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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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09 조회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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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3성분별
 
 
 
 
13장에서 몸과 아트만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먼저는 베단타의 입장 에서 했고, 다음은 다시 삼캬론의 입장에서 했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 데 모든 작용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고, 푸루샤, 즉 크쉐트라즈나(밭알이)는 아무런 감동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프라크리티의 작용이 어떤 방법으로 계속되어간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주는 이 장에서 같은 한 프라크리티에서 어떻게 각종 창조물, 특히 산 피조물들이 창조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창조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쉐트라, 즉 몸에 관한 문제이므로, 그것은 자연 몸과 아트만에 대한 문제 속에 포함되어버린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세계도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프라크리티의 한 발전이기 때문에 프라크리티의 구성요소들간의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설명은 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하신 주는, 몸과 아트만에 대한 설명이라는 국한된 논술을 버리고, 아르쥬나에게, 나아가서 즈나나(영적 지식)와 비즈나나(경험적 지식)에 대한 설명을 해 주겠다는 말로 이 장을 시작한다. 즈나나 비즈나나의 문제는 그가 이미 제7장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 프라크리티의 세 요소의 전개에 대한 설명은「아누기타」(anugita)와「마누 스므리티」(Manu-smriti) 제 12장에도 나와 있다. —틸라크
이 14장과 자연의 성격에 대한 세 가지 등분의 설명을 보면 30년 전에 내가 읽었던 헨리 드럼먼드(Heny Drummond)의 저작물(The Natural Law in the Spiritual World) 생각이 난다. 원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세 제목으로 갈라놓았다. 14 장은 인간이 속해 있는 원리를 설명해주는 것이고 15장은 푸루쇼타마(purushottama) 즉 완전한 인간에 대한 설명이다.
인간의 향상이란 것이 이 장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제목이다. 이 사트바(善性), 라쟈스(動性), 타마스(暗性)의 세 성 중에 어떤 사람도 그중 하나만이 독점적으로 주장함을 받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구나 다 힘써서 주로 선성의 원리가 주장하고 있는 지경에 올라가도록 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셋을 초월하여 완전한 인간에 이르러야 한다. 물질계에서 한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가령 말한다면, 물이다. 물이 고체로 있을 때에는 땅 위에서 공중으로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증기가 되어 희박해지면 올라간다. 마침내 공중에 올라가면 구름으로 변하고 비로 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러면 열매를 맺게 하여 땅에 복을 준다. 사람은 모두 물과 같다. 우리는 다 노력하여 우리 자신을 증발시킴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사사로운 나를 없애버리고 무한에 들어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선(善)이 되어야 한다. —간디(「청년 인도」12~1,1928)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내가 다시 지식 중의 지식인 최고 지상의 지식을 말하리라. 그것을 앎으로써 모든 성인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최고의 완전에 이르렀느니라.
 
2. 이 지식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나와 같은 성격에 이르러, 창조 때에도 다시 나는 일이 없고 풀어져 꺼지는 때에도 흔들림이 없느니라.
의지 우파슈리챠(upashritya), 의지(依止), 은신함(take shelter)
힌두교의 신앙에서는 우주 만물이 제 때가 오면 창조되었다가 또 제때가 오면 풀어져 없어져서,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인생에 고뇌가 있는 것은 전생의 업(業) 때문이므로 이 생에서 해탈을 얻어 다시 이 고뇌의 생사유전의 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이상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속에 녹아버리는 일이 아니라, 경험적인 활동을 초월한 정신의 보편성과 자유에 도달하는 일이다. 그 자격은 창조와 소멸의 윤희과정의 영향을 조금도 받는 일이 없다. 모든 형상의 지경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영혼은 점점 자라 거룩하신 이를 닮아 영원불변의 성격을 갖게 되고, 가지가지의 우주적 형태를 스스로 취하는 최고의 주재자에 대한 영원한 의식을 가진다. 그것은 수바루파타(svarupata) 즉 동일성이 아니고 사마나쟈르마타(samanadharmata) 즉 평등의 상사성(相似性)이다. 그는 자기가 찾는 이와 같은 성격이 되어 사드리샤묵티(sadrisyamukti)에 이른다. 그는 자기의 외적 의식과 생활에 신성(神性)을 실현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태복음」4: 48)를 보라. 샴카라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다. 그는 사쟈르먀(sadharmya)는 성격의 동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속성의 동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은 하나의 서론이다. 이제 크리슈나는 우선 첫째로 프라크리티는 자기의 여러 가지 형상 중의 오직 한 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삼캬론의 이원론을 제쳐 버리고, 그리고는(베단타와 충돌됨이 없이) 이 세계의 모든 인식할 수 있는 물체가 이 프라크리티의 요소로 인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틸라크
 
3. 바라타의 왕자야, 저 큰 브라마는 나를 위한 탯집이다. 내가 그 속에 종자를 넣어주면 그로부터 모든 산 것들이 나오느니라.
브라마(brahma) 프라크리티.
우리가 만일 단순한 자연의 산물만이라면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절은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란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는 우주의 씨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그는 히라냐가르바(hiranyagarbha) 곧 우주의 혼이다. 샹카라는 말하기를 “내가 밭(크쉐트라)과 밭알이(크쉐트라즈나)를 결합시켜 히라냐가르바를 낳게 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나온다. 주께서 ‘아버지’시고, 그가 자아 아닌 탯집 속에 생명의 짬인 종자를 넣어서, 모든 개체의 출생을 일으키신다. 이 세계는 무한이 유한 위에 노시는 놀음이다. (11장 12절에 대한 주석 참조) 저자는 여기서 창조를 안 있음, 곧 혼돈, 혹은 밤으로부터 형상이 전개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는 설명을 채용하고 있다. 캄캄한 깊음 속에서 일어나 나오는 만물의 형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뽑아낸 것이다. 그것들은 ‘그’가 안 있음 속에 던진 종자들이다. —라다크리슈난
맨첨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는데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지어졌고. 지어진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1:1)
그러므로 도(道)가 내고, 치고, 키우고, 기르고, 튼튼케 하고, 여물게 하고, 먹이고, 덮어준다. 내고도 가지지 않고, 하고도 믿지 않고, 어른 되고도 쥐고 놀려 않으니, 이를 일러 까만 속이라 한다. (道生之畜之長 之育之 亭之毒之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노자
 
