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9

2008 [운동론] 김지하 '촛불'은 후천개벽의 시작이다

[민주법연] FTA - [운동론] 김지하 칼럼(7/3 프레시안)




문병효 교수와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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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론] 김지하 칼럼(7/3 프레시안)
고영남
조회 수 : 10279
2008.07.04 (22:42:47)


줄탁(啐啄)을 생각한다
[김지하 칼럼] '촛불'은 후천개벽의 시작이다

등록일자 : 2008년 07 월 03 일 (목) 19 : 27


줄탁(啐啄). 정확하게는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무엇일까? 생명의 세계에서는 달걀 속의 병아리가 때가 되어서 밖으로 나오기 위해 달걀 속에서 어떤 한 부위를 부리로 쪼기 시작하면 어미가 밖에서 그 쪼는 부위를 아주 정확히 쪼아줌으로써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태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안팎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생명탄생의 신비로운 비밀이다.

불교에서는 해탈(解脫)의 선기(禪機)가 무르익은 수좌(首座)의 기미를 조실 스님이 눈치채고 결정적인 때에 봉갈(棒喝)로 충격을 가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고, 후천개벽론에서는 젊은 후천(後天)의 기운이 우주의 접근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방면에 노력을 집중할 때에 늙은 선천(先天)의 지혜나 그 문제 영역을 타격해줌으로써 안팎의 개벽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후천개벽의 기운이 다방면으로 무르익은 때다. 즉 문명권 전체의 대전환의 때다. 인류와 지구 또는 우주의 지화점(至化点) 즉 '오메가 포인트'다. 이 대전환의 주체가 나타날 때다. 인류사와 자연사, 생명사가 이 전환의 주체를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기후혼돈 등을 비롯한 세계사, 지구사는 종말적 대혼돈을 맞아 그 혼돈을 활용하여 그 혼돈을 빠져나갈 혼돈 그 나름의 독특한 질서를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의 종말관과 불교의 미륵회상이 그러한 사상이다. 19세기 한반도의 남조선 사상사, 남쪽조선에서 세계와 인류를 구할 새 민중사상사가 창조될 것이라는 전설에 따라 출현한 동학, 정역, 남학, 증산, 원불교 등이 바로 그 대전환과 새 세상의 도래를 예언한 후천개벽의 변혁사상이다. 이 변혁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와 불교 등의 비폭력과 평화의 상상에도 이미 있다.

그리고 후천개벽의 남조선 사상사에는 그것이 거의 핵심내용을 이룬다. 그 한복판의 '혼돈적 질서'의 세상이 동학에서는 '지극한 기운-혼원지일기'로, 정역에서는 '여율(율려의 전복된 개념)'로, 증산에서는 '천지공사와 천지굿'으로 원불교의 소태산 사상에서는 '일원상법신불과 정신개벽운동'으로 제시되었다.


▲ 우리나라는 일반 청소년, 여성, 서민 일반이 개방적인 쌍방향 소통과 논쟁으로 가득찬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형성하여 이미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프레시안

서양과학문명의 발전에 따른 소통양식의 대변혁과 문화의 혁신과정에서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사이버소통방식이 하나의 새로운 후천적 문화양식으로 등장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유럽, 일본, 중국과는 또 다르게 우리나라, 그것도 일반 청소년, 여성, 서민 일반에게서 개방적인 쌍방향 소통과 논쟁으로 가득찬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형성하여 이미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바로 최근 '촛불'의 등장배경이다. 촛불은 2002년 월드컵 응원문화의 발전과정에서 축제 형식으로 등장해서 올해 쇠고기 문제와 대운하 문제의 정치 아젠다에 대한 직접민주주의 운동으로 그 차원을 높였다. 축제와 정치의 결합, 숭고한 새 '문화혁명'의 한 형태는 '정치적 상상력'의 한 양식이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후천개벽운동으로서의 거대한 네오 르네상스의 역동이 뜀뛰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 축제 때에 사흘밤 사흘낮을 춤추고 노래 부른 민족으로 이름나 있다. (중국 기록) 영고, 무천, 동맹의 축제 때와 고려 시에도 팔관이나 국중대회에서 계승된다.

이 천의무봉의 신기, 신명, 신바람이 이후 976회의 외국침략에 억압되어 <한(恨)>이라는 이름의 그늘진 내상으로 침전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2002년에 바로 이 억압된 신기가 한의 일방적 지배를 뚫고 폭발한 것이다. 이 역사적 굴곡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촛불은 해명되지 않으며 제대로 접수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기, 신바람이 <풍류>라는 이름의 문화적 축적의 기본이요 <신시>라는 이름의 시장과 경제, 호혜와 교환의 자연생명존중과 인간친교통합의 성스러운 시장의 추동력이요, <화백>이란 이름의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적 단상 단하의 합좌기구를 통한 장기간에 걸친 토론을 거쳐 전원일치에 도달하는 "직접-대의"의 결합구조의 기원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 살아난 것이다.

우선 촛불의 진원지인 인터넷 디지털 네트워크 문화의 특징을 일별해 보자.

1. 다층성과 다양성
2. 쿨함, 즐거움, 감동
3. 함축성, 직접성, 속도
4. 개체적 융합
5. 내부공생과 자기조직화
6. 종합정보학적 집합지성
7. 상고신화와 미래 멀티미디어 세계에로의 쌍방향 통행성
8. 뇌과학적 이진법에 토대한 '아니다, 그렇다(no-yes)'의 생명논리학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1. 다층성, 다양성은 혼돈과 개체성, 자유, 우연성, 창발성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자연스런 융합으로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2. 쿨함, 즐거움, 감동 : 재미없고 멋없고 갈등 없고 즐길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

3. 함축성, 직접성, 속도 : 키워드나 키포인트, 촌철살인적 포괄성과 함께 자기자신의 현실과 연결된 직접성, 그리고 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 쉽게 그리고 빨리 돌아와야 하는 속도가 중요하다.

4. 개체적 융합 : 현대 자유의 진화론의 특징이다. 개체가 먼저고 개체가 중심이 되어 개체개체들이 융합한다. 개체가 전제되지 않는 공동체와 협동의 강제는 거부된다.
- 몬드라곤 공동체와 기브츠 공동체의 쇠퇴. "계와 품앗이"와 개체성을 토대로 한 저축조합, 민중은행, 사회적 기업 등의 등장. 붉은 악마 때나 이번 춧불에서 그 주체세대와 시민들은 거의 다 개체 중심의 융합을 상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2002년에 '밀실의 네트워크'니 '방콩의 연대'니 하는 유머는 모두 이것이다. 동학의 '각지불이(各知不移)'의 원리다.

5. 내부공생과 자기조직화 : 내부공생은 개체 내부의 우주적 생명공생체(린 마글리스) 작동에 의해 개체 개체가 자기 나름으로 소규모의 생활형식(life-form)을 자기 조직화하는 원리로서의 진화개념. 동학 등 남조선사상사 공유의 사상이요 디지털 시대의 생활상식이다.

6. 종합정보학적 집합지성 : 우주시대에 새로운 다양한 학문 모두를 하나로 종합하는 지성의 네트워크. 개별성을 하나하나 그대로 살리면서 종합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의 획일화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우주선 '스페이스 비글'이 그 선례다. 개체적 창의를 전제한 집합이므로 그 지성은 에드워드 윌슨 따위의 '통섭', 쏘셜 다위니즘, 전일적 우주생명론 강조의 에코 파시즘 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7. 쌍방향성에 의한 문예부흥 : 문화혁명 가능성(入古出新)

8. 변증법을 대체할 '아니다, 그렇다(不然基然)' 류의 생명논리학의 출현

촛불세대는 분명히 한 가지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으며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존중한다. (그 점에서 이것은 수운은 개체적 실천(各各明)이나 그것은 세계사의 밝은 기운(明明其道)과 연결되어야 운명이다)

그들은 미국을 위협만으로도 도움만으로도 일면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반미도 친미도 없다. 위협이 될 때도 있고 도움이 될 때도 있다고 본다. 현대 사회의 특징인 여러 가지 다른 상황과 여러 가지 선택조건을 우선 전제하고 인정한다. 한 사람도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이고 시민이면서 정치가이다. 개별적이면서 포괄적이고 우선 인간은 다양하다는 것을 기존 인식으로 전제한다.

이 전체 특징은 우선 뚜렷이 후천적이며 개벽적이다. 그런데 왜 인정되지 않는가. 왜 양극단의 폭력 악순환에 의해 훼손되고 괴로워지는가. 시위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요구 사항 속의 사상들.

<생명>
1. 광우병 쇠고기 반대 - 음식, 생활의 제일가치
2. 대운하 반대 - 생태, 환경의 중요성
3. 물문제 - 생명
4. 의료민영화 반대 - 생명
5. 공기업민영화 반대 - 생명의 중요성
6. 교육개혁 - 영성, 유년, 세계와의 일치

핵심은 생명과 생활.

<평화>
1. 채식 대안의 등장 - 생명, 평화
2. 미국, 유럽가축 동물사료 사육, 도축 비판 - 평화(생명관)
3. 미국과의 진정한 우정의 조건 형성의 요구 - 평화

아기 유모차 등장. 초중학교, 중학교 여학생, 여성, 주부, 광범의 청소년 주체

<풍류>
1. 비폭력 일반화 - 생명
2. 유머의 일반화 - 평화
3. 유희, 축제, 제의 - 프리드리히 실러의 문화혁명론
풍류의 새 가능성. 정치, 경제, 도덕, 자연 중심의 프랑스혁명 시월혁명의 비판
4. 밤새운 토론
- 화백의 가능성. 단상, 단허의 합좌시도
- 가르치는 자도 학생도 없고 모두가 토론자다
- 장시간 토론에 의한 전원 일치에의 지향
5. 음식나눔 - 신시장터의 등장가능성
6. <경향신문>이 전하는 바대로라면 디지로그(디지털아나로그문화) 출현 가능성과 함께 현실 삶에서의 동학이나 불교의 중도나 채식 가능성도 논의됐다.

- 방향을 청와대 쪽으로 한 것은 아직도 낣은 정치관의 반영
- 컨테이너 등장 결과
- 촛불의 방향 : 사방, 팔방, 시방으로 전우주 전세계로 열려 있어야 하고
- 토론 등 연관. 한 연관으로 일방 집중돼선 안 된다.
- 일방집중(연사, 대책회의 멤버, 사회)은 세뇌의 시작이다.
- 우주 전 방향으로 소리 주장, 유희, 촛불, 노래, 농담, 잡담까지도 <사방치기> <사방뿌리기>(탈춤과 같다)가 되어야 한다.
- 마당이 원형이면 일방적 폭력선동은 안된다.
(누가 '어디로 가자' 소리지르면 한 귀퉁이에서 '너나 가거라' 대답하면서도 반대로 기이하게 '비판적 갈등'이 있다. 이것이 '생명 평화' 촛불비폭력의 힘이다)

6월 10일 이후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한다. 한쪽은 낡아빠진 보수 꼴통들이요 다른 한 쪽은 좌파 시위꾼들이다. 이것은 순수한 촛불을 훼손했다. 바로 이 폭력선동자, 폭력조장자 양쪽을 나는 <까쇠>라고 이름지어 부르기로 한다.


▲ 촛불세대는 분명히 한 가지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으며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존중한다ⓒ프레시안

프랑스에는 데모 때마다 복면을 쓰고 나타나 폭력선동으로 그 결과를 난장판으로 귀결시키는 파괴자들을 가리켜 <Casseur. 까쇠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을 <키워드>로 떠올리기로 한다. 이 <키워드>(촛불세대의 문화)를 통해 사태전모와 위험을 제거하고 비판해야 할 문제점을 순식간에 이 혁명과 인식해야 하는 것이 신세대 문화이다.

