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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8

[북한연구]책 By Sandra Fah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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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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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연구]책 <Marching Through Suffering: Loss and Survival in North Korea> By Sandra Fah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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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자들을 인터뷰하여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격은 경험을 연구했다는 책인데, 한국어 실력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읽어보아야겠다. 한국의 북한연구에 대하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 전자책이 아마죤에서 미불 40불이 넘어가는데, 자꾸 찾아보니, 미불 15불, 미불 12.5불인데도 있다. 덴마크 회사인데 책은 많지는 않지만 이책이 있는데 epup format이라서 알라딘 리더에 집어넣으면 들을 수도 있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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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Reviews
Marching Through Suffering is a really moving book. It is partly the subject matter, to be sure, but it is also Sandra Fahy's sensitivity to what her subjects are saying and their psychological state. That is what ethnography should be doing for us. (Stephan Haggard,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Sandra Fahy offers a unique, penetrating, and informative ethnography of one of the most opaque societies in modern history. Few scholars have sought to understand the humanity that survives, and sometimes thrives in its own way, beneath the oppressive state structure―an important contribution to the expert literature, yet accessible to the general reader. (Victor Cha, Georgetown University)
This book is an extraordinary contribution to the famine literature. Sandra Fahy's analysis of the North Korea famine draws extensively on her interviews with survivors, which gives this narrative a unique depth and credibility. These personal accounts lift the veil of secrecy and reveal North Koreans as real people with a healthily skeptical sense of humor, even in extreme adversity, not as mute shadow-puppets mindlessly manipulated by their dour leaders. No book I have ever read conveys the mundane horror of a famine so vividly, while retaining academic rigor and advancing our understanding of this famine's complex causes and consequences. (Stephen Devereux, Institute of Development Studies, author of Theories of Famine and editor of The New Famines)
If you want to know why the human rights agenda matters, read this book and be reminded how complexly damaging state-led deprivation and oppression can be.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
Fascinating... An important work that helps provide a far more nuanced view of the complexities of life in North Korea than that found in the media. (CHOICE)
With its nuanced understanding of North Koreans and elegant prose, Fahy's work will certainly find a place on the syllabi of many future coures on North Korea. (BAKS Papers)
What emerges is a people-centered story, a tale that empowers rather than victimizes. It is, the reviewers unequivocally conclude, a harrowing but powerful read. (Sino NK)
Subtly and sensitively, the author examines how people tried to cope with and make sense of their lives as they ran out of food in a society where words such as famine and starvation were taboo. (Times Literary Supplement)
Sandra Fahy's, Marching Through Suffering: Loss and Survival in North Korea, makes an original contribution to the literature on the 1990s famine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avid Hawk Human Rights Quarterly)
Sandra Fahy's fascinating work... achieves something of much depth and empirical utility to the scholar. (Pacific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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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Sandra Fahy is assistant professor of anthropology at Sophia University in Tokyo and a fellow at the Korean Studies Institute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She has been a Sejong Society Post-Doctoral Fellow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and earned her Ph.D. at the School for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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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com.au/books?id=0IAyBgAAQBAJ&pg=PR4&lpg=PR4&dq=Marching+Through+Suffering+library&source=bl&ots=8pu3idEpr5&sig=onUmDy6J42Vdrl4_ve8XzNvFbI0&hl=en&sa=X&ved=2ahUKEwj3vPTpktzcAhVEbbwKHacdALk4ChDoATAJegQIBxAB#v=onepage&q=Marching%20Through%20Suffering%20library&f=false










3崔吉城, 정승국 and 1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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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2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알라딘: [전자책]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epub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홍지수 (옮긴이),오강남 (해제)김영사2017-04-10 원제 :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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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424쪽, 약 34.1만자, 약 7.6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샤인

ISBN : 978893497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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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천 eBook(장르) + 6월 쿠폰북 (매일 적립금, 10% 쿠폰)

책소개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의 명저다.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목차

1장 종교의 진화 | 2장 초자연적 감시자 | 3장 위로부터의 압력 | 4장 우리는 거대한 신을 믿는다 | 5장 자유사상가는 무임승차자 | 6장 진정한 신도 | 7장 거대 집단에 필요한 거대한 신 | 8장 협력과 경쟁을 부추기는 신들 | 9장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 10장 신 없는 협력 | 해제_거대한 신, 그리고 그 너머 | 주석 | 참고문헌 | 색인



책속에서

P. 53 인간과 유사한 초자연적 존재들이 인간을 감시하고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고 인간의 행동을 보상하고 처벌하는 존재로서 훨씬 설득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이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청탁도 들어주는, 자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인격화된’ 신을 원한다. 추상적이고 인간사에 무심한 신보다 인격화된 신에게 훨씬 열렬한 추종자들이 몰리는 현상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접기

P. 137 친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는 세속적 경로가 또 하나 있다. 협력과 높은 수준의 신뢰를 촉진하는 효과적인 제도와 기관들이다. 이런 제도와 기관이 갖추어진 세속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이라면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종교에 의해 직접적으로 동기 유발되지 않는 무신론자도 친사회성을 보일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공적 영역을 관장하는 강력한 제도가 존재하면, 즉, 계약이 이행되고 경쟁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부정행위자는 처벌받는다는 믿음이 있으면,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공히 높은 수준의 신뢰와 협력의 태도를 보인다.  접기

P. 182~183 이런 터무니없이 과도한 행위들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주로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고, 이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예를 들어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남성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을 거세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로마제국 초기에는 키벨레 종교가 부활해 문화적으로 확산되었다. 신심을 공개적인 행동으로 과시해 보이면 키벨레를 숭배하는 다른 신도들에게 믿을 만하다는 신호를 보낼 뿐만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포교하는 수단도 된다는 뜻이다. 즉, 문화적으로 키벨레 종교를 비신도들에게 전파하는 수단이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행태가 나타났다. 그들은 기꺼이 순교를 택하여 문화적인 귀감이 되었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믿음이 문화적으로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접기

P. 296 종교적 관행과 의식을 통해 공고해지고 사회적 결속력은 공동체를 응집시키지만 동시에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부인인지 구분하게 만든다. 흔히 강한 사회적 결속력이 본질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결속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친사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도 많다. 하지만 강력한 사회적 결속력 이면에 존재하는 추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배타심이 생기고,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폭력적 반감을 표출한다. 이런 현상을 ‘집단 간 폭력에 대한 사회적 결속력 가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접기

P. 309 죽음을 상기시키면 사람들은 자기가 지닌 문화적 신념에 방어적으로 매달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비롯해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편협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실존적 위협이 팽배한 경우더라도 호전주의가 평화주의로 전환될 가능성은 있다. 이란의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죽음을 상기시키자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한다는 사례가 증가했다. 하지만 자비심을 강조하는 이슬람 가치들(“알라는 선행하는 자를 사랑하시니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라”)을 상기시키자, 죽음을 떠올려도 미국인에 대한 자살공격을 지지하는 수가 줄어들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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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아라 노렌자얀 (Ara Norenzay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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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성에 대해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연구에 CNN, BBC 등의 방송과 <뉴욕타임스 매거진> <이코노미스트> <슈피겔> <내셔널포스트> <뉴사이언티스트> 등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주목하였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자랐으며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총 5종 (모두보기)

홍지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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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하버드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KBS 앵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정부의 정보통신부 차장, 리인터내셔널 무역투자연구원 이사로 일했다. 옮긴 책으로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짝찾기 경제학』, 『월든: 시민불복종』, 『고령화 시대의 경제학』,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뇌를 훔치는 사람들』, 『오리지널스』, 『원더랜드』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가 있다. 현재 <미디어펜>과 <펜앤드마이크> 객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접기

최근작 :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 총 57종 (모두보기)

오강남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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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힌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으며, 제17회 《코리아 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 종교 둘러보기』... 더보기

최근작 :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고전 강연 2>,<도덕경 (큰글씨책)> … 총 60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 뇌과학자 김대식, 종교학자 오강남,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 긍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추천! ★



인간 사회는 어떻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친밀한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에서 낯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거대 집단으로 확장되었나? 이슬람, 그리스도교 등 영향력이 막강한 유일신교를 숭배하는 종교들은 어떻게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왜 무신론자가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종교와 인간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종교의 탄생과 발달, 인간 사회의 기원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밀도 있게 파헤친 사회심리학 명저. 사회를 지키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필요성,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세속화가 발달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란 퍼즐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흥미진진한 지적 탐구.



출판사 리뷰



인간과 사회 그리고 신의 관계에 대한

심오하고 독창적인 지적 탐구



소규모 수렵채집 집단생활을 하던 인류는 어떻게 거대한 집단을 만들고 오랜 기간 집단을 확장하거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친족이라는 친밀함의 경계를 넘어 낯모르는 사람들까지 거대 집단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어둘 수 있었던 구심점은 무엇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결속 아래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사회화의 기원을 묻는 이런 물음은 역사가 시작한 시점부터 있어왔고, 무수히 많은 종교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이 그 답을 찾아 수많은 시간을 바쳤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Big Gods》의 저자 아라 노렌자얀도 그중 한 사람이다. 레바논 출신으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그는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을 결속하는 힘이 무엇이며, 그 힘은 우리를 어떻게 협력하게 만들었는지 연구했고, 종교의 관점에서 그 답을 제시한다. 신앙의 대상이기만 했던 종교가 인간의 사회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거대한 집단에 거대한 종교가 필요했고, 거대 종교의 성장을 위해 거대한 사회가 필요했던 공생 관계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본다. 더불어 저자는 종교가 거대 사회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여덟 가지 믿음을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여덟 가지 믿음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급진적인 것은 아니지만, 논리정연한 주장과 실험을 통한 탄탄한 연구가 뒷받침되었고, 영장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프란스 드 발도 “아라 노렌자얀은 방대한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절실하게 필요했던 논리정연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추천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과 종교의 미래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

“신에게 물을 것인가, 우리에게 물을 것인가”



젊은 석학 아라 노렌자얀의 학문이 집대성된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종교를 넘어 심리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종교의 탄생과 발달, 사회의 기원에 대해 밀도 있게 보여준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초자연적 감시자의 성격과 역할,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관계, 과도한 신앙행위가 사회에 불러오는 효과, 종교 간 경쟁의 양상, 제도와 문화가 공정하고 선진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약화 등 역사의 시간 동안 꾸준히 모색된 사회와 종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하는 한편, 21세기 미래의 종교 현실과 역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묻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사회제도의 발달과 공정한 세속적 권위의 강화로 변모하는 종교의 역할이다. 저자는 10장에서 2007년 코펜하겐에서 겪은 자전거 서비스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그리스도교가 전통을 이어온 서구 사회에서 점차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심지어 “정부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이 서로 상쇄하는 관계로 보인다는 점에서”(321쪽) 유럽의 무신론 확산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이런 세속적 제도는 종교를 대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제도가 잘 갖추어진 것에 비해 종교적 파급력이 강한 나라, 국민 대다수가 종교가 있다고 말하는 나라, 저자가 사회적인 긴장도(여러 가지 상황에 적용되는 엄격한 사회적 규범들을 갖추고 있는가?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은 어느 정도나 허용되고, 이런 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는가의 여부)가 상당히 높다고(259쪽) 연구를 통해 밝힌 한국의 독자들이 특히 눈여겨보며 우리 사회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거대한 신들,

그들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나



이 책을 관통하는 초자연적 감시에 대한 여덟 가지 믿음이 있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 여덟 가지 믿음은 종교가 거대한 사회를 만드는 데 되었다. 이제, 이 여덟 가지 주장을 찬찬히 짚어보자.



인간은 초자연적 감시자가 있다고 상정하고, 그 감시자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볼 줄 알며, 인간 사회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고 의인화한다. 감시자는 높은 곳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감시하고 있다. 이런 초자연적 감시자에 대한 생각은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이런 신들을 두려워한 신앙인들은 전지적 능력이 없는 신들이나 인간의 도덕성에 무관심한 신들을 믿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구성원들과 서로 협력하고 신뢰하고 희생을 감수”(22쪽)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정신-육체 이원론’과 ‘목적론적 직관’을 가지고, 이것을 통해 막강하고 거대한 신이 인간을 감시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는 신격체-하늘의 감시자-가 있으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사람들”(48쪽)은 서로 협력하게 된다.

두 번째 믿음은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이다. 저자는 ‘일요일 효과’를 그 예로 든다.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는 자선이나 봉사 등 종교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일요일을 제외한 다른 날에는 비신앙인들의 반응과 그리스도교도들의 반응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74쪽)는 것을 일요일 효과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24시간 내내 종교적일 수는 없으며, 종교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친사회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믿음은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이다. 저자는 신의 성정에 관한 평가실험을 통해 “신이 무자비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이 자비롭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부정행위를 할 가능성이 훨씬 낮”(86쪽)다는 것을 입증했다. 초자연적 존재에게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신의 자비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직접적이고 이는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자비롭고 너그러운 신은 정반대 효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비리를 저지르고 부추기는 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87쪽) 이는 천국보다 지옥을 믿는 비율이 높은 나라의 범죄율이 낮다는 아짐 샤리프와 마이크 렘툴라의 실험 결과에서도 입증되었다.

