서구정신문화의 깊은 만남이 창조적으로 활달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정신과 기독교의 깊은 만남이 이루어졌고, 기독교 정신과 서구 근대정신의 도전과 충격으로 민족정신이 깨어나고 민중의 각성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동서정신문화가 가장 창조적으로 만났고 융합되었다. 기독교 신앙과 근대민주정신의 수용으로 한국근현대사는 동학혁명과 3.1운동, 4.19혁명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함석헌(1901-1989)은 개신교와 서구근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시기에 살았던 사상가였다. 한국의 근현대사 자체가 한국적 동양적 정신문화와 서구 기독교 정신 및 서구 근대문화의 창조적 만남과 융합의 과정이다. 동학, 증산교와 한국기독교, 3.1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자체가 동서정신문화의 종합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인물들,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이용도, 안병무, 문익환 등은 동서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창조적 인물들이다. 한국근현대사는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의 공존과 상생의 가능성, 융합(fusion)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함석헌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민중의 자리에서 동서정신문화의 깊은 만남과 창조적 융합을 경험하고 그것을 창조적 사상으로 형성하고 삶으로 피어낸 이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동서정신문화를 종합한 민주사상을 폈다. 그는 기독교신앙정신을 등뼈로 해서 이성적인 과학정신과 민주정신을 바탕으로 동양정신과 한국정신문화, 유교, 불교, 도교의 정신세계와 두루 통하는, 물질과 정신, 자연과 역사, 신앙과 이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사상을 펼쳤다.




2) 함석헌 사상의 독창성




1930년대 근대 인류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비관적일 때, 파씨즘적 전체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전쟁, 세계대전과 집단학살이 준비되고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달했을 때인 1933년부터 조선역사를 썼다.



그는 고난의 민족사를 십자가 고난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민족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민족에게 적용시키고 고난 받은 한민족이 세계평화와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적 구실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세상의 죄 짐을 진 어린양, 세상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양으로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함으로써 인류의 죄를 씻고 화해와 구원을 가져오듯이, 고난 받는 한민족이 고난의 짐을 짐으로써 세상을 화해와 평화의 세계로 이끈다고 보았다.



믿음의 주체(나, 민중, 민족)와 대상(그리스도, 하나님)을 일치시키며, 오늘 ‘나’, 또는 ‘민족’이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구원을 스스로 성취한다는 주장은 오늘의 삶을 강조하는 주체적이고 일원론적인 동양적·한국적 사고를 반영할 뿐 아니라 씨·민중을 민족 또는 그리스도(하나님)와 일치시키는 민중적 사고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고난받는 사람을 통해 치유되고 죄의 속량이 이루어지고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고난의 종의 노래’(이사야 53장)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삶에 직접 적용한 것이며 성경의 역사적 진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밝혀진 성경의 진리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이다. 인간의 고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는 온전히 드러나며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나’와 ‘너’의 경계와 벽, 적대와 갈등의 깊은 골을 넘어 ‘하나’로 되어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에 이를 수 있다. 함석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체의 자리에서 보는 것이며 “너를 나로 본 것”이다. 전체의 자리에서 본다는 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역사상에 일인칭을 똑바로 쓴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고 했다.8) 이처럼 전체의 자리에서 ‘나’와 ‘너’를 볼 때 비로소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여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함석헌은 제3세계의 식민지적 고난을 패배주의나 전투적 투쟁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고난을 승화시켜 고난 받는 민중과 민족을 생명과 평화를 실현하는 주체로 제시했다. 함석헌의 민족사 이해는 1960년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사적 이해를 추구했으나 십자가 고난의 관점에서 민족사를 본 것은 변화가 없다.



민족사에 대한 그의 해석에는 민중적 관점, 민족적 관점, 세계적 관점이 결합되었고, 기독교의 신앙과 동양의 영성이 결합되었다. 그는 풀뿌리 민주주의자이면서 겨레 얼을 추구한 민족주의자이고 세계평화를 추구한 세계주의자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민족사에 적용함으로써 이미 함석헌은 민족과 성서, 민중과 예수를 긴밀히 결합시켰고 오늘 우리의 주체적 삶과 책임적 실천을 강조했다. 이로써 함석헌의 민족 주체적 신앙과 사상의 틀과 방향은 정해졌다. 그의 신앙과 삶은 역사와 사회에 책임지고 행동하는 신앙이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데 머물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삶을 살려고 했다.



기독교의 십자가 신앙을 민족사에 적용하여 일관성 있게 해석한 것 자체가 기독교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새롭고 독창적이다. 또한 함석헌이 실존, 민족, 민중, 세계평화를 아우르는 깊고 열린 사관(史觀)을 제시한 것도 독창적이다. 동양, 한국적 정신과 기독교 정신, 개인과 전체, 영적 깊이와 과학적 이성, 헌신적 신앙과 주체적 책임성을 역동적으로 결합한 것은 그의 사상의 크기와 창조성을 드러낸다.




3. 기본 사상의 내용




1) 정신적 우주관;




함석헌은 상대성원리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4차원적으로 이해하며, 현대 원자물리학에 따라서 물질을 과정과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는 물질을 “입자와 파동의 생성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우주, 세계는 생성하는 과정과 사건이다. 물질은 운동의 굳어진 것이고, 시간은 정신이 폭발하고 나가는 뒷 파동이다.”9) 그는 또한 고생물학자이며 카톨릭신학자인 샤르댕을 따라서 “뜻, 생각, 정신에서 물질도 나왔다.”고 본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주 물질의 힘은 믿음, 뜻에서 나오며 통전하는 힘이다. 생명, 물질, 하나님, 인간, 역사는 스스로 함의 원리를 따른다. 스스로 함의 주체는 정신과 의식이다. 물질은 운동의 굳어진 것이며, 시간은 정신의 폭발한 결과이다.



