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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아사카와 다쿠미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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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최근 수정 시각: 
아사카와 다쿠미
浅川巧あさかわ たくみ
Takumi Asakawa
Takumi
출생
사망
1931년 4월 2일[1] (향년 40세)
직업
임업기사, 도예 연구가
가족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2]
주요 업적
잣나무 종자의 노천매장 발아촉진법 개발(1924)
조선의 소반(朝鮮の膳) 저술(1929)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저술(1931)

1. 개요2. 출생3. 생애4. 죽음5. 평가6. 기타7. 영화화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 국적의 한국 내 활동하던 도예 연구가.

일제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친한파 인사였으며 후세 다츠지와 더불어 조선에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으로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2. 출생[편집]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으로 오기 전까지는 야마나시에서 소학교와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아키타현의 대관 영림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성부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부임하고 있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3]의 권유로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의 임업기사로 일하게 되었다.

3. 생애[편집]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고안했다. 그는 이를 활용하여 그 당시 2년이 지나야만 양묘가 가능했던 조선의 소나무들을 1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4] 경기도 광릉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에 있는 1892년생 소나무(盤松)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

다쿠미의 주 업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자연스레 조선 사람들과 조선 문물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5] 그러던 가운데 그는 형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깊이 공감하고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들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했다. 그는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한국에는 한 권으로 묶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조선의 소반에서 그는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미를 발휘하므로 사용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히 봉사하여 세월과 함께 아미(雅美)를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대표라고 칭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며 책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16년 8월,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찾아왔는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만난 것이다.[6] 아사카와 다쿠미의 형 노리다카가 소개하여 야나기와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야나기는 직감적으로 다쿠미가 수집해 놓은 조선 민예품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공예에 눈을 떴다. 결과적으로 다쿠미는 야나기가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준 장본인이 된 셈이고, 그 후 야나기가 조선미술품을 수집하는 데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아사카와가 경성에 거점을 두고 조선 민예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야나기에게 전수하면 야나기는 일본에서 조선 민예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노릇을 했다. 조선을 통해 민예의 미를 발견한 야나기는 후에 일본 민예로 그 영역을 넓혔다. 조선민족미술관이란 곳을 열기도 했는데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야나기가 맡고 전시품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등의 실무는 아사카와가 도맡았다. [7]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해방 이후 수집품들을 처리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불안한 정세와 미성숙한 학문성적을 신용하지 못하겠다며 대부분 연구품들을 일본으로 가져갔다.[8]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아사카와 타쿠미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신들이 수집한 물품 3,000여점 전부 한국 정부에게 기증하였고, 이렇게 받은 것들은 한국 연구가들에게 소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4. 죽음[편집]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서울 망우리 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명

아사카와 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는 죽기 전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자신이 살던 경기도 이문리에 묻혔다가 몇 년 후 망우리공원[9]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10] 그가 모은 항아리를 본따 만든 탑이 그의 무덤 앞을 지키는데, 산림청에서 무덤을 주기적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5. 평가[편집]

그 당시 한국에서 소반이나 도자기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이었지, 예술품으로 대접받으리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일본인들 중에서도 조선 도자기는 예술품이기에 앞서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그러한 사회적인 시류 속에서도 한국 공예품들을 잘 정리하여 후에 한국 공예연구를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많은 연구가들은 조선 문화에 대해 중국 문화의 아류라고 평가절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 문화만의 독창성을 찾아 연구하며 후세의 연구가들에게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었다.
피곤으로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 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으로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당대 현실에서 그는 일반적인 일본인들에겐 결코 좋게 평가받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인격과 평소 생활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나 총독부 고위 관료 중 극히 일부는 그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경했고 물론 당대 조선인들에겐 거의 숭배에 가깝게 존경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본인 대부분은 그를 대단히 이상한 인물로 여기면서 싫어했었다. 일종의 조선도자기 혹은 조선소반 오타쿠쯤으로 취급 받았다고 보면 된다. 한편 오늘날은 당연히, 그에 대해 알게 된 일본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6. 기타[편집]

조선 공예품을 사랑함에 그치지 않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도 사랑했던 사람이다. 1914년 24세 나이로 조선에 부임했을 때, 일기에 '조선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기도 하였고 '내가 조선에 있는 것이 언젠가는 무슨 일에든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이야기 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사는 한 한국인과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써야겠다'고 결심하여 조선인 마을 온돌방에서 지내며 바지저고리 차림과 망건을 쓰고 외출했는데 일제의 무단통치가 절정일 때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인품도 좋아서 많지 않은 월급으로도 절반을 조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적지 않은 조선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어 졸업시켰다.

아사카와는 그 당시 한국 지식인들과도 면식이 있어 1920년대 문예잡지인 ‘폐허[11]’ 활동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서 아사카와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일본에서 보낸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을 당시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에게 넘겨 게재한 적도 있다고 한다.

