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9

깨달음의 교학적 의미 / 김성철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의 교학적 의미 / 김성철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의 교학적 의미 / 김성철
기자명 김성철
입력 2008.12.07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在家者든 出家者든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신행생활을 한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깨달음이냐?’고 물을 경우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과거 러시아의 大 불교학자 Stcherbatsky조차, ‘불교라는 종교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또 그 철학이 무엇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다’고 토로할 정도였으니, 일반 불자들이 느끼는 혼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재 전 세계 불교권은 남방상좌부의 소승불교권(Hīnayāna)과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권(Mahāyāna), 그리고 티베트의 금강승불교권(Vajrayāna)으로 삼분된다. 인도불교의 전파시기에 의거하여 이 세 지역의 불교권을 비교하면, 소승불교권의 경우 서력 기원 전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고, 대승불교권에는 서력 기원 후부터 8세기까지 대승활동기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으며, 금강승불교권에는 8세기 이후 13세기까지 금강승 전성기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소승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고, 대승과 금강승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권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불자들 대부분은 선불교에 의거해 신행생활을 해 왔다. 그런데 선불교가 불교인 이상, 그 궁극적 목표 역시 불교적이어야 할 것이다. 대승을 능가하는 최상승이라고 자부하는 선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승과 대승과 금강승의 교학에 비추어 볼 경우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된 禪僧의 정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아라한인가, 아니면 부처인가? 아니면 제3의 누구인가? 앞으로 최상승인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 역시 교학적 견지에서 명확히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연구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소승과 대승, 그리고 금강승의 교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를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2. 소승의 깨달음

소승불교의 수행자는 아라한을 지향한다. 아라한이란 모든 번뇌가 소진되어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게 된 최고의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果를 얻은 수행자는 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의 삶은 이미 다했으며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노라. 할 일을 다 했으니 내생에 다시 삶을 받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아노라.

戒行을 어기지 않고 살며,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가 소진된 아라한은 결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계행이 완성될 경우 三界 중 欲界의 정상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계행만으로 아라한과를 얻을 수는 없다. 계행과 함께 좌선이 겸수되어야 한다. 계행을 갖춘 수행자의 마음은 좌선을 통해 욕계를 초월하여 色界의 初禪, 2禪, 3禪, 4禪의 상태로 향상하게 된다.

그리고 제4선의 상태에서 연기의 지혜를 추구할 때, 비로소 아라한과가 열려 有餘依涅槃에 들게 되며,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오는 無餘依涅槃 역시 제4선에서 이루어진다. 색계 제4선에 윤회로부터의 탈출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계정혜 삼학이라고 부른다.

수행자는 지계행 이후에 선정을 닦고 선정 이후에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혜학의 단계는 철정한 계행과 제4선의 선정력에 의해 뒤받침되고 있다. 제4선의 경지에서 계, 정, 혜 3학이 竝修될 때 모든 번뇌가 정화되어 깨달음을 얻는다. 그 결과 아라한은 자신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自知不受後有).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혹이 생길 수 있다. 불전에서는 ‘如來는 死後에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문제가 無記答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의 사후에 대해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는 반면, 깨달은 자인 아라한은 ‘내생의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고 선언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잡아함경󰡕에서는 焰摩迦(Yamaka) 비구의 일화를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염마가라는 이름의 비구가 ‘번뇌가 모두 사라진 아라한은 열반한 이후 존재하지 않는다(漏盡阿羅漢身壞命終更無所有)’고 주장하자 많은 비구들이 염마가를 ‘惡邪見의 비구’라고 말하며 이를 사리불에게 이른다. 그 때 사리불은 염마가를 별도로 부른 후 비유를 들어 타이르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재산이 많은 한 장자가 하인을 구하는데, 장자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하인으로 가장하고 들어와 온 정성을 기울여 일을 하여 장자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래서 하인을 좋아하게 된 주인이 방심하게 되자, 하인은 장자를 칼로 찌르고 달아난다. 장자가 하인의 정성이 거짓임을 알 경우에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윤회하는 세속의 진상에 무지하여 세속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세속이 마치 원한을 가진 하인과 같이 자신을 해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럴 경우 세속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되어 스스로 열반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부자를 속인 하인은 윤회의 세계인 세속을 비유한 것이고, 부자는 어리석은 비구승들을 비유한 것이다. 삶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어리석은 비구승이나 일반인들은 세속적 삶이 자신을 해치는 것인 줄 모른다. 마치 부자가 지극 정성의 하인으로 가장한 사람이 사실은 자신을 해치는 자객으로 돌변할 것을 모르듯이 …. 부자에게 그 하인의 음모를 알려 주어도 부자는 이를 곧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하인이 당장 자신에게 큰 행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인 부자가 방심한 틈을 타서 하인으로 가장한 자객은 부자를 해치게 된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지금 이곳은 행복한 곳으로 착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이곳은 무상한 윤회의 세계일 뿐이며, 윤회의 세계에서 그나마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바다 밑을 헤엄치던 눈 먼 거북이가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얼굴을 내밀다가 우연히 그 곳에 떠 있던 널빤지의 구멍에 목이 끼게 되는 정도의 확률’을 갖는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지금 전 인류의 대부분은 내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축생 이하의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우리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은 수만 년, 수억 년 후의 일이다. 그 때까지 우리 대부분은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윤회의 진상, 윤회의 고통을 정확히 자각할 경우,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자각하게 된다.

열반 후 어딘가에 존재하든 않든 문제가 안 된다. 다시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이런 자각이 든 자에게 ‘無로서의 열반’은 행복으로 다가오지만, 아직 세속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열반 후 사라진다는 말을 들을 경우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염마가(Yamaka)의 주장을 비판했던 비구들 역시 세속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여래나 아라한이 死後 어딘가 있는지(有), 아니면 아예 사라지는지(無) 여부에 대해 물을 경우, 세속에 대해 집착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無)로 답할 것이 아니라, 먼저 세속의 고통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세속의 진상인 無常, 苦, 空, 無我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라한 死後의 無’는 공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로서의 열반은 고성제를 자각하지 못한 세속인들에게 더 큰 괴로움과 절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무상, 고, 공, 무아의 苦聖諦를 徹見한 사람에게 ‘아라한 사후의 無’는 평화와 安穩으로 다가온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라한 死後의 無’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소승 아라한을 지향할 경우 세속이 모두 고통임을 철저히 체득하는 수행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희구하며 진심으로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아라한이 될 경우 우리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를 위해 수행자는 탐욕(貪), 분노(瞋), 어리석음(癡), 교만한 마음(慢), 불교에 대한 의심(疑), 자신의 몸이 있다는 생각(有身見), 인생에 끝이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邊執見), 이런 생각들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는 것(見取見), 잘못된 종교의식을 옳다고 보는 생각(戒禁取見), 인과에 대한 부정(邪見)등의 번뇌들을 하나하나 끊어야 한다. 이와 같은 번뇌가 남아 있는 한 내생에 그 번뇌가 초래하는 삶을 다시 받게 되기 때문이다.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위대한 성자, 즉 아라한에게만 가능한 축복이다.

3. 대승의 깨달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성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불은 무엇일까? 소승에서 말하는 아라한이 된다는 것과 부처가 된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아라한이라는 호칭은 부처에게도 부여된다.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교화한 후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아라한과 부처는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대지도론󰡕에서는 부처와 천신과 二乘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대공덕의 신통력이고 둘째는 모든 번뇌의 소멸된 지극히 청정한 마음이다. 천신들의 경우 복덕의 신통력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번뇌를 소멸하지 못했기에 그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 또,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통력도 역시 적다.

그리고 성문과 벽지불은 비록 번뇌를 소멸하여 그 마음이 청정하지만, 복덕이 약하기 때문에 그 세력 역시 적다. 부처는 두 가지를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누구든 이기지만, 다른 자들은 모든 자를 이기지 못한다.

아라한은 그 마음이 청정하다는 점에서 천신과 구별되지만, 마음의 청정과 복덕의 세력이 부처에 못 미친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어 깨닫긴 했어도 전생의 習으로 인해 번뇌의 기운이 남아 있다. 사리불에게는 진에의 습기가 남아 있고, 난타에게는 음욕의 습기가 남아 있으며, 필릉가파차에게는 교만의 습기가 남아 있다고 󰡔대지도론󰡕에서는 각각의 例話를 들어 설명한다.

성문과 연각의 이승과 부처 모두 색계 제4선에서 깨달음에 든다. 그리고 깨달음에 들기까지, 초야, 중야, 후야에 걸쳐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이 차례로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三明의 힘에서도 아라한은 부처와 차별된다.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三明은 대아라한과 벽지불도 획득한다.
문: 그렇다면 부처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답: 이들은 비록 三明을 획득했지만 그 밝기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부처는 완전하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문: 어째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답: 아라한과 벽지불들의 숙명지는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완벽하지 못하다. 전생 하나만 아는 아라한도 있고, 2생, 3생, 10생, 천겁, 만겁 내지 팔만겁까지 아는 아라한도 있지만 이 이상을 넘어가게 되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안통이 완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라한과 차별되는 부처의 복덕과 지혜는 어떻게 얻어진 것일까? 󰡔대지도론󰡕이나 󰡔성유식론󰡕 등 대승논서는 물론이고 󰡔구사론󰡕이나 󰡔아비달마대비바사론󰡕 등 소승 논서에서도 부처와 아라한을 구별하며, 부처의 복덕과 지혜는 3아승기겁의 수행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승기(asaṃkhya)란 無數, 또는 無量으로 번역되며 인도에서 사용되는 숫자 단위 중 가장 큰 단위이다. 세 번의 아승기겁 각각에서의 보살행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첫 번째 아승기겁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인지,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두 번째 아승기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긴 하지만, 그것을 발설하지 않는다. 세 번째 아승기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을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공연히 발설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3 아승기겁의 보살행이 끝나면, 100겁에 걸쳐 三十二相의 과보를 초래하는 공덕을 짓게 된다. 부처가 삼십이상으로 몸을 장엄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고, 비단 지혜와 선정 등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성불을 위해 우리는, 초발심 이후 3아승기 100겁의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이는 대소승 논서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초지 보살이 되기 이전에 제1 아승기겁의 수행을 완성하고 초지에서 제7지까지 향상하는 기간이 제2 아승기겁이며, 제7지에서 제10지까지가 제3 아승기겁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무량한 세월 동안 수행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성불을 지향하며 윤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경우, 3아승기겁의 보살행 기간 동안 수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며, 성불한 이후에도 그 공덕의 힘으로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과의 경우, 鈍根機는 최소 3생의 수행, 利根機는 최대 60겁의 수행만 하면 성취된다. 부처가 되든 아라한이 되든 대열반의 의미는 마찬가지다. 대열반에 든 자는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성불이란 이렇게 至難한 일이며, 그 동기는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전생에 3아승기 100겁의 수행을 모두 마치고, 현생에 성불하는 수행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그는 태어날 때부터 三十二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량한 세월 동안 무량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조바심 내며 기다려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불이라는 목표는 지워버린 채, 항상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행하고(상구보리), 항상 남을 도우며 살아갈 때(하화중생), 미래세에 언젠가 성불의 과보가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수억 겁에 걸친 무한한 과정적 신행을 통해 귀결되는 것이 대승불교의 깨달음, 즉 성불이다. 그리고 이렇게 久遠劫 이후의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는가?

4. 금강승의 깨달음

밀교 또는 ‘불교 Tantrism’으로 불리는 금강승은 크게 보아 대승에 속한다. 대승과 마찬가지로 성불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과 차별되는 점은 ‘3아승기 100겁’이라는 보살행의 기간을 현생의 1생으로 단축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불의 기간을 단축하는 이유는 보다 빨리 더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3아승기겁 동안 무량한 공덕을 쌓아야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기간을 1생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까? 부처가 된다는 것은 부처의 몸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의 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는 法身과 報身과 化身의 三身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몸을 모두 성숙시켜야 한다.

법신은 空性과 無我에 대한 조망을 통해 성숙한다. 그러나 법신만 성숙시킬 경우 소승 아라한이 될 뿐이다. 그래서 금강승의 수행에서는 보신과 화신의 성숙을 목표로 삼는다. 보신은 일반적 공덕을 지음으로써 성숙한다.

그리고 금강승에서는 이렇게 ‘3아승기 100겁’ 동안 지어야 할 공덕들을 현생에 농축적으로 짓는 수행을 하게 되는데, 그 요점은 자신의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의 三業을 부처의 身口意 三業에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수행의 결과인 부처의 모습이 그대로 수행 수단으로 사용된다. 대승은 보살행의 因을 통해 불과를 얻기에 因乘이라고 부르며, 금강승은 수행의 結果인 부처의 보신과 화신을 수행의 因으로 삼기 때문에 果乘이라고 불린다.

大日如來를 主尊을 삼아 觀想하며 손(身)으로는 手印(mudra)을 짓고, 입(口)으로 진언(mantra)를 암송하며, 만다라(maṇḍala)를 보며 마음(意)으로는 자신이 부처로 출현하는 모습(生起次第)을 관상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부처의 몸으로 성숙시키기도 한다.(究竟次第). 이런 수행을 통해 우리의 육체는 급격히 化身으로 성숙하고, 우리의 영혼(= 中陰身)은 신속히 報身으로 성숙하게 된다. 금강승에서 卽身成佛을 기치로 내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atnakaraśanti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성에 대해서만 명상할 경우 성불은 무량겁이 걸린다. 반대로 佛尊修行(deity yoga)만 할 경우 성불은 완전치 못하다. 공성에 대한 명상과 불존에 대한 명상을 겸할 때 성불의 시기는 단축된다

여기서 말하는 불존수행(deity yoga)이란, 자신을 부처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부처의 보신으로, 또 자신의 육체를 부처의 화신으로 성숙시키는 수행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강승의 수행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달라이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겔룩파의 경우 󰡔보리도차제론󰡕 체계에 의거해, 不淨觀과 慈悲觀이 철저히 완성되고, 止觀 수행을 통해 공성에 대한 조망을 어느 정도 갖춘 수행자에 한해 금강승을 수행할 자격을 부여한다. 금강승의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수행자는 먼저, 세속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하는 부정관을 닦고,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 자비관을 닦아야 한다. 그 후 三昧力도 훈련하고 공성을 파악하는 논리적 사고도 훈련해야 한다.

금강승의 수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철저히 보살을 닮아 있어야 한다. 아직 세속적 음욕이나 재물욕, 명예욕이 남아 있고, 질투심과 분노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며, 선정력이 깊지 못하고, 공성에 대한 지혜를 갖추지 못한 자에게 금강승의 수행은 금지된다. 藥이 오히려 毒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살로서의 마음이 철저히 갖추어진 수행자는 10만 번의 오체투지를 하고, 자신이 金剛薩陀(Vajrasattva)로 된 모습을 명상하며 100자 진언을 10만 번 암송하여 업장을 정화하며, 쌀과 보석 등의 공양물들을 만달라 판 위에 올려 쌓고 허물기를 되풀이하며 기도문을 10만 번 암송한다.

그 후 금강승 수행으로 이끌어 줄 스승과 자신이 하나가 됨을 관상하며 스승에게 귀의하는 기도문을 암송하는 구루요가(guru yoga) 儀式을 치른다. 이런 모든 의식을 마쳐야 비로소 금강승, 즉 밀교 수행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불교의식을 치르는 것은 보살로서 살아가며 3아승기 겁에 걸쳐 지어야 할 공덕을 농축하여 현생에 짓기 위해서이다.

3아승기겁에 걸쳐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공양을 바쳐야 하는 대승 보살의 수행과 비교할 경우 10만 번의 오체투지, 10만 번의 진언암송, 10만 번의 공양기도는 그 양이 너무 적다고 하겠다. 이러한 금강승의 교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철저한 믿음이 티베트 불교인들의 자발적이고 강력한 신행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소승의 깨달음과 대승의 깨달음 그리고 금강승의 깨달음을 비교해 보았다. 소승 수행자의 경우 아라한을 지향하고, 대승과 금강승 수행자의 경우 부처를 목표로 삼는다. 금강승의 경우 3아승기겁 수행 후의 성불을 현생의 ‘즉신성불’로 단축시킨다는 점에서 대승과 차별된다.

그러나 이 삼자에 공통되는 것은 아라한이 되든 부처가 되든 내세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윤회하는 세속의 고통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自問해 보아야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에 공감하는 우리들 중 다시는 태어나지 싶지 않을 정도로 苦聖諦, 즉 一切皆苦를 깊이 자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지금 위빠싸나 등 소승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불자들 중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또,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갖춘 수행자의 마음에는 ‘나만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다시 태어나지 않게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다음과 같이 自問해 보아야 한다: ‘현재 대승 또는 금강승의 수행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중에 다른 모든 중생을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역시 위와 같은 조망 하에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선승의 깨달음은 아라한의 깨달음인지, 부처의 깨달음인지, 아니면 제3의 무엇인지 ….


김성철
서울대 치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초기불교에서 바라 본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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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서 바라 본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

각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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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한다. 한국의 불자들은 ‘마음 깨쳐 성불한다.’거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일체유심조).’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를 심학(心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심리학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초기불교에서는 과연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이러한 관심에서 홍법사의 대중논강 첫 번째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을 것이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할 점은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무아는 불교를 특징짓는 말로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반야/중관과 유식을 망라한 모든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뜨만이니 자아니 대아니 진아니 하는 무언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실체가 나라는 존재나 세계의 안에 혹은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개념(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만일 우리가 마음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생각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를 역설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한국불교 일반에서는 마음이니 자아니 대아니 참나니 진아니 심지어는 대승불교의 여래장이나 불성 등의 가르침조차도 무언가 존재의 배후에 불생불멸로 존재하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실로 많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홍법사 대중논강의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다고 발제자는 이해한다. 발제자는 이제 몇 가지 측면에서 이 주제를 소화해내고자 한다.

