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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5

“일본불교 별 니시다와 스즈키, 제국주의 미화했다”

“일본불교 별 니시다와 스즈키, 제국주의 미화했다”

“일본불교 별 니시다와 스즈키, 제국주의 미화했다”
입력2021.08.04. 
조현 기자

‘불교평론’ 일본불교 실상 고발
니시다 기타로·스즈키 다이세쓰
20세기 세계적 불교학자 흔적 추적
원본보기2020 도쿄올림픽을 닷새 앞둔 7월18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선수촌 인근 도로에서 극우단체가 차량을 이용해 확성기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0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성화봉송로 지도에 독도를 일본 땅처럼 표기해 ‘평화의 제전’ 올림픽에서마저 제국주의적 마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 대표적인 계간지 <불교평론>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일본의 세계적인 불교학자들이 제국주의 이론 정립에 앞장섰다고 고발했다.

<불교평론>은 최근 펴낸 여름호 커버스토리 특집 ‘일본 불교의 특성과 실상’에서 니시다 기타로(1870~1945)와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의 친제국주의적 사상과 행보를 파헤치는 글을 게재했다. 이 특집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주류 종교인 불교가 어떻게 제국주의 전쟁을 돕고 참여했는지 구체적인 자료들을 적시했다.


원본보기니시다 기타로. <한겨레> 자료사진

일제의 총동원령에 따라 우리나라 불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 등도 강압적 혹은 자발적으로 전쟁물자를 지원했으니, 일본 내 종교들이 애국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된 것은 별 신기할 게 없다. 그러나 니시다 기타로와 스즈키 다이세쓰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인가받고 이를 이론화해 서양에 전한 동갑내기 둘은 서양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불교인을 꼽을 때 1·2위를 다툴 만한 인물들이다.

니시다 기타로는 일본의 독자적인 철학을 형성한 대표적 사상가로, 교토학파의 개조(한 종파의 원조가 되는 이)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에 건너가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전한 서양 불교의 태두다. 그는 인류문명이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을 서양의 합리주의에 두고, 동양적인 직관, 곧 선 사상의 중요성을 알려 서구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인들이 선(禪)이 아니라 일본어인 젠(zen)으로 표기한 것도 그로 인해서다.


원본보기교토학파의 아버지인 니시다 기타로가 고뇌하며 걷던 ‘철학의 길’이 시작되는 일본 교토의 은각사 전경. 조현 기자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가 약소국들을 침략하는 데 있어 전위대 구실을 한 데 반해, 불교는 ‘비폭력 평화의 종교’로 자리해왔음을 불교계는 자부해왔다. 하지만 이번 특집을 통해 불자도 언제든 제국주의와 폭력에 동원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나선 셈이다.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는 “니시다 기타로는 1944년 ‘일본의 국체가 바로 대승불교 참정신의 재현’이라고 주장했다”며 “니시다가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대하고, 동양공영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왕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썼을 때, 그는 유사제국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니시다 기타로.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에서 발행된 니시다 기타로 기념우표.

최용운 서강대 연구교수는 “니시다는 1943년 5월 일본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지침에 대한 글을 요구받고 <세계 신질서의 원리>를 집필했다”며 “당시 도조 내각이 이를 수용해 중국, 만주, 필리핀, 타이, 미얀마 등의 대표가 참가한 ‘대동아의회’에서 채택한 ‘대동아공동선언’에 상당 부분 반영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론 자체가 니시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근대 세계 역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비판했던 그가 피지배국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치 않은 채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편승했던 행적은 그의 학문적 위업의 빛을 감쇄케 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니시다와 함께 교토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다나베 하지메(1885~1962)가 니시다와 달리 참회의 양심선언을 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다나베는 1946년 저서 <참회도로서의 철학>을 통해 전쟁 기간에 국가의 실책에 대해 어떤 반대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를 뉘우치며 철학자로서의 무력함으로 고뇌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참회를 통한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스즈키 다이세쓰. <한겨레> 자료사진

종교학자인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은 선을 ‘전투 정신’으로 결부시킨 스즈키 다이세쓰를 비판했다. 스즈키는 저서에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극기적인 선 수업의 계율적인 경향은 전투 정신과 일치한다. 전투하는 이는 언제나 싸움의 대상에 마음을 오롯이 쏟으며, 곁눈질해서는 안 되고 적을 부수기 위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썼다. 이 원장은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인 1938년 일본의 대륙 침략이 한창이던 때 스즈키가 이 글을 썼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또 “태평양전쟁 패전 후 스즈키는 일본이 사태를 잘못 파악해 큰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문제의식을 갖기는 했고, 쇼와 일왕 부부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치며 ‘다른 사물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며 “그러나 그 상처 속에 조선인의 상처와 무고한 죽음들이 포함돼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원본보기1946년 도쿄 전범재판석에 앉은 도조 히데키(맨 왼쪽) 등 일본군 전범들. 수많은 부하들과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 중 다수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다시 출셋길을 걸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는 “니시다와 스즈키는 깨닫지 못한 이들에 의한 역사적 현실을 깨달음의 논리로 너무 쉽게 긍정했다”며 “그러다 보니 전쟁의 희생자, 아수라장, 거짓과 폭력 같은 구조적 폭력과 민중의 고통을 마치 가상세계 대하듯 간과해 마침내 침략도, 전쟁도, 죽임도 무화시킨 채 결국 천황제와 군국주의도 긍정했다”고 비판했다.




조현(cho@hani.co.kr)

2021/06/23

알라딘: 빈탕한데 맞혀놀이

알라딘: 빈탕한데 맞혀놀이

빈탕한데 맞혀놀이 - 다석으로 세상을 읽다   
이정배 (지은이)동연출판사2011-11-02


책소개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다석학회 회원으로 다년간 다석사상을 연구해온 이정배 교수가 다석과 관련하여 연구한 두 번째 책이다. ‘빈탕한데’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허공’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석 선생은 평생의 소원을 그 ‘빈탕한데’ 맞혀(맞춰) 노는 것이라고 했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실체는 ‘빈탕’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토착화’는 WCC의 JPIC(정의·평화·창조의 보존) 한국 대회에서 기독교의 10대 과제로 뽑힐 만큼 중요한 과제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이듯이 신토불이(神土不二)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옷을 입혀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착화 신학의 과제이고 저자는 토착화 신학의 원류, 토착화 신학의 절정을 다석에게서 찾는다. 토착화된 신학이기에 세계적인 신학일 수 있다. 다석을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서슴없이 올릴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서론_ 미정고(未定稿)로서의 예수 - 多夕 유영모를 만나기까지
1. 신학적 영향사(影響史)의 개관
2. 오늘의 시각에서 본 가족사와 학창시절
3. 一雅 변선환 선생
4. 프릿츠 부리와의 만남
5. 스승 없이 스승되어 살기
6. 초현실주의 신학자 이신(李信)의 재발견
7. 토착화 신학의 절정으로서 多夕학파의 기독교 이해
8. 신학함의 동반자가 있어 행복했던 25년

제1부 한국 신학의 두 과제, 토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른 多夕의 기독론

1장. 多夕신학에서 본 ‘역사적 예수’의 기독론
들어가는 글
1.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기독론 비판의 근거 - 부활 이전/이후 예수상(像)의 구별
2. 초자연적 유신론 및 인습화된 ‘케리그마’ - 바울 신학과의 연계를 중심하여
3. 역사적(부활 이전) 예수의 신성(神性)과 영(靈)기독론 - ‘참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 이해
4. 역사적 예수의 한국적 재(再)케리그마화 - 영(靈)기독론에서 多夕의 ‘얼’기독론으로

2장. 多夕신학 속의 자속(自贖)과 대속(代贖), 그 상생(相生)적 의미
들어가는 글
1. 기독교 케리그마(Kerygma)는 불변의 상수(常數)인가?
2. 역사적 예수 삶의 탈(脫)현대적 조명
3. 多夕의 예수 이해, 상생적 구속론의 사상적 토대로서 <天符經>과 三才사상
4. 역사적 예수 삶의 재(再)케리그마화로서 多夕의 스승기독론 - 대속(代贖)과 자속(自贖)의 상생(相生)적 차원
나가는 글

3장. 민족과 탈(脫)민족 논쟁의 시각에서 본 多夕신학 - A.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의 비판적 독해
들어가는 글
1. 토착화 신학의 토대로서 ‘한국적 주(정)체성’, 그 실체는 있는가?
2. A. 네그리의 민족주의 비판의 새 차원 - ‘제국’의 도래와 세계적 가난의 실상
3. 다중(多衆)의 삶정치(Biopolitics)와 ‘유러피언 드림, 그 공감의 정치학’
4. 한국적 ‘통섭론’에서 본 새문명론과 多夕의 ‘다중(多衆)’기독론 - 3세대 토착화론에 대한 소견
나가는 글

제2부 두 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 -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

1장. 귀일(歸一)사상에 근거한 多夕의 유교 이해
들어가는 글
1. 多夕의 시각에서 본 유교와 기독교 만남의 역사 및 평가
2. 역사적 유교의 한계와 歸一사상에 근거한 유교 본래성 이해
3. 유교경전에 대한 多夕의 신학적 해석학
4. 성서 풀이 속에 나타난 후천(後天)시대의 多夕의 기독교상(像) - 귀일(歸一)사상에 근거하여
나가는 글

2장. 多夕신학 속의 불교
들어가는 글
1. 삼재론(三才論)의 틀에서 이해된 多夕의 신학적 회통 원리
2. 불교와 기독교 간의 소통 원리로서의 여래장(如來藏)사상 - 삼재론(三才論)에 대한 불교적 이해
3. ‘自他不二’적 구원(해탈)론으로서 십자가 사건 - 돈오돈수(頓悟頓修)적 점수(漸修)론과의 대화
4. ‘얼나’와 불교적 ‘無我’(成佛) - ‘덜 없는 인간’을 넘어서

3장. 기독교의 동양적, 생명적 이해 - ‘빈탕한데 맞혀 놀이’와 진물성(盡物性)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글
1. 없이 계신 하느님과 귀일(歸一)사상
2. 십자가와 참(얼)나
3. 바탈[本然之性]로서의 성령
4. 빈탕과 하나되는 삶 - 자속과 대속의 불이(不二)적 관계
나가는 글