7. 영화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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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핑크영화계 쪽에서 유명한 다카하시 반메이가 2012년 영화로 제작하였다.

줄거리가 전반적으로 약간 루즈하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하다.

8. 관련 문서[편집]

[1]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중에 순직[2] 생몰: 1884년 ~ 1964년. 일본의 조각가로 동생 다쿠미와 마찬가지로 그도 조선의 도자기에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1906년 야마나시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1924년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그가 모았던 소장품은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고향인 야마나시현에 형제를 기리는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기념관이 있다.[3] 형인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도 나중에 일본에서 '조선 도자의 신'이라 불리며 일본 내 조선 도예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하나가 된다.[4] 조재명 전 임업연구원장은 한국 인공림 37%가 다쿠미 선생이 공을 들인 나무라고 했다. #[5] 실제로 그는 당시 조선어를 아주 능숙하게 했다.[6] 야나기는 일본 문예운동의 중심이자 해군 장성의 아들로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부친의 후배인 사이토 조선총독의 힘을 활용해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이외에 한국의 문화를 한의 정서로 규정한 인물이기도 하다.[7] 조선민족미술관은 광복 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8] 이 때문에 한일협약에서 문화재반환 문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9] 망우리 공원 묘지는 방정환한용운이중섭 등 한국 위인들이 많이 묻혔기로 유명하다.[10] 망우리 공원에 있는 유일한 일본식 무덤인지라 눈에 쉽게 띈다.[11] 염상섭이광수나혜석 등 쟁쟁했던 작가, 예술가들이 있었던 그 잡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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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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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년 1월 15일 ~ 1931년 4월 2일)는 일제 시대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이다.
생애[편집]

야마나시현 출신.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하며 산림녹화에 힘썼다. 그의 형은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아사카와 노리타카이며, 자신도 조선의 공예를 좋아했다. 형에게 조선의 도자기 파편을 구해 보내주는 한편, 자신은 조선의 소반(밥상)을 연구하며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호쿠도시노라다카·다쿠미 형제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는 40세에 요절하여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1]
민예운동에 영향[편집]

아사카와 다쿠미의 영향으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이를 일본에 소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운동을 시작한 배경에는 조선 백자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고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고, 이 소장품은 후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됐다.
한국의 조림[편집]

당시 한국 잣나무는 2년간 길러야 양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아사카와씨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1년으로 단축할 수 있었으며, 2011년 현재 한국의 인공림 37%에 잣나무가 심겨져 있다. 아사카와는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소명이라 믿고,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을 거듭하여 자연 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개발했다.
영화[편집]2012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일본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일본어: 道〜白磁の人)가 개봉했다. 에미야 다카유키의 소설 《백자의 사람》이 원작이다.
기타[편집]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혀 있다.[2]
각주[편집]
전병근, 일제시대 한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일본인 아사카와 망우리 묘지엔 아직도 참배객들이 늘어선다는데…, 조선일보
한국일보 성혜경, 삶과 문화/9월 16일-아사카와 형제, 노리타카와 다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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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를 기리는 사람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巧) 형제 추모회’의 잔영(殘影)

비바람이 멈춘 다음날, 야마나시(山梨)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구름들이 휘감고 있는 3,776m의 후지산(富士山)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사이로 몇 줄기 만년설도 보였다. 시즈오카(靜岡) 여행 시절 후지산을 여러차례 통과하면서도 구름의 훼방으로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이날은 운(運 )좋게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자! 갑시다.”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다쿠미(巧) 형제 추모회’의 치노 쓰네오(千野恒郞·77) 회장이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앞장섰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의 생가 터


두 형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 터는 자료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다카네초(高根町) 고초다(五丁田) 294번지. 동쪽으로는 긴포산(金峰山), 남동쪽으로는 후지산, 북쪽으로는 야쓰가타케(八ヶ岳)가 보이는 아늑하고 예쁜 농촌이었다. 노리타카·다쿠미 형제는 이러한 자연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생가 터에는 말뚝 세 개뿐 아무 것도 없었다.



아사카와 형제의 탄생지 비석


“생가를 복원해서 문화관을 만들면 어떨까요?”

필자가 치노(千野) 회장에게 의견을 제시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추모회가 나고야(名古屋)에서 살고 있는 땅 소유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값을 비싸게 부르더군요(웃음).”

추모회의 모금으로 땅을 사는 것은 버거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치노(千野) 회장의 표정으로 봐서 언젠가는 뜻이 이뤄질 것으로 보였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의 탄생지’라는 비석도 생가 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또한 추모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일 듯싶었다.