2. 마음의 사전적 의미

먼저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마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우리말 마음의 의미를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사람의 몸에 깃들여서 지식·감정·의지 등의 정신 활동을 하는 것, 
또는 그 바탕이 되는 것. 예: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 
② 거짓 없는 생각. 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 
③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하여 일어나는) 기분. 느낌. 예: 홀가분한 마음. 
④ (어떤 사물이나 행동에 대하여) 속으로 꾀한 뜻. 예: 마음을 고쳐먹다. 
⑤ 심정(心情). 예: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다. 
⑥ 사랑하는 정. 예: 그에게 마음을 두다. 
⑦ 성의. 정성. 예: 마음을 다하다. (준말)맘. 
한편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마음’은 ‘정신’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뜻으로 쓰이는 일이 많고, 그 의미 내용도 애매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육체나 물질의 상대적인 말로서 철학상의 ‘정신’ 또는 ‘이념’의 뜻으로도 쓰이는 막연한 개념이 되었다.
다음 백과서전에서는 한자 심(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사유기관을 가리킨다.〈맹자〉의 고자(告子) 편에서 “심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心之官則思)라고 하였는데, 심은 보통 인간의 의지·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객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리고 백과사전들에서는 중국 철학자들의 용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 혹은 심(心)라는 용어는 참으로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되며 다양한 사람에 의해서 다양한 뜻으로 정의되고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말 마음 혹은 중국어 심만을 가지고는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 설명하는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이제 마음에 대한 이 정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 그것도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살펴보자.

3.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불교술어는 심(心)과 의(意)와 식(識)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문으로 옮긴 심․의․식의 범어 원어를 살펴보면, 심(心)은 citta(Sk. citta)이고, 의(意)는 mano(Sk. manas)이며, 식(識)은 viññāṇa(Sk. vijñāṇa)이다. 心으로 옮긴 citta(√cit, to think)는 초기경들에서는 주로 생각하는 그 자체를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나고, 意로 옮긴 mano(√man(to think)는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 혹은 기능[根, indriya]이나 감각장소[處, 入, ā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나타난다. 識으로 옮긴 viññāṇa(vi분리하여+√jñā, to know)는 여섯 감각 장소[六內處]와 여섯 대상[六外處]이 관여할 때 일어나는 6가지 알음알이[六識]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경들에서는 이렇게 심․의․식의 용처가 다르다 할 수 있다. 
여러 초기경에서는 ‘안다고 해서(vijānāti) 알음알이라한다’고 알음알이[識]를 정의하고 있으며, 다른 몇 경들에서는 “마노로 법을 안다(manasā dhammaṁ vijānāti - S.v.451)”라고도 설명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보면 ‘마노[意]를 통해서 법(대상)을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을 사량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cittan ti 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vijānātīti attho - DhsA.63)”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동의어로 설명되고 있다.
한편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과 마노[意]와 알음알이[識]의 셋을 같은 것이라 한결같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북방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주석서 문헌에서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완전히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고 마노[意]는 대상을 아는 기능[根, indriya] 혹은 장소[處, 入, āyatana]의 의미로 쓰이지만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는 이 셋은 동의어로 쓰인다.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아는가? 이를 정밀하게 설명해내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의 설명을 종합하면 마음은 여러 심리현상들(心所法, cetasikā)의 도움을 받아서 마노를 통해서 대상을 안다. 마음이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하는데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 7가지와 때때로 일어나는 6가지와 해로운 심리현상 14가지와 유익한 심리현상 25가지의 총 52가지 심소법들을 들고 있다. 특히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곱 가지 심리현상들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7가지 마음부수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첫째,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phassa, 觸)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 느낌(vedanā, 受)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saññā, 想)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넷째, 의도(cetanā, 意思)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작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 집중(ekaggatā, 心一境, 定)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떤 정도의 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알지 못한다. 
여섯째, 생명기능(jīvitindriya, 命根)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作意) 즉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기능뿐인 마음은 이 일곱 가지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임금이라면 일곱 가지는 최측근의 대신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일곱은 항상 마음과 같이 일어나고 마음과 같이 멸한다.

4.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 saññā, 이성적이고 지적인 초기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오온의 화합 혹은 무더기로 이해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독립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몸(물질, 色, rūpa)의 무더기(蘊, khandha)와 느낌(受, vedanā,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의 무더기와 인식(想인 측면)의 무더기와 여러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a, 오온의 문맥에서는 항상 복수로 나타나며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뜻함)의 무더기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 수와 상과 행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하는 것)의 무더기가 함께 뭉쳐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薀]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불교는 마음(citta/viññāṇa)과 정신(名, nāma)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정신은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즉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심리현상들의 무더기, 알음알이의 무더기인데 정신 가운데서 대상을 아는(요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알음알이[識]라하고 마음[心]이라한다. 마음(알음알이)은 느낌[受]과 인식[想]과 심리현상[行]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了別]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우리의 정신적 영역 가운데서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을 뜻할 뿐이지 마음이 우리의 정신영역 모두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초기불교는 밝히고 있다. 
이제 이처럼 심리현상들(마음부수법들)의 도움으로 마노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으로 정의되는 마음의 중요한 성질을 초기경에 준해서 살펴보자.

5. 마음은 무상하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마음을 비롯한 제법(유위법)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초기경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인식은 … 상카라[行]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여.”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M26, M109)
“자 매들이여, 여기 기름 등불이 타고 있다고 칩시다. 그 기름도 심지도 불꽃도 불빛도 모두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기름과 심지와 불꽃은 무상해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 불빛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그 기름과 심지와 불꽃이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그 불빛 또한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 와 마찬가지로 자매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반연하여 느끼는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제각기 나름대로 조건을 반연하여 그에 상응하는 느낌들이 생겨나고, 조건들이 멸하면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느낌들도 멸하기 때문입니다.”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이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는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M146)

6.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이다

이 처럼 마음(알음알이)을 위시한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 그래서『증지부』에서는 특히 마음의 무상성을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citta)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A.i.9)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첩경이다. 무상을 통찰할 때 우리는 고를 절감하고 실체 없음(무아)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서들에서는 한결같게 이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하였으며 각각 무상(無相)해탈, 무원(無願)해탈, 공(空)해탈이라 불렀으며『화엄경』 「정행품」등에서도 이 공․무상․무원은 거듭 강조되어 나타난다.
마음을 위시한 제법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는 카나(khaṇa, 찰나, 순간)로 정착이 된다. 찰나의 규명은 주석서 문헌을 통해서 이루어낸 아비담마 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담마 불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존재를 법들의 흐름(santati, 相續)으로, 찰나의 연속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위시한 법들은 일어나고 사라짐, 그것도 찰나생․찰나멸의 문제이다. 그것은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대승에서도 많이 인용하는「가전연경」(S12:15)에서도 세상의 일어남을 보기에 없다하지 않고 세상의 소멸을 보기에 있다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중(中)의 견해라고 하고 있다. 찰나는 초기불교의 도처에 나타나는 무상의 가르침과 법들의 일어남, 사라짐, 머문 것의 변화함이라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계승한 것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흐름, 변화, 무상성, 찰나를 제거해버린 수행이 다름 아닌 사마타수행 혹은 삼매수행이다. 삼매는 변하는 대상에서 변하지 않는 표상(nimitta, 니밋따, 이것은 법이 아닌 개념에 속함)을 취해서 거기에 집중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특히『청정도론』18장부터 22장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 위빳사나는 변화와 무상을 주시하는 수행이다. 변화와 무상을 관찰해 들어가서 찰나를 만나고 이런 찰나생․찰나멸하는 법을 내관하는 수행법이다. 제법의 찰나생․찰나멸을 직시하여 매순간 무너지고 있는 법의 무상이나 법의 고나 법의 무실체성을 직시하여 무너짐(해체)의 지혜(bhaṅga-ñāṇa)로써 ‘나’니 ‘내 것’이니 하는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제행에 대해서 평온(우뻬카, 捨)을 유지하는 지혜를 개발해서 도와 과를 증득하는 체계를 위빳사나수행이라 하고 있다. 이처럼 찰나는 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법을 통찰하는 위빳사나와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uppāda-ṭṭhiti-bhaṅga) 세 아찰나(亞刹那,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게 된다. 찰나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흐름 그자체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자가 사용한 아찰나(sub-moment)라는 술어는 서양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주석서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비담마에서는 아찰나란 단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아찰나라는 단위를 인정한다면 다시 아찰나를 구성하는 아아찰나(亞亞刹那)를 인정해야 하고 다시 더 짧은 단위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은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면서 존속하는 최소단위가 찰나이고 이것은 위빳사나의 대상이다. 그래서 법은 찰나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7. 마음은 흐름이다

마 음이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금강경: 心流注)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북방 불교에서 공히 강조하고 있다. 초기경의 비유를 살펴보자.
“찟따여, 예를 들면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curd)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ghee)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제호]가 되는 것과 같다. 우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응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때에는 오직 우유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 응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생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정제된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최상의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우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응유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때에는 오직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D9)
이러 한 마음의 상속은 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이 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 이렇게 쉼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으로 대표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탐진치)이 다할 때 까지 흐르는[相續]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이 무아라면 윤회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바로 이 흐름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흐름으로 파악한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수많은 심리현상들이 용틀임하며 흘러가는 것이 윤회요, 바로 중생의 삶의 현주소이다. 이런 흐름을 과거·현재·미래나 전생·금생·내생이라는 틀로 부르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매 찰나의 흐름일 뿐 과거·현재·미래라는 실상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금강경』에서는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미래심도 불가득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금강경』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금강경』에서는 마음을 마음의 흐름(citta-dhāra, 心流注, 18장 현장 역, 구마라즙은 心으로 옮기고 있음)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의 전변을 흐름(srota)으로 인찰나의 소멸과 과찰나의 일어남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무튼 초기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에서 공히 마음은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지 결코 고정불변한 마음을 상정하지 않는다.

8.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 대상이 없는 마음은 일어나지 못한다.

거 듭 말하지만 마음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상(ārammaṇa)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緣]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난다. … 마노[意]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난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M18 등) 
그리고 이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마음(식)은 크게 여섯 가지로 일어난다. 형상(혹은 색깔)이 대상이 될 때는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소리가 대상이 될 때는 귀의 알음알이가, 같이 하여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난다. 
한편 아비담마에 의하면 의식(마노의 알음알이)의 대상은 ① 감성의 물질(pasāda-rūpa) ② 미세한 물질(sukhuma-rūpa) ③ 이전의 마음(citta) ④ 마음부수들 ⑤ 열반 ⑥ 개념(paññatti)의 여섯 종류라고 한다. 이 여섯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이 여섯은『아비담마 길라잡이』319-321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우리는 이 여섯 가지 혹은 12가지 가운데서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여 내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매순간 살펴서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은 피하고 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을 향해서 마음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혹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통해 해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고 이로운 업을 일으키도록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yoniso manasikāra, 如理作意)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가 우리에게 간곡히 전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다.

9. 마음은 연이생(緣起, 조건발생)이다.

연기(혹은 緣而生)는 세 번째 논강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초기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도반들이여,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緣]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하여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sañjānāti, 想) 인식하는 것을 생각하고(vitakketi, 尋)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papañceti, 戱論)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산냐라는 헤아림이 함께 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들에서 그러합니다. 
도반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마 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 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산냐라는 헤아림이 함께 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마노로 알아지는 법들에서 그러합니다.”(M18)
“도 반 사띠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 이 못됩니다. 세존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반 사띠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지워져서 일어남[緣起]난다고 설하셨습니다.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는 그 비구들과 더불어 반문하고 대꾸하고 대화하였지만 그 삿된 견해를 완강하게 국집하고 고집하여 주장하였다. 
“도반들이여, 저는 세존께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건너가고 윤회한다.'라고 설법하셨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 사띠를 데리고 세존께 가서 지초지종을 다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사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좋고 삿된 업들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참으로 나는 많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지워져서 일어난다고 설하였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부덕을 생기게 하는구나.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니 그대는 긴 세월을 이익됨이 없고 괴롭게 될 것이다.” <중략>
“비구들이여, 마치 무엇이든 그것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기나니 장작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지저깨비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지저깨비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짚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짚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소똥을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소똥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왕겨를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왕겨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쓰레기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쓰레기불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무엇이던 그 조건을 반연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긴다. 눈과 형상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눈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코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마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중략>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하고 나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한다. '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 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그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상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형상에는 혐오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귀로 소리를 듣고서, … 코로 냄새를 맡고서, … 혀로 맛을 보고서, … 몸으로 감촉[觸]을 닫고서 … 마노로서 법을 분별하여 알고서 사랑스러운 법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법에는 혐오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M38)
“왓차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대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 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내 앞에서 붙고 있는 불은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붙고 있습니다.’라고.” 
“왓차여, 만일 그대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그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꺼진 그 불은 꺼진 후에 어떤 방향으로 갔는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 따마 존자시여, 그것은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하여 타올랐던 불은 그것을 다 써버리고 다른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M72)

10.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이 상의 여러 인용문들에서 봤듯이 고정불변한 마음이란 불교에는 없다. 마음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연이생(緣而生, 조건발생, 연기)일 뿐이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다. 고정불변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의 아뜨만(자아) 이론이 되어버린다. 불교는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들의 무상과 고와 무아를 설하는 가르침이며 그래서 무상․고․무아 혹은 무상․무아․열반은 삼법인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발제자가 마음은 무상이라고 하고 찰나생․찰나멸이라 하고, 연이생이라 하고, 실체가 없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마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냐. 그렇다면 불교는 허무주의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마음이 무상이요 찰나생멸하고 흐름이며 연이생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고정불변한 마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 은 흘러간다.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 탐진치가 있는 한, 우리가 의도적 행위(업)를 계속해서 짓는 한 마음은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하여 쉼 없이 연속적으로 지속적으로 거듭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중생의 삶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이다. 갈애가 다 할 때 마침내 이러한 흐름은 끝이 나게 되며, 이것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반열반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무상이나 찰나생멸이나 실체 없음을 강조하여 설한다고 해서 결코 허무주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매찰나 지금여기에 충실하게 된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 만나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11.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보는 것이 해탈이다

그 러면 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위시한 제법의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강조하셨는가? 이것을 봐야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탈․열반은 무상이나 고나 무아의 통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탈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상과 고와 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주석서들은 강조하는 것이다. 
초기경들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오온에 대해서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는 경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존재(5온․12처․18계)에 대한 염오-이욕-소멸-고요-최상의 지혜-깨달음-열반을 강조하시기도 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마음을 위시한 일체법의 무상, 고, 무아, 연이생 등을 강조하신 것은 이러한 제법의 보편적인 특징에 사무칠 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계합하고 그것과 하나 되려는 발상을 가지면 그것은 관념놀음에 지나지 않게 되어 결코 해탈․열반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금강경』은 자아[我]니 영혼[壽者]이니 인간(진인, 人)이니 하는 것을 단지 산냐(saññā, 相, 想)일 뿐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론송 삼제계로 잘 알려진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 역위시가명 역명중도의에서도 인연소생법 즉 제법의 연이생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을 체득해야 공과 중도를 철견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유식에서도 식을 의티기로 이해하며 식전변을 연이생과 찰나생․찰나멸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몇 가지 초기경을 인용한다.
“비 구들이여,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만남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아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다.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닿아서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서 그런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탐하는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적대하는 잠재성향을 없애버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 무지한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서 무명을 버리고 영지를 일으키고 지금 여기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있다.”(M148)
“비구들이여, 눈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형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알음알이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에 눈에 집착하지 않고 형상들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미혹하지 않고 달콤함을 찾지 않으며 머물 때에 미래에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이 쌓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가 버려진다. 그의 육체적인 곤란이 버려지고 정신적인 곤란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성가심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성가심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열병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열병도 버려진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린다.”(M149)
“비 구들이여, 그러므로 어떠한 물질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서 보아야한다. 어떤 느낌이든 … 어떤 인식이든 … 어떤 심리현상[行]들이든 … 어떤 알음알이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알음알이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서 보아야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염오하고 느낌에 염오하고 인식에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염오한다.”
“염 오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 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라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의 마음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했다.(M109)
“보 라, 아난다여. 그 모든 형성된 것[行]들은 지나갔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은 견고하지 않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모든 형성된 것[諸行]들은 염오하여야 마땅하며 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하여야 마땅하다.”(D17)
한편 초기경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바른 지침서로 알려진『청정도론』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일 어나고 사라짐을 파악하여 흐름[相續]이 해체될 때 무상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계속되는 압박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행동거지가 드러날 때 괴로움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여러 요소로 분해하여 견고함이 해체될 때 무아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이 가운데서 ① 무상이란 무더기 다섯 가지[五蘊]가 무상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것이 무상의 특상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짐이라 불리는 형태의 변화(ākāra-vikāra)가 [무상의 특상이다]. 
②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 가지가 괴로움이다. 왜 그런가? 끊임없이 압박받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압박받는 형태가 괴로움의 특상이다. 
③ “괴로운 것은 무아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은 무아다. 왜 그런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형태가 무아의 특상이다.”(청정도론.21.3-5)

12. 무상․고․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먼저『청정도론』22장을 인용한다.
“이 지혜가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관찰로 일어날 때 [믿음, 삼매, 통찰지]의 세 가지 기능(根)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력으로써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무 상이라고 [형성된 것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行]들은 부서짐으로 나타난다.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공포로 나타난다.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공으로 나타난다.(Ps.ii.48)” 
그들은 표상 없음, 원함 없음, 공함이라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 편안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한 해탈을 얻는다.(Ps.ii.58)” 
이처럼『청정도론』을 위시한 모든 주석서들에서는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상은 무상(無相)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고 고는 무원(無願)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며 무아는 공(空)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다. 이 이외에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법의 세 가지 특상인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을 반야라고 하며 위빳사나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정해진 열반이나 자아나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이나 진리를 상정하고 그것을 체득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과 하나되는 것으로 깨달음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단지 관념이나 상놀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처님께서 간곡히 설하신 해탈과 열반은 아닌 것이다.