4. 쿤티의 아들아, 어떤 탯집에서 어떤 형상이 되어나왔든간, 그 ‘큰 브라마’가 그것들의 탯집이요, 내가 그 씨를 넣어 주는 ‘아버지’이니라.
모든 산 것들의 어머니는 프라크리티요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또 프라크리티는 하나님의 본성이므로, 하나님은 우주의 아버지요 또 어머니다. ‘그’는 우주의 씨요 또 탯집이다. 이런 관념이 어떤 예배형식에 이용 되는 일이 있으므로 근대의 어떤 청교도들은 그것을 음탕한 생식기 숭배라고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생명에 수정(受精)을 시켜서 그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게 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 는 세계의 ‘생식적인 이유’ (seminal reason)이시다. 모든 존재는 물질이 말씀의 정자(logoi spermatikoi) 즉, 생명 주시는 영으로 수정됨에 의하여 임신된 결과로 인하여 나온다.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계에서 자기의 일을 이룬다. 이 말씀의 씨는 거친 물질세계를 형성시키는 이상적인 형상이다. 이 이상, 즉 장차 있게 될 것들의 모형은 다 하나님 안에 있다. 온갖 나타남의 가능성은 그 근거를 거기 대응하는 안 나타남의 가능성 속에 둔다. 그 안에서 그것은 자체의 영원한 원인으로 존재해 있고, 거기 대하여서 나타남은 하나의 탄력성 있는 확증이 된다. 하나님은 창조의 세세한 것까지를 포함한 영원한 전망을 가지신다. 그런데 대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서는 이상과 물질은 이원론적으로 생각되고 있어서 오묘한 이상의 세계와 조잡한 물질세계와의 두 관계에 대한 이해가 곤란한 반면,「기타」에서는 그 둘이 다 같이 ‘거룩하신 이’ 밑에 속해 있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 이상의 정자를 이 거친 세계 속에 화신(化身)으로 나타내신다. 이 하나님께로 조차 나오는 이상의 정자들은 모든 것의 근원되는 ‘말씀’ (logos)에 속하는 것들인데,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설명이 된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성에 대하여 초월적이나, 또 다른 한편 영혼 속에서는 거룩하신 이의 직접적인 표현이 된다. 우주의 흘러감은 기원인 알파와 종국의 완성인 오메가가 일치하게 되는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건의 길이 사내 되고 곤의 길이 계집 되니 건이 큰 비롯을 알고 곤이 몬을 지어 이루느니라(乾道成男 坤道成女 乾知大始 坤作成物). —「주역」
건을 아비라 일컫고 곤을 어미라 일컫는다. 내 이에 아득한 것으로 왼통 섞이어 그 가운데 있으니, 그러므로 하늘 땅에 찬 것이 내 그 몸이요, 하늘 땅의 머리 된 것이 내 그 바탈이라, 씨은 내 한배요, 몬은 내 더불어다. 임금은 내 부모의 맏아들이요, 그 대신은 맏아들의 가상(家相)이다. 나 많은 이를 높임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하는 바요, 어린이를 헤가림(慈)은 내 어린이를 어린이로 함이다. 거룩한 이는 그 덕을 합한 이요 어진 이는 그 빼어난 이며, 무릇 천하의 지치고 병들고 불구 되고 시름에 빠지고 의롭고 홀아비 되고 과부 된 것들은 다 내 형제의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며 어디 말할 데도 없는 것들이다.(乾稱父 坤稱母 予兹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吾其體 天地之帥吾其性 民吾同胞物吾與也 大君者吾父母宗子 其大臣宗子之家相也 尊高年所以長其長 慈孤弱所以幼吾幼 聖其合德 賢其秀也 凡天下疫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顚連而無告也) ᅳ장재 (西銘)
 
5. 억센 팔을 가진 자야,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는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특성으로서, 그것이 그 불멸의 거주자를 이 몸 속에 묶어두느니라.
불멸의 거주자 아바야(avyaya), 우리의 자아. 아트만이 몸을 집으로 삼고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
불멸의 영혼을 이끌어 생사의 돌아가는 바퀴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구나(gunas), 혹은 무드(mood)의 힘이다. 그것은 “자연의 원초적인 구성 요소요, 모든 물질의 기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질 속에 내재하는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아난다기리의 말). 그것을 구나라 부르는 것은 그 나타나는 것이 언제나 삼캬론의 푸루샤 혹은「기타」의 크쉐트라즈나(밭알이) 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구나는 프라크리티의 세 경향 혹은 성질의 꾀어 있는 삼겹노끈의 세 가다리다. 사트바(sattva)는 의식의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비쳐줌을 받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방사(prakasa)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라쟈스(rajas)는 밖으로 향한 운동(pravrtti)을 가지고 있고, 타마스(tamas)는 타성(inertiaapravrtti)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부주의, 무관심(pramada)하다.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를 영어로 꼭 맞게 옮기기는 어렵다. 사트바는 완전한 정결(淨潔)과 광휘 (光輝)요, 라쟈스는 불순(impurity)이므로 활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타마스는 어둠이요 게으름이다.「기타」에서는 구나들을 주로 도덕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사트바를 선성(善性)이라 하고, 라쟈스를 열성(熱性)이라 하고, 타마스를 둔성(鈍性) 이라 한다.
우주의 삼위일체는 이 세 성의 어느 하나가 주장이 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보존자인 비슈누에는 선성이, 창조자인 브라마에는 열성(혹은 동성)이, 파괴자인 시바에는 둔성(혹은 암성)이 주장이 된다. 선성은 우주의 안고(安固)를 차지하고 동성은 그 창조적 운동을 돕고, 타마스는 모든 것의 무너지고 죽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것들은 각각 이 세계의 계속과 기원과 분해의 이유가 된다. 구나들을 인격적인 하나님의 세 면에 적용해 본다면 그 세면은 객관적 혹은 현상의 세계에 속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속에서 분투하시고 있고, 하나님 닮은 영혼들은 이 구속사업에 ‘그’ 와 협력하고 있다.
영혼이 자신을 자연의 성격과 한가지인 것으로 알 때 그 자신의 영원성을 잊고 마음과 생명과 몸을 다 이기적인 자기만족을 위해 써버리고 만다. 그 얽매임을 벗어버리려면, 자연의 성격을 초월하여 트리구나티타(trigunatita, 三性초월)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유롭고 썩지 않는 영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사트바는 승화되어 의식의 빛, 즉 죠티(jyotih,直觀)에 들어가게 되고, 라쟈스는 고행, 즉 타파스(tapas)에, 그리고 타마스는 평정 혹은 안식, 즉 샨티(shanti)에 들어가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6. 그중에 선성은 청정함으로 하여 광명을 주고 건강을 준다. 오, 흠없는 자야, 이것은 즐거움의 집착과 지식의 집착으로 얽어매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낮은 지적인 지식이다.
선성이 사람의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제거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비록 고상한 것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욕망을 일으켜준다. 모든 것에 대해 애착이 없는 자아도 여기서는 즐거움과 지식에 애착한다. 이기적인 자아의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의지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우리는 해탈된 것이 아니다. 즈나나 혹은 지식은 부디에 관계되어 있는데 그 부디는 프라크리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트만의 본질인 순수의식과는 구별 되어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사람을 아는 이는 슬기롭고, 스스로를 아는 이는 밝으니라(知人者智 自知自明). —노자
 
7. 동성은, 너 알라, 달라붙는 성질이니라. 애욕과 애착에서 나오느니라. 쿤티의 아들아, 이것은 활동의 집착으로 몸에 머무는 이를 얽어매느니라.
몸에 머무는 이 데히나(dehina), 주신자(住身者),몸의 거주자(body's tenant), 자아, 아트만.
아난다기리는, “자아가 그 대행자는 아니지만, 라쟈스는 ‘내가 그 하는 이다’ 하는 생각으로 그를 움직여 활동하게 한다”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8. 그러나 암성은, 너 알라, 무지에서 나와, 몸에 머문 모든 이를 매혹시키느니라. 바라타족의 아들아, 이것은 멍청함과 게으름과, 잠으로 얽어매느니라.
멍청 프라마다(pramada), 태만.
게으름 알라샤(alasya), 유타(遊惰)
 
9. 선성은 행복에 집착하고, 동성은 활동에 집착한다. 그러나 바라타족의 아들아, 암성은 지식을 가려 멍청에 매이게 하느니라.
 
