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소학.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소학. Show all posts

2021/11/16

알라딘: 화병의 인문학 : 근현대편

알라딘: 화병의 인문학 : 근현대편

화병의 인문학 : 근현대편 - 의료문학으로 보는 화병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통합의료인문학문고 1  
박성호,최성민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0-09-20
==
책소개의료인문학의 한 부문으로서의 ‘의료문학’의 관점에서 ‘화병’을 조명해 본다. 한국 고유의 질병으로서의 화병은 전통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 기록에서 그 사례가 등장하며, 당대의 문학에 반영되어 있다.

화병을 의료적인 관점이 아닌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매개로서 문학작품은 훌륭한 통로가 된다. 화병의 양상은 시대를 따라 일관된 부분과 시대상을 반영하여 변형되고 변화된 양상을 띠기도 하는바, 이 책은 ‘화병의 인문학’의 근현대편으로 근대 개화기 이후 각 시대별로 문학작품에 나타난 화병을 통해 한국인의 심성의 심층을 들여다보고, 또한 그 시대의 이면을 재조명해 보는 유의미한 시각과 통찰을 제공한다.

목차
0. 머리말
1. 총론: 우리는 왜 ‘화병’을 이야기하는가?
2. 근대를 만난 화병, 고난을 만난 여성 ─ 신소설 속 화병의 재구성
울화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 유행병 아닌 유행병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병 / 그들은 과연 어떻게 치유되었을까?
3. 욕망에 눈을 뜬 여성과 신‘ 경쇠약’ ─ 번안된 화병
다이아몬드가 낳은 병, 신경쇠약 / 욕망을 좇는 여성은 질병을 만난다
왜 하필 신경쇠약이었을까? / 번안된 소설, 번안된 질병
4. “나는 신경쇠약을 앓고 있소” ─ 여성에서 남성으로, 이야기에서 문학으로
누군가에게는 중2병, 누군가에게는 신경쇠약
여성에게서 남성으로, 오점에서 자랑거리로
번안된 질병의 재번안, 혹은 받아쓰기 / 신경쇠약이 쏘아올린 작은 공
5. 전쟁의 소용돌이와 화병 ─ 상처받은 심신(心身)
전쟁이라는 화(禍), 그리고 화병(火病) / 전쟁의 후유증으로서의 ‘화병’
베트남전쟁 용병의 상흔(傷痕)
6. 난장이 가족의 화병 ─ 산업화와 소외된 인간
한강의 기적 / 경제 성장의 이면들
도시인들의 중압감과 분노 / 목소리를 잃은 난장이의 선택
7. 젊어도 늙어도 화가 나는 사회 ─ 사회적 갈등과 화병
가정 폭력과 화병 / 정치적 사건들과 화병
나이와 화병(1) - 젊어서 화병 / 나이와 화병(2) - 늙어서 화병

접기
책속에서
P. 15 “이러다가 화병 나겠다.”라는 말을 익숙하게 사용하면서도 정작 그 화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왜 버릇처럼 저런 말을 쓰는지 생각해본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중략) 근대 초기에도 화병은 여전히 문학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했다. 비록 ‘화병’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보전한 채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근대 서구 의료와의 충돌과 접합 사이에서 그 이름이나 기전의 다양한 변모를 겪으면서도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총론: 우리는 왜 ‘화병’을 이야기하는가?)  접기
P. 27 (한국 최초의 신소설) 「혈의누」에는 … 현대 한의학에서 화병의 원인으로 손꼽는 것은 대체로 가족 내에서의 갈등 내지는 가족을 잃은 슬픔 등이다. … 어릴 때 겪은 가족과 관련된 불행한 경험, 결혼생활에서 겪는 갈등, 자식 양육 과정에서 겪는 부모로서의 좌절, 가난이나 사회적 제약으로 인한 내적 갈등, 정치ㆍ사회적인 억압이나 가족과의 이별 등이 화병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근대를 만난 화병, 고난을 만난 여성)  접기
P. 77 (근대 이후) 소설 속에서 화병을 앓는 여성은 가슴을 땅땅 두드리거나 피를 토하는 대신, 병상에 누워서 파리한 모습으로 죽어가거나 착란 속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는 식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번안된’ 신경쇠약이 「쌍옥루」나 「장한몽」 같은 ‘번안소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 이는 질병을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 또한 외래적인 것, 혹은 ‘근대적인’ 것과의 접촉을 통해 적잖은 번안의 과정을 거쳤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욕망에 눈을 뜬 여성과 ‘신경쇠약’)  접기
P. 103 최남선과 이광수로부터 시작된 신경쇠약-결핵의 감각은 이후의 작가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작가 스스로에 대해, 혹은 소설 속 인물에 대해 신경쇠약-결핵의 의미를 덧씌우는 일이란, 곧 이들이 예술의 첨단에 놓인 감수성 뛰어난 청년임을 표상하는 방법이었다.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이나 나도향의 「젊은이의 시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경증, 혹은 이상이나 박태원, 김유정처럼 작가 자신이 신경쇠약이나 결핵을 앓았던 경우 등만 보더라도 이 두 질환이 문학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뚜렷하다. (“나는 신경쇠약을 앓고 있소!”)  접기
P. 125 예로부터 화병으로 인하여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 이야기, 얼굴과 머리로 화기가 몰려 그것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래되곤 한다. 발치 때문이기는 하지만 피를 토하며 죽은 「오발탄」의 철호, 갑작스러운 실족사였던 듯싶지만 물속에 머리를 넣고 목숨을 잃는 「망향」의 이장환 부친에 대해 ‘화병’으로 인한 죽음이라고 진단하여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화병)  접기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성호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광무 융희 연간 신문의 ‘사실’ 개념과 소설 위상의 상관성 연구」(2014)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 초기 서사를 연구하면서 매체와의 관계 및 서사 인식의 변화상을 폭넓게 조망하는 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현재는 근대 초기 서구 의료의 도입과 더불어 발생하는 다양한 변화상에 대해 서사를 통해 접근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저서로는 대중교양서인 『예나 지금이나』(2016, 2인 공저) 등이 있고, 주요논문으로 「「소학령」을 통해서 본 이해조 연재소설의 변화와 한계」, 「유학생의 개인 체험 서술을 통한 1920년대 초반 글쓰기의 양상 고찰」, 「신소설 속 여성인물의 정신질환 연구」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화병의 인문학 : 근현대편>,<예나 지금이나> … 총 3종 (모두보기)
최성민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문학평론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서사 텍스트와 매체의 관계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학의 매체를 확장하여, 게임, 웹툰, 영화, 드라마 등을 폭넓게 연구해 왔다. 현재는 문학과 대중문화콘텐츠를 통해 의료인문학 연구 범위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다매체 시대의 문학이론과 비평』(2017), 『근대서사텍스트와 미디어 테크놀로지』(2012) 등이 있고, 주요논문으로 「판타지의 리얼리티 전략과 서사적 감염」, 「한국 의학드라마 연구 현황과 전망」, 「융합 시대 글쓰기 교육의 과제」, 「현대 신화 스토리텔링의 프로세스」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화병의 인문학 : 근현대편>,<다매체 시대의 문학 이론과 비평>,<대학생을 위한 글쓰기 강의>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1.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대체로 ‘화난 표정’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90년대 이후 우리 스스로도 그러한 표정을 자각할 정도가 되었고,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화난 한국인’의 표정을 지적한다는 것이 언론에 심심찮게 거론되었다. 그때의 화난 한국인이란 대체로 오랜 식민통치를 겪어야 했고, 또 6.25라는 엄청난 비극적 상황에 이어 장기 독재체제를 반세기 이상 살아오면서 주눅 들거나 화내거나, 둘 중 하나의 감정이 그렇게 표정으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진단하였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를 경험하고, 1997년의 IMF로 인한 크나큰 국난을 극복하면서 2000년대 이후로는 ‘화난 한국인’의 이미지는 거의 불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화난 한국인’은 다시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우리 사회의 ‘불공정’을 참지 못하고, 강요된 N포세대로서의 좌절감, 그리고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기후위기’에 빠지고 ‘제대로 된 일자리 없음’의 사회뿐이라는 현실 앞에 “분노”한다. 늙은이들은 늙은이들대로,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일구어 온 주역으로서의 자긍심을 채 누리기도 전에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 퇴물로 취급되고, 경제성장의 성과로부터도 소외되어 빈곤으로 내몰리는 상황에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억울해 하고’ ‘분노’로 표출하고 있다.

2.
‘분노’를 표출한다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만 할 때, 그것은 고질적인 “화병”이 되어 스스로를 좀먹고 그가 포함한 공동체,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를 파괴하고 말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사실 “화병” 보유국이기도 하다. “화병”은 한국 고질병이(었)고, 고유병이(었)다. 한때 국제질병관련 연감에 Hwa-byung(화병)이라는 우리말 발음 그대로 실릴 만큼 세계적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전히 한국의 특수한 지역적, 사회적 문화와 관련된 정신의학적 증후군으로 의학적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인에게 ‘화병’이라는 고유의 고질병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문화적, 기질적, 시대적 등등의 여러 조건들이 중첩되고 복합되어 빚어진 일일 터이다.
가장 전형적인(전통적인) 화병은 오랜 가부장제하에 이중, 삼중, 사중(남녀차별, 고부갈등, 살림 책임, 남편외도)의 고통을 견뎌야 했던 며느리(여성)에게서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달라지면서 화병은 ‘신경쇠약’과 같은 현대적인 병명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현대 사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3.
가장 최근의 전공의나 의대생들의 진료거부, 시험거부 사태에서 가장 극명하게 전면에 드러난 것은 “분노”였다. 그들의 분노가 정당한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그 분노는 사회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린다. 그들의 분노는 여전히 진행 중인 부동산 관련한 분노의 ‘영끌 매입 사태’ 또 그로부터 불과 얼마 전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사태를 둘러싸고 ‘취업준비생’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졌던 “분노”, 광화문 광장을 뒤덮던 태극기부대의 분노의 물결, 나아가 작년 1년 내내 대한민국을 들끓게 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과 자녀 및 검찰총장을 둘러싼 거대한 분노의 촛불의 대립,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 그룹 사이의 치열하고 극악스러운 쟁투 등을 떠올려 보면, 한국 고유의 질병으로서의 “화병”은 오늘날 ‘분노’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불태울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타오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4.
화병은 ‘분노’만이 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9개월째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최소 1년은 계속될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따른 우리 사회 전체의 ‘우울증’과 그 변형으로서의 ‘분노’ 역시 오늘 우리들 심리 깊숙이 ‘화병의 씨앗’을 심고 있다. 그것은 언제든 폭발적인 형태로, 그리고 파괴적인 양상으로 그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를 파멸적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다.
<화병의 인문학>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깊숙이 뿌리 내린 ‘화병’을 “의료문학”이라는, 문학작품에 반영된 ‘화병’의 양상을 살피는 작업으로써 접근한다. 문학작품이 보여주는 친근성, 그리고 문학작품이 당대의 시대 현실을 전형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작품으로서 ‘화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생생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화병의 치유는 (서구)의료적인 접근보다는 사회적인, 관계적인, 문화적인 접근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한 실질적이며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것이다. 우선 거기로 나아가기 전에 ‘화병’이라는, 우리에게 당연하고 친숙한 언어에 대해서 좀 더 낯설게 접근하여,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개인이든 사회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삶과 내 주변의 인간 군상의 행태를 밝게 설명해주는 도구를 갖게 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의료문학”과 “의료인문학”이 이렇게 우리 삶으로 다가오고 있다. 접기

2021/09/28

알라딘: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지은이),김진 (엮은이)

알라딘: 너 자신을 혁명하라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지은이),김진 (엮은이)
오늘의책2003-03-10




7.0 100자평(1)리뷰(6)
품절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248쪽

책소개
함석헌은 한국 근대사를 서술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역사, 언론, 종교, 정치와 사회운동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장기려 박사,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 원경순 선생등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함석헌이 남겼던 말과 글들을 모아 놓은 '명상집'이다. 학문으로서 그의 사상을 파고드는게 아닌, 그의 글 속에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그래서 '명상과 실천'의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5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 책은 참된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글, 생명과 전체에 대한 글,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 의식에 관한 글, 편견과 자만에 빠지지 않은 참된 종교와 믿음에 관한 글,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서문

