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7

일본 오대산 문수신앙의 역사적 전개와 특징 2017 최복희

일본 오대산 문수신앙의 역사적 전개와 특징


일본 오대산 문수신앙의 역사적 전개와 특징
Historical Development and Characteristics of Japan Mt. Wu Tai Manjusri Belief




정토학연구(淨土學硏究)

2017, vol., no.28, pp. 111-147 (37 pages)


발행기관 : 한국정토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불교학 > 정토학
최복희 /CHOIBOKHEE 1


1중앙승가대학교

초록 


일본의 오대산 문수신앙은 7세기에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불리운 교키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교키의 민중적이고 다양한 사회사업 등으로 인한 것으로, 일본 오대산 문수신앙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성격이다. 교키 이후, 헤이안시대에는 히에이잔과 남도불교, 두 계통의 오대산 문수신앙이 전개된다. 특히, 남도불교의 곤죠가 설치한 문수회는 교키의 민중적인 문수신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가마쿠라시대가 되면, 에이손과 닌쇼에 의하여 비인구제의 문수신앙이 성행한다. 에이손의 비인구제의 의의는 남도불교의 문수회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에이손이 독자적인 해석을 하여 가마쿠라시대의 승려들이 포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천민인 비인들에 대한 구제에 큰 힘을 쏟은 것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 즉, 문수회에서는 단순히 ‘빈궁자’ ‘고독자’라고 칭하던 구제의 대상들을, 장애자와 나병환자 등을 포함하여 ‘비인’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일본 오대산 문수신앙의 특징은 히에이잔의 전통적인 학문적 문수신앙도 계승되지만, 한편으로는 교키로부터 시작된 민중적 문수신앙이 가마쿠라 시대까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t. Wu‐Tai Manjusri Belief in Japan started from Kyoki(行基), who was called the incarnation(化身) of Manjusri Bodhisattva in the 7th century. This is due to Kyoki's popular and diverse social projects, and it is an important character of Japan Mt. Wu‐Tai Manjusri Belief. After Kyoki, in the Heian era, two lines of Mt. Wu‐Tai Manjusri Belief including Mount Hiei(比叡山) and southern Buddhism, were unfolded. Among them, the Manjusri society established by Gonjyo(勤操) of southern Buddhism inherited the tradition of Kyoki's popular Manjusri Belief. In the era of Kamakura, the Manjusri Belief of non‐human salvation became popular by Eizon(叡尊) and Ninsho(忍性). The significance of Eizon's the Relief Work for Hinin(非人救濟), while inheriting the ideas of the Manjusri society of southern Buddahism, was that Eizon did his own interpretation and devoted much of his relief to the non‐humans whom the monks in the Kamakura era regarded as no subjects of their mission, which has a big significance. In other words, Manjusri society simply referred to the remedies called ‘paupers’ or ‘solitary men’ as ‘non‐human’ including persons with disabilities and lepers. The characteristic of Japan Mt. Wu‐Tai Manjusri Belief is that the traditional academic Manjusri Belief of hieizon is succeeded, but on the other hand it is understood that the Manjusri Belief of the people originated from Kyoki is running parallel to the Kamakura era.


키워드열기/닫기 버튼
오대산 문수신앙,
교키,
사이쵸,
에이손,
문수회,
비인구제.

Mt. Wu‐Tai Manjusri Belief, Kyoki, Saicho, Eizon, Manjusri society, the Relief Work for Hinin.
======

일본오 산문수신앙의역사 개와특징

최복희(오인)*1)

목 차

              . 들어가기

              . 나라시 의 산 문 신앙                 1.  산에 최초로 입산한 일본 려                 2. 나라시 산 문 신앙의 개창

              . 헤이안시 의 산 문 신앙

                1. 히 산계통 

1)  사이쵸의 문 신앙

2)  엔닌과 문 신앙

                2.          계통                   1) 곤죠 문

                  2) 이젠과 문

              . 가마쿠라시 의 산 문 신앙

                1. 에이손의 문 신앙

1)  에이손의 문 신앙

2)  에이손의 문 신앙의 성격비인 제

2.  닌쇼의 문 신앙

3.  에이손의 비인 제의 의의- 문 신앙인가?

. 나가기

앙승가 학교 불교학부교수.

Ⓒ 淨土學硏究 28, 2017 12, pp.111-147.

한글요약

일본의 오 산 문수신앙은 7세기에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불리운 교키 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교키의 민 이고 다양한 사회사업 등으로 인한 것으로, 일본 오 산 문수신앙을 이해함에 있어 요한 성격이다. 교키 이후, 헤이안시 에는 히에이잔과 남도불교, 두 계통의 오 산 문 수신앙이 개된다. 특히, 남도불교의 곤죠가 설치한 문수회는 교키의 민 인 문수신앙의 통을 계승하고 있다.

가마쿠라시 가 되면, 에이손과 닌쇼에 의하여 비인구제의 문수신앙이 성행한다. 에이손의 비인구제의 의의는 남도불교의 문수회의 사상을 계 승하면서도, 에이손이 독자 인 해석을 하여 가마쿠라시 의 승려들이 포교의 상으로 삼지 않았던 천민인 비인들에 한 구제에 큰 힘을 쏟 은 것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 , 문수회에서는 단순히빈궁자’ ‘고독자라고 칭하던 구제의 상들을, 장애자와 나병환자 등을 포함하여비인이라고 칭하 던 것이다.

일본 오 산 문수신앙의 특징은 히에이잔의 통 인 학문 문수신앙 도 계승되지만, 한편으로는 교키로부터 시작된 민 문수신앙이 가마 쿠라 시 까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어 오 산 문수신앙, 교키, 사이쵸, 에이손, 문수회, 비인구제.

. 들어가기

5세기 국에서 발생한 오 산 문수신앙이 일본에 정착이 된 것은 나라시 의 교키가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숭배된 7세기 무렵이다. 이 후, 헤이안시 를 거쳐서 가마쿠라시 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사회 배경을 바탕으로 독특한 일본의 문수신앙으로 변화되었다. 교키 이후 헤이안시 에 오 산 문수신앙은 두 계통으로 발 된다. 하나는 사이쵸와 엔닌을 심으로 하는 히에이잔의 학문 성격의 문수신앙과, 다른 하나는 곤죠와 타이젠을 심으로 하는 남도불교의 실천 성격의 문수신앙이다. 그 후, 가마쿠라시 에는 에이손의 비인 구제라고 하는 사회복지 차원의 문수신앙으로 자리매김 된다. 이와 같이 본고는 시 별로 오 산 문수신앙과 련한 인물들을 심으로 서술될 것이다.

일본의 문수신앙을 독특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신 앙이 비인구제라고 하는 자비의 실천 성격으로 행하여졌기 때문이 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자비는 문수보살이 아닌 세음보살의 상 징성이다. 그 다면, 자비를 근본정신으로 하고 있는 비인구제가 음 신앙을 바탕으로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문수신앙 을 근본으로 삼았는가 하는 에 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 나라시 의 오 산 문수신앙

1. 국 오     산에 최 로 입산한 일본 승려

일본승려로서 최 로 국의 오 산에 입산한 인물은 구인가? 이는 일본 오 산의 개창과 련한 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 를 밝히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문헌기록이 명확하지 않으며, 학자들의 논 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 로 국 오 산에 입산하 다는 승려는 겐보, 교가, 료센의 3

이다. 이들에 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겐보(玄昉, ?-746)는 법상종의 승려이다. 겐보의 오 산입산 을 주장하는 것은 모리 카츠미이다. 그는 칠 사순례사기 에 기록된 「오 산기」1)를 거로 하여, “일본의 입당승 가운데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오 산을 오른 것은 겐보이며, 2(716)에 입당해서, 신귀 2(725)에 오 산을 순례하 다.”2)고 한다. 이후, 아사에다 젠쇼3)가 모리의 설을 수용하고 있다.

다음은성유식론첨기 4) 인왕경약찬 5)을 비롯하여 수 많은

술을 남기고 있는 교가(行賀, 729-803)가 최 의 입산승려라고 하는 것은 요시다 야스오이다. 요시다는각사와 오 산 문수신앙에 한 지식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코후쿠지(興福寺)의 교가이 다. 그는 승보5(753)에 입당해서, 연력2(783)에 귀국한 것으로 추 정되는데, 오 산을 순례했다고 해지는 최 의 일본인이다.”6)고 하 다.

마지막으로, 료센(霊仙, 759-827)이라고 주장하는 오가와 칸이치는

1) 「興福寺」藤田経世編 ( 校刊美術史料․寺院篇          , p.54.) 2) 森克己,          遣唐使 , p.161.

3)      朝枝善照, 厳の世紀-五台山仏教文化圏と東大寺,厳学論集 , 1997.

