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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7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 네이버 블로그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 네이버 블로그

[공지]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시원 김흡영 교수
도의 신학 서설
・ 2021. 7. 17. 16:59


도-그리스도론에 대한 한국적 전거들
그렇다면 도란 근본 은유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사실 도의 해석학
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시작부터 도의 관점을 통해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리스도를 이해한 것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로고스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한 것처럼 지극히 타당하고, 그와
할 수 있다. 한국 신학 사상사에서 도를 근본 은유로 적용한 대표적 사례로서 이벽, 유영모 그리고 이정용의 그
다.<1>
1) 이벽(李檗, 1754-1786):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교차점으로서 그리스도
노자는 궁극적인 도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넘어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언어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
삶의 방법(德)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도는 단지 형언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혁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인 방식들까지도 제시하는 자기발견적인 은유인 것이다. 동아시아
반적으로 도교와 유교라는 상호보완적인 대립쌍(complementary opposites)에 의해 인식되었다. 도가전통
(apophatic) 차원, 곧 하늘의 길(天道)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유가전통은 인간 삶의 언어적(kataphatic) 측
욱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당대에 탁월한 유학자이면서 한국 최초의 신학자라 할 수 있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영적 교부라는 광암 이벽(1
인도의 일치와 합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도와
인성이 합일한 최상의 현자로 보았다.
2)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없이 계신 님”으로서 그리스도
동아시아의 해석학적 지평의 깊은 심장부에서부터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단초를 제시한 이는 다석(多夕) 유영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유교와 불교에 통달했고 선도의 수행자였다.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太極
而太極)’, 즉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절대무(空虛)와 우주생성적 근원이라는 상호보
적 대립쌍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도를 최상의 우주생성적 역설이라고 보는 신유교적 관점에서, 다석은 아주
스도론을 구상했다. “십자가를 무극이 태극이라고 본다. 동양의 우주관이다. 동양의 우주관을 몸소 보여 주신
성인(殺身成仁)이었다. 자기를 제물로 바쳐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가 “내
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넘치는(父子有親
( )로서 드러난다. 다석은 십자가를 “꽃피”라고 했다. ‘꽃피’인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을 드러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라는 꽃이 피를 흘리며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주의 영광스런 만개를