물질, 힘, 시간의 근원을 정신으로 보았고 정신을 자유로운 주체, “스스로 하는 나”로 보았다. 스스로 함, 나, 주체, 정신은 모순의 통일이며 까닭 없음이다. “물질에 까닭 있지 정신, 생명에는 까닭 없다. 그 자신이 까닭이다. 정신, 신은 까닭 없이 있는 이다. 인격의 본질, 생명의 근본은 스스로 하는 자기초월이며 까닭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10)



함석헌의 이런 주장은 관념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서처럼 물질과 정신, 현실과 관념을 이원론적으로 갈라놓고 물질과 현실을 정신화, 관념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질과 정신, 현실과 관념(생각, 뜻)을 통전적으로 본다. 다만 정신과 뜻에 비추어, 정신과 뜻을 통해서 물질과 현실을 본다. 정신과 뜻은 물질의 주체이며 의미이다. 함석헌에게는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몸과 마음에는 떼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인격은 몸·마음이 하나된 것이다...우주가 무한하다 하여도 그 중심은 나요, 만물이 수없이 버려져 있다 하여도 그것을 알고 쓰는 것은 나다. 내가 스스로 내 몸의 귀함을 알아야 한다. 욕심의 하자는 대로 끌려 내 몸을 허투루 다루는 것은 내 몸을 천대함이다.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는 이 몸, 이 마음을 허투루 하면 우주와 만물은 차례와 뜻을 잃고 어지러워지고 맞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조심이란 몸 공경이다.”11)



함석헌은 정신을 전체, 하나님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 전체, 아가페의 관점에서 우주와 역사, 생명을 보았다.12) 하나님을 부르면 ‘나’와 우주가 하나로 통전된다. 믿음은 전체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인간의 본 바탈을 창조적 지성, 이성으로 보았다. 생각하는 내 속에 우주가 열린다. 내 속에 열린 우주와 세계가 하나로 되며, 몸과 우주의 일치에 이른다. 하나님, 전체, 우주를 모신 '나', 몸, 맘이 우주의 중심이다. '나'는 코로 우주의 숨을 쉰다. “내가 하나님의 콧구멍이요, 우주의 숨통이다.”13)







2) 주체사상




함석헌사상의 중심은 나를 찾고 세우는데 있다. “ ‘나’-주체성 상실이 모든 고난과 간난의 근본원인이고 죄이다. ‘나’를 잃은 죄가 역사와 인생의 고난을 가져왔다.”14) 생명과 정신의 근본원리가 󰡐스스로 함󰡑인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생각과 힘에 눌려 살면 생명과 정신은 파괴되고 쇠퇴한다. 스스로 힘 있게 살려면 나를 찾아야 하고, 나를 찾으려면 나를 깊이 파야 한다. 나를 깊이 파는 길은 생각하는 길밖에 없다. 생각함으로써 나를 찾고 세운다. 살림의 뿌리는 생각함에 있다. 살림의 주체는 나이고 나를 찾고 세우는 일은 생각에 있다. 그는 명상이나 감흥, 감정보다 생각함을 철학과 종교의 근본행위로 보았다.15)




스스로 함의 주체로서 “나”는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나”는 자기부정과 죽임에서 참된 나, 전체로서의 나로 드러난다. 함석헌의 나의 주체성은 무한한 깊이, 초월, 절대, 순수를 지향하며, 구도자적 자유와 평화, 사랑을 추구한 공동체적 개방성을 지닌다. 이처럼 함석헌의 󰡐나󰡑는 타자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다. 함석헌에게서󰡐나󰡑는 초월적 타자와 인격적 관계 속에 있으며, 사회적 타자와의 일치와 상생을 지향한다. 함석헌의 주체성은 타자와 맞서고 타자를 정복하고 희생시키면서 자아의 실현과 확장을 추구한 서구의 근대적 주체성과는 다르다.16)




얼과 정신은 주체이고 󰡐나󰡑이다. 󰡐나󰡑는 물질의 주체이며, 스스로 하는 자유로운 인격이다. 물질과 현상에는 원인, 까닭, 인과관계가 있으나 정신에는 까닭이 없다. 저 자신이 까닭이다.17) 인간은 물질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물질과 자연 현상은 인과관계의 사슬과 법칙에 매여 있으나 마음, 정신, 신은 원인, 까닭 없이 스스로 자유롭게 있다. 마음과 정신은 까닭을 밖에 갖지 않고 자기 안에 갖는다. 제가 삶의 이유이고 동인이다. 제가 곧 까닭이다.. 그러므로 자유다. 결정론은 없다. 전통과 권위도 없다. 모든 우상은 부서진다.




스스로 하는 존재가 되려면 스스로 하는 힘과 의지, 스스로 하는 삶의 궁극적 근거와 동인, 신적 씨앗, 불빛, 인(仁)이 있어야 한다. 제 안에 스스로 함의 근거가 있다. 스스로 함의 원리와 근거가 고장 난 것이 죄다.18) 죄는 전체, 신과 하나인 '저'에 대한 불신앙이다. 죄는 스스로 함의 부정이며 불가능이다. 스스로 함은 '저'와 신이 하나임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스스로 함은 신, 우주와의 합일, 일치이다. 전체의 자리에 섬이다. 나를 버리고 나에게서 자유로워져서 참 나, 전체의 나, 신과 하나로 된 나에 이를 때 비로소 중단 없는 스스로 함의 삶이 나온다.



