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4

알라딘: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1 - 이집트·이스라엘 초기기독교 성지순례기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1 - 이집트·이스라엘 초기기독교 성지순례기

김용옥(저자) | 통나무 | 200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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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은 예수의 말씀만을 수록하는 어록 형식으로 된 복음서다. 콥트어 문헌 발굴지 나그함마디를 비롯하여 이집트, 이스라엘의 초기기독교 유적을 탐방하고, 예수와 '도마복음'이 형성되던 당대의 문화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을 수록한 것이다.

1권은 “도마복음서”의 내용을 해설하기에 앞서 예수와 “도마복음”이 형성되던 당대의 문화사적 배경에 대한 광범위한 고찰을 수록하였다.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로 개명된 제2권은 전체 114개 장으로 구성된 도마복음서에서 제25장까지를 역주한다.





1권



순례역정대강
이집트 문명은 단합된 공동체 모습 과시한 것

1. "나그함마디"로 가는 길
1600년 암흑을 뚫고 나온 도마복으의 첫 운명

2. "함라돔"의 피비린내
"엘 카스르" 농가의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도마복음

3. 함라돔의 아이들
초기기독교 수도승의 降魔成道, "타리프" 절벽에 묻힌 비밀

4. 파코미우스를 찾아서
개인수행에서 집단수행으로 옮겨간 초기기독교

5. 파바우 수도원 본부
돌기둥만 뒹구는 인류 최초의 기독교 수도원 터

6. 셉츄아진트와 콥틱기독교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이집트 콥틱기독교의 초대 교황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등대
세기적 영웅들의 로망 간직한 비감의 도시

8. 알렉산드리아와 세례요한
알렉산드리아의 석학 아폴로,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

9. 알렉산드리아와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핵심,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10. 삼위일체의 정치사적 맥락
예수는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11. 아타나시우스의 도바리
AD 367년 이전에는 "신약성경"은 없었다

12. 아타나시우스의 정경목록
신약 27서는 어떻게 생겨났나?

13. 정경과 외경
성경이 교회를, 교회가 성경을?

14. 묵시문학의 본색
선·악 대결의 파노라마, 계시의 세계

15.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문명충돌
기독교 공인 이후 파괴되어간 인류의 문화유산

16. "함라돔의 피" 그 이후
투탕카멘의 저주, 그리고 예수의 저주

17. 코우덱스의 여로
- 심리학자 카를 융에게 헌정된 제1코우덱스

18. 프로이트와 융
나는 신을 창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9. 신화를 찾아서
너를 낳은 자궁을 축복하라!

20. 삶의 의미
인간 실존의 자리는 증오 아닌 사랑일 뿐

21.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예수는 누구인가?

22. 사도바울의 예수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23. 엘레우시스의 비의종교
예수는 새로운 미스테리아일까?

24. 케리그마
예수는 과연 부활했는가?

25. 요세푸스의 증언
예수는 賢者였다

26. Q자료의 발견
복음서 속에 나타나는 다른 예수들

27. 도마복음서와 Q복음서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들어라

28. 천당과 천국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9. 바울과 Q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냐?

30. 산상수훈과 Q
가난한 자들이여! 천국이 너희 것이다

31. 지혜담론과 묵시담론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주라

32. 선민의식과 종말론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섬기려느뇨?!

33. 쿰란공동체와 예수
성서의 오리지날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34. 스토익과 그노스틱
종교란 하늘과 땅 사이의 도랑을 메우려는 노력

35. 콥트어와 기독교
초기기독교는 이집트에서 대세를 형성했다

36. 옥시린쿠스 사본
성서의 텍스트들은 어떻게 변형?獰駭째??

37. 디두모 유다 도마
예수에게 쌍둥이가 있었다?

38. 노자(老子)와 도마복음서
도마복음서는 언제 집필되었나?

