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4

Kee Ho Kang - 호주 한인 캬운셀링연구소 강기호



Studied Counselor education at University of Scranton

"강기호 칼럼" 소개





글쓴이 : webmaster
조회 : 28,869 추천 : 0
강기호 소장


* 1986년에 호주에 이민. Wesley 정신장애자 사회교육부의 Coordinator와 Baulkham Hills TAFE의 이중언어 카운셀러와 International Student Coordinator로 심리상담 및 교육상담.
* 호주한인복지회 회장 역임.
* 현) 호주한인 카운셀링연구소의 대표.




저술 및 논술

"집단상담의 이론과 실제" 교보문고. 1987
"청소년(이민자/유학생) 진로지도 보고서" 호주한인 카운셀링 연구소. 2002
"한국 유학생 실태(만족도)조사 보고서" 호주한인 카운셀링 연구소. 2003

호주한인 카운셀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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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ee Ho Kang - 지난 주 google의 강기호칼럼에 올렸던 글 입니다....

https://www.facebook.com/keeho.kang.357/posts/484753852227043


Kee Ho Kang
19 January at 15:18 ·



지난 주 google의 강기호칼럼에 올렸던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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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장애자의 천국 / 목사? 사이비종교 교주? 망상증 환자?

호주 한인 캬운셀링연구소 강기호

이지음 한국에는 한국기독교 총회의 회장이라는 사람이 설교라기 보다는 초기 망상증 환자들에서나 볼수 있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망발을 대중 집회에서 자주하고 있어 사회적 물의를 야기하고 있다. 그의 언행을 보면 목사인지 사이비종교의 교주인지 또는 과대망상증 환자인지 혼란이 온다.

망상증적 존재가 어떤 모임의 카르스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는 현상은 가끔 있는데 지난 2010년대에는 네이버 블로그에 둥장한 드르킹(김동원)이 있다. 그는 인터넷카페에 경제적 공진화 모임을 만들고 이 경공모를 중심으로 거대한 사이비 종교적 공동체를 조직했다. 이 조직을 5단계의 피라미트식으로 계층화하고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어 강좌를 해왔다. 그는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증표로서 ‘옴마니밤배우쿰’ 이란 주문도 만들어 자신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할 때 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회원들에게 일본이 지진으로 곧 붕괴 될 것이므로 일본 난민들을 수용할 수용소를 개성에 만들어야 하고, 중국이 곧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일본 자위대를 인수해서 대 중국전을 준비해야 된다는 등의 세뇌교육을 했다. 또한 이런 국제적 사태로 인해 대기업들이 파산하게 될 것이므로 일본 난민들이 소유한 자본과 경공모 회원들의 자본을 합쳐 이 대기업들을 인수해야 할 수 있도록 거액의 주식자본을 준비하도록 기금 모으기 활동도 전개했다.

20대 대선때에는 선거기간을 활용하여 정치인을 이용하려고
했다가 구속되어 지금은 재판중에 있지만 한 때는 수만명이 그를 따르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블로그 누적 방문자 수는 2018년 3월 기준으로 980만 명이었고 그들 모임의 1년 운영비는 11억원 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상당수의 신도들이 계속해서 그를 면회 오고 있으며 조직과의 연결도 지속중 이라고 한다.
만약 그의 사이비적 행위가 계속 되었다면 아마도 이상한 주문을 중얼거리는 거대한 사이비 종교단체(통일교나 박장노의 신앙촌 같은)가 또 하나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독교의 한 교단에서 사이비 교주가 출현한 것이다. 그는 x교희의 목사라는데 정치적 망언들을 주일설교에서 만이 아니라 예배가 아닌 어떤 정치집단이 주최한 야외 장소에서 해오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07년 4월에는 경남 마산에서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주최한 강연에서 “이명박 안 찍는 사람은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것”이라며 “생명 책에서 안 지움을 당하려면 무조건 이명박을 찍으라”고 한바있다. 이처럼 비이성적 발언을 자주 하게되는 것은 그의 인지적 사고 과정에 이상이 생겨 ‘나는 인간을 초월한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망상적사고가 발현 되어서인 것이다. 또한 지난 10월 22일 청와대 앞 집회에서는 "문재인은 벌써 하느님이 폐기처분 했어요" "대한민국은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 나에게 '기름 부음'이 임했기 때문"이며 "나는 하나님 보좌(寶座)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단 말이야" 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드디어 망상증이 과대망상증으로 악화되고 있는것 같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러한 그의 정신병적 발언을 "아멘!!" "할렐루야!!"하며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십계명 중 3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이라고 냉철하게 비판하지만 그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상당히 많다.

이상심리학을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현상을 종교적 측면이 아닌 이상심리학적 측면에서 보게된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망상증과 과대 망상증세를 갖고있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마도 이대로 증세가 악화된다면 그도 자칫하면 지난1978년 남미의 가이아나에서 자기의 신도 909명에게 cyanide가 혼합된 Kool-Aid를 마시고 집단자살 하도록 한 다음 자기도 자살 한 ‘인민사원’의 카르스마적 사이비교주인 J. James 목사처럼 될지도 모른다. 그가 이러한 비극을 저지른 것은 그의 사이비종교적 교주생활을 알게된 미 국회에서 조사위원을 보냈고 이 국회위원이 실정을 파악하게 되자 그를 살해한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인들 중 전광훈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음을 볼수 있는데 만약 전광훈목사가 주장한바 처럼 ‘청와대로 진격할 결사대를 조직’한다는 망상이 현실화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서울 효자동 일대에 어떤 비극이 빚어질지 인민사원의 비극적 사진을 보게 될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일설에는 순교결사대를 자원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고 있다니 어떤 비극이 발생할지 예견할 수 없다.

망상증은 대체로 색정형, 과대형, 질투형, 피해형, 신체형, 혼합형, 불특증형 등으로 세분되는데 이병의 대표적 증세는 어떤 잘못된 인식(perception)을 틀림없는 사실처럼 믿는 확고한 신념 (unshakable beliefs)이 있는 점이다. 환자들이 갖게되는 이러한 비이성적 신념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 신념(beliefs)이 잘못된 것임을 아무리 지적해도 좀처럼 시정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망상증 환자들은 대개 편집적 망상(paranoid)과 환상(hallucinations)의 증상 까지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병이 이 정도로 심화되면 이 환자는 자기의 편집적 망상이나 환상이 틀림없는 사실(fact)이라는 신념에 더 깊게 빠진다. 편집적인 사람들은 상상력이 탁월하고 지극히 세세한 사건들의 증거까지를 수집하여 상당히 세밀하게 망상체계를 체계화 하게되므로 전문적인 지식이 결여된 일반인들은 이러한 망상체게를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

사이비종교 교주들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자기가 신과 동격
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과대망상증세까지 갖게 되어서인 것이다. 더욱 더 증세가 악화되면 환청(auditory hallucinations) 까지도 갖게 되는데 이 정도로 환청이 심해지면 조현병 (정신분렬증)과 구분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쯤되면 교주를 숭배하던 맹신도들도 점차 자기교주의 언행이 좀 이상해 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이비 종교가 이처럼 번창하는 이유에는 탁월한 망상증교주가 출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맹신도)들에게도 성격상의 미숙점이 있다는 점이다.

