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 군국주의 그리고 선(禪) / 이찬수
기자명 이찬수
입력 2021.06.27
-스즈키 다이세츠로 선을 되묻기
1. ‘천황교’의 탄생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봉건적 지방 분권 체제인 막부 체제였다. 그러다가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규슈(九州) 지방의 무사들이 메이지 천황을 앞세우며 메이지 정부(1868~1912)를 탄생시켰다. 이 정부에서는 천황을 권력의 정점으로 삼으면서 서양식 정교분리형 근대국가를 이루고자 했다. 국가의 이념적 통일을 위해 ‘일본적인 것’으로 신도(神道)를 내세우며, 일본인이라면 일본의 기원이 되는 신과 그 후손인 천황을 숭배해야 한다는 강력한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제사를 강조했고, 그 ‘제사의 정치학’의 정점에는 천황이 있었다. 천황 중심의 국가는 그 자체로 모든 정책의 목적이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황은 헌법상 모든 권리를 다 가졌지만 책임은 면제되는 기이한 존재였다. 가령 1889년에 공포한 ‘대일본제국헌법’에서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면서도 “천황은 신성하게 보호된다”(제3조)는 규정도 함께 두었다. 헌법 제정에 관여했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아마테라스의 자손인 천황을 최상위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일본 입국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듯이, 천황은 국민적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의식까지 주재하는, 사실상 신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구노 오사무(久野收)는 “일본 천황이 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의 두 자격을 한 몸에 갖추었고, 국민은 정치적으로 천황의 신민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천황 신자(信者)가 되었다”고 말했다. 불교철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1945년(패전)까지는 천황 숭배가 일본에서 가장 심했던 신앙 형식이었다. ……유신 이후에는 천황 숭배가 강권으로 집행되고 최근에는 그것이 절대 종교 형태로 되었으며 다시 국민 전체에게 강제 형식을 가진 신흥종교로 군림하였다”고 정리한 바 있다. 종교학자 무라카미 시게요시(村上重良)는 “메이지 정부가 이세신궁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를 조직화한 국가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초종교적 지위에 두고 그 체제의 틀 안에서 여러 종교의 활동을 용인했다”고도 말했다. 이런 배경에서 아마 도시마로(阿滿利麿)는 “국가신도는 천황을 교조로 하고 ‘교육칙어’나 ‘군인칙유(軍人勅諭)’를 경전으로 하여 전국의 신사를 교회로 삼은 국가 종교 조직이었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일종의 ‘천황교’가 탄생한 셈이다.
2. 화혼양재와 병리적 천황제
천황제의 정책에 대한 순응과 수용은 국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다.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인의 정신적 균형은 개인의 안과 밖의 조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밖의 일방적 수용을 통해서 유지되었다”(〈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1946)라거나, “천황제 체제에서는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순차적으로, 권위를 방패 삼아 자의적인 폭력을 행사해야 ‘정신적 균형’이 유지되는 일본 집단의 병리가 드러난다”고 비판적 분석을 한 바 있다. 메이지 정부가 신도 중심의 ‘일본적 정신’을 강조했지만,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화된 ‘일본적 정신’이 실제로 적용되는 과정은 어느 정도 병리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가 일본인들이 저마다 인격적 판단을 한다지만 그 ‘인격적’ 판단이라는 것이 실상은 작은 인격들에 대한 ‘비인격적 지배’ 메커니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강상중이 말하듯이, 일본이라는 ‘국가’는 강력했지만, ‘국민’은 ‘국가’ 안에 함몰된 셈이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에 이른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치로 내걸었을 때 이미 시작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혼양재’는 일본적 정신을 지키며 서양적 기술을 수용하자는 소박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프로젝트”였다. 강상중은 이렇게 정리한다. “메이지 국가 이래 일본은 지식과 기술을 탈착 가능한 장치로 간주하고, 그것에 목적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화혼, 즉 국체라 인식했다.”
‘화혼’은 철학적 차원의 ‘일본 정신’이라기보다는 국민으로 하여금 정부 정책에 동의하게 만드는 상위 권력이었다. 서양적 지식과 기술[洋才]은 화혼 속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화혼을 보좌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화혼은 천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국체와 같은 말이 되었고, 이러한 국체를 넘어서는 상위의 새로운 가치가 자리 잡기 힘든 구조가 되었다.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정리한 대로, “일본의 공(公) · 사(私)는 천황을 정점으로 그때그때의 상위자나 상위의 영역이 하위자나 하위 영역을 포섭하는 구조를 띠고 있어, 천황과 일본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이를 상대화할 수 있는 존재나 원리는 없다”는 말도 이것을 잘 보여준다. 사(私)가 천황과 국가라는 공(公)의 하위 범주이다 보니, 전란기에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버리고[滅私] 전쟁에 참여하는 행위가 공적 행위로 받들어지게 된 것이다[奉公].
