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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최현민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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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2010-03-23 1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2009년 5월 크리스찬아카데미 김지하 발표문에 대한 논평문--

최현민 (서강대)

동서양의 종교사상을 넘나들며 섭렵한 김지하 시인의 글을 접하면서 그의 사유와 고뇌의 흔적을 본다. 시공의 역사 안으로 녹아들어 현실의 문제를 풀어갈 해법을 제시함을 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으로서 현실을 깊이 통찰치 못한 채 살아온 나 자신을 만난다. 김지하 시인의 사유를 다 따라가지 못한 체, 그저 공감된 부분을 중심으로 나의 성찰과 함께 토론해 볼 점들을 나누고자 한다.

1. 일상 안에서의 ‘모심’을 향한 회심

김지하 시인은 ‘모심’의 문화혁명에 대해 말한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화두, 이 복잡한 현실문제를 풀어갈 해법은 ‘모심’ 한마디에 있다는 것이다. ‘화엄개벽의 모심’에 우리의 문제를 풀어갈 묘수(妙修)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 사회문제의 해법으로 김지하 시인이 제시한 ‘화엄개벽의 모심’에 대해 몇 가지 나누고자 한다.
김지하 시인은 ‘모심(侍)’을 동학본주문의 첫 글자, 곧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이진각지불이자야(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로 풀어 말한다. 그는 여기서 내유외유(內有外有)를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한 ‘우주진화 내면에 의식의 증대와 외면의 복잡화’로, 각지불이(各知不移)를 ‘현생인류가 화엄세계(不移)을 각자 제 나름으로 깨달아 실현함’으로 풀이한다.
이를 떼이야르 사상과 비교해보면 떼이야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출현이 지닌 가장 큰 의미를 ‘반성의 능력’으로 본다. 우주는 반성이전의 단계를 몇 십 억 번 시도한 후 인간 곧 반성력을 출현케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됨의 정체성이 반성의 능력 곧 ‘회개’할 줄 아는 능력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 곧 자각해야 하는가?
김지하 시인의 사유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각지불이(各知不移)’ 곧 각자 제 나름으로 화엄세계를 깨달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겠다. 그 세계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예수의 선포 속에서 회개와 하느님 나라가 지닌 불가분의 관계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말씀한다. 그 징표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바로 그 섬김의 세계, 모심(侍)의 세계가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심(侍)이나 섬김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섬김(모심)을 현실 문제를 풀어갈 해법으로 제시하려면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섬김(모심)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삼보일배, 촛불, 오체투지의 대외적 모심이 현실 안에서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 마음자리,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섬김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가정과 직장,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와 사회 안에서의 섬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화엄개벽의 모심’이란 허울 좋은 슬로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일상 안에서 모심이 어려운 까닭은?



2. 섬김의 주체로서의 ‘여성성’ 회복

김지하 시인은 개벽을 실천할 모심의 참 주체로서 ‘여성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 여성성을 1만 9천 년 전 파미르고원 마고성의 창조신인 여신, 그 잉태의 힘에서 찾고 있다. 마고라는 여신의 표상이야말로 여성성으로 드러난 비로자나의 화엄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 여신 모성의 전통을 상실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되기 전 고대역사 안에 엄존해온 모권제의 사상적 근원에 있는 여성성인 모성을 김지하 시인은 모심의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을 모심과 살림의 참주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남성을 여성에 의존하도록 길들이는 것도 아니며, 남성과 여성의 자리를 바꿈으로서 이루어지는 개벽세상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는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의 자리바꿈이 아니라 남성은 자신 안의 여성성을, 여성은 자신 안의 남성성을 재발견하여 균형있는 참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심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은 남녀로 이분화된 한 쪽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상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성적 원리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性을 넘어 존재 안에 드리운 바로 그 여성성을 회복해감이 중요하리라 본다. 섬김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은 온전한 인간성 회복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가정, 직장, 사회공동체에서 우리 모두가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장애되는 요인은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3. 영성적 차원과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

앞서 필자는 ‘모심’을 구체화함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모심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을 말함에 있어 장애요인이 무엇인지 숙고해볼 것을 제안했다. 두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영성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이다.

1) 영성적 차원

영성적 차원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왜 내 삶의 자리에서 ‘모심’이 어려운지 그리고 모심의 주체로서 여성성을 실현해감에서 무엇이 장애가 되는지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결국 ‘모심’이 어려운 것은 내 자존심을 버리기 싫기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자존심의 실체는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나인지, 나의 정체성인지, 아니면 나의 허상인 거짓자아에 불과한 것인지를....
내가 참된 주체로 산다는 것, 그것은 바로 ‘모심’의 삶에 있다. 모심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참된 자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다. 김지하 시인이 말한 ‘모심’은 회개를 첫 가르침으로 삼은 예수의 언표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회개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함은 예수의 가르침의 정점인 ‘섬김(모심)’을 사는데 있기 때문이다.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도겐(道元, 1200-1253)은 “불도(佛道)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正法眼藏』「現成公案」)라고 한다. 도겐의 표현대로 자기를 잊는 것이 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면, 그 길이 곧 모심의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

앞서 말한 영성적 차원이 개인적인 면에서 성찰한 것이라면,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이란 그 영성이 현실 안에 구체화되기 위해 영성의 지속적인 연대성을 유지해감에 필요하다는 측면을 말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은 ‘촛불’을 지도자도 조직도 강제도 없이 그때 그때의 합의에 의해 도달한 ‘집단지성’이라고 본다.1)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그들 마음마다에 드리운 ‘천지공심의 씨앗들’이라고 풀이한다. 김지하 시인이 말했듯이 촛불이 ‘영을 동반한 생명사건’이라면 그 생명력은 지금도 계속 피어오르고 있는가? 또한 그 촛불의 힘을 계속 유지하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아무리 생태문제 등 일련의 현실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도, 영성이 부재한 정부 정책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거대한 정책과 맞서기 위해선 우리의 영성을 공유하고 나누며 표출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자신이 속한 소공동체(가정, 교회, 사찰, 직장, 서클, 지역)가 그런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성찰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를 방해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토론해 보았으면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속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례전(예배, 미사, 예불 등)에 우리의 변형된 의식을 수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한 우리의 가정이 영성적 통합의 장이 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요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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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5월2일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이하여 촛불집회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낸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촛불집회는 시민의 재발견이었다,” “거대한 정치 교육장이었다,” “10대 촛불소녀들을 통해 몸에 체화된 민주주의의 결실이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 "자신의 계층과 가까울수록 촛불은 좀 더 빛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촛불은 어둡다"고 촛불집회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 “아무리 주장이 옳아도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민주주의의 기능은 국가 기본 법질서의 메커니즘을 보완할 수 있을 뿐 대체할 수는 없다. 스스로의 한계와 분수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법천지의 약육강식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피력하기 위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부정의 소리들도 있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평가 이외에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 목소리로 외쳐댔건만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지만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어떤 운동의 성패를 가늠하기에 1년이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아직까지 마음의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2023/03/30

박정미 박석,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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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 
역시 나는 우리집 문 앞에 눈을 쓸어야겠다

-박석,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을 읽고

 사실 좀 질리는 책이다. 

