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30

알면 알수록 놀라운 독일 농촌의 '비밀' - 오마이뉴스 모바일

알면 알수록 놀라운 독일 농촌의 '비밀' - 오마이뉴스 모바일



알면 알수록 놀라운 독일 농촌의 '비밀'

[행복사회 유럽 24] '사람 사는 농촌'이 목표, 인구까지 헌법에 규정


일시 15.09.28

정기석(tourmali) 기자

공감405 댓글27선진국 독일 농민들도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지 못한다. 농가당 연평균 농업소득이 2천만 원 밖에 안 된다. 그중 50% 이상은 세금으로 나간다. 한국 농민의 수준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러나 한국 농민들과 독일 농민들의 생활은 차원이 다르다.

독일 농민들은 농촌을,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기본생계를 국가에서, 정부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어찌보면 기본소득제나 마찬가지인 직불금 정책으로 농업 소득만큼 부족한 생활비를 보전해준다. 농민들은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 그런 국가와 정부를 믿고 농촌을 잘 지키고 산다.

무엇보다 독일에는 농부들 스스로 욕심을 조절하고 규제할 수 있도록 법과 정책이 마련돼 있다. 1954년에 만들어져 60년 넘게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녹색계획(Green Plan)이다. 도시보다 농촌이,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독일의 농업정책은 바로 이 4가지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철칙과 같다.

첫째, 농민도 일반국민과 동등한 소득과 풍요로운 삶의 질을 향유하며 국가 발전에 동참한다. 경쟁력 향상, 소득 증대만 추구하면 대다수 소농들의 토대는 무너지고 이농을 할 수밖에 없다.

둘째, 국민에게 질 좋고 건강한 농산물을 적정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한다. 농산물을 과대포장해 비싸게 파는 것은 세금을 내는 국민을 배반하는 일이다.

셋째, 국제 농업과 식량문제 해결에 기여한다. 자국의 먹을거리 문제 해결은 물론, 먹는 것으로 다른 나라의 목을 조이지 않는다.



넷째, 자연과 농촌의 문화경관을 보존하며 다양한 동식물을 보호한다. 농촌의 자연, 문화 경관은 모든 국민이 즐길 권리다. 국도변, 아름다운 호숫가에는 상점도, 간판도 들어설 수 없다.

한줄 한줄이 다 금과옥조같다. 그래서 농민들은 농사를 크게 짓거나 돈을 많이 벌려고 무리를 하지 않는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 2% 밖에 안 남은 독일 농민들은 독일 국민의 60%가 사는 농촌을 사람이 살 만한 생활공간으로 보전하고 보호하는 일에 오직 집중하면 된다. 자기의 자리만 그대로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


축소
▲ 라인스바일러 마을 한복판에서 1581년부터 샘 솟고 있는 마을의 공공재 샘물 - ⓒ 정기석

독일 농정의 목표는 '사람 사는 농촌'

이렇게 독일의 농정이 궁극의 목표로 삼는 지상과제는 그저 '사람 사는 농촌'이다. '돈 버는, 또는 돈 되는 농산업'이 아니다. 농민도 사람 꼴을 하고,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생활농촌을 지향한다. 그 소박하지만 소중한 '농(農)'의 철학과 가치를 공평하고 공정하게 실천하는 데 독일 농정당국은 매진하고 있다.

물론 첨단기술농업이니 농식품가공이니 수출농업이니 '돈도 되는' 농업전략과 정책이 없는 게 아니다. 그건 자본력과 조직력이 뛰어난 일부 기업농이 할 일이다. 대다수 중소농이 함부로 덤벼들 영역이 아니다.

평균적인 농민들은 이기적으로, 경쟁적으로, 독과점적으로 '저 혼자만 잘 먹고 잘 살 수 없게', '생활에 필요한 돈 이상은 못 벌게', 유기농업이나 지역농업에 충실하게 법이나 조합의 정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농촌공동체, 농업 협업경영체(Gemeinscaft) 동지들 사이의 약속으로 서로가 서로를 엄중하게 단속하고 규제하고 있다.

독일 농촌에는 더 놀라운 사실도 있다. '농촌에 최소한 유지되어야 하는 인구밀도'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굳이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정부의 공무원들은 애를 쓰고 있다. 농민들이 살고 있는 농촌의 전통과 경관을 지키려고 들판의, 나무 한그루도 함부로 베지 않는다. 농업소득 보다 많은 소득보전 직불금도 다 그런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정책의 성과물이다.

그런 독일 농정의 현장에서 나는 계속 감동하고 감탄했다. 농민의 삶을 돌보고 지키려 애 쓰는 이 국가의 도덕성이, 이 정부의 책임감이, 이 국민들이 품고 있는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와 양식'이 놀라웠다. 결국 신뢰, 협동, 연대 같은 철두철미한 사회적 자본의 힘이 부럽고 샘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의심과 의혹이 크게 들었다. 지난날 독일 등 유럽의 선진 농정을 배우고 돌아와 오늘날 대한민국 농정당국의 요직을 꿰차고 있는 수많은 학자, 공무원, 전문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나. 대체 무엇을 했나.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도대체 독일 같은 농정 선진국의 농업, 농촌 현장에서 그들은 뭘 보고 느끼고 돌아온 건가.