이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가 “내
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넘치는(父子有親
( )로서 드러난다. 다석은 십자가를 “꽃피”라고 했다. ‘꽃피’인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을 드러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라는 꽃이 피를 흘리며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주의 영광스런 만개를
있어서는 “우주 궤도의 돌진이 십자가요 우주 궤도를 도는 것이 부활이요 세상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우편에
이러한 없음(無)과 있음(有), 비존재와 존재라는 최고의 역설적 시각에서 다석은 특유한 한국적 영성으로서 기
apophatic) 도 그리스도론을 구상했다. 그는 예수를 원초적 호흡, 즉 “숨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예수는 “계시
는” 분이다. 다석은 “없이 계신 님”이라고 하는 비존재(無極)적 존재(太極)이라는 특이한 동양적 그리스도론을
어도 (실제적 가치가) 없는 존재’, 즉 ‘존재적 비존재’라면, 예수는 ‘없어도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 곧 ‘비존
하면, 우리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면, 그리스도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3) 이정용(Jung Young Lee, 1935-1995): 역(易)의 완성으로서 그리스도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정용은 주역(周易)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동아시아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키고자 했
신학을 위한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실효성을 상실한 실체론적(substance
충분한 과정신학적(process) 패러다임(becoming)을 넘어서서 역(change)의 방식(being and becomin
임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 보여주었
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유클리드 기하학, 뉴턴 물리학 같은 희랍적 형이상학에서의 있음(substance)이
(Whitehead)의 과정 형이상학에서의 되어감(process)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변화 안에 있는 있음(bein
은 음과 양의 상호보완적 대립쌍 안에 있는 태극에 근접한다. “그러므로 역은 있었고, 있고, 있을 모든 것들의
있음과 되어감의 근원이다. 따라서 역의 신학은 있음이면서 또한 되어감인 궁극적인 것의 특징을 설명한다.”
서구적 사고방식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하는 양자택일적인 논리가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러
까지도,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모든 궁극적 문제들에 있어,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상극적인
모두를 아우르는 상생적인 양자긍정(both-and)에 있다. 이정용은 양자택일의 방식은 그릇된 것이고, 역의 “
의 올바른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했다(God as Change). “역경(易經) 속에 나타난 역은 분명히 범주화할 수 없
에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동시에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이러한 완전긍정(bo
(neither-nor)과 상호보완적이다. 최상의 역설로서, 태극은 완전한 긍정을, 무극은 완전한 부정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면서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그러나 동
않으면서도 비인격적이지 않고, 남성이 아니면서 여성도 아니며, 내재적이지 않으면서 또한 초월적이지 않다
스도는 역의 완벽한 실현으로서 파악된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속에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인성을 배제하는
음(陰)의 존재를 전제하듯이 그렇게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완전한 인성은 완전한 신성을 전제하고 있
변화와 변화함의 완전한 상호보완성 속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변화와 변화
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와 변혁의 궁극적인 현실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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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속에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인성을 배제하는
음(陰)의 존재를 전제하듯이 그렇게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완전한 인성은 완전한 신성을 전제하고 있
변화와 변화함의 완전한 상호보완성 속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변화와 변화
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와 변혁의 궁극적인 현실이다."<4>
이정용의 제안은 사실 신학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합당한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의 반서양적 수
과도했고,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지나치게 실증적인 형이상학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역이 새로운 대안
이상학이라고 주장하며 내세운 그의 ‘복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retrieval)’은 여러모로 탁월성을 가지
학의 구성을 위해 더불어 중요한 전통의 역사에 대한 진솔한 비판을 하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
서 역의 신학은 토착전통에 대해 순박하고 낭만적인 해석학을 사용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스 신학(종교신학)을 위해서는 좋은 모형이지만, 아시아 신학의 또 다른 축인 프락시스 신학(해방신학)을 위해
지 못한다. 서구 형이상학의 모순에 반대하는 열정적인 논쟁 속에서 이정용은 그의 본래의도와는 반대로 도가
있다고 하는 형이상학적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도덕경이 정의한대로, 도는 결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발견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콘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
다. 따라서 역동적인 도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맥락과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도의 해석학이란 해석자 또는
과 맞물리면서, 도의 궤적을 각성하고 창조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
진 어느 때에 어떻게 우주적인 운동 속에 적절히 참여할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요구한다는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 완전긍정과 완전부정의 그리스도
신학적 근본 은유로서 도의 탁월성은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초언어적인 도를 표현해내
적 실재를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도는 그리스
결하고 그리스도를 통전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실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탁월성도 희랍
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우주생성적인 본성을 표현해낸 것에 있다. 그것을 통해 4-5세기 교부들 은 기독교 신앙
고를 초월할 수 있게 하였 다. 우선 니케아 신조(325)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인 동시에 ‘참 인간
기 위해 양자긍정(both-and) 또는 완전긍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칼케돈 신조(451)는 그리스도의 두 본
하지도,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자부정(neither-nor) 또는 완전부정의 방식
어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인성과 신성 양자 모두에 대한 전적 긍정으로서 태극(太
부정으로서 무극(無極) 사이의 최고의 역설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인 신비를 통찰하고 표현했던
인간이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우주의 참 주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의 신학은 신-인간
---
도덕경이 정의한대로, 도는 결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발견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콘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
다. 따라서 역동적인 도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맥락과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도의 해석학이란 해석자 또는
과 맞물리면서, 도의 궤적을 각성하고 창조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
진 어느 때에 어떻게 우주적인 운동 속에 적절히 참여할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요구한다는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 완전긍정과 완전부정의 그리스도
신학적 근본 은유로서 도의 탁월성은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초언어적인 도를 표현해내
적 실재를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도는 그리스
결하고 그리스도를 통전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실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탁월성도 희랍