이와 관련해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윤리학자 와쓰지 데쓰로우(和辻哲郞)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으로서의 인격은 일체의 사(私)를 버림으로써 성스러운 것으로서의 민족의 전체성에 귀일한다. ‘사’를 버리는 것[去]은 개성을 무시하는 것[沒]이 아니다. 정신공동체의 일원인 이상 인격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이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인 것이 전일(全一)이 되는 것은 바로 ‘사’를 버리기 때문이다.” 종교가 아무리 보편적 메시지를 갖고 있어도, 일본이라는 국가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원리로까지 이어질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3. 공(公)에 포섭된 공(空): 니시다 기타로의 경우
이런 태도는 당대의 수준급 사상가들에게서도 잘 볼 수 있다. 근대적인 의미의 일본 최초의 철학자라 할 만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도 참혹한 침략 전쟁으로 이어갔던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은 물론 그 정점에 있는 천황가를 긍정하거나 존중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니시다는 대승불교, 특히 선(禪)의 철학을 서양의 언어로 재해석, 재구성하면서 동서양을 통합시킨 새로운 철학의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그도 천황제하에서 현실과 타협적인 발언들을 많이 했다.
"황실은 과거 · 미래를 포함하는 절대현재로서,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활동하며 여기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거기에 아국체는 참으로 주체즉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세계 창조란 것이 아국체의 본의(本意)이리라. 이 때문에 내부에 만민보익(萬民補益)이고 외부로 팔굉일우(八紘一宇)다. 이런 국체를 기초로 하여 세계 형성에 나서는 것이 아국민의 사명이어야만 한다.
아국(我国)의 국체에서는 황실이 세계의 시작이고 끝이다. 황실이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고 절대현재의 자기한정으로서 모든 것이 황실을 중심으로서 생성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 국체의 정화(精華)인 것이다."
니시다 철학의 골자는 ‘절대무(絶對無)의 자기한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절대무의 자기한정’은 사실상 ‘공즉시색(空卽是色)’의 현대철학적 변용이다. 색과 공이 동일성의 관계에 있듯이, 절대무는 절대유(絶對有)의 상대적 언어가 아니다. ‘절대’라는 말을 쓰는 순간 그것은 절대유와 사실상 동의어이다. 이 ‘절대’는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적 연장을 넘어선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분절은 없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듯이, 모든 것은 불성의 구현[性起]이듯이 시간은 오로지 영원한 현재이다. 위 인용문들에서 황실을 절대현재, 혹은 ‘절대현재의 자기한정’으로 표현한 것은, ‘화혼’이 천황을 그 자체로 완벽한 현실로 규정하는 국체의 다른 표현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니시다가 파괴적 전쟁 자체를 찬양했던 것은 아니라 해도, 그의 세계 설명 이론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역사만을 긍정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절대무의 자기한정’은 오로지 일본에만, 그리고 일본의 천황가에만 적용된다는 듯한 발언으로 일본이 벌인 전쟁과 그 정점에 있는 천황가를 칭송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4. 논리에만 충실한 스즈키 다이세츠
선(禪, Zen)이라는 말을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는 어떤가. 그도 천황제하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할 만한 교묘한 발언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선과 군국주의를 단순 동일시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대중적 담론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변용될 가능성을 충분히 지닌 것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禪)에는 일련의 개념이나 지적 공식을 가진 어떤 특별한 이론이나 철학이 있지 않다. 단지 사람을 생사의 굴레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그만의 특유한 어떤 직각적(直覺的) 이해방법에 따른다. 그 직각적 가르침에 방해되지 않는 한, 거의 모든 철학이나 도덕론에 응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지고 있고, 그 억양(抑揚)도 지극히 풍부하다. 선은 무정부주의나 파시즘에도, 공산주의나 민주주의에도, 무신론이나 유심론에도, 또한 어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교설에도 결부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선은 언제라도 혁명적 정신의 고취자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과격한 반역자에게도 해당한다면, 완고한 수구파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선이 무정부주의나 파시즘은 물론 공산주의와도 연결된다거나, 거의 모든 철학과 도덕론에도 응용할 수 있다거나, 어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교설에도 결부되어 있다는 말은 일체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 현실을 탈색하고 선의 논리 자체만을 볼 때 가능한 말이다. 순수한 논리 그 자체에만 집중하면, 선을 전쟁과 연결시키는 것조차도 가능하다.
선 수업은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자기 믿음(自恃)적이고 극기적이다. 이 계율적인 경향은 전투 정신과 잘 일치한다. 전투하는 이는 언제든 눈앞에 있는 싸움의 대상에 마음을 오롯이 하면서 뒤돌아보아서도 곁눈질해서도 안 된다. 적을 부수기 위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다."