10. 바라타족의 아들아, 선성이, 동성과 암성을 압도하면, 그것이 우세해지고 동성이, 선성 암성을 압도하면, 그것이 우세해지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암성이 선성 동성을 압도하고 우세해지기도 한다.
3성은 어떤 사람 속에도 다 있다. 다만 그 정도가 서로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도 그것이 전연 없을 수는 없고, 사람마다 다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그 어느 하나가 우세하다. 그 우세하는 성에 따라, 선성적인 사람, 동성적인 사람, 암성적인 사람이 된다. 생리학에서 체액설(體液說)이 한창 지배적이었을 때, 사람을 다혈질, 담즙질, 지둔질(遲鈍質), 신경질로 나누었다. 체액 중 어느 것이 우세하냐 하는 것에 따라서 한 구분이었다. 힌두교의 배열은 정신적 특징을 보아서 한 것이다. 선성적인 성격은 빛과 지식을 목적하고, 동성적인 성격은 불안정적이어서 외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선성적 성격자의 활동은 자유롭고 고요하고 무사(無私)한데 반해 동성적인 성격자는 줄곧 활동하며 가만 앉아 있지 못하며, 그 활동은 이기적 욕망에 물이 들어 있다. 암성적 성격은 우둔하고 게으르다. 그 마음은 어둡고 어지러우며 그 생애 전체가 환경에 대한 하나의 계속적인 굴복이다. —라다크리슈난
 
11. 광명이 (지식이) 이 몸의 모든 문으로부터 발사되어나올 때는 선성이 더해진 줄로 알 것이니라.
지식의 빛은 완전히 생리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의식의 참은 물질적 표현에 반대되는 것 아니다. 신성(神性)은 육체적인 분야에서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을 성화(聖化)하는 것, 빛을 신체 속에 끌어들이는 것, 우리의 생활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요가의 목적이다. 우리 마음이 빛을 발하고 감각이 민첩해지면, 그때는 선성이 우세한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꼴과 빛은 하늘 바탈이다. 성인인 다음에야 제 꼴을 밟을 수 있느니라. (形色天性也 聖人然後可以踐形) —맹자
 
12. 바라타족 중의 으뜸가는 자야, 탐욕과 활동과 사업의 계획과 불안정과 애욕, 이것은 다 동성이 늘어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생활과 그 쾌락을 열심으로 추구하는 것은 동성이 왕성한 데서 오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예수
그 즐기는 욕심이 깊은 사람은 하늘이 준 영적 힘이 옅으니라(其嗜欲深者 其天機淺). —장자
 
13. 쿠루족의 아들아, 밝지 못하고, 활동도 없고, 게으르고, 헤매이고, 이것은 암성이 늘어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14. 몸에 머무는 이가 선성이 왕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그는 ‘가장 높은 것’을 아는 성자들이 도달하는 세계에 갈 것이니라.
환멸(還滅) 프랄라야(pralaya), 죽는 순간.
그들은 해탈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브라마로카(brahmaloka)에 태어난 것이다. 해탈되는 조건은 니슈트라이구냐(nishtraigunya) 즉 3 성의 초월이다. —라다크리슈난
“ ‘가장 높은 것’ 을 아는 사람들이 도달하는 정결한 세계.” 이 뜻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지극히 높은 것을 아는 사람은 자아를 깨달은 사람 혹은 즈나니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극히 높은 것은 마하트(mahat)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틸라크는 ‘신들의 세계’ 라 했고, 비데 샤스트리(Bhide Shastri)는 “사차로카(), 박쿤다(), 카일라사()......”라 했고 비노바()는 전혀 새로운 말을 끄집어냈는데 그것이 본문에 들어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무후(無垢)한 세계에 나서 즈나니(jnani)들과 같이 있다” 한다. 이에 대한 해설은 아마도 다음 절에 있는 카르마상기슈(karmasangishu)라는 단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동성의 사람들이 카르마에 집착하는 사람들 속에 난다면, 선성의 사람들은 즈나나에 집착하는 사람 즉 지식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 날것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러한 논법이 비노바로 하여금 그 절을 그렇게 번역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므로 그의 번역을 취한다. —마하데브 데자이
 
15. 동성이 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그는 활동에 집착하는 자들 속에 날 것이고, 마찬가지로 암성이 성할 때에 환멸을 당하면 미혹의 태속에 날 것이니라.
 
16. 선행의 열매는 선성적이어서 정결하나, 동성의 열매는 괴롬이요, 암성의 열매는 무지니라.
 
17. 선성에서는 지식이 나오고, 동성에서는 욕심이 나오고, 암성에서는 게으름, 헤매임이 나오고 또한 무지가 나오느니라.
 
18. 선성에 머무는 이는 위로 올라가고, 동성적인 이는 중간에 머물고, 암성적인 이는 가장 낮은 특성의 영향을 입어 아래 로 내려가느니라.
최고의 이상은 도덕의 지경을 초월해 영계에 올라가는 일이다. 선한사람(satvika)은 반드시 성자(trigunatita)에 이르러야 한다. 이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우리는 아직도 되어가는 도중이다. 우리의 진화는 아직 미완성이다. —라다크리슈난
높은 선비는 도를 듣고 부지런히 행하고, 가운데 선비는 도를 듣고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낮은 선비는 도를 듣고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족히 도로 삼을 수 없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노자
 
19. 보는 이가 구나(性)밖에 다른 작용자가 없음을 알고, 또 구나를 초월하는 자를 알면, 그는 나의 바탈에 이르느니라.
보는 이 식자(識者, seer).
사람이 자기는 하는 자(doer)가 아니고 구나가 있어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자아는 없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 하는 모든 행동을 자발적으로 통과하여, 단순히 제 몸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몸은 가장 고귀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은 떠나 있어 애착이 없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한 보는 자는 구나를 초월하는 ‘그이’ 의 모습에 능히 눈을 떠 그를 믿게 된다. —간디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비임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비임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 장자
그럴 때 자기와 브라만이 하나인 것이 환해진다. —아난다가리
 
20. 몸에 머무는 이가 몸이 거기서부터 일어나는 그 세 구나를 초월할 때, 그는 남, 늙음,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느니라.
간디는 데하사무드바반(dehasamudbhavan)을 “그것은 몸과의 접촉에서 나온 것”이라고 번역했다. 힐도 이 합성된 낱말을 같은 식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은 자아와 관련하여서 존재한다. 몸 속에 태어나 있기 때문이다” 했다. 여러 주석가들이 샹카라를 따르고 있는데 그는 “그것은 몸이 거기로 쫓아 나오는 씨다” 했다. 나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자아를 몸과 하나로 보게 되는 근본이다.—마하데브 데자이
데하사무드바반은 구나는 몸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샹카라는 “그것은 몸이 거기로 쫓아 나오게 되는 씨다”라고 했다. 선성의 사람의 선성조차도 불완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선성은 반대자와 싸우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이 끝나고 절대의 선성이 될 때 그것은 선성이기를 그치고 모든 윤리적 강요를 초월한다. 선성을 발달시킴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것을 초월해 초월적 지혜에 도달한다. 마치 가시로 가시를 뽑는 모양으로, 우리는 세속을 내버림에 의하여 내버림을 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트바에 의하여서 우리는 라쟈스와 타마스를 이기고, 그다음 사트바까지도 초월한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 말하기를
 
21. 오, 주여, 3성을 초월하는 이는 어떤 모양을 함으로 인하여 되는 것이옵니까?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하며 또 어떻게 이 3성을 초월하옵니까?
지반묵타(살아 있는 現身으로 해탈을 얻은 사람)의 특별한 상(相)은 무엇 인가? 그 특징은 2장 55절 이하에 있는 스티다프라즈나(지혜가 부동의 자리에 간 사람). 12장 13절 이하에 있는 박티마(정성으로 믿는 마음이 완전한 사람)와 비슷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분명한 것은 어떤 길로 도달했든간 완전에 이른 사람의 모습은 같다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2. 오, 판두의 아들아, 그는 광명과 활동과 미혹을 그것이 일어날 때에 싫어하지 않으며, 그것이 일어나기를 그쳤을 때 원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23. 그는 가만 앉아, 구나에 관심도 아니하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홀로 서서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니, 그건 그가 작용하는 것은 오직 구나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24. 그는 고락을 평등으로 보고, 자기의 자아 속에 거하며, 흙과 돌과 금을 한가지로 알고, 쾌불쾌를 같이 보며, 마음이 견고하여 비난과 칭찬을 한가지로 여기느니라.
 