39. Q복음서의 저작연대
지혜담론이 먼저냐, 묵시담론이 먼저냐?

색인

2권

도마복음 고대문명 제2차 탐방 보고서

40. 도마기독교 : 예수 생전에 예수를 초청한 에데사의 왕(王)
41. 마르코 폴로와 도마의 최후 : 기독교는 원래 서양종교가 아니다
42. 예수와 페니키아문명 :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43. 예수 자신의 이방선교 : 상 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44. 지브란과 견유(犬儒) 예수 : 샌달과 속옷,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
45. 에데사의 도마행전 : 예수가 편지를 쓰다
46. 콥트어와 성각문자 : 인간의 언어는 문자라기보다는 소리의 체계
47. 도마복음서 해독 기초자료 【서장】: 프롤로그에 숨은 뜻은?
48. 영지주의와 도마복음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나?
49. 메시아니즘과 도마복음 : 교회는 종말론적 회중이었다
50. 화자와 기록자 : 예수의 말을 예수의 쌍둥이가 기록하다
51. 메시아 비밀 :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52. 슈바이처와 도마복음 : 그대들은 내가 꿈꾸는 사람이라 말하겠지
53. 예수의 죽음 : 예수는 기묘한 과일이었다
54. 성서와 해석학 : 예수는 어느 나라 말을 했을까?
55. 은밀한 말씀과 나레이터 : 살아있는 독자들이여!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라
56. 요한복음과 도마복음 【제1장】: 도마의 자각성에 대한 극단적 반동
57. 해석의 발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58. 죽음의 해석 :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59. 소승과 대승 【제2장】: 구하라! 그러나 쉽게 얻을 것을 기대치 말라
60. 쉬움과 어려움 : 찾았을 때 너는 고통스러우리라
61. 지혜와 왕(王) : 구하는 자여! 그대 “몸의 왕국”의 왕이 되라
62. 주체의 혁명 【제3장】: 천국(나라)은 천당이 아니요, 주체의 개벽이다
63. 안과 밖 :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64. 소크라테스와 예수 : 너 자신을 알라
65. 아가페와 그노시스 : 네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66. 아니마와 아니무스 【제4장】: 남자 속에 여자가 있고, 여자 속에 남자가 있다
67. 자웅동체의 시간관 : 묵시를 완성치 말고 낙원을 회복하라
68. 어른과 아이 : 아기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질 않는다
69. 시간의 반역 : 봄비에 솟아오르는 연두잎 같은 노인이 되라
70. 첫째와 꼴찌 : 어린이는 도덕적 순결의 상징 아닌 웅혼한 원초성
71. 그노시스와 아포칼립스 【제5장】: 천당도 지옥도 없다. 머리 위로 푸른 하늘만
72. 히포크리테스(위선자)의 경건 【제6장】: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
73. 하늘과 알레테이아 : 숨겨진 것은 하늘 앞에 반드시 드러난다
74. 플라톤의 국가와 예수의 천국 【제7장】: 지배자가 철인이 될 때만 정의롭다
75. 이드와 사자 : 덮치는 사자를 먹어라!
76. 큰 고기와 작은 고기 【제8장】: 긁어모으는 자가 되지 말고 버리는 자가 되라
77. 마가복음과 도마복음 【제9장】: 예수의 비유가 과연 천국의 비밀일까?
78.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씨처럼 자라나고 있다
79. 불씨와 세상 【제10장】: 불은 심판이 아니라 천국운동의 불씨였다
80.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제11장】: 저 하늘도, 그 위의 하늘도 사라지리라
81. 하나와 둘 : 구원을 얻었다고 하자!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82. 의로운 자 야고보 【제12장】: 말씀은 중간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83. 가이사랴의 철학자 【제13장】: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천사? 철학자?
84. 도마와 노자 : 예수를 예수라 말하면 그것은 예수가 아니다
85. 기도와 구제 【제14장】: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86. 밥(食)과 말(言) : 더러운 것은 똥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다
87. 태어난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 【제15장】: 나 예수는 여자가 낳았다
88. 평화와 충돌 【제16장】: 가정사에 집착 말고 홀로 서라
89.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제17장】: 나 예수는 황홀한 경지를 선사하노라
90. 시작과 끝 【제18장】: 종말은 끝에 있지 않고 시작에 있나니라
91. 페르시아적 사유와 초기기독교 : 종말론의 종말을 선포, 시작에 서라
92. 존재와 존재 - 전(前) - 존재 【제19장】: 돌이 떡이 되어 너를 섬길 때
93. 겨자씨와 백향목 【제20장】: 겨자는 어떻게 백향목 같이 거대한 나무가 될까?
94. 수평적 확산과 수직적 확대 : 하늘의 나라여, 들판의 잡초처럼 퍼져라
95. 아해들과 주인들 【제21장】: 옷을 벗어라! 과연 이것은 무슨 뜻일까?
96. 아기와 천국 【제22장】: 네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될 때 너는 나라에 들리라
97. 천 명과 한 명 【제23장】: 천 명 중 하나뿐인 자여! 단독자로 서라
98. 빛과 어둠 【제24장】: 평범한 너 자신 속의 빛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99. 형제와 이웃 【제25장】: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이웃은 누구일까?
100. 지로역정(地路歷程) : 한국의 교회여! 새롭게 울려퍼지는 예수의 복음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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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 탈고소감: 기존의 복음서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말씀의 황금광맥