선은 단순하고 직접적이다. 선에는 곁눈질이 없다. 보이는 그대로만 볼 뿐이다. 그러나 그 직접성이 가령 누군가를 죽이는 결과로 나타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선을 곁눈질해서는 안 될 전투에 비교하는 것은 비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전투는 순수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 폭력과 살상의 현장이다.
게다가 스즈키가 위와 같은 글을 쓸 때가 1938년이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을 벌였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갔으니, 1938년은 일본의 대륙 침략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런 전쟁기에 선의 직접성이 전투 정신과 통한다는 식의 말은 그저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논리 자체에는 육체가 없고 기쁨도 슬픔도 없지만, 그 논리가 사회 속에서 힘을 얻으면 거기서 기쁨도 슬픔도 나온다. 게다가 전쟁기라면 선도 전쟁에 참여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5. 군국주의에 공헌한 불교계
실제로 일본 불교계는 불교의 메시지를 오로지 일본사회와 국가에 적용했다. 불자로서보다는 천황제, 군국주의하의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이 더 강했다. 당시 일본 불교계 전반은 일본이 벌인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선종이었던 조동종(曹洞宗)이 대표적이었다. 현 조동종 승려인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는 당시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며 이렇게 증언한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조동종은 대동아문화공작연구소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대동아 건설에 협력하고 흥성호국(興聖護國)의 종의를 기조로 하는 대륙 및 남방 제국 문화 공작에 관한 제반 조사 및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종교 국책 수립에 관한 건, 대동아의 종교 사정에 관한 건, 개교 및 교육에 관한 건을 다루었다. 전시색이 한층 짙어지던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전개하고 있던 조동종 사원이나 포교소도 전시하에 더욱더 긴장도가 높아졌다. 대화정의 양대 본산 별원 조계사는 대범종을 군에 헌납하여 모범을 보였다."
1941년에는 모금 활동을 벌여 제국 해군에 전투기 두 대를 기증했다. 전투기 이름도 ‘조동1호(曹洞1号)’ ‘조동3호(曹洞3号)’였다. 당시 《조동주보(曹洞週報)》(第55号, 1941.9.1)에는 다음과 같은 논평이 실렸다.
"완전무장 국가 건설이라는 국가 정책에 발맞추어 우리 종단은 하나로 단결하여 [비행기명] ‘조동(曹洞)’을 이러한 행동의 신실성이 이 비행기들이 대동아 공영권의 하늘에서 높이 나는 장엄한 모습에서 증명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증했다. …… 이러한 행동은 국민정신의 고무와 성숙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일련종(日蓮宗)에서는 1938년 4월 《호국불교》를 창간했고, 종단 지도자들은 ‘황국의 길 불교 실천연합’을 결성했다. 이 단체의 회칙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황국의 길 불교는 국가 정책의 장엄한 정수를 드러내는 《연화경》의 오묘한 진리를 이용한다. 대승불교의 참 정신을 드높이는 것은 경건하게 천황의 직무를 지지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 황국의 길 불교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숭배해야 할 형상은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그 계보를 일본 세대에 걸쳐 이어온 천황 폐하이다.”
그뿐 아니다. 메이지 천황이 반정부 세력을 제압하고 새 정부를 옹위하도록 하고자 〈군인칙유(軍人勅諭)〉(1882)라는 군인 지침서를 제정했었는데, ‘일련종’에서는 그 지침서의 취지와 내용을 적극 수용했다. 〈군인칙유〉의 핵심은 ‘군대는 천황이 통솔해 온 오랜 전통을 복원하니 모든 군인은 천황에 복종하면서 ① 충절을 다하고 ② 예의를 갖추고 ③ 무용(武勇)을 중시하고 ④ 신의를 존중하고 ⑤ 검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도시마로가 〈군인칙유〉 및 〈교육칙어〉가 일종의 ‘천황교의 경전’처럼 활용되었다고 말한 바 있듯이, 전쟁에서 〈군인칙유〉는 군인들이 전쟁에서 자기 검열을 하는 데 적절히 활용되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이러한 내용을 전쟁에 적용하기 위해 〈전진훈(戰陣訓)〉(1941년)이라는 이름의 군인 규정으로 변용해 공포한 바 있다. 그 핵심은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2장 8절)는 데 있었다.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 최고의 영예라는 것이다.
문제는 불교계 상당수가 이러한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찰 안에 묘지를 두고 있고 일종의 ‘죽음의 관리자’ 역할을 하던 일본불교와 승려의 입장에서는 전쟁과 죽음과 종교가 별개일 수 없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 당시 승려들이 사찰에서 전사자 수십만 명의 장례식을 거행하면서 〈전진훈〉을 일종의 불교 전도서 내지 교재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조동주보(曹洞週報)〉(1941.2.1)에서는 〈전진훈〉의 전문을 게재하면서 전진훈의 내용은 군인만이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동종 종무청은 〈전진훈〉을 수천 권이나 발행해 판매하기도 했다. 사찰과 거기에 속한 묘원이 망자에 대한 ‘추도’시설이라기보다는 국가주의에 대한 ‘현창’시설로 작동한 것이다. 사찰이 ‘야스쿠니신사’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한 셈이다.