4)      成唯識論僉記       30, 行賀( 大正藏 55)

5)      仁王経略賛 3, 「興福寺行賀於唐土撰」(大正藏55)

6)      吉田靖雄, 「霊異記 の行基文殊化身説をめぐって」, 日本仏教 46, p.19. 요시다는 다른 논문에서도당의 각사는 력2(767)에 최 로 낙성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으며, 이 칠한 사찰을 본 일본인은 연력2(783)에 귀국한 코후쿠지의 교가이다.”고 하 다.(吉田靖雄, 「文殊信仰の展開-文

会の成立まで,南都仏教 38, p.38)

료센은 당 에 바다를 건 일본 승려로서 최 로 오 산에 오른 자 이다.”7)고 하 다.

오가와가 주장하는 료센은 당에서 경 번역에 참가한 유일한 일 본승려이다.8) 하지만, 그에 한 사료가 많지 않으며, 그 동안 학계에 서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 었다. 그러다가, 2(1913)에 종교 국이 보물조사를 하 는데, 오기노 나카사부로(荻野仲三郎)가 이시야 마데라(石山寺)의 경장을 조사할 때, 승본생심지 경 제1권의 간 기(奥書)9)에 역장 순 에 기입된 료센의 이름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 려지게 되었다. 그 후, 타카쿠스 지로(高楠順次郎)가 여러 사료를 수집하고 편집해서 선삼장행력고 라고 제목을 붙여서 일본불 교 서 10)에 편입하 다.

이 자료를 토 로 료센은 헤이안시 에 코후쿠지의 법상유식의 승 려 다는 과 국에서의 활동 등에 한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 만, 그의 출신과 탄생, 그리고 입 11)등에 해서는 명확하게 밝히 지 못한 부분이 남아있다.

료센은 당에서 왕실의 내도량을 출입할 수 있는 내공 승12)이 된 이후,13) 원화15(820) 9월에 오 산으로 향하 다.14) 오 산의 보통

7)         川貫, 入唐僧霊仙三蔵と五台山,     支那仏教史学  5-34, p.143.

8)         료센이 역경에 여한 것은 입당팔가의 사람인 엔코(円光) 靈巖寺和尚請來法門道具等目錄 (大正藏55, 1073,)梵夾二具(一具中天竺三蔵難陀付授 一具霊仙大徳弟子付授)”라고 하는 기록에서 확인할 있다.

9)         간기에 해서는 妻木直良, 唐代の訳場に参したる唯一の日本僧,東洋学報 3-3, p.432 참조.

10)      霊仙三蔵行歴      (大日本仏教全書71, pp.152-155.)

11)      요리토미 모토히로는 료센의 정확하게 단정할 없지만, 類聚国史 続日本後記 등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력원년(825)에서 태화2(828) 사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頼富本宏, 入唐僧霊仙三蔵, 伝の研究 , p.138.)

12)      大宋僧史略 3, 內供奉并引駕(大正藏54, 250,) 의하면, 内供奉僧 숙종 때에 설치되었다.

13)      료센의 내공 승에 해서는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내공 승이라는 ( 野勝年, 仏教の美術と歴史 2, p.424), 입당 이미

원에 도착한 료센은 공 에서 문수보살과 일만 권속을 친견하고, 각사의 견고보살원(堅固菩薩院) 2년 동안 거주하 다. 그 후, 장경2 (822)에는 칠불교계원에 주하 고, 철훈난야에도 주하 다. 철훈난 야에서는 일본의 사가천황으로부터 을 하사받았는데, 이에 한 보 답으로 귀국하는 정소(貞素)에게 사리 1만과와 경 2,15) 조칙 5통 을 헌상하 다. 태화2(828)에 순화황제가 다시 백 을 발해 사신인 고승조(高承祖) 일행에게 부탁했는데, 정소가 다시 오 산을 찾았을 때, 이미 료센은 독살되었다.

그런데, 일본 오 산의 문수신앙은 이들과는 무 한 나라시 에 교 키에 의하여 시작된다. 3명의 입당승들에 의해 개창되지 못한 이유는 좀 더 상세한 고찰을 요하는 문제이지만 간단히 살펴보면, 겐보가 귀 국한 천평7(735)에는 이미 교키가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칭하여지 고 있었으며, 교가는 교키의 입 후인 승보5(753)에 입당하 으며, 료센은 교키 이후의 인물이다.

2. 나라시    산 문수신앙의 개창16)

내공 승이었다는 설이다. (松本文三, 日本国訳経沙門霊仙, 仏教の芸術とその人物 , p.276) 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 3, 開成57조에日本国内供奉翻経大徳’ ( 大日本仏教全書 72, p.116)이라고 호칭 명기되어 있는 것을 고려해보면, 국의 내공 승이었음을

.

14)      공승의 있었던 료센이 장안을 떠나서 산을 순례한 이유 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요리토미 모토히로는 반야삼장이 료센에 순례를 권했거나, 료센이 일본으로 보낼 불사리를 구하 해서 다고 한다. (頼富本宏, 入唐僧霊仙三蔵-不空空海をめぐる人々」,伝の研究 , pp.147-148) 반편, 오노 겐묘는 산이 당시의 불교의 심지 때문이라고 한다. ( 野玄妙, 平安朝の文化と入唐僧霊仙三蔵,仏教の美術と歴史 , p.915)

15)             료센이 번역에 참가했던   승심지 것이다.

16)      교키의 문수신앙에 서술은 최복희(오인) 교키와 일본의 산문수신앙,일본불교사연구 5, pp.22-36) 재인용함.

나라시 (710-794)에 오 산 문수신앙을 개창한 인물은 교키(行基, 668-749)이다. 그의 일생은 매우 변화가 심하다.17) 그를 따르는 수행 자와 민 들을교키집단이라고 하여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하 고, 쇼무(聖武)천황이 토다이지(東大寺) 불조성을 발원하고 그를 승 정으로 임명하기도 하 다.

특히, 교키가 행한 토목사업과 49()의 설치, 보시처(布施屋)

은 고 일본승려들의 사회활동을 짐작하게 하며, 이는 일본의 오 산 문수신앙의 성격을 자리매김하는 요한 논 이기도 하다.

승정사리병기 를 비롯한 교키의 사료들 가운데, 그의 문수신 앙18)에 해서는 일본 이기 19)의 「삼보를 믿고 공경해서, 생의 과보를 얻는 인연」20)조가 기본 사료에 해당한다.

일본 이기 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즈미(和泉)에 표착한 신령스러운 나무를 가지고, 후에 요시노(吉野)의 히소데라(窃寺)에 안 치한 보살상을 만든 오오토모노 야스코(大部屋栖野古)가 사후에 다시 소생해서 명계에 해서 말하는 것이다. 야스코가 간 명계는 오색구 름이 향기를 띄고 있고, 황 의 산에서 성덕태자가 기다리고 있고, , 묘덕보살이라고 이름하는 비구에게 받은 선약을 먹고 소생한 후 에도 장수하게 된다. 야스코가 만난 묘덕보살은 문수보살이며, 황 의 산은 오 산, 교키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는 것이 설화의 요

17)     田村円澄는 行基と僧尼令( 日本宗教史論集   , p.51.)에서 그의 일생 주술자로서의 측면, 설법자로서의 측면, 토목사업자로서의 측면으로 구분한다.

18)     교키의 문수신앙에 논문은 吉田靖雄의 霊異記 の行基文殊化身説をめぐって(日本仏教 46, 1978) 된다. 그는 교키가 수많은 보살 가운데 문수보살로서 불리워진 이유, 그리고 일본 이기 에서의

은신의 성인이라고 하는 역사      의미 등에 해서 논하고

.

19)     야쿠시지薬師寺의 교카이景戒가 술한 일본 이기 홍인연간(810-824) 성립하기 때문에 보면 속일본기 다음에 성립되었지만, 일본기 향을 받지 않고, 다른 계통에 속한다.

20)     日本霊異記         권상, 信敬三宝得現報縁第五( 日本古典文学大系 , pp.85-87.)

이다.

교키를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표 한 것은 이 설화에 의거하는데, 호리 이치로 등은일본 이기 의 교키의 오 산설화는 이미 쇼토쿠 (聖德)태자-쇼무천황, 오 산문수-교키라고 하는 일련의 설이 완 성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는 삼국불법 통연기 에 토다이지를 심 으로 해져 온 설을 계승한 것이다.”21)고 하여, 교키의 문수설화 가 일본 이기 에서 독립 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

.

한편, 문수보살의 화신인 교키가 오 산 문수신앙과 연결성을 갖는

에 해서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국 오          산의 문수보살은 출가비구의 수행자로 화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교키가 행한 사회사업들이 경 에 설한 문수보살의 행과 매우 비슷하다는 이다.22) , 교키가 설 립한 49원과 보시처에서는 역민(役民)과 빈궁자, 병자 등 사회 으로 약자의 치에 있는 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숙소를 제공하 다. 그 다면, 문수보살이 음식과 련하는 경문을 살펴보자.