제3부 多夕으로 오늘의 세상 읽기 - 多夕신학과 현대 사조와의 만남

1장. 생명담론의 한국적 실상 - 생명담론으로서 多夕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하여
들어가는 글
1. 생명의 형이상학적 이해, 그 새로운 시도들
2. 신과학의 전일적 생명론과 그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
3. 진화생물학의 생명담론 실상과 전개 및 비판 - ‘通涉’ 개념을 중심으로
4. 한국에서 전개된 자생적 생명철학 - 동학, 多夕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의 한국적 수용
나가는 글 - 현대적 생명담론과 多夕사상의 치열한 만남을 꿈꾸며

2장. 한국적 통섭론(通涉論)으로서의 多夕신학 - E. 윌슨의 ‘생명의 편지’에 대한 한 답신
들어가는 글
1.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편지』 풀어 읽기 - 생명을 위한 연대의 제안
2. 『생명의 편지』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 - 토마스 베리의 우주 진화적 신학과 샐리 맥페이그의 성육신적 생태신학을 중심하여
3. 기후 붕괴 및 종의 멸종 시대와 多夕의 생명사상 - ‘統攝’을 넘어 ‘通涉’으로
4. 한국적 통섭론(通涉論)의 시각에서 본 『에코지능』과 『생체모방』 - 多夕 생명사상의 구체적 실상
나가는 글

3장. 種의 기원과 種의 멸종 사이에서 본 多夕의 ‘없이 계신 하느님’
들어가는 글
1. 다윈 진화론의 핵심 내용과 기독교와의 갈등 배경
2. 진화론에 대한 현대적 논의들 - 유물론적 진화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3.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한 신학적 논의들 - 설계, 성사(聖事)를 넘어 ‘약속’으로?
4. 창조와 성육의 통합으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와 多夕의 ‘없이 계신 하느님’ - 약속을 넘어 ‘책임’으로!
나가는 글

접기
책속에서

서론 중에서

필자의 多夕연구는 크게 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多夕의 동양적 기독교를 서구 종교다원주의 틀에서 다루되 그와의 변별력을 강조했다. 소위 그의 ‘얼기독론’을 서구 다원주의 시각의 급진적 내재화로 본 것이다. 최근에는 그의 ‘얼기독론’을 ‘다중多衆기독론’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두 개의 ‘탈脫’ 탈현대와 탈식민성을 의식했던 까닭이다. 둘째는 多夕사상을 일본 교토학파와 견줄 만한 사상체계로 이해하는 일이었다. 해서 필자에겐 多夕한 사람만이 중요하지 않았고 함석헌 · 김흥호를 비롯하여 박영호 등 多夕을 스승으로 모신 이들의 사상과 多夕과의 관계를 묻는 일이 소중했다. 多夕학파란 이름하에 이들을 함께 묶을 수 있는 틀거지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에 초점을 맞춘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다른 점도 확연히 드러났다. 무게 중심이 기독교에 있었던 까닭에 이들에게 예수는 이론적 전거만이 아니라 고백적 토대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多夕의 기독교 사상을 민족문화 속에 스며든 <천부경>, 그 영향사의 정점으로 보았고 유불선(儒佛仙)은 물론 동학(東學)과도 회통할 수 있는 대승적 틀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십자가를 수행적, 자/타불이(自/他不二)적 대속론(代贖論)의 차원에서 설명한 것이 바로 그 핵심 증거이다. 성직만 있고 수도(修道)의 개념이 간과된 한국 기독교에게 그의 수행적 기독론은 상당히 유의미하다. 향후 필자는 多夕이 남긴 난해한 원전을 더욱 깊이 읽어갈 생각이다. 그러나 多夕을 과거적 시각에서가 아닌 현대 신학적 주제들과 맞부닥트릴 계획이다. 이미 다중(多衆), 생태신학, 진화신학, 역사적 예수 연구의 차원에서 多夕을 조명한 글들을 준비해놓았다. 물론 이런 글쓰기는 多夕한 개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多夕학파의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多夕연구는 순수 종교적 · 이론적 차원에서만 비롯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식치 못했으나 동양적으로 이해된 십자가 개념 속에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케리그마(kerygma)가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多夕에게는 십자가를 지신 스승 예수가 중요했고 그의 십자가를 ‘일좌식 일언인(一座食一言仁)’이란 말로서 동양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것은 그것을 믿는 차원을 넘어 그렇게 사는 길밖에 없을 터, ‘일좌식 일언인’이란 말 속엔 자본주의와 맞설 수 있는 삶의 에토스가 가득 차 있다. 소승적으로 자신 한 몸 수신(修身)하는 차원이 아니라 세상에 가득 찬 죽음의 세력(자본주의)과 맞서는 길이란 것이다.
필자 역시도 처음에는 多夕사상 속에서 개인적 차원만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전 재산이 오늘의 동광원의 기초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제 뜻 버려 하늘(아버지) 뜻’이룬 예수의 십자가는 오늘날 반(反)생태적 천민자본주의와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치열하게 공적(公的)인 삶으로 부르는 것, 사(私)와의 사투(死鬪)를 벌리는 일이 多夕에게 ‘일좌식 일언인’으로서의 십자가였던 것이다. 필자가 多夕사상 속에서 한국적 생명신학의 정수를 재인식하고 이에 몰두하게 된 것도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다. 多夕사상 속에 신학적 화두인 ‘생명’을 발견한 것은 필자에겐 은총 그 자체였다. 향후 한국적 생명신학의 차원에서, 아니 내 자신의 삶 속에서 多夕사상을 깨치고 체화시키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뿐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벨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했고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 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백 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상임 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정배의 생명과 종교 이야기』, 『이웃 종교인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 『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켄 윌버와 신학』,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토착화와 생명 문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종교개혁 500년 以 後신학』과 『3.1정신과 以後신학』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접기
최근작 : <유영모의 귀일신학>,<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 … 총 4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 다석일지 중

현대 담론을 다석 유영모의 사상으로 읽어내다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다석학회 회원으로 다년간 다석사상을 연구해온 이정배 교수가 다석과 관련하여 연구한 두 번째 책 『빈탕한데 맞혀 놀이 - 多夕으로 세상을 읽다』를 펴냈다. 첫 번째 책,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을 내며 다석 사상을 깊이 있게 내재화시킨 저자는 이 책에서 다석사상으로 현대의 신학 담론들, 현대 사조들과 만남을 시도한다.
‘빈탕한데’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허공’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다석 선생은 평생의 소원을 그 ‘빈탕한데’ 맞혀(맞춰) 노는 것이라고 했다. 곧 ‘없이 계신 이’의 실체는 ‘빈탕’이며,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가는 것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토착화’는 WCC의 JPIC(정의·평화·창조의 보존) 한국 대회에서 기독교의 10대 과제로 뽑힐 만큼 중요한 과제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이듯이 신토불이(神土不二)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온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옷을 입혀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착화 신학의 과제이고 저자는 토착화 신학의 원류, 토착화 신학의 절정을 다석에게서 찾는다.(물론 다석 스스로는 토착화라는 단어를 쓴 적은 없다.) 토착화된 신학이기에 세계적인 신학일 수 있다. 다석을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서슴없이 올릴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론 “미정고(未定稿)로서의 예서 - 多夕을 만나기까지”에서는 저자 자신의 신학적 실존,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난 多夕의 의미를 정리한다. 숫한 신학 여정에서 씨름하며 만난 뭇 이론들과 만나 씨름했던 저자가 온전히 무릎 꿇을 사건을 多夕사상을 만난 것이라고 하는 저자의 삶으로 다석을 반추한다.

1부 “한국 신학의 두 과제, 토착화와 세계화를 아우른 多夕의 기독론”에 속한 세 논문은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들과 탈(脫)민족주의 이론들과의 대면을 통해 多夕이 이들 담론들 속에 내재된 서구적 갈등, 곧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민족과 탈민족주의 간의 대립을 동양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적시한다. 1부에서 제시한 자속과 대속의 불이(不二)적 성격 나아가 多夕의 ‘얼기독론’의 재해석으로서 다중(多衆)기독론을 통해 이들 서구 담론에 대한 동양적 응답을 접할 수 있다.

2부 “두 번째 차축시대와 회통적 기독교 -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이해”에서는 역으로 한국 고유한 종교들, 즉 유교와 불교와 만날 수 있는 신학의 적실한 가능성으로서 多夕사상을 언급한다. 축(軸)의 시대 종교들의 영향력이 실재하는 한국 땅에서 서구식의 어떤 종교다원주의 유형도 이런 실상을 온전히 밝힐 수 없다는 판단에서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多夕이 한국 고유한 <천부경(天符經)>의 귀일(歸一)사상의 빛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유교와 불교를 풀었기에 두 번째 차축(後天)시대(후천시대)에 합당한 회통적 기독교를 말했다고 확신하며 글을 풀어나간다.
마지막 3부 “多夕으로 오늘의 세상 읽기 - 多夕신학과 현대 사조와의 만남”에서는 우리 시대의 화두인 생명담론과 多夕사상의 상관성을 논한다. 진화생물학자로서 생태학에 관심 깊은 E. 윌슨의 통섭(統攝)적 생명론을 多夕의 눈으로 비판했고 다윈 진화론에 대한 서구적 논의구조 속에 뛰어들되 종(種)의 멸종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多夕신학의 얼과 구조가 얼마나 더 현실적 대안일 수 있는가를 역설한다. 동서양에서 논의되는 생명담론들의 빛에서 多夕의 생명사상을 자리매김한 것도 저자가 주안점을 둔 곳이다. 접기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⑤-6 이정배 교수 인터뷰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 아주경제


하늘로 이끄는 뜻이 한글에 있다 하셨죠
황호택 논설고문입력 : 2021-02-17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⑤ 이정배 교수 <上>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서울에서 인사동 삼청동 부암동 같은 곳은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다.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가고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이 자리 잡고 있다. 부암동에는 김환기 미술관, 윤동주 문학관, 석파정 서울미술관, 젓가락 갤러리 ‘저집’ 등 문화 명소가 많다. 고풍스런 동네에 눈발이 날리니 분위기가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윤동주 문학관 옆에 차를 세우는데 이정배 교수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교수의 집은 문학관에서 멀지 않았다. 대문에서 안채로 이르는 가파른 돌계단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교수 집 2층 창밖으로 부암동의 푸근한 설경(雪景)이 액자 그림 처럼 내다보였다. 이 모습을 놓치기 아까운 듯 인턴기자가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교수가 고창의 윤정현 신부가 보낸 것이라며 곶감을 내놓았다. 고영재 부근 야산의 감을 따서 깎고 말려 보낸 정성이 대단하다. 릴레이 인터뷰 1호가 3호에게 보낸 곶감이다.
다석은 수를 좋아하고 셈을 즐겼다. ‘호암(문일평)이 52세(1만8545일)로 가시니 나보다 627일 먼저 나시었다.’(다석이 쓴 추도문) 다석은 이런 식으로 숫자 기록을 많이 남겼다.