하바드 대학 정신과 교수인 Dr. John G. Clark, Jr.는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현혹되어 상당 기간을 그 집단과 함께 지내다가 나중에 심리상담 치료를 받게된 사람들을 연구한 바 있는데 그의 임상연구를 보면 이런 사람들은 대중 집회에서 교주의 안수를 받기 간절히 원했거나, 그의 명령에 따라 입신상태에 쉽게 빠지거나, 사지를 떨며 쓸어지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두뇌는 측두엽 간질환자(temporal lobe epilepsy)의 두뇌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외부자극에 쉽게 흥분하며, 종교적 의식주의 (ritualism)와 편집적의심(paranoia)과 영감상태(mystical states)성향이 있고, 진지하고 엄숙하며, 성적충동, 성적욕구, 유모감각이 낮고,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특징등이 있다고 한다.

또한 심리학자인 런던 대학의 Adrian Furnham박사는 이런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열등의식이 높으며 자존심과 자신감(self- confidence)이 낮고 현실에 대해 좌절감을 많이 느끼며 이런 고통스런 현실을 탈피하는 방편으로서 초라한 자신의 힘 보다는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힘에 의지하려고 한다고 했다. 특히 사이비교주를 맹신하게 되는 계층은 대체로 무지하고 사회적 경험이 단순하며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하고 감성적 사고를 하는 성향이 높다고 했다.

사이비종교의 출현은 대체로 국가의 교육 및 경제수준이 저조한 저개발국에서 빈발해 왔다. 하지만 2천 년대의 한국은 더 이상 저개발국이 아니다. 교육수준은 선진국 중에서도 상위에 있고 GDP도 상위권에 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어떤 특수한 이유가 있기에 이런 현상이 아직도 발생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할 것이다. 한국인의 문화사회적 특성이라던가 사회경제적 여건, 그리고 하나의 민속처럼 전승되어 온 무속적 사고등이 다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당한 기간을 연구해 보지 않는 한 함부로 논하기 매우 난해한 과제이다.

하지만 다른 영역을 제하고 정신과학의 하나인 정신건강 영역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인들은 이분야에 대한 관심이 아직도 별로없어서 인간의 두뇌나 신경전달물질들이 인간의 의사결정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 생각된다.
특히 인격장애자 (personality disorders)과 같은 영역은 거의 백지 상태이어서 아직도 정신병질자 (psychopathy)와 사회병질자(sociopathy) 를 혼동하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지음 너무나도 많은 사회병질자들이 사회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실을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가 아무리 더 높은 경재적 성장을 이룬다고 하여도 이지음처럼 이상인격체들이 사회적 지도자들도 부상한다면 아마도 한국사회는 이상인격자들의 천국이 되어 정상적인 인격체들이 받게되는 피해는 더욱 더 심화 될 것이다.

최근에도 한 특검검사팀이 과대망상증 증세가 완연한 환자의 진술을 재판의 증거로서 이용되고 있다. 어떤 용의자나 피의자가 수사를 받을 때 진술한 내용중에서 망상증 증세가 발견 되었다면 먼저 그 사람의 정신검증을 해보아야 된다. 검증결과 망상증 증세가 있음이 발견된다면 이런 사람의 증언을 사용해서는 않될 것이다.
앞으로 전목사의 과대망상적 발언들을 한국사회가 어떻게 이해할지 알 수 없다. 성령이 충만한 예언으로 볼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이비교주의 과대망상증적 발언으로 볼것인지…

오늘처럼 진실이 왜곡되거나 부정되고 망상증이나 과대망상증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망한 내용들이 사회에서 비판없이 용인된다면 아마도 한국에도 1978년 ‘인민사원’이나 1995년 ‘도교 지하철의 옴 진리교 사건’ 같은 끔찍한 비극이 언젠가는 발생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5박걸, Jae Gon Kim and 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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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영 기독교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셈.
서로 물고 뜯고 썩어서 죽게될것임이 훤히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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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 Ho Kang 기독교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 팔아 구멍가개 만들고 있는 가짜 목사들이 너무 많은것이 문제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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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h
====
주한 공사님을 통해 정확한 영어의역법을
알게 되었다.
즉 일본의 "자위대"는 National Self Defense Forces가
아니라 거룩한 공사님의 정확한 의역법에 따라
National Masturbation Forces 로 칭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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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ic Evolution (book) - Wikipedia

Cosmic Evolution (book) - Wikipedia

Cosmic Evolution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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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rophysicist Eric Chaisson argues in Cosmic Evolution that optimal energy flows are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origin and evolution of complexity, whether in stars and galaxies (photo courtesy STScI/NASA) or in carbon-based structures such as life-forms and the human brain.
Cosmic Evolution: The Rise of Complexity in Nature (2001) is a book by Harvard astrophysicist Eric Chaisson.[1] It examines cosmic evolution which includes the history of natural evolution from the Big Bang to the presen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merging multi-scientific discipline of Big History.[2] It offers an explanation of why simple structures billions of years ago gave way to more complex structures, such as stars, planets, life, and human beings in complex civilizations.[2] It is written for a general audience interested in science.

Overview[edit]

Chaisson argues that cosmic history can be examined from the perspective of energy flows.[1][3] He analyzes the flows of energy through various objects, and argues that these flows are relevant to understanding the relative complexity of these objects.[1] He suggests that a key measure for scientific analysis should be energy per second per gram, termed "energy rate density," and that analysis using this yardstick can be used to explain not only human evolution but cosmic evolution.[3] He sees energy as "work per unit time" which he equates with power, and shows how energy rate density in some structures has increased over time.[3] For example, in Chaisson's view, the human brain uses a much greater amount of energy, relative to its size, than a galaxy.[4] He suggests that energy lets us make "order out of disorder"; for example, an air conditioner, which draws current from an electric outlet, can turn a less-complex zone of lukewarm air into two more-complex zones of hot air and cold air, and in so doing, it reverses the disorder in a room.[1] According to his view, organisms do much the same thing with energy but in a more complex way, by taking in food instead of electrons, to keep themselves from disintegrating and becoming less complex; he analyzes energy flows in not just organisms and society, but in inanimate structures such as stars, galaxies, planets.[1]
Chaisson notes that increases in complexity are consistent with the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according to one reviewer, the second law might suggest that complexity should decrease with the universe "slouching toward disorder."[1][5] However, Chaisson argues that complexity can increase because complex structures such as a star can "generate and sustain complexity by exporting enough disorder to its surrounding environment to more than make up for its internal gains."[5] From this perspective, Chaisson offers a definition of life as an "open, coherent, space-time structure maintained far from thermodynamic equilibrium by a flow of energy through it."[1]
Reactions to Chaisson's book are generally positive, although different reviewers took issue with some of his points and writing style. Biologist Daniel W. McShea originally noted that Chaisson is "prone to using inflated language," but a decade later in another review of his work notes that "Chaisson offers data showing a trend in what he calls energy rate density ... over the history of life (and even over the much longer history of the universe), that's really saying something."[5] Critic Stewart Kauffman found the book to be a "wonderful discussion."[3] Critic Hillel Braude wrote "Cosmic Evolution draws from a rich scientific palette to paint a colorful explanatory model of the ascending complexity in nature."[4] Critic Charles Seife wrote highly about Chaisson's book although he criticized Chaisson's definition of life as being "such a broad definition" that it becomes meaningless, while acknowledging that Chaisson's analysis "gives the theory some numerical muscle."[1] Many more excerpts from reviews of this book are collected here [6]

Choice of units[edit]