25. 그는 명예와 불명예를 상관 않으며 벗과 대적에 대해 같이하고, 모든 활동의 경영을 내버린 사람이니, 그를 가리켜 구나티타라 하느니라.
구나티타(gunatita) 구나를 초월한 사람.
22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로 읽고 생각하여야한다. 광명, 활동, 미혹은 앞절에서 본 것같이,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가 낳은 산물이다. 이 절들의 속뜻은, 구나를 초월한 사람은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돌은 빛을 바라지도 않고, 활동, 게으름을 싫어할 리도 없다. 그것은 잠잠해, 그런 의지도 없다. 누가 흔들어도 까딱없고, 다시 흔들면 그대로 누워 게으름이나 미혹이 저를 붙잡았다는 감각도 없다. 돌과 구나티타가 서로 다른 것은 구나티타는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죽을 인간을 얽매는 얽맴을 떨어버렸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식의 결과로 돌의 안식을 성취하고 있다. 돌과 한가지로 증거하지만, 그것 구나나 프라크리티의 작용을 행하는 자는 아니다. 즈나니(아는 이)는 정좌하여 작용하는 것은 구나임을 알면서도 흔들림이 없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가 그 행하는 자인 듯이 행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다만 그 지경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도저히 그것을 체험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수레를 그 별에다 붙들어 맬 수는 있고, 그리하여 모든 활동에서 자신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점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구나티타는 자신으로서의 지경의 체험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지경을 떠난 것이다. 그러려고 하는 순간, ‘자기’가 벌써 참견을 한다. 우리 평상시의 살림에서 하는 평화, 광명, 소란, 게으름의 체험은 환상이다.「기타」는 여러 가지 말로써 신성의 지경은 구나티타에서 가장 가깝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나도 어떤 때에 가서는 구나티타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힘써서 자신 속에 더욱 선성을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간디
 
26. 흔들림 없는 박티 요가로써 나를 섬기는 사람은 이 3성을 초월함으로써 브라만이 되기에 합당하니라.
 
27. 나는 불사 불멸의 브라만의 기초로, 영원한 법, 절대 복락의 기초이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인격적인 크리슈나가 자기는 절대의 브라만의 기초라고 한다. 샹카라는 설명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주는 그가 브라만의 나타남이라는 의미에서 브라만이라고 한다. 브라만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이슈바라삭티(Isvarasakti)를 통해서 은총을 보여주는데, 그는 그 능력의 나타남이므로, 브라만 자신이다. 샹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설명을 한다. 브라만은 인격 적인 주다. 그러므로 이 절의의미는 “나, 무한정, 불가형언의 내가 한정 속에 있어서 불멸괴(不滅壞)하는 브라만의 기초다” 하는 뜻이다. 닐라칸다(Nilakantha)는 브라마를「베다」가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라마누쟈는 이것을 해탈된 영혼으로 해석하고 마드바(Medhva)는 마야(maya)로 본다. 마두수다나는 이것을 인격적인 주로 본다. 크리슈나는 자신을 절대 무제한의 브라만이라고 한다. —라다크리슈난
구나티타는 모든 구나를 뛰어넘었다. 사트바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모든 정진자가 그렇게 하려고 하겠지만) 그보다도 순결 무염(無染)한 사트바여서 라쟈스나 타마스의 한 부스러기도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완전은 사트치트아난다(sat-chit-ananda)인 ‘그이’다. 브라만의 모습 그대로다. 그는 사트(sat), 곧 참, 혹은 실재며, 자신 속에 영원한 법(dharma) 즉 우주 진화의 영원한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치트(chit)다. 그는 완전한 복이 있는 곳이므로 아난다(ananda)다. —마하데브 데자이
이 절의 뜻은 삼캬론의 이원론을 버리고 나기만 하면 남는 것은 오직 하나 파라메슈바라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트리구나티타(trigunatita)의 경지는 파라메슈바라를 믿어서만 된다. 그러나 오직 한분 최고 주재자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기타」는 ‘그이’ 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독단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기타」가 신앙이 가장 쉬운 길이라 하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받아들일 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서도 다른 길은 따르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기타」는 오직 신앙의 길만을 지지한다. 혹은 지식의 길만을 혹은 요가의 길만을 지지한다 하는 것은 각각 그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붙인 의견일 뿐이다. —틸라크
 
이것은「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14장 3성분별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쳐주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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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03 조회9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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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밭 크쉐트라(kshetra), 들(field). 전(田).
밭알이 크쉐트라즈나(kshetrajna), 지전(知田).
앞장에서 구원(해탈)은 비록 나타나 보이지 않고 인식할 수도 없는 최고 주재자(Pr[arameshvara)를 명상함으로야 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마는, 또 그 구원을 쉽게 얻는 길(易行道)이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즉, 그 최고 주재자의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형상을 신앙으로 몸 바쳐 믿으며, 모든 행동을 그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제7장에서 시작된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에 대한 설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최고 주재자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으려면 사람의 몸과 영혼(즉, 밭과 밭알이, 크쉐트라와 크쉐트라즈나)에 대한 것을 알지 않으면 아니되며, 또 겸하여 변(變), 불변(不變)의 외적 우주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일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물체들이 원소들에 의해 지어진 것을 안다 하더라도,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의 문제는, 자연의 어떤 성질에 의하여서 이 광대무변한 전개가 이루어졌으며, 또 그 전개의 순서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전에는, 다 됐다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13장에서는 먼저 몸과 영혼의 문제를 설명하고, 그 다음 네 장에서 세 구성 요소의 부분을 설명한 다음, 18장에서 전체 문제를 요약한다. 한마디로 해서, 이 세째 사다쟈이(sadadhyayi, 여섯 장씩으로 되는 편들)는 독립된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의 전통에서는「기타」전체의 18장을 6장씩 세 편으로 나누어서 그 제1편을 倫理篇, 제2편을 神理篇, 제 3편을 心理篇이라 한다―역주) 그리하여 제7장에서 시작된 카르마 요가를 완전히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에 대한 설명은 이 제3편에 가서야 완결이 된다. ―틸라크
 