1. 참 찾아 나선 혼
2. 생명의 우주와 하나되어
3. 이 역사에 씨알로 서서
4. 미완성의 하나님
5. 아름다워라, 우리의 삶이여


책속에서



네 맘을 좀더 가라앉혀라. 좀더 속을 들여다보아라, 참 자유를 얻기 위하여 숨을 좀더 죽이고 생각을 좀더 고요히 해 보아라.
새벽 밝기 전에 명상의 낚시로 잡은 산 고기가 있는 사람은 종일 피곤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고 독수리처럼 영원을 향해 올라간다. 그 사람은 낚는 줄도 모르게 많은 영혼을 낚을 것이다. -42쪽 - 이누아
이제 기도해라, 새로 내는 네 맘의 뿌리가 지구의 중심을 뚫도록까지 기도를 끊지 마라, 맘 박기를 쉬지 마라. 네 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 네 가슴 속에서 빛이 환하게 날 때까지 열도를 내리지 마라. 맑아져서 새벽 이슬 같을 때까지. 향기로워서 향기로워서 아침 연못의 연꽃 같을 때까지, 동짓달 밤하늘의 별보다 더 거룩하도록, 그래, 거룩해야 한다. -57쪽 접기 - 이누아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이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것은 내 몸이다. -85쪽 - 이누아
진리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체험은 몸으로 앎이다. 몸으로 하기 전엔 참이 아니다. 마음이 옹근(통일) 것이 함(행동)이요, 함이 맺힌 것이 몸이다.-196쪽 - 이누아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함석헌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접기


최근작 : <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큰글씨책] 함석헌 수필선집 >,<함석헌 수필선집> … 총 59종 (모두보기)

김진 (엮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십 대 때 성경말씀 읽기에 빠져 평생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길을 가고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대학 재학 중, 예수전도단(YWAM) DTS를 마치고 대학부 간사를 했다. 신앙 수도공동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 이십 대 중반에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생활하며 공부했다.
총신대학, 한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프랑크프트 대학 신학부에서 신학과 종교학의 경계학문인 종교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Ph.D) 독일 유학 중, 인도 푸나에 있는 “드 나빌리 칼리지”에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성과 수련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여러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강의했고, <크리스챤 아키데미>에서 근무한 후, 인도선교사로 생활했다. 한국 최초의 도심 속 기독교명상 센터 <예수도원>을 개원했고, 40대 초반 인도를 오가면서 10년을 생활하며 “씨알아쉬람”을 개원했으며, 실롱(Silong)에 있는 마틴 루터 대학에서 연구 방문교수로 생활했다.

(재)밀알복지재단 사목으로 사역했고, 생활수도 공동체인 <예수나무공동체> 꿈꾸고 있다. 현재에는 북한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주로하는 (사)글로벌블레싱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면서 동시에 예수향남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신부와 스님과 함께하는 <삼인삼색> 토크쇼로 KBS <아침마당>, <여유만만> 출연했으며, 현재 SBS 라디오 <시사특공대>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진의 영성시리즈>, <나의 질긴 외로움을 만지시는 이>, <하나님과 내통하라>, <간디와 대화>, <예수공부법> 등 20 여권의 책이 있다,
E-mail : kimsanjin1@naver.com 접기


최근작 :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예수공부법>,<간디와의 대화 어떻게 살 것인가> … 총 31종 (모두보기)


북플 bookple

평점
분포

7.0
전체 (1)

공감순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단편적인 글 모음으로 보여주기는 무리인듯.
madwife 2015-10-31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구매자 (3)
전체 (6)


[마이리뷰] 너 자신을 혁명하라


씨알 함석헌 명상집.

책 제목만 보면 흔히 유행하는 자기계발서 같지만, 내용적으로 깊이가 일반 자기계발서와는 다르다. (책 내용 중 `몸은 언제나 꼿꼿이 가지자`, `늘 하늘을 우러러보자`, `닭 울기에 일어나 하루 살림 준비를 하자`, `날마다 글 읽기를 잊지 말자`, `먹고 입음을 간단히 하자`, `내 몸 거둠을 내가 하자`, `때때로 산과 바다에 가자`, `술, 담배를 마시지 말자`, `산 물건을 죽이지 말자`, `하루 한번 땀을 흘리자`, `시골을 지키자`, `빚을 지지 말자`라는 삶에 대한 조언도 있기에, 자기계발서의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혁명(革命)은 개인의 혁명이 아니라, 민중(民衆) 전체의 혁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변화를 말하는 자기계발서와 큰 차이가 있다. 마치,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중에서 일반 서적은 `修身` 측면을 강조하는데 반해, 이 책은 `平天下`까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책의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지만, 동양 고전, 성경, 불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책 곳곳에 고전에 대한 인용과 설명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와, 나 같은 초보자들은 초반에 질려 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초반부에 나오는 한 단락이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영원 무한하다. 그러나 사람은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하자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자가 가운데(中)를 말했고, 고르게 함(和)를 말했다. 가운데란 여기나 저기가 아니다. 여기면서 저기요 저기면서 여기인 곳이다. 고르게 함이란 함이나 아니 함이 아니라, 하면서 아니 하고 아니 하면서 하는 지경이다.
그래서, 노자가 비임(虛)을 말했고 됨(化)을 말했다. 비임이란 있음이나 없음이 아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음이다. 됨이란 달라짐이나 그대로 있음이 아니다. 달라지면서 그대로 있고 그대로 있으면서 달라짐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를 졌고 새로남을 보여 주었다. 십자가란 죽음이나 삶이 아니다. 죽음으로 살고 삶으로 죽음이다. 새로남이란 육이나 영이 아니다. 육이면서 영이요 영이면서 육이다.
그래서, 석가가 반야(知慧)를 말했고 해탈(解脫)을 말했다. 지혜란 안다 모른다가 아니다. 앎으로 모르고 모름으로 아는 자리다. 해탈이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면서 저 세상이요 저 세상이면서 이 세상인 삶이다. (p39)˝

˝사람에게 있어서 자아라, 영혼이라, 아트만이라, 인격이라 하는 것이요, 전체에 있어서는 하늘이라, 하나님이라, 브라만이라, 생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둘이면서 하나요, 아버지면서 아들이요, 절대면서 상대다. 거기 생명의 정신의 한 큰 운동이 있다. (P43)˝

이 책의 장점은 내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동안 새로움 깨달음을 접한다는 감동을 주기에,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라 생각된다.
또한, 많은 인용이 있음에도, 그러한 인용이 저자의 `지식 자랑`이 아닌, 우리에게 `一以貫之(하나로써 꿰뚫음)`하는 친절함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단편적인 명상집이지만, 큰 주제별로 묶인 내용을 정리해 본다.


사람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하나님의 뜻(天命)`을 알게 된다.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 스승이 바로 `씨알`이다.
우리는 `씨알(생각함)`을 통해 하늘의 얼을 우리 속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씨알`을 각자의 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씨알이 있다.
씨알을 찾는 것은 각자의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찾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구체적인 실천 사항은 서두에 정리한 내용임)

하늘의 전체는 `하나님`이지만, 역사의 전체는 `씨알`이다. 생각을 통해 깨닫게 되면, `나`와 `너`가 다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씨알`이 `하나`되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天心은 民心으로 나타나며, 민심의 표현은 `악에 대한 반항`, `폭력을 쓰지 않는 싸움`, `조직적인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민심의 표현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불의와 싸워 나가야 한다.

책에 있는 대강의 내용을 정리했는데,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 대한 이해도 많이 부족했기에, 놓치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 많이 아쉽다. 이러한 부분은 시간을 두고 더 깊은 공부를 통해서만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자신의 선택한 하나의 길을 통해 전체를 보려는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던 기쁜 시간이었다.

˝<中庸>에서는 중(中)은 천하지정리(天下之定理)라 했지만 이(理)가 이(理)대로만 있다면 죽은 이(理)다. 중(中)은 필연적으로 발(發)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하고야 만다. 그러면 벌써 만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곧 사람에게 있어서 빛이지만, 빛이라 할 때 벌써 거기 어두움이 있었다. 싸움은 거기서부터 벌어진다. 힘씀이 필요하다.(P47)˝

˝나는 물론 불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불교에 대해 무엇을 아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안다.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안다. 그것은, 부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예수를 통해서 안다. 영원하신 이는 마치 소금과 같은 것이다. (P81)˝

ps. `인(仁)`에는 한자로 `씨(核)`의 의미도 있는데, 이러한 공자의 `인(仁)`사상과 `씨알사상`도 아마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들었다.

- 접기
겨울호랑이 2016-06-14 공감(30) 댓글(0)
Thanks to
공감




씨알사상과 자기 혁명....


이 책은 함석헌 사상을 그가 남긴 글을 따라 재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전기가 아니다.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편향적인 시각없이 오로지 그의 생각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사상의 주요내용을 담은 글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와 삶의 변화를 위한 책이라고 엮은이가 말한다.

'너 자신을 혁명하라'라는 제목의 말은 함석헌 옹의 씨알사상으로 드러난다. 씨알은 민의 역동적인 생명력이며 그것은 늘 변화한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보다 널리 퍼지며, 자신을 버림으로써 더욱 크게 산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영원한 존재와의 만남도 현실의 삶에서의 민중의 처지와의 만남도 이루어낸다.

늘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세계와 밖으로 나가는 세계와는 불연속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어울릴것 같지 않은 두 세계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위대한 삶들을 만날 때면 늘 그 불연속면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하였다. 그들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연속면....

하지만 그 두 삶을 동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서도 꺽이지 않고 좌절되지 않는 내면의 밝은 빛이 있었고, 그 빛은 사회적 현실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꺼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만 했다.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처럼....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놓아두고, 그가 가진 생명의식과 씨알 사상은 나의 개인사적 관심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관심의 한가운데를 뚫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 접기
달팽이 2003-10-13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나는 정말로 노력한다



이누아 2009-08-21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2021/08/30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의료 활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고찰* 이영아**

kjmh-20-2-291.pdf

291
의사학제20권제2호(통권제39호)2011년12월 KoreanJMedHist20ː291-326Dec.2011
ⓒ대한의사학회 pISSN1225-505X,eISSN2093-5609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의료 활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고찰*
이영아**
1. 머리말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3. 알렌의 의료 행위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5. 결론
-----
1. 머리말
2010년 TV드라마 <제중원>과 이것의 원작이 된 소설 『제중원』(이기원, 2009)이 발표되면서, 개화기 조선에 유입된 서양근대의학에 대한 사회적 관 심이 커졌다. 제중원은 고종에 의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이며, 이를 설립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선교의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거나 한국 관련 일을 수행한 약 20년(1884~1905)의 시
간 동안 꾸준히 작성한 일기와 편지글을 통해 그 시기의 한국의 정치, 외교, 사회, 문화, 의학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그의 일기와 선교
1) 
 