450여 명이 참석한 총회, 날씨만큼 뜨거워

노리타카·다쿠미 형제를 추모하는 모임의 총회는 6월 16일 오후 1시 30분부터 ‘야스가타케(八ヶ岳) 메아리 홀’에서 열리는 것으로 예고돼 있었다. ‘메아리 홀’이라는 이름이 야마나시의 특성과 잘 맞아 떨어졌다.

오후 1시가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젊은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450여 명 홀의 좌석은 삽시간에 꽉 메워졌다. 1시 30분이 되자 사무국장 히나타 요시히코(比奈田善彦·65)씨가 마이크를 잡고서 총회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아사카와(淺川) 형제를 추모하는 모임의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호쿠토(北杜) 시장·시의회 의장 등 내빈 소개에 이어서 치노 쓰네오(千野恒郞)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인사말을 하는 치노 쓰네오 회장



“회원 여러분! 레이와(令和) 원년 6월 16일, 저희 모임의 총회가 성황리에 개최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 추모회는 1996년에 발족한 이래 23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회원이 많아진데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특히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는 지난 2015년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세계의 70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명실 공히 ‘한일을 연결하는 가교(架橋)를 건설한 인물’로 평가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서울시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역에 ‘한일 우호의 표지석’을 설치하려는 것을 실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양국의 우호관계가 걱정이 되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민간의 교류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사카와 형제의 마음’은 지금도 일본과 한국에서 살아 있습니다. 두 형제의 박애 정신을 한일 양국의 차세대에 계승시키기 위해서, 한국문화원과 도쿄한국학교, 호쿠토시의 교류를 보다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치노 쓰네오 회장은 ‘민간교류를 확대해서 양국의 거리를 좁히자’면서 ‘아사카와 형제의 박애 정신을 후세에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정치성이 없는 순수한 민간교류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총회에서는 사업 방향과 예산 집행 등 여러 가지 현안들을 논의 했으나, 중요한 안건은 ‘다쿠미의 기념비’에 대한 것이었다.



어떠한 내용일까.



조선일보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광복 70주년(2015년)을 맞아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세계의 70인에 아사카와 다쿠미가 포함됐다’는 사실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다. ‘아사카와 노리타카·타쿠미 형제 추모회’ 회원들은 ‘한국 발전에 기여한 인물(아사카와 다쿠미)’에 큰 의미를 두고, 그의 족적을 길이 남기기 위해서 정성스럽게 모금 운동을 펼쳤다. 정성의 결과물은 오는 10월, 그의 묘역에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번 총회에서는 이명렬(李明㤠·54) 주(駐)요코하마대한민국총영사의 기념 강연이 눈길을 끌었다.

요코하마 총영사의 강연...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받아




강연을 하는 이명렬 요코하마 총영사

“오늘 이토록 귀중한 자리에 초대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아사카와(淺川) 형제의 이야기는 책과 영화(道, 백자의 사람)를 통해서 한일 양국에 소개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100년 전에 민족의 벽을 넘어 한국의 삼림과 한국인을 사랑한 아사카와 선생은, 지금도 많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인입니다.(...)

화제를 잠깐 바꾸겠습니다. 유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DNA분석에 의하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양(兩)민족은 유전자적으로 사실상 형제의 관계인 것입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일본은 혈연관계로 여겨 지원군을 파견할 만큼 형제의 관계였다고 역사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일 양국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통한 교류에 의해서 한일 관계의 진정한 정상화가 이뤄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강연을 듣는 참석자들의 진지한 모습


참석자들은 이명렬 총영사의 강연 내용이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듯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산골마을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후지카와(富士川)이야기...한일관계의 토대는 사람

연극 ‘후지카와(富士川) 이야기(物語)’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극(劇)의 내용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준비를 위해서 전투기의 재료인 알루미늄이 필요했다. 알루미늄 공장 운영을 위한 대량의 전력이 필요한 까닭에 각 지역에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고, 후지카와의 취수를 위한 터널 공사도 있었다. 여기에 많은 조선인이 동원됐다. 이들 중에 초등학교 6년생인 손춘임(孫春任)이 있었다. 일본 이름은 하루코(春子). 이들 가족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인정 많은 일본인 선생님(武井善人 분)도 있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목포의 눈물이 배경으로 깔리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도라지 타령을 하는 노동자(雨宮徹周 분)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도라지 타령을 하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극의 한 장면


<이 산에서 목숨을 잃은 동포여!/ 이 강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이여!/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저 쪽의 나라로부터/ 빛이 되어 찾아 오리요.>

이 연극은 야마나시 현민(県民)문화제에서 상은 받을 와타나베 슈코(渡邊修孝)씨의 수필<손춘임의 일>을 희곡으로 만든 것이었다. 97세의 와타나베씨가 무대에 올라 관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극이 끝난 후 메아리 홀의 로비에서 극작가 미즈키 료(水木亮·77)씨를 만났다. 그의 말이다.

