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3

알라딘: 철학으로 저항하다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 다카쿠와 가즈미

  • 알라딘: 철학으로 저항하다


    Jin Lee
    https://www.facebook.com/jin.lee.129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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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리는 책보다 절판 폐기하는 책이 더 많은 건 아닌가 싶은 시기에, 어쩐지 조금은 비장한 마음이 되어 내보내는 신간. 이번에는 철학 입문서다. ‘편집자 북클럽 랑’을 시작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책을 고민하던 무렵에 눈에 띈 책이다. 일본어는 읽을 줄 모르니 한자로 표기된 세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철학, 저항, 이색 철학 입문서. 검토해보니 일반적인 철학 입문서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한 책이었다.
    저자는 일본의 철학자 다카쿠와 가즈미. 일본에서는 아감벤, 푸코, 데리다 등의 수많은 저작을 번역해 ‘번역 기계’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철학사를 요약 정리하는 방식의 입문서를 쓸 법도 한데, 이 책에서 저자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철학사와 철학자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책 자체도 ‘철학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철학이라고 하면 겁부터 먹는 사람들에게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철학사를 익히는 것이 곧 철학 그 자체는 아니라고, 철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며 책의 문을 연다.
    철학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언급한 뒤에 저자는 오랫동안 철학을 공부하며 다듬어온 자신만의 정의를 내놓는다. “철학은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 그런 다음 이 정의에 등장하는 ‘개념’, ‘운운’, ‘세계’, ‘인식’, ‘지성’, ‘저항’ 등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는데, 요약하자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일관성 있게 쓰이고 그 세계에 일순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인식을 통째로 바꾸는 것, 그 달라진 눈과 머리로 권력의 통제나 개입, 폭압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때의 개념은 어떤 한계 상황에 처한 사람이 생활이나 경험에서 우연히 건져 올려 그 상황에 맞서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물고기나 와인일 수도 있고 오를 수 없는 계단이나 폐관된 공공도서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철학을 다시 정의한 저자는 두 편의 영화, 두 편의 소설, 두 명의 인물 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인 철학의 계기, 저항이 시작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보도자료와 카드뉴스에서 소개한 예 말고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런 것이다. 최초의 아이누 출신 국회의원이자 아이누 문화 연구자인 가야노 시게루는 오랜 시간 일본 정부의 아이누 문화 말살 정책에 저항해왔는데, 어느 날 문득 과거 ‘일본인’이 아이누에게 강요했던 연어잡이 금지가 단순히 어업 제한에 불과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아이누어 사전 편찬자이기도 한 그는 아이누어에서는 연어가 곧 ‘주식主食’을 뜻한다는 것(시에페, 시=정말로, 에=먹는, 페=것)을 불현듯 발견하고, 일본의 아이누 박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식을 빼앗는 일’이었다는 새로운 개념, 더 강력한 저항의 언어를 찾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부, 반란 노예, 운명론에 저항한 소설가, 민권 운동가 등의 ‘철학자’들을 보며 홍은전 선생님의 여러 글에서 보았던 ‘차별받은 존재가 저항하는 존재로 거듭나는 순간’이 자주 떠올랐다. 이를 저자의 표현으로 바꾸면 ‘철학이 탄생하는 순간’일 것이다. 저자가 예로 든 영화나 소설 속, 역사 속 저항은 대체로 다 실패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대부분 비극이다. 저자는 저항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로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 순간 세계를 보는 방식이 이미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시위에 나가는 것, 맞았으면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 “이제 이런 것은 싫다”라며 앓아눕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저항이며,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현대 프랑스, 이탈리아 철학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던 저자는 일본 정부의 계속되는 실정과 부패, 횡포에도 불구하고 냉소와 무력감을 보일 뿐인 사람들을 보며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냉소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의 실천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의미의 철학’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이런 것도 철학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저자가 제시하는 철학 개념과 가까운 자리에 계시는 고병권 선생님께 먼저 읽어봐 주십사 부탁을 드렸고, 이 책에 대한 나의 인식까지도 갱신하는 너무나 귀한 글을 받았다. 편집자가 책을 소개하는 여러 가지 말들이 조금 미심쩍은 분들은 “이 문으로 들어가 철학을 탈환하고 싶다”라는 고병권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열린 문으로 쓰윽 들어와 주시면 좋겠다.
    오랜만에 ‘입문’이라는 말이 붙은 책을 진행하니 조금 설레기도 했다. 어떤 분야의 문을 여는, 이리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책. 11월 ‘편집자 북클럽 랑’에서는 이 책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려고 한다. 초대에 응해주실 분들은 10월의 마지막 날 사계절출판사 SNS 계정을 확인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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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으로 저항하다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
    다카쿠와 가즈미
    (지은이), 노수경 (옮긴이) 사계절 2023-10-26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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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100자평 3편
    리뷰 4편
    세일즈포인트 1,034

    원제 哲學で抵抗する228쪽
    122*188mm
    228g

    책소개
    ‘철학’의 이미지에 갇힌 철학을 탈환하려는 야심 찬 시도. 철학자의 이름과 철학사를 몰라도 철학에 입문할 수 있을까? 아감벤, 푸코, 데리다 등 현대 철학자들의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해온 철학자 다카쿠와 가즈미가 철학의 문에 들어서는 색다른 길을 제시한다.

