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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지눌과 구산의 선 사상 비교 연구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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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지눌과 구산의 선 사상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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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영불교연구소

2019. 10. 3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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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과 九山의 禪 思想 比較 硏究



1999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종교학 전공



박 정 환



목 차



Ⅰ 序 論 1



1. 硏究의 目的 1



2. 硏究의 方法 4



Ⅱ 知訥의 生涯와 韓國佛敎傳統 6



1. 知訥의 생애와 禪風의 振作 6



2. 知訥의 불교사적 업적 8



Ⅲ 九山의 生涯와 宗風振作 12



1. 九山의 출생과 求道 12



2. 교화와 禪의 중흥 18



Ⅳ 知訥과 九山의 禪思想 比較 21



1. 知訥의 禪思想 21



1) 禪思想의 형성 21



2) 心性論 24



3) 修行論 30



(1) 頓悟論 30



(2) 漸修論 32



(3) 看話論 37



2. 九山의 禪思想 40



1) 心性論 42



2) 修行論 47



(1) 三要 48



(2) 三學 49



(3) 看話論 51



(4) 頓悟漸修 55



(5) 定慧雙修 60



Ⅴ 結 論 63



참고문헌 67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compare Gusan with Chinul. I



investigated their places in the history of korean Zen Buddhist thought. I



traced Chinul and Gusan in their writings and ascertained their enormous



achivements and also pursued the samenesses and differences between



Chinul and Gusan.



The first chapter shows the significance of the purport and method of



this study.



In the second chapter, I deal with the life of Chinul in the background



of the Korean tradition of S o ˘n. He aimed to reform the corrupt Koryo



buddhism. This made his contribution to the Koryo Buddhist society.



In the third chapter, I study the life of Gusan. Gusan devoted himself to



his own self-cultivation and the mission toward foreigners. He spread



Koean Buddism in the world, and made many pupils. So there are many



disciples in the Songgwang-Sa and in the foreign countries. In this chapter



I showed how important his place and activity was in Songgwang Sa.



Forth chapter is the most important, because I refer to the essential



samenesses and differences of Chinul and Gusan in this chapter. Gusan



followed Chinul with a little modification. But his concept of self-awareness



shows some differences. Gusan's kanhwa s o ˘n(看話禪) is somewhat



different from Chinul's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cultivation.(頓悟



漸修) In this chapter, I aimed to compare their theories of mind(心性論)



and theories of cultivation,(修行論) analyzing the thoughts of these two



Korean Buddhist monks.



In the last chapter, I explain the places of Gusan and Chinul inside the



Korean Buddhist history. To sum up, through the comparison of Gusan



and Ghinul, I clarified the characteristic places of their Zen Buddhist



thoughts.



국문초록



본 논문은 지눌과 구산의 선사상을 비교하여 한국선에 있어서 양자의 위치



와 두 선사의 사상적인 특색을 밝히고자 한다.



지눌의 사상을 축으로 해서 구산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검토해 양자를 비교하



여 일치점과 차이점을 구분하고자 한다.



먼저Ⅰ장에서는 연구의 목적과 방법을 제시한다. 문헌에 대한 설명과 비교



방법 등을 제시 하다.



Ⅱ장에서는 한국불교전통과 지눌의 생애를 다룬다. 그는 고려시대에 철저한



자기 수행과 함께 정혜결사를 실행하여 혼탁한 시대의 불교를 바로잡고자 노



력하다. 그의 생애와 불교사적 업적을 통해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살펴 보



았다.



Ⅲ장에서는 구산의 생애를 검토하다. 구산은 사상못지 않게 포교에 더



많은 중점을 두었던 선사이다. 그는 한국의 불교를 해외에 전파하고 외국인



제자들을 양성하는 등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노력한 선사이다.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많은 제자를 두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송광사에서의 그의



위치와 활동을 비롯해 해외에서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Ⅳ장은 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지눌과 구산의 선사상을 비교한



다. 구산의 사상은 지눌의 사상과 거의 유사하다. 특히 심성론이 더욱 그러하



다. 즉, 구산이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는 것이다. 단 약간의 변형된 형태의 계



승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수행론에서 간화론에 대한 차이점이 드러나기 때



문이다. 따라서 구산의 간화선과 지눌의 돈오점수론을 대비해 다루어 보았다.



구도는 심성론과 수행론으로 나누어 양자 모두 이 구도에 따라 분석해 보았



다.



Ⅴ장 결론에서는 이제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구산과 지눌의 일치점과 차이



점을 도출해 보았다. 한국의 불교전통에 있어 그들은 어떠한 존재는지를 살



펴 보았다. 그리고 비교를 통해 각자가 지니는 선사상의 특징등을 살펴보면서



그 일단을 정리해 보고자 하다.



Ⅰ 序 論



1. 硏究의 目的



현재 우리 사회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古代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교가 발생했다가 소멸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종교는 간단한 原理로 생겨나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해석과 실



천에 의해 그 내용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2,5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한 불교에는 많은 실천



적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佛性을 찾아 깨달



음에 이르는 自覺的 방법을 대표하는 것이 禪이라 할 수 있다.



禪은 思惟修나 靜慮 그리고 定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음을 一



境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게 정신을 통일하는 수행법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禪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수행자들에게 행해졌던 수행법의 하나다. 석가



모니 부처님께서 思惟修에 의해 正覺을 이루어 성불하신 이후 불교에 있어서



는 선을 최고의 수행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禪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하나의 宗派로서 형성되기에 이르고, 禪宗은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표방하



면서 불교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본격적인 禪의 전래는 新羅末로 보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간헐적인 전래가 있었으나 본격적인 전래는 신라 말쯤에 들어오기



시작한 南宗禪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禪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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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그러한 禪을 연구하는 작업은 우



리 스스로가 한국불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이며 새로운 실천불교를 이룩하



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禪思想을 주창한 고승은 많았다. 그 가운데 고려시대의



知訥(1158∼1210)은 단연 돋보이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적과 사상은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1) 그만큼 그의 불교사적 위상이 높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12세기의 고려불교가 정치적인 혼란시기에 교단



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정법이 멀어진 상태에서 불교 본연의 자세를 堅持하는



데 헌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눌의 정신은 그가 창건한 송광사를 중심으로 면면히 계승되었고,



16국사가 배출되면서 고려후기부터 수행의 중심처가 되었다. 그리고 排佛政策



으로 불교계의 위상이 저하된 조선시대에도 지눌의 사상은 면면히 계승되었



다. 특히 근·현대 인물로서 이러한 지눌의 사상을 드높이는데 앞장선 분은



九山(1909∼1983)이라 할 수 있다.2) 현재에도 송광사에는 지눌의 사상을 연구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87년 창립된 ‘보조사상연



구원’이다.



구산은 오래 동안 송광사에 머물면서 많은 불사를 행하다. 그런 불사 가



운데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한 활동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지눌이 송광사



에 세운 修禪社를 다시 재건하면서 지눌의 사상을 바탕으로 다시 결사의 정신



을 되새기는 한편 本分事를 요달하여 국사의 慧命을 이어가자는 내용에서 그



가 얼마나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3)



1) 지금까지 지눌에 관한 연구성과는 다음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普照關係資料目 錄 , 보조사상 , 제1집- 제11집, 보조사상연구원, 1987- 1999. 2) Robert E. Buswell JR, The Zen M onastic Experience, Princeton Univ Press 1992, pp. 59∼64. 3) 구산문도회, 구산선문 , 불일출판사, 1995,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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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山은 이런 결사의 의미 이외에도 禪을 지도하면서 修禪者의 이해를 돕는



내용의 상당법어를 펼칠 때 많은 부분에서 지눌의 사상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구산은 지눌



의 시호를 딴 佛日會를 발족하여 그의 慧命이 이 땅에 계승되기를 기원하는



한편, 佛日國際禪院을 개설하여 그의 제자 Buswell로 하여금 지눌의 법어집을



번역케 하여 서구 세계에 지눌의 사상을 알리는 등 지눌의 사상이 함축된 佛



事를 행함으로써 시공을 초월한 사상적 계승에 전념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



다.4) 따라서 본 연구는 九山의 선사상에 지눌의 사상이 어떻게 계승되는지 구



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九山의 사상이 지눌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쉽게 가정



할 수 있겠지만 반면 지금까지 이루어진 九山의 생애와 그 사상에 대한 연구



는 전무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구산의 생애가 연구 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입적 하신지 오래되지 않은 시간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구산의 사상을 구명하는데 어려운 점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눌



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 연구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지눌과 구산은 그들의 생존연대에서 보여지듯이 752년이란 시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활동이 판이하게 달랐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방향은 禪의 부흥을 통한 불교 본연



의 모습을 찾는 데 있었다. 특히 구산의 사상이 대부분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



고 있음을 볼 때,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성이 현존함을 인식하는 계



기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본 논문이 추구하는 목적이다.



4) 구산문도회,『구산선문 , 608∼6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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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硏究의 方法



한 禪師가 남기고 간 발자취를 더듬고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특히 이 논문을 쓰며 부딪히는 어려움은 知訥은 많은 저술과



역사적 활동을 통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어 그의 사상과 불교사적 위치를 비교



적 수월하게 알 수 있는 반면, 근·현대에 걸쳐 자신의 삶과 사상을 펼쳐온



九山은 그와 같은 위상을 조명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知訥과 九山



의 사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두 선사의 생애를 비교하여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들이 가진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다. 지눌은 고려시대 혼탁한 사회상



황 속에서 定慧雙修의 기치를 내걸며 한국 선을 크게 융성 시킨 한국선종사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가 크게 존경받는 것은 당시의



혼탁하고 부패해진 수도공동체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지눌의 생존시기



인 12- 13세기는 혼란한 시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기간의 무신정권의 통치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왕실과 매우



접한 관계에 있었고, 정치적 배후를 등에 업은 불교는 현실과 접한 관련



을 맺게 됨으로 해서 본연의 모습을 떠난 세속과의 결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눌은 이런 사회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불교를 혁신적으로 개혁하고자 하



다. 이것이 정혜결사 운동이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교단을 정화시킴과 동시



에 그의 독특한 사상체계도 발전시켰다. 따라서 그러한 정신이 어떻게 전승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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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가를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한편 구산은 1937년 불법에 귀의한 이래 교단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다.



특히 스승인 효봉 스님을 도와 1954년부터 시작된 불교계의 정화운동에서 한



국불교의 전통을 살리고자 노력한 점은 시대적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69년부터는 정법구현과 보살도를 실천하며 조계종풍과 목우가풍



을 다시 일깨워 제2의 정혜결사 운동을 염원하면서 조계총림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그 후원회로 불일회를 두어 국제선원을 설립하여 수행과 포교에 힘썼



다.



그렇지만 구산은 그러한 佛事의 중흥보다는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여 한국



불교의 禪風을 진작시키는 한편 수행자로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주된 관심



이었다. 따라서 구산은 인간본성을 추구하는 眞性의 탐구가 그의 화두다. 구



산은 그런 진성의 탐구를 위해 여러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의 자료가 빈약한 구산에 대해서는 다



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하다. 구산에 관한 자료로는



먼저 구산선풍 과 구산선문 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구산의 제자들이 구



산의 법어를 모아 사후에 편찬한 책이다. 구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책의 분석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적인 선사상을 전개하



기보다는 게송과 그의 들이 체계가 없이 나열되어 있다. 따라서 나는 지눌



의 사상과의 비교를 통하여 구산의 사상체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즉 두 권의 법어집에 수록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지눌이 제시하고 있는 심



성론과 수행론의 체계에 구산의 심성론과 수행론의 체계를 대비시켜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는 면과 차이점을 찾아봄으로써 시대적 차이를 두고 보여주고



있는 두 선사의 사상을 비교하고자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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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知訥의 生涯와 韓國佛敎傳統



1. 知訥의 생애와 禪風의 振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지눌은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역사적으로는 禪·敎



를 통합하여 교단의 융화를 모색하으며, 사상적으로는 頓悟漸修와 定慧雙修



를 제청하여 문란한 僧風을 회복하다는 점에서 그가 철저한 수행을 중심으



로 한 실천가음을 보여준다.5)



知訥은 고려 의종 12(1158)년 황해도 서흥군에서 부친 鄭光遇와 어머니 趙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諱는 知訥이며 스스로를 牧牛子라 불다. 우리가 普照



國師라 함은 희종이 내린 시호가 佛日普照國師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부모는 부처님 전에 기원하기를 병이 나으면 출



가시킬 것을 결심하고 기원대로 병이 낫자 宗暉禪師에게 귀의하여 득도케 하



다.



출가 후 지눌은 다음과 같이 몇 차례의 계기로 인해 禪에 귀착하는 계기를



맞게 됨을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일정한 스승 없이 수행하다가 1182년 승



과에 합격하으나 이에 집착하지 않고 普濟寺 담선 법회에서 뜻을 같이한 10



여 명과 結社를 약속하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전남 나주에 있던 淸源寺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중생의 眞性은 萬象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함을 깨닫게



5) 朴相國,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저술 , 普照思想 제3집, 보조사상연구원, 1989,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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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큰 전기를 맞이하다.



다음은 지눌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 1185년 普門寺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李通玄의 화엄론을 읽고 부처님의 말이 禪과 계합함을 깨닫고



禪敎不二 禪敎會通을 주도하게 되었다.6) 이후 지눌은 본격적인 禪의 수행을



주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修禪結社이다. 결사운동은 자신이 25세 때 마음에 두



었던 것으로 여기서 그는 부처님의 말은 道에 들어가는 문턱인 戒와, 그 핵



심으로서의 定과 慧를 균등하게 닦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눌은 자신의 나이 41세(1198)가 되던 해 지리산 上無住庵에



은거하면서 투철한 정진으로써 깨닫게 된다. 여기서 그는 禪定의 근원을 깨닫



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얻은 그의 감회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보문사에서부터 이미 10년이 되었다. 비록 뜻을 얻어 부지런히 닦아 시간



을 헛되이 보낸 일은 없었으나 아직 情見만은 버리지 못하여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리어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리산에 있을



때 『大慧普覺禪師語錄』을 보니 여기에 “禪定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 하여 응하는 곳도 있지 않



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을 버리고



참구 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



일임을 알 것이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치어 저절로 걸려 있는 가



슴이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 편하고 즐거워졌다.7)



이러한 깨침은 지눌에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것은 지눌의 나이



6) 강건기,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 , 인문논총 제 14집, 1985, 49쪽. 7) 金君綏 撰, 普照國師碑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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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1200)가 되면서 자리를 松廣寺로 옮겨 1210년 입적할 때까지 禪을 닦으



며 대중을 교화하여 한결같이 깨우침에 의한 자비와 실천을 위해 매진하기



때문이다. 그런 지눌의 생애는 禪學을 융성하게 한 것이 가까이나 멀리에서



비교할만한 상대가 없다는 평가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 후 지눌은 定과 慧를 고루 닦아 禪과 敎를 함께 하는 수행으로 문란해



진 교단의 수행풍토를 개혁하고 禪敎의 대립을 지양하는 會通을 위해 매진하



다가 1210년 그의 나이 53세가 되던 해 대중에게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입적



하다.8)



2. 知訥의 불교사적 업적



지눌은 고려시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고 있음은 물론 그의 사상



은 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처럼 그의 사상이 계승됨은 불교



사적 업적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이 남긴 불교사적 업적을 살펴보면 우선적으로 고려불교의 비판을 통



한 목표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과, 다음으로는 그의 사상이 후대에 계



승되면서 한국불교사상에 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지눌이 보여주고 있는 현실비판의 주된 내용은 수행자의 자세에 관한 면모



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당시 수행자들의 경향은 현



실적 이양에 떨어져 공부를 게을리 하며,9) 문자에 집착한 교학자의 병과 깨침



8) 강건기, 앞의 , 51쪽. 9) 지눌, 勸修定慧結社文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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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닦음의 본말을 모르고 무조건 앉아 있는 것을 禪으로 착각하는 선학자의



痴禪, 그리고 눈뜬 종사들의 말을 겉으로 흉만 내며 닦음을 포기한 채 날뛰는



무리들이 마치 모든 수행을 다 마친 양 착각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10)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눌이 결사를 생각한 것이 선풍의 회복



과 선교의 회통이었다. 지눌이 본격적으로 결사운동을 전개한 것은 1190년(명



종 20)에 팔공산 居祖寺에 있을 때 禪客들의 청을 받고 머물게 되면서 법회를



열고 定慧社를 결성하고 결사문을 지으면서 비롯되었다. 그 후 1200년 定慧社



를 吉祥寺로 옮기고 그 이름을 修禪社로 개명하고 11년 동안 대중을 교화하



여 많은 사람이 동참함으로써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으며,11) 이러한 결사운동을 통해 당시의 문란한 僧風을 회복하고



일상생활에서 禪修行이 생활화 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



다.12)



선의 중흥뿐만 아니라 지눌은 당시 불교계가 지니고 있는 禪과 敎의 문제



점을 여실히 지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병폐는 지눌이 살았던 고려불교의



과제으며 지눌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진력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부처의 입으로 말한 것은 敎이고 祖師의 마음에 전한



것이 禪이므로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이 결국엔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禪·敎 學者들은 그 근원을 알려하지 않고 각기 자신이 익힌 곳에



안주하여 논쟁만을 일삼아 시간만 헛되이 보낸다는 것이다.13)



이와 같은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敎로서 그 방향을 분명히 한 다



음에 닦아야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 禪敎會通이야말로 수행자



10)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03∼117쪽. 11) 金君綏, 앞의 . 12) 權奇悰, 고려 후기 불교와 보조사상 , 보조사상 제3집, 보조사상연구원, 1989, 25쪽. 13) 知訥, 華嚴論節要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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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녀야 할 본분임을 알려주고 있다.14)



다음으로는 지눌의 사상이 후대에 계승되어 그것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눌의 모든 교학



과 선이 일치한다는 견해는 선을 중심으로 한 교학의 융합이라는 전통을 남겼



으며, 선풍 진작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창적이고 체계를 갖추어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자리하고 이것이 후대에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15)



지눌의 결사운동을 효시로, 이후 한국불교에서는 많은 결사가 이어져왔다.