“후지카와는 나가노(長野)·야마나시(山梨)·시즈오카(静岡) 현을 흐르는 128km의 강입니다. 이 강은 인간의 삶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극의 내용은 후지카와 강변에서 일어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가도, 배우도, 관객들도 ‘한일관계의 토대는 사람이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듯했다. 하루코(春子)를 넘어 손춘임(孫春任)의 마음으로(계속).

입력 :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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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사개공(活私開公·사적인 이익을 잘 살리되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도 배려한다)

농업경영학, 활사개공(活私開公·사적인 이익을 잘 살리되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도 배려한다는 개념) : 네이버 블로그

2015. 8. 26 농민신문에 실린 GS&J 이사 이병오 강원대 교수의 글입니다. 건강한 농촌공동체와 6차산업화 GS&J 이사 이병오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농업의 6차산업화를 알기 쉽게 정의하자면 각 지역에 분산된 소규모 가족농들이 농산물과 그 부산물, 토종종자, 전통기술, 문화 등 지역의 부존자원을 발굴해 깨끗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이를 스스로 가공·판매하면서 체험관광도 가미해 부가가치를 올리는 농업경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농업도 공업과 같은 하나의 산업임에는 틀림없지만, 농촌이라는 공간사회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특수성이 있다. 농촌공동체는 그 특성상 지역과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이웃 주민들과 더불어 공존하면서, 공평한 기회를 가지며 살아가도록 돼 있다. 이러한 환경은 개별 경영체가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토양인 동시에 공공재적인 성격도 갖기 때문에 구성원 전체는 이를 잘 보존할 책임이 있다. 농촌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이 농사나 일상생활에서 지역 내 다른 주민들과 돕고 협력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배려정신이 마음 속에 깔려 있다. 그러 나 1970년대 이후 고도 경제성장을 겪으면서 우리 농촌사회는 농업의 본질과 철학을 외면한 채 오로지 나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달려 왔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농촌의 공동체 정신은 훼손되고 각박해졌으며, 농업의 본질적인 룰도 무너졌다. 최근 이러한 반성에 기반해 공공 농업경영학, 활사개공(活私開公·사적인 이익을 잘 살리되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도 배려한다는 개념) 농업경영, 공 유가치 창출형 농업경영(CSV·Creating Shared Value)과 같은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 농업인, 정책 담당자, 연구자 모두 좀 더 장기적이고 넓은 시야에서 개별 경영체와 지역이 상생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공공선(social good)을 추구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공 공선이란 경영체가 자기의 생활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외부의 다른 사람에게 배려하는 복지의 개념으로서, 공적 기관이 시행하는 사회 전체의 공공복지와는 다른 개념이다. 국가나 지자체에 분배정책이나 사회안전망의 틀이 있다고 해도 고령화 소농구조하에서는 활사개공 농업을 기초로 삼아 농산물 생산과 공공선 실천 이 적절히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스스로 노력하고 이웃과 협력해 농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 나가는 자생력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며, 이 자생력이 잘 육성될 수 있는 농촌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건강한 농촌공동체는 어려움이 닥쳐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복원력을 가지는데, 이는 마치 건강한 사람이 생체 내에 면역기능을 가지고 있어 어 떤 질병이 왔을 때 스스로 대응능력을 가지는 것과 같다. 오늘날 우리는 농업의 어려운 문제를 모두 자유무역협정(FTA)이나 고령화, 규모의 영세성, 정 부지원 부족 탓으로만 돌리면서 정작 건강한 농촌공동체를 복원하려는 노력에는 소홀한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6차산업화는 앞의 정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참여 구성원들의 지혜와 아이디어 결집(집단지성), 지역에 분산된 소규모 6차산업 경영체들의 네트워 크 구축(연결의 경제), 협동과 배려 정신(공동체 기능)이 핵심요소다. 따라서 6차산업화가 성공을 거두고 오래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먼저 건강한 농촌공동체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혹자는 우리 민족이 단결이 잘 안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의 유전자(DNA) 속에는 품앗이·두레·계와 같은 상부상조의 배려정신이 녹아 있다. 일제강점기, 6·25 한국 전쟁 등 그동안의 각박한 생활 속에 많이 퇴화됐을 뿐이다. 이를 다시 살려내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6차산업화 정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강한 농촌공동체를 육성하면서 차근차근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나치게 경제적인 성과에만 초점을 맞추고 획일적인 잣대로 평가하거나,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실적에 집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6차산업화가 교육·복지·문화·국제교 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사업의 지원이나 평가 시에도 이런 점들이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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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 멸사봉공(滅私奉公)
& 활사개공(活私開公)

지속가능한 커뮤니티비즈 : 우리는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 않는가?
by씩씩한 종윤아빠Mar 09. 2018





멸사봉공(滅私奉公) : 개인을 희생하여 공공의 일에 봉사해야 한다.