Chaisson chose to use the obsolete cgs (centimetre, gram, second) system of measurement, rather than SI units as is standard current practice, for his calculations and numerical estimates - thus quoting energy in ergs (one ten millionth of a Joule), also using calories, and sometimes kilocalories as alternative measures of energy.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c d e f g h Charles Seife (book reviewer), Spring 2001, Wilson Quarterly, COSMIC EVOLUTION: The Rise of Complexity in Nature, Retrieved Sept. 1, 2014, By Eric Chaisson. Harvard Univ. Press. 274 pp. , "...Harvard University astrophysicist Chaisson ... Energy lets us make order out of disorder. ... defines life ... open, coherent, space-time structure maintained far from thermodynamic equilibrium by a flow of energy through it....problem with such a broad definition of life is that it becomes meaningless...
  2. Jump up to:a b Book Review by George Ellis, Nature 412, 587-588 (9 August 2001), doi:10.1038/35088114, Review title: An energetic view of nature, An energetic view of nature, Retrieved Sept. 1, 2014, "...stepping back to confront the broader scheme of things..."
  3. Jump up to:a b c d Stewart Kauffman, June 30, 2010, NPR, Why Is The Universe Complex? Broken Symmetries, Information, Energy, Work, Retrieved Sept. 1, 2014, "...Eric Chaisson’s Cosmic Evolution is a wonderful discussion ... well supported ... energy density per gram universe per second has increased over the course of cosmic, biological and cultural evolution...
  4. Jump up to:a b Hillel Braude, Perspectives in Biology and Medicine, Volume 45, Number 2, Spring 2002, pp. 307-309, 10.1353/pbm.2002.0021, Cosmic Evolution: The Rise of Complexity in Nature (review), Retrieved Sept. 1, 2014, review of The Rise of Complexity in Nature. By Eric J. Chaisson.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2001. Pp. xii + 274...."Cosmic Evolution draws from a rich scientific palette to paint a colorful explanatory model of the ascending complexity in nature ... analysis of energy flows therefore provides the opportunity to map the evolution in complexity of the cosmos...."
  5. Jump up to:a b c Daniel W. McShea (book reviewer), November-December 2001, Volume 89, Number 6, Page: 1, American Scientist, Measuring Complexity, Retrieved Sept. 1, 2014, "...a complex structure such as a galaxy, a star or an organism is an open system, able to generate and sustain complexity by exporting enough disorder to its surrounding environment to more than make up for its internal gains..."; Complexity and the Arrow of Time Lineweaver et al. (eds.) Cambridge Univ. Press, 2013 (review), Science, vol. 342, pg 1319, 2013, "Only two other trends on the scale of life’s history have been documented quantitatively—those in body size and in hierarchy or nestedness (prokaryotic cell, multicellular individual, colony). Energy rate density is a fine candidate for a third."
  6. ^ [1].

External links[edit]

06 `퀘이커` 박성준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 호흡(呼吸)수련 강조 - 미래한국



`퀘이커` 박성준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 호흡(呼吸)수련 강조 - 미래한국



`퀘이커` 박성준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 호흡(呼吸)수련 강조

미래한국
승인 2006.04.10



朴씨 설립 한백교회, 주기도문 대신“해방실천 하느님을 믿습니다”신앙고백문 사용

한명숙 의원의 남편인 박성준씨는 퀘이커이다. 그는 출소 후인 1994년 일본 도쿄 릿쿄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따고 다시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대와 펜실베니아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를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퀘이커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반면 박성준씨는 퀘이커에 대해 2001년 겨울 ‘새길이야기’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ere is 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정수(精髓)다”고 정의했다. 성령(聖靈)이라는 타력(他力)으로 구원받는 정통 기독교 보다 내면의 신성(神怯)을 깨달아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얻는 동양적 사상과 유사성을 보이는 부분이다. 박성준씨는 퀘이커적 ‘깨달음’을 위해 호흡(呼吸)수련을 강조한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베트남출신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수련”을 권고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를 수련하라고 권합니다.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숨쉬기는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과 깨어있는 의식 사이를 다리 놓아 줍니다. 언제라도 마음이 산만해질 때면 그대의 숨을 사용해서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숨을 다스리는 것은 몸과 마음을 그대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고 싶으면 즉시 그대의 숨을 먼저 관찰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처음에는 정상적인 숨을 쉬다가 차츰 숨을 길고 느리게 하여 숨결이 곱고 잔잔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숨의 길이는 꽤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가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mindfulness)`의 상태라 하겠습니다”민중신학자 안병무씨와 한백교회 설립박성준씨는 1987년 민중(民衆)신학자 안병무 박사와의 공동발기로 ‘한백교회’를 설립했다. ‘한백교회’는 소위 해방신학(解放神學)을 표방한 교회로서 서기(西紀) 연도 앞에 통일염원 몇 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가령 통일 염원 44년, 1988년 10월 23일로 표기함). 한백교회의 예배는 주기도문(主祈禱文) 대신 ‘한백공동체 신앙고백문’을 암송하며 마무리되는 등 일반교회의 예배형식과 큰 차이를 보인다. 1988년 만들어진 ‘한백공동체 신앙고백문’은 “우리는 이 세계를 나날이 새롭게 변혁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해방(解放)의 실천을 행하시는 야훼 하느님을 믿습니다”를 시작으로 14개의 항목을 두고 있다. 주요부분을 발췌해보면 아래와 같다. “3. 우리는 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억압과 착취와 소외와 차별이 있는 곳마다, 그러한 온갖 비인간화의 현실을 혁파하려는 민중의 열망이, 야훼 하느님의 해방(解放)하시는 능력(=靈)과 한데 어우러져 해방(解放)사건의 원천적 힘이 되고 있음을 믿습니다.4. 우리는, 민중적 당파성에 뿌리 내린 해방(解放)의 실천이야말로 하느님나라 운동의 본질적 요소라고 믿습니다. 6. 우리의 회개는 구체적으로 이 땅의 민주화와 자주화, 평화통일 운동에 동참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10. 우리는, 야훼 하느님의 자유롭게 해방(解放)하시는 능력(靈)이 살아 숨쉬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고 섬기고 친교 하는 기쁨의 공동체, 새 영의 힘에 취하게 하는 춤과 노래, 말씀, 명상과 기도로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신명나는 `예배공동체`이기를 원합니다.12. 우리는, 분단과 예속, 억압과 소외 등, 온갖 모순과 부조리와 질곡으로 점철된 한반도에서 이 민족과 민중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14. 우리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중산층, 청년, 학생, 지식인으로서 민중이 주인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에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박성준씨는 2001년 이래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민중신학-함석헌-퀘이커-동학-영성/박성준 - 퀘이커이야기 - 늙은 전사의 노래 권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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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함석헌-퀘이커-동학-영성/박성준 퀘이커

2005/12/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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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民衆’ 理解의 새 지평을 모색하며-

