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늙은 선생. 새창으로 보기
가넷 ㅣ 2016-01-16 ㅣ 공감(3) ㅣ 댓글 (0)
어렸을 적에는 노자를 신선으로, 노자가 남겼다는 도덕경의 신비한 비밀을 간직한 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매체의 영향 탓이였는지는 모르겠다. 오강남 역본을 고르게 된 건 2009년도인데 막 대학을 졸업하고 난뒤에 취업 준비 내지는 시험준비로 괘나 불안한 당시였는데, 구입하고는 잠시 읽다가 덮어두었다. 영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기억으로는 오강남 역본의 장자를 읽고 나서 세트로 구입해버렸던 것 같은데, 우화라서 재미있기라도 한 장자와는 달라서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 이제야 일독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 예전에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에서야 그나마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81장으로 이루어진 이 도덕경(물론 다양한 노자가 있다는 건 안다)은 하나 다 내게 들어온 건 아니다. 취사 선택하며 마음을 다졌다. 종종 이해못할 구절들이 많았고... 아니, 거의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역자의 해설이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냥 억지로 갖다 붙힌 느낌도 없지 않았고, 그냥 짜증나는 잔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은 건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간다는 것이었다. 알듯 말듯한 이야기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 도서관에서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를 빌려왔다. 바로 읽을까 했지만, 조금 기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뭐 급할 것이 뭐가 있나. 그 외에도 해제주의자의 도덕경인 <사유하는 도덕경>, 왕필의 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노자>, <백서 노자>를 구입해두었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도 구입해두었다. 이건 태학사에서 나온 두 권이 있는데 책무덤에 같혀 버려서 찾을 길이 없다. 나중에 정리할 때나 볼 수 있겠지.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 초심자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구입했다. 강신주 박사의 노자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에 지식인 마을이라는 총서에서 나온 <장자&노자>를 통해 접한 바 있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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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집중과단순함 ㅣ 2015-07-23 ㅣ 공감(1) ㅣ 댓글 (0)
수년 전 알라딘에서 오강남 풀이 도덕경을 구입하고 읽고서는 구절구절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많아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볼 정도로 애장도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본문과 해설을 같이 보다가 나중에서 본문만 보는 게 좋더군요. 그 이유는 오강남 저자의 해설이 기독교과 도덕경을 관련지으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보였기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참고문헌을 참조하고 저자의 생각을 추가한 결과이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견강부회식 해석이더군요. 전체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여러 지은이의 도덕경을 보기도 했는 데, 돌이켜보면 제대로 된 해설은 많지 않았습니다. 동양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도덕경을 서양서적의 해석을 참고하는 문제와 저자들의 한자중국문화의 이해부족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관심있는 분들은 동양문화와 철학 전반에 대한 깊이있는 공부와 한문해석을 통해 제대로된 도덕경의 의미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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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인간의 다면성 새창으로 보기
밍교 ㅣ 2014-07-26 ㅣ 공감(0) ㅣ 댓글 (0)
우리 사회는 냉소의 시대이다.
최악 속에서 힘겹게 차악을 골라야하는 상황들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최선이 없다며 냉소하기 시작했다.
러셀이 한 말처럼 힘이 없는 자는 냉소한다.
그리고 냉소하기 때문에 더 힘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냉소적이고 무력해졌다.
과연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이 냉소하지 않고 참여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원하는 지향을 향해 촉구'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촉구하는 여론을 형성하여 그로써 지배 세력을 압박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 후 작동해야 할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니, 냉소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 나 역시 냉소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지친다.
누구나 뭘 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다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대다수는 ‘아직 죽지 않은 자’로서 계속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주류의 질서를 선택하고,
여전히 다른 삶을 꿈꾸는 소수의 사람들은 주변의 작은 삶들을 긍정하며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전자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이고,
후자는 그 미덕과 더불어 선명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런 맥락 속에서 도덕경을 읽으며, 나는 노자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지향을 보여주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노자는 두 가지 길 중 첫 번째 길을 제시하며, 아직 죽지 않은 자로서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 길이 옳건 그르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도이고, 그렇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것이다.
천지는 불인하고, 세상은 이미 이러하고, 사람들은 선악의 너머에 존재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지만, 나의 냉소에 하나의 근거로 더해질 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은 일종의 칼날같은 것이라면,
나의 세계관을 깨트려주는 칼이야말로 나에게 소중하고 유용한 연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칼이 나와 결이 같아 그저 스며들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 확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논어는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세상을 보는 방식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 속에는 공자가 원하는 세계가 있었다.
도덕경은 노자의 뛰어난 우주관과 정확한 현실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칼끝이 제국의 정당화로 향한다.
그 속에는 노자가 원하는 세계가 없다.
그저 이미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투가 들어있다.
노자를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절대자가 다스리는 세계, 그리고 그 절대자마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치열한 세계에서 그의 글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글이 지금 나에게 어떤 생명력을 지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제국에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덕경은 생생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고,
제국의 너머를 바라는 누군가에게는 권모술수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냉소와 무기력을 넘되 처세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은 나에게, 노자는 힌트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세계의 변화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인간의 본질이란 얼마나 견고한 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찰할 줄 아는 인간의 지성 역시 얼마나 유구한 지에 대해 좀 더 깊은 고찰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문과 함께 참고로 본 이 책은 나와 전혀 다른 해석을 보여주면서,
형이상학적인 왕필식 해석을 하는데, 그 점이 참고는 되었으나, 그렇게 설득력 있진 않았다.
특히 한 장에서 여러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오랜 세월 계속된 편집의 이유인지, 노자 본연의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점에 대한 명확한 생각없이 그 생각들을 연결해버린다.
참고는 되지만, 역시 원문을 읽는게 좋을 것이고,
원문을 읽지 못한다면 번역문 정도를 참고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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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오강남] 새창으로 보기
그랜드슬램 ㅣ 2013-01-07 ㅣ 공감(0) ㅣ 댓글 (0)
상선약수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노자님의 말씀을 압축한다면 상선약수라고 말할 수 있다.
수 백,수 천년된 고전이 현실의 사람에게 보약이 되고 제대로 된 길을 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지금 나도 정확한 답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조금씩,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어제보다 성숙해진 마음과 행동,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책을 읽는 이유이자 고전을 독서하는 이유다.
하루 아침에 깨닫고 나아지지는 않는다.
"가장 휼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나도 물처럼 살고 싶다.