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우주생성적인 본성을 표현해낸 것에 있다. 그것을 통해 4-5세기 교부들 은 기독교 신앙
고를 초월할 수 있게 하였 다. 우선 니케아 신조(325)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인 동시에 ‘참 인간
기 위해 양자긍정(both-and) 또는 완전긍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칼케돈 신조(451)는 그리스도의 두 본
하지도,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자부정(neither-nor) 또는 완전부정의 방식
어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인성과 신성 양자 모두에 대한 전적 긍정으로서 태극(太
부정으로서 무극(無極) 사이의 최고의 역설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인 신비를 통찰하고 표현했던
인간이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우주의 참 주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의 신학은 신-인간다.
사실 이러한 역설적인 사유 방식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 복음서들, 그레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reopagite)와 같은 초기의 창의적인 신학자들,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와
Eckhart)와 줄리안(Julian of Norwich)과 같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콜라스(Nic
상극적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원리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바울은 성경에서 이
여 그리스도교를 설명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새번역)
새로운 태극(太極): 우주생성적 그리스도
앞에 열거한 선진들의 통찰을 기반으로 도의 신학은 도-그리스도론을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예수는 곧 도이시다. 그는 태극과 무극이 일치를 이루는 지고한 역설의 완성이며, 원초적 숨님이며, 비존재적
---
새로운 태극(太極): 우주생성적 그리스도
앞에 열거한 선진들의 통찰을 기반으로 도의 신학은 도-그리스도론을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예수는 곧 도이시다. 그는 태극과 무극이 일치를 이루는 지고한 역설의 완성이며, 원초적 숨님이며, 비존재적
이며,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완전한 비움(kenosis 혹은 sunyata)이다. 십자가는 우주변화의 길(道)로의 돌진
간-우주적 궤적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변혁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우주의 길을 변화시키는 우주생
것은 도의 옛 형이상학적 세계, 즉 태극과 이(理)에 존재하던 역사적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열어젖히는 사건을
벽(開闢)을 언표한다. 옛 태극의 우주생성은 무극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새로운 태극으로서, 다시 말해 지
적 운동으로서 부활했다. 그것은 그저 교리적인 혁명(logos)만도 아니요, 단순히 메시아적 영감을 받은 사회
은 우주생성적 혁명이다. 도로서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태극은 그리스도의 우주 생성적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태극의 옛 인간-우주적인 고리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그것을 상서(祥瑞)
간-우주적 궤적으로 변화시키고, 태극의 새로운 시대(aeon)를 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주생명
하고 성취했다.<5>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반전과 복귀의 그리스도
이 뜻밖의 상서로운 신-인간-우주적이고 우주생성적 궤적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아직도 감추어져 있다. 그 궤적
지 않고 있으며, 종말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기(氣, )의 개념은 중요한 해석학적 열쇠를 제
통해 그리스도론적 영이신 신-인간-우주적 비전이 새롭게 창안될 수 있다.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기
동시에 그러한 힘의 물질적 현현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원초적 기운의 근원(source)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말하기도 한다. 기의 소통은 인간과 다른 생물들의 관계를 보다 통전적으로 그리고 보다 심오하게 발전시킨다
을 통해 신-인간-우주적 생명의 그물망(life network)이 서로 공생(symbiosis)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민중의 사회-전기(socio-biography)와 순진한 인간-우주적 비전 사이의 변증
서서,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를 주제화 할 수 있게 해 준다. 도로서의 하나님은 기의 영적 소통을
생명들의 사회-우주적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초적 기운인 원기(元氣)로서 그리스도는
에 가져온다. 더욱이 영이면서 동시에 물질로서의 기는 성육신(Incarnation)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탄생 이야기는 영-인간-우주적 비전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착취당하는 생명의
월하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초적 기, 즉 원기
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그리스도론은 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학과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 모두를 그 구성요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곧 도를 그리스도로 언표하는 도-그리스도론은 영적이고 해방적이다. 결국, 도
태극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시아 영성의 구원론적 핵심 안에 구현되어 있는 해방적 그리스도론의 한 전형이라
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와 기-사회-우주적 도로서의 그리스도를 구상하는 도-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
----
생명들의 사회-우주적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초적 기운인 원기(元氣)로서 그리스도는
에 가져온다. 더욱이 영이면서 동시에 물질로서의 기는 성육신(Incarnation)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탄생 이야기는 영-인간-우주적 비전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착취당하는 생명의
월하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초적 기, 즉 원기
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그리스도론은 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학과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 모두를 그 구성요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곧 도를 그리스도로 언표하는 도-그리스도론은 영적이고 해방적이다. 결국, 도
태극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시아 영성의 구원론적 핵심 안에 구현되어 있는 해방적 그리스도론의 한 전형이라
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와 기-사회-우주적 도로서의 그리스도를 구상하는 도-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
본문제인 근대적 역사중심주의와 희랍적 이원론을 극복한다.
결론적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론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라 삶을 바른 길(正道, orthodao)로 변화 시켜나가며,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생명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적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새로운 태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주생성적
신-인간-우주적 도로서 그리스도는 수난받는 온생명들에게 이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으로 복귀할 수
지-영이며, 더욱 우리식으로 말하면 원초적 기(元氣)를 불어넣어 주신다. 이 대목에서 『장자』에 다음과 같은 구
"너는 뜻을 한가지로 가져라. 그래서 귀로 들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듣
은 부합(符合)하는데서 그친다, 허나 기는 허해서 온갖 걸 다 포용한다. 오직 도는 허(虛)한 데서 모이니 허한
다."<6>
참된 도로서의 그리스도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려 솟구치는 연어와 같이 생명들로 하여금 도로 복귀하게 만
를 완성하는 능력인 그리스도의 원초적 기, 곧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공허 곧 자기비움( )과 심재
한 마음 닦음( )이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반전(산상수훈)의 능력에
가려는 물고기처럼 도약하며 도로 복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물고기로 상징되는 깊은 의미를
태극기에 나오는 태극문양 또한 물고기 두 마리가 맞물려 도약하는 상징으로도 표현되니, 그리스도와 우리나
또한 예수께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하신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1:17)
주:
1 이 글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표한 글을 보완·축약한 것이다. 학술적인 논의와 자 료를 위해서는 김흡영, 『도의
175-195; Heup Young Kim, A Theology of Dao (Orbis, 2017), 34-56을 참조하라.