◎ 탈고도마복음 제26장 ~ 제114장 본문역주
【제26장】네 눈에서 들보를 빼라, 그제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리 / 【제27장】세상을 금식하라 / 【제28장】취하여 목마름을 모르는 자들이여 /
【제29장】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 거하느뇨? /
【제30장】세 명의 하나님과 한 명의 인간 / 【제31장】선지자와 고향, 그리고 의사와 의사를 아는 자들 / 【제32장】높은 산 위에 지어진 동네 / 【제33장】등불은 등경 위에 / 【제34장】눈먼 자가 눈먼 자를 / 【제35장】지혜로운 도둑질 / 【제36장】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제37장】부끄러워 말고 발가벗어라 / 【제38장】나를 발견치 못하는 날들도 있으리라 / 【제39장】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쥐고 있는 지식의 열쇠 / 【제40장】아버지 밖의 포도나무/
【제41장】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뿐 /【제42장】방랑하는 자 /
【제43장】나의 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느냐? / 【제44장】성령에 대한 모독만은 용서받지 못한다 / 【제45장】포도는 가시나무에서 수확되지 않는다 / 【제46장】어린이가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하다 /
【제47장】옛것과 새것은 양립하지 않는다 /【제48장】산도 움직이리라 /
【제49장】너희는 나라에서 왔고 나라로 돌아간다 / 【제50장】빛의 증표는 동(動)과 정(靜) /
【제51장】새 세상은 이미 와있다 / 【제52장】이스라엘의 스물넷 예언자는 죽은 자들이다 /
【제53장】영 속에서의 진정한 할례 / 【제54장】가난한 자는 버린 자 / 【제55장】부모·형제·자매를 버려라 /
【제56장】세상은 시체와도 같다 / 【제57장】좋은 씨와 가라지의 공존 /
【제58장】고통 끝에 생명, 고진감래(苦盡甘來) / 【제59장】너희가 죽은 후에는 나를 보지 못한다 / 【제60장】사마리아 사람이 걺어진 양 /【제61장】침대에서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 것이다 /
【제62장】너의 왼손이 너의 오른손이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 /
【제63장】세속적 부의 축적의 허망함 / 【제64장】잔치에 초대된 자들 /
【제65장】포도원 주인 아들을 때려죽인 사악한 소작농부들 /【제66장】모퉁이의 머릿돌 /
【제67장】다 알아도 자기를 모르면 / 【제68장】박해받는 너희는 복이 있도다 /
【제69장】가슴속의 박해, 나눔을 위하여 배고픈 자 /
【제70장】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제71장】내가 이 집을 헐겠노라 / 【제72장】내가 분할자란 말이냐? / 【제73장】추수할 것은 엄청 많은데 일손이 모자란다 /
【제74장】우물 속에는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제75장】단독자만이 혼방(婚房)에 들어갈 수 있노라 /
【제76장】단 하나의 진주에 투자하라 / 【제77장】나는 빛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
【제78장】황량한 사막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을 보려느냐? /
【제79장】예수여! 그대를 낳은 자궁과 그대를 먹인 유방에 감사하라! /
【제80장】세상이 육체임을 안 자에게는 세상이 합당치 아니 하다 /【제81장】풍요로운 자여, 다스려라! / 【제82장】나는 불이다 /【제83장】모습은 빛 속에 숨는다 / 【제84장】닮은 꼴만 보고 기뻐하지 말라 / 【제85장】너희가 아담보다 더 위대하다 /
【제86장】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간의 자식인 나는 머리 누일 곳도 없다 /
【제87장】한 몸에 매달리는 그 몸은 비참하다 /
【제88장】천사나 예언자보다 더 심오한 너희여, 자문해보라 /
【제89장】어찌하여 너희는 잔의 겉만을 씻으려 하느뇨? /
【제90장】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다스림은 부드럽다 /
【제91장】너희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을 줄 알면서 너희 앞에 서있는 나를 모르느냐? /
【제92장】왜 찾고있지 않느냐? /【제93장】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라 /
【제94장】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 /【제95장】돈을 꿔주려면 아예 받을 생각마라 /
【제96장】아버지의 나라는 빵 속에 효모를 숨기는 여인과도 같다 /
【제97장】아버지의 나라는 부지불식간에 밀가루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 【제98장】아버지의 나라는 엄청난 강자를 살해하는 사람과도 같다 /
【제99장】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야말로 나의 형제요 나의 엄마다 /
【제100장】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나의 것은 나에게 /【제101장】하나님 엄마가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 /
【제102장】여물통에서 잠자는 개가 되지마라 /【제103장】도둑놈이 언제 들어올지를 아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제104장】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서야 금식하고 기도하라 /
【제105장】세속적 엄마와 아버지만 아는 너는 창녀의 자식이다 /
【제106장】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 / 【제107장】가장 큰 양 한 마리 / 【제108장】예수 나 자신 또한 너희처럼 되리라 /
【제109장】나라는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도 모르고 밭을 가는 농부와도 같다 /
【제110장】세상을 발견하여 부자가 된 자는 세상을 부정하라 /
【제111장】하늘과 땅이 두루말릴지라도 살아있는 너희는 죽음을 보지 아니 하리라 /
【제112장】부끄러울지어다! 영혼에 매달린 육체여! /
【제113장】아버지의 나라는 지금 여기 이 땅에 깔려있다 /
【제114장】남성과 여성을 초월하여 살아있는 정기가 되어라 / 토마스에 의한 복음