<까쇠>는 '까는(파괴하는)' '까부는(난동부리는)' ' 까발리는'선동만 하는)'것을 직업으로 하는 놈(마당쇠 따위의 쇠)을 뜻한다. <까쇠르>를 이제부터 <까쇠>로 부른다. <까쇠>는 정부에도 반정부좌파에도 있다.(종북전술단위) 이들 목적은 아무 이익도 없는 (시민에게) 파괴뿐이다. 또 인터넷에도 있고 활자 신문에도 있다. 인터넷에는 <댓글알바>가 그것이고 신문에서도 <극우선동꾼>이다. 이것을 대중화시키는 것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나는 최초에 '줄탁동시'에 관해 말했다. 촛불의 후천적 개벽 요구가 달걀을 깨고 현실적으로 <개벽>하고 나오려면 바로 이같은 <까쇠>들이 설치는 폭력적인 어둠 속에서 <선천>과 연결된 <후천>이라 하더라도 종교, 교육, 문화와 연결된 기존세력, 즉 달걀 밖의 어미닭이 달걀의 바로 그 부위(정치문제)를 동시에 쪼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개벽은 <까쇠>들이 주장하듯이 선천을 완전히 섬멸하는 후천만의 단독행동이 아니요, 수구권력자들이 맹신하듯이 후천의 난동을 철저히 <까부수는> 낡아빠진 선천만의 보수주의적 군림이나 일부 부유층의 독점과는 인연이 없다.

해월은 개벽이 후천을 중심으로 하되 (달걀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병아리가 주인공이다) 선천의 어미(기존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가 새롭게 권리를 정립함으로써 선후천이 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대한 고대회복. 새로운 땟길(문예부흥)로서의 혁명(문화혁명)이요 우주와 역사변동이다.

수운 최제우의 동학은 '등불이 물 위에 밝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고 기둥은 낡았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다' 또는 "인의예지는 공자 성인의 가르침이니 버리지 말고 수심정기(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한국 고대 이래의 선도사상)는 내가 다시 정하는 바이니 따르라"고 했다.

동학의 조직이 포(包)와 접(接)의 이중구조로 돼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치다. 접은 후천 동학꾼의 기초 조직이고 포는 유불선 명망가들(유학자, 스님, 산에서 수련하는 도사)의 전선조직인 것이다.

경전도 한문과 한글 두 종류가 있고 주문도 두 종류다. 모두 다 식자층과 민중, 어른들과 아이들, 나성 가부장과 여성 주부들 대상으로 이중화되어 있고 둘 사이의 공동해석을 겨냥하는 해월 최서형 선생 등의 수많은 현실적 통합해석과 가르침들이 있다.

원불교에서도 소태산 선생의 진리(계시)와 실천적 삶의 직결된 관계(백지혈인의 기적 직후 며칠 만에 가장 현실적 문제인 저축조합으로 운동을 시작하는 역사) 또는 일원상 법신불의 대혼돈 원리가 모은 운동을 통해서 또한 개간사업, 교육사업을 통해서 질서화하는 것. 또는 일원상 법신불의 수양원리에 입각해서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의 개별적, 다층적인 정신 개벽운동을 전개하는 복합관계 등이 그것이다.

강증산의 주장도 이와 비슷하니 동서양 모든 종교 신들의 원탁회의인 통일신단을 기초로 해서 최초의 세계 정치기구인 UN의 이상적 모델이 세계 조화 정부라는 '혼돈적 질서'를 추구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동학과 같은 동세개벽(폭력용인)이 아닌 정세개벽(비폭력 평화변혁)으로 나아가되 개벽은 개벽인 점 등이다.

나는 이제 결론 부분에 왔다. 유모차 타고 나온 아기, 젊은 어머니들, 초등학교 중학교 여학생들. 그 어여쁘고 아름다운 촛불의 춤과 노래. 이 문화와 유희를 통한 생활 정치ㆍ생명 정치의 현실 변혁에의 요구와 지식인, 종교인 등의 도움이 연결된 이 몇 달 간의 촛불 -촛불에 대한 폭력의 훼손 과정- 뒤를 이은 종교에의 비폭력 평화 촛불시위의 과정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남조선 사상사의 두 번째 큰 흐름인 '정역(正易)'은 1879년에서 1885년 사이에 충청도 연산땅 김일부(金日夫) 선생에 의해 공표된 후천개벽기 한국과 민중과 아이들과 백성들과 세계 인류 전체와 지구 우주 중생 모두의 신비과학, 즉 역(易) 철학이다.

정역에는 후천 개벽기인 '기위친정(己位親政)', '십일일언(十一一言)', '십오일언(十五一言)'이라는 세 마디가 나온다. 기위친정은 개벽이 시작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던 것들이 임금처럼 정치를 담당하게 되는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럼 십일일언은 무엇일까? 이는 이제껏 매만 맞고 구박만 받던 나이 스물 미만의 청소년 어린이들과 젊은 여성들이 정치를 담당한다는 뜻이다. 바로 고대정치다.

십오일언은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때에는 기존의 지식인과 종교인, 정치인은 뒤로 물러나 교육, 문화, 종교에 몰두하면서 청소년과 여성의 정치를 음으로 돕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십일일언과 십오일언 둘 다 뒷부분에 일언(一言), 즉 한 마디가 똑같이 붙어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십일'의 청소년ㆍ여성 정치와 '십오'의 중년ㆍ남성ㆍ전문 지식인의 지혜와 경험, 영성적 능력이 이심전심으로 언어, 즉 '진리'를 통해 소통한다는 것이다.


▲ 나는 촛불에서 비움으로, 그 비움을 근거로 동학의 그 '모심'으로 전개되는 한 마디(一言)를 배운다. 또 광장을 지키는 것은 그 광장이 화백과 선서와 풍류의 새 생명사상의 후천개벽적 참 민주주의의 성소(聖所)라는 뜻을 배운다. 그 핵심에 생명이 있다.ⓒ프레시안

바로 이 한 마디, 즉 '일언'이야말로 달걀 속 병아리의 쪼는 행위와 달걀 밖의 어미 닭이 그에 맞게 같은 부분을 쪼아주어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탄생하는 개벽과 전환의 비밀스런 부분이다. 개벽이 임박했을 때는 바로 이 '한 마디(一言)'가 가장 중요한 노스님의 몽둥이요 호령 소리다.

촛불이 폭력에 빠져들어 선을 넘었을 때,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해서 옛 군사정권의 상투적 전술인 마타도어처럼 군대가 진주할 수 있는 계엄령 선포의 사유를 만들고자 너트며 몽둥이를 쓰고 물대포, 방패 등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정체불명의 '까쇠'들이 그것을 조장하는 폭력의 악순환 과정에서 촛불은 거의 꺼지려 했다.

이 절망의 순간에 종교계의 비폭력 촛불 시위가 개입한 것이다. 지난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3일 아침 원불교 교무들의 침묵의 기도집회가 동참했다. 그리고 같은 날 밤 평화 애호 개신교 목사들과 오는 4일 불교 스님들이 연이어 비폭력 평화 촛불 시위에 들어선다. 바로 이것이 어미 닭이 병아리와 똑같은 달걀 부위를 쪼아줌이고 십오일언의 그 한 마디(一言)다.

사제단은 지난 30일 절망한 촛불들에게 "괴로웠지요. 위로하러 왔습니다"고 말했다. 비폭력, 평화, 고시철회 주장에 이어 청와대가 아닌 남대문 행진 뒤 밤늦게 해산을 종용했다. 정부와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폭력을 중지했다.

다른 종교단체들도 이미 똑같은 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그들이 왜 어미 닭이며 선천임에도 십오일언인지 보자. 2008년 7월 2일 수요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사제단 전종훈 대표신부의 말이다.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생명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먹는 것에 무슨 이념이 있고 좌우가 있는가. 우리 국민은 누가 앞에서 선동한다고 쉽게 손뼉치고 따라가지 않는다. 사제들은 촛불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바른 국민인가 뼈저리게 느꼈다. 광장에 모인 촛불이 이를 증명한다. 색깔론은 이제 너무 상투적이다.

사제단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우선 촛불 민심의 발원지인 광장을 지키며 기도하고 매일 밤 미사를 열 것이다. 광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매일 촛불이 모이는 곳이다. 광장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이 자리가 무너지면 국민들의 마음도 무너진다.

'섬긴다'는 말은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말이다.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 단식은 '비움'이다. 비워야 그 안에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비우지 못하면 다른 목소리와 주장을 담아낼 수 없다. 이 대통령도 그 점을 좀 알았으면 한다."

나는 촛불에서 비움으로, 그 비움을 근거로 동학의 그 '모심'으로 전개되는 한 마디(一言)를 배운다. 또 광장을 지키는 것은 그 광장이 화백과 선서와 풍류의 새 생명사상의 후천개벽적 참 민주주의의 성소(聖所)라는 뜻을 배운다. 그 핵심에 생명이 있다.

불교 스님들 역시 비폭력, 평화를 강조하고 염주, 촛불, 연등을 갖춰 광장에서 108배를 올린다고 한다. 불교의 촛불 참가는 아마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문화적 개벽을 가져올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본격적으로 다루겠다. 약속한다.) 원불교는 '비폭력으로 생명 평화를!'의 현수막을 펼쳤다. 이 모두가 '십오일언'이다.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는 이어 말한다.

"우리는 인격의 크기와 예의로 싸워야 합니다. 오늘 행진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미소로 서로를 품을 수 있도록 합시다. 어제 우리가 불타버린 숭례문으로 행진했는데, '숭례'는 예를 높인다는 뜻입니다. 예의 첫 번째는 무엇을 먹을 것이고 무엇이 못 먹는 것인지를 가리는 것입니다. 시궁창에 떨어진 쌀 한 톨도 주워 먹을 수 있는 것이 예입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은 먹지 않는 것 또한 예입니다."

'십일일언'은 어떤가? <한겨레> 보도를 보자. 대답 없는 정부를 향해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목 놓아 외치던 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시민들은 때로 침묵이 함성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시민들은 전날에 이어 이 날도 웃음과 박수 속에 촛불 집회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다.

충북 청주에서 올라왔다는 한 대학생은 "사제단이 함께 해 시민들의 마음속에 다시 촛불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떠오른 것 같다"며 "불법과 폭력이라고 우리를 매도한 정부와 보수언론에 다시 맞설 자신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노정석(47) 씨는 지하철역에서 산 장미꽃을 사제단에 건넸다. 노 씨는 "사제단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 평화로운 촛불의 큰 힘을 되찾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촛불 시위는 밤 9시 40분께 함성과 노랫소리 속에 끝났다. 시민들은 "너무 일찍 끝나는 것 아니냐"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집으로 향했다.


▲ 역사의 차원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으나 후천개벽의 대세, 십오일언과 십일일언의 중대성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프레시안

신민철(26) 씨는 "학교에서 공부 못 한다고 꾸지람 듣던 학생이 집에 와 엄마에게 '착하게만 자라다오'하는 위안을 받는 느낌이다"고 말했다. 신 씨는 "50일 남짓 시청을 벗어나며 세상은 적막했다. 그 때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힘들어 할 때 사제들이 지지해줌으로써 다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일 새벽 최창열(26) 씨는 "이명박 정부와 우리가 무슨 정치적 이념이 달라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다만 잘못된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옳지 못한 정부를 규탄하는 것입니다"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분명한 것은 이 개벽 시대, 다가오는 다민중의 시대에는 십오일언에 한 마디(一言)가 있다. 십오일언의 반응 뒤에야 비로소 침묵이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는 점이다. 불교의 4일 시위는 아주 장중하리라 생각한다. 그 이후에는 더욱 아름답고 영적인 해방의 문화가 촛불 주위를 에워쌀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다시 공부해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한겨레> 칼럼에서 연세대 정치학과 박명림 교수는 이명박 퇴진을 반대하고 있다. 그대로 두고 이번에 나타난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나 역시 동감이다. 그리해야 한다. 나라를 생각하자.

그러나 어떤 보수들은 종교계의 촛불 참여를 마치 커다란 패륜 행위처럼 매도하고 있다. 한참 웃었다. 입장이란 무서운 조건이다. 이 신문 유신시절엔 아직 없었는가?

정부와 여당이 더 우습다. 평화와 화해의 실마리가 나타났는데 완연히 낙담 일변도다. 정치력이라고는 전무한 집단이다. 중상모략 수준이다. 공적으로는 의전적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사적 자리에서는 당황감 일변도라는 것이다.

'다 돼가는 판에 곤혹스럽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청와대가 술 먹고 춤추는 데 쯤인듯 착각하는 사람 말투다. 나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종교계의 가세가 저희들을 귀찮게 한다는 정도 뿐이다.