-윤정현 신부, 이 교수 그리고 인터뷰어가 공교롭게도 모두 1955년생 양띠입니다. 다석이 지금 살아있으면 132세였을 텐데요. 55년생인 우리 나이의 딱 두 배가 132네요. 다석도 숫자 계산을 하다가 기묘한 우연을 발견하면 즐거워했습니다.

“다석을 공부하는 우리가 지금 다석 나이의 절반, 그러니까 다석의 허리춤 정도에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석은 ‘나만 따르라’ ‘추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길 삼아, 다리 삼아 한 번 건너라’고 했습니다. ‘나의 허리춤을 잡고 씨름하라’는 의미로 새기고 싶습니다.

-2020년, 작년이 정년이었군요. 정년 4년 반을 앞두고 학교를 떠났더군요.

“31살에 교수로 부임해 30년을 재직했기에 남들 할 만큼 충분히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학내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학생들 편에서 학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요. 교수직 사퇴를 배수진으로 치고 학교 당국과 씨름하고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세월호가 주는 충격이 컸습니다. 강단 신학자로만 학교에 머무는 것이 제 양심에 허락지 않았죠. 국가와 교회 공동체의 문제에 우리가 뛰어들어서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겸사겸사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일찍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석의 묘소는 둘째 아들 자상이 꾸리던 강원도 평창의 농장 인근에 있다. 다석은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아들들이 듣지 않고 묘소에 모셨다. 다석 부부 합장묘를 참배한 이정배 이은선 교수 부부. [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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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 <빈탕한데 맞혀놀이>의 도입부에 자전적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서울에서 사업을 일구었다가 실패한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기 싫어 처가가 있는 충북 보은으로 이사 갔다. 그렇지만 자식들은 서울로 보냈다. 누나는 이화여대에 다녔다. 그는 영락교회 재단인 대광 중고교에 다니다 기독교를 접했고, 누나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감리교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저희 집안은 전통적 유교 집안입니다. 아버님은 제사를 지내면서 울기까지 할 정도로 조상들에게 죄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던 분이었지요. 나는 그런 배경에서 대광중고교를 다니면서 기독교를 알게 돼 감리교 신학대학에 갔어요. 김리교 신학대학 학생들 중에 목사 장로의 아들 딸이 많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자녀는 나를 포함해 몇 사람 없었던 것 같았어요. 생각만큼 학교 공부가 재미없었습니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던 차에 대학 3학년 무렵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변선환 교수를 만났죠.

그 당시 나는 기독교 교리에 깊이 빠져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데, 그럼 우리 부모님은 어떡하나…”라는 고민이 컸습니다. 그런데 변 교수가 새로운 신학 사조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유교적, 무속적, 불교적 바탕이 매우 소중하고, 서양 사람들이 갖지 못한 정신적 자산을 잘 활용하면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를 학문의 길로 이끌어 준 것이지요.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신앙 양식에 눈 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마복음 "우리를 나간 한 마리 양이 되라"

변 선생의 뒤를 이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더니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한 김흥호 교수(1919~2012)가 명예교수로 와 있었습니다. 바로 옆방에 있던 그분의 가르침을 받게 됐지요. 김 교수는 자신도 다석한테 그렇게 배웠다면서, 나를 한 시간씩 일찍 학교 나오게 해서 다석 사상을 가르쳐 줬어요. 그렇게 2년 이상에 걸쳐 다석에 입문했지요.”

방에 김흥호 선생이 1993년 이 교수에게 써준 글씨가 걸려 있었다.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가 쓴 시구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이었다. ‘시가 떠올라 취중에 붓을 휘갈기다’라는 뜻이다. 이 교수는 하느님의 영에 취해서 학문에 몰두하라는 김흥호 선생의 분부 같다고 해석했다.

-초기 예수 공동체의 도마복음에는 동정녀, 예수님의 부활, 재림, 대속(代贖) 신앙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과정에서 예수가 신격화했다고 하던 데요.

“예수 사후(死後),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국교화하는 AD 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누가 옳고 그르고, 누구는 정통이고, 누구는 이단 같은 구분이 없었습니다. 도마복음서가 있었던 것은 도마를 추종하는 예수 공동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최초의 복음서라고 하는 마가복음서도 예수의 죽음으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한 세기 지난 이후에 부활 이야기를 첨가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따르던 공동체들이 많았습니다. 도마복음서의 공동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양 99마리가 있는 우리를 떠나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죄인이라 하고, 그 양을 다수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도마복음서는 차라리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되라고 합니다. 기존 교회가 제도(교리)화 하고 성직자 중심으로 변질돼 가는 정황에서 오히려 도마복음서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을 진정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본 것이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는 과정에서 도마복음서는 제도를 부정하는 거추장스러웠던 책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경에서 제외된 측면이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의 예수는 성경에 다르게 묘사돼 있는가요.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30세 될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모습부터 시작합니다. 
그것보다 조금 늦게 쓰인 마태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30년 소급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예수의 삶이 조금씩 도그마화하고 교리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보다 조금 더 늦게 쓰인 누가복음서에는 예수의 재림, 승천, 심판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리고 가장 늦게 쓰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를 로고스인 하나님과 동격이라 묘사합니다.

 나중에 쓰인 복음서일수록 예수님에 대한 신성화, 예수님에 대한 교리화, 도그마화 하는 과정이 두드러집니다. 이에 반해 예수 어록을 담고 있는 도마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김흥호 교수가 제자 이정배 교수에게 써준 '시성비취묵'(詩成飛醉墨) 글씨 [사진=황호택]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속죄(贖罪)를 대신(代身)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영생한다는 대속(代贖) 신앙은 정통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데요. 그러나 다석은 대속 신앙에 대해 “나와 관계 없다”고 했는데요?

“톨스토이가 스스로를 비정통이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다석도 스스로 비정통이라고 했습니다. 다석이 본래는 주일 아침만 되면 연동교회 승동교회 새문안교회 등 여러 교회를 다녔고,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을 기독교로 인도할 만큼 정통 신앙에 빠져 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유학 시절에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습니다. 그의 일본식 기독교에 접하면서 다석의 마음속에는 한국식 기독교라는 형상이 잡혀갔겠죠.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적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루터의 대속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일본적 기독교는 물론 대속 사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일본에 갔던 함석헌도 이 점에서 동일합니다. 대속 사상은 동물을 잡아 피를 바쳐야 했던 유대 민족의 제사 풍습의 연장선에서 나온 예수에 대한 이해지, 오늘날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낯설다고 본 것이지요.
서양의 기독교가 예수를 통해 구원 받는 대속 신앙을 가르쳤다면 동양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가는 자속(自贖) 신앙이라고들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속과 자속의 의미를 철저히 구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삶이 있었고, 그 삶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 이상 이 길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란 차원에서 대속의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따라 살다가 우리도 그처럼 길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을 자속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가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대속이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우리도 그 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 자속입니다.
그렇기에 대속 신앙이라는 말을 폐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석은 우리들 일상의 삶 자체가 대속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지요. 물론 나 역시 인습적으로 사용되는 교리적 대속 신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기독교가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대속은 틀렸고 자속은 맞다는 양자택일(兩者擇一)적 이해는 오히려 다석의 생각을 그릇되게 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인식이 강한 아버지께 혼날까 봐 신학대학 진학을 상당 기간 숨겼다고 했던 데요.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의 양반들은 왜 기독교를 반대했습니까.

“‘예수 믿고 자기 조상도 못 알아볼 놈’ ‘부모가 죽어도 제삿밥도 안 챙겨줄 자식’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거죠. 아주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조상을 안 챙기는 기독교 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유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느님만 알고, 집안도, 제사도 모르는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걱정을 한 거죠. 저를 손사래 하며 서울로 보낸 데는 가문의 영광을 회복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 신학대학을 나와 누추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전도사가 있었는데 자식의 앞날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 나는 교회에서 배운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에 아버지의 유교적 삶이 못마땅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에 맞서다 생전 안 맞아보던 뺨도 몇 차례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요. 이래저래 큰 불효를 했습니다.”
가톨릭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엄청난 희생자를 낸 것은 장례와 제사 문제 때문이다. 전라도 금산(지금은 충남)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천주교를 믿으면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어머니의 장례를 가톨릭 예식으로 치렀다. 그는 1791년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신해박해다.

-가톨릭이 가혹한 박해를 받은 이후에도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조상숭배는 미신이라고 근본주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기독교와 전통사회의 갈등이 심해졌다는 시각이 있는데요.