사놓고 반년을 넘겨서야 겨우 다 읽어냈다. 읽어놓고도 정리가 안되어 독후감을 쓸 엄두를 못냈다. 페친 이남곡 선생님이 이 책을 소개하며 지은이 박석교수를 ‘천재’라고 하시길래 호기심이 동했다가 경을 친 것이다. 박학이면 깊이를 좀 덜하든가, 깊이 파고들면 범위를 좁히든가 해야 하는데 박이심(博而深)의 경지라. 이건 반칙이다.
 글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술술 읽히게 너무나 정확한 논거를 대며 쉬운 말로 이론을 전개한다. 미학이라면 생경한 개념어가 난무하는 외국책, 그것도 설익은 번역본만 읽은 사람이라 이 쉬운 한국어문장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음악이론은 내 지능의 한계로 끝내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만 논거를 제기하는 각도가 새롭고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무궁무진 일어나서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웠다. 수렁도 아닌 인식의 꽃넝쿨에 발목을 잡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빽빽한 인식의 숲을 겨우 헤쳐나와 다시 목차를 보며 전체를 조망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정말 크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기쁨이며, 우리 안의 동양과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통합된 인류의 미래를 새롭게 그려보는 방편을 얻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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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대로 몇 개의 키워드로 동서양의 문화사를 꿰뚫었다. 
저자는 중국에서 비롯되어 동아시아의 저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코드가 바로 화광동진, 대교약졸과 대성약범의 미학이요, 수렴의 미학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서 철학이 나오고 종교가 나오고 문학, 음악, 회화, 건축 등 예술이 나오고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화광동진

 화광동진과 대교약졸은 노자도덕경에 함께 나온다. 
도가적 사유의 원형으로서 모두 나선형적 발전과 감추기의 논리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진정한 의미는 화광과 동진의 두 단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깨달음의 빛을 밖으로 보내지 않고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화광이다. 또 하나는 성스러움과 범속함,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해서 새롭게 현실을 살아가는 동진이다.
보통사람들은 성스러움에 도취되면 깨어나기 힘들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감추는 화광은 대단한 경지이다. 그러나 한발짝 더 나가 진정한 동진을 구현하는 것은 더욱 심오한 경지를 필요로 한다.
화광에 급급한 표피적인 동진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세상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보살도’의 단계가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동진이 무르익은 경지가 있으니 그것은 ‘혁명가의 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개인적 인연의 구제에 그치지 않고 현실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수준의 화광동진이라는 것이다.
 화광동진은 노자가 말했지만 사실 화광동진의 경지를 끝까지 체현한 사람은 공자라고 박교수는 보고 있다.
노자는 화광동진의 경지를 알았을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결국 문명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화광동진을 종교계에서 변주한 것이 바로 동양적인 성스러움을 표현한 대성약범(大聖若凡)이다. 
이는 거룩한 기독교와 범속한 유교,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와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사이에서 철저하게 대비되어 드러난다.
공자는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범속한 일상의 윤리를 강조하며 개인적 수양과 사회적실천의 통합을 강조했다. 공자는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버둥거리며 평생을 살았다. 공자야말로 대성약범의 대성인이다.

◇대교약졸

 낮은 수준에서는 기교가 밖으로 그냥 드러난다.
하지만 기교가 커져 무르익게 되면 기교는 안으로 감추어지고 겉으로는 다시 서툰 듯이 보인다는 것이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의미다. 
이 경우 졸은 단지 교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를 통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차원의 졸이다. 이렇게 졸에서 교로 나아갔다가 다시 졸로 돌아온다는 말 속에는 회귀의 개념이 들어있으나 이는 평면의 무한순환이 아닌 삼차원의 나선형발전을 의미하게 된다.
 대교약졸의 미학이 구체화되어 다섯가지 미적범주을 이룬다. 저자는 세련된 소박미와 심오한 단순미, 숙성된 평담미 그리고 분산된 통일미와 배경과의 조화미를 들고 있다.
인공적 기교를 통과하여 다시 원초적 생명력을 회복한 소박미(素樸美),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내면으로 숨겨 안정감과 깊이를 주는 단순미(單純美), 
평범한 듯 담백하여 부담없이 편안한 평담미(平淡美), 뚜렷하게 가시적인 구심점이 보이지 않고 각 부분의 개성이 살아있으면서 모호하게 기운이 통일되어있는 통일미, 
주체를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고 배경인 자연과 사회를 끌어안아 조화를 이루는 조화미가 그것이다.
 앞의 세가지는 감추기와 나선형회귀의 두 가지 속성을 다 가지고 있고 뒤의 두가지는 감추기와만 관계가 있다. 이들 다섯가지 아름다움 모두에 공통된 특징은 안으로 감추기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렴미라고 할 수 있다. 
수렴미란 발산미와 대비되는 말이다. 서양의 미학적 특성인 발산미가 자신의 아름다움의 빛을 밖으로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동아시아의 수렴미는 아름다움의 강한 빛을 속으로 감추는 것이다. 결국 화광동진과도 통하는 것이다.
대교약졸에 대립되는 서양의 아름다움은 기교를 중시하는 화려미, 다채로운 농염미, 시선이 하나로 고정된 초점투시의 집중된 통일미, 전경을 독자적으로 부각시키는 전경미를 들 수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양방향의 아름다움은 서양과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화적 코드이다.

◇동아시아와 서양 미의식 차이의 근원

 이러한 미의식의 차이는 대비되는 삶의방식과 문자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문화의  근원을 이루는것은 해양의 그리스문명이고 동아시아 문화의 근원은 대평원의 중국문명이다.
 에게해를 무대로 상공업으로 부를 일군 그리스정신은 개별자 중심으로 배를 타고 멀리 낯선 곳으로 가는 지적 오디세이를 이루었고, 일찍부터 황하강 유역에 자리잡고 사람들간 협력이 필수적인 쌀농사로 시작한 중국문명은 질서와 조화를 체화하는 문명을 일구었다.
거기에 굴절어인 그리스, 로마어와 고립어인 중국어의 차이에서도 사유방식과 철학의 체계, 그리고 미의식의 차이가 비롯된다.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여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체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양과 중국의 가장 큰 차이는 서양은 표음문자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은 상형에서 출발한 표의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설령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도 그것을 문자로 표시할 때는 구체적인 이미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의 경우 수많은 격변화의 규칙을 잘 지키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면 아무래도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가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한문어법은 융통성이 너무 많아 막연하고 모호한 측면이 있다. 대신 문장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면서 그 속에서 각 단어들의 역할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총체적 직관적 사유는 더 발달하게 된다.

 공자가 말한 인이나 노자가 말한 도 또한 마찬가지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을 수없이 언급하였지만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리적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인 실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 또한 논리적사유가 아닌 마음을 허정하게 한 가운데 바로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궁극의 실재가 이 현상계의 데이터에 따른 논의로는 증명될 수 없으며 직접 경험에 의해 체험되어야 한다. 철학이란 인생의 길이며 그것에 대한 사고가 아니라 생활에서의 실천이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 철학이란 반드시 인생의 길은 아니며 그것의 입증은 이성에 의해서만 증명이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서양은 리얼한 것을 보기를 원하고, 동양은 리얼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

◇새로운 통합문명의 미래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와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동아시아문화라는 두 줄기 흐름은 근대의 산업혁명으로 승기를 잡은 서양문화의 완승으로 일단 종결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두차례 세계대전을 거치고 지역의 장벽이 무너지며 하나의 세계문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전혀 새로운 문화적 요구, 심미관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음악이나 영화, 티브이 등 지금의 대중문화는 자극적인 소재, 말초신경을 흥분시키는 표현 등 발산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노자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우리의 감각기관을 망가뜨리고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발산형문화의 폐단이다. 
이제 인류문명은 힘을 과시하고 발산미에 탐닉하는 것을 넘어 차분한 지혜와 수렴미가 필요한 중년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산의 아름다움을 성숙시켜서 다시 수렴으로 돌리는 대교약졸의 미학이 필요하다.