박 성 준

1999. 11. 3




一. 문제제기




서남동은 한국민중의 ‘恨’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독특한 기여를 했다. 나는 ‘한’을 민중신학의 핵심 주제로 설정하는 데 대하여 서남동에게 확고한 지지를 보내왔고 그 점에 있어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동학=崔水雲) 또는 ‘내재하는 빛’(the Light within) (퀘이커=George Fox)을 민중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놓는, 그래서 ‘한’과 더불어 또 하나의 핵심되는 주제로 삼는 민중신학의 새로운 얼개를 구상해 보게 되었다. 민중의 ‘한’이라는 하나의 핵심에 편중되면 역사창조 주체로서의 민중의 생명력(자율성, 자주성, 창조성, 자기 구원의 주체성)이라는 다른 하나의 핵심이 가려지거나 약화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중 안에 있는 ‘恨’은 보면서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빛’(=그리스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민중의 일면 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서남동이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의 언어인 ‘한’을 제시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 안에 있는 ‘빛’을 제시할 차례이다. 민중의 ‘한’과 함께 ‘빛’을 보고 그 상호관계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 양자를 민중신학의 중심에 역동적으로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남동의 신학에서 민중의 ‘한’과 ‘고난’이 민중의 ‘메시아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이라는 기독교의 正統 敎義에 있었다. 민중의 메시아성을 이렇게 대속적 능력 쪽으로만 치우쳐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민중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빛과 창조력에도 동시에 주목하면서 그 메시아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병무가 이따금 언급하며 경탄해 마지않았던 민중의 자기초월의 능력은 ‘초월’이면서 동시에 민중에게 본래 ‘내재’하는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씨(함석헌)인 민중의 속 깊이 숨겨져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 가능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씨알의 살아 숨쉬는 보배로운 생명력, 그 경이로운 역동성에 새삼 눈뜨고 이를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21세기와 새 천년(the New Millenium)의 ‘새 민중신학’을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나는 결코 민중에 대한 美化나 낭만화(romanticize)를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말해야 한다. 낭만화된 관념 속의 민중, 비현실화되고 박제화된 민중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민중, 질긴 생존력으로 일상의 삶의 터전에 뿌리내린 ‘생활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 자기 속에 ‘한’을 품고 살지만 ‘빛’도 품고 살아가는 온전한 민중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이해에 다음과 같은 점들을 보완하거나 새롭게 추가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첫째로, 함석헌의 민중 이해로부터 ‘씨알’을 받아들이되 <ㅇ・ㄹ>의 각 요소를 적극적으로 深化 發展시킨다. 즉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 >는 내재적인 하늘을,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나타낸다고 그가 스스로 설명해 놓은 그 각 項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서 한층 더 심오하고 풍부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사상적 源泉(resources)으로서는, 한쪽으로는 東學이라는 큰 사상의 젖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함석헌 자신이 훗날 그 멤버가 되었던 퀘이커의 사상,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 퀘이커 사상(Early Quakerism)이라는 큰 광맥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로, 민중의 목마름의 重層구조를 천착하는 것이다.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 곧 민중의 영성은, 예컨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日常의 안전과 편안함, 경제적 안정 등에의 갈망이라는 層位가 있는가 하면, 우정과 고독, 사랑의 아픔과 번뇌,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민 등의 層位가 있으며, 영혼의 虛飢, 생애를 통해 지속되는 인격의 성숙과 자기완성에의 渴求, 진실과 진리를 향한 목마름, 疾苦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등의 層位, 이렇게 複雜하고 重層的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

셋째로, 민중신학은 ‘사건’의 신학을 보완하기 위해 ‘사건’과 ‘日常’을 손의 앞뒤면 처럼 설정하여, 사건과 일상이 갖는 각각의 의미와 함께 둘 사이의 긴밀한 상호관련성을 올바르게 밝힐 필요가 있다. 민중은 1970년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연쇄적으로 분출하는 활화산 기슭에서, 또는 언제 터질지 모르게 꿈틀대는 화산맥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민중은 아마도 더 많은 일상의 시간을 너른 들녘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여름 한철 가뭄에 강바닥으로 스며들어 소리 없는 지하수로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땅 속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없다면 장대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샘의 분출은 있을 수 없다. 물이 콸콸 솟는 샘은 실은 땅 속을 흐르는 저류(the underground stream)와 연결되어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sustained) 있는 것이다. 사건과 일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건’의 신학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가 요청된다.

넷째로는, 민중 공동체 운동이다. 이거, 저 70년대, 80년대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민중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운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근본적으로(radically) 다시 묻고,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







二. 민중 이해의 새 지평




1. 민중신학의 先驅: 함석헌의 씨알 사상




함석헌은 씨알의 은유로 역사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根幹이 되는 사람, 곧 민중을 나타내고자 했다. 민중은 씨알이다. 태어난 그저 그대로인 씨알, 풀씨 같은 존재. “씨알이란 다른 거 아니고 자연이지요. 문명은 결국은 자연에서 멀어져 가는 방향이고(참 문명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니깐 지금은 사람의 큰 잘못이 자연을 잊어버리고 자연에 반항하고 하는 건데, 근본의 절대적인 의지ㄹ ㅏ ㄹ까 그게 곧 자연인데, 자연 속에 있는 건데----”(“씨알의 소리, 씨알의 사상” <씨알의 소리> 76년 9월호)

씨알은 이 끝에서 보면 있는 그대로인 ‘나’이고 저 끝에서 보면 하나님이라고 한다. 결국 민중 곧 씨알과 하나님은 이 끝과 저 끝으로 서로 연결된, 둘이 아닌 한 <>이다.




“민중이 뭐냐? 씨알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 사람이다. 은 실(實), 참, real이다.............정말 있는 것은, 은, 한  뿐이다. 그 한 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씨알의 설음”, 함석헌 전집 제4권, 66면)




나아가, 함석헌은 씨알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알의 ‘혼’을 불러내자고 한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불러내느냐가 문제다. 속에는 다 개인의 행위와 역사의 사건으로 영향을 입지 않는, 입힐 수 없는 혼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씨알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일할 터를 찾고 일할 거리를 기다린다. 그것을 능히 알아 불러내어 동원하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바다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제4권 129면)




이와 더불어, 씨알은 마땅히 ‘남의 종교’가 아닌 ‘내 종교’를 가져야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 위대한 종교지. 하지만 남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우리 초가삼간 보다 작은 집이다. 내 종교가 큰 종교지, 내 것이 되지 못한 종교...........종교의 허울이 무슨 위대한 종교일 수 있을까? 제 종교만이 큰 종교다. 제 종교를 가진 한 사람만 있어도 온 세상이 다 구원될 것이다.”(“씨알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큰 것은 하나님이요, 큰 것은 나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종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까지 뚫리지 못한 종교,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 아니다. 나의 종교가 종교다. 교도(敎徒)가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라..........아무도 이 결혼의 중간에 서지 마라.”(“씨알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민중은 자기 속 깊이에 계신 하나님, 그 창조적인 생명과 무한한 힘의 源泉에 깊숙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민중 곧 씨알은 자기 속의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한다. 내 안의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해답을 간절히 구하고 거기에 맞추어 각자 자기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재정립하고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를 관철해야 한다.

씨알 속에, 곧 내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하나님(‘나라’, I am.)을 일깨우고 ‘불러내자.’ 그리하여 하나 하나의 씨알은 함께 새 시대, 새 나라를 바로 지금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2. 퀘이커 사상과 민중신학의 만남의 가능성




퀘이커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시대는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격동의 시대, 혁명과 변화의 시대였다. 당시 영국 국교회에서는 외적인 종교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국교에 반대하는 침례파와 장로회파의 교회들은 신앙을 성경의 권위나 공식적 신조와 대체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식이나 신조에 염증을 느끼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갔다.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사람들은 개인적 체험의 종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갈구하고 있었다.

죠오지 폭스(George Fox, 1624-1689)도 그런 사람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구하는 자들’(seekers)이라고 불렀다--중의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했다. 製靴工의 徒弟, 소먹이 목동 등으로 지내는 동안 홀로 고요한 묵상에 잠기는 습관을 익혔고,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에 잠겼으며, 온 피조세계의 오묘하고 미세한 소리에도 예리하게 반응하곤 했다. 열 아홉 살 때에 집과 부모의 곁을 떠나 절절한 목마름으로 진리를 찾는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에 나섰다. 4년간의 영혼을 달구는 숱한 시험과 연단 끝에 Pendle Hill이라는 작은 山頂에서 그는 드디어 진리를 깨닫고 환상(vision)을 보았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성직자들)에게 걸었던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외적으로는 내가 의지할 아무 것도 없게 되었을 때, 내가 어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니, 그는 너의 처지에 맞게 말씀하신다.’(‘There is one, even Christ Jesus, that can speak to thy condition.’)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자 내 가슴은 歡喜雀躍하였다. ........ 주님을 향한 나의 갈구,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지식에의 열망은 더욱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Fox, 11)




그가 얻은 다음과 같은 진리는 재래적이고 인습적인 신조들(creeds)과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精髓이다. 우리 각자의 깊은 속에 하나님의 씨앗(the Seed), 하나님의 영(the Spirit), 그리스도(the Christ),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즉 성직자나 교회의 儀式이나 어떤 다른 매개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역사적인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아 (신적인)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계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영속된다는 것(the continuing revelation). 이것이 그의 새로운 깨달음의 내용이었다. 자기 자신 속에 불타오르는 이 깨달음(revelation)을 지니고서, 죠오지 폭스는 세상를 향해서 힘차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돌아섭시다. 자기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러한 (즉 하나님을 모신)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갑시다.”라고.




