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5

Doheum Lee 이정희 전 대표의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에 대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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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전 대표의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에 대한 서평
종북 혐오 표현에 대한 피해 당사자의 종합보고서
난민, 여성, 이주노동자, 장애인, 노인, 진보적 인사나 집단에 대한 혐오표현(hate speech)으로 한국 사회가 요동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논의가 무성한 가운데 이정희 전 민주노동당 · 통합진보당 대표가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들녘)를 출간했다. 이 책은 ‘종북’이라는 혐오표현과 타자화의 실탄을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맞으며 그악한 꼴을 당하고 당의 사망선고까지 받아야 했던 피해 당사자의 피눈물 나는 보고서다. 이정희 전 대표는 혐오표현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원인 분석을 하고 종북이란 혐오표현이 한국 사회에서 빚어낸 야만들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이에서 그치지 않고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사례를 검토하며 국제 규범에 비추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통찰을 하고, 이를 없애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지금 한국 사회에 사상의 자유시장이 필요하다면 그곳에서 보호되어야 할 것은 혐오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혐오표현을 거절하고 비판할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혐오표현의 자유는 넘쳐나는데 이를 거절할 자유는 보장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센 혐오표현을 당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피해 당사자가 역사적 · 사회적 · 사법적 분석을 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한, ‘종북이라는 혐오표현에 대한 종합보고서’다.
<70년 동안 제주 4·3의 피해자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이 통합진보당에 반복되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제주 4·3민중항쟁’의 70여 년에 걸친 서사들이 겹쳐졌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1948년 남도의 양민 학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3만에서 8만 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자신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아무런 죄가 없이 죽었음에도 남은 자들은 제사 때를 제하고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사실조차 말할 수 없었다. 참다못하여 발설한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순이삼촌>이라는 픽션으로 재현한 작가 현기영조차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고 소설은 오랫동안 금서가 되었다. 그러다가 50년이 더 지난 2,000년에서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어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와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이 사건은 비로소 사회 기억(social memory)에서 공식 기억(official memory)으로 전환하였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이를 기억하고 추념하면서 화해와 상생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제주 4·3 평화공원이 세워졌다.
2018년은 마침 제주 4·3민중항쟁 70주년이어서 여러 행사가 열렸다. 그해 2월에 열린 ‘제주 4·3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박명림 교수는 화해와 상생의 제주모델의 요체는 “① … 단 한 건의 상호보복과 폭력, 가해자-피해자 재충돌, 최소한의 법적 처벌조자 없이 관용과 상생의 절정의 모습을 보여준 화해 협력과 평화공존의 정신, ② 민관협력과 협치의 정신, ③ 진상규명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도내 단합과 … 가해자-피해자 … 사이의 연대-결속, ④ 지속성”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제주 4·3치유 모델(Jeju 4·3 Model of Healing)’ 등으로 명명해, 남남갈등 극복의 전거로 삼고, 남북분단 극복과 통일의 모델로 삼으며, 세계 분쟁 지역과 갈등 경험 지역의 과거사 극복의 모범적 전범으로 만들어가자”라고 제안하였다.(<제주 4·3모델의 전국화, 세계화, 보편화 - ‘세계 보편 모델’을 향한 시론>)
과연 그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박명림 교수는 진보로 분류되는 학자임에도 진실의 왜곡에 바탕을 둔 거짓화해를 공론화하고 있다. 그의 주장과 달리 제주 4·3민중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진정한 화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가해자인 미국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으며 관련된 문건의 공개를 거부하며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이 사건은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제주 4·3사건’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명명되고 있다. 평화의 섬은 선전구호일 뿐이고, 강정에는 제주 전체를 전장터로 만들 수도 있는 군사기지가 들어섰다. 민주화 정권이 들어서서 많이 나아졌지만, 피해자들은 아직도 트라우마를 앓고 있고, 그 중 상당수는 아직도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이도흠, <제주 4·3민중항쟁에서 폭력의 양상과 공동체 복원 방안>, ) 한 후보자가 ‘완전한 진상규명과 배· 보상’을 2020년 4.15 총선에서 공약으로 내걸 정도다. 며칠 전에 우리공화당은 “제주 4·3사건은 남로당이 일으킨 폭동·반란”이라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두렵고 ‘뒷날’이 무섭기도 하고 후손들이 걱정되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제주 4·3학살의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70년 동안 가해졌던 여러 폭력 - 물리적 폭력, 문화적 폭력, 구조적 폭력, 재현의 폭력 - 들이 형식을 바꾸어서 통합진보당에 고스란히 행해졌다. 그때의 양민처럼 통합진보당은 철저히 배제되어 죽음을 당하고, 구성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였고, 촛불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화해와 상생은커녕 통합진보당의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인종, 민족, 국적에 의해 외부자를 차별하는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사상과 정치적 의견이 혐오표현의 핵심사유다. 이 땅에서 ‘빨갱이’나 ‘종북’의 명명은 무고한 사람을 누구나 죽여도 좋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규정하는 법이었다. “주권권력은 법을 매개로 어떤 개인을 이에서 예외로 설정하여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한다.”(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저자는 일제, 미군정, 독재정권으로 이어진 주권권력이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주화운동가, 호남사람, 노동조합원, 진보정당원, 진보적 지식인들을 빨갱이로 배제하여 구속하거나 살해한 한국의 현대사를 조망한다. 