아르쥬나 말하기를
 
케샤바시여, 프라크리티와 푸루샤, 밭과 밭알이, 지식과 지식의 대상을 알고 싶사옵니다.
케샤바(Keshava) 조발주(稠髮主), 크리슈나의 칭호.
프라크리티(prakriti) 물질, 자연. 자성(自性).
푸루샤(purusha) 정신.
밭 크쉐트라, 몸.
밭알이 크쉐트라즈나, 몸을 아는 이, 영혼.
지식 즈나나(jnana).
지식의 대상 즈네야(jneya), 소지(所知), 가지(可知), 이염(爾燄).
이 절은 어떤 본(本)에는 없다. 샹카라는 이 절에는 주를 달지 않았다. 이것을 만일 한 절로 친다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기타」의 전체의 절수는 700이라는 것과 맞지 않고 701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절에 넣지 않는다.—라다크리슈난
이것은 분명히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해서 몸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기타」속에 들어오게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에 써넣은 것이다. 일반으로 주석가들은 이것을 후대에 써넣은 것으로 본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쿤티의 아들아, 이 몸을 가리켜 밭이라 하고, 그 몸을 아는 이를 가리켜 밭알이라 하느니라.
프라크리티는 무의식의 활동이고, 푸루샤는 비활동적인 의식이다. 몸은 밭이라 해서, 거기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다. 성장과 쇠잔과 사망이 거기서 일어난다. 의식적인 원리는 활동은 아니하고 가만있어 모든 활동적 상태의 뒤에 들어 있어서 지각하고 있는 것으로서 밭을 아는 자다. 이것이 누구나 잘 아는, 의식과 의식이 보고 있는 대상과의 차이다. 크쉐트라즈나, 즉 밭알이는 지각의 빛, 즉 모든 대상의 지각자다. 지각한다는 것은 개체적으로 있는 마음으로서가 아니고 전우주를 대상으로 삼는 우주적 의식으로서다. 그것은 고요히 맑고 영원한 것이어서 지각을 하기 위해서 어떠한 감관의 사용도 필요치 않다.
크쉐트라즈나는 지극히 높은 주지 세계 안의 어떤 물체가 아니다. 그 자신은 어떠한 제한도 없고 어떤 범주에 의해서도 정의할 수 없는 이이지만 그이는 가지가지 상태의 제한된 차이에 따라, 창조주인 브라마로부터 풀잎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든 밭(境) 속에 계신다. 불변의 의식을 인식자라고 하는 것은 다만 비유로 하는 말이다.
우리가 인간 영혼의 성격을 알아보려고 할 때는 위로부터도 할 수 있고 아래로부터 할 수도 있다. 즉, 영적인 원리에 의해 하든지, 아니면 본질적인 성격에 의해 하든지, 인간은 이중적인, 서로 반대되는 존재다. 자유 하면서 또 종살이면서, 그는 하나님 닮으면서 또 그 속에 타락의 표적을 가지고 있다. 즉 자체 속에 떨어져 있다. 타락한 존재로서는, 사람은 프라크리티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외견상 순전히 원소적인 힘에 의해, 감각적인 충동에 의해, 공포 불안에 의해 결정이 되는 듯하다. 그렇지만 자기의 타락된 성격을 이기기를 바란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같은 객관적인 과학에 의하여서 연구되는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다. 세계 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운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하나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다른 기원을 가진다. 그는 세계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자연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객관적인 서열에 속해, 거기 복종하는 한 부분이 아니다. 푸루샤 혹은 크쉐트라즈나를 여러 대상 중 한 대상으로, 혹은 한 물체로 인식 할 수는 없다. 그는 다만 주체로만, 그 안에 존재의 비밀이 들어 있는 한 개인의 형태로 있는 하나의 온전한 우주로만 인식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세계의, 혹은 그 밖의 어떤 다른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다. 하나의 경험적인 존재로는 그는 한 개의 라이브니트의 모나드 같은, 문도 창도 없이 닫히고 갇힌 것일 수 있다. 하나의 주체로는 그는 무한 속에 들어가고 무한이 그 속에 들어간다. 크쉐트라즈나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개인적 형태 속에 있는 보편자다. 인간의 형체는 보편적 무한과 보편적 특수 가 연합된 것이다. 그의 주관적 양상에서는 그는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능적인 전체이다. 그것은 실상화하는 것이며, 그 보편성을 완성하는 것이 사람의 이상이다. 그 주체는 자체를 보편적인 내용으로 충만 시킨다 —그 여행의 끝에 가서 완전의 통일을 성취한다. 인간의 특성은 두 눈 두 손의 공통된 방식을 가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질적인 내용을 창조적으로 성취케 하고야 말, 강력하게 내미는 내적 원리를 가지는 데 있다. 그는 보통이 아닌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이상적인 인격은 독특한 반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각 사람은 그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 특이한, 반복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가진 생명체가 된다. —라다크리슈난
 
2. 바라타의 아들아, 나를 모든 밭에 있어서의 밭알이로 알아라. 밭과 밭알이를 아는 것이 참 지식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니라.
 
3. 그 밭이란 어떤 것이며, 그 성질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어디로 조차 오는 것인지, 또 그것을 아는 이는 누구며 그의 능력은 어떤 것인지를 내게 간략히 들어보아라.
 
4. 이것은 여러 성자들에 의하여 각종 각양의 찬가로 노래되었으며, 또한 명철하고 금강적(金剛的)인「브라마수트라」의 귀절에 의하여 노래되었느니라.
「바가바드기타」는 그것이 「베다」와「우파니샤드」와 「브라마수트라」(Brahma-sutra)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라다크리슈난
이 절에서 이야기하는「브라마수트라」는 오늘날 있는「베단타수트라」(Vedanta-sutra)를 말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한 성자가 한 문제에 대하여 쓴 것이 아니고 여러 성자들이 서로 다른 때 서로 다른 문제에 대해 감동된 가지가지의 형이상적인 생각들을 기록한 것이므로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 있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을 서로 뜻이 통하게 하기 위하여 바다라야나(Badarayana)가「베단타수트라」를 썼다. 그리하여「우파니샤드」안에 있는 모든 제목들을 새 수트라에 집약하여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어떻게 그것을 하나의 교리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안에 밭과 밭알이에 관한 설명들이 있기 때문에 「브라마수트라」를 또「사리라카수트라」(Sariraka-sutra)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사리라(sarira) 즉 크쉐트라에 관한 성전 곧 수트라기 때문이다. 一틸라크
 
5. 5대 원소, 나라는 생각, 이성, 비현현, 감관, 마음의 다섯 대상.
5대원소(五大原素) 마하부타니(maha-bhutani),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나라는 생각 아함카라(ahamkara), 아집(我執).
이성 부디, 지성(知性, intelligence, understanding).
비현현(非顯現) 아박타(avyakta), 나타나지 않음(unshown), 자성(自性).
감관(感官) 인드리야니(indriyani), 감각기관(sense-instuments),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이것을 5지근(五知根)이라 함. 근(根)은 기관이란 뜻이요, 근에 대하여서 대상을 경(境)이라 하는데. 그것도 다섯, 즉 색(色), 성 (聲), 향(香), 미(味). 촉(觸).
 
6. 욕망, 미움, 즐거움, 괴로움, 모음 의식, 단단함, 이것을 간단히 말한다면 밭과 및 그 변화니라.
모음(集合) 모아놓은 것이라는 뜻. 몸을 의미하는데 우리 말의 몸도 모음이란 뜻인 듯.
의식 살아있는 흔적을 보여주는 것.
정상적인 현상까지를 밭에 속한다 한 것은 그것이 지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밭알이는 주관인데도 그것을 대상 즉 물건으로 꼽는 것은 무지 즉 아비자(avidya)임을 의미한다. 대상화는 주관을 객관세계로 몰아냄이다. 객관세계의 어떤 것도 자주하는 실체인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주체성을 깨닫는 것은 객관세계의 종으로 잡아가두는 힘을 이기고, 그 안에 녹아버리기를 거부할 수 있은 다음에야 가능하다. 이것은 저항과 고통을 의미한다. 둘러싸는 세계에 대한 묵종과 그 관습은 고통을 감해주고, 저항은 그것을 더해준다. 고통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 참비 본성을 찾으려고 싸워나가는 길이다. —라다크리슈난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
 
7. 안 교만함, 거짓 없음, 안 사나움, 참음, 곧음, 스승섬김, 깨끗, 굳셈, 자제(自制),
 
8. 감각의 대상에 대해 애착이 없음, 나란 생각이 없음, 삶 죽음 늙음 병의 괴로움과 고통에 대해 생각을 가짐,
 
9. 자녀, 아내, 집, 그런 것들에 대해 무애착 무관심함, 좋은 일 언짢은 일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가짐,
 
10. 전심으로 하는 요가에 의하여 내게 대한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가지고, 한적한 곳을 떠나지 않으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데를 좋아하지 않고,
 
11. 영적 자아에 대한 영구성 있는 지식을 가지며, 진리의 지식의 구경에 대한 뚫어봄이 있는 것, 이것을 참 지식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지식이 아니니라.
여기 몇 절에 걸쳐 열거한 것을 보면 즈나나 즉 지식에는 도덕의 실천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단순한 이론적인 지식은 아무 것도 아니다. 도덕성이 발달함에 따라 항구불변하는 자아의 빛은 모든 것을 보기는 하면서도 거기 집착함은 없어 일시적인 것들에서 떠나 스스로 그것과 버물리지 않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목적(지식)이 수단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주의해볼 만하다. 왜냐하면 수단 없이는 목적도 없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그 말은 다르지만 뜻은 서로 일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여러분은 온갖 열성을 다 기울여서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게 되어 많은 업적을 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앞 못보는 장님이며 과거에 지은 자기의 죄가 깨끗해졌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베드로후서」1: 5∼9)—마하데브 데자이
 