설마 독일에 가서 농업을 자본에게 헌납하는 농업의 기업화개론과 공업화총론만 공부한 것인가. 삶의 터전인 농촌 마을을 한낱 유원지 같은 구경거리로 만드는 관광지화 경영론, 공원화 개발론만 실습하고 온 건가. 그게 아니라면 대체 우리 농업이, 우리 농촌이, 우리 농민의 삶이 도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는가.


축소
▲ 수백년이 넘은 중세의 골목길과 농가주택이 잘 보존된 라인스바일러 마을 - ⓒ 정기석

포도 하나로 일군 농촌생활공동체, 라인스바일러(Leinsweiler)

지난해 5월, 조국의 농정과 농정책임자들에 대한 평소의 의심과 불신을 가득 품고 라인스바일러(Leinsweiler) 마을에 들어섰다. 독일 중서부 라인란트 팔츠(Rheinland Pfalz) 주를 대표하는 명품 수제 포도와인의 명산지다. 1935년에 개통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주가도(Weinstraße)'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수백년이 넘은 중세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풍광이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그 평화로운 농촌마을 어귀에 서서 나는 부러움과 안타까움, 희망과 절망, 그리고 한국 농정 책임자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교차하는 복잡미묘한 정신상태에 빠졌다.

와인으로 유명한 라인스바일러 마을은 전체 180가구 가운데 와인농가는 16가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와인농가가 소득을 독점하지 않는다. 와인농가끼리만 잘 먹고 잘 살지 앉는다. 와이너리를 소유하지 않은 나머지 가구도 와인시음장, 전통식당, 농가민박시설 등을 운영해 독일 평균농가 소득 이상의 농외 소득을 창출하고 있다. 포도 하나로 모두 함께 먹고 사는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중 30여 가구에서 운영하는 농가민박은 우리 농촌휴양체험마을의 그렇고 그런, 틀에 박힌 농박 수준을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개인적으로는 독일 도시에서 묵었던 그 어느 호텔들보다 더 쾌적하고 편안했다. 그곳에서 먹고 자는 동안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유년에 시골 외가에서 느꼈던 그런 만족감과 행복감까지 들 정도였다.

특히 내가 묵었던 퇴페라이(Toepferei) 농박은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도 굽는 예술가가 아틀리에를 겸한 곳이었다. 가족 단위의 장기 휴양객이 주 고객이라고 한다. 우리처럼 소주에 삽겹살이나 실컷 구워먹으려고 작정하고 오는 일회적 유흥 관광객은 없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이 휴양과 치유를 목적으로 농촌을 찾아오는 체류형 고객이 대부분이다.


축소
▲ 도자기 공예가가 운영하는 문화예술형 농박 퇴페라이(Toepferei) - ⓒ 정기석

라인스바일러 마을은 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포도로 농민들이 직접 만든 수제 포도주로 유명하다. 10ha가 넘는 포도밭을 경작하는 피터 스튜빙어(Peter Stu¨binger)씨 같이 '포도주 마이스터'들이 대를 이어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와이너리마다 독특한 풍미의 와인을 경쟁하듯 만들고 있다. 중세 이래로 농가마다 대대로 이어온 고유 제조법 대로 만들어 맛과 향이 다 다르다.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10여 농가의 와인은 서로 다른 상표로 출하된다. 하지만 품질은 다르지 않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조합에서 와인의 품질을 철저히 공동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품질과 상품성이 좋은 라인스바일러산 와인은 이제 독일 전역으로 판매되는 것은 물론 외국에 수출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만일 한국에서 사려면 몇 배는 더 지불해야할 것이라는 스튜빙어씨의 엄포에 연수단원들은 와인 몇 병씩을 다투듯 배낭에 챙겨넣기에 바빴다.

이처럼 와인테마 농촌관광으로 활성화된 라인스바일러 마을 안에는 관광청의 공무원이 아예 상주하고 있다. 포도주 가도(Weinstraße)를 따라 이어진 14곳의 포도주 마을연합체의 가운데 라인스바일러 마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공무원 다니엘라 되닉(Daniela Doenig)씨는 '상생'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설명한다.

"14개 마을의 농촌관광 농가들이 일정 금액을 내면 관광책자에도 실어주고 홍보를 관광청에서 대신 해줍니다. 해마다 연합체의 14개 마을이 돌아가면서 와인축제도 하고 있고요. 3년에 한 번 씩은 농가민박마다 평가를 해서 인증서도 부여하고요. 농가민박 대문마다 인증패가 붙어있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요즘 들어 포도주 농가 경영주들이 노령화되면서 농사는 못 짓고 민박만 하는 경우도 많아요."