예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는데, 함석헌에 따르면, “사람을 낚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낚는 것이다.19) 나의 본성, 어짐, 혼을 낚는 것이 내가 사람 되는 것이며, 나를 일깨우고 붙잡음이 나를 사람으로 세움이고 스스로 하게 함이다. 사람이 되어 스스로 일어섬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스스로 일어나야 하며, 내가 나를 붙잡아 일으켜야 한다. 나를 붙잡는 것, 내 삶의 본성을 살리는 것이 기도이고 예배이며 믿음이고 명상이다.



스스로 함은 자유의 원리, 신앙의 원리, 사랑의 원리이다. 이것은 저항의 원리, 비폭력 평화의 원리이다. 이것이 반국가주의와 세계평화주의의 원리이며 기초이다.




(1) 얼 힘을 기름




함석헌은 인간을 인격, 정신, 얼로 보았다. 얼은 개성적이고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인생과 역사와 문화와 교육과 종교의 목적은 얼 힘을 기르는데 있다. 지식과 기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직접 주고, 받을 수 없고 얼과 정신을 통해서만 깨달음과 이해를 통해서만 전해진다.20) 얼 힘 없으면 인생과 문명은 무너진다.



󰡐스스로 하는 나󰡑는 통일성을 지닌 존재이다. 분열, 갈등, 혼란, 분규, 얼크러짐에서는 힘찬 스스로 함의 삶이 나올 수 없다. 얼은 생명의 꼭대기 한 점이다. “교육의 목표는 위대한 얼의 사람을 길러낸다는 한 점에 집중되어야 한다.”21) 원기는 회개, 자기부정을 통해서 전체생명에로 돌아갈 때 나온다. 원기, 생명력, 생기에 가득 찰 때 자유롭고 힘 있는 행위가 나온다. 회개는 하나님, 전체 생명이 하나 되는 자리로 돌아감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자리에 설 때 스스로 하는 얼 힘이 솟는다.22)




(2) 유기체적 전체 생명; 진화의 절정이며 우주의 중심




우주 자연의 물질과 생명 세계에서 인간이 가장 존귀하고 위대하다. 인간을 대자연 생명세계의 일부로 보면서도 새로운 영적 존재로 상승하고 비약할 존재로 보았다. 인간이 생명진화의 절정과 목적이라고 보면서도 인간의 얼을 유기체적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보았다. 얼은 개체를 지탱하는 정신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정신이다. “오늘 내가 있고 내 머리에 생각이 솟는 것은 전에 억만 생명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요, 억만 마음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무한 바다의 한 물결이다. 내가 일어선 것은 내가 일어선 것이 아니요, 이 바다가 일으켜 세운 것이다.”23) 내 몸과 마음은 생명진화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다.

인간의 몸과 정신이 우주의 중심이다.24)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과 닿아있으며 통해 있다. “이 나는 작고 형편없는듯하지만 저 영원 무한에서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이다.”25) 함석헌은 인간의 깊은 죄를 말하고 피조물로서 작고 유한한 존재임을 강조하지만 인간을 신과 일치된 존재, 신과 통하는 존재로 본다. 내가 우주의 주인이고 왕이다. 모든 것은 인간 안에 “나” 안에 있다. 나를 존중하는 데서 생각과 삶이 시작한다. “거울에 비치는 네 얼굴을 보라...그것은 백만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그 얼굴이다.”26)



인간영혼의 정점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한 점에서 인간의 얼과 정신에서 하나님과 일치하고 통하면 무한한 얼 힘, 영적 힘이 나온다. (하나님과 일치된) 나를, 기운을 펴야 한다. 하나님과 일치된 나를 펴기만 하면 우주와 역사를 돌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3) 섬기는 삶




우주와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면서도 그 중심의 높이와 깊이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보았다. 전체의 자리에 선 나는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있는 존재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존재이다. 거룩한 창조자, 무한한 절대자 앞에서 자기를 회개하고 비워야 한다. 스스로 서는 것이 민주의 시작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이 나라사랑의 기본이다. “나라 사랑하거든 네 옆의 사람부터 존경하라. 네가 만물의 왕이라면 그도 만물의 왕이다. 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식모는 네 식모가 아니요, 영원한 님의 아내다. 너를 섬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이’를 모시러 왔다.”27)



제 할 일을 남에게 시키는 버릇은 계급사회의 못된 습관이다. 섬기는 삶은 제 몸을 제 손으로 섬기는데서 시작된다. “네 몸 대접 네가 해라...제 신발도 닦지 않는 청년이 이 다음 사회봉사, 인류공헌이라니 곧이들리지 않는 말이다...네 몸 거둠 네가 하는 것이 데모크라시의 첫 걸음이요, 하늘나라 준비다.”28)