이러한 결사는 불교 자체내의 모순과 부패를 없애고 정법불교로 새로워지려는



움직임이다. 그 가운데 정혜결사와 같은 시기에 나타나 이후까지 전개된 백련



결사는 지눌의 향을 받아 了世에 의하여 결성되었는데 당시 불교계의 타락



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을 띄었다.16)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눌의 회통적이고 실천적인 전통은 서산에 의해



계승됨을 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응하여 禪敎·悟修 등



의 융회(融會)는 물론 타교와의 융회(融會)까지도 꾀하여 불교의 위상을 새롭



게 정리하다고 할 수 있다.17)



근대에 이르러 지눌의 결사운동은 鏡虛에 의해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



다. 경허에 의하면 당시 정법이 사라진 시대, 혼돈의 시대, 더 나아가 개혁을



시도할 시기로 보고 있으면서 그 방법은 정혜를 닦는 것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지눌의 정혜결사에서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18)



지눌의 사상은 결사운동으로만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측면에서도



14) 知訥,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03쪽. 15) Hee Sung Keel, Chinul, The Founder of the Korean S n Tradition, berkly buddhist studies series, 1984, pp. 163∼177. 16) 채상식, 고려후기 불교사상연구 , 일조각, 1991, 70∼71쪽. 17) 서산, 禪家龜鑑 , 동국역경원, 1976. 18) 김경집, 鏡虛의 定慧結社와 그 思想的 意義 , 韓國佛敎學 , 제21집, 한국불교학 회, 1996, 376∼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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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업적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 불교계에서 실행하고 있는



강원교육의 특성과 교과목에서 지눌의 저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



기 때문이다.



먼저 현재의 강원교육은 禪敎를 겸수하는 교육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부터 계승되어온 교육 방법임은 물론 지눌 이후로 보여지는 전



통적인 禪敎觀과 일치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로 나누어져 있는 강원의 교육 과정에서 지눌이 저술한『계초심학인



문』과『법집별행록병입사기』가 사미과와 사집과에 포함되어 있으며, 지눌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 혜심이 찬집한『선문염송집』이 대교과에 포함된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19)



더 나아가 지눌이 평소 즐겨 인용하던 경전들이 강원교육의 교과목에 편성



되어 있음은 그의 정혜쌍수와 선교회통의 사상이 그대로 한국불교의 강학이념



과 수행법풍으로 계승되어온 그의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20)



19) Hee Sung Keel, ibid. pp. 175∼176. 20) 종범, 강원교육에 끼친 보조사상 , 보조사상 제3집, 보조사상연구원, 1989, 7 5∼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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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九山의 生涯와 宗風振作



1. 九山의 출생과 求道



구산 스님은 1909년 1월 27일(음 1909. 12. 17)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 내



척리 509번지에서 아버지 蘇在衡과 어머니 崔姓女 사이에서 4남 2녀 중 3남으



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농사일에 종사하여 그리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다. 그런 생활



에서도 구산은 1922년(14세) 일제 식민지하에서 용성 소학교를 졸업하다. 그



후 漢學을 공부하던 중 1923년(15세)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청년기에 가사



를 돌보며 이발관을 운하다. 훗날 부처님 10대 제자 중 이발사 출신인 우



바리 존자를 상기시켜 ‘우바리존자’라는 별명이 생기게 된다.



불교와의 인연은 구산의 나이 26세가 되던 해에 이루어졌다. 1934년 그 해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하던 중 진주에 사는 河處士라는 불심이 강한 居士를



만나 무상 법문을 듣고 인생 무상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의 출가는 다음해인 1935년에 이루어졌다. 거사로부터 ‘몸은 마음의



그림자며, 사람마다 누구나 원만히 갖추어 있는 自性자리는 본래 淸淨하거늘



어디에 병이 있겠느냐.’ 라는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집안일을 정리하고 불법에



귀의하고자 먼저 지리산 원사에서 백일간 관음기도를 시작하여 이를 성취하



자 차츰 육신의 병이 쾌차하게 되고 불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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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28세다.



그 후 스승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의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송광사에 금강산



도인 曉峰禪師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자신을 문하에 받아 줄 것을



간청하여 1937년(29세) 음력4월8일 효봉선사를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에서 사



미계를 받았다.



이와 같이 불교에 인연을 맺은 구산은 남보다도 굳은 의지로 수행에 전념



해 갔다. 구산의 나이 31세가 되던 해인 1939년 음력 4월 15일 통도사에서 해



담 화상을 戒師로 比丘戒를 받고 여름 안거를 백련암 선원에서 보냈다. 그 후



에도 구산은 1941년(33세) 가야산 백련암에서 정진하면서 化主소임을 맡아 백



련암 중건불사를 이룩하고, 이듬해 34세에 선원에서 안거를 마친 후 상노사인



석두스님과 은사인 효봉스님께서 수행했던 금강산의 산사들을 참배하다.



1943년(35세). 경북 금릉군 불산 청암사 수도암에서 정각토굴을 짓고 착실히



정진하기도 하다.21)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이후의 행적은 한국 불교의 정통을 바로 세우고



일제하에서 크게 변질된 종단을 정화하여 올바른 수행인을 양성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그는 1946년 가야산 해인사에 한국불교



최초로 가야총림(伽倻叢林)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은사 효봉스님



의 부름을 받고 가야총림 선원의 도감과 원주소임을 번갈아 보면서 지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수행이 부족함을 깨닫고 정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1947년(39세) 은사의 허락을 받고 가야산 정상봉 밑에 법왕대 토굴을 짓고 용



맹정진 하다. 그렇지만 한 철이 지나도록 별로 소득이 없어 하산을 결심하



고 짐을 챙기니 그날 밤 꿈에 산신이 나타나“이 곳은 스님과 인연 터이니 떠



나지 말고 한 바탕 더욱 용맹 정진하라”고 당부하며 “현세의 복으로는 공부



21) 구산문도회, 구산선풍 , 299∼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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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가 어려우니 내생 복을 당겨 받으시오” 라고 지침을 내려주었다고 한



다.22)



이와 같은 기이한 꿈을 꾸고 난 후 필사적인 정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心眼



이 열리고 큰스님의 인가와 함께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



을 남겼다.



달이 일천 강에 비치고 파도는 달을 비추니



하늘은 만물을 안고 나는 하늘을 안았도다.



일체의 명상이 그대로 진리이거늘



어찌 장엄 법계가 진리를 말하리요.23)



6·25 사변으로 내외의 사정이 어렵게 되자 해인사 가야총림도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구산은 진주 의석사로 거처를 옮겨 동안거를 보냈으며,



세수 44세에 이르러서는 통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 선원에서 모시던 효봉스



님을 미륵산 정상봉에 토굴을 지어 주거케 하고, 1953(45세)에는 경남 통군



산양면 운리 뒷산 미륵산의 편백나무 숲 속에 스승님을 모시기 위해 미래사



를 창건 한 후 초대주지가 되기도 하다. 1954년(46세), 음력 3월 미래사 법



당을 낙성한 후 미래사의 좌우 산자락에 토굴을 짓고 상노사(석두)와 효봉노



사를 모시는 등 수행에 힘썼다.



한가로이 수행에 전념하고자 했던 구산에게 당시의 교단은 그를 놓아주지



22) 같은 책, 301∼302쪽. 23) 구산선풍 , 302쪽. 月印千江波印月 天藏萬物我藏天 一切名相元理足 莊嚴法界豈 言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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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내외의 사정은 물론 교단에서도 혼란의 기미가 보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다. 이른바 정화불사에 참여하신 것이다.



한국불교에 있어 정화운동은 일제의 강점기와 해방후 미군정 속에서 변질



된 불교계의 모습과 함께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나타난 종단적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분규의 시작은 독신 승려의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다.



특히 1952년 11월 경주 불국사에서의 승려대회는 수행풍토를 저해하는 대처승



들의 사찰내의 생활을 지적하고, 다음해 4월에는 조계종의 부활 등이 논의



되기도 하다. 이런 작은 움직임 등이 1954년 5월 21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유시에 힘입어 점차 대립적 양상으로 변해가



게 되었다.



이승만의 유시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발표되지만 주된 내용은 일제불교의



잔재를 일소한다는 취지에서 사찰에서의 음주, 가무 등을 금지하는 내용이었



다. 이러한 유시를 계기로 비구승들은 선학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정통이라



는 주장을 피력하고, 대처승들은 태고사에서 법통을 고집하게 되었다.



그후 정부의 중재로 여러 차례 합의와 결렬이 반복되면서도 비구 측과 대



처 측은 최종적인 합의까지 협의되었지만 타결되지는 못하다. 그 결과 쌓인



감정의 대립과 함께 재산권의 분배에 따른 이견으로 말미암아 분규는 계속되



었고 이것은 결국 법정싸움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다.24)



지금까지 세연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구산도 이런 종단적 사태에는 방관만



24) 이러한 분쟁은 5·16 이후에는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불교계의 법적 단체로의 등록이었다. 당시 불교계의 중재를 맡았던 문교부에서는 1961년 12 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를 제시하여 양측의 화합을 도모하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후 양측은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등록하지만 비구 측에 유리한 면이 강조된 탓에 대처 측은 이를 수락하지 않고 다시 분종을 선언하여 1970년 1월에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설하여 문교부에 등록하게 되어 불교분쟁은 막 을 내릴 수 있었다. 정병조, 불교의 대중화운동과 전망 , 대한불교총람 , 대한불교진흥원, 1993,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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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54년 음력 8월 17일 여름 안거를 마친 후 효봉스님을



모시고 상경하여 종단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선학원에 머물면서 전국 비구니 대회를 개최하여 정화불사를 위한“종단정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다.



그 후 1955년 음력 6월 15일 500자 혈서로서 정화불사의 당위성을 알리는



탄원서를 당시 이대통령에게 보내어 정화의 결의를 굳게 다졌으며, 같은 해에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전남종무원장’에 취임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다.



그 후에도 그는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감찰원장’에 취임하고, 1960년부터 1967



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임되어 종단일에 관여하다.



1957년 그의 나이 49세에 이르러서 종단정화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자 수행정진만이 見性成佛하고 교화중생의 길임을 절감하여 전남 광양 옥용



면 소재 백운산 상백운암의 옛터에 삼 칸 토굴을 중건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불퇴전의 용맹심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시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으시



니 이때 선사의 나이 53세다.



깊이 보현의 터럭 속에 들어가



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동짓날에 소나무가 저절로 푸르니



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간다.25)



구산의 정진은 나이에 관계없이 지속되었다. 그의 나이 70이 되었을 때도



동분서주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헌신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25) 같은 책, 305쪽. 沈入普賢毛孔裡 捉敗文殊大地閑 冬至陽生松自綠 石人駕鶴過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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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년에 가장 애를 쓴 것은 스승의 유훈을 받들어 표충사에서 송광사로



옮겨온 후 16년에 걸쳐 중창불사를 이룩하여 오늘과 같이 한국에서 최초로 국



제선원을 개설하는 등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기여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은 의지의 스님도 世緣이 다함을 막지 못하셨다. 1983년 3월 26일 전국



불일회 총회에서 제8차 중창불사를 결의하여 공사가 시작되자 기뻐하면서 설



계와 공사현장을 두루 살펴보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



후 제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첫째, 내 몸에 주사를 놓지 말아라.



둘째, 坐禪의 자세로 장례를 치르라.



셋째, 和合하여 살아라.



넷째, 禪風에 累가 되지 않게 하라.



또한 “자기를 속이는 중노릇하지 말고 거듭 발심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라”



고 유촉하며 다음과 같은 열반게를 남기셨다. 이때가 1983년 12월16일로 그의



나이 75세이며 법납 46년이었다.



온산의 단풍이 봄꽃보다 붉으니



삼라만상이 그 바탕을 온통 드러내었도다.



생도 공하고 사도 또한 공 하니



부처의 삼매 중에 미소지으며 가노라.26)



26) 같은 책, 313쪽. 滿山想葉紅於二月花 物物頭頭大機彰 生也空兮死也空 能仁三昧微 笑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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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화와 禪의 중흥



구산이 근·현대의 격변기에서 한국불교를 위해 크나큰 족적을 남겼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그의 업적을 요약해 본다면 한국불교의 正體



性 확립과 국제화로 요약할 수 있다.



구산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것은 교단의 정화와 많은



불사를 추진하여 쇠락한 교단을 부흥시킨 점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



화의 기운이 일어나자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선학원에 머물면서 종단정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혈서로써 정화불사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노력하다.



이런 노력 가운데 그는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전남종무원장’ ‘대한불교 조계



종 중앙감찰원장’ 등의 교단의 주요한 자리에 취임하여 불안한 교단의 안정에



주력하다. 그리고 정화이후인 1960년부터 1967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으로 선임되어 종단 일에 관여하는 등 교단을 위해 헌신하다.



정화불사가 일단락 되자 그의 관심은 허물어져 가는 가람을 중창하는데 뜻



이 모아졌다. 1962년 그의 나이 54세인 4월 11일 오랜 분규가 종식되고 통합



종단으로 탄생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에 효봉스님이 추대되자 종정의



거주 사찰로 지정된 대구 팔공산 동화사 주지로 취임하여 봉서루 등 중창불사



를 시작하고, 금당선원 산내암자 등을 수행 도량으로 불사하다.



1966년 구산의 나이 58세가 되던 해 노환중인 효봉 대종사가 앉은 자세로



입적하면서 승보사찰인 조계산 송광사를 재건하라는 유훈을 남기자 구산은 이



를 자신의 평생 사업으로 받들었다.



1969년 그의 나이 61세 때는 은사인 효봉스님의 유훈인 송광사의 복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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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여 한국불교에 있어 해인총림에 이은 조계총림을 발기하고 하안거 결제



일에 개원식을 거행하다. 이때 조계총림 설립위원장에는 청담스님을 추대하



고, 자신은 초대 방장에 추대되었다.



총림을 개원 한 후에도 총림의 수행적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단체인



불일회(佛日會)를 전국적으로 결성하여 대구 불일회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 광주, 대전, 서울 등 대도시마다 불일회의 지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에게



생활불교의 지표인 7바라 사상을 실천하도록 선양하다.27)



그 후에도 구산은 전국의 여러 곳의 도량을 중창하다. 대략적으로 살펴



보더라도 1971년 6·25사변으로 폐사가 된 山內庵子 감로암의 중건을 필두로



1974년 ‘法蓮寺’의 개원, 1975년 산내암자인 ‘불일암’의 중건, 조계산 상봉아래



‘ 인월정사’의 창건, 그리고 1976년에는 호남불교의 중흥을 위하여 광주시에 광



주 분원인 ‘원각사’를 개원하여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이러한 구산의 업적이 두각을 보인 것은 바로 한국불교를 세계로 알린 것



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구산의 나이 58세가 되던 해 세일론에서 개최된 ‘세



계불교승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을 필두로, 1972년(64세) 12월에는



한국불교 최초로 미국 가주 카멜시 근교에 한국 사찰인 ‘三寶寺’가 설립되어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첫 번째 미국 순방 길에 올랐다. 이어 1973년(65세)



에는 미국의 LA, 뉴욕, 시카고, 등 동 서부와 동부지역을 순방하고 3월 13일



귀국 길에 미국 LA의 최초 사원인 ‘達摩寺’ 개원 법회에 참석하여 설법하는



등 한국불교를 미국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구산의 한국불교의 해외 소개는 자신의 방문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1973년



여름 안거부터 조계총림에 한국 최초의 국제선원인 ‘佛日國際禪院’을 개설하여



27) 요일별로 지켜야 할 규율이다. 월요일부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만 행을 지킬 것을 구산은 강조했다. 생활불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206∼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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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에 관심 있는 해외의 스님들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는 등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앞장섰다. 그런 구산은 또한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문판 법어집인



Nine mountains 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런 향은 뒤에 외국인으로 송광사에



서 출가 수행한 Buswell(慧明)이 지눌의 법어집을 문으로 번역하여 서구세



계에 지눌의 사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다.28)



1980년 그의 나이 72세가 되던 해 10월 14일 두 번째 미주 순방 길에 올라



많은 외국인들에게 수기 설법으로 선풍을 진작 시켰고, 12월 21일에는 송광사



‘ 불일국제선원’의 LA분원 ‘高麗寺’를 개원하다.



1982년 세 번째 미국 순방 길에 올라 미국 각지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사원들을 순방하여 법회를 개최하고, 서구인들을 위한 수련 도량의 개설



을 위해 유럽을 순방하기도 하다. 그 해 6월 17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구산은 ‘불일국제선원’을 개설하려 하으나 여의치 않아 스위스 제네바로 옮



겨 ‘佛乘寺’를 개원하고 7일간 개원기념 법회를 개최하다. 이어 프랑스, 스위



스, 이태리, 독일 덴마크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법회를 주관하다.



그 해 여름 미국을 다시 방문한 구산은 캘리포니아 카멜시에 ‘大覺寺’를 개



원하고 많은 미국인에게 수계법회와 참선법회 등을 개최하여 한국 선 불교를



고취시키고 10월 12일 귀국하기도 하다.



이러한 활동에 만족하지 않은 구산은 문판 법어집인 The Way of



Korean Zen을 발간하여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



에게 한국의 선을 이해시키는 데 노력하다.



28) Robert E. Buswell JR, The Collected Works of Chinul, Univ of Hawaii Pres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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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知訥과 九山의 禪思想 比較



1. 知訥의 禪思想



1) 禪思想의 형성



지눌(1158- 1210)은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선사기에 그의 구도 역정을



통해 많은 정신적 방황을 해야만 했다. 지눌의 선사상은 결코 그 자신의 證驗



없이 전개된 단순한 이론적 사변이 아니었다. 그가 선에 관한 이론적 저술을



통해서 후학들의 선 수행에 지침을 마련해 주고자 한 것도 자신의 정신적 방



황의 경험을 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제시한 선 수행의 길은 모



두 자기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지눌에게 있어 이론과 실천, 사상과



체험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선사상은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로 하여금 선적 진리로 이끌어 준 如



實言敎에 근거하여 동시에 그 자신이 터득한 진리의 표출로 볼 수 있다.29) 그



것은 사상은 반드시 체계가 있으며 체계가 있으면 구조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



29) 길희성, 지눌의 선사상 구조 , 지눌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 정신문화연구원, 1996,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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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지눌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선사상을 구축하려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선적 진리와 그 진리를 중득 하게 하는 수행의 길을 향해 있었다. 지



눌은 자신의 구도역정을 선에 관한 확고한 이해를 얻게 될 때까지 선과 교를



막론하고 많은 전적들과 씨름해야 했으며 여러 사상가들의 향을 받게 되었



다. 그의 선사상은 그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점차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지눌의 선은 지적일 뿐만 아니라 포용적이고 포괄적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정혜결사 운동을 통해서 당시의 타락한 불교계를 정화하여 불교 본연의 길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생각의 폭은 단지



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정혜결사 운동은 초종파적인 것이었고 불교 밖의 인



사들로부터도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따라서 지눌의 선은 매우 포괄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다양한 근기를 지닌 사람들에게 알맞은 수행법들을 제시함으로



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선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는 지눌의 선사상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지눌의 선사상 체계란 결과적으로 생겨



난 것이지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지눌은 그의 저술 어느 곳에서든 자신의 선



사상 전체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측면들의 상관 관계를 밝히는 종합적인 성찰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



는 의도적으로 선 사상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지눌의 선사상의 체계를 논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저술에 암묵적



으로 내재하고 있는 체계를 말하는 것이지 지눌 자신이 명시적으로 밝히거나



인정하는 체계는 아니다. 지눌의 선의 체계란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혹은 구



성하는 체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불가피하게 지눌 선의 전



체적 성격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하나의 해석학적 작업일 수밖에 없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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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지눌의 선사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생애를 기록한 다음과 같은



을 주목하게 된다.