마을 한복판 네거리, 마을의 가장 중요한 공공재 마을샘물에는 158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다. 1581년부터 샘물이 계속 솟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라인란트팔츠 지방에서 유일하게 중세 시대 건물과 거리가 남아있는 설촌 역사 800년의 마을답다. 이토록 오래된 마을의 농촌관광사업 주제는 자연스레 중세 독일의 전통과 문화를 살리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전통 와인과 전통 음식이 풍기는 중세와 현대의 역사적 조화를 체험하러 찾아오는 관광객은 연간 10만여 명에 달한다.


축소
▲ 라인스바일러 마을에 상주하는 관광청 홍보담당자 다이엘라 되뇍씨와 황석중박사 - ⓒ 정기석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농부의 나라'

"독일에 유기농(Bio)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죠.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유기농업이 더욱 빠르게 확산됐어요. 독일 국민들은 가격이 비싸지만 직접 농가를 찾아가 유기농산물을 구입해 먹었어요. 그러면서 자연과 환경을 생각했죠. 또 독일 등 유럽의 공무원들은 '농업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기본 이념이 투철해요.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농민들이 얼마나 잘 친환경적으로 생산해 내는지 늘 감시하는 역할도 맡고 있어요. 매년 5%씩 무작위로 토양검정을 실시해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 농민이 있다면 형사처벌을 하고 그동안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은 돈은 모두 환수할 정도로 엄격합니다."

농촌진흥청에서 초지사료과장을 지냈던 연수지도교수 황석중박사는 독일은 먹을거리로 장난을 칠 수 없는 사회라고 강조한다. 독일 농정의 성공이 생산자인 농민 뿐 아니라 소비자인 독일 국민의 의식과 실천에 크게 힘 입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인 도시민과 상생하는 협동과 연대의 전략이 없이는 농민 혼자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독일에는 라인스바일러 마을이 놓인 포도주가도처럼 80여 개가 넘는 관광가도가 있어요. 관광가도가 스치는 작은 농촌마을 안에도 수백 년이 넘은 중세의 건축물과 거리가 보존되어 있어요. 대부분의 농촌마을이 '동화 속 풍경 같다'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푸른 숲과 초지, 자연과 전통을 지키려는 생태적 마을가꾸기의 결과입니다. 심지어 지붕의 각도, 벽의 색깔 등 모든 것을 나라에서 법으로 정해 놨어요. 독일의 오랜 전통, 아름다운 문화경관을 볼 수 있도록 농가주택 외부는 마음대로 고칠 수도 없어요."

한 번 더 되풀이 한다. 아니 열 번, 백 번도 더 되뇌이고 싶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 굶고 깊게 문신처럼 새기려고 한다. 60년 전 독일이 정해놓고 변함없이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4가지 농업정책(그린플랜)을. 더도 덜도 말고 딱 이 만큼만,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농부의 나라' 독일이 하는 것 만큼만 우리도 하자.

하나, 농민도 일반국민과 동등한 삶의 질을 누리게 하자. 둘, 농민들은 농산물과 농식품을 적정한 값에 국민들에게 팔고, 국민들은 농민이 수고한 만큼 보상을 하고 구입해주자. 그렇게 농민들은 국민들의 생명을 위하고, 국민들은 농민들의 생활을 보살피자.

셋, 먹을거리를 무기로 다른 나라의 목을 조이지 말자. 아니면 다른 나라도 우리의 숨통을 조이려 들 것이다. 넷, 착한 농업, 정의로운 농업으로 조상에게 물려받고 후손에게 빌려쓰고 있는 우리 자연과 문화와 경관을 지켜내자, 더도 덜도 말고, ICT융복합농업이나 스마트농업을 하기 전에 우선 이 정도만이라도 먼저 하자, 제발.