활사개공(活私開公) : 개인을 살려서 공공의 이익을 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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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멸사봉공이라는 단어에 주제로 적었던 글을 다시 꺼내어 보았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개인의 자유나 공익과 사익,,,,, 뭐 이런 문제에서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에서 바라본 멸사봉공의 이데올로기는 마을사업에 있어 '마을과 나', '국가와 마을', '관과 주민'의 관점에서 조금은 다른 결로 읽혀집니다.




지난 세월 우리의 지배적 가치관은 멸사봉공에 가까왔습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혹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희생은 당연시되었고 개인의 성장과 복지는 무시되기 일수였습니다.

지금은 나누어 줄 것이 부족하지만 파이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몫(분배)도 늘어날 것이라는 경제적 지배 가치관,

분단국가로써의 존립과 국제정세속에서의 생존이라는 이유로 중앙정부로 권력집중이 당연시된 정치적 지배 가치관,

계층이동이 막힌 사회적 경직성을 개인의 노력부재로 내모는 사회적 지배 가치관,

한국사회를 이끌어 왔던 가치관들은 이러한 멸사봉공에서 출발해 왔고 민주화 이후 아주 조금씩 개인을 돌아보며 세상의 시선이 변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의 문제로 단정 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사회에서도 속도와 결과를 중요시 여기어 왔고 여기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사회적경제, 커뮤니티비즈니스 역시 이러한 점에서 다시 바바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적경제는 멸사봉공인가 활사개공인가?

물론 이 쯤에서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당연히 활사개공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 할까요?

개개인을 기다려주고 있을까요?

개인의 욕구나 수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하고 있을까요?

활사개공은 가치관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다른면에서 보면 우리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협동이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과 협동을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인식하는 것은 머리이지만 실천하는 것은 몸입니다.

가치를 인식하는 것은 머리이지만 가치를 실행하는 것은 몸입니다.

개인의 수요를 공공의 수요로

개인의 이익을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얼마전 분임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조마다 마을활동에서 가장 중요ㅕ한 키워드를 몇개 선정하는 기회가 있습니다.

신뢰, 행복등등의 다양한 키워드중 하나는 '기다림'이었습니다.

'기다림'을 키워드로 다들 동의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뜻일겁니다.

개인의 이익을 무시하는 경우보다는

개인의 이익이 실현될 기다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겁니다.

개인의 수요을 무시하기보다는

개인의 수요를 모아내는 과정을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겁니다.




속도와 효율, 경쟁, 목표,,,,,,, 이런 것들은 우리를 항시 긴장하게 만듭니다.

이런 것들은 활사개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이를 개개인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이는 공동체 혹은 관계망에서 함께 합의하고 풀어내야 하는 문제입니다.




느리다는 것에 겁을 낼 필요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커뮤니티비즈니스는 느리게 가더라도 개인개인을 서로 보듬어 함께 가야하기에 '활사개공' 을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합니다.
커뮤니티비즈니스
마을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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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로 엮은 마을공동체] 2. 활사개공(活私開公)
기자명 이로운넷=최봉익 공동체 모닥 대표
입력 2022.05.24 05:30
https://www.eroun.net/news/articleView.html?idxno=28436

양파처럼 주민들마다 핵심역량 갖기
그림=최봉익

조촐한 우리 집 식탁은 언제부턴가 양파 장아찌가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열흘에 한 번꼴로 양파 겉절이가 곁들여진다. 집사람 왈, "모두가 당신을 위해서" 란다. 나이 들면 철든다고 밥상머리에서 이 말 들으니 집사람이 한량없이 고마울 뿐이다.

양파는 흔히 식탁 위의 불로초라 불릴 정도로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치매 예방, 항암, 심혈관질환, 고혈압, 안질환, 불면증, 당뇨, 혈액순환, 면역력 회복 등 무려 54가지 효능이 있다는 내용이 검색창에 있다. 보약으로 상징되는 인삼의 효능은 기껏 6가지인데 반해 이보다 아홉 배나 많은 양파다. 양파의 생김새, 그 형성구조를 살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까도 까도, 지극-정성-소통-융합-배려-협력’ 구조다. 늙은이의 생뚱맞은 생각일까. 사람들마다 갖추지 못한 핵심역량을 양파들은 모두가 갖추고 있어 놀랍다.