 지금의 고등종교 및 철학사상들은 대략 기원전 8~2세기, 소위 <축의 시대>에 등장했다. 당시는 문명의 대변혁기로 조그만 지역단위 도시국가들이 통합되면서 점차 강력한 고대제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원시적인 부족종교나 윤리로는 새로운 사회환경에 대응할 수 없어 새로운 사상과 종교가 요구되었으며 보다 넓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심원한 변화가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근대 이후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적 통합의 기운이 시작되면서 <제2의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변화는 과학적 합리적 사유능력의 발달로 신화적 초월적 성스러움이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개혁개방으로 오랜 잠에서 깨어난 중국이 새로운 문명의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앞세워 역사학계의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을 꾀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영화에 기댄 대국주의의 발로로 볼 수 있는데 결국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것이 박교수의 지적이다.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유우석은 “산의 명성은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 되는 것이고, 물의 명성은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이 살아야 영험해진다.”라는 말을 하였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화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계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문화의 깊이가 있어야 진정한 대국이라는 것이다.
 박석 교수는 동서양을 가로지르고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예술과 종교와 사상을 광폭으로 넘나든 사유의 끝을 다음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동아시아의 오랜 강자 중국, 19세기 후반에 부상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본, 그리고 20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 어느 나라에서 동서문화가 융합된 더 큰 보편성을 지닌 새로운 문화가 나올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 각자 선의의 경쟁을 하며 노력할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대체 마지막을 어떻게 끝낼까, 중국찬양으로 끝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역시 멀리보고 깊이 보는 인문학 천재다운 클로징이다. 박석교수의 다음 저작이 기대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어서 우리집 문앞의 눈을 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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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230328
  · 
현관문 앞에 하얀꽃잎이 눈처럼 날리면

 우리 빌라와 옆집 빌라사이 좁은 공터에 자란 벚나무는 영 볼 품이 없다. 햇볕을 찾아 가늘고 길게 몸피를 늘여서 솟아올라 멀대같이 키만 크다. 
하지만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높은 가지에 봄이면 솔찬히 꽃을 피워내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검은 아스팔트 인도에 하얀꽃잎이 눈처럼 내려있다. 
 눈처럼 하얀 꽃잎을 보면 어디 싸리비라도 찾아 쓸고 싶어진다. 
송나라 휘종대 진적선사(眞寂禪師) 일화가 생각나 마음이 더욱 정갈해진다.

ㅡ법당을 열던 날, 어느 승려가 물었다.
"세존이 세상에 나왔을 때 땅에서는 금빛 연꽃이 솟아올랐는데 
스님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습니까?"

스승은 답하기를, "문 앞에 눈을 쓸었다.".ㅡ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에서 박석교수는 이 일화를 새롭게 해석한다.

법당을 열어 설법을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일화는 인도식 깨달음선종 깨달음미학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한다.

인도식 깨달음이 기이한 이적과 지극한 성스러움을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된 반면 
선종의 깨달음은 평범하고 담백한 일상사 속에 숨겨져있다는 것이다.

박석교수는 선종은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아버지로, 중국의 도가사상을 어머니로 삼아 탄생했기 때문에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미학을 내면화했다고 본다.

화광동진은 선가에 와서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는  진광불휘(眞光不輝)로 변주된다. 
여기서 진적선사는  
'깨달음의 성스러운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것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범속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 보통사람처럼' 문 앞에 눈을 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진정한 성스러움은 밥먹고 일하는 일상에 있다고 
현관문 앞에 내려앉은 하얀꽃잎은 말해준다.

도닦는게 별건가.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어린시절부터 이 노래를 부르면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항상 고요한 산사의 아침같은 마음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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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omments
이군희
저는 요즘 가슴 속의 빗물을 쓸어야 할 듯 싶네요..ㅜ.ㅜ
지인이 많이 아파서 흩어지는 마음을 어떻게 쓸어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Reply3 d
박정미
이군희 그 빗물을 저도 같이 쓸어드리고 싶어집니다. 그 비가 어서 그치기를 마음 보탭니다. 교장선생님. 힘 내시길요.
Reply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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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철
Reply3 d
Ilwon Yoon
"문 앞에 눈을 쓸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Reply3 d
박정미
윤일원 일화를 처음 읽는데 차고 맑고 푸른 기운이 찻물처럼 몸 속에 흘러드는 것 같았습니다.
Reply2 d


정금희
이렇게도 찬란하게 목련이 피었는데 의성은 긴 고난을 뚫고봉오리를 터트려 고고한 자태를 뽐내지도 못한 채 어제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모두 갈색이 되어 주렁주렁 달렸는데 가슴 한 켠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지....
Reply3 d
박정미
정금희 영하라니요. 이 좁장한 반도에서 무슨 변괴랍니까. 의성에 겨울요괴가 잠시 난동을 부렸나봅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하루이틀이겠죠. 이제 힘을 못 쓸겁니다.
찬란한 봄이 피어날겁니다. 목련도 그냥 지지만은 않을거구요!
Reply2 d


김두화
아예 1도를 하셨군요.
Reply2 d
박정미
김두화 일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런 기분이 확실히 듭니다. 
안보이면서 꽃잎을 보내주는 벚나무에게 감사하는 마음도요^^
Reply2 d


Jungeun Kim
맞아요 언니 매일 아침 청소하고 빵을 준비하고 커피를 내리면서 행복해요ㅎ 오늘도 행복하세요💕
Reply2 d
박정미
Jungeun Kim 네가 진정한 도인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하루하루 일상을 변함없이 지켜내는것, 그것이 도력 아닐까, 싶다.
화이팅!
Reply2 d
Jungeun Kim
박정미
Happy Tom And Jerry GIF
Reply2 d


이근식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행복한 아침!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웃는 일,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
Reply2 d
Rie Saito
私たちが友好的にお互いの国の文化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れば、フェイスブックを追加することができればもっといいですね。
ReplySee translation2 d
이병철
낙화인들 꽃이 아니라 쓸어 무삼하리요.
나는 떨어져 있는 꽃이나 눈을 보면 사람들이 쓸어버릴까 마음이 조려지네.
떨어져 있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까. 떨어진 꽃을 밟지 않으려고 길을 돌아가네.
Reply2 d
박정미
이병철 꽃잎을 쓸다가 빗질을 멈추고 잠시 푸른 하늘을 우러릅니다. 아! 빗질은 호사요, 흉내일뿐이지요. 저 하늘 가득 내리는 꽃눈을 보세요.
Reply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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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

최정철 2004.09.01 11:11 조회 수 : 375

NIKON D100 2004:08:28 16:03:481/90sF11.0+0.33 EV조리개 우선 모드스팟105mm430x644



콩과식물인 싸리나무입니다.
옛날에 줄기를 이용해서 빗자루나 사립문 같은 것을 만드는데 이용했었지요.
저 어렸을 때에는 '싸리비'라는 동요를 배웠는데 요새도 배울까요?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꽃잎과 빗물을 쓸던 이 싸리비.
이제는 낙옆을 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2023/03/17

알라딘: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알라딘: 모멸감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은이),
유주환 

문학과지성사201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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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쪽
135*210mm
465g
ISBN : 978893202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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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빚어내는 일상의 문법을 추적해온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가 이번에는 ‘감정’으로 삶과 사회를 읽어냈다. “감정은 이성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 『모멸감』에서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함을 역설한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마음의 습관은 인간 사회를 순조롭게 작동하게 하지만, 그 질서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회를 보는 논리』 『문화의 발견』 『돈의 인문학』 등의 저서를 출간하며 일상에 주목해온 그간의 작업과도 일맥상통한다. 생생한 현장 연구와 학자로서의 전문적인 식견, 친근하고도 유려한 글쓰기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자리매김해온 저자는, 이번 책에서 ‘모멸감’을 키워드로 한국인의 마음 풍경과 한국 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낱낱이 해부한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 감정의 사회적 문법
1. 나도 모르는 나
2.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3. 한국인의 마음 풍경

1장 모멸감,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
1. 수치심의 두 얼굴
2. 모멸,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
3. 치욕과 폭력의 악순환
4.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자본주의
5. 미소 뒤의 분노, 감정노동

2장 한국 사회와 모멸의 구조
1. 언어에 반영된 한국인의 정서 지형
2. 귀천에 대한 강박
3. 신분제의 붕괴, 신분의식의 지속
4. 위계 서열과 힘의 우열
5. 공동체의 붕괴, 집단주의의 지속
6. 인종주의와 콤플렉스

3장 모멸의 스펙트럼
1. 인간 이하로 취급_비하
2. 열등한 존재로 구분 짓기_차별
3. 비웃고 깔보고_조롱
4. 대놓고 또는 은근히 밀어내기_무시
5. 시선의 폭력에서 섣부른 참견까지_침해
6. 불쌍한 대상으로 못 박기_동정
7. 문화의 코드 차이_오해

4장 인간적인 사회를 향하여
1. 품위를 잃지 않도록
2. 문제는 감수성이다
3. 물리적 쾌적함, 생리적 청결함
4. 화폐의 논리를 넘어선 세계
5. 소수자들의 연대와 결속
6. 환대의 시공간