흐르는 물처럼 잔잔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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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초월자 새창으로 보기
kikaider ㅣ 2012-06-26 ㅣ 공감(1) ㅣ 댓글 (0)
사실 이 책은 읽은지 꽤 된 것인데, 그 누가 老子의 道德經을 한 번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도 수시로 꺼내 한 구절씩 읽으며 그 깊은 뜻을 새기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정작 노자의 의도와는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구절들과, 시대를 넘어 그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기를 반복하는 고전 중의 고전, 노자. 물론 나의 한자 실력이 노자만큼 된다면 그와 직접 대화하면서 질문하고 잘못 해석한 부분에 대해 교정을 받겠지만, 불행히도 노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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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발췌 새창으로 보기
탕자 ㅣ 2011-06-15 ㅣ 공감(1) ㅣ 댓글 (0)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 비트겐슈타인 (22쪽)
성인(聖人) ? 도덕경에서 약 30번 정도 사용되며, 어원적으로 귀가 밝은 사람,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27쪽)
중국에서 최고의 인격신으로 모시는 하늘님(上帝) ?37쪽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은 도덕경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훈이다.(41쪽)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도의 최고 상징이다.(52쪽)
부유하든 가난하든 재산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인생의 더 깊은 면에 눈을 돌려 보지 못하고 평생을 그저 돈 생각만 하다가 마쳐 버릴 위험이 있다.(59쪽)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인간이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혼은 정신적인 면을 관장하고, 백은 육체적인 기능을 주관한다고 보았다. 몹시 놀란다는 표현으로 ‘혼비백산’이란 말이 있지만 문자 그대로 혼이 날아가고 백이 흩어지면 사람은 죽어 버린다.(62쪽)
동양에서는 예부터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오복이니 오륜이니 오관이니 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다섯가지로 분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69쪽)
토마스 아퀴나스-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78쪽)
아놀드 토인비-종교라 했을 때 내가 뜻하는 것은 ….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100쪽)
도덕경은 도道를 체득함으로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德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말씀經이다.(107쪽)
종교란 궁극적으로 구원을 목표로 하는데, 구원이란 온전함(wholeness)을 회복하는 일이다.(114쪽)
노자,장자에서는 이 ‘혼돈’을 모든 것의 시원으로 본다. 통전적, 통일적 실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그 속에 머금고 있는 ‘완전한 무엇’이다.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 이를 추구하는 참삶(how to live)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오로지 사회에서 떠받드는 고루한 윤리체계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 매끈하게 꾸미려는 처신(how to behave)의 문제가 주관심사가 되어 버린 사회.(181쪽)
구슬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려 하지 말고 돌처럼 단단한 소리를 내십시오(184쪽)
임금이 자기를 과인寡人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부름(186쪽)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역설”이라고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194쪽)
아힘사 ? 간디를 통해 유명해진 이 말의 본뜻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음’이다. 정치적인 용어로는 ‘비폭력’, ‘무저항’이라고 한다.(202쪽)
자기 주장, 자기 줏대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섞일 수가 없다. 자기를 진정으로 비운 사람만이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204쪽)
신학자 니버의 기도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그리고 이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208쪽)
기독교 신자 가운데 특히 열성적인 교파 신도를 만나도 자기가 세상의 모든 진리는 독점하고 있는 양 무슨 질문이 나와도 척척 박사처럼 잘도 받아넘긴다. 이런 식으로 미리 다듬어지고 학습된 말재주에 능하다고 정말 달변이라 할 수 있을까?(212쪽)
17세기 유럽에서는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내면 세계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내면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 사상가가 나오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파스칼, 몽테뉴, 존 던, 칸트 같은 사람이다.(221쪽)
중국에서는 도가道家와 도교道敎를 구별한다. 도가에서는 생사에 집착함이 없이 자유스러운 참삶(eternal life)을 주된 가르침으로 삼는 반면, 도교에서는 보약,금단,부적,요술,방중술 등 어떠한 수단을 쓰든지 장생불로(長生不老)하고 될 수만 있으면 신선이 되어 죽지 않는 불멸을 이상으로 가르친다는 점이다. (233쪽)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234쪽)
도와 덕은 물론 본질적으로 같지만 도가 본체론적인 면을 가리킨다면, 덕은 도에서 나오는 내재적 창조력이나 그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가 개인이나 개체 안에서 작용할 때 그 힘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여 덕이라 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237쪽)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데도 뭔가 허전하고 모자란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이렇게 내면적인 세계, 도에 접하기 전에는 영원에의 목마름이 충족될 수 없다. “주님,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 안주하기 전에는 안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242쪽)
덕德-도에 입각하고 도를 터득했을 때 얻어지는 신선하고 활기찬 생명력, 도의 활성화에서 나오는 약동적인 힘을 뜻하는 것.(250쪽)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知者不言,言者不知)-도덕경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257쪽)
도데체 도를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구체적 첫걸음이 바로 근검 절약.(273쪽)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생선을 구울 때는 우선 칼로 배를 따서 내장을 뺀다든가 뼈를 추린다든가 하지 않고 통으로 굽는다.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들쑤시지 않는다.익을 때까지 가만히 놓아 두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완전히 내팽개쳐 두는 것은 아니다.(275쪽)
고대 사람의 생각으로는 세상에 사람을 못살게 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움직이는 귀신이요, 다른 하나는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는 위정자였다.(277쪽)
큰 나라는 강의 하류…….유가에서는 하류를 천히 여기고 상류를 좋아하는 데 반해 도가에서는 하류를 상류보다 좋게 여긴다.(281쪽)
책을 한 권 쓸 때 ‘360쪽짜리 책 한 권’이라 생각하는 대신 ‘하루 한 쪽’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일이 더 쉬워질 수 있다.(289쪽)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이루고 말리라는 강한 집념과 집착 때문에 실패했을 경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과 실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295쪽)
도덕경에서는 루소를 비롯한 자연주의 정치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국민을 교육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이 본래 가지고 있던 순박한 본성을 후패케 할 뿐이라고 한다.(299쪽)
불초不肖는 ‘같지 않다’는 뜻인데, 확대된 뜻으로 불초소생이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조의 덕망이나 유업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흡함, 똑똑지 못함, 쓸모없음 등을 가리킨다.(309쪽)
간디에게 많은 영향을 준 톨스토이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태5:30)고 한 것을 가장 중시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사실이다.(315쪽)
조셉 캠벨에 의하면 위대한 정신적 영웅은 이렇게 일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refusal to return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324쪽)
사실 진리는 단순하고 담백한 것이다.(324쪽)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으면 손가락에 우리의 전적인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 아니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한다. 상징 자체에 붙들리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일깨움을 따라 상징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본다는 것이다.(324쪽)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知不知上)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不知知病) (327쪽)