12. 내 이제 네게 알 수 있는 것을 보여줄 것이니, 그것을 앎으로 인하여 구원을 맛보리라. 그것이 처음이 없는 지극히 높은 브라만이니 그는 있음이라 할 수도 없고 안 있음이라 할 수도 없느니라.
알 수 있는 것 즈네야(jneya), 가지(可知).
구원 아므리타(amrita), 감로, 신주(神酒), 구원, 불사, 영원한 생명.
처음이 없는 아나드마트파라(anadmat-para).
있음 사트(sat), 유(有).
안 있음 아사트(asat). 비유(非有)
 
13. 모든 곳에 손과 발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곳에 눈과 머리와 입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곳에 귀를 가지고 있어, 그는 우주에 계셔 모든 것을 덮고 있다.
최고의 주재자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진다. 초월하여 떨어져 있음과 내재하여 각 특정한 나 아닌 것과 연합되어 있음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의 모순으로 묘사된다. 밖이면서 안, 부동(不動)이면서 동(動), 멀면서 가깝고, 갈라짐 없으면서 갈라져 있다.「마하바라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자아가 자연의 여러 가지 방식들과 연합됐을 때 그를 크쉐트라즈나, 밭 알이라 부르고, 거기서 풀려났을 때 파라마트만 즉 지극히 높으신 자아라 부른다.” —라다크리슈난
 
14. 그는 어떤 감관도 가지지 않으면서 모든 감관의 능력을 가진 듯이 보이고, 집착함이 없으면서 모든 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특성이 없으면서 특성의 맛을 알고 있다.
특성 구나(gunas), 성(性).
 
15. 만유 밖에 계시면서 또 그 안에 계시고, 부동이면서 또 동이시다. 너무도 미묘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고, 멀리 서시면서도 그는 가까이 계신다.
 
16. 갈라지지 않았으면서도 모든 산 것 속에 갈라져 있는 듯이 보이니, 그는 만물을 지지하는 자요, 멸하시는 이요, 다시 지으시는 이로 알아야 할 것이니라.
 
17. 그는 빛 중의 빛이시오, 어둠을 뛰어넘으신 이다. 지식이요, 지식으로 알 이시요, 지식에 의하여 뚫고 들어갈 이시다. 그는 일체의 가슴속에 들어 계시는 이니라.
빛은 만물의 가슴속에 들어 있다. 이 모든 말들은 다「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들이다.「수베타수바타라 우파니샤드」(Svetasvatara) 3권 8과 16.「이샤 우파니샤드」(Isha Up.) 우파니샤드(Mundaka Up.)
13권 1과 7,「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Brihadaranyaka Up.) 4권 4와 16 참조. —라다크리슈난
언더힐(Miss Underhill)이 인용한 각 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의 말을 비교해보라.
“저 이름 할 수 없는 어떤 무엇, 그것은 하나님이 되실 수 있을이만큼 크신 이요 내가 될 수 있을이만큼 작으신 이다.”(Suso) “네가 작고 작은, 겨자씨만한 동그라미를 생각한다 해도 하나님의 마음은 그안에 온전히 다 들어갈 수 있다. 네가 하나님 안에 났다면 네 속에 하나님의 심정이 갈라짐 없이 그대로 다 있다.”(Boehme) “하나님은 나 자신보다도 더 내게 가까이 계신다. 그는 숲과 돌에도 역시 그렇게 가까이 계시지만, 그것들은 그것을 모른다.”(Eckhart)
만일 현대 영국 찬송가의 말을 빈다면, “숨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그 이, 손보다도 발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이”가 될 것이다.
 
18. 밭과, 밭알이와, 알아야 할 것을 대략 말하였으니, 나를 믿는 자가 그것을 알면 나의 존재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19. 너는 알아야 한다.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는 다 처음이 없는 것이다. 또한 알아라. 변화와 특성은 다 프라크리티에서 나온 것이니라.
지극히 높은 이가 영원한 것같이 그의 프라크리티도 또한 그렇다. 자연과 영혼 두 프라크리티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이슈바라는 우주의 기원과 지지와 무너짐을 다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푸루샤는 삼캬론에서 말하는 것 같은 여러 가지의 푸루샤가 아니고 모든 밭에 하나로 있는 크쉐트라즈나다.「기타」는 삼캬론에서 하듯이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를 두 개의 독립한 요소로 보지 않고, 같은 하나의 지극히 높으신 이의 낮은 모습과 높은 모습으로 본다. —라다크리슈난
 
20. 프라크리티는 인과작용이(주가 되는 점에 있어서) 인이라고 하고, 푸루샤는 즐거움 괴로움을 느껴 받음에서(주가 되는 점에 있어서) 인이라고 하느니라.
프라크리티 자연이라고도, 혹은 물질이라고도 번역한다. 불교 용어로 한다면 자성(自性)이다.
인과작용(因果作用) 원문은 카랴카라나카르트리트베(karya-karrana- kartritve) 인데 카랴는 결과의 뜻(effect)이요, 카라나는 원인(cause)이의 뜻이요. 카르트리트베는 작용(activity)의 뜻이다.
인(因) 원인(原因) 결과(結果)라 할 때의 인이다. 원문으로는 헤투(hetuh)라는 단어인데, 한문으로는 원리라 번역한 데가 있고 영어로는 원인(cause) 외에 방편(instrument)이라 한데도 있다.
푸루샤 한문으로는 자아라 했으나, 그러면 아트만과 혼동될 수 있고, 영어로는 솔(soul)이라 하기도 했으나 그러면 우리말로는 영혼 같아서 또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넋, 백(魄)이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틸라크는 이 절의 카랴를 몸이라 해석했고 카라나를 감각이라 했으며, 라다크리슈난도 이 점에 대한 주석에서 몸과 감각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오고 즐거움 괴로움의 경험은 푸루샤에 의해서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영혼(Self)의 복된 본성이, 즐거움 괴로움을 그 자연적인 대상이 바로 그런 줄로 앎으로 인해서 더러워짐을 받는다고 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힌두교의 우주론을 간단하게나마 알 필요 있다.「기타」가 말하는 것은 당시에 일반으로 알려져 있었던 삼캬론의 것이었으므로, 그 삼캬에서 말하는 것을「간디에 의한 기타」(Gita According to Gandhi) 중에 기록되어 있는 마하데브 데자이의 설명에 의해서 보기로 한다.
“샴카(samdhya system) 철학에서는, 위에서 우리가 본 대로, 프라크리티와 푸루샤의 두 개의 영원한 원리가 존재한다고 정해놓는다. 프라크리티 혹은 원시적 물질, 혹은 자연의 존재는 그에 의하면, 이 나타난 우주에 의해 증명된다. 이것은 그 결과로 된 것이며, 결과는 사실로는 원인 안에 있다. 그 원인은 필연적으로 원인 없는 원인(couseless cause)이다. 이 나타나 뵈지 않는 프라크리티로부터 나타나 뵈는 우주가 진화되어 나오는 것은 그 안에 자명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세 구성 요소 사이에 있는 균형에 혼란이 일어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구성 요소를 구나(gunas) 라고 하는데—성(性), 혹은 덕(德)이라 번역된다—글자 그대로의 뜻은 실오리, 혹은 프라크리티를 이루어가지고 있는 세 가다리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라고 부르며 그것이 존재와 운동과 타성의 근원이 되는데, 그 작용은 빛, 활동, 억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 같이 있는 것이요, 사실로 서로 떠나는 일이 없다. 서로 갈라져서 서로 섞인다. 균형이 깨지자마자 프라크리티는 진화를 시작하고, 진화되어 나온 것은 다 그 구성의 흔적을 입게 되는데, 우주 안에 있는 물체가 무한히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은 이들 세 요소가 각 물체 안에서 서로 다른 비율로 있어서 서로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라크리티는 푸루샤의 영향을 받음없이 혼자서는 진화하지 못한다. 푸루샤도 프라크리티나 마찬가지로 영원한 원리인데, 그것이 어떻게 있게 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삼캬 철학자들간에는 복잡한 토론이 있지만, 거기 대하여는 말할 것 없다. 푸루샤는 그 몸, 즉 프라크리티에게 알게 해주는 혼이다. 프라크리티와는 달라서 그것은 활동적이 아니다. 그에게는 구나가 없다. 그러므로 구나를 가지는 모든 물체의 주체요 보는 자인 그는 원인도 결과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프라크리티는 하나인 대신 푸루샤들은 무수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있어서 그것을 이루어가지고 있는 원료는 다 한가지인데, 서로 다른 개인들에게 서로 다른 남과 죽음, 서로 다른 자체들과 기능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프라크리티 진화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그릴 수 있다.
                                  ➀ 프라크리티(나타나 뵈지 않음)
                                           (나타나서)
                                  ➁ 부디 (知 혹은 意)
 