경찰은 어떤가? "'불법, 폭력 시위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선언한 검ㆍ경의 태도를 머쓱하게 했다"고 보도된다. 아마도 이 따위 '머쓱'해지는 태도의 근본 원인은 정권이나 경찰 지휘부의 그때그때 제못대로의 단속 지시였을 뿐, 근본적으로 법과 평화, 비폭력의 자세로 시민을 인도하는 경찰들의 지혜롭고 민주적인 '가이드 라인'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국회는 이 점부터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일이다.

역사의 차원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으나 후천개벽의 대세, 십오일언과 십일일언의 중대성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시절도 개벽기요, 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촛불과 시민들이 끝끝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석별하며 제거시켜야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터넷과 공중파, 활자신문과 길거리, 경찰과 정부요 시민단체와 정당, 그리고 시민들 도처에서 복면을 쓰고 폭력 경찰과 부딛쳐 싸우면서도 동시에 불만 지르고 내빼는 '까쇠'들을 경계하는 일일 것이다. 온라인까쇠, 오프라인 까쇠들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하기야 불난 집에 들어와 도둑질 하는 놈들도 있는 법이니!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과 동학, 불교, 역철학의 '이중 구속(double bind)', 그 해결책인 '이중 통합(double message)'과 양리성, 중도, 이중성, 철학으로 양극단의 폭력의 악순환을 넘어서는 중도 보수의 원리가 나올 차례다.

마지막 한 마디, 일언(一言)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정부에 있다.

정신을 차려라.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앞으로 2~3년 안에 남북을 포함한 동아시아 태평양에 거대한 정치ㆍ사회ㆍ경제ㆍ군사적 대변동이 올 것이다. 이어서 7~8년 안에 온난화와 바이러스 공격, 대전염병 창궐, 지진, 화산 등 생태적 대변동이 온다. 정신 차려라. 폭력을 유도해서 정치적 입지만 그때 그때 확보하려는 음흉하고 낡아빠진 꼼수정치를 빨리 포기하라. 이명박 정부가 제 잘못을 종교계까지 포함한 '10년 좌파 정권'에 떠넘기는 것 역시 까쇠다.

촛불을 물대포나 구속으로 막을 수 있는 시절은 이미 갔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징벌과 복수는 촛불이 아니라, 종교가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극우파시스트 군사집단이나 그들과 별 차이 없는 자칭 좌파의 엉터리 폭력주의자들에게 당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결국은 까쇠가 문제다. 절에서 사용하는 몽둥이는 쇳덩어리가 아니라 대나무, 죽비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승리'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승리가 아니라 시작이다.

미국 예일대 사회학자인 제프리 알렉산더 교수가 "종교적 상징인 촛불과 순수의 상징인 10대 소녀가 만나 이 운동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히 환상적인 일이다"라고 극찬한다. 이것은 개벽의 시작이다. 시작이다.


* 이 글은 김지하 시인이 4일 오후 원불교 은덕문화원에서 행한 소태산 아카데미 강연의 전문입니다. 편집자


김지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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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역은 인간존중, 인간완성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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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2017.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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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역>을 내놓은 김일부와 <정역> 연구의 대가인 학산 이정호가 추었던 영가무도춤




 <정역>(正易> 연구가인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가 일부 김항의 <정역>은 유학으로 시작했으니 우리 민족 고유사상인 풍류도를 계승해 동방사상을 낳았다고 분석했다.

 이는 <정역>의 대가인 석학 학산 이정호(1913~2004)의 전집 13권 출간을 계기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나왔다. <정역>은 동양사상의 뿌리인 주나라 역인 주역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한 김일부(본명 김항·1826~1898)에 의해 제시된 새 시대의 역이다.




 한글학자(국어국문학)였던 학산은 해방 전후 김일부의 정역을 보고는 30살 무렵 자신의 행로를 철학으로 선회해 충남대 총장을 지내는 등 철학자로서 살면서도 평생 정역을 절차탁마했다.




 학산의 장남인 이동준(81)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제자이기도 한 최영성 교수는 <정역>에 대해 “문자에 담긴 심오한 의미에다 언외(言外)의 지취(旨趣)가 곁들인 미언(微言)의 결정체로 ‘압축된 비밀코드’ 같다는 비유가 지나치지 않아서 은미할수록 더 드러나는 것이 역설의 법칙이다”고 말했다.




 그는 정역의 후천개벽 사상이 한국의 민족종교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이렇게 주장했다.

 “정역은 ‘지도(地道)’의 변화에 중점이 있다. ‘지축(地軸)’이 바로 서야 천지간의 잘못된 질서가 모두 바로잡힌다는 ‘정력정륜(正曆正倫)’이 그 기본 정신이다. 논리는 ‘가을의 도리’에 입각해 있다. ‘창조의 원리’보다 ‘변화의 원리’에 중점을 두고 미래상(未來像), 미래세계를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후천개벽(后天開闢)’ 사상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근대의 민족종교로는 동학(東學)을 비롯하여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이 있다. 지금은 없어진 보천교(普天敎)도 이 대열에 포한시킬 수 있다. <정역>은 이들 민족종교에게 이론적 토대의 하나가 되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근대 민족종교치고 <정역>과 사상적으로 연관 없는 것은 없다고 본다. 대개 19세기 중반 이래 민족종교가 잇달아 모습을 드러내면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그 중심에 우주의 변화에 따른 ‘후천변화론’이 있었다. 정역팔괘도를 보면 복희ㆍ문왕의 팔괘도와 괘의 배치가 다르다. 억음존양(抑陰尊陽)으로 상징되는 선천의 괘도로부터 조양율음(調陽律陰)을 상징하는 후천의 괘도로 바뀌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근대 민족종교에서 말하는 ‘개벽사상’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 <정역>을 내놓은 일부 김항





 그는 “근대 민족종교의 특징은 ‘민족 고유사상’을 모태로 한다는 점인데, 큰 틀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사상적 근간인 ‘풍류(風流)’의 정신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정역의 성격을 놓고 ‘유불선합일지정(儒佛仙合一之精)’, 즉 유⋅ 불⋅ 선 삼교의 정수가 합일된 것으로 보는가 하면, ‘선진유학(先秦儒學)’의 전통을 이어 유교 본래의 오의(奧義)를 재천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는 “근대 민족종교에서 <정역>의 내용을 중시하고 저자인 김항을 높이는 데에는 김항이 제시한 ‘선후천 변화의 원리’를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항과 <정역>이 민족 고유사상의 맥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또 김항의 <정역>의 뿌리가 유가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항은 <정역>의 첫머리 ‘십오일언(十五一言)’에서 유가의 도통(道統)을 밝혔다. <정역>이 공자와 유가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대역서£에서는 공자의 거룩함을 기리고, 공자와 맹자를 ‘만고의 성인’이라고 칭송하였다. 또 복희씨의 선천역(先天易)을 ‘초초지역(初初之易)’이라 하고, 자신의 <정역>을 ‘내래지역(來來之易)’이라 하여, <주역> 없이 <정역>이 나올 수 없음을 시사하였다.”




 하지만 김항의 학문과 사상은 유가에 그치지 않고 불가와 선가(仙家)까지 아우를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 한 차원 더 높은 곳에서 만나는 무언가 하나의 실체가 있다며 김항의 ‘무위시(无位詩)’를 예로 들었다.

 

 도내삼분리자연(道乃三分理自然) 도가 곧 셋으로 나뉨은 이치상 자연스러운 것

 사유사불우사선(斯儒斯佛又斯仙) 이에서 유교가 나오고 불교가 나오며 또 선도가 나오는 것을.

 유식일부진도차(誰識一夫眞蹈此) 뉘라서 알랴, 일부가 진정으로 이 도를 도습(蹈襲)한 줄을.

 무인즉수유인전(无人則守有人傳) 사람이 없으면 지킬 것이요 있거든 전해주리라.  

 

 또 김항이 유ㆍ불ㆍ선(도) 삼교에서의 중요 개념을 빌어 자신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한 점을 예로 들기도 했다.

 “‘대성칠원군(大聖七元君)’은 도교에서 북두칠성의 정령을 말하는 ‘대성북두칠원군(大聖北斗七元君)’이다. 또 금화정역의 세계를 불교에서 말하는 ‘용화세월(龍華歲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용화미륵불이 출현하여 교화하는 후천의 세계를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유리세계(琉璃世界)’라 하였다. 또 <정역>을 ‘정리현현진경(正理玄玄眞經)’이라 명명하기도 하였는데, ‘현현진경’이란 명칭에서 도교의 색채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정리’ 두 글자를 덧붙여 유가적 성격을 가미한 것이다. 이를 보면 <정역>은 공자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유불선합일지정(儒佛仙合一之精)’을 넘어선 무위(无位)의 경지를 추구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면서도 최 교수는 의문을 제기한다. ‘어느 것이 김항의 학문 본령인가? 유교, 특히 역학이 본령인데 여기에다 불교와 선가 등의 사상을 수용하여 외연을 넓힌 것인가? 아니면 유ㆍ불ㆍ선을 넘어서는 재래의 사상체(思想體)가 그 본령인데,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역학에 관련된 저술만 세상에 남긴 것인가, 그도 아니면 뭔가 숨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 실상과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것인가?’.




 그는 김항의 주장이 너무 파격적인 것인데다, 이미 동학의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21년뒤 <정역>을 완성한 김항은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또한 김항과 최제우가 같은 스승 아래서 공부한 사실도 밝혔다.




 “천도교 및 증산교, 김항의 후학들에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제우와 김항은 이운규의 문하에게 배웠다고 한다. 최제우와 김항의 교유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현재로선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동학의 주문이 이운규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세전(世傳)의 말들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이운규가 이들 세 계열의 문인ㆍ후학들에게 끼친 영향이 매우 컸고, 또 그들 사이의 사상적 연관성이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록 이들이 각각 ‘선(仙)’과 ‘유(儒)’와 ‘불(佛)’을 맡아 그 방면으로 발전시켜 나갔지만, 사상적 종교적 모체(母體)는 하나였을 것이다. 그 ‘모체’의 실상을 이운규가 문인ㆍ후학들에게 전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최 교수는 “동학과 정역과 남학은 미래세계를 예시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후천사상과 개벽사상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면 하나로 통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그린 미래세계 속에는 현세에 대한 비판의 논리가 함께 들어 있으므로, <정역>에서는 불완전, 불합리, 불평등한 현실세계와 미래의 이상세계를 미제(未濟)와 기제(旣濟), 나아가 윤력(閏曆)과 정력(正曆) 등으로 선명하게 대비하였다. 따라서 전제 왕조의 탄압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였다. 동학이 탄압을 받았고 남학 역시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김항은 이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항에게 역학은 알파이자 오메가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보호막이나 보호색 구실을 해낸 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특히 <정역>의 출현 이후 ‘간방’을 조선을 가리킨 것이라 하여, 간방 중심의 새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선언이 주체의식의 발로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문왕팔괘도에서 ‘간’은 방위로 동북방이다. 팔괘를 지리상으로 나누어 보면 우리나라에 해당한다고 한다. 계절로는 겨울과 봄의 중간이다. 겨울의 ‘종(終)’과 봄의 ‘시(始)’를 동시에 지닌 방위이니, ‘종만물(終萬物), 시만물(始萬物)’이라 함은 이런 의미다. 또 나무로 치면 ‘결실’을 의미하는데, 뿌리가 ‘시’라면 열매는 ‘종’이다. 이 역시 ‘시’와 ‘종’을 아우른다. 다만 열매는 성장할 때는 뿌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만 결실을 본 뒤에는 뿌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것은 진(震)이 변하여 간(艮)이 되는 이치와 같다. 지리상으로 중국을 의미하는 진방(震方)에서 동방문화가 출발하여 간방에서 완성을 본다는 말이 ‘제출호진(帝出乎震)’이요 ‘성언호간(成言乎艮)’이다. 간은 종착점인 셈이다. 여기서 <정역>에 담긴 주체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김항은 자신의 <정역>을 ‘간방(艮方)’과 연결시켰다. 자신이 말한 ‘제삼의 역’이 간역(艮易)임을 누누이 시사하였다. ¢정역팔괘도£를 보면 ¢문왕팔괘도£에서 ‘동방 진(震)’이 있던 자리에 ‘간(艮)’이 들어서 있다. 지난날 ¢문왕팔괘도£가 동아시아(중국 중심)를 판도로 했다면, ¢정역팔괘도£에서는 간방이 동방을 대표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필자는 간역에 담긴 정신세계를 ‘19세기판 동방사상이요 동인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금화정역이 주역(周易)과 같지 않다고 선언한 것부터가 주체의식의 발로라 하겠다. 난세(亂世)나 난국(難局)을 당하여 우리 민족의 자존심으로 북돋우는 동인의식이 고취되었음은 눈여겨 볼 만하다.”