3) 세계평화사상과 비폭력저항




70년대에 대표적인 진보적인 지식인들(송건호, 박현채, 백락청 등)은 민족주의자였다. 생활방식과 사고는 서구적으로 하면서도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던 사람,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함석헌은 세계평주의를 내세웠다. 오산학교 학생 시절에 웰즈(H.G. Wells)의 「세계사대계」에서 세계국가주의에 대한 이상을 접하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리고 일제의 혹독한 식민통치를 겪으면서 함석헌은 한민족의 평화정신과 기독교의 평화주의에 근거하여 함석헌은 50년대 중반 이후 비폭력 평화주의와 세계평화사상을 내세웠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으나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세계평화를 열망하고 추구했다. 그는 민족을 사랑했으나 국가는 비판했다. 민족들의 독특한 정신과 문화가 피어나는 세계공동체를 지향했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제 인류역사는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민족국가들을 넘어서 세계가 하나로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29) 동(복종, 통일, 되풀이 지킴)의 역사와 서(저항, 자유, 진보)의 역사가 만나고 있다.30) 역사는 중도(中道)를 지키고, 한(韓; 큰 하나)을 붙잡고 밝히면서, “비폭력평화주의, 세계국가주의, 우주통일주의”로 가야 한다.31)




그의 평화주의는 한국인의 평화정신과 기독교의 평화주의에 근거한다. 한국인의 심성이 인정 많고 착하다는 점에서 평화적이라고 보았다. 6.25 전쟁 때 피난 가는 기차에서 음식이 부족한 형편인데도 반드시 옆 사람에게 음식을 권하고 함께 먹는 것을 보고 함석헌은 “한국인의 저 착한 마음으로 세계에 크게 공한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인의 종교문화의 맨 꼭지가 신선사상이라면서 자연과 하나 되기를 열망하는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평화적이라고 보았다. 한국의 신화도 평화적이고 한국인의 이름에도 평화의 열망이 담겨 있고, 역사적으로도 다른 민족을 침략한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평화민족임을 내세운다.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을 이루는 “한”사상이 하나(一)와 크다(大)를 함께 나타내는, 크게 하나 됨을 추구하는 평화사상임을 강조했다.32)



그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비폭력 저항정신을 추구했다. 그는 치열하게 저항하고 투쟁했으나 비폭력과 사랑의 포용주의를 추구했다, 원수와 싸우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기고 짐을 떠나서 싸우라고 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원수는 없다. 그의 평화주의는 전체를 끌어안는 사랑의 포용주의이다. “가룟 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독독 갈고 있는 한 천국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가룟 유다와 화해하기 전에는 천국은 완성될 수 없다.”33)



그는 섬김과 살림의 사람이었다. 그는 후배가 “디디고 설 흙”이 되고자 했다. 지배, 권위의식을 철저히 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라 할 수 있는 안병무와 김용준을 형이라 불렀다. 누가 의견이나 조언을 구할 때마다, 자기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늘 “글쎄”라고 해서 “글쎄”가 그의 별명이 되었다.




4) 과학적 사상; 생각과 믿음과 행동의 일치




함석헌은 호기심, 탐구심을 평생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역사적 새로움, 삶의 새로움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영원한 어린이였고, 과학적 탐구심을 지닌 영원한 학생이었다. 80대에도 예쁜 조가비 모으고, 예쁜 그림 오려 붙였고, 늘 새 책을 읽었다. “과학의 시대는 씨의 시대, 씨의 아구를 트이어 눈을 트고 입을 열게 한 것은 참의 과학이었다. 씨은 과학으로 말한다.”34) 감정의 종교는 낮은 것이고, 이성으로 닦여진 신앙이 깊고 높다. 함석헌의 믿음은 생각하는 믿음이다.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의 통전된다. 생각으로 역사의 뜻을 알고 주체, 나가 된다. 생각은 믿음에 이른다.



생각하면 믿음이 깊어지고 자유로운 실천에 이른다. 생각은 물질적 사건적 현상의 깊이를 파헤쳐 없음과 빔의 까닭 없는 자유에 이르고 물질과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부정과 죽음에 이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고 없음과 빔의 자유에서 자기를 버리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35) 자아도 물질도 없고 하나님만 있으면 단순하게 믿고 자유롭게 행동하게 된다.







5) 역사철학; 씨사상




함석헌은 자신의 역사관과 인생관을 씨사상으로 나타냈다. 씨은 자연과 인간과 초월의 차원을 통전시키는 개념이고 역사의 중심이며 주체이다.




(1) 자연과 역사와 초월적 영성의 통전




역사는 기후 토질 지리 조건, 민족의 특질, 신의 뜻, 의미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나사바퀴, 수레바퀴처럼 발전한다. 역사는 미완성이며, 되풀이하면서 자란다.36) 함석헌은 우주생명진화의 맥락에서 역사를 보았다. 뇌신경과 뇌세포 속에, RNA, DNA 속에 생명진화와 인류사, 민족사가 통조림 되어 있다.37) 생명진화를 거쳐 인류로 진화했듯이, 인류역사의 진화를 거쳐 초정신, 초인류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 한, 우주, 전체와 하나 된 인간, 새 인간, 새 종교를 기다렸다.38) 하나님을 찾음이 사람의 바탈이며 역사를 낳는 것은 아가페다. 사랑의 임(하나님)을 찾는 것이 역사이다.39)



씨은 인간과 자연생명의 일치를 뜻한다. 씨은 자연생명의 본질이면서 인간생명의 본성을 나타낸다. 인간과 우주생명은 일치하고 통한다. 또한 씨의 속에는 신적 생명의 씨앗, 본질이 담겨 있다. 씨은 초월적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이다. 씨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날 길도 없고 구원받을 길도 없고 진리를 찾을 길도 없다.