필자 세대만 하더라도 <반공도덕>이라는 교과목을 배웠으며, 당시 초등학생의 상당수가 북한에 도깨비들이 살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도깨비라고 여겼으며, 마을에 그런 대학생이 있으면 사람들이 마주치는 것조차 기피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수많은 민주화운동가와 학생들이 고문과 구속을 당하였으며, 그 중 상당수가 죽음까지 맞았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종북이라는 기표가 북을 환기시킴으로써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면서 대중의 분노를 이들에 대한 ‘공격적’ 에너지로 바꾸어놓는 특징을 가짐”(박영균, <종북이라는 기표가 생산하는 증오의 정치학>)을 간파하고, 종북 표현의 공격적 특징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와 사회적 결과에 주목한다. 그 정치적 효과는 조직결성이나 사회적 발언권 행사를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정치세력, 언론이나 대중들이 자신들도 그들처럼 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들을 감싸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이의 사회적 효과는 공론장에서 배제와 축출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으면 “폐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는 아픈 고백으로 책의 서장을 연다. 저자의 지적대로 아직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지 않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종북은 여성, 성소수자, 난민, 장애인에 대한 혐오표현이 논의될 때조차 그 담론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혐오표현은 인간의 존엄과 공존할 권리를 훼손한다>
2008년에서 2016년에 종북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극심해졌다. 종북이란 혐오표현은 극우세력이 집권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정권 핵심의 공식 발언과 국가기관의 조직적 유포, 보수언론의 집중 보도를 통해 빠른 속도로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민주노총, 전교조, 통합진보당을 없애는 것을 집요하게 추진하였고 여기에 보수언론과 단체가 호응하였다. 이에 따라 “67.7%가 종북 세력에 대해 심각하다”라고 여론조사에 답할 정도로 대중들의 종북 혐오도 심해졌다.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부터 시작하여 세월호 유가족 등 일반 시민에게까지 종북몰이를 하자 박근혜 정권의 지지율은 상승하였다. 저자의 지적대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기 전까지, 종북몰이는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낸 묘책이었고 지지율 상승의 비결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결국 4·3의 희생자처럼 2014년 12월 19일에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로부터 해산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촛불항쟁이 일어났고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었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그럼, 종북의 혐오표현은 사라질까. 아니다. 저자는 북에 대한 혐오와 종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남북관계가 악화하면 다시 심해질 것이라 예측한다. 문재인 정권은 통합진보당을 다시 살리라는 당원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계속 외면하고 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에 극우매체의 종북 표현이 허위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것이니 손해배상을 하라는 이정희 대표의 청구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므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혐오폭력으로 이어지고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고 소수집단이 다수집단과 공존할 권리를 침해하기에 규제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필자가 한 가지를 더 추가하면, 혐오표현은 공론장을 붕괴시키기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규제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든 어느 상황에 있든 인종과 종교와 사상을 떠나 존엄성을 가지며 타인, 사회,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긴 했지만, 사회를 구성하여 협력과 공존을 도모하면서 이타적 유전자도 발달시켰다. 협력과 공존은 사회의 전제다. 인류는 17세기 이후 교회 바깥에 공론장을 만들고 이곳에서 합리성에 근거하여 토론하면서 진리를 판별하고 합의를 도모하였으며 이것이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혐오표현은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고 때로 당사자들의 죽음이나 대량학살에 이르는 폭력을 야기하며, 소수자들을 집단에서 추방하고 배제하며, 토론과 합의는커녕 의제로 올리는 것조차 배척하여 공론장을 붕괴시켜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이에 저자는 율사답게 국제규범을 살핀 후 혐오표현을 정의하고 이에 대한 사법적 · 공동체적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혐오표현을 “역사적 · 구조적 연원에 의해 형성된 다수집단이 소수집단과 그 구성원에 대한 배제 또는 축출을 주장하거나 정당화하며 차별하거나 적대하는 표현”으로 규정하고, 이를 표현의 자유로 보호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혐오표현에 대한 형사처벌 범위는 좁게, 처벌 대상은 명확히 하되, 대신 민사상 구제 가능성은 넓게, 구제조치는 다양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행동이 아닌 말과 표시를 규제하고 형사처벌은 최종적으로 보충의 제재로 가해져야 하므로, 형사처벌은 최소화해야 한다. 다만, 일반인의 말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는 ‘위로부터의 혐오 조장’을 막기 위하여, 공직자, 정당의 등록된 간부, 등록된 언론사 임직원의 혐오표현에 한해서는 단순유포도 처벌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에 따라 민형사상 입법과 법리를 개발하고 자유규제와 구제조치, 차별금지법 제정이 뒤따라야 한다. 이 제안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사상과 표현을 자유를 억압하는 혐오표현을 제재할 사법적 대안을 모색한 것이기에 합리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다.
<피해자의 책임과 연대가 혐오표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
이 책은 사법적 대안 제시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혐오표현을 절대 쓰지 않는 정치언어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사회경제적 개혁이 수행되어야 함은 물론, ‘피해자의 책임’과 연대를 거론한다. 혐오표현이 줄어드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실제의 변화가능성은 피해자의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는 혐오표현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다수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함께 막아낼 수 있어야만, 혐오표현의 주동자들은 혐오표현을 내려놓을 것이다. …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피해자들의 노력이 충분히 차오른 뒤에야, 그리하여 혐오표현을 막아낼 사람들이 가까이 함께 설 수 있어야 세상은 마침내 변할 것이다.”