공자님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하라. 그것이 곧 아는 것이다.(논어2:17)라고 했다.(327쪽)
도덕경에서 말하는 용기란… 의연함과 침착함을 유지함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상대방 스스로가 더 이상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336쪽)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337쪽) 사필귀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죽음보다 더 큰 가치, 자기가 믿기에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경우이다.(339쪽)
도가적 입장에서 보면 살아가는 데 어떤 목표를 정하고 삶을 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행복은 나비와 같다…..행복은 고양이 꼬리에 달린 방울과도 같다.(345쪽)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353쪽)
깊은 원한은 화해하더라도 여한이 남는 법입니다.(358쪽)
기도는 하늘이 남보다 나를 더 잘봐주기를 바라서 드리는 주문이나 편법이 아니다. 어떤 면책권이나 치외 법권적 특권을 얻어 내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기도는, 넒의 의미의 종교는 내가 하늘의 뜻에 내 뜻을 맞추고 하늘의 길에 내 발걸음을 맞추기 위한 자기 낮춤, 자기 비움의 작업이다.(361쪽)
진리의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368쪽)
진리의 말은 변론이 아니라고 한다. 양쪽을 다 같이 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분명히 딱 쪼개고 끊는 논리적인 변론일 수가 없다. 변론을 잘 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자기가 가진 제한된 생각이나 고정 관념을 평소 달달 외우고 있던 틀에 맞추어 독단적으로 그리고 일사천리로 주장하는 일이다…. 어느 종교에서 열성파 신자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서 구절만을 달달 외워서 타교파 사람을 공박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한 가지 생각, 곧 자기가 가진 생각만 옳고 다른 생각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선은 무지의 특권인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말할 수 있다. (369쪽)
사랑이나 진리 같은 정신적인 것은 나누어 주면 줄어드는 산술 법칙이 아니라, 나누어 주면 줄수록 오히려 더 많아지는 역설의 법칙이 적용된다.(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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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유내강 새창으로 보기
모래바다 ㅣ 2011-06-14 ㅣ 공감(3) ㅣ 댓글 (0)
이 글을 쓰기 전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대부분은 오강남의 도덕경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더러는 노자의 사상을 왜곡해서 한심하며,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평가도 있었다. 나는 전자에 속한다. 동양 철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도 아니고 이 책에서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이 책이 도덕경을 180도 왜곡 했다 한들 나는 그것을 별로 중요한 관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도덕경을 하나의 자기 계발서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사상에 관련된 책을 이번에 처음 읽어 보았다. 나는 철학에 철자도 모르는 사람이며, 노자에 대해서도 역시 전혀 알지 못했다. 오강남의 도덕경 81장을 다 읽은 지금 역시 도와 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겠다. 분명히 다른 여러 가지 번역본에 비해 오강남의 도덕경은 일반인이 읽기 쉽게 집필 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지 쉽게 마음속으로 다가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어떠한 리뷰' 에서 말하듯이 대통령이나 왕이 아닌 그냥 '평범한 일반인' 에게 전혀 쓸모 없는 것이냐?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려한다.
나는 공대생이다. 지금 현재 학생이라는 나의 신분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노력'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력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본 바로는 '노력'은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근심에 쌓여 있으면 어떠한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도덕경'을 매우 높게 평가 하고 싶다.
나는 성격이 근심이 많고 대인관계를 썩 잘 해내지 못한다. 겉으로 봐서는 사람들과 매우 원만한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항상 불안하고 불편하고 욕심이 많다. 그러던 중 등교 길에 '도덕경' 을 읽기 시작했다. 신기 하게도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면 마음이 매우 편안해지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음' '무소유'에서 비롯되는 마음은 결코 아니었다. '도뎍경' 에서도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마라", "완전한 비움"처럼 무소유와 비슷한 말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다음과 같은 것을 갖게 되어서 인지 싶다. 바로, 항상 상대적인 평가로 고통 받고 남들보다 우위서지 못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나 자신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잣대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것을 어떠한 구절에서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나는 언제나 이러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외유내강' 이라는 중국인들의 가치관이 도덕경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81 개의 전장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도덕경은 왕, 재상을 위해 쓰여진 것 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에게는 전혀 필요 없거나 혹은 안 읽는 것보다 못한 것 같은 그러한 구절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걸러가며 읽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시대가 바뀐 만큼 적용할 수 있는 문장도 바뀌었으니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내 짧은 견해를 늘어놓았고,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분명히 도덕경 이라는 밥상에는 여러 반찬 들이 많이 차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얼마나 자신에 게 필요한 영양가 있는 반찬을 골라서 먹느냐 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반찬은 안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도덕경에는 매우 영양가 있고 주옥같은 반찬들이 곳곳에 많이 차려져 있다는 것이다.
'물'과 같이 되라. 물은 누구와도 겨루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하지만 물은 만물을 존재하게 한다.
총 : 2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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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워 나를 완성시키는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doorumgil ㅣ 2010-02-06 ㅣ 공감(2) ㅣ 댓글 (0)
도가사상의 원조인 노자의 저술로 알려진 도덕경, 그냥 '무위자연'으로만 배웠던 노자를 알기위해 도덕경을 일독하였다. 많은 도덕경 번역서가 있지만 읽기 쉽게 풀어쓰고 분량도 적당한 현암사판 도덕경을 선택하였다.
도덕경이 시종 강조하는 것은 무위와 비움이다. 없음으로 있음을 만들고, 하지 않음으로써 함을 만드는 역설의 철학이다. 이는 다시말해서 있음과 함의 주류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의 문제점을 노자는 부국강병을 달성하기위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예법을 강조하는 인위적인 작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애초부터 주류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탄생한 소수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핵심적 역할이자 한계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진보정당이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현실문제에 대한 환기의 역할을 하지만 수권정당으로는 어려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이 든다
5천자 정도의 간결한 격언집으로 이루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해석하기에 따라 의견이 분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가령 36장의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합니다.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폐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빼앗으려면 일단 줘야합니다.' 라는 부분은 법가에서 정적을 치는데 필요한 정략적 음모로 읽힌다. 이구절은 원래 만사 흥망성쇠나 생주이멸을 뜻하는 것이라 역자는 말하는데 그 본질적인 면보다 세상사람들에게 권모술수의 처세술로 더 많이 알려진 것이다. 도덕경을 우리가 그동안 익숙한 자구해석이나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볼때는 인생의 처세술이나 뜬구름 잡는 명상록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 같다. 내용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의 <도>라는 이미지로 크게 받아들여 깨우쳐야 하는데 쉽지않은 일이다.
도덕경이 이야기하는 큰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남들과 비교하며 욕심과 소유욕의 굴레에서 스트레스를 받던 나를 돌아보고 무언가 계속 서두르며 눈에 보이는 양적인 쌓임을 성취라 자족하던 조급한 발걸음을 한박자 늦춰야 겠다는 고민을 잠시나마 하게된건 도덕경을 읽은 후 큰 소득이었다.