13. 맺는 말

이 상으로 간략하게 초기경에서 언급되는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괴로운 것[苦]이요 실체가 없는 것[無我]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비담마에서는 찰나생․찰나멸로 규정하고 있으며 심찰나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런 전통은 유식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편 이러한 무상한 마음의 생멸은 연이생(緣而生, 緣起, 조건발생)이다. 모두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이 소멸할 때 소멸한다. 마음은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나며(所緣緣) 앞 심찰나에 조건지워져서(等無間緣) 일어난다. 한편 마음은 과거의 심찰나에서 지은 업의 결과로도 일어나는데 이를 업연(業緣)이라 부르며 이때 일어난 마음을 이숙식(異熟識, 과보의 마음)이라고 아비담마와 유식에서는 부르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불변하는 실체를 세우면 그 순간 그것은 관념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아무리 그 실체 혹은 본체와 하나 되는 것으로나 그것을 직관하는 것을 설해도 그것은 이미 관념적인 것(산냐, 相, 想)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실현하고 해탈․열반을 체득하는 길은 오직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이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연이생일 뿐임을 이해하고 이러한 것을 지금여기 내 안에서 분명하게 볼 때 실현되는 것임을 초기경들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초기불교에 서 본 마음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이다. 무상은 찰나생․찰나멸로 정리가 되고, 무아는 연이생(연기)의 다른 이름이며, 고는 사성제의 고성제로 정리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일 뿐이며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 만일 고정불변이요 영원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집착이요 삿된 견해이다. 집착과 삿된 견해가 남아있는 한 깨달음도 해탈도 열반도 결코 실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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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묵스님   강의  자료임...

한국불교를 망치려는가

칼럼ㆍ기고 > 기고․견해

한국불교를 망치려는가

미디어붓다 | mediabuddha@hanmail.net | 2016-07-14 (목) 11:04

[마성 스님 특별기고] 초기불교 근본주의자
"어설픈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에게 고한다"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최근 초기경전에 심취한 근본주의자들의 무익한 논쟁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기고문을 본지 미디어붓다 앞으로 보내왔다. 마성 스님은 불교문헌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 붓다가 설한 본래 의미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다고 경고하고 있다. 본지는 이 글이 한국불교와 초기불교의 건전한 관계 정착의 계기가 되길 기대하는 글이라고 판단해 기고문 전문을 게재한다. 이 글에 대한 반론도 일정한 수준의 격조를 갖춘 글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편집자   

  
종교는 인간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의 성전(聖典)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음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지구상에는 성전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현재의 학문적 연구 성과나 과학기술까지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을 ‘문자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자주의자들은 합리적 사고의 능력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자신이 만든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남에게 강요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사회는 불행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테러행위도 자행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불교에서도 초기경전에 심취한 근본주의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에 의한 무익한 논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들은 경전에 씌어져 있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믿는다. 간혹 똑같은 경전의 내용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교육과정과 지적 능력 그리고 수행력의 깊이에 따라 경전을 이해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불교문헌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 붓다가 설한 본래 의미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오늘날의 학문은 다양한 방법으로 텍스트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을 해석학(解釋學)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그 경전을 설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 경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영향 때문에 오늘날의 학자들은 경전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극히 경계하고 있다.

 

스리랑카 담불라 사원. 사진은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련없음.

  

인터넷 불교언론의 댓글들을 보면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은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불교를 전공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이들은 한글로 번역된 빨리 경전 몇 편을 읽고 초기불교의 신봉자 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이들의 특징은 불교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장하는 내용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어제 주장했던 내용과 오늘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초심자들은 심한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진작 자신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이 다루는 주제는 대부분 현실을 떠난 현학적인 담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담론들은 사실상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주제는 한 사람이 일생을 걸고 연구를 해도 그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운 주제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전문가인양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개인적인 생각을 결론으로 내놓는다. 이것은 학문에 대해 조예가 전혀 없기 때문에 저지르는 과오들이다. 제대로 학문적 수련을 거친 사람이라면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학자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언제 자신의 오류가 드러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퇴로를 열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일수록 대단히 용감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내뱉어 놓은 말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한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하루 종일 댓글놀이로 소일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불교공부를 그만 두고 사회봉사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기 때문이다.


어제(7월 13일) 필자가 ≪불교닷컴≫에 기고한 <분노에 대한 오해>라는 칼럼에 대해 이 사이트의 댓글에서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댓글들을 보면서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에게 보내는 나의 답변이다.


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일 자기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을 당하고 있다고 하자. 그때도 분노하지 말아야 하는가? 만일 그러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일 것이다.


붓다는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붓다의 말씀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언제나 상황을 감안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율장≫에 의하면, 어떤 비구가 음행(淫行)을 저질렀을 때, 붓다는 당사자를 불러놓고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를 직접 물어본다. 그런 다음 그 비구가 음행을 범했는가[犯戒], 아니면 범하지 않았는가[不犯]를 판단하게 된다. 만일 그가 의도(意圖)를 갖고 음행을 저질렀다면 크게 꾸짖고 승단에서 추방시켰다. 그러나 그가 어떤 불가항력적인 사정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면, 그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당부하고 용서해 주었다. 모든 행위는 어떤 의도를 갖고 그 행위를 저질렀느냐에 따라 선(善)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악(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윤리는 ‘상황 윤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 그가 말한 대로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지 검증해 보아야 한다. 법정스님의 책이 베스트셀러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도 그의 글과 삶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미사여구는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이 세상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고수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헛된 명예를 추구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불교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오직 논문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뿐, 대중과의 접촉을 가능한 한 삼간다. 이처럼 진짜 전문가는 자신이 전문가라고 나서지 않는다. 비전문가가 엉뚱한 헛소리를 하는 것은 전문적인 학자들의 논문을 읽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해프닝이다.


인터넷상에는 쥐꼬리만 지식으로 전문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1학년 과정만 마쳐도 인터넷에 함부로 댓글을 달지 않는다. 광대무변한 불교사상의 바다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40년 동안 오직 불교학 연구에만 전념해 왔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언제나 부족하다는 자세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런 탓인지 학계에서는 초기불교와 율장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를 전혀 공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간혹 대승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대승 논사들의 탁월한 불교 해석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학문적 검증을 거치지도 않은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필자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하지만, 대승불교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대승불교는 천년이 넘은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검증을 거친 사상이다. 이처럼 대승불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할 뿐이다.


진짜 풍수(風水) 전문가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반풍수가 집안을 망치듯, 어설픈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이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다.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면, 대승불교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대승불교가 불교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것은 초기불교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다.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의 자중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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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그렇다면 2016-07-14 12: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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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은 초기불교도나,
또한 마성스님의 분노개념에 대한 나같은 다른이견자와
그지점에 대해 공개토론이라도 할 의향이 있으시오?
이상한분이군 2016-07-14 12:15:58
답변  
격조를 갖춘 반론글을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하시지 않았소이까.
격조를 갖추어서 반론 댓글을 쓰세요. 그러면 공개토론이 되는겁니다.
말끝마다이상한분 2016-07-14 12:28:27
답변  
그건 기고문을 이야기 하는거요.
고수들이 댓글서 무슨토론은해요?
분문도 이해 안가요?

님 공개토론 결사반대자요?
이상한분이군 2016-07-14 12:33:08
답변  
유저들이 다 지켜보고 있잖아요. 여기는 공개된 곳이잖아요. 로그인 없이 누구나 댓글 달 수 있잖아요. 회원이 아니더라도 게시판 댓글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잖아요. 이미 다 누구나 접속할 수 있고 누구나 제한없이 댓글 달 수 있으며 누구나 다 댓글란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행되는 댓글 토론이 공개토론인거에요.

공개토론 결사반대가 아니라, 이미 공개토론의 장인 곳에서 주제와 상관없이 걸핏하면 공개토론 운운하니까 좀 웃기다, 황당하다는 겁니다. 수저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 내 수저 어디있냐고 찾아내라고 성화를 내는 사람 보면 이상하지 않아요?
말끝마다이상한분 2016-07-14 12:52:24
답변  
결사반대자로군......아듀
이상한분이군 2016-07-14 13: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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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상한분 맞네, 반박도 못하고 도망치는 걸 보니.

로그인 없이, 등급이나 자격제한 없이, 특정한 절차없이, 누구나 다 와서 누구나 다 하고 싶은 말하는, 열린 게시판(공개게시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본적인 사이트 속성도 모른체 '공개토론' 왜 안하냐고 해야한다고 이상한 주장을 하다가. 여기가 바로 공개토론의 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반박도 못하고 도망치는군. 공개토론하자는 분이 왜 공개토론을 거부하고 도망치실까요?
이상한분이군이사람은 2016-07-14 20: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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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호잔 2016-07-14 12: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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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에 귀의하옵고,
스님의 지적에 따라 저는 자중하겠습니다.
그동안 저의 글 또는 댓글이 불편하셨던 스님들에게도 사과드립니다.
변명을 한다면, 저는 밝힌 바와 같이 전문가나 학자 또는 출가자로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가야할 길이 한참 먼 재가 불자일 뿐입니다.
분노하라에반대 2016-07-14 12:50:02
답변  
'...어떤 고위 공무원이 민중을 개나 돼지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신분제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의 발언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국민이 아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과 같은 국토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분노에 대한 오해'
[연재] 마성 스님의 摩聖斷想-16 (불교닷컴에서)

윗글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다.
문제 발언 당사자가 교육공무원 이기에 반향이 큰 것 처럼,
불교학자스님으로서, 합당하지않은 말처럼 보인다...

사회의 어느 한쪽 사이드에 얼마든지 불교학자스님으로서
자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드가 모든 국민의 당연히
할 도리라고 믿고, 또 그 반대사이드는  존재자체가 싫다는 발언은....
스님의 위글 논리대로라면 사회도 잘 모르고 정치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또 해석학에서도 상황논리에서도 지나치지 않나싶다...
그러던지요 2016-07-14 13: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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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무원이 국민인 당신에게 개나 돼지라고 하고, 당신같은 사람을 하위 신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신은 '분노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군요. 허면 당신은 고위공무원이나 권력자들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노예로 삼아도 분노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원하신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하지만 우리나라는 헌법에 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공화국이란 말으 의미를 아신다면 신분제하자는 주장을 근원적으로 할 수 가 없는겁니다. 헌법을 부정하는 공직자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둘 수 있어요? 그는 국민적 분노에 의해 당국에 의해 파면됐습니다. 여야 모두 그의 파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마성스님의 입장이 일반 국민의 상식이고 우리나라 헌법에도 맞는 법상식이고 불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인간차별을 반대하는 불교의 원리에도 맞습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노도 안된다고 하셨다,고 믿는 당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부처께서 사람이 사람을 개나 돼지 취급해도 분노하지 말라',고 하셨느냐고 되묻고 싶네요. 사람이 사람을 개돼지 취급하는 것은 일단 계정혜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개돼지 취급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분노도 표현하지 않을때 세상은 온통 사람을 개,돼지 취급하는 사람만 남을겁니다. 그런 지옥같은 세상은 바로 불의에 분노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신같은 사람이 만드는겁니다. 히틀러에의 만행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아서 유럽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진 것입니다. 불의에 분노하지 않고 침묵한 댓가입니다.

당신의 불교적 해석이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겠고 인간성마저 버려서야 쓰겠습니까.
상식에반하는주장 2016-07-14 14: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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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이해를 잘 못하신 것 같네요,라고 되돌려 드리죠.

개,돼지 취급하는 고위공직자와 같은 국토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 라고 마성스님이 분노하셨잔하요. 분노-반대라는 분은 개,돼지 취급하는 고위공직자와 같은 국토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아무런 분노도 해서는 안된다는 거잖아요.

마성스님의 관점이 폐쇄적 정의라면 열린 정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린정의의 관점도 제시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마성스님의 상식적 정의를 폐쇄적 정의로 규정해요? 분노-반대가 열린정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게 설득력을 가질 때만이 마성스님의 정의가 폐쇄적이 될 가능성이라도 있는겁니다. 분노-반대의 우려가 전혀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은 개,돼지 언급한 공무원이 국민들의 바람대로 파면됐다는 것이죠.

개,돼지 언급한 공무원을 파면시킨 국민들이 수준이 높을까요, 아니면 개돼지 언급한 공무원에게 분노하면 안된다는 분노-반대가 수준이 높을까요? 파면시킨 국민들이 폐쇄적 정의를 실현한 것이 맞습니까? 국민적 상식을 폐쇄적 정의라고 하고 상식에 반하는 자신의 입장을 열린정의라고 한다면 상식을 몰상식 취급하는거고 몰상식을 상식으로 아는 뭔가 정신이 잘못된 사람의 주장이 아닐까요.
상식에반하는주장 2016-07-14 1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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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반대 라는 뜻이 뭐에요?
공적인 분노를 해야한다는 마성스님의 입장에 반대하는 것으로 공적인 분노하면 안된다는 거잖아요. 그 정도 독해력도 없나요? 닉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구만.

당신 마음에 몹시 걸린다고 해서 "폐쇄적 정의"가 된거에요?
상식적 기준에 의해서 "폐쇄적 정의"가 되는게 아니라 당신 맘에 걸리는지 안걸리는 지에 의해 "폐쇄적 정의"도 되고 "열린 정의"도 되나요?

이번에 개,돼지 발언으로 분노하여 그를 파면시키라고 요구했던 국민들의 입장이 당신에겐 몹시 맘에 걸립니까? 세상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타입이신것 같네요. 아마도 공감능력이 현저히 낮거나 없는 사람같네요. 다수의 국민상식과 다른 정의관을 가지시고 계시니까요.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과 같은 국토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는 표현이 곧 "공적인 분노"입니다. 국민을 개,돼지취급하는 사람과 같은 국토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혀 불쾌하지 않을 당신 같은 부류가 있다는 게 다수의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불행이지요.
뭐래 2016-07-14 13: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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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 달라 하고 그 권위에 굴복해 달라, 하신 것은 없으십니다. 40년간 초기불교 공부하신 분이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을 할 까닭이 없다는 정도를 말씀하셨네요. 스님이 보시기에 초기불자연 하는 맹신도들은 남이 번역해 놓은 것(스스로 번역할 능력은 없고), 그것을 문자적 인해로만 받아들여서 무오류라고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석존께서 하신 말씀이 상황과 조건 말씀을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말씀자체만 딱 떼어다가 전혀 다른상황과 조건에 무차별적으로 부처님 진리랍시고 적용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겁니다. 아주 상식적인 말씀이 아닙니까. 초기불교 전공학자들도 함부로 부처님 말씀이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을 꺼리는데 왜 전문가도 아닌 자들이 석가모니의 말씀은 이런거다,라고 함부로 단정짓느냐는 겁니다. 틀린 말씀 없잖아요?

마성스님글에 어떤 권위도 부여하지 않고 숭배적 태도도 없으시면서
권위의 우상숭배라는 말을 왜 해요?
마성스님의 글이 권위의 우상숭배글이 되어야만 자신의 입장이 옳은게 되니까 그런 말을 하는것이겠지요? 하지만 마성스님글에 네거티브 한다고 해서 당신의 주장이 포지티브가 되지는 않아요.

마성스님글에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어디있습니까?
경전해석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말씀만 하셨는데
어디에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있다는 겁니까?

격식을 갖추어 반론하면 환영하신다 하셨는데도
스님이 '언로탄압'하시는 것이라니? 초기경근본주의자가 맞으신듯
동감 2016-07-14 2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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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요
스님께 2016-07-14 15:21:26
답변  
귀의삼배 하옵고 스님께 여쭈옵니다.
단도직입으로 질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인터넷 특성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면서 질문드리겠습니다.

아라한을 재교육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대승불교라는 주장에 대하여
스님께서는 어떠한 말씀으로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가끔 와서 공부하는 초보 근본불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라한 이상의 도달경지는 없는 것으로 알다가 그 위에 보살의 경지를 1~10단계로 올리고, 부처님의 경지는 10지보살의 단계라는 답변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부처님의 아라한의 경지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야 하는지요?

그 주장이 한국 불교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이고, 전세계 대승불교권에서도 일반론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존경하는 스님의 입장은 무엇인지 간절히 알고 싶습니다.
초보자 합장-()()()_
내가답할입장은아니지만 2016-07-14 16:50:03
답변  
대승의 입장에 대해 왜 초기경수행자가 왈가왈부해야 되요?
님이 대승의 주장에 동의할지 말지를 님이 결정하면 되는 거고
초기경수행자가 대승의 입장에 찬반표시한다고 해서 대승이 자신들의 입장을 바꿀리도 만무합니다. 초기불교를 선택하셨다면 그 선택이 후호없도록 초기경으로 열심히 수행하시면 됩니다. 왜 대승불교나 여타 다른 가르침에 대해 신경을 쓰시는지요?

자기가 가는 길이 확신이 없고 흔들린다는 것인데 타인의 말에 의해 가는 길을 결정했나요?
스님께 2016-07-14 17: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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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스님의 설명으로 듣고 싶을뿐입니다.
직접하시기 어려우시면, 스님이 직접 명백히 하신 글(논문)이나 말씀을 소개라도 해 주시면 읽겠습니다.
관련 없는 다른분들의 댓글은 사양하겠습니다. 초보합장.
어설픈초기불교자들이 2016-07-14 20: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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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스님은 불교문헌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 붓다가 설한 본래 의미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다고 경고하고 있다."

위 말에 동감...
그러나, 지금은 이미 늦었겠죠?
벌써 20 30여년이 되었는데말이죠. 아마....
원불사단현 2016-07-14 21:52:45
답변  
진흙속연꽃이 읽고 참회하라고 쓰신 글입니다.
상식 없는 자가 초기경전 운운하며 억지 글을 난발하는 것이 초기불교를 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이 설해진 동기 역사를 모르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수미산이니 33천이 어떻고 지옥과 천상이 실제로 있는 것으로 믿게 되고 귀신 천신이 돌아다닌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도리어 이단이라고 힐란하는 연꽃 같은 바보가 없길 바랍니다...
믿음을탓하지맙시다 2016-07-14 22: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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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현 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종류의 바보가 있겠는지요, 요즘 세상에. 오히려 삼계의 종생적 실존성을 단지 비유로 격하하여 욕계-색계-무색계 해탈과 십분결 해탈의 대응을 망실시킴으로써 부처님 가르침인 점수적 열반-해탈론을 부정하게 하는 몰이해들이 더 걱정이지 않나 싶네요. 나모땃사 바가왓또 아라핫또 삼마 삼붓다사 _()_
안죽었네 2016-07-15 11: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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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이 만들어진 동기 역사를 모르고
무턱대고 대승경전은 힌두교 스파이들이 만들었다,
대승승려들은 사이비다, 대승경전 불살라 버리고, 대승승려 몰아내자....운운 하면서 쌍욕을 동원해서 한국승려들을 모욕하기 비방했던 원불사단현씨가 할말은 아니지요. 초기부교 권오민 교수가 당신같은 무지막지한 주장을 하면서 대승경전을 불살라 버려야한다, 초기경만 읽히게 해야한다는 해서 니까야가 불설이라는 근거가 없다. 문헌적으로 고증해 보면 니까야도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각부파의 경전편집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편집한 경전이다, 라고 학자적 양심으로 말했어요.