가장 최고의 명약은 그 병으로 아픔을 겪은 자가 만든 것이리라. 종북 혐오표현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의 글이기에 이 책은 진정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설득하는 힘이 있다. 혐오표현에 관련된 방대한 문헌을 읽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10장에 걸쳐서 명쾌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며 대안을 모색한 것은 석학의 모습 같다. 부당하게 해산된 당의 대표로서 증오를 드러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문제와 원인을 살피고 그 원인을 해소할 수 있는 법안을 제시한 것은 가장 최고 수준에 이른 율사만이 해낼 수 있는 솜씨다. 종북 혐오 표현의 피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의 책임을 말하며 경미한 가담자와 방관자들과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포용의 정치인만이 이룰 수 있는 경지다.
<대량학살의 근본 원인은 동일성이다>
그럼에도 읽기를 마쳤을 때 아쉬운 점이 남는다. 법적인 측면에 많이 치우치다 보니, 혐오표현에 대한 인류학적 · 철학적인 분석이 다소 부족했다. 좀더 체계적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왜 교양과 상식, 이성을 가장 잘 갖추고 보통교육이 실시된 20세기에 유태인 대학살, 난징 대학살, 킬링필드, 루완다 대학살 등 희생자가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대량학살이 수시로 자행되었는가. 이의 원인에 대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서 ‘악의 평범성’과 ‘순전한 생각 없음’으로(<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라 주장하였다.(<권위에 대한 복종>)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조직에 충실한 아이히만에게 히틀러가 독일 우파 시민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렸어도 유태인에게 하듯이 별 거리낌 없이 이를 수행했을까. ‘생각 없음’보다,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 대량학살이나 집단적인 폭력을 야기하는 근본 요인은 ‘동일성에서 비롯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이다. 백인 어린이는 때리지도 못하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 어린이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이교도로 타자화/악마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문명사회 이래 종족번식, 전염병, 종교, 이데올로기 등의 요인으로 동일성을 형성하고 다른 종족이나 다른 질병, 종교,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을 타자화하여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해 왔다. 그러기에 대량학살 이전에는 이들을 타자화하는 혐오발언이 선행한다. 정복 시대에 백인들은 유색인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짐승이나 야만인, 혹은 악마’로, 히틀러는 유태인을 ‘유럽의 정신을 훼손하는 반기독교도’로, 르완다의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매도하는 혐오발언을 퍼트렸다. 학살은 그 후에 진행되었다. 제주의 4·3 학살에서도 육지/섬, 우익/좌익, 알뜨르(해안지역)/웃뜨르(중산간 지역)으로 나눈 채, 주로 전자로 동일화한 세력이 후자를 타자화하면서 학살하였다. 동일성은 ‘차이’를 포섭하여 이를 없애거나 없는 것처럼 꾸민다.
이에 대한 대안은 동일성에서 ‘차이(difference)의 사유’로, 이분법에서 대대(待對)의 논리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한 근대적 주체에서 타자성(alterity)을 추구하는 탈근대적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다. 차이는 동일성을 해체한다. 차별했던 이주노동자에게서 독일에 간호사로 갔던 내 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포옹하듯, 대대(待對)는 이것과 저것을 분리하는 A-or-not-A의 이분법적 모순율의 논리를 깨고 내 안에 대립적인 것을 서로 품으며 역동적으로 상생을 도모하는 A-and-not-A의 퍼지(fuzzy)의 논리다. 21세기의 바람직한 인간형은 이 세계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근대적 주체와 공감을 매개로 타자에 대한 윤리를 실천하는 탈근대적 주체를 종합한 눈부처-주체다.(이도흠,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소극적 자유에 적극적 · 대자적 자유를 종합해야>
이 책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서양의 사상의 자유시장론을 분석하며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병존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법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소수의 현인(賢人)/철인(哲人)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나 그들이 인정하는 이에게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권위주의를 해체한 것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나 존 밀턴(John Milton)에서 비롯된 사상의 자유시장론이라면, 이를 또 다시 극복한 것이 사회적 책임론이다. 자유로운 표현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의 이윤추구와 결합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공동체의 윤리를 저해하는 것을 성찰하여 사회적 책임론으로 발전하였다.