사람들에 권하여 암송하는 것은『金剛經』으로 했고 법을 세우고 뜻을 설



명한즉 반드시『六祖壇經』에 뜻을 두었으며 거듭 이통현의『華嚴經』과



『大慧語錄』으로 양 날개를 삼았다. 문을 열매 三種이 있었으니 곧 惺寂



等持門, 圓頓信解門, 徑截門이다. 이에 의거하여 수행하여 믿어 들어가는



자가 많았으니 선학의 융성함이 옛날이나 근래에나 이에 비함이 없었다.31)



이것은 지눌 선 수행론의 전모를 三門으로 요약하고 있는 내용이다. 지금



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수행론이 이 세 가지로 요약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수행체계라고 말할 수 없고 지눌의 선사상에 있어



다른 측면이라 할 수 있는 心性論이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지눌은



선 수행의 길만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眞心의 세



계, 곧 깨달음을 통해 드러나는 眞如 혹은 實在의 세계에 대해서도 수행자들



을 위해 자상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눌의 선사상은 구조



적으로 심성론과 수행론이라는 두 부분을 갖게 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32)



이러한 견해를 뒤받침하고 있는 것이 지눌의 저술 가운데 그의 말년에 저



술된 것이라고 하는『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



다.



지눌의 선사상에서 법의 두 측면인 불변과 수연은 지눌의 心性論이라 할



30) 길희성, 앞의 , 69∼70 쪽. 31) 金君綏, 앞의 . 32) 길희성, 앞의 ,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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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으며, 돈오점수로서 모든 성현들이 따랐던 길은 곧 修行論으로 볼 수 있



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눌은 선행에서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것이 徑截門(지름길)으로서 화두를 看하는 看話禪이다. 돈오점수가 선의 시작



과 과정이라 한다면 간화선은 지눌에 있어서 선의 완성을 기하는 길이며 불법



에 대한 문자 적이고 개념적 이해의 자취를 말끔히 씻어버린 證俉를 성취하는



선 특유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33)



2) 心性論



지눌은 그의 저서인『眞心直說』에서 眞心을 體와 用으로서 고찰하고 있



다. 지눌은 원래 그의 생애에 있어서 大慧禪師의 간화선을 접한 후 선의 원리



가 어떠한 知的인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그것을 자신의 저서



에서 역설하고 있다.



지눌은 진심의 진리는 조사들에 의하여 마음에서부터 전하여 오다가 하택



신회가 드디어 知라는 한 자는 모든 妙함의 門이라는 말로서 말없는 以心傳



心의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마음의 본성을 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법이 꿈과 같다고 여러 성인들은 다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



각도 원래 고요한 것이요, 티끌의 경계도 본래 空한 것이라, 공하고 고요한



마음은 신령스러이 알아 어둡지 않나니 이 공하고 고요한 마음은 곧 과거



에 보리달마가 전한 깨끗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미혹하여도 미혹한 그대로



33) 길희성, 앞의 ,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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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깨달아도 깨달은 그대로로서, 마음은 본래 스스로 아는 것이라. 인연을



따라 생기지도 않고 경계로 인해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



한 때에는 번뇌이지만 그것이 번뇌가 아님을 알고, 깨달을 때에는 신변이



지만 그것이 신변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아는 것(知)이라는 한 자는 온



갖 묘한 이치의 근원이다.34)



이러한 견해는 모든 법이 다 空한 곳에 신령스런 앎이 어둡지 않아 무정한



것과는 같지 않게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러이 아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중생들



이 지니고 있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며, 이것이 삼세의 모든 부처의 깨끗하



고 맑은 마음으로 중생들이 깨달아야 하는 성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35) 그



것은 마음의 세계는 단지 모든 현상적 다양성이 다 사라져 없어진 조용한 공



의 세계가 아니라, 이 空한 경지를 동시에 어떤 스스로 밝게 아는 것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앎이야말로 眞心의 세계를 아무 감각과 사고도 없



는 無情의 세계와 구별시켜 주는 결정적인 차이인 것이다.



지눌은 이 앎을 중생에게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佛性 혹은 覺性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눌은 心體의 양면 즉 空寂과 靈知를 또 하나의 체와 용의



관계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法과 이치를 세운다면 이치에 들어가는 천 가지의 문이 定과 慧 아님



이 없다. 그 강령을 들면, 그 둘은 體와 用이라는 자성의 양면이니 앞에서



말한 바 空하고 고요하여 신령스런 앎이 바로 그것이다. 定은 體요 慧는



用이나, 體는 곧 用이므로 慧는 定을 떠나지 않고, 用은 곧 體이기 때문에



34)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104쪽. 謂諸 法如夢 諸聖同說‥‥然知之一字 是衆妙之源. 35) 지눌, 修心訣 , 普照全書 , 보조사상연구원, 1989,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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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은 慧를 떠나지 않는다. 定이 慧이기에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慧가 定이



기에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마치 조계가 혼란 없는 心地가 자성의 定이요



어리석음 없는 심지가 자성의 慧라 하는 것과 같다.36)



지눌은 이러한 진심의 내용을 설득하기 위하여 능엄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知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37) 이와 같이 知와 寂의 관계를 定과 慧



와 같이 진심의 體상에 있는 體用의 관계로 보는 것은 바로 신회의 선사상이



나 단경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외부 세계와의 감각을 통한 접촉을 끊고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면 고요한 상태가 나타나며, 이 상태는 결코 단순한 空의 세계가 아니라 어



떤 밝고 어둡지 않은 것, 즉 어떤 앎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서 지눌은 우리의 진심의 체는 고요하나 앎이 있어 한편으로는 앎이 있으나



고요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요하나 앎이



없는 무정의 세계와도 다름을 피력하고 있다.38) 지눌은 이와 같은 진심을 體



와 用의 양면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 밝힌 바 空寂靈知는 비록 분별을 하는 식도 아니고 깨달음을 체험하



는 지혜도 아니지만 識과 智慧를 산출해 낼 수 있다. 범부도 되며 성인도



되며 선도 짓고 악도 짓는다. 마음에 들거나 거슬리거나 하는 용의 힘이



만 가지로 변한다. 그 이유는 그 체가 知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났을 때 모든 옳고 그름 좋고 싫음 등을 구별한다.39)



36) 지눌, 修心訣 , 普照全書 , 39쪽. 若設法義 入理千門 ‥‥ 心地無痴自定慧. 37) 지눌, 修心訣 , 普照全書 , 36쪽. 38) 지눌, 眞心直說 , 普照全書 , 65쪽. 39) 지눌,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普照全書 , 143쪽. 今之所明空寂靈知 ‥‥ 能分 別一切是非好惡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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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고요하고 불변한 진심의 체가 동시에 우리의 일상생활에



서 경험하는 모든 특수성과 차별성을 되살려 내는 모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심의 體가 知이기 때문이다. 즉 진심이 그 체에 있어서 밝고



투명한 면이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 항상 외적인 대상의 세계가 지닌 다양성



에 대하여 그대로 알 수 있으며, 이 다양성의 세계가 진심의 체를 떠나서 따



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심의 체가 앎을 갖고 있기 때문



에 동적인 用의 세계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하나의 마음에 고



요하고 변치 않는 眞如의 면과 수시로 변하는 生滅의 면이 동시에 있으며, 이



두 면을 연결시켜 주는 원리가 다름 아닌 심진여 자체상의 앎을 말하는 것으



로 볼 수 있다.



지눌은 이 寂과 知라는 두 측면이 모두 진심의 體의 세계이지만 양자를 다



시 體와 用의 관계로 해석한다. 지눌에 의하면 진심의 空寂한 측면은 우리의



自性에 내재하는 定이며 靈知는 자성의 慧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과 혜 사이



의 관계는 불가분적 체용의 관계이다.40)



지눌이 말하는 空寂靈知心에서 空寂의 개념은 물론 空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用적 측면인 知는 보다 세심한 주의와 고찰을



요한다. 지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중생은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선하



거나 악하거나 혹은 금수의 차별 없이 가진 바 心性이 모두 자연히 언제나



환히 알아 木石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대상에 따라 분별하는 의



식이 아니며 깨달음의 지혜도 아니다. 다만 진심의 自性이 무감각한 허공



40) 金呑虛, 縣吐譯解 普照全書 , 회상사, 1963,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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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달라 본성이 스스로 항시 앎이 있다는 것이다.41)



여기서 지눌은 이 진심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앎(知)은 우리가 대상을 분별



하는 일상적인 인식이 아니며 또한 ‘깨달음의 지혜’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앎이다. 그것은 따라서 앎이 아닌 앎이다.



지눌에 의하면 이 知가 비록 보통의 인식과도 다르고 깨달음의 지혜와도



다르지만 우리의 모든 인식활동의 바탕이 되며 깨달음을 얻는 지혜의 근거도



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심의 體와 구별되는 진심의 用에 관한 지눌의



이론에 접하게 된다.42)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는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진심의 體가 동



시에 우리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모든 차별적 조건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하



는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세계가 진심



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심의 妙用적 측면일 뿐이라는 것이



다. 진심의 세계에서는 따라서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 시간과 원, 그리고



생성과 존재의 대립이 극복된다. 화엄철학의 술어로 말하자면 理事無碍의 세



계인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진심이 이렇게 수연적 성격을 띠는 것은, 다시



말해 진심의 體가 변하는 用적 측면을 띨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진심의 體 자



체가 지니고 있는 知라는 용적 측면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體가 知이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눌의 心性論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모든 차별성



과 다양성이 사라진 공적 한 진심의 체에서 일상적 세계가 역동적으로 되살아



날 수 있는 것은 진심 자체가 지니고 있는 知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이 신비를 우리에게 가장 잘 이해시켜 주는 종이 사용한 摩尼珠의 비유



를 살펴보면서 지눌의 심성론을 요약하고자 한다.



41) 안진호 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 四集合本 , 법륜사, 1973, 766쪽. 42) 안진호, 앞의 , 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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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주가 오로지 둥고 깨끗하고 맑아서 일체의 차별적 색상을 전혀 가지



고 있지 않듯이, 하나의 靈的 心性이 비고 고요하고 항시 알며 본래 아무



런 分別도 없고 일체의 선악도 없다.



그 체가 맑기 때문에 바깥의 사물들을 대할 때 일체의 차별적 색상을 나타



낼 수 있듯이, [심성의] 體가 앎(知)이기 때문에 여러 조건들을 대할 때 모



든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을 분별할 수 있으며 世間과 出世間의 온갖 종류



의 일들을 수행하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이 隨緣의 측면이다.



비록 색상 자체는 差別이 있으나 맑은 구슬은 일찍이 변한 일이 없듯이,



비록 어리석음과 지혜, 선과 악 자체는 차별이 있고 걱정과 기쁨, 미움과



사랑 자체는 생기고 사라지는 일이 있지만, 아는 마음은 일찍이 그침이 없



다. 이것이 불변하는 면이다43)



이 비유의 핵심은 마니주가 깨끗할 뿐만 아니라 맑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



내고 있다. 즉 진심의 體가 寂할 뿐만 아니라 知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왜냐



하면 바로 이 맑음의 면이 있기 때문에 구슬이 바깥 대상들과 접할 때 여러



가지 색상을 취하여 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구슬 자체가 대상에 따라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지눌은 寂과 知[구슬의 깨끗함과 맑음]의 관계를 진심의 體가 가지



고 있는 體와 用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眞心의 體안에 있는 불



변의 用[구슬의 맑음]이 진심의 변하는 用[구슬 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색상



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심의 知를 알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며, 知야말로 衆妙之門이라 할 수 있다.



43) 안진호, 앞의 , 6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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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修行論



(1) 頓悟論



지눌은 자신의 수행관을 정립하면서 깨침을 닦음에 종속시켜 漸門을 세운



澄觀의 입장과, 닦음을 깨침에 종속시켜 頓門을 세운 宗密의 입장을 두루 섭



렵한 다음, 그들의 돈과 점을 아울러 자신만의 頓悟漸修를 확립하다.



그가 이러한 돈오점수를 채택한 것은 수심의 올바른 길이 먼저 마음의 性



品을 분명히 깨치고 그 깨친 후 점차로 닦아 가는 先悟後修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을 모두 성인의 길로 보고 있



다.44)



보조의 견해대로 수행과정의 순서를 둔다면 먼저 돈오를 들 수 있다. 돈오



란 우리 마음의 實相에는 번뇌 망상이 空하여 본래 부처와 똑같은 지혜가 갖



추어져 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다. 즉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에 눈뜨는



것이며, 자기 존재의 실상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은 이러한 돈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頓悟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



기의 성품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靈知가 참 부처인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 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



44)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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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히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頓悟라 한다.45)



지눌에게 있어서 깨침이란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



다. 그것은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미혹한 범부이기 때문에 진리의 원천이



성품 가운데 있음을 모르며, 거짓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참다운 나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허망 된 생각을 마음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눌은



밖으로 향했던 마음의 빛을 안으로 돌이키면 스스로의 성품, 즉 본래 참다운



모습이 밝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눌의 頓悟論은 宗密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지눌의 頓悟論에는



종과는 다른 새로운 면들이 있다. 지눌은 구도기에 수 차례 깨침의 체험을



한 일이 있다. 그 가운데서 지눌의 돈오관에 커다란 향을 준 것은『華嚴



經』과 이통현의『華嚴論』을 읽다가 얻는 깨침의 경험과 『大慧語錄』을 통



해 얻은 깨침의 경험이었다. 전자는 지눌의 華嚴的 頓悟論의 배경이 되었고



후자는 우리가 나중에 고찰할 그의 看話禪 곧 화두를 통한 깨침의 길인 敎外



別傳的 頓悟論의 배경이 되었다. 양자 모두 종에게는 찾아볼 수가 없는 사



상이다.



지눌은 자신이 禪師임에도 불구하고 頓悟가 결코 禪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



달았다. 宗密이 禪과 敎의 일치를 이론적 혹은 사상적 차원에서 보여주고자



했다면, 지눌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화엄적 돈오의 체험을 통해 선교일



치를 몸소 확인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두 저술,『華嚴經節



要』와『圓頓成佛論』에서 화엄적으로 돈오의 길을 천명하고자 했다. 이것이



곧 그가 제시한 圓頓信解門인 것이다. 이를 통해 지눌은 頓悟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고 顯敎化시킬 뿐 아니라, 禪의 관점에서 華嚴을 해석함으로써 - 혹



45)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4쪽. 頓悟者 凡夫未時 ‥‥ 分毫不殊 故 云頓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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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華嚴의 관점에서 禪을 해석함으로써- 敎를 禪안으로 끌어안았다. 이것은



고려 불교계의 골칫거리던 禪敎의 갈등에 대한 그의 해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눌의 돈오, 즉 見成에 대한 이론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눌에 의하면 悟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解悟이



고 다른 하나는 證悟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것은 解悟로써, 如實言敎에



따라 반조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의 체험이다.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할 점은, 解悟라 해도 결코 그것이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것은 이해의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이해이며 오직



내적 자기성찰의 행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깨침의 체험이기 때문이다.46)



(2) 漸修論



깨침이 아는 것이라면 닦음은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가는 닦음의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지눌에 의하면 깨친 즉시 행동이 일치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



로 깨친 후에도 수행이 필요한데 이것이 漸修이다. 지눌은 자신의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점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漸修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



혀온 習氣를 모두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



차로 익히어 공이 이루어지고 오래 오래 소질을 길러서 성인이 되기 때문



에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충실하지 못하므로 상당한



46) 길희성, 앞의 ,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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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47)



이와 같이 지눌은 성품을 깨친 사람을 바로 성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의한다면 깨친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며, 그



자질은 점수의 과정을 거칠 때 완전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



눌은 깨친 후 닦음의 과정을 소를 먹이는 행위로 비유하고 있다.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진심이 앞에 나타났을 때에 아직 습기를 버리지



못하고 전에 익히던 妄의 경지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을 잃을 수가 있다.



마치 소를 먹일 때 그것을 잘 다루어 이끄는 대로 따르게 되었더라도 그래



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고, 마음이 부드럽고 걸음이 평온하여 곡식 밭에



몰고 들어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손을 놓



는 것과 같다.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목동의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더라



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48)



이와 같은 지눌의 견해로 본다면 한 번 깨침으로 모든 일을 다 마쳤다고



닦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눌은 리한 무리들이 별



로 힘들이지 않고 깨쳐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닦지 않는 것을 크게 경계하다.



지눌은 점수의 필요성에 대해 바람의 비유를 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



눌의 견해에 따른다면 바람이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이고, 이치는 나타났



47)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4쪽. 漸修者 雖悟本性 ‥‥ 故云漸修也. 48) 지눌, 진심직설 , 보조전서 , 64쪽. 學道之人 已得眞心現前時 ‥‥ 自然無傷苗 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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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망념은 아직 침노할 수 있다는 것이다.49)



이 견해는 출이는 물결을 재우고 망념을 대처하는 공들임은 다름 아닌



점수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망념을 지혜로 살필 때 완전한 결지로 나아갈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깨달은 후에 필요한 닦음인 것이다.