6. 차가운 국가주의, 이념적 감정
불교의 이름으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아주 기초적인 관점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스러운 죽임에 대한 연민, 공감의 차원이다. 선 사상이 군국주의에 기여하고, 불교가 협의의 현창 시설로 작용한 데에는 상처와 죽음, 살상과 죽임 자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결여가 있었다. 국가에 의해 ‘적’으로 규정된 이의 죽음에 대한 공감은 물론 자국민의 죽음에 대한 연민조차 이념에 휩싸인 공적(公的)인 의무로 전환해버린 것이다.
가령 야스쿠니신사의 이념은 기본적으로 호국영령에 대한 ‘현창’이다. 그러나 호국영령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도 원치 않는 ‘개죽음’을 당한 경우가 태반이다. 죽고 싶지 않았는데 상처 입고 죽임당한 경우가 허다하다. 서구식 ‘희생의 논리’에 함축되어 있듯이, 이러한 희생자를 영령으로 받들고 현창하는 일은 희생당한 이들보다는 희생시킨 이들의 정당화에 기여한다. ‘희생당한’ 이들의 슬픔을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기쁨으로 전환시켜버린다. 이것이 현창 시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는 추도 시설로서보다는 현창 시설의 역할이 크다. 추도 혹은 추모에는 슬픔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전제되어 있지만, 국가주의적 시설에는 추모보다는 현창이 전면에 등장한다. 특히 국가에 의해 ‘적’으로 규정된 이들에 대한 슬픔은 들어 있지 않다. 그나마 무명의 전사자들은 기억조차 되지 못했다. 일본의 불교가 군국주의에 기여한 것은 이러한 따뜻한 공감이나 연민 같은 인간적 감성의 언어가 없이 형식논리를 국익 중심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설령 감성의 언어가 있었다 해도, 거대한 국가주의와 차가운 논리 안에 흡수된 감성이었다. 불교의 가르침도 개인의 내면 안으로만 몰아넣었다. 여기에다 유력한 불교 사상가들은 이것을 정교한 듯 냉정한 논리로 뒷받침하고, 모든 것을 죽은 이의 ‘명예’로 회수해버렸다. 여기에 이념을 개입시키면서 감성에도 차별을 두었다. 이념적 감성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분리하고, 국가가 적으로 규정한 이에 대한 죽임과 죽음을 당연시했다. 스즈키가 위에서 표현했던 ‘단순’ ‘직접’ ‘극기’ ‘마음 오롯이 먹기’ ‘똑바로 나아가기’ 등을 개인의 내적 태도에만 한정하면, 현실에서의 죽음과 죽임도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문제투성이 사회와 국가도 전혀 문제가 아니게 된다. 설령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 책임을 물을 권력 너머 상위의 보편적 기준이 없다 보니, 현실은 비슷하게 지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살상의 현장과 일체의 결과를 개인의 내적 순수함으로 환원시키는 태도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자기 초탈’도 순수하게 개인의 체험으로만 보면, 타자의 죽음과 죽임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다. 스즈키가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무사도를 선과 연결지으며 그와 통하는 듯한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무사도의 인생관은 선의 인생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죽는 순간 마음의 고요함이나 심지어 기쁨까지 느끼는 일본인들의 뚜렷한 특징, 일본 군인들이 압도적인 적군 앞에서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대담함…… 이 모든 것은 바로 선 수행의 정신에서 비롯한다.
무사 정신은 당연히 일본 국민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무사 정신을 순수한 상태 그대로 일본의 모든 계급이, 정부의 관리든 군인이든, 기업가든 지식인이든 전원이 흡수한다면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 대부분이 단칼에 제거될 것이라고 믿는다."
무사도에 입각한 자기 초탈적 죽음이나 자살은 가능할 것이다. 자기 개인의 죽음을 무집착적으로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수천, 수억 전 국민이 이런 정신을 가지면 스즈키의 말대로 풀지 못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기 초탈을 경험하는 이는 소수이고, 나로 인해 누군가가 죽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도 없이 순수하게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성을 도외시하고 사회적 윤리와는 무관한 개인만의 태도, 그것도 내면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관은 인류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당연히 순수한 인식과 전적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깨닫지 못한 중생과의 사회적 관계성이 있다.