네 번째 믿음은 마 타리니Maa Tarini 여신을 믿는 인도 버스 운전기사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어라’이다. 자신의 귀중품을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길 때 ‘신성한 유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니 무신론자보다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협력을 촉진하는 초자연적 감시자를 믿는 사람이라면 협력의 상대로 신뢰할 수 있”(123쪽)다. 9?11 이후에도 미국인들은 무슬림보다 무신론자에게 더 큰 반감을 가졌으며,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은 불신에서 비롯된 반면,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현오감에서 비롯”(149쪽)되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행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과도한 종교적 행위는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는 믿음으로 설명된다. 독실한 신자들이 이런 자학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거세나 장기간의 금식, 특정 음식 섭취 등 “거짓으로 꾸미기 어려운 행위를 함으로써 종교집단에게 신심을 증명해 보이는 효과가 있”(182쪽)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과도한 행위를 통해 추종자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종교적 믿음은 거짓으로 꾸미기 쉽기 때문에,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합리적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비용의 종교적 행위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진화”(188쪽)해온 것이다.

어린이에게 도덕적 심판을 하는 산타클로스는 왜 거대한 신이 될 수 없는가?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열렬한 추종자들이 독실하게 그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회적 증거가 없으면 그 신은 사람들을 개종하게 만들 힘을 발휘하지 못”(205쪽)하고 지리멸렬한다. 그래서 초자연적 감시자로 도덕성에 관심이 많은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의 신화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문화적 진화라는 막강한 힘이 작용하여 문화적 생존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종교집단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저자가 주장하는 초자연적 감시의 일곱 번째 믿음을 보자. ‘거대 집단에게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지구상 최후의 수렵채집 집단이라 불리는 ‘하드자Hadza'(탄자니아 북부에 거주)는 거대한 신을 섬기지 않는다. “교회도, 목사도, 지도자도, 종교적 수호자도 없고, 신의 형상이나 이미지, 조직화된 모임, 종교적 도덕성, 내세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도 없다.”(226쪽) 그들은 어느 정도 한계를 초월하는 영령이나 신을 섬겼지만, 오늘날의 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런 수렵채집인들이 거대한 신 없이도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사회는 도덕적 심판을 하는 전지전능한 초자연적 주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역사회의 결속력을 구축할 수 있었”(230쪽)기 때문이다.

마지막 종교적 믿음은 종교 간 경쟁에 관한 것이다. 거대한 집단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게 되었을 때 어떤 집단들이 더 우세하게 될까? “집단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거대한 신과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관행들로 무장한 친사회적 종교집단은 경쟁 집단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된다.”(262~263쪽) 바로 ‘종교적 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유전적 진화의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문화적 진화로만 설명할 수 있다. 친사회적 종교집단의 생존을 위해 개종과 출산율의 증가를 통해 집단의 규모를 유지하거나 확장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 종교가 지닌 이점, 즉 출산율을 높인다는 이점은 협력을 촉진한다는 이점과 더불어 문화적 진화의 과정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280쪽)



우리가 잘 아는 이슬람교, 개신교뿐만 아니라 모르몬교나 오순절주의는 그 세력을 빠르게 확장한 반면 어떤 종파는 왜 그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동성애자보다, 왜 무신론자가 신앙인 사회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왜 천국의 나팔소리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인간에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이 근본적인 질문의 답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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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이다.

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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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본문중에서 폐경을 완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자의적으로 만든 말이죠. 번역자의 태도로 옳지 않습니다. 공사구분을 해야죠.

maitri 2017-09-12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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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용감한 책을 썼을까.. 레바논에서 20년동안 종교전쟁을 목격한 사람의 말이라면 이해가 될까.. 종교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썼다.

삐약삐약 2019-01-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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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인류는 대부분의 세월을 가까운 혈연관계인 구성원들끼리 비교적 소규모 집단을 형성해 채집과 수렵 활동을 하며 서로 직접 대면하면서 관계를 유지했고, 이따금 낯선 이들과 제한적으로 교류를 했다." 대규모 공동체 생활, 낯선 타인과 협력과 거래를 시작한 시기는 불과 만이천 년 전으로, 농업 혁명이 시작된 시기다. (P.14) 그와 더불어 이른바 '거대한 신들'(big gods)에 대한 숭배가 퍼졌다.거대한 신들은 '초자연적 감시자'다. 자연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도덕성에 관심을 ... + 더보기

캐모마일 2016-10-25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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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감시자의 존재감 새창으로 보기

【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아라 노렌자얀 (지은이) | 홍지수 (옮긴이) | 오강남 (해제) | 김영사  2016-09-19_원제 Big Gods: How Religion Transformed Cooperation and Conflict   (2013년)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게 만드는가?” 1.‘신’의 존재감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양식에 크나큰 ... + 더보기

쎄인트saint 2016-10-1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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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어떻게 생겨났고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나?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새창으로 보기

 알고 있는지? 종교에도 수명이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에 따르면 19세기에 종교적, 세속적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 공동체가 무려 200개나 만들어졌는데, 그 평균 수명이 겨우 25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보면 종교의 생명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길고 질길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가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 + 더보기

ICE-9 2016-10-2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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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탄생과 성장, 그 실체를 다양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잘 정리한 책 새창으로 보기

신과 종교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아서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종교인들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과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면 바로 종교인들의 거센 공격이 빗발치기 십상인데 이 주제는 기본적으로 논쟁이 제대로 성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신과 종교가 상당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종교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와 그 전파과정, 인간 사회에 있어 끼치는 영향까지 종교를 논리적으로 제대로 분석한다.... + 더보기

sunny 2016-10-23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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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은 제목만 얼핏 보면 "신의 존재 여부"를 과감히 논하거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유신론 vs 무신론"의 현황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런 추상적이고 어차피 똑떨어진 답이 나오기도 힘든 물음에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처럼 무익한 수고를 벌이는 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때로는 특징적 혹은 무작위로 뽑힌 집단을 두고 벌인 실험을 통해, 중립적이고 과학적 접근으로 "왜 신은 우리 인간의 관념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나"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 + 더보기

빙혈 2016-10-25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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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종교는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해 왔다이러한 종교는 어디에서 왔을까?사람들은 종교를 왜 갖게 되는걸까?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을까?반대로 무신론자는 왜 종교를 갖지 않을까?종교는 어떻게 현 시대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이러한 다양한 물음에 답을 해 주는 책

독서하자곰 2017-03-27 공감(5)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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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이 책을 읽으며 인간과 종교를 생각해본다 새창으로 보기

제목부터 질문 하나 툭 던지는 책이다.《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제목 앞에서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거대한 신'은 무엇을 의미하며, 인간은 무엇을 믿으며 종교가 변해왔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알고 싶어진다. 종교의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르는 변천사와 의미, 종교가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짚어본다. 이 책을 읽으며 종교의 기원과 발달, 거기에 얽힌 사회심리적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 종교의 미래를 짐작해본다.







이 책의 저자는 아라 노렌자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행동, 종교와 사회의 진화적 기원, 종교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과 문화적으로 다양한 상징을 설명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문화적 자양성과 보편성에 대해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책의 해제는 오강남이 맡았다.《세계종교 둘러보기》라는 책을 통해 종교에 대해 큰 틀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저서였기에 그의 해제가 기대되었다.







이 책은 모르몬교 창시와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루 평균 두세 개의 신흥종교가 생겨난다는 추산이 있을 정도로 종교는 빠른 속도로 그 수가 늘어나고 성장하고 변해왔다. 생존에 성공한 종교와 실패한 종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당신이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힌두교도, 불교도라면, 아니 이런 종교를 믿은 사람들의 후손이지만 불가지론자거나 무신론자라고 해도, 여러분은 이름 모를 문화적 실험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둔 종교운동을 이어받은 상속인이다. 거대 집단의 출현과 친사회적 종교의 출현이라는 두 가지 의문이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유를 알아보려면 모든 종교가 지닌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신, 영혼, 악마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 말이다. (19쪽)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계속 읽어나가게 된다. 그 점이 이 책을 읽는 독자를 끝까지 끌고가는 힘이다. 저자의 질문에 함께 고민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이어가며 전체적으로 큰 틀에서 인간의 종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며 자리잡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이 책은 총 10장으로 나뉜다. 1장 '종교의 진화', 2장 '초자연적 감시자', 3장 '위로부터의 압력', 4장 '우리는 거대한 신을 믿는다', 5장 '자유사상가는 무임승차자', 6장 '진정한 신도', 7장 '거대 집단에 필요한 거대한 신', 8장 '협력과 경쟁을 부추기는 신들', 9장 '종교를 통한 협력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10장 '신 없는 협력'으로 구성된다. 해제 '거대한 신, 그리고 그 너머'는 오강남이 맡았다. 마지막에는 주석, 참고문헌, 색인이 있다.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정보일 것이다. 2장부터 6장까지는 친사회적 종교의 등장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7장부터 9장까지는 지난 1만 2천 년에 걸친 친사회적 종교와 대규모 협력 공동체가 출현하도록 만든 역사적 동향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세속 사회가 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놀라운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10장의 주제이다.







이 책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책이다. 거대한 신들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인간 사회를 어떻게 다양한 종교를 믿는 거대한 사회로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세속주의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앞으로 보다 윤리적인 조직과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놀라운 방법들을 제시한다.



_조서넌 하이트 뉴욕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바른 마음》저자







다양한 실험 결과와 이론 등 저자의 논리를 펼쳐나가는 데에 있어서 풍부한 예시가 돋보이는 책이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종교의 역할을 이 책을 통해 살펴본다.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거나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점을 짚어줄 때, 책을 읽는 보람이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가 있는 책이다. 막연히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주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종교 관련 연구자라면 곁에 두고 참고하기에 좋은 책이고, 일반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기에 종교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상관없이 일단 펼쳐들면 생각보다 몰입도가 뛰어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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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라스 2016-10-23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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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제목만 봐서는 살짝 오해할 수도 있다.<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거대한 신'은 우리가 신을 경배하고 고무됨에 따라 동시에 위축되면서 느끼는 감정으로서 거대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이 다루는 모든 주제를 다 담지 못한다. 이 책의 초반부를 읽으며, 나같은 종교 문외한에게도 직관적으로 명료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책에 따르면, 오늘날 거대 종교로 성장한 세계 주요 종교의 신이나 그에 준하는 교세, 신도자수 등을 가진 종교 정도의 신이면 '거대한 신'이 되며, '거대한 신'이란 그런 의미인... + 더보기

바람흙별 2016-10-1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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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미국 대통령 선거가 얼마전 끝났다.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트럼프의 종교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역시나 트럼프의 종교는 개신교였으며, 과거 미국 대통령의 공통적인 룰에 벗어나지 않았다. 400년동안 지금까지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대통령은 모두 개신교였다. 바꿔 말하면 현재 미국 사회에서 개신교를 믿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국 속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며, 그들의 종교관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답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미국에서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신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만들어졌고 형상화 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특히 미국 사회 속에서 종교의 존재가치. 미국사회에서 그들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신뢰하는 반면 무신론자들을 배척하고 있으며, 무신론자에 대한 혐오증은 이슬람교보다 높다. 이런 모습은 미국의 특별한 모습이며, 덴마크나 핀란드,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무신론자에 대한 배척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무신론자를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지 않으려 하고,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신론자에 대한 혐오의 깊이가 차이가 있는 이유는 미국 안에 존재하는 사회제도가 그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고, 한나라의 국민의 기본으로 누려야할 제도적 장치가 잘 되어 있는 국가는 무신론자에 대한 배척이 크게 도드라지징 않으며, 대한민국 또한 무신론자에 대한 혐오증은 거의 없다.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진 것은 수렵문화에서 벗어나 농경사회로 바뀌면서 공동체가 형성되고, 거대 집단이 만들어지면서 종교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건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 능력이 인간의 정신을 종교적 믿음으로 연결짓게 된다. 인간 스스로 육체과 정신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고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 그것이 바로 신이 탄생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으며, 신은 초자연적인 감시자로서의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받게 된다. 비도덕적인 행동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알지 못해도 신은 분명히 알고 계실 거라는 생각을 인간은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들과 만남 속에서 밎음과 신뢰,협력이 만들어지며, 교류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낯선 나라에서 낯선 환경에서 낯선사람과 만남을 가지면서 경계를 하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면에는 서로간에 암묵적인 종교적 가치관이 있으며, 절재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해서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터키와 인도 한국은 긴장도가 높은 반면, 아이슬란드, 우크라이나. 뉴질랜드와 같은 나라는 이완도가 높다. 그 차이는 영토 분쟁이 일어난 나라일수록 긴장도가 높은 나라이며, 사회적 결집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인 성향 또한 강하다. 한국에 있는 대표적인 종교, 개신교,불교, 가톨릭의 성향이 다른나라보다 도드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인 결집은 국가 권력에 순응하는 반면, 국가 권력이 그 권한을 남용할 때 국민들은 집단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일어난 응원문화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촛불집회를 하는 모습들은 대한민국 안에 존재하는 긴장도가 현존하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이 책은 대체로 미국 안에 존재하는 신에 대한 개념과 그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다양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신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과정을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전쟁이 종교와 연결되지만, 종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사회 깊이 뿌리내리고 잇는 그 이유는 종교가 있음으로서 사회적인 교류가 있으며, 서로간에 믿음을 가지고 교류하기 때문이다. 법과 도덕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종교가 해결해 줄거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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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6-11-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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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새창으로 보기





