5장 생존에서 존엄으로
1.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2. 누가 나를 모욕한다 해도
3. 감정의 주인이 되려면
4. 행복감은 우월감이 아니다

맺음말

음악과 감정_유주환
1. 음악에 나타난 감정의 흔적
2. 현악 사중주를 위한 열 개의 단상, 모멸감이 나오기까지
연주자 약력

접기


책속에서


P. 35~36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의 습관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폭넓은 시선으로 조망하면서 상대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여러 사회의 습속이나 관행을 입체적으로 대조하는 문화인류학적인 렌즈와도 일맥상통한다. ... 더보기
P. 41 모멸을 주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여러 가지 기준으로 열등한 집단을 범주화하고 멸시하는 통념이나 문화의 위력도 만만치 않다. 일부 소수의 ‘잘난’ 사람들만을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박대 또는 천대를 받는 듯 느낀다. 은희경의 소설 제목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응용하자면, 부유함이 똑똑함이 젊음이…… 나를 멸시한다. 아무도 대놓고 비웃지 않지만 열패감에 젖어든다. 누가 자기에게 손가락질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위축되는 것이다. 은근히 깔보는 마음이 느껴진다. 자신도 그러한 시선에 자연스럽게 동의하면서 자격지심에 빠져든다. 접기
P. 81~82 모멸은 ‘정서적인 원자폭탄’이라는 비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폭력이며, 평생을 두고 시달리는 응어리를 가슴에 남기기 일쑤다. 「올드 보이」나 「디스커넥트」 같은 영화에서 잘 묘사했듯이,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기억은 세상에 대한 증오 또는 자기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억울하게 수모를 당했다는 피해의식은 다른 집단에 대한 맹렬한 공격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간 개인의 내면 그리고 사회에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두운 심연이 있다. 매일 접하는 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규모와 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 이유 없는 저주와 맹목적인 폭행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많은 경우 그 씨앗은 모멸감으로 밝혀진다. 접기
P. 88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굴욕감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소비시장이다.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쓰고 싶다.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덮어씌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최소한의 신체적인 안락을 위한 소비라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비교가 이루어지는 소비사회에서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자꾸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소비 급수의 사다리가 점점 높아지고, 웬만큼 재산을 갖고 있거나 소비를 하지 않으면 위신을 인정받지 못한다. 최소한의 품위 유지비가 너무 높다. 접기
P. 116~118 ‘귀’는 곧 ‘고귀하다’는 뜻이고, 영어로 풀이하면 ‘noble’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와 달리 객관적으로 금방 드러나거나 비교되기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양의 구속을 받지 않고 질로 평가된다. 당사자를 직접 만나거나 함께 지내면서 그 고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삶을 가꾸고 마음을 연마함으로써 고귀해질 수 있다. 비록 다른 복을 받지 못했다 해도, 귀만큼은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닦음으로써, 어떤 사람은 예술이나 종교를 통해,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많은 것을 베풂으로써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개방되어야 할 ‘귀’마저도 벼슬이라는 것으로 축소되고 획일화되었다는 것이 최 교수의 평가다. 〔……〕
지금은 조선 시대와 달리 ‘귀’가 관직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관료기구 이외에도 수많은 조직이 생겨났고, 거기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귀’를 나타낸다. 그리고 시장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재력이 곧 ‘귀’와 동일시되는 경향도 있다.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높은 연봉을 받느냐, 소비시장에서 얼마만큼의 구매력을 갖느냐가 행복의 기준으로 절대화되어간다. 교육열이라는 것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러한 일원적인 가치를 향한 경쟁에 다름 아니다. 아이에서 청년에 이르기까지, 장차 ‘천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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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찬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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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사회학을 전공했고 일본의 마을 만들기를 현장 연구하여 박사논문을 썼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과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부센터장을 지낸 바 있고, 현재 교육센터 마음의씨앗 부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멸감』 『눌변』 『생애의 발견』 『사회를 보는 논리』 『도시는 미디어다』 『문화의 발견』 『휴대폰이 말하다』 『교육의 상상력』 『돈의 인문학』 『인류학자가 자동차를 만든다고?』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작은 인간』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공역), 『학교와 계급 재생산』(공역)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큰글자도서] 대면 비대면 외면>,<대면 비대면 외면>,<[큰글자도서] 나는 오늘도 교사이고 싶다> … 총 50종 (모두보기)

유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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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음악 이론가. 연세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두 번의 개인작품 발표회를 비롯한 활동으로 국내외 단체로부터 다양한 음악상을 수상했다. 대학에서 음악 이론과 음악 역사에 관해 강의하고 있으며 대학 바깥의 시민대학에서 현대음악, 서양 전통음악의 이해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퀵서비스 관현악법』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관현악을 위한 산조』 『피아노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 『바리톤과 앙상블을 위한 ‘입속의 검은 입’』 『현악 사중주 제3번』 『피아노 삼중주 제3번』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퀵서비스 관현악법> … 총 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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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소설 보다 : 봄 2023>,<거침없이 내성적인>,<문학과 사회 141호 - 2023.봄 (본책 + 하이픈)>등 총 1,893종
대표분야 : 한국시 1위 (브랜드 지수 1,675,708점),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6위 (브랜드 지수 902,623점), 철학 일반 10위 (브랜드 지수 73,68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모멸감 ː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

악플, 왕따, 감정노동, 갑을관계…… 모멸 권하는 한국 사회를 해부한다!
「짝」 카톡, “카메라가 따라다녀… 인격적 모멸감 느껴”
“주민 센터 갈 때마다 구걸하러 가는 느낌에 모멸감”
허지웅 악플 심경 고백, “멸치 이야기 자주 들어! 모멸감 느껴진다”
대구 여대생 아버지, “경찰 핀잔에 모멸감 느꼈다”
“모멸감 느껴”… 내년 향해 치닫는 민주 장외투쟁 시계바늘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한 기사 제목이다. 비단 뉴스뿐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를 비롯해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모멸감’이란 단어는 자주 쓰인다. 출퇴근길 도로 위에서 주고받는 거친 언사, 학교나 회사에서 겪는 크고 작은 모욕, 수화기 너머에서 혹은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평범한 일상에서 ‘모멸감’은 빈번하게 경험된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모멸감―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은 한국인의 일상에 만연한 ‘모멸감’의 실체를 인문학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국내서로, ‘모멸감’을 키워드 삼아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조명하면서 한국인의 삶과 마음의 문법을 추적한다. 한국에서 모멸감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경험되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모욕을 주고받는가. 한국의 사회와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크고 작은 모욕이 이어지는 데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가. 모멸감을 딛고 일어서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못난 사람들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어떻게 열릴까.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인문학.심리학 문헌을 비롯해 뉴스 기사,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오가는 대사, 수많은 문학작품 등에서 수집한 적실한 실례와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어가며 흥미진진한 논의를 전개해간다. 책의 저자인 사회학자 김찬호가 타진하고 있는 이 새로운 시도는 독자들에게 ‘감정’의 차원에서 우리 사회를 조망하고 성찰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일상의 문법을 추적해온 김찬호 교수, ‘감정’으로 삶과 사회를 읽다!
그동안 꾸준히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빚어내는 일상의 문법을 추적해온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가 이번에는 ‘감정’으로 삶과 사회를 읽어냈다. “감정은 이성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기 때문. 저자는 이 책 『모멸감』에서 ‘감정’을 사회적인 지평에서 분석하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함을 역설한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마음의 습관은 인간 사회를 순조롭게 작동하게 하지만, 그 질서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회를 보는 논리』 『문화의 발견』 『돈의 인문학』 등의 저서를 출간하며 일상에 주목해온 그간의 작업과도 일맥상통한다. 생생한 현장 연구와 학자로서의 전문적인 식견, 친근하고도 유려한 글쓰기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자리매김해온 저자는, 이번 책에서 ‘모멸감’을 키워드로 한국인의 마음 풍경과 한국 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낱낱이 해부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가혹한 입시 경쟁, 인터넷에 범람하는 악플, 최근 새롭게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감정노동, 유행어처럼 쓰이는 갑을관계…… 저자는 이러한 정황 이면에 한국인의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모멸감이 사회 곳곳에 만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모욕의 실체를 규명하고 모멸감을 성찰하는 언어가 빈곤하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모멸감은 흔히 ‘정서적인 원자폭탄’이라고도 불리며, 인간을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폭력으로 발화하기도 한다. 그것은 ‘화’ ‘분노’ ‘우울’ 등의 감정과 달리 객관화하기 힘든 속성을 지닌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그 어둡고 복잡한 마음자리를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개인의 심리나 일상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경험을 성찰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시선을 사회적 지평으로까지 확대, 분석한다.