또 <정역>과 민족 고유 사상과의 연관성을 이렇게 부연했다.

 “김항이 상제를 말하면서 이를 조화옹이란 말과 동격으로 사용한 것은, 용어상 민족종교와 맥락을 같이 한다. 즉, 대종교(大倧敎)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말하는 조화주(造化主), 교화주(敎化主), 치화주(治化主)의 개념을 통틀어 ‘상제’나 ‘화옹’이라 말한 것으로 보인다. ‘화화(化化)’는 조화ㆍ교화ㆍ치화의 공능(功能)을 말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화옹께서 친히 화사(化事)를 주의하여 지켜본다”고 할 때의 ‘화사’ 역시 조화ㆍ교화ㆍ치화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김항이 ‘내가 정성을 다하면 화옹을 만날 수 있다’고 한것은 내 속에서 하늘을 찾거나 신을 찾는 것을 의미해 한국사상 속에 담긴 영험성(靈驗性)의 측면을 고취한 것이면서 아울러 유교의 종교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한국사상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초월적 신’보다 ‘내재적 신’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내 속에서 천성(天性)을 찾고 불성(佛性)을 찾고 신성(神性)을 찾는 것이 한국사상의 본령이다. <삼일신고>에서는 “자기의 본성 속에서 그 분의 아들 됨을 구하라! 신성(神聖)께서는 너의 뇌 속에 내려와 계신다”(自性求子, 降在爾腦)라고 했다. 모든 인간의 머릿속 깊은 곳에 하느님이 내려와 계신다 동학이나 대종교에서는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지 않고 ‘모신다’고 한다. 내 영성 속에 있는 하느님을 모신다는 의미에서 시천주(侍天主)란 말이 나왔다.”




 그는 이런 근거를 들어 “김항의 <정역>은 유교의 종교적 측면, 아니 한국사상의 종교적 측면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또 김항이 말한 상제의 개념이 신도(神道)의 개념을 배태(胚胎)한다고도 보았다.

 “김항은 뇌풍항괘(雷風恒卦)를 중시하여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항’괘에 담긴 의미는 ‘한결같다’[久也]는 것이다. 이는 ‘변함없는 진리’라는 의미와 통한다. 김항은 뇌풍항괘에 담긴 의미를 중시한 끝에 이름을 ‘항’으로 바꾸기까지 하였다. 그는 ‘금화일송’에서 “화공이 붓을 놓음에 뇌풍의 도가 생겨났다”(畫 工却筆, 雷風生)라고 할 정도였다. <주역>에서 ‘뇌풍(雷風)’은 만물을 운행하는 ‘기(氣)’를 의미한다. 만물의 본질을 이루는 ‘정(精)’은 대개 수화(水火)로 표현한다. 김항이 뇌풍을 중시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뇌풍으로 표현되는 ‘기’의 작용에 의해 우주의 운행이 이루어진다는 점, 이점은 최제우의 ‘至氣’ 철학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그리고 뇌풍이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수식천공대인성(誰識天工待人成)’이란 기실 뇌풍의 의미를 염두에 둔 말이라 하겠다.”







» 학산 이정호가 <정역>을 연구했던 계룡산 향적산방





 최 교수는 한민족의 고유 정신의 중요한 축인 궁리진성과 함께 ‘고무진신(鼓舞盡神)이라는 게 김항 학문의 주요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궁리진성과 고무진신은 본디 역학 공부와 관련된 것이다. 전자가 궁리에 중점이 있다면 후자는 수양에 중점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공부방법을 아우르는 것을 ‘精義入神’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사람을 고무시켜 신명(神明)을 다하게 한다’는 고무진신은 공부 방법의 하나이면서, ‘감발흥기(感發興起)’ 같은 교육 방법과도 통한다. 감발흥기는 크게 느낀 바가 있거나 크게 흥미를 느껴 마음과 힘을 떨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감흥의 최고 경지는, 자기도 모르게 춤을 추고 스텝을 밟는 경우다. 정명도가 말했던 ‘수무족도(手舞足蹈)’ <二程全書>에서 “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를 모두 4회 언급하였다. ‘고무진신’은 이후 김항에 의해 ‘영가무도(詠歌舞蹈)’로 구체화하였다. 김항은 영가무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매우 골독(汨篤)하게 하였다 한다. 야간에도 영가무도를 열심히 한 나머지 무도를 한 자리에 풀이 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영가무도를 표방하거나 이것을 후학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다. 이 영가무도는 주자가 ¢소학제사(小學題辭)£에서 소학(小學)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소학의 방법은 청소하고 응대하며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순하며 행동에 혹 어그러짐이 없어야 한다. 행동(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혹시라도 한도를 넘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小學之方, 灑掃應對, 入孝出恭, 動罔或悖. 行有餘力, 誦詩讀書, 詠歌舞蹈, 思罔或逾) 그러나 주자가 말하는 영가무도는 아동의 정서함양과 관련된 교육 방법이다. 김항이 말하는 영가무도는 주자가 말한 것과 같지는 않다. 다만 심성수양의 한 방법이요 정감에 호소하는 것이라는 점은 같다. <정역>을 보면 ‘금화송(金火頌)’, ‘구구음(九九吟)’, ‘십오가(十五歌)’와 같이 각 편의 제목부터 ‘영가’를 암시한다. 이밖에도 ‘일곡(一曲)’, ‘가악(歌樂)’, ‘율려성(律呂聲)’ 등 영가와 관련된 말들이 등장한다. 영가무도는 김항의 학문 방법을 드러내는 중요한 화두요, <정역> 나오는 ‘우우이이(于于而而)’ 같은 것은 영가무도의 실체를 직접 드러낸 경우다. 김항이 영가무도를 중시하였음은, 후일 김항의 가르침을 따르는 집단에서 김항을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의 창시자로 받들었던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유ㆍ불ㆍ선 합일을 추구하는 가운데 불교를 그 중심에 놓았던 남학에서도 영가무도를 매우 중시하였다. 노래와 춤을 통한 이 수련법은 연담 이운규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를 확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전해 받은 정도가 얼마 만큼인지도 알기 어렵다. 이를 볼 때, 영가무도를 ‘궁리진성하기 위한 방법’만으로 이해하는 것 류남상ㆍ임병학, <一夫傳記와 正易哲學>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유가 쪽으로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정역>이나 김항의 학문 경향을 보면 ‘독서학역(讀書學易)’의 합리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고무진신에서 유래한 영가무도의 신비적 측면이 공존한다. ‘철학과 종교의 공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항이 창교(創敎)는 하지 않았지만, 근대 민족종교에서 자교(自敎)의 지도자와 함께 받들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동학과 남학, 그리고 김항이 공통적으로 중시하는 영가무도는 어찌보면 우리 고유의 선맥(仙脈)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이 성행함에 따라 그 맥락이 희미해졌던 한국사상의 종교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최 교수는 “김항의 <정역>이 우리 고유사상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중요한 암시는 있는 것 같다”면서 초치원이 말한 현묘지도와 접화군생과 풍류도와 접점을 이렇게 제시했다.

 “궁리진성의 차원에서 보면 ‘신이명지(神而明之)’, 즉 신령하여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데 지나지 않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하늘과 소통하는 신비한 경지를 말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의 소통이 한 경지에 이르고, 그 경지가 고조되면 영가(詠歌)를 하고 무도(舞蹈)를 한다. 그와 반대일 수도 있다. 즉, 영가를 하고 무도를 하는 가운데 한 경지에 이르고, 그 경지가 고조되면 하늘과의 소통(교섭)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영기(靈氣)가 주어지고 통할 때 완전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물이 된다. ‘기’로 표현할 수 있는 정감성과 ‘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험성이 이 지점에서 하나로 만나게 된다. 이처럼 ‘접(接)’ 자에는 한국사상의 특성이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김항의 영가무도에는 재래의 ‘접화군생’의 사상적, 종교적 맥락이 숨어 있다고 판단한다.”




 최 교수는 특히 <정역>에 제시한 황극역이 새 시대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성으로 제시했다.

 “<정역>은 ‘황극역(皇極易)’으로도 일컬어진다. 그 만큼 황극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김항은 ‘삼극(三極)’을 말하면서 황극을 무극과 태극의 중심에 놓았다. 본디 ‘황극’은 <서경>의 주서(周書), ¢홍범(洪範)」 편에서 나왔다. <서경>에서의 ‘황극’은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하나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準極]을 말하는 것이었다. 황극의 도는 ‘대중지정(大中至正)’ 넉 자로 요약된다. 그러나 김항이 말하는 황극은 임금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 아니다. <정역>에서의 황극은 완성된 인간상, 즉 ‘후천군자(後天君子)가 거할 중심처(中心處)’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천의 황극과는 대비되는 후천의 황극이다. 대중지정한 황극의 도를 임금만이 아닌 모든 인간들에게까지 끌어올려 ‘인간완성’의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인간존중사상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일부(一夫)가 만부(萬夫)요 만부가 일부인 것이다. 황극을 무극과 태극의 중심에 놓았다는 것은 미래세계가 ‘인존(人尊)’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김항이 ¢포도시(布圖詩)£에서 ‘수식천공대인성(誰識天工待人成)’, 즉 하늘이 하시는 일(造化)이 지인(至人)을 기다려 이루어진다고 한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지인’은 하늘을 닮은 완전한 인간을 말한다. 결국 인간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 껍데기이고 일월도 지인이 없으면 헛 그림자다”(天地匪日月空殼, 日月匪至人虛影)라고 한 말 역시 천공(天工)을 대신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임은 물론, 인간 완성의 후천시대를 여는 지인(至人: 眞人)의 등장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이전 시기 반곡(盤谷) 성이심(成以心: 1682~1739)의 <인역(人易)>에 담긴 사상으로부터 민족종교에서 말하는 ‘인존사상’까지 맥락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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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걷고 읽고 땀흘리고 어우러져 마시며 사랑하고 쓰고 그리며 여행하며 휴심하고 날며…. 저서로 <그리스 인생학교>(문화관광부장관 추천도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누리꾼 투표 인문교양 1위), 숨은 영성가들의 <울림>(한신대, 장신대, 감신대, 서울신대가 권하는 인문교양 100대 필독서). 숨은 선사들의 <은둔>(불교출판문화상과 불서상), 오지암자기행 <하늘이 감춘땅>(불교출판상).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우리시대 대표작가 300인’에 선정.

2011 모심으로 가는 길 김지하

피플[신동아 창간 80주년 기념 릴레이 강연 |

 ‘한국 지성에게 미래를 묻다’ ① 김지하]

모심으로 가는 길

“남성은 여성에게 큰절을 하면서 수천 년간의 죄업을 씻어라”

입력 2011.06.21 / 622호(p38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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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는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한국 대표 지성들의 릴레이 강연회를 마련했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2012 4월까지 1년간 계속되며 강연 내용은 신동아 지면에 실린다. 첫 회 연사는 김지하 시인이다. 김 시인의 강연회는 523일 오후 7시 반 서울 신문로 문호아트홀에서 열렸다. 강연에서 김 시인은 여성상위의 남녀평등을 강조하며 여성을 모시는 길이 후천개벽 시대에 인류가 사는 길이라고 설파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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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근 시 한 편을 먼저 인용한다.

열기(熱氣)그날 경기도 주최
세계생명문화포럼에서 호주여자
생태학의 발 플럼우드는
다섯 번을 똑같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인류와 지구의 대혼돈을 넘어서는 길은 단 한 가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하고 일체 존재를 다 같이 우주공동주체로 거룩하게 드높이는 모심의 문화, 모심의 생활양식으로 현대인간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변혁하는 길 그것뿐이다.