◎ 로기온 주제 상관 도표
◎ 콥트어 도마복음
◎ 우리말 도마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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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2000여 성상을 거쳐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 말은 곧, 모든 종교가 한 시점에서의 완성된 고정된 모습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물론 예수교(예수의 가르침)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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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전3권 완간.

1945년 12월 나일강 상류 아라비아사막의 게벨 알 타리프 절벽에서 발견된 콥트어 도마복음의 출현은 기독교신학의 신기원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말, 20세기 초기로부터 독일신학계에서는 현행 4복음서(narrative gospel)에 앞선 “예수 가라사대” 파편만을 모은 어록복음서(sayings gospel)가 존재했다는 가설을 줄기차게 밀고 나갔는데, 그 가설이 놀라웁게도 물리적 현실로서 입증되었던 것이다. 도마복음은 “살아있는 예수the living Jesus”가 하신 말씀을 도마가 기록한 것이다. 이 복음은 114개의 예수의 말씀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 말씀파편들의 내용이 현행복음서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거의 다 현행복음서와 겹치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도마복음과 공관복음을 비교해보면 도마복음이 더 원자료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공관복음 중에서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여졌는데 AD 70~75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도마복음은 이 보다 한 세대가 빠른 AD 50년경에 성립한 것이다(쾨스터, 로빈슨, 크로쌍, 패터슨 등 사계의 대가들이 이 설을 지지한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의 출현으로 우리는 원래 예수의 말씀의 원형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말씀자료를 어떻게 공관복음서기자들이 초대교회의 문제의식 속에서 변형시켰나 하는 것을 명료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살아있는 예수”는 “죽은 예수”가 아니다. 그는 그의 죽음이나 부활이나 재림에 대한 생각이 없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삶”에 관하여 이야기할 뿐이다. 살아있는 예수는 수난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닌 것이다.
도마복음이 전하는 예수는 매우 상식적이며 심오하고 건강하다. 일체 신화적 윤색이 없으며, 기적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이 없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아시아대륙의 아시아적 가치를 구현한다. 동·서회통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서구문명과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하고 사고한 인간이었다. 예수의 인성을 거부하는 자는 기독교의 이단이다. 예수의 인성은 도마복음 속에서 매우 정교한 언어로 그리고 매우 점잖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도마복음에 관한 모든 가능한 출전을 동원하여 도마복음을 해설한다. 우선 도마복음 구절과 관련된,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의 서한을 독자들이 비교적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모조리 다 인용하여 상세한 주석을 가한다. 그리고 당대의 관련된 메소포타미아문명권의 자료들, 구약자료들, 그리고 『숫타니파타』 등의 초기불전자료, 유교·노장철학자료 등등 역사적 예수의 상(像)을 바르게 그릴 수 있도록 만드는 모든 자료를, 개방적인 자세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기독교는 이제 바울이 제시하는 기독론·부활론이라는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케리그마를 원점으로 고집할 수가 없다. 앞으로 오는 복잡다단한 정보의 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본래적 모습인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정체를 다원적으로 파악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다. 앞으로 모든 신학논쟁에 있어서 도마복음은 배제할래야 할 수 없는 결정적 “함수”가 되어버렸다. 2007년, 2008년 2차에 걸쳐 도올의 학설을 검증하기 위하여 감리교신학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신학대토론회에서도 신학자들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개방적 자세로 수용하면서 한국신학을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시점”이라고 견해를 모았다. 도마복음이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국면을 외면하는 자는 시대에 뒤떨어질 뿐이다.

원광대학교 석좌교수 도올 김용옥이 행한, 크라운판 양장 전3권에 이르는 도마복음주석작업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가장 방대한 작업이며, 구미신학계에서도 그 유례를 볼 수가 없다. 그는 114개의 파편의 주제상관도표까지 그려가면서 종전의 신학논의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이 책은 도올의 스승 허혁, 그리고 허혁의 스승 요아킴 예레미아스와 루돌프 불트만에게 헌정되었다.

그리고 특기할 사실은 이 『도마복음한글역주』의 내용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게 하기 위하여 인터넷 강의를 개설하였다는 것이다. 책의 출간과 인터넷 강의가 동시에 출범하는 새로운 문화콘텐츠는 인문학에 갈증을 느끼는 이 땅의 지성인들 모두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www.hooz.com에 들어가면 『도마복음 한글역주』와 『대학· 학기 한글역주』에 관한 도올 김용옥 석좌교수의 열정적 강의를 누구든지 쉽게 접할 수 있다.

도올은 말한다: “나는 동·서의 대표경전으로서 『논어 한글역주』 전3권과 『도마복음 한글역주』 전3권을 완성하였다. 내가 『도마복음』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노자』로부터 받은 충격만큼이나 강렬했다. 『도마복음 한글역주』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웠던 영적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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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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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저작 중 가장 옹골차다고 생각함. 복잡다단한 사료와 사관을 간명하게 정리, 주장을 설파하는 필력은 그만큼 자료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단순화와 자기화의 위험을 감지하기에는 독자보다 도올이 너무 위에 있다. 군데군데 자화자찬의 깔때기 토크는 여전하시다.
피라미 ㅣ 2018-02-19 l 공감(0) ㅣ 댓글(0)



인간의 최고의 지성이 빚어내고 참으로 인간적이고 인간이고 싶어하는 교만에 빠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나약한 인간의 스스로 최악의 몽부림이 보임
하늘 아래 어느 누구라도 어떤 뛰어난 인간의 지성과 통찰이라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 오직 전능자만 할 수 있음 도마는 보이는 것만
메마른나무 ㅣ 2017-07-23 l 공감(0) ㅣ 댓글(0)



알라딘에서 구매해 읽은 2015년 첫번째 책은 `예수는 신화다`이지만 중고서점에서 산 책이라... `도마복음`은 새 책으로 구매한 첫 책. 하루도 기다릴 수 없어 오프라인 Y문고에서 사고 있다가 2권은 또 다른 서점에서 3권은 알라딘에서 주문했어요. 2015년 화두는 아마도 종교가 아닐까...
햇빛아이 ㅣ 2015-01-12 l 공감(0) ㅣ 댓글(0)



기독교적 전통이랄까 그런 것에 대해서 워낙에 무지하긴 하지만, 흥미롭게 읽힌다. 도올이 쓰는 성지순례기! 재미있다.
가넷 ㅣ 2012-04-10 l 공감(0) ㅣ 댓글(0)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성경의 또 다른 복음서와 그와관련된 것에 알게되어 ...
벚꽃장미사랑 ㅣ 2011-10-16 l 공감(0)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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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6편




오리지날 예수 newone ㅣ 2013-05-13 ㅣ 공감(10) ㅣ 댓글 (0)


도마복음서는 현 성경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 속에 있는 복음서 안의 예수만 알아왔다. 그게 예수가 한 진짜 말씀인 줄 알았다.

신학 공부하면서 복음서의 예수 말씀이 오리지날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신학자, 가령 불트만 같은 이들의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도마복음서에 대한 도올의 세 책을 읽어 본 뒤 사복음서는 예수의 진짜 말씀이 아니구나, 이제야 알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2, 3권이 도마복음 원문 해설이니 꼭 다 보길 바란다.