더불어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가 번역하여 그런지 성경구절과 비교하여 풀이한 구절이 여러곳에 나열되어 있는점이 특징이다. 산은 하나인데 어느 방향에서 오르느냐에 따라 내용과 과정이 달라진다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만드는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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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스파피필름 ㅣ 2009-05-30 ㅣ 공감(1) ㅣ 댓글 (0)
도를 도라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는 그 유명한 도덕경의 구절을 난생 처음 읽어봤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는 순간 사랑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이라고 농담을 해본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마음이 어지럽다. 단순하고 명료한 무언가를 생각하고 집중하고 싶은데 딱히 그럴만한 대상이 없다. 한마디로 마음 둘 곳이 없구나. 하여 잡은 이 책.. 총 81장으로 되어있고 한 장당 서너 페이지로 하루에 한장씩 읽어도 마치 마음이 정화되는 것처럼 차분해진다. 무위, 상선약수와 같이익히 알고 있는 개념도 글을 통해 다시 확인하니 새롭다. 살아가면서 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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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노자에게 듣다 새창으로 보기
minerva ㅣ 2009-05-17 ㅣ 공감(1) ㅣ 댓글 (0)
노자에게 듣다, 듣기가 어려운 부분은 살면서 배워 나가기로 하고, 일단 듣는다. 노자는 시적인 은유로 직설적이지 않고 에둘러 가르침을 준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함을 발견하고, 없음의 쓰임에서 있음의 이로움을 역설하며, 하고서도 드러내려 내세우지 않는 깨달은 자의 자세를 말한다.
1장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
항상 욕망이 없다면 그 신비스러움을 볼 수 있으며
항상 욕망이 있다면 그 분명함을 볼 수 있다.
이 둘은 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이름만 다를 뿐,
그 같음을 어둠이라 부른다.
어둠 속의 어둠이어라 모든 신비의 문이여!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덕경 1장은 많은 흥미로움을 주는데, 우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은 무엇인가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말로 표현되면 이미 도를 떠나서 다른 무엇이 된다는 뜻 같기도 하다. 나는 ‘도’를 도 말고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본다. 내가 이루려는 목표, 사랑 등으로. 문맥이 통하기에 더 생각해 본다. 우리는 쉽게 사랑을 말하고, 쉽게 자신의 꿈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말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게 노자의 입장이다.
도를 꿈을 사랑을 한 가지로 보는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룰 것인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셋이 함께 가야 행복할 텐데, 욕심을 낸다. ‘부를 수 있는 도는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임의로 이름을 지어 부르는 모든 대상들 또한 유한자로서 영원하지 못하다. 개체를 반복해서 이어가더라도 더 이상 그 이름은 아닌 것.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정하는 것으로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기 위해 도를 행하되 그 자체로서 충만하고, 이름을 짓되 그 자체로서 충만하면 될까? 이름을 짓기 시작한 때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욕망이 없고있음으로 하여 신비로움과 분명함을 볼 수 있다. 흔히 빛을 경외하며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빛을 빛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둠이다. 그런 논리로 욕망이 없기 때문에 신비로움을 볼 수 있고, 반대로 욕망이 있기 때문에 분명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의 근원은 어둠, 어둠 속의 어둠, 그것은 모든 신비의 문이라 일컫는 것에서 밝은 면과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어둠을 함께 보는 눈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가 인생무상으로 흐르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길을 걷는 성인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은 노자의 사상이 그만큼 원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로서 오히려 우리들에게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이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루려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도로 해야 한다, 그러니 그런 것을 꿈꾸지 말라, 아니 말하거나 부르기 전에 이런 전제 정도는 알고 출발하라. 다소 어감이 딱딱해졌더라도 이해하시길. 아마도 노자는 좀 더 부드럽고 자상한 면모를 지녔으리라.
오히려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무위자연을 역설하고 있는 노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시대를 앞서 산 철학자일 것이다. 전편에 흐르는 마음결로 사상은 철학자, 절대자, 군주,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까지도 들여다보는 혜안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위자연은 아마도 모든 것을 끝까지 열심히 해낸 자의 역설 같이 느껴진다. 다 하고 나서도 그 다함을 드러내지 않는 태연함, 속속들이 체험하고 나서 느끼는 여유로움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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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듣기. 새창으로 보기
누구개 ㅣ 2009-01-05 ㅣ 공감(1) ㅣ 댓글 (0)
아담한 사이즈와 읽기 쉬울 것 같은 편집(대중적으로 씌여졌음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때문에 서점에 가면 늘 현암사의 시리즈들을 훑어 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중에 읽은 것은 두세권에 불과하지만.
주말에 술먹고 하루 신세를 진 친구 방 한 구석에 그 현암사의 도덕경이 꽂혀 있었다. 빨간 책들 사이에 외롭게 있는 것같아 기왕 진 신세라는 생각에 '안 읽으면' 달라고 했다. 선듯 내주는 친구.
고마운 친구^^.
긴 휴가를 맞아 다시금 읽어 봤다.
대학때, 그리고 사춘기 시절 도가와 관련한 책들을 간혹 읽곤 했었다.(이 책도 서점 한구석에 앉아서 다 읽었었다.) 초탈한 도인들을 사뭇 경외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 다시 읽어 본 도덕경, 정확히는 주석자가 다시 '읽어준' 도덕경은은 예전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단지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는 '최소한 도는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닌 것'은 일러준다'는 식의 말장난에 가까운 이해를 위한 책읽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첫번째로 주석자가 그 뜻을 우리 삶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것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말을 위한 말,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어야 한다는 도덕경의 가르침을 도덕경의 해설에서 부터 실천하고자 노력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만큼 그 참 뜻을 밝히기 위해 이전의 다양한 해석들을 읽고 읽었을 것이리라. 또 그 문구를 언어적 해석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입하여 성찰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나는 도덕경은 물론 해설까지도 짐작할 뿐이지만 말이다.)
두번째는 10여년이라는 세월이 읽기의 깊이를 다르게 해주었다는 생각이다. 그간 얼마나 지혜로워지고 얼마나 지식이 쌓였겠는가. 하지만 그간 부딧친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난 (알지 못했던) 나 자신들. 그런 경험과 혼란들이 다시 읽는 도덕경을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믿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언어와 대상과의 인식론적이고 본질적인 간극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대상을 명명하기 위해,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 사고의 관성이거나) 만들어진 이분법적이고 정태적인 언어적 시스템과 그 기반인 인간의 일차원적인 욕망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함이 아닐까?
옛 선인들의 깊은 통찰과 본질에 대한 탐구는 시대를 초월한다. 아마도 그것은 죽어서 쌓여있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직관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인간 본질/자연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일테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 도덕경. 두고 두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한 흥분에 '장자를 읽다'라는 책까지 사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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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 ㅣ 2007-06-05 ㅣ 공감(3) ㅣ 댓글 (0)
학교 다닐 때 쓴 것.