5월로 접어들어 코로나19 기세가 한풀 꺾이자 미뤄왔던 마을학교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나름대로 거버넌스 운영체제인 마을학교는 2014년에 NGO시민재단,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살기좋은마을만들기네트워크, 도시재생공동체센터, 자치구 중간지원조직 등 다양한 시민조직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력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간 마을학교는 꾸준히 성장해 왔다. 운영체계나 프로그램 다양성은 진화했으나, 체계적인 교육과정 구성 미비, 일방향 강의식 교육, 자치구센터와 교육내용 중복, 교육대상의 모호함 등이 개선점으로 제기되었다. 마을학교가 마을활동가 역량 강화에는 기여 했지만, 주민의 역량 강화에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운영위원들의 평가다. ‘주민역량’이 곧 ‘마을역량’이고, ‘마을역량’이 곧 ‘지역역량’이라는 등식 성립을 전제할 때, 앞서 제기한 마을학교 교육과정 재구성이 요구된다.

2015년 다보스포럼은 지구촌 사람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4가지 핵심역량을 제시했다. 주민의 소통능력, 주민의 비판적 사고능력, 주민의 창의능력, 주민의 협업능력이다. 이는 마을학교 교육과정 재구성을 위한 메시지라고 믿는다.

캐나다 노바스코시아주 안티고니쉬카운티에 있는 셰비어 대학의 사명을 소개하고 싶다. 지역의 성인교육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티고니쉬운동을 탄생시킨 셰비어 대학은 1853년에 설립됐다. 국민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대학이 지식의 탐구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학의 정신은 신부이자 철학교수였으며 코디 박사를 이끌어낸 탐긴스 교수의 소신이기도 했다.

당시 캐나다 동부 해안지역은 농업, 어업, 광업에 의존하는 매우 가난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조소의 대상이기도 했다. 탐킨스 교수와 코디 박사는 대학이 상아탑 만이 돼서는 안 되고 지역사회와 어울리면서 지역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구자들은 초기에 지역에서 일할 대학생들을 애써 가르쳤지만, 대학생들은 지역에 남지 않고 대도시로 떠났다. 이들은 지역주민 교육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처음에는 교수들에게 주민교육을 맡겼다. 교수들은 ‘세익스피어’만을 가르칠 뿐 주민의 실생활 필요 욕구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선구자들은 지역주민에게 필요한 실용적인 성인교육을 위해 대학이 학생을 찾아가는 교도부를 설립했다. 농어촌 현장을 찾아간 교도부는 지역주민의 생각을 모으는 토의·토론중심의 학습동아리 모임을 전개했다. ‘만인은 철인’이라는 자신감을 키우며 대학과 지역주민을 연결하면서 현장의 요구에 답하는 지역 리더를 양성했다. 당시 지역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민 주도의 지역개발 방법은 협동조합이었다. 대학과 지역주민이 협력하여 만든 다종 다양한 협동조합운동은 큰 성공을 거뒀고, 농어촌지역의 실질적인 학습운동으로서 안티고니쉬 운동은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됐다.

안티고니쉬 운동은 다음의 6가지 원칙으로 운영했다. 첫째,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둘째, 사회개혁은 주민의 기본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셋째, 교육은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경제문제로 시작돼야 한다고 믿는다. 넷째, 주민은 사회구성원이기에 교육은 집단사고 활동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섯째, 효과적인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 운동의 궁극적인 비전은 주민들마다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서 보다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성취감을 누리는 삶이라고 믿는다.

주민의 역량이 지역의 역량이라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철학이 담긴 원칙으로 운영되는 셰비어대학의 코디연구소는 세계 대공황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에 영감을 줬다. 특히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거듭 말하지만 셰비어대학 코디연구소의 사명은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지역주민이 주도해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방법으로 지역리더 양성,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의 조직화, 사회혁신, 다양한 지역공동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한다. 또한, 지역문제를 풀어가는 사회적 경제조직을 포함한 다양한 지역사회 조직들과 긴밀히 협력한다. 거버넌스를 기반으로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자세를 중요시하며 실천해 나가고 있다. 셰비어대학 코디연구소의 사명은 우리들의 마을학교는 물론 지역의 대학들이 챙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우스갯말로 양파의 원산지가 캐나다가 아니기에 셰비어대학 코디연구소는 오히려 매력점수를 더 받는다.




뭇 생명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 정신

뭇 생명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 정신

뭇 생명 살리는 ‘접화군생(接化群生)’ 정신
한국정신문화를 찾아서(2)

sy104@m-ecoonomynews.com
등록 2018.12.21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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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西紀前, 기원전) 24세기에 선포된 홍익인간 정신이 그후 어떻게 변화했을까. 무려 3,000년 훌쩍 넘긴 서기 9세기의 인물 최치원에 이르러서야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로 싸우지 말고 어울려서 하나 되라’는 홍익인간 정신은 신라대에 와서 뭇 생명을 살리는 ‘접화군생’의 생명사상으로 이어졌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자연과 함께 상생하자는 접화군생의 풍류도 정신은 그저 소중하기만 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중심으로 생명사상을 알아본다.