나는 그 뒤부터 어쩌면
발 플럼우드의 충실한 똘마니
어떠랴 서양의 한 젊은 여성의 뒤를 따라 동양의 한 늙은 남자가
중국이 세계에서 돈을 제일 잘 번다는 이 시기에 
도리어 철저히 따라감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불교도 동학도 개벽역학도 모두 다 그 뒤다

나는 이제 한 여자의 피끓는 모심의
세계문화대혁명 주장을 따라 가다가 가다가
몇 번이나 죽을 각오가 돼있다
熱情 없이는 삶은 아예 없는 것
.

(
‘흰그늘의 산알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 p.211. 2010 7월 ‘천년의 시작’ 刊)

이 강연은 신동아가 기획한 지식인 대상의 교양강좌로서 강연자 자신의 전공에 토대를 둔 현대적 교양,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혼돈, 대변혁의 시기인 현대의 동아시아·태평양 한반도의 한 개인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 도덕인 ‘모심’으로 가는 길과 그 길에서 조심할 것 몇 가지를 본인의 최근 열흘간의 일정을 통해 간략히 찾아보는 것이다.

현대 인류 최고의 도덕률

‘모심’이 무엇인가?

나는 천도교가 아닌 ‘나홀로 동학당’이다. 동학의 핵심교리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이고 그 실천윤리는 철저한 모심()이다. 그러나 모심은 단지 동학만의 윤리는 아니다. 2000년 전 나사렛 예수의 필사적인 사랑의 형식은 ‘섬김’이라는 이름의 모심이었고, 그보다 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가 펼친 ‘나무(南無)’라는 이름의 회향(回向) 역시 모심이었다.

공자의 사단(四端)에서 인()은 의()에 앞서고 퇴계·남명의 영남학에서는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성실()보다 인간이 하늘을 향해 바치는 공경()이 훨씬 중요하다.

이슬람은 아니 그런가?

이슬람 여성과 아기들은 지난 50년간의 지하운동을 통해 무하마드의 거룩한 첫 번째 메카시대 부인의 별명인 아크발라이 쇼크니아바(저 어둠 위에 참빛을!)의 한마디와 그에 대한 무하마드의 코란 제63절 하단의 기도 ‘저 어둠에 대해 진정한 존경심을 갖게 해주소서’의 둘째 마디를 끊임없이 외우는 ‘쎄벨리온()’ 운동을 통해 오늘 쎄벨리온과 똑같은 뜻을 갖는 재스민혁명의 놀라운 모심의 실천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과격한 젠더투쟁의 실패로 인해 이미 낡아빠진 남성가부장적 에코파시즘을 복권시킨 유럽 페미니즘은 오늘 도리어 그 고전적 신성성(神聖性)의 생동하는 해석방향에서 공양(供養)과 양육(養育)을 포함하는 ‘새크라리온(Sacralion)’이라는 ‘모심’을 들어올림으로써 유럽을 다시 한번 신선하게 하고 있다.

현대 유럽 최고의 영지주의자요 대안영성학교 발도르프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현대 인류 최고의 도덕률을 단 한마디로 ‘모심’으로 규정한다.

종말 뒤의 새 시대

모심!

종말적 개벽사태인 대혼돈 극복의 유일한 길을 모심으로 단정한 발 플럼우드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바로 그 모심 때문에 독거미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희생을 설명하는 ‘온난화’는 정당한 우주관인가?

지난해의 강추위나 지금의 일교차는 무엇이며 남극이 추워지고 북극이 더워지며 적도와 경도의 일치, 일본의 대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와 원전 방사능 누출과 지면침강, 미국의 토네이도와 사방에 번지는 수질오염과 해파리 등 죽지 않는 생명체의 등장, 이유 모를 심장해체로 갓난아기들이 돌발적으로 떼죽음당한 것과 며칠 전 보도된 바 제주에서 강남 가기 직전의 제비 3만마리가 한 군데 전선줄에 함께 모여 앉은 현상은 또 무엇인가?

개벽(開闢)이란 어휘 이외에 도대체 무엇으로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짐승마저 모심을 지키는 이 현상은 또 어찌 해명해야 되는가?

3
만마리 제비가 모여 앉은 그 앉음새의 철저한 간격을 어찌 봐야 할 것인가? 그것은 모심의 한 형식이 아니던가?





김지하 시인의 강연회는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김지하 시인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2월15일 형집행정지로 그가 석방되자 동료와 가족들이 목말을 태우며 교도소 앞을 돌고 있다.


‘매화산(梅花山).

?

‘준비하는 마음의 뜻으로!

아항!

저 기괴한 한계령과 얼마나 다른가?

공부하고 글 쓰는 시간 이외에는 며칠 동안 이 한계령과 비로봉과 매화산 이야기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역시 모심의 비밀이겠다. 특히 내가 최근에 몰두하고 있는 ‘서기(瑞氣)의 미학’에 대한 미의식의 조건으로서의 ‘모심’과 연계된 것이다. 여기에 괴기(怪奇), 산숭해심(山崇海深)의 숭고와 심오 등이 모두 직결된다. 거기에 여성성과 모성의 현빈(玄牝)과 어린아이의 현람성(玄覽性)이 마땅히 그 기초를 이룬다. 머리에서 떠날 까닭이 없다.

이후 14, 16, 17일 이외에도 모심은 여러 형태로 나를 붙들고 있었다. 이 다음 모심에 관한 본격적인 글을 쓸 때 상세히 밝힐 것이다.

4
14.

나를 치료해온 장병두(張炳斗) 선생이 서울에서 나를 아내와 함께 불렀다. 만나뵙자마자 대뜸 모심 이야기다.

“왜 화를 내는 거요. ?

“예.

“부인한테 왜 고분고분하지 않는 거요?

“때에 따라서 그런 일도….

“절대로 안 돼요. 부인은 큰 어른이고 선생은 아기요. 그것도 계집아이.

“그거….

“그래야 다 잘돼요! 몸도 낳고 일도 잘되고. 선생은 운이 커서 부인에게 화내기 십상인데 한번 화내면 그만큼 망해요 망해. 명심하세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웬일일까?

전 같으면 그 말에 화가 벌컥 났을 터인데 자꾸 웃음만 나고 화가 전혀 나질 않는다. 웬일일까? 생명이 예절을 좌우하는구나! 아하하!

이날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모심’을 익힌 것이다. 좌우간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4
16.

돌아가신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金玉吉) 선생을 생전에 나는 꼭꼭 ‘누님’이라고 불러 모셨다. 그 누님의 동상제막식 소식을 들었다.

문경새재 고사리 별장의 분수동산이었다.

아내와 함께 갔다. 200명 가까운 분이 오셨다. 김동길 교수의 주재로 기념예배가 있었다. 회식도 있었다. 많은 분이 참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주었고 특히 아내에겐 얼마 전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때문인지 참으로 애틋했다.

나는 떠나도록 내내 한 가지만 생각했다.

‘지족(知足)’이라는 말이었다.

누님은 내가 원주에서 출옥한 뒤 남모르는 집안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중에도 아내가 말 못할 괴로움을 한껏 겪고 있을 때 고사리 별장으로 나를 부르셨다.

식사 후 누님은 분수가에 서서 곁에 있는 내게 이리 말씀하셨다.

“김 시인, 내가 저 분수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성경 속의…?

“음, 김 시인, 한자로는 그걸 뭐라고 하지?

“‘지족’입니다.

“그래 지족. 김 시인. 이제 지족할 수 없겠나?

“네에?

“최고의 시인, 최고의 혁명가, 최고의 사상가가 되었어. 이젠 그만 만족하라고.

“무얼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우리 영주(나의 아내) 언제 행복하게 해줄 건가?

“….

“언제 분가(分家)할 거야? 바로 지금 독립 안 하면 영주 죽어! 머리 빠지는 것 봐! 두 번이나 약 먹었잖아! 죽어. 이 사람아! 김 시인. 독립 안 하면 나 누님 안 할 거야!

벽력이었다. 누님은 그런 분이었다.

모심은 지족의 산물

나는 잔뜩 얼어서 늘 나를 위해 비워놓는 아래 뜰의 조그마한 골방 침대에 가서 누웠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꿈결에서다. 문경새재 꼭대기 신선봉에서 도적떼 애꾸눈 부자(父子) 난쟁이가 내려와 하나는 내 머리를 잡고 하나는 내 다리를 붙잡아 기운껏 위아래로 잡아당겼다. 찢어 죽이자는 거였다.

“아아악-.

소리 지르며 깨어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이 금방 들어왔다.

‘떠나라는 것이로구나!

머뭇거릴 틈도 없었다. 누님께 ‘떠난다는 것’ ‘독립한다는 것’ ‘지족한다는 것.’ 세 마디를 작은 쪽지에 써놓고 바로 일어서서 수안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거기서 바로 버스를 타고 전라도 광주로, 광주에서 해남으로 달렸다. 해남 작은 여관에서 원주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아이들만 데리고 내려와버려라. 차일피일하면 못 온다. 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마침 나의 모친은 하와이에 있었다.

이튿날 아내와 아이들이 왔고 해남 후배들을 시켜 낡은 고가(古家)를 얻기로 했다. 그 뒤로 곧 장모님과 함께 누님이 오셨다.

나를 보고 빙긋 웃고는 아무 말씀 없이 떠나셨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족.

그렇다.

한계령은 내 마음속에 아직도 배회하는 꿈들, 야망들, 울분과 노여움들이었고 그 다음날의 비로봉은 바로 지족이었다.

아하 답은 나왔다.

모심은 지족의 산물이다. 내가 옛 꿈들, 야망들, 울분과 노여움을 다 털고 만족해야만 모두를 모시고 아내를 모시고 아기들과 여성들과 쓸쓸한 사람들과 고양이, 강아지, , , 산과 강물, 그리고 기계와 물건들. 끝내는 내 마음마저도 다 모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심은 립 서비스가 아니다! 먼저 남성 가부장제 전체의 역사적 한계에 지족해야 한다. 물론 진리 공부에 지족 따위는 아예 있을 수 없지만!

오일장의 즐거움

4
17.

내가 원주에 내려간 뒤 새벽과 아침의 공부시간 이외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세 가지. 토지문화관이 있는 회촌의 양안치(兩岸峙) 아래 오봉(五峰)에 가끔 가는 일. 원주 주변 산천들을 돌아다니며 공부하는 일, 그러고는 옛날 나 열세 살 때 목포를 떠나온 뒤 대학 때까지 내내 살았던 평원동, 봉천 냇가의 시궁창 판자촌, 그 가난뱅이 동네에 요즘 들어선 오일장에 닷새마다 꼬박꼬박 장보러 가는 일이다.

그 일이 그렇게 신나는 일이다.

나도 전에는 몰랐다.

옛 어른들은 그 오일장을 ‘희비리(喜悲離)’라고 부르셨다. ‘기쁨과 슬픔이 넘나드는 한울타리’의 뜻이다. 마치 내가 떠나온 목포의 밑바닥 뻘마당 하당(?)과 같은 희비리에서 서기 어린 백운산과 탈속한 미륵산 사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와서 살다간 귀래(歸來)와 원주의 대학들, 고등학교들이 밀집해 있는 흥업(興業) 사이의 토지문화관이 있는 양안치까지가 어찌 보면 나의 지난 삶 전체의 파노라마다.

바로 이 희비리 장바닥에 와 이빨 빠진 귀머거리 할머니들에게 들나물이며 고사리며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사들고 절룩절룩 집으로 돌아갈 때 나 스스로 깜짝 놀라곤 한다.

‘아! 이것이 참 모심이로구나!

여성상위의 남녀평등

그 뒤에 생각해보니 그럼 남자가 이제부터 여성 모심 뒤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달과 물과 그늘의 시대에 그 밑에 쭈그리기만 할 것인가?

바람직한 것은 ‘여성상위의 남녀평등’이다. 이 구조에서 남성이 창조해야 할 자기 일거리의 원칙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고 생각한다.

