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0

박상익 - 김교신과 유영모 <성경연구> 제9호(2001년 5, 6월호)에 실린 박상익의 글....

박상익 - 김교신과 유영모 <성경연구> 제9호(2001년 5, 6월호)에 실린 박상익의 글....

김교신과 유영모
<성경연구> 제9호(2001년 5, 6월호)에 실린 박상익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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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들어 동양학자 유영모 선생의 글이 책으로 출간되고, 김교신.함석헌 선생의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함에 따라, 세 분에 관련된 기사가 언론에 종종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일간지 기사란 것이 워낙 졸속(拙速)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관련 기사 중에 석연치 않은 내용이 있어 무교회 진영 일각에서 설왕설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중앙일보』(2001년 3월 15일자)는, 함석헌이 유영모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정작 유영모가 “가장 아낀 제자”는 바로 김교신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기사를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다석(유영모)은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알게 됐다. 그는 김교신의 사람 됨됨이에 매료돼 평소 가장 신뢰할 만한 제자로 생각했다. 다석은 “사람은 죽었다 살아나야 진정한 삶을 깨닫는다” 며 56년 4월 26일 자신의 상징적 죽음의 의식을 갖는데, 이 날짜를 잡은 것도 김교신이 죽은 날(4월 25일)을 의식해 그 다음날로 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교신을 배려하는 마음이 컸다.>

유영모 선생이 1956년 4월 26일 자신의 상징적 죽음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김교신 선생을 가깝게 여겼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수긍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김교신 선생이 유영모 선생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얼른 납득이 되질 않는다.

김교신 선생 자신은 『성서조선(聖書朝鮮)』에서 “나는 스승을 가진 자”라고 분명히 선언한 바 있다. 물론 여기에서 선생이 말한 “스승”이란, 일본에서 선생이 7년 동안이나 신앙을 배웠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그의 사후 15년 이상이나 국가적으로는 천황과 국시를 모독한 국적이요 교계에서는 이단자로 매도되었던 인물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치무라는 정의와 진리의 높은 이상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고, 김교신 선생은 이러한 우치무라의 위대한 애국심에 존경심을 금치 못하여 기꺼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우치무라를 일컬어 발톱 끝에서 머리털 끝까지 애국의 화신이라고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생긴 까닭은 선생이 부지불식중에 자신의 심중을 우치무라에게서 읽은 때문이었다.

선생 자신의 글이나 선생 생전의 정황으로 미루어 우치무라야말로 선생의 스승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유영모 선생이 김교신 선생의 스승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문제의 내용을 보도한 기자가 기사 작성을 위해 유영모 선생의 제자들을 상대로 취재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유영모 선생의 제자 입장에서 보면, 유영모 선생을 훌륭한 제자를 거느린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김교신 같은 이도 그 제자 중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유영모 선생에 대한 높은 존경심 때문에 김교신 선생을 그 제자 중 하나로 언급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김교신 선생이 무교회 기독교 신앙에 철저한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인물들과도 이른바 “인간적”으로 가깝게 교유할 수 있는, 비범한 포용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타종교에 대한 선생의 태도는 놀랍도록 관용적이었다. 선생의 일기에는 “기독교도로서도 불교의 연구를 등한시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을 절감”했다는 내용도 있고, “시기를 기다려 우리 동기 집회에서 불교 강좌를 열어볼까 한다”는 말도 나온다. 심지어 “불원에 반도의 불교가 크게 부흥될 것이 기대된다”는 글도 남기고 있다.

유교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선생의 일기에는 “유교의 건실한 도덕관념으로 기독교의 천박한 전도자를 공격하는 점이 쾌(快)하였다”는 글도 보인다.

이렇듯 타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선생이 어떤 사람이든 도덕적 진실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도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례로 들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공산주의자 한림(韓林)이다. 선생의 1940년 6월 19일자 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저녁에 한림 형 댁에 부름을 받아 쾌담수각. 형은 본래 ML당(마르크스-레닌 당) 사건의 거두(巨頭)요 지금도 물론 유물론자이지마는 나의 근래의 심경을 가장 깊이 통찰하여,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고 역설하여 책망하다시피 독촉함을 받았다. 주의와 사상을 위해 그 목숨을 던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 심지가 비열하지 않음이 가경가애(可敬可愛). 기독 신도가 안 한다면 자기가 후사를 돌보아 줄 터이니 전진하라고. 신앙의 세계와는 별천지로 의기(意氣)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발견하다.>

선생과 한림은 도쿄 유학 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고, 한림은 후일 선생이 흥남에서 병사했을 때 우인대표(友人代表)로 분향을 하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신앙과는 별개로, “진실”과 “의기”로써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상과 종교가 달라도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녔던 선생이, 비록 자신과 신앙 내용은 달랐지만, 당대의 동양학자로 존경을 받던 유영모 선생을 가까이 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더구나 유영모 선생은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생이자, 우치무라 문하에서 함께 신앙을 배운 바 있던 신앙 동지 함석헌 선생이 깍듯이 스승으로 모시던 인물이었다.

조선 선비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던 김교신 선생이, 연장자요 친구의 스승이기도 한 유영모 선생에게 응분의 예를 갖추어 대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를 사제 관계로 단정 짓는다면, 그것은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