도마복음을 사복음서와 비교하여 보니 과연 예수의 본래 말씀은 이거였구나, 이제 알았다.



도마 속의 예수는 너무 선사상이나 노장사상과 가깝다. 이것도 놀랐다. 역시 깨달은 자들에곈 진리가 하나인 것인가?

우리나라에 기독교인이 천 칠백만이라는데, 왜 이 책을 안 보는 것이지? 오리지날 예수에 관심이 없나? 서양신학자들은 오히려 도마복음을 이해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동양사상에 가까워서.

도마의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예수에 대해 설교를 해대는 목사들의 외침을 우리가 이 이십일세기에 듣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 목사들부터 이 책을 읽어야 할 텐데.. 그리고 신학도들도.



이제야 예수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쇼의 도마복음 강해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갈릴리의 견유 Lulu ㅣ 2011-10-06 ㅣ 공감(0) ㅣ 댓글 (0)
인도기행문인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2’에서 저자는 미켈란젤로의 예수상과 간다라미술의 불상을 비교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예수의 모습과 싯달타의 모습의 이러한 차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관념의 차이를 나타내준다. 보다 신적인 예수는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반면, 보다 인간적인 싯달타는 우리에게 신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은 기실 역사적으로 대승불교가 우리에게 끼친 해악 중의 하나다. 싯달타라는 인간이 증발되어 버린 것이다.”

붓다의 신적 이미지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싯달타가 붓다가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인간이라 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3권에서 달라이 라마는 해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해탈을 원하지 않습니다. 해탈이 마음의 모든 것의 완전한 종지이며 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윤회가 더 좋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요!”
“그럼 붓다는 재미없는 사람이겠네요?”
“ 그렇습니다. 붓다는 이미 다르마 자체입니다. 어떤 구체적 형상으로는 다시 구현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붓다의 깨달음에 있다. 붓다가 깨달은 것은 無我였다. 무아는 말 그대로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며 항상 그렇게 있는 ‘나’란 인격은 없다는 말이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제자들의 다채로운 초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서양의 독자들은 초기 불교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아난다와 데바닷타는 빅쿠들의 무리 가운데 두르러졌지만 그들의 초상은 복음서의 생생한 성격 연구에 비하면 여전히 상징적이고 양식화되어 잇다. 심지어 붓다의 최고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도 언뜻 보기에는 인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무색무취의 인물들로 제시된다. 붓다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감동적인 삽화도 없더. 우리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지만 얻게 된다.

붓다는 서구인들이 그들의 영웅에게서 높이 사는 독특한 자질이나 개성을 소멸시킴으로써 해방을 얻었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붓다와 빅쿠들은 잘 구별되지 않으며 빅쿠들 역시 모두 작은 붓다로 묘사되고 있다. 빅쿠들 역시 붓다와 마찬가지로 인격이 사라지며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특성도 사라진다.

경전의 텍스트들은 빅쿠들의 마음속에 묻힌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거부하여 이런 익명성을 유지한다. 또 깨달음의 성취 이전에 그들에게 있었을 만한 성격상의 기벽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서 예외적인 사람들이 데바닷타와 아난다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데바닷타는 자기중심주의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상냥한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서구인들이 이런 식의 인격 상실을 비난한다면 빅쿠들은 아마 자아의 포기는 닙바나라는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 얼마든지 치를 수 잇는 대가라고 대답할 것이다. 닙바나는 자아에 갇혀 있는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그렇기에 인격을 가진 보통 사람에게 깨달은 자란 (인간같지 않은) 신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싯달타의 형상이 신적으로 그려진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형상을 만든다는 자체이다.

아잔타 석굴 가이드가 “저보고 묻더군요.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불상의 유무지요. 소승에는 불상이 없고 대승에는 불상이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붓다를 사람의 형상으로 시각화할 때 그것은 불교의 무아론의 근본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붓다를 하나의 실체로서 신격화하고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 그러기 때문에 붓다는 제자들이 진리만에 의거하여 살 것이며 자기라는 인간의 형상에는 집착치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불상이란 1세기말경 대승운동이 태동되면서 생겨난 것이며 불교사에서 매우 이질적인 것이엇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2’)