(당연히 잘 쓴 글은 못되고) 재밌다.
난 참 재밌는 아이야... ^__^
비교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잠언이 인생에 대한 각론이라면 전도서는 총론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비교하자면 공자의 논어는 잠언에 해당하고 노자의 도덕경은 전도서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사상이 거의 동시대 즉 춘추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책’을 제시한 차원의, 같은 외부적 동기에서 나온 사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본서를 읽으면서 순수하게 묵상하게 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머리가 상당히 복잡해져 무언가를 논하기엔 정리가 힘든 상태였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또한 본서가 어떤 비범한 명상이나 체험, 인물따위에서 비롯한 산물이 아닌, 유교의 사상이 교조화된 시대에서 그에 대한 반발의 사회적 ‘의도’에서 저술된, 그런 선도적 목적과 개혁의 노력이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text를 그 자체로 깊이 묵상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많은 의문점과 결론지어지지 않는 복잡스러운 생각들을 대충 정리해보고 싶다.
우선 ‘도’의 본질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결부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음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도가사상은 언뜻 보면 유사성이 있는 듯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도가사상은 올바른 정치와 삶의 자세를 위한 절대불변의 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절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불가지론’으로 정의될 수 있는 노자의 도에 관한 기본 생각은 우리가 진정한 진리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수 가 없다. 그것은 ‘無’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이 있다. 후자가 진리자체를 거부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들도 진리가 혹시 존재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거부의 의사가 담긴 결론이고 도가 사상은 그것을 깨달아 체득할 것을 가르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진정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혼동하는 이야기에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흡사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내가 차원(dimension)을 적절하게 연결(match)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한가지로는 ‘절대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관념주의 문화의 다른 시대/장소의 사상과 접목시켜볼 때이다. 각 문화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AD 4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시작된 관념주의 단계의 서구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봉사의 형태가 지역의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여기에서 관념주의란 어떠한 절대적 가치의 실재를 믿는 것을 말한다. 그 가치가 절대적 신에게서 부여되었으며 그러므로 신적권위를 갖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자체로 악한 것’과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라는 수식어와 모순적인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아즈텍 부족은 신에게 정결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지극히 반인륜적인- 바쳤다.[1] 신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가혹한 대가를 치뤄 왔던 것이다. 노자는 서구인들이 믿었던 이 ‘절대적 가치’를 ‘도’라 하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절대적 가치’라 이름 지어지지만 지역문화에 따라 다양성을 지녔던 그 모순은 그 ‘절대적 가치’가 진정 ‘절대적 가치’가 아님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인가? 둘을 접목시켜보자면 노자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을 ‘도’라 명명한 것이라고 이해되어지는데 -그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도라 하지 않는다 – 이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진정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적 신이 아닌 그러한 존재라고 한 역사적 시기와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상정되었던 ‘道보다 하위인’ – 도라고 불릴 수 없는 – 하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둘을 비교하기에 도가사상은 종교를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철학이라 할 수 있고 삶에 관한 지혜를 중심으로 하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는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내가 전혀 비교 불가능한 차원의 양자를 무식하게 연계지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절대불변의 법칙’과 ‘창조주의 창조질서’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하여.
그가 말하는 ‘도’는 신이 아닌 만물의 움직임의 근거이다. 말없이 만물을 생성화육하게 하는 저 자연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는 그것을 ‘절대불변의 법칙’이라고 일컫는다. 계절의 변칙 없는 주기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우주의 생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절대불변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이해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절대적 진리란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우주의 ‘법칙’, 즉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가 근거 없이믿는 미신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 감각시대를 사는 ‘감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추론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한정된 범주에서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과학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과학이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훌륭히 설명해 내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아무리 객관적 진리라고 외쳤던 과학 조차도 실험자의 의도와 해석에 좌우된다는 그 실망은 가히 파격적이었을 것이라생각된다. 과학에의 실망은 각자가 인지하는 세계가 각자의 진리라고 말하는 진리관으로 이어진다. 노자가 말하는 ‘영원불변의 법칙’ 그리고 엄연한 실제적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이 시대의 사상은 어떤 결론을 내리나. 책을 다 읽진 않았지만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에서 이해한 바를 언급하자면 그는 그것은 모든 생물학적 현상을 완벽하게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기체인 생물은 어떠한 목적인(이성이 기능하는 출발점) – ‘산다’, ‘잘산다’, ‘더 잘산다’로 간략화되는 - 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물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몸 속에서 발견되는 목적적 인과에서 유추하여 우주에도 그러한 힘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대충 이러한 논리로 결국에는 창조론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무신론적인 우주관을 제시하는 것 같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인간의 육체와 실재하는 자아를 완전히 벗어난 형이상학적 초탈을 의미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 경지는 고요히 흐르고 낮은 곳에 처하길 즐기는 물과 같이 감정적(인격적)으로 겸손하며 사심 없는 담담한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힌두교가 현상적/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연습하는 철학이라면 본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애써 바꾸려 작위하지 않는- 그렇게 행동해야 할 근거를 인식할 것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이해했다.
<실은 노자는, 성인은 천지의 무위자연의 법칙을 몸소 인간에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성인이 하는 일은 하늘의 도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장 解義 중>
비록 역자의 해의이긴 하지만 이 구절에서 나는 노자의 사상이 초기 기독교에게 영향을 미친 스토아학파와유사하다고 생각했다.(좀 단편적인 비교이긴 하지만) 후자역시 인간이 inexorable law에 도달하려 train할 수있고 철학의 목적은 자연의 법을 understand, obey and adjust 하기 위함이며 현명한 사람은 우주의 법(질서)에 mind가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제9장이 제시하는 미덕은 ‘중용’인 것 같다. 조금 부족하게, 겸허하게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 태도는 어디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물을 조금 부족하게 받아놓고 쓰는 사람은 현명하며 아낄 줄 알고 최선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물이 넘치도록 틀어놓은 채로 사용한다면 그는 헤프고 마음이 섬세하지 않으며 차분한 성품을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밥을 먹을 때에도 조금 부족하게 먹는 것이 육체의 건강에는 물론 정신 건강에도 좋다. 욕망에의 절제 없는 개방, 즉 방종은 인간의 마음을 퇴폐적으로 만든다. 칼을 잘 다루어 보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갈 때 무조건 쓰임의 효율성만을 생각하여 더욱 날카롭게 갈 것이다. 그럴수록 예리하여 잘 자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을 많이 다루어본 사람은 적당히 날카롭게 갈 것이다. 부러지거나 꺾어지기 쉬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면만 바라보고 극단으로 치우쳐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무엇이든 여러가지 면을 신중히 고려하여 적정 線을 파악하고 이루어가야 함이 마땅하다.