우리는 왜 서로 모멸감을 주고받는가
모멸은 ‘업신여기고 얕잡아봄,’ 모멸감은 ‘모멸스러운 느낌’으로 풀이된다. 모멸감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이며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을 파괴한다. 많은 경우 모멸은 다른 모멸로 이어지면서 자괴감과 수치심을 확대 재생산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분노는 자기나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도 표출된다. 저자 김찬호는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로 ‘모멸감’을 지목하며, 한국 사회에 만연한 모멸의 흔적을 다양한 각도에서 추적, 조명한다.
「프롤로그」에서는 감정이 개인의 내밀한 영역이면서 사회적으로 작동함을 밝히고 감정의 차원에서 인간의 문화를 새롭게 구상할 것을 제안한다. 1장에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모멸감이 지니는 기본적인 속성을 해명하며, 그것이 삶과 인간관계를 어떻게 왜곡하고 폭력화하는지를 여러 사례를 통해 살피고 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멸감이 경험되는 양상을 노동 세계에 맞춰 들여다본다.
2장에서는 한국 사회의 정서적 지형을 조감하면서 모멸감이 만연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분석한다. 조선 시대에 형성된 귀천의식과 신분적 우열 관념은 외형을 달리한 채 끈질기게 지속되어왔고, 산업사회 및 소비사회와 맞물려 사람들 사이에 피곤한 경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위신을 확인하려는 문화 역시 강한 관성으로 남아 있는 데 반해, 개인을 감싸주고 인정하는 공동체는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크고 작은 모멸감이 가중되고, 훼손된 자아를 보상받으려는 집단 콤플렉스가 공격적인 민족주의와 편협한 인종주의로도 나타난다.
3장에서는 인간세계에 나타나는 모멸의 존재 방식을 일곱 개의 범주로 나누어 살펴본다. 사람 사이에 격을 나누고 가치를 매기는 현실, 사람 자체를 본질적으로 위계화하며 거기에 사회적인 명예나 실존의 가치까지 결부시키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의미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모멸감이 얼마나 씁쓸하게 경험되는지를 여러 사례와 인용, 그리고 저자의 경험을 통해 짚어본다.

모멸감을 뛰어넘어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삶에 관한 탐색!
저자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모멸감이 보다 날카롭게 경험되는 데는, 조선 시대에 형성된 귀천의식과 신분적 우열 관념이 자의적으로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급격하게 추진된 산업화와 급변한 사회 환경이 역사적 배경에 있다고 분석한다. 그와 맞물려 모든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가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바로 정치.사회제도와 경제력 간의 불균형, 삶의 형태와 의식 사이의 부정합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악플, 왕따, 감정노동, 갑을관계 등 모멸 권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돈 벌면서 받은 멸시를 돈 쓰면서 풀고, 누군가에게 당한 모욕을 다른 누군가에게 앙갚음하고, 아무도 대놓고 비웃지 않지만 스스로 열패감에 젖어든다. 은근히 깔보는 마음을 느끼고, 스스로에게도 그러한 시선에 동의하며 자격지심에 빠져든다.
그렇다면 모멸감을 뛰어넘어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못난 사람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어떻게 열릴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의 4장과 5장을 통해 세 가지 측면에서 그 해결책을 모색한다. 첫째는 구조적인 차원의 접근으로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경험하며 ‘기적’이라 불릴 만한 놀라운 발전을 일궈냈지만, 여전히 우리 삶은 퍽퍽하기만 하다. 절대 빈곤, 실업 등을 비롯해 최소한의 품위를 갖출 수 없다는 것, 자신이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엄청난 모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의 몫으로 수렴되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가 제기된다. 둘째는 문화적인 차원의 접근이다. 학력이나 외모, 경제력, 피부색, 나이 등 외형적인 차이를 절대화하면서 멸시하는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넘어 느끼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모욕 감수성’을 제안한다. 셋째는 개인적 차원이다. 아무리 사회와 제도가 정비되더라도 모멸감을 아예 느끼고 살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삶의 자리에 모멸이 차고 넘치는 까닭은 스스로의 품위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인을 쉽게 모욕하는 풍토는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멸감에 취약한 심성에 대해 저마다 일정 부분씩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존중과 자존의 문화는 여럿이 만드는 것이면서, 그 출발과 귀결의 지점은 결국 각자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또 한 가지 새로운 시도는 바로 ‘음악’이다. 작곡가 유주환 선생이 텍스트를 바탕으로 마음이 머물게 된 열 군데 대목을 골라 모두 열 개의 곡을 썼다(QR코드로 연결, 유튜브로 감상 가능 https://youtu.be/doG76EJbDPU). 음악사적으로도 불안이나 분노, 고독이나 초조함, 슬픔이나 기쁨 등을 주제로 한 곡은 많지만,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다룬 곡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인문사회과학 서적과 음악과의 이 만남은 새로운 시도라는 참신함과 더불어 독자들이 텍스트를 읽고 향유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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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서와 대중서 사이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작업을 하고계신 김찬호 선생님의 저작. 좋은 책이자.
두크나이트 2019-02-01 공감 (2) 댓글 (0)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 유주환 작곡 문학과지성사 학교에서 '어쩌다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인문학 교실이 진행되고 있는데, 과학중점반에 적을 둔 나로서는 적극 참여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행사를 계기로 이 책을 살펴보게 되었다. 주제가 다양한 인문학 교실을 3차에 걸쳐 진행되는데, 4월에 실시된 첫 번째 인문학 교실은 역사학자... 더보기
두뽀사리 2018-05-28 공감 (3) 댓글 (0)



5월에 예정된 두 번째 인문학특강 주교재라서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나에겐 생소하고 낯선 분야라서 다소 걱정스럽기는한데... 그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뽀사리 2018-04-2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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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를 기대한다면 후회할 책.
무시와 모멸을 당하는 사례만을 엮었다.
해당 사례에 대한 깊은 논의로 발전하지 않고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포장돼있어 미리 읽어보고 살수도 없는 책...
SPG 2014-05-13 공감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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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것을 비단 내안에서만 일어나는 화학작용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조건에서 형성되는 마음의 습관 내지 정서의 얼개로 파악하고 우리사회에 만연한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풀어나가는 글을 읽으면서 내 속의 모멸감도 수없이 반추해볼 수 있었다. 글이쉬워 얼개가 쉬이풀리는 듯하지만 무겁게 남
김민준 2016-01-24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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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부터, 첫장부터 확 빠져들게 하는 인문과학서!
한국사회에서의 `모멸감`에 대한 첫 분석.
보물선 2015-02-15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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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stillyours 2017-11-0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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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서와 대중서 사이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작업을 하고계신 김찬호 선생님의 저작. 좋은 책이자.
두크나이트 2019-02-01 공감 (2) 댓글 (0)

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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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요새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는 기사 중 하나가 '보복운전'이다. 최진기 씨는 도로 위에 서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빈부격차'가 운전자의 심리를 더 극단으로 몰아가게 한다고 진단한 바가 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차종의 차이에서 이미 모욕감을 받은 것일까? 그런 상대가 나를 제치고 가는 것에 욱하고, 나보다 못한 차를 모는 자가 '감히' 끼어들거나 하면 분노가 폭발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수치심을 느끼는 대한민국이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은 따로 있는데, 물질적인 부분에서만 노골적으로 비교하고 열등감을 갖는 것은 아닌지?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은 또 다른 모멸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68쪽




낮은 자존감이 유리멘탈을 불러오는 것일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에게서 느끼는 가장 큰 불만 중 하나가 이들이 식당에 가면 종업원에게 지나치게 불친절하게 군다는 것이다. 굉장히 까칠하게 군달까? 내 생각엔 문제 삼을 만큼 상대방이 불친절했던 것도 아닌데 자긴 너무 기분 나쁘다며 틱틱 댄다. 차라리 조목조목 어떤 부분이 문제가 있다고 따지기라도 하면 낫겠는데 그러진 않으면서 자신의 불쾌함을 보란듯이 드러낸다. 같이 있는 내가 불편할 정도로. 내가 공통적으로 느낀 건 이들이 '돈 쓸 때' 그런다는 것이다. 평소 '을'로 살면서 느낀 부당함과 서러움을 돈 쓰면서 손님이 될 때 '갑' 행세를 한다고 느껴졌다. 이런 깨달음이 참 슬펐다.