“대승불교는 불상을 도입하면서부터 엄청난 대중운동으로 발전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도 말할 수 잇다. 즉 불교의 진면목은 무신론이었는데 불상을 도입하면서 오히려 유신론으로 전락해버렸다. 불상숭배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대한 일반재가신도들의 불교이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고자 하는 유일신관과 별 차이가 없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저자는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전락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 전락을 이해하려면 먼저 기독교는 아시아의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의 생애는 사실이 아니라 신화로 읽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티머시 프레케와 피터 갠디는 ‘예수 미스터리야 명제’란 가설을 세웠다. 이들의 가설에 의하면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이집트, 지중해연안, 근동지역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었던 미스테리아 비교의 신화적 운동의 유대인적 버전 속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神人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신화운동의 한 가상적 주체이다. 이 가상적 주체야말로 우리 자신이 모두 그리스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을 가지는 신화적 운동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미스터리야 비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신화들의 골자를 간추려내면 곹 예수의 신화적 삶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1.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肉化된 신이며, 구세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2.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며 어머니는 인간동정녀이다.
3. 그는 3명의 양치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12월 25일 동굴이나 허름한 외양간에서 태어난다.
4. 그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세례의식을 통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잇는 기회를 준다.
5. 그는 결손식장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이적을 행한다.
6. 그가 나귀를 타고 읍내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찬양한다.
7. 그는 세상의 죄를 대속하여 부활절 무렵에 죽는다.
8. 죽은 직후에는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사흘 후에는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 광영 속에 하늘로 올라간다.
9. 그를 따른 자들은 그가 최후심판의 날에 심판관으로서 되돌아오기를 기다린다.
10.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써 기념된다.
이것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공통된 이집트, 근동지역 신화의 매우 보편적인 설화양식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이야기의 골력은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흔해빠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미스테리아 가설은 예수의 부활과 동일한 구조의 신화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희랍에서는 디오니수스,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카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신인들은 모두 동일한 신화적 존재이며 이 신화는 기전원 3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조셉 캠벨이 말한대로 이러한 신화들은 ‘동일한 해부학적 구조’를 갖는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그러나 복음서 내러티브가 해부학적 구조를 공유하는 다른 신화들과 다른 점은 “뮈토스적 세계와 로고스적 세계를 혼융하는 기묘한 신념체계를 자신의 실존적 삶의 의미로서 받아들이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고대인은 신들이 하늘에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 어느 신을 하늘에서 보았다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시간 문제에서도 고대인이 하는 이야기를 액면 그래도 받아들여 헤파이스토스가 얼마전에 재혼을 했다거나 아테네가 근래에 몹시 늙엇다고 알려주면 그는 마찬가지로 아연해 앳으리라. 그러면서 신화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 사이에는 그 자신이 보기에도 막연한 유추적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일종의 정신적 혼수 상태에서 그 이질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현실화’시켰을 것이다.” (폴 벤느)

1세기의 헬레니즘 세계는 지금 우리와 그리 큰 차이가 없이 개명된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것은 그들은 신화의 언어를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신화의 언어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언어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근대 이전 문명에는 생각하고 말하고 배우는 두가지 인정된 방식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뮈토스와 로고스라고 불렀다. 둘 다 중요했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둘 다 중요했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둘은 상충관계가 아닌 상보관계로 각각의 고유한 기능이 있었고 둘을 뒤섞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엇다. 신화는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기능을 했다. 신화가 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실은 로고스의 소관 밖에 잇는 인간적 곤경의 좀더 비극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신화는 심리학의 원시적 형태로 일컬어져왔다. 신화가 실을 잡고 미궁을 빠져나가거나 지하세계로 내려가거나 괴물과 싸우는 영웅을 그렸다고 해서 그것을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한 신화는 우리가 접근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영역과 타협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 속의 미궁으로 들어가서 자기 안의 괴물들과 싸워야만 했다. 프로이트와 융이 인간정신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계획했을 때 본능적으로 주목한 것도 바로 이런 옛 신화엿다. 신화는 역사적 사건을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신화는 본래 행동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신화는 우리가 올바른 영적 혹은 심리적 자세를 갖게 할 수는 있었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 신화의 ‘진실’을 만드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었다.”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붓다의 본생담이 그 좋은 예이다. “불교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본생담의 이야기를 싯달타 전새으이 다양한 전기문학장르로 파악하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이야기하거나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본생담의 주제는 매우 단순하다. 자기헌신이며 희생이며 자비며 사랑이다. 역사적 싯달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친 자비행을 통하여 해탈을 이룩할 수 있었나 하는 대승정신의 드라마틱 프리젠테이션인 것이다. 즉 자타카는 사실적 스토리로서의 역사성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시의 메시지를 구현하기 위한 신화적 선포로서 그 일차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예수의 전기도 자타카와도 같은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서 초대교회에 유행했던 하나의 현상이었”다. 그 현상의 의미는 죽음에서 드러나며 그 죽음의 의미는 당시 헬레니즘 문명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아주 이성적인 철학자로만 생각하며 그가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켯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이나 예수가 바리새인의 율법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성전을 뒤엎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혁명을 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에 동일한 스토리의 구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아테ㅐ네의 준법정신 때문에 사형을 달게 받은 것이 아니라 사후의 새로운 삶에 대한 종교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는 사형을 오히려 자초했다고 하는 그러한 과정이 예수의 스토리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이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와 달리 부활함으로서 죽음의 의미를 완성한다. “복음서 내러티브의 대전제는 이미 부활로 확정되어 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며 죽기 위해서는 수난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난에 이르기 위해서는 체제를 뒤흔드는 많은 혁명적 언행을 해야 한다. 그 혁명적 언행 속에 또 우리의 인과적 상식을 뛰어넘는 이적이 점철되어 잇다.”

그런 내러티브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삶과 무관한 객관적 물리적 사태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과 부활을 나의 실존적 고통의 심연에서 직접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죽고 내가 부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6~7)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의 주된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잇지 않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끊임업없는 몸부림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의 전제가 없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예수는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죽었다 부활한 예수로서 묘사된 예수가 바로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인의 신상속의 예수일 뿐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분명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의 소산인 것이다. 선포 즉 케리그마의 대상이 되는 예수는 예수의 색신이 아닌 예수의 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법신과 색신을 분리하지 않으며 예수의 법신이 곧 색신이라 믿는다.”