씨은 전체(나무)의 하나(일부)이면서 자신 안에 전체를 품고 있다. 씨은 자기를 버리고 깨뜨리고 내맡기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죽음으로써 사는 생명의 길을 보여준다. 씨은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과 함께 어우러져 생명을 창조하는 상생과 공생의 평화세계를 보여 준다.




(2) 씨; 역사의 주체




씨사상은 민주사상이다. 씨 속에 생명의 본 바탕이 비교적 옹글게 남아있고, 삶의 지혜와 힘이 있으므로, 씨에게 배우고 씨이 앞장 서게 해야 한다. 씨을 가르치려들지 말고, 이끌려고 하지 말라고 함석헌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경고했다. 씨이 혁명의 주인공이 되고, 정치의 주역이 되게 하라고 역설했다. 이미 50년대에 함석헌은 국민이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원리와 지침을 제시했다.40)

민이 역사와 사회의 주인이며, 하나님과 직통하는 존재이다. 역사의 씨인 민 속에 민족정신과 생명이 온전히 담겨 있고 5천년 민족사가 담겨 있다. 더 나아가서 우주 생명진화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41) 현재와 미래의 역사와 생명진화의 운명이 씨의 손에 맡겨져 있다.




6) 대종합의 통일사상




함석헌의 사상은 아주 쉬우면서 매우 어렵다. 그의 생각과 통찰이 삶의 체험에서 우러났고, 일상의 삶, 구체적인 현실, 몸과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맘으로 함께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사상은 현실의 상대세계를 뛰어넘어 모든 잡다함과 다양함을 하나로 꿰뚫는 절대, 초월, 궁극의 자리에서, 죽고 다시 사는 깊은 신앙체험의 자리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깊고 높은 깨달음의 미묘함과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글은 깊은 감동과 충격을 주면서도 높은 하늘을 보는 듯, 깊은 바다를 보는 듯, 어지럼을 일으키고 너무 높고 깊어서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함석헌은 구체적인 삶의 철학자이면서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는 대종합의 사상가이다. 그는 몸과 영혼, 물질과 정신을 통전적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의 자리에서 전체의 자리에서 믿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에게는 민중, 민족, 세계평화, 신앙적 실존의 차원이 긴밀히 결합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더 민중주의자였고, 누구보다 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누구보다 더 개방적인 세계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진지하게 신앙적 실존의 진실을 추구하는 철저한 구도자였다. 민중, 민족, 세계평화, 종교적 실존을 추구한 초월적 자유인이고 저항적 행동인이었고 비판적 지성인이었다.

그의 삶과 사상 자체가 대종합을 이루었다. 겨레얼과 기독교신앙, 동양정신과 서양정신, 몸과 정신, 자유와 평등, 물질과 정신, 이성과 신앙, 이론과 실천, 인간과 신, 역사와 자연, 민족과 민족을 크게 하나로 통일하려 했다.




그는 한겨레가 언어와 문화 속에서 정신적으로 닦아낸 “한 사상”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업적이라고 했다. “한”은 한님, 하나님과 한겨레를 함께 나타내고, 개체와 전체, 큰 하나 됨을 뜻한다. “한”은 세계화되는 인류의 하나 됨을 지향하는 정신적 바탕이 된다. 함석헌은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에서 우주적 일치와 종합의 근거를 발견한다. 민족의 원형질인 “한 사상”과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대종합의 근거가 되었다.

함석헌의 글과 사상에는 유교의 선비정신, 기독교의 죄의식과 역사적 책임의식,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불교의 없음과 빔, 한국의 한 사상, 서구의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이 녹아있다. 함석헌이 깊은 믿음으로 없음과 비움 속에 자기를 잊고 자기를 버림에서 행동의 자유가 나온다고 할 때, 기독교 신앙과 동양적인 정신이 결합되어 있다.









1) 함석헌의 생애에 대해서는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함석헌전집4. 201쪽 이하 참조.


2) 함석헌의 신앙이 변화되고 발전된 것에 대해서는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함석헌전집4. 177쪽 이하. 특히 196-197쪽 참조.


3)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4) 함석헌, “새 나라 꿈틀거림”, 함석헌전집2. 294쪽.


5) 함석헌,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함석헌전집 8. 56쪽 이하.


6) 함석헌, “새 윤리”, 함석헌전집2. 348쪽.


7) 함석헌, “우리 민족의 理想”, 함석헌전집1. 361-3쪽.


8) 함석헌, “인간을 묻는다”(송기득과의 대담), 함석헌전집 4. 344쪽.


9) 함석헌, “레지스땅스”, 함석헌전집2. 187쪽.


10)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5쪽.


11)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13쪽. “새 나라 꿈틀거림”, 같은 책. 262쪽.


12)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함석헌전집9. 14-5쪽.


13)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7쪽.


14)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185쪽.


15) 함석헌, “새 시대의 종교”, 함석헌전집3. 213-4쪽.


16) 서구의 대표적인 신과학적 생태주의 사상가 에리히 얀치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아라”는 자기 개념, 그리고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헤겔의 “자기의식” 철학적 전통에 서 있다. 얀치의 우주는 헤겔에 의해 대표되는 모놀로그의 신령(神靈)이다. 그러나 한국적 사유인 동학사상에서는 한울‘님’과의 대화의 길이 열려 있다. 이준모, 밀알의 노동과 共進化의 敎育. 한국신학연구소, 1994. 274쪽.


17)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5-6쪽.


18)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6-100쪽.