초자연적 감시자라는 종교적 개념이 거대 사회를 만들었고,



거대 사회의 필요는 거대 신을 숭배하는 친사회적 종교를 키웠으며,



종교와 신의 도움 없이도 협력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복지사회는 이제 종교의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이 책은 사실상 종교의 종말을 예언하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그것이 '종교'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는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종교'를 객관적으로 통찰해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간입니다. '내가 믿는 바'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점검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처럼 종교사회학은 물론 "문화진화론, 인지과학, 사회과학, 종교 심리학 분야"(352)의 이론을 '통섭'한 책을 만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이 책이 던지는 첫 질문은 "인류는 어떻게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구성원들 간에 결속력이 강하고 고도로 협조적인 거대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해올 수 있었을까?"(13) 하는 점입니다. "결속력이 강한 소규모 집단에서 유전적으로 무관한 익명의 낯선 이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규모로 지속적으로 협력을 실천하는, 익명의 거대한 사회로 급격히 변모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알려진 동물 종은 인간밖에 없다"(18-19)는 놀라운 현상에 주목한 것입니다. "거대한 신들을 섬기는 친사회적 종교"가 바로 그 비밀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종교의 감시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초자연적 감시자'라는 개념을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요? 저자는 이것이 인지기능의 진화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종교는 생각하기 쉬운 직관에서 흘러나오지만 과학은 이런 직관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개념으로 대처해야 하는 힘든 지적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따라서 과학은 무신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주장이 흥미롭습니다(324). "인간의 뇌는 종교를 쉽게 받아들이지만 과학과 무신론을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349).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발생적인 종교가 인류의 필요에 의해 '거대 신'으로 성장해왔고, 이제 복지사회가 그 기능을 대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무신론자가 증가하는 것도 그 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초자연적 감시자라는 종교적 개념이 거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여덟 가지 믿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1. 보는 눈이 있으면 언행을 삼간다.



2. 종교의 효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3. 지옥은 천국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4.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는다.



5. 신앙심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6. 숭배 받지 못하는 신은 무력한 신이다.



7. 거대한 집단에는 거대한 신이 필요하다.



8. 종교집단들은 다른 집단과 경쟁하기 위해 자기 집단 내에서 서로 협력한다.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는 이 "여덟 가지 믿음"이 어떻게 거대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며, 모든 주장은 "10장 신 없는 협력" 사회를 향합니다. 제1장부터 9장까지는 "10장 신 없는 협력 사회"를 논증하기 위한 과정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보통 이런 책들은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기 쉬운데, (실험의 조작과 통제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흥미로운 실험을 예로 논증을 펼치기 떄문에 생각보다 재밌고 수월하게 읽힌다는 것이 장점이기도 합니다. '일요일 효과' 같은 실험같이 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실험들이 많습니다. 또 학문은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저자의 내공이 깊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매 장마다 흥미로운 질문들로 논증을 이끌고 나가는데, 이 책의 주제를 이끌고 나가는 커다른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부 종교적 믿음과 관행들은 지난 1만여 년 동안 어떻게, 왜 대규모 협력사회를 출현하게 했는가?" 둘째, "이런 과정을 통해 친사회적 종교는 어떻게 문화적으로 전파되었고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는가?"(27)







진화론적 세계관을 가진 저자는 사실상 이 책에서 "거대 신"의 종말, 다시 말해 종교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속 사회는 종교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저자는 세속 사회가 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하며, 지난 몇 백년 만에 거대 신을 믿지 않는 거대 집단들이 출현하고 번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의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태부족"이라고 말을 아끼며, "하지만 서로 다른 다양한 종교들 간의 갈등, 종교와 세속적 삶의 방식 간의 알력은 다음 세기에도 계속해서 이 세상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리라는 점만은 분명하다"(351)는 다소 안전한 결론(?)을 내놓습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진화론적 세계관, 의존은 나약한 것이라는 신화, 견고한 논리(그럴듯한 설명)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흥미로웠던 책입니다. 사실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미키마우스, 산타클로스, 제우스가 왜 거대 신이 될 수 없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한 독자라면 충분히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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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딸 2016-10-2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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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6

박노자 강연 :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 네이버 블로그

박노자 강연 :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 네이버 블로그





박노자 종교 강연회 전문

출처 : 다함께 -  http://www.alltogether.or.kr/0330french/0318pnj.html

"짓밟힌 자의 신음소리"

이 글은 지난 3월 18일 연세대에서 열린 '종교·진

보운동·사회주의' 강연회를 녹취해 정리한 것이다.

하필이면 왜 이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일종의 변명 같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1∼2년 전에 민중 신학과 가까운 한 기독교 계통의 잡지로부터

현대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죄송합니다. 못쓰겠습니다' 그렇게 넘어

갔습니다. 제 학술 분야가 원래 기독교보다 고대사였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좀더 많

이 한 부분도 있었고, 또 신자가 아닌 신분으로 비판하기에는 뭔가가 쉽게 내키지 않

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사실 그때 제가 거절의 말씀을 드렸을 때 어떤 생각

이 들었는가 하면 이건 굳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결국 불교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만

'기업 활동에 대해서 이념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기업 활동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얼핏 보면 신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은 신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 현존하는 종교 조직에 대한 발언입니다. 그

리고 사실은 외국의 사회인류학이라든가 사회학 같은 부문에서는, 특히 종교사회학

에서는 요즘 '종교 시장'이라는 용어를 거의 별 거부감 없이 쓰다 보니까 저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 한국의 경우 사찰이든 교회든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

하면, 일종의 기업 활동으로 보이는 신앙 활동의 형태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이념적 입장에서 비판하기가 왠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활동이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아는 소위 기복 장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회를 찾을 때는 마음 속에 일종의

거래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찾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말씀이지요. 예컨대 "내가 열

심히 신앙생활 하고 기도하면 내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하겠지" 하고 생각할 때 여기

서 신의 축복이란 게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기도를 잘 하면, 대학교 입학뿐 아니라 예컨대 직장에서도 인간 관계가

원만해져서 안 짤리겠죠. 그러니까, 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하느님의 축

복을 받아 결국에는 여유있는 생활하고 잘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

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 신이나 어떤 초

자연적인 힘과 거래할 수 있다”는 조직에 가입해서, 헌금이라는 이름이든 성금이란

이름이든 불전이란 이름이든, 어떤 명목으로 거기에다 일종의 물질적 대가를 바치고

그 대신에 상당히 현실적인 성격의 축복을 돌려 받는, 성격의 신앙 생활이 우리한테

는 아주 익숙해진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기복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복 신앙은 꼭 구체적으로 ‘자녀 입학하게 해 달라',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 하는 것뿐만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현실 생활이 원만하고, ‘현

실적인 잣대'로 봤을 때 행복한 생활을 초자연적 힘에 의해서 돌려받으려는 것이 기

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이든 교회든 수많은 종교단체에서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기복을 제공함

으로써 상당한 대가를 받고, 또 그 대가로 사찰의 경우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대형

불상을 짓고, 교회 같으면 단일 교회로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말하자면 기

복 장사를 잘 한다는 것을 건물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결국 그런 거래나 장사에 대해서 이념적 입장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기복 장사, 종교를 신통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와 거래

하는 곳으로 이해한다는 것, 또는 종교의 대상으로 신이나 초자연적 힘, 또는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제그제 생긴 일이 아니

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때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이차돈이 누군지 기

억하십니까? 신라 법흥왕 때의 순교자 이차돈을 잘 기억하시겠지만, 왕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도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시킨 거죠.

대신들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이차돈을 죽였는데, 결국 대신들의 반대가 무로 돌아가

사회관련 자료

박노자 강연 :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독학자

2006. 4. 1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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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이야기인데, 혹시 여러분은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삼국유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동기가 됐는데, 이차돈

이 참수당하기 직전에 ‘만약 부처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부처님에게 기적을 일으킬

권세가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참수당한 뒤

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 대신에 하얀 물, 그러니까 우유와 같은 색깔의 하얀

물이 갑자기 목에서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부처가 대단한 신통력

을 가진 무서운 신인 줄 알고 거기에 감복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이고, 불교를 믿는 수행자의 목을 칠 때 하얀색

의 액체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붓다의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에서 많이 읽을 수 있

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설화로서는 유래가 깊은 설화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신라에

서 생긴 설화도 전혀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신라 사람들한테 초

기의 붓다, 초기의 부처가 바로 기적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그런 신통한 존재였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 승려나 순교자 이차돈 같은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킬 만한 신통

력의 소유자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백제가 불교를 일본에 전달했다는 것을 상당한 민족적 긍지로 삼는데, 만약

≪일본서기≫, 일본의 공식 역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

수했을 때, ‘부처를 믿으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이고 붓다가 나라를 지켜줄 수 있

다'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 지배자의 입

장에서는 붓다라는 신이 힘이 세고 무서운 신통력을 갖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

런 초자연적 존재였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종교에다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고,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섭고도 신비한 도사로 생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 역사 속에 상당히 깊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기가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기복과 오늘날의 기복은 상당히 다릅니다. 기복은 복을 빈다는 이야기인

데, 복을 누구를 위해서 비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자녀가 수능시험을 볼

때 어머님이 사찰에 가서 대입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입 기도라는 게 결국

내 옆에서 기도를 하는 다른 아줌마의 아들보다 내 아들을 먼저 입학시켜 달라는 이

야기가 들어 있는데(청중 웃음), 기도는 같이 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상당한 경쟁 관

념이 내재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대의 기복은 완전히 장삿속이 되기도 하지

만, 아주 원자화된 개인, 말하자면 옆의 아줌마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만을 입학시켜

달라는, 개인?개체 위주의 장사인데, 전통적인 기복이 이것보다는 약간 차원이 높았

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때 미륵상이나 아미타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어떤 명을 새겼는

가 하면, 나의 부모를 비롯한 칠세(七世) 친척들을 극락왕생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국토가 태평하고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게끔 하소서 하는 명을 새겼습니다. 결국

나뿐만 아니고 국가 전체가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뭔가를 받도록 비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기복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이미 문화 속에 얽히고설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 때는 그것에 대

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왠지 참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 때 제게 어떤 생각이 들었냐하면,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 삼기가 어려울 수

도 있습니다. 기복 장사에는 사찰이나 교회라는 공급자가 있는가 하면, 그 장사를 제

발 해 달라고 하는 수요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사찰들이 갑자기 없어

지고 수요만 그대로 남는다면, 예를 들어 무당이나 점쟁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요자로 하여금 이런 기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상황이 있

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급자나 수요자만을 인격적으로 탓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삼을 순 없다 하더라도 소위 ‘상도덕'은 문제삼을 수 있

는 부분입니다. ‘상도덕' 아시죠? 장사할 때 그래도 어기면 안 되는 일종의 ‘상도'가

있는데, 기복 장사하는 과정에선 이것이 너무도 많이 어겨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

어서 일반 재벌들끼리 장사를 해도, 만약 LG 휴대폰 쪽에서 ‘삼성 휴대폰이 곧 고장

날 것이니 삼성 휴대폰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행복하게 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악

성 흑색 광고를 낸다면 이것은 아마 당장 재판을 받아 상당한 돈을 물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불신지옥'이라고 외친다면 이건 사실 LG 휴대폰

만이 진리고 삼성 휴대폰이 거짓이라는 말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에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그걸 또 ‘불신지옥'이라고 외칠 때에는 꼭

‘불신(佛信)지옥', 그러니까 ‘불교를 믿는다면 지옥이다' 라고 들리기 때문에... (청중

웃음)

이것은 상도덕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도 장사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청중 웃음)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기업체에서는 고용자를 막 다루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한다고 해서 삼성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데 삼성말고 무노조 경영하는 곳이 ‘종교 재벌'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혹시 대형

교회나 대형 사찰에서 노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죠?(청중 웃음)

사실은, 삼성보다 대형 교회에서 주인이 아닌 ‘밑에 사람'으로 일하기가 훨씬 불안합

니다. 대형 교회의 부목이나 전도사, 운전사 정도면 ― 뭐 월급이 박한 건 그렇다 치

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상황이죠. 주목의 마음에 안 들고 노선을 달리 하면 자르는

데 별 절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노조를 만드는 시도를 2년 전부터

한 것 같은데, 아직 대다수 대형 교회들에 노조가 없습니다. 고용된 사람들이 많은데

도 말입니다.