그 깨달음을 근거로 그는 오늘날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는 별명이다.)로 알려진 신앙적 結社의 기치를 올렸다. 죠오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physically)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 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음으로 해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죠오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transformed)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私的인 내면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 초기 퀘이커들(Early Friends)은 당대의 사회에 불을 지피는 불씨의 전령이었다. 그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 온갖 종교집단, 모든 사회조직에 불을 붙였다.

죠오지 폭스는 17세기 영국인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과 우리 시대를 위해서도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 그는 과거의 사람만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깊은 개인적 경험과 메시지, 그리고 초창기 퀘이커들의 묵시록적인 삶과 행동은 우리 시대의 긴박한 필요에도 절실하게 말을 걸어오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함석헌은 197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의 펜들 힐(Pendle Hill; A Quaker Center for Study and Contemplation)에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씨 사상을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나 자신이 비교 검토해 본 바로는 그의 씨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酷似하다.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과 더불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에 주목할 수 있다면 주체로서의 민중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민중을 세계와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데 새로운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동학의 전통으로부터 배우기:




우리는 이제 19세기 말엽 한반도에서 출현한 동학운동, 그 중에서도 1860년-98년의 水雲 崔濟愚와 海月 崔時亨, 그리고 갑오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동학의 재건을 의도했던 甑山 姜一淳의 사상과 실천에 주목할 차례다.

동학은 19세기말, 조선의 봉건제가 한계에 도달, 근대사회로 이행되기 시작하는 세기말적인 일대 전환기에 피어난 한국사상문화종교의 꽃이고, 조선의 근대역사가 시작되는 發源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 동학이 창시되던 1860년 당대의 조선의 현실에 대한 수운의 인식은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 질서의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 위기 그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 신분제의 문란(紊亂), 도탄(塗炭)에 빠진 민중의 잦은 봉기와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으로 과거의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구미제국의 근대문명이 압도해오는 가운데, 전통적 종교인 儒佛仙은 정신적 지주나 새로운 사회이념의 기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윤리와 가치규범의 붕괴, 사상의 혼돈, 민중의 정신적 방황이 극도에 달한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사회에는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민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있었다.

절망과 암흑의 시대, 바로 그 한가운데서, 수운은 先天문화 질서의 종말과 후천개벽의 새 문화, 새 시대의 도래를 예감했다. 수운은, 동양문명의 해체와 몰락, 서양문명의 침략적 폭력성을 확인하면서, 전통적 지배이념인 朱子學을 대체할 새로운 道學을 갈구했다. 그는 前人未踏의 새 길, 동서양의 기존의 종교와 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찾아내어 新天地, 新文明을 구현하고자 고난에 찬 구도의 길을 홀로 걸었다.

“庚申年에 이르러 전하여 오는 말을 들으니 서양사람들은 한울님을 위한다는 뜻으로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들의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의 교를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므로, 나는 과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느니라.”<東經大典, 前編 五>

“서양사람들은 전쟁을 하면 이기므로 쳐서 빼앗아 그들의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리하여 천하가 다 멸망한다면, 어찌 입술이 상하여 없어지면 이가 시려 견디기 어려운 것과 같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東經大典, 前編 九>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6년째 되던 1860년 음력4월, 그의 나이 37세 때 그는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통해 得道에 이른다. 그의 신비체험은 한울님 마음과 하나가 된 경지에서 ‘天語’를 듣게 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울님과의 사이에 문답 형식으로 여러 달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내용을 냉철히 반성 체득하면서 일년 여에 걸쳐 동학의 신관, 세계관, 인간관, 修行法 등을 글로 체계화해 나갔다. 득도한 이듬해(1861년) 6월부터 그는 布敎에 나섰다. 득도로부터 체포되기까지 불과 2년 6개월 사이에 수운은 漢文體의 <東經大典>과 한글로 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수운의 가르침은 고통과 시련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그 시대의 민중들의 가슴에 심었다. 사방에서 그의 소문을 듣고 그의 거처인 경상북도 慶州 龍潭亭으로 찾아오는 민중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수운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따랐다.

1864년 3월 수운은 41세의 나이로 斬首刑에 처해졌는데, 세상을 어지럽게 한 邪術의 傀首라는 죄목이었다.

수운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해월은 道統 承繼 후 殉道할 때까지 30여년 간 가시밭 길을 걸으며 조선 땅에 동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人乃天’, ‘事人如天’의 교의로써 교도들을 지도하는 한편, 지배권력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接’조직을 확장해나가다가 1898년(72세) ‘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스승 수운의 뒤를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2) 동학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데 있다. 사람이 곧 한울님, 한울사람, 섬김 받아야 할 신령한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이 이러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지극히 공경(敬人)하게 되고 한울님을 공경(敬天)하게 되며 한울님의 뜻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주체로서 바로 서게 된다. 즉 현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신령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한울사람(God's person)을 통해서만 사회와 세상의 聖化(한울나라의 실현)가 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주체성은 우주 가족의 일원으로서 더 큰 생명인 우주를 어버이로서 섬기며(敬物), 우주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相生(서로 살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적 존재이다.

동학에서는 지금까지 저 밖에 있는 신(God without)을 향해 놓았던 祭床과 位牌를 나를 향해(向我) 돌려놓도록 하는 새로운 祭祀法을 창안했다. 이것을 ‘向我設位’라고 하는데, 저 밖에 있는 초월적 신을 상정한 인류 문명 문화 樣式의 일대전환과 정신개벽을 이로써 상징한다.

또한 ‘同歸一體’라고 하여 후천개벽운동의 동반자들의 공동체, 새 인간(한울사람), 새 천지(한울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인류문명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신령한 도덕적 주체들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이 공동체는 타종교 공동체의 전통을 존중하며 관용의 정신과 개방적 태도로써 후천개벽의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길동무(道伴)들의 공동체이다. 동학에서는 특히 생활의 주인이자 新天地 창조의 주역으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강조된다.




3) 강증산은 스무 살 무렵에 동학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甲午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시체가 가득 널려진 폐허의 강산을 여러 해에 걸쳐 편력했다. 그때에 그는 구천에 사무치는 울부짖음과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민중의 고통을 보았으며 민중이 그 얼마나 절실하게 생명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가를 사무치게 절감했다. 따라서 간증산은 자기의 목표를 동학의 동세개벽 실패 이후의 민생의 재건과 활인(活人)에 두게 되었다.