축소
▲ 라인스바일러 마을 180농가, 400여 주민을 먹여살리는 포도밭 - ⓒ 정기석





2017/03/22

몸의 철학으로 도달한 미래의 시간 | arte365



몸의 철학으로 도달한 미래의 시간 | arte365



몸의 철학으로 도달한 미래의 시간
알바로 레스트레포, 마리 프랑스 들뢰방 / 콜롬비아 몸의학교 교장

우 연 _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극장장,
댓글_0 조회수 _ 717

콜롬비아에 ‘몸의학교(El Colegio del Cuerpo)’가 설립된 것은 1997년이다.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2008년 무렵으로 설립 후 10년이 지난 뒤였다. 당시 KBS 다큐멘터리, EBS 지식채널을 통해 몸의학교의 철학과 운영방식이 처음 소개되었고, 실제로 몸의학교 학생들의 공연도 서울과 안산,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그 후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El Sistema)의 사례와 함께 콜롬비아의 몸의학교는 소외계층을 위한 예술교육 사례로 전파되었고, 이 분야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다시 십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몸의학교는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어왔을까? 지구 저편에 50년 이상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고, 우리의 아이들이 키보드로 모니터 속 적군을 죽일 때, 거리에서 실제 총탄을 피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고, 세계에 대한 미천한 상상력을 확장시켜 준 이 학교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건재한 것일까? 콜롬비아의 대문호 마르케스가 이야기했던 ‘고독의 시간’을 여전히 겪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한 ‘미래의 시간’에 도달해 있을까? 평창 아트 드림캠프와 해외전문가 초청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콜롬비아 몸의학교 교장 알바로 레스트레포(Álvaro Restrepo)와 마리 프랑스 들뢰방(Marie-France Delieuvin)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마리 프랑스 들뢰방(왼), 알바로 레스트레포
알바로 선생님은 2008년 당시 몸의학교를 ‘콜롬비아 미래 세대를 위한 학교’라고 소개했다. 10년, 20년 전 몸의학교 학생들에게 2017년 지금은 바로, 그 당시 바라본 ‘미래의 시간’이다. 이제 성인이 되었을, 당시 몸의학교 학생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나?
알바로 레스트레포(이하 알바로) 지난 20년은 우리 모두에게 극적인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제 대부분 예술가가 되었다. 자기 삶을 극적으로 바꾸고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기적처럼 전환시킨 친구들도 많다. 설립 당시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콜롬비아라는 불행한 작은 세계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콜롬비아 밖의 세계를 통찰하는 세계시민이 되었다. 전 세계를 돌며 투어 공연도 하고 국제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몇몇은 이러한 인생의 반전에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10년 전 선생님께서는 ‘우리는 창조자들의 창조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제 당당한 예술가가 되었다면, ‘창조자를 창조하는’ 역할을 이미 완수하신 것이다. 더불어 이들이 미래의 몸의학교 운영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꿈도 이루신 것인가?
알바로 이번 워크숍에는 두 명의 무용수, 리카르도 부스타만테 마티네(Ricardo Bustamante Martinez), 요한 구티에레 파딜라(Johan Gutierrez Padilla)와 함께 왔다. 이들이 바로 이제 몸의학교 운영자가 된 과거의 내 학생들이다. 워크숍에서도 질의응답 시간에 요한이 잠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몸의학교에 다니며 내가 배운 것들을 직접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되어 실제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너무 큰 만족감과 성취감이 느껴진다고. 요한은 극한적인 콜롬비아의 현실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지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교육자로서의 만족감이 남다를 것이다. 몸의학교는 요한처럼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킨 리더, 정치 사회적인 혼돈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뒤바꿔 온 창조자를 위한 학교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20년 동안 콜롬비아 사회도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겪어왔다고 알고 있다. 처음 설립하실 때와 지금, 학교를 둘러싼 콜롬비아 사회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알바로 콜롬비아는 현재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고, 몸의학교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몸의학교는 결국 콜롬비아 사회의 축소판이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학교 설립 당시는 콜롬비아 내전이 극심한 상황이어서 폭력과 가난이라는 환경 자체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가 교육의 핵심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평화시대에 대비해 우리가 하는 작업이 사회에 어떻게 더욱 기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예를 들면 청소년을 키우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어떻게 가동할 수 있는지, 이러한 프로그램이 다른 지역의 많은 어린이들에게도 전파될 수 있도록 문화부나 교육부, 대통령실과 협력하는 방안을 계획 중이다.
평화시대에 대비한다고 하셨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얼마 전 50년간 내전으로 고통 받던 콜롬비아에서 대통령과 게릴라 대표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가 있었다. 평화를 고대하던 콜롬비아가 한 열흘 동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들었는데 막상 평화협정 국민투표의 결과는 부결이었다. 콜롬비아 사회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던 것일까? 맥락을 모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충격적인 결과다. 몸의학교 이야기로부터 너무 멀리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콜롬비아의 이 역사적인 상황과 몸의학교의 운영도 별개로 사고할 수 없으니 설명을 부탁한다.
마리 프랑스 들뢰방(이하 마리 프랑스) 정치적인 과정의 실수가 있었다. 정부와 게릴라 간에 4년간 평화협정을 위한 합의작업이 있었는데, 이 합의의 내용을 먼저 국민투표를 통해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마친 후에 국민들에게 물어보는, 순서가 뒤바뀐 정치적 실수가 있었다. 이 속에서 국민들의 무관심이 표출될 수밖에 없었으니 콜롬비아 전체가 충격을 받고 있다. 나 또한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현재 한국사회도 중요한 국면에 서 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국민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식과는 다른 이견(異見)과 갈등을 대면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분명 충격적이기도 하다.
알바로 콜롬비아의 경우, 충격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투표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65% 정도가 투표를 안 해서 부결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원한다고 한 사람들이 이긴 게 아니라 무관심한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아서 생긴 비극적인 드라마 같은 상황이다. 보고타 젊은이들이 평화의 시대가 온다며 축하하고 거리행진도 하고 그랬지만, 국민 대부분이 무관심한 상태로, ‘평화가 나한테 뭐가 중요해?’, ‘내전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 이러한 태도로 지난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콜롬비아다.