대형 교회도 그렇지만 최근 부산의 삼광사라는 대형 사찰에서 노조 탄압 사건이 일

어났습니다. 비정규직 사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다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

를  <매일노동뉴스>에서 알게 됐습니다. 결국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장사를

해서는 무노조 삼성보다 더 못된 장사가 될 것 같아서 좀 문제가 있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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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를 들어, 아무리 장사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업체가 정치에 부당하게 압박을

주면 안 된다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노무현 정부가 미국

과 FTA 투자 협정을 맺고자 하는데 실제로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가장 혜택을 볼 기

업체가 어느 기업체인지 뻔하거든요. 삼성입니다. 삼성에서는 아마도 FTA가 맺어지

기를 대단히 바라고 있겠지만, 만약에 삼성이 이를 위해 정치권에 상당히 노골적인

로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미군을 찬양한다든가 ‘We Love Americ

a!'를 부른다면 이것도 결국엔 일종의 기업체의 정치적 압박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

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역사적 관계도 있고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지는 부

분이 많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의 정치를 한 집단 위주로 하려고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또, [그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올 때 드는 생각은, 미국의 정치인들이나 주류 지식인

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 중 하나, 즉 미국을 ‘새로운 로마제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로마제국'처럼 미국이 전 세계를 다스리면서 사람들한테 라틴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 주고 공동 문화를 만들어 주고 문명의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

것은 미 제국의 주류 지식인들이 제국을 옹호하는 입장의 골자 중 하나인데, 그러면

미 제국의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에는 새로운 로마제국의 깃발을 들고

다니는 꼴이 되는데, 예수를 못 박아 죽인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 아닙니까? (청중 웃

음) 그러니까, 그런 역사적 관계까지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로마제국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숭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무한의 힘의 상징인 성조기를 숭배하는 것인지 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업체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 삼는 부분이 ‘탈세'인데, 종교단체 같은

경우엔 탈세도 아니고 ‘무세'입니다. 세금을 아예 안 냅니다(청중 웃음). 만약, 주요 종

교단체들의 수익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많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예컨대 대형

교회에서 세금을 내서 그 세금 전액이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의 실천에 쓰인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선에 쓰인다든가 이런 조건을 내세워 세금을 낸

다면 이것은 교리에 반대되는 부분이 전혀 없을 텐데, 어쨌든 탈세도 아닌 ‘무세'라니

이건 참 ‘상도덕'상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청중웃음).

또, 제가 늘 한국 종교에 관해 문제 삼고자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상품 강매'입니다.

일반 회사가 그렇게 하면 당장 걸리겠지만, 예를 들어 종교 재단이 세운 학교에서 학

생들한테 예배시키는 것은 결국 ‘상품 강매'와 다른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

인들이 신앙 시장에서 본인들의 상품을 열심히 마케팅하고 추진하는 것까진 좋은데,

본인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한테까지 그 상품을 사게끔 강제한다면

이건 헌법상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상도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주류 종교를 얘기할 때, 이것은

단순히 기복 장사로만 얘기할 수 없는 성질의 훨씬 더 복합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

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한인 사회에 왜 하필이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가 물어보면 그것은

신앙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교회가 일종의 네트워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 사회나 유럽의 한인 사회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돼 있습

니다. 교회들이 일부러 왕따 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당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그것이 좀더 극명하게 나타날 뿐이지만, 한국 안에서도 보이게 또

는 보이지 않게 교연, 즉 교회와 교맥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흔히 ‘관계 자본'이라고 말하는 3연, 즉 학연?혈연?지연말고도 ‘교연'을 분명히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나 사찰의 경우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사회나 기존 질서에 뭔가 신성한 듯한 외피를 덮어 주고 기존 질서를 합리화하

는 데 신의 도움을 받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한국 사

람이 평생 살면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공인(public figure)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일찍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주의적인 주입을 받아 국가를 대단한 숭

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국가를 존경하기가 좀 힘들어요.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다들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추상적인 국

가'를 숭배해도 ‘구체적인 국가'를 존경하기란 좀 힘듭니다. 존경하고 싶어도 곧잘 무

슨 최연희 의원의 성파문이든 무슨 파문이든 (청중 웃음)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추상적으로 운동 경기에서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든가 태극기로 상징되는 추상적인 대한민국이 숭배 대상이 돼도 구체

적인 대통령, 국회의원, 고급관료들이 존경 대상이 되기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학교 의식이라든가 어떤 공적인 의식

에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아마 참석자들이 대단히 좋아할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노무현 씨라는 한 개인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대통령직에 추상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대통령도 왔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위계 서열에서

는 대단히 높은 사람이 온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노사모 빼고는 인격적으로

노무현 씨를 아주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청중 웃음)

그러니까, ‘추상적인 권위 인정'과 ‘구체적인 인격적 존경,' 이 두 가지는 조금 다릅니

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가 제도적으로도 존경하게끔 돼 있지만, 좀 신비한 옷을 입고

신비한 말씀을 하고 뭔가 신성한 듯한 아우라(청중 웃음), [즉] 후광을 갖고 나타날 추

기경님이나 큰스님이다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제도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존경까지도 하게 돼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이 이 체제가 나쁘다든가, 이 체제를 우리가

빨리 바꿔야 한다든가, 이 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말씀을 잘 안 하시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청중 웃음), 사실 맞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도 잘하시기 때문에, 이 분들의 존재 자체는 체제를 상당 부분 합리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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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높으신 스님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에 인터뷰하시고

법문다운 좋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별 문제가 없어도 ― 어차피 그 말씀

상당 부분이 당나라 후기나 송나라 때 선사들의 책에서 다 베낀, 이미 역사적으로 검

증된 말씀이라 별 문제는 없는데 ― 주류 언론에다가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는 대한

민국 제도권의 권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이 체제가 인간이 살 만하고 이 체제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라는 환상을 피지배자들한테 상당히 효과적으로 덮어씌우는 면이 있는 건

데 이것은 굳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작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

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주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피임을 종교적 죄악으로 본 겁

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맞다 틀리다 하는 건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특히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에이즈가 지금 대단

히 치성(熾盛)을 부리고 있어서 예컨대 잠비아나 나미비아의 경우에는 에이즈에 전염

된 사람이 이미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입니다. 이미 나라가 멸종으로 치닫고 있

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보호 없는 섹스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대단히 위협할 만한 부

분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교시에 피임하지 않을 경우 곧잘 에이즈가 전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황의 말씀을 듣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에이즈에 걸려 죽은 사람이 과연 몇 만 명이 되는지 대단히 궁금할 따름입니

다.

낙태 수술에 대한 교황의 입장도 아주 단호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어차피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가는 결국 사회적 살인처럼 되게 돼 있습니다. 그

런데 낙태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종교 입장을 따라서 많은 여인들이 결국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빠뜨렸는지 생각

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을 적에 한국 언론들도 그렇지만 외국 언론에서도 그

것을 언급하는 언론이 몇 군데밖에 안 됐고, 대다수는 요한 바오로를 거의 새로운 성

인으로 모시고 그랬습니다. 요한 바오로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여러 언론 중에서도

한두 군데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의 권위는 세계 지배계급에

게 그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굳이 한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성하다 싶은 지도자로 상징되는 종교가 원자화?개체화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여러분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생

활이나 인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여러분의 불행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언제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행복

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신과 종교

라는 매개체를 통해 거래하면 일단 개인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죠.

그런데, 이 메시지는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 예수님이나 부처님하고는 별 관계가

없고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비자이자 노동자

들한테 모든 사회적 문제를 인격이나 수양 문제로 돌리기를 원하는 게 아마 자본주

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기복 장사하는 기업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기업체의 정체는

체제 전체를 합리화하고 공고화하고 아주 당연할 뿐만 아니라 거의 신성하다 싶은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맑스가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제일 유명해졌는데, 그 문장에서는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종교는 맑스가 보기에는 ‘짓밟힌 존

재의 신음소리이자 민중을 위한 아편'이라고 이야기한 건데, 그런 면에서 맑스는 신

음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게 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

다. 맑스는 종교가 단순히 위에서 강요하는 ‘아편'이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을 사람들이 바꾸지 않는 한은  결국 민중이 저절로 찾게 돼 있는 불가피한

것, 또는 일부분이나마 민중의 현실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종교 이단들이 바로 민중의 반항 의지, 저항 의지를

대변했고, 말 그대로 민중의 신음소리를 담았다는 것이 맑스의 종교론이기도 했습니

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의 한국 현실을 중심으로 본다면 종교는 과연 ‘짓밟힌 존재

의 신음 소리'에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민중을 위한 아편'에 더 가깝습니까? 둘 다

종교의 기능을 묘사하는 얘기인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보다 그 신음 소리를 진통시켜 주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

처가 아프지 않게 진통시키는 일종의 마취제에 더 가까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아주 아플 때 마취제를 먹게 돼 있지만, 마취제?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당분간 아프지는 않겠지만 상처는 그래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무엇이냐면, 지금의 종교가 기존 체제를 옹립하고 합리화하

고 체제로 인한 개인의 불행을 개인적인, 상당히 자기 기만적인 행복으로 바꿀 수 있

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들의 원래 모습이 과연 맞

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교가 정말 민중을 위한 아편 정도라면 하필이면 기독교나 불

교, 이슬람이 왜 그렇게 오래도록 존재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

니거든요. 기만이라면 상당히 빨리 깨우칠 수 있는 부분인데, 또 실제로는 신음하는

소리, 짓밟힌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담지 않은 종교는 지금 봤을 때는 그렇게 오래

안 가요.

예컨대, 최근에 만들어진 소위 신흥종교들 중에는 상당히 빨리 쇠퇴하는 종교들이 꽤

있는데, 통일교만 해도 1960~70년대에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교세 확장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실제로 교세가 상당히 쇠미해졌습니다. 기존의 신자도 많이 탈락하고

새로운 신자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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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중 하나는 실제 통일교 교리에서는 이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를 거의 들

어볼 수 없다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선명한테 카리스마가 있지만 문선명

이 미국의 지도층?지배층하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무래도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

리” 듣기에는 조금 어려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신흥종교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대개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를 담아 주지

않는 종교는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이 때까지 장수해 온 비

밀이 있다면,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분명히 민중 편에 섰던

것이고, 민중의 그 신음 소리를 많이 담고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쪽

으로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나 붓다, 무하마드의 카리스마

를 이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용하려면 일단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붓다나 예수님, 무하마드에게 그 카

리스마를 만들어 준 것이 아마도 종교 속에 담겨 있는, 그러니까 초기 불교나 초기

기독교, 초기 이슬람에 담겨 있는 상당히 강력한 평등 정신이나 저항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저항 정신이란 말이 아마 지금의 불교를 보면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

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제도 불교는 저항과 전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데, 실제

로 붓다라는 사람 ― 원래 상류계급에 속했다가 진리를 찾겠다고 혼자 뛰쳐나와 6년

동안 고생해 결국 뭔가를 깨달았다는 그 붓다 ― 은 그 깨달은 것이 공(空)과 연기(緣

起)라는 진리였는데, 이 진리대로라면 당시 인도 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나 남녀차

별이 사실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불경을 통해서

는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대다수 불경들이 붓다가 죽은 뒤 4~5백 년 뒤에 만

들어진 글들입니다. 거기에 붓다가 그렇게 말했다고 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관

계 없습니다. 실제 붓다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초기 경전들 중에서도 붓다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마 ≪숫타니파타≫라든가 그 정도 경전 몇 개

이고요, ‘니카야', ≪아함경(阿含經)≫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기 경전도 붓다가

죽은 지 훨씬 뒤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실제로 무슨 얘기를 했

는지 아마 ≪숫타니파타≫를 보면 대충 알 수가 있겠지만 ― 윤색된 부분도 있고 가

미된 부분도 있습니다만 ― 붓다는 처음에 깨닫고 나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평등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진정한 바라문이 무엇이냐? 바라문은 인도의 성직자 계급입니다. 당시에는 계급 질

서 맨 위에 있었다는 성직자 계급인데, 이 바라문에게 붓다가 얘기한 것은 사람 귀하

다는 것이 결국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

절대 차별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내 종이다, 내 종이 아니

다. 동류다, 이류다' 이렇게 서로 차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다 이런 얘

기를 한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이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만들어지는 이유와 결과의 순환이다” 이런 것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영

구한 계급 차별이라는 부분이 개입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만든 것입니다.