학자들 간에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나오는 풍류도가 유불선삼교를 종합수용한 것이냐, 유불선 삼교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 고유의 사상이냐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 하고 있다. 기자가 보기엔 인류 보편적 정신사적인 흐름으로 볼 때 우리의 고유사상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홍익인간 정신을 가진 동이 사람들이 후대로 이어오면서 고유한 정신사상이 없었을리 없다. 공자가 살고 싶다는 나라, 군자국으로 불린 나라에서 왕조를 바꾸고 타민족들이 섞이고 부침하였다고 해도 정치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사상, 신념, 신앙이 없었을리 없다.

홍익인간 정신이 3,000여년이 흘러가는 사이에 좀 더 제도적, 관습적, 조직적체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홍익인간 정신은 부여와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각 나라마다 국가적 필요성과 지리적 위치와 씨·부족적 기질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수당(隋唐)과 직접 전쟁을 치른 고구려는 기상과 용맹이 강조됐을 것이고, 신라는 화랑정신을 제도화하기도 했다. 최치원이 <난랑비서>에 언급한 풍류도는 비명의 주인공이 화랑이므로 화랑들의 정신사상과 관련돼 있을 것임은 틀림 없다. 그러나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고 밝히고는 풍류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접화군생’ 넉자만 기술했다. 그리고 풍류도는 유불선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며 유불선을 이용해 풍류도를 설명하고 있다.

선사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풍류도는 유불선처럼 가르침이 경전으로 체계화돼 있지는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최치원과 같은 학자가 만약 체계화된 내용이 있었다면 유불선에 빗대어 설명하기 전에 풍류도 정신의 일단을 밝혔을 것이다. 따라서 풍류도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빈약한 사료들과 비교분석 하고 근·현대 가설들을 끌어대어 억지로 상상력을 발휘할 필 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난랑비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빈약한 사료들이라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홍익인간 정신이 실천적이었듯, 풍류도도 ‘접화군생’과 같은 근본적가치, 소박한 의례, 실천적인 내용의 강령 등이 거의 전부일지 모른다. 풍류도와 풍월도, 국선, 미륵선화 등 여러 호칭으로 나타난 것은 풍류도가 확립된 사상과 학파, 종교집 단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당시에는 한자를 쓸 수 있는 지식층도 극히 제한돼 있었으며 문자로 남기는 작업은 국가적 사업이었던 까닭에 기록이 많지 않았을 터다. 다시금 얘기하자면 너무 글자 하나, 일획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가 없고 대의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풍류도가 바로 화랑도가 아닐 것이다. 화랑도는 나라의 인재 양성을 위한 목적으로 초기엔 자연발생적으로 나중에 국가에 의해 풍류도 중에서 필요한 것만 취해 화랑도의 가르침이 형성됐을 것이다. 어떤 씨족, 부족집단이나 어린전사의 양성이 중요했을 터이다. 귀족, 성주의 자제들과 그 주위 낮은 계급의 자제들로 이뤄진 전사 양성습속(習俗)이 있었을 것이고 삼국 전란 시기에 ‘세속오계’와 같은 실천덕목이 만들어 졌을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에도 풍류도와 화랑도와 같은 정신사상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지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한국철학을 전공한 성균관대 이선경 교수는 풍류도는 삼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고유 정신사상이라며 그 근거로 최치원 이 쓴 <대숭복사비>의 내용을 제시했다. “우리 태평국(신라)은 승지이니, 사람의 성질이 매우 유순하고 지기가 만물을 생기게 하는데 모아졌다. 산과 숲에서는 말없이 고요하게 도를 닦는 무리가 많아 인(仁)으로써 벗을 모으고, 강과 바다의 물은 더 큰 곳으로 흐르려는 형세를 좇아, 선(善)을 따르는 것이 물 흐르는 것 같았다. 이런 까닭에 군자의 풍도를 드날리고 부처의 도에 감화돼 있는 것이, 마치 붉은 인니(인주)가 옥새를 따르고, 쇠가 거푸집 안에 들어 있 는 것과 같았다.”

이선경 교수는 또 <난랑비서>에서 풍류도의 핵심으로 언급 한 ‘접화군생’을 뭇 생명과 만나서 감화한다는 의미로 해석했 다. 이 교수는 풍류도는 이질적 사상들과 얼마든지 만나 대화할 수 있으며 인간을 넘어서 천지자연의 뭇 생명까지 감화시키는 생명사상이라고 강조했다. 최치원의 <지증화상비명> 에도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 생의 철학‘이 잘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이선경 교수는 또 최치원의 <진감화상비명>을 인용하면서 통일신라인의 고유정신이 갖고 있는 개방성에 주목했다.