    저자는 철학사를 익히고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는 것과 철학 그 자체를 신중하게 구분하며, 모든 철학의 뿌리에 있는 ‘저항’을 중심으로 철학을 다시 정의한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이란 개념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 즉 생활이나 경험 속에서 건져 올린 어떤 개념을 통해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우월한 힘에 맞서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면 ‘바다의 물고기’도, ‘주식主食’이라는 흔한 단어도 철학 개념이 될 수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좁은 의미의 철학자’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저자는 그 대신 영화 〈흔들리는 대지〉와 〈스파르타쿠스〉, 소설 『캉디드』와 『제5도살장』, 역사적 인물인 가야노 시게루와 마틴 루서 킹의 이야기를 통해 철학이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전태일 같은 이를 철학자로 보지 않는다면 나는 철학을 떠나겠다’라고 마음먹었던 철학자 고병권은 다카쿠와 가즈미가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가 철학을 탈환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항의 계기가 차곡차곡 쌓여도 냉소와 환멸만이 가득한 시대에 이렇게 되찾은 철학이 변화의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야심이 깃든 이색 철학 입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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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들어가며
    철학의 이미지에 겁먹지 마라 | 모든 것이 철학으로 보이는 경험 | 철학은 철학사가 아니다 | 철학자는 세습되지 않는다 | 철학은 고매한 이념을 논하는 행위만은 아니다 | 철학은 고민이 아닐뿐더러 고민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1장 철학을 정의하다
    철학의 정의 | 개념 – 일관성 있는 단어 혹은 표현 | 당장 개념을 정의할 필요는 없다 | 개념이라고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 개념을 운운하는 것 – 창조·폐기·왜곡·전용 등에 관하여 | 개념의 긴장감이 미치는 곳, 세계 | ‘엘리먼트’에 관하여 – 와인과 물고기 | 시간은 금이다 | 인식 – 머리로 세계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 관점의 갱신 – 전승이 아닌 행위 | 지성 –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머리가 좋다 | 저항 – 말을 듣지 않거나 들을 수 없는 것 | 저항에는 ‘좋고 나쁨’이 존재하지 않는다

    2장 예속된 자의 저항
    〈흔들리는 대지〉와 〈스파르타쿠스〉 | 〈흔들리는 대지〉 | 〈흔들리는 대지〉의 줄거리 | 토니의 연애 | “바다의 물고기는 먹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 시칠리아 속담 | 철학자의 탄생 | 속담의 전용 | 저항이 실패하더라도 | 푸코와 〈흔들리는 대지〉 | 봉기는 쓸모없는가 | 〈스파르타쿠스〉 | 〈스파르타쿠스〉의 줄거리 | 인텔리 노예 안토니누스 | 시칠리아 출신 |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 커크 더글러스의 의도 | 안토니누스의 기지 | 원형 연판장이 발명되는 순간

    3장 주식主食을 빼앗긴다는 것
    가야노 시게루 | 소년 시게루의 경험 | 동정에 관하여 | 여성이라는 소수자 | 다수자와 소수자 | 감정 이입의 중요성 | 연어는 아이누의 주식 | 주식론 | 서서히 정립된 ‘주식’이라는 개념 | 시에페 | 소수민족과의 교류 | 댐 건설 반대 운동 | 감정 이입의 강요 | 주식론의 계승

    4장 운명론에 저항하다
    『캉디드』와 『제5도살장』 | 계몽사상가 볼테르 | 『캉디드』 | 낙관론 | 신의론 | 충족 이유율 | 팡글로스에 의한 최선설 | 신의론을 깎아내리다 | 리스본대지진 | 대지진 이전의 볼테르 | 「리스본의 재앙에 관한 시」 | 철학 개념의 폐기 | 커트 보니것과 볼테르 | 커트 보니것의 경험 | 드레스덴 폭격 | SF소설 『제5도살장』 | “그런 것이다” | 서두의 몇 가지 예 | 끝부분의 몇 가지 예 | 불편한 농담 | 최선설과 운명론을 부정하다 | 그런 것일 리가 없다 | 20세기의 볼테르?

    5장 지금이 그 시간
    마틴 루서 킹과 커트 보니것 | 흑인 민권 운동의 시작 |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 | 편지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 시의적절하지 않은 운동 | 신화적 시간 개념 | 「편지」 전체를 지배하는 시간론 | 워싱턴대행진 연설과 비교하면 | 신중하게 고려된 속도 | 토크니즘 | 토큰(대용화폐) | 워싱턴대행진 연설 – 수표에 관하여 | 반드시 지켜지는 약속? | 바울을 대신하는 킹 목사 | 바울에 대한 명시적 언급 | 1957년의 설명 | 바울의 설명 | 킹 목사의 해명과 고통 | 구제되어야 하는 현재 | 지금이 바로 그 시간 | 종말은 왔는가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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