 *  이 논문은 2009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9-351-A00276]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인문교양학부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120-728) 
전화: 02-300-0878 / 이메일: coolya112@naver.com
활동, 외교활동을 하면서 작성한 방대한 양 )의 공적·사적 편지의 내용, 그 리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 지냈던 시간들을 회고한 기록들은 특히 정치·외교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조선의 공식 문서나 기록의 빈틈 을 메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료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 입국 초 의사로서 활동했던 시기의 조선인 의 몸, 위생, 질병 등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알렌은 1884 년 9월 조선에 입국했을 때 선교사이기 이전에 먼저 ‘의사’로서 정의되어 미국 공사관의 부속의사 및 유럽, 일본의 공사관 공의(公醫)로 임명되었다(민경배, 1991: 95). 그리고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1885년 4월 설립된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다른 선교 사 및 의사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 선교사직을 그만두고 1887년 8월 주미 한 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외교관으로 변신하게 된다. )
1884년부터 1887년까지의 알렌의 선교 및 의료 사업 기간은 한국사적으 로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시기이다. 조선 정부가 서양식 근대병원을 처 음 세운 시기이며, 이와 함께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가 생겨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알렌은 이 기간 의료 활동을 통해 조선인의 몸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였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았던 많은 서양인들처럼 동양의 한 인종으로서 조선인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환자로서 조선인의 몸을 관찰하 고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일기, 편지, 그리고 회고록 등을 통 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알렌은 의사로서, 선교사로서뿐 아니라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 으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직을 역임했으며, 훗날에는 주한 미국공사관 공 사로도 활동했다. ) 그만큼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던 존 재이다. 이처럼 알렌은 제중원의 설립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자, 구한말의 한 미외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에, 기존 연구에서는 그의 치적사 업들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어 왔다. ) 알렌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의사 중 한 명을 살펴보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한국사 에서 개화기라는 격동의 시기의 중심부를 이해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알렌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기록들에 대한 섬
세한 텍스트 분석을 방해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즉,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생각과 태도로 일상에서 조선인들을 보고, 대하고, 치료해왔는지에 대한 관 심은 극히 적었던 것이다. 김윤성이 「개화기 개신교 의료선교와 몸에 대한 인 식틀의 ‘근대적’ 전환」에서 여러 선교의사들의 몸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가운 데 알렌의 논의가 포함된 경우를 제외하고는(김윤성, 1994), 알렌은 정치사 적ㆍ외교사적ㆍ의료사적 ‘행위’를 한 인물일 뿐 어떤 조선(인의 몸)에 대한 ‘ 시선’을 가진 인물로서 연구되지 못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알렌을 ‘대문자 의 역사’라는 ‘거시적’ 담론 속 존재가 아닌 조선이라는 동양을 방문하여 생활 한 한 명의 서양인으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가 가진 선교 사, 의사, 그리고 외교ㆍ정치가로서의 위치가 참조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점 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남긴 기록들이다. 그가 ‘글’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 특히 조선인의 몸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았는지를 ‘미시적’으로 분 석하고자 한다. 
‘몸’의 문제에 집중하여 본 논문을 전개하려는 데에는 이 시기의 ‘몸’에 대 한 담론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몸은 인간과 세계 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몸 안에서, 몸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몸은 문화에 의해 정교화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가능성이
다. ) 따라서 몸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ㆍ환경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몸은 능동적인 행위자이면서 또한 모든 사회적 계기와 그 역사에 의해 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1900년을 전후한 시기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서구의 문물이나 서양인의 방문 등을 통해 전면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 조선의 ‘근대화’는 여러 방면,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격변을 보인 부분이 몸에 관한 인식 부분이다. 의학, 위생, 체육교육, 섹 슈얼리티, 인종, 우생 등의 근대화 문제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선결되어야 할 요소였다.7)
따라서 이 시기 조선 땅에서 마주친 조선인과 서양인이 각기 바라 본 ‘우리’
와 ‘그들’의 몸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몸의 근대화’의 과정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몸을 묘사하는 과정은 어떤 경우에서건 온전 히 객관성을 띨 수는 없다. 여기에는 대상을 보는 주체의 시선이 언제나 개입 될 수밖에 없으며, 서술을 하는 목적과 주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주관적 평가 가 포함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을 대할 때에는 ‘누가’, ‘무엇을’ 그리고 ‘왜’ 묘사하는지 항상 질문해야 한다(존 퓰츠, 2000: 21). 이들의 ‘충돌’과 ‘융 합’, 혹은 ‘경쟁’과 ‘승/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근대적인 몸’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몸에 대한 강박에까지 많은 부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러 한 연구는 시의적 가치를 지닌다. 
먼저 조선인 쪽에서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선행 연구인 「1910년대 조선인의 타자의 몸에 대한 시선 고찰」을 통해 기왕에 살펴본 바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이번에는 서양인 쪽에서의 당시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 조선과 매우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서양인이자 몸에 대한 감 각이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인 의사로서 알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 다. ) 제국주의의 열풍이 불었던 당대에, 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한 서양인·백 인이자 의사로서의 알렌이 보고, 진료한 조선인의 몸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리고 그 몸을 대하는 알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을까?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비서구사회에 서구 근대의학을 이식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가 되었던 것 은 의료선교사들이었다. )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고 일본에 의해 부 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이래로 1877년 제생의원이 부산에 설립되면서부 터 서양식 병원들이 조선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공사를 통해 알렌 에게 이듬해 봄부터 의료사업을 허락할 뜻을 비쳤던 고종은 갑신정변 때 알렌 이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1885년 봄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게 되면 서 본격적인 서양 선교의사들의 조선인을 상대로 한 진료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정부는 1885년 4월 재동의 고 홍영식의 옛집에 근대적인 서양식 의술 을 시행하는 병원 제중원을 세우고, 알렌에게 진료를 맡겼다. 제중원의 설립 에는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에게 국가가 의료를 베풀던 기관인 혜민서의 역할 과 함께 서양 의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할 목적이 있었다. 1885 년 5월부터 6월까지 한 달간 스크랜턴이 알렌을 도왔으며 6월에는 헤론이 합류하여 알렌과 같이 진료를 맡았다. 이들은 개원 이후 1년 동안 1만460명 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료한 실적을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서양인이 조선인을 진료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서 그들 이 파악한 조선인의 몸과 질병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 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스크랜턴은 보다 자유로운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1885년 민간진 료소인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Relief Hospital)을 설립하여 진료를 하였 는데, 역시 『연차 보고서(Annual Report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6 )』를 통해 조선인에게 흔한 질병이 무엇인가 등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또한 1887년에는 여성 환자들을 위해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워 여의사 하 워드(Meta Howard)를 통해 진료하도록 했다. 그후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M. Cutler) 등도 여의사로서 보구여관에서 활동했 다(조이제, 2007).
그런데 서양의 선교의사들이 조선인을 진료하면서 남긴 기록 및 의학행 위들에는 조선의 몸 문화 및 의학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두 시각이 모두 드 러난다. 예를 들어, 1890년에 내한한 영국성공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랜디스 (Eli Barr Landis)는 조선 전통의료에서 사용하는 치료약재들을 긍정하는 모 습을 보였다. )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서양인들 중에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한문에도 밝아 조선의 다양 한 문화, 풍속에 대한 소개 글을 발표하고 동의보감의 영역(英譯)을 시도하기 도 하였다. 33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동의보감을 완역하진 못하였으나 그 가 제일 먼저 번역하여 중국학 잡지 The China Review에 소개한 부분이 「탕 액편(湯液篇)」이라는 사실(여인석, 2007: 10-1)은 그가 조선의 전통의학 중에 서 가장 인상 깊게 생각했던 부분이 조선의 전통적 치료약재에 관한 것이었 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보구여관의 의사였던 로제타 셔우드는 온돌형식의 병실이 당시 한
국 환자를 위해서는 가장 좋은 병실이라고 생각하였다(이방원, 2008: 39). 그 이유를 “첫째, 온돌방은 따뜻하고 잠자기에 편안하다. 둘째, 방 전체가 하나 의 침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환자가 침대 밖으로 나올 염려가 없다. 셋째, 온돌방은 청결하여 소독하기 쉽고, 요를 쉽게 살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 교병원에서 사용하기에 경제적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 조선의 전통 의료방식에 대해 불신하거나 폄하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양인 의사들은 한국인들이 질병에 대해 무지하며 비(서양근대)과학적인 치 료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죽거나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신들의 서양근대의학 대신 뜸, 침 )의 치료나 비위생적인 환경, 콜레라의 유 행에 고양이 그림으로의 퇴치, ) 부적, ) 굿 등의 미신에 의존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서양 선교의사들은 동의하지 못했다. ) 그들에게는 한국인이 사용하던  
민간요법과 미신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계몽’ 하면서 치료하려 했다(이방원, 2008: 48).
이처럼 서양의 선교의사들은 어떤 면에서는 조선의 전통의학과 생활환경 에 대해 인정하려는 태도가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침, 뜸과 같은 전통 적 치료법이나 위생불량 등을 비판하는 모습도 보였다. 알렌의 경우도 조선 의학에 대해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래 인용문에서와 같이 조선의 전통의학에 ‘좋은 아이디어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하고, 조선인들은 쌀밥을 주식으로 해서 치아의 성장이 좋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 으며, 인삼의 발한(發汗)을 유도하는 작용에 대해 흥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토착 의료진들은 치료법에 대해 몇몇 좋은 아이디어들을 가지
고 있다.(The native faculty have some good ideas in regard to treatment.)16)
쌀밥 식사는 이의 성장에 좋은 것 같다. 한국인은 거의 누구나 
훌륭하고 진주와 같이 흰 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침에 조심 스럽게 이를 닦는데 청정제나 솔 대신 손가락 위에 소금을 놓고 이 에 비벼댄다.17)
조선의 약전(藥典)은 주로 인삼으로 알려진 식물의 뿌리에 의존 한다. 인삼은 발한을 필요로 하는 조선 사람의 모든 병에 만병통치 약이다. 조선은 뛰어난 인삼으로 유명하며 최근 일본이 조선을 점 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삼은 왕실의 부수입의 하나였다. … 미국 산 인삼은 활성이 없는 데 반해 조선의 인삼은 탁월한 발한성 때문 에 귀중하게 여겨진다. 나는 인삼을 먹고 발진한 외국인과 조선 사 람들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 약초의 위대한 가치를 최음제 로 이용하는 것 같다. 내가 민영익을 치료할 때 체온이 올라가자 부 상한 부분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특히 유의해서 
 