붓다는 만인 평등을 외치기도 하고, 동물 죽여서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원칙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또, 붓다의 생활 방식

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탁발 아니었습니까? 탁발이라 하면 동냥을 구하는 것인

데, 실제 붓다가 탁발하면서 뭘 했었냐면 요즘 말로 아마 심리정신과의 상담 같은 것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이 밥을 줄 때는 뭘 물어보지 않습니까? 붓다가 그 대답

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생활 문제 풀어 주고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얘기해

주고, 말하자면 상담을 해 주고 식량을 받는 그런 거래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민중과

아주 가까운 생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붓다는 기적을 절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통력이나 기적이라는 부분은

붓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한 여자한테

붓다는 ‘그래요? 한 번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에서 친척 중에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사람을 한 번 찾아 주면 제가 당신 아들도 부활시켜 보겠습

니다' 하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무슨 얘기냐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신통력,

초자연적 힘, 신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붓다는 대단한 카리스마

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민중한테 붓다는 존경받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에게 한 가지 좀 아쉬운 점은, 붓다는 일종의 초기 공산주의적인 공동체

인 승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제자, 수행자들

과 함께 숲 속에서 살기로 한 것인데요. 그것은 어찌 보면 민중과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그런 저항의 태도, 아주 소극적인 저항의 태

도에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붓다는 자기 부인 야쇼타라와 아들 라후라를 내버려두어도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훨씬 더 부담이 큽

니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대개 수행 생활을 해도 되는 상당한 재력과 위치

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결국 그 사람들이 붓다가 죽자마자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편한 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붓다의 제자 중에는 노예 출신들

도 있었는데, 붓다가 죽고 나서는 노비는 스님이 될 수 없다는 계율이 만들어졌습니

다. 그러니까 노비나 왕의 고용자한테는 스님이 되는 기회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가 했는지 아니면 그 제자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 아마도

초기 불교의 주류 승단에서 한 것 같은데 ―, 처음부터 여성이 승려가 되는 데 대단

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팔경법'[尼八敬戒]이라는 건데, 여덟 가지로

여승이 남자 승려를 공경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 어린 남자스님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여자 스님이 먼저 꼭 절해야 한다든가 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붓다

에게 가탁(假託)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자들이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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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불교는 상당 부분 아주 초기부터 왜곡되기 시작했고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

는데, 인도를 통일했다는 아쇼카왕 때는 불교가 왕의 국교가 돼서 거의 원래 정신을

이미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으로 유입된 불교는 이미 절대평등

주의적이고 남녀평등주의적인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계 없다 싶은, 이미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붓다라는 스승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후기의 승단, 후기의 승려들이 그것을

계속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고, 바로 그런 붓다의 카리스마는 불교가 그래도

죽지 않고 계속 민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한 묘사는 기독교에 대한 묘사와 놀랍게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복음서를 읽

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특히 누가복음에는 계급투쟁적이라 할까요. 상류 계급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이 담겨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배

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리라' 하고 돼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은 체제에 편입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도 그렇지만 그런 체제 반대적인 발언들이 가장 많은 책이 요한계시

록입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으로 기술을 하고, 하

나님의 나라가 올 때 로마제국이 망할 것이고, 로마제국에 협력했던 부자들이 결국

벌을 받을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최종 편집되는 것은 180년

대라고들 추정하고 있습니다. 180년대에 이미 기독교는 거의 체제에 편입된 종교였

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체제에 협력하고 있던 교단 지도자들이 ‘부자들이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없다'는 예수의 진짜 말씀을 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

습니까?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예수의 카리스마가 그 사람들한테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만약에 부자들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2세기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화됐는데, 그래도 예수의 원래 정신은 상징적으

로라도 복음서에 담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예수의 정신이 있

었기에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짓밟힌 사람들한테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런데 복음서의 편집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합리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게 4복음서 ―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 ― 에는 재미있게도 노예의 존

재나 노예제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겁니다. 예수가 살았다고 믿어지는 1세기 초반

에는 노예제가 경제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노예들이 대단히 많았고, 예수가 부자 보고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다면 분명히 노예 문제에 대해 발언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노예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 그러니까 기독교 보수

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 하고

말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대로 신약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까 결국 그 편집 과정에서는 말하자면 대중한테 어필할 수 있는 미끼 밥을 남겨 두기

는 했는데, 상당 부분은 바울 사도와 그 제자들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메워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또 아주 재미있는 예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

라는 사람은 메카라는 상업 도시에서 ‘거지가 왜 이렇게 많은가. 왜 부자들은 이렇게

잘 살고 못사는 사람은 왜 이렇게 못사는가' 이런 불만이 출발점이 돼서 새로운 종교

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무하마드와 그 공동체가 메디나에서 망명중이었을 때, 당시

에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무하마드의 집뿐이었는데, 그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

께 예배를 봤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가 죽고 나서 무하마드의 계승자 우마르가 거의 맨 먼저 개악을 한

것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는 예배를 따로 봐야 한다'는 법률을 정한 겁니다. 무하

마드의 원래 육성을 담은 코란의 기록을 보면 여성의 권리를 상당 부분 주장했습니

다. 이혼권이나 피임권리나 유산상속권이나, 여자와 남자는 원래 알라신에 의해서 평

등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등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중의 이

슬람 율법을 보면 이게 상당 부분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슬람권의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상당 부분 서구의 페미니즘에서도 영

감을 받지만, ‘무하마드의 진짜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을 페미니즘

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보든, 기독교를 보든, 불교를 보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계급 사회에

서 고등 종교의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 제가 뭔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

는 입장에서 기존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

는데, 이제 그것을 결론 삼아 끝내겠습니다.

결국 지금 성직자 집단이 대표하는 기존의 제도권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그 종교를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

나 다릅니다. 사실, 옛날에 한용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약 붓다의 가르

침이 맞다면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해야 하

는가. 나 자신에게 절해도 되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또는 “명부전에 가서 부모님들이

나 내 자신이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재판관한테 뇌물 주는 것하고 무엇

이 다르냐. 결국에는 내가 죄가 없으면 왕생할 거고 죄가 있다면 아무리 빌어도 안

될 텐데, 뇌물 주듯이 비는 게 다 뭐냐”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살려서 우리가 기존 종교가 분명히 그 원래 정신과 다른

부분을 당연히 비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맑스주의자가 된다 하더라

도 속류 맑시스트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종교, 그 정체는 무용지물이다. 마약이다'

하고 버리기보다는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의 진짜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사람

들한테 그렇게 많은 민중이 모였는지, 왜 그 사람들이 지금도 민중한테 이렇게 귀중

한 이름들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빈민들의 집에 딱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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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차베스 대통령이죠. 그러니까

양쪽을 상당히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여튼 왜 하필이면 수많은 빈민들한테 예수는 지금도 이렇게 영감을 주는지, 우리가

진정한 맑시스트라면 스탈린주의 식으로 종교를 무조건 팽개치기보다는 종교를 비

판함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원래 종교의 모습에 대해 나름으로 애착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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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자와의 대담

김하영 :

무릇 모든 종교에는 보수파와 진보파가 있습니다. 가령 불교의 경우, 일본제국주의와

박정희의 “호국불교”가 있었는가 하면, 암베드카르를 지지한 인도 불가촉 천민(달리

트)의 불교가 있었고, 또 1980년대 한국의 “민중불교”가 있었습니다. 박노자 동지의

경우 민중불교와 흡사한 데가 적잖이 있는 듯합니다. 민중불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

십니까?

박노자 :

한국에서 민중불교의 창시자는 바로 만해 한용운 스님입니다. 민중불교는 일본과 한

국에서 1920~30년대에 상당히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민중불교의 주장이 결국 이거

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사찰들이 산송장,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시체

에 불과한 것이고요, 붓다의 원래 정신이 초기에 수행자 공동체, 즉 승가의 무소유 공

산주의적인 생활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원래 승가에서는 한 승려가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옷 한 벌과

밥 그릇 하나 정도였고요, 민중한테 상담을 해 주고 민중한테 여러 가지 살고 죽는

일에 대해서 생각을 심어 주고 식량을 받아 살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원래 불교

에서 모든 고뇌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게 ‘탐진치(貪瞋痴)'라는 건데, ‘탐진치'가 뭐냐

하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한용운 스님도 그렇고, 일본의 민중불교

도 그렇고, 성냄이나 어리석음보다 가장 무서운 게 탐욕이라고 생각했고, 탐욕을 그

기반으로 삼으면서 늘 재생산시키는 자본주의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자본축적과 확대재생산이라는 것이 심리적으로 분석하자면 결국 탐욕과

공포 심리 없이 개인 차원에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이 가지려고 탐욕을 내고 낙오

자가 될까 봐서 늘 겁에 질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세계는 만약 축적이 안

되고 확대재생산이 안 되면 죽게 돼 있는 세계인데, 공포와 탐욕의 이중주입니다.

그래서 민중불교는 거기에 주목을 해 “자본주의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중생들이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불교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의 삶은 자본주의 하

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낸 겁니다. 그래서 일본 민중불교 같은 경우 전후에 소

수자로나마 남아 있고, 비판불교라는 이름으로 1970~80년대에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는데, 한국 같은 경우 잘 아시겠지만 1950~7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얘기를 꺼낼

수 없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민족 지도자로 상당히 우상화됐는데, 그렇다고 해도

만해 한용운의 진짜 사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하영 :

불교가 초기 단계를 벗어날 때 보인 모습은 그리스도교의 수도원 운동과 닮은 데가

많은 듯합니다. 초기 불교의 승가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의 사회적 기반은 도시의 상인과 금융업자, 장인 들이었습니다. 이들로부터 재정 지

원을 받았던 거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기부금으로 부유해져, 노예를 부리게까지

됐습니다. 중세 스리스도교 수도원들이 농노를 부린 것처럼 말입니다. 비폭력 교리도

7세기 왕 하르샤 실라디티야의 경우처럼 아주 간단히 무시되곤 했습니다.

이런 모순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종교적 모순 때문에 또한

각 종교는 부패와 쇄신 운동이 충돌하곤 합니다. 또, 다양한 사회 계급들이 같은 종교

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충돌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합니까?

박노자 :

노예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원래 불교에서는 스님이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돼 있

습니다. 구족계를 받아야 자격을 갖춘 스님이 되는 것이고, 이 구족계는 남자 승려의

경우에는 2백50 가지 계율이나 됩니다. 그런데 구족계 내용을 보시면 ― 불교 서점에

가셔서 ≪사분율≫이라는 책을 보시면 거기에 내용이 나오는데 ― 그 계율 중에 “금

전을 취급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제정한 계율이죠. 또, “노예를

소유하거나 부리면 절대 안 된다”는 계율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계율을 진짜 계율답게 하자면, 노예 내지 농노를 부린다든가

[하는 것은] 불교 공동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아쇼카왕 때 불교가 주류

종교가 된 뒤에는 인도에서도 불교 사찰에서 노예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고요. 중국이

나 조선에서는 사찰이 노비를 부리는 데 별다른 제한이 없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에서 사대부들이 더 이상 가만두면 안 된다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서

그렇지, 빼앗기 전까지 사찰들은 주요 노비주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불교가 중국에 들어서면서부터 초기 계율을 원천적으로 무시해 왔다고 봐야 하

는데, 불교의 경우에도 이것에 대한 쇄신 운동이 몇 번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

에는 많이 안 들어왔지만, 중국에는 삼계교(三階敎)라는 중세의 민중불교 교단이 있

었습니다. 6세기, 7세기에 수나라와 초기의 당나라에서 많이 유행했는데, ‘다 불성(佛

性: 부처로서의 성격)을 갖춘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곧 평등하게 사는 것이

종교의 진짜 교리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운동인데, 당나라 중기 때 탄압을 받아 무산

됐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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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쇄신 운동이 있었다는 것은 맞습니다. 기독교만 해도 예를 들어, 16세기의 종

교개혁은 주로 루터 교회라든가 칼뱅 교회에서도 출발했지만, 또 한편으로 수많은 소

수자 교회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소수자 교회 중에는 예를 들어서 퀘이커라는 종파

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다들 아시죠? 박정희 때 곧은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이

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신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한국 종교인이 함석헌 선생이죠.

한국에서 함석헌 선생님이 한국 퀘이커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퀘이커라는 종파가 영국에서 17세기에 만들어졌는데, 퀘이커 교도들이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였고요. 국가권력을 부정했고요, 또 제일 중요한 것

으로 노예제를 부정했습니다. 미국에서 퀘이커 교도들이 흑인 노예 해방운동에서 늘

선두에 섰습니다. 수많은 다른 소수 종파들이 미국에서 노예제와 전투를 벌였던 것입

니다. 지금의 퀘이커는 그 모습이 전혀 아니지만, 18세기 이전에는 계급 타파 운동,

계급 전복적인 운동을 봐도 종교적이지 않은 운동이 거의 없습니다. 종교적이지 않은

속세적인 반계급 운동은 18세기 이후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우리

가 종교를 좀더 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양면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김하영 :

이라크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충돌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부시 일당은 미국의 보수우익 기독교인 집단입니다.

미국의 보수 우익 기독교는 어떤 성격입니까?

박노자 :

이런 얘기를 들으면 듣자마자 무엇이 생각났느냐 하면,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바티

칸의 교황청이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합니까? 절대 반대하는 거죠.

그것은 교황청이 꼭 착해서 그런 것이기보다는 만약 전쟁에 찬성한다고 하면 지금

카톨릭 신도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빈민들이 과연 가만히 두

겠습니까? 아마 신자들 대다수가 탈락할 것입니다. 어쨌든 교황청은 공식적으로 이

번 이라크 전쟁뿐 아니고 1991년 제2차 걸프전쟁도 교황청이 반대했습니다. 그러니

까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기독교는 전쟁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중에서 다수파라 할 수 있는 가톨릭은 전쟁하면 안 된다고 하니 종교 전쟁이

라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데, 아까 말씀하신 미국의 일부 기본주의[근본주의]

적인 신학자들, 부시와 상당히 가까운 기본주의적인 교파들은 대충 어떤 신앙을 가지

고 있냐면, 인류의 최후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그 인류의 최후는 바로 아마겟돈이

라고 할 만한 악과 선의 마지막 전투에서 결정될 것이고, 선은 물론 미국이고, 악은

물론 이슬람 세계입니다. 그래서 최종 전투에서는 결국 핵폭탄도 사용될 수가 있는

데, 그 최종 전투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고, 인류가 멸망함과 동시에 선택받은 자들만

이 “휴거”(携擧: “들어올림”, “이끌어 올림”의 뜻)되어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인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끔찍한 이야기인데, 어쨌든 이 얘기가 미국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배경 중 하나는 지금 미국의 중산층이 ― 한국도 그렇지만 ― 해체 중에 있다는

겁니다. 상당 부분의 중산층의 위치가 하락하고 있는데, 기본주의적인 신앙은 위치가

하락되는 중산층의 불만을 체제가 아닌 종교적인 관심으로 돌리는 데 상당히 사용되

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의 경우 전체 노동인구 중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8퍼센트도 안 됩니

다. 제조업은 그 비중이 지난 50년 동안 거의 3~4배 정도 줄어든 것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돼 지금은 아주 불안정한 서비스 직종을 찾아 헤매야 되는 것이고,

미국은 지금 의료보험이 안 돼 있는 사람들만 해도 4천만 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적 불만을 종교적인 관심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아까 말씀하신 부시와 같

은 종류의 기본주의적인 신학이죠.