“도는 사람에게 멀지 않고 사람에게는 남의 나라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東人)의 자손들이 불교도 하고 유교도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계원필경 권2, ‘진감화상비명’)” 이 교수 는 “풍류도는 ‘접화군생’의 열린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늘과 땅과 어울려 살아가는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는 단군시대 신시(神市)의 소망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허호익 대전신대 교수는 <난랑비서>에 나오는 ‘국유(國有)’ 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허 교수는 「최치원의 <난랑비서>의 해석의 여러 쟁점」이란 논문에서 최치원은 당나라를 서토(西土) 서국(西國)이라고 부르고 신라를 동국(東國)이라 부를 만큼 신라의 주체적 자각이 뚜렷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최치원이 <난랑비서> 서두에 ‘국유’를 명시한 것은 풍류도가 유불선이나 중국식 풍류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우리 민족 의 고유 사상임을 강조하기 위한 어법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풍류도는 중국에서 사용되던 색정적 풍류나 감흥적, 미학적 풍류도 아니며 은일형, 계절형, 순례형 풍류도 아니고 종교 신앙형 풍류라고 주장했다. 접화군생에 대해서도 최영성, 도광순 교수의 글을 인용해 초목이나 동물에게까지도 덕화를 베푸는 정신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선경 교수를 지난 11월 초에 만났다. 이선경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조선시대 실학자이자 역학자인 이원구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교수는 풍류도와 단군신화는 역학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한국문화의 원형적 상상력으로서의 역학」에서 풍류 도와 단군신화는 음양 대대와 천지인 삼재, 상생의 생명사상 이 풍성하게 녹아 있다고 말했다.




Q. 역학이라고 하면 보통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선경 안재홍 선생과 유승국 선생이 연구한 바가 있는데, 두 분의 선생님들이 역학을 중국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부여에서 수골 복사가 성행하고 나중에 은나라에서 갑골 복사가 이뤄졌습니다. 안재홍 선생은 태극이고 팔괘고 간에 역학은 중국 특유의 문화 산물이 아니고 조선적인 요소가 매우 많다고 하셨어요. 삼국지 위서 부여전에 부여인들은 전쟁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발굽이 갈라졌으면 흉하고 합쳐졌으면 길한 것 으로 봤다는 수골복사 기록이 나옵니다. 주역이란 본디 점치는 책인데, 북사가 동이에서 일찍 행해졌던 것이지요. 역학이 중국에서 체계가 잡혔지만 그 역학적 사고의 바탕은 동이 족이 이미 전해오고 있었다는 거지요.


Q. 역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이선경 한국철학을 공부하다가 늘 역(易)에 걸리는 거예요. 역(易)의 사유를 모르니까, 한국철학, 성리학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리학의 이기론이라는 것도 주역과 닿아 있거든요. 동양학을 하면 항상 주역의 언어가 나옵니다. 대만에 어학연수를 갔다가 대만정치대학에서 역학의 대가이신 고회민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에게서 본격적으로 역학을 배웠습니다. 석사 논문은 「역경의 선(善) 사상 연구」 였습니다.


Q.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분인데, 이원구 선생을 사상가로 규정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이선경 실학파들은 주장은 있는데 철학이라고 할만한 이론체계가 미약합니다. 이원구 선생은 북학파와 비슷하게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의 육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음양변증론이라고 할 수 있는 ‘구도육사론 (九道六事論)’의 이론 체계를 세웠습니다. 다시 말해 인륜과 산업은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산업 속에서 인륜이 실현돼야 한다’는 주장을 독창적인 역학론으로 설파하셨습니다. 이원구 선생의 역학은 중국 역학의 수용과 이해의 단계를 넘어 독자적 역학 세계를 여신 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Q. 역학 사상이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요?

이선경 역학의 기본 원리는 ‘음양 대대(待對)’와 ‘소식(消息)’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대’란 대립된다는 말인데 음양, 즉 낮과 밤, 빛과 어둠처럼 대립돼 있지만 낮과 밤이 서로 연결돼 있지 않습니까. 어둠이 있어야 빛이 보이는 것이죠. ‘소식’은 잦아들고 불어난다는 뜻인데요, 낮이 줄어들면 밤이 늘어나고 밤이 깊어지면 해가 솟아난다는 것이죠. 이것을 인간 세상에 빗대면 내가 존재하려면 나와 상반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미운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 까. 미운 놈을 밉다고 죽이는 게 아니고 미운 놈은 함께 살아 가야 하는 상생관계라는 원리입니다. 역에 보면 비구혼구(匪寇婚媾)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적인 줄 알았는데, 혼인할 짝이더라는 말이죠.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 여태까지 도적놈이라고 서로 대치했는데 좋은 기운이 돌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립자인 줄로 아는데 결국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라는 게 역학이 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