유럽의 저명한 과학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그의 논문 ‘세 개의 태양에 관한 상상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람직한 해의 기능은 앞으로 불의 추진력과 온도 중심의 Energy Bubble이 아니라 투명한 빛과 예감으로 가득 찬 Symtomm Aura로 변해야 한다.

그렇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이것을 태평성대라고 했다. ‘태양지정(太陽之政)’이다. 우리나라 고대의 천부경은 이것을 ‘태양앙명(太陽昻明)’이라 불렀고 이것을 화엄과 같은 뜻인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조건이라 했으며 그러한 개벽의 실행조건을 바로 ‘묘연(妙衍)’ 즉 여성과 아기의 생명, 생활 가치성, 즉 ‘달과 물과 그늘’의 생활창조의 적극성이라고 했다. 남성은 이제부터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훨씬 더 지혜롭고 훌륭해져야 한다. 버블이 아닌 아우라의 차원에서 말이다.

이 모든 나의 모심, 여성 모심이 꼭 어떤 여성 대권(大權) 지망자의 선전전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럴 때 쓰는 한마디 시구절이 있다. 명말 중국의 한 떠돌이 중이 지은 환조판이환서면(還肇判而環瑞面). 허허허허허. 뜻은 ‘그거나 그거나가 아니다.’ 오대산 간통수(干筒水) 같다.

작자 이름은 ‘개미화(改微花)라 하는데 법명(法名) 같지 않다.

에에잇!

또 유식한 척! 헤헤헤헤헤. .제임스 러브럭은 한때 내가 존경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가이아 복수설’은 정당했는가? 북극 대피설은 온난화를 강조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 직후 북극은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원자력 대체에너지론을 편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일본 원전사태에서 그리도 아득한 옛날 일인가?

스티븐 호킹의 ‘외계 도피설’은 또 어떤가? 그는 현대과학의 유럽적 상징이다. 그러나 제주 제비 떼 3만마리보다 더 나은가?

인간이 제비보다 더 모심의 능력이 없는 것인가? 제비보다 더 진화된 영성적 능력을 가졌다면 인간은 당연히 이 지구를 스스로 지키고 살려야 한다. 어디로 도피하겠다는 건가?

그 살림의 힘은 모심에 있고 모심과 살림만이 진정한 화엄개벽의 깨침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 그래야 종말 뒤의 새 시대를 맞는다.

전 국토의 도시화

나는 지난 46일 아침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버스 편으로 부산에 가는 도중 바로 이 ‘모심으로 가는 길’을 내내 생각했다. 똑같은 길을 그 지난해 2010년 봄 지인들과 함께 승용차로 간 일을 기억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나.

강원도 원주에서 경상도 청량산에 이르기까지 단 한 건의 생태파괴와 환경오염 사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기적인가?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씨가 제 고향이라고 특별히 봐준 것인가? 아니라면 그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서인가? 도대체 그가 한 일에 천하의 욕쟁이 김지하가 이렇게 감격하는 사건이 일어나도 좋은 것인가?

길게 전문적 설명을 늘어놓지는 않겠다.

나는 박정희씨가 시작한 국토개발 이후 그 추종자들의 일관된 개발 방향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당시의 중앙정보부장과 독대했을 때 그 방향에 대한 나의 질문에 단 한마디의 명쾌한 답변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전 국토의 도시화.

물론 십승지(十勝地)가 많은 양백간(兩白間)에 동해안 쪽으로 중앙고속도로가 뚫린 것이 불과 4~5년 전 일이다. 그러니 당시는 개발이니 나발이니 따위가 아직 들어설 때가 아니었던 것도 안다.

그러나 서부 중부 남부 등 그야말로 전 국토의 너덜너덜한, 이른바 ‘도시화’니 ‘개발’이니 ‘혁신’ 따위에 진저리가 난 내 입맛 때문이었을까?

한마디로 ‘서기권풍수(瑞氣圈風水)’였다.

현대생태학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모시듯 취급하는 ‘과밀초류지역(過密超留地域)’ 또는 ‘과소개활지구(過疎開豁地區)’ 요소들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도대체 웬일인가? 나는 좀체 현상에 감동할 줄 모르는 평소와 달리 몇 번이고 차를 세웠고, 몇 차례고 무릎을 쳤다. 금방 현대생태학에서 관행적으로 쓰는 ‘모시듯 취급’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 내 마음 안에 잃어버렸던 내 조국의 산천에 대한 상서로운 모심의 기이한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그 모심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일본 여성들의 해방운동

대표적 십승지인 풍기(豊基)의 그 서늘한 소백산 바람과 아파트 따위 걸레조각이 일절 없는 민들레 벌판의 그 애틋함이 함께 노래 부르는 상서로운 감격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주 봉화 뒷산의 낭떠러지 초미(初眉)와 그 앞 벌판의 현불사(現佛寺), 그리고 그 날 그 길은 아니지만 역시 한 현상이라 할 양양 구룡령(九龍嶺) 아래의 미천골, 제천의 박달재를 싸고 있는 ‘천등산(天登山)’과 ‘지등산(地登山)’ ‘인등산(人登山)’의 각기 다른 기반강물들과의 기이한 풍수(風水)!

이들이 모두 다 동서양 생태학과 풍수학자들의 현장보고들을 훌쩍 뛰어넘은, 거의 기적 수준의 서기(瑞氣)였으니 모심의 대상이 아니려야 아닐 수 없었다.

이조 중·후기의 지질서인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에 대강 이런 내용의 기사가 있다.

‘영주·봉화 뒷산의 낭떠러지 초미는 동해안에 첫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바위 속의 광석들이 수많은 빛으로 반짝이며 은은한 음악을 일으키며 숨어 있던 웬 기운을 뿜어내 주변에 가득 찬 독기와 탁기들을 모조리 정화한다.

모심으로 가는 길
충북 제천의 관문인 박달재의 목조각 공원.

지금부터 10여 년 전 대구 매일신문 문화부는 전문인력을 동원해 이 기사의 진위를 엄밀히 검색한 결과 음악 사안인지 한두 가지를 빼놓고는 모두 사실과 일치함을 발견, 크게 기사화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에 의한 저 너스레 많은 환경운동 따위가 아닌, 자연 스스로 자연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새롭고 진정한 생태자기치유운동의 압도적인 가능성이다. 어디 초미가 우리나라에만 있겠는가? 나는 지난해 언젠가 젊은 풍수학자 김두규 교수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출판기념회에서 그 축하연설을 겸해 한·일 간 공동의 초미운동을 제안한 바 있다.

바로 그 초미운동을 통해 특히 일본열도의 지진, 화산과 지면 침강 경향을 원천적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자연 스스로의 자연융기 가능성을 찾으라고 강하게 제안하고, 그것이 바로 이제껏 억압당해온 일본여성들의 창조적 해방운동의 시발점이라고, 왜냐하면 일본의 유명한 여황(女皇)들인 덴무·지토 천왕들의 능혈과 똑같이 초미가 음혈(陰穴)이고 또 그 연속선상에 신라 역사가 선덕여왕을 포함한 삼대(三代)의 여왕 전통을 창조했다고 강조했으나 대답은 코웃음과 지금의 저 수만명 죽음의 난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아니나 다를까! 지금 일본의 그 동해안 마을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의 잘못인가? 그러고는 그 대답이 겨우 ‘독도는 일본땅’인가?

죽음의 바다,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엄밀한 풍수운기설(風水運氣說)에 의하면 독도는 분명 양혈(陽穴)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잘못인가? 양혈이라면 당연히 그 위에 초미운동이 배합되지 않을 때 지금 진행 중인 개벽의 첨예한 시기에 가서 몇 번이고 또 폭발할 수 있다. 독도의 폭발은 일반적인 바람과 물의 관성대로인 이른바 ‘사할린의 평화’를 여지없이 교란하고 일본의 자랑인 ‘근역성수(謹域聖水)’의 신화는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래도 값싼 국토영유권 내셔널리즘밖에 갈 길이 없다고 믿는가?

반대로 초미의 음혈은 지금 ‘죽음의 바다’라고 하는 오호츠크해와 동해안과 일본해 현해탄(玄海灘)을 도리어 여름의 서늘함과 함께 겨울의 온화함을 유지하는 정역(正易)의 이른바 4000년 동안의 ‘유리(琉璃)의 세계’로 바꿀 강력한 조짐이기도 하다. 사철 해수욕은 물론이고 없어진 북어 대신 귀한 민어와 참치의 시절이 올 수도 있다.

서기(瑞氣) 아닌가! 모심은 자연스러운 솟아오름이다. 초미 앞 경건한 ‘우바이’(출가하지 않은 여성 불제자)들의 오랜 성지(聖地)인 현불사 또한 그렇다. 소의경전인 법화경(法華經)은 화엄경(華嚴經) 이전 최고의 생명의 약속이다. 이 괴질(怪疾)과 죽음의 시절에 땅 밑으로부터 솟는 거룩한 보살들이라 할 신성한 약초의 무성함을 계시받은 명말(明末) 서남부 중국의 ‘시공종(時工宗)’의 의학적 기적을 화엄경과 함께 일으킨 믿음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정글에, 황량한 남아공(南阿共)의 밀림에, 심지어 로키와 안데스에서까지 약초 채취를 시도하는 유럽과 미국의 의료재벌들, 그 슈퍼박테리아의 참담함과 중국의 화학적 재배 복약물의 공포를 생각해보자.

오늘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의 원천지가 왜 하필이면 저 깔끔한 선비의 땅 안동인가? 독과 약의 상관은 신비에 속한다 하니 이 또한 모심의 조건이 아닌가! 그리고 이 또한 ‘우바이’들의 샘물인 법화경의 꽃 ‘종지용출품(從地湧出品)’이 상서롭게 흐르는 현불사의 존재 아닌가!

어떤가?

경상도 아첨이 너무 심한가?

천왕, 지왕, 인왕

그러면 강원도와 충청도 이야기도 한번 해볼까? 양양 구룡령 아래 깊이 감추어진 골짜기 끝의 약수구멍 ‘불바라기’의 미천골은 어떤가? 시뻘건 약수가 불치의 아랫도리 결림과 다리 저는 병 따위를 깨끗이 고친다. 전문 풍수는 이 역시 미천골이 사실은 미친골로서 음혈인 데서 발원한 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어찌 생각하는가?

나는 이미 신문에 공개된 대로 정신병원에 열두 번 드나든 고질 정신질환자였다. 나를 완치시킨 것은 위대한 유럽과 위대한 중국의 술이 아니다. 백두산 천부의학을 배운 전라도 출신의 조선의술이다.

그 의술의 대강은 이렇다.

“생명도 조국도 세상도 천왕(天王)과 지왕(地王)과 인왕(人王)이 하나()로 통일돼야 건강해지고 좋아지고 해방되는데 문제는 삼왕(三王)이 다 있어도 맨 밑바닥에 있는 작대기 하나(), 즉 ‘물’, 수왕(水王)이 단단히 받쳐주지 않으면 삼왕통일(三王統一)은 불가능하다.

, 수왕은 무엇인가?

바닷물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우주생명의 비밀로서 이 힘이 물 위로 올라와야만 삼왕이 통일되는데, 마치 자라 입안에 먹이가 들어가서 오랜 세월 숨어 있다가 참으로 신묘한 힘을 가진 진국으로 변해서 밖으로 나와야 그 것이 곧 신약(神藥)이 된다.”박달재 이야기다.