린이에게도 예방접종을 하지 못했다”며 화를 냈음을 언급하고 있다.
16)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7.
17) H. N. 알렌,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1쪽.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많은 질문을 한 끝 에 그의 가족이 빨리 낫게 하기 위해 당치도 않은 인삼을 복용시켰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는 나의 말에 분명히 복종하 지 않는 한 치료를 전부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말이 너무도 강경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쁜 징 후가 없어진 후 나는 전보다도 더 인삼에 대해 탄복하게 되었다. )
그러나 알렌 역시 전통의학의 치료법에 대해 부정하거나 우려를 나타내기
도 하였다. 그는 침을 놓는 것의 비위생성, 고약을 바르는 것의 무의미함 등을 언급하며 전통의학은 그가 보기에 효능이 없거나 오히려 환자에게 해로운 것 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음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무면허 의료행위로 침을 놓 다가 환자가 즉사를 한 경우, 민영익을 치료할 때 자신의 외과수술과 달리 전 통의사들은 고약을 바르려 했던 것 등에 대해서는 매우 위험한 치료방식이라 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조선의 의학 체계는 주로 중국의 의학 체계이며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뜸을 자주 놓기 때문에 조선 사람을 벗겨 보면 어떠한 통증을 고치기 위해 뜨거운 뜸을 놓은 자리가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침도 뜸만큼 자주 놓는데 때로는 침이 더러워 원래의 병보다 더 심한 병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언젠가 나는 침을 사용하여 매 우 슬픈 결과가 일어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 한의사를 높이 평 가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잘못되어 침이 골수 를 꿰뚫어 젊은이는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쓰러져 죽고 말았고, 몇 시간 내에 그의 어머니도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
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니 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1885년 2월 4일 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3. 알렌의 의료 행위
이처럼 조선의 전통적인 의료 방식과 관념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를 나타냈던 알렌은, 조선인을 어떠한 의료방 식과 관념으로 치료하였을까?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알렌은 조선에 서 양의 근대의학을 도입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 조선 최초의 근 대식 정부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그의 존재가 이를 추진하는 데에 큰 동력이 되었다. 즉 그는 개별적인 치료행위 외에도 조선의 서양 근 대 의학 시스템, 지식, 기술을 수용할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 할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서양의 근대적 의사로서 그의 구체적, 개별적 의 료행위는 어떠했을까?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환자가 불치 환자일 때 무척 슬퍼하였으며, 완치되 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치료할 수 없는 환 자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극진한 치료를 통해 환자의 회복을 기원하 고 성취해내는 그의 모습은 여느 의사들과 다를 바 없는 숭고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일을 하는 가운데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우
리에게 계속 오는 많은 수의 불치 환자였는데, 눈병의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했다. 두 눈이 완전히 손상된 남자가 외국인 의사가 그 를 완치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찾아 왔을 때 “우리가 당신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나는 어제 밤에 다 죽어가는 김판서의 아들을 진료하기 위하여 
불려갔다. 나는 그가 3일간 소변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약 3 시간 진료끝에 드디어 나는 소(小)카테테르(도뇨관)를 통해 소변 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몇 방울의 오줌을 빼내었고, 그리고 이에 관련된 약을 조제해 주었다. 나는 그가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주 정성껏 그를 위해 기도했다. 초조와 불안의 아 침나절을 지난 후 내 기도는 감응을 받아, 정오 경 환자의 형이 내 게 와서 하는 말이 환자는 차도가 좋아져서 소변도 잘 나온다는 것 이다.(1885년 3월 22일자 일기) )
그러나 그는 때로는 조선인 환자들에게 오늘날의 의료윤리에 대한 ‘상식’ 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는 점 역시 주목을 요한다. 이를테면 그는 일 종의 ‘의료사고’를 낸 뒤에도 환자가 그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면 자신의 과 오를 시인하며 사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환자들의 무지와 맹목에 편승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나는 의과 대학에 다닐 때 이 빼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러 나 내가 얻은 유일한 방법은 적합한 집게를 골라 이를 깊게 꼭 집 어 비틀면서 ‘귀중한 생명을 위해 잡아 뽑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 떤 사람이 이가 몹시 아프다고 불평을 하면서 찾아 왔다. 그 사람 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아픈 이를 뽑아 버리자고 권했다. 그렇게 권하면 환자들은 곧 가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놀랍게도 당장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처방을 수 행하기 위해 나는 능력을 다해 한 번에 이 두 개를 뽑아 버렸다. 그 날 늦게 내가 병원 문을 닫기 전에 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나는 기 가 꺾이고 말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이 하나를 썩은 이와 같 이 뽑아 버리고서는 호되게 욕을 먹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처의 이 몇 개를 뽑아 달라고 처 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 한국인으로 그 렇게 아프지 않게 한꺼번에 이를 두 개씩이나 뽑는 사람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이를 뽑게 되어 오히려 이 뽑 는 일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
위의 인용문은 알렌이 제대로 된 치과치료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한 환 자의 건강한 생니를 뽑아 놓고도 환자가 그 사실을 개의치 않자 오히려 자신 감을 갖고 발치(拔齒)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그는 자신이 했던 의료 실수에 대한 정보를 환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으며, 그런 채로 지속했던 의료행위에 대해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음 인용문은 알렌이 제중원에서 1년간 근무한 뒤 작성한 『조선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기 에는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큰 사지 절단 수술은 환자의 거부로 하지 못했고, 그 대신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음경을 환자에게 충분한 상의 없이 절단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의료윤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쉽게 납득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수술 후 “환자들은 항상 그 결 과에 만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 각한다. 절단이 필요한 환자가 여러 명 왔지만, 다리를 잃을 것이 라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죽어서 고통 에서 해방되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앓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 및 음경을 절단한 경우 우리는 환자와 길게 상담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진정으로 알아차리기 전에 절 단했다. 환자들은 항상 그 결과에 만족했다. )
알렌의 1885년 4월 10일자 일기에 따르면, 제중원에서 자신이 환자를 처 음 진료한 첫날 환자 총 20명 중 절단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3명이었으나, 그 들은 모두 절단수술 받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효경』에는 “우리의 몸, 머리 카락, 피부 등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감히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소학』에는 “증자가 말하기를 신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으로 행하면서 감히 공 경하지 않을 것인가?” )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유교 사회 에서 몸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체(遺體)이기 때문에, 자식은 몸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즉 “전신(全身)”의 개념을 효의 근본으로 실천한다. ) 근 500 년간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는 몸의 털끝 하나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고 믿었던 조선인들에게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 을 것이다(이영아, 2008: 25-8). 물론 살기 위해서였지만, 때론 신체부위를 절 단하거나 큰 흉터를 남겨야 하는 외과수술을 받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서 입원환자 분류표에는 45세 의 남성으로 음경상피종양(epithelioma penis)을 앓고 있던 환자가 음경절단 술(amputation)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음경절단술을 알렌과 헤론 에게서 받고 24일간의 입원기간을 거쳐 ‘good’이라는 치료결과로 퇴원했다. 본 논문에서 이에 대해 현대의 관점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가능 하지도 않거니와 논점에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알렌의 사유구조이다. 그는 어떻게 그러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알렌이 기본적으로는 환자를 극진히 치료하고 그것을 통해 서양의학과 기
독교의 힘을 증명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의료행적들에는 몇몇 실수나 과잉진료 등의 흔적도 남아있다. 특히 조 선인의 몸에 대한 관념의 중심을 차지하는 효(孝)의식과 전신(全身) 개념(최 근덕, 1992: 171)에 배치되는 절단술 등의 의료행위도 감행했던 사실들에 대 해서는 보다 면밀한 해석이 필요하다.
1)조선및유교문화권의‘전신(全身)’개념에대한알렌의이해 그가 절단술을 행할 때 조선인에게 있어서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이 
가지는 치명적인 의미를 의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겠다.
어떤 사람은 파상풍으로 팔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그것을 절단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그 중국인 장군은 외 팔이 군인으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고 불구의 몸으로 고통을 받 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이유로 권하는 수술을 받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파상풍에 걸려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 )
위의 인용문은 조선 내에서 있었던 청일간의 무력충돌 때 생긴 중국인 부 상환자가 절단술을 거부했던 것에 대한 회고이다. 알렌은 전쟁에서 파상풍 을 입은 환자에게 절단술을 권유했으나 환자는 ‘외팔이 군인’으로 사느니 죽 겠다며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 군인 역시 서양의학의 절단수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혹은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 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에 절단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런데 그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알렌은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며 비판적 인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의학은 몸을 하나의 기계로 여기면서 유기체로서의 몸, 하나의 
완결된 몸보다는 각 부분들의 해부학적 기능성을 더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 다. 근대에 들어 등장한 실증적인 해부생리학의 지식은 인간을 신체와 정신 으로 구분하고, 실증적인 인체 내부의 관찰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직 접 ‘관찰’해 보니, 인간의 몸이란 하나의 ‘잘 만들어진 기계’와도 같다는 생각 에 미치게 된다(다비드 르 브르통, 2003: 29).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몸은 하나 의 완결되고 유기적인 총체가 아니라, 분할되고 파편화된 부분들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처럼 몸을 계속해서 분할할 수 있는 ‘기계’로 생각한 사상가가 바로 데카르트이다. 신체의 절단이 가능한 이유도 몸이 하나의 기계이자 물질이기 때문이다. 몸은 한꺼번에 하나로서 주어진 총체가 아니라 분해되고 재결합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부분을 떼어내거 나 수정, 조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몸의 한 부분을 없앤다거나 조금 고친다고 해서 전체의 통일성이 깨진다거나 존재 자체가 바뀌어버리지 는 않는 것이다(김종갑, 2008: 132-6).
이러한 맥락에서 알렌이 환자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이 가지는 (동 양 혹은 조선의) 한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의 의미를 간과했을 수 있다. 그러 나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몸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 큰 의미 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조선에서 제일 처음 집도한 수술은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어떤 조선 사람의 팔을 잘라 내는 꼭 필요한 절단 수술이었다. 팔꿈 치 바로 위에 있는 뼈가 호랑이에게 물려 살이 썩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의 회복이 잘 되어 그의 친구들도 의아할 정도였다. 호랑이의 상처는 의사의 치료로 나을 수 있었지만 그는 (훗날 죽어서-인용 자 주) 그의 팔이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될 것이다. )
그가 처음으로 절단수술을 한 환자가 상처는 회복되었으나 “팔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되었다”라고 언급한 것은 곧 그것이 조선인 환자에게 얼마 나 큰 타격이라는 사실을 그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을 수 있었지 만’, 즉 ‘생명은 건졌지만’ 팔을 잃는 ‘장애’가 생긴 것이며, 전통적인 유교윤리 를 따르는 조선인의 입장에선 그것이 조상에게 엄청난 불효를 저지르는 일임 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신체의 절단이 조선인 개인의 삶에 아무런 지 장도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 앞서 인용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 록’에서 ‘큰 사지 절단’은 할 수 없었으나, ‘손가락, 발가락, 음경’의 절단 수술 을 환자의 동의 없이 행했다고 말한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가 ‘ 큰 사지’에 대비되는 ‘신체의 작은 일부’로서 손가락, 발가락과 음경을 동위에 놓는 신체관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경우, 그가 조선인들에게 단발(斷髮)을 요구하였듯,30) 신체의 부위에 따라 훼손되 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여겼고,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은 전자 에 속한다고 여겼던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알렌의 의료행위들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절단술
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비록 신체의 ‘작은 부분’이나마 환자에게 충 분한 설명을 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절단수술을 감행할 때에는 이 수 술방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성공’에 대한 확 신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수술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그 런데 사실 알렌은 의과대학을 나왔으나 1년제를 졸업하였기 때문에(민경배, 
1991: 82) 일기나 선교본부의 엘린우드(F. F. Ellinwood)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30)  “조선어 교사가 오늘 오후에 나의 한문본 성서를 빌렸을 때 … 성서를 읽으려면 먼저 상투 를 자르라고 경고했더니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마침내 상투를 자르는 모험을 강행했다. 성서가 그로 하여금 단발의 결심을 굳히게 했던 것이다.”(1885년 1월 29 일자 일기)
서 자신의 의학에 대해 자신감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중원이 설 립된 뒤 스크랜턴이나 헤론이 제중원 진료를 도와주길 바랐던 이유도 그 때 문이었을 것이다.
박사님이 나중에 저를 다시 조선으로 파송하게 된다면, 저는 외 과분야에서 졸업 후 과정을 밟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저 는 조선에 오기 전에 경험이 전혀 없었고,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했 기 때문에 이 제중원과 같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병원에서 시 술해야 할 큰 수술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회피하고 있습니다.(1887년 1 월 3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스스로 고백하고 우려하였듯, 알렌은 외과분야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self-taught)하였기 때문에 오히 려 큰 수술은 ‘회피하고’ 있는 정도였다. 
2)알렌의서양의학및외과수술에대한확신 그럼에도 그가 환자를 대상으로 과감한 절단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은 이것이 19세기, 즉 서양의 근대의학이 ‘과학성’, ‘객관성’으로 이해되고, 이 러한 서양 근대의학의 새로운 ‘성격’에 외과수술이 가장 크게 기여를 했던 시 대였기 때문이었다.
묄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환자가 이미 출혈이 심했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나의 과감한 치 료방식에 크게 반대하는 14명의 조선인 의사들에게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1884년 12월 5일자 일기)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