A-1 옛 에 연수동진(문수)은 음식으로써 제불에게 공양하여, 하여 무상정진의 도심를 발하 다.23)

A-2 문수사리가 붓다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는 원이 있사 온데 마치 아미타불세계에서 법희로써 음식을 삼는 것처럼 의 세 계에서도 보살이 처음 태어나 먹고 싶은 생각을 일으킬 때에 곧 모

21)   堀一, 行基伝説の社会性-行基智光伝説の意義,日本上代文化と仏教 , pp.223-224.; 石崎達二, 奈良朝における五台山信仰を論じ東大寺大仏造顕思想の一端に及ぶ, 学雑誌 41, p.99.; 米山孝子, 行基説話伝承 , 教文化 168, p.12.

22)   吉田靖雄, 霊異記 の行基文殊化身説をめぐって,日本仏教  46, pp.20-23.

23)   文殊師利普超三昧 권상(大正藏15, 413,a), “昔往古世 軟首童真以膳見施供養仏衆 発無上正真道意

든 맛있는 음식이 발우에 가득히 담겨지면서 오른손 안에 있게 되 며, 곧 생각하기를만일 시방의 모든 붓다께 공양하지 못했거나 그 리고 가난하여 고뇌하는 생과 아귀 등의 무리에 보시하여 그들을 배부르게 하기 이면 나는 기필코 먹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할 때에 다섯 가지 신통을 얻어 허공으로 올라가 걸림없이 시방의 한량없고 수없는 모든 붓다의 세계 안에 나아가 모든 붓다 와 성문들에게 밥을 공양하고 가난으로 고생하는 생들에게도 모두 두루 돌려 뒤에 다시 그들을 하여 설법하여 갈애를 여의 게 하고 한 찰나 동안에 다시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겠다고 하 는 원이옵니다.”24)

A-1은 문수사리보 삼매경 이며, A-2는 보 경 이다. 문수사 리보 삼매경 에서는 문수보살이 제불에게 음식공양을 하여 도심을 내었으며, 보 경 에서는 문수보살이 가난하고 배고 생들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설법하여 갈애를 소멸하고자 하는 원을 세운다. 그러나, 교키가 와 같은 경문을 근거로 하여 빈민구제를 하 다 는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교키의 다방면에 걸친 빈민구 제 활동을 당시의 민 은 문수보살의 행으로 수용하 음을 알 수 있

.

                   . 헤이안시 의 오 산 문수신앙

24) 宝積経 60(大正藏11, 347,c), “ 我復有願 如阿彌陀佛剎以法喜為食 而我剎中菩薩初生起食念時 即便百味盈滿於鉢在右手中 作是念 若未供養十方諸佛 及施貧窮苦惱衆生 餓鬼等類令其飽足 而我決定不應自食作此念時 得五神通乘空無礙 往於十方無量無數諸佛剎中 以食供養諸佛如來及聲聞衆 又於貧苦諸衆生類亦皆周給 為說法令離渴愛 於一念頃還至

本處

1.     산계통

 헤이안시 (794-1185)가 되면 일본의 입당구법승의 수가 증가하는 데, 입당팔가25)가 표 인물이다. 히에이잔(比叡山)의 천태종 계통 의 문수신앙은 입당팔가 에서 사이쵸와 엔닌 등이 속하며, 학문 성격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사이쵸가 불공의 문수신앙에 주목하고, 엔닌이 오 산 각사의 문 수보살상을 친견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히에이잔의 문수신앙 은 곧, 오 산문수신앙과 한 련성을 지닌다.26)

1) 사이쵸의 문수신앙 사이쵸( , 767-822)는 교화된 문수신앙 즉, 불공의 문수신앙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하 .27)

연력23(804)에 쿠카이(空海, 774-835)와 함께 입당한 사이쵸는 다 음 해 805년에 귀국하 다. 귀국 후, 홍인10(819)에 승계단을 설 립할 것을 조정에 주하여 남도계단28)에서 독립된 천태계단의 설립을 청원하 고, 다음 해(820)에 계론 을 지어서 자신의 뜻을 피력하 다.

사이쵸가 천태계단을 설립하고자 한 이유를 계론 에서 밝히고 있는데, “삼사 칠증을 살펴보면, 보 경 등에서 설하기를, 석 가모니불을 화상으로 삼고, 문수사리는 갈마아사리, 당래미륵은 교수

25)  入唐八家는 , 円仁, 空海, , 円行, 恵運, 円珍, 宗叡이다. 입당팔가 모두가 산을 순례하지는 않았다.

26)  上田純一, 平安期諸国文殊会の成立と展開について, 日本 475, p.29. 27) 吉田靖雄, 文殊信仰の展開-文殊会の成立まで,南都仏教 38, p.38.

28) 당시에는 앙의 이나, 지방의 고쿠분지(国分寺)에서 사미계를 수계 하고,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시모쯔께(下野) 야쿠시지(薬師寺), 치꾸시(筑紫) 칸논지(觀音寺) 3 계단에서 비구계를 수계해야 했다.

아사리로 하며, 시방제불이 이를 증명한다.”29)고 하여, 삼사칠증의 제 도를 부정하고, 승계단을 설립하려는데 있다.

, 그는 교단의 지도자들과 심한 논쟁을 하 는데, 그 의 하나 가 문수보살상을 안치하는 문제 다. 계론 의 「개 문수상좌편」에지 들으니, (인도의) 모든 사원에 승려 형상의 상을 안치하는데, 필시 이것은 문수상일 것이다. 옛 사람들은 잘못하여 문수상을 빈두 로상이라고 지 하 다.”30)고 하여, 식당에 문수상을 안치하는 것은 인도와 당의 승사원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 다. , “문수 상을 상좌에 안치한 식당에서 매일 배하고, 매일 공양한다. 공양을 베푸는 자와 (이를) 받는 자는 태어나는 곳마다 제불의 처소에 날 것 이다. 문수사리의 신력과 가호를 출가인 이라면 우러르고 믿지 않 을 수 없다. , 꿈속에서 문수를 친견하면, 하루 만에 아라한을 성 취할 것이다.”31)고 하여, 불공이 식당에 문수상을 안치한 을 들어 서, 문수상을 상좌에 안치하지 않는 남도불교는 소승이라고 비난하

.

나바다 타카시는 사이쵸가 식당에 문수상을 안치하고자 했던 이유 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문수보살이 승참회의 주요한 역 활을 하고 있는 , 둘째, 문수보살이 이타행 실천의 표상인 이

.32)

남도불교의 독립된 승계단을 설치하고자 했던 사이쵸의 입장에 서 보면, 승참회의 주()이며, 범계(犯戒)의 죄를 소멸시키는 주

29)   顕戒論 , 顕授大乗戒為大僧篇第五(伝教大師全集 1, p.123.), “三師及以七証故 謹案 観普賢経等云 釈迦牟尼仏為我和上 文殊師利為我阿闍梨 当来弥勒 願授戒法 十方諸 願証知我

30)   顕戒論 , 顕文殊上座篇第三(伝教大師全集 1, p.92.), “今此聞諸寺 所置上僧形 恐皆是文殊像矣 先代伝人 謬指文殊像 為賓頭盧

31)   顕戒論 , 顕文殊上座篇第三(伝教大師全集 1, p.101.), “文殊上座案置食堂 日日礼拝 日日供養 生生之 生諸仏家 文殊師利威神所護 誰出家人 不仰信 夫夢中得見文殊聖 一日一夜成阿羅漢

32)   名畑崇, 日本仏教における社会的実践の系譜大谷大学研究年報   23, pp.240-241.

이며, 범망경보살계의 계단에는 갈마아사리로서 등장하는 문수를 안 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계론 의 「개시동소율의보살불동소율의보살명거」에서는불필정 입정입인경 에서 설하기를, 이때에 문수사리동자가 붓다에게 말하기 를, “세존이시여, 오직 원하건데 세존과 모든 보살이 필정불필정입지 인법문을 를 하여 인가하소서. 제가 이 보살의 필정을 얻고, 이 보살이 불필정아뇩다라삼 삼보리를 얻어서 무상지도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여주소서.”33)라고, 불필정입정입인경 을 인용하여 문수보살 이 부동소율의(不同 律儀)의 보살임을 설명하고 있다. , 사이쵸는 상좌일행삼매원(常座一行三昧院)을 건립하고자 할

때에도 문수반야경 의 경문을 인용하여 정당성을 확립하고 있다. 계론 의 「개시사종삼매원명거」에서항상 문수보살이 설하기를 문수 보살이 반야에게 묻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이름한다. 방법은 몸으로는 열고 닫음을 논하고, 입으로는 설법과 묵언을 논하고, 뜻으로는 지과 을 논한다고 이와 같이 경에서 설하고 있다.”34)고 하 다. 사이쵸 가 지 에서 설하는 상좌삼매와 법화삼매의 참회의 방법 에서 상좌삼매를 더 요하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참회의 주를 문수에게 서 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이쵸는 오 산에서 불공이 식당에 문수상을 안치한 것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를 계단설립의 사상 근거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사이쵸에게 있어 오 산 문수신앙의 의의는, 문수 보살은 승참회의 주이며, 이는 상좌일행삼매와 직결된다고 하는

33)   顕戒論 권상, 開示同 律儀菩薩不同 律儀菩薩明拠五( 伝教大師全集 1, p.62.), “不必定入定入印経云 爾時文殊師利童子 仏言 唯願世 為諸菩薩 必定不必定入智印法門 以彼印故 令我得知此菩薩必定 此菩薩不必定阿耨多羅三藐三菩提 無上智道

34)   顕戒論 권상, 開示四種三昧院明拠六(伝教大師全集 1, p.74.), “常座出文殊 文殊問両般若 為一行三昧 方法 身論開遮 口論説黙 意論止 具如経説

이다.