19) 함석헌, “새 나라 꿈틀거림”, 함석헌전집2. 295-6쪽.


20)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3쪽.


21)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6쪽.


22) 같은 글. 310-311쪽.


23) 같은 글. 304쪽.


24) 함석헌, “살림살이”, 전집2. 307쪽.


25) 같은 글. 306쪽.


26) 같은 글. 313쪽.


27) 같은 글. 314쪽.


28) 같은 글. 314쪽.


29)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31쪽.


30) 같은 책. 61-2쪽.


31) 같은 책. 297쪽.


32) 함석헌, “새윤리”, 함석헌전집2. 347-348쪽.


33) 함석헌, “펜들힐의 명상”, 함석헌전집3. 317-8쪽.


34) 함석헌, “씨의 설움”, 씨의 소리. 1970. 4.


35) 함석헌, “열 두 바구니”, 함석헌전집4. 393-4쪽.


36)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56쪽 이하.


37)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38)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26쪽.


39) 같은 책. 52-3쪽.


40) 이에 대해서는 박재순 “함석헌의 민주정신”, 씨의 소리. 2003년 3-4월호 참조.


41)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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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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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나눔회원 1:1 채팅

함석헌

-생명평화민주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한국의 간디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우리 마음속에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들어가며


다석 류영모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가 함석헌 선생이었고함석헌 선생이 가장 존경하던 스승이 류영모 선생이었다함석헌 선생은 다석의 1주기에 다석 선생의 제자들이 다석 선생의 집에 모였을 때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두 분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이었다우선 11살의 차이였지만 생몰 일자가 거의 같다똑같이 3월 13일에 출생하고 돌아가신 날도 류영모 선생님은 2월 3일 저녁함석헌 선생님은 2월 4일 새벽으로 몇 시간 차이일 뿐이다그야말로 의미 있는 우연이라고 할까두 분 모두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고수염을 기르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분의 근본 사상이 여러 면에서 같았다는 사실이다두 분 모두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되었다필자로서는 류영모 선생을 뵙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면함석헌 선생은 여러 번 뵙고, 1979년 캐나다 에드먼튼에 살 때 필자의 집에 유하시면서 필자가 근무하던 알버타 대학교에서 교민을 대상으로 강연도 하시고 종교학과 교수들과 대담도 하실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은 더 없는 영광이라 생각된다.


대조적인 점은 류영모 선생에 비해 함석헌 선생은 키도 크시고 외모도 출중하셨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류영모 선생이 생의 후반에서 비교적 은둔적이고 금욕적인 면이 강했던 데 비해 함석헌 선생은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한국 민주화에 직접 참여하시는 등 사회 개혁에도 힘을 많이 쓰셨던 점이라고 볼 수 있다신비주의 전통에서 즐겨 쓰는 용어를 빌리면 함석헌 선생은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마침 함석헌 선생이 나는 왜 퀘이커교도가 되었는가하는 제목의 자서전적인 글을 쓰셨는데그것을 토대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


그의 삶


신천 함석헌咸錫憲(1901~1989)은 (여기서부터 존칭 생략평안북도 황해 바닷가 용천에서 아버지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 사이의 32녀 중 누님 아래 둘째로 태어났다. 5세경 누님이 배우는 천자문을 옆에서 듣고 모두 외었다여섯 살에 기독교 계통의 사립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고 긴 댕기머리를 잘랐다함석헌에 의하면 전통 종교가 창조적인 생명력을 잃은 형식적 전통에 불과할 때 바닷가 상놈의 고장으로 알려진 자기 마을에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넣어주었다고 한다그는 기독교 계통 사립 초등학교에서 하느님과 민족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홉 살 때 나라가 일본한테 아주 망하고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린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인해 아주 낙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후일 함석헌은 자기가 열세 살까지 지금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 소년이었다고 고백한다. 14세에 양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6세에 졸업한 다음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이것은 나중 의사가 될 목적이었다공립학교에 다니면서 순진성이 많이 없어지고 과학을 배우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양고보 2학년 17세에 한 살 아래의 황득순과 결혼했다.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수리조합 사무원소학교 선생으로 일하기도 했다그해 11월 장남 국용이 출생하고 2년 후 장녀 은수가 태어났다그는 모두 2남 3녀를 두었다그는 이때를 회고하며 집에서 2년 동안을 있노라니 운동 이후 폭풍처럼 일어나는 자유의 물결과 교육열 속에서 젊은 놈의 가슴이 타올라 날마다 빈둥빈둥 놀면서 썩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21년 21세에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4월이라 입학 시기가 지나 어디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그러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집안 형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나그가 써주는 편지를 가지고 정주 오산학교에 가서 3학년에 편입되었다그해 여름이 지나고 류영모가 교장으로 부임하고, 9월 개학식 때 함석헌은 처음으로 류영모를 만나게 되었다함석헌에 의하면 그는 류영모의 영향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처음으로 한국이 필요로 하는 뭔가를 찾기 시작하고또 류영모로부터 노자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그 결과 남을 따라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 더 참된 믿음을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더욱이 교회가 점점 현실에서 먼 신조주의信條主義’, 교리중심주의로 굳어지게 되자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시작했다오산학교와 류영모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함석헌은 1923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그해 9월에 난 대지진으로 도쿄시의 3분 2가 타버렸다일본 정치가들은 민심수습책으로 한국인들이 폭동을 계획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한국인 약 6천명이 학살되었다이를 본 함석헌은 기독교를 가지고 내 민족을 건질 수 있을까?” 번민하기 시작했다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렇다고 도덕을 무시하는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할 수도 없었다오래 동안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 형편으로는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일본 유학을 결심한 그 본래의 의도대로 1924년 지금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다가 동갑내기 1년 선배인 김교신金敎臣을 만나고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우치무라는 오산학교에서 류영모 선생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그 당시에는 우치무라가 생존인물인지도 몰랐는데김교신을 통해 그가 도쿄에 살면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함석헌은 존경하는 스승 류영모가 언급한 인물이라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모임에서는 별도의 예배형식이 없이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며 해석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한다여기서 함석헌은 성경이란 이렇게 읽어 나갈 것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그러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번민에서 벗어나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8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오산학교로 돌아와 역사 선생으로 일했다그러나 역사 선생이 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역사란 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일 뿐 아니라 한국 역사가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이어서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과 낙심만’ 심어줄 것 같고다른 사람들처럼 과장하고 꾸미려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민에 고민결국 자기에게는 세 가지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확인했다첫째 한민족으로서 민족적 전통을 버릴 수 없고둘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버릴 수 없고셋째 영국 역사가 H. G. Wells의 The Outline of History를 읽고그 영향으로 받아들인 과학과 세계국가주의를 버릴 수 없었다이 셋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이 셋을 다 살리면서 역사 교육을 할 수는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난의 메시야가 영광의 메시야라면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느냐?’하는 것이었다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용기가 나 역사 교수를 계속할 수 있었다말하자면 한국 역사의 keynote를 고난suffering’으로 보는 역사관이 확립되고 이런 역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역사를 재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치무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했던 유학생들 여섯 명이 귀국하여 성서연구모임을 만들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는데함석헌은 고난의 견지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글을 연재했다이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명작이 되어 나왔다이 책은 나중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나왔고류영모의 맏아들이 번역하여 영문판으로도 나왔다.