상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 니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병원 계획 에 관심을 갖고 병원에 수용이 되는 숫자만큼 와서 교육을 받으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
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 월 4일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33)
꽤 많은 한의사가 병원을 이용했는데, 모두 치료 결과에 만족 해하는 것 같았다. 그중 몇 명은 서양의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
했다.34)
알렌의 서양의학에 대한 자부심은 그가 갑신정변 당시 자상을 입은 민영익 을 치료하면서부터 확보된 것이었다. 민영익을 살려 낸 ‘외과수술’이라는 새 로운 의료방식은 조선 사람들로서는 매우 경이적인 것이었다. 알렌은 “피가 흐르고 있는 측두골 동맥을 관자놀이로 이어 명주실로 봉합하였고, 귀 뒤 연 골과 목 부분, 그리고 척추도 모두 봉합”했으며, “팔꿈치에서 팔뚝까지 약 8인 치의 깊은 상처도 명주실로 네 바늘 꿰매었다.” 이것은 조선에는 없는 치료법 이었다. 이 수술로 민영익이 회복되자 조선인들은 알렌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measures”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번역이 더 적절하나, 김원모의 번역본에는 “이곳에 치료 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 의사들은 나의 뛰어난 치료 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오역을 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인석, 「한말과 일제시기 선교의사들의 전통의학 인식과 연 구」, 『의사학』 16-2, 2007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33) H. N. 알렌 저, 김인수 역, 『알렌의 선교 외교편지(1884-1905)』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부 설 한국교회사연구원, 2007) 38-9쪽.
34)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7-8.
오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약간의 생리학 지식을 민영익에게 설 명함으로써 그의 관심을 끌었다. … 그는 인체해부도를 보고는 경 탄의 소리를 연발하면서, 이들 기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 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그는 인체 내부에 생긴 혹을 어떻게 치료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나는 물 통 크기의 복부종양도 제거 수술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인공항문을 만들어 끼어줌으로써 장의 수축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 은 문답은 그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관심은 너무나 심대해 서 … (1885년 2월 21일자 일기) )
위 인용문에서 민영익에게 자신이 인체를 해부해서 본 경험이 있다는 사
실, 그리고 그 경험이 있어야만 의사 면허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알렌의 모습에서 서양의 근대 의학교육 체계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또 한 서양의사들은 종양 제거, 인공항문 조성 등의 외과수술이 가능하다는 이 야기를 통해 알렌은 서양의학기술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알렌 등 서양의사들이 자신들의 의학에 대해 이와 같은 자부심을 가
질 수 있었던 것은 해부학과 외과수술 방식 때문이었다. 알렌은 자기 개인의 의사로서의 숙련도나 지식보다 서양 근대의학의 특성 자체에 대한 신뢰를 바 탕으로 이러한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대 서양 근대 의학의 자기 확신은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미셸 푸코가 말한 바와 같이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에서는 외과 수술이 의 학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대표하게 되었다. 질병의 내적/외적 원인을 밝히려 는 의학적 지식은,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질병의 원인에 대한 ‘실증적 시 선’을 요구하게 되었고, 질병은 인간 몸과 의학적 시선이 마주치는 곳으로 끌 려나와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미셸 푸코, 2006: 32-3). 질병은, 해부대 위에 서, 현미경 속에서, 인간 몸의 안팎에 자리잡는 것으로 공간화되기 시작했으 며, 의학적 지식으로 분류되고 정복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사물화, 실체 화되기 시작한 것이다(김윤성, 1994: 19). 서양의 근대의학은 질병을 ‘보고’ ‘ 말하려’ 했고(병리학), 이를 통해 기왕에 존재해 온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나누던 지식의 경계가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 기 위한 기술(해부학)이 발달하고, 정교한 수술 솜씨를 갖추게 되면서 서양의 학이 ‘과학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근대의학이 말하는 객관성이다. 외 과수술과 같은 구체적 행위만이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의학적 시선은 객관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형성되는 진리를 담는 저장고이자 명증성의 근원이 되었다(미셸 푸코, 2006: 17-9).
3)알렌의조선인의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 그런데 이처럼 서양의학이 그 가치와 우월성을 인정받을수록 서양의 근대 의학 지식을 지닌 알렌과 조선인 환자 사이에는 수직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밖 에 없다. 지식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콜린고든, 1995). 자신들의 치료법을 아직 모르는 조선인들과 이를 익힌 서양인 의사는 권력관계에 있어서 평등할 수가 없었다. 나아가 이러한 수직적 관계는 그가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조선 인을 무지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알렌은 특히 조선인의 몸과 위생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굉장히 게으르고 더럽습니다. 중상류층이 흰 도포 와 큰 챙이 있는 작업모를 쓰고 여유 있게 활보하는 것을 보면 그 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조선인들은 할 수만 있 다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들이 일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일 을 하도록 시키자면 이곳 외국인들이 보통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조선산 막걸리에 취해 있고 외국 술도 매우 좋아해서 20% 의 관세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양의 술이 조선에 들어와 있습니
다.(1884년 10월 1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이곳은 인건비는 싸지만 일꾼들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의 일을 하는 데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른 외국인들은 급사들을 고용해 식탁 시중을 들게 했는데 그들이 차차 하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너무나 더럽고 게으르고 확실한 도둑들이라 결코 큰 기대는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1884년 10월 8일 엘린우드에 게 보낸 편지)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
은 선실에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이 담배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 는 조선 음식 등이 뒤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1887 년 12월 26일 일기) )
위와 같이 알렌은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르며 행동이 느리고 무절제한 생 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 엔탈리즘’론에 따르면 서양은 자신들 이외 지역(특히 동양)을 ‘여성적=감성 적=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왔으며, 이와 동시에 ‘미개척지=야만적=정체적’인 문명으로 간주해왔다(에드워드 W. 사이드, 2000). 그는 푸코의 ‘지식/권력의 연계관계’의 개념틀을 차용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 담론을 통하여 구성된 오리엔탈리즘의 허상을 폭로하고, 이러한 담론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의 지를 파헤치려고 하였는데, 육체/정신, 여성/남성, 처녀지/개발, 빈곤/자본, 야만/문명 등의 이분법적 대비를 통하여 타자와 나를 구분 짓는 일은 오리엔 탈리즘적 사고의 변종이라고 하였다(이승환, 2004: 21). 4)당대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의보편성
알렌 뿐 아니라 언더우드(H.G. Underwood), 게일(J.S. Gale), 비숍(I.B. Bishop), 에비슨(O.R. Avison) 등 조선을 방문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알 렌과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 그것이 조선인들의 실제 모습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조선을 낙후된, 미개한 국가라고 생각하 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알렌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 었다. 이처럼 미개한 인종을 동일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차등을 두어 대하 려 한 태도는 알렌뿐 아니라 문명화된 국가에서 온 대부분의 서양인들, 심지 어는 서양인들의 눈에 ‘비문명국’일 뿐인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청결의 문제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는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 운 사람이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가 뜻하고자 한 것은 조선 사람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미국인은 제아무리 게으름을 피우게 되더라도 노동은 고귀하다 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와 정반 대되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양심 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
평균 이상의 신장과 힘든 일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닌 한국인들은 우수한 종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신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우수한 체력에 비해 정신력은 그에 못 미치는데, 그들은 분명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너울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동방인 몽고계와 남방 인들의 교접에 의해 생겨난 탓으로 한국 민족 또한 너무나 다른 두 개체간의 잡종 혈통에 가해지는 조기 절멸의 생물학적 법칙의 가 혹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아닐지 모르나 지금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쇠잔한 상태이다. )
사람으로 생겨나기는 다 마찬가지언마는 현금 지구상 인류간에
는 온갖점에 비상한 층등이 잇슴을 보겟도다. 구주각국의 인류가 긔 만 더할수업는 인지와 천혜의 결과로 「문명」이라는 맛조흔 술에 취흥이 잠잠하야 좁은 세계를 넓게 헵쓸고 단이는가하면 아 불리가 아미리가내지며 남양군도의 토인중에는 우리가 수백년 좀 더드리켜 수천년이전에 경험이 잇는 극히 유치(幼稺)한 극히 참혹 한 금수나 얼마틀리지안이한 상태가 지금 지도 온젼히 남어 잇 스니43)
조선인들은 『독립신문』의 1899년 2월 23일자 논설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을 문명국으로, 일본,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개화국으로, 중국, 페르 시아, 터키와 함께 조선 스스로를 반개화국으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일대 를 야만국으로 구분하였다(박승희, 2008: 77). ‘반개화국’의 국민인 조선인들 은 위의 글에서와 같이 인간에게 종족, 인종 등에 따라 ‘층등’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아프리카, 아메리카, 남양군도, 호주 등의 ‘야만인’들은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만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오리엔탈리즘 이나 인종주의는 단순히 서양만의 인식 태도라기보다는 심지어 동양인들에 게까지 내면화되었던 세계의 사상적 조류였다고 할 수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동양을 방문한 미국의 선교의사인 알렌 역시 이러한 사유틀로부터 자 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의료행위를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있 을 것이다.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들의 생명이나 몸이 문명국 사람 의 그것보다 하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사 알렌 은 그 사실을 종종 간과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의료행위를 하는 데 있 어서 미개한 동양인에게 시혜를 베풀러 온 문명화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 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에 의해 알렌은 자신들보다 ‘낮은’ 등급 인 조선인 환자의 몸을 대할 때 과감하고 위험한 치료마저도 감행하였던 것 이라 판단된다.
5)알렌의선교사업외의성취욕망-보론
마지막으로, 알렌이 선교사로서가 아닌 정치가, 외교가, 사업가로서 가졌 던 야망도 그의 행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알렌은 1887년 한 국의 외교관리로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제중원을 떠난다. 1889년 9월 알렌은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으나, 1890년 7, 8월경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면서 선교사직은 사임하였다. ) 한국 최초의 외국인 선교 사 알렌은 한국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세관이나 미국 회사에서 함께 일하자 는 제의를 계속 받고 있었다. 1885년 7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묄렌도르프 는 그에게 세관병원 설립과 좋은 집과 연봉 5000달러를 제의했다. 1886년 5월 
13일자에도 미국 무역회사로부터 좋은 직위를 제의받았다. ) 그런데 사실 당시미국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의 정치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주재국 국내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본국 정부 에 대한 국민의 의무로 되어 있다. …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일도 없어야 한 다”는 것이 당시 주한미국 공사로부터 선교사들에게 내려온 지침이었다(백낙 준, 1979: 255). 선교사들도 당시 미국 신학계의 주류였던 경건주의ㆍ복음주 의적 신학교육을 받았고, ‘사회부재의 영혼구제, 정치무관의 정숙주의’를 노 선으로 삼았다(조영렬, 1990: 4).
그런데 알렌은 조선 정부의 사업과 정치에 매우 깊숙하게 연관을 맺고 있 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 서두에 “본 일기에는 공식적이고도 정치적인 성격을 띤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 알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공식적, 정치적인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1884년 12월 26일 일기에 는 갑신정변의 전개과정, 당시 발표된 황제의 포고령, 정변 직후의 내각 개편 등에 대해, ) 1885년 2월 16일자 일기는 조선 정부의 권력구조에 대해48) 매 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 그가 일기를 통해 조선 정 부나 외국 공사의 세관, 미국의 회사 등으로부터 받고 있는 여러 제의들을 기 록해 둔 것도 그만큼 그가 선교사직 외의 사업이나 관직 등에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그가 헤론이나 스크랜턴 등과 불화를 겪은 것도 그의 이와 같은 외부 활동 과 연관이 있다. 알렌은 자신의 일기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크랜 턴이나 헤론에 대한 험담, 혹은 그들과의 불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알 렌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띠기는 어려우나 그 갈등의 주 된 양상이 선교행위에 대한 ‘진정성’, ‘순수성’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으로 판단 된다. 예를 들어, 1885년 6월 28일자 일기에서 알렌은 “스크랜턴은 심술궂은 인간이고 병원 일을 너무나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병원사업에 적임자 가 아니라고 판단,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1885년 9월 1일 일기에서는 “우리는 헤론 박사와 아주 놀랄만하고도 짜증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이러한 감정적 대립은 헤론의 가 장 완고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는 드디어 선교부를 떠나 겠다고 사임 의사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 헤론부인은 이 기회를 놓칠세 라, 내가 선교사업을 맡을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 다만 이를 선교부 사임의 구실로 이용, 돈벌이에 나서려 한다고 통박했다. 이같은 모욕적인 발 언은 정말로 그리고 당연히 나를 격분시켰고. … 이리하여 나는 마침내 뉴욕 의 선교본부에 부산에서 새 선교사업을 개척해 보겠으니 부산 전근을 요청했 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선교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알렌의 행위 들이 동료 선교의사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선교사 외의 외부적인 사업들에 관심을 둔 그의 행동이나 생각은 
그의 강한 ‘인정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의 생활에 적 응하지 못한 알렌은 조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민 경배, 1991: 93) 그가 중국에 비해 조선을 좋아한 이유가 다음과 같은 부분에 서 드러난다.
조선 사람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받은 환영에 매우 기뻤다. 우리가 중국에서 사는 동안 그들은 외국 사람 들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그 반대로 조선에서는 외국인 들이 양반과 마찬가지로 존경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우리를 감시 할 개를 배치하곤 했지만, 조선에서는 개가 뛰어나와 우리에게 짖 으면 반드시 개를 꾸짖고 짖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떤 때 혹 시 군중 속에 휩쓸리게 되어도 떠민다든지 거칠게 대하지 않고 반 드시 지나갈 통로를 비켜주곤 한다. )
즉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을 ‘환영’해 주었고, ‘존경’해주었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들었으며, 조선과 깊은 인연을 맺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알렌의 ‘인정 욕망’의 한 모습을 보여주 는 예이다. 알렌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에서 자신의 성취동기를 찾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한 민영익과 관련된 일기들 에서도 항상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조선인들이 어떻게 놀라고, 감탄하였 는가에 대한 서술을 빼놓지 않고 있다. ) 덧붙여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은 그 가 의사로서보다 제중원의 설립과 운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 여주는 예이다. 
 