2021/08/04

서윤애: 파니카의 우주신인론과 수운의 시천주 사상 비교

DSpace at EWHA: 파니카의 우주신인론과 수운의 시천주 사상 비교

파니카의 우주신인론과 수운의 시천주 사상 비교
Title파니카의 우주신인론과 수운의 시천주 사상 비교
Other Titles(A) Comparison Between R. Panikka's Cosmotheandrism And Soowun's Idea of Shichun-Joo

Authors서윤애

Issue Date1998Department/Major대학원 기독교학과

Publisher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DegreeMasterAbstract

필자가 관심을 두는 것은 동양인들의 영성,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에게 공통된 하느님 이해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여러 시대를 두고 맥맥히 이어져 왔던 동일한 하느님 이해가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 민족이 섬겨 온 하느님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동학이라 할 수 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체험한 '시천주'의 하느님은 온 세상에 편만히 살아 계시며 인간 속으로 화육한 우주의 원리이자 실재(reality)였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설명을 하는 현대 기독교 신학의 한 사상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레이몬드 파니카가 강조하는 '우주신인론'이다. 파니카와 최제우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고 있는데, 그러한 공통의 하느님 이해야말로 21세기를 살아내야 할 동서양의 현대인들에게 바른 통찰력과 프락시스를 제공해 주는 단서가 될 수 있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우선 첫 장에서 파니카의 생애와 사상을 개괄하겠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의 우주신인론을 집중 정리하면서, 특히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로 현현되었는가를 말하는 그의 신관, 즉 로고스 화육론을 중심으로 하여 내용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3장에서는 파니카의 우주신인론이 수운의 시천주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밝히기 위하여 수운의 생애 및 그 사상의 특징을 소개한 후, 
4장에서는 시천주 사상이 해월 최시형에 이르러 '양천'과 '체천'으 로 더욱 뚜렷하게 정리되었음을 보일 것이다. 
5장에서는 기독교와 동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위하여 먼저 두 사상가의 신 체험 방식을 비교할 것이다. 그리고 수운과 해월의 시천-양천-체천으로 정리된 '하늘님' 사상이야말로 파니카가 말하는 우주신인론의 한국적 선언(파니카보다 반 세기도 더 이전에 선포된)임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드디어 현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결국은 동학의 '하늘님', 즉 한국적 '하느님'이라고 설명할 단초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며, 기독교와 동학이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지 짐작하게 될 것이다.;


What the author of this study concerns about is the Orientals' spirituality, especially the understanding of God common to our countrymen. The Korean race has had one unified understanding of God throughout history which still manifests itself i us living at present, here. Our race's veneration of God is revealed best in Dong-hak thoughts. God in Shichun-joo idea, experienced by Choi Je-woo, the founder of Dong-hak is pervasively living all over the world and a reality as well as a cosmic principle incarnated into human being. Meanwhile, there is the same explanation of God in the contemporary Christian theology, that is, the cosmotheandrism emphasized by Raymond Panikka. Basically, many' parts of Panikka's idea coincides with that of Choi Je-woo, and the author of this study thinks that this common understanding of God could be a clue for providing insights and praxes to the people in the East and West who have to live through the 21 st century. First of all, in the 1st chapter, the author summed up R. Panikka's life and ideas. And in the 2nd chapter, intensively arranging Panikka's cosmothearndrism, in particular mainly around his view of God, i.e., the logos doctrine of Incarnation, the author developed the details. In the 3rd chapter, to clarify that Panikka's cosmotheandrism has something in common with Soowun's idea of Shichun-joo, the latter's life and the characteristics of his idea were introduced: and in the 4th chapter, the author showed that the idea of Shichun-joo became more clearly identified into the idea of 'Yandchun' and 'Chechun' by Haewol Choi Shi-hyound. In the 5th chapter, under the theme of the meeting of Christianity and Dong-hak, the two thinkers' ways of experiencing God were compared at first. And then, the author made it clear that the very idea of 'Haneulnim' consolidated through Soowun and Haewol's idea of 'Shichun-Yangchun-Chechun' is exactly what Panikka tried to say by his cosmotheandrism (the lather was half a century behind the farmers in proclaiming his view). Consequently speaking, we can get a clue from this study to explain that 'God' in the corntemporary Christianity in the same with. 'Haneulnim' in Dong-hak, i. e., Korean God and presume at what point Christianity and Dong-hak meet each other.FulltextShow the fulltextShow the fulltextAppears in Collections:일반대학원 > 기독교학과 > Theses_MasterFiles in This Item:

2021/07/22

그리스도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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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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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의 복음서 9장 20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론(라틴어Christologia)은 주로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간들에 기록된 예수의 위격적 존재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연구 분야이다.[1][2][3] 예를 들어 그리스도론은 성부와 성자인 예수의 관계, 예수의 사제직과 활동, 가르침에 관하여 상세히 연구하여 구원사에서 그의 역할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다.[4] 사도 바울로의 관점은 사도 시대 그리스도론의 주요 요소를 제공하였다. 바울로 서간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선재 개념과 그리스도를 키리오스(주님)로 경배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5]