이렇게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몸의학교 학생들의 교육환경도 달라졌을 것이라 예상한다. 학생들이 처한 문제의 본질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알바로 평화협정이라든지 새로운 시대로 가자는 논의가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이나 조건이 바뀌었다고 볼 수 없고, 여전히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기대하고, 향후 평화정책이 잘 정비되길 바랄 뿐이다. 태평양 시대에 대비하게 되고, 그동안 내전에 쓰였던 국방비 등이 처음으로 교육부문에 투자되고 있는 중이고, 교육에 대해 국가의 관심이 커졌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고위층과 기득권층의 부패, 사회 불평등 문제 등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지 않는다면,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로서는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것이 아무리 평화시대라 명명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가?
알바로 몸의학교 학생들은 여전히 대부분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철학은 변화된 것이 없다. 만약 사회가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다면, 우리 사회가 가진 트라우마나 상처가 치유된다면, 그때부터는 치유보다는 예술 본연의 역할, 창조,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않을까 싶다. 즉 지금 콜롬비아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사회적 기능, 치료의 기능, 정치적 기능을 많이 요구받게 되는데,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 예술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게 되길 바란다.
마리 프랑스 알바로 씨의 이야기에 동의하고 꿈꾸고 소원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우리에게 주었던 상처가 도대체 몇 세대를 지나야 치유될 수 있을까? 지금 세대 역시 여전히 깊은 상처를 입고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 같아서, 시간이 지나더라도 몸의학교의 철학은 많이 변화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한 일들이 콜롬비아에도, 우리의 학생들에게도, 나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면 트럼프처럼.
화제를 바꿔, 한국의 학생들이 처한 몸의 양상은 콜롬비아와는 많이 다르다. 이에 대해 예술교육자로서의 조언을 듣고 싶다. 이를테면 ‘움직이지 마시오’와 같이 권력과 지시에 의해 통제받는 ‘수동적인 몸’, 히키코모리처럼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자폐적인 몸’, SNS나 인터넷과 같은 가상현실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 몸’, 대지진이나 세월호 참사와 같이 ‘재난에 처한 몸’ 등이다. 이것이 오늘날 현재 한국사회를 반영하는 몸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께서는 한국의 학생들이 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고, 이들을 가르치는 예술교육자들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마리 프랑스 사람의 몸은 어떤 상황에서도 외부적 힘이나 순종으로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컨트롤되어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몸의 본능조차 억압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어제 한국 예술교육자 대상으로 워크숍을 하면서 참가자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매우 놀랐다. 다수 참가자들이 어릴 때 겪었던, 지금도 겪고 있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트라우마를 교육현장에서 계속해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교육자 스스로가 여전히 어떤 트라우마를 겪고 있고, 극복하지 못한 상태로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 앞에 서려면 우선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어느 정도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린이들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한국 예술교육자들에게 영감을 주신다면? 예술교육자로서 가장 보람 있고 행복했었던 경험을 하나만 꼽는다면?
마리 프랑스 너무 많은데.(웃음) 콜롬비아에 처음 와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카르타헤나 지역 어린이들의 문제를 막 발견하던 때다. 당시 카르타헤나 지역 중 ‘만델라’라는 소외지역의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굉장한 폭력 속에서 자라나 언제나 경직되어 있던 한 아이를 만났다. 수업을 해도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아이에게 다가가 긴장을 풀어주려고 얼굴을 마사지하듯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런데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던 그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후두둑 흘렸다. 그때 참 안정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내가 그 아이에게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어떤 신뢰감을 줬던 것이다. ‘신뢰’라는 것이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알바로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면서) 많은 어린이들이 한 교실에 앉아있는 사진이다. 이 아이들은 정말 시끄럽게 떠들고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빈민 지역의 평범한 아이들이다. 그중 이 어린이는 평창 아트 드림캠프에도 같이 왔다. 한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어린이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며 그 침묵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나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이것이 정말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한 몸이다. 언젠가는 이런 몸이 될 수도 있겠지?


몸의학교 명상 장면
[사진제공]알바로 레스트레포
이번 한국 방문에서 느낀 인상이나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알바로 이번 한국 방문에 만족스럽고 다시 한 번 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5개 국가가 함께 작업했는데, 국가도, 인종도 다 다르지만, 우리가 똑같이 몸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든 몸은 다 우주적인 몸이고, 우리가 몸을 통해서 서로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감사하다.
마리 프랑스 워크숍을 하면서 참가자들이 정말 무언가에 허기져있고 무언가를 실제로 찾고 있다는, 열정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가오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걱정, 또한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새로운 생각을 대면하는 즐거움 등으로 가득 찬 참가자들을 보면서 매우 감명 깊었다. 이 예술교육자들은 무언가 낯선 것에 대해 호기심을 지닐 줄 알고, 찾아보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이라고 느꼈다.