<건전한 정신이란 몸과 마음을 도에 집중하여 기가 흩어지지 않고 유화함을 체득하여 순수하고 꺠끗함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마음에 더럽혀짐이 없이 도에 집중된다면 심오한 경지에 이를 것이며, 그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반성하여 흠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10장>
‘영아와 같은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어린아이는 세상을 많이 경험하지 않았고 머리가 자라지 않았으므로 순수하게 세상을 인식한다.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술수로 처세할 줄 모른다.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고 거짓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더러움으로 물들지 않은 그 마음은 흠이 없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참으로 순전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다.
20장은 철학적 가르침과 더불어 탄식과 푸념 섞인 듯한 표현이 감상을 자극한다.
<세상의 여러 사람들은 기뻐 웃으면서 소나 양의 맛있는 고기를 즐기는 듯,…나만은 홀로 휑하게 빈 가슴으로 평안하고 고요하게 있네..나른하고 고달파서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네…>
33장은 그 어느 장보다도 받아들이기 평이하고 귀감이 되는 교훈이다. 앞의 장들이 추상적이고 대의적인 반면 본 장은 비교적 소시민적이고 개인적인 교훈도 준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지혜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욱 명철함이 있는 자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더욱 강한 사람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하고, 근면 역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자이다…>
전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가르치는 이익과 손실에 대하여 나도 또한 가르친다. ‘남들은 강한 것, 있는 것이 이익이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한 것, 없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42장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44장
날뛰어 움직이면 추운 것을 이기고, 고요히 있으면 뜨거운 것을 이긴다. –45장
고요함을 찬양한 내용이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현상으로 아주 재치있게 비유하였다.
나는 착한 사람을 선으로 대한다. 나는 착하지 않은 사람도 또한 선의로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선인이 된다. 나는 믿음성이 있는 자를 믿는다. 그러나 나는 믿음성이 없는 자도 또한 믿는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성인이 된다. –49장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함으로서 그들을 진정 그렇게 변화시키는 사람은 정말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힘을 지닌 사람이다.
사욕이 생기는 구멍을 막고 사욕이 들어오는 문을 닫으면 몸이 다할 때까지 노고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구멍을 열어 놓은 채 거기에서 생기는 일들을 잘 처리하려고 하면 몸이 다하도록 구제되지 못할 것이다. –52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분(忿)을 풀며, 그 광채를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심원×신비한 동일이라고 한다. –56장
사욕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문을 닫고 그리하여 날카로운 것을 둔하게 만들어 질박함을 지키고, 분노하는격정을 풀어 누그러지게 하여 다툼의 근원을 없애 버린다. 특히 남의 눈에 드러나 보이는 광명을 흐리게 하여 티끌과 함께 있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해의>
언어적 표현 자체가 문학적 감흥을 주는 장이다. 메시지 또한 그렇다. 외우고 싶은 구절이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허하게 저자세를 취하면 작은 나라가 거기에 붙게 되고 –61장
크면 클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저자세를 취하라는 가르침.
훌륭한 전사는 무용을 부리지 않고, 싸움을 잘 하는 자는 성내지 않으며, 적에게 가장 잘 승리하는 자는 적과 대전하지 않고,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 앞에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것을 남의 힘을 쓰는 길이라고 한다. –68장
백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잘
싸우는 것이다. –孫子
한 번 생각하고 반응하는 나에게 두 번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한 발짝 물러서는
여유로움…그 진부한듯한 교훈을 새롭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알면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상덕이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71장
사람이 살았을 떄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으면 곧고 강하다. 초목도 살았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죽으면 말라서 야물다. 그런 까닭에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속성이다. 그런 까닭에 군사가 교만하여지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여진다. 강대한 것은 아래에 있고, 유약한 것은 위에 있다. –76장
가장 경탄을 자아내는 장이다. 그 비유의 절묘함과 유약함의 힘.
산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생명의 태어남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작위’로 삶을 메우려 한다. 욕심, 쾌락, 야망…을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삶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물질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그리고 자기PR시대로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드러내기를 추구하는 현대인들과 그런 경향을 자연스레 많이 답습하는 나. 그런 나에게 이 어찌보면 진부하면서도 실천하기엔 낯선 그런 교훈들이 ‘도덕경’이라는 권위로 인한 새로운 뉘앙스로 내게 깊이 생각해보고 좀 더 여유로움을 지니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생각해본 것을 덧붙이자면 노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작은 생선을 삶는 것처럼 백성들을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법령을 자주 변경하거나 많이 만들어내서 국민의 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제한하고, 명령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60장>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멍청’하고만 있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은 그것이 쉬울 때에 처리하고, 큰일은 그것이 미세할 때에 해결하라.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데서부터 일어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미세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63장
대충의 그림은 그려지지만 과연 이 사상은 현대의 정치에 어떤 효용성과 의미를 지니는가. 도무지 적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토록 범죄가 갈수록 잔인하고 극악해질뿐더러 수단방법도 과학기술의 무궁한 발전에 부응해 고차원적인 시대에, 또한 원조교제 등 윤리체계가 무너지는 시기에 무위 자연의 사상은 괴리감만 줄 뿐이다. 아마도 도덕경의 저자들이 현 세대를 보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 같다. 백성들이 너무 지혜로와서…
[1] 감각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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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새창으로 보기
평범 속의 비범 ㅣ 2006-05-13 ㅣ 공감(10) ㅣ 댓글 (0)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어서 좋군요. 나름의 뜻을 새겨서 보여주는 것도 좋구요. 다만 원문의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것은 약간 어렵더라도 새겨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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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가 OTL 새창으로 보기
風月樓主 ㅣ 2005-02-24 ㅣ 공감(28) ㅣ 댓글 (1)
이런류의 리뷰를 쓰시는 분들께서 흔히 혼동하시는 것이 있다.
이런 책의 좋은 주옥같은 구절들은 원전에서 있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번역이라도 원전을 훼손하거나 자신만의 주관이 너무 들어가는 것은 해석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자신만의 깨달음 등을 방해하곤 한다는 것이다. 요컨데, 이런 책에서 중요한 내용은 얼마나 보기 좋은지가 아니라 원본에 충실한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문열씨의 삼국지에 낮은 평가를 주시는 분들이 많으시다.)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초이스! 와 현암사라는 이름에 넘어가 판본 확인도 안한 나도 잘못이지만 이 책은 더욱 대단하시다 _-b 오탈자는 애교요, 나름대로의 의역에 다른 판본을 보지 못했다면 이것이 정론인양, 옳은 해석인양 넘어가 볼뻔 했다. 마음을 비우고 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도덕경을 보면서 자꾸 슬금슬금 화가 치밀어 책을 엎은적은 이번이 처음인거 같다. 장자도 오강남씨의 저서를 비싼 돈주고 사서 봤는데 그녀석까지 제대로 된 판본인지가 의심스러울정도다.