사도 시대 이후 초대 교회는 서로 긴밀하게 관련된 여러가지 사안들에 대해 종종 격렬한 토론을 벌였으며, 때로는 정치적 논쟁거리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론은 이러한 논쟁의 주요 쟁점이 되었으며, 제1차부터 제7차까지의 세계 공의회는 그리스도론에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었다. 그리스도론의 고전적 교리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일단 확립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고 참 사람이며, 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했지만 그 이후에도 신성과 인성은 섞이거나 변하거나 나뉘거나 갈라지지 않고 그 고유한 속성을 하나의 위격 안에서 그대로 유지된다는 핵심 교리를 교의로 선포하였다. 특히 인격 또는 위격을 나타내는 용어 '프로소폰'(인격 또는 위격)을 사용하면서 같은 의미로 '휘포스타시스'(위격 또는 실체)를 다시 한 번 사용함으로써, 칼케돈 공의회는 오해 소지를 없애고 ‘한 위격 안의 두 본성’ 교리를 확정하였다.[6] 동방교회 전통의 동방 정교회 등과 서방교회 전통의 천주교회와 개신교 교파들의 그리스도론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칼케돈 공의회 등에서 확인된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최초로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하여 당시까지 남아있던 많은 문제를 해결하였다.[7] 그 역시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통해 인간적 측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완전함이라는 원칙을 옹호하였다.[8][9][10] 또한 서방교회인 서유럽 지역의 중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주님'라는 도상 뿐만 아니라 친구이자 사랑과 위로의 살아있는 원천으로서 다정한 분위기의 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11]

용어 및 개념[편집]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론의 테두리 안에서 “예수는 누구이며, 그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많은 용어와 개념이 발달하였다. 많은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고,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분열하는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중세 이후로는 그리스도론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법이 발전하였다.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라는 용어는 요한 복음서 서문(요한 1:1-14)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말씀'(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즉 삼위일체의 제2위에 의해서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을 수용했다는 개념이 어떻게 모순 없이 선포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성 측면에서 그의 활동에 대한 연구를 추구하는 것이다.[12]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2세기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 때부터 강조되기 시작했다.[13] 반면에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인간적 측면과 활동(기적, 비유 등)에서 시작해 그의 신성과 강생의 신비에 접근하는 방식을 가리킨다.[14][13]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라는 개념은 사도 바울로가 처음으로 상술한 것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고, 그를 통해 코스모스(우주)의 본질이 어떻게 영원히 바뀌었는지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다.[5][15] 그리스도론을 이루는 부차적인 논제로는 강생과 부활, 구원이 포함된다.

그리스도론과 연관된 다른 신학적 주제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 예수 탄생 예고예수의 족보최후의 만찬 및 성찬례 제정, 예수의 수난과 십가가형예수의 다섯 상처, 지옥에 내려감, 승천성령 강림재림최후의 심판이 있다.

‘수도적 그리스도론’이라는 용어는 캔터베리의 안셀모피에르 아벨라르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등이 발전시킨 영성적 접근법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12세기와 13세기 프란치스코회의 신심은 ‘대중적 그리스도론’으로 이어졌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신학자들에 의한 체계적인 접근은 ‘스콜라적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른다.[16]

교의사[편집]

성 바울로의 아레이오스 파고스 연설, 1515년 라파엘로 작품.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원과 구속이라는 개념 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에 관한 일련의 새로운 개념과 사상에 직면하여, 이를 다루기 위해 새로운 용어와 관념, 사상을 사용해야 했다.[17] 기존의 용어와 체계로는 종종 이러한 종교적 개념을 전달하는데 불충분했으며, 이와 더불어 새로운 유형의 담론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토의하려는 시도로서 그리스도론이 처음 시작되었다.[17]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내린 지상 사명에 따라 때때로 당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청중에게 자신들의 개념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이따금씩 그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신앙을 설명해야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행전 17장 16-34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로의 아레이오스 파고스 연설이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인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전달하려고 시도했으며, 그의 설교는 향후 그리스도론 담론의 주요한 구성 요소들 중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17][18][19]

예수의 '주님'이라는 호칭은 신약 그리스도론 발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자기네 사상의 중심에 놓고, 그리스도의 신비와 관련된 다른 문제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20]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는 본질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를 암시한 키리오스 호칭과 연관되어 있다. 초기 기독교 신앙에서 키리오스라는 개념은 한처음부터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결합되어 함께 있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재가 포함되어 있다.[20][21]

일상생활에서 아람어 '마리'는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단순히 '선생님' 이상을 의미했으며, 랍비와 다소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용어를 그리스어로 옮길 때는 주님의 뜻인 '키리오스'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마리라는 용어는 예수의 생애 전반에 걸쳐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반면, 그리스어 키리오스는 온세상에 대한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의미하게 되었다.[22]

사도 시대 그리스도론[편집]

네 복음사가, 아브라함 블뢰마르트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마태오 복음서 16:15-16