7. 선과 의지: ‘하고자 함’과 ‘함’의 간격
선은 무아론을 기반으로 불성론과 성기론을 거쳐 도달한, 온 생명의 소중함을 구현하려는 삶의 근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화중생(下化衆生)’도 그렇고, ‘입전수수(入廛垂手)’도 생명, 특히 타자의 생명 본연의 모습을 살리려는 선적 실천이다. 선은 개인의 자기 극기적 행위만이 아니라, 중생과의 근원적 연결성과 평등성을 전제로 한다. “중생이 병들어서 나도 병들었다”는 유마 거사의 일성처럼, 어딘가에 아픔과 죽임이 있으면 그 아픔과 함께해야 하고, 나아가 그런 아픔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무집착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런데 스즈키는 일종의 개인의 ‘별업(別業)’에만 매몰된 채 사회적 ‘공업(共業)’은 도외시한 것으로 보인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선적 논리의 힘 자체에 충실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논리가 개인 안에만 매몰되고 생명의 평등성에 입각한 사회적 관계를 간과하면 깨달음의 이름으로 충돌과 살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한국의 종교인과 일본의 종교인 간 전쟁은 임진왜란 때는 물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중에도 경험한 일이다. 이른바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의 종교전쟁이나 평화라는 이름의 폭력이 벌어지는 것도 비슷한 구조를 한다. ‘자기중심적 평화들(ego-centric peaces)’ 간 충돌의 사례가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나의 무집착적 실천이라는 것도 사회적 관계성을 무시하면 타자의 무집착적 실천과 충돌할 수 있다. 그 실천들이 저마다 개인적 자기 정당화로 인해 전쟁으로도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런 과정에 죽는 이 자신이 죽음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다면 그것도 좁은 의미에서는 선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중생마저 죽이는 형태로 나타나면 그것은 선이 아니다.
그런데 왜 스즈키와 같은 근대 일본의 주요 선 사상가에게 이런 문제의식이 잘 안 보이는 것일까. 왜 일본에 점령당한 한국과 여러 나라, 일본 군인에 의해 희생당한 조선 민중의 현실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을까. 왜 사회적 구체성을 개인적 깨달음의 논리 안으로 환원시키고 만 것일까. 그 근본적 이유 중의 하나는 의지와 윤리의 문제를 간과한 데서 온다.
스즈키는 선을 ‘의지의 종교’라고 말한다. 의지는 어떤 개인이 무엇을 ‘하고자 함’이다. 선의 논리대로라면, 무언가를 ‘하고자 함’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개인의 순수한 주체성 및 타자의 주체성과 완전히 일체가 되면 하고자 한 대로 하게 된다.
그러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한계를 지닌 현실에서 ‘하고자 함’과 실제로 ‘함’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은 하고자 함의 대상 혹은 하려고 하는 내용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주체 및 그 의도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데서 생긴다. ‘하고자 함’은 순수하게 개인적일 수 있지만-물론 근본적으로는 ‘하고자 함’ 자체도 그 무엇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벌어지지만-, 실제로 ‘함’은 제한된 물리적 환경 속에서,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태가 뜻하지 않은 곳으로 여러 갈래를 만들며 흘러갈 수도 있다. 한마디로 내 일도 내 맘대로 다 할 수 없고, 너는 나와 같지 않다. 내가 너에게 하고자 함이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하고자 함’, 즉 ‘의지’는 너를 살리려는 ‘하고자 함’이어야 한다. 나의 순수한 주체성이 타자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윤리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하고자 함’이 실제로 ‘함’으로 하나가 되어 이어질 때, 그 ‘함’이 타자의 생명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결국 타자를 존중하고 그 생명을 살리는 행위와 동의어이다. 그러한 생명 중심의 실천에서만 선이 ‘의지의 종교’라는 스즈키의 말이 일정 부분 설득력을 얻는다. 선의 논리에 따르면, 너를 살리려는 의지조차 무집착적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스즈키는 이러한 문제까지는 보지 못했다. 무집착적, 자기 초탈적 직접성에는 집중했지만, ‘의지’를 ‘실천’과 단순 동일시하고, 순수한 ‘실천 자체’와 구체적 ‘실천의 결과’를 구분하지 못했다. 적어도 군국주의 시대를 살던 스즈키는 그랬다. 그가 “의지의 종교”로서의 선은 “철학적으로보다는 도덕적으로 무사 정신에 호소한다”고 했을 때도, 말의 겉뜻과는 달리 무사 정신이라는 개인의 철학적 논리가 관계적 차원의 이타적 도덕을 앞섰다. 이것은 그보다 앞선 인물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가 무사도(武士道)를 이상화된 일본 정신으로 체계화시켰던 자세에서도 보인다.