쉽게 들고 다닐수 있는 이동성. 잘된듯해 보이는 번역내용. 이런것이 전부는 아니다. 처음 본 판본이 해석은 철저히 배재된 채로 원문과 번역만을 실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거부감이 더욱 할런지 모르겠다. 화려하지만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은 듯한 그런느낌. 그런 찝찝함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한다. 다른 판본이나 구해서 다시 구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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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노자읽기 ㅣ 2004-10-29 ㅣ 공감(2) ㅣ 댓글 (0)
가장 쉽고, 편하고 무난한 해석본을 보고 싶다면, 단연 오강남의 도덕경이다..책이 작고, 편집도 깔끔하고, 단단한 겉 표지에, 내용도 쉽게 잘 만들어진 책이다..이것이 기독교 종교 철학자의 솜씨라는 점 또한 흥미롭다. 그런데 쉬운 만큼 오역은 게 중 심한 것 같다. 특히 13장의 경우는 매우 독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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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새창으로 보기
md1221 ㅣ 2003-11-23 ㅣ 공감(2) ㅣ 댓글 (0)
중.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가볍게(?) 훝고 지나갔던 노자의 사상에 대해서 접할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무위자연...뭐 이정도 기억이 난다. 사상 자체가 뭐랄까 좀 신비하고 다른 사상과는 독특함이 느껴지는거 같아서 기회가 되면 한번 책을 보고자 했는데 원전과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서 괜찮았던거 같다.
도덕경은 80장이 약간 넘는 분량이고 1장은 대략 1페이지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몇몇 장은 약간 고루하고 설명을 읽어도 잘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내용이 훌륭하다.
원전만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잘모르고 수박 겉핡기 식으로 넘어 갈 수도 있지만 다음장에 그장의 설명이 같이 나오니 내가 모르고 넘어간 부분에 대해 많이 알수 있다.(물론 저자의 주관이 약간씩은 들어간듯 하다)
소위 요즘 범람하는 성공, 자기계발 쪽의 도서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이 많아 신선하기도 하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편안함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소장하고 있다가 속상하거나 스트레스 받을때 읽어도 도움이 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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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kje0525 ㅣ 2003-11-08 ㅣ 공감(1) ㅣ 댓글 (0)
역자는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의 비교 종교학 교수로 있는 오강남이다. 그는 서두의 '독자들에게'라는 글에서 '이렇게 신나는 책을 읽어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책을 다읽고 난 뒤의 내생각도 그와 같다.
'장자'는 '도덕경'과 함께 노장 사상의 성전이랄 수 있겠는데, '도'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도'를 내비취고 있는 책이다. 사실 오강남 풀이의 이책은 장자 전문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에게 장자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내편 7편과 그외에 외편과 잡편에서 자주 거론되는 몇몇 내용들을 담고 있다.
나는 요즘 '낭만주의는 해방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내고 그기서 나의 사상적 단초를 마련할려고 하고 있다. 직감을 통해 경험과 논리의 협소함을 초월하고 우주의 총체성에댜한 통찰을 얻는 것은 분별지에 속박당한 주객해체의 억압적 담론을 해방할 수 있는 힘이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힘은 주체 중심의 왜곡된 낭만주의를 넘어 나와 나 이외의 모두를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인식할 수 있는 화엄의 경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장자'에서 특히 2장의 '제물론'은 물(인식의 대상인 객체)를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 장은 모든 분별지의 극복을 통해 있음의 없음과 없음의 있음이라는 상식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획기적인 변혁과 그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도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도'는 말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 그렇다. 도는 해방이다. 도를 해방이라고 규정한 것 자체는 내가 도를 구속한 것이 되지만 도는 분명 해방이다. 해방 그것이 도인 것이다.
'장자'는 심오한 책이다. 개념지어질 수 있는 피동형의 책이 아니라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것을 말하는 역설 그 자체의 책이다. 이 역설의 경지는 진리일까? 도일까? 나늠 말하지 못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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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mem1980 ㅣ 2002-12-08 ㅣ 공감(0) ㅣ 댓글 (0)
얼마전 그것도 2년이나 됫군 도올 김용옥 선생이 티비에 등장해 노자에 대해서 강연을 했엇고 한때 노자 센세이션이라고도 할수있을만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그때 노자관련 서적이 인문 베스트에 많이 들어가 있엇다. 그 이후에 다시 도올선생이 나오고 다시 동양 고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노자가 과연 어떠하길래 그렇게 떠들어 대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동양 고전에 대해서 무지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좀 궁색한 면이 있엇기에 이책을 구입햇다. 책을 읽는데 무슨 도덕책을 읽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도 비슷하다. 하지만 먼가 안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잇는것 같다. 근데 아직은잘 모르겟다. 더 열심히 읽어봐야겟다. 즉 한번바서 잘 모르겟다 이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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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는 空이 아니다 새창으로 보기
jd5024 ㅣ 2003-04-18 ㅣ 공감(0) ㅣ 댓글 (0)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한다. 노자의 도는 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채워서 없애는 것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느낌이 좋다.. 수많은 번역서가 있지만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책의 향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매번 언제 읽어도 새롭다..1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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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한계를 넘어 진리를 이해하는 사유체계로 새창으로 보기
곽지희 ㅣ 2002-08-14 ㅣ 공감(0) ㅣ 댓글 (0)
도덕경은 당시 주류의 사상에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환경오염, 인위적이고 상업적인 자본의 횡포, 빈부의 차 현재의 많은 문제점들의 원인들도 지적해줄 수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환기를 할 뿐이지 현실적으로 전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덕경에서 나타나 있듯이 도, 무위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애쓰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나는 도덕경의 사상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 보다는 새로운 사유체계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도와 덕에 관한 경전은 말중심의 사유체계에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도에 대한 정의는 그 서술하는 즉시 한계에 봉착하게 되며, 따라서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진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유체계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유체계로 도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도는 오히려 언어 중심의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지도 또한 개념적 또는 추상적인 의미 규정과는 달리 대상을 구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재현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정의할 때에 우리는 논리적 사유방식, 즉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로 이미지의 하나의 측면만을 말하겠다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규정이나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붙잡아야 하며, 이미지에 대해 정의 내리는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로고스 중심적인 사유체계로 정의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은 도를 정의할 때 가지는 어려움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특히 이미지는 명백하게 현존하는 인식이나 사물의 재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부재하는 것의 표현도 아니다 . 몽젱은 “이미지는 절대 존재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또한 비존재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지는 현존하지 않는 절대 존재의 독특한 표현 양태이다. 이미지는, 부재와 현존을 맺어준다. 게다가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 부재를 현존케 하고, 그 부재의 현존을 하나의 기호관계로 뚜렷하게 해준다.”고 했다.