                                  ➂ 아함카라(개체화)
 
 
          유기적                                                                                   무기적
 
         ➃마나스(마음)                                                       ⑮~⑲ 다섯탄마트라(빛, 소리,
         ⑤~⑨ 다섯 감관(눈, 귀, 코, 혀, 몸)                                                        냄새, 맛, 촉각)
         ⑩~⑭ 다섯 행동 기관                                               ⑳~㉔ 다섯 마하부타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地, 水, 火, 風, 空)
 
 
이슈바라찬드라(Ishvarachandra)의 카리카(karika)이에 나오는 삼캬론에는 최고 주재 혹은 신(god)은 없고 다만 프라크리티와 푸루샤만이 두 영원한 원리로 있을 뿐이다. 푸루샤가 있어 어떻게 작용해 나타나 뵈지 않는 프라크리티의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진화가 시작된다. 단일적인 프라크리티의 진화의 첫걸음은 그것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결정함, 혹은 뜻함(buddhi)이다. 비록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의 첫째 산물이라고 한다. 다음은 개체화(ahamkara), 부디의 산물인데, 그것으로 프라크리티가 분열되어 가지가지의 무수한 실체로 갈라지게 되는 원리다. 그 개체들은 두 길로 갈라져서 유기물, 또는 무기물이 된다. 그 개체화에서 유기물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11근(十一根), 즉 마음과, 눈, 귀, 코, 혀, 몸의 인식의 5지근(五知根)과,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의 행동의 5작업근(五作業根)이 나오고,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오대원소(mahabhutas)로 만들어지는 무기물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5경(五境 tanmatras)을 만들었다. 이 세 개의 5 인조는 사실 서로서로를 불러내주고 있다. 각 감관은 오직 하나의 분야를 가질 뿐이다. 예를 든다면 눈은 빛의 분야뿐이고 다른 것은 없고, 귀는 소리의 분야뿐 다른 것은 없다. 그래서 5지근(五知根)에 대해서는 5경(五境)이 있을 뿐이고, 그리고 5경에 대해서는 지, 수, 화, 풍, 공의 5대원소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프라크리티의 우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 선견자들이 자연 속에 분명히 있는 이 진화의 과정에 도달한 것은 의심 없이 다만 조그만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구조를 관찰함으로써 된 것이다. 이 소우주는 그들에게는 대우주의 축소판이었다. 개인에게 있어서 인식의 감관은 마음에다 자료를 제공해서 마음으로 하여금 그 속에서 인식을 만들어 내게 한다. 그리고는 개체화는 그것을 자아에 대해 미루어보아서 그것을 부디에 혹은 결정의 원리에다 보낸다. 그러면 그것이 개념과 결정을 지어서 마음에다 돌려주며, 그렇게 되면 마음은 그것을 다섯 행동기관을 통해서 실행시키게 된다.
푸루샤가 어떻게 해서 프라크리티에 잡혀버리느냐 하는 것을 대충 이런식으로 설명한다. 진화가 시작된 후에는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는 부디는 푸루샤와 마찬가지로 자극적이다. 부디가 사트바의 색채를 띠게 되면 푸루샤의 해방을 돕고, 타마스나 라쟈스의 색채를 띠면 푸루샤를 결박하여 졸라맨다. 사실 욕망, 미움, 좋아함, 싫어함, 쾌락, 고통 하는 모든 심리적 경험은 푸루샤가 스스로 떠멘 부디의 변형들이다. 부디가 사트바 구나(善性)의 영향을 받아서 선행, 분별, 냉철을 일으키면 해방의 운동이 시작되어 부디에 푸루샤와 프라크리티의 차이가 분명해져서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는 서로 해방된다. 산사라(sansara) 즉 생사윤회의 바퀴는 고통인데 그것을 영원히 끊어버리는 단 하나의 방법은 이 지식 즉, 분별이다. 개인 즉 소아는 언제나 대아의 확신을 얻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확신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이 분별의 지식이 일어난다. 그 지식의 내용은 “나는 아니다.” 즉, “나는 프라크리티가 아니요 푸루샤다” 하는 깨달음과,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다” 하는 깨달음과, “소아는 없다” 즉 “나는 행하는 자도 경험하는 자도 아니다” 하는 깨달음이다. 이 지식이 “죄와 고통의 사슬에서부터의 영원한 해방이다.”
앞면에 있는 도표의 인식과 행동의 열(根)과, 마음과, 다섯 대원소는 다른 것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이성과 개체화와 다섯 경(境)은 원인 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인데 20절에서는 결과로 말하고 있다. 프라크리티가 그 모든 것을 낳는다. —마하데브 데자이
 
21. 왜냐하면 푸루샤는 프라크리티 안에 있으면서 그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구나를 받는다. 이 구나에 집착함이 선한 탯 속 혹은 악한 탯 속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느니라.
프라크리티는 보통 말로는 마야(maya, 無明)이다. 푸루샤는 지바(jiva, 生命素)인데, 지바는 자기 성질에 따라 활동하면서 세 구나에서 일어나는 행동의 열매를 경험하게 된다. —간디
 
22. 감시자, 찬성자, 지지자, 경험자, 최고 주재자, 가장 높은 자아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영이 이 몸에 계실 때의 칭호이니라.
여기서 가장 높은 자아라 하는 것은 심리적 생리적 개인과는 다르다. 그 개인은 프라크리티의 작용 속에 얽매임으로 인하여 생기는 분리적 의식을 초월할 때에 영생하는 자아가 된다. 「기타」에서는 밭알이와 지극히 높으신 주와의 사이에 구별을 하지 않고 있다. —라다크리슈난
지바 혹은 개인적인 대아(大我)는 이 한정된 몸속에 있기 때문에 온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것이 다름 아닌 ‘그이’ 즉, 지극히 높으신 이이 다. —마하데브 데자이
 
23. 이와 같이 푸루샤와 프라크리티와 그 구나를 깨달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든지간 다시 태어나지 않느니라.
2장, 9장, 12장의 주지에 의해 이 절을 읽을 때 어떠한 방탕주의도 허락되는 말이라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자기를 완전히 내놓는 무사한 헌신의 덕을 가르치는 말이다. 모든 행동이 자기를 얽어매지만, 모든 것을 주한테 바치면 얽어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해방시켜준다. 이와 같이 자기 혹은 나란 생각을 소멸시켜버리고, 언제나 저 대감시자의 눈앞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다시 죄를 짓거나 잘못하는 일이 없다. 모든 잘못과 죄 밑에 자기의식이 들어 있다. 그 ‘내’가 소멸됐을 때, 죄는 이미 없다. 이 절은 모든 죄를 어떻게 피해나가는가를 보여준다. —간디
 
24. 어떤 이는 쟈나에 의하여 아트만을 자기로서 자기 안에 보고, 다른 이는 삼캬 요가에 의하여 보고, 또 다른 이는 카르마 요가에 의하여 보느니라.
쟈나(dhyana) 선정(禪定), 명상.
아트만(atman) 자아(Self),영혼, 대아(大我).
여기서 말하는 삼캬(samkhya)는 즈나나(jnana)의 뜻이다. —라다크리슈난
 