8. 니토베 이나조의 경우
니토베는 18세기 말에 무사도를 일본적 정신의 근간으로 전 세계에 소개했다. 그에 의하면 무사도의 정신은 정의, 용기, 인애, 예의, 성실, 명예, 충실, 극기 등으로 요약된다. 메이지 정부 들어 봉건제가 타파되고 무사 자체는 사라졌어도, 무사의 정신은 그때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일본을 견인할 것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니토베 역시 무사도 자체에 취해 무사도를 기반으로 일본이 행한 사례 전반에 대해 자긍심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근년의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무라타 총과 크루프 총 덕택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 승리는 근대적인 학교제도의 덕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새삼 말할 것도 없이 활력을 가져오는 것은 정신이고 정신이 없으면 최선의 장비도 전혀 쓸모없게 된다. 최신식 총포도 스스로 불을 뿜는 것은 아니다. 가장 진보된 근대적 교육제도일지라도 겁이 많은 자를 영웅으로 키울 수는 없다. 압록강이나 조선 및 만주 등에서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우리를 계속 격려하고 있는 조상들의 영혼이다. 무용이 풍부한 선조의 영혼과 정신은 아직 죽지 않고 있다. 보는 눈이 있는 자에게는 명확하게 보인다. 가장 진보된 사상을 지닌 일본인일지라도 그 표피를 한 꺼풀 벗겨보면 그 피부밑에서 한 사람의 무사가 나타날 것이다."
무사의 정신을 일본적 도로 규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청일전쟁에서의 승리, 조선과 만주 전쟁에서의 승리를 ‘무사도를 이어온 조상의 영혼이 격려해왔다’라는 식의 표현에 있다. 이 말 자체가 무사도 전반의 핵심은 아니지만, 이러한 해설을 서슴없이 붙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사도 자체와 무사도의 온갖 결과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무사도의 충정의 논리에 치중한 나머지 그 충정의 결과로 나타난 살상은 안중에 두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칼 슈미트(Carl Schmitt)가 ‘정치적인 것’의 근본 범주를 ‘동지’와 ‘적’의 구분에서 찾은 바 있는데, 국가가 적으로 규정한 이와의 전쟁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적’은 죽여도 죽인 자가 죄인으로 문초당하지 않는 마치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처럼 작용한다. 불교가 이념적으로는 물론 물리적으로까지 군국주의와 밀착되었었다고 해서, 그것이 딱히 일본만의 현상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다시 스즈키로 돌아가 보자.
9. 선(禪)과 현실, 다시 스즈키 비판
전술했듯이 선을 무사의 정신과 일치시키면서 ‘적을 부순다’든지, 선을 ‘파시즘에도 연결시킨다’든지 하는 스즈키의 발언들은 선의 개인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의 영역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다. 선을 개인적 행위의 순수성에만 두고, 연기 사상에 담긴 타자와의 실질적 관계성을 도외시하면 일종의 무사에 의한 처참한 살상도 그저 무사의 순수한 행동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예리한 살상용 칼이 추상적 논리 안에 함몰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스즈키가 ‘무사가 자기중심적 의지와 충동을 억제해 평화, 정의, 진보, 인도(人道) 등과 연결시키고, 그로 인해 평화, 정의, 진보, 인도에 방해되는 사태를 없앨 수 있다면 그 전쟁은 선불교적으로도 정당한 셈이 된다’고 말했던 것은 자칫하면 살생과 상생은 무사가 얼마나 칼과 하나 되어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만 작용할 뿐, 유혈이 낭자하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칼의 현실은 간과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선과 검도의 관계를 다루는 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칼은 무사의 혼이다.” “선에는 활인검과 살인검이라는 말이 있다.” ‘단순한 기술자의 칼은 사람을 죽이지만, 칼과 일체가 된 선적 무사의 칼은 적을 죽이려 하지 않아도 적이 나타나 그 자신을 죽게 만든다. 그때의 살생은 그 무사가 행한 것이 아니라 칼 자체가 행한 것이다.’
전쟁에서의 죽임과 죽음을 모두 개인화시키면, 내가 남의 칼에 의해 죽는 순간에도 초연해질 수 있고, 내 칼에 의해 누군가가 죽는 순간조차 그저 가상세계의 하나처럼 보일 수도 있다. 누군가 무사에 의해 죽임을 당해도, 그 누군가가 무사의 칼로 스스로 다가선 것일 뿐이어서, 무사의 윤리적 책임이 아니게 되는 형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스즈키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는 일본이 사태를 잘못 파악해 큰 혼란으로 들어갔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기는 했다. 각종 전란에 휘둘리게 된 불행의 근본 원인은 불교 사상의 두 축인 지혜[大智]와 자비[大悲]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가령 그는 패전 이후 쇼와(昭和) 천황과 황후를 위해 불교 사상의 기초를 강연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화엄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은 다름 아닌 대비심(大悲心)입니다. 이 대비심 때문에 인간의 개아(個我)는 그 한계를 타파하여 다른 많은 개아와 편용섭입(徧容攝入)할 수 있습니다. 비심(悲心)은 빛으로 빛나는 천체와 같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광명은 모든 다른 형체를 비추고 그것을 감쌉니다. 그래서 그것과 일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물들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도 또한 상처를 입는 것 같이 됩니다."