왜 지눌이 修後의 悟가 아니라 悟後의 修를 주장하는가? 지눌에 의하면



悟없는 修는 뿌리를 제거하지 않은 채 돌로 뿌리를 누르는 행위와 같다고 보



고 있다. 누르면 누를수록 맹렬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눌은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이 空함을 모르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몸과 마음을 억제하면서 이것이 마음 닦는 것이라 한다. 이는



크게 미혹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聲聞은 마음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되 끊으려는 마음 자체가 적이 된다”고 했다. 단지 살인, 절도, 간



음, 거짓말이 性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觀하면, 일어남이 곧 일



어남이 아니라, 그 순간에 단박 고요해지니, 어찌 다시 그것들을 끊을 필요



가 있겠는가? 고로 이르기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딜까 두려워하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만일 생각이 일어



나면 곧 깨닫고, 깨달으면 곧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50)



따라서 頓悟의 세례를 받지 않은 漸修는 지눌에 의하면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억압일 뿐이고, 처음부터 진 싸움이나 다름없다. 修에



대한 이러한 억압적 관점은 北宗뿐만 아니라 모든 방편적 가르침에서도 발견



49) 지눌, 수심결 , 보조전서 , 38쪽. 50) 김탄허, 앞의 , 5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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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지눌은 禪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런 형태의 修를 따르지 말고, 닦음이



없는 닦음, 번뇌를 끊음이 없되 끊는 진정한 修를 하라고 촉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가르침 중에서 法의 相에 관련된 방편적 가르침에



집착하여 스스로 비굴한 마음을 내어 수고로이 점진적 수행을 닦아 性宗을



어긴다. 그들은 여래가 말세의 중생을 위해 비을 여는 비결을 열어 놓으



신 것을 믿지 않고, 종전에 들었던 바를 고집하여 황금을 버리고 삼을 지



고 간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매우 빈번히 만났다. 비록 그들에게 설



명을 해 주어도 끝내 그들은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단지 의심과 비방



을 더할 뿐이다. 어떻게 그들이, 心性은 원래 깨끗하고 번뇌는 원래 空한



것임을 모름지기 먼저 믿고 이해하되 그러한 이해에 의거하여 薰修함을 방



해받지 않는 사람들과 같을 소냐? 외적으로는 [이 후자의 사람들은] 戒律



과 儀禮를 지키되 구속과 집착이 없으며, 내적으로는 고요한 생각[禪, 禪那]



을 닦되 억누르지 않는다. 가히 악을 끊되 끊음이 없는 끊음이요, 선을 닦



되 닦음이 없는 닦음이기에 참다운 닦음이요 끊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다.51)



우리는 頓悟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진정한 修를 역설적 修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번뇌가 본래 공하고 중생이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다는 통찰



에 근거한 닦음이기에 쉽고 가벼운 修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돈오가 반드시



漸修에 선행해야 하는 이유이고, 이것이 漸修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頓悟



이전의 수행, 즉 억압과 수고로움의 수행으로 다시 회귀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 점에 대해 지눌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51) 김탄허, 같은 책,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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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록 後修가 있다 해도, 이미 먼저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대번에 깨달았기 때문에 악을 끊음에 있어서 끊되 끊음이 없고 선을



닦음에 있어서 닦되 닦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참된 닦음이요 참된 끊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만 가지 행을 갖추어 닦는다 해도 오직 아무런 생각



이 없음(無念)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2)



이제 점수의 요점만을 말하자면 지눌은 定과 慧 혹은 性과 寂, 止와 觀의



균형 있는 닦음을 주장한다. 이른바 定慧雙修, 惺寂等持門이다. 그러나 이 닦



음이 어디까지나 오후의 수이기 때문에 지눌은 수행에서 自性定慧와 隨相定慧



를 구별한다. 수상정혜의 定은 수행자가 그때그때 직면하는 상과 사로서의 번



뇌에 꾸준히 대처해 나가는 삼매이며 慧는 제법 하나 하나에 대하여 미혹됨이



없이 그 공을 관하는 반야를 말한다. 지눌에 의하면 이런 수상정혜의 수는 북



종이나 기타 방편적 가르침들에서 행하는 수의 길로서 결코 최상승선이 아니



다. 반면에 자성정혜란 자신의 본성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정과 혜를 의미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진심의 체가 지니는 두 측면인 寂과 知,



定과 慧를 가리킨다. 따라서 자성정혜를 닦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심성 속



에 내재해 있는 것을 닦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곧 修 아닌 修인 것이다. 이



런 역설적 닦음이야말로 진정한 修, 無念修이다. 자성정혜란 따라서 일반적 의



미의 닦음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라기 보다는 돈오에 의해 이미 자신의 현실로



서 자각되는 定慧이다. 여기서는 누구도 정과 혜를 이루기 위해 어떤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정과 혜는 이미 우리의 심성 속에 내재하고 있기에



다만 자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성정혜의 수에서는 정신집중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인 결가부좌나 호흡조절 그리고 정신적 혼침을 막기 위해



성성함을 유지하려는 노력 등 모든 것이 필요 없다. 그리고 자성정혜의 수에



서는 정과 혜 사이에 수행 순서상의 구별도 무의미하다. 진심의 체의 양면으



52) 김탄허, 같은 책,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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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정과 혜는 불가분적 통일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며, 하나를 위해 다른 하



나를 닦아야 할 필요도 없으며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자성정혜의 수에서는



또한 닦음의 주체와 대상의 구별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寂과 知는 수의 대상



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53)



(3) 看話論



지눌이 간화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바로 大慧의 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지리산의 상무주암에 거주하면서 내관과 함께 대혜의 어록을



읽었는데 대혜가 끊임없이 재가신자들에게 일상생활 본연의 업무 가운데서 간



화 수행을 권하고 있는 점에서 크게 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눌의 간화선은 대혜의 향을 받았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



고 있다. 즉 간화선을 수용하고 있으면서 돈오점수의 길을 포기하거나 무시하



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지눌에 있어서 하나의 특색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각각의 근기에 따른 여러 가지 방편을 인정한다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수승한 경계로서 간화참구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4)



강 저편 언덕에 다다른 수행자는 타고 간 뗏목을 지체 없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지눌에 따르면 바로 이 버림이 뗏목을 타는 일 못지 않게 어렵고 때로



는 그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 버림을 위해서 별도



의 특별한 방법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곧 話頭 공부, 즉 看話禪이다. 그 뿐



아니라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 이른바 過量之機의 소유자들은 여실



53) 길희성, 앞의 , 104쪽 54) 지눌, 법집별행록병입사기 , 보조전서 ,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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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교에 의존하지 않고서 처음부터 바로 眞心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것이 곧 徑截門으로서, 지름길로 진리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이것이 간화선이



다.



간화선은 처음부터 아예 말을 듣고 의미를 이해하는 일없이 곧바로 증입할



수 있는 파격적인 길이다. 곧 徑截門으로 바로 꺾어 들어가는 참구의 길이다.



이것은 돈오점수 혹은 先悟後修라는 도식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證悟의 길이며, 여기에는 인식과 실천 사이의 간극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눌에 있어서 이 새로운 깨침은 점수상의 막연한 어떤 지



점이 아니라 점수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어떤 계기를 이룬다. 解悟가 하나의



뚜렷한 체험이듯이 화두 참구를 통한 證悟 역시 하나의 독자적인 체험의 계기



를 형성하는 것이다. 지눌의 看話決疑論은 바로 이러한 화두 참구를 통한 선



만이 아는 頓門에 대한 논의이다. 거기서 지눌은 화두선의 특성, 그 수행 방



법, 그리고 그것을 통한 깨침이 교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지를 논하고 있다.



대혜 스님이 이렇게 주해를 붙여 화두를 주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자는 하



루 24시간, 걷거나 머물러 있거나 앉거나 눕는 모든 행동 속에서 다만 [화



두를] 붙잡고 깨달으려 할뿐이니, 심성의 도리에 관하여 離名絶相[이름을



떠나고 형상을 끊음]의 알음알이가 전혀 없고 緣起無碍[모든 것이 조건에



따라 생기는 것이기에 서로 막힘이 없다는 진리]의 알음알이 또한 없다. 불



법을 머리로 이해해서 알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열 가지 알음알



이의 병에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모두 내려놓되, 내려놓았다거나 내려놓지



않았다거나 병에 걸렸다거나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헤아림조차 없다. 홀연



히 재미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화두에서 한 번 단박 깨치면 一心의 法



界가 환히 밝아진다. 그러므로 심성에 갖추어 있던 수백 수천의 삼매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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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없는 이치의 문이 구하지 않아도 완전하게 얻어진다. 종전의 치우친 뜻



과 이치, 그리고 듣고 이해함으로 얻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종



경절문에서 화두를 참구하여 證得해 들어가는 비결이다.55)



『간화결의론』에서 길게 인용한 위의 에서 우리는 대혜 선사와 간화선



에 대한 지눌의 견해를 알 수 있다. 지눌이 대혜의 간화선을 채택하면서 우선



적으로 관심을 두었던 점은 알음알이의 병(知解病)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지눌이 경절문을 세운 것은 순전히 알음알이의 병을 제거함에 있어서 화두



가 지니는 위력을 절감한 그의 개인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통 속에서 알음알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열망이 가장 잘 표현



된 곳은 空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般若部 계통의 경전들이다. 특히 『金剛



經』같은 경전에서는 진리에 대한 언술과 더불어 생기는 진리의 대상화를 거



부하고 언표 자체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자 하는 자기 해체적 언술들이



거듭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화두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처음부터 언어의 분별적 작용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말 아닌 말이다. 지눌은



이 화두 참구야말로 모든 분별지와 알음알이의 병을 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행법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선 수행자들은 先行하는 어떤 문도 거치지 않고 바로 화두



를 붙잡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돈오점수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화두선에 들어



갈 수도 있다. 지눌은『간화결의론』에서는 전자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반면



에『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는 후자의 길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



제는 궁극적으로 각자의 역량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다. 다만 지눌 자신이 그



55) 김탄허, 앞의 , 120∼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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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구도 역정에서 따랐던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려해 볼 때, 그는 필경 전자



보다는 후자의 길을 더 권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徑截門을 선의 완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특출한 근기의 소



유자라면 돈오점수라는 예비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간화선을 시도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지눌에 의하면 최고의 수행이라 할 수 있는 무심합도도



화두라는 格外的 방법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눌에 있어서 禪行의 세 번째 문인 徑截門은 頓悟 혹은



圓頓信解門의 완성이자 漸修 혹은 惺寂等持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계에는 알음알이의 걸림돌이 제거되고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해소되며 정과



혜의 구별조차 무의미하게 되어버려 수행이라 부를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단지 無心으로 道와 일치하는 완전한 자유의 경지가 활짝 열리는 것이다.



지눌은 실로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간화선의 전통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



헌을 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어느 선사로부터 특정한 선의 법맥을 친히 전수



받은 일없이 無師獨悟한 자지만, 간화선의 확립에 있어 지눌의 공헌은 결정



적이었다. 지눌 이후 곧 간화선은 더 이상 이론적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시되었다. 이것은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를 주도한 眞覺國師 慧諶



에게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다. 흔히 지눌의 禪 사상을 논할 때 頓悟漸修論



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지눌 선의 일면만을 논하는 것이다.



看話徑截門은 그의 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길이다. 그것으로써 지눌의 선은



완성되기 때문이다.56)



2. 九山의 禪思想



56) 길희성, 앞의 , 113∼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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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想이란 오랜 생각의 所産이라 단편적인 생각이 아니라 일정한 체계는 물



론이고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九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구산이 文字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수행에 전념하



기 위해 불필요한 言說을 삼가고자 했던 의도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산은 출가후 많은 시간을 통해 확고한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부



처님의 말을 연마하는 것은 물론이고 참선을 통한 자기체험을 위해 노력하



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고 일정한 체계를 형성하여 사



상으로 발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여러 사상가의 향이



다. 구산은 자신의 생애에서 보여주듯이 時空을 초월하여 지눌로부터 향을



받아왔음을 그의 저술에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의 본성과 그 본성을 찾



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이 보여진다.



즉 심성론은 지눌과 많은 일치감을 보이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수행론에서



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특히 구산과 지눌의 돈오사상의 차이점이다. 구산이



간화선을 돈오점수보다 더 중요시하으므로 이점을 근거로 양자에 나타나는



돈오의 개념을 살펴 그 차이점을 밝힐 것이다.



단 어려운 점이 있다면 현존하는 구산의 연구가 전무한 상태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생애와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따라



서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구산에게 가장 많은 향을 주고 있는 지



눌의 사상적 체계에 대비해서 구산의 사상을 체계화 하고자 한다. 그러면 구



산의 선 사상적 특징이 돋보일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구산의 禪 사상에서는 앞서 살펴본 지눌의 선사상과 같이



심성론과 수행론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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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心性論



지눌은 인간의 마음을 眞心이라고 표현한 반면에 구산은 인간의 마음을 다



룸에 있어 眞性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구산에 의하면 진성은 다름아닌 인



간의 본래 모습이다. 따라서 진성을 깨닫는 것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진성은 인간 고유의 밑바닥에 있는 가장 깨끗한 인간의 본래 성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의 참성품을 깨달으면 그대로 佛祖가 된



것이요, 참된 나를 잃게 되면 중생이라 부르게 될 것이며, 자기의 주인공을 밝



혀내면 바로 피안에 이르는 것이요, 자기의 주인공을 모르게 되면 그대로 사



바세계라는 것이다.57)



그래서 수행자가 진성을 깨달으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나와 한몸일



뿐 아니라 산하 대지도 일시에 같이 증득하며 일체 중생도 나와 다름이 없게



되지만, 眞性에 미혹하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고



전도를 이루며 모든 고뇌가 생겨나서 생사를 스스로 부르게 되어 삼계의 윤회



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58)



구산은 깨달아야 할 대상을 진성이라 명명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알면 부처



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선과 교에서는 이를 일컫는 많은 용어들이 존재



하며 나름대로 인간의 참성품을 밝힌다. 진성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상태이고



그 상태에 인간은 묘한 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산은 지눌과 마찬



가지로 空寂靈知라 하다.



한 물건이 신령하여 묘용이 많으니



57) 구산선풍 , 28쪽. 58) 같은 책,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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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부터 생사가 없는 줄을 알겠는가



根塵을 벗어나서 전체가 드러나니



산하와 대지가 이대로 내 집일세.59)



空寂한 靈知는 범부성을 초월하니



자비 광명 비춘 곳에 道는 더욱 친해지네



南海에서 구름 일고 北山에서 눈 내리니



氷 와 玉骨을 한 바늘에 꿰었구나.60)



구산은 이러한 空寂靈知에 대해 예전이나 현재에 있어 뚜렷하고, 범부와



성인을 초월하여 밝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묘용이 毘盧遮那의 정수리를 드러



내고 四相이 푸른 하늘 밖에 멀리 떨어질 정도여서 십불이 이 가운데 언제나



자재 하다는 견해이다.61)



인간의 마음은 고요한 가운데 앎이 있다라는 커다란 전제아래 한편으로는



‘ 寂’하고 한편으로는 ‘知’한 것이다. 구산은 지눌과 같이 이 구도를 다시 ‘定’과



‘ 慧’ , ‘寂’과 ‘惺’ , 그리고 ‘體’와 ‘用’으로 구별한다.



그래서 만약 이러한 도리를 알게 되면 제각기 모든 것이 기틀이요, 사물마



다 온통 밝게 드러내게 되어 菩提와 열반도 오히려 눈 속의 티끌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일하여 이러한 공적지를 알지 못하면 생사의 괴



로운 굴레가 心身을 사로잡는 것이 마치 벌겋게 단 쇠 바퀴 위에서 누르고 밑



에서 받치면서 갈아대는 것과 같아서 그 지극한 괴로움이 끝이 없다는 것이



59) 구산선문 , 202쪽. 60) 같은 책, 425쪽. 61) 같은 책,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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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62)



구산이 위에서 말하고 있는 공적지는 사실 구산의 독자적 思考는 아니



다. 이 知라고 하는 언어는 하택신회, 종, 지눌로 이어지는 개념으로 구산이



위의 선사들의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63)



구산은 선가에서 언급하는 진리의 체를 위와 같이 靈知라고 하는 언사로



표현했다. 하택신회는 진심의 진리는 조사들에 의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오다가 드디어 ‘知’ 라고 하는 한 자로 진리를 밝혔다고 하다. 종에 따



르면 신회의 특별한 공헌은 종전의 無爲, 無相 등과 같은 부정적인 언사들을



넘어서서 심의 체를 ‘知’라는 한마디로 적극적으로 풀어냈다는 것에 있다.



즉 선의 궁극적 실재인 진심의 체를 空하고 寂 할뿐 아니라 이 空한 경지



에 동시에 어떤 스스로 밝게 아는 앎(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앎이야말로 진심의 세계를 아무 감각과 사고도 없는 무정의 세계와 구별시켜



주는 결정적인 차이라는 것이다.64)



이와 같이 구산은 진성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깨칠 것



을 주장한다. 이것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근거(佛性)로서 부처를 부처이게끔 하



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산은 자기의 참성품을 어둡게 하면 부처가 중



생이 되고 참성품을 밝히게 되면 중생이 부처를 이루게 되니, 밝고 어둠의 차



이는 있으나 성품은 둘이 없는 것이니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 경계에 빠져서



바깥을 향하여 구하게 되면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65)



구산에 의하면 이 진심을 깨닫게 되면 몸과 마음이 모두 온전하게 되니 그



때에야 만물의 장이라 부를 만하며, 생사를 해탈하여 세간이나 출세간에 걸



림 없이 자재 하게 되니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큰 스승이라,



62) 같은 책, 28쪽. 63) 구산선문 , 224∼225쪽. 64) 길희성, 지눌의 심성론 , 역사학보 제3집, 1982, 4∼6쪽. 65) 구산선풍 ,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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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운데서 하늘이요, 부처 가운데서도 참 부처라는 것이다.66)



이몸이 태어날 때 따라 난 것 아니고



이몸이 죽을 때에 따라가지 않는다.



한결같은 참성품은 끝없이 원하니



신령스런 광명이 법계에 두루하네67)



모든 사람에게는 본래부터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한 眞性이 있다. 그



러나 이 진성을 망각하고 오랫동안 육체 본위로 살아왔기 때문에 환경에 사로



잡혀 망상을 진성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가 善性이 따로 있고 惡性



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혹은 착해지기도 하고 혹은 악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햇빛 그 자체에는 본래 명암이 없으나 어느 때는 비가 오기도 하



고 구름이 끼어 어두워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밝은 햇빛이 나기도 하는 것과



같고, 또 저 푸른 하늘은 본래 변함이 없건만 기후 변화가 측량키 어려운 것



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변화무쌍한 것은 중생심



이요 기후는 변하여도 日光은 불변하듯이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저 맑은 하늘



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산은 이 세상 천지 만물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如如不動한 것이



청정법신이며, 우주가 건설되기 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도 不增不減하는 것이 곧 우리의 眞性이라 표현하고 있



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眞性은 부처님으로부터 인간과 미물 산천초목에 이르



66) 같은 책, 135쪽. 67) 같은 책,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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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까지 털끝만큼도 차별이 없이 본래 구족하여 있는 것이다.68)



구산은 이와 같은 점에 있어서 미묘한 법은 모든 선악경계의 八風에도 움



직이지 않고 뜻은 태산처럼 굳게 서며 다만 自性에 의지하여 정과 혜를 함께



닦고 공적한 지를 마음대로 쓰더라도 天眞스러워 하는 것이 없으며 動과 靜



이 언제나 禪이 되어야만 쇳덩이를 다루어서 황금으로 만들게 될 것이니 뜻이



있는 장부는 모름지기 간절하게 힘써야 할 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69)



그래서 구산은 범부가 수심하여 眞性을 깨치면 성불한다고 보고 있다. 그



렇지만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육신만을 ‘나’라 하고 心靈을 망각하여



眞我를 상실하고도 상실한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인간이라 하면서도 眞我를 모르고 사



는 것은 사이비 인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전도되어 자유 없이 속박된 노



예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아를 망각하면 잠잘 때만 夢幻이



아니라 일체의 생활이 전부 다 夢幻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몽에 의해 假我



에 집착하고 유위법에 속박되어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다.