알바로 레스트레포(Álvaro Restrepo)


몸의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콜롬비아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무용 외 철학, 문학, 음악, 연극 분야 ‘통합신체교육’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981년 콜롬비아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안무를 전공하고 귀국하여 1997년 몸의학교를 설립했다. 생각과 정신을 담고 있는 ‘몸’을 매개로 힘든 환경에 노출된 청소년들에게 춤추고 생각하는 방법을 통해 몸을 아끼고 타인을 존중하는 학습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마리 프랑스 들뢰방(Marie-France Delieuvin)


몸의학교 교장. 무용가이자 안무가, 교육자이다. 프랑스 리옹 국립 무용 컨서바토리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91년 프랑스 문화부 Superior Contemporary Dance School of Angers 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몸의학교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및 다수의 사회참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_ Studio E
우 연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및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기획실장(1998-2005), 서울예술단 기획PD(2006),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사업부장(2007-2012)을 역임하며 서울아트마켓(PAMS)및 국제교류 사업을 총괄했다. LIG문화재단 기획실장 (2013-2014)으로 LIG아트홀 강남·합정·부산 3개 제작 극장을 운영했고, 현재 창작연극 제작극장인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으로 일하고 있다.
yeoniris@gmail.com

2017/03/10

In Contemporary South Korea, Sins of Grandfathers Are Still Sins of Children | KOREA EXPOSÉ



In Contemporary South Korea, Sins of Grandfathers Are Still Sins of Children | KOREA EXPOSÉ



In Contemporary South Korea, Sins of Grandfathers Are Still Sins of Children
Published on March 7, 2017 by Se-Woong Koo


More than 70 years since Korea’s independence from Japan, having a traitor as one’s ancestor still brings great shame — if made public. Most South Koreans decline to mention such parts of their family history. A-list actor Kang Dong-won isn’t one of them, much to his own detriment.

Kang is at the center of a controversy that erupted on Mar. 1 — the day marking the 1919 uprising against Japanese occupation. Film news site Max Movie triggered the scandal by running a profile of actors and actresses whose forebears were pro-Japanese collaborators or independence fighters. Topping the list of collaborators’ descendants was Kang, whose maternal great-grandfather allegedly funded Japan’s war efforts and grew rich from mining rights granted by the colonial government.

The article has since been removed (but is still available on various blogs like this one). Max Movie claims that the posting, made by an individual user on its community page, had been unsolicited and contained some “information that deviates from the truth.” But the debate rages on. Under scrutiny is a comment Kang made in an interview a decade ago: “My maternal great-grandfather was [amazing]. His name was Lee Jong-man. He was chairman of Daedong Corporation. He ran gold mines.”

Worse than collaboration itself, according to many South Koreans, is refusing to acknowledge or being ignorant of colonial-era family sins. A “twisted” or “wrong” historical consciousness is a label frequently attached to views of the past that differ from or deny the ‘true’ history of the nation. Glorifying collaborator ancestors, unknowingly or not, falls squarely within this category. The only thing one can do to satiate an irate public is to confess the crime and silently disappear.

It’s a bizarre reality of South Korea: One’s career can be affected by ancestors’ deeds decades ago, for better or for worse. Another celebrity, Song Il-gook, known for starring in a popular child-rearing reality TV show Superman Returns, basks in the glory of having notable independence fighters as his maternal great-grandfather and grandfather. (He has also burnished his credentials as a patriot by naming his triplets Daehan, Minguk and Manse — the six characters that make up the expression “Long live the Republic of Korea.”)

Then there is actress Moon Geun-young, whose maternal grandfather spent more than three decades behind bars for pro-North Korean activities. For that, she has been trolled for years as a “commie.” When it was revealed in 2008 that she had been giving large sums to charities, right-wing pundit Ji Man-won accused her of trying to “elevate” her family’s leftist record with her good deeds and pretty face. In short, her actions couldn’t be accepted at face value because of who her grandfather was.

After the news broke, Kang Dong-won and his management agency, YG Entertainment, made a poor attempt at damage control by requesting that the claims against his great-grandfather, which they see as defamation, be removed from various sites and search portals. The move has only provoked angry reactions online; people now think Kang is trying to conceal the unsavory past. He is slated to star in an upcoming movie about the 1987 democratization movement, but this prospect is now in jeopardy. Since the scandal broke, Kang’s detractors have been claiming he is unfit to play the role of an iconic student activist as planned.



Follow

lvjfug pvos @lvuevu


이종만 논란' 강동원 차기작 '1987'..네티즌 "친일파 손자가 이한열 영화를.."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친일파 손자는 이한열 영화 하지 마라" "강동원은 과거 외조부를 존경한다고 칭송했다"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5:16 PM - 4 Mar 2017

Retweets
likes





“The grandson of a pro-Japanese collaborator shouldn’t play [student activist] Lee Han-yeol.”


1987 이한열 열사 배역 교체하는게 맞는거 같다. 강동원이 일찍 사과했어도 그가 맡을 역할은 아닌것 같다. 역사를 다룬 영화도 역사로 남으니까. 그대로 밀어부치면 난 물론 안 볼거고 위선 쩌는 한국 영화계에 저주를 퍼부을거고

— 크앙ㅋㅇ (@zzvlf27) March 5, 2017



“Even if he had apologized earlier, this doesn’t seem like a role he should play. Because a movie about history becomes history.”

Such sentiments are equally widespread in South Korean politics. There is plenty to criticize in the impeached president Park Geun-hye and the former Saenuri leader Kim Moo-sung without delving into their parentage. Yet the left’s favorite gossip, at least before the Choi Soon-sil scandal, was stories of what Park’s and Kim’s fathers got up to as collaborators before 1945. To me, how General Park Chung-hee — Park’s father — worked his way into Japan’s good graces is as irrelevant to assessing his daughter’s career as what her fans say: that president Park deserves support simply because her father was a great leader. Either way, the logic is the same. Love or hate her not for what she has done, but for who sired her.