박달재는 제천에서 충주로 가는 길목에 놓인 500m 높이의 고개다. 그런데 이 고개는 세 개의 산에 의지하고 있다. 800m 정도의 천등산과, 750m 정도의 지등산과, 600m 정도의 인등산이 그것인데 세 산은 거의 연속된다. 문제는 천부경처럼 천지인(天地人)의 이름을 가진 세 산이 모두 다 산 밑에 따로따로 세 개의 서로 다른 물길에 의지하고 있는 점이다. 천등산은 남한강, 지등산은 충주호, 인등산은 삼탄강을 끼고 있다. 이른바 천왕, 지왕, 인왕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수왕의 밑바닥을 얻어서 서로 연결하며 500m의 박달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스민 혁명과 ‘촛불’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박달재의 박달나무는 단군의 나무, 바로 그 ‘단()’을 말한다. 고조선 역사에 의하면 바로 박달나무 아래에서 신시(神市)의 제사와 호혜시장 및 풍류, 화백의 모임, 바로 그 ‘모심’을 열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소수이지만 유럽과 미국의 중도혁신 경제학자들과 일본의 경제통 요사노 가오루, 교텐 도요오, 이나모리 가즈오 등은 ‘따뜻한 자본주의’ ‘착한 경제’ 또는 ‘축적순환과 장기 지속’ 그리고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등 카알 플라니나 페르낭 브로델, 그리고 화엄경의 ‘동진부염 이생상도(同塵不染 利生常道)’ 등을 앞세워 ‘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를 추구한 옛 아시아의 신시 시스템의 현대화를 외쳐댔다. 그리고 일본 여성들은 ‘용녀(龍女)’ ‘역녀(歷女)’ 아메 요코와 같은 여성 중심의 경제사회 혁신을 들어올렸으며 미국 힐러리 그룹의 커피 파티나 유럽의 조안나 안젤리카의 ‘신의 우물’, 또는 뤼스 이리가라이의 ‘새크라리온’, 그리고 이슬람의 ‘아크발라이 쇼큐니아바(저 어둠 위에 참빛을!)’라는 이름을 가진 ‘쎄벨리온()’ 지하운동을 기초로 한 여성과 아기들의 ‘재스민 혁명’이 마치 우리나라의 2008년 ‘촛불’집회의 직접 영향을 받은 듯 거의 똑같은 유행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또 하나의 박달재 아닌가!

박달재에는 정도령이라는 이름의 골짜기 사당이 있다. 지금은 말라 있지만 깊은 물못이 있어 옛 신시나 솟대의 산상지유수(山上之有水), 즉 산 위의 물과 똑같다. 그리고 그 못 위에 서방대장군(西方大將軍)과 동방대장군(東方大將軍)의 두 장승 사이에 세 개의 놋잔(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의 삼태극(三太極))을 세운 상석이 있고 사방에 돌덤부락을 쌓아올렸다. 의미심장하다.

옛 단군 무속 위에 동서양 융합과 삼태극이 결합되고 그 주장을 오두막에 사는 젊은 여성이 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박달재의 금봉이

예부터 박달재는 여성들의 통로였다. 여성들의 장터나 토속신앙의 통로를 천지인과 수왕이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이 젊은 여성이다. 휴게소에는 여성장승들이 가득하다. 노래까지도 그러하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박달재의 금봉이야….

출세하려는 과거꾼이 그 고개에서 금봉이라는 한 여인에게 붙들려 출세를 포기한다는 노랫말의 뽕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정도령의 산시(山市·신림 쪽의 여성무속인들이 찾는 안덕사 굿당 등 치악산 산계열 등)와 반대편 남한강가 목계 선창마을의 유명한 파시(波市), 즉 산과 물 사이의 신시(神市) 여관이다. 이것은 현재 원주를 비롯해 전국 여기저기에서 다시 활발해지는 재래시장 5일장의 유행과 함께 앞으로 동아시아 태평양 신문명의 호혜시장(互惠市場)과 그 여성 주도의 시장소비판단력이 생산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창조적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이곳은 강원, 충청, 경기 세 지역의 물, , 길의 초점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 예맥, 백제, 고구려, 발해 및 궁예의 태봉과 고려의 왕건이 서로 차지하고자 오래도록 갈등하고 또 융합했던 바로 그 땅이다.

그러나 막상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금봉이다. 과거 정치를 뛰어넘는 금봉이의 정치력은 무엇인가?

하도 커서 모심이니 서기(瑞氣)니 하는 말은 줄인다. 나는 치악산 구룡사는 물론이고 궁예의 둔거지였던 영원산성,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귀래 미륵산 아래와, 문막후용의 견훤길과 삼거리의 중용 고구려탑, 황사영이 잡혀가 죽은 배론, 동학 지도자 해월 최시형 선생의 피체지 호저 고산리와 임윤지당의 자리, 무장의 신평못과 박달재를 나의 학교로 생각하고 산다.역시 금봉의 정치력 공부가 핵심이다. 왜 박달재의 이쪽저쪽, 박달재의 산시와 목계의 파시 사이에 그리도 환하고 유려한 유교 예절의 ‘모심’이 빛나는 성취들과 모심의 증좌들이 농후한가? 목계 입구의 수많은 마을 이름이 왜 서계(書契)며 율리(律里)며 엄정(嚴正)이며 원월(圓月)인가? 왜 박달재의 제천 쪽 한말 선비 의병들의 본거지로 유인석(柳麟錫)과 유중교(柳重敎)의 고장인 공전리에 자양영당(紫陽影堂)이 그리도 거룩한가! ? 신시, 호혜시장, 비단 깔린 장바닥은 그런 곳이다. 그래서 돈 가는 데에 마음 간다고 했다. 그런 유형들은 중조선 일대에 많고도 많다. 나는 그곳, ‘모심’의 자리들을 찾아다닌다.

여성은 소비와 생산의 주역

무슨 공부를 하나?

표현은 그저 ‘모심으로 가는 길’이지만 자세한 것은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차차 ‘모심으로 가는 길’ 시리즈로 발표할 것이다. 다만 박달재와 세 산과 세 물과 목계 선창마을을 다니며 항상 기억하는 경제학의 한 부분이 있음을, 그것이 금봉이와 연결돼 있음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폴 크루그먼의 ‘새로운 경제학 이야기’다. 여성은 현대경제학에서 소외돼 있다는 말은 전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현대 경제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영역이 소비이고 소비판단이며 그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여성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역할의 창조적 확장과 유기적 연관의 확보과정에서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생산적 기능은 또한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거의 원시적 상태에 가까운 경제학 가부장제 아래 묶여 있는 셈이다.

또 기억난다. 나의 전공 이야기다.

유럽 미학의 새 바람이다.

유타 베름케의 ‘미학과 경제’다. 그의 말이다. 오늘날 미학의 최전선을 이루는 것은 문화자본주의다. 문화자본주의는 문화를 원료로 하는 돈벌이나 문화적 의장이나 홍보수단 또는 브랜드를 일컫는 게 아니다. 그것은 칸트 미학의 이른바 판단력 비판의 영역인 것이다.

판단력 비판이 카를 폴라니가 신시의 현대화, 호혜시장 실현에서 제일 어려워한 획기적 재분배라는 정치적 중심성, 남녀 이원집정제 해결의 열쇠였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본다면 칸트로서는 족탈불급의 차원이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나라 원효(元曉)의 판비양론(判比量論)이다. 나는 박달재의 바로 그 서방대장군이 다름 아닌 칸트이고 동방대장군이 곧 원효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농담 아니다.

그만큼 앞으로의 경제에서 핵심 미스터리는 획기적 재분배이고 그에 의한 호혜와 교환을 객관적 시장 패턴 속에서 현실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화엄사상

지금도 세계 시장의 숨은, 그러나 곧 드러날 차원이 다름 아닌 섬세한 미학적 취미 판단 차원으로까지 발전한 여성 소비판단력이고 그에 토대를 둔 근원적인 재분배의 날카로운 획기성, 세목성, 혼돈성과 개체성, 그리고 심지어는 우연성이기 때문이다. 판단력과 비판력의 융합이 문화자본주의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나의 경제미학적 박달재는 농담은커녕 바로 서기, 그 자체요 당연한 모심의 차원인 것이다.

평등, 균등, 대동(大同) 위에 각자의 경제적 삶에 요구되는 천차만별이 이제는 하나로 이루어져 호혜와 교환의 이불이(移不移), ‘개체화하되 개체화 못함’의 이른바 월인천강(月印千江·달이 천 개의 강물에 다 따로따로 비침)과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한 톨의 작은 먼지 속에 우주가 살아 있음)의 경제적 화엄사상이 반드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나의 전공은 미학이다.

간다.

부산으로 간다.

부산 경암(耕岩)교육문화재단 특강이다.47.

특강 내용의 몇 줄기를 요약한다.

“신령한 거북이 먼 바다를 바라본다(靈龜望海). 경암학술상 시상식이 열린 부산진 앞바다 동백섬의 풍수학적 비의(秘義). 조선조 정조 때 동래사람 정조신(鄭朝臣)의 ‘순수역수기(巡修歷水記)’ 중 ‘가변도서록(嘉邊島嶼錄)’에 다음 구절이 보인다.

신령한 거북이 먼 바다를 바라본다는 문구는 신령한 거북은 아득한 깊은 바다의 나이 많은 거북으로서 문득 햇빛 아래 떠올라 제 속에 가득 찬 것을 토해서 그윽한 먼 바다로, 바다 바깥의 푸른 새 하늘에까지 널리널리 그것을 퍼뜨린다는 뜻이다.

거북은 여성이고 그 속에 든 것은 오랜 고통이 약이 된 것을 뜻하며 먼 바다는 태평양이고 바다 바깥은 미래요 우주다.

아기들의 떼죽음

“나는 지난 시상식에서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 중 넷째인 용옥이 가덕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빠져죽고 그 뒤 시체가 인양되었을 때 가슴에 끌어안은 아기와 함께 그 품속 깊은 곳에서 십자가가 뚝 떨어지는 장면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의 예언성을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의 ‘거북신령의 기운(龜靈跡)’으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미학원리를 ‘초ㅐ탁성(口卒啄性)’으로 설명했다.

“나는 또 대천재 김범부(金凡夫) 선생이 동래 국회의원 시절 하신 기이한 말씀 한 가지를 붙였다.

“정조신이 동백섬을 두고 먼 바다를 개척하는 거북이라 말한 것은 먼 바다가 독물로 들끓는 훗날 한울의 신약(神藥)을 거기 풀어 온 세상을 구할 여자와 아기들이 나온다는 뜻이었다.

“그 자리엔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와 시인 서정주(徐廷柱)가 함께했다고 한다.

“한울의 신약이 무엇일까? 바다는 지금 독물로 들끓고 있다. 일본의 대지진, 화산 폭발, 지면침강, 쓰나미에 원전방사능 누출까지 덮쳐 새떼와 물고기떼, 고래들이 무더기로 죽어간다. 사람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인도는 서양에서 달려온 이른바 ‘현자(賢者)’들로 만원이라 한다. 그들의 소망은 딱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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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달력이 끝나는 내년 2012년 겨울 갑자기 전세계를 가득 덮을 거라는 무수한 아기들의 떼죽음에 어떻게 대응하며 또 그와 함께 시작될 인류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현대세계의 문명 중심 허브는 분명 동아시아·태평양이다. 금융위기 직후 미국의 국가정보위원회는 전 세계 신문과의 공식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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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 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쪽(대서양)에서 동쪽(태평양)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둘은 그럼에도 각 지역의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는 다극체제가 형성돼가고 있다는 것.

모심의 주체는 여성과 아기들

똑같은 내용이 7년 전 미국, 일본, 중국, 북한, 남한의 동아시아 경제통 다섯 사람이 다섯 번에 걸친 장시간 비밀 경제회의에서 다음의 결론을 얻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EAST Rotterdam -the integrated network

‘동()로테르담’이란 네덜란드의 대서양 경제 문명의 허브인 로테르담이 동아시아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동로테르담’이 어디인가? 한반도의 동남해안, 서남해안, 동지나해, 그리고 현해탄이다. 그 동남해안이 어디인가? 바로 이곳 부산이다. 그 밑의 설명구인 ‘the integrated network’는 무슨 뜻인가?

‘중심성이 있는 탈중심’이다

미국 쪽 공식 견해와 하나도 다름없다.

나는 7년 전 그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화엄경과 후천개벽의 정역(正易)과 그것을 실천하는 동학과 예수의 ‘모심’과 그 ‘화엄개벽모심’을 제대로 해석하고 정확히 전망하는 방법으로서 통치와 처신 중심의 주역 ‘추연법(推衍法)’ 대신 ‘여성과 아기들의 생명 및 생활 중심성의 법칙’인 천부경 81자의 ‘묘연법(妙衍法)’으로 상호 결합하는 공부를 해왔다. 이것이 곧 ‘모심 공부’다.

부산 특강의 요약을 끝낸다.