이러면서 자유 또한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freedom from)에서 노동과 실천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는 적극적 자유(freedom to)와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는 순간에 자신의 자유를 진정으로 구현하는 대자적 자유(freedom for)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대자적 자유를 구현하는 순간 인간은 정의를 실천한다. 진보 진영이 자유의 개념을 보수에게 내주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적극적 자유와 대자적 자유의 개념을 잘 응용하지 못한 데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소극적 자유에 치우친 사상의 자유시장론에 바탕을 둔 근대법 체계를 적극적 자유와 대자적 자유의 개념에서 비판하며 혐오표현을 규제할 법률적 대안을 마련했으면 더욱 진전된 제안을 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종북 혐오표현을 야기하는 원인에 대해 좀더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종북 혐오표현을 야기하는 것은 분단모순과 남북관계, 신자유주의 체제, 대미 종속 체제, 기득권 동맹의 권력욕, 6.25 기억투쟁의 실패, 반공교육, 노동배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보수양당 체제, 보수언론의 조작, 진보의 분열 등이다. 그러기에 그 대안 또한 멀리로는 신자유주의와 대미종속체제를 극복하고 남북한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노동중심의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며, 가까이로는 이를 지향하는 가운데 기득권 동맹에 균열을 내는 운동을 끊임없이 하고 교육개혁과 노동개혁, 정치개혁을 수행하고, 6.25에 대한 기억투쟁을 올바로 하며, 언론과 정치인의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법을 실시하고, 진보정당이 통합하여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다.(이도흠, <종북 프레임의 극복 방안>)
<우리가 성찰할 것들>
왜 대중들이 혐오표현에 가담하는가. 왜 자신의 형제와 자식, 부모가 아무 죄 없이 학살당하였음에도 제주도민은 저항하기는커녕 가해자의 편에 서고 반공국민으로 거듭나기를 했는가? 주로 공권력이 양민을 학살하였지만 제주도민이 서로 죽이기도 하였다. “제주도민은 민보단, 향토자위단, 해병대에 입대하고 자진하여 반공대회의 동원에 응하였으며, 자신의 딸을 경찰과 군인 등 우익 인사에게 시집을 보내고 심지어 빨갱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다른 지역의 빨갱이까지 죽였다.”(양정심, 「제주 4·3항쟁과 레드콤플렉스」) 일본에서도 관동 대지진 때 일본 천민이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을 학살한 이유는 일본 주류로부터 ‘일본인’으로 인정받기 위함이었다.(藤野裕子, <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의 토목건축업과 조선인 노동자(戰前日本の土木建築業と朝鮮人勞働者)>)
이들 사례에서 잘 볼 수 있듯, 피해자들이 권력을 가진 가해자들의 동일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남으려는 일종의 인정투쟁을 한 때문이다. 여기에 레드 콤플렉스가 구성한 불안이 폐쇄된 공간에서 비슷한 정보와 아이디어가 돌고 돌면서 강화되고 악순환을 일으키는 반향실효과(echo chamber effect)을 일으키면서 집단적 공포로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혐오표현이 대중의 폭력으로 전환하는 다양한 요인과 과정에 대한 분석, 혐오표현이 구조적 폭력으로 작동하면서 문화적 폭력과 재현의 폭력을 생산하는 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필자는 이명박 정권에서 당시 ‘진보의 궤멸’을 극복하고자 진보 진영의 대통합을 시도하였다. 민교협의 의장으로서 통합진보당 잔류파와 탈당파, 진보신당,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진보진영의 정당과 진보단체, 주요 진보인사에게 17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범진보 단일 후보를 내는 ‘노동자 · 민중후보 추대 연석회의’를 제안하고 십여 차례에 걸쳐 전체 회의를 주재하고 물밑교섭을 하였다. 첫 회의를 갖기도 전에 통합진보당 잔류파가 들어오면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겠다는 이들이 있어서, 고민 끝에 첫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잔류파의 대표로 참석한 인사에게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에 대해서만 다른 정당과 단체 대표에게 사과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통합진보당 잔류파에서도 여러 차례 회의를 한 끝에 수용되지 못하였고, 결국 통합진보당 잔류파는 이 회의에서 이탈하였다. 이에 민주노총도 마지막 회의까지 참석했지만, 여러 차례 내부 회의 끝에 참여단체로 전환하지 못하고 참관단체로만 머물렀다.
결국 대통합은 실패했다. 진보당 잔류파가 이정희 후보를 내자 통합진보당 탈당파가 심상정 후보를 냈고, 진보신당이 김순자 후보, 변혁ㆍ노동자 그룹 등 노동좌파진영이 김소연 후보를 냈다. 설혹 통합진보당이 모두 옳았다고 하더라도 대승적으로 사과하였으면 다른 결과가 빚어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본다. 모택동의 말대로 물 없는 곳에 물고기가 살 수 없다. 왜 통합진보당이 많은 대중을 놓치고 진보진영마저 함께 하지 못하는 내적 요인은 없었는지에 대한 성찰도 한 장 정도 할애하였다면 맨 마지막의 ‘피해자의 책임’이 더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통합진보당이 성찰할 것이 1이라면 진보진영을 포함하여 우리가 성찰할 것은 100이다. 미국의 연방대법관인 벤저민 카도조(Benjamin N. Cardozo)가 1937년 팔코 대 코네티컷 재판에서 판결한 대로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모체이자 절대 필요한 조건”(<Palko vs. Connecticut, 302 U.S.>)이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이를 전면 부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혐오표현의 가담자나 방관자로서 통합진보당의 해산에 일익을 하였다.
촛불 이후에도 서민과 노동자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크게 다섯 가지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유지되고, 대미종속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본-정권-보수언론-사법부-종교권력층-김앤장과 같은 전문가’로 이루어진 기득권 동맹이 조금도 균열되지 않았으며, 문재인 정권도 반노동 · 친미 · 친재벌을 지향하면서 진정한 사회개혁을 하지 않고 있고, 시민사회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자의 지적대로 남북의 갈등이 고조되면 종북의 혐오 표현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이는 다양한 폭력, 곧 물리적, 문화적, 구조적, 재현의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사법부는 재심을 수용하고, 문재인 정권은 통합진보당을 복원해야 한다. 우리 또한 피해자들의 절규에 연대하여 통합진보당을 복원함은 물론, 혐오표현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극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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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하고 복된 명절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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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이웃종교의 향기 신년기획 1]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
승인 2014.01.07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에 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하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Jongchul Hong CK Park 사람들은 박원순 시장이 성폭행이 아니라, 성추행을 한 사실이 너무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주장



(1) Facebook




Jongchul Hong
25 sSotSpoJiunslhosaryuedc ·



합리적 의문, 꼼꼼히 정독해야 할 글...