돈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 본질이 사악한 것은 아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돈은 인간에게 자유를 증진시켜주었다. 문명의 탄생과 함께 출현해 1,2세기 전까지 세계 곳곳에 존재하던 노예는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예를 대신해 임노동자들이 대거 도시에 등장했다. 노동자는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일을 할 뿐, 그 누구도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없다. 이런 변화는 돈이 사회의 지배 원리가 되면서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돈은 일정 정도의 진보성을 갖는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똑같은 대접을 받는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귀족들만 누릴 수 있던 호사를 이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얼마든지 향유할 수 있다. -87쪽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바로 그 돈 때문에 빈곤해지고 구속을 받는다. 금융자본의 막강한 힘과 지식 정보 중심의 산업구조 재편, 그리고 비민주적인 국가정책과 경제 시스템 속에서 빈부의 격차는 계속 벌어진다. 게다가 시장 원리가 사회질서를 대체하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이 상품화된다. 이제 돈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돈 벌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공급과잉과 노동의 종말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밥벌이를 하려면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87쪽




우리는 남들을 열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한다. 자기보다 못났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과의 선 긋기를 통해 스스로의 잘남을 확인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절대적인 기준이다. 경제의 수단으로 고안된 돈이 삶의 목적이 된다. 그 결과 삶 자체가 수단이 되어버린다. 사용설명서specification의 약자인 ‘스펙’이 경력 및 자격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90쪽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단순히 불편한 것에서 그치던가?





서울의 청계천이 그러했듯이,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개천이 매우 더러웠고 그 주변에서 하층민들이 애옥살이하고 있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비유는 그런 구체적인 공간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표현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은연중에 가난을 더러움으로 직결시키는 고정관념이 지속되기 마련이다. 경제적인 궁핍이 단순한 결핍이나 불편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저열함으로 등식화되는 것이다. -170쪽




자주 쓰는 표현인데 저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저자의 지적이 맞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서도 이젠 개천에서 아예 용이 나오질 않고 있다. 속담 자체를 수정해야 할 판이다.





타인의 시선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상처와 아픔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것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마음의 습관은 상대방을 그 굴레에 가두어둔다. 그의 모든 성격과 행동을 트라우마와 결부시키면서 비정상의 부류에 묶어버린다. 그 결과 연민의 눈길은 수치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는 자는 자신이 더 낫다는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일종의 권력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197쪽




자각을 하든 못하든 저런 우를 범하기 쉽다.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같은 선상에서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도 이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차태현과 자신을 좋아하는 김수현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공효진에게 막내 작가가 조언을 한다. 더 미안한 쪽을 버리라고. 동정으로는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다. 그것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연인사이뿐 아니라 다른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해서 노숙자를 찾은 얼 쇼리스 씨의 이 대목은 감동 그 자체다.





온갖 고통을 모질게 겪어왔고 하루하루 생계가 막막한 이들에게 안부나 위로 대신 다짜고짜 시를 좋아하느냐는 질문, 그것은 그분들의 삶에 대한 깊은 경외감과 신뢰가 없이는 나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여성 노숙인과 미국의 남성 지식인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존재 조건에서 너무나 차이가 크다. 그런데 얼 쇼리스 씨는 그 거리를 뛰어넘어 시詩라는 ‘섬’을 찾으려 했다. 빵의 문제로 허덕이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장미 한 송이에 대한 소망을 클릭해주었다. -257쪽




쉽게 모멸감을 주고 쉽게 모멸감을 느끼는 사회를 살고 있다. 급격하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고, 급격하게 받아들인 민주주의는 성장속도를 맞추지 못했다. 저자의 지적대로 '역지사지'를 뛰어넘어 '역지감지'가 필요한 때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나자신이 먼저 건강한 멘탈을 가져야 한다. 이 책은 4월에 읽었는데 그 무렵에 나에게 '갑질'을 한 누군가로 인해 큰 모멸감을 느꼈더랬다.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를 썼지만 며칠간 분노가 일었고, 그 후로는 상대방을 볼 때마다 그 감정이 되살아나서 마음이 활활 타오르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대로 사과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몇 번에 걸쳐서 자신이 사실은 아픈 상태라는 것을 거듭 말하는 것을 보며 미움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타인 위에 군림하지 않고 위엄을 누릴 수 있을까.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기품은 어디에서 우러나올까. 품격은 겉멋이 아니다. 예절은 단순한 고분고분함을 넘어선다. 자기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품에서 격조 있는 삶이 가능하다. 높은 것에 사로잡혀 삶을 창조하기에 자기를 돌볼 줄 안다.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며 스스로 채워진 마음이 타인에게 스며들기에 품위 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위엄과 기품이 사회적 풍토로 자리 잡을 때, 모멸감의 악순환도 줄어든다. 그 길은 자존의 각성과 결단에서 열린다. -307쪽




모멸감의 악순환을 낳는 것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분명히 있지만 개인도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앞서 제시한 사례처럼 식당 같은 곳에서 '손님은 왕이다'라는 생각은 제발 하지 말기를. 난 언니의 가게에서 8년 동안 일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자영업의 고단함이 너무 크게 공감이 간다. 불친절한 사장이나 종업원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당신이 불친절한 손님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안 그래도 피곤한 세상에서 제발 갑질들 하지 맙시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음반이 같이 들어 있다. 책의 주제에 맞게 '힐링'용 명상음악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런 뻔함을 깨버린 것도 참 신선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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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5-08-24 공감(2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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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모멸감

최고의 책이다.
최고의 혁신적인 음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으려고 플레이어에 시디를 넣었는데 음악이 재생되고 5초 후에..
어설프게 시디를 조작하던 내 딸이 아주 신속하게 음악을 끄고 시디를 빼서 던져버렸다.
이런 음악은 안 듣겠다며..
정말 음악이 모멸감을 주나보다.
최고다.

이 책을 보며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문제점과 함께
내 삶을 이끈 원동력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이성을 잃고 화가 나서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내 기본적인 문제는 바로 모멸감이었다.
아주 최근에 `아줌마`사건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사회학자인 저자는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모멸감을 주고받는 사회가 됐는지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연구한다.
일단 우리나라는 빠르게 평등사회로 변화됐는데 그에 반해 상놈과 양반을 가르는 그 행태는 아직 잔존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양반 가문의 며느리가 상놈 집안이지만 이제는 제법 돈이 많은 집 여자를 얕보았다가..
하인 집안사람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러느냐.. 이제 좀 나에게 그런 수모를 주지 말아라. 나도 사람이다.˝이런 얘기를 감정을 섞어 격하게 하자, 감히 상놈이 지체 높은 나를 공연히 사람이 많은 데서 창피를 줬다며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단다.
1960년대로 기억남. 그 사건을 보고 진짜 빵 터졌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으로 계급 지어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땅콩 사건 라면 사건 등등을 봐도 자신이 돈이 있기에 더 우위에 있다는 전제 아래 당당하게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선사한다.