그래서 구산은 중생들이 이러한 진성을 찾을 수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70) 왜냐하면 구산이 말하고 있는 본



래의 성품 즉 眞性은 성인이라고 해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범부라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진성은 深淺의 차별과 優劣의 차별이 없



다는 것이다.71) 그래서 참된 수행을 한다면 사람마다 본래 구족한 불성인 眞



我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72)



68)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155∼156쪽. 69) 구산선풍 , 169쪽. 70)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61∼63쪽. 71)『구산선문 , 548쪽. 72) 구산, 석사자 ,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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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修行論



여기에서는 구산이 인간의 본성을 眞性이라 표현했는데 그 진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수행론을 다루고자 한다. 구산이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



다고 하는 것은 구산의 수행론 역시 지눌의 수행론에서 많은 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지눌의 심성론을 구산이 계승하기 때



문이다.



먼저 우리가 여기서 검토할 것은 두 禪師의 사이에 나타나는 미묘한 차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간화선에 관한 두 선사의 입장 차이



이다. 지눌은 圓頓信解門, 惺寂等指門, 徑截門을 거치는 수행의 구조를 지향한



다. 따라서 그에게는 앞의 두 문과 간화선은 별도의 수행관으로 여겨도 무방



하다. 곧 간화선은 상근기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그의 저서 속에도 이러한 점



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반면 구산에 있어서는 간화선이 그의 사상을 지탱하는 축이다. 결론에 가



서 보다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여기서 한가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이 있



다. 그것은 구산의 어록 속에는 돈오점수나 정혜쌍수와 같은 사상에 간화 즉



화두가 항상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사상은 간화선이라



는 커다란 틀 안에서 모든 사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지눌과 구산



의 차이점을 결정적으로 구별짓는 중요한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이러한 양자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구산의 수행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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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要



구산은 수행의 근본으로 다음과 같은 三要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삼요



가 중생이 진성을 찾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먼저 구산은 眞性을 찾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三要가 그 근본이 됨을 말하



고 있다. 여기서 三要란 大信과 大憤心, 두 번째 大勇猛心 마지막으로 大疑心



을 말한다.



이러한 삼요는 오래 전부터 禪家에서는 공안 참구의 조건으로 거론되어 왔



으며,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 가면 범부에서 성현 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다.73)



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런 사실을 믿지 않고



온갖 罪業만 짓고 생사윤회만 익혀 성현의 세계와 열반의 경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세계와 惡道의 고해에 빠져 무량한 고통을 받고, 늙고 병들고



신음하는 중생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古人의 행적을 거울 삼아 믿고 難行苦



行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大勇猛心이다. 이는 세간에 존재하는 순간



의 즐거움을 끊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세간에 존재하는 즐거움에 대해 구



산은 財慾, 色慾, 名譽慾, 貪慾, 睡眠慾으로 나타내고 있다. 중생이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욕락을 너무 즐기게 되면 생활의 안전성을 가져올 수 도 없고 수



행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잠을 자면서만 꿈을 꾸는 것



이 아니라 눈을 뜨고서도 二重, 三重의 꿈을 꾸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면 우리 중생들이 생각하는 명예와 권력, 부모형제 怨親恩愛가 모두 一場春夢



과 같으므로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大勇猛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73) 구산, 石獅子 , 불일출판부, 1980,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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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진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大疑心을 일으켜야 한다는 견해이



다. 그것은 三世佛祖와 천하의 선지식들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간절한 마



음으로 말하셨지만 듣는 중생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고 自心을 깨닫지 못하



므로 佛祖의 誠言인 公案을 참구함에 있어 큰 의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조의 성언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와 같고



자비와 聖行을 보되 보지 못하니 눈이 있어도 눈먼 봉사와 같기 때문에 이런



악도에서 벗어나려면 眞我를 찾아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의심을 갖고 공안을



참구해야 한다는 견해이다.74)



(2) 三學



삼학은 선의 참구만이 아닌 계율과 지혜의 均修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



에 화두를 중요시 여기는 禪家의 전통에서는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렇지만 구산은 화두를 참구하는



것 못지 않게 삼학이 제대로 갖추어지기를 바랐다. 즉 구산은 간화선을 강조



하면서 동시에 戒, 定, 慧와 같은 수행도 중요시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구산은 법의 그릇을 이루는 공력이 定慧를 雙修하고 惺寂을 等持하



는 功임을 피력하면서 육근이 경계를 대하더라도 마음이 경계를 따르지 않는



것을 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空하여 밝은 거울처럼 미혹함이 없는



것을 慧라 보고 있다. 또한 법망경에서 계의 그릇이 청정하고 정의 물이 맑아



야 혜의 달이 밝게 나타남을 인용하면서 본분납자가 수행하고자 한다면 戒,



定, 慧 삼학은 솥의 세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고



74) 구산, 石獅子 , 불일출판부, 1980, 48∼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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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75)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본래부터 眞性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산은 아무리 환경이 변하여도 맑은 하늘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성현의



마음이며 원히 不增不滅 하는 것이 우리의 眞性이라는 것이다.76) 중생이 모



든 선악경계에 흔들림이 없이 뜻을 굳게 세우고 자성에 의지하여 定과 慧를



함께 닦아 진성을 깨치면 성불한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생이 눈에 보이



는 육신만을 ‘나’라 하여 眞我를 상실하고 망각하면 허수아비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77)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戒行을 지켜야 하고 계행을 지키면 禪定이 생기



며, 선정이 생기면 지혜가 생기므로 어지러운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불안한 마



음이 사라져 즐거움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대중들은 옛사람



의 금언을 거울삼아 부지런히 삼학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구산의 견해이다.78)



계, 정, 혜 三學이란 바로 그러한 목표를 위해 수행하는 바른 길이다. 그래



서 구산은 마음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戒요, 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



이 자성의 定이요,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을 자성의 慧라는 견해임을 밝



히고 있다79)



75) 구산선문 , 32쪽. 76) 구산, 석사자 , 불일출판사, 1980, 155- 156쪽. 77) 같은 책, 61- 63쪽. 78) 구산선문 , 588쪽. 79) 같은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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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看話論



구산의 선사상 저변에는 항상 간화선이 깔려 있다. 그것은 수행의 완성을



간화론을 통한 깨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화선에 대한 흐름은 지



눌이후 한국 선종에서 볼 수 있는 전반적인 경향으로 지눌의 제자인 혜심과



고려말의 보우,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산과 그 법통을 계승한 인물들에



서 나타나는 전통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80)



구산은 먼저 화두를 들 때의 방법과 자세에 대해 도 있게 설명하고 있



다. 구산의 견해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선정을 닦아 眞性을 발견하고 범



부를 고쳐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공안을 결택하여 간절하게 참구해 나



가되 사량 분별로써 이리저리 헤아리지 말고 머리 위에 불을 끄듯이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81)



그리고 화두를 결택하여 공부를 지어갈 때에 바깥경계는 寂寂하고 안의



경계는 惺惺하게 하여 간절히 추구해 가되 급하거나 느슨하지 않게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이 하면서 간절히 참구해 나갈 것을 당부하면서 화두에 집중할 때



는 연속적인 자세가 필요하므로 망상이 생기더라도 화두를 놓아버리지 말고



뜻은 태산처럼 굳게 세우고 마음을 바다와 같이 하여 부지런히 할 것을 당부



하고 있다.82)



구산이 화두에 집중할 때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은 선 수행에



있어 본참공안을 성성하게 의심하거나 혼침과 망상이 일어나게 되면 眞性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시



적인 집중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괴롭게 생각하거나 생각과 생각을 서



80) Hee Sung Keel, ibid. pp. 167∼175. 81) 구산선풍 , 32쪽. 82) 같은 책,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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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번뇌는 저절로 사라지고 의심 덩어리는 뚜렷이 드러



내어 마음이 깨끗하기가 차가운 눈과 서리 같이 되고 눈빛은 새벽별처럼 초롱



초롱하게 되어 점차 좋은 경지에 들어가서 마침내 크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이 구산의 생각이다.83)



그래서 예전부터 참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다만 화두를 들 때 혼침과 망



상이 화두와 서로 다투게 되면 오히려 끊임없이 이어가며 화두를 들어 망상을



물리치는 자세를 견지 하여하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혼침과 망상이 공부에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 생각이 도리어 혼침과 망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일이 됨을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84)



이런 상태에서 구산은 망상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자세를 지니



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방법은 과거사는 이미 지나갔으니 잊어버리고, 미래사



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생각을 안 하면 마음은 자연히 앞과 뒤가 끊어지고 망



상이 공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더욱 성성하게 화두를 참구한다면 진



실하고 간절하게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85) 그러다 보면 시절인연에



이르게 되고 ‘할’하는 한 소리에 홀연히 칠통을 타파하고 佛祖를 붙잡게 되어



참으로 쾌활하고 쾌할 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86)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간화선에 있어 수행자들은 선문 조사의 화두나



공안에 대하여 의심하도록 지시 받는다. 한편 간화선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체



험에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계·정·혜와 같은 점진적 수행 덕목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념적 사유의 과정에



서 자유롭게 되어 수행자는 본래부터 깨친 상태로 있는 그의 마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자신의 깨달음을 저절로 실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



83) 같은 책, 32쪽. 84) 같은 책, 49쪽. 85) 같은 책, 93쪽. 86) 같은 책,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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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전부터 간화선에 정통한 선사들은 닦음은 깨달음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87)



구산은 수행시 부딪히는 번뇌 망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부연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간화선의 수행은 번뇌 망상을 버리고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번뇌 망상에 즉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



구하는 데 그 요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산은 그러한 번뇌에 대해 원래



空한 것이라 하며, 보리는 길고 짧다는 생각마저도 끊어져 변함없는 이름인



金剛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88) 이제는 無心을 최고 수행 단계로 보아 그에 대



해 살펴보고자 한다. 지눌에 따르면 자성정혜는 여전히 의미 작용의 자취를



완전히 털어 버리지를 못한다. 그러나 무심합도의 경지에서는 구태여 어떤



수행의 방법을 논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높은 수행의 형태



이지만 결국은 아무런 수행도 아닌 오히려 자유로운 삶 그 자체를 말한 것이



다. 이 무심합도문의 사상은 구산에게서도 같은 맥락으로 발견된다.



봄바람이 평등하여 온갖 꽃을 피우지만



흰구름은 흩어져서 오고감을 싫어하네



오고감이 분명함이 어느 곳에 돌아가나.



흔들리는 바람가지 달빛 어린 물이로다89).



구산은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공적하게 관하고 오직 한 마음만 있어서 외



로이 드러내어 홀로 서고 진심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걸리지 않음을 강조하고



87) 길희성, 앞의 , 115- 117쪽. 88) 구산선문 , 559쪽. 89) 같은 책, 22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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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90) 그러면서도 구산은 그의 선사상에서 無念과 無心에 관한 이론을 전개



하면서 일체의 망상을 털어버린 후의 가장 자유롭고 높은 수행의 단계임을 보



여주고 있다.



모든 생각 돌이켜 無念으로 돌아가면



툭 터지는 한 소리에 만상을 거두리라



한 조각 녹음 속에 원한 여름이요



밝은 달빛 가득하니 온 누리가 가을이네.91)



모든 인연 쉬고서 無念이 되면



한 법에 일체 지혜 두루 갖추고



백천 가지 삼매를 모두 닦으니



천만갈래 함께 모여 한맛 이루네92)



무심합도문의 경지에서는 구태여 어떤 수행의 방법을 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수행이지만 결국은 아무런 수행도 아닌, 오히려 자



연스러운 삶 그 자체라 할만한 것이다. 결국 道와 합한다는 최고의 수행방법



은 수행을 넘어선 자유로운 삶이다. 오히려 화두를 넘어서는 경지로 무심으로



참 자아와 하나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93) 이와 같은



이유로 간화선은 깨달음에의 경절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94)



90) 같은 책, 467쪽. 91) 같은 책, 118쪽. 92) 같은 책, 412쪽. 93) 길희성, 앞의 , 116쪽. 94) 김호성, 간화선에 대한 양자 택일적 관점과 돈오점수와의 관련성 , 보조사상 , 4집, 451-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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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은 화두로 들어가 바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따라서 화두의



참구는 깨달음을 얻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화



두에 관해서 구산은 상세하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공안을 참구하여 깨닫기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산은 화두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성스런 마음을 더하여 뜻은 태산과 같이



세우고 믿음과 원행을 철두철미 하여 본참공안에 대해 생명처럼 여기어 간절



하고 간절하게 참구해야만 조금이라도 나아갈 分이 있게 될 것으로 보고 있



다. 그래야만 禪定을 익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점점 좋은 경지를 얻게



된다고 하다.95)



그래서 진실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본참공안을 간절하게 참구 하여야만



점점 깨끗한 경지에 들어가 不二法에 계합하게 되며, 이렇게 된다면 다시 공



력을 들여 의심을 흐릿하게 하지 말고 성성하고 적적함을 같이 지녀서 한덩어



리를 이루게 되면 즉 이것이 잠잘 것과 먹을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때라는 것



이다. 그래서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잊지 말고 머리 위에 불을 끄듯이 하면



홀연히 대쪽 맞듯 맷돌 맞듯 칠통을 타파하여 불조를 잡아 거꾸러뜨리고 부처



나 조사들이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을 곳을 잡아내게 된다는 것이다.96)



(4) 頓悟漸修



구산은 돈오점수에 있어서는 지눌과 큰 이견을 내지 않고 전통적으로 내려



오는 돈오점수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구산은 돈오점수보다 간화선에 비중을 많이 두었기에 간화선에서



95) 구산선풍 , 23쪽. 96) 구산선문 ,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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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그의 頓悟觀을 지눌의 돈오점수의 頓悟觀과 간략히 비교하여 돈오의



의미를 검토한 후 구산의 돈오점수를 언급하겠다.



지눌에게 있어 돈오의 의미는 일차적인 깨달음, 돈오(解悟)가 있어야만 점



수가 가능하다고 하다. 그렇지 않고 돈오의 세례를 받지 않은 점수는 단순



한 억압일 뿐이라고 하다.97) 따라서 지눌에게 있어서 궁극적 깨침에 이르기



위해서는 점수 이전에 돈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구산이 강조한 간화선의 경우는 先頓悟가 없이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가능하다. 즉 근기에 상관없이 바로 간화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구산



은 말한다. 따라서 간화선에 있어서 돈오는 수행의 전제조건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산과 지눌이 지니는 돈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눌에



게는 수행에 돈오가 전제조건이기에 돈오점수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반면



구산의 간화선에 있어서 돈오는 일정기간 동안의 점수 끝에 궁극적으로 얻는



깨우침인 것이다. 따라서 양자간의 돈오의 의미는 이와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간화선에서는 닦음은 깨달음과 동시에 이루



어지는 것이다.98) 따라서 이때의 돈오의 의미는 닦음보다 앞선 지눌의 돈오의



개념과 일치점을 보인다. 즉 돈오아래 점수를 해야 하는 지눌의 돈오점수이론



과 돈오와 동시에 깨닫는 순간의 닦음은 돈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양쪽



다 돈오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이론은 이와 같은 일치점도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산의 간화선과 지눌의 돈오점수론에 나타난 돈오의 의미를 간



략히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구산이 계승한 돈오점수 이론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산의 돈오점수는 지눌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97) 길희성, 앞의 , 101쪽. 98) 길희성, 앞의, 115-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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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하고 있다.



구산은 먼저 수행적 자세에 대해 당부하고 있다. 그는 비록 중생이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으니, 바람이 고요해도 물결은 아직 솟구치듯 이치가 드



러나도 생각은 오히려 침입한다고 하으며, 또 이르기를 한 가리움이 눈에



있으면 헛꽃이 떨어진다고 하으니 법을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이다.99)



그런 자세로 깨달음을 추구해 가면 깨달음이란 찰나에 있는 것이요, 수행



함은 만겁에 있는 것이니, 모든 집착은 녹아버리고 온갖 의혹을 부수어서 선



입견이나 잘못된 주견을 흩어버리고 법을 간택하여 관조하되 크게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고 머리 위에 불을 끄듯이 하고 닭이 알을 품듯이 하여 오래오래 계



속 하다보면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100) 이러한 구산의 돈



오점수론은 지눌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돈오 후에도 습기가 남아있



기 때문에 계속 수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돈오점수의 사상이기 때문



이다.



돈오란 단박에 깨치는 것이다. 즉 돈오란 공적지한 마음에 대한 눈뜸이



다. 그 자리는 본래 일체의 번뇌 망상이 없는 여여한 부처의 자리이다. ‘마음



이 부처’ 라는 말은 이 때에 비로소 확인된다. 그러면 무엇을 깨치고 닦는다는



것인가. 다음의 게송에서 구산은 그 답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생각에 빛을 돌려 자성을 보게 되면



한량없이 묘한 지혜 걸림 없이 쓰게 되네



원래부터 번뇌 없고 애욕강물 맑았으니



달빛아래 태연하게 젓대를 희롱하네.101)



99) 같은 책, 47쪽. 100) 구산선풍 ,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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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깨침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깨침이 아니다. 종교적 체험은



결코 다른 어떤 체험으로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며 선 불



교에서의 깨침 또한 마찬가지이다.102) 논의하고자 하는 ‘깨침’이란 것은 엄



한 의미에서 가르쳐 줄 수 없고 깨닫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깨침의



내용을 규명하고자 함은 그 비합리적 요소를 무시하여 합리화하자는 뜻이 아



니며 비합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남기자는 것이다.103) 그렇다면 돈오



는 자신의 참자아(眞我), 즉 허망한 꿈과 같은 미혹으로 인해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참마음을 홀연히 발견하게 됨을 의미한다104).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은 그 내용을 보다 간결하게 표현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등불 밝혀 장님이 눈뜸이여



천 년간 어둡던 방 한순간에 밝아지네



마음 쉬고 망상 없앰 이 또한 아니라



광대한 자비로서 중생을 위함이네.105)



佛祖께서 법을 설하시는 것은 병을 따라 약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병이 없다면 약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自性을 어둡게 하는 것은 오직



망상이며, 이 망상에 의해 좋고 궂은 경계에 근본을 버리고 枝末을 쫑으면서



흐름 따라 망령되이 행동하게 되니 이것을 마음의 병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



101) 구산선문 , 384쪽. 102) 이동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동시적 고찰 , 각 , 민족사, 1994 306쪽. 103) 구산선풍 , 307쪽. 104) 길희성, 같은 책, 90쪽. 105) 구산선풍 ,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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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는 지음이 없는 대도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일체 모든 경계를 단번



에 놓아버리고 마음이 벽을 대하듯 해야만 한다는 것이 구산의 頓悟觀이



다.106)



구산은 돈오 이후에도 습기가 남아 있으니 계속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



다. 이것은 돈오점수의 가장 기본으로서 지눌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



다.