한편, 사이쵸는 토고쿠(東国) 지방으로 향하는 도 , 시나노(信濃, 재의 長野県)에 코사이(広済)35)와 코죠(広拯), 두 곳에 원을 설치하 여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 다.36)

계론 에는 불설문수사리반열반경 37)을 인용하여, “문수사리법 왕자는 만약 어떤 사람이 생각하거나, 만약 공양하여 복을 닦고자 한 다면, 곧 빈궁자나 고독한 자의 고뇌하는 생의 모습으로 행자 앞에 화신하여 나타날 것이다. 문수사리를 염하는 자로서 인자한 마음을 행하여야 하고 이 마음을 행하는 자라면 문수사리를 볼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슬기로운 자는 마땅히 문수사리의 32상과 80종호를 자세히 할지니, 이 게 하는 자가 수능엄삼매의 힘 때문에 속히 문수사 리를 친견하게 되는 것이다.”38)고 문수보살의 요익 생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계론 에 문수보살의 요익 생에 하여 서술하고 있

는 은, 그가 교키의 사회 활동의 문수신앙을 계승한 것이라고 단하기가 쉽다. 하지만, 사이쵸의 이와 같은 행 은, 당시의 사회 배경에 의한 것으로 단된다. 그 이유는 교키의 문수화신 설화를 수 록한 일본 이기 는 사이쵸가 입 한 해인 홍인13(822)에 편찬되 어, 계론 과는 불과 2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시 에 는 이미 문수신앙이 사회 으로 리 퍼져있었던 것이다. , 사이

35)      재도 히에이잔의 엔략쿠지(暦寺) 하는 특별노인요양소인 暦寺 広済寮 되고 있다.

36)      名畑崇, 日本仏教における社会的実践の系譜,大谷大学研究年報  23, pp.245-246.

37)      佛說文殊師利般涅槃經 (大正藏14, 481,a)

38)      顕戒論 開示大乗上座像明拠十五(伝教大師全集 1, p.99.), “此文殊師利法王子 若有人念 若欲供養修福業 即自化身 作貧窮孤獨苦惱衆生 至行 若有人念文殊師利 當行慈心 行慈心 即是得見文殊師利是故智 當諦觀文殊師利三十二相八十種好 作是觀 首楞嚴力故 當得疾疾見文殊師利

쵸는 사경, 법화십강(法華十講)의 설치, 토고쿠 지방의 포교 등을 극 으로 한 으로 보아서, 반드시 교키의 행 을 계승하여 코사이 를 설치하거나, 문수보살의 요익 생을 강조한 것은 아닌라고 단된

.

2) 엔닌과 문수신앙 엔닌(円仁, 794-864)은 국의 오 산 문수신앙을 직 래한 인물 이다. 그의 순례일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 39) 9세기 국 오 산불 교의 상황을 악함에 있어서 더 이상의 사료는 없다고 하여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엔닌이 오    산을 순례한 개성5(840)에는 불공                  등은 이미 열반에 들고, 당시의 오  산은 화엄교학보다는 천태학이 발 하고 있 었다.

화엄사에서는 문감(文鑑)과 지원(志遠)에 의해서 천태학이 양 되고, (法賢)과 형(玄亨) 등에 의해서 천태 사의 마하지 과 법화소 가 자주 강설되었다. 엔닌은 이와 같은 천태지 과 교 수 행에 아무런 항감도 없이 오 산불교를 체험하고, 히에이잔의 개조 인 덴교 사(伝教大師)의 円( 법화경 )과 密( 일경 )이 일치하는 사 상 입장에 확고한 자신과 신념을 얻었을 것이다.40)

, 엔닌은 사이쵸가 주장한 사종삼매(四種三昧)를 숙지한 후에 입당하여 오 산의 염불을 수용한 것이다. , 새로운 오 산염 불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상행삼매의 수행을 한 후에 오 산염불

을 받아들인 것이다.41) 

엔닌은 귀국 후, 히에이잔의 요꼬가와(横川)에 수능엄원(首楞厳院)

39)  입당구법순례행기 해서는 野勝年의 入唐求法巡礼行記の研究 참조바람.

40)  覚超, 五台山参拝報告,         聖地五台山 , p.19.

41)  浅井成海, 覚大師の浄土教,   龍谷大学論集  455, p.6.

을 건립하여 주하 다. 쿠우게(公家)는 가상3(850)에 엔닌을 청해서 문수팔자법(八字法)을 닦게 하 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2 (860)에 엔닌이 히에이잔에 문수루를 조 하게 되었고, 오 산의 문 수상[1])을 일본에 재건하 다.

한편, 엔닌은 당에서 가져온 청래목록에 오        산의 흙을 기재하고

있다.[2]) 이 흙은 법화홀지원(法華惣持院)에 있었는데, 엔닌의 입 (864) , 천원3(980)에 당원44)으로 옮겨진 후, 12세기 엽까지 당원에 보 되어져 있었다.[3][4]) 엔닌이 오 산의 흙을 목록에까지 기 재한 것은, 엔닌의 오 산불교에 한 존경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

.

엔닌은 일본에서 교키와 같은 문수신앙을 개하지 않았지만,

오 산의 오 (五峰)순례를 소오(相応)에게 하여 히에이잔의 회 행(回峯行)의 순례형식을 확립하 으며, 이는 33개소와 88개소의 순 례 통이 되었다.46)

2. 남도불교계통 

1) 곤죠와 문수회 히에이잔과는 다른 남도불교의 오 산 문수신앙의 특징은문수회

의 실행이다. 문수회를 최 로 발원한 인물은 곤죠(勤操, 754-827)[5])이다. 그는 헤이안 기를 표하는 학식을 겸한 고승으로, 젠기(善議)에게 삼론 학을 배우고, 후에 승정되었으며, 망모의 천도공양을 해 법화경 을 강독하고 법화팔강(法華八講)을 창시하 다.

문수회는 곤죠가 기나이48)에서 음식 등을 비하여 빈곤한 사람들 에게 공양하 던 법회를 말한다. 문수회에 한 최 의 연구는 츠에 다 분에이49)가 문수회를 고쿠분지(国分寺)의 법회라는 논 에서 진행 한 것이다. 그 후, 승려의 빈민구제사업이라는 논 은 츠지젠노 스 50)의 연구가 단 가 되었으며, 이를 미야자끼 엔쥰51)가 이어 받았 다. 호리이 슌보52)는 히에이잔의 학문 문수신앙에 한, 남도불 교의 빈민구제를 본원으로 하는 신앙과의 차이를 비교하여, 문수회는 고 율령제의 붕괴과정에서 민 에 한 빈민구제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 다.

곤죠의 기록은 원형석서 53) 본조고승  54) 등에 하는데,  

형석서 에는 그가 문수사상을 지니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곤죠가 다이안지(大安寺)에 주석을 할 때, 방에 노모를 모시고 있는 에이코(榮好)라는 승려가 있었다. 당시 칠 사에서는 밥을 짓지 않고, 오시가 되면 아에서 수 에 밥을 싣고 와서 스님들에게 4되 씩 나 어 주었다. 에이코는 공양을 4등분하여 노모와 노모를 시 하 는 동자, 걸인에게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먹었다. 곤죠는 에이코의 이 와 같은 행동을 여겨 보았을 것이다. 에이코에 한 기록은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가 걸인에게 공양

勤操)’라고 불리웠다.

48)      内는 일본의 지방구분으로, 당시의 일본의 심지 , 山城大和和泉摂津의 5 지역이다.

49)      角田文衛, 国分寺の寺院組織, 国分寺の研究 , 1938.

50)      辻善之助, 僧侶の社会事業,    日本仏教史 , p.527.

51)      宮崎円遵, 文殊信仰と利生事業,        中世仏教と庶民生活

52)      堀池春峰, 南都仏教と文殊信仰,        大和文化研究    142

53)      元亨釈書  2, 石淵寺 釈勤操( 国史大系    14, pp.668-669.)

54)      本朝高僧         5( 大日本仏教全書 102, pp.101-102.)

을 나 어 것이 문수신앙에 의한 보시행 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다이안지는 보제선나(菩提僊那, 704-760)가 살았던 곳으로, 보 제선나는 국 오 산에서도 주하 기 때문에 에이코의 행 를 통하 여, 다이안지에는 보제선나에 의한 오 산 문수신앙이 계승되어 왔음 을 추측할 수 있다.