“맞는 말씀이죠. 당시 한국에 왔던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대부분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구 우월의식, 제국주의 의식을 지니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 것은 미개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것을 기억, 답습하여 한국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우리가 경험했던 그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를 함부로 재단하는 행태가 많습니다.
다수의 유교인들은 기독교인을 조상을 홀대하는 못된 사람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오히려 유교의 병폐가 조상밖에 모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둘 다 문제라는 것이죠. 조상의 끝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상을 유(有)라고 하면 하늘은 무(無)다, 없음까지 올라가야만 진짜 유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도 조상의 의미를 소중히 여길 때 진정한 기독교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이 인터뷰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번역한 성경 2판(1999년)을 인용했다. 공동번역 성경은 요즘 우리가 쓰는 말로 돼 있어서 읽기가 부드럽다. 그렇지만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관주 성경의 옛글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 성경에 애착을 갖는다. 결례되는 비유일지 모르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지금도 빨간 뚜껑의 진로 소주만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로다.’(공동번역 성경)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관주성경)


다석은 광주 동광원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해 강의하면서 하느님의 ‘외아들’(공동번역) 보다는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관주성경)에 애착을 보인다. 다석은 독생자를 다시 ‘한(獨) 나신(生) 분(者)’이라고 순우리말로 바꾸어 풀이한다. 그러나 다석은 로마서 8장 4절을 소개하면서 공동번역이 알기 쉽게 되어있다고 말한다. 60년 동안을 보던 그 관주성경보다는 공동번역 성경을 보고 참뜻을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다석은 한글 사랑이 각별해서 순 우리말로 된 종교 용어를 많이 만들어냈는데요. 그런데 거의 안 쓰이던 순우리말로 조어(造語)를 하다 보니 더 어려워진 것이 많아요.

다석의 한글사랑과 십자가 신학


“흔히 중국의 글자는 뜻글자고 한글은 소리글자라고 구분하잖아요? 우리는 보통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고 해서 혀가 구강의 어느 부분에 닿느냐에 따라 소리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다석은 한글 또한 뜻글자로 보았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끄는 천문(天文)이라고 했죠. 세종대왕은 훈민(訓民)의 차원을 넘어 천문(天文)으로 격상시켰습니다. 
무엇보다 다석은 모음의 원리가 천지인(天地人) 3재(三才) 사상을 기초로 했다고 봤습니다. 농경 중심의 중국 문명은 음양론에 토대를 두었고, 시베리아 수렵문명권인 한국의 문화는 천지인 3재 사상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석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풀었지요.
 땅(ㅡ)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고된 인간의 삶(ㅣ)이 3재론 속에 담겼다고 봤습니다. 다석은 이 3재를 합해서 십자가로 풀었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 현실의 세계인데, 이 땅을 뚫고 올라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이라 한 것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십자가고, 불교로 말하면 성불(成佛)이겠습니다.

다석은 한글이 단순히 소리글자가 아니고 우리 민족을 하늘로 이끌려는 뜻을 담은 글자라 믿었습니다. 자음 역시 삼수(三數) 변화를 퉁해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을 고양시키는 뜻을 담았다 했지요. ‘ㅅ(시옷)’ ‘ㅈ(지읒)’ ‘ㅊ(치읓)’의 변화를 보십시오. 이걸 선생님은 ‘삶-잠-참’으로 설명하세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잠을 자야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잠이란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한 번 죽어야만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한글에 뜻이 있고, 그 뜻이 우리 인간을 하늘로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교수가 책 제목으로 빌려 쓴 ‘빈탕한데 맞혀놀이’도 어렵죠. 좀 쉽게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빈탕이라고 하는 것은 허공, 무, 없음이라는 말인데 결국 그 없음에 맞춰 살아가는 게 인간이 이 땅에서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인간 속에 바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빈탕은 곧 어둠이기도 합니다. 빛으로 드러난 세상에서 견물생심(見物生心)하지 말라는 뜻도 담겼습니다. 어둠 속에서 더 큰 것과 하나 되는 삶을 살자는 초대이자 부름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꽃이 있으면 꽃만 보고 ‘이쁘다, 좋다, 꺾고 싶다’라는 욕망을 갖지만 꽃을 꽃 되게 하려면 그것을 있게 한 허공, 빈탕한데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알아야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인간도 없이 살 수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늘상 덜 없는 존재, 그래서 더러운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덜 없다는 것은 늘 욕망적인 존재로, 탐진치(貪嗔癡)의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덜 없다’는 것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럽다’가 되는 거예요. ‘덜 없는’ 존재가 ‘더러운’ 존재가 되는 거죠.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자신의 바탈로 모신 인간이 할 일을 자신 속 탐진치를 벗는 길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이 땅에 온 이유고 살아야 할 목적입니다. 빈탕한데 맞혀놀이가 다석의 구원관입니다.”


부암동 집 대문 앞에서 이 교수(왼쪽)와 황호택 논설고문.[사진=이주영 인턴기자]

-다석이 십자가를 동양적으로 재해석해서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일좌식은 한 끼 식사와 명상이지요. 그런데 일언인은 제자나 연구자들의 해석을 들여다봐도 조금씩 다르고 잘 이해가 안 가요.

“김흥호 선생은 다석의 기독교를 한마다로 동양적 기독교라 풀었고 그 핵심이 일좌식 일언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일좌식 일언인은 김흥호가 이해한 다석 사상의 본질입니다.

 ‘일좌’는 말 그대로 앉아있는 것, 명상을 의미하고, ‘일식’은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이죠.

일언은 남녀관계를 풀어 끊는 것입니다. 다석은 뜻과 맛이라고 하는 개념을 대비시켜 이해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맛을 찾아 살지만, 선생님은 뜻을 찾아 사는 것이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아마도 맛중의 맛이라고 하는 것이 남녀의 관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일언’이라고 말로 인간이 색에 사로잡혀 사는 것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맛을 버리고 뜻을 찾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흥호 선생은 마지막 일인(一仁)을 명(名)과 관계시켜 이해했습니다. 한마디로 헛된 명예욕을 벗자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있는 몸을 갖고서 ‘몸성히’를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몸성히’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지면(마음 놓이)로 자신의 바탈을 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수는 다석의 ‘일좌식 일언인’에서 인에 대한 해석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저서 ‘유영모의 귀일신학’에서 ‘일인은 늘상 걷는 일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어질 인이 걷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왜 다석이 여기서 인을 사용했는지 잘 알지 못하겠으나 가늠할 여지는 있다”고 했다. 두 발로 어디든 다니고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해 몸을 건강하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몸성히를 삶의 근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해설했다.

다석의 一日一食과 늘상 걷기

그러나 다석은 1971년 광주 동광원 강의에서 인(仁)에 대해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이라고 하면서 ‘어질 인’이 아니라 ‘성언 인’이라는 순우리말로 푼다. 성은 ‘(몸이) 성하다’에서, 언은 ‘언니’에서 따왔다. 그래서 성언을 찾아서 그 성언을 완전히 이루는 것, 그래서 참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인이라고 다석은 말한다.

-다석은 40년 동안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고 체조와 늘상 걷기 등으로 건강을 다져서 그 시대로서는 드물게 91세 장수를 했는데요. 다석을 따르는 분들 중에 그런 수행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윤정현 신부는 한 때 일일일식을 하다가 포기하고 배꼽시계에 맞춰 먹는다던데요. 

“다석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일일일식을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김흥호 선생은 38살 무렵부터 일일일식과 해혼(解婚)을 실천했고 그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그걸 실천하려고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지요. 나 역시도 시도했으나 거듭 실패를 했습니다. 저는 일일일식을 문자적으로, 소승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자 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문명비판적인 차원에서 단순성(Simplicity)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다석은 하루 한 끼를 드셨으나 잡수신 양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 한 끼에 집착하는 문자적 의미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단순성, 즉 최소한의 물질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물질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기후(생태)붕괴 시대의 일식의 의미라 믿습니다. 이 때 물질, 곧 최소한의 물질은 정신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석 자신도 하루 한끼 식사를 자기 생명을 바치는 정신적 행위라 여겼습니다. 내 몸이 얼마나 가난한가, 최소한의 물질로, 정신으로 살아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합니다.” <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이정배 교수 약력>

-1955년 출생
-1974년 대광고 졸업
-1974~1981년 감리교 신학대학 및 대학원
-1981~1986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전공
-1986~2017년 감신대 교수
-2010~2011년 한국조직 신학회 회장
-2012~2013년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2011~2012년 한국 기독자 교수협의회 회장-1992년 서울에서 열린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대회를 계기로 토착화 신학과 생태신학을 연결하고자 애쓰다-강원도 횡성에 독서와 기도, 노동이 어우러지는 현장(顯藏)아카데미 조성 중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2010) <한국 개신교 전위토착신학연구>(2003)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2008) <빈탕 한데 맞혀 놀이>(2011) <유영모의 귀일신학>(2020) 등 저서 다수




21세기 생태문명의 맹아를 담은 다석 사상
황호택 논설고문입력 : 2021-02-24 16:06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⑥ 이정배 교수<하>

이정배 교수의 스승인 변선환 전 감신대 학장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폭탄 선언과 함께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간 대화를 중심으로 종교간 대화를 활성화하는 운동도 벌였다. 그러다 결국 보수적인 기독교계 목사들의 표적이 되다시피 해 소속된 감리교단으로부터 출교(黜敎)당했다. 변선환 신학을 계승한 대표적인 제자가 이정배 교수다.

-변선환 학장이 1992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주도하는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부터 출교 조처를 당했더군요. 김홍도 목사는 지난해 광화문에서 광복절 태극기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를 대형교회 부흥 목사로 데뷔시켜준 사람인데요.

"그 당시 변 교수는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었죠. 70,80년대부터 부흥목사들이 교회들을 크게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로 교회가 엄청난 권력기관이 됐고, 부흥목사들이 교단 정치를 하면서 신학대를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대학을 학문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변선환 박사가 눈엣가시였던 것이지요. 변 학장은 신학대학을 금권과 교권으로부터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흥목사들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 학장의 신학적 소신을 이단(異端)이라고 몰아 출교를 시켰죠. 나도 그 때 교수였는데, 변 학장이 출교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습니다, 학생들 수백 명이 출교를 막으려고 금란교회에 몰려갔다가 교회가 동원한 어깨들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종교인 중에서도 개신교가 유달리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가진 것 같아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가 주로 성경 구절로부터 도출되었다고 말했는데, 주로 어떤 구절을 인용합니까?

“보통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 3절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가 대표적입니다. 이 두 구절을 이웃 종교를 부정하는 원리로 쓰죠. 