구산이 이러한 점수를 주장하는 것은 등불이 비록 밝기는 하지만 햇빛으로



견줄 수가 없고 햇빛이 밝다해도 자신의 광명과는 비교할 수 없고, 지금 만일



닦지 않으면 악도에 떨어져서 온갖 괴로움이 몸을 얽어매고 벗어날 기약이 없



게 되어 괴롭고 괴로울 뿐이며 고난만 가득하리니 닦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다.107)



구산의 이러한 점수론은 중생의 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근기에 맞



춘 수행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산은 중생의 근기를 셋으



로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上根大智는 일언지하에 생사를 단박 뛰어 넘을 수



있지만 중근기나 하근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생사를 돌보지 않



고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되도록 모든 힘을 다해 정진하여 겨우 화두가



조금 익어졌다가도 정진의 기간이 지난 후 할 일없이 분주하게 남북으로 왔다



갔다하면서 本分事를 방일하게 되고 이때 옛 부터 익혀온 번뇌의 가림이 돌로



풀을 누른 듯이 다시 되살아나서 도를 장애하게 되는 것이 말로 다할 수가 없



다는 것이다.108)



그것은 頓悟하면 비록 부처와 같이 되나 이미 여러 생에 익힌 버릇이 깊어



서 바람이 고요해도 물결은 아직 솟구치듯 이치가 드러나도 생각은 오히려 침



106) 구산선문 , 511쪽. 107) 구산선풍 , 154쪽. 108) 구산선문 , 406∼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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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는 것처럼 법을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서 옛 사람도 참되게 수행하는 자는 갈수록 어렵다고 한 것을 들어 자기 마음



을 밝히지 못한 자는 수행한 자취를 여의지 말고 큰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아



간절하고 부지런히 힘쓸 것을 강조하면서109), 깨달은 뒤에도 선지식을 찾아



탁마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110)



(5) 定慧雙修



구산은 지눌이 언급한 바와 같이 定과 慧를 반드시 함께 닦을 것을 강조했



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과 해석은 구산이 직접 그의 어록에서 언급하고 있



다. 이러한 점이 보조와 구산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지눌이 언급



한 성적등지란 정혜쌍수의 다른 이름으로 이것은 결사문에 보이듯이 정과 혜



를 겸수하자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구산은 정혜쌍수를 설명하면서 보조의 견해를 많이 따르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바깥 경계는 적적하게 되어 가는 먼지



하나라도 묻을 수가 없게 된 것을 定이라 하고, 마음 경계가 성성하여 화두가



어둡지 않은 것을 慧라고 보고 있다. 구산은 이러한 자신의 견해에 대해 지눌



이 성성함과 적적함을 같이 지녀 성적등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라고 한



점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11)



더 나아가 六根이 경계를 거두어서 마음이 攀緣을 따르지 않는 것을 정이



109) 같은 책, 47쪽. 110) 구산, 석사자 , 68쪽. 111) 구산선풍 ,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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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하여 밝게 비추어 미혹함이 없는 것을 혜라고



하면서 이것이 비록 相을 닦아 들어가는 정, 혜 이지만 점점 닦아 들어가는



수행이라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112) 구산은 이러한 의미를 다음과 같은 게



송으로 나타내고 있다.



정과 혜를 같이 닦아 헛된 꿈을 깨고 보니



한밤중에 밝은 해가 시방세계 비추도다.



털끝 속에 바다 품고 모래알에 천지 안아



무수 가지 끝에 꽃은 절로 붉었구나.113)



이와 같이 살펴본바 惺惺寂寂과 定慧雙修가 그의 사상의 골격을 이루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성적적은 지눌의 惺寂等持門과 유사한 의미로 寂은



定에 해당하고 惺은 慧에 해당되며, 寂寂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리고 뒤에



惺惺으로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114)



그러나 특이한 점은 구산은 지눌과는 달리 성적등지를 화두참구의 일환으



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구산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통 좌선한다는 것에 대



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坐라는 것은 바깥경계가 적적하고 안의 경계가



성성하여 화두가 이곳에 견고하게 머물러서 끊어지지 않고 역력한 상태를 말



하고 있으며, 선이란 것은 안의 경계가 성성하고 바깥경계가 적적하여 의심



덩어리가 홀로 드러나서 흩어지지 않고 간절하게 참구하는 것을 선이라 말하



고 있는 것이다.115) 이는 성성함과 적적함을 함께 지니고 정과 혜를 함께 닦



112) 같은 책, 162∼163쪽. 113) 구산선문 , 426쪽. 114) 같은 책,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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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함을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어느 누가 무생법(無生法)을 깨닫고자 한다면



성성적적(惺惺寂寂) 함께 지녀 정(定)과 혜(慧)를 밝히어라



털끝이 바다 삼켜 광명을 통달하니



무수(無影樹) 가지마다 꽃향기가 절로 나네.116)



공부를 지을 때에 그저 空한 定만 지키지 말고 惺惺함과 寂寂함을 지녀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거니와 망상이 성



성한 것은 잘못이며,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은 옳지만 적적한 가운데 혼침에



빠지는 것은 잘못된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깥의 경계는 적적하고 안으



로는 화두가 성성하여 적적함과 성성함을 가지런히 지니고 선정과 지혜를 함



께 닦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은 있고 지혜가 없으면 무명만 더



욱 늘어나고 지혜는 있으나 선정이 없으면 삿된 견해만 늘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7) 그러한 점을 구산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성성적적 함께 지녀 정과 혜를 밝히니



티끌세계 국토마다 큰 기틀을 드러내네



두 쪽 견해 내지 않고 평등하게 행동하면



115) 같은 책, 556쪽. 116) 구산선풍 , 47쪽. 117) 같은 책,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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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마저 모두 건져 극락세계 이루리라.118)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산의 선사상에는 성성적적과 정혜쌍수적 사상



을 확연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구산사상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수행자들이 위없는 菩提道를 이루고자 한다면 惺惺과 寂寂함을 함께 지녀 定



과 慧를 밝히기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119)



Ⅴ 結 論



지금까지 지눌과 구산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선사의 생애



에 있어서는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는 두 선사



118) 구산선문 , 557쪽. 119) 구산선풍 , 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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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애와 활동에 있어 교단의 상황이 혼미한 때 교단의 쇄신에 전념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두 선사의 생존연대가 대략 칠백 여년이 넘는



차이는 있지만 교단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은 동질의 것이라고 보



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러한 종단의 부흥을 禪風의 振作으로 이끌어 간 점



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사상적인 면을 살펴본다면 구산은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여



러 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心性에 대한 견해(心性論)와 이를 찾



기 위한 수행의 방법에서 지눌과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지눌의 眞心이라



는 개념이 구산의 眞性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져 인간의 참성품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어 인간의 본래 순수한 마음을 찾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적



지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寂과 知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이 공적지는



인간을 가장 순수한 불성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역사적으



로 계승되는 지눌의 선사상과 일치하는 점이다.



수행론에 있어서 두 선사의 공통되는 면을 살펴보면 그들 모두 看話禪을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단 지눌은 最上根機에만 화두를 들라고 한 반면 구산은



간화선을 보다 더 대중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눌에 있어 간화선이



禪의 최종 단계라면 구산에 있어서는 간화선이 禪의 모든 것이라는 견해를 보



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눌의 선사상과 구산의 선사상을 구별



짓는 결정적인 내용인 한편 지눌과 구산이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단서이



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눌은 원돈신해문, 성적등지문이라는 수행을 지나 간화론을 세



워 화두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알음알이의 병을 제거할 수 있는 강한 수행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세 번 째 문인 경절문은 돈오, 혹은 원돈신해문의



완성이자 점수 혹은 성적등지문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구산의 수행론은 간화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사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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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을 간화선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는 수행의 바탕이 온통 간화



선이다. 단 여기서 주의할 것은 구산이 주장하는 간화선에는 항상 점수의 이



론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구산과 지눌은 차이점을 보인다.



구산은 근기의 상하에 관계없이 모든 수행자에게 간화선을 제시하면서 정과



혜를 닦는 것도 간화선과 함께 수행해야 하며 공안을 참구함에 점수적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을 제외한 수행론에 있어서도 두 선사간의 견해에는 몇 가지 공통되



는 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지눌은 先頓悟 後漸修를 주장하며 전통적인 頓悟



漸修說을 주장한다. 구산도 이러한 지눌의 수행관을 계승하여 돈오점수를 주



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눌이 주장하는 돈오점수는 解悟와 證悟



를 구분하여 먼저 돈오한 후 점수를 계속 닦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음



이 특징인데, 돈오점수론에 있어 구산도 頓悟를 시작으로 하여 계속 漸修해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교로써 심성론과 수행론에 나타난 두 선사의 특징들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처음부터 구산의 생애와 법어집에서 지눌의 저서가 자주 인용되



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모습이 두드러져 많이 답습



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두 선사를 비교했는데, 지눌의 禪思想은 변형된 형태



이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가 창건한 송광사의 방장 九山에게 면



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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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불교평론





조선불교유신론의 소회(塑繪)1)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특집] 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16호] 2003년 09월 10일 (수)서재영  buruna@buruna.org
1. 머리말

조선조에 의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통폐합되어 다양한 종파적 특성들이 혼재되어 오던 한국불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퇴를 거듭한 끝에 구한말에 이르면 은둔적 승가와 기층민중들의 기복 신앙이라는 형태로 변모해 간다.1) 소회(塑繪)란 입체적 형태를 가진 소상(塑像)과 회화(繪畵)를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만해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회는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상과 탱화를 비롯해 각종 조각이나 그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정화(淨化)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그 모습을 일신해 오늘날 조계종이라는 선종(禪宗)으로 다시 자리 매김하면서 종단의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근래로 오면서 수행승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선법이 융성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2)2) 1976년과 1982년에 집계된 ‘전국선원현황’에 따르면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하는 수행승은 950여 명이었다. 그러나 1999년에 집계된 통계를 보면 무려 1,640명으로 대폭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찬, 〈선원의 운영 현황과 문제점〉, 《禪院總覽》(서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0), p.99.

따라서 근대 한국불교사는 조계(曹溪) 선종의 정체성을 회복해 가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구한말은 한국불교가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런 계기를 가져 온 것은 개항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적 흐름과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와 서구 신문물의 전래였다.3) 3) 김경집, 《한국근대불교사》(서울: 경서원, 2000), p.19.


오랜 침체를 거듭해 온 불교계로서는 당시의 급격한 사회적 변화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불교가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나타났고 그와 함께 각종 개혁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4)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바로 이 같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4) 권상로는 1913년 간행한 〈朝鮮佛敎革新論〉에서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개량(改良)’, ‘발달(發達)’, ‘확장(擴張)’, ‘유신(維新)’이라는 기치를 내건 각종 개혁론이 활발하다고 기술하고 있다.(權相老,<朝鮮佛敎革新論>,<退耕堂全書8冊>,P51)

이렇게 근대 한국불교사를 불교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선종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조선불교유신론》의 개혁론은 현재적 의미로 되살아난다. 달리 말해 《조선불교유신론》은 과거 어느 시점의 개혁론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과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한국불교에서 여전히 유효한 개혁론이며, 한국 선(禪)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고민해 보아야 할 여러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기초로 만해가 주창한 소회(塑繪) 폐지론이 선종에서 말하는 믿음의 문제와 어떤 논리적 당위성을 갖는지, 또 한국 선종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문제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회 폐지론을 주창할 당시의 신행 양상을 살펴보고 소회 폐지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믿음에 대한 선종의 입장을 통해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구한말 불교계의 신행(信行) 양상

1) 은둔적 승가와 기복적 대중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함께 개항이 단행되면서 한반도에는 서구 사조와 외래 종교를 비롯해 소위 신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반도는 격동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한 불교계의 상황은 오랜 탄압과 침체로 피폐해져 있었고, 종단과 승려 등 제반 여건은 국가로부터 용인되지 못한 상태였다.5)5)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조계종사(曹溪宗史): 근현대편》(서울: 조계종 출판사, 2001), p.21.

사찰은 경제적으로 곤궁했으며, 승려들은 하천한 신분으로 천대받아 도성출입마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는 사회의 주류층과 접촉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었다.6)6) 바로 이 시기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영토분할이라는 국제적 질서와 궤를 같이하면서 한반도 곳곳에 성당과 교회를 설립하고 점차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승려들은 자연히 깊은 산중에 은거하면서 선(禪)과 교(敎)의 겸수를 통해 어렵게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무종산승(無宗山僧) 불교시대를 보내고 있었다.7) 이처럼 지배층으로부터 멀어지고 국가로부터 공인받지 못한 불교계의 상황은 자연히 승려들의 자질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해는 당시 출가하는 승려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7) 김영태, 〈근대불교의 종통 종맥〉, 《한국근대종교사상사》(이리: 원광대 출판국, 1984), p.186.

빈천에 시달리지 않으면 미신에 혹한 무리들이어서, 게으른데다가 어리석고 나약해서 흩어진 정신을 집중할 줄 몰라서 처음부터 불교의 진상(眞相)이 무엇인지 깜깜한 형편이다.8)8) 한용운, 이원섭 역, 《조선불교유신론》(서울: 운주사, 1992), p.70.

인용문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가장 하등한 사람들만을 모아놓은 집단이 불교계라는 것이 당시 승려의 자질에 대한 만해의 평가다. 출가자의 자질에 대한 탄식은 만해뿐 아니라 1913년 《조선불교월보》를 통해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을 발표했던 권상로(權相老)나 대각교 운동을 펼쳤던 용성(龍城)의 글을 통해서도 한결같은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권상로는 승려들이 학식이 미천해서 시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명리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9) 9) 권상로, 〈조선불교혁신론〉, 《조선불교월보》 18호(1913년 7월), pp.47∼49.

또 용성은 “청정한 도량이 음탕한 소굴로 변하였으며 술과 고기와 오신(五辛)이 낭자하고 또 개인의 이익에만 몰두하니 악마가 사문이 되어 불도(佛道)를 스스로 멸망케 하는 것이다.”10)라고 탄식했다.10) 용성, 한종만 편,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 《한국근대민중불교의 이념》(서울: 한길사, 1982), p.141.

이렇게 불교가 외적으로 핍박받고 내적으로 사원 경제의 빈곤과 승려 자질의 저하는 불교를 믿는 신도들의 구성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이 시기 불자들의 특징은 권력에서 멀어진 일부 유생들과 기층민중들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특히 이들을 성별로 분류해 보면 여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만해는 불자들의 구성에 대해 “신도로 말하면 소수의 여인뿐이며, 남자는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같이 아주 드물다.”11)라고 표현하고 있어 당시 불교 신자들의 구성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1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70.

물론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불교를 믿는 거사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8∼1856)를 비롯해 월창(月窓) 김대현(金大鉉, ?∼1852) 등은 당대의 뛰어난 거사들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월창 거사는 천태지의의 《선바라밀차제법문》을 토대로 참선 입문서에 해당하는 《선학입문》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12) 12)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p.24∼26.

또 1872년에는 거사들이 묘련사(妙蓮寺)에서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몇몇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상황은 조직적 신행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개인적 차원의 학문 탐구나 신앙활동에 그치는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13)13) 김경집,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서울: 도서출판 진각종 해인행, 2001),p.15.



2) 염불결사와 정토신앙 중심의 신행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교단 내적으로 사원 경제가 피폐하고 승려들의 자질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불자들의 구성은 기층민중들을 주축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 같은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은 자연히 신앙적 측면과도 상호 인과적 관계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교학적 체계에 근거해서 신행을 지도할 만한 승려의 부재와 기층민을 중심으로 한 신도 구성은 자연히 기복적 신앙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외연(外緣)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행해진 대부분의 신앙활동은 미타신앙(彌陀信仰)을 중심으로 한 정토신앙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14)14) 김경집, 위의 책, p.16.

이 같은 신행적 특징은 19세기부터 본격화된 염불결사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때 종합적 고찰이 가능하다.

만일염불회(萬一念佛會)로 불려지는 염불계(念佛契)는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범어사·유점사·건봉사 등에서 결성된 이런 염불계는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되기 이전 시기, 즉 1895년까지만 해도 무려 21건이나 결성되고 있다.15)  15) 19세기 불교계에 나타난 염불계의 급증은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즉 일반적 계는 1800년부터 1910년까지 모두 82건의 계가 성립되고 있다. 김필동, 《한국사회조직사연구: 계조직의구조적 특성과 역사적 변동》(서울: 일조각, 1992), p.247.

전국의 대소사찰에서 결성됐던 이 같은 염불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염불계, 미타계, 관음계, 지장계 등이 중심을 이룬다.16)16)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p.21∼22.

이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염불계의 주된 흐름은 극락왕생을 기원하거나 또는 현세적 복을 비는 기복신앙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염불결사의 확산은 침체한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피폐한 사원경제를 되살리는 한편 일반 대중들에게는 신앙심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17) 17)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p.21.

그러나 당시의 신행 풍토는 불교의 사상적 전통의 계승이나 자력적 수행 전통의 상승(相承)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일정 정도 거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만일염불회가 전국 도처에서 결성되는 데는 불교 내적 상황과 신도들의 기복성이 상호 일치점을 찾는 데서 기인한다. 즉 교단 내적으로는 어려워진 사원경제를 되살리고 사찰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조직적 신행결사가 필요했다. 그 예로 신앙적 내용을 중심으로 하던 염불결사가 18세기 중엽을 거치면서 점차 사찰의 유지와 보수 등 이른바 ‘보사(補寺)’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어간다는 점이 이를 반증해 준다. 즉 이 시기의 염불계는 주로 계금(契金)에 대한 적립과 운영 등 신앙적 측면보다 경제적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18)18) 한상길, 〈조선후기 사찰계 연구〉(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p.40∼41.

반면에 불자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기층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침투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19) 등으로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는 곧 내세적 구원과 현실적 안녕이라는 기복신앙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 같은 이해관계로 인해 도처에서 만일염불결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19) 1876년 강화도 조약과 개항,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1905년 노일전쟁 등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격변의 연속이었다.