, 곤죠의 문수회의 발원은 보제선나에서 에이코로 이어지는 배경

을 고려해야만 한다. 미야자키 엔쥰도곤죠의 문수사상이 용수 삼론종과의 계가 있는 것과, 다이안지는 보제선나가 살았던 곳 으로 곤죠는 보제선나의 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55) 고 설명하고 있지만, 미야자키는 에이코에 해서는 주목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2) 타이젠과 문수회 타이젠(泰善, ?-?)은 간코지(元興寺)의 승려로 삼론종을 공부하 으 며, 곤죠와 함께 문수회를 행하 다. 천장4(827)에 곤죠가 니시데라 (西寺)에서 입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젠은 문수회를 개최할 것을 상주한 내용이 류취삼 격 에 한다.

증승정 등 법사 근조와 원흥사 등 법사 태선 등은 기내의 군읍 에 리 (문수)회를 설행하여, 밥과 음식 등을 마련하여 빈곤한 자 들에게 베풀고자 합니다. 이는 문수열반경 에 의거한 것입니다.56)

이에 하여 부에서 칙허를 내린 것은 천장5(828) 2월이다. 매년 7 8일에 그 일(문수회)을 하게하며, 겸하여 당이나 탑, 경 등이 손된 것을 고치고, 문수회가 열리는 날에 함께 공양한다.

55)   宮崎円遵, 文殊信仰と利生事業,          中世仏教と庶民生活 , p.77.

56)   類聚三代格 2, 天長五年二月付官符, 応修文殊会事(類聚三代格前編, 新訂増補国史大系, p.54.), “贈僧正伝灯大法師位勤操 元興寺伝灯大法師位泰善等 内郡邑広設件会 備飯食等 施給貧 此則所依文殊涅

그 후 3일간은 살생을 하며, 남녀가 모여서 삼귀의를 설하고 오 계를 수지하게 하며, 약사불과 문수보살의 명호를 각각 100만 편씩 칭하게 하여 천하의 백성들이 함께 복업을 닦게 한다. … ( ) … 보시와 회비는 료의 이자로 할당하여 충당한다. , 리와 백 성 등이 자신의 분수에 따라서 보시하는 것은 제한하지 않는다.57)

문수회가 천장5년에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고, 나아가 리와 백성 들이 참가하는 규모를 갖춘 것은 당시의 사회 배경 때문이기도 하 다. , 홍인말년부터 천장년간에는 국에 기아와 역병이 유행하 는 데, 빈고하고 고독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 등을 베풀어주는 문수 회를 정부의 입장에서는 진구(賑救)정책의 일환으로 활용하 던 것이

.

이와 같은 사회실천 성격의 남도불교의 문수회는 교키의 통을 계승하는 일이었으며,58) 주로 다이안지와 간코지 승려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에도 유의하여야한다.59)

한편, 오야마다 카즈오는문수회는 빈자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

57)   類聚三代格 2, 天長五年二月付官符, 応修文殊会事(類聚三代格前編, 新訂増補国史大系, p.54.), “毎年七月八日令修其事 兼修理堂塔経教破損等 当彼会日 同供養之 当会前後并三箇日 断殺生 会集男女等 先授三帰五戒 次令称讃薬師文殊宝号 各各一百遍 庶使普天之下 同修福業 …( )… 会料 割救急料利 充行 国那司百姓等 随分物加

不在制限

58)   하지만, 上田純一는 平安期諸国文殊会の成立と展開について(日本歴史 475, p.30.)에서종래의 문수회연구의 공통 특징은 문수보살의 신이라고 생각했던 교키의 사회복지사업과 문수회를 연결 지어서 논하 있는 이며, 이것이 자선구제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러나, 石崎達二는 奈良朝における五台山信仰を論じ東大寺大仏造顕思想の一端におよぶ( 学雑誌 41)에서 교키의 문수화신설은 나라시 래한 바라문승정과의 계에 있어서 발생한 것으로, 교키의 사회복지사 업과는 일단 계없이 성립한 것이다.”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는 입장 취하고 있다.

59)   名畑崇, 日本仏教における社会的実践の系譜大谷大学研究年報   23, p.252.

만이 아니라, 훼손된 , 탑을 수리하는 등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기 때문에, 문수회의 회비의 부분은 당탑의 수리에 하고, 보시물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60) 하여, 문수회가 빈궁자 보시보다는 사찰의 수리에 부분의 회비를 사용되어졌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에 명확한 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 가마쿠라시 의 오 산 문수신앙

1. 에이손의 문수신앙

1) 에이손의 문수신앙 가마쿠라시 (1185-1333)의 문수신앙은 유마거사와 화를 나 는 문수상의 조성, 천태계의 팔자문수법(八字文殊法), 식당에 안치된 성 승(聖僧)문수상 등과 같은 통 인 측면과, 신불습합(神仏習合)에 의 한 다양한 성격의 문수신앙이 공존하 다.61) 그 가운데, 본고에서는 에이손( , 1201-1290)의 비인구제의 문수신앙에 하여 살펴보고 자 한다.

에이손은 가마쿠라 기의 진언율종의 개조로 계율을 부흥시켰 다.62) 에이손에 한 기록은 원형석서 의 「존」63)을 토 로, 17

60)   山田和夫, 文殊会の成立とその実施,   立正史     41, pp.50-51.

61)   林剛, 興正菩薩叡 の文殊信仰とその造像,       大和文化研究         7-5, p.4.

62)   때문에, 1970   까지는 그를 계율승으로 악한 계율     심의 연구가 부분이었다. 그러나, 1980  이후의 그에             연구는 교키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가능한 인물임을 알았다. 인하여, , 문수, 쇼토쿠태자, 교키신앙, 자선구제사업 등의 분야가 그것이며, 에서도 에이손의 문수신앙에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졌다. 에이손의 문수신앙에 해서는 宮崎円遵이 文殊信仰の一形態( 龍谷大学仏教史学論叢 ) 발표 , 堀池春峰가 南都の文殊信仰について

세기에는 律苑僧宝伝 , 東国高僧伝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리고, 에이손이 홍안9(1286)에 술한 金剛仏子叡 感身学正記 (이하, 학정기 )가 있다. 그런데, 원형석서 에는 에이손의 문수신앙에 한 기록이 없다. 때문에, 그의 문수신앙은 학정기 와 한야지(般若寺) 소장의 「반야사 문수보살상조립원문」64)(이하, 「반야사원문」)을 통해서 악할 수 있

.

부분의 학자들은 에이손의 문수신앙은 제자 닌쇼의 향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학정기 에 에이손이 39세인 역인3(1240)에 제자 닌쇼가 수계를 받고,65) 닌쇼는 망모를 천도하기 해 야마토(大和)의 나나슈쿠(七宿)에서 문수공양을 하고자 에이손에게 의논을 하 는데,66) 이 기록 이 에는 에이손의 문수신앙의 련성을 찾을 수 없 기 때문이다.

그 지만, 에이손이 닌쇼에 의해서 갑자기 문수신앙을 가지게 되었 다는 도 쉽게 수 할 수는 없다. 코바야시 고우는 이와 같은 의문 에 하여 오히려 당시 16세 던 닌쇼에게 에이손이 문수신앙을 가

( 大和文化研究 7-12)에서 남도불교의 문수신앙과 련하여 상세히 논하 있다.

한편, 한국에서 발표된 에이손 논문은 강형철이 번역한 松尾剛次, 에이존의 생애(일본불교사 공부방 1, 2005) 있지만, 논문에는 에이손의 문수신앙에 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63)      元亨釈書  13, 西大寺 ( 国史大系       14, p.862.)

64)      般若寺文殊菩薩像造立願文,西大勅謚興正菩薩行実年譜 ( 西大寺叡伝記集成 , pp.155-158.)

65)      오이시오 치이로는 닌쇼와의 만남 이후 에이손의 문수신앙의 변천을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1기는, 에이손이 닌쇼를 만난 39세부터, 나라(奈良) 한야지(般若寺) 재건을 시작한 55세까지이다. 이때는 이손이 비인들과의 통해서, 문수신앙의 내용을 정리해 나아가는 시기라고 한다. 2기는, 55세부터, 한야지에 안치할 문수상을 완성하고, 문수상의 공양발원문을 69세까지이다.(追塩千 , の諸信仰と慈善

   済事業,南都仏教 40, pp.97-99.)

66)      金剛仏子叡         感身学正記 , 応元年( 西大寺叡    伝記集成 , pp.14-15.)