화엄경의 핵심은 ‘이불이(移不移)’의 ‘탈중심이로되 중심성의 법칙’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달은 하나인데 천 개의 강물에 다 따로따로 비침’이다.그야말로 ‘획기적 재분배’의 신시는 호혜시장의 경제원리이며 ‘호혜와 교환’이 함께 움직이는 한 사회경제 아닌가! 이것이 ‘동로테르담’에 주어진 새로운 세계의 사회경제적 요구 아닌가!

이러한 화엄이 지금 다가오고 있는 개벽을 타고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의 실재라면 이것을 실천하는 길은 어디에 있으며 이 길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핵심 문제다.

모심! ‘모심’ 아닌가! 또 그 주체는 ‘여성과 아기들’ 아닌가. 그리고 다중(多衆)과 중생 아닌가!

4
8.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

나의 아내인 토지문화관 김영주 관장으로부터 바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과 강연에 대한 잡지 ‘신동아’의 요청을 전달받았다. 나는 즉각 거절했다. 왜냐하면 아내의 요구는 주역이니 정역이니 또는 ‘산알’ 같은 경락학 따위, 그리고 ‘복승론(復勝論)’ 같은 동양생명철학 얘기는 빼고 하되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나 지식인 상황으로 보아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니 꼭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뒷이야기는 좋은데 그것에 맞추려면 앞 이야기는 도리어 그 반대가 옳다는 내 속 의견이 있지만 평소 아내가 늘 하는 다음과 같은 말,

‘만날 민중, 민중 하면서 여성이나 아기들, 또 쓸쓸한 사람들 그 누구더러 들으라고 주역이니, 정역이니 산알이니 그 어려운 얘기를 혼자서 즐기느냐?

또 그 말이었기 때문에 우선 벌컥 화부터 냈다.

이것이 사단이었다.

‘모심으로 가는 길’의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화엄경도 후천개벽도 동학도 정역도 예수의 섬김도 천부경 81자도 사실은 모두 다 노자나 장자처럼 ‘여성 모심’을 전제로 하고 있고, ‘여성적 생명과 생활가치’를 그 해석과 전망 방향으로 이미 못 박고 있으며 동로테르담 허브의 ‘탈중심적 중심성’으로 마치 달과 물의 시대인 현대의, 태양력 중심의 윤달 체제, 365 4분의 1의 슈퍼버블시대가 아닌 정력(正曆), 달력 중심의 360일 무윤력 시대이고, 그러나 ‘달그늘’ ‘물개현상’ 그리고 ‘소산지기(疎散之氣)’의 용납 아래에서 파악되는 ‘흰그늘’의 시대이니 다름 아닌 ‘혼돈의 질서’요 왈, 동학의 ‘강태극(弓弓太極)’의 시절이라!

원주 주변 내 공부하는 산천 중 무장리(茂長里) 신명못가에 묻힌 여성 기철학자 임윤지당(任允持堂)은 가라사대.

‘여성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도 칠정(七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폭탄발언을 한 정조 때 사람, 저 유명한 기철학의 호랑이 임성주(任聖周)의 누이동생이다.

아내와 장모님이 모두 좋아하던 여성 사상가다.

나홀로 동학당

원주에 돌아와서다.

오래도록 나 혼자 끙끙대며 애써온 ‘화엄개벽을 위한 여성 모심의 길’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난 것이다.

4
8일 오후.

집에서 정신없이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앵산(鶯山)으로 달린다. 앵산이 어디이며 무엇 하는 곳인가? 나는 애초 ‘나홀로 동학당’이라고 했다.

1894
년 겨울 갑오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동학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은 남도권을 떠나 경기도 이천군 설성면 수산1리 앵산동에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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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피신이 아니었다.그 이전 제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 ‘남진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남쪽 별이 원만을 얻으면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은하수 이야기는 후천개벽의 완성이고 별은 개벽행동의 첫 시작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 시작과 끝에 남과 북이 있으면 가운데는 자연히 중()이 된다. 그러니 중조선의 원만한 조건을 말한다. 해월의 피신지가 그 뒤 이천, 여주, 양평, 남양주와 원주인 것은 결코 우연이나 단순한 피신 사정이 아니다. 바로 원만이다. 지형적 조건, 역사, 사람, 종교, 문화 등이 모두 연결된다. 정말 그런가?

날더러 과장이 심하다고 흉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내 직업이 시인인 것을 잠깐 잊어버린 사람의 주책이지만,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이것은 사실이다. 나는 최근 사람을 안 만난다. 그 대신 내가 만나는 것은 바로 소나무, , 강물과 벌판과 산이다. 이것도 거짓말 같은가? 외로운 삶의 형태에도 과장이 통하는가?

해월이 원주에서 체포당한 것, 탄허의 월정사 입정, 궁예의 영원산성 입산, 남조선 뱃노래의 주인공 강증산의 제자들 모임인 대순진리회 본부가 여주와 원주 사이에 자리 잡음. 모두 그렇다. 모두가 후천개벽과 화엄 연관행위다.

여성 월경과 ‘엄마를 부탁해’

‘원만’에서 가장 민감한 인간적 조건은 무엇일까? ‘여성 모심’이다. 해월의 중요한 가르침 중 두 가지가 이것이다

여성의 뾰족한 성질은 수천 년간 억압의 산물이니 이때마다 큰절을 하라. 절하면서 그 긴 세월 동안 쌓인 남자들의 죄업을 씻으라.

여성과 아기들은 후천개벽의 타고난 도인(道人)들이니 깊이 모셔라. 후천개벽은 북극의 태음(대빙산) 물의 변동(해빙)이고 그 물을 변동시키는 것은 여자들 몸속의 월경의 변동이다. 이를 모셔라.

마음에 안 들 것이다. 그러나 듣거나 말거나 개벽은 개벽이다.

어째서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 여자주인공들 가운데 악녀와 마녀가 그리도 많은가? 왜 소와 돼지, 닭과 오리, 물고기, 새떼가 그리도 많이 한꺼번에 죽는가? 이 두 가지는 무슨 관계인가? 왜 건강유지에 물이 가장 중요해지는가? 달에 6t의 얼음이 있고 혹성과 혹성 사이에 그린 포플러, 옐로 보넛 따위 수성(水性) 안개띠 같은 화이트홀이 압도하는가? 왜 태양흑점은 140일 이상 다운되는가? 유럽 통합천문대는 작년, 왜 지난 12년간 태양열이 최저로 내려갔다고 발표했는가? 왜 현대를 물의 시대라 하는가? 작년 늦가을 신문 보도에 따르면 ‘비경제권 여성 리더십이 전 인구 중 1270만명의 여성’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기록되는가? 반장, 이장, 동장 등을 여성이 맡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째서 신세대 사이에 ‘엄마’가 아이콘이 돼가고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저리도 인기인가?

나는 그날 앵산동의 앞 논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봉우리 ‘앵봉(鶯峰)’에 섰다. 해월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자의 못난 점, 그 뾰쪽한 편성(偏性)은 ‘그늘’이고 여자의 잘난 점, 부드러운 엄마와 시장판에서의 날카로움은 ‘흰빛’이다. 네 미학사상은 바로 ‘흰 그늘’이고 ‘흰 그늘에 대한 모심’은 바로 너의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의 ‘비결’이자 세계 문화대혁명의 ‘모토’다. 왜 안 지키느냐?

“권세를 여자에게 넘겨라”

아하!

나는 그길로 양평장터와 그 근처의 남한강 ‘두물머리’로 갔다. 장터는 해월 선생을 수발하던 28세의 동학당 여성 ‘이(蝨·본명 李水仁)’가 붙잡혀 반항하다가 찢겨 죽은 장소이고 두물머리는 그때 거기 숨어 있던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 강 위에 뜬 희미한 초생달을 보면서 ‘이가이다(蝨爲李)’라고 울부짖었던 곳이다.

‘이가이다’란 말은 ‘밑바닥이 임금자리에 되돌아온다(已位親政)’라는 소리다. 먼저 ‘이’는 그 여성이 스스로를 낮춰 부른 별명이고, 나중 ‘이’는 그 여성의 본래 성()이 왕족(王族)이었던, 쫓겨난 전주이씨(全州李氏)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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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물머리 나루터에 서서 가슴에 칼이 꽂히는 아픔으로 기억한 말이 이것이었다.

기위친정.2008년 시청 앞 ‘촛불’에서, 튀니지와 예멘 등의 재스민혁명 기사에서 그 재스민이 곧 쎄벨리온()과 같은 뜻의 꽃이름임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이 모두 이것이다.

2005
년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 강증산이 여러 남성 제자가 둘러앉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그의 아내 고수부(高首婦)에게 식칼을 들고 누운 자기 배 위에 올라타고 ‘지금 당장 하늘, , 사람의 큰 권세를 나에게 모두 넘기시오!’라고 부르짖게 하고 자기는 밑에서 두 손을 싹싹 빌며 ‘네에, 잘못했습니다. 지금 당장 다 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한 뒤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이제부터 꼭 이렇게 하라!

이리 가르친 것이 모두 이것이다.

모심이다.

두물머리 곁이 저 유명한 다산 정약용의 ‘마재’다. 그가 평생 집착한 ‘정전법(正田法)’이 무엇인가? 마재에서 남한강을 끼고 원주로 원주로 한없이 오다 들른 강천면 부평리의 쓸쓸한 한 묘지, 선조 때 사람 한백겸(韓百謙)의 묘지임을 기록한 두 개의 돌비석 앞에 선다. 둘 다 무덤 아래의 돌거북이 기이하게도 머리를 획 꼬아 비틀고 있는 모양새다. 이상하다. 그가 반역자 정여립의 시체를 거두었기 때문인가?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그의 이름 ‘백겸(百謙)’이 곧 ‘지극한 모심’이리는 생각에 부딪힌다. 나의 한때 아호가 ‘노겸(勞謙)’임도 뒤따른 생각이다.

시루봉에서 비로봉으로

마재 정약용의 정전제(正田制)와 부평 한백겸의 기전제(箕田制)는 이제부터 나도 여러 지식인도 필히 비교 연구해야 할 ‘공()’과 ‘사()’ 사이의 올바른 ‘중도적(中道的) 경제구조’의 원형이다. 거기에 아마도 참다운 삶의 살아 있는 ‘모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내게는 그 이름 속의 ‘모심’이 아프게 새겨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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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박달재다. 느끼고 생각한 것은 역시 대장군 상석 위의 세 개의 놋잔. 이른바 ‘삼태극’이요, 삼태극의 주인이며 밑받침인 물, 수왕, 이른바 과거꾼을 붙든 금봉이에의 모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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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횡성을 지나 서석(瑞石)의 태기산을 지나 양양 구룡령 밑 미천골로 향했다. 모심을 새기기 위해서다. 그러나 ‘불바라기’는 공사 중이라 한다.

그곳에 공사라니 우습기 짝이 없었으나 돌아오는 길에 인제 쪽 한계령으로 들었다.

한계령.

기괴하고 무서운 산괴(山槐). 돌아오면서 내내 산이 내 넋에게 불편했다. 도저히, 산을 그리도 좋아하는 나지만 빈 마음으로 ‘모실 수가 없다.

두려움은 모심이 아니다. 조심과 무심이 모심임을 상식으로도 알지만 이 두려움만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생각해보자. 큰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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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숙제는 나를 항상 분주하게 한다. 그러나 새벽 글쓰기와 아침나절 세 시간의 공부는 단 하루도 빠진 적이 없다. 오후 치악산 구룡사로 들어간다. 구룡사 뒤편의 치악산 왕초 비로봉(毘盧峰)은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산이다. 마치 화엄경처럼. 그 근처의 학곡리 출신 사람에게 비로봉에 대해 듣는다.

‘왜 비로봉인가?

일반적으로 시루봉인데… 왜?

“왜 부인한테 화를 내는 거요?

이야기는 이렇다.

‘본디는 아홉 용이 절자리와 봉우리 근처에서 들끓었다. 물이 흥건해 시루봉이라 불렀는데 창건자 의상(義湘)스님이 큰 기도를 해서 흥건한 물이 빼어난 봉우리로 변했다. 그 뒤로 화엄경 주불(主佛) 비로자나 사상을 말없이 가르치는 비로봉으로 바뀌어 우아한 산이 되었다.

이 비로봉으로 오르기 위해 산길까지 이름이 바뀌었다.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