갑오동학혁명이 민중반란의 조직적 확대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함으로써 후천개벽을 실현하려 했다면, 강증산의 실천은 하나 하나의 이름 없는 민중들의 그날 그날의 먹고, 살고, 입고(衣食住), 고통받고, 병들고, 죽고, 두려움과 굶주림과 죽임 당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구체적인 삶, 곧 민중생존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매일 매일의 自助 自活의 작은 공동체 건설과 협동생활의 조직을 통해 후천개벽을 실천해 나가는 방향이었다.(김지하 사상기행, 2권, 206-9면 참조)

그렇다면 강증산의 사상과 실천은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를 꾀하려는 우리들의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동학의 인간관은, 매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퀘이커 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민중신학은 퀘이커 사상의 인간이해로부터 배움과 동시에 동학의 인간관을 민중이해에 적극 도입함으로써 민중의 대상화, 객체화를 극복하고 민중의 ‘주체화’에 진실로 기여하는 큰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三. 민중적 영성론의 가능성:




1. 영어권에서도 spirituality란 말이 등장한 것은 지난 30년 어간의 일이라 한다. 이렇게 새로운 말이고 보니 한국에서는 그 용법이나 의미를 둘러싸고 적잖은 오해와 혼선이 있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카리스마 집회나 성령파 교회들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연유로 해서 민중신학자들은 애써 이 말을 기피했고 금기시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남미 해방신학 쪽에서 spirituality라는 범주를 사용하여 심도있는 신학작업을 전개하는 것은 보고서야 새로운 관심과 눈으로 이 말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중신학 내부에서 spirituality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 드문 것 같고, 여전히 개념의 혼란이 가셔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 자신 아직 본격적인 공부가 부족하여 spirituality의 정의조차 내리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민중적 영성론의 필요성과 가능성의 예감만은 절실하다.




2.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했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씨의 혼’이라. 혹시 이것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닐런지? spirituality는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존재를 관통하고 그 존재를 떠받치고 그 존재를 推動하는 영적 힘, 에너지, 불꽃과 같은 그 무엇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우리가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spirituality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spirituality는 기독교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인의 영성, 무신론자의 영성도 있을 수 있다.(나는 사실 감옥에서 무신론자들의 심오한 영성에 무수히 접했다.)




3.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닌가. 나는 앞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이라는 범주로 다루어온 영역과 크게 겹치는(overlap) 영역이어서 민중의 恨과 민중 spirituality의 관계와 구조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4. spirituality는 우리의 日常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의 욕망과 애정, 고통과 슬픔, 고독, 야심과 좌절감, 불안과 초조, 공포와 희망 등등, 이 하나 하나가 spirituality와 깊이 관련된다. 어떤 사람의 영성은 그가 자기 속의 그 영적 에너지 혹은 불꽃을 가지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가와 깊이 관련된다. 즉 spirituality는 신앙이나 종교성과 관련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매일 매일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compassion)과 자비(mercy), 평화와 화해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 참된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갈구하는 정치적 각성, 깨어있는 양심, 도덕적 민감성 등은 민중적 영성의 불가결한 요소들(integral elements)이다.




5. spirituality는 개인적인 것 만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적인 것이다. ‘나의 영성’과 동시에 ‘우리의 영성’이 존재한다. 개인주의에 물든 사회와 그 문화(individualistic culture)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촛점이 맞춰지기 쉽다. 그래서 개인적 영성은 자칫하면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頹落할 수 있다. 개인적 영성에만 집착하거나 매몰되면 영적 개인주의와 영적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고 영적 우상숭배의 위험에 떨어질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적 영성의 경우에는, 개인의 영적 생활(personal spiritual life)에 기울이는 집중력이 떨어질 때, 영적 메마름과 세속화라는 또 다른 위험이 있다.

개인의 영적 체험과 공동의 영적 수련은 상호 의존적이다. 서로 보완하고 서로 북돋아 준다. 민중신학은 개인의 영적 체험 또는 개인적 영성수련과 공동체적 영성 또는 영적 공동 생활(spiritual life together)에 같은 비중을 두어 이 양자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

공동체적 영성은 함께드리는 예배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각자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바친 영적 생활의 밀도는 함께 드리는 예배의 質을 좌우한다.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묵상과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깊이를 더해갈 때, 개인과 공동체의 영성을 고양시켜주는 높은 질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6. 밥상(식탁)공동체는 공동체적 영성의 실천 모델이 되며 민중적 영성의 엣센스를 집약한 것이다. 민중신학은 해월의 밥 사상과 향아설위의 밥상 차리기로부터 배우면서 다음과 같이 相生의 식사예법을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1)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다. (2)원을 그리고 둘러앉는다. (3)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손을 잡고 잠시 묵상(또는 짧게 한마디씩 기도)한 후 함께 담소하며 서두르지 않고 즐겁고 느긋하게 식사한다. (4)설거지도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한다. (5)음식찌꺼기는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서 거름으로 쓴다.




7. 민중적 영성은 서로 모시고 섬기는 相生의 영성이다. 그 엣센스는 겸허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깊이 귀기울여 듣는 데(敬聽, mindful listening) 있다.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 놓고 하나님에게, 자연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고요히,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민중신학에는 이 敬聽의 영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여겨진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다보니 민중, 씨에게 귀기울여 듣는 마음의 餘白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말하는’(preaching) 종교지 ‘듣는’(listening)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큰 약점의 하나다.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이 관계의 그물에 얽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의존하고 있는 이 우주와 세계 공동체 안에서 ‘敬聽의 spirituality’가 없이는 相生의 관계를 창조해나갈 수가 없다. 이제 21세기와 새 천년의 입구에서 기독교는, 그리고 민중신학은, 말하는 ‘입’으로부터 듣는 ‘귀’로의 radical한 파라다임 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8. 예언자적 선포(prophetic speaking)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언자적 경청(prophetic listening)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언자적 경청은 권력과 富에 억눌리고 빼앗겨온 자연과 민중, 곧 씨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씨에게 경청한다 함은 하나님께 경청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을 때, 더 깊숙이 귀를 기울여 고요히 기다려 보라. 소리 아닌 소리가 내 마음의 귀에 들려오지 않는가. 민중인 씨(들)에게 말과 설교를 가지고 가는 대신에 마음의 귀를 가지고 가본 사람은 안다. 경청하는 사람이 자신의 계획이나 용건, 판단이나 충고 따위를 완전히 접어놓고, 오로지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나를 내맡기는 방법으로 귀를 기울일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가 둘 사이에 싹튼다는 것을.

듣기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씨이, 그래서 자기 주견이나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이 보였던 민중이 비로소 가슴을 열고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기 시작할 때, 그(들) 자신 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놀라운 지혜와 꿈과 비전이 엉킨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 나오지 않던가. 이 새로운 관계, 새 카이로스 속에서 상처가 아물고 한풀이가 시작된다. 씨이 제 이야기에 스스로 격려를 받고 힘이 북돋아져 현재의 곤경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열리고 문제에 해답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말한 “씨의 혼(魂)을 불러내는” 방법이 아닐까.






四. 21세기, 새 천년기에 민중은 어떻게 살 것인가?

--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살림 공동체’ --




공동체 운동은 개인과 민족의 생존(survival)을 위해, 우리들의 문화와 지구 자체의 존속을 위해 비상히 중요하다. 현대 사회와 현대적 생활양식은 자연적 내지 가족적 공동체를 해체한 결과이다. 현대인의 삶은 파편화되었고 공동체 감각을 잃어버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고립되어 있고 까닭 모르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한편 그들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찾고 있으며, 꿈과 理想을 서로 나눌 친구를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 그 중에서도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공동체는 어떤 내용, 어떤 모습의 공동체일까? 우리는 김지하가 먼저 주목해서 그의 생명사상 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던, 그리고 안병무가 몹씨도 아꼈던 아름다운 우리말 ‘살림’을 붙여 ‘살림공동체’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살림’이란 무엇인가?