난 원불사단현같은 배타적이고 포력적인 사람이 초기불교를 더 망치고 있다고 봅니다. 마성스님이 당신이 인터넷에 뱉어놓은 폭력적 언어들을 보면 아마 경천동지할 걸요.

한동안 불교언론에 안보이던 나타나셨네요. 과거의 모습에서 얼마나 변했고 참회했는지 모르나 누군가를 훈계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이해 보입니다.
다원이오 2016-07-20 00: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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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이해하는데 설해진 동기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

대승경전의 동기와 역사가 오리사리 했단 반증이 아닐까요?
그래서 문헌학으로 역사와 동기를 알려고 하는거고... 그런들 역사와 동기를 알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알지말자는 거는 아니고...
그래서 너무 심하게 변하거 말고... 최대한의 전승 그대로의 것인 테라와다 초기불교를 정법의 준거로서 인용하는거 잖아요.

목사들이 성경인용 할 때 역사와 동기가 있나요? 연대기가 있다지만 실제로는 순서가 엉망이잖아요?

그럼,
단현은 뭘 믿는지 궁금하네요?
문자 그대로 해석 안하면, 무얼 해석하나요?
해석의 근거나 기준은 어떤거나요?

팔정도가 기준인거는 알거고... 그럼 초기불교 팔정도가 아니면 단현의 팔정도는 어디거입니까?

연꽃을 바보라고 하는데... 꽃님이가 사람 좋으니까... 일언도 벙긋거리지 않는다고 자꾸 갈구며 건드리는 모양인데.. 이제는 사천 광불사 근본불교대학 학장 마성스님이하 도반들이 동원돼서 꽃님이를 흠집내려고 작당들을 하셨는가요?

이래도 되는거요. 마성 스님이 이렇게 뎃글에 등장해도 되는거요?
부처님과 예수가 등장해도 레미콘차로 자갈을 퍼부어서 뼈도 찾기힘들 한국 땅에, 이따금씩 마성스님을 내세워서 꽃님이를 이바구해서 흠집을 내려고 하는데.. 머하는 짓들이요? 그대들이 불자들이 맞나? 조계종이 하는 짓이나 일배들이 하는 짓이나 다를게 뭐요?
불교가 끼리끼리 노는 젠더들의 합숙소나!
꽃님이의 초기경전 인용과 칼럼이 머가 틀리다는 거요? 또한 때때로 잘못알고 쓴곳이 있다 할지라도 설법도 아니고, 학술지 논설도 아니지 않는가? 아는 만큼 경전을 인용하고 거기에 준용해서 그 틀 한계 안에서 해석된 만큼 생각을 펼치는 것이 머가 어쨌다는 건가?
글의 내용이 마땅치 않고 자기 불교관과 모리배정서관과 맞지 않으면 자기들이 가고 싶은 길만 묵묵히 가면 될 일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원불사 개시판 다 걷어치우세요? 그 글들은 역사와 동기가 담보된 글들인가?
연꽃 같은 바보만 되도 당신들 만한 인격보다는 나을 것이요. 
문헌에 박학하다고 스님도 아니고 교학 좀 안다고 잘난 불자가 아니라고..
심소가 재대로 박혀있어야 불자라고...
손오공 겨드랑이 털 뽑아서 유체이탈하는 모리배들에게는 과보가 있을 것이야... 뜨근뜨근한 걸로...
나 다원이는 권하고 싶다. 꽃님이만큼만 바보가 되라고... 그 이상이 되려고 한다면 제 분수도 모르는  불덩어리 들...
나 욕쟁이 다원이야 이미 존 소리 포기한 중생이니까... 이정도야 친절한자비인줄 아시요. 내 단현에게 할 말을 많으나 이미 이 기세간의 중생취급도 안하고 있으니 후에 인연이 있으면 지옥에서라도 만납시다...()...
그렇지 2016-07-23 08: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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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와야 정상이지...!!!

참회하시오!!! 그거이 개혁이오. 연꽃 바보만들지 말고... 바보는 혼자로 만족하시오. 부처님 법이 그것이오.
아미타불 2016-07-15 10:27:11
답변  
현 불교의 가장 큰 폐단은 초기불교론자들이 아니라 법을 설하는 분들이 윤회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거기까지 공부가 되어있지 않아 단지 죽으면 끝이라는 단멸들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끝이라 생각하니 이생에 겁없이 탐욕을 부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분들이죠 하지만 윤회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미 우주가 윤회의 법칙으로 돌아갑니다 업장이 무섭다는 것을 죽어보면 윤회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느껴본다면 뼈져리게들 후회할 것입니다 ㅡ()ㅡ
오류좋아하네 2016-07-15 12: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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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어미나 누이가 강간을 당하고 있을 때
당신은 아무런 분노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어설픈 논리로 자꾸 빠지지 말고
실제로 사건이 벌어졌다는 가정하에 당신의 어미나 누이가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일말을 분노의 감정도 일으키지 않을텐가? 만일 그런게 가능하다면 당신은 허수아비나 로봇처럼 감정이 없는, 감정이 거세된 정신병자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오류좋아하네 2016-07-15 12: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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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어미,누이가 강간범에게 당할 때
당신은 그 장면을 보고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냐고요?
당신에게 물어보는거지 부처님께 물어보는게 아니잖소
대답해 보시오
오류좋아하네 2016-07-15 12:59:53
답변  
니 엄마와 누이가 너보고 그럴거야
"니가 사람새끼가 맞냐고"

그리고 천인공노할 짓을 나는 한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할거야, 약자가 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도 하지 않는 인간이 천인공노할 인간이야 입은 삐뚫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응?

마성스님마저도 일천제로 취급해 버리고야 마는 너의 무지막지함을 보고 부처님께서 괜히 불법을 설했다고 후회하시는 모습이 선하다. 오죽했으면 마성스님이 초기불교근본주의자라고 딱 잘라 표명하셨을꼬. 초기불교 수행자한테도 거부당하는 자칭 초기불교도들 너의 이번 댓글로 인해 이제는 일말의 가련한 생각도 생기지 않게 됐다. 불교를 배웠는데 결과가 싸이코패스라니, 석가모니께서 통탄할 일이다 이눔아!
ㅋㅋㅋ 2016-07-18 16: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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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진짜 불교를 배웠는데 결과가 사이코패스, 무감정 로봇이라니...ㅋㅋㅋ 이런 분들은 차라리 애초에 불교에 불자도 모르고 사는 게 세상에 더 이로울 듯..
너혼자가라 2016-07-15 13: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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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니가 괌에 배치된 사드지역에 잡입해서 한 1년만 살아보지 그래? 전자파가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면 되잖아.
너혼자가라 2016-07-15 13: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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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끄네 여신의 점지를 적극수용하고 한국민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니가 사드의 안정성을 몸소 검증하면 좋잖아. 검증해서 이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것으로 성주국민을 설득하면 되잖아. 왜 하기 싫어? 입으로만 한국민, 바끄네 여신 나불거리는 자야?
놀랍다 2016-07-15 12: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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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을 가르치려 드네요?
놀랍다 2016-07-15 1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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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탐진치를 본다고 했는데 그닥 잘 본것은 아닌것 같아. 아직 치심이 성성한 것을 보니 말야. 파랑새를 찾는다는 거 자체가 아직 지혜롭지 못함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못 보나보지? 마성스님을 보고도 자신의 무지를 못 보는 것처럼 자식을 보고도 자신의 탐진치를 잘 보지 못할꺼야. 그만큼 업장(무지와 아집)이 두텁다는 거지.
선동과수행의차이라할까 2016-07-15 14: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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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가 화를 내면 안된다"
"불의에 분노하라"

위 두문장은 같은걸 가르킨다.
일반화의오류라고 할까?
선동과수행의차이라할까 2016-07-15 15: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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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댓글이 욕지거리에 좀그런것도 있는데,
모든댓글러들이 그런건 아니죠.
오히려
검증되지 않은 기고문들도 한국불교 망치는건 아닌지?

제안을 하자면,
각종매체들은 기고문자들의 연락처와 소통메일주소로,
이견 이의자 댓글러와 소통할수 있도록 하면 어떨지....
이런게 먼저 기고문자들에 의해 소통노력이 선행된다면,
한국불교를 살리는 일보가 아닐지?
궁금이 2016-07-15 15: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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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를 올리신
마성스님은 수행자입니까?
해석학적 방법을 통해서 재해석을 시도하시는 학자입니까?
진짜 몰라서 묻는 물음이니 복잡한 재해석은 말아주세용.
이름일뿐 2016-07-15 21: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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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
라고 했거들랑요..

뗏목을 들고 댕기니가 " 분노라는 이름에  말들이 많고  시그러운 겁니다..
번뇌즉 보리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걸 이해 한다면

분노즉 보리..
번뇌즉 보리라고 하는데..

분노는 뭣 잉~~~
초심자 2016-07-15 22: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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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초심자로서 한마디만 하고 이댓글판에서 ..나가겠습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말법시대)  법정스님같으신분이 돌아가신후 또그런 훌륭하신 스님분이 다시 우리나라 불교계에 나타나신다면 그보다더 더한
복덕이 없을건데 ....초심자불자로서. 늘 불퀘하게 생각하는점을 오늘 스님께서 한마디 해주시니 저도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는 미디어붓다에 언제부터인가 게시판의 대문글도 관심이 없어지고, 댓글도 전혀
읽지 않습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는생각이고요, 꼬투리잡기 윌해 달려드는 이무기같다는 생각과 함께....불교뿐만 아니라 다른종교도 그렇지만 종교의 가장 원천적인 문제인 이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일반재가자가 불교관련글을 쓰면서..
저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불교적인 현실이 문득 슬퍼지더군요.
그렇게도 불교관련 블로그를 운영할 인재가 없나? 그래서 결국엔  이름도 가명에다가 얼굴도 공개를 않하는..일개 일반, 보통불자가  돈도 되지 않는다면서  ....은근슬쩍 불교블로그를 하면서, 스님도 비판하고, 학자들도 자신의 발아래로 보고, 그리고 어떨때는 바로 자신이 부처인양 그리 착각도 한다고 ,,,허심탐회하게 자신의 속을 털어 놓기도 하는 이러한 개탄할만한 우리나라 불교계의 현실이...너무 슬프고 화가 납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이모양이꼴이 됐을까 하구요.
비유를 하자면...스승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짜증나게 제멋대로 인 사람인데,
머리는좋아서 도저히 아무도 그사람에게 뭔가 문제점을 토로하지 못하고,
그냥  다른 별다른 스승이 없으니...그냥 그사람의 블로그를 들여다 보는
그런 실정이고  우리나라불자들은 .....좋은 불교 스승님이 그닥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시대가 혼란스럽구,난세일때엔 영웅이나 고수들이 어디 심산유곡이나
사람없는 곳으로 숨어든다구 하는데....그런것인가 봅니다.
저불교초심자는 이러한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짜증이 나구,스멀스멀
화가 올라 오려다
그래 , 이럴수록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자등명, 법등명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불교를 잡고, 이칡흙같은 혼돈의 시대에 현명한 판단을 내려서, 세세생생
윤회의 바다에서 그누가 사이비인지? 그누가 정말로  언행일치하는 수행승인지 ?를 가려내는 지혜와 또 제가 가야할길은 어느길인지?판단를 내리는
지혜등등 ...저도 갈길이 너무 멉니다   
하지만 좋은 불교도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뉴스시간대에, 고위공직자의 비리가 터지지 않는날이 없고
이런세상에서 살아남기위해선, 나도 알게 모르게 그런세상의 흐름을 타게 되고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 이게 답은 아닌데, 그래서 불교를 의지하게 되고  부처님그분 가신그길을 배우고 본받고 싶은데, 글은 훌륭한데, 언행은 일치하지 않는자가 자꾸 이말하고 저말하고 ...종잡을수 없는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이 스승이 될수가 없다고 ..하늘이 두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이건 정말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성스님 이번 글 정말 잘 올려 주셨습니다 .
중심자 2016-07-16 13: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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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게시판에 대해 필요이상의 으미부여를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불교판이 상상이상으로 꽤 넓어요. 불교언론 몇개 안되고 댓글 게시판 이용자도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숫자가 적습니다. 이들의 댓글 하나하나에 의미부여하여 한국불교 전체가 어떻다는 둥 가늠하지 마세요. 진짜 선수들은 이런 게시판에 오지 않습니다. 불교 스터디 그룹 만들고, 강사,스님등을 초청하거나 찾아가서 직접 법문듣는 불자들 많습니다. 참선수행도 직접 찾아가서 배우는 분들입니다.

여기 게시판에 나오는 태반의 사람들은 실제로 실참수행하는자들 별로 없어요. 진흙속의 연꽃만 해도 실수행을 해 본 경험이 없노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습니다. 마성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남이 번역해 놓은 초기경 좀 읽은게 전부이고 위빠사나 수행을 실제로 해 본 사람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런 자들의 말에 왜 의미부여 하고 그런 자들을 근거로 해서 왜 한국불교 전체를 가늠해요? 전 아니라고 봐요.  여기는 사바세계의 현장입니다. 님의 눈에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과 상황이 벌어지는게 사바세계에요. 아 저런 부류들도 있구나 하면 되는 거지요.

자기들의 좁디 좁은 소견을 지켜내고자,
자기들이 칭송해 마지 않는, 대승승려보다 뛰어난 청정승인 테라와다 수행자이신 마성스님마저도 한 수 가르치려 들잖아요.
이들은 가차없어요, 강병균교수가 참나는 힌두교다,라고 글 쓸때 초불들이 강병균편에 서서 열성적으로 편들다가 그가 윤회를 부정하자 마자 단멸론자,유물론자로 가차없이 버리더군요. 각묵스님이 초기경 번역내자 그에 열성적으로 응원하다가 각묵스님이 안거기간에 간화선을 하신다 하니 또 가차없이 버리더군요. 마성스님에 대해서도 대승승려보다 낫다고 칭송하더니 오늘 또 가차없이 버립니다.  기준은 자기들의 논리를 지지해 주지 않으면 모두 적이라는 아주 단순한 논리죠.

괜히 마성스님이 근본주으자들이라고 하셨겠어요?
스님께 2016-07-16 0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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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즉 보리니, 번뇌 즉 보리니 , 중생 즉 부처니하는 그 주장이나 명제는 부처님의 어느 경전에 출현하시는지요?
.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스님이 지적하신 누이의 강간을 보고 분노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전제(사례)는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매우 잘못된 거증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에서는 스님이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그 누구든 순간적으로 꼭지가 돌아버려 분기탱천하지 않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신속한 주시(알아차림)의 지혜로써 대처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초보인 제가 알기로는...
12연기의 결정적 중단은 오로지 알아차림으로만 중지시킬 수 있을뿐, 갈애와 집착으로는 결코 끊을 수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자극적인 제목(한국불교 망치려는가)의 꾸지람을 내리신 의도와 걱정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격정적인 토론과 치고박기가 한국불교의 다이네믹한 발전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수는 없을런지요?
저는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막행악구를 하지 않는 차분한 주장을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여기는 대부분 부처님을 믿음으로 하는 미디어붓다라는 특수한 공간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초보자입니다.
그만하시죠 2016-07-16 13: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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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즉 보리는 대승경전에 나와요. 대승경전을 인정하지 않는 그대에게는 말도 안되는 것일지는 모르나 법공에 대한 이해가 트이면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성스님이 든 극단적인 사례 마저도 진흙속의 연꽃은 화를 내선 안된다고 했습니다. 자비의 일환으로 내는 화도 안된다고요. 당신이 말했다시피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분노하는 순간 야차,아수라가 된다면서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화조차도 거부해야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은 틀렸다는 게 마성스님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진흙속의 연꽃은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일말의 화도 내서는 안되고, 조금이라도 화를 내면 그 자를 떠나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에 대해서 마성스님이 반론한 것이므로 매우 잘 된 사례를 통한 반박이 되는 거지요.  당신도 경전을 실상황에 적용하는 법을 잘 모르시는군요.

당신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서도 '차라리 그러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신속한 주시(알아차림)의 지혜로써 대처가능 하도록 해야할 것' 운운 하였습니다. 앞말고 모순이 아닙니까.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맞다면 그러한 순간에 냉정한 주시 운운하는 것은 틀린 말이 되고. 냉정한 주시가 가능하다면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뭐에요 하고싶은 말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화가나는 것을 여기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화에 휩쓸리지 않고 화를 통제해 가면서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게 냉정하다의 본래 뜻입니다. 냉정이라는 말 안에 아무런 미동도, 화도 없이 차분하게가 아니에요. 화가 불같이 솟아나는 상황이지만 자신안의 화를 통제하는게 냉정한것이지 아예 화가 나지 않게 억제하는 것은 싸이코패스입니다. 우리는 슬픈상황에 직면하면 눈물을 흘리고 기쁜상황을 맞이하면 깔깔거리고 웃게 되어 있고 분노의 상황에서는 화를 내도록 세팅되어 있습니다. 이건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태어날때 부터 그렇게 프로그램이 되어 태어난 거에요. 만일 슬픈 상황에서 기뻐하며 웃거나 화가 날 상황에서 화를 내지 못하면 그것은 정신에 심각한 병이 생긴겁니다.