내가 부러워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꼭 모멸감을 줘서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이것을 아주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정말 다 읽기가 아까워서 아껴읽게 된다.
사실 저자의 강의도 들었는데 다시 듣고 싶은 생각도 들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모두 마음을 활짝 열어서 흡사 전에 강신주의 `다상담`과 같은 심각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래서.
이런 모멸감을 받고 모멸감을 주는 이런 각박한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모멸감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인가?
예를 들어 상대방이 갖고 있는 루이비통이 부럽다.
하지만 나는 상대방의 루이비통이 부럽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러면 난 그 상대방에게 ˝된장녀˝라고 얘기하면서 사치하고 시녀들이 줄줄 따르네..라면서 비아냥 될 수도 있다.
이게 현대 대한민국 표준 반응이기도 하고..
모멸감을 주지 않으려면 그냥 인정하는 거다.
˝와-나도 저 루이비통 갖고 싶다. 진짜 좋아 보인다.˝
그게 끝이다.
그러면 내 안의 주체할 수 없는 질투와 모멸감으로 상대에게 정신적 스크래치를 주고 싶은 욕망을 잠재울 수 있다.
˝나는 나만의 패션 세계가 있거든?루이비통은 내 시각에서 정말 쓰레기야.˝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건 `정신 승리`. 옳지 않은 자기 정당화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정말 내 안에 있는 모든 나쁜 마음의 근원에 대해 정말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내 모든 상처의 근원도 모멸감이고..
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상처 또한 모멸감이 가장 많으리라.. 내가 의도하던 의도치 않던 간에 말이다.

현대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꼭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감히 이 책을 내 인생의 책이라 평한다.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이분법은 다양하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똑똑하고 너는 멍청하다. 나는 유능하고 너는 무능하다. 나는 강하고 너는 약하다. 나는 예쁘고 너는 못생겼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이런 구분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상대방의 열등감을 자아낸다. 단편적인 잣대로 사람의 격을 나누고 자의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속에서 모멸감을 주고받는다.(174)

소통에는 정성이 중요하다. 정성이란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몸으로 함께 있는 사람이 내게 온 마음을 기울여줄 때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경청하고,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늘어놓으면 자존감이 상한다. 그렇게 겉도는 만남과 대화 속에서 심성은 자꾸만 건조해지고 냉랭해진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사소한 부주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섭섭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186)

연장자가 상투적인 간섭으로 젊은이에게 모멸감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제 만혼이나 비혼이 대수롭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기성세대는 `정상`에 대한 고정관념이 여전하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당연히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이 굳건하다. 그래서 타인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평하하면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처신해라 훈계를 늘어놓는다. 일가친지들이 다 함께 모이는 명절이면 어른들이 꼬치꼬치 캐묻고 간섭하는 분위기가 싫어 아예 불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략)
의도는 선하다. 가족이나 친지들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버겁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기에 무시하거나 정면으로 반박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내가 한마디 하겠는데`라면서 시작되는 충고라고 한다. 물론 쓴 약이 양약이듯 고언이 꼭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어설픈 단정과 주제넘은 조언이 짜증을 불러올 때도 적지 않다. 상대방이 놓여 있는 처지, 어쩔 수 없는 상황, 거기에서 겪는 일들과 그에 대한 느낌 들에 대해 무심한 채 피상적으로 판단하고 자기식대로 도움말을 주는 것은 모멸감을 자아내기 쉽다.(190-191)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258)

내면이 풍부한 사람은 구차하게 자기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스스로 드높은 세계에 충실한 사람은 타인의 평가나 인정에 얽메이지 않는다. 그가 머무는 마음의 정원은 타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억지로 은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범상한 사람들이 그 깊이에 이르지 못해서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그럴수록 오묘한 경지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의 건설적인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묵묵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갈 줄 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자신의 특별함도 상대화시키면서 평범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과 이룬 업적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270-271)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감정 자체를 주시해보자. 내가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감정과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어떤 사건이나 상대방의 언행이 나의 반응(행동)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상황에서 생겨나는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여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별것 아닌 일들에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순간의 충동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상대방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나 혼자 모욕감에 사로잡혀 씩씩거린다. 심지어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건넨 따끔한 충고인데 비난을 받았다고 분노한다. 얄팍한 마음은 늘 그렇게 상처를 자초한다. 피해의식에 길들여져 자기 연민에 쉽게 빠지고 세상을 원망한다. 값싼 위로와 상투적인 힐링은 그런 미성숙함을 방조할 뿐이다. 그 천박한 심성은 사려 깊지 못한 언행으로 외화되어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한다.


한국의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마음 맞는 사람들과 뒷담화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험담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것을 함께하는 이들과 짜릿한 유대함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화 이외에는 아무런 화제를 찾지 못하거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자문해보아야 한다. 서로의 가슴속에 비겁한 늑대를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그놈들이 떼거리를 이루어 돌아다니면서 자신까지 해치는 것이 아닌지.
타인을 아무렇지 않게 모욕하는 풍토는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모멸감에 취약한 심성에 대해 저마다 일정 부분씩 책임져야 한다. 존중과 자존의 문화는 여럿이 만드는 것이면서, 그 출발과 귀결의 지점은 각장의 내면에 있다. 감정의 주인이 되려면 자기를 주의 깊게 보살펴야 한다. 마음을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단단하게 양생해야 한다.(292)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매여 사는 듯도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 대부분이 우월감으로 보인다. 내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났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증명하는 데서 살맛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내가 못났다는 것이 드러나면 곧바로 불행감에 빠져든다. 비교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그것을 인정받는 게임에 몰두하다 보면 행복과 불행의 양극을 오가는 진자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내게 행복감을 주는 바로 그 점이 불행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29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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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6-05-04 공감(19)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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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과 멸시.




모멸 (侮蔑) [모ː멸]



[명사] 업신여기고 얕잡아 봄.
[유의어] 모욕, 굴욕, 멸시



모욕과 멸시를 동시에 당하것.

네이버 사전을 검색해보니

모멸이란 업신여기고 얕잡아 봄을 말한다.





십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기억속에 아니 가슴속에 상처로 기억되는 일이 있다.

그때 당시 나는 투잡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청소 그 후에는 웨이트레스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이가 삼십대 초반이였고, 내가 웨이트레스 일을 하고 있는 가게의

부사장은 나와 한동갑이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서빙일을 해야하는것이 스스로도 그리 자랑스러운 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느날 바텐더와 부사장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바텐더가 매상을 중간에서 상습적으로 가로챈것을 부사장이 알게된것인데

당시 나는 홀매니저였고 어떻게든 싸움을 중재해야 하는 입장이여서

어쩔수 없이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고

이 바텐더의 부인이(이십대 중반) 가게로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심지어 나와 친분이 있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이 일과 아무 상관없는 내게

"너가 그러니까 그 나이 먹도록 그런데서 써빙이나 보고 있는거야!" 라며 인신공격을 하였다.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슴과 머리에서 각자 다른 무언가가 '펑'하고 터지면서

말 그대로 그 '모멸감'이란것을 느꼈다.

분한 마음에 손발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터질듯 방망이질 하고

눈물이...고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당신의 동의없이는 누구도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엘리너 루스벨트 -



만약 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여자의 그런 말따위가 내게 그토록 큰 모멸감을 불러 일으킬수 있었을까?

나는 상처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쉽게 모멸감을 느끼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만들수 있는 이유는

타인의 평가에 쉽게 좌지우지 되는 낮은 자존감.

문제는 그것이다.








타인에게 하는 말은 곧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 자기를 혐오하기에 남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을 알면, 연민이 싹튼다. 부당하게 악감정을 퍼붓는 사람은 자존감이 파괴되었기 때문임을 이해하면서 측은지심에 이를 수 있다. 그 모습을 거울 삼아, 과연 나는 스스로를 정당하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자존감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나를 귀하게 여겨야지 하고 결심한다고 곧바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작물을 재배하듯이, 오랫동안 꾸준하게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한다. 거기에 어떤 씨았을 심고 가꾸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p290< 모멸감>



'소심하다' 는 평을 많이 듣는다. 다시말해 쉽게 상처 받는 인간인데,

그건 바로 낮은 자존감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상처 그 이상으로

주변인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더 큰 모멸감을 주는 나를 알고 있다.



상대방의 약점, 어디를 찌르면 헉 소리 나게 아프겠구나 하는 것들이 쉽게 보인다.

그리고 나에게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나는 가차없이 그 약점을 후벼파고 난도질한다.

말을 잘한다, 말빨이 세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대부분 남들을 갈굴(?)때 나의 말빨이 세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 찌질하고 못난 인간....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감을 도대체 어떻게 회복시킬수 있는것인지.