다른 사물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는 발언은 지극히 대승적이다. 그런데 ‘다른 사물의 상처’ 속에 조선인의 상처도 들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스즈키는 자신의 상처, 천황의 상처를 다른 사물의 상처 및 침략 전쟁으로 인한 무수하고 무고한 죽음들과 비교해본 적이 있었을까. 대비심(大悲心)이라는 순수한 이론, 그 너머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을까.
우리 일본인 누구나 과거 십수 년 동안 전체주의라든가 개인주의라든가 국가지상주의라고 하는 것에 제압되어 말할 수 없는 고뇌를 받고, 그 결과 오늘날에도 또한 그 화(禍)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필경 대비심(大悲心)의 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사무애법계로부터의 소식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과학도 이 대비를 소홀히 하면 반드시 인간에게 화가 되는 것입니다. 국제간의 분규도 그 근원은 대비원(大悲願)의 유무와 관계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또한 이것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정치도 재정도 법률도 사회생활도 ‘한 소식(一著子)’을 놓치는 것에 의해서 헤아릴 수 없는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국제간 분규를 포함해 각종 불행의 과정과 그 근본 원인에 대한 불교적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는 발언들이다. 대비심과 대비원이라는 ‘한 소식’을 놓치면 모든 것이 망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패전 후 패전의 상황을 돌아보며 천황 부부를 위해 강연한 내용이라는 한계도 있겠지만, 스즈키에게 교묘한 주권의 탈취, 참혹한 폭력과 살육의 현장, 특히 한국이나 중국, 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 피해자의 상상할 수 없을 슬픔에 대한 현실적 반성의 모습은 없다. 오늘의 보수 정치인이 침략 전쟁에 대한 ‘외교적’ 사과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모든 배상 책임은 다 끝났다고 말하는 일본 중심의 정치적 발언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스즈키도 일본 중심의 ‘논리적’ 반성은 하지만, 타자를 아프게 한 데 대한 타자 지향의 ‘심정적’ 반성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일본에 대해 민족주의적 감정이 앞서는 한국인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정서가 한일관계를 여전히 갈등 속에 두는 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10. 상(相)의 논리와 다나베 하지메의 경우
현실은 논리가 아니다. 누군가, 어디선가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대지진으로 핵발전소가 폭파되어 방사능이 세계로 퍼져나가고, 군부 쿠데타가 벌어져 수백 명이 총에 사망하며,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세계대전 당시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간다. 누군가 ‘한 소식’ 한다고 해서 이런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죽고 죽이고 처절한 투쟁의 현장도 다 공할 뿐이라며 ‘색즉시공’이라는 문장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영령을 현창만 하고 정작 죽음의 현실을 그대로 둔다면, 그것은 종교라기보다는 그저 국가주의적 정치 행위이다. 죽임, 아픔, 연민, 괴로움 등 감성의 언어에 충실하면서 그 감성에도 차별을 두지 않는 생명 존중감에 충실할 때 선은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민과 공감은 원효의 삼대(三大), 즉 체(體) · 상(相) · 용(用)의 논리를 빌려 말하면, ‘상’의 영역에 해당한다. 결국은 체 · 용과 하나이지만, 깨닫지 못한 현실에서 죽음과 아픔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괴로운 일이다. ‘체’는 현실의 괴로움을 떠나 있지만, ‘상’은 그 괴로움과 연결됨으로써 괴로움을 넘어선 ‘체’로 다가선다. 상이 없는 용은 너무 쉽게 체와 동일시되며, 현실의 고통에 눈감는다. ‘상’의 논리는 체와 용, 공과 색의 단순 동일시를 교정하면서 강화시켜준다. 괴로움을 회피한 즐거움이야말로 공하다. 온전한 즐거움은 괴로움을 도피하지 않고 관통하며 경험된다. 이 점에서는 십자가라는 처참한 죽음의 사건을 구원의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기독교적 논리와 구조적으로 통한다.