특수한 사례 한 가지를 언급한다. 증례 1은 첫 번째 입원환자이 자 최초의 수술환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 훈 련받지 않은 조수들에 의해 클로로포름 마취가 행해져야 했으며,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 기 때문이다.51)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적힌 위의 수술은 다행히 사고 없이 성 공했고, 환자는 빠르게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훈련받지 않 은 조수”들이 마취를 했다는 것은 의료사고 위험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충 분한 임상 훈련이 되지 않은 자들에 의해 마취를 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다. 알렌 역시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고 서술하였듯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했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먼 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알렌이 일차적으로 걱정한 것은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 ‘병원의 존립’이었던 것이다. 
그가 병원 설립 사업이 더뎌지자 “나는 하루 속히 병원 건물이 마련되길 바 라는 마음에 병원 건물이 준공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하면서, 매일 찾아 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냈다”(1885년 3월 18일 일기)는 것도 그의 그러한 의중
 
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 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 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1885년 2월 21일자 일기);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 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 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월 4일자 엘린 우드에게 보낸 편지) 등.  
51)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30-1; H. N. 알렌 저,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2 쪽.
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병원의 설립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위해 조선인 환자들의 건강상태에 대한 걱정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했다. 
결국 그는 길지 않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 제ㆍ외교적 이권을 획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다. 그만큼 알렌은 권력 지향적 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 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한 한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5. 결론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에 입국하여 초기 제중원 등에서 의료 활동을 
했던 1884~1887년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일기, 편지, 그리고 정부병원 보고 서, 회고록 등을 살펴보았다. 알렌은 조선에 서양의 근대문명이 수용될 수 있 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정부가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는 데에 많은 동력을 제공하였고, 선교사들의 입국과 정착 등을 도우면서 조선에 기독 교가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제중원 설립 후 1 년 동안 그는 헤론 등의 의료진과 함께 1만46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될 때에도 그는 주한 미국공사 자 격으로 미국선교부 측과 한국정부 사이에서 조율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담당 했다. 따라서 그가 개화기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으며 한국 개화기 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의사로서의 태도에 있어서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힘 든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는 사실 충분히 숙련된 의학기술을 지닌 의사가 아 니었다. 단지 1년의 약식 교육과정을 마쳤을 뿐 제대로 된 임상 수술 경험도 없는 초보적인 의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의료행위를 행할 때 거침이 없었다. 그는 조선인의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에 대한 신체 절단술을 행하면서 환자 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과정이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해 버렸다. 그리고 생니를 뽑는 등의 의료적 과실을 저질렀을 때에도 이를 은폐했다.
그의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서양근대의학의 
객관성, 과학성이라는 권위에 대한 알렌의 굳건한 믿음에 일차적으로 근거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렌에게는 19세기 중엽 이후 해부학, 외과수술 등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서양근대의학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개별 의사로서 본인의 의술에 대한 확신은 부족 했지만, 집합적 의미의 ‘서양의사’로서의 조선의 전통 의학에 대한 우월감은 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사-환자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것은 더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전통 의학뿐 아니라 조선인 전체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불결하고 무지하며 게으른’ 조선인들 에게 한편으로는 동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부 분의 비서구지역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지닌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알렌 역 시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의사-환자로서뿐 아니라 서구인-비서구 인, 혹은 문명인-야만인으로서의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여겼다. 때문에 그는 조선인 환자들에게는 의사로서 친절하고 정직한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문명인으로서 야만인들에게 ‘시 혜’를 베푼다는 입장에서, 의학지식 독점자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더불어 알렌은 사실상 선교사ㆍ의사로서의 활동기간보다 정치가ㆍ외교관 으로서의 활동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길지 않 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제ㆍ외교적 이권을 획 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던 권력지향적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 한 한 ‘과정’의 의미가 더 강했던 듯하다. 그래서 숙련되지 않은 조수들에게 마취를 맡겨 ‘위험’한 경우에 처했을 때에도 환자의 생명보다 병원에 대한 존 립을 먼저 걱정했고, 조선 정부에게 병원 설립의 재촉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 부하기도 했다. 알렌에게 있어서 의료행위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위한 수단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색인어: 알렌, 선교의사, 의료 활동, 신체인식, 개화기, 조선, 오리엔탈리 즘, 서양근대의학
투고일 2011. 11. 1.         심사일 2011. 11. 3.       게재확정일 2011. 12. 6.
참고문헌
<자료>
H. N. 알렌 저, 김원모 역, 『알렌의 일기』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H. N. 알렌 저,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H. N. 알렌 저, 김인수 역, 『알렌의 선교 외교편지(1884-1905)』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부설 한국교회사연구원, 2007).
J. W. 헤론 저, 김인수 역, 『헤론 의사의 선교편지』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원, 2007). 까를로 로제티 저, 서울학연구소 역, 『꼬레아 꼬레아니』 (서울: 숲과나무, 1996).
셔우드 홀 저, 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 회상』 (서울: 좋은 씨앗, 2006). 정성화·로버트 네프, 『서양인의 조선살이』 (서울: 푸른역사, 2008). 제임스 게일 저, 장문평 역, 『코리언 스케치』 (서울: 현암사, 1971). 조지 길모어 저, 신복룡 역, 『서울풍물지』 (서울: 집문당, 1999).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연구논저>
B. S. 터너 저, 임인숙 역, 『몸과 사회』 (서울: 몸과마음사, 2002).
김윤성, 「개화기 개신교 의료선교와 몸에 대한 인식틀의 ‘근대적’ 전환」,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1994.
김일순, 「제중원에서의 초기 의학교육(1885-1908)」, 『연세의사학』 2-2, 1998. 김종갑,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서울: 나남, 2008).
다비드 르 브르통 저, 홍성민 역, 『근대성과 육체의 정치학』 (서울: 동문선, 2003).
문정난, 「한말 한미관계에 대한 일고찰: 알렌의 이권활동을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학 위논문, 1993.
미셸 푸코 저, 홍성민 역, 『임상의학의 탄생』 (서울: 이매진, 2006). 민경배, 『알렌의 선교와 근대한미외교』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박승희, 「근대 초기 매체의 세계 인식과 문학사」, 『한국민족문학』 53, 2008.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연세대 출판부, 1979). 손정숙, 「한국 근대 주한 미국공사 연구(1883-1905)」, 이화여대 박사논문, 2004.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서울: 역사비평사, 2004). 신재의, 「알렌의 의료활동과 제중원의 설립」, 『연세의사학』 8-1, 2004. 에드워드 W. 사이드 저,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서울: 교보문고, 2000). 여인석, 「한말과 일제 시기 선교의사들의 전통의학 인식과 연구」, 『의사학』 15-1, 2006. 여인석, 「한말과 식민지 시기 서양의학의 한의학 인식과 수용」, 『의사학』 16-2, 2007. 윤희창, 「알렌의 의료선교에 관한 연구: 제중원을 중심으로」, 장신대 석사학위논문, 2009. 이기원, 『제중원』 (서울: 삼성출판사, 2009). 이만열, 『한국 기독교 의료사』 (서울: 아카넷, 2003). 이방원, 「보구여관의 설립과 활동」, 『의사학』 17-1, 2008.
이승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유교담론의 지형학-근대 이후 유교 담론에 관한 정치 철학적 고찰』 (서울: 푸른숲, 2004).
이영아, 『육체의 탄생』 (서울: 민음사, 2008).
이영아, 「1910년대 조선인의 타자의 몸에 대한 시선 고찰―잡지 <청춘>, <학지광>을 중심 으로」, 『한국문화』 49, 2010a.
이영아,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인종적 특질 연구-새비지 랜도어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중심으로」, 『호모 미그란스』 3, 2010b.
조영렬, 「재한선교사와 한국독립운동」, 『한국기독교사연구회소식』 29, 1990.
조이제, 「감리교의 서울 지역 초기 의료 선교」, 『한국 기독교와 초기 의료선교』 (서울: 한국 기독교역사문화연구소, 2007).
조형근, 「일제의 공식의료와 개신교 선교의료간 헤게모니 경쟁과 그 사회적 효과」, 『사회 와 역사』 82, 2009.
존 퓰츠 저, 박주석 역, 『사진에 나타난 몸』 (서울: 예경, 2000). 최근덕, 「죽음의 사상」, 『한국 유학사상 연구』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2). 콜린고든 저, 홍성민 역, 『권력과 지식: 미셸 푸코와의 대담』 (서울: 나남, 1995). 



-Abstract-

AStudyonHoraceN.Allen'sMedicine andRecognitionofKoreanBody
LEE Young Ah*


Je Jung Won(濟衆院) was the first modern-style Government hospital built by the Korean King Ko-Jong(高宗) in April 1885, and it was the medical missionary Horace Newton Allen(1858~1932) who made one of the greatest contribution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hospital. 
Allen was an American missionary. He graduated from Ohio Wesleyan University with a degree in theology in 1881, and completed one-yearcourse at Miami Medical College. In Korea and America he worked as a physician, a missionary, an American diplomatic minister to Korea and a Korean minister's secretary to America. While acting as a mediator between Korea and America, he knew and recorded the domestic and foreign situation of Korea during Gaehwagi(開化期 :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Thus to study him is to understand Korea's Gaehwagi as well as to research American medical missionaries.
During his stay in Korea(1884~1905), Allen steadily wrote diaries and letters about Korean politics, diplomacy, society, culture, and medicine. Thus his public/private record through diaries and letters(the quantity of these materials amounts to several thousands) supplements the Korean 
 
*  Bangmok College of General studies in Myongji Univ., Namgajwa 2-dong, Seodaemungu, Seoul, Korea, (120-728) 
Tel: 82-2-300-0878 / E-mail: coolya112@naver.com
early modern era's historical record. However, until now these materials have received little scholarly attention from researchers except for a few historians of missionary work between Korea and America, or of Korean modern medicine. I intended to use these materials to suggest a new perspective on the study of Korean Gaehwagi.
Allen, along with John W. Heron, who came to Seoul on June 21st 1885, treated about 10,460 Korean patients in the first year of the opening of JeJungWon. They made "the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This report explained how Allen and Heron regarded and treated Korean patients.
Allen's diaries, letters and other writings offer a realistic view of how the western people actually recognized the Korean people at that time. As a western doctor, Allen had an ambivalent attitude toward Korean medical concepts and systems. On the one hand, he thought that medical idea, some food and drug of Korean is valuable.
He said that the native Korea faculty had some good ideas with regards to treatment. And he held Korean rice, ginseng, and so on in high regard. However, he did not rate Korean acupuncture and Korean traditional ointment at all.
In addition, he sometimes cured Korean patients dangerously and with imprudence. The amputation of patients' body, no matter how little, must ask the permission of the patients themselves. Especially, the sense of Korean filial duty(孝) couldn't accept amputation of body at those times. The artificial change of body meant to hurt parents' body, because at those times Korean people thought that my body was my parent's possession. But Allen did it without enough explanation or persuasion. Moreover he didn't feel guilty for the behavior at all. Besides, he seemed to be proud of it in the above mention. Such careless or unethical behavior cannot be excused. 
On the other hand, he had made mistakes in treatment according to his record. He pulled out some healthy teeth of patients who had a bad toothache. But he didn't explain nor apologize the mistake. Besides, he refused treatment of patients until the hospital would be opened in order to push Korean government to prepare hospital quickly.
Why or how did he do that? The first answer available to the question, he might be so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and skill that he didn't feel the need to ask the patients' thought and will. However, as stated above, his medical study was just one year. And he worried about his inexperience of surgery.
Thus the first assumption seems to be false. He wasn't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The fact that nevertheless Allen treated Korean patients at his will, is still blamable. 
The second assumption is that he regarded western modern medicine as the only correct and proper approach. He didn't have many experiences, but his west modern medicine made him proud of its achievement. After middle 19th century of modern times, Micheal Foucault said at The Birth of Clinics, western modern medicine believed itself scientific on the ground that west modern medicine could have pathology and surgery. Allen might also trust the scientific ability of western modern medicine. So he might think that he didn't need to explain 'modern and scientific' medicine of West to people in 'premodern and non-scientific' medicine of Korea. 
The third answer is his 'Orientalism'. He thought that Koreans were dirty, lazy, and barbarous and, therefore, he mad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Caucasian and Korean. He set his affection on 'Cho-Seon(朝鮮)' and made efforts to cure Korean patients and establish the first western Government hospital in Korea. However he, as a westerner, could not free himself from ‘Orientalism’ and ‘Imperialism’. Thus, he might ride so roughshod Korean patients. 
In fact the ‘Orientalism’ was not only Allen’s thought. Many western visitors thought Korean as an ‘Orient’. The West regarded themselves as civilized and the East as uncivilized or barbarous, therefore the West thought that the East should be modernized with the help of the West. This thought rationalized their imperialism and colonialism toward the East. 
In addition, he seemed to have some ambition in politics and diplomatics. He wanted to be a high-ranking official, so his goal of his life was political or economical power rather than medical missionary.
Keywords :  Horace N. Allen, medicine, missionary, body, Cho-Seon(朝鮮: Korea), Gaehwagi(開化期 : about the year 1876-1910, that is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Orientalism, western modern medicine
 

2021/07/22

정경옥 - 나무위키 1903 감리교 목사 신학자

정경옥 - 나무위키
정경옥
최근 수정 시각: 2020-01-08 14:35:29


분류 감리회진도군 출신 인물1903년 출생1945년 사망
정경옥(鄭景玉, 1903. 5. 24~1945. 4. 1)[1] 은 감리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전남 진도군 진도면[2] 교동리 123번지에서 출생했다. 진도소학교를 거쳐 서울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며 기독교에 심취하게 된다. 출옥 후 상경하여 서울YMCA 영어과를 수료한 후, 1923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同志士大学)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2학기 개강을 앞둔 그 해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사건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편입하고 1927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27년 9월 도미,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 있는 개렛(Garrett)신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미국 사상계를 휩쓸던 자유주의 신학자 롤(H.F. Roll)의 지도를 받아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석사(B.D) 학위를 받았다. 1929년 9월 계속하여 같은 지역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로 1931년 5월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계속하여 박사 과정을 밟으려 했으나, 모교의 부름을 받고 1931년 귀국하여 협성신학교 조직신학 전임강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한편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3년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정교수가 되었으며, 1937년까지 협성신학교[3] 교수로 재직하면서 명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았다.[4]

그는 교수 취임 이후 강의에도 주력했거니와 집필에도 힘을 기울였다. 협성신학교 교지인 〈신학세계〉의 주간을 맡으면서 1932년에서 1936년에 걸친 5년간, 무려 60여 편의 신학논문을 발표했고 한 권의 저서(《기독교의 원리》, 1935)를 내놓았다. 이 외에도 YMCA에서 발간한 〈청년〉지, 류형기 박사가 주간으로 펴낸 〈신생〉지에 여러 논문과 일기, 수상, 설교 등을 발표했다. 