예수는 본인이 직접 어떠한 글도 남기지 않았으며, 사도 시대 그리스도론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는 초기 기독교 문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복음서는 예수의 삶과 일부 활동들에 대해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요한 복음서 21장 25절에서 복음서에는 예수의 행적들을 전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천명한 바대로 예수의 일대기 전반이나 그의 삶 중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시간 간격을 조정하는데에는 관심을 거의 두고 있지 않다.[23]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루가 복음서 등 공관 복음서에서는 대체적으로 예수의 인성과 설교, 비유, 기적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신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앞의 세 복음서와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 복음서 1장 1절-14절은 말씀으로 번역되는 로고스로서 예수의 신성과 더불어 그의 선재를 나타내는데 할애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요한 복음서 1장 3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우주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는 한처음에 말씀이 있었으며, 이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느님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했으며, 이 말씀이 살(육신)을 취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와 동일인물로 해석되고 있다.[4]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적을 남긴 이는 바울로이다. 바울로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선재[24]와 그리스도의 키리오스로서의 신원 증명[5]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울로 서간은 예수를 가리켜 거의 230번에 걸쳐 키리오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25]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의 계시가 이전까지의 모든 하느님의 자기 계시보다 우위를 차지한다고 보았다.[4]

바울로 서간은 또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5장 17절(“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과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5절(“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에 나와 있듯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존재에 대한 우주적 함축을 설명함으로써 요한 복음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켰다.[5][15]

사도 시대 이후 논쟁[편집]

사도 시대에 이어서 2세기 이후부터 예수의 단일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성과 인성의 일치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26][27] 2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 내부에서 그리스도론에 관하여 서로 다른 여러가지 주장들이 많이 생겨났다.[28] 크게 구분해 보면, 한편으로는 예수의 인성을 거부하는 영지주의 계열의 가현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 혹은 경시하는 에비온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 등이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초기 교황들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되었다.[28]

4세기 초반,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가 종속론적인 그리스도론(아리우스주의)을 주장함으로써 교회는 크게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오직 성부만이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진정한 하느님이며, 성자, 즉 로고스(말씀)는 세상 창조 이전에 성부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이러한 로고스를 통해서 세상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로고스는 완전한 신이라 불릴 수 없는 반신(半神) 개념으로 성자가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극단적인 입장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의 참다운 신성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참하느님도, 참사람도 아닌 그 중간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이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되면서 교회는 혼란과 분열에 빠지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자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아리우스 자신은 파문되었다.[29]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믿음의 신조로 공포된 니케아 신경은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형태의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최초의 보편적 신앙 고백문인데, 성자에 대한 신앙고백 부분에서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본체적(혹은 본질적, 실체적) 동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일본체’(同一本體)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가 사용되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써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지 않고 출생하여, 하느님과 신적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이 바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교의적 결정의 핵심 사항이었다.[30]

하지만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계속해서 교회의 분열과 혼란이 생겨났다. 엄격한 아리우스주의로부터 온건한 반(半)아리우스주의가 파생되어 출현했는데, 그 추종자들은 어떻게든 동일본체라는 뜻의 그리스어 호모우시오스를 피하려 했다. 그리하여 ‘동일한’ 대신 ‘유사한’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유사본체’(類似本體)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호모이우시오스’(ὁμοιούσιος)를 내세우고자 시도했다. 결국 혼란 끝에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는 다시 한 번 결정적인 단죄를 받게 되고, 기존의 니케아 신경을 보완하여 확대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장엄하게 선포되기에 이른다. 성자에 대한 신앙고백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Dominus)으로 호칭하며 전반적으로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31] 또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주의 뿐만 아니라, 반아리우스주의와 아폴리나리스주의도 단죄하였다.[32]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자가 성부와 똑같은 신성을 지닌다고 천명했고,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이를 재확인하면서 성령 또한 신성을 지닌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다. 하지만 이들 공의회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으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달리 말하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5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학파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가 있었고, 안티오키아 학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다. 치릴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 복음서 1장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로고스와 사람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강조함으로써 로고스가 사람이 된 존재, 곧 인간 예수는 바로 하느님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네스토리우스는 말씀이 사람이 된 존재, 곧 예수가 온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이 인간 예수 안에 머문다는 식으로 이해했다.[33] 4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게 어떤 칭호를 부여할 것인가를 놓고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일부에서는 마리아가 인간인 예수를 낳은 것이니 ‘인간의 어머니’(안트로포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는 호칭을 불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이미 지난 200년 동안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신인(神人) ‘속성들의 교환’(communicatio idiomatum)이라는 원칙에 의거한 견해였다.[34]

양측 간 대립이 심해지자 네스토리우스는 중재에 나섰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크리스토토코스)라고 부르자는 것이었다. 이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데서 오는 위험(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존중하고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이 대안 역시 교회 초기부터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해온 신자들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치릴로가 이 논쟁에 개입했는데, 그는 예수의 육신이 하느님의 육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육신일 따름이라면 어떻게 그 죽음이 구원을 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네스토리우스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성을 강조하고자 하느님의 어머니 대신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치릴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것으로 몰아간 셈이다.[33]

갈수록 대립이 심화되면서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에페소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치릴로와 네스토리우스가 벌인 논쟁을 차례로 검토하고 나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말씀이 사람이 된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느님이자 영혼과 육신을 갖춘 온전한 인간이라는 치릴로의 주장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부합하다고 인정하면서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했다.[35]