김하영 :

최근 덴마크 일간지 <율란트 포스텐>이 예언자 무하마드를 모욕적으로 묘사한 만평

을 실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서방 세계에서 이슬람 혐

오가 인종차별의 가장 뚜렷하고 또 유력한 형태가 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

었습니다. 이슬람 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인터넷을 통해 무하마드 만평을 직접 보신 분들 계십니까? 어떻

게 생각하세요? 혹시 독후감이라도 있습니까? 이따가 저도 제 독후감을 말씀드리겠

습니다.

그 만평을 보면 무하마드는 모자 대신 커다란 폭탄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났느냐 하면, 코란에는 ‘만약에 이슬람교인 여러분들 중에서 기독

교인이나 유대인한테 누군가 악을 끼치면 나(즉, 무하마드) 자신이 최후의 심판의 날

에 당신의 죄악을 증거할 것이다' 하고 써 있습니다. 무하마드의 부인들 중에는 유대

인과 기독교인이 한 명 있었고요. 무하마드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 대해 상당한 호

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한테 배운 바도 있고 해서요.

그리고 실제로 유대인들에게는 중세 이슬람 국가야말로 제일 살기 좋았던 곳입니다.

그들은 중세 유럽에서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박해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래 이슬람이야말로 다른 종교, 특히 같은 계통의 기독교나 유대교에

대해 대단한 똘레랑스를 갖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자살 공격이라든가 하는 것은 종교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종교적

인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무력감의 발로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율란트 포스텐>이라는 신문이 무하마드 ―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괴롭힌

사람을 내가 최후 심판 때 고발하겠다고 한 무하마드 ― 를 마치 기독교도나 유대인

을 죽이겠다고 폭탄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무하다드 만평이야말로 종교 왜곡일 뿐이죠. 더 할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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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있겠습니까?

그 만평 중에는 또 어떤 것이 있었던가 하면, 자살 테러로 숨진 사람들이 낙원에 들

어서자 무하마드가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처녀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더 이상 여러

분들한테 붙일 처녀가 없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데, 코란은 자살 공격은 물론이

거니와 자살 자체를 아주 안 좋게 보고 있습니다. 자살 공격은 이슬람에서 주장된 적

이 없습니다.

유럽인들이 요즘은 이슬람에 대한 혐오, 이슬람에 대한 공격의 근거로 삼는 것이 이

슬람의 지하드인데, 이 지하드라는 말이 유럽에서는 가끔 ‘신성한 전쟁', ‘성전'이라고

번역되는데, 원래 지하드가 무슨 뜻이냐 하면 불교의 용맹정진(勇猛精進)과 똑같은

뜻입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이에요. 다만 알라신을 받드는 공동체를 외적이 괴롭

힌다면 지하드는 방어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용맹정진을 뜻하는 이 말이 유

럽에서 갑자기 신성한 전쟁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니, 이것은 왜곡 중에서도

아주 심한 왜곡에 속합니다. 유럽인들이 이슬람에 대해서 왜곡하고 일종의 위협으로

꾸미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식을 넘는 이야기죠. 뭐 히틀러의 반유태주의 공포하고 거

의 차이가 없습니다.

김하영 :

그리스도교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개신교의 경우 1980년대에 민중신학에 근거한

민중교회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이나 그 주의주장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습니

까?

박노자 :

안병무 선생이나 서남동 선생 등 몇 분의 저서를 읽었는데, 이분들의 이야기는 ‘우리

가 기존 교회라는 매개체를 넘어서 예수라는 사건, 예수가 나타났다는 그 사건을 직

접 체험하고, 우리와 그 사건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는 역사 속의 예수도 있는데 역사 속의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

스 말로는 ‘오흘로스'(ochlos), 즉 민중이죠. 그러니까 민중에게 둘러싸여 있고, 민중

을 위해서 부자들은 축복받을 수 없다고 말한 예수라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우리들

사이에도 예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주장이었습

니다.

민중신학자들 중 몇 사람은 전태일 분신 사건 때 대단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분

신하고 있는 전태일을 보면서 예수를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예수와 같은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을 위해 이렇게 자기를

아끼지 않는, 그리고 민중편에 서서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고, 평등한 세계가 오

게끔 노력하는 것이 예수를 재현하는 하나의 체험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원래 기독교 정신을 회복하자면,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민중신학이 하나의 첩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쉽게도 한

국에서 1970~80년대 민중신학의 열기가 높았다가 결국 그것이 주류 교회에서 따돌

림을 당해서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화되지 못했습니다. 대단히 아쉬운 일이죠.

함석헌 선생님 같으면 민중신학자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실제로 함석헌의 기독

교 이해는 주류 신학하고 너무 달랐습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아마 20세

기가 낳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비주류” 신학은 귀중한 문화적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김하영 :

천주교는 최근에 교황이 바뀌었습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전 교황 요한 바

오로 2세 못지 않은 보수파, 전통파인데요. 최근 우리 나라에서 새로 추기경이 된 정

진석 추기경도 사회 문제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분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더는 198

0년대의 진보 인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제는 진부한 얘기가 됐죠. 반면에, 천주교 고

위 성직자층의 이런 보수화에 저항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목소리는 들릴까 말할 할

정도로 미약한 듯합니다. 왜 이런지 설명해 주십시오.

박노자 :

한국 천주교는 재미있는 부분인데요. 1970년대 천주교는 반독재 운동의 대명사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외국 학자들이 많이 지적한 부분입니다만, 사실 1970년대

한국의 천주교는 정치적으로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학적으

로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오로지 개신교 속에서, 그것도 기독교장로회를 중심으

로 해서 일어난 것인데, 천주교 같은 경우 신학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에 그대

로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천주교가 군사독재에 반대했던 것은

군사독재가 그만큼 부르주아적인 사회질서를 위협한다는 의식이 있어서였기도 했습

니다.

대개 부르주아 질서로는, 소위 제도적인 민주주의 이상으로는 안정적인 것이 없거든

요. ‘박정희가 결국 나라를 파멸로 끌고간다, 박정희의 무제한 종신 집권 같은 성격의

군사독재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잘못하면 사회적인 급진적 변동의 가능성까지

열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하자면, 1970년대부터 이분들은

박정희를 일종의 불안 요소로 간주해서, 정상적으로 부르주아 국가가 작동되기 위해

서는 박정희가 물러나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에는 사실 더 이상 한국 천주교가

바랄만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신학적으로 한국 천주교는 사실 중남미의 해방신학

같은 진보적 흐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질서가 회복됐다

면 이 질서를 옹호하는 데 그냥 사력을 다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면에서는 김

수환 추기경이라든가 하는 분의 보수화는 어찌 보면 합법칙적인 행동이 아닌가 싶습

니다. 그렇게밖에 될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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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중 질문에 대한 박노자의 답변

1.

수행 단체가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인데요. 문제는, 불

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생 모두가 수행자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수행 단체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이 세계를 어떻게 바꿔 보자는, 일종의 전위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모든 속인들을 포함하는 한 제도의 대

안이 될 수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아까 언급하신 도법 스님처럼

탁발 수행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본인들의 수행의 의미를 알린다면, 그것이 자

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는 못해도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도전은 될 수 있을지

도 모르겠습니다.

2.

‘만약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눈에 그림이 선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서에서 읽으셨겠지만, 예수님

이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와서 거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막 내쫓아버리지 않았습

니까? 만약 지금 예수님이 한국 대형교회 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테러리스트 명단에 오르실 겁니다. 그것은 거의 안 봐도 그림이 선합니다. 예수

님 같으신 분이 만약 지금 다시 오신다면 대충 지금의 교회를 어떻게 보실 것인지,

또는 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그것은 보지 않아도 볼 수가 있

는 겁니다.

붓다만 하더라도 사회적인 발언을 꽤 많이 했습니다. 붓다의 사회적인 발언을 종합해

보면,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악법을 남발해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고, 전쟁을 하고, 지

배계급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그런 국가는 악이라고 봤습니다. 국가의 긍정적인 기

능으로 붓다가 딱 두 가지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재분배 기능입니다. 사람들이 가난

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는데, 부자한테서 재물을 거두고 그것을 평등하게 나눠 주

는 것이 국가의 긍정적인 기능이라고 본 것이고요. 또 하나는 갈등의 조절자라는 부

분입니다. 꼭 폭력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들 사이에서는 평화

를 찾아 줘야 한다.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라 그

중간에서 국가라는 조절자가 필요하다'는 점도 본 거죠.

아마 붓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국가, 아마도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국가로부터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일단 분쟁에 대한 비폭력적인 조절과

재물에 대한 세계적 분배를 요구하실 겁니다. 초기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발언을 종

합해 보면 그런 요구를 하실 것 같습니다.

3.

정의구현사제단이나 도법 스님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요. 아마 한국에서 지금 만나

볼 수 있는 종교인 중에서는 가장 올바른 길로 가시는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일단은

본인들의 종교적인 수행도 하시고 도법 스님은 화엄학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불교 교

리에 대해서 많은 논문도 쓰시는 분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본인의 불교적인 이

상을 사람들과 나눌 줄 알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참여할 줄 아시는 분이시라서, 지금

종교인으로서 가야 할 길로 가시는 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불교 승려들의 정치에서 약간 아쉬운 점은 불교 교리 ― 그런데 불교 교리는

대단히 난삽합니다. 공부하기가 아주 쉽지 않은 교리입니다 ― 를 많이 배우신 분들

이 예컨대 사회과학이라든가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 제기 방법을 많이 외면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배울 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

도 현 사회에 대해서 발언할 때 꼭 2천 년 전의 말씀으로 해도 되지만 조금 더 사회

과학적으로 정리를 해서 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이 있습니

다.

4.

‘종교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지금 같은 시절에 진정한 종교인이 있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 것 같으냐'는 질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매일노동뉴스> 같은 매체에서 여승무원들이 파업하는 모습을 보

지 못하셨습니까? 파업 투쟁한 지 거의 2주가 다 돼 가는데 성과는 없고, 공사나 국

가 쪽에서는 절대 양보할 생각도 없고, 결국에는 다 해고하겠다는 방침을 만들어 놓

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여론 매체에서는 동정 여론이 많이 없다 보니 국가에서는

막 나가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일단 여론 조작에서는 공사와 국가

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싶은 겁니다.

만약 진정한 종교인이 그런 상황을 본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 아마

도 조금 성격이 강인하신 종교인이라면 부산과 서울 사이의 철로에 누워서 ‘승무원

문제가 풀릴 때까지는 기차가 안 다니게 하겠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에서

민중한테 아주 강력하게 호소하는 부분 하나는 정의감 표출입니다. 종교는 정의가 구

조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이고요. 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구할 수 없는 그 정의를 종교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적인 호소력입니

다. 그래서 아마도 진정한 종교인이 나타난다면 종교의 정의라는 본질을 행동으로 보

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승무원 문제는 지금 질질 끈 지 거의 2~3주가 다

돼 가는데, 종교인들이 아직 말 한 마디 안한 것 같습니다. 진정한 종교인들이 많이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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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같은 경우 아무리 민중적이라 하더라도 현실화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았

느냐', 그러니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 없듯이 부자가 하늘나라로 못 간다는

것이 물론 계급 질서에 대한 비판이지만, 구체적인 행동 방법이 제시돼 있지 않은 것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의 사회 인식 수준과 우리의 인식 수준이 당연히 조금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당시로서는 계급 질서를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체념적인

생각이 거의 모든 고대?중세 사회에 아주 만연해 있었습니다. 예컨대 붓다도 사회개

혁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수행자 공동체를 만들어서 그들끼리 국가를 벗어나서 공산

주의적인 생활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에서도 ‘최후의 날에

부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요한계시록 같은 곳에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 손

으로 부자들을 심판해서 부자들도 빈민들도 없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그 당시로서는 제시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소농들과 노예, 그리고 장인들의 사회인데, 생산력의 발달 수준이 미

미하고 분산되다 보니까 서로 힘을 결합하는 데 한계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종족?부족?도시국가로 나뉘어 있는 그 당시의 세상에서는 민중이라는 종합적인

개념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당시의 사회적 한계가 있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는데, 초기 기독교의 정신을 오늘날에 와서 살리자면

분명히 오늘날의 우리 수준에 맞는 그런 현실화 방안을 고민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

다.