CK Park
18 sSotSpoJiunslhosaryuedc ·

異見
긴 글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답이 나온 이는 읽지 않으셔도 된다. 아직 명증한 답을 못 찾은 분들과 나의 좁은 소견을 나눈다.
요즘과 같이 흉흉한 시기에 대중의 정서에 반하는 이견을 가진다는 것은 마음 무거운 일이다. 걸핏 하면 2차 가해 운운하며 을러대는 이들이 주변이 넘치는 시제에 이견 제시는 2차 가해라는 낙인을 받기 쉬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주사회가 도덕주의적 자의에 세워지는 위험을 인권과 법치사회라는 이념으로 극복해 왔다고 믿는다. 법치가 최후의 보루는 아니다. 법의 판단이 무수한 희생자를 낳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치적 오류는 남아있는 증거들이 있지만, 도덕주의적 오류는 대중의 익명성 속에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심판하기 어렵다.
하나의 이견을 밝힌다.
1.
사람들은 박원순 시장이 성폭행이 아니라, 성추행을 한 사실이 너무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주장한다. A씨측 변호사가 찔끔 찔끔 피해사실을 밝히고 있으니, 그의 주장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그렇게 믿기를 의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 자기를 방어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대가 내리는 이런 일방적 판단에는 어떤 위험이 담겨 있을까?
과연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그대의 해석이 적절하고 옳은 것일까? 나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경험적 사유의 오류를 이런 판단에서 보고 느낀다. 자신의 욕망, 판단, 경험에 맞추어 사랑하는 벗을 판단하고 실제로는 괴롭히며 버리는 것이다.
그대는 왜, 무슨 근거에서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성폭력을 자인한 죽임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는가? 박원순 시장이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해자 보호주의 원칙을 따르다 보니 피해자 편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그대의 경험에 비추어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여 판단하는 것인가? 박 시장을 옹호하다가는 젠더 인지도가 떨어지는 자라는 낙인과 비난을 받아 정치적으로 불리해질 것이 두려워,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 주장하는 것인가?
박 시장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고발자들이 어떤 주장과 항목들을 가지고 그를 고발하고 있는지 세세히 알고 있었을까? 그 모든 것을 다 인지한 후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범죄라고 여겨 자신을 징벌한 것일까? 고발자들이 주장하듯 고의로 위압을 행사하며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인정했기에 죽음을 택했을까?
나의 판단은 “아니다.” 그는 고소 사건에 휘말린 것을 알았을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고소되었는지 상세히 알 수 없었다. 다른 고소 사건들이 다 그러하듯이. 피고소인에게는 고소 사실이 뒤늦게 통보되는 것이다. (혹 그가 어떤 경로로 고소인의 소장을 받아 보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개연성이 없다고 본다.)
지금 우리 앞에서 A씨의 변호사가 거듭 거듭 “말 할 수 없는 위압 속에서 4년간 지속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 변호사가 나열하는 범죄 리스트를 그가 충분히 인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하는가?
- “위압”을 느낀 것하고, 위압을 행사한 것은 다르다. 졸병이 장군 앞에서 위압을 느끼는 것이 곧 장군이 졸병에게 위압을 행사한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주장이 유통되면 군대는 즉시 해체되어야 한다.
- “4년간 지속적으로“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다. 지금알려진 바로는 A씨는 서울시에 2년 3개월 근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 “지속적으로”, 라는 표현도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변호사가 내놓은 “주장“과 그 내용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주장에 박시장이 승복하여 스스로 자책과 회한에 싸여 세상을 버렸다고 쉽게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의 생각에는 “아니다”이다.
그는 고발자들이 나열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죄책에 못 이겨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은 그를 거듭 억울하게 만드는, 그에게는 사후에 가해지는 제 2차 가해 행위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까?
2.
우선 정리가 필요하다.
나는 A씨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미투(나도 당했어)”한 것이 아니라, 법에 고소하며 법적 판단을 의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발자가 공개적으로 나섰다면, 아마도 박 시장은 목숨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은 변호사와 2달여 협의 과정을 거치며 “미투”보다는 법의 위하력을 동원해서 공인인 박시장을 공격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피해자냐 고소인이냐라는 논쟁은 사실 부질없는 논쟁이다. 나는 고소를 제기한 당시 “법적인 신분은 고소인이 맞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일, 그녀가 고소를 제기하며 스스로 대중 앞에 나서서 “저 사람이 나를 위압으로 지난 4년간 성추행 했답니다.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라고 고발을 했다면 나도 A씨를 피해자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A씨는 처음부터, 2차 피해가 두려워 공공의 세계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법에 호소했고, 법적 절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며, 지금도 신분 노출을 두려워하며 대중 앞에 나오지 않고 숨어서 지낸다. 사람들이 박시장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녀에게 물을까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정직하고 진실했다면 진실의 힘을 믿으면 된다. 고소로 인하여 온 세상이 그를 파렴치하다고 비난하며 달려들 것은 충분히 생각했을 터, 박시장 만큼 위험하지 않다.