부처님께서 화를 내지 말라고 하셨을 때는 탐진치심에 기반해서 제 욕심을 채우려는데 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화입니다. '나'를 남보다 앞세우는 화입니다. 내꺼야, 내가 먹을거야, 내 이익이 침해되잖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해야 돼....이런 화를 근절해 내지 못하면 열반은 어림도 없죠. 하지만 '나'가 아닌 약자들이 강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때, 부당한 일, 부패, 다수의 피햬가 벌어질 때..."내가 위험해 질지도 모르고,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남과 공동체를 위해 내는 화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거지 그것을 가지고 야차,아수라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강간범,강도......등 나와 상관없지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자들이 뉴스로 나올때 화 안나요? 저런저런 못된놈~ 이러면서 다들 화를 냅니다. 이것은 야차,아수라가 되겠다고 내는 화가 아니라  울고,웃는 것처럼 인간에 내재된 자연스런 것입니다. 우리는 옳지 못한 것을 보면 화가 나도록 세팅되어 있어요. 부처님께서 정의(올바름),자비의 일환으로 내는 화도 내서는 안된다고 하신바가 없습니다. 있다면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와 보세요...이게 마성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할소릴 2016-07-16 14: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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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지 못하는 것도 너
사유 못하는 것도 너
이해 못하는 것도 너
맥락 모르는 것도 너
마성스님을 가르치려고 드는 것도 너, 초불근본주의,맹신주의자인 너
질문은 2016-07-16 16: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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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쭙겠습니다.
번뇌 즉 보리나 심불급중생은 무차별이라는 표현은 어떤 초기경전이나 대승경전에 나오는지 아니면 선사의 가르침에 있는 것인지요?
막연히 대승경전에 나온다고만 하시지 마시고요.
가끔은 선사의 말씀이 (대승)경전이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의도적 행위는 개인의 업식으로 축적되는만큼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은 그 의도적 행위가 자신의 깨우침과 공동체에 이익을 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판단하여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답변 중에...
세팅된대로 일차적 반응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표현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아주 거리가 먼 행동이아닐까요?
제가 잘못 오해하고 있나요?
사악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저는 급속히 제 자신을 먼저 살펴보면서 "저런 어리석은..!"이라는 자세로 봅니다만.
그만하시죠 2016-07-16 17: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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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유마경에 나옵니다.
탁한 진흙밭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듯이 여래의 종자도 인간의 번뇌에서 피울 수 있다, 그리하여 번뇌속에 보리가 있고, 생사속에 열반이 있다는 의미로 '번뇌즉 보리' '생사즉 열반'이라고 한다.
선사의 가르침도 대승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도 혜능대사의 육조단경에 나오죠. 선사들이 대승경전의 논리를 그대로 이어 받아서 선불교의 가르침을 펼치는 것이지 대승과 상관없는 별도의 가르침을 펼치지는 않습니다. 대승의 범주에 선불교가 포함된다는 상식만 가져도 대승의 가르침 따로 선불교 가르침 따로라고 판단하지는 않죠.

남들 다 웃을 때 슬퍼하거나
남들 다 슬퍼할때 웃거나
남들 다 화를 낼때 기뻐하면 정상인인가요? 부처님 가르침 이전에 그대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모두다 강간에 대해 분노할때(인간은 그렇게 세팅되어 있는데)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거나, 기뻐하는 사람이 정상이란 말인가요? 부처님이 그런 상태를 인정하는 내용이 경전상에 나옵니까.그대야 말로 그런 생각하는 이유를 경전적 근거를 통해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런 어리석은!" 이라고 반응하는게 분노에요! 어쨌든 강간범 같은 파렴치한에게 "반대한다, 분노한다, 왜 저렇게 어리석은 거냐...." "저런 어리석은!" 이라는 그대의 마음안에 일말의 분노의 감정도 없어요? 어리석다라고 일갈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불의라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법을 배우지 않아도 인간은 잘못된 것에 대해 귀신같이 판단합니다. 말 잘 못하는 아이의 과자를 그대가 뺏어 보세요. 아이 얼굴일 바로 찡그립니다. 아이는 말은 못해도 남의 것을 뺏는 것이 잘못이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다만 이런 세팅된 마음이 업장(탐진치) 때문에 왜곡되어 나옵니다. 부처님은 그런 업장이 마음병이라고 명명하시고 그것을 수행으로 제거하여 치유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병을 치유한 사람은 개이의 탐진치에 의거하지 않고 본성대로 세팅된 대로 맑음 마음으로 감응합니다. 불의를 보고 자시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저항하죠. 개인의 탐진치 때문에 "불의에 저항해 봤자 나만손해야"라면서 침묵하지는 않아요.

아직도 스님이 든 사례가 잘못되 거증이라고 생각하세요?
다원쓴소리 2016-07-16 01:05:18
답변  
[...‘문자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자주의자들은 합리적 사고의 능력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자신이 만든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남에게 강요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사회는 불행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테러행위도 자행하기 때문이다... /본문인용]
➥다원왈: 도그마. 일반화의 오류. 논리의 비약.

[... 불교문헌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 붓다가 설한 본래 의미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다. ... 대부분의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은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불교를 전공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때문에 그 주장하는 내용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어제 주장했던 내용과 오늘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초심자들은 심한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진작 자신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인용]
➥다원왈: 학문적인 논지가 아니라서 표현의 적절성이 일관되지 못한 점은 있어도 상반되게 쓰면서 맞다고 우기는 사람은 내가 싸우는 그 넘 둘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이하존칭 생락합니다.) 꽃님이를 지칭하는 경우라면 더욱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왜냐면 문장의 구성이 마성 스님의 집필이라면 항상 반론에 대한 개념정리, 용어선택, 출처, 구성 등등이 완전해야겠지만 꽃님이의 글은 글을 쓰는 상황과 문맥에 합하는 정서만 전달되면 그만인 수필, 에세이 같은 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왜? 혼란을 겪어야 하는가? 수필과 에세이는 이해되는 곳까지만 읽으면 돼는 것 아닌가? 다행이 꽃님이는 수필이나 에세이를 넘어 논문 수준에 가깝게 경전의 출처를 일일이 인용해 주는 세심함이 돋보이지 않는가? 얼마나 고마운가? 거기서도 부족하면 자기가 찾아보며 체워가면 되지 않는가? 잘못된 곳이 있으면 가르쳐주면 되지 않는가?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넷 시대에 넷상에 글 쓸 사람이 정해져 있나. 아무리 불교라도 불교말 할 사람 정해야 한단 말인가? 정할수도 없을 텐데.. 답이 나올 수도 없는 에매한 떼제를 깔아 놓고 누군가는 ‘스스로가 모르는 것 같다.’라는 결론인데.. 이것은 결론이 아니라 초불신봉자들에 대한 스님의 투사 아닙니까?
왜냐면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도 맞는 말이 아니고 공부를 했다고 해서 일관성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라는 이 말, 공부를 떠나서도 다 알아먹을 겁니다. 그런데, 불교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발 더나가 공론으로까지 알아먹어야 하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고요...
그러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스님은 알고 있나요?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스님은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아는 말을 잘 알고 하시는건가요?
스님은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아는 말을 잘 모르고 하시는건가요?
스님은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면서 아는 말을 잘 알고 하시는건가요?
스님은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면서 모르는 말을 잘 모르고 하시는건가요?
 이 문장이 말이 안되는 문장인가요? 글씨하나 순서가 틀리지 않게 멋진 글입니다. 묻는 질문이니 대답 해주세요. 대담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스님의 단견을 다시 한 번 숙고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이글도 언설이고 스님의 글도 언설이기에 언설로서는 스님의 더 깊은 도는 내가 헤아릴 길이 없음을 밝힙니다.

[..마치 자신들이 전문가인양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개인적인 생각을 결론으로 내놓는다. .. /본문인용]
➥다원왈: 만약 고집과 아집을 부렸다고 합시다. 설령 고집과 아집 일지언정 주장했다고 한다면 거기까지도 좋습니다. 떼 좀 쓰고.. 주장을 하고... 고집 좀 부리면... 이것이 전문가인체 하는 겁니까? 스님의 위의가 엄연한 여기서 단언명령이 정언명제처럼 들리는 마당에... 전문가인체 한다는 냉소적 표현도 그렇지만... 여기 글쓰는 사람이 모두 전문가라서 글 씁니까? 욕쟁이 다원이 잡는 몇몇 안티 팬들... 모두 전문가입니까? 여기 쓰는 뎃글 전문가들이 모두 퇴로를 열어 놓고 글을 씁니까? 아니면 누구를 말하나요?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하루 종일 댓글놀이로 소일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불교공부를 그만 두고 사회봉사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기 때문이다... /본문인용]
➥다원왈: 이런 글은 다원이가 이름도 없는 사족들에게 욕을 붙여준 비형상들에게 보내면 좋겠다. 사회봉사는 언감생심이다. 수치심과 양심도 없는 자들.. 시간이 아까운자들.. 

[...만일 자기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을 당하고 있다고 하자. 그때도 분노하지 말아야 하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에게 해당된다. .. /본문인용]
➥다원왈: 이거는 하나마나 한 말 아닙니까?

[...또한 어떤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 그가 말한 대로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지 검증해 보아야 한다. 법정스님의 책이 베스트셀러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도 그의 글과 삶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미사여구는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본문인용]
➥다원왈:등가성의 입장에서 법정 스님 대신에 직접 마성스님이 들어가고 비유를 해야 더 가치가 빛나지 않을까요? 인증은 내 몫이 아니네요.

[...인터넷상에는 쥐꼬리만 지식으로 전문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 그러나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1학년 과정만 마쳐도 인터넷에 함부로 댓글을 달지 않는다. .. /본문인용]
➥다원왈:인터넷에서의 일반인과 전문가의 행세에 어떤 규범이 있나?
➥다원왈:동대에 1년이란 비유는 어떤 개념인가? 아니면 인칭의 수사학인가? 스님이 누구를 이렇게 넌지시 의도했다면 그래도 괜찮은가요?

[필자는 지금까지 40년 동안 오직 불교학 연구에만 전념해 왔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언제나 부족하다는 자세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 /본문인용]
➥다원왈:문외한이 보기에도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학자적이고 학승으로의 각고는 존경하기 그지 없다. 부족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적 딜레마의 한계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하지 않을까? 왜? 자기 탓이 아닌 것을 자기 탓인 냥 겸양을 부릴까? 붓다는 모르는 것은 침묵 했지 겸양을 부린 적이 있는가? 에둘러서 말해도 안되고, 건네서 말해도 안되고, 뒤로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말해도 안된다고 했다. 율장에 있나? 출처는 모르겠다.

[...필자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하지만, 대승불교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한국불교가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할 뿐이다... /본문인용]
➥다원왈:애초에 학문적인 글도 아닌데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도 그렇고... 어떤 것이 대승불교의 비판이고, 어떤 것이 한국불교실천비판인가? 최근에 러시아 정교와 로마카톨릭이 분파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서로가 부딪친 적은 없었다. 문제가 없었다는 것일까? 이슬람과 카톨릭 합쳐 기독교까지 한 뿌리 종교다. 이 종교들의 전쟁으로 유럼인구가 반으로 줄어들 정도(자료 미비한 비약적 비유임)였다고 한다. 지금도 지중해가 피로 물들고 있다. 뭐가 달라서 그런가? 자기들의 가치, 즉 실천의 가치문제 아닌가? 붓처님만 같다고 가치가 같은 것은 아니다. 가치는 바로 종지나 종맥 아닌가? 대승불자들이 한국불교를 비판하면 실천문제 비판이고 초기불 이름표 붙인 사람이 한국불교 비판하면 대승불교 비판이 되는가?

[진짜 풍수(風水) 전문가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의 자중이 요구된다... /본문인용]
➥다원왈:진짜 전문가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거는 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면 ‘너희들은 전문가가 아니니 자중해라’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 전문 영역이 어디라는 말인가? 그걸 누가 말한다는 말인가? 승가와 대중의 구분은 있다는건 안다. 승가 안에서 거짓이 있다면 당사자에게 확인해서 가부를 확실히 했던 부처님은 알지만 왕자와 모반을 꾸미고 승단탈취 음모를 꾸민 형제한테도 거절은 했으나 의도를 들어 비난이나 어떤 권고도 요구도 하지 않은걸로 안다.
어떤 것이 망치고 있나? 기독교가 카톨릭을 망치고 있나? 기독교가 유교를 망쳤나? 누가 누구를 이라고 정의를 할 수 있나? 우리문화에서 유교의 미풍양속이 사라져 간다고 기독교의 제사없애기 교설이 문화말살이라고 하지 않는다. 초불교도들의 담론이 어떻게 한국불교, 대승불교 망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그래도 되나?
이건 니들은 신도대중이니 입 다물어라는 협박 이상 이하도 아니다. 스님이 무슨 권위로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 우리의 만용이 잘못일 수는 있어도 질책의 대상일 수는 없다. 반면에 스님들의 책임은 무한하다. 우리의 만용도 고에 포함된다. 스님은 고의 문제로 접근 해야지 어찌 사람의 문제로 접근하나? 스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교학도 견해에 포함되는 범주이니 견해로서 사족을 달수는 있다. 그러나 스님의 위의로 신심의 만용에‘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거나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라고 폄하를 하는 치심은 수미산 만 한 학덕이라도 난 배우지 않을 것이다. 스님은 오로지 교학과 설법으로만 말하라. 학문에는 논설로만 말하라. 설법도 청법이 아닌가? 이는 무슨 뜻인가? 대중은 업을 짓고 받는데 경계가 없지만 스님은 파계 전에는 업을 짓고 안 짓고의 자유조차 없다. 오직 청정뿐이다. 우리는 들고 나가는 승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승가의 청정을 담보로 공양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승가의 완벽한 청정을 요구 하지만 승가는 우리의 치심을 탓하지 말라. 우리의 치심은 승가의 과보일 뿐이다. 중생의 광기는 승가의 토방이지만 승가의 삼독은 어불성설이다. 스님의 위의로 했다면 더욱 말이 안된다.
이분이 2016-07-16 10: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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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요?
참못났다 2016-07-16 13: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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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쓴소리는 아니고 다원의 쓴 웃음 짓게하는 소리가 제격이지 싶다.

마성스님글 반박하는게 아니라 [꽃비어천가]를 불렀네?
다원글 보고 그가 참 좋아라할까?
내가 그라면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으네
이런 일편단심 부담스러워서 어찌 살겠냐 ㅋㅋㅋ
질투가 2016-07-18 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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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다...
부러워만 허지 말고..
배가 아프신 분인가보지요...
화장지 드릴까요?
마성비구의글의경우 2016-07-16 09: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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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비구는 자신의 학문성과를 지나치게 과대 포장하신다...내 글에 함부로 반론을 달아? 내가 누군데...신경질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며 상대를 공격한다...진흙의 글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그러나 진흙도 나름대로 경전에 근거하여 자신의 불교관을 피력한 것이다..마성비구가 불교 해석학 운운 하시는데 진흙의 주장은 해석학이 아닌 원리주의에 의함이고 자신은 해석학의 범위란다... 해석학에 의해서 글을 쓰시는 모양인지 이번의 분노관은 순전히 자신 개인의 해석이지 경전의 근거를 대지 못한다..마성비구가 분노관을 말하려면 경전의 근거를 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어야 한다. 비록 진흙이 초불론자이지만 남이 번역한 경전이지만 경전에 근거한 글을 쓴다...마성비구는 대중들에게 우월감에 사로 잡혀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버릇 없는 불교학 전공도 못한놈들이 연재를 한다고? 그렇지만 마성비구는 불교닷컴의 강교수의 윤회에 관한 글이나 조계종 교육원장의 깨달음 논쟁에는 침묵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분노를 일으키지 말라는 부처님의 원론적 법문은 그대로 두고 그 기준에 맞추어 분노를 조절하든지 말든지 스스로가 알아서 할 문제이다...진흙은 그걸 주장했는데 마성비구는 이를 근본주의자로 몰아 부치면서 박사학위 없는 놈들은 함부로 글도 쓰지 말고 댓글도 달지 말라고 한다...비구의 길을 얼마나 청정하게 걸어 왔는지 학문에 얼마나 조예가 깊은지는 40년 세월이 말해주지는 않는다...모자란 사람들에 대한 분노섞인 글보다는 자신의 주장에 부족함이 없는지 다시 점검 하셔야 하지 않을까?
초기경근본주의자답다 2016-07-16 13: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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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도 나름대로 경전에 근거하여? 경전 어디에 '자비의 일환으로 라도 화를 내면 잘못'이라고 했는가? 진흙은 '자비의 일환으로 내는 화도 금해야 한다는' 경전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다. 그의 주장은 경전에 대한 그 자신의 독해의 결과일 뿐이다. 마성스님은 그 지점을 적확하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내지 말라는 화에 대해서 경전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에게 열반증득으로 가기 위해서 진(성냄)심을 내면 안된다고 하신 것이라고. 경전에 나온 이부분을 진흙은 모든 경우, 모든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화도 내서는 안되는 것, 조금이라도 화를 내면 그 순간, 야차,아수라가 된다는 식으로 단정해 버린 거다. 부처님께서 수행승들에게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 화를 내면 안된다고 한 부분을 모든 경우로 확대해서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전속 부처님의 뜻과 멀어지고 모든 경우에 화를 내서는 안된다면 불의에 대해서, 정의가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인가, 하고 마성스님은 진흙의 잘못된 경전해석과 적용을 비판한 것이다.

진흙은 문자적으로 초기경을 보고 부처님의 뜻과 다르게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 본위대로 해석하고 단정하여 학자들도 하지 않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초기불교를 협소시켜 버린다. 그리고 이런 협소한 해석이 옳다는 신념과 이 신념에 반하면 초기불자가 아니라는식의 태도가 근본주의인것이다. 자기가 설정한 근본만이 옳고 나머지 다른 해석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 근본주의,원리주의다.
이해못하남 2016-07-16 14:5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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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수행자시인 마성스님이 너에게 말씀하시잖아
너는 초뿔근본주의자라고.
붙어보면안다 2016-07-16 1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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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누가 더잘하는지는 대화해보면 알게된다.
가수 누가 더노래잘부르는지는 경연해보면 알게된다.
돈 누가더 많은지는 까보면 알고,
공부 누가 더 잘하는지는 시험쳐보면 알게된다.