19세기말의 시대적 위기상황과 맞물려 본격화된 이 같은 염불결사 운동은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수도권으로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즉 1904년의 흥국사, 1910년 화계사, 1912년 봉원사와 개운사를 비롯해 1900년대에 결성된 염불결사도 확인된 것만 13개에 달하고 있다.20) 20) 한보광, 〈최근세의 만일염불결사〉, 《신앙결사연구》(성남: 여래장, ,2000),pp.272~296

이렇게 볼 때 19세기에 본격화된 염불결사와 정토신앙은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시점인 1910년대에 이르면 수도권 등지로 확장되면서 불교의 보편적 신앙형태로 자리잡게 된다.21)21) 이 같은 통계는 결사문을 비롯한 결사와 관련한 자료를 토대로 산출된 것이다. 그러나 결사문이 없는 결사 등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진행된 염불결사 운동의 양상은 통계 수치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보편적 신앙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만해는 당시 신행의 중심이 되었던 염불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동일한 불성(佛性)을 지닌 엄연한 7척의 몸으로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곧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로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 있으니, 이는 과연 무슨 짓일까. 이를 가리켜 염불이라 하다니, 어찌도 그리 어두운 것이랴.22)22)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64.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해는 당시의 신앙적 흐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불성을 지니고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북을 두드리며 밖을 향해 구원을 비는 것은 선적(禪的) 관점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이런 신행에 대한 보편적 평가는 북을 치며 염불하는 것이 곧 연화장 세계라고 생각할 만큼 불교신행 그 자체로 이해되고 있었다.23)23) 당시 염불하는 의식은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곧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로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라는 만해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고성염불은 《아미타경통찬소(阿彌陀經通贊疏)》(大正藏 37)에서 고성염불의 열 가지 공덕(十種功德)을 말하고 있는데 이같은 근거에 따라 정토종에서는 고성염불을 수행법으로 택하고 있다.(이태원,<염불의 원류와 전개사>(서울:운주사 998),pp.525~529

이번 사월 보름,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보광암에 이르렀는데 수십 명의 스님들이 향을 사르고 예불을 드리면서 북을 두드리고 경을 염송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정토의 연화법계이리라.24)24)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 p.267. “是歲巳月之望 余遊覽金剛 轉到普光庵 十數僧道 燒香禮佛 擊鼓念經 正是彌陀淨土蓮花法界.”

앞에 인용한 만해의 글과 위의 인용문은 모두 북을 치며 소리 높여 염불하는 동일한 의례를 두고 밝힌 소감이지만 두 인용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만해와 당시의 보편적 신행관과는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만해가 당대를 풍미하던 신앙적 흐름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데서 기인한다.

결국 당시의 신앙적 흐름은 교리와 경전에 근거한 체계적 신행과 수행보다는 염불과 기도라는 대중적 신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같은 현실은 불교의 본래성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3) 쇠잔한 선풍과 경허의 선풍진작



말세사상이 만연하고 기복적 신앙과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결사가 대중적 신행운동으로 풍미할 때 조선의 선풍(禪風)은 극도로 쇠잔해 있었다. 제방에는 깨침을 인가할 스승도 없었으며 법맥을 물려받을 제자도 없었다. 경허는 “정법 보기를 흙덩어리와 같이 하며, 불조(佛祖)의 혜명(慧命) 계승하기를 아이 장난과 같이 여기고……”25)라며 당시의 분위기를 한탄하고 있다. 북소리와 염불소리는 요란했지만 선맥(禪脈)을 지켜온 선승들은 자신의 법통을 전승하지 못하고 스스로 법맥을 단절해야 하는 것이 당시 불교계의 현실이었다.26)25) 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경허법어(鏡虛法語)》(서울: 인물연구소, 1981), p.250. 26)한암문도회 편,<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서울,민족사,1995),pp.293~294.

그러나 꺼져 가는 선풍을 되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시기에 경허(鏡虛)는 1899년 무너진 선풍을 회복하고자 해인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한다. 경허의 이 같은 수행결사는 염불신앙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다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반문과 함께 역사적 자각이 담겨진 운동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경허의 눈에 비친 당시 불교의 모습은 정법이 침체되고 쇠미하여 삿된 도가 치성한 상황이었다. 염불결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자성자도(自性自度)라는 선의 본래 정신이 없었다. 대신 스스로 자신의 근기를 낮추고 구원을 빌기에 바빴던 것이다. 경허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여러 대승경전과 선문어록을 모두 살펴보아도 말세중생이 진정한 도를 구할 수 없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며 당시의 신행풍토와 가치관에 대해 강한 반문을 제기한다.

모든 도사들이 마음을 밝혀 견성(見性)을 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말세 사람은 정(定)과 혜(慧)를 익혀 배우지 말라는 것은 보지 못했도다. …… 말세 중생이 진정한 도를 참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문구가 있었던가.27)27) 경허(鏡虛),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결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쫶社文)〉, 《경허집》(양산: 극락선원, 1990), p.80.

경허는 꺼져 가는 전등의 불빛을 되살리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 바른 법을 배우고 도업(道業)을 함께 닦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결사를 추진하고 전국을 두루 편력하면서 선을 실천하고 도반을 규합했다. 이를 위해 경허는 해인사의 정혜결사 이후에도 통도사·범어사·화엄사·송광사 등을 순력하며 선원을 복원하고 선실을 개설하는 등 영남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결사운동을 확장하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고 있다.28)28) 권상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서울: 동국대학교, 1959), p.293.

경허에 의해 진행된 이 같은 선풍진작 운동에 대해 한암은 “사방에서 선원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들이 구름 일듯하니 마치 부처님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하는 것 같았다.”29)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경허의 선풍진작 운동이 근대 한국불교사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랜 침체 속에 끊어졌던 법맥이 하루아침에 복원될 수는 없는 문제였다.29)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위의 책, p.33.

경허의 선풍진작 이후 전국 곳곳에 선방이 유행처럼 생겨나고 수행자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만해는 선실(禪室)을 사찰의 명예나 이익을 낚는 도구로 삼는 곳도 있었기 때문에 선방은 많아지지만 진정한 선객은 봉황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귀하다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30) 3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55.

이를 미루어 볼 때 오랜 침체를 겪은 당시 불교계는 비록 경허와 같은 선지식에 의해 선풍진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수행자의 자질 면에서 보면 외형적 선방의 증가만큼이나 실질적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시기의 상황은 승려와 불교 대중들의 인식은 말세관에 빠져 있었으며, 신행의 주된 흐름은 자력적 신행보다는 타력적 신행에 의존하고 있었다. 선풍은 침체되어 있었지만 활발한 염불결사 운동으로 곳곳에 염불당이 세워지고 밤 세워 고성염불을 하며 극락왕생을 비는 것이 당시 불교계의 전반적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선적 견지에 입각해 본다면 당시의 불교 현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만해는 이상과 같은 시대적 문제를 해소하고 불교의 참다운 본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내놓고 있다.

3. 선종의 사상적 맥락에서 살펴본 믿음의 문제

1) 한국불교의 통불교성(通佛敎性)

한국불교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모든 불교적 전통들을 계승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종파불교의 흐름과 민간 신앙과의 섭합을 통해 불교는 하나의 줄기가 아니라 다양한 신앙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이 같은 교리적 내용과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혼란은 종파불교라는 형태로써 극복되고 있다. 선종은 선종의 전통에 입각하고, 화엄종은 비로자나불을, 정토종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해당 종파의 소의경전에 따라 믿음과 신행을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전통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통일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의해 교리와 믿음의 대상이 서로 다른 종파를 강제로 통폐합당한 조선시대의 불교사는 한국불교를 소위 말하는 통불교(通佛敎)라는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태조의 창업을 도왔던 태종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11개였던 종파를 7개로 통폐합했다.31)  31) 우정상·김영태, 《한국불교사》(서울: 신흥출판사, 1968), pp.134∼135.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탄압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세종대에 이르면 7개의 종파를 통폐합하기 시작한다. 즉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의 3종을 합쳐서 선종(禪宗)으로 삼고,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4종을 합쳐서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하면서 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는 체제가 만들어진다.32)32) 우정상·김영태, 위의 책, p.136.

결국 이 같은 과정을 거친 한국불교의 모습은 상이한 종파적 전통이 서로 혼재하게 되면서 다양한 사상적 체계와 신앙적 양식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따라서 종파불교의 단순하고 명확한 교리와 의례 체계는 조선시대의 불교에는 찾아볼 수 없다. 선종과 정토종의 교리가 뒤섞이고, 화엄과 정토의 가르침들이 서로의 개념적 영역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불교의 믿음과 신행체계에 아주 복잡한 모자이크 문양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상근기 중생에게는 통합과 융섭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중·하근기 중생에게는 혼란과 충돌로 이해되기에 충분했다.33)33) 이 같은 상황은 현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정도 사세가 갖추어진 사찰에는 다양한 경전에 출현하는 부처님을 봉안하기 위한 여러 전각들이 건립되고 다양한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는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만해는 “조선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가 매우 많아서 아마 백 가지도 넘을 것”34)이라고 분석한다. 그 수많은 소회의 내용은 각기 다른 종파불교에서 성립된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출가 수행자를 외호해야 하는 신중은 물론이요, 불교적 신앙과 아무 상관없는 칠성과 산신령 등 민간신앙의 소회까지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35)34)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35) 이 문제는 한국불교의 관용성·융통성·통합성이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읽을 수 있으며, 불교 사상의 포용성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교리적근거의 혼란은 부정할수 없는 문제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은 오랜 탄압을 거쳐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변모해 가던 구한말에는 상황이 극한에까지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논객들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소상과 탱화 등은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인 만큼 전부 소각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미신적 요소를 일소하고 신앙의 본질적 모습부터 뜯어고칠 때 비로소 암흑 시대의 전통을 일소하고 참다운 불교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36)36)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서산 대사는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파의 가풍(家風)부터 자세히 알아야 한다.”37)고 했다. 이는 복잡한 종파적 전통이 혼재된 한국불교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1개의 종파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빚어낸 한국불교의 문양은 ‘불교는 비체계적이고 상호 모순적’이라는 인식을 낳기에 충분하다.37) 《선가귀감(禪家龜鑑)》, 韓佛全 7책, p.644 上. “大抵學者 先須詳辨宗途.”

따라서 한국불교를 바라볼 때 나름대로 정리된 교판적(敎判的) 판단 기준이 없다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학적, 실천적 가치관의 부재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합리적이라는 미명 아래 미신과 비불교적 요소마저도 불교라는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문제는 보다 구체적인 고민들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렇게 볼 때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기반해서 올바른 신앙적 체계를 정립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2) 선종사(禪宗史)를 통해본 믿음의 대상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때 불법의 진리성은 경전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내용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문화적이거나 신앙적인 증거는 경전에 근거한 불상을 통해 제시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는 모습은 곧 불상과 경전을 통해 이루어졌다.38)  38) 권기종 역, 《중국불교사》(서울: 동국역경원, 1985), p.21.

이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 나라에서 경전과 불상은 새로운 사상체계와 문화로 받아들여지면서 불교는 국가적 차원에서 수용된다. 그러나 선종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시작되는 선종사를 살펴보면 믿음의 대상에 대한 선의 입장이 드러난다.

달마가 처음 중국으로 왔을 때 그는 불상도 경전도 없이 홀홀 단신으로 선법을 전하러 왔다. 금빛 찬란한 부처님에게 예배하는 것이 불교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불상도 경전도 없이 불법을 전한다는 달마를 기이하게 생각했다.39) 소문은 황제에게까지 미쳤고 마침내 달마는 양무제와 만나게 되지만 서로의 인연이 맞지 않아 소림사로 들어가 면벽하게 된다.40) 39) 阿部肇一, 최현각 역, 《인도의 선 중국의 선》(서울: 민족사, 1990), p.116.40) 《전등록》(서울: 동국역경원, 1986), p.98.

고승이라면 국가적 차원에서 맞이하던 중국에서 달마는 예외적으로 은둔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는 진리에 대한 경전적 근거나 불상으로 대표되는 신앙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는 달마의 선법을 당시 불교계나 중국사회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에 선법이 처음 전래될 때도 이 같은 상황은 재연되었다. 가지산문의 개산조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선법을 전래한 도의 국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달마에게 가해졌던 것처럼 마설(魔說)이라는 비방이었다. 결국 도의국사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원도 오지의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달마처럼 시절인연을 기다리며 은둔해야 했다.41)41)최현각,<선학의 이해>(서울,여시아문,2002)pp.162~163.

이상의 두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선(禪)은 그 전래 초기부터 일반적 불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거나 전법의 증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전통은 선종이 율종 사찰에서 독립해서 자체적인 전통을 수립하는 청규(淸規)가 제정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즉 선림(禪林)의 가람, 직위, 수행 등의 항목을 담고 있는 청규에는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요사(寮舍) 등만 기록되어 있고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은 아예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다.42)42) 최법혜, 《고려판 선원청규 역주》(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출판부, 2001), p.37.

불전을 건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선문규식(禪門規式)》에서는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法堂)만을 두는 것은 불조(佛祖)께 친히 전해 받은 이로서 당대의 존중할 곳임을 표시하는 것이다.”43)라고 기록하고 있다.43) 《전등록》(서울: 동국역경원, 1986), p.244.

이처럼 선종이 독자적 사원을 짓고 선종만의 전통을 형성할 수 있게 되자 아예 부처님을 모시는 불당을 짓지 않고 그 자리에 법을 설하는 법당을 지었다. 그리고 부처님이 봉안되어야 할 설법전의 법상(法床)에는 부처님 대신 조사가 올라가 상당설법(上堂說法)하는 장소로 대체되었다.

이에 대해 백장은 “일산(一山)의 주지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설법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선종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 기존의 불교 종파와는 철저히 독자적 입장을 견지한다.44) 물론 만해가 이 같은 선종의 역사를 예로 들어 소회폐지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불교유신론》이 담고 있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결국 선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44) 불전을 짓거나 불상을 모시지 않는 당대(唐代) 선종 사찰의 구조와 정신과는 달리 신라 선종사찰에서는 불전(佛殿)을 세우고 주존불로서 비로자나 불상을 봉안한다. 이는 신라의 선종이 화엄교학을 기초로 발전한 것에서 기인하는 부분이다. (이기선, 〈고려시대 선종가람과 불교미술(1)〉, 《韓國禪學》 4호(서울: 韓國禪學會, 2003), p.166) 특히 긍양(兢讓)이 중창한 선종 사찰 봉암사의 전각을 보여주는 자료에 따르면 ‘대웅광명보전’, ‘약사전’, ‘설법전’, ‘관음전’, ‘응진전’, ‘금색전’, ‘지장전’, ‘시왕전’, ‘극락전’ 등의 전각이 보이고 있다.(한기문, 〈新羅末 禪宗 寺院의 形成과 構造><韓國禪學>2호(서울,한국선학회,2001)p287)이상의 내용을 미루어 볼때 신라시대의 선종사찰에서는 불전을 비롯해 시왕전까지 대부분의 전각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다.



3) 선(禪)에서 믿음의 의미

선종의 역사에서 볼 때 부처님이나 보살상 등을 향한 신앙행위는 앞서 살펴본 대로 불교의 일반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종 역시 불교 테두리 내에 있는 만큼 불상이나 보살상을 향한 믿음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불설선생자경》45)에서 전의설법(轉意說法)을 통해 기존의 종교 의례를 부정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던 것처럼 선종에서도 믿음의 대상에 대해 선종의 시각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45) 《불설선생자경(佛說先生子經)》, 大正藏 1, p.252下.

적어도 초기 선종이나 당대(唐代)의 선종에서 믿음이란 절대자를 향한 경배를 인정치 않으며 그 같은 믿음의 대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선에서 믿음의 대상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조단경》에서는 참다운 귀의란 “스스로 깨쳐 스스로 닦음이 곧 돌아가 의지하는 것”46)이라고 정의하고 만약 “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않으면 돌아갈 바가 없다.”47)고 못박고 있다. 46) 성철 편역,<돈황본단경>(서울,장경각,1988),p.145."自悟自修 卽名歸依也“ 47) 성철 편역,위의 책,p.157."自性不歸 無所歸處“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귀의(歸依)는 눈앞에 있는 대상화된 불상이 아니라 바로 불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이 전환된다. 《육조단경》에서는 이 같은 믿음의 방향전환을 ‘스스로에게 귀의함’이라는 ‘자귀의(自歸依)’48)로 규정한다. 따라서 선종에서 믿는 삼보란 내면의 삼보를 의미하는 자성삼보(自性三寶)가 된다.48) 성철 편역, 위의 책, p.142.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自歸依者 除不善行 是名歸依)”

선지식들아, 혜능이 선지식들에게 권하여 자성(自性)의 삼보(三寶)에게 귀의하게 하나니, 부처란 깨달음(覺)이요 법이란 바름(正)이며 승이란 깨끗함(淨)이니라.49)49) 성철 편역, 위의 책, p.155. “善知識 歸依自性三寶 佛者 覺也 法者 正也 僧者 淨也.”

믿음이라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돌아가 의지하는 ‘자귀의(自歸依)’이며 그 믿음의 대상이 스스로의 성품에 내재된 ‘자성삼보’로 규정된다면 전통적 불교에서 해왔던 것처럼 믿음의 대상을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이 밖을 향해 찾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임제는 스스로 믿는 것이 요체인 만큼 밖을 향해 의지할 대상을 찾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설사 밖을 향해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다운 의지처가 아니라 육진 경계를 반연(攀緣)한 삿된 길이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밖으로 찾지 말라. 모두가 저 부질없는 육진 경계를 반연(攀緣)하여 도무지 삿되고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50)50)<임제록臨濟錄>,大正藏47,p.499上합. “如今學道人 且要自信 莫向外 總上他閑 塵境 都不辯邪正”

이처럼 밖을 향해 찾는 것이 삿된 도라면 우리가 의지해야 할 믿음의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그것은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이기 때문에 그 대상은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있다. 혜능(慧能)은 우리 내면 속에 있는 그 믿음의 대상을 ‘자성(自性)’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성이 드러난 바이기 때문에 그 자성이 미혹하면 중생이 되고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51)51) 성철 편역, 위의 책, pp.200∼201.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佛是自性作 莫向外求 自性迷 佛卽衆生 自性悟 衆生卽是佛).”

따라서 혜능도 밖을 향해 찾지 말 것을 강조한다. 임제는 이 부분에 대해 더욱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즉 우리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고자 한다면 밖으로 구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52)는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 임제는 우리가 방황하며 찾는 그 믿음의 대상을 부정하기에 앞서 그 대상을 찾아 질주하는 바로 ‘나’의 정체를 반문한다. ‘나’의 정체, 즉 스스로의 자성을 밝히는 것이 곧 부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2)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횝要與祖佛不別 但莫外求.”

대덕들이여! 그대들은 똥자루를 짊어지고 바깥으로 달음질치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데, 이렇게 내달려 구하는 바로 그놈을 그대들은 아느냐?53)53) 《임제록》, 大正藏 47, p.501中. “大德 횝擔鉢囊屎擔子 傍家走 求佛求法 卽今與? 求底 彌還識渠?.”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육조단경》과 《임제록》을 비롯해 수많은 어록(語錄)과 선전(禪典)에서 말하는 믿음의 대상은 밖을 향한 귀의가 해체되고 내면으로 돌아오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결국 선에서 바른 믿음은 밖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믿음이란 밖에서 구하지 않고 자성을 바로 믿은 것을 말한다.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하고, 마음 밖에서 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이라 한다.54)54) 박산화상(博山和尙), 《참선경어(參禪警語)》(합천: 장경각, 1988), p.35. “邪正者自心卽佛名正信 心外取法名邪信.”