한편 열정적인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된 그는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2년간 고향인 진도로 내려가 요양을 하였다. 이 기간중 그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설교집 《그는 이렇게 살았다》(1938)와 조직신학 개론서인 《기독교신학개론》(1939)을 집필하였다. 

요양을 마친 후 1939년 모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가, 1941년 3월 만주로 건너가 사평가(四平街)신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던 중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요양하게 되었다. 1942년 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이후 한국인 친미파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친미파로 지목되어 8개월간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여기서 일제는 그에게 일본적 기독교의 논리적 구성을 강요하였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논리와 문장이 유독 어려운 "일본적 기독교론"을 쓰게 된다(이 논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국 일본적 기독교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천배, "고 정경옥 교수의 편모", 〈기독교사상〉, 1958. 5). 

이 공로로 풀려난 그는 1943년 2월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특히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토"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자기 방에서 10명 남짓한 남녀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는 1945년 3월, 두 차례나 수술받은 복막염이 악화되어, "곧 날이 밝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그 해 4월 1일, 불과 광복을 4개월여 앞두고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42세,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그의 천재적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도 언명하였듯이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의 주된 저서에서 즐겨 인용한 신학자들은 역시 슐라이어마허, 리츨, 바르트 등이다. 특히 "위기의 신학"(1932), "위기 신학 사상의 연구"(1936) 등에서 바르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그는 한편 성서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당시 고도로 발전되었던 역사적, 문학적 비판연구를 채택했다. M. 디벨리우스와 R. 불트만의 형식 비판연구를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한 이도 바로 정경옥이었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고 역사나 과학적 지식을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안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성서가 인간의 책이요, 종교문학에 속하는 것이라 했다. 즉 한 민족과 개인이 하나님을 찾고 이에 복종하는 생활의 경험을 역사, 율법, 편지, 시가 등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성서이기에, 마땅히 문학적, 역사적 연구 등을 통해 그 진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어떤 통일된 신학체계나 학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항상 새롭게 형성해 가는 것이 개신교의 원리라고 보는 신학적 경향이다. 이런 점에서 정경옥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또한 그의 신학적 공헌은 무엇보다도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을 정립했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의 원리》 서론의 요점만을 간추려 보면, 그는 먼저 조선 감리교회의 교리적 특질을 두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하나는 종교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선교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다. 전자를 경건주의라 한다면 후자는 복음주의다." 또한 "교리는 구원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아니한다." 즉 감리교 교리적 선언은 우리가 믿는 바를 선언한 것이요, 결코 우리 교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교리적 경험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함과 그를 따르려는 결심뿐이다." 누구든지 경건한 삶을 영위하는 이상 "개인 신자의 충분한 신앙 자유를 옳게 인정한다." 

-저서:《기독교의 원리》, 감리교신학교, 1935;《그는 이렇게 살았다》, 평양애린원, 1938;《기독교신학개론》, 감리교신학교, 1939;《감리교교리》,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1939;《신비경험의 가치》, 삼각산기도원, 1939.

[1] 감리교회 역사 자료 검색 서비스
[2] 현 진도읍
[3] 현 감리교신학대학교이다. 협성대학교가 아니다!
[4] 그가 기독론을 강의할 때에 학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2021/07/02

조선 실학자 안정복 기독교 비판론, 안정복 위키백과

조선 실학자 안정복 기독교 비판론 : 네이버 블로그


조선 실학자 안정복 기독교 비판론


한강수2017

2017. 12. 28. 



인터넷에서 본 글중 인상깊어서 가져왔다.
안정복이 진짜 이렇게 정리했는지 아니면 할일없는 고시생이 올린 인터넷 짜깁기한 글인지 모르겠으나
위키를 찾아보니 연관성은 있는듯하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C%A0%95%EB%B3%B5
안정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정복 안정복 (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 )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 성리학자 ,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광주 (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 (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 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 성호사설 》을 해석, 일부 수정한 《 성호사설유선 》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 라는 단어
ko.wikipedia.org



이글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구원,기복을 추구하는 한국의 각종 종교세태와 일맥상통한다.
한국의 종교(불교도 마찬가지만 특히 메인권력축인 기독교)는 유교적 무속신앙과 지극히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복신앙 그리고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종교지도자 우상시스템이 전형적이다.
종교의 역할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한국에서 종교는 폐쇄커뮤니티와 자기만족 그것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기교회를 바꾸지 못한다.
종교가 아니라서 피라미드시스템 조직탈퇴가 불가하다.
나도 지난시절 종교활동을 경험해봤지만 도시화된 지금의 한국종교시스템은 사적부조클럽 그것외에 의미가 없다.
관혼상제의 부조, 가벼운 인적교류 오직 그목적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포스트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불편할수도 있겠다.
이런 시선도 있다는것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안정복의 기독교 비판
1. 사람의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원수로 간주한다. 하지만 육체는 부모로부터 받은 고귀한 것으로 이 것은 모든 도덕의 근본인 효를 모독하는 것이다.
2.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묵자의 겸애설보다 더 과격하고 현실성없는 이야기다.
3. 천국, 지옥, 영혼불멸 등 불확실한 것들을 교리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
살아있을 때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은 어찌알까? 초월적 환상에 빠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4. 인간을 도덕적으로 하기 위해 마귀의 기만과 유혹을 주의하라고 한다.
하지만 본적이 없는 마귀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하게 만든다. 이는 현세의 책임을 경시하도록 할 뿐이다.
5. 창조설 역시 비합리적이다. 천지개벽에 인격체 조물주가 끼어질 여지가 전혀 없다.
6.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도 틀리다. 신은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7. 사후세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다. 인간이 전력을 기울여야할 일은 현세에 있다.
8. 구원을 도적적 의무보다 상위에 둠으로써 인간공동체에서의 근본을 거부한다.
9. 예수가 아담의 자손인 이상 예수는 인간이다.
10. 아담과 이브의 원죄도 모순이다. 어떻게 신은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해놓고, 그들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는가?
그 것은 스승의 태도가 아니다. 가난, 질병, 죽음이 원죄때문이라고 가르치리는 것은 가소로운 모순이다.
11. 왜 인간은 죽은 후 보상을 받기 위해서 행동해야하는가?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일뿐이다.
죽은 후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은 현세의 고뇌에서 해탈하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당면한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며, 근원적으로 보면 이기적인 행위이다.
12. 인간이 구원을 바라는 이기심으로써 도덕을 행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바른 세상의 도덕적 토대를 이룰 수 없다.
13. 세례, 죄의 고백, 공개 기도 등의 행위는 고대 신앙에 불과하다.




안정복 기독교 비판


실학성리학 사이를 오가던 그는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다. 그는 천주교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고, 성호학파나 그밖의 남인실학, 성리학자들 중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공격을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실에서의 삶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사후 세계를 말하며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는 것이다. 1785년의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권철신 등에게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양명학의 이단성과 불확실성을 경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 교리의 이단성과 반사회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설득,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에서 그는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의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남인


===

안정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정복
安鼎福
조선국 중추원 통정대부 겸 첨지중추부사
임기1772년 2월 1일 ~ 1773년 3월 31일
군주조선 영조 이금
조선국 중추원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
임기1773년 3월 31일 ~ 1778년 9월 30일
군주조선 영조 이금
조선 정조 이산
섭정왕세손 이산
도승지 홍국영
신상정보
출생일1712년
출생지조선 충청도 제천
사망일1791년 7월 20일 (향년 80세)
사망지조선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덕곡리에서 노환으로 병사
본관광주(廣州)
학력한학 수학
경력문신, 정치인, 실학자, 성리학자, 철학자
정당남인 후예 세력
자녀아들 안경증
딸 안씨 부인(권일신의 부인)
친인척권일신(사위)
별명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종교유교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은 조선국 중추원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실학자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경기도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주요 이력[편집]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역사가이고 실학자이지만 성리학자이기도 하여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문을 해석,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775년 세손익위사 익찬으로 세손(정조)를 보도할 때는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를 비교하는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자득하였고, 이황이 선현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하기도 했다.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받았고, 정조 즉위 후 남인을 중용하였으나 스스로 관직을 사양하였다. 그 뒤 특명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작되었다. 1790년 이후 천주교가 보급되면서 남인내에서도 천주교도가 퍼지자,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였다. 《동사강목》과 계갑일록의 저자이자 발해사를 한국사 일부로 보았다. 사후 천주교 비판의 공로로 자헌대부 광성군(廣成君)에 추증되었다.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 중의 한 사람이다. 제천 태생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712년 예조참의 안서우(安瑞雨)의 손자이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안극(安極)과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후손 이익령(李益齡)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717년(숙종 43) 외할머니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전라남도 영광군 월산(月山)의 농장에 내려가 생활하다가 1719년 할아버지 안서우가 한성부에서 벼슬을 하게 됨에 따라,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으로 귀경하였다.

그의 가계는 당시 세력을 잃은 남인으로 기호(畿湖) 간에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생활하던 광주 안씨였다. 고조부 안시성(安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안신행(安信行)은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으며 할아버지 안서우의 대에 예조참의까지 역임했으나 경신대출척과 갑술옥사로 몰락하고 말았다. 아버지 안극은 종2품의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르렀지만 이는 명예직이었다.

어머니 전주이씨는 학문적 소양이 있는 여성이었는데, 후일 안정복은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가 역사에 대한 식견이 깊었다는 회고를 남겼다.

유년기와 소년기[편집]

유년 시절에는 하급 관리이던 조부를 따라서 여러 곳에서 보냈고,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 복거하던 그의 일가는 1735년 할아버지 안서우가 사망하자 1736년(영조 12) 25세 때 선영이 있는 광주군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에 정착하였다. 그 뒤 중년 이후에는 경기도 광주 덕곡(德谷)에 정착하여 순암(順菴)이라는 서실을 짓고 일생을 마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 암기력이 뛰어났는데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아버지 안극의 입지에 따라 오랜 동안 정주지가 일정하지도 않은 환경이었다. 10세 때 ≪ 소학 ≫ 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학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학(經學)은 물론, 역사·천문·지리·의약 등에 걸쳐 폭넓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러나 갑술환국과 1701년 장희빈의 옥사로 남인은 몰락하였으며, 청소년기 시절이던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 대다수가 중앙정계에서 숙청되었으므로, 그는 일찍이 관직을 단념하고 과거에는 단 한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는데 이는 그의 활동에 제약을 주었다. 또한 관직 욕심이 없던 아버지 덕에 가세는 빈한하여 한때 종답(宗沓)을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하였고, 결국 종중의 종답을 되찾게 된다.

학문연구와 저술, 연구 활동[편집]

실학, 성리학 수학[편집]

남인 성리학의 종통을 이은 인물이며 실학의 대가이기도 한 성호 이익을 찾아가 글과 학문을 배웠다. 이익은 실학자이면서도 성리학지식도 해박하였는데, 허목으로부터 이어지는 남인 학통의 종주로 평가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남인계 성리학을 수학한다.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신후담, 윤동규 (尹東奎), 이병휴(李秉休) 등을 만나 교분을 쌓기도 했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학문에 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다시 경세치용학파의 대종(大宗)인 성호 이익이 광주에 살고 있어서 안정복은 성호의 문하에 갈 수 있었고, 따라서 일생 동안 성호에게 사사하면서 그의 학풍을 계승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주자의 학설을 신봉하면서 그것에 의한 실천궁행에 힘쓸 뿐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를 즐기지 않아 학문적 태도에 있어서 사제간에 대비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관 및 사론은 성호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전반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 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1]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부터는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서 진력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현장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변복하고 민심의 동태를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광주 덕안에 순암(順菴)이라는 서실을 짓고 문하생들을 양성한다. 그러나 많이 양성하지 못했고, 이기양(李基讓), 이가환(李家煥), 황덕일 (黃德壹), 황덕길 (黃德吉) 등이 배출되었다. 그 중 이가환[2]과 권철신(權哲身)과 권일신 형제가 그의 문하에서 이름이 있었는데 권일신은 후에 그의 사위가 된다.

저술 활동[편집]

1737년 요,순,우 삼대 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 治統圖≫ 를 저술하였고, 그해 사서 육경(四書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 道統圖≫ 를 저술, 출간하였다. 1738년에는 ≪치현보 治縣譜≫ 를 저술했으며, 이어 향약인 ≪향사법 鄕社法≫ 을 지었다.

1740년 초기 학문적 완성인 ≪하학지남 下學持南≫ 상 · 하권을 저술하였다. 한편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 井田說≫ 을 내 놓았고,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 內範≫ 을 짓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유형원(柳馨遠)의 저서 ≪반계수록 磻溪隨錄≫ 을 입수하였다. 이는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자들과 두루 교류하여 1775년에는 그들과 함께 유형원의 연보와 행장인 〈반계연보 磻溪年譜〉를 찬하였다.