리켰을 것이라고 하지만,67) 그는 이에 한 명확한 사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재까지는 이 논 을 증명할 명확한 문헌 기 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 칙호흥정보살실행연보 의 원3(1245)조에는 에이 손의 문수신앙의 한 면을 엿보게 하는 기록이 있다. 에이손은 문수보 살로부터불성계 정을 받은 것을 신쿠(信空)에게 하고 있다.68) 이것은 자선구제의 문수신앙과는 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오히려 묘에(明恵)의 문수신앙과 상통한다. 묘에는 매일 문수오자진 언을 1천편씩 독송하거나, 무아법인의 진리를 감득하기 한, , 교에서 문수보살에 한 이해를 심으로 하여 깨달음으로 향하는 수행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이 사료에서 하는 연 가 닌쇼와의 만남 이후이기는 하지만, 에이손의 기 문수신앙 을 이해할 수 있는 가치는 충분히 지니고 있다.69) , 에이손이 한야 지에 문수상을 조성한 후, 복장물로 반야경 600권을 비롯하여 심 경 1천권, 문수진언 1만편, 오자문수상, 팔자문수상과 함께 강계와 태장계의 양부만다라 등을 넣은 교 측면의 문수신앙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단할 수 있다.

에이손이 문수신앙과 련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학정기

등에서 문수와 련한 내용가운데 하나의 공통 이 발견되는데, 문수 공양을 비롯하여, 문수상의 안치, 한야지의 문수상을 안하기 하여 서신을 보낸 날자 등이 모두 25일이다. 한 「 존등발원문叡 等発願文」의 간기도 보치원년(1247) 5 25일이며, 「반야사문수보살상조립

67)   林剛, 興正菩薩叡 の文殊信仰とその造像,       大和文化研究         7-5, p.4.

68)   西大勅謚興正菩薩行実年譜 寛元三年( 西大寺叡 伝記集成 , p.125. “為末代密法修行伝戒持律資汝可授仏性戒灌頂印明汝伝持勿令失한편, 미야기 료이치로는 学正記 구제사업, 実年譜 정에

     기록이라고 한다.(宮城洋一, の文殊信仰について,仏学

36-1, p.219.)

69)   追塩千      ,    の諸信仰と慈善救済事業,    南都仏教     40, p.95.

원문」의 간기 역시 문 6(1267) 3 25일이다.

이와 같이, 문수 련행사나 기록날짜인 25일은 문수보살의 결연일

(結縁日), 오처경 에도 8회의 문수공양이 25일에 행하여졌는데, 이 한 에이손 문수신앙의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70)

2) 에이손의 문수신앙의 성격 - 비인구제 에이손의 문수신앙은비인 (非人觀)’에 의해 그들을 구제하는 것 이다.

비인   이란 헤이안시 남도불교에서 행한 문수회에서 구제의

상이었던 빈궁자와 고독한 자들을, 가마쿠라시 에는비인이라고 칭 하고 구제한 것을 말한다.71) 비인이라는 용어의 성립시기가 확실하 지 않지만, 가마쿠라시 라고 상정한 이유는 이 의 기록에서는 보이 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인 이야말로 일본의 오 산 문수신앙이 국이나 한국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가마쿠라시 에비인이라는 용어는 에이손 이 , 미나모토노 사네 토모(源実朝, 1192-1219)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B-1 (승원4) 본존인 오자문수상에게 공양하고자 수복사의 방장의 인도로 50번이나 행하 다. 이는 사네토모의 발원에 의한 것이다.72)

B-2 건력3 4 20일 신유일에 남도의 15개의 큰 에서 스 님을 공양하고, 비인에게 보시행을 행하 는데, 사네토모가의 매년 하는 행사이다.73)

70)       内田啓一, 西大寺叡     及び西大寺流の文殊信仰とその造像,美術史研究

26, p.44.

71)       追塩千     ,    の諸信仰と慈善救済事業,南都仏教    40, p.101.

72)       吾妻鏡 19, 承元4925( 新訂増補国史大系 吾妻鏡二 , p.653.)“御本 五字文殊像更被遂供養 寿福寺方丈 此儀五十度可被行之由

御願云云

73)       吾妻鏡     21,    3420( 新訂増補国史大系    吾妻鏡二 ,     p.679.),

B-3 승구3 정월27 임자 … ( ) … 오늘 아침에 법화당에서 (사네토모) 3년째 추선을 이품(후지와라노 요리츠네)사태가 . … ( ) … 걸인 1천명에게 보시를 행하 .74)

자료B는 오처경 의 기록이다. B-1 B-2는 가마쿠라시 최고의 문수신앙자 던 사네토모가 행한 문수신앙의 내용이다. 사네토모는 승원4(1210)에 문수보살상에 50번의 공양을 올리고, 건력3(1213) 에는 스님과 비인들에게도 보시행을 행하 다고 한다. B-2에 비인이라는 용어는 등장하고 있지만, 상에 한 구체 인 설명은 없다.

B-3은 사네토모와 련한 비인구제의 다른 로, 승구3(1221)에 후지와라노 요리츠네(藤原頼経, 1219-1256)가 사네토모의 3주기 기일 에 걸인 1천명에게 음식을 제공한 내용이다. 후지와라의 걸인공양은 사네토모의 문수신앙을 기리기 한 것이었다. 때문에, 공양 상자를걸인이라고 표 하 지만, B-2의 비인은 곧 걸인이었음을 알 수 있

.

한편, 에이손은 한야지에 백단으로 장육의 문수상을 조성하고, 6(1269)에 조성을 기념하는 무차 회를 열었다. 이때, 공양을 받은 사람의 수가 6천명을 넘었고, 그 에 비인은 3천여 명에 달하 다. 이 법회의 막 한 재원은 에이손이 기나이를 돌며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시주를 받았다. 75)

「반야사원문」에는 문수상을 조성한 연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暦三年四月廿目辛卯 於南京十五大寺供養衆僧 可有非人施行之由

(実朝)家年来御素願也

74)   吾妻鏡 권25, 承久3127( 新訂増補国史大系 吾妻鏡二 , p.765.), “承久三年正月廿七目壬子 …(中略)… 今朝於法華堂修故右大臣(実朝)第三年追善二品(藤原頼経)沙汰也 …(中略)… 次有施行乞食千人

75)   요시다 야스오는에이손의 문수신앙은 각 지방의 유지인 시주자와 승 려, 그리고 비인들의 세 집단을 결합시킨 것이 특징이다.”고 하 다.(

田靖雄, 「文殊信仰の歴史」,大法輪 536, pp.148-149.)

있다.

한 험한 도량이 있는데 한야지라고 칭한다. 남쪽에 시신의 분묘가 있어 때문에 망혼을 구하는 역할을 하고, 북쪽에는 나병환자들의 숙 소가 있어 숙세의 죄를 참회함을 얻는 방편이 된다. 이에 이 수승한 곳을 택하여 안 안치하는 것이다.76)

한야지는 남쪽에는 분묘가 북쪽에는 나병환자들의 숙소가 있는 곳 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행환경으로서는 합하 겠지만, 일반인들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소외된 곳이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있는 한야지에 장육의 문수상을 조성한 것은, 에이손의 비인들을 향한 비심의 마음이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에이손의 문수신앙은 단순히 신앙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문수상을 조성하는 발원을 드디어 마쳤다. 공양의식에 임하여 경 을 설하 는데, 문수경 이었다. 문수경 에 말하기를, 문수사리법왕 자는 빈궁, 고독, 고뇌의 생으로 변하여 행자 앞에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문수사리를 염하면, 진실로 자비심을 행하는 것이다. 자비심을 행하는 것이, 곧 문수사리를 친견하는 것이다. 자비심과 문수보살의 이름은 체가 다른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오    로지 자비심을 권하는 것은 고뇌의 모습에 보시행을 발하는 것을 근거로 한다. 때문에 내년 3월의 길일에 리 비인을 모아서 무차 회를 설하여 살아있는 문수를 공양하는 것처럼 한다.77)

76)      般若寺文殊像造立願文, 西大勅謚興正菩薩行実年譜 ( 西大寺叡 伝記集成 , p.157.), “爰有一霊場 称日般若寺 南有死屍之墳墓 為救亡魂之媒 北有疥癩之屋 得懺宿罪之便 択此勝地 所奉安置也

77)      感身学正記 권 , 「文応五年戊辰六十八歳」( 西大寺叡 伝記集成 , pp.33-34.), “文殊造立之大願已果遂畢 供養之儀 宣任経説 則文殊経 文殊経云 此文殊師利法王子 作貧窮孤独苦悩衆生 至行 前 若人念文殊師利 当行慈心行慈心 即是得見文殊師利云云 当知慈心与文殊名異躰 一為勧慈心 現苦

는 학정기 의 문 5(1268)조의 기록이다. 이 내용을 통해서 에이손의 문수신앙은 경 을 근거로 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 인용문의 문수경 은 문수사리반열반경 으로, 에이손은 문수 상조성 공양법회에서 아래의 경문을 설하 을 것이다.