그런 방법이 있기는 있는 것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 답이 나오길 바랬지만,

'오랫동안 꾸준하게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한다.' 가 끝이다. 아쉽다.




*저자의 맺음말 요약*



어떻게 하면 모멸감을 덜 느끼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당당함을 좀더 누리고 살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있고,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그것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이 요청된다. (...)경제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제도를 수립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로 심화되는 불평등 지수가 개선되도록 분배의 틀을 리모델링 하고,(...)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의 몫으로 수렴되고, 그것을 촉진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가 제기 된다.



둘째, 문화적인 차원의 접근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격을 위아래로 나누는 서열 관념은 학력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경제력, 거주지, 가정환경, 피부색 외모, 나이 등 외형적인 차이를 절대화하면서 차별하고 멸시한다.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 도전과 성취를 붇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셋째, 개인의 내면적을 힘을 키워야 한다. 삶의 자리에 모멸이 만연하는 까닭은 스스로의 품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품에서 격조 있는 삶이 가능하다. 높은 것에 사로잡혀 삶을 창조하기에 자기를 돌볼 줄 안다.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며 스스로 채워진 마음이 타인에게 스며들기에 품위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한 위엄과 기품이 사회적 풍토로 자리 잡을 때, 모멸감의 악순환도 줄어든다. 그 길은 자존의 각성과 결단에서 열린다.



백화점 모녀의 주차요원 폭행사건이나 땅콩회항 같은 갑들의 횡포에서

그 주차요원이나 사무장이 느꼈던것이 바로 이 '모멸감'이었을 것이다.

모멸감은 인간의 자존감을 박살내면서 그 삶을 파괴시킨다.

상처받은 그 사람은 그 상처로 인해 날이 바짝 선 폭력의 칼을

타인에게 휘두룰수도 있고

자신에게 휘둘러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돈 자체가 목적이며 사람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은 아무렇게나 취급당하수 있고, 언제든 버려질수 있기때문이다.

툭하면 갑질하는 그리고 갑질 당하는 한국 사회에서(슈퍼 갑이 아닌 이상, 우리는 누구에게나 갑질 할수 있고 갑질 당할수 있다.) 개인의 마음 수양만으로는 이 모멸의 시대를 벗어날수 없다.

정치적, 문화적인 변화 없이 사람이 목적이 되고,

돈은 그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될수 있는 사회로의 변모는 불가능하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는

공자의 말씀도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힐링서나 자기계발서의 간사한 속삭임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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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1-28 공감(12) 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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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을 키우기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





'모멸은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 즉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심코 격하시키고 그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 상대방을 비하하고 깔아뭉갬으로써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다. 그러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 모멸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아이는 자존심이 세다. 엄마의 눈빛이나 손짓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즉시 지적한다. ‘엄마, 못 알아 들을 수도 있지. 왜 기분 나쁘게 쳐다봐?’ 내 표정에서 모멸감을 읽은 것이다. 사회생활에서는 나름 밝은 미소로 인정받지만 가족에게는 짜증과 화를 잘 내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도서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김찬호 저, 문학과지성사)’은 내 가족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심하게 보낸 모멸감을 깨닫고, 내 마음과 행동의 습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멸감은 5장으로 나누어 다양한 이론과 사례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각 장의 키워드(수치심, 모욕, 감정, 연민, 에고 등)에 어울리는 현악 사중주의 연주곡은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1장은 수치심, 모욕, 모멸감의 기본적인 속성에 대해 다룬다. ‘자살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그 방향이 타인에게로 향하면 살인이 된다. 둘 다 바탕에는 복수심이 깔려 있다. 모멸감은 복수심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2장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나라 언어, 신분제는 붕괴되었지만 신분 의식은 지속되는 심리를 다루었다.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반말과 폭언을 일삼는 사람의 내면에는 다른 곳에서 똑같은 차별을 당하고 모멸감을 느끼며 살았던 결과라는 점에 수긍이 간다. 3장은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 등의 스펙트럼을 통해 모멸감의 구체적인 의미를 다룬다. 4, 5장은 인간적인 사회,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출하며 사는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건강한 사회에 대해 말한다.‘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우리나라의 노숙자를 방문한 자리에서 첫 마디가“시를 좋아하시나요? 좋아하는 시가 있으면 알려주시겠어요?”노숙자들은 비록 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겉모습만으로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었던 그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해준 질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울림이 있는 시간이 되었다.





모멸감의 상반되는 말은 자존감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생활 습관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살인죄로 수감 중인 재소자들을 심층 인터뷰 했는데, 범죄의 진짜 이유를 설명할 때 “그 놈이 나를 깔보았다”는 표현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주는 말 한마디는 때로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존감을 키위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수첩에 적어 놓고 하루에 하나씩 실천해 보면 어떨까? 내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하지 않기, 품위를 잃지 않기, 내 감정의 주인이 되기, 타인에게 진정성 있게 대하기. 감사하며 살기. 그리고 또?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자기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 무지하다. 또는 '터치 오브 라이트' 영화의 치에처럼 현실의 조건에 발이 묶여 있거나 유시앙의 경우처럼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자기 안에 있는 열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이나 사회가 부여한 편견에 의해서 일정한 틀 안에 자신을 가둬두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그 굴레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재능을 상대방의 눈으로 발견하게 되고, 삶을 나누는 가운데 새로운 꿈의 씨앗이 뿌려진다.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싹을 틔운다.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p.254





언제부터인가 힐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치유는 단순히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새살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떤 힘이 약동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소망과 가능성을 응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을 꺼내어 존재의 날개로 펼칠 때 기꺼이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우정과 환대가 곧 힐링이 된다. 살아 있음을 축복하면서 존재를 중심으로 맞아들이는 만남에서 우리의 생애는 고귀해진다.

p.259





중심잡힌 사람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모두 균형 있게 품고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표현한다. 억울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할줄 알고, 장례식장에서 슬픔을 나눌 줄 알며, 그러다가도 경사가 난 집의 잔치에 참석해서는 온 마음으로 축하를 해주고, 음악을 들으면 즐거움에 빠져들 줄 안다. 그런 사람은 건강하다. 어느 한 감정에만 매여 살지 않기에 인생이 풍요롭다.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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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5-14 공감(11)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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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사실 이 책은 좀 지루하게 읽혔다. 새로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감정들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 같은 책들은 반갑다. 그런데 그것이 소설이었을 경우,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 받는 느낌이 드는데, 사회과학서인 경우 식상하단 느낌을 받는다. 뭔가 모르는 것을 새로 알게 되는 기쁨을 찾는 마음이, 그런 의도가, 있어서인가 보다. 어쨌든 나로선 <모멸감>을 그렇게 읽었다.



모멸감이란 무엇인가? '모멸은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 즉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비하함으로써 그러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최근의 땅콩 회항 사건과 서울의 모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은 모멸감이 만연하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수치심은 사회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이지만, 다른 어떤 속성보다 파괴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한다.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 못지 않게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 또한 위험하며, 무시와 경멸을 자주 당하다 보면 수치심이 꼬리를 물로 폭력을 일으키기 쉽다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기억은 세상에 대한 증오와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는 분통, 울분, 허탈, 짜증, 설움이 팽배해 있다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감정이 이럴 것이다. 19세기 말의 노예선과 이라크 전쟁의 포로학대, 장애인들에 대한 비하를 예를 들며 타인의 인격을 부정하는 풍토는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여성, 장애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청소년 왕따나 비만이나 대머리 등의 신체적 약점을 조롱당하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예들을 들어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로 모멸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욕하는 풍토는 사회적으로 형성되며,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눈빛 하나가 모멸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존중과 자존의 문화를 만드려면 저자는 모욕감수성, 자존감, 회복 탄력성을 키워 스스로 내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자기 계발서들을 읽고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 내부로 향하는 에너지를 밖으로 돌려 이 '모멸적인 사회'를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멸감>이 '삶의 문제'들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짚어주고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감>은 나의 내면을 단단히 하고 내가 바라는 대로의 사회를 변화 시킬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책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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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5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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