인간이 현재 세상에서 그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결핍을 느끼는 존재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서 도와 덕에 대해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단지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에 대한 이미지의 공유일 것이다. 도에 대해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점. 이것은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접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는 그것이 관련되는 모든 영역(실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지만) 즉 논리, 미학, 윤리, 교육, 정치, 형이상학, 예술, 철학에서 하나의 근본토대를 차지하고 있다 .
이미지와 상상력이 서구의 합리주의내에서 경시 받아오다가 이제서야 인류의 공통분모로 그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 . 도의 성격, 즉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말로 표현할 때는 어렵지만 상상력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신비함은 언어 중심주의가 아니라 이미지 중심주의라는 대안적인 새로운 사유체계와 닮은 점이 많으며 이렇게 이미지중심주의로 전환하며 이해할 때, 그 본래적인 진의가 전달될 수 있어 보인다. 또한 그 동안 주류에서 외면되어 왔던 인류의 공통분모인 이미지와 상상력의 의미를 도라는 궁극의 진리로 극대화 시켜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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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 새창으로 보기
shinny2002 ㅣ 2003-08-07 ㅣ 공감(1) ㅣ 댓글 (0)
오강남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며 그의 편견없는 종교, 철학의 식견에 감탄을 하곤 했다. 몇 해 전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몇회 보면서 좀 의아하기도 하고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노자에 대한 서적을 몇 권 읽었던 적이 있다. 도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를 계기로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니까. 그의 도덕경 해설로 뭇사람들이 노자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었다는 것 만큼은 고마운 일이다.
고등학교 윤리책에서 배운 단 한 줄의 노자 '노자의 무위자연설' 그 때 윤리선생님의 해설을 생각하면 기막힌 한숨뿐이다.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해설을 하셨었는데, 차마 내 모교의 선생님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 생략하겠다. 그만큼 노자에 대한 평가가 왜곡돼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이제라도 노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다행이란 생각이다. 빠르게 소용돌이 치는 사회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세상에서 그의 말씀 하나 하나는 등대처럼 절실하고 안타깝다. 지금이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시도해야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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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외로운 투쟁과 나눔의 미학 새창으로 보기
페르 ㅣ 2002-01-03 ㅣ 공감(1) ㅣ 댓글 (0)
원문을 통한 [도덕경]읽기와 해석은 많은 인내와 한자 실력을 필요로 했다. [도덕경]을 읽는 일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내용과 느낌 점에 있어서는 마음의 양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BS를 통해서 간간이 강좌를 들어보기도 했지만 강사의 견해가 많이 들어가 큰 도움은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대학],[중용],[논어]의 잠언들(나는 이 책들을 인생의 잠언 집이라고 명명한다.)
배울 때는 상당히 지루한 경향이 있었지만 (물론 개인적인 욕심과 한문강좌를 수강하면서 시험이라는 필요에 따라서 잠정적인 외우기에 불과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도덕경]은 인간의 가치관과 자연관, 사회 그리고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고서라고 본다. 특히 [도덕경]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자연관(미국과 유럽)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대두되면서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 근래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책이다.
[도덕경]-제1장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모든 수식어를 불허하는 이 한 문장은 나를 [도덕경]에 빠지게 하는 문구였다.
-(명가명, 비상명)
希言自然(희언자연) 말이 없는 것이 자연이다.(제 2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지인자지,자지자명)-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명철함이다.(제33장)
無執故無失(무집고무실)(제 64장)-집착이 없으니 상실이 없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관과 인간사의 뚜렷한 차이점은 자연은 집착이 없고 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연은 넘치면 덜어낼 줄 알고 사람은 넘치더라도 그 욕심이 끝이 없으니 시사하는 바가 이렇듯 크다.
만물과 더불어 되돌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반자도지동-즉 되돌아감이 도의 근원이다. 도는 일체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는 도=자연이라는 성립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보여주는 자연관은 이렇듯 순수한 원리를 통해서 아낌없이 주는 것이 자연이라고 본다. 그 동안 우리의 패러다임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위주로 형성되어온 가치관이었다면 현대는 개인주의 경향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단시되어 온 [도덕경]의 가치가 새롭게 재평가되어지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칫 각박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여유라도 주지 않을까?
아무튼[도덕경]은 새로운 가치관의 틀에서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세계가 변화하고 세계관이 이동하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새로운 지침서로 부각하고 있는 [도덕경]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은 준책이다.
세상은 나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공간이다. 이 공동체의 공간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하고 대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독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현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 그리고 가치있는 삶의 방법을 모색해 나가기위한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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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의 도덕경 주해 새창으로 보기
정기립 ㅣ 2001-08-22 ㅣ 공감(1) ㅣ 댓글 (0)
도덕경은 동양 최고의 경전이다. 원전의 본문은 겨우 원고지 25매 분량밖에 안되지만, 한자 한자에 담긴 함축성과 상징성, 그리고 그 의미의 깊이와 넓이 때문에 후대의 주석가들이 쓴 주해서만 해도 종류가 수천가지나 되며 해석방법도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많은 종류의 노자 도덕경 주해서가 있었지만, 이 책이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느낀다. 역자 오강남씨는 최근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분으로, 캐나다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고 도덕경 번역을 18년전부터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 구석구석에 역자의 세심한 정성이 배어있는 듯하다. 역자는 우리말 번역을 모두 경어체로 썼다. 심원한 우주의 진리를 먼저 터득한 고대 사상가가 그것을 반말로 전달하리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부터가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번역된 본문을 읽어보면 친근감과 그윽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 책이 국내에서 나온 도덕경 주해서 중에 최고라는 것은 번역된 본문만 읽어보아도 바로 느낄수 있다. 이전에 나온 번역들처럼 우리말 문장 자체가 의미를 알기 힘들어서 몇번씩 읽어야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술술 읽혀지면서 의미가 통한다. 이 점이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이다. 역자는 거기다가 자기나름의 느낌과 이해를 토대로 충분한 분량의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여 놓았고 그 내용또한 알짜배기이지만, 나는 굳이 그것까지 읽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역자가 18년 전부터 도덕경 풀이를 준비한 노고의 결실이라 하겠다.
누군가가 도덕경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해 줄 것이다. 이미 선물도 많이 했다. 역자는 캐나다에서 오래 체류하며 공부한 분인 것으로 안다. 아마도 캐나다라는 나라의 환경이 이 책의 열매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중국만큼 광대한 영토를 가졌으면서도 인구가 고작 3000천만에 불과한 나라... 밑에 있는 미국에 비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경쟁없이 욕심부리지 않고도 살수 있는 나라, 그야말로 무위의 실천이 가능해보이는 나라. 노자의 사상을 실천하면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느민족 누구에게나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