이 문수사리법왕자는 어떤 사람이 생각하거나, 는 공양하여 복을 지으려고 하는 자가 있으며, 곧 스스로가 빈궁하고, 고독한 고뇌의 생이 되어 수행자의 앞에 화신하여 이르니, 어떤 사람이 문수사리 를 염한다면 자비한 마음을 행하여야 하며, 자비심을 행하는 자는 곧 문수사리를 친견할 것이다. 때문에 명한 자는 마땅히 문수사리 의 32상과 80종호를 자세히 할 것이니, 이는 수능엄 삼매의 힘 때문이다.78)

에이손은 한야지의 문수상 조성에 동참한 시주자들에게, 한야지 주 변의 나병환자들이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강조하 을 것이다. 이 경문이 곧, 에이손의 비인구제의 사상 근거인 것이다. 에이손은 문수사리반열반경 외에도 승본생심지 경 79)

강정경유가문수사리보살법일품역명오자주법 80) 등을 인용하 다.81) 에이손은 제자 닌쇼의 향으로 문수신앙을 신앙하게 되었지만, 경 을 근거로 사상 토 를 확립하 기 때문에 가마쿠라시 의 문수신 앙을 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경 을 근거로 한 에이손의 비인 은 「반야사원문」에 더 구체 으

悩相施行之起       職而由斯               当明年春三月縁日         普集非人        設無遮大会欲擬供養生身文殊云云

78)      文殊師利般涅槃 (大正藏14, 480,c), “此文殊師利法王子 若有人念 若欲供養修福業     即自化身 作貧窮孤独苦悩衆生 至行        若有人念文殊師利当行慈心 行慈心    即是得見文殊師利 是故智      当諦観 文殊師利三十二

  相八十種好 作是 首楞厳力故

79)      乗本生心地観経 (大正藏3)

80)      金剛頂経瑜伽文殊師利菩薩法一品亦名五字呪法 (大正藏20) 81) 沢隆子, 文殊菩薩像造立の一系譜上,東海女子大学紀要 19, p.252.

로 표 되어 있다.

어업과 수렵을 업으로 하여 산과 물의 생명을 죽여서 살아가는 자, 혹은 요염함으로 생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자는 벙어리나 귀머 거리의 과보나 혹은 나병에 걸리는 과보를 받는 것은 생에 승 을 비방한 죄업이다. 비록 니리(지옥)을 지나왔다고 하지만 아직 그 보가 다하지 않아서 걸인과 고독의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의복과 음식을 바랄 뿐, 다른 생각은 없으니, 언제 해 탈할 것인가.82)

문수사리반열반경 에서는 빈궁자와 고독자를 문수보살의 화신이 라고 하 는데, 에이손은 그 범 를 한야지 주변에 살고 있었던 사람 들로 확 하 다. 언어나 청각 장애인들과 나병환자, 고독한 자와 걸 인 들을비인이라고 하 다. 즉 인간의 을 받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쿠로다 토시오는 비인의 범 를기본 인 생산수단에서 소외된 각 계의 사람들이다. 세에는 걸식자, 은둔하는 히지리(), 유민(遊民),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자, 병자, 도살이나 시체를 처리하는 등의 천시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들을 모두 비인이라고 하 다.”83)고 상당 히 폭넓게 규정하지만, 에이손의 비인의 범 는 그 보다는 한정 이

.

에이손에게는 문수신앙 뿐만이 아니라, 계율부흥과 명진언회 등 도 요한 사상들이었다. 때문에 오로지 문수신앙에 의해서만 구제사 업이 행하여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수신앙이 구

82)   般若寺文殊菩薩像造立願文, 西大勅謚興正菩薩行実年譜 ( 西大寺叡伝記集成 , pp.156-157.), “ 鎮殺山水之生 衒艶色 常迷衆庶之心上乎 加之 或有受盲聾報之 或有嬰疥癩病之 謂彼前業 則誹謗大乗之罪雖歴泥梨 猶未尽見其現報 亦乞匈孤独之苦 但望衣食 無他念 脱何日

83)   黒田俊雄, 中世の身分制と        卑の観念,日本思想史の基礎知識

제사업에 있어서 요한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은, 구제사업의 심인 비인구제와 한 계가 있기 때문이다.84)

헤이안시 의 문수회와 사네토모가 생각한 비인은 단지 가난한 자 들이었다. 하지만, 에이손은 한야지 주변의 나병환자들을 보면서 그들 을 하여 수행자로서 역할을 고심하 을 것이며, 그 실천행이 비인 구제 던 것이다. 때문에 에이손의 비인구제는 새로운 문수신앙의 개인 것이다.

그 다면, 에이손은 무엇 때문에 걸인, 나병환자, 고독한 자, 이 외 의 힘든 사람들은 문수보살의 구제 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인가. 이 에 하여 오이시오 치이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부와 사냥꾼, 그리고 유녀 등은 일정한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들이 고민하는 것은 풍족 한 의식을 구족하는 것이 아니라, 계에 의한 죄의식에 있었다고 하는 이다. 때문에 에이손은 그들에게 수계를 받게 하고, 그래도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명진언을 염송하게 하여 구제의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맹아와 농아자에 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맹아는 능을 비롯하여 여타의 방법으로 생계를 해 나아갈 수 있 는 방법이 있었다고 생각하 다. 에이손은 자립할 수 있는 계층은 자선구제의 상에서 제외하고, 자립할 수 없고 실 으로 물질 인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는 의식과 약 등을 주어서 구제하 기 때문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야말로 비인의 핵심이라고 생각하 다고 본다.85) 2. 닌쇼의 문수신앙

닌쇼(忍性, 1217-1303)는 정  2(1233)에 토다이지에서 수계하고,

84)      宮城洋一,   の文殊信仰について,仏学 36-1, p.217.

85)      追塩千     ,    の諸信仰と慈善救済事業,    南都仏教    40, pp.100-102.

역인3(1240)에 에이손을 스승으로 득도한다. 性公大德譜 86)에 의 하면, 11살에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를 독송하고, 14세에는 문수상을 그리고, 20세에는 문수오자명을 50만편 염송하 다고 하므로, 문수신 앙자 음을 알 수 있다.

닌쇼가 에이손을 만나기 , 문력2(1235)에 이코마(生駒)의 치쿠 린지(竹林寺)에서 교키의 사리가 발견되었는데,87) 닌쇼는 이 해부터 3년간, 매일 교키의 묘를 참배한다. 닌쇼는 칸토(関東)로 옮기고 나서 도 온갖 물건과 불상 등을 치쿠린지로 보내서 경제 후원을 하 으 며, 입 후에는 유골을 치쿠린지에 안하 다.88) , 그가 일생동 안 수리한 가람은 83곳이며, 불탑은 20, 그리고 각 지방의 하천에 다리를 놓은 곳이 189곳이나 되었다.89) 닌쇼의 이와 같은 행 은 교 키의 행 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그의 쿄키에 한 존경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에이손은 만년에 우지(宇治)의 교량수리를 하 는데, 그의 일 생을 통하여 교키의 업 을 답습한 것은 단지 이 한번뿐이었다. 때문 에, 에이손의 문수신앙이 닌쇼의 향이라고 한다면, 에이손은 사원의 수리나 교량축조 등과 같은 일에 좀 더 극 이었어야 할 것이다. 그 기는 하지만, 에이손이 45세에 교키의 유 인 에바라지(家原寺)90)에서 계를 설하고, 문수당에서 서원한 것은 교키를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는 통념에 따른 것으로, 교키를 일본의 문수행의 실천 자로서는 상기하 을 것이다.91)

86)      辻善之助, 慈善救済史料

87)      生駒山竹林寺縁起( 大日本仏教全書   85, p.263.)

88)      竹林寺略 ( 大日本仏教全書    85, p.266,)

89)      元亨釈書  13, 極樂寺 忍性(国史大系       14, p.862.)

90)      교키의 출생지인 大阪府 堺市 西区에 있는 고야산 진언종 사찰이다. 존은 문수보살이다.

91)      奈良弘元, 我が国における菩薩号の下賜について,日本仏教学会年報

51, p.469.

닌쇼의 문수신앙은 모친과 련한 내용들이 다소 한다.

원형석서 에는 원연간(1243-1246)에 모친을 해서 왕성 근처의 나병환자 1만여명을 모아서 음식과 숙소를 베풀었으며,9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문수상을 조성한다.

불멸후, 일체 생이 문수사리의 명호를 듣거나, 형상을 친견하면, 백 천겁동안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에 문수사리의 명호를 수지 독송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있더라도 아비지옥의 맹렬한 불길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청정한 불국토에 태어나서 붓다를 친견하고 무 생법인을 얻는다.93)

닌쇼가 망모의 천도를 해서 문수상을 조성하는 것은 불설문수 사리반열반경 94)의 경문을 근거로 하 을 것이다. 이는 경 을 근거 로 문수신앙을 개한 에이손의 향으로 보인다.95)

이와 같이, 닌쇼는 교키와 에이손의 문수신앙의 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닌쇼가 일생동안 사원수리나 교량축조 등의 일을 한 것 은 교키의 향이며, 모친을 하여 나병환자에게 공양을 베풀거나,

92)      元亨釈書  13, 極樂寺 忍性( 国史大系      14, p.862.)

닌쇼가 사이다이지(西大寺) 있을 때는, 나병환자를 해서 매일 그를 업고 가서 거리에 두었다가, 녁에는 다시 업고 집으로 데려갔 다고 한다.