우리 한국불교 망하는 이유를 들라 한다면,
모든...영역에..... 다....있는......

이것이 없다 .....
보이는건그들의선동 2016-07-16 13: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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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책임지지 않는,
항상 퇴로가 있는,
밥그릇놀이에 국한된,
망해가는 한국불교?
보이는건그들의선동 2016-07-16 1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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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진정성이 없으면,
그렇게도 공부에 자신이 없을까?
마성 2016-07-16 17: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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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어떤 특정한 사람, 즉 진흙속의연꽃만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서 초기불교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대승불교사상에 대해 잘 모르면서 함부로 비판하는 것을 보고, 불교에 먼저 입문한 사람으로서 조언을 해주기 위해 두서없이 급히 작성한 글임을 밝혀둔다.

‘한굴불교를 마치려하는가’라는 자극적인 제목은 <미디어붓다> 편집자(editor)가 뽑은 것이다. 이 글의 원래 제목을 ‘초기불교 근본주의자’이다. 이처럼 자극적인 제목을 선정하는 것은 언론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러므로 언론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도 안 된다.

이를테면 진흙속의연꽃의 글을 <미디어붓다> 메인으로 올리는 것도 진흙속의연꽃의 글이 훌륭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터넷언론의 노이즈마케팅(noise marketing)이다. 즉 완벽한 글보다는 무언가 부족하면서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는 글을 인터넷언론에서는 선호한다. 그래야 많은 댓글들이 달리고 조회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언론의 생명은 조회 수에 달려 있다. 조회 수에 따라 광고의 단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진흙연꽃의 목적과 <미디어붓다>의 목적이 서로 부합되었기 때문에 그의 글을 대문에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임은 말할 나위없다.

만일 진흙속의연꽃이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글을 계속 연재했다면 순수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후자에 속한다면 그는 문자적인 지혜는 있는지 모르나 실제적인 지혜는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혜를 불교에서는 마른 지혜, 즉 건혜(乾慧)라고 부른다.

내가 볼 때, 진흙속의연꽃의 장점은 성실함이아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어떤 글감을 찾아 글을 쓰겠다는 그 열의와 정열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글이란 많이 쓴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단 한 편의 글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남게 하는 것이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교과서에도 실렸던 금아 피천득의 “낙엽을 태우며” 같은 글은 노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나는 진흙속의연꽃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글쓰기를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고 혼자 생각해 볼 뿐이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충고를 한 번 해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조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진흙속의연꽃을 미워하지 않는다. 즉 사적인 분노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글로 인해 불교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길까 하는 노파심에서 위의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나는 법정스님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김바사’라는 사람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나는 승려 ‘법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그 이유는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나의 몸이 그의 언행에서 발산되는 효소가 내 육체의 단백질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 사람의 성향이나 취향에 따라 논리적이고 딱딱한 나의 글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아니 체질적으로 거부 반응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댓글에 단세포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비록 단 한 줄의 댓글일지라도 깊이 생각해 보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재 2016-07-16 1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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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올리고, 올린 조회수를 근거로 광고단가가 책정되는 특성 때문에 많은 인터넷 언론이 소위 '낚시'질을 하죠. 자신의 글 가독률(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네티즌들이 몰려들만한 '떡밥' (글의 주제)을 일부러 고르고, 편집자는 낚시가 잘되도록 '제목질, 편집질'이란 것을 합니다. 낚시성 제목은 때론 글 주제와 하등 관련도 없는 경우도 있어 허탈케 하죠.

먹고 살아야 하는(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처한 현실을 긍정한다고 해도 부작용으로 불법이 아닌 것을 불법으로 여기거나 필자 개인의 해석을 불법인 것처럼 포장을 하는 경우 훼불이 되겠지요. 이교도가 아닌 소위 불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훼불말입니다. 자기 혼자 생각하면 아무 문제 없지만  초보불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자칭 초기불교도연 하시는 분들은 사고의 브레이크가 없어요. 자신이 붓다의 원음이자 '정법'으로 수행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확신에 차서 대승적 냄새가 나는 견해라고 판된되거나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내용이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일단 사법으로 매도 합니다. 말로는 대승을 전면부정하는 거 아니라면서도 따져보면 항상 전면부정입니다. 대승에서 무아를 아예 가르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대승에서 아예 사성제 팔정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대승에서 수십년 불자인데 무아,사성제 팔정도 다 배웠거든요. 공, 보살에 대한 개념도 대승에서 용어를 어떤 방식으로 쓰는지 이해도 하지 않고 초기불교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합니다.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지 않고 포크로 먹는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죠. 먹는 방식이 다른 거지 잘못은 아닌데,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잘못으로 몰아 부칩니다. 초기불교가 대승 불교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 것이죠. 초기불교가 자신의 성품을 바르게 하고 삶을 바른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이 되는게 아니라 꼴보기 싫은 대승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겁니다. 그런용도로만 초기불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천주교나 개신교 이슬람교에 대한 비방은 거의 없어요.생판 다른 종교에 그리 자비롭고 관대한대 왜 대승은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승불자이지만 테라와다 불교로 수행한다는 분들을 욕해본 일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에게 대승불교보다는 초기불교가 더 잘 맞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불교를 하는 것인데 대승불교를 한다는 이유로 저는 초기불교도들에게 험한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테라와다 관련 기사나 글에 왜[대승불교를 비방하는 내용의 댓글이 필수적으로 달리죠?] 제가 미디어붓다에 댓글달게된 까닭도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한국내에서 초기불교의 확장을 꿈꾸는 초기불도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실어줄 미디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미디어 붓다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실어주게 되자  감정이 과잉이 됐는지는 몰라도 초기불교관련 글이 올라오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그 기사의 댓글란은 대승불교에 대한 비방으로 가득찼습니다. 초기불교의 유익한 점, 실제로 해보니 이러이러해서 참 좋더라는 내용이 한국내 초기불교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저는 판단하는데 여기 초기불교도들은 대승불교를 비방하면 자연적으로 한국내 초기불교가 확장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제가 보기엔 한국초기불자들은 근본주의적 성향, 대승에 대한 배타적이고 공격적 성향만 확산시키고 있거든요.

초기불교를 한국내에 확장시키려는 뜻이 있다면, 대승에 대한 일방적이고 형편무인지경인 비방부터 금지해야 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초기불교가 한국내에서 확장되려면 초기불교도들은 대승불교를 먼저 배워야 합니다. 한국불자들이 왜 대승적인 사고방식을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북방에서 왜 대승불교가 선택되고 있는지를 근원적으로 알아야 초기불교를 확장시킬 수 있는 방안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현재처럼 초기불교에 입각해서 대승에 대한 몰이해 상태로 일방적인 대승비방은 저와같은 대승불자들에게 반감만 삽니다. 초기불자들에 대승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으로 나오면 대승불자도 마찬가지로 응대하는겁니다. 여기 초기불도연 하는 자들의 방식이 야차,아수라입니다. 누가 보면 대승불교에 대한 전면적 전쟁선포라도 한 줄 알것입니다.

미디어 붓다도 좀 성의있게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회수만 올리고 광고단가 올라가면 이득은 되겠지만 초기불교 불자와 대승불자간 다툼의 장으로 변질된 것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할까요. 불교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서로 내 불교 옳다고 감정싸움하다가 아예 불교자체에 대한 혐오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혐오,정치불신에 빠져서 정치발전이 전혀 진전이 안되는 것처럼.

초기불교도연 하는자들의 대승에 대한 일방정이고 무차별적 비방과 공격이 없다면, 저도 댓글달지 않습니다. 초기불교도들의 이러한 방식으로는 절대 한국내에서 초기불교가 확장되지 않을겁니다. 오히려 초기불교에 대한 반감만 증가할 것입니다.
저게선재면이건악재가맞겠네 2016-07-16 18:11:48
답변  
인터넷 핑계로 가는군요.
세속적인 사유의 해석들.
미디어붓다가 죄가 많네요.
~ 어설픈 대승주의 때문에요.
역시 2016-07-16 19:53:45
답변  
초불근본주의자는 비아냥 외엔 할 말이 없지
복음이왔어 2016-07-16 21:43:52
답변  
밑으로 가 봐
혼자놀아 2016-07-16 22:01:28
삭제  
어느 미친 초뿔근본주의자에 무관심이 최고지 너나 가봐
다원이몽니 2016-07-19 1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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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만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 함부로 비판하는 것을 보고, 불교에 먼저 입문한 사람으로서 조언을 해주기 위해 두서없이 급히 작성한 글임을... /인용글]
➥[다원몽니] 어느모로 보나 마성스님은 이 초로보다는 수승한 분이라는 것를 나를 포함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승한 분인 것과 여기서 할 예기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인 아들이 집에서 청소하다가 아버지에게 ‘아부지는 우째 걸래질을 고렇게 한다요. 걸레질 할지도 모르요?’ 라고 했다해서 머가 이상한가? 그러나 혹 아버지가 교장인 학교에서 청소사간에 교장실로 달려가 나 시방 집에서 엄마가 빨리 오라고 헨폰 받었으니까 아부지가 내 대신 좀 해주세요.‘ 한다면...
시방 이글은 스님과 내가 아버지 학교에서 청소하는 아들은 아니고 집에서 청소하며 할 말을 하는 아들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고? 넷상이니까! 스님의 절에서 우견착지한 신도도 아니고 나이로 보아도 연배가 크게 나지 않는다.
전제를 했다시피 교학과 법, 승속에서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나 이를 벗어난 여기 넷상의 언설은 분명 세간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간해의 도리는 분명 마성스님이 나보다 더 출중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탁발하던 스님이 경로당 앞에서 탁발염불을 하고 있다면 공양과 숭앙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둑판을 기웃거리다 한수가 보인다고 훈수라도 했다치면 판세 그른 넘한테 멱잡히기 딱 아닌가? 거기서 보잘 것 없은 스님이 먼 감정이 있어서 그랬겠냐고 이바구 할텐가? 주제 없다 하지 않겠는가?

➥[다원몽니] ‘연꽃만...’이 아니라고 했는데...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실 연꽃을 의식한 글이 사실 아닌가? ‘현세구경열반’ 논란도 그렇고...
➥[다원몽니] ‘함부로 비판하는 것에 두서없이 조언을 했다고 하는데... 이거이 말이 되는가? 머이 바빠서 두서없이 써야 된단 말인가? 조언한다는 입장은 두서없이 써서는 안되지 않는가? 더군다나 스님의 위의와 권위 의식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진정한 교학의 가르침을 내리는 글인데... 이것이 지금 한국불교의 법공아유 유식적해석학인가? 우리는 앞뒤가 없이 글을 써도 하등에 문제될 것은 없다. 그래서 중생이고 아만으로 갔다 왔다 했든 만용으로 부처님 밥상을 들었다 놨다 했든 중국식 유불도 훈고학이 아니라면 이는 불재자들의 심리(신심)발달과업일 것이다. 짬뽕훈고학도 아장거리는 아이가 할아버지 밥상에서 엎어졌다고 애 탓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로 생각한다면 내 글이나 관련된 글들의 화제가 교학이나 불교를 들먹이고는 있어도 분명 스님의 경계와는 관계가 없는 손가락과 달이야기이다. 내가 모른다면 내 업이긴 하나 스님에게 책망을 받아야할 내 탓도 아니다. 세간의 도리로서는 이 촌부나 스님 중 누가 위아래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할 말이 있어서 이의를 붙이는 것 아닌가? 이하는 이의를 붙이는 걸로만 그치겠다. 대통령이 면도를 하려면 이발사가 목을 빼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목을 뺀다. 당연하니까 대통령과 목을 빼는 것과 먼 상관인가? 내 이의에 답을 하고 안하고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할 말이 있어서 해 주면 좋고 면도를 하려면 목을 빼야하듯이... 교학이라고 하지 말라... 대통령 목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한굴불교를 망치려하는가’라는 자극적인 제목은 <미디어붓다> 편집자(editor)가 뽑은 것... 이처럼 자극적인 제목을 선정하는 것은 언론의 고유한 특징... 그러므로 언론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도 안 된다. ... 글이 훌륭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 노이즈마케팅(noise marketing)... 그래야 많은 댓글들이 달리고 조회 수가 증가하기 때문... 조회 수에 따라 광고의 단가가 정해지기 때문... 진흙연꽃의 목적과 <미디어붓다>의 목적이 서로 부합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임은 말할 나위... /인용글]
➥[다원몽니] 스님을 떠나서, 종교인이 이렇게 말해도 되나? ‘편집자가 뽑았다’까지는 좋다... 아니 ‘조회수’ 까지도 좋다... ‘조회 수’ ‘단가’... ‘단가’에서 내 기가 막혀버렸다... 이렇게까지 들먹여서 확인 사살을 해야 하나? 문헌학을 너무 충실히 따르는 것 같다.  결국 미디어붓다와 연꽃의 글 조회수가 이익에 부합되서라...??? 정말 이렇게 밖에 말할 줄 모르나??? 그렇다면 마성스님의 이글도 논란의 진리 문제가 아니라 센세이셔널해서 올려 준 건가?

[만일 진흙속의연꽃이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글을 계속 연재했다면 순수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 문자적인 지혜는 있는지 모르나 ...이런 지혜를 불교에서는 마른 지혜, 즉 건혜(乾慧)라고 부른다.... /인용글]
➥[다원몽니] 스님은 진정 천안통이 열리셨는가? 스님의 글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은 것이 미디어붓다의 언론 속성이라면서... 이렇게 스님의 진정성과는 다른 제하를 정정해달라고 이의 신청을 하셨는가? 했다면 바꾸지 않는 이유는 먼가? 알고도 말하지 않고 이렇게 뎃글 협박만 하는 이유는 어떤 순수인가? 혹 마른 순수는 아닌가? 건수... 시기 질투와 냉소적 합리화는 양심과 도리와 이해면 충분하지 교학의 유.증.인 논법까지 동원된 식견을 보여야 하는가?

[...내가 볼 때, 진흙속의연꽃의 장점은 성실함이아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어떤 글감을 찾아 글을 쓰겠다는 그 열의와 정열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글이란 많이 쓴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단 한 편의 글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남게 하는 것이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인용글]
➥[다원몽니] 욕인지 칭찬인지 구별이 안간다. 시쳇말로 들었다 놨다 하시는데... ‘들렸다 놓였다’가 아니라 들었다 놨다 하시네요... 겸양인가? 평등심인가? 이것이 유불도 짬뽕 수입한 한국불교의 실천교학 공심중도인가?

[예를 들면 교과서에도 실렸던 금아 피천득의 “낙엽을 태우며” 같은 글은 노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나는 진흙속의연꽃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글쓰기를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고 혼자 생각해 볼 뿐이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충고를 한 번 해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조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진흙속의연꽃을 미워하지 않는다. 즉 사적인 분노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글로 인해 불교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길까 하는 노파심에서 위의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인용글]
➥[다원몽니] 지금 분위기 띄우시나요? 나는 금아 피천득의 낙엽은 금시초문이오나 시몽 낙엽이 구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금아의 낙엽을 듣든 시몽의 낙엽을 듣든 인연대로 조건대로 듣는 것이지 꼭 금아의 낙엽을 들으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꽃님이의 블로그 글에는 금아의 태우는 낙엽보다 어마어마하게 쏟아지지는 낙엽들이 많습니다. 이거는 노파심과 조언이 아니라 편집증입니다. 나 역시 이렇게 병리적으로 스님을 분석하기까지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호불호 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스님의 홈피에서 좋은 글을 도적질 해다 비어있는 골수를 채운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랍니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나는 법정스님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김바사’라는 사람은 ...이처럼 그 사람의 성향이나 취향에 따라 ... 그러나 인터넷 댓글에 단세포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비록 단 한 줄의 댓글일지라도 깊이 생각해 보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인용글]
➥[다원몽니] 단세포라 했습니까? 법정의 비유를 보고 있자니 스님의 의도와 맥락이 오버랩 됩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어떤 모리배들을 아는데... 스님까지 이렇게 종교적 도그마를 개인의 낙인화에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네요. 세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보입니다. 단어가 아니라. 단어의 연결에서 말입니다. 나는 단어가 욕이지만 단어의 연결은 언중유골입니다. 벨이 꼬인 넘하고 미디어붓다의  유식론적 현세주의자 외에 인보적 현실인지론자들에게는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글입니다... 글은 단어가 아닌 줄 아시지요. 문맥 아닙니까? 어차피 단어의 개념은 동일성이 없으니 욕이라고 듣는 넘의 인지구조까지 내가 어찌 합니까? 유식과 공의 교학이 멀 가르치나요? 스님의 삼법인이 해석학이 아니고 훈고학이라서 이해합니다... 훈고학도 결국은 문자주의 고고학 같은 것 아닌가요? 이 표현은 단어로만 보면 욕이 됩니다. 알면 이 초로의 심중이 현세구경열반보다 얼마나 더 심오한 지 아는 자만 알 것입니다.
아셔야될것이있는데요 2016-07-16 18: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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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대승불자들의 “비-불교성”을 비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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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인정하면 불교 아닌 힌두교”

삼법인설은 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교설이다. 상좌부에서는 삼특상이라고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삼법인이라고 부른다. 삼특상은 무상 고 무아, 삼법인은 무상 고 무아에서 고를 빼고 열반을 말한다. 명칭의 차이가 곧 상좌부와 대승불교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마성 스님은 “붓다 입멸 후 부파분열의 중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삼법인설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스님은 “제법무아 해석에 있어 보특가라(중음신) 같은 윤회 주체를 상정해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 개념과 아무 차이가 없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파불교시대에는 불교의 무아론을 강조하기보다 윤회의 주체 문제와 관련해 유아론의 입장을 취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대승불교 <반야경>에서는 초기불교에서 강조했던 제법무아 교설을 강조한다.

다만 용어를 무아 대신 공이라 사용했다.
스님은 “무아의 본래 의미는 점차 퇴색하고 관념화된 것 같다”고 했다.