25. 그러나 또 다른이는 자기로서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여도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 (그를) 예배하게 되는데, 그들도 또한 그들의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길을 벗어나느니라.
스승의 권위에 의지하여 그 가르침대로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마음이 열리므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 —라다크리슈난
위의 두절은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길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 파탄잘리 요가에 의한 명상의 길, 둘째 삼캬론에 의하여 참지식을 얻음에 의한 행동 포기의 길, 세째 카르마 요가에 의하여 ① 모든 행동을 결과를 바람 없이 하며, 그것을 최고의 주재자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는 길, ② 신뢰할 만한 스승의 말을 믿고 최고의 주재자를 몸바쳐 공경하는 길이다. 그 어느 길을 따라도 궁극에 가서는 최고의 주재자를 아는 데 이르러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에 나오는 장들에서 이야기해온 카르마 요가가 최상의 길이라는 말과 조금도 모순이 되지는 않는다. 이 절에서는 그와 같이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는 것을 말한 다음, 다음 절들에서 전체의 문제를 한데 묶어서 결론을 짓는다. —틸라크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가르치는 가운데서, 자기발견 문제에 관한 한,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회의주의자 하는 사람들은 정신적 깨달음의 울타리 밖에 선다. 그러나 정신적 생명에 대해 알아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실천주의자들인데 행동의 결과에 대한 생각을 다 내버린 사람들이다. 언제나 일원론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속에 든다. 말을 바꾸어 한다면, 오로지 지극히 높은 인격적 신성(神性)을 믿는 사람만이 정신적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물질적 자연의 저 너머에 정신의 세계가 있는 것을 알고, 지극히 높은 인격적인 신성이 있어 최고의 주재자로서 온누리를 뒤덮고 있는 것을, 만유에 편만한 아트만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높은 절대의 진리를 지식적인 노력에 의해 터득해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도 둘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무신론의 철학자들은 이 물질적 세계를 24원소로 분석하고는 인간 영혼을 그 스물다섯째 요소로 꼽는다. 그들이 개인 영혼의 성격이 물질적 요소를 초월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때에 그들은 또한 개인 영혼 위에 다시 지극히 높은 인격적인 신성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5절의 말은 특별히 현대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에는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사실상 교육이 도무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무신론적인 듯, 혹은 철학적인 듯이 보이지만 실지로는 아무런 철학의 지식도 없다. 보통 인간에겐, 그가 선량한 영혼을 가지기만한다면, 들음에 의하여서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 듣는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크리슈나 의식을 가르쳐준 차이타냐 (Lord Caitanya)는 들음을 특별히 강조했다. 보통 사람도 권위있는 능력자에게서 듣기만 하면 진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26.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어떤 산 물건이 일어날 때는 움직이거나 안 움직이거나간에, 밭과 밭알이가 서로 연합함으로 인하여 되는 것인 줄 알라.
샹카라는 말하기를 이 연합은 “노끈이나 진주조개를 뱀이나 은으로 잘못 보았을 때같이, 분별하는 지식이 없음으로 인해서 오는 환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일까? 아마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환상으로 된 연합에서 더 되는 것이 아니겠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떠할까? 파스칼은 말했다. “사람이란 저 자신에 대하여서는 자연 속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있어 몸이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마음이란 더 알 수 없고, 그 몸이 어떻게 되어서 마음과 연합되어 있는지는 무엇보다도 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려움의 절정인데, 그것이 바로 그렇다면, 그 둘의 결합은 서로 혼동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그 혼동을 깨쳐 알게 될 때 그 결합은 끝난다.” ―라다크리슈난
 
27. 최고의 주재자는 일체 만유 속에 평등으로 들어 계시면서 멸망하는 것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보는 자가 참으로 본 자니라.
만유 속에서 보편적인 정신을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이 보편을 보고 보편이 된다.
‘멸망하는 것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는다.’ 만일 만물이 끊임없이 진화하는 상태로 있다면 불변하는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든다면, 베르그송(Bergson)은 하나님을 완전히 세계 속에 내재하여 있으면서, 세계가 변할 때에 같이 변하는 이로 만들어버렸다. 우주 발전과정의 한 부분으로 생각되는 진화의 하나님은 우주가 움직이기를 그칠 때에 존재하기를 놓치고 말 것이다. 열역학의 제 2법칙은 하나의 무사변의 침체, 완전한 휴식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진화, 돌변하는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 구주는 될 수 없다. 그는 종교적 감정의 한 알맞은 대상이 아니다. 이 절에서 「기타」는 하나님은 우주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 계시는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라다크리슈난
골은 죽지 않아, 이를 일러 감은이라 하니, 감은의 문, 그것을 일러 하늘 땅의 뿌리라 한다. 실낱같이 끊이지 않아 있는 듯한데, 써도 다함없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노자
 
28. 모든 곳에 다름없이 평등으로 계시는 이슈바라를 보는 사람은 자기로 하여 자기의 참 자아를 해치 않으므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느니라.
이슈바라(Ishvara) 창조의 근원인 주.
같은 하나님을 모든 곳에서 보는 사람은 ‘그이’ 안에 빠져들게 되므로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정욕에 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대적이 되지 않음으로써 자유함에 이른다. —간디
 
29. 모든 행동은 다만 프라크리티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요, 그러므로 참 자아는 그 행하는 자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은 참으로 보는 사람이니라.
사람이 잘 때에, 그의 자아(영혼)가 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프라크리티가 그렇게 하는 것이듯이, 그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자아를 모든 행동에 버물리지 않게 하고 있다. 정결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다. 프라크리티가 행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건방진 사내가 그를 아내로 붙잡을 때 둘의 정욕이 일어나는 것이다. ―간디
 
30. 사람이 만일 산 물건들의 가지가지의 상태가 하나인 것에서 일어나서 거기서부터 번져나가는 것이라 본다면, 그는 브라만에 도달하느니라.
자연의 복잡과 발전을 ‘영원한 하나’에까지 더듬어 올라갔을 때 우리는 영원을 스스로 취한 것이다. 아난다기리(Anandagiri)는 말했다. “모든 유한의 원인을 자아의 통일 속에 빨아들이고 말았을 때 그는 자아의 무한 보편한 성격을 깨달은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모든 것이 브라만 속에 평안히 머무는 것을 깨달았을 때 브라만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면 지바(jiva)가 시바(Shiva)가 된다. —간디
이 생각의 근거는「우파니샤드」에 있다. “땅 위에 여러 가지란 것은 없다. 여기서 여러 가지인 것밖에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은 죽음에서 죽음으로 간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영원한 산 것은 오직 통일로 보아서만 인식할 수 있다.” 쇼펜하워의 상상력을 붙잡아 “힌두교의 성자들은 부딪히는 모든 것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동질성을 가지고 모든 공덕과 복을 확신하며 구원의 직로(直路)를 걸었다”라고 말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사상이었다. —마하데브 데자이
 
31. 쿤티의 아들아, 이 지극히 높은 불멸의 자아는 시작도 없고 특성도 없으므로 비록 몸속에 있을지라도 무엇을 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느니라.
 
32. 마치 에테르가 일체에 편만하면서도 지극히 가늘고 작기 때문에 물이 들지 않는 것같이, 그와 같이 자아도 모든 몸속에 있으면서도 물드는 일이 없느니라.
 
33. 바라타의 아들아, 마치 한 태양이 온 세계를 두루 비치듯이, 그와 같이 밭의 주께서는 왼 밭을 비치시느니라.
 
34. 지혜의 눈으로 그와 같이 밭과 밭알이의 차이, 또 산 프라크리티와 산 것들의 구원의 (비밀을) 깨닫는 사람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느니라.
 
이것이 제 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의 끝이니 이는「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요가를 가르치는 학문에 있어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가 하는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