니시다 같은 불교적 철학자나 스즈키 같은 선 사상가들이 천황제하의 군국주의에 기여하게 된 것은 깨닫지 못한 이들에 의한 역사적 현실을 깨달음의 논리로 너무 쉽게 긍정했기 때문이다. 스즈키는 ‘즉비(卽非)의 논리’라는 이름으로 용을 고민 없이 체와 동일시했다. 부정의 대립[非]을 긍정으로 동일시[卽]하는 논리에만 익숙했다. 그러다 보니 전쟁의 희생자, 아수라장, 거짓과 폭력과 같은 구조적 폭력과 민중의 고통을 마치 가상세계 대하듯이 간과했다.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논리에 익숙한 나머지, 일본 군국주의라는 부정을 그대로 ‘공(空)의 역사’로 긍정하면서 침략도, 전쟁도, 죽임도 무화시킨 채 결국 천황제와 군국주의도 긍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정토불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국가와 개인 사이에 매개를 설정해 인간적 책임을 물으려 했던 다나베 하지메(田邊元)의 시도는 다소 의미가 있다. 니시다의 제자인 다나베는 공과 역사 사이에서 사회라는 매개를 설정하고자 했다. 다나베는 ‘공즉시색’이나 ‘절대무의 자기한정’ 개념만으로는 ‘즉(卽)’의 논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절대무와 역사 사이의 ‘매개’에 관심을 기울였다. 개인과 국가를 단순 동일시[卽]하지 않고, 그 사이에 ‘사회’라는 매개를 설정해 개인과 집단,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연결시키려 시도했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근원적 일치가 되도록 하기 위해 개인과 국가를 ‘상호 부정적’으로 매개시키는 변증법을 시도했다. 이것을 “종(種)의 논리”로 명명하면서 이를 통해 일본이 “현실과 이상의 실천적 통일로서의 국가”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그도 일본을 긍정적으로 해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드러난다.
우리가 태어난 이 일본이라는 국가를 생각해보면 ……국가의 통제와 개인의 자발성이 직접 결합 · 통일되어 있다. 이것이 ‘내가 자랑해야 할 국가의 특색’이다.
이때 국가의 통제가 개인의 자발성의 이름으로 작동하려면, 그 개인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나베는 인간 정신의 심층에 ‘인식하려는 의지(Wille zur Erkenntnis)’를 설정하고서, 그 ‘인식하려는 의지’가 도덕적 실천을 통해 인간적 오성과 신적 직관을 연결하는 매개로 작용할 때, 현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절대무와 역사, 영원과 시간이 만나기 위한 논리를 추구하되, 절대무이기만 하면 역사를 포함할 수 없기에, 절대무가 스스로를 한정해 역사의 세계로 나타나는 데에는 사회성을 지닌 개인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통제와 개인의 자발성이 직접 결합 · 통일되어 있는 자랑스러운 국가’라는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다나베도 현실에서 횡행하는 자국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과 이상의 실천적 통일체로서 국가론이 일본 중심의 아시아 지배 이데올로기가 한창 강화되던 일본적 현실과 맞물려 들어가면서, 제국주의적 팽창에 공헌하는 논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전체가 개체의 자기부정으로 긍정되고 개체가 전체의 자기부정으로 긍정된다고 하는 논리의 앞부분만, 즉 개체의 자기부정으로 인한 전체의 긍정 부분만 살아남은 탓이다. 다나베에게 ‘사회’는 개체의 자기부정과 전체의 자기부정이 상즉적(相卽的)으로 매개되는 지점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화(和)라는 이름의 동(同)에 익숙했던 일본의 사회적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전체, 즉 국가만 당당하게 존재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11. 여전한 한계와 근본적인 과제
이런 식으로 불교를 현대철학의 언어로 보편화하려는 사상가들의 시도는 ‘화혼(和魂)’을 다지는 데는 기여했지만, 복잡하고 폭력적인 사회, 이해관계로 점철되는 국제관계, 무엇보다 생명들의 죽음과 죽임의 현실적 이유를 보는 데는 실패했다. 일본적 정신을 화혼으로 명명하며 개체들의 조화[和]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때의 ‘화’는 ‘한 그룹 내에서의 동화’이자 ‘외부인의 배척’에 지나지 않았다. ‘상화(相和)’가 아니라 사실상 ‘동(同)’이었던 것이다. 군국주의하의 근대 일본에서의 종교, 특히 선(禪)도 ‘화’를 ‘동’으로 변질시키면서 폭력적인 동화 · 강제로서의 침략 전쟁으로까지 나아가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30)
다나베는 물론 니시다, 스즈키 등 불교철학에 입각해 일본적 사유체계를 확립하려 했던 많은 사상가들도,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同)을 화(和)로 해석하게 만드는 제국주의적 정치 상황에 함몰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불교도가 그랬던 것은 아니고, 정토진종 등 이제는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종교계의 흐름도 제법 있지만, 국가 혹은 천황 너머에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상위의 보편 논리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의 희생자를 영령으로 받듦으로써 계속 영령을 만들어내는 국가의 논리를 배후에서 지원했던 역사를 반성하고,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보편의 차원을 열어가는 일이야말로 일본 종교계의 근본적인 과제라 하겠다. ■
이찬수 chansuyi@hanmail.net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강남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내며 종교학, 평화학 등을 연구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내통》 《평화와 평화들》 《사회는 왜 아픈가》 등 그동안 8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현재 보훈교육연구원 원장.
이찬수 chansuy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