The controversy surrounding Kang betrays two impulses in South Korean society. One is to use the past to judge children who weren’t responsible for that past. Holding figures accountable for the sins of their kin is a vestige of feudal politics. In Joseon, the Korean dynasty that endured until 1910, blood and marital relations of treasonous subjects could incur punishment even if they themselves were not disloyal to the throne. The system survives on a smaller scale in contemporary South Korea. Not only do descendants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and communist sympathizers suffer shaming; children of criminals, too, are often socially shunned as the product of “bad seed.”

Another impulse is to quickly condemn a past that may be too complex to be grasped through a few factoids, especially concerning the colonial era. Of all South Korean media outlets, it is surprisingly the liberal Hankyoreh that has leapt to Kang Dong-won’s defense by reprinting a column from last year: The article contends that while Lee Jong-man, Kang’s great-grandfather, did offer money to Japan, he also donated 800 times that amount (roughly 70 million dollars in today’s terms) for the education of Korean workers and farmers. This complicates the narrative surrounding the man. But it won’t be enough to turn the backlash against the actor.

My own lineage has made me wonder whether I ought to be ashamed of my family’s past. My father’s side of the family were once large landowners in South Jeolla Province. After 1945, my paternal grandfather headed the local chapter of the Anti-Communist Youth League. On my mother’s side, my great-grandfather was vice-principal of a venerable girls’ school in Seoul while the city was the colonial capital.

Such facts conform to typical profiles of collaborators. Under Japanese rule the percentage of land owned by Koreans decreased steeply; those who held on to sizeable tracts of land likely accommodated and even assisted the foreign rulers. The same landowners often became anti-Communist stalwarts after liberation, fearing land redistribution similar to that enacted in North Korea. Meanwhile, holding a position of authority in the colonial education system could easily attract a charge of betraying the nation.

But were they traitors? If so, how much did they benefit from collaboration? My maternal grandmother hastily married, in the twilight of colonial rule, a man she didn’t care for. She did it as the only way out of becoming one of the comfort women who were coerced into sexually servicing Japanese soldiers. Only after marrying was she safe from forcible recruitment, I am told. Being from a family of ‘collaborators’ did nothing to protect her.


We may never get the chance to learn the complete truth about Kang Dong-won’s great-grandfather, already branded a collaborator in the internet trial. Kang himself has apologized for “not correctly perceiving [my maternal great-grandfather’s] actions.” In that same apology, he also spoke about his maternal grandmother, an “independence fighter’s descendant,” clearly in an attempt to salvage his family’s and his own reputations. It’s perhaps the only thing he can do now. In history as defined by the majority of South Koreans, there is only right and wrong, white and black. And collaboration is the blackest sin of them all, pass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till the end of time.
ーーー
For more on the Kang Dong-won controversy, read “Pro-Japanese Roots Haunt South Korean Actor Kang Dong-won” in ké radar.

Cover Image: High-profile pro-Japanese collaborators stand next to the last emperors of Korea, Gojong and Sunjong,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1910 treaty that formalized Japan’s takeover of Korea. (Source: unknown)

TAGS: COLLABORATIONCOLLABORATORSCOLONIAL RULEHISTORYJAPANKANG DONG-WONMOON GEUN-YOUNGPARENTAGESONG IL-GOOKSOUTH KOREA


SE-WOONG KOO
LATEST POSTS


Se-Woong Koo earned his Ph.D. from Stanford University and taught Korean studies at Stanford, Yale, and Ewha Women's University. His writings have appeared in The New York Times, Foreign Policy, and Inside Higher Ed among other publications.

妄想 - 崔吉城との対話

妄想 - 崔吉城との対話



[彼をはじめ多くの日本人は当時の日本軍は「日本帝国」の品のあるジェントルな軍人だという妄想を持っていることである。なるほど戦争は平和のためであるから戦士は天使と思われがちである。戦争と軍人の実像を知らないのが一般的である。]