하지만 구약성서의 경우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백적으로 했던 말입니다. 자신들 하느님이 최고, 절대라 고백함으로써 종살이하던 이국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다수의 종교가 되고, 제국주의라고 비판 받는 마당에 고백적으로 이야기했던 언어를 교리적인 차원으로 바꿔놓으면 이런 기독교의 정체성은 사람 잡는 정체성이 되어버리죠. 이런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다석은 신약성서 언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란 말씀도 달리 이해했지요. 예수가 말한 ‘나’는 육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 속의 바탈, 없이 계신 하느님, 곧 ‘얼나’를 일컫습니다. 다석은 우리 역시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다석은 배타적인 성서 언어를 보편적으로 달리 사용하였습니다.”



이정배 교수의 뒤편 창 밖으로 부암동의 포근한 설경이 보인다. [사진=황호택]

-이 교수가 쓴 논문 중에 ‘천부경을 통해서 본 동학과 다석의 이해’도 있더라고요.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한다는 다석의 귀일사상(歸一思想)이 천부경에서 비롯됐나요?

“예.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유불선에 능통한 다석이 정작 동학을 언급하지 않았고, 언급하더라도 부정적인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여기서 다석과 동학을 연결 지어 생각해봐야겠다는 학문적인 관심이 생겨났지요. 그 연결 고리가 바로 천부경이었습니다. 천부경에 근거해서 동학을 보았고 바로 그 동학의 빛에서 다석 사상을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동학을 단지 부적을 신뢰하는 비합리적 종교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천부경은 천지인, 3재 사상의 틀로 구성되었습니다. 천부경의 상경은 하늘, 중경은 땅, 하경은 인간을 주제 삼았습니다. 그 중 하경의 핵심은 ‘인중천지인(人中天地一)’이란 말 속에 담겼는데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중심이란 사상입니다. 한 유교 학자는 여기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넣은 ‘천인무간(天人無間)’을 보기도 했지요. 저는 이 말을 갖고서 동학과 다석을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 이론과도 변별된다고 여겼지요, 종교다원주의는 큰 틀에서 기독교를 유일 절대의 종교로 보지 않고 제 종교가 저마다 자기 식대로 구원의 길을 간다는 가치 다원주의를 적시합니다. 예수와 붓다 공자 같은 위대한 성인들이 궁극적 실재의 다른 표현이란 것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골자입니다.

하지만 다석은 그 차원을 넘어서지요. 예수 석가 뿐 아니라 우리 인간도 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인중천지일, 모든 인간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없이 계신 이가 인간 속에 ‘바탈’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서구는 붓다 공자 같이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서 다원주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하지만 다석은 ‘없이 계신 하나님’을 인간 개개인의 마음(바탈)속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덜 없는 상태에서 뛰쳐나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존재라 본 것입니다. 그런 힘이 예수 뿐 아니라 우리 인간 속에 있다고 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인간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귀일사상의 핵심입니다.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도 예수처럼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되고 성불(成佛)하고,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과정에서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엿새 만에 우주를 창조하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 쉬었다고 하는데요. 다윈의 진화론으로 보면 허황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지 않고 창조적인 진화, 진화적인 창조로 봐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에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과학의 논리는 사이비 과학이고 사이비 신학이죠. 지적 설계론은 창조과학의 발전된 형태이긴 하나 근본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 속의 천지창조 기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BC 580년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서 바빌론의 문명을 경험하며 고백한 하나의 문서입니다. 그 자체로 과학적 진술이나 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화의 한 방향을 이끄는 신적인 원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진화와 창조는 함께 가야 옳습니다. 진화론만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습니다. 다석이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도 과학적 사고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변선환 아키브에서 제자들이 펴낸 책들[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다석을 연구하는 이 교수의 학문적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제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서구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적 토양에서 기독교를 이해했던 감리교의 토착화 신학 전통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은 지금까지 그 어떤 토착화 신학보다 도발적이고 창발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로써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능가하는 한국적 신학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지하듯 일본 선불교를 배경으로 한 교토학파는 공(空·Śūnyatā) 개념을 갖고서 신의 죽음 이후의 신학을 재정립했습니다. 서구신학이 로고스 개념을 가지고 신학을 만들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공 사상의 개념으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적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주목받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교만 아니라 민족 고유한 천부경에 터해 유불선을 통섭한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훨씬 탈(脫)서구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라 여겼습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다석만 연구한다든지, 함석헌 박영호 김흥호 등 어느 한 인물에 치중한 개별 연구를 넘어서야 하다고 생각 합니다. 다석과 함석헌 간의 차이가 있고, 함석헌과 김흥호가 다르고 박영호와 김흥호 간의 변별력 그 자체가 다석 학파의 기독교를 성립시키는 주요한 근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석 연구자들 간에도 무수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의 논쟁을 벌이기보다 어떻게 다석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는가를 봐야 옳습니다. 이 점에서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모든 분들을 연구하고픈 학문적 욕심이 있습니다. 일본의 교토학파의 기독교처럼 한국에는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있음을 서구에 알리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대속적인 기독교 대신 수행적인 기독교를, 배타적인 기독교가 있었다면 불이(不二)적이고 귀일적(동양적) 기독교를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석 학파의 계보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을 통해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 다석을 알게 됐는지에 따라 시각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 다석에 입문한 신학자입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다석 사상을 수용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다석 사상은 아직 이단처럼 취급받습니다. 그럴수록 김흥호 선생은 다석을 교회 밖의 다원주의자 사상가로만 자리매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 안에서 다석을 정착시키고자 애쓰셨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서 모순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감신대라는 기독교 학교 안에 있었기에 다석을 기독교 틀 안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석을 교회의 교사로서 만들고자 하신 것이지요. 다석 사상을 교회 안에 들여놓겠다는 생각을 나는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물론 다석 사상을 기독교 밖에서 더 넓게 이해하는 것에 찬성하지만요.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김흥호 선생을 통해서 다석을 배웠기에 대속을 버리고 자속만 취하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석에게 예수가 유일한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물론 인습적인 구세주로서 예수의 이해는 버렸지만요.”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 연구자 많이 나와야

-불교계 유교계에서도 다석에 대해 연구하는 분이 있나요?

“더러 있기는 하지만 주로 기독교 신학자들이 다석을 연구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웃 종교들에서 다석 연구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유교에서는 고인이 된 도원 류승국 교수가 대표적으로 다석을 좋아했고 연구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 혹은 기독교를 바탕한 종교학자들의 연구만으로 향후 다석 사상이 충분히 발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병무 선생이 다석 사상을 민중신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큰 공헌입니다. 다석 사상을 세상에 알린 박영호 선생의 공로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다석 사전을 만들고 있는 가톨릭 정양모 신부의 역할도 대단합니다. 다석을 한국의 하이데거로 여기며 그의 말 속에 담긴 철학적 뜻을 살핀 철학자 이기상 교수의 역할도 높이 평가합니다.

-시인 고은이, 다석에 대해 ‘총기가 넘치나 부질없는 생각을 한 늙은이’라고 코멘트를 한 게 있던데요.

“<만인보>에 적힌 이 표현에 대해 정양모 신부가 제일 분노했지요. 고은 시인으로서는 다석이 한글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과 소통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으로서는 다석의 언어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은 시인은 다석이 왜 한글을 그렇게 풀어내려고 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석의 종교관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도 다석의 삶 중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중학교까지만 가르치고, 자신도 일본 유학을 갔다가 그만두고 돌아오고….

“다석의 행동 중에 기행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결혼한 날 신부를 놔두고 일주일 동안 목포 처가에 혼자 갔다 온 일도 있고, 그리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사경을 헤맨 일을 두고도 말이 많습니다. 오산학교 교장을 했고 교육자로 살았음에도 아마 다석 입장에서는 자녀들을 자기 방식대로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배우도록 하려던 것이 아니었겠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스스로 하는 공부, 기계적인 학습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일종의 홈스쿨링(homeschooling)이나 가정교육(home education)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러운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데요. 이 교수는 글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던 데요.

“오늘날 동성애는 과거 천동설 지동설 논쟁처럼 이제 과학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 식물 세계도 동성애의 비율이 대략 10% 남짓 정도 된다고 하죠. 단지 지금까지는 과학적으로 증명을 못했을 뿐입니다.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를 여러 권 펴낸 유발 하라리도 최근 커밍아웃했죠. 기독교는 동성애의 성적 문란함에 초점을 맞추지만, 역사적으로 성소수자(性少數者·sexual minority)들이 창조적인 일을 엄청나게 해냈습니다. 동성애를 병이나 죄로 다루기보다는 그들 성정체성(성지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고 복음이라 생각합니다.”

동성애를 범죄로 보지 말고 성 정체성 인정해줘야

-성경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구절이 더러 있지요?

“구약 롯기에 남색(男色) 이야기가 있고, 로마서에 보면 어린 소년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사실 동성애의 문제로 보기보다 권력의 문제로 봐야 옳은 거지요. 설령 성서 어느 부분에 그런 기록이 있다 할지라도, 과거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XY 염색체만 알았는데 XXY 염색체도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성지향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들을 자꾸 억압하고 몰아치면 음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고 나쁜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을 불행한 존재로 만든 데는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책임이 큽니다.”

-세월호 아픔에 참여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 모임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데, 한국에서 세월호를 바라보는 시각도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팩트는 분명히 있는데 서로 다른 오피니언을 만들며 싸우잖나요. 세월호를 가지고 정치가들이 이데올로기 싸움을 조장했어요. 팩트를 명확히 밝히면 오피니언 간의 갈등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시민 사회와 함께 정치인을 움직여 진실 규명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합니다. 지금도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어머님들 추위에 노숙하고 있어요.”

이정배 교수의 부인은 여성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은선 세종대 명예교수다. 성균관대 동양철학 대학원에서 ‘조선 유교의 종교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편과 함께 스위스 바젤에서 신학대학 박사 논문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공부를 더해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갖게 됐다.