그녀의 법적 대리인 변호사는 지난 5월 초 이 시건을 접하고, 장장 2개월 동안 이 사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소 시점을 저울질 하다가,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이 봉합 단계에 이르자 이 문제를 주도면밀하게 제기해 크게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A씨와 그와 연대하는 이들은)은 대리 기자 회견을 자청하고, 마치 심판자나 된 것같이 흥분한 어조로 박 시장을 성 추행범으로 심판했다. 그리고 2차 가해를 하지 말라며 우리 모두에게 거듭 거듭 경고하고, 2차 가해자를 고소했다는 사실도 밝히며 간접적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2차 가해라니....
현재, 당시 1차 가해 사실을 법정에 물으며 판단을 의뢰한 상태이나 박 시장이 사망하여 공소제기가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한 것일까? 이들은 집요하게 나(우리)에게 1차 피해를 인정하라고 강요하고, 이를 마치 인정받은 듯이 2차 가해(1차 가해가 확인 되어야 2차 가해라는 것이 성립한다)를 하지 말라고 위협한다.
내가 아는 판단의 형식은 굳이 윤리적 판단의 제 1 원칙으로 적용하는 "an ethic of fitness" 이론을 적용할 필요도 없이 그대라면 그대에게 고소를 제기한 자의 “주장“을 “사실 확인 없이 진실한 판단”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주장”은 일단 “그저 자의적 판단”일 뿐이다.
그런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으로 유통된다면, 왜, 우리 사회는 법률 전문가를 교육하고, 검경을 두며, 법원의 판단을 단 한 차례가 아니라, 세 차례나 거듭하는 제도를 두고 사는가? 유, 무죄 판단의 신중함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그대는 한 번도 배우지 못했는가? 목하, 세상은 불법적인, 일방적인 자의적 판단에 빠져있지만, 나는 민주사회가 법치사회인 한, 일방적인, 그리고 자의로 규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나온 “의견”에 지나지 않는 내용을 최종 판단이라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3.
엄청난 권력자와 힘없는 여성 사이에, 시장과 비서(시장에게는 비서가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사이에 일어난 일이므로, 약자 편에 서야 한다는 당위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며, 대학에서 그렇게 가르쳐온 사람이다. 그러나, 고소장을 제출하는 즉시, 한 편을 무작정 피해자로 상정한다면 동시에 다른 편은 무작정 가해자로 규정되는 이런 현실을 인장하라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인가?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이 이런 억지 판단을 강요하기 위한 전제로서 성폭력 사건에서 중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은 “사실 확인 절차“에서 피해를 겪은 이의 고통이 충분히 배려되지 못하여 조사자나 심사자에 의하여 재차 성적 수치심이나 인격적 모독을 초래하는 경우를 방지하자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사실 확인을 요구하는 소리 자체가 제 2차 가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가해가 아니라 “함께 진실을 밝혀 피해자의 고통을 씻어주고 보상을 받을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며, 동시에 만의 하나 피고소인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계략으로 “과장되거나 허위의 사실로 한 개인을 공격하는 행위”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경험적 지혜를 통해 오판을 막자는 주장이다. 이를 통하여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행위의 부당성”을 밝혀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하자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어떻게 2차 가해가 된다는 것인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4.
서울 시장의 죽음을 불러온 이 사건 앞에서 온 국민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라고 묻고 있을 때 A씨 편에 연대한 이들과 법률 대리인이 나와서 밝힌 내용을 내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스스로 목숨을 내 놓을만한 범죄“라고는 특정 짓기가 매우 어렵다.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대가 남성이라면,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대가 여성이라면, 그대의 남편, 혹은 아들이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A씨가 나열하는 죄목 때문에 그대가, 그대의 남편이, 자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정말 생각하시는가? 아주 낮선 남성과 여성 사이가 아니라, 평소에 시장과 비서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장이 있으면, 반박도 있을 수 있다.
- 셀카를 찍으면서 접촉했다.
박 시장이 고의로 성추행 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조그만 화면에 두 사람 혹 세 사람을 넣기 위해 포즈를 이리저리 잡아야 하는 셀카 사진을 찍기가 성추행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 멍든 무릎에 호하며 입을 맞추었다.
박시장이 성을 착취하기 위하여 “X저씨”같이 행동한 것이었을까?
- 수면실에서 나를 안아 달라고 했다.
성추행을 목적으로, 나아가서 성폭행까지 일어날 수 있는 정황,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 텔레그람 비밀 방에서 대화하자고 했다.
변호사는 심야라 대서특필하게 주장 했지만 실제는 오후 8시 대의 일이다. 이 대화가 성희롱을 일삼으려는 대화였을까?
- 속옷을 입은 사진을 내게 보냈다....
서민의 정황을 채험하던 박시장이 무더운 여름 부채를 들고, 그러나 전혀 성적 매력이 드러나지 않는 “아저씨 사진“은 여기 저기서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박시장의 이런 일련의 행위에 대하여 다분히 유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다른 해석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박 시장에게 분노하는 그대, 그대라면 이런 일로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성폭력의 모든 동기는 여성을 성적 호기심,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성 착취하려는 내심의 동기와 목적에서 작동된다. 이런 행위는 개인의 습관적 행위를 유발한다. 내심의 동기와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여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 만일 그런 동기가 아니라면 민감한 젠더인지도의 결핍에서 나온 행위다. 이런 행위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악의적 해석 그리고 선의적 해석.”