오산학교에 10년간 있었는데그때는 스스로 십자가 중심 신앙에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다고 했다그러나 본래 교파를 싫어하여 무교회라는 것이 생겼는데아이러니하게도 무교회도 하나의 교파로 굳어가는 것 같고또 우치무라에 대한 개인숭배 태도가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반감을 느끼고더욱이 중요한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을 깊이하면서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강조하는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심정적으로는 무교회주의에서 떠났지만그것을 크게 공표하여 부산을 떨 필요를 느끼지 않아 그런대로 몇 년을 지났다.


오산에 있으면서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농촌을 살려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오산에 온 것도 이를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믿었다그러나 1936~1937년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점점 가혹해지자 함석헌은 죽을 지언정 이에 맞서야 한다고 하였지만 오산학교 행정자 측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그는 평생을 바칠 마음으로 왔던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봄 눈물로 교문을 나왔다.”


교문은 나왔지만 차마 학생들을 떠날 수는 없었다오산에 머물면서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만났다그렇게 2년을 보내다가후배 김두혁이 평양 시외에서 경영하던 덴마크식 송산농사학교를 넘겨주겠다고 하여 1940년 그리로 갔다가자마자 설립자가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에 따라 함석헌도 덩달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억울하게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집안이 말이 아니었다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1942년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실린 조와弔蛙라는 우화 때문에 잡지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가는 사건이 터져다시 감옥에 들어가 1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이 때문에 나중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이장될 수 있게 된 것이다출옥 후 다시 농사를 짓고 있는데, 2년 후 해방이 되었다.


함석헌은 이때까지 감옥을 네 번그 후로도 세 번 더 들어갔는데감옥에 있을 때 얻은 것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부르고감옥 속에서 불교 경전도 보고노자장자도 더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도 얻었다고 한다이런 경험을 통해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를 수도 있었다함석헌은 감옥에서 깨달은 바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것은 단순히 국경선의 변동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인간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는 세계혁명의 시작이다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국가관이 달라져야 한다대국가주의시대大國家主義時代가 지나간다세계관이 달라지고 종교가 달라질 것이다아마 지금과는 딴판인 형태를 취할 것 아닐까종교의 근본 진리야 변할 리 없지만 모든 시대는 그 영원한 것의 새로운 표현을 요구한다각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누가 받을까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기성 종교는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관련되었기에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마치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나 2000년 전 예수 탄생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지금도 동방에서 새로운 정신적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한 토마스 머튼을 읽는 기분이다

 

해방 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임시자취원회 위원장이 되고이어서 평안북도 임시정부 교육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밀정이 되기를 요구하는 소련군정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남한으로 넘어왔다. 1947년의 일이다.

월남하여서는 무교회 친구들의 협력으로 일요 종교 강좌를 열어 1960년까지 계속하면서 말로나 글로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필자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 그 당시 󰡔사상계思想界󰡕에 실린 그의 글들을 읽었다그의 생각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그의 무교회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세 가지 주된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부정하고기도하지 않고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그러나 함석헌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고기도도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공중기도를 삼갈 뿐이라고 하고동양 종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으로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고 한다결국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심층 종교로 들어가는 함석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구태여 무교회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무교회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중대한 사건’ 때문이었다그가 오산 시절부터 간디를 알고 오래 동안 간디를 좋아해 간디 연구회를 만들 정도였는데동지들 사이에서 간디의 아슈람 비슷한 것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고 젊은 몇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이때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형세는 돌변했다친구들이 모두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그러면서 관념적으로 믿고 있고 감정적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그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러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러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 뿐이러라
내가 쟝발장이되어 보자고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미리엘이 아니고 쟈벨 뿐인 듯이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든다.”