결국 정의를 구할 수 없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를 타파하자면, 일단 그 질서 속에

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행동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일 테고, 지금에는

생산력의 발달 수준과 교육의 발달 수준 등으로 봐서 이것은 꼭 폭력적인 행동이 아

닐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생산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한다면 그 다음에 자본주의

를 폐기한다는 게 지배계급의 저항만 끈질기지 않다면 굳이 폭력을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제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물으셨는데요, 저한테는 사실 제일 고통스러운 질문입

니다. 예컨대 불자라 하더라도 제가 사찰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조계종 신도증도

없고, 그러니까 가짜 신자라고 해야죠. 그리고 ‘신자'에서 ‘신' 할 때 ‘믿을 신(信)' 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기 불교에서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실

제 초기 불교에서 가장 많이 썼던 용어가 뭐였냐면 ‘냐나'(이해), ‘브라즈냐'(般若: 지

혜) 같은 용어였습니다. 초기 불교에서 가르침은 무조건 믿으라는 그런 소리가 아니

었고요. 이해해서 실천하라는 소리였죠. 만약 진짜 불교를 가지고 뭔가를 한다면, 믿

을 신 자는 웬만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불교를 종합적으로는 공부를 많이 해

서 그쪽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7.

‘우리가 그렇게 기복신앙에 열중하는데 왜 하필이면 삼신할머니라든가 하는 민속신

앙이 기독교와 맞물릴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느냐' 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 민

속신앙의 하나의 큰 문제는 뭐였냐 하면,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자로부터 천시를 많이

받았던 거구요, 근현대에 와서는 성리학자를 대신한 기독교인으로부터 그것보다 훨

씬 더 심한 멸시라든가 악마시하는 그런 것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속신앙

인이 지배자들로부터는 천대를 많이 받아온 것입니다. 시장화하는 데에는 지배자들

이 늘 낮은 것으로 취급해온 민속신앙보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고급 신

앙'이 상품화하는 데서는 훨씬 쉬운 거죠. 이것은 한국의 사회?문화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요.

8.

단군 이야기를 하자면, 하도 폭발력 있는 주제라 간단하게 [답변]하겠는데요. 조선 시

대에는 민중 생활이라든가 민중의 신화를 보면, 단군이 민중에게 신앙의 대상이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왕조실록에서나 “단군묘가 있다”는 기록은

있는데, 민중들이 단군을 찾고 신앙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개화기에 와서 단군이 민족주의적인 신앙의 대상이 됐는데, 단군 신앙, 즉 대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호남의 유림들이었습니다. 민중이 아니라 유림들. 나철 선생 같은 사

람들이 대종교를 만든 동기는 일본에 가서 일본의 국가 신도(神道)의 주된 신격인 태

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보고 ‘한국에서도 부국강병을 이루자면 그런 국가

신도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저쪽에 아마테라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단군이

있다'는 얘기를 해서, 1909~10년에 초기 대종교를 만든 겁니다.

거기에 상당히 동조한 사람들이 일부 개화주의자였습니다. 박은식 선생 같은 사람이

많이 동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단군 신앙이 당시 민중적이라기보다는 사회 상류층 일

부의 일종의 반대모방, 일본과 정치적으로 싸우면서도 일본의 신도를 모방하고자 하

는 욕망의 표출이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때는 수많은 반일적?항일

적인 저항적 지식인이 단군 신앙을 갖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일제 말기에 대종교는

일제와 협력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미군정기에 들어서 대종교뿐만 아니고 천도교라든가 동학을 이은 기타의 신

앙 단체들이라든가 거의 모든 토착적인 신앙 단체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미

군정이나 초기 한국 정부를 등에 업고 기독교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종교 시장이 아주 급격하게 기독교 위주로 재편됐습니다. 그것이 미군정이나 이승만

시절의 일인데, 그 뒤로는 교회가 고성장을 계속 거듭해 온 겁니다. 한국 종교시장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9.

제가 질문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의 논리가 결국 신앙을 지

배하는 게 아니냐' 하는 질문인 것 같은데요.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앙을 표방하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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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단체들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일종의 기업의 형태로 꾸려져 있는 것이고, 기업

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금을 안 낸다는 것 빼고는 [다른 점이] 거의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기업 형태로 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구체적인 신앙 행위는 결국 말 그대

로 장사 가까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한계를 갖고 있는데, 물론 모든 교회들이 꼭 그

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향린교회라든가 몇 군데의 민중신학 계통의 교회에서는 전

혀 다른 모습의 신앙과 신학을 볼 수는 있으나 아쉽게도 그것은 소수 아닌가 싶습니

다.

10.

‘전태일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 같은데, 전태일이라는 분의 수기 등을 보면

한 사람이 어떻게 계속 변해 갔는지, 어떻게 사람의 사상?이념 세계가 계속 바뀌어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초기에 전태일은 대통령한테 “상소”를 하면, 즉 대통령한테 노동자의 생활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편지를 쓰고 얘기한다면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말

하자면 기존의 권력 체제를 이용해서 노동자 생활을 개조하고자 했는데, 결국 그 미

련을 버리고 전투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노동자 투쟁 과정에서 한 사람의

사상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아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은 그 당시 한국 사회, 아마 1960~70년대에 가장 큰 충격이 아니

었나 싶고 민중신학을 만드는 데 기폭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라든가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신 자살합니다. 최근 몇 년

만해도 자살한 노동자들이 벌써 수십 명이 되는 것 같은데, 그 중에서 분신하신 분들

만 해도 적어도 열 명 안팎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노동자가 그냥

자살하면 신문에서 보도도 없고요. 분신자살한다 하더라도 신문에는 짤막한 보도 하

나 나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자본주의에는 확실히 제

도적인 민주주의가 유리한 겁니다. 소프트한[연성] 독재죠. 그런 체제 안에서는 노동

자의 죽음은 별다른 충격이 될 수 없습니다. 여론 형성 과정이 철저하게 통제받기 때

문에 결국 전태일처럼 요즘 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해도 결국 사회에서는 아주 외로운

위치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박노자의 전체 강연회 요약 발언>

종교라는 게 우리 사회에서 비판할 수 없는 아마 유일하다 싶은 분야가 아닌가 싶습

니다. 지금은 국가나 대자본은 물론이거니와, 예를 들어서 군이라든가 여태까지 거의

비밀로 싸여져 있던 그런 분야에 대한 비판도 거의 다 가능해진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안기부 내지 국정원의 최고 비밀 중 하나라고 여겨지고 있는 1987년 KAL기 사

건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그것이 거짓이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라면 더 이상 이 얘기

도 성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에 딱 하나 남은 성역이 있다면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해서는 뭔가 깊이 있

는 해부 작업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우리 서적 시장을 봐도 여러 가지 책들이 많아 거

의 홍수인데, 한국 대형 교회 사회경제학은 한 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터부시되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도 너무 이야기한 게

없다는 거죠.

종교라는 게 사람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고요,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종교가 있을 수

없는 것 같고요. 기독교 내지 불교를 가진다, 종교를 가진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마다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 내지 불교는 어차피 개체적으로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 없이 ‘남과 다른 형태의 신앙과

실천을 한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내지 불교를 생각하고 실천한다' 해도 그것

은 당연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종교, 특히 불교에서 영감을 많이 얻고 있다 해도 가장 귀중한

한 가지 교본이 있다면,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철학은 회의(懷

疑)로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종교를 가진다 하더라도 회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모

든 것을 의심해야 결국에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무비판

적으로 받아들이면 이것이 꼭 마약이 되는 겁니다. 종교가 마약이냐 아니냐 하는 해

묵은 논쟁이 있지만, 결국 제가 보기에 회의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받아들

여지는 종교는 마약이 아닐 것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종교는 그야말로 “민중

의 아편”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2020/02/07

15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 신동아


Interview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한국종교 비판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7-21 15:21:00



2015년 0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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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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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믿는 것보다 안 믿는 게 낫다
● 경탄하고 감격하라, awesome!
● ‘참나’ 찾아 ‘자유’ 얻는 게 심층종교
● 행복의 원천은 성찰이 주는 ‘아하!’의 삶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권위가 전만 못하다. 존경할 만한 종교 지도자도 찾기 어렵다. 오강남(74)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된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비교종교학자다. 그는 1971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줄곧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동아일보’ 2001년 10월 11일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오강남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 교회 문턱을 넘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미션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종교학과에 진학해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의 믿음은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슬람이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게 사실인 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유학을 한 후 그곳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한문을 다시 공부해 노장사상과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그는 자기 안에서 ‘기독교와 타 종교가 대화하는’ 핵융합의 과정을 겪게 된다. 예수님의 성령체험이 ‘성불(成佛)’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노장에서 말하는 ‘붕새처럼 변화와 초월의 체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아니겠냐는 인식이었다.”

오 교수가 2001년 한국에서 출간한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은 파문을 일으켰다. 요지는 “역사적 예수는 있었으되 오늘날의 교회가 가르치는 그런 예수님은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저술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1947~2010)다. 가수 조영남(70)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억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강남 교수는 글로 먼저 만났다. 목사가 되겠다며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미주지역 순회공연을 하던 1980년으로 기억한다. 공연을 마치고 우연히 누군가가 소일거리로 읽으라며 던져준 교포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읽고는 섬뜩해졌다. 당장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나섰다. 그는 내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한국인의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특별한 사람이다.”

오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캐나다 맥매스터대 대학원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 변화를 경험했다. 서울대 규장각과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섰고,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14년 전보다 지금 한국 종교의 위상은 더 후퇴한 듯 보인다. 기독교 신자가 감소한다. 기독교와 불교 공히 사회적 소통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출간한 저서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는 때로 집단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국가 간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개인의 번영만을 위한 종교, 권력에 기생하거나 스스로 권력화한 종교, 양적 대형화에만 골몰하는 종교. 과연 종교란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7월 2일, 그에게 물었다.

▼ 종교란 무엇입니까.

“수없이 많은 답이 있겠으나, 간단히 대답하라고 한다면 ‘우리가 통속적 안목으로 볼 수 없는 실체의 더 깊은 차원을 발견해 더 큰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는 수단’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불교로 말하면 부처님이 4가지 진리(四聖諦)를 깨침으로써 고통에서 자유스러워지라고 한 것, 그리스도교로 말하면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 것을 떠올려 보세요. 욕심과 미망으로 가려진 눈을 떠 사물을 더욱 명확히 보면서 그만큼 자유스러워져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종교기업’

▼ 한국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압도적 크기의 교회 간판이 보입니다. 어둠이 깔리면 십자가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입니다.

“교회도 이 시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흐름에 영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십자가 물결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고 봐요. ‘종교기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좀 다행인 것은 요즘에는 붉은 십자가 대신 흰색, 노란색 십자가가 이따금 눈에 띈다는 거.(웃음) 십자가를 보면 그것이 예수가 달려 죽은 로마의 형틀이라는 생각 대신, 다석 류영모(1890~1981·교육자 겸 종교인) 선생이 말씀한 것처럼 ‘인간이 대지를 뚫고 하늘과 하나 되고자 위로 솟남을 뜻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의미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요.”

다석이 설파한 ‘솟남’은 기독교의 부활, 불교의 해탈에 비견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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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은 기독교도입니까. 한국의 일부 개신교도는 교수님을 배교자(背敎者)로 여기기도 합니다. 박사학위 논문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는 불교 및 노장사상을 넘나들었고요.


“어머니가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에 다니셨는데, 덕분에 저도 그 교회에 다녔습니다.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할 때도 기독교 극보수주의 교수님의 강의를 많이 들었고요. 머리가 커지면서 어머니가 다닌 교회에서 가르친 것, 그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사상에 몰두했으니 캐나다에서는 동양 종교를 전공으로 택하기로 하고 불교, 힌두교, 노장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했어요. 그러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졌습니다. 불교를 전공 분야로 삼았고, 말씀한 대로 화엄의 법계연기를 학위논문 주제로 택했지요.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다닌 교회의 가르침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글로도 써야 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갖고 있던 교적(敎籍)을 철회해달라고 교회에 요청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배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특정 종교나 교파를 헐뜯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교적이 없어 어느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하지 않은 셈입니다.


현재는 캐나다 연합교회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합니다. 한국에 머무를 때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에서 주관하는 ‘일요 경 모임’에서 종교 경전을 읽습니다. 이곳저곳의 교회나 교역자 수양회, 사찰에서 초대받으면 가서 강연합니다. 개인적 이력을 물은 것 같아 사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겸연쩍습니다.”


▼ 한국 불교의 상황도 신자 수가 줄어드는 기독교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복(祈福)적 성향도 강하고요. 사업 잘되게 해달라,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며 시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찰(大刹)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요.








“그렇지요. 뜻있는 스님들이 직접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불교계가 부처님의 ‘정법’을 따르지 않는 건 알지만, 정법대로 해서는 사찰을 운영하지 못 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속의 佛性, 神性


▼ 나와 내 가족의 복을 바라는 신앙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가족의 평안을 간구(懇求)하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 아닐까요. 종교는 나와 내 가족이 잘살고 싶다는 소망을 심리적으로 충족시켜줘야 하고요.