대부분의 악의적 해석은 사건 현장에서 “그 때” 일어나지 않는다. 사후에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악의를 감추는 대신 상대를 악마화 하는 입장을 강화한다.
내가 묻는다.
위의 내용을 가지고 그대가 남자라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그대가 여성이라면 그대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스스로 죽으라 하겠는가?
5.
다른 해석도 있다.
박원순 시장과 함께 일한 O작가는 위의 사실들과 유사한 경우들을 들어가면서도 그 내용을 성폭력이라고 해석하거나 읽지 않았고, 오히려 박 시장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여성이지만 해석이 이렇게 다르다.
진혜원 검사는 성폭력 사건 전담 검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측의 진정성”은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알려주었다. 이런 검증적 절차를 언급한 것이 2차 가해라며 진 검사를 징계하자는 웃지 못 할 사건도 일어났다.
진 검사는 이렇게, 우리에게, 실무적 진실을 알려 준다.
“고소 사건의 절반 정도는 기소하고, 절반 정도는 불기소하고, 불기소 사건의 절반 정도는 무고죄로 기소하거나, 무고는 인정되더라도 초범이라는 사유 등으로 기소유예의 불기소 결정을 한 것이라고 상세히 기록해서, 무고를 당한 피해 남성이 나중에 민사소송을 하거나 국가배상청구를 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진 검사의 페북 글에서 인용)
고소한다고, 피해를 호소한다고 모두 “피해자”가 아니라는 현직 검사의 합리적, 실무적 해명이다.
평균 4명 중 2명은 “실제로” 피해자고, 그 중에서 한 명은 남성을 무고하게 가해자로 몰아 법적 처벌을 받게 할 목적으로 음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A씨 편에 선 이들은 무슨 근거로 A씨가 피해자임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정치인들은 앞 다투어 A씨를 ”피해자“로 확정해 주고 있는 것일까? 이런 행위가 재판없이 사람을 여론 재판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성”인지도만이 아니라 “정의”인지도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Gender Justice는 성 인지도만이 아니라 정의 인지도도 요구하는 개념인 것을 모르는가?
이런 어리숙한 바보 게임에 나는 속을 생각이 없다. 속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검증절차 없이 A씨가 4명 중 2명에 속할 가능성은 지금 그들이 하는 모양을 보아 더욱 그 개연성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 절차를 통해 사실을 확인해 주기 바란다. 성희롱, 성추행을 내가 가볍게 보기 때문에 아니다. 무겁게 보면 볼수록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더 가중된 범법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김학의도 살고, 전두환이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 왜 박원순 시장은 왜 우리와 같이 산자 중에 있지 않은 것일까?
부가적인 요인들도 있겠으나 일단 나는 “A와 그녀의 법률 대리인 변호사가 제기한 고소”가 직접적 요인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이들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수 없다.
이 고소는 겉보기엔 “권력자와 힘없는 자 사이에서 벌어진 성추행 고소”라는 성격을 가지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민감한 정치적인 사건이다. 단순한 이들은 “성추행” 주장의 진실성을 확인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겪는, 겪었던 일처럼 간주하고 분노를 드러낸다. 그 사이에 이 사건은 일파만파 엄청난 정치적 사건으로 확장되어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이미 우리를 삼키고 있다.
고소인과 그녀의 대리인은 이런 여파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측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몇 시간 조사하면 되는 문제를 2달 넘게 품고 있었고, 적시를 기다렸으며, 폭로행위를 시리즈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는 묻게 된다.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2년 3개월 근무 기간에서 일어난 기억을 소환하는 일, 세세히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기억은 감정과 해석에 의하여 간혹 왜곡되기도 하는 것이다.
6.
나는 박 시장이 오랜 기간 약자로 몰린 여성,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의 편을 들어가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욱 철저하게 젠더 평등성을 실천하지 못한 여러 흔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시장 - 비서의 관계에서 서로 허물없이 지낸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A씨에게 혐오와 성적 수치감을 주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박시장이 성 착취를 목적으로 그런 행위를 했는가 아닌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악의로 혹은 선의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앞서 그대들에게 물었듯이, 법률가로 살아온 그가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할 만한 성범죄 리스트를 인정하고 “자책과 책임”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다.
추가로 더해진 내용,
새벽에 나와 같이 뛰자.
내가 혈압을 재면 자꾸 높게 나오니 A씨가 재 줘....
운동 후 샤워실에 속옷을 가져다주고, 벗은 옷을 집으로 보냈다... 과연 박시장이 그렇게 요구하고 시켰을까? 왜 이런 일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부끄럽지만, 이런 일은, 교회마다 부흥사를 불러 부흥회를 열 때, 집회 때마다 흠벅 젖은 부흥사의 속옷과 와이셔츠를 갈아 대 주는 일은 정말 흔한 일이다. 나는 이런 행위를 비판해 온 사람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일은 교회에서 비일비재 하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분개하며 박시장을 고발하는 것,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주장”을 사실로 확정하는 것은 이미 악의적인 해석을 받아들인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다시 묻자.
그대라면 이런 일이 세간에 알려진다 하여 목숨을 끊겠는가?
그대의 남편이, 그대의 아들이 이런 일로 목숨을 끊어도 당연하다 여길 것인가?
말하는 것도 2차 가해라더니, 이젠 침묵도 또 다른 가해라고?