이렇게 밖에서 찾지 않고 자성을 바로 보아서 부처님을 찾고 그 주인공이 그대로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른 믿음’55)이라는 믿음에 대한 선의 일관된 가르침이다.55) 박산화상, 《참선경어》(합천: 장경각, 1988), p.35. “卽佛要究明 自心親履實踐 到不疑之地 始名正信.”

이상과 같이 믿음과 믿음의 대상에 대한 선(禪)의 입장을 통해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바라보면 만해의 주장이 개인적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사가 정전(正傳)해 준 가르침에 따라 선종의 본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개혁론임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왜곡된 시대적 상황이 극복해야 할 현실이라면 선사상에 입각한 종풍(宗風)은 만해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는 관계성을 이루게 된다.



4. 소회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회복

1) 소회의 기능과 선별적 폐지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종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수많은 소상을 모셔놓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불법의 대의로 생각하는 것은 왜곡된 불교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선종으로 보는 만해56)가 복잡한 소회(塑繪)의 정리를 통해 신행을 개혁하고자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해는 당시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소회를 일거에 소각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반대한다. 만해는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신봉해야 할 믿음의 대상이 교리적 근거가 있는지를 따져서 폐지해야 할 것과 보존해야 할 것을 구별하고 있다.56) 만해는 임제종 운동에 대해 “조선(朝鮮) 고유(固有)의 임제종(臨濟宗)을 창종하여……”(韓龍雲, 〈佛敎靑年同盟에 대하야〉, 《佛敎》 86호)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뒤 곧바로 임제종 운동에 뛰어들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만해가 선별적으로 소회를 폐지하자는 이유는 소회가 갖는 신앙적 기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해는 자신이 어린 시절 공자묘에서 만난 석상이나 관공묘에서 관우의 그림을 보고 받은 정신적 감동을 회상하면서 소회가 갖는 신앙적 기능을 인정한다.57) 57)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1.

따라서 소회 그 자체는 비록 ‘거짓 모양’이지만 중생들의 모범이 되고 부처님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하는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회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소회에 대한 신앙이 본래적 의미에서 벗어나 마치 불교의 본질처럼 본말이 전도된 상황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해는 소회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민지(民智)가 미개해서 자기가 받들 신이 아닌데도 상(相)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공연히 모셔 놓고 아첨해 제사를 드려 화복(禍福)을 빌고 망령되이 길흉(吉凶)을 물으니, 이에 있어서 폐단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58)58)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2.

중생의 사표로서 소회의 기능이 큰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것이 길흉화복을 비는 대상이 되고 그와 같은 의례가 불법의 본질로 인식될 때 소회의 기능은 불교의 본래성을 전복하는 미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 만해의 생각이다. 따라서 폐단을 낳는 소회를 일제히 폐지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더 많은 왜곡과 사법(邪法)이 뒤따르기 때문에 모두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회폐지론의 표면적 이유는 미신적 내용을 폐지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소회 폐지론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2) 미신적 소회의 폐지

첫째, 불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 비불교적인 소상과 탱화 등은 모두 폐지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소상들은 소승(小乘)의 소견으로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나한독성, 자연의 일부인 별을 신봉하는 칠성(七星), 망자의 죄를 심판하는 시왕(十王)을 비롯해 천왕(天王), 신중(神衆), 조왕(?王), 산신(山神), 국사(國師) 등을 꼽고 있다.59) 59)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만해는 이런 소상들은 정법을 받드는 출가자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것들로써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난신(亂信)’이라고 한다. 종교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그 믿음의 대상이 미신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미신을 받드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면 수많은 난신을 받드는 조선불교가 가장 발전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60)6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8.



만해가 난신으로 분류한 각종 미신적 소회를 폐지하자는 본뜻은 각종 민간신앙이나 미신적 요소가 담긴 비불교적 요소를 배제하고 불교가 가진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해는 불교의 본질은 “허황하고 신통치도 않은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는”61) 미신이 아니라 깨달음을 준칙으로 삼는 종교이며, 부처님은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시는 분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6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6.

불교는 그렇지 않다. 중생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경에 “깨달음으로 준칙을 삼는다.” 하셨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며, 정각(正覺)·정변지(正遍知)의 주장이 모두 그런 취지였으니, 이 점에서 부처님이야말로 철저하였다.62)62)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18.



만해는 문명한 새 시대는 진보의 이상을 완전히 실현하지 않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따라서 이 같은 시대적 변화 앞에서 낡은 미신을 불법(佛法)이라고 믿는 것은 마치 옷 속에 보화를 감춘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지노릇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불교의 소회를 정리하자는 것은 단지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가진 본래적 위대성을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 시대적 변화를 넘어 불교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그릇된 철학적 견해나 그릇된 신앙 같은 것이야 어찌 다시 눈에 띌 까닭이 있겠는가.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착실히 하게 될 것이다.63)63)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29.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잘못된 철학과 미신적 종교는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에 불교는 본래의 위대한 종교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 만해의 입장이다. 따라서 참다운 진리의 종교를 미신의 종교로 전락시킨 미신적 “소상들을 불살라 날려 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를 되살려서 흠이 없게 해야 한다.”64)는 것이다.
64)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불교에 대한 만해의 기본적인 관점은 불교는 철학적 종교이며 미래 사회의 도덕과 문명의 원천이 될 위대한 종교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질곡과 내적 빈곤이 만들어 낸 불교의 왜곡된 모습을 정리하고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 만해의 개혁론에 담긴 인식이다.



3) 교학적 내용에 맞지 않는 소회의 폐지

둘째, 비록 불교적 요소를 담고 있는 소상일지라도 교학적 내용에 비춰볼 때 경배의 대상으로 적절치 못한 소회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신중(神衆)이다. 이런 소상들은 비록 불교 경전에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본래 의미는 불법과 수행자를 외호(外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소상들이다. 그럼에도 신중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후 본말이 전도된 상황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65)65)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6.

신중이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출가자와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의미는 띠고 있다. 그런데도 신중을 향해 기도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무엇이 참다운 믿음의 대상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만해는 신중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소상을 모시고 공양하는 기본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써 정사(正邪)에 대한 기본적 가치관의 빈곤을 드러내는 문제로 바라본다.

자신들이 받들 대상인지 자신들을 외호하는 하인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는 것에 대한 만해의 질책은 주인과 나그네를 구분하지 못하고 대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무리를 경책하는 임제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마치 양(羊)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머슴인지 주인인지 가리지 못하고 나그네인지 주인인지 구분치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에 들어왔으므로 번잡스런 곳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진정한 출가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66)66) 《임제록》, 大正藏 47, p.498上. “今時學者 總不識法 猶如觸鼻羊 逢著物蘗在口裏 奴郞 不辯 賓主 不分 如是之流 邪心入道 鬧處卽入不得 名爲眞出家人.”

참다운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집착하고 물들기 때문에 번잡한 곳에 갈 수 없다. 그들은 입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염소처럼 주인과 머슴을 구분하지 못하고 대상을 향해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참다운 출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임제의 가르침이다.

만해는 소상이 갖는 기능에 대해 “한 거짓 모습으로 된 대상을 만들어 중생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소회가 발생한 원인이다.”67)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소회는 복을 비는 기복의 대상이 아니라 소회가 나타내는 참다운 지혜와 덕상을 배우기 위한 표상이라는 의미를 띤다. 67)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0.

그러므로 불교의 소상은 중생들의 사표가 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 소상을 보고 ‘우리들도 저렇게 되겠다’는 서원을 세울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이처럼 소회가 중생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닮아가야 할 대상이라면 잘못된 믿음의 대상은 우리의 서원을 왜곡하고 불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임제가 말하는 것처럼 주인인지 나그네인지 모르고 밖을 향해 치달리는 믿음은 불교의 본래성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중을 경배의 대상으로 받드는 것은 소상을 모시는 근본적인 취지를 왜곡하고 소상을 복 비는 대상으로 전락시킨 데서 비롯된 문제다. 따라서 이런 류의 소상을 없애자는 주장에 담긴 만해의 취지는 불교 신행에 담겨진 기복적 요소를 일소하고 불교의 본래적 성격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4) 석가모니 한 분으로 충분하다

셋째, 비록 미신적 대상도 아니고, 교리적 내용으로 보아도 전도됨이 없는 불·보살의 소상일지라도 수많은 소상을 다 모실 필요가 없으므로 석가모니 한 분만 모시자고 주장한다. ‘종교는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에 대해 만해는 설사 종교가 미신을 믿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의 대상이란 부처님 한 분을 믿는 것으로 족하다고 답한다.68)68)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7.

그러나 대승불교에는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등장한다. 일례로 《화엄경》에서는 우리가 신앙할 믿음의 대상인 부처님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따라서 대승보살의 서원을 담고 있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서는 그 수많은 부처님께 모두 예배, 공경하는 것이 보살의 큰 행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 불찰, 극미진수, 모든 부처님을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눈앞에 대하듯이 깊은 믿음을 내어서 청정한 몸과 말과 뜻을 다하여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되…….69)69) 《보현행원품》(서울: 보련각, 1991), p.7. “言禮敬諸佛者 所有 盡法界虛空界 十方三世一切佛刹極微盡數 諸佛世尊 我以普賢行願力故 深心信解如對目前 悉以淸淨身語意業 常修禮敬.”

인용문에서 보듯 대승불교의 부처님은 불찰 극미진수로 많고 대승행자는 그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드려야 한다. 그러나 만해는 이 같은 경전적 근거에 따라 모셔진 수많은 불·보살상일지라도 다 모실 필요는 없다고 한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이름이 다양할지라도 그 본질은 한 부처님의 본성이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는 “불·보살로 말하자면 이름은 달라도 이치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그러기에 어느 한 분을 들어 다른 여러 불·보살을 통합함이 좋다.”70)라고 주장한다.70)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98.
여기서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단순히 미신적 대상을 일소하자는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불 보살상은 미신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만해가 주창하는 소회 폐지론의 논거가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향한 믿음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선적(禪的) 입장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주장은 만해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선사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임제는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이 모두 한 생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청정한 빛은 그대 집 속의 법신불(法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분별 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보신불(報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마음 위의 차별 없는 빛은 그대 집 속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세 가지 부처는 지금 눈앞에서 법을 듣는 그 사람인데, 그것은 다만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71)71)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횝一念心上 淸淨光 是횝屋裏法身佛 횝一念心上 無分別光 是횝屋裏報身佛 횝一念心上 無差別光 是횝屋裏化身佛 此三種身 是횝卽今目前聽法底人 祇爲不向外馳求 有此功用.”



이처럼 법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보신불인 노사나불, 그리고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 모두 한 마음에 계신다는 것이 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72)  72) 삼신(三身)에 대한 《육조단경》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육조단경》에서는 삼신을 ‘자삼신불(自三身佛)’이라고 하여 삼신이 스스로에게 구족되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귀의도 이 자삼신불을 향해 하는 것이다. (성철 편역, 《돈환본 단경》(합천: 장경각, 1988), ),p.139

이는 참다운 믿음의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밖을 향해 치달려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즉 자신의 자성이 참다운 삼신불(三身佛)이라는 믿음의 부족은 결국 본래의 불성을 버리고 밖을 향해 치달리며 모양을 추구하게 만든다.

오늘날 공부하는 이들이 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 병통(病痛)이 어느 곳에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 스스로의 믿음이 부족하면 망망하게 경계따라 전변(轉變)하여 온갖 경계에 휩쓸려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한편 생각 생각 치달려 구하던 마음을 쉴 수만 있다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73)73) 《임제록》, 大正藏 47, p.497中. “如今學者不得 病在甚處 病在不自信處 횝若自信不及 卽便忙忙地 徇一切境轉 被他萬境回換 不得自由 횝若能歇得念念馳求心 便與祖佛不別.”

믿음에 대한 선의 가르침과 만해의 주장을 상호 비교해 볼 때 만해가 수많은 불 보살상을 폐지하자는 것은 그가 불교적 신앙심이 부족해서이거나 또는 불교를 메마른 이성적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선(禪)의 입장에서 참다운 믿음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참다운 믿음의 부족이 미신을 부르고, 자성(自性)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 밖을 향해 치달리며 모양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현실은 자성에 대한 믿음은 이미 신화적 사실이 되어버렸고 눈앞에 펼쳐지는 믿음과 신행이란 수많은 소상을 향해 절하며 복을 비는 것으로 대변되고 있었다. 따라서 만해가 제기하는 믿음의 문제는 대상적 소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적 믿음의 부재를 확인하고 이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경허(鏡虛)는 당시 승려들이 갖고 있던 내면적 믿음의 부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개 미혹한 자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조종(祖宗)의 말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은 성인들의 높은 경계라고 밀쳐버리고 다만 현실적인 함이 있는 것에만 힘을 쓰는데 혹은 손에 염주를 잡으며 입으로 경을 외우고 혹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거나 그리고 공덕만을 바라니 보리(菩提)와는 틀렸고 도에는 멀어짐이로다.74)74) 경허,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 《경허집》(양산: 극락선원, 1990), p.82.

말세의 하근기 중생이라 스스로 구제할 수 없다는 말세적 가치관은 자성(自性)이 참다운 귀의처이며, 삼신(三身)은 자성에 있다는 조사들의 말씀은 수용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말세의 중생으로 근기가 하열(下劣)해서 스스로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타력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세관이 이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다.

이 같은 말세관은 결국 선적(禪的) 믿음의 약화로 나타나고 그와 반비례해서 대상적 믿음에 대한 집착은 점점 강고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자연히 “염불(念佛)이나 송경(誦經)·송주(誦呪)를 일삼고 있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극소수”75)가 되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75)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하편(서울: 보련각영인본, 1972), p.951.

그렇다면 수많은 불·보살상은 모두 폐지하고 모든 불·보살의 근본이 되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실 때 그 부처님은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만해의 입장에서 볼 때 소상(塑像)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란 바른 믿음이 아니라 단지 겉으로 드러난 상(相)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비록 석가모니 한 부처님만을 신봉한다 할지라도 실은 그 부처님조차도 거짓 믿음의 대상일 뿐이지 진리의 당체는 아니다. 다만 중생들의 근기에 다라 신행(信行)의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시는 것이지 그 자체가 부처님은 아니다.

무릇 현상은 진리의 거짓 모습(假相)이며, 소상(塑像)은 현상의 거짓 모습이니, 진리의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소상은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이 된다.76)76)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p.89.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 선의 정신이므로 부처님이라는 상(相)을 갖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그 거짓 모양을 본 따 다시 소상을 만드는 것은 ‘거짓 모습의 거짓 모습’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겉으로 형상을 짓고 그것을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고 진리의 화현(化現)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빈주먹에 누런 잎사귀를 쥐고 돈이라고 속여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77)이라는 《임제록》의 말씀처럼 그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77) 《임제록》, 大正藏 47, p.499中. “空拳黃葉 用쮱小兒.”

다만 근기에 따라 중생들에게 믿음의 표상으로 제시된 것일 뿐이다. 때문에 수많은 전각을 짓고 그 속에 수많은 불 보살상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이런 행위들은 선에서 바라보는 참다운 믿음의 대상인 자성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결과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진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그대들은 이처럼 변화로 나타난 허깨비들 위에서 이런 저런 모양을 짓는구나. 그렇게 구해서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여우 도깨비들이며 결코 참된 부처가 아니니, 이는 외도의 견해이다.78)78) 《암제록》, 大正藏 47, p.500上. “道流 眞佛無形 眞法無相 횝祇큯幻化上頭 作模作樣 說求得者 皆是野狐精魅 幷不是眞佛 是外道見解.”

부처님은 형상이 없지만 중생들은 외형적 모양을 찾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금강경》에서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므로 모든 형상이 실체가 없다고 보면 곧 여래를 본다.”79)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수많은 형상으로 부처님을 조성하고 복을 빈다. 임제는 설사 그렇게 해서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다운 부처님이 아니라고 한다.79) 《금강반야바라밀경》, 大正藏 6, p.749下.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처럼 선(禪)의 관점으로 만해의 소회 폐지론을 볼 때 그것은 단순히 미신적 소상의 폐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해의 소회 폐지론은 불교의 본래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선(禪)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만해의 불교개혁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자는 자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탈고될 시기 한국불교는 쇠퇴를 거듭한 끝에 선풍(禪風)이 쇠진하고 참선하는 수행자가 드물었다.80) 자연히 불교 신행의 주된 흐름은 타력적 신행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사찰은 사원경제의 유지를 위해, 또 대중들은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내세적 구원과 현세적 안녕을 위해 기복신앙에 몰입하고 있었다. 쇠퇴해진 선풍은 이 같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더욱 외면 받게 되었고 불교계에는 말세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80) 제방(諸方)의 선교의 승려 수를 비교하여 보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 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불과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에 속한다. 만약 조선의 승려 7000인을 들어서 말하면 10중 8, 9는 모두 교종에 속하며,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사람이 실은 다수를 점하고 있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 하편(서울: 보련각영인본,1972),p.951.

이 같은 교단적 흐름을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만일염불회로 불리는 정토신앙의 성행이었다. 이 운동은 쇠락한 한국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염불신앙의 성행이 곧바로 불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선법(禪法)의 전승(傳承)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면 더욱 그랬다.

만해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으로 보고 임제종 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임제종 운동에 대해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하야……”81)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임제종으로 보고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82)81) 한용운, 〈불교청년총동맹에 대하야〉, 《불교》 86호, 1931. 8.박한영도 “조선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서 발하얏슨즉 일본 조동종과 련합 수 없다.”(동아일보, 1920. 6. 28)라고 하고 있어 임제종 운동을 펼칠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임제종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82) 만해는 1911년 1월 15일 전남 송광사에서 열린 총회에서 임제종 관장 대리로 선출 된 이후 1912년 서울에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 건립시기까지 임제종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임제종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 같은 만해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당시의 불교 상황은 끝없는 자기 부정이 요구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만해는 그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선(禪)의 본질적 입장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개혁이라기보다 본래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을 갖게 된다.83) 83) 당시 불교계 상황이 극복되어야 할 현실이라면 그가 추구할 이상은 선(禪)의 본래성이다. 여기서 만해는 현실적 타협보다는 이상적 가치관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만해의 개혁론이 결코 쉽게 현실 속에 뿌리내릴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아쉬운 점은 그가 주도했던 임제종 운동이 일제에 의해 무산됨으로써 이같은 개혁론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회 폐지의 문제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염불신행이 주된 흐름이 된 당시 상황에서 석가모니불만 남기고 다른 모든 소상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미는 당시의 보편적 신행 형태를 부정하고 선(禪)의 사상적 내용성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해가 제기한 개혁론은 제도적, 행정적 차원의 개선책을 넘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불교유신론》의 핵심은 미신과 은둔적 모습의 불교를 지양(止揚)함으로써 불교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으로 현대적 불교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서재영동국대 대학원 선학과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 강사. 한국선학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