이것이 문제라고, 원시기독교가 대승기독교로 전락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예수에게 인성을 부여해야만 가현론의 픽션을 벗어날 수 잇다고 한다면 그 인성은 매우 정직한 보편적 인성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부활의 예수가 될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는 죽었다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예수에게 그러한 이적과 부활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일 뿐이며 이성의 논의를 벗어나는 불합리한 신앙의 특수상황에 속해버릴 뿐이다. 부활의 예수는 기독론의 핵심이며 초대교회의 프로라간다이다. 기독론으로 예수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운동의 ㅎ산 고리를 캐는 작업일 뿐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의 모든 신화의 전형적 양식이며 그것은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의 한 아키타입일 뿐이다. 예수의 신성만을 고집하며 인성을 왜곡한다면 그러한 예수는 신화적 예수가 되고 말 뿐이다.

과연 그러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 있는가? 나는 당당히 외친다: 오히려 기독교에서 그러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할 때만이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가 된다! 이적과 부활이 없이도 예수는 예수일 수 잇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참모습이다.”

저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도마복음이 ‘또 다른 예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헌비평에 따르면 도마복음은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공관복음보다 선행한다. 그리고 공관복음이 도마복음과 상당량을 공유하는 자료들을 비교하면 도마복음의 내용이 공관복음의 원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잇다. 그리고 도마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자료인 “Q자료 속의 예수에게는 탄생설화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 예수는 과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하고 산 사람이었을까? Q자료 속의 예수는 전혀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공고나복음서의 사실이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이니 하는 그럴싸한 드라마도 없다. 나의 피니 살이니 하는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를 갖는 그런 언어가 그림자도 없다. 자신의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친근한 관계로 파악하는 언어는 있지만 아버지가 파견하여 천상(빛)에서 지상(어둠)으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자라는 식의 그리스도(메시아)적 이해가 전무하다. 예수는 오직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을 뿐이다. 천국은 천당이 아니다. 천국이란 하늘구름 위에 붕 떠 있는 어느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로마의 지배나 율법의 지배나 바리새인 대제사장의 지배가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 무매개적 지배엿다. 그것은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지배였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구현된 그런 질서가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청이다. 바로 이 말씀의 주인공이 예수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실상인 것이다.”

그러면 역사적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저자는 견유학파의 현자에 가깝다고 말한다. 예수가 살았던 갈리리 지방은 “그 아이덴티티가 남방의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지역보다는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개방적 선진문명에 더 근접해 있엇고 더 동화되어 잇었다. 당시 두로와 시돈의 찬란한 역사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 관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갈릴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은 변방의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 예수의 입장에서 이 도시들을 감지하는 느낌을 말한다면 주변의 고라신과 벳새다가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비유된다면 두로와 시돈은 뉴욕 맨해튼의 느낌이었다. 당시 지중해연안 최대의 도시였다. 최근의 스칼라십은 예수운동이 당대에 이미 페니키아문명권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숙지한다.” 예수 자신도 페니키아문명권과 같은 아람어를 사용했다.”

당시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였고 우주의 원질에 대한 통찰이기보다는 인생의 아타락시아의 체득이엇다. 아타락시아란 과도한 쾌락이나 고통 그 어느 것에 의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이었다. 그것은 도마복음에서 안식(res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이엇다. 이 해탈을 가장 철저하게 구현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견유학파였다. 예수야말로 디오게네스의 제자엿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견유학퍼족 리얼리즘을 철저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그의 운동에 가담하는 제자들에게 돈을 담은 전대는 물론 지팡이나 가죽샌달도 그리고 속옷조차도 지니지 못하게 햇다. 지나치는 사람들과 문안인사조차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견유학파의 덕목은 최소한의 질박한 삶이엇고 모든 세속적 가치에 대한 절제였다. 예수가 비유를 잘 들기로 유명한데 견유학파의 사람들이야말로 비유의 천재엿다.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의 견유였다.” (2권)

도마복음의 예수는 철저히 현자였다. 현자로서 예수는 종말론적 예수와는 거리가 멀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수공동체는 철저히 지혜담론의 공동체였으며 그 지혜담론적 성격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 묵시담론적 틀 속에서 재해석되어 갔다. 묵시담론은 물론 기독론의 형성과 관련되며 그것은 유대국가의 멸망이라는 긴박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의 성격을 띤다. 묵시담론은 선택된 자들의 폐쇄적 사유에서 기인되는 것이며 지혜담론에 어떤 긴장감과 긴박감을 부여한다.

불트만은 말한다: ‘종말론적 분위기라는 것은 기대나 계산이나 희망이나 염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선민이라는 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선민의식은 선택된 자들과 선책되지 않은 자들의 분별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은 선택된 자들은 하늘에 속하고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땅 즉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곧바로 하늘은 빛이고 세계는 어둠이라는 이원적 사유로 연결된다. 여기에 플라톤적 사유가 결합되면 하늘이라는 이데아만이 실재하는 것이 되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그림자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멸절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도덕적 이원론까지 더하면 선택된 자들만이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이며 선택되지 못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악의 구현체가 된다. 그러니 이 세계는 멸절의 종말로 치닫지 않을 수 업6t다. 그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공관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 세대’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심층구조적 언이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눅 11:29, 마 12:39 막 8:12)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갈릴리 사람이엇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그에게는 철저한 인간평등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저주 아닌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이 바로 지혜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이었다. 묵시담론은 후대 기독교공동체의 성격에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묵시담론을 거부한 사상가엿다. 도마복음서에는 묵시담론이 없다. 이것이 바로 도마복음서의 성격이 Q복음서보다도 더 오리지널한 예수의 담론을 드러내고 있다고 추론케 만드는 한 근거가 된다.”