말을 하면 그것이 곧 “사실 확인 없이” 의미를 가진다고 그대는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평생 이 사회를 위하여 공헌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런 일을 열거하며 사형을 선고하겠는가? 권력을 탐하고, 쾌락을 쫒으며 치부해온 어느 검사처럼 박원순 시장이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라면 나는 어느 정도 그의 혐의보다 더 큰 혐의도 있을 것이라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유한 목사들도 버리지 못한 탐심을 그는 버리고 살았고, 일하다가 과로사로 죽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위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 놓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개인주의자라기보다는 공동체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며 그가 가진 것을 더 큰 일을 위해 기꺼이 내놓던 사람이다.
과연, 그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믿고, 헌신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함께 일한 시민사회와 여성들, 그들의 우월성은 어디 있었을까? 그것은 동지들과 함께 웃으며 일할 수 있는 근거, 곧 도덕성이다.
그의 공격자들은 박 시장의 아킬레스 건, 그의 도덕성을 치명적으로 겨냥한 것이다.
서울 시청 뒤에서 “박원숭이”라고 조롱하며 그의 아들의 병역 면제를 병역 비리라며 쉬지 않고 공격하던 이들은 “십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혔고, 배현진이는 지금도 그를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법적 판단, 의학적 판단, 합리적 판단, 그것이 그의 적대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함께 일하던 동지들이, 그가 위하던 여성들이 그를 적대자, 아니 성추행범으로 몰아가는 현실을 직면했다. 나는 이 엄중한 현실 앞에서 그의 팔과 다리가 다 잘려 나간 것과 같은 절망을 상상한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여기에, A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면 내가 너무 “낭만화”하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낭만적인 권고였을까?
7.
그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과연 세상이 그를 공정하게 대하고 있는 것 같은가?
손에 돌을 들고 있는 그대 너무 경솔하지 않은가?
그는 일하다가 죽기를 바란 사람이었다.
서울 시정을 위하여 “나인투화이브“ 깔끔하게 일하고 칼 퇴근하는 그였다면, 그가 서울 시장실에 마련되어 있는(사택이 교회에 붙어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규모의 교회 목사 집무실 한 귀퉁이에도 ”침실“이 아니라 ”수면실“이 있다) 수면실에서 예순 다섯 살아온 몸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가 매일매일 그대처럼, 그대의 남편처럼 사생활을 중시하며 집에 들어와 오순도순 살아간 사람이라면, 그가 가족이 있는 공관이 아닌, 시장실에서 이른 아침 조깅도 하고, 샤워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는 자기 목숨을 그대들처럼 아까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대들처럼 강남에 집을 두고도 또 한 채 집을 가지려는 이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가진 것을 모두 내 놓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목숨보다도 돈을 위해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 인사에서 정말 미안해 한 대상은 그의 가족이었다. 떠나려니 가족에게 정말 미안했던 것이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미안하다.”
8.
그가 사랑한 대한민국 서울을 위해 일하는 것, 그가 평생 여성과 약자 편에 서서 사는 일, 그가 꿈꾸며 하고 싶었던 일들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서 조중동과 정치적 적대자들이 이구동성 던질 온갖 모욕과 조롱을 직면할 것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어둠의 세력을 직면해야 할 운명을 직감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 앞에 던져진 먹잇감이 되어 끝없이 상처받으며 변명으로 일관해야 할 그의 남은 삶, 함께 일하던 민주 진영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줄 정황을 예측하지 않았을까?
왜 살아서 결백을 입증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그에게 물을 수가 없다. 조중동한경의 비방 일색의 도배도 모자라, 지금 그의 죽음 앞에서 앞 다투어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 드는 정치인들과 배현진 부류의 인사들을 보면 내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성희롱을 당한 여성 편에서 그 여성의 권리를 지켜주던 인권 변호사로 살아온 그에게, 자기가 위하던 여성들이 자기와 함께 일해 온 비서를 앞세우며 적이 되어 비난하며 칼을 겨누는데, 예순 다섯 된 노병 보고 칼을 들고 그 여성들과 피터지게 싸우라고?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격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9.
그들은 한 여성을 향한 “성추행 사건”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 부주의와 오류를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하여 정치판에 던지기만 하면, 그의 적대자들이 무리지어 나서서 “사실과 해석의 진실성”을 확인하려는 합리성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 들 것이라는 것, 누군가는 충분히 예측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군위안부들을 대리한다며 민족적 자존심과 피해 여성의 권리를 간과하며 일본과 적당히 타협했던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화해·치유재단’의 이사였던 그녀, 그녀가 이번에는 여비서의 법률 대리인이 되어 전면에 나섰다. 2015년 대한 송유관 공사 여직원 강간피살 사건 피해자 모친 유미자씨와 대면한 자리에서 그녀가 냉철하게 했던 말이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 그 때는 없었다.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할 수 없으며 여가부는 징계권한이 없다.”
여가부 국장 시절 강간 당하고 피살 당했던 여성의 모친에게 김재련 변호사, 그녀가 했던 말이다.
박 시장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멈추어 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우리에게 “안녕”이라 작별의 인사를 하고 초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의 가슴은 그의 쓸쓸한 죽음을 위로하고 싶고, 지금은 한없이 슬프고 아프다.
10.
피해자가 과연 누구일까?
나도 피해자 보호주의를 따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