스님은 “중관학파는 연기법을 통해 상주론과 단멸론을 논파했다.

그러나 중관사상에는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일부 나타내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유식학파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면서도
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처럼 고정적 실체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뢰야식을 불변하는 아트만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된다”고 했다.

여래장사상은 후대로 갈수록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과 차이가 없게 됐다.

스님은 “대승의 <대반열반경>에서는
‘자아, 즉 아트만이 곧 여래장이다’라고 주장해 삼법인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님은 “붓다의 입멸 후에는 붓다의 신격화가 가속화됐다.
그로 인해 인도에서 불교는 점차 바라문화 혹은 힌두교화 되고 말았다”고 했다.

스님은 “무아를 절대적 자아로 인정하게 되면 지금의 힌두교와 아무 차이도 없게 된다.

삼법인설의
제법무아를 해석함에 있어서
유아론으로 해석하면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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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범위를 넘어서 간 적이 있던가요?

사례가 있으면 신고 바랍니다. 시정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불상한조상님들 2016-07-16 19:46:51
답변  
한국 불교 1000년 이상의 근본 문제는 부처님 언어가 아닌 브라만 언어(산스크리트)로 기록된 북방전래로부터 생태적 오류의 문제를 안고 출발하였다.

그 시대 언어는 당대 사람들의 사고나 관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분명 처음 전해진 북방전래의 불교는 빠알리 경전으로 된 니까야가 전해지기 전까지는 왜곡되고 변질된 불교인 줄 몰랐던 것이다.

대승론자들이 그토록 들먹이는 유마경은 결코 경이 아니며, 한낱 소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경이라고 붙이는가 하면. 특정 시대 한 선사의 말씀이 경전으로 둔갑하여  부처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것은 (학문적 차원의 연구는 그렇다치러라도) 종교적 성전으로 올려서는 절대 부적절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조상님들이 불상할 뿐이다.
믿고 매달렸던 불교가 부처님 말씀과 엄청나게 어긋난 왜곡된 말씀이었음을 과연 몇분들이나 알고 가셨을까?

왜곡되고 변질된 불교를 참불교로 믿다가 돌아가셨으니, 차라리 요즘이 바른 정법의 시대를 향해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법을 찾아가는 진지한 노력은 빠알리로 기록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면 우선이지, 대승론자들이 주장하는 유마소설나 육조스님의 말씀이 아닐 것이다.
순서를 지켜 공부하자.

아라한 재교육의 관점에서 대승불교가 출현하였다는 분은 기본적으로 도과의 기본지식부터 갖추지 못한 맹목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주장은 "대승불교가 나올 때, 그 당시 대승을 주장하는 분들이 과연 모르고 있었을까요?"로 얼렁뚱땅 넘어가는데,

참으로 아라한을 알고 있다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개선의여지가없어 2016-07-16 19: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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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록 초기불교에 대한 이미지만 나빠짐
유식송과기신론광팬 2016-07-16 21:47:09
답변  
참 희한~혀…

지~네들 뿔교의 경전이라는
유식송들을 읽지도 않고, 이해도 못하면서…
또 대승기신론 역시 읽거나, 이해할 생각도 안 하면서…

도대체 누가 뭘 했다고 상념-희론-망상을 돌리면서 난리인지…

어이! 그 경전들 우리 꺼여!
유식송도 뿔교 아닌 불교 논서이고, 기신론도 뿔교 아닌 불교 논서여!

아뢰야식의 참나-실체는 사기여! 그것도 비-실체론의 연기법 불교이고…
일심의 마음-실체 신앙도 사기여! 생멸심-to-진여 변화도 비실체론 연기법 불교…

그거 우리 꺼여… 그냥 가~ 당신네들 자유여…
당신네 뿔자들… 이젠 참나-감옥, 일심-사슬에서 풀려날 거여…

추카! 유식송들과 기신론으로 우리가 치료해줄게 걱정마.
앞으로도 당신네들 무명-훈습인 뿔교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면 말여…
부끄러운줄몰라 2016-07-17 11:47:50
답변  
소승뿔교야 초기뿔교나 제대로 해라
유식송 처음구절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해석해봐
기신론 처음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해석해봐
한문 글자 하나하나에 번호 먹여서, 토 달아서
실제로 니 실력을 보여주고 내가 유식,대승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해라

이 소승뿔교는 자기 주장도 왔다리갔다리 중심도 없고
그저 소대승 구절 일부 검색해서 긁어와서 붙여놓고 지가 해석한거라고 떠벌이다가  가지고 온 내용이 자기 주장을 번복시키는 것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란게 몇번이나 발각이 됐는데도 아직도 창피한줄 모르고 잘나척을 한다. 급기야 마성스님을 가르치려고 하질 않나 참...가관이다. 초뿔이라는 검으로 매일매일 니가  머릿속으로 만든 대승이라는 허상의 괴물과 전쟁을 벌이는 아수라야 너는.
공부해서남주자 2016-07-17 19: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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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은 나의 사랑이라우.

지가 남방까진 못 가나
유식송과 기신론이 충분히 그 다리를 놓네요.

또 머리 안 깎고 버티기에도 정말로 안성맞춤이고요.

당신이 나라는 허상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야튼 다시 책을 펼치세요.
보는 글자 그림은 예전과 같아도
당신이 성장하는 만큼 예술^^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대승을 먹든 말든 그건 당신과 아무 상관 없잖아요.
당신이 대승=중생심=일심이 아닌데 말입니다. Good Luck! _()_
도연 2016-07-17 13: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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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의 "분노에 대한 오해" - 불자(佛子)의 분노
 - http://cafe.daum.net/DaeKwaungSun/g9W0/30

1. 마성스님의 2중의 판단 기준 - 두 얼굴의 불교

  선이나 악, 정의나 불의를 논하려면 먼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마성스님에게는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마성스님의 주장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불교가 있습니다.

 마성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올바른 불자라면 반드시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것이다.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부처님의 나라, 즉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성스님은,
<붓다는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에게 해당 된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성스님은,
<사실 재가자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하여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고 합니다.

 마성 스님은 출가자입니다. 그의 말이 맞다면,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에 전념해야 할 출가자인 그 자신은 분노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아니면, 그는 분노해야 할 것이고, 분노한다면 열반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출가자일 수 없을 것입니다.

 마성스님의 주장은 결국,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가능한 출가자는 분노하지 말아야 하고, 열반의 증득이 불가능한 재가자가 분노를 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마성스님의 말씀 대로라면, 근본불교의 입장에서 마성스님을 비판한 것들이 정당한 것입니다.
 재가자야 어쨌거나, 출가자인 마성스님이 분노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말씀에 의하더라도 출가자의 입장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외면하고 열반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불교와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불자들이 따르는 불국토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는 같은 불교일 수가 없겠습니다.

2.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출가자

 마성스님의 말씀입니다.
 <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일 자기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을 당하고 있다고 하자. 그때도 분노하지 말아야 하는가? 만일 그러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일 것이다.>

 마성스님의 말씀 대로라면, 출가자는 인간이기를 포기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는 분노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3. 불국토 건설을 외면하는 출가자

  마성스님은 불자들의 목적이 불국토 건설이기에, 불의가 불자들의 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출가자로서는 불의를 적으로 삼아 분노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불국토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면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출가자에게는 분노의 대상인 적이 아니므로, 출가자의 목적은 결국 불국토 건설이 아닌 것이 됩니다.
  마성스님 말씀 처럼 출가자의 목적은 불국토 건설이 아니라 열반입니다.
 
  마성스님은 근본불교의 입장에 계신 분이십니다.
  마성스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초기불교와 율장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를 전혀 공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간혹 대승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대승 논사들의 탁월한 불교 해석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따라서 마성스님이 불국토 운운하시는 것은 "간혹 공부한 대승불교"에 의한 것입니다.

  유마경 이후의 대승불교에서는 심지어 열반에 든 아라한은 부처가 될 수 없다고까지 했었습니다.
  후기 법화경에 이르러서야 아라한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수기를 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라한은 현상계를 부정하여 열반에 들어 지멸(止滅)하는 것이 목적이고, 대승의 발심한 보살은 이 현상계에서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현상계의 일체 중생이 모두 불보살이 되어서 극락을 이루는 불국정토가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근본불교의 입장은, 마성스님 말씀 그대로 "열반이 목적"이지 불국토 건설이 목적이 아닙니다.

4. 마성스님의 비전문가에 대한 비하 발언 

  마성스님의 말씀입니다.
  <인터넷 불교언론의 댓글들을 보면 대부분의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은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불교를 전공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이들의 특징은 불교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장하는 내용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가 볼 때는, 인터넷 댓글을 다신 초기 불교 근본주의자들의 비판과 마성스님의 기본 입장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에 따라 열반을 목적으로 하는 한 세상 일에 분노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마성스님은 "간혹 공부한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근본불교와는 어긋나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일관성을 상실한 사람은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마성스님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스스로를 전문가인 양 하면서, 비판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시는 것은 경우에 어긋납니다.
  그런 말씀은 먼저 마성스님 자신에게 하셨어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성스님 자신은 대승불교의 전문가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대승불자이지만 전문가가 아닌 제가 보기에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의 1.에서 분석한대로 <열반을 추구하는 출가자인 마성스님의 불교>와 <불국토를 추구하는 대승불교>가 같은 것일 수 없음에도, 마성스님은 자신의 입장이 아닌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근본불교인 자신의 입장을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5. 대승 불자의 분노

  마성스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자기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을 당하고 있다고 하자. 그때도 분노하지 말아야 하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일 것이다.>

  앞서의 논의대로라면, 출가자야 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마성스님 자신이 하신 말씀의 필연적인 결론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불자(佛子)는 인자(人子)이기는 하지만 불자가 아닌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불국토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불자의 불의에 대한 분노는 불자가 아닌 사람들의 분노와 같지 않습니다.

  이 주제는 다음의 글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우선, 아래의 두 편의 글을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정의 실현과 우리 불교계의 문제>
 - http://cafe.daum.net/DaeKwaungSun/g9W4/3

<선과 악의 분별>
 - http://cafe.daum.net/DaeKwaungSun/g9W0/3
불쌍한마성스님 2016-07-17 13: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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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에 대한 반박이랍시고 가져온 것일까.
내가 다 민망하다.
도연 2016-07-17 15: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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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과 관련해서 불교닷컴에 반론과 답변이 오르고 있습니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86
동조 2016-07-17 14:18:45
답변  
도연님의 주장에 적극 동감이다..논쟁에 있어  자어상위 (自語相位)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 마성비구의 글이다.
어처구니없네 2016-07-17 14: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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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속 부처님: 출가자에게 탐진치에서 비롯한 분노를 하지 말라, 그러한 분노는 열반증득을 못하게 한다.(초기경 내용을 마성스님은 재확인)
초기불교근본주의자: 부처님은 모든 경우의 분노를 반대하셨다(이에 대해 마성스님은 초기경해석을 잘못한 것이라고 함. 일단 부처님은 재가자에게 한 말이 아니고, 경전상에서 분노하지 말라는 의미는 탐진치에서 비롯된 화를 의미하지 공적인 분노를 하지말라는 것은 아님,이라고 알려줌.

마성스님은 <율장>을 근거로 해서 음란한 행위의 경우도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를 구별하고 가해자일 경우 꾸짖어(분노)서 승단에서 퇴출시켰으며 피해자일 경우 정상참작하셔서 용서해 준 일화를 이야기 하셨다. 열반을 얻은 부처님도 공적인 분노를 하셨다는 거다. 불교는 '동기'를 중요시 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윤리도 "상황윤리"이다. 분노도 동기(개인적인 분노인지 공적인 분노인지를 따져야함)와 상황에 따라서 하지 말아야할 것과 해야할 것이 있는거다. 부처님을 말씀을 상황과 조건, 누구에 말씀하신 것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모든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취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라고 마성스님이 말씀하셨다.

마성스님은 자어상위의 주장을 펴치신 바가 없다. 도연이란 자, 동조가가 마성스님의 글을 오독해서 자어상위라고 매도하고 있을 뿐이다. 무식한것은 자랑할만한 것이 못된다.
도연 2016-07-17 15:17:53
답변  
* 대승 불자의 입장에서는 비로자나불의 본원(本願)이 자신의 소원(所願)입니다.
불의는 부처님이 바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불국토를 세우려면 불의를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들이 대승 불자가 싸워서 없애야 할 적인지는 의문입니다.
그들은 불심을 일으킨 대승의 불자들이 구제해야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의를 보시면 분노가 아니라 아픔을 느끼실 줄로 믿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네 2016-07-17 15:53:02
답변  
문장과 문장이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하세요?
=>대승불자의 입장에서는 비로자나불의 본원이 자신의 소원입니다,라는 문장이 무슨 뜻입니까. 대승불자는 수행을 통해 비로자나불을 체험해야 합니다. 수행한 만큼만 체험되는 비로자나불을  보신 로사라나불이라고 합니다. 이뜻으로 말씀하신거에요? 그런데 다음문장과 이게 무슨 관련이 있어요?

=>불의는 부처님이 바라지 않으신다, 불국토를 세우려면 불의를 없애야 한다.  그래놓고==>그러나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들이 대승 불자가 싸워서 없애야할 적인지는 의문이다?  대승불자들이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했다구요? 누가요? 마성스님이요? 제가요? 불의를 보고 모른척 하지 말라, 불의에 분노하라는 말이 곧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입니까. 나라에서 공권력을 통해 강간범을 검거하고 감옥에 처 넣는 것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적"이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공공성을 저해하여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것에 분노해야 한다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인데 당신은 "적"으로 규정해야 하냐며 핀트가 한 참이나 엇나간 황당한 논리를 펼치는군요.

불의는 부처님도 바라지 않으시고, 불국토를 세우려면 불의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거면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대승불자건 초기불자건 분노해야 마땅한 겁니다. 당신같은 초기불교도들은 공적인 분노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공적인 분노를 하지 않을 경우 불의는 어떻게 멈추고 불국토는 어떻게 이룰 것인지요?

==>그들은 불심을 일으킨 대승의 불자들이 구제해야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저지른 자들은 대승불자들이 구제해야할 대상이고 초기불자들은 구제해야할 대상이 아닙니까? 애시당초 불의를 일으킨 자들을 '적'으로 규정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도 당신 혼자서 그렇게 생각한 것인군요.
=>부처님께선느 불의를 보시면 분노가 아니라 아픔을 느끼실 줄로 "믿고" ????? 있습니다??? 이게 바로 당신의 문제에요. 부처님께서는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않고 "아픔만 느낄 것이다"라고 "믿는다"

왜 당신의 개인적 "믿음"이 진리라고 생각하세요.위세 마성스님의 제시한 율장에 보면 부처님이 벚서이 화(공적인 화)를 내시어 꾸짖는 일화가 나옵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에 기반해 주장하지만 마성스님은 "율장"을 근거해 주장하셨습니다. 누구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3살먹은 어린아이도 알겠지요.

결국  당신의 초기불교적 해석과 "믿음"에서 어긋나면 초기불교 수행자건 대승불자건 일단 틀렸다라는 거군요.
도연 2016-07-17 16:32:05
답변  
<대승불자들이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했다구요? 누가요? 마성스님이요? 제가요?>라고
하셨는데

분노에 대한 오해
[연재] 마성 스님의 摩聖斷想-16
  불교닷컴 -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86

에서 마성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불의는 모든 사회악(社會惡)의 근원이다. 사회악은 공공의 적일뿐만 아니라 불교의 적이기도 하다. >

2. 다른 말씀에 대해서는 그냥, 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십시다.
어처구니없네 2016-07-17 16: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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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이라구요. 당신은 "공공"이란 말을 쏙 빼놓고 '적'이라고 했잖아요.  만일 공공의 적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됩니까. 불의가 만연하게 되면 불법을 펼칠 수가 없어요. 계정혜에서 계가 무너진 사회에서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상상력이 그정도로 형편없어요?
도연 2016-07-17 17:42:59
답변  
불교닷컴의 토론에서 마지막에 제가 올린 글입니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86

<마성스님의 입장을 대변해주신 분께>
저역시 11면 관음보살의 진상(瞋相, 성난 모습)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초기불교의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글은 그 자체로서 독립된 것입니다.
저는 <분노에 대한 오해>라는 글과 <한국불교를 망치려는가> 두 글을 읽고 그 글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 두 글만으로 볼 때, 앞 뒤가 안 맞아보였을 뿐입니다.

애초의 오해는, 열반 증득이 가능한 출가자와 불가능한 재가자를 구별해서 적용시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열반은 현상계를 외면하고 지멸에 드는 것을 뜻하므로 현상계에 관심을 가지고 간섭하는 것과는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정성스런 말씀을 통해서 마성스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르면 //한심한 독해//에 해당이 될 텐데, 억울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애초에 <분노를 멸하는 것은 출가자에 해당된다.>가 아니라, <출 재가를 막론하고 부처님께서 분노를 멸하라고 하신 것은, 이기적인 분노이지 공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면 전혀 오해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 편,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선가(禪家)에서도 무심을 강조하여 사회악을 외면하는데, 근본불교의 입장이신 마성스님께서 초기 근본불교 조차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을 밝혀주셨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불교의 근본불교 입장 자체가 스님의 뜻과 같은 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근본불교의 입장에서 반대가 많았을 것인데, 저 역시 마성스님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근본불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승불교도 아닌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양쪽의 입장에서 비판하면서 말씀하시는 뜻을 파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쪼록 마성스님의 입장이 근본불교의 출가 스님들에 있어서, 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예외적이거나 이단적인 것이 아니기를 소망해봅니다.
마성스님 개인적인 입장을 "근본불교"의 입장이나 "불교"의 입장이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근본불교와 대승불교,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11면 관음보살의 진상(瞋相, 성난 모습)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성스님을 대변하여 답변을 올려주신 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_()_
어처구니없네 2016-07-17 18:39:58
답변  
마성스님이 아닌 다른 초기불교 스님께 여쭤보세요.
초기경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부처님께서 공적인 분노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는지 말입니다. 한국테라와다 승려들이 있지 않습니까.