“저희 집사람에 대해 물어줘서 고맙습니다. 부부관계를 너머서 학문적 동지로 살고 있습니다. 바젤 대학에서 변선환 선생 내외분과 같은 교수 지도 하에 논문을 썼습니다. 지도 교수는 알버트 슈바이처와 칼 야스퍼스를 배경으로 독창적인 신학 활동을 하던 분이었지요. 그의 지도하에 변 선생 내외는 기독교와 불교, 우리 부부는 유교를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주자학 쪽으로, 저희 집사람은 양명학을 주제로 기독교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은선 교수는 부족한 한문 공부를 더하면서 8년에 걸쳐 한국 철학 분야에서 유교의 여성 종교성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향후 미래가 중국 문명과 미국 문명의 갈등으로 본다면, 종교로는 유교와 기독교가 될 텐데, 지금과는 다른 유교가 필요하고, 지금과는 다른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비판적인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설립한 한국 신(信) 연구소를 통해 기독교를 유교적으로, 여성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화전민의 집을 사서 가꾼 횡성 현장아카데미는 노동과 기도의 공동수행체로 꾸리고 있다. [사진=이정배 교수 제공]

-부암동 아카데미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요?

“여기서는 주로 학문적 토론의 장이 열리며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70년과 기독교’라고 하는 책은 2년간 작업해서 이번에 출판합니다. ‘종교개혁 500년과 이후 신학’ ‘3·1 선언 100주년과 이후 기독교’ 등의 책도 앞서 펴냈지요. 이은선 교수의 선친인 고 이신 박사의 연구서 ‘환상과 저항의 신학’, 그리고 해천 윤성범 교수 탄생 100주년을 추모한 ‘우주 보편적 영성으로서의 성과 효’란 책도 발간했습니다.”

부암동 집 대문에 현장(顯藏)아카데미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유승국 선생의 작명이다. 인(仁)의 주역적 표현이 현장이라고 한다.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진다고 해서. 횡성에서는 화전민의 집을 사서 20년째 가꾸며 예배드리고 농사를 짓고 수확도 함께 한다. 횡성은 노동과 기도의 수행 공동체이고, 부암동은 학문 공동체다.

-생태신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쓰던데요. 다석의 가르침과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다석을 생태 신학적으로 연구해서 외국어 논문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더라고요. 우선 앞서 말씀드린 
  • 일식(一食)의 개념을 simplicity(단순함)로 본 것이 생태적인 사유(思惟)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 다석의 말씀 중 중요한 것으로 견물생심(見物生心)과 견물불가생(見物不可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 견문불가생, 즉 물건을 보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다석의 가르침이에요. 
  • 서구의 신학과 철학에서 존재는 언제나 ‘있음(유·有)’ ‘Sein'의 차원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있음’을 우선하는 세계관에서 견물생심의 유혹은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입니다. 
  • 견물불가생이 가능하려면 있음보다 ‘없음’을 더 중요시하고, 빛보다 ‘어둠’에 무게중심을 두는 새로운 철학이 요구됩니다.

알다시피 유영모 선생의 아호인 ‘다석(多夕)’엔 저녁 석(夕)이 3개 들어있지요, 이기상 교수가 ‘태양을 꺼라’라고 멋지게 풀어서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의식의 세계죠. 그런데 다석은 ‘빛(의식)을 꺼라’ ‘태양을 꺼라’고 말합니다. 빛이 꺼질 때 광대한 우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다석은 생각의 빛을 끄고 보이는 세계를 단절하는 의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있음을 근거로 하는 서구적 인식으로는 우리의 자본주의 문명을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을 있게 하는 테두리를 먼저 보는 것, 그렇게 하면 견물불가생, 물건을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놔둘 수 있지 않은가요?”

부암동은 다석이 과수원을 가꾸고 축산을 하고 수행을 하며 살던 구기(舊基)동에서 버스 두세 정거장 거리다. 원래 인터뷰를 횡성 현장아카데미에서 하려고 했으나 눈이 많이 오고 찻길이 험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이 교수와 우리 일행은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부암동의 한 식당에서 치킨과 볶음밥을 먹고 눈길을 걸어가다가 헤어졌다. 

유영모의 귀일신학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알라딘: 유영모의 귀일신학


유영모의 귀일신학 -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이정배 (지은이)밀알북스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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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500쪽


책소개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재정리한 책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목차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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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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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벨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했고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 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백 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상임 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정배의 생명과 종교 이야기』, 『이웃 종교인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 『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 『켄 윌버와 신학』,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토착화와 생명 문화』 등이 있고 최근에는 『종교개혁 500년 以 後신학』과 『3.1정신과 以後신학』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접기
최근작 : <유영모의 귀일신학>,<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우리는 하느님을 거리에서 만난다> … 총 4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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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도 같은 시간을 바치며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룬 부분은 다석에게 그만큼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이렇듯 종교는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생향 2020-12-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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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유영모의 귀일신학, 이정배지음
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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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7월 15일 (수) 08:05:41
최종편집 : 2020년 07월 16일 (목) 09:06:35 [조회수 :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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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유영모의 귀일신학
 

 

지은이 이정배

펴낸곳 신앙과지성사

값 30,000원

ISBN 978-89-6907-235-1 93230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책.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장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으로 바궈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학문적이고 영성적인 책이다.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을 펴내며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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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현암사, 1990)를 필자 나름대로 읽고 재정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다석강의』의 목차를 따라 서술했지만 본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43강의 전체 제목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구어체로 쓰인 본래 내용이 단순 명료화되었고 필자의 생각이 보태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로 900쪽에 이르는『 다석강의』가 그 절반의 양으로 줄여졌고 책 제목도『 귀일신학』(歸一神學)으로 바꿔졌다.『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란 신학적 판단 때문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다석 사상의 핵심을 서구와 변별된 차원에서‘ 귀일’이란 말에서 찾곤 했으나 아직까지 이 주제를 사용한 책이 출판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다석이 구술한『 다석강의』가『 귀일신학』이란 이차적 언어를 갖고서 재탄생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물론‘ 귀일’이란 말도 다석이 즐겨 쓰던 용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귀일신학』이란 제목은 필자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리라.『 귀일신학』 속에 실린 두 편의 논문을 통해 필자는 다석 사상의 출처 및 세계사적 의미를 밝혔고 귀일신학의 핵심을 서술했다. 이는 오로지『 다석강의』를 엮어 펴냈던 다석학회 회원들, 특히 앞서 다석의 생각을 밝혀준 박영호 선생님, 정양모 신부님의 덕분이다.

 

그동안 필자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여 두 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과『 빈팅한데 맞혀놀이』(동연, 2011)가 그것이다. 물론 이들보다 앞서 김흥호 선생님과 함께 펴낸 책도 있었다. 여러 학자들의 글 모음집이었던『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출판사, 2002)이 그것이다. 다석을 연구한 필자의 처음 글이 실렸고 선생님과 함께 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필자의 연구서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선 두 책이 필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책 제목들 또한 모두 다석 고유한 언어에서 비롯했다. 앞의 책에서 필자는 다석 사상을 서구의 종교다원주의 사조와 대면시켰고 다석을『 천부경』(天符經)을 매개로 동학과 연결했으며 함석헌, 김흥호로 이어지는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를 일본 교토학파의 그것과 견주고자 했다. 나중 책에서는 다석사상을 통해 서구의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물과 대화하되 그 한계를 밝혔으며 유불선을 회통한 귀일신학의 골격과 본질을 연구했고 그리고 동서 생명사상의 틀에서 다석을 재조명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금번 『다석강의』를‘ 귀일’(歸一)개념에 근거하여 독해했고 이에 방점을 둔 채 논지를 펼쳤다. 이 과정을 통해『 귀일신학』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두는 다석의 생각이자 그분 직계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일 뿐 그 이상일 수 없다. 신학교에서 30년 토착화 신학을 가르친 학자로서 다석 사상을 신학적 언어로 개념화시킨 작은 공헌만이 필자의 몫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다석강의』를 본격적으로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었다. 대학을 명예퇴직한 이후 다석 유영모란 인물이 학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붙들고 씨름해야 될 영성의 사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를 알수록 동서를 막론한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애시당초 필자는 이 책을 읽고 저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기 위한 갈급한 상태에서 다시 손에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읽어 가면서 값진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았고 그를 종종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터져 나온 욕망으로서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였다. 간혹 페이스북에 글을 옮겼을 때 제법 많은 이들이 다석이 내리치는 죽비에 정신 차렸다는 답 글을 올려주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글이 모아졌고 오늘 이 시점에 이르렀다. 다석의 글은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결코 읽히지 않았다. 때론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리 쓰인 글들은 흡족지 않았고 폐기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다석강의』를 읽고 정리하는 동안 모처럼 직업적 종교인(신학자)이 아닌 신앙인, 구도자의 마음으로 살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다석을 가르쳐 주신 김흥호 선생님을 많이 생각했다. 살아계실 때 년 초에 세배를 가곤 했었다. 정월 초하루였음에도 선생님은『 다석일지』를 풀고 계셨다. 팔순을 넘긴 연세였지만 스승의 구술 언어를 글로 재탄생 시키는 모습이 지금도 경이롭게 기억된다.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시간을 바칠 만큼 스승의 말씀이 귀했던 까닭이다. 지난 2년의 삶에서 김흥호 선생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 책『 귀일신학』을 두 해 전 탄생 백 주년을 맞았던 김흥호 선생님께 바치고자 한다.

 

『다석강의』를 꼼꼼히 읽으며 새삼 발견한 것은 첫 강과 마지막 강의인 43강이 모두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다석에게 죽음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리라. 각 강의의 제목이‘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와‘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귀일신학』에서 다석의 사생관과 성령의 삶이란 말로 바꿔 달았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가 있고 죽었으되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뜻을 보태면서 말이다. 종교란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죽음 이후의 몸 적 소생이라는 인습적 부활신앙을 다루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을 믿었을 뿐이다. 죽음을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얼로 사는 삶이다. 얼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삶 속의 부활은 너무도 자명하다. 우리들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믿었던 고린도서 저자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삶이겠다. 하지만 기독교, 불교를 막론하고 종교들이 죽음장사를 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장례식 이후 낯선 공간으로의 이주를 믿으라 권하며 정작 삶 속의 부활을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을 삶 속에서 초월(극복)하고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 믿는 것이 다석이 말하는 부활인 것을 유념하면 좋겠다.