“물론 종교에 그런 면이 있어요. 종교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수단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진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종교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 한국 교회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웃에 배타적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같은 어구(語句) 탓에 비(非)종교인이 기독교를 삐딱하게 바라봅니다.


“영적 눈을 떠서 사물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중 하나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속에 신성이나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의 근본은 우리가 이런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이라고 하겠지요. 불교에서는 우리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 속에 신성, 혹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고, 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고 해서 우리가 ‘한울님’을 모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내가 하늘과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나아가 천도교에서 말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처럼 남을 하늘 섬기듯 대하게 됩니다.


여러 종교에서 가르치는 이런 기본 가르침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 진리를 가졌다, 자기들만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는 등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곤란합니다. 봉은사역 역명 논란, 탱화에 낙서하기, 땅 밟기 기도 등 일부 기독교도의 행동은 기독교와 기타 종교들의 기본 진리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땅 밟기 기도는 일부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의 성소에서 예배를 올리는 의식이다. 또한 기독교 목사가 대구 동화사 탱화에 낙서해 논란이 인 적이 있으며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명명을 두고 불교계와 기독교계가 갈등을 빚었다.


“神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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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여하는 神’ 관념 수정돼야”

▼ 지난해 6월 문창극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 등으로 인해 낙마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할 만한 발언이라고 여겨지지만, 비(非)기독교인은 이러한 견해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비(非)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담스러운 발언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나 미국·소련의 분단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6·25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내지 미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다면 독립을 위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싸운 운동가나 남북분단 상태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이가 되는 셈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관은 함석헌 선생이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본 것과 판이합니다. 함 선생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함께해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니 이제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하면서 이 고난의 역사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역설한 반면, 문 후보자는 우리 민족은 나태하고 무기력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나 미국의 개입 등 외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도움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항과 자존의 역사냐, 숙명적 외세 의존의 역사냐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뭔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와 바울이 말씀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를 꼽고 싶습니다. 종교에서 중요한 대목은 할례나 기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변화(transformation)를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장자’ 첫머리에 물고기가 변해 붕(鵬)이라는 큰 새가 되어 구만장천을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가 줄 수 있는 초월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 ‘닫힌 종교’가 아닌 ‘열린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어느 특정 시대, 어느 특정 사회를 배경으로 생겨난 종교관을 비롯해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 등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새롭게 이해돼야 합니다. 하나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특수 교리는 진리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특별한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 혹은 절대자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해요.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해 신이 인간사 하나하나에 직접 관여한다는 ‘관여하는 신(Interventionist God)’ 같은 신관(神觀)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열어놓음’이 중요합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 종교에는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 병존하게 마련입니다.

“표층종교가 지금의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힘쓰는 자기중심적 종교라면, 심층종교는 나의 ‘참나’를 찾아 지금의 나로부터 자유를 얻고 나아가 이웃을 위해 힘쓰는 타인 중심적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표층종교가 신과 나를 분리해 생각하고 나와 나의 집단이 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것과 대조적으로 심층종교는 신과 나,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과 자비를 중요시합니다. 표층종교가 경전의 문자에 매달려 나와 다른 해석을 하는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심층종교는 문자 너머의 속내를 발견하려 노력하고 나와 다른 해석에 열린 태도를 가집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표층종교로서 종교생활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지만, 거의 모든 종교는 우리가 표층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심화 과정을 거쳐 종교가 줄 수 있는 시원함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종교에나 존재하는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표층종교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종교적 근본주의는 폭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근본주의 그룹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치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근본주의자가 가진 정신적 구조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라는 게 교황의 설명인데요. 한국 가톨릭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가톨릭 지도자들이 가진 의식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신학자 한스 큉처럼 근본주의에서 벗어난 진보적 가톨릭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처럼 비교적 보수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압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진보적인 신부들이 있지요.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는 보수 경향이 강한 분들이 이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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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성장률 1600%의 배경


▼ 한국 기독교는 교수님이 비판하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듯합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고 가르치곤 합니다. 기독교는 20세기 초 한국이 개명(開明)에 나섰을 때 도움을 줬습니다.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웠고, 독립운동과 기독교가 연결됐습니다. 1970~80년대에는 그리스도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970년대 10년 동안 교인 성장률이 1600%가 넘은 교회도 있습니다. 근본주의 신앙 덕분에 공격적 선교가 가능한 측면도 있었던 듯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러 면으로 공헌한 바가 컸습니다. 교육, 의료, 독립운동, 계몽…. 그러다 1970~8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하면서 전통적으로 친숙하던 농촌 공동체 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한 도시생활에서 소속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에서 새롭게 소속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어요. 더욱이 사람들 사이에 자본주의 가치관이 팽배하면서 부유해지려는 마음이 더 뜨거워졌는데, 교회에서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물질적 축복이 보장된다는 식으로 부채질을 한 셈이지요. 이것이 교회가 기복적으로 경도된 주원인이면서 교인 수 증가의 동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나 사회적, 심리적, 건강상의 소망을 교회가 아니더라도 채워줄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그런 필요에 의해 교회에 다니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문자주의에 입각한 공격적 선교에도 한계가 오지 않았나 생각되고요.”

▼ 성경의 문자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보는 대로’가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전을 읽는 것은 그것을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가 아니라 ‘나는 성경을 이렇게 읽었다’고 해야 합니다. 경전이란 문자적으로 객관적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내 눈높이에서 읽고 이해하도록 구성됐어요. 이해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해야 하고요. 한국 교회의 큰 문제점이 성경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나요.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책 ‘신 없는 사회’를 보면 라디오, 텔레비전에 나온 목사들이 죄악에 물든 이교도를 저주합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하고요. 경찰서장이 범죄율 증가가 사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느 주지사는 자연재해에 기도로 대처하라고 호소하더군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시작을 알리면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신께서 미국을 변함없이 축복하시길”이라는 말로 연설을 마친 것도 떠오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회입니다. 유럽에서 근본주의가 거의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에는 아직도 기독교 근본주의가 살아 있지요. 주커먼 교수가 지적했듯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는 실질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 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북유럽 사회가 범죄율, 문맹률, 행복지수, 복지수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을 앞섭니다. 교회 출석률이 높은 미국 남부 ‘바이블 벨트’ 지역 주들의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근본주의에서 말하는 신들을 앞세우면 결국 ‘신들의 전쟁’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사회제도를 개선하거나 복지제도를 확장하려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들만의 신’ ‘만들어진 신’

주커먼에 따르면, 북유럽에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거나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죽은 후 부활했다든지 하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게 그들이 말하는 종교의 핵심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품위 있는 도덕과 가치관이 담긴 책이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는 소수의 북유럽 사람들도 대체로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은 생전에 “모든 이교(異敎)의 군대가 무함마드의 땅을 떠나기 전까지는 미국이 결코 평화로울 수 없을 것을 신께 맹세한다”고 다짐하면서 “신은 위대하다. 영광이 이슬람에 있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리아·이라크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슬람국가(IS)는 형제 격인 시아파마저 ‘불순한 이교도’라고 여깁니다. 불교나 힌두교와 다르게 유일신교인 크리스천과 무슬림은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내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한다고 여기는 건데요. 그렇다면 ‘오직 한 분’인 하나님, 다시 말해 ‘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요.

“그들이 말하는 신들이란 대부분 ‘만들어진 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 격으로 받드는 신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에 대한 각자의 견해일 뿐이지요. 그들만의 신관(神觀)입니다. 궁극실재로서의 신,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고를 초월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밝힙니다. 말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신관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만진 것만을 절대화하는 대신 서로 둘러앉아 각자 만진 것을 이야기하면서 실물 코끼리에 근접한 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종교 간의 화해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세계 평화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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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esome!’을 외치는 삶

▼ ‘그들만의 신관’은 ‘부족신관(部族神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성경의 구약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전투지휘관이 돼 다른 민족을 정벌합니다만….

“그렇지요.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 자기 집단만을 위한 신을 받드는 게 부족신관입니다. 지금도 가령 운동경기를 하면서 자기 팀이 이기기를 신께 비는 것, 자기 종교만을 사랑하는 신을 받드는 것은 부족신관의 잔재라고 할 수 있지요. ‘도덕경’에서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예수님도 하느님은 의인의 밭이나 악인의 밭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이 무조건 내 편,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은 망상인 셈이지요.”

▼ ‘신 없는 사회’가 오히려 평화롭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표층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봐요. 잘못 믿는 것은 안 믿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주커먼 교수가 지난해 ‘Living the Secular Life(종교 없는 삶을 살다)’를 썼습니다. 이 책은 경탄하고 감격하는 삶, ‘awesome(기막히게 좋은)!’을 외칠 수 있는 삶이 권위에 의존적인 종교적 삶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바꾸면 성찰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아하!’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2012년 출간한 ‘종교를 넘어’에서 종교적 계율에 따라 강제되는 삶보다 선한 일을 할 때 더 행복하다는 기본 원리에 입각한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한물간 패러다임에 입각한 옛 신관이나 세계관, 가치관에서 벗어나 생명, 평화를 기본으로 여기고 삶을 사는 세계시민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 앞서 ‘장자’의 붕(鵬)과 ‘도덕경’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언급했는데, 노장사상이 21세기 한국과 세계에 도움을 줄 것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노장뿐 아니라 여러 종교의 심층이 활성화해야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지만, 노장이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에 기여할 대목을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첫째, 도(道)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노장의 실재관은 오늘날의 세계관과 부합하는 점이 많습니다. 둘째, 도를 어머니나 여성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는 등 여성성을 강조합니다. 셋째, 자연은 신비스러운 기물이므로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하는 환경보호 내지 생태적 관심을 가졌습니다. 넷째,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면서 폭력, 전쟁을 반대합니다. 다섯째, 꾸미지 않은 통나무처럼 욕심을 줄이고 순리대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여섯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면서 진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종교 같은, 종교 아닌 종교

▼ 한국 사회는 이념, 정치 성향에 따라 편갈림이 심합니다.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쟁은 요즘 말로 고치면 다원주의(pluralism) 혹은 시각주의(perspec tivalism)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동일한 사물이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자는 뜻이에요. 똑같은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모양이 다릅니다. 둘 중 하나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지만,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싸움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화쟁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사상이다. 대립과 모순·쟁론을 조화·극복해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 원효는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화쟁 이론을 전개했다.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도 한다.

▼ 스님이 중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중생이 중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 파문 탓에 시끄러웠습니다. 기독교 교단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는 금품 살포, 상호 비방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종교가 ‘소금’ 구실, ‘목탁’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세태를 어떻게 봅니까.

“어느 스님이 그러시더군요. 지금 한국 종교는 기업만도 못하다고. 기업은 돈을 번다는 것을 떳떳이 밝히고 돈을 버는데, 종교는 거룩함이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오히려 기업보다 돈 벌기에 더 혈안이 된 상태라고. 종교가 물질만능주의로 변질되거나 권력화해 생기는 부작용이겠지요. ‘종교 같은 종교가 아닌 종교’를 보고 있다고나 할까요”.

▼ 우리는 종교를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통해 더 큰 자유를 누리는 특권을 얻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적,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상 너머에 있는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과 불의의 원인을 꿰뚫어 살펴보고 이런 현상을 타파하는 것도 종교가 할 일이라 봅니다.

인간의 근본적 사명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종교라면 존재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선불교에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침으로 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조상도 죽이라는 뜻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잘라버리라는 말이지요.”

▼ ‘종교는 궁극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변화하는 체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쉬운 말로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변화된 개구리,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개구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고 멀리 항해하지 못하다가 바다의 실재, 곧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멀리까지 항해할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생각하는 백성’

▼ 한국 종교가 어떻게 나아가기를 바랍니까.

“지금까지 이렇게저렇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요약하면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돼야 하겠지요.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 같은 이는 그리스도교가 심층적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 남양주시의 어느 큰 스님도 기복 일변도 종교로서의 불교는 역할이 끝났다고 말씀하더군요. 생각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종교의 심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 개인은 종교와 관련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영성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과정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캅 교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물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한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동방정교에서 행하던 예수기도(Jesus prayer),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선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지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過程神學)은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사조다. 인간과 세계의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신도 변화해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헌금은 ‘욕심 줄이기’ 연습

▼ 헌금은 왜 하는 겁니까. 십일조는….

“히브리 성서(구약) 마지막 책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생각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1000만 원이 필요하면 미리 100만 원을 바치고 1000만 원이 들어올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헌금은 이처럼 내가 얼마를 내고 신의 축복으로 그 몇 배로 튀겨서 받는 투자나 투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욕심을 줄이는 연습이고,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겠다는 인류 공동체 의식의 함양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종교기관에 바치는 것이 그것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로 나뉘어 있을 때 각 지파가 수입의 10분의 1을 제사장 족인 레위지파에 바치는 제도에서 비롯했습니다. 레위족은 그것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습니다. 당대에는 일종의 세금이었던 셈이지요. 오늘날 십일조를 강제로 바치게 한다면 이중과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지만, 수입 일부를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사용하도록 적절한 곳에 바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