동사강목 집필[편집]

그는 오랫동안 《동사강목》을 편찬하며 스승인 성호 이익의 지도와 감수를 받았다. 스승인 이익은 거침없이 조언하는 한편으로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절단이 있으면 지인들을 통해 자료를 구하기도 했고, 주변의 지인과 측근, 다른 문인들을 통해서도 자료들을 입수하여 그에게 내주곤 하였다.

그는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 이외에도 다양한 독서를 탐독하였는데, 음양(陰陽), 성력(星曆), 의약(醫藥), 복서 (卜筮), 무속 등에도 두루 지식이 있었고, 손자(孫子), 오자(吳子) 등의 병서, 한비자이사상앙 등의 법가, 불교, 노자(老子) 등의 노장 사상, 그리고 패승(稗乘), 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책을 탐독하였다. 그는 또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사주나 관상도 더러 봐주었는데, 이 때문에 방술가(方術家)라는 비칭을 듣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중단하라는 경고와 이름을 바꾸라는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

동사강목》 등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신라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강조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경고하였다. 성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 가필 하고 요령 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였다.

관료 생활[편집]

그는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연구를 계속했고, 후학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구에 전력하였으므로 문하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뒤 계속 출사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무시하던 중 1749년 결국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1750년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고, 1752년에는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1753년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건강 악화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하여 1753년 퇴계 이황의 학문적 치적을 설명한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 道東錄≫ 을 ≪이자수어 李子粹語≫ 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1756년 향약인 〈이리동약 二里洞約〉 을 짓고, 1757년 향약을 바탕으로 ≪임관정요 臨官政要≫ 를 저술하였다. 이후 복직하여 사헌부감찰, 세자익위사익찬(世自翊衛司翊贊) 등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에 배치되었다.

1767년에는 ≪열조통기 列朝通紀≫ 를 간행하였다. 세자시강원에 재직 중인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이관(李灌)·한용화(韓用和)·박사형(朴師亨)·이겸진(李謙鎭)·심정진(沈定鎭)·임정주(任靖周) 등과 함께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장구(章句)를 정하고 의심스런 뜻을 해석하여 풀이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세손 사부와 지방관[편집]

1772년 세손익위사익찬(翊贊), 위솔(衛率)이 되어 세손(뒷날의 정조)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775년 세손익위사 위솔로 세손(정조)를 보도할 때는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를 비교하는 질문에 이이는 스스로 자득하였고, 이황이 선현의 뜻을 계승하였으니 이황을 정통으로 본다고 평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퇴계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주는 근본이 있으므로 당연히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해 65세 때에 외직인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갔다. 3년 뒤 지방관의 임기를 마친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다시 부름을 받아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의빈부도사(義貧府都事),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라는 청사(廳舍)를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 뒤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제수되었고, 이듬해 다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8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학문연구와 할 수신과 제가, 치인 등 선비로서 갖추어야 몸가짐을 게을리하지 않고 늘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공격[편집]

성리학이나 실학 외에도 도교와 노장 사상까지도 두루 수용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만큼은 이단사상(異端思想)으로 간주하여 배척에 앞장섰다. 양반과 상민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을 들먹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이 그가 천주교를 비난하는 이유였다. 천주교의 전파가 평민과 노비 외에도 사대부가의 여성들에게까지 전파되는 등 사회문제가 되자 그는 1785년(정조 9)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 을 저술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에서 그는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 비판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이 천주교에 호의를 보이자 이들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내 천주교에 빠지지 말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양반 상민의 계급을 부정하는 것은 곧 일체의 반질서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실학사상은 인정되지 않았으나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만큼은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벽파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만년[편집]

1776년 정조 즉위 후 남인을 중용하던 정책을 펴던 정조의 배려로 입궐하여 세상을 태평하게 하는 것은 경세에 있다고 한 뒤 물러났다. 이후 정조는 그에게 출사의 뜻을 전했으나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겠다며 모두 사양하였다. 1784년 정조의 명령으로 서용의 령이 내려졌고[3], 그 뒤 특별 명령으로 광성군(廣成君)에 봉작되었다.

그 뒤 천주교가 보급되면서 남인 내에 천주교 신봉자들이 나타나자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였다. 1790년 이후 천주교가 확산되자 사후 세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며 비판한다. 1791년 7월 20일 광주 덕곡 자택에서 조용히 사망하니 향년 80세였다.

저서로는 《순암집》, 《성호사설유선》, 《상헌수필》, 《홍범연의》, 《가례집해》, 《천학고》, 《천학문답》, 《희현록》, 소설 《여용국전》(女容國傳) 등이 있다.

사후[편집]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특별히 부의를 추가하고 사람을 보내 조문하였다.[4] 그는 천주교에 비판적이었던 까닭에 1791년의 윤지충권상연의 위패 소각 사건 때와 1801년 남인 천주교신봉자들을 처형할 때 화를 면했다.

1791년에는 이승훈의 사건에 연루되어 사위 권일신(權日身)이 공초를 받기도 했다.[5]

시골에서 올라올 때 동생이 중도에 마중 나와서 대략 홍낙안과 목만중 두 사람의 일을 알려주어 이로써 알았습니다만, 저와 저의 장인인 고 동지중추부사 안정복(安鼎福)이 서로 사이가 어긋났다는 말은 모두 시속의 부박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천주문답(天主問答)》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장인이 분명히 이 책을 지었으나, 그와 더불어 강론할 때 입론(立論)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 받은 일이 있으니, 제가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자식이 외조부의 상을 당했을 때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그때 마침 제가 중병에 걸려 사경(死境)에 처했기 때문에, 힘을 다해 구호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 가서 참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상 때에는 두 아들이 모두 가서 호상(護喪)하였고, 또 장사지낸 뒤에도 계속 왕래를 하였으니, 이로써 애초부터 서로 어긋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5]

권일신은 이승훈에 관련되어 일곱 번의 공초, 형문을 당했다. 그 뒤 사형은 면하고 위리 안치(圍籬安置)된다. 그의 장례식에 사위 권일신(權日身)과 외손자들이 방문하지 않아 시중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 광성군에 추증되었다.

저서 및 작품[편집]

저서[편집]

  • 《순암집》, 《상헌수필》, 《홍범연의》, 《희현록》, 《하학지남 (下學指南)》,《임관정요 (臨官政要)》, 《잡동산이 (雜同散異》,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등
  • 역사서 : 《동사강목 (東史綱目)》, 《열조통기 (列朝通紀)》, 《계갑일록 (癸甲日錄)》
  • 예론서 : 《가례집해 (家禮集解)》
  • 천주교 비판서 : 《천학고》, 《천학문답 (天學問答)》

소설[편집]

  • 《여용국전》(女容國傳)

작품[편집]

  • 반계유형원행장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 안서우(安瑞羽)
    • 아버지 : 안극(安極)
    • 어머니 : 이씨
      • 장남 : 안경증(安景曾)
        • 손자 : 안철중(安喆重)
      • 장녀 : 안씨
      • 사위 : 권일신(權日身)

사상, 학문적 치적[편집]

경종 1년(1721)에 학문의 길에 들어섰고, 35세 때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 진력하였다. 영조 25년(1749)에 만령전(萬寧殿) 참봉(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65세 때에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정립을 모색하여 갔다. 이러한 사상적 성과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서 집대성되었다.

스승 이익의 문하를 나선 뒤에도 오래도록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星湖學派)와 성호학파 이외의 남인실학자, 남인 성리학자들과도 두루 교류하고 어울리면서 토론하고 서신을 주고받는 등 학문적 교환을 하며 자신의 사상적 영역을 넓혀나갔으며, 교육, 학문연구 외에도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 정립을 해나가게 된다. ≪하학지남≫ 은 주자의 ≪소학≫ 을 모방한 것으로 저술의 기본이념은 ‘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 이라고 밝히면서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의 이기논쟁을 직 · 간접으로 반박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 외에도 《하학지남 (下學指南)》,《임관정요 (臨官政要)》, 《가례집해 (家禮集解)》, 《잡동산이 (雜同散異》,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역사서인 《동사강목 (東史綱目)》, 《열조통기 (列朝通紀)》, 《계갑일록 (癸甲日錄)》 등을 남겼다. 동사강목, 계갑일록 외에도 《잡동산이 (雜同散異》,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책들로 간주된다.

기독교 비판[편집]

실학과 성리학 사이를 오가던 그는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다. 그는 천주교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고, 성호학파나 그밖의 남인실학, 성리학자들 중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공격을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실에서의 삶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사후 세계를 말하며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는 것이다. 1785년의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권철신 등에게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양명학의 이단성과 불확실성을 경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 교리의 이단성과 반사회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설득,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천학고 (天學考)》·《천학문답 (天學問答)》에서 그는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의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남인을 떠나 안정복과 같은 전통적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서학(西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저술이기도 하다.

성리학적 지식[편집]

그는 원시 유교와 주자학의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고, 해석, 번역에도 능하였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세자시강원의 궁료로 있으면서 이관(李灌)·한용화·박사형·이겸진·심정진·임정주 등과 함께 영조의 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받아 그 장구(章句)를 정하고 의심스런 뜻을 해석하며 그 언독(諺讀)을 기록하고 내용을 해석하는데 참여하였다.[6]

기타[편집]

그는 발해사를 최초로 한국의 역사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유득공의 발해고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발해-고려만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신라 역시 정통으로 보는 등의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저작 중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훗날의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저서 중 《임관정요》는 후학인 정약용(丁若鏞)의 저서 《목민심서 (牧民心書)》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각주[편집]

  1.  다음 글로벌 세계대백과. 근대사회의 태동-문화의 새 기운
  2.  채제공 사후 남인붕당에서 재상감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3.  정조실록 18권, 정조 8년(1784 갑진 / 청 건륭(乾隆) 49년) 8월 2일(을유) 4번째기사 "상전에 대한 하교"
  4.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7월 23일(병신) 2번째기사 "광성군 안정복에게 부의를 추가할 것을 명하다"
  5. ↑ 이동: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11월 8일(기묘) 6번째기사 "이승훈을 삭직하고 권일신을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다"
  6.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5월 3일(임인) 5번째기사 "《주자대전》 등의 언독에 참여했던 이술원·한용화를 의망해들이게 하다"


---

안정복의 천주교 비판

이 사료는 조선 후기 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시문집 『순암집(順菴集)』권17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문답(天學問答)」이다. 『순암집』은 27권 연보 합 15책의 목활자본으로 제자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이 편집하고 뒤에 안경위(安景褘)가 잡저의 편목을 수정했으며, 5세손 안종엽(安鍾曄)이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간행하였다.

안정복은 남인 계열로 이익(李瀷, 1681~1763)을 스승으로 삼고 여러 학문을 섭렵했다. 그중 특히 경학과 사학에 뛰어났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주자학적인 경학설에 따라 만사를 판단하면서도 경학(經學)은 경세적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또 경학 해석에서는 이황(李滉, 1501~1570)이익은 물론 주자(朱子, 1130~1200)의 해석까지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있었다. 이익이 죽은 뒤부터 그는 자신이 이익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료와 후학들의 행동에 관심을 표방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정치권은 정적인 노론의 전권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관의 쇠퇴를 드러내면서 사상적 갈등을 보였다.

이에 그는 이단 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 참여를 통해 행동으로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정조 9년)의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의 저술은 천주교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안정복은 이벽(李檗, 1754~1785)⋅권철신(權哲身, 1736~1801)⋅정약전(丁若銓, 1758~1816)⋅정약종(丁若鍾, 1760~1801) 등 당시의 남인 소장학자들이 유교의 정학을 하였으면서도 사학(邪學)인 서학서의 한역본을 가까이하여 사교에 빠져듦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들의 미혹을 깨우치고자 『천학고』와 함께 『천학문답』을 편술한다고 하였다.

총 31항에 걸쳐 문답 형식으로 천주학이 사학임을 주장하는 척사론을 전개하고 있다. 즉 천주교는 현실을 문제 삼지 않고 오로지 내세의 천당 지옥설을 믿어 사람을 황당한 지경에 빠뜨리린다고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지옥의 고통을 면하고자 자기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함이 무당이나 불가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면서 천주교의 망발됨을 가려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천학의 근본설인 당옥설, 현세론, 삼구설, 원조론, 야소 구속론, 영혼론 등에 대해 유교의 세계관⋅인생관에 입각해 일일이 논박하였다. 그리고 천학을 하는 자들이 조상 제사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은 천주상을 걸어 놓고 기축(祈祝)하고 있음은 결국 천학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학인 까닭이라고 결론지음과 동시에, 유학만이 정학임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벽위사상(闢衛思想)은 그 뒤에 쏟아져 나오는 유가적 척사론의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천주교 박해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