 

다석의『 귀일신학』이 인습화된 기독교에 던지는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목도하며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뉴 노말’ (New Normal)을 요구받고 있는 중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타 성에 젖은 신앙양식으로는 코로나 이후의 교회를 이끌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의 오만과 성직자의 무능을 목도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역할에 회의를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위한 교회인지 안식일을 위한 교회인지 되묻기 시작한 까닭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위해 사람을 도구로 여겼던 종교의 자기반성이 통렬히 이뤄져야만 한다. 축복신앙이 무너졌고 절대라 여겼던 가치가 실종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종교는 무너질 것이나 영성으로서의 종교는 영원할 것을 의심

치 않는다. 물론 제도 없는 영성도 위태로울 수 있겠다. 하지만 제도를 최소화시키고 영성을 깊게 하는 일이 더없이 필요하다. 안식일의 종교화가 아니라 일상의 영성화가 더 화급한 현실이 된 까닭이다. 일상이 없는 종교는 죄책감을 가중시켜 교회만을 살찌울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교회의 본래 이름인‘ 에클레시아’ 즉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과감하게 부활시켜야 옳다. 평신도,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독생자의 길을 걷도록 종교가 새로운 관점을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만인 사제직을 입이 아니라 삶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신독(愼獨), 즉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있다는 확신 하에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기만 옳다는 배타성도 자연스레 옅어질 수 있겠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만 바라봤듯, 한국 개신교도 지금껏 미국 교회만을 쳐다봤고 서구 기독교에서 답을 구해왔다. 하지만 그들도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고 알았다. 코로나 사태로 허둥대는 기독교 서구 문명의 허약성을 목도한 탓이다. 이 점에서 본 책『 귀일신학』은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 아니 종교인들 모두에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 생각하는 종교인들을 위해 본 책이 기여할 바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정년을 4년 6개월 앞두고 학교를 떠났다. 이제 그 시간이 다 지났고 마침내 은퇴시점에 이르렀다. 4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은퇴자로 살지 않았고 나름 더 열심히 글을 썼으며 땅을 일궜고 현장을 찾고자 했다. 김흥호 선생님께 헌정한 이 책을 출판함으로써 정식으로 은퇴의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말까지 해야 할 작업이 산적해 있다. 모든 일을 잘 마친 후 여유를 갖고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염려하며 주변을 더 열심히 살피면서 살아가고 싶다. 필자가 쓴 다석의 글을 읽고 그때마다 마음을 나누고 평해 주신 여러분들이 기억난다. 이은선 교수를 비롯하여 석준복 감독님, 하중조 장로님, 박정규 교수님, 이면주 목사님, 조용훈 장로님, 김선주 목사님 등이다. 이 분들의 격려에 힘입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필자의 글을 소개해준 인터넷신문‘ 에큐메니안’의 이정훈 선생의 수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앙과지성사’에서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일전의『 수도원 독서』에 이어 연거푸 두 번째이다. 본 책의 독자가 얼마나 될지 염려하면서도 출판을 결정해준 최병천 장로께 많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교정을 보아준 권오무 목사님과 직원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바라기는 이 책을 갖고 이곳저곳에서 다석 강독회 모임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모임이 만들어지면 만사제치고 달려가 함께 토론할 생각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다석을 좀 더 체화시켜 멋진(?) 토착화 신학의 골격을 만들어 낼 뜻도 마음에 품고 있다. 다시 한번 말을 주신 다석 선생님과『 다석강의』를 펴낸 다석학회 회원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길을 가다 길이 되라 했으니 애써 이분들이 가신 길에 발을 올려놓은 채 달려가고 싶다. 말에 삶이 실려야 힘 있게 출발할 수 있으리라.

2020년 5월 7일

아내 이은선 교수의 63번째 생일 날

부암동 현장 아카데미에서

이정배 두손 모음

 

차례
 

머리글·3

서론 논문 : 다석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말한다·13

 

『다석강의』 다시 읽다

 

제1강 사생관/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 · 31

제2강 기도/ 日三省으로 마음 곧게 하는 일 · 41

제3강 종교/ 실(열매)없는 삶을 그치기 위하여 · 49

제4강 사람/ 못된 짓 버리고 제 길 가라 · 57

제5강 하느님/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 65

제6강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정의의 길 · 73

제7강 자유/ 삶을 짐으로 만들지 말라 · 81

제8강 빛^빚^빗/ 색(色)의 세계를 뚫고 올라야 · 87

제9강 하늘 법칙/ 세상의 인과율을 넘어서기 · 97

제10강 참 자아/ 밝은 것(빛)에 속지 말기 · 105

제11강 진리/ 하나로 돌아갈 때 자유롭다 · 119

제12강 기독교/『 주역』을 통해서 본 십자가와 부활 · 129

제13강 우주/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 137

제14강 예배/ 인간을 위해 하늘이 쳐둔 쥐덫 · 145

제15강 시간/ 삶은‘ 이제’를 사는 것 · 153

제16강 정신(신학)/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일 · 161

제17강 구원/ 체면을 없애는 일 · 171

제18강 예수/ 모든 것을 주고‘ 하나’로 돌아간 이 · 183

제19강 독생자/ 하늘 길을 곧이 곧장 가는 사람 · 193

제20강 『 대학』/ 하늘에 이르는 길 · 205

제21강 진리파지/ 간디의 가르침 · 215

제22강 불이(不二)/ 허공과 마음은 하나다 · 221

제23강 말씀/‘ 빈탕한데’의 주인 · 237

제24강 인생관/ 맛이 아니라 뜻으로 살기 · 251

제25강 대속/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약자들의 삶 · 267

제26강 하늘/ 혈육이 아닌 정신의 근본 · 283

제27강 삶의 목적/ 천국을 침노하는 일 · 293

제28강 참말/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 307

제29강 영(靈)/ 성령과 악령이 있다 · 325

제30강 원죄/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 339

제31강 상(像)/ 영원한 하나를 담은 그릇 · 355

제32강 신의 속성/ 유일불이, 불이즉무(唯一不二, 不二卽無) · 365

제33강 찬양/ 새로운 생각을 낳는 길 · 371

제34강 하늘 마음(天心)/ 물건에 마음이 걸리지 않는 상태 · 379

제35강 사상/ 강한 신념이 있어야 사상도 있다 · 391

제36강 로고스(빛)/ 우리 안에 있는 속알(예수) · 399

제37강 영생/ 자신속의 속알을 밝히는(明德) 일 · 405

제38강 사랑/ 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 413

제39강 자속/‘ 이제’를 타고 가며 하나에 이르다 · 419

제40강 그리스도(인)/ 글이 서도록 하는 존재 · 435

제41강 예정/ 사람은 누구나 분수(分受)가 있다 · 447

제42강 신앙/ 자기 속의 큰 하나(大一)를 찾는 일 · 455

제43강 영육/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 465

 

부록 논문 : 다석의 귀일신학에 대하여 ·473

 

2020/09/30

『보리수 가지치기』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 : 네이버블로그



『보리수 가지치기』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 : 네이버블로그

[공지]『보리수 가지치기』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서평
2015. 6. 9. 23:43

https://blog.naver.com/tvam/220385279347
번역하기


『보리수 가지치기』[Jamie Hubbard, Paul L. Swanson]













판매가격 38,000 원
시중가격 0 원
할인금액 0 원
적립포인트 3,800 P
재고수량 0 개
배송료 0 원
저자 Jamie Hubbard, Paul L. Swanson


ISBN 979-11-5610-136-9 (93220)
발행일 2015년 06월 05일
판형정보 신국판(152*224)
페이지 776쪽
역자 류제동

방금 씨아이아알출판사에서 연락받았습니다. 이렇게 인정을 받으니 정말 기쁩니다. 모두에게 깊은 감사드립니다.^^
ㆍ작성일 2016-05-13 (금) 10:37

http://www.circom.co.kr/board.php?board=tnshopnotice&command=body&no=39

도서출판 씨아이알

www.circom.co.kr



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6종 선정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지난 3월에 시행한 ‘2016 우수학술도서’ 공모에 도서출판 씨∙아이∙알의 도서 6종이 ...
선정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과 저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흥하는 양질의 도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정된 도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보리수 가지치기

2. 불교의 원자설

3. 해양지구환경학_생물지구화학의 순환으로 해석

4. 상수도 공학

5. 자연과 문명의 조화 토목공학

6. 사회환경 안전관리




동아시아 권위주의 문화에
해체의 메스를 들이대는 역작
"국정교과서 반대를 위한 필독서!"『보리수 가지치기: 비판불교를 둘러싼 폭풍』

보리수로 상징되는 불교전통은 오늘날 양심적으로 지혜의 나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불교전통을 넘어서 오늘날의 문학, 사학, 철학, 종교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양심적으로 지혜의 나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지혜의 나무는 이미 병들어서 고사(枯死)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의 불교학자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은 참여적이고 양심적이고 실천적인 지혜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기득권층의 정의롭지 못한 질서에 편승하면서, 더 나아가 기꺼이 종속적으로 자본을 추종하면서,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하는 불량식품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어용 지식을 판매하는 지식소매상 노릇을 자처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하카마야 노리아키 그리고 마츠모토 시로 같은 일본의 대표적 불교학자들이 그 지혜의 나무를 되살리고자 본격적인 가지치기에 나섰다. 오늘날 그 가지치기 작업은 ‘비판불교운동’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확산되어 전개되면서, 불교학계를 넘어서 지구촌의 학계 전반을 강타하는 폭풍이 되어 몰아치고 있다.