그렇지만 에페소 공의회 이후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발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한 대수도원 원장 에우티케스가 제공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나 예수의 신성만 지나치게 강조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고 나서는 신성이 인성을 흡수해버려 신성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융합되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온전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성 하나만 남아있다고 해서 이 주장을 단성설이라고 부른다. 에우티케스의 이런 주장을 편든 사람은 치릴로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된 디오스코루스였다.[36]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는 44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를 소집하여 에우티케스를 단죄하였다.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한 인격(또는 위격) 안에 영속히 있다’는 에페소 공의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으나, 에우티케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단성설 논쟁으로 분열과 혼란에 빠진 상황을 수습하고자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공의회 교부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성과 신성의 결합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인정하지만 결합 이후에는 오로지 한 본성만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 에우티케스주의를 단죄하였다. 이어서 칼케돈 신경이라는 신앙 정식(Definitio fidei)을 통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나 인성에 있어서 모두 완전하며, 참하느님인 동시에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사람이라는 것,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본체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죄만 빼고는 모든 것이 인간과 동일본체라는 것, 그리고 신성을 따라서는 모든 시대 이전에 성부로부터 출생하였으며 인성을 따라서는 마지막 시대에 인간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고백하였다.[37]

칼케돈 신경의 가장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부분은, 사람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두 본성 안에서’(in duabus naturis) ‘혼합이나 변화(변질) 없이’, 또한 ‘나누어짐(분할)이나 분리 없이’ 인식해야만 한다는 신앙 고백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본성 사이의 구분이나 차이점은 그 결합에 의해 사라지지 않으며,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자존체 안에서 결합될 때에도 각 본성의 고유한 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두 위격으로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 독생자이며 로고스(말씀인 하느님)라고 선포하였다. 이로써, 육화를 통한 신성과 인성의 결합 이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두 본성 안에 있다고 장엄하게 선포되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두 본성 안에서의 한 위격’(una persona in duabus naturis)이라는 교의적 공리가 확립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unio hypostatica)라는 원리가 제시되었다.[38]

마침내 칼케돈 공의회를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론의 형성 과정이 일단락되고 집대성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단성설의 후유증은 가라앉지 않고 정치적 차원으로까지 비화되어 오랜 기간 동안 논쟁이 지속되었다.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이른바 삼장서 논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일종의 위격적 주체로 간주하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영원으로부터 선재하는 로고스의 위격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인간 본성을 취한 예수의 위격과 동일한, 오직 하나의 유일한 위격임이 천명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 원리 역시 확인되었다.[39]

그리고 680-681년에 열린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에너지만이 있다고 주장했던 단활설 또는 단력설적 관점에서 제시된, 그리스도의 ‘하나의 의지’만을 주장하였던 단의설을 단죄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일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에 따른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본성적인 작용(행위)이 나누어짐(분할)이나 변화(변질) 없이, 그리고 분리나 혼합됨 없이 존재한다고 선포되었다. 또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능한 신적 의지에 순종한다고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인류 구원을 위해 함께 협력하여 활동한다고 천명되었다. 바로 이 같은 신학적 배경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결합된 도구’(instrumentum conjunctum)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입장이 형성되기에 이른다.[40]