살림은 相生 즉 서로 살리기, 살림은 生命敬畏, 살림은 죽임의 반대, 살림은 물질의 나눔, 살림은 상호존중, 살림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 살림은 거룩한 경청, 살림은 섬김, 살림은 그저 우리네 살림살이. 그럼 살림공동체는?




나는 살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다음의 7가지 원리로 정리해 본다.

첫째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과 조화이다.

김지하식 표현을 빌리면, “개별 인격들의 자유로운 전체인 민중”의 공동체이다.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이 존중된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진정으로 존중된다. 그러나 그 개인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전체를 형성하되 그 전체가 또한 자유와 창의성이 넘치는 탄력적인 전체를 이룬다. 이 자유로운 전체인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창의성(individual initiative)과 공동생활(corporal life)의 규율이 조화를 이루며 개인적 생활영역과 공동 생활영역이 공존하고 균형을유지한다.

둘째로,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된다. 인종, 성, 피부색, 민족, 종교, 사상, 문화, 언어, 음식, 관습 등에 있어서의 차이와 다양성이 권장되고 존중된다.

셋째로, 깊은 영성적 修行(spiritual practices in depths)과 활발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social concern and action) 간의 균형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이 균형을 강조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영성적 수행을 통해 사회적 불의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에 대해 민감해지도록 노력하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참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또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이나 지구상의 다른 種(species)의 고통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힘쓴다.

넷째로, 일의 평등성(equality at work)을 추구한다. 공동체 내에서 일과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인정되나 신분이나 지위의 개념은 인정되지 않는다.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가져올 수 있는 공동체 성원간의 평등성의 저해 또는 약화를 방지하기 위한 방도가 강구되며 평등성을 높이기 위한 다방면적인 노력이 경주된다.

다섯째, 공동체성원 간의 인간관계는 동학의 ‘侍’(모심)을 기본정신으로 한다. 즉 누구든지 사람을 대할 때 그 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과 자세로써 대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에 통하고, 베트남 출신의 스님 Thich Nhat Hanh이 강조해 마지 않는 ‘정념’(正念; ‘mindfulness’)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質素한 삶(plain life)을 산다. 질소한 삶이란 (1)자원과 물자를 아껴 쓰고 사치를 하지 않으며, (2)경제적 정의에 우선적 관심을 갖고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며, (3)기도와 묵상을 생활화한 삶의 방식을 말한다. 질소한 삶은 단순함(simplicity)을 소중히 여기고 餘白이 있는 삶을 사랑한다. 여기서 여백이라 함은, 일을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바쁘게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알맞게 남길 줄 아는 여유를 말한다. 또한 너무 많이 말하지 않고 남이 말할 여지를 남기며 언제나 상대방에게 조용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현대인의 삶의 병적 奔忙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이따금 물어야 한다. “말씀이 들릴 만한 고요함이 있는가?”(Are there enough silence for the Word to be heard?)

일곱째로, 축제가 있는 공동체를 가꾼다. 축제(festival)와 祝賀(celebration)는 공동체 생활의 한 中心軸이다. 축제와 축하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생활의 시련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북돋아준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 사람들 보다 축제를 더 사랑한다.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축제의 감각과 기술을 상실했다. 그것은 공동체의 전통을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축제는 음식을 나누는 것과 함께 공동체 성원들에게 공동체의 참 의미를 손으로 만지듯이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축제는 생활 속에 일어나는 마찰과 사소한 분쟁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는 청량한 바람이 된다. 축제 속의 환희와 엑스타시(ecstasy)의 요소는 생명의 흐름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성원을 관통해서 흐르게 해주며 우리들의 가슴을 하나로 묶어 준다. 축제는 육체와 감각의 기쁨을 영의 기쁨에 연결시켜 주는 경이로운 시간이다. 따라서 축제는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 요소이다.

살림 공동체는 대안적 문화로서의 음악, 詩, 춤, 노래, 이야기, 연극 등을 적절히 생활 속에 도입한다. 노약자나 장해자 등 누구나 쉽게 배워서 출 수 있는 춤(universal dances)을 개발하고 쉬운 춤사위에 공동체의 정신을 나타내는 소박한 말을 붙여(곡에 가사를 붙이듯이) 일하는 틈틈이 함께 추기도 한다.






五. 에필로그




나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Pendle Hill이라는 퀘이커의 공동체에서 지난 한해를 보냈다. 위에서 제시한 공통체像은 그 Pendle Hill을 모델로 하여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다만 Pendle Hill을 좀 더 민중적인 쪽으로 끌어당겼다고 할 수 있겠다.

살림공동체의 7가지 원리 하나 하나를, 구원과 해방을 절절히 갈망하는 민중의 가슴과 눈으로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들을 구체적인 공동체운동에 응용할 때에는 내가 몸담고 사는 사회현실과 자신의 문화전통, 그리고 공동체의 조건에 맞추어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중심부가 아닌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한 주변부에 떨어진 작은 씨들의 눈이 지금 터지고 있다. 민중이라고도 불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이 자신 속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에 눈떠 깨어나고 있다. 그들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본이다. 씨들은 자신의 문화와 사상과 전통에 돌아가 그 토양에 튼튼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에워싼 동양과 서양의 온갖 문화, 문명, 사상, 전통들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여 그들 자신의 잠재력, 생명력을 꽃피워 나갈 것이다.

바야흐로 21세기, 새 천년의 새 문명, 새 문화, 새 인류의 도래를 예비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 곧 ‘살림 공동체’의 창조라는 가슴 뿌듯한 과제가 아시아의 민중에게 맡겨져 있다. 이 창조에서 민중신학의 몫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이 민중신학의 새로운 전개 가능성의 단초만이라도 전달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다.









<참고 문헌>

*Larry L. Rasmusen, ‘Earth Community Earth Ethics’, 1996, Orbis

*Ed. by Martin O'Connor, ‘Is Capitalism Sustainable?’, 1994, The Guilford Press

*Helena Norberg-Hodge,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 1991, Siera Club Books. (한국어역: ‘오래된 미래’, 녹색평론사)

*Jean Vanier, ‘Community and Growth’, 1989, Paulist Press

*‘Faith and Practice’, 1997, Philadelphia Yearly Meeting

*Thomas R. Kelly, ‘A Testament of Devotion’, 1941, Harper Collins

*John Punshion, ‘Encounter with Silence’, 1996, QHS

*C. G. Jung, ‘Memories, Dreams, Reflections’, 1973, Vintage

*Douglas Gwyn, ‘The Covenant Crucified -Quakers and the Rise of Capitalism-’, 1995, Pendle Hill

*Edited and Introduced by Douglas V. Steere, ‘Quaker Spirituality, selected writings’, 1984, Paulist Press

*Patricia Loring, ‘Listening Spirituality’, 1999, Loring

*Ed. by David Cren and Eric & Helen Ebbeson, ‘Living Simply’, 1981, The Seabury Press