2017/03/09

Design for aquaponic

Design for aquaponic

Album - Google+



33 Photos - Sep 23, 2008
Photo: 水池池緣一定要水平尤其是水池4個角點. 利用立柱來調整池緣高度.然後鎖入橫板固定高度Photo: 利用方框結構來穩定座椅或池緣Photo: 花架可利用池緣與水壓來穩定 或可固定在屋頂女兒牆Photo: 利用池緣原木面板來抵抗水池的外推力 就可以免去向下釘到樓板固定的需求Photo: 預防轉角的變形力量-可利用角鐵固定加強Photo: 增加一側封板可增加美觀與座的舒服Photo: 細部結構Photo: 花架部份如果允許也可固定在水泥地上 如果在屋頂最好固定在女兒牆上Photo: 花架部份如果允許也可固定在水泥地上 如果在屋頂最好固定在女兒牆上Photo: 花架也可固定在池緣 但是池緣結構需如座椅才能防止水池外擴張力Photo: 花架高度不要太高以方便採收作業Photo: 池內封板可留間隙Photo: 如果因為水泥地不平可在下部增加修補Photo: 各面視角Photo: 各面視角Photo: 完成後地面需清掃乾淨-不容許有尖銳異物Photo: 防水布固定-建議採用HDPE塑膠布Photo: 防水布固定-建議採用HDPE塑膠布Photo: 水培器材鋪設考慮覆蓋率65%-75% 以及日後操作方便Photo: 人伸手操作長度不會長過80公分 因此福田板配置時一兩片並排即可-成為一列Photo: 花飛碟的形狀也一樣需要考慮操作方便 縱深最不要超過120公分--以免拿不到Photo: 抽掉水池水Photo: 馬達已抽不了Photo: 大樹要通力合作搬出Photo: 抓魚移動到暫存池Photo: 給一些無法移動的一個小水盆Photo: 瓜類最好移出Photo: 清洗池底地板 移掉舊帆布Photo: 關掉電源 整理管線Photo: 由邊角開始對準Photo: 鋪設防水布Photo: 自走機具融合2MM HDPE塑膠布 可使用30年 
我不知是否有活那嚜久Photo: 固定池案

유기농보다 앞선 농사기술 아쿠아포닉스 : 네이버 블로그

유기농보다 앞선 농사기술 아쿠아포닉스 : 네이버 블로그

신농법 아쿠아포닉스 물고기 수경재배 : 네이버 블로그

신농법 아쿠아포닉스 물고기 수경재배 : 네이버 블로그

신농법 아쿠아포닉스 물고기 수경재배 : 네이버 블로그

신농법 아쿠아포닉스 물고기 수경재배 : 네이버 블로그

자연을 모방한 미래 ICT 농장 팜잇 | 크라우드펀딩 와디즈

자연을 모방한 미래 ICT 농장 팜잇 | 크라우드펀딩 와디즈



자연을 모방한 미래 ICT 농장 팜잇

국내 최대 ICT 농업벤처 만나씨이에이의 첫번째 공유 농장 

농업회사법인 팜잇 주식회사

흙도 없이···물고기가 키우는 채소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흙도 없이···물고기가 키우는 채소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흙도 없이···물고기가 키우는 채소

등록 :2017-01-02
[새해 기획] 음식과 IT기술의 만남
밭에서 장바구니까지 ‘푸드테크
만나씨이에에의 농장 풍경.
만나씨이에에의 농장 풍경.
농산물을 포함한 식품과 정보통신기술이 결합한 ‘푸드테크’(FoodTech. Food와 Technology) 산업은 농업에도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충북 진천 이월면에 위치한 스마트팜 스타트업 ‘만나 씨이에이’(MANNA CEA)의 농장(사진)에는 흙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싱그럽게 꽃처럼 피어나는 채소들은 물속에 뿌리를 박고 자란다. ‘수경재배 제어시스템’이다. 박아론(31)·전태병(28) 공동대표가 자체 기술로 개발한 방식이다.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아쿠아포닉스’(Aquaponics. 물고기 양식과 수경재배를 결합한 농법)와 빛, 습도, 사료 공급 등을 자동 조절하는 소프트웨어 등이 결합된 시스템이다.
스마트 농장인 ’만나 씨이에이’
’바이오 필터’ 특허기술 개발해
물고기 양식한 물로 수경재배
엽채류 생산량 일반농가 30배
박 대표는 “양식한 물고기의 배설물을 질산염으로 처리해 액상배료를 만들어 식물을 키운다. 물고기를 양식한 물이 바이오필터를 거쳐 식물의 뿌리로 전달되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 물은 다시 물고기 양식장으로 간다. 바이오필터는 만나씨이에이의 대표적인 특허기술이다.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박씨와 기계공학이 전공인 전씨는 대학에서 룸메이트였다. 농업이야말로 미래산업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본 이들은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2013년 법인을 설립한 이들은, 전공을 살려 첨단정보기술을 농업에 적용했다. 2014년 1만9800㎡(약 6000평) 규모로 세운 만나씨이에이 농장이 그 결과물이다. 현재 엽채류 50가지, 뿌리채소 7가지, 허브 20가지 등을 재배하고 있다. 엽채류는 일반 농가보다 생산량이 30배 많다. 이들 채소는 지난해 1월 선보인 유통 서비스 ‘만나박스’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박 대표는 “매월 30~40% 정도 성장해 누적 회원수가 대략 1만2000명”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공유농장 프로젝트인 ‘팜잇’을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 선보였다. 하루 만에 386명의 투자자가 몰리면서 목표했던 투자금 7억원 유치에 성공했다. 박 대표는 “팜잇은 지분을 나눠 가지면서, 오너십과 수익을 배분하는 공유농장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아쿠아포닉스 시설과 수경재배 제어시스템 등도 판매 상품으로 내세운다. 2015년에는 카카오의 자회사인 케이벤처그룹으로부터 투자도 받았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만나씨이에이 제공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76986.html#csidxc4fb099e48c5b819ed84f24509fa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