기득권과 위선과 침묵 뒤 일본 불교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시작하여, 동아시아의 조화(和)의 이념이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득권의 가식임을 폭로하고, 객관성을 표방하는 막스 베버 부류의 학문 풍토가 실상은 몰염치한 침묵임을 고발하는 비판의 폭풍이 이제 우리 앞에 몰아친다. “가만히 있으라”는 유체이탈화법 속 침묵의 카르텔에 감연히 맞서는 이 폭풍 앞에서, 한국의 지식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저자

제이미 허바드 Jamie Hubbard
스미스 대학(Smith College) 예한 누마타좌(Yehan MumataChair) 불교학 교수. “야마구치 이야기: 현대일본에서 불교와 가족”(“The Yamaguchi Story: Buddhism and the Family in Contempororay Japan,”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1988)이라는 비디오를 연출했으며, 『절대적 망상, 완벽한 성불:한 중국불교 이단의 흥기와 몰락』(Absolute Delusion, Perfect Buddhahood: The Rise and Fall of a Chinese Heresy, Univ of Hawaii Press, 2000)의 저자

폴 스완슨 Paul L. Swanson
난잔 종교문화연구소(南山 宗敎文化硏究所) 상임연구원이자 난잔대학(南山大學) 교수. 『일본종교학 저널』(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의 편집자이자 『천태 철학의 토대』(Foundations of T’ien-tai Philosophy, Asian Humanities Press, 1989)의 저자

역자
류제동
현 중앙대학교 철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금강대학교 HK연구교수로 있었고, 서강대학교, 중앙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가톨릭대학교, 강남대학교, 위덕대학교, 금강대학교, 신앙인아카데미 등에서 강의. 
『하느님과 일심: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종교학과 대승기신론의 만남』(단독: 2007, 한국학술정보),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공저: 2013, 가나출판사), 
『텅 빈 충만: 공의 하느님』(John Cobb 외 저, 공역: 2009, 우리신학연구소) 등 
저역서 다수와 
「Baqa and One Mind」(『한국불교학』 55호, 2009),「하쿠인(白隱) 선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 체험적 삶에대한 시론적 비교 – 무(無)에의 추구를 중심으로」(『불교학보』 64호, 2013) 등 논문 다수. 그리고

kocw.net에 <삶과 죽음의 철학> 강의 탑재


































추천사


편저자 서문


역자 서문


서 론-제이미 허바드







제1부 비판불교란 무엇이며 왜 주창되는가?


1. 왜 선은 불교가 아니라고 이야기되는가?


2. 비판불교와 근원으로의 회귀


3. 비판철학 대 장소철학


4. 장소 공포증


5. 비판으로서의 학문


6. 비판의 한계


7. 비판불교에 대한 코멘트-마츠모토 시로







제2부 참된 불교를 찾아서


8.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9. 불성사상은 온전히 불교적이다


10. 유가행파와 여래장 문헌에서 기체설 사상


11. 기체설 사상에 관한 비판적 대론(對論)


12. 티벳으로 도입된 인도불교의 핵심 요소들


13. ‘선’(禪)의 의미


14. 비판불교와 도겐의 『정법안장(正法眼藏)』


15. 비판불교는 실제로 비판적인가?


16. 형이상학, 고통, 그리고 해방


17. 기체설과 불교학의 최근 동향에 대한 고찰


18. 비판불교에 대한 재검토







제3부 사회비판


19. 사회적 차별의 이념적 배경에 대한 고찰


20. 불교와 가미


21. 천태본각사상과 일본의 자민족중심주의적 전환


22.『법화경』과 일본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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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는 일본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 『보리수 가지치기』 548쪽

일본에서 명망 있는 대표적 불교학자 마츠모토 시로가 이렇게 주장합니다. 배신 운운하는 누군가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 특히 일본에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http://blog.naver.com/tvam/220385279347






법보신문에 『보리수 가지치기』를 소상하고 품격있게 소개하는 기사가 크게 났습니다.(☆ω☆)(^◇^)




http://m.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7758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7758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 “비판만이 불교다” - 법보신문
비판불교 이론 진면목 담긴‘보리수 가지치기’ 첫 번역역사적·문헌적 연구 아닌철학적·비판적 진리 추구“선·여래장사상은 비불교불탑숭배도 아트...
www.beopbo.com







#미시마유키오#비판불교#사회적차별#미하엘엔데#모모



영화 <관상>에서 한명회에 대한 김내경의 명대사...파도만 보았을 뿐 바람을 보지 못했소...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인데..



https://www.youtube.com/watch?v=0w9thT-ay7M#t=14


如大海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
바다의 물은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되어 움직인다.
그러므로 파도의 상은 바람의 상과 따로이 떼어 놓을 수가 없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파도를 만드는 바람이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핵심인 “소언법자, 위중생심(所言法者, 謂衆生心)”의 중생심, 곧 민중의 마음이다. 『보리수 가지치기』에서 바로 그 민중의 마음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다.



그리고 『보리수 가지치기』의 취지를 권해효씨가 잘 말해주고 있네요.^^
https://youtu.be/3ZqZZqbCUjc
공감하시면, 계시는 지역이나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도록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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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리수 가지치기』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작성자 어린왕자




[eBook] 보리수 가지치기 - 비판불교를 둘러싼 폭풍
제이미 허바드,폴 스완슨 (지은이),류제동 (옮긴이)CIR(씨아이알)2018-06-01






종이책
38,000원 36,100원 (1,900원)
전자책정가
19,000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불교학계를 넘어 인문학계 전반에 가지치기를 시도하는 비판의 폭풍

보리수로 상징되는 불교전통은 오늘날 양심적으로 지혜의 나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불교전통을 넘어서 오늘날의 문학, 사학, 철학, 종교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양심적으로 지혜의 나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지혜의 나무는 이미 병들어서 고사(枯死)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의 불교학자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은 참여적이고 양심적이고 실천적인 지혜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기득권층의 정의롭지 못한 질서에 편승하면서, 더 나아가 기꺼이 종속적으로 자본을 추종하면서,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하는 불량식품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어용 지식을 판매하는 지식소매상 노릇을 자처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하카마야 노리아키 그리고 마츠모토 시로 같은 일본의 대표적 불교학자들이 그 지혜의 나무를 되살리고자 본격적인 가지치기에 나섰다. 오늘날 그 가지치기 작업은 ‘비판불교운동’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확산되어 전개되면서, 불교학계를 넘어서 지구촌의 학계 전반을 강타하는 폭풍이 되어 몰아치고 있다.
기득권과 위선과 침묵 뒤 일본 불교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시작하여, 동아시아의 조화(和)의 이념이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득권의 가식임을 폭로하고, 객관성을 표방하는 막스 베버 부류의 학문 풍토가 실상은 몰염치한 침묵임을 고발하는 비판의 폭풍이 이제 우리 앞에 몰아친다. 이 폭풍 앞에서, 한국의 지식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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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이든 대승이든 불교사상의 전개가 워낙 방대하고 보살을 제외하고 숙성된 대승철학은 어렵기도 하고 전체가 잘 엮어지지도 않는다.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초심이 뭔지에 따라 불교철학을 대거 가지치기해서 적당한 책들로 정리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철학사를 몇권 읽어보는게 좋겠다  구매
알라딘(최란)은 댓글농단을 멈춰라 2018-11-2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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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석학들이 불교의 정체성과 미래를 넘어 종교의 본질과 인류의 미래를 두고 격론을 전개하다. 새창으로 보기
피터 그레고리, 폴 그리피스, 루벤 하비토, 스티븐 하이네, 제이미 허바드, 샐리 킹, 댄 러스트하우스, 폴 스완슨, 람버트 슈미트하우젠, 린쩐구어, 하카마야 노리아키, 마츠모토 시로, 스에키 후미히코, 다카사키 지키도, 야마베 노부요시, 야마구치 즈이호, 다무라 요시로, 히라카와 아키라 등, 구미와 중국 및 일본의 석학들이 불교의 미래를 넘어, 종교와 인류의 미래에 관하여 격론을 전개합니다.

 

영화 <관상>에서 한명회에 대한 김내경의 명대사...파도만 보았을뿐 바람을 보지 못했소...파도를 만드는것은 바람인데..
https://www.youtube.com/watch?v=0w9thT-ay7M#t=14

如大海水,因風波動,水相風相不相捨離.
바다의 물은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되어 움직인다.
그러므로 파도의 상은 바람의 상과 따로이 떼어 놓을 수가 없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파도를 만드는 바람이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핵심인 “소언법자, 위중생심(所言法者, 謂衆生心)”의 중생심, 곧 민중의 마음입니다. 『보리수 가지치기』에서 바로 그 민중의 마음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전개됩니다.
 

“일본에는 어떠한 형태의 사회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1979년 세계종교평화회의(World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에서 당시 일본 조동종 종무총장이자 전일본불교회 이사장이었던 마치다 무네오(町田 宗夫)의 이러한 발언에 대한 뼈아픈 반성에서 일본의 비판불교운동이 전개되어 세계적으로 확산됩니다. 유체이탈화법 속 침묵의 카르텔이 횡행하는 한국의 현상황에서 이렇게 철저한 반성 운동이 특히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2011년 우리나라 전임 대통령의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유체이탈화법식 발언이 연상됩니다. 일본에서 이렇게 철저한 반성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아직 그러한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하카마야 노리아키와 마츠모토 시로는 선불교에서 그 답을 찾지 말라고 합니다. 교토학파 철학에서 가르치는 불이(不二)에서도 찾지 말라고 합니다. 하카마야는, 기성 불교 전통에서 진리에 관한 언표 가능성 자체가 부정되고 언어적 표현과 합리적 사고가 저해됨으로써 불교적 실천과 사회정의의 심장, 곧 진리에 대한 비판적 식별이 소실되기에 이르렀다고 비판합니다.
저명한 불교학자 가마타 시게오(일본 도쿄대학 불교학 명예교수)는 이 책에 대하여 “본각사상 비판에 관한 이 글들이 현대사상계 전반에 그리고 구체적으로 불교학계에 혁명적 충격을 가하리라 확신한다. 이 책은 참된 불교가 무엇인가를 당신에게 말해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존 F. 키난(미국 미들베리 대학교 종교학 교수) 또한 다음과 같이 이 책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하카마야 노리아키와 마츠모토 시로의 비판은 순응적이고 무비판적인 관념과 관행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다. 이 책이 출간됨으로써,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불교가 가르쳐지고 실천되는 곳 어디에서나 중요한 그 이슈들이 서구의 독자들과 조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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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am 2015-06-26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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