이때를 예견한 것인가함석헌은 1947년 월남 이후 지은 그의 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심정이 토로하고 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救命袋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不義의 死刑場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 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스승 류영모마저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끝내 그를 내쳤다그러나 물론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다석일지󰡕에 보면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영 이별인가” 하며 탄식하는 등 7~8회에 걸쳐 제자 함석헌을 그리는 글이 나온다류영모는 내게 두 벽이 있다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적으로는 그럴지라도 겉으로는 스승으로부터도 버림받아 홀로 된 그에게 퀘이커가 나타났다퀘이커에 대해서는 오산 시절부터 들었지만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한국 전쟁 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퀘이커들을 만나 처음으로 퀘이커 신도가 된 이윤구를 통해 퀘이커를 접하게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 1961년 겨울이었다이렇게 되어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퀘이커 훈련 센터인 펜들힐Pendle Hill에 가서 열 달 동안비슷한 성격의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브루크Woodbrooke에 가서 석 달 동안 지내게 되었다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룻밤 뽕나무 그늘 밑에서 자고 가려는 중의 심정이었다그러다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에서 열렸던 퀘이커 세계 대회에 퀘이커 친우들이 그를 대해 주는 데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서 결국 퀘이커 정회원이 되었다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수평선너머를 내다봅니다.

내가 황햇가 모래밭에서 집을 지었다 헐면서 놀 때에 내다보던 수평선,

피난 때 낙동강 가에서 잔고기 한 쌍 기르다 죽이고 울면서 내다보던 수평선,

영원의 수평선너머를 나는 지금도 내다봅니다.”


함석헌은 류영모와 달리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961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단에 초빙되어 5·16 군사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잡지 󰡔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 사상을 널리 펼치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8년 만에 복간되었다군사 정권에서는 군사 독재에 맞서서 1974년 윤보선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역을 맡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이런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9년 췌장암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2월 4일 새벽 5시 28, 87년 11개월 가까이날짜로 33,105일을 사시고 세상을 떠났다함석헌을 따르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박재순 박사에 의하면돌아가시기 전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애쓰셨다는데그것이 스승 류영모가 돌아가신 날에 맞추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고 한다장례식은 조문객 2 명이 오산학교 강당에 모여 오산학교장으로 치르고 경기도 연천읍 간파리 마차산에 묻혔다가,  200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고이에 따라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영원한 들사람에게는 약간 의외의 조치가 아닌가 여겨지는 면도 있다.


그의 가르침


함석헌은 동서고금의 정신적 전통에서 낚아낸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생명평화민주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세간에서 말하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성경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누가복음6:40) 했다󰡔도마복음󰡕이나 󰡔장자󰡕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류영모 선생님의 제자이지만어느 면에서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했다는 의미에서 청출어남이청어남靑出於藍而靑於藍의 경우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함석헌의 사상이 어떻게 세계 종교의 심층곧 신비주의 전통과 통하는가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우리가 살펴본 인류의 정신적 스승들의 사상을 통섭하고 있는가몇 가지 예를 들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경전을 끊임없이 고쳐 해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없는 역사의 행진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아니다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


종교적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적’ 태도는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고 한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자라나는 신앙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

옛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는 낡아 빠진 종교다우리들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하는 종교는 낡아 빠진 종교이다신학적인 설명을 강요하기 휘해 과학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종교도 역시 낡아 빠진 종교다.”


자라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생명이 없는 신앙이다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바람(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결국에는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도마복음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우리의 의식구조가 변화를 받아 점점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우리 마음속에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가장 본질적인 나라는 뜻에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참 나라 할 수 있다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나의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이런 발견을 일반적으로 일컬어 깨침이라 한다심층 종교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넷째,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믿는 것은 그리스도다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놀라운 통찰이다예수는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혹은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임을 발견한 분이다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예수와 같은 그리스도 의식에 동참하여 그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다. 1945년에 발견된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심층 종교의 기본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랑이 이긴다는 가르침이다.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세계 거의 모든 종교 신비주의 심층 전통에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말함과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다른 사물들과도 결국 일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이다. “어떤 경우가 천박한 이해인가나는 답하노라.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 라고그리고 어떤 경우가 이런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인가나는 말할 수 있노라.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깨닫고 천박한 이해를 넘어섰을 때라고.”


여섯째는 너와 나는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남과 같이 있다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남이 떨어져 있는 한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다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그러므로 남이 없이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함석헌은 내 속에 참 나가 있다”, “이 육체와 거기 붙은 모든 감각·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참 나는 죽지도 않고늙지도 않고변하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와 만물이 하나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가히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다.    


일곱째는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우주의 법칙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느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장도 모두 다 하느님의 예언자다.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말이나 문자로 표현된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궁극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견해見解는 그 타당성이 결할 수밖에 없다모든 견해가 이럴 진데 나의 견해만 예외적으로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자연히 다원적 사고를 인정하게 된다거의 모든 심층 종교신비주의 전통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이런 몇 가지 예만으로도 함석헌의 사상이 류영모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세계 신비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아는 데 충분하리라 생각한다특히 오늘 한국의 종교들이 거의 표층 종교 일색으로 변해 있는 상태에서 이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된다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나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가 미래의 종교는 어쩔 수 없이 심층적인 종교신비주의적 종교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류영모·함석헌의 사상에서 미래 종교의 광맥을 보는 듯하다 하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