*Mark A. Burch, ‘Simplicity’, 1995, NSP

*Grace Kuto, ‘Harambee, African Family Circle Cookbook’, 1995, Book Partners

*Thich Nhat Hanh, ‘The Miracle of Mindfulness', 1975, Beacon Press

*Thich Nhat Hanh, ‘Living Buddha, Living Christ’, 1995, Riverhead Books

*咸錫憲全集, 1987, 한길사

*김지하전집(5), ‘생명, 이 찬란한 총체’, 1991, 동광출판사

*한글 東經大全, 1991, 동학연구원

*金芝何 思想紀行, 전2권, 1999, 실천문학사

Love of Wisdom <지혜 사랑> 1월부터 시작하는 법보신문의 내 연재... - Chang-Seong Hong



(5) Love of Wisdom <지혜 사랑> 1월부터 시작하는 법보신문의 내 연재... - Chang-Seong Hong







Chang-Seong Hong
29 December 2019 at 07:43 ·



Love of Wisdom
<지혜 사랑>
1월부터 시작하는 법보신문의 내 연재 <<철학하는 삶>>의 둘째 원고 초안을 완성했다. 원고지 15.5매로 짧다. 80년대 중반 내 학창시절 철학과 전공생의 95% 이상이 남학생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지혜를 사랑했다. 윤지혜나 한지혜가 아니라 그냥 지혜(wisdom)를 - 왜냐하면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니까. 아, 이번 연말을 이렇게 좀 유치한 농담으로 마무리하는구나 - 그래도 그동안 점잖은 척 많이 했으니 페친들께서 이 정도는 용서하시리라 믿는다.
밑의 사진들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다. 나를 처음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유학길에 오르게 한 장본인들이다. 방금 옆에서 우리집 유선경선생이 "생긴 것들 하고는..."이라고 코멘트했다.
https://www.dropbox.com/…/02%20%EC%A7%80%ED%98%9C%20%EC%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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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지혜 사랑
<지혜 사랑>

세계적으로 저명한 20세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철학자 러셀을 기차역까지 운전해 주던 택시기사의 일화가 있다. 30년 넘게 러셀을 태우고 다녔던 그가 어느 날 뒷좌석에 앉아 있던 러셀에게 물었다.

“교수님,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

이 택시기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이보게들, 아 글쎄 러셀 교수님이 철학이 무엇인지를 모르시더라고!”

세계적인 철학자가 철학이 무엇인지를 답하지 못했다는 이 일화는 철학을 정의定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들도 여럿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이 질문에 시원하게 답해 주지 못한다.
그런데 공空의 가르침에 밝은 불자佛子라면 철학뿐 아니라 이 세상 아무 것도 제대로 정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펜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려면 펜을 펜이게끔 해 주는 그 무엇, 즉 펜의 본질 또는 자성自性을 밝혀 언급해야 할 텐데, 연기緣起하여 공空하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물의 자성을 어떻게 밝혀내란 말인가. 이 점을 보여주는 내 강의실 대화를 하나 소개한다.

“제임스, 자네가 손에 쥔 길쭉하게 생긴 물건은 무엇인가?”
“펜입니다.”
“펜이란 무엇인가?”
“필기도구입니다.”
“그래? 그런데 그것을 마치 스파이 영화에서처럼 사람의 목을 찌르는 데 쓴다면?”
“그러면 펜이 아니라 살인무기입니다.”
“그것을 유명한 디자이너가 귀금속으로 멋지게 장식해 박물관에 전시한다면?”
“예술품입니다.” ......

우리가 일상에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펜도 그것이 속하는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즉 조건에 연기하며 각각 다른 물건으로 간주된다. 사물에 고정된 본질이나 자성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본질을 언급해야 가능한 정의는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초반 세기의 천재라던 케임브리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단어나 개념도 제대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고 우리는 그것이 각각의 맥락에서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그 의미를 가늠할 뿐이라고 통찰했는데, 이 사람 아무래도 전생에 연기와 공空을 깨친 불자였던 것 같다.
일상에서 익숙한 물건 하나도 정의하지 못하는데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에 답하기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서양철학개론 수강생들의 답변은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된다.

“철학이란 모든 학문의 근원입니다.”
“돈벌이 어려운 인문학의 대표 과목입니다.”
“실존을 향한 탐구입니다.”
“엉뚱한 짓만 골라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철학자들입니다.”
“모든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철학의 일부입니다.” ......

답변이 너무 다양하다보니 공통점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처럼, ‘철학’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각각의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성이 없는 ‘철학’을 정의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이럴 경우 우리는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을 살펴보며 이 단어를 처음 만든 고대 희랍 사람들이 ‘philosophy’란 말을 어떤 뜻으로 쓰려 했던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philosophy’는 ‘사랑하다(philein)’와 ‘지혜(sophos)’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탄생했다. 철학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붓다, 공자, 예수, 원효, 지눌, 율곡, 퇴계 같은 분들은 모두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한 분들이 사랑했다는 지혜란 또 무엇일까?
지혜 자체도 자성이 없이 공空하기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일단 지혜(wisdom)를 비슷한 개념인 지식(knowledge)과 함께 비교 및 대조해 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지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해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거의 언제나 좋은 답변으로 응수한다.

“지식이란 사실(facts)에 대한 정보를 말합니다.”
“지식이 풍부하다(knowledgeable)는 말은 책 많이 읽어 똑똑하다는 겁니다(book-smart).”
“지혜란 책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만 가능합니다.”
“경험을 통해 인간사와 세상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street-smart).” ......

학생들은 우리가 삶과 관련된 경험으로 지혜를 체득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개인적·사회적으로 더 좋은 삶을 연구하는 윤리학이 철학의 중요한 분야가 되는 이유도 알게 된다. 불가佛家에서라면 경전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이고 다양한 종류의 수행이 지혜를 체득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만도 하겠다.
그런데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서 철학자들이 반드시 더 좋은 삶에 대한 연구만을 진행할까? 철학에는 윤리학뿐만 아니라 논리의 체계를 다루는 논리학, 지식의 속성을 연구하는 인식론, 그리고 존재의 근원을 파헤치는 형이상학 등 여러 다른 분야도 있다. 이 모두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주제들을 다룬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혜를 어떻게 이해해야 지혜에 대한 사랑이 이런 주제들에 대한 사랑도 포함할까?
한편, 지난 번 에세이에서 나는 ‘철학은 의심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철학을 정의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는데, 이것은 이번에 ‘철학은 정의할 수 없다’고 한 주장과 상충하는 듯 보인다. ‘철학은 의심이다’와 ‘철학은 정의할 수 없다’는 두 견해를 과연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지혜에 대한 일상적 이해를 넘어 지혜를 좀 더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이 둘을 일관된 통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 단락에서 제기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다음 에세이에서 이 문제를 다뤄 보겠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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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in Jong-sik Woo 생활속의 지혜가 철학이라면 이정도의 문장으로 철학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홍교수님의 지혜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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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replied · 1 reply


임용택 펜이 무엇인가? 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화두가 있습니다.
ㅡㅡㅡㅡ…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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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replied · 3 replies


Justin Suchul Kim 이번글도 쉽게 와닿고. 예전기억들을 끄집어내어주세요.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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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Kyeong Y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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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 예리한 칼을 가지고 의사가 수술한다면 사람을 살리는 의료기기가 되지만, 흉악범이 인질이나 피해자 목에 들이대면 살인 홍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상'황에 따른 '용'도에 의해 정의하면 어떨지요?.
어떤 사물이나 인식 , 관계등이 고정된 실체가 없는 인연소기에 의해서 파악하는 방법(제 소견입니다. )
물 자체 성분은 동일하지만 얼음(욕계, 온도에 의해 고정됨) 물 (색계, 얼음보다는 흐름 등이 더 자유로움) 수증기(무색계, 형상은 물보다 더 자유롭지만 기온 등의 조건에 따라서 구름이 되었다가 비나 우박이나 눈이 되어 지상으로 추락 , 다시 물이나 얼음으로 변함). 물로서 3계와 윤회 과정을 간단하게 비유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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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 replied · 3 replies


이재형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철학을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주변에 철학을 전공한 분들도 꽤 계시지만 철학자인지 문헌학자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교수님의 글은 핵심 주제를 슬쩍 비껴가거나 모호하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교수님 글을 꾸준히 읽다 보다 보면 이전에 철학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 의문이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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