도올 선생의 도마복음을 시작하기 전의 순례, 재밌는 너무나. 대머리메뚜기 ㅣ 2011-01-01 ㅣ 공감(0) ㅣ 댓글 (0)역시 도올 선생님! 1권에 도마복음 얘기는 직접 나오지 않는다. 1권은 오히려 도올 선생이 왜 도마복음이 중요한지 우리 개신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를 직접 여행하면서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들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막힘 없는 필치 직접 카메라를 들고서도 사진 속 주인공도 되시고... 글도 재밌고 도올 선생님의 행동도 재밌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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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 1 녹차 ㅣ 2009-03-26 ㅣ 공감(2) ㅣ 댓글 (0)
전작들인 <절차탁마 대기만성>과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겹치는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재밌게 읽었다.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일화와 새롭게 안 사실 몇 가지를 간추려 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책은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나일강 서안 도시와 강 건너편 마주 보고 있는 엘 카스르(El Qasr)라는 작은 농촌에 사는 두 형제가 게벨 알 타리프(Gabel al-Tarif)라는 산에서 사바크(sabakh: 천연비료)를 캐다가 높이 70cm가량의 항아리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도마복음서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 두 형제, 아부 알 마지드(Abu al-Majid)와 그의 형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al-Samman)의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야기 책 속에서 나올 법한 얘기들이라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2. 신약성서 27서 체제가 서기 367년 아타나시우스가 발표한 이후부터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3. 카논(Canon)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다음의 세 가지 항목을 꼽는다고 한다.
첫째, 사도의 저작성(apostolicity)
둘째, 신앙의 잣대
셋째, 교회 내의 의견 일치

그러나 책에 의하면 '사도의 저작성'은 온당한 기준이 되기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1세기로부터 4세기에 걸쳐 모든 저작자들이 사도의 저작을 가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위서나 표절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는 너무도 양연시된 공적 행위라고 한다. 베드로니 바울이니 요한이니 하는 이름들은 '철수'처럼 매우 흔한 보편적 이름들이었으며, 그러한 사도 중의 한 이름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작 그 자체를 영예롭게 하는 고귀한 행동이었으므로, 그러한 위작의 방식은 당연시된 한 양식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역시 온당한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생략한다.

4. 여지껏 그냥 'Q자료'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Q'의 뜻은 '자료'에 해당하는 독일어인 '크벨레(Quelle)'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1838년 라이프치히대학의 철학.신학 교수였던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1801~1866)가 문헌학적으로 매우 유력한 학설을 제시했는데,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 자료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또다시 공통된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는 것. 그 또하나의 자료를 바로 'Q'자료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는 마가 복음 자료와 Q자료, 두 자료를 보고 썼다는 것이다.

5. 아직 '도마복음'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았다. 아마도 2권부터 시작 될 듯하다.

6. "나에게 신앙이란 나의 상식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타자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감동적이었다.


과거와의 대화가 가능한 득도의 길 jahny ㅣ 2008-12-24 ㅣ 공감(0) ㅣ 댓글 (0)나도 해 보고 싶은 일입니다. 제목과 같은 이유로...
--- 초기 기독교 모습은 어땠을까? 겸둥베짱이 ㅣ 2008-05-11 ㅣ 공감(0) ㅣ 댓글 (0)
제목 : 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1(이집트·이스라엘 초기기독교 성지순례기)

지은이 : 김용옥

통나무(2008년3월)

도올 김용옥선생이 성경에 관련된 책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였고 주저없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는 가장 최근에 발견된 예수의 말을 옮겨놓은 외경(外經)인
도마복음이 어떻게 발견되었으며 그것이 기독교에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도올
선생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여 살펴본 것이다.

성경은 누가 써 놓은 것인가? 신이 말한 내용을 사도들이 계시를 받아 적은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사실인가?라고 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독교의 발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도올선생은 기독교의 발상도 기타 다른 종교와 그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교리야 다를 수 있겠지만 예수라는 사람에 의해 탄생한 것이 기독교이고
초기 기독교는 깨닭음에 주축이 되어, 소위 논어처럼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였으나 그것이 훗날 종단을 이루면서 사회적인 현상과 맞물려
종말론적인 색깔을 띄게 되고 현재의 기독교와 같은 형태를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인간이다. 독신녀 마리아에서 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형재와
자매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도 있는....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다른 개념을
심어 주었던,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깨닭음으로 생각했던 민중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이런 논리는 그를 신으로 추앙하는 기독교의 논리와는 정면으로 부딪히지만 초기
기독교에서는 그를 신으로 추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고서적이 바로 '도마복음'인 것이다.

물론 아직 여러가지 논란이 많은 내용이긴 하지만 도올선생의 독특한 필체로 독자를
설득해 나가고 있는 것은 본 서적에서도 어김없이 펼쳐지고 있다.
도올의 논어이야기에서도 공자를 인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맹점을 적날하게 지적
하고 있듯이 본 서적에서도 예수를 신으로만 보고 내세의 구원만 바라는 기독교의
현 작태에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과연 기독교의 가장 큰 목표는 무엇인가?
믿어서 내 한 몸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인가?
아니면 만민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인가?

도마복음이 발견되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어록복음서가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새로운 가치와 판단이 요구되는 것은 어쩌면 현재 기독교가 처해있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예수가 신이든, 인간이든, 쌍둥이 형재가 있던 없던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인류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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