마성스님을 제가 왜 대변해요?
그냥 당신의 말이 '말이 안된다'고 한겁니다.
마성스님을 대변해야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대변할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당신이 마성스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을 오독하는 것을 봤을 때도 저는 당신의 주장의 헛점을 짚었을 겁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의 대변인이라고 하시겠네요? A라는 사람이 B의 글을 잘못 읽고 B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했다는 식으로 모함했을 때 B랑 관계없는 C가 A당신이 잘못하고 있는 거다,라고 알려주면 C는 B의 대변인이 되나요? C는 그저 A에게 오류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도연 2016-07-17 19: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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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닷컴의 토론에서 마지막에 제가 올린 글의 내용의 제목이
<마성스님의 입장을 대변해주신 분께> 입니다.

* <어처구니 없네>님과는 "어처구니가 없다"하시니 모시고 대화를 나눌 뜻이 없습니다.
말은허망하다 2016-07-17 21:17:03
답변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사람 저런 사람 등등을 만나기 마련이고
세상사람이 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것도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정도만 걷는것도 아닌데
세상사람을 탓하지 말자구요.

다른님 탓하지 말자구요

각자가 자기의 능력대로 말하는것일뿐이고
어떻게 보고  듣느냐는 각자의 능력대로
하늘에선  똑같은 비가와도
누구에겐  재앙이되고
누구에겐 단비가 되듯이.

각자가 보는 눈에 따라  능력대로 볼것이고
설혹
악마가  악을 말해도  보는 능력에 따라부처님 법으로 들을수도 있는거구요
비록  천사가 내려와 정의를 설한다해도  말따라 들으면 이 또한 마구니가 되는것이고

요점은 타인이 어떤말을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타인의 말을  자기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더 소중하고 귀한겁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같이 한평생 살고지고..
꼰대사절 2016-07-17 22: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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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도 모두 '말'입니다.
경우에 맞지 않으면 허망하고 경우에 맞는 말은 한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위대한 진리가 됩니다.

깨어있는 자는 분명히 말이 가리키는 진리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갈대처럼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좋은게 좋은 거다는 식으로 분석과 통찰을 거부하는 순간 진리얻기는 요원할 것입니다. 당신의 눈에 의미없는 수다로 보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불교교리를 진리에 맞게 교통정리 작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상관없으면 구경만하고 빠져주는게 좋죠.
지나가는바람 2016-07-18 03:44:01
답변  
위빠사나, 사띠 어쩌고 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부처님의 금구처럼 까부는
초기불교ㅡ 근본불교 얘기하는 것들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 탈레반
일천제 2016-07-18 05: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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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이런 것 좀 그렇죠?

뭐 다른 더 나쁜 말은 없나요?

탈레반을 탈레반이라 하니 탈레반이 무시무종을 달리는 겁니다.
초기불교? 근본불교? 그것들~요? 다 쓰레기랍니다. 당신은~요?
지당하신말씀 2016-07-18 10: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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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나가는바람/
공감합니다.
말은허망하다 2016-07-18 08: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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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그림자가  뜰을 쓸어도 먼지가 일어나지 않으며,
밝은 달빛이 물밑을 뚫어도 물에는 아픈 상처가 없다.

일 천강에 구름 없으면, 일 천강에 달이 뜨고,
만 리에 구름 걷히면, 만 리가 청천 하늘 일세.

새가 허공을 날아가도 허공에는 새 발자국이 없듯이,
내 마음 가운데, 미운 생각(단어)을 두지마라
도연 2016-07-18 09:57:04
답변  
토론 전체의 과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논점은 출가와 재가의 기준이 같은가 아닌가였습니다.
애초의 제 글 서두입니다.
<선이나 악, 정의나 불의를 논하려면 먼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마성스님에게는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마성스님의 주장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불교가 있습니다.>

- 왜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까요?

 마성스님은  <분노에 대한 오해>에서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여 불교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매우 좁은 소견[短見]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이익[私益]이 아닌 공공의 이익[公益]을 위한 분노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공적인 분노는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한국 불교를 망치려는가?>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붓다는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붓다의 말씀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언제나 상황을 감안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 마지막 (  )한 부분은 율장의 말씀인데, 상황윤리와 관련된 것입니다.
모든 행위는 어떤 의도를 갖고 그 행위를 저질렀느냐에 따라 선(善)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악(惡)이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서, 열반 증득을 위한 출가자의 삼독 제거의 당위성과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출가자는 삼독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언명은 여전히 참입니다.

 이 글만을 읽고서, 부처님께서 "그런 의도"라면 출가자도 마땅히 분노를 일으켜야 한다고 하셨을, "그런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마성스님은 두 편의 글 어디에서도 출가자도 분노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뒤에 말씀하신 뜻으로 보자면, 먼저 말씀하신 공적인 분노를 권장하는 대상인 불교도에 출가자가 포함 될 수가 없습니다. 공적인 분노를 일으켜야 할 불교도는 재가자입니다.
마성스님에게는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한편, 댓글 토론에서, 마성스님을 대변하시는 분은,
댓글 <2016-07-17 13:13:30  한심한 독해//>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증득을 위해 출가수행자는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니 말대로 부처님은 출/재가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준으로서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초기경에 부처님께서는 출가자를 향해 열반증득을 위해 분노하면 안된다,라고 하셨다.
 재가불자가 일상생활에서 불의를 보고 분노하면 안된다,하신 부분이 있다면 그 경전을 가지고 와라. 그러면 마성스님의 주장이 반박된다.//

- 라고 하시며, 분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재가불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출가자에게 하신 말씀임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자는 열반증득을 위해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고하셨고, 재가자에게는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출가와 재가에 적용되는 기준이 다릅니다. 이것이 애초의 논점입니다.

그래서, 저의 댓글 <2016-07-17 13:33:39  한심한 독해//>에서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 마성스님 자신은 실제로 어떠하신가, 하는 것입니다.(분노를 느끼시는가, 아닌가?)
1. 이런 사람의 발언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국민이 아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과 같은 국토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
2. 붓다는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에게 해당 된다.
* 마성스님이 출가자이시므로 위의 두 말씀에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 라고 해서, 모순된 입장 중 어느쪽이신가를 여쭈운 것입니다.
이런 이후에 공적인 분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넘어갔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야 출가자도 공적인 분노를 일으켜야 한다고 하셨지, 그 이전에는 그런 얘기 전혀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결론은 출,재가를 포함한 불교도 모두가 공적인 분노를 일으켜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마성스님을 대변하신 분께서는,  마성스님의 입장이 출가자도 공분을 일으키더라도 열반증득에 지장이 없다 하신다니, 다른 스님들께서도 모쪼록 사회악에 대해 함께 공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처구니없네 2016-07-18 10: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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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이 두가지 기준을 가진게 아닙니다.
초기경속의 부처님께서 출가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재가자한테도 적용하면 안된다고 말한 것 뿐입니다. 도연이란 자는 이 간단한 사실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성스님이 두가지 기준을 가졌다고 오독하고 있는겁니다.

마성스님은 일관되게 불교는 상환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도 상황을 보고 일이 벌어진 동기를 살피어 상황에 맞는 윤리를 펼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부처님 가르침을 판단 적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분노라도 개인의 탐진치에서 발생한 분노라면 마땅히 급해야 합니다(특히 열반증득을 하려는 수행자는 더더욱 개인적 분노에 휩싸이면 안된다--이게 초기경내용) 재가자도 당연히 개인적 탐진치 차원에서의 분노가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하지만 출가자와 달리 재가자들은 마음통제가 쉽지 않죠. 재가자의 한계를 잘 아시는 부처님께서는 재가자에게 엄격하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분노에 대해서는 출/재가자 모두 공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맑고 청정한 진리에 부합하기 때문이고 중생구제의 일환이고 선업의 일환이고 자비행이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분노를 도연이라는 분은 자꾸만 사적인 분노와 등급으로 놓고 분노하면 안될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게 이자의 무지이자 무명입니다.

그 무지와 무명에서 벗어나고 말고는 본인 하기 달렸습니다.
어처구니없네 2016-07-18 14: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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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의 얘기고,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상황에 맞게 윤리를 펼치셨지 근본주의자들처럼 모든 사안에 획일적인 윤리관을 설하시지 않았어요. 부처님의 상황윤리에 대고 신조어라는 둥, 처세론이라는 둥, 내얘기도 아닌 마성스님얘기를 내가 한 것을 둔갑시키고....정말 어처구니 없는 자네. ㅋㅋ
도연 2016-07-18 10: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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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분노에 대해서는 출/재가자 모두 공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
- 마성스님의 뜻이 애초에 이런 것으로 이해를 했었다면, 문제 제기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오해했다면, 왜 오해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윗글에 밝혀져 있습니다.
 마성스님의 뜻이 애초에 그런 것이었다고 하시니, 저로서는 만족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논의할 뜻이 없습니다.
도연 2016-07-18 12: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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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토론이 벌어진 사이트에,
과정에서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올렸고,
마성스님의 애초의 본 뜻이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공분을 느껴야 한다고 하시므로, 존경을 뜻을 표하고, 모든 스님들이 공공의 사회악에 함께 분노해주시면 얼나나 좋을런지...하는 제 소망을 말씀을 올렸습니다.
토론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말은허망하다 2016-07-18 11: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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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측천무후는 즉위 후에 혜능 대사를 황궁으로 초청했다. 혜능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측천무후는 “그럼 대신 달마 조사가 물려준 가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혜능 대사는 가사를 보냈다. 혜능은 빠졌지만 측천무후는 신수·지선·현약·노안·가은 선사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10대 고승’을 황궁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물었다. “화상들은 무슨 욕망이 있습니까?” 지선 선사를 제외한 나머지의 대답은 똑같았다. “욕망이 없습니다.”

 측천무후가 지선 선사에게도 물었다. “화상도 욕망이 없습니까?” 지선 선사가 답했다. “욕망이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측천무후가 다시 물었다. “어찌해서 욕망이 있습니까?” 지선 선사가 말했다. “일으키면 욕망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욕망이 없습니다.(生則有欲 不生則無欲)”이 말을 듣고 측천무후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목면가사와 칙명으로 새로 번역한 『화엄경』 한 부를 지선 선사에게 내렸다.

 지선 선사의 답은 명쾌했다. 욕망이 뭔가. 마음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욕망이 없다”고 말한 이들은 “마음이 없다”고 답한 셈이다. 그건 숨 쉬지 않는 돌멩이와 같다. 지선 선사의 답은 달랐다. 그는 “일으키면 욕망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욕망이 없다”고 답했다. 그 답은 숨을 쉰다. 들숨과 날숨이 자유롭다. 우리의 마음도 숨을 쉰다. 일으키는 마음이 날숨이고, 내려놓는 마음이 들숨이다.

 지선 선사의 마음은 그렇게 들락날락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게 왜 가능한가. 답은 간단하다. 욕망의 실체, 다시 말해 마음의 실체를 봤기 때문이다. 그게 온전히 비어있음을 말이다. 그걸 알면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고, 쓰고, 내려놓고, 다시 일으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주먹을 세게 움켜쥐어도 허공을 붙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음이 ‘허공(비어있음)의 작용’임을 깨친다면 말이다. 그래서 마음을 일으킨 뒤와 일으키기 전이 하나로 통하는 거다.

 측천무후는 혜능 대사에게 “전승 가사를 지선 선사에게 줘 잘 보관 공양토록 했다”는 칙서와 함께 따로 가사 한 벌과 비단 500필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혜능 대사의 목면가사가 지선 선사에게 가게 됐다는 것이다. 그 가사가 수제자인 처적 선사에게, 다시 수제자인 무상 선사에게 전해졌다는 기록이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등장한다.(일부에선 지선이 아닌 처적 선사가 측천무후에게서 가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사 법당에는 지선 선사가 황궁에서 가사를 받는 장면, 처적 선사 앞에서 신라의 왕자가 손가락을 태우는 장면, 무상 선사가 중국인 대중에게 법을 설하는 장면 등이 좌우 벽면에 가득 그려져 있었다.

 ◆15년간 수행했던 무상의 바위동굴=영국사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쯤 달려 천곡산에 도착했다. 시골이었다. 밭두렁을 30분쯤 걸어 어하구(御河溝)란 골짜기로 들어섰다. 거기에 무상 선사가 15년간 수행했던 바위동굴이 있었다. 순례객들은 그 동굴 앞에 섰다. 침묵이 흘렀다. 동굴 안은 빗물이 고여 아예 웅덩이로 변해 있었다. 무상 선사는 그곳에서 수행을 했다. 풀로 옷을 엮어 입고, 음식이 떨어지면 흙을 먹었다고 한다. 너덜너덜한 옷에 머리카락과 수염도 길었다. 지나던 사냥꾼이 짐승으로 착각해 활을 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15년을 수행했다.

 스승인 처적 선사가 무상에게 물었다. “너는 천곡산에서 무엇을 했느냐?” 무상이 답했다. “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쁘지도 않았습니다.(總不作 只沒忙)” 그 말을 듣고 처적 선사가 말했다. “너와 그가 바쁘면, 나 또한 바빠진다.(汝與彼忙 吾亦忙矣)

 이 문답은 무상 선사의 견처(見處·깨달은 경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굳이 풀면 이렇다. “천곡산에서 무엇을 했는가?”라는 스승의 물음에 무상은 “늘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만든 착각 때문에 바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답을 한 셈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바쁘지 않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도 바쁘지 않다. 가을에 물드는 단풍도 바쁘지 않다. 자연과 이치에는 바쁨이 없다.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바쁠 뿐이다.

 왜일까. 착각 때문이다. 비와 바람, 자연과 우주의 이치에 대한 착각 때문이다. 처적 선사는 “너와 그가 바쁘면, 나 또한 바빠진다”고 답했다. 무슨 뜻일까. 내가 바쁘면 세상이 바쁘고, 내가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해진다. 깨달음도 그렇다. 내가 눈을 뜨는 순간, 온우주가 눈을 뜬다. 내가 눈을 감으면, 온우주가 눈을 감는다. 그래서 처적 선사는 “네가 눈을 감으면 나 또한 눈을 감게 된다”고 한 것이다. 제자의 명쾌한 답에 스승은 그렇게 맞장구를 쳤던 것이다.

 무상 선사 수행동굴은 웅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고인 물 위로 불상의 머리만 보였다. 순례객들은 그 불두(佛頭)를 향해 합장을 했다. 천년 세월이 흐른 뒤, 고국에서 온 순례객과 무상 선사의 시선은 그렇게 마주쳤다.

 ◆이치를 깨쳐라, 탐착이 멸한다=쓰촨성에서 무상 선사는 유명해졌다. 그는 대중에게 ‘인성염불(引聲念佛)’이란 수행법도 제시했다. 신라 사람으로 중국 땅에 정중종(淨衆宗)이란 종파도 세웠다. 안록산의 난(755년)이 일어나자 당 현종은 쓰촨성으로 피신했다. 그때 무상 선사와 만났다. 무상은 현종에게 제왕으로서 선정을 베푸는 것에 대해 선법(禪法)을 설했다. 난이 끝나자 현종은 무상 선사에게 대자사(大慈寺)란 절을 내렸다. 무상 선사는 티베트에서 온 사신에게 처음으로 선(禪)불교를 전하기도 했다. 티베트 고대역사서인 ‘바세’전에도 무상 선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사실 ‘신라 왕자 무상 선사’는 역사 속에서 잊힐 뻔했다. 1907년 영국인 탐험가 스테인이 돈황석굴에서 발굴한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를 통해 되살아났다. 거기에 담긴 무상의 어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치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탐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바람이 비었음을 안다. 그래서 바람이 생기고, 바람이 불고, 바람이 사라짐을 볼 뿐이다. 누구도 바람을 움켜쥐려고 하진 않는다. ‘바람이 무엇인가’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이치를 알면 움켜쥘 수가 없는 법이다. 1200년 전, 무상 선사는 그걸 설했다.

옮긴긍임다
도연 2016-07-24 19: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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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성격>
1. 부처님에게는 분노란 존재하지 않는다.

< 모든것을 확실히 알고 깨달은 사람에게는 분노란 존재하지 않는다. >- 소부경

소부경의 말씀이 부처님의 말씀이고.
부처님이 "모든것을 확실히 알고 깨달은 사람"이라면
부처님에게는 분노란 존재하지 않는다.

- 부처님은 부처님 자신에게 분노가 없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2. 부처님에게도 자비에 의한 분노가 존재한다.
----------------------------------------------

위의 1과 2는 명백한 모순입니다.

1.을 참이라고 인정하면, 2.는 참이 아닙니다.
분노를 갖는 것은 "모든것을 확실히 알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를 참이라고 인정하면 1.은 참이 아니어야 하는데.
불자의 입장에서 1을 부정하여 부처님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부처님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신 분노를
부처님에게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 따라서 2를 인정하면
1과 2의 분노가 같은 뜻일 수가 없습니다.

저의 기존 입장은 불의에 공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모순은 이성적인 사고로는 극복이 않됩니다.

상황윤리든, 부처님의 견책이나 질책을 근거로 하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분노 앞에 자비를 붙이든...
저의 이성적 사고 능력으로는 이 모순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이성은 1.을 받아들이고 2.를 버리라고 하지만
제 감성은 2.를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부처님께서도 자비에 의한 분노를 느끼셨다고 믿는 것인데,
"아니다."라고 고함치는 제 이성을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믿고싶어 하는 것은 확신으로 정립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입니다.

지금은 11면 관음보살상의 진노의 상에 매달려있습니다.
혹시라도 관음보살의 진노의 모습이, 보살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악한 대상에게 보여주는 분노한 모습일 뿐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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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을 인정하고 2를 버린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마성스님 말씀대로 불국정토, 지상의 극락을 소원하는 불자로서
"정의 실현에 대한 열정"을 버리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지금으로서는 "정의실현에 대한 열정"이 곧 "불의에 대한 분노"라 알고 있는데,
혹시라도, "불의에 대한 분노"를 수반하지 않는 "정의 실현에 대한 열정"이 가능하다면
이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지도...?

아직은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의에 대한 열정"에서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