주요 주제[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Christology: A Biblical,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of Jesus by Gerald O'Collins 2009 ISBN 0-19-955787-X pp. 1–3
  2.  Compare: Ramm, Bernard L. (February 1993). 〈Christology at the Center〉. 《An Evangelical Christology: Ecumenic and Historic》. Regent College Publishing (1993에 출판됨). 15쪽. ISBN 9781573830089. 2016년 5월 9일에 확인함Christology is the reflective and systematic study of the person and work of Jesus Christ.
  3.  Michael F. Bird; Dr. Craig A. Evans; Simon Gathercole (2014년 3월 25일). 〈Endnotes – Chapter 1〉. How God Became Jesus: The Real Origins of Belief in Jesus' Divine Nature – A Response to Bart Ehrman. Zondervan. 134, n. 5쪽. ISBN 978-0-310-51961-4New Testament scholars often speak about “Christology,” which is the study of the career, person, nature, and identity of Jesus Christ. There are, of course, many different ways of doing Christology. Some scholars study Christology by focusing on the major titles applied to Jesus in the New Testament, such as “Son of Man,” “Son of God,” “Messiah,” “Lord,” “Prince,” “Word,” and the like. Others take a more functional approach and look at how Jesus acts or is said to act in the New Testament as the basis for configuring beliefs about him. It is possible to explore Jesus as a historical figure (i.e., Christology from below), or to examine theological claims made about Jesus (i.e., Christology from above). Many scholars prefer a socio-religious method by comparing beliefs about Jesus with beliefs in other religions to identify shared sources and similar ideas. Theologians often take a more philosophical approach and look at Jesus’ “ontology” or “being” and debate how best to describe his divine and human natures.
  4. ↑ 이동:   Catholic encyclopedia: Christology
  5. ↑ 이동:    Christ in Christian Tradition: From the Apostolic Age to Chalcedon by Aloys Grillmeier, John Bowden 1975 ISBN 0-664-22301-X pp. 15–19 [1]
  6.  이창훈 기자 (2011. 04. 17).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10) 칼케돈 공의회(하)(451년)”.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1월 14일에 확인함.
  7.  Gilson, Etienne (1994), 《The Christian Philosophy of Saint Thomas Aquinas》,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502쪽, ISBN 978-0-268-00801-7
  8.  Christology: Biblical And Historical by Mini S. Johnson, 2005 ISBN 81-8324-007-0pp. 76–79 [2]
  9.  Christology: A Biblical,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of Jesus by Gerald O'Collins 2009 ISBN 0-19-955787-X pp. 208–12 [3]
  10.  Aquinas as authority by Paul van Geest, Harm J. M. J. Goris pp. 25–35 [4]
  11.  Christology: Key Readings in Christian Thought by Jeff Astley, David Brown, Ann Loades 2009 ISBN 0-664-23269-8 p. 106
  12.  존 폴킹혼, 《양자물리학 그리고 기독교신학》,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116
  13. ↑ 이동:  Jesus God and Man by Wolfhart Pannenberg 1968 ISBN 0-664-24468-8 p. 33
  14.  Christology: A Biblical,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of Jesus by Gerald O'Collins 2009 ISBN 0-19-955787-X pp. 16–17
  15. ↑ 이동:  The Witness of Jesus, Paul and John: An Exploration in Biblical Theology by Larry R. Helyer 2008 ISBN 0-8308-2888-5 p. 282
  16.  Christology: Biblical And Historical by Mini S. Johnson, 2005 ISBN 81-8324-007-0pp. 74–76 [5]
  17. ↑ 이동:   Christianity: an introduction by Alister E. McGrath 2006 ISBN 978-1-4051-0901-7. pp. 137–41
  18.  Creation and redemption: a study in Pauline theology by John G. Gibbs 1971 Brill Publishers pp. 151–53
  19.  Mercer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by Watson E. Mills 2003 ISBN 0-86554-864-1 pp. 1109–10
  20. ↑ 이동:  Christology: Biblical And Historical by Mini S. Johnson, 2005 ISBN 81-8324-007-0 pp. 229–35 [6]
  21.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by Oscar Cullmann 1959 ISBN 0-664-24351-7 pp. 234–37 [7]
  22.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by Oscar Cullmann 1959 ISBN 0-664-24351-7 p. 202 [8]
  23.  Encyclopedia of theology: a concise Sacramentum mundi by Karl Rahner 2004 ISBN 0-86012-006-6 p. 731
  24.  Witherington, Ben (2009년 9월 20일). 〈Christology – Paul’s christology〉. Gerald F. Hawthorne.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A Compendium of Contemporary Biblical Scholarship》. Ralph P. Martin; Daniel G. Reid. InterVarsity Press. 106쪽. ISBN 978-0-8308-7491-0[Christ’s Divinity] We have already seen that Paul, in appropriating the language of the christological hymns, subscribed to the christological notion that Christ existed prior to taking on human flesh. Paul spoke of Jesus both as the wisdom of God, his agent in creation (1 Cor 1:24, 30; 8:6; Col 1:15–17; see Bruce, 195), and as the one who accompanied Israel as the “rock” in the wilderness (1 Cor 10:4). In view of the role Christ plays in 1 Corinthians 10:4, Paul is not founding the story of Christ on the archetypal story of Israel, but rather on the story of divine Wisdom, which helped Israel in the wilderness.
  25.  Christology: A Biblical,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of Jesus by Gerald O'Collins 2009 ISBN 0-19-955787-X p. 142
  26.  Editors, Erwin Fahlbusch (1999), 《The encyclopedia of Christianity》, Leiden, Netherland: Brill, 463쪽, ISBN 0-8028-2413-7
  27.  Rausch, Thomas P. (2003), 《Who is Jesus? : an introduction to Christology》, Collegeville, Minn.: Liturgical Press, 149쪽, ISBN 0-8146-5078-3
  28. ↑ 이동: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45-353쪽. ISBN 9788984812635.
  29.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54-358쪽. ISBN 978898481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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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61-364쪽. ISBN 978898481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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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76쪽. ISBN 9788984812635.
  35.  이창훈 기자 (2011. 03. 27). “[교회사 속 세계공의회] (7) 에페소 공의회(하)(431년)”.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16일에 확인함.
  36.  이창훈 기자 (2011. 04. 03).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8) 칼케돈 공의회(상)(451년)”.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1월 16일에 확인함.
  37.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91-392쪽. ISBN 9788984812635.
  38.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93-395쪽. ISBN 9788984812635.
  39.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95-396쪽. ISBN 9788984812635.
  40.  박준양 신부 (2009).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396-397쪽. ISBN 9788984812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