93)      佛說文殊師利般涅槃經 (大正藏14, 481,a), “佛滅度後一切衆生 其有得聞文殊師利名 見形像 百千劫中不墮惡道 若有受持讀誦文殊師利名 設有重障 不墮阿鼻極惡猛火 常生他方清淨國土 值佛聞法得無生忍

94)      일본유입은 나라시 찬술된 光明皇后御願一切 서사 되어있으며, 겐보(玄昉) 국에서 가지고 開元釈経目録 기록되 었다. (堀池春峰, 南都仏教と文殊信仰, 大和文化研究 14-2, p.20)

95)      후지자와 타카코는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인 강조해서, 반야보살 동격으로 보았으며, 반야보살은 불모(仏母)라고 . 때문에 수보살=반야보살=불모라고 하는 계성으로 인하여 망모의 천도를 수신앙에 의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沢隆子, 文殊菩薩像造立の一

  系譜上」,東海女子大学紀要 19, pp.245-246.)

문수상을 조성한 것은 에이손의 향인 것이다.

3. 에이손의 비인구제의 의의 - 왜 문수신앙인가?

에이손의 비인구제는 자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다면, 그는 문수신앙이 아닌 자비의 상징인 음신앙에서 개되었어야 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손이 문수신앙을 통하여 비인구제를 실천한 것 은 어떠한 이유인가. 그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자비심을 발하는 입장의 측면이다. 앞에서도 설명하 듯이, 에이손의 문수신앙의 거인 문수사리반열반경 에 의하면, 자비심을 발하는 것은 문수보살이 아닌 수행자인 것이다. , 수행자가 자비심 을 내면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자비심은 문수보살이 아 닌 생이 내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구제       상의 측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음보살과

문수보살이 구제하고자 하는 생의 구제 상이 같지 않은 것이다. 음보살의 구제 상은일체 생이지만, 문수사리반열반경 에서 의 문수보살은빈궁하고 고독한 사람들이라고 구제 상을 한정하고 있다. 이는 문수보살이 빈민이나 천민의 모습으로 화 하는 오 산 문수신앙의 향으로, 비인이야말로 문수보살의 화 이라고 여긴 것 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자장을 만나러 온 문수보살은 걸인의 모습으 로 화 하 다.

, 구제의 상인 비인들이 오히려 생의 구제하는 문수보살이라 고 하는 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수화 이라고 하는 사상인 것이다. 물론 문수화 이 에이손에 의하여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사상의 원류는 국이며, 특히 오 산 문수신앙에서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96)

96) 문수보살의 화                                        은 崔福姫, 「五台山文殊信仰における化現」,佛教大學大

. 나가기

이상으로, 일본의 오 산 문수신앙의 역사 개와 특징에 하여 살펴보았다.

일본의 오    산 문수신앙은 7세기에 교키로부터 시작되어, 13세기의

에이손에 이르는 약 5세기 동안, 다양한 개양상을 보인다.

7세의 민 들은 교키의 활발한 빈민구제 활동을 문수보살의 행으 로 보고, 그를 문수의 화신이라고 칭하 다. 이와 같은 교키의 민 인 문수신앙은 이후의 일본의 오 산 문수신앙을 악하고 특징짓는 매우 요한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교키의 문수신앙이 경 을 근거 로 행하여졌다는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교키 이후, 헤이안시 에는 오 산 문수신앙이 히에이잔과 남도불 교의 두 계통으로 개된다. 천태종의 사이쵸는 식당에 문수상을 안 치하여 불공의 문수신앙을 계승하여, 승계단의 설립을 주장하며 학 문 문수신앙을 개한다. 이에 반하여, 남도불교는 곤죠가 설치한 문수회가 교키의 민 인 문수신앙의 통을 계승한다. 가마쿠라시 가 되면, 에이손과 닌쇼에 의하여 비인구제의 문수신 앙이 성행한다. 이는 헤이안시 의 문수회와 유사하지만, 구제 상에 한 인식이 같지 않았다. 문수회에서는 단순히빈궁자’ ‘고독자라고 칭하던 상들을, ‘비인이라고 하며 장애자와 나병환자 등을 포함하 다.

에이손의 비인구제의 의의는 남도불교의 문수회의 사상을 계승하 면서도, 에이손이 독자 인 해석을 하여 가마쿠라시 의 승려들이 포 교의 상으로 삼지 않았던 천민인 비인들에 한 구제에 큰 힘을 쏟은 것은 커다란 의의가 있다.

學院紀要 33, 2005 참조.

마지막으로 일본의 오 산 문수신앙은 학문 , 그리고 민 인 두 가지 계통으로 승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민 문수신앙은 교키의 빈민구제에서 남도불교의 문수회, 그리고 에이손의 비인구제 까지 몇 세기 동안 면면히 승되어, 국 오 산 문수신앙의 구제의 성격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참고문헌

1.

大乗本生心地観経 , 大正藏3 大宝積経 권60, 大正藏11

佛說文殊師利般涅槃經 , 大正藏14 文殊師利普超三昧経 권상, 大正藏15

金剛頂経瑜伽文殊師利菩薩法一品亦名五字呪法 , 大正藏20 金剛頂経曼殊室利菩薩五字陀羅尼品 , 大正藏20 金剛頂経瑜伽文殊師利菩薩法 , 大正藏20 大宋僧史略 권3, 大正藏54 成唯識論僉記 30, 大正藏55 仁王経略賛 3, 大正藏55

靈巖寺和尚請來法門道具等目錄 , 大正藏55 入唐新求聖教目錄 , 大正藏55

2.

七大寺巡礼私記 , 藤田経世編, 校刊美術史料․寺院篇 上霊仙三蔵行歴 , 大日本仏教全書 71 入唐求法巡礼行記 권3, 大日本仏教全書 72

日本霊異記 권상, 日本古典文学大系

顕戒論    , 伝教大師全集 1

山門堂舎記 483, 群書類従 15

元亨釈書 권2, 「石淵寺 釈勤操」, 国史大系 14 元亨釈書 권13, 「西大寺 叡 」,国史大系 14 元亨釈書 권13, 「極樂寺 忍性」 国史大系 14 本朝高僧伝 권5,  大日本仏教全書 102

類聚三代格 2, 新訂増補国史大系 類聚三代格      前編

「般若寺文殊菩薩像造立願文」,西大勅謚興正菩薩行実年譜 , 西大寺叡伝記集成金剛仏子叡 感身学正記 , 西大寺叡 伝記集成西大勅謚興正菩薩行実年譜 , 西大寺叡 伝記集成吾妻鏡 권19, 新訂増補国史大系

「生駒山竹林寺縁起」,大日本仏教全書 85 竹林寺略録 , 大日本仏教全書         85

3. 단행본

松本文三, 日本国訳経沙門霊仙,仏教の芸術とその人物 , 同文館, 1923.

辻善之助, 慈善救済史料 , 金港堂書籍, 1932.

角田文衛, 国分寺の研究 , 古學研究 , 1938.

宮崎円遵, 龍谷大学仏教史学論叢 , 竜谷大学史学会, 1939.

堀一, 日本上代文化と仏教 , 法藏文庫, 1940.

宮崎円遵, 中世仏教と庶民生活 , 平樂寺書店, 1951.

森克己, 遣唐使 , 至文堂, 1955.

辻善之助, 日本仏教史 1, 岩波書店, 1961.

野勝年, 入唐求法巡礼行記の研究 , 鈴木学術財団, 1964-1969.

井上光貞, 律令国家と貴族社会 , 吉川弘文館, 1969.

黒田俊雄, 日本思想史の基礎知識 , 有斐閣, 1974.

野玄妙, 平安朝の文化と入唐僧霊仙三蔵,仏教の美術と歴史 2, 開明書院, 1977.

笠原一男博士還暦記念, 日本宗教史論集 , 吉川弘文館, 1977.

木村博士教授古稀記念集,     伝の研究 , 永田文昌堂, 1981. 武覚超,        聖地五台山 , 同朋, 1986

鎌田茂雄博士古稀記念, 厳学論集 , 蔵出版, 1997.

4. 논문 妻木直良, 唐代の訳場に参したる唯一の日本僧,東洋学報 3-3, 1913.

石崎達二, 奈良朝における五台山信仰を論じ東大寺大仏造顕思想の一端に及ぶ, 学雑誌 41, 1930.

浅井成海, 覚大師の浄土教, 龍谷大学論集         455, 1937.

川貫, 入唐僧霊仙三蔵と五台山, 支那仏教史学   5-3·4, 1942.

林剛, 興正菩薩叡    の文殊信仰とその造像,       大和文化研究    7-5, 1962. 堀池春峰, 南都の文殊信仰について, 大和文化研究     7-12, 1962.

田村隆照, 観房弘真と文殊信仰,   教文化       76, 1966.

堀池春峰, 南都仏教と文殊信仰,      大和文化研究 14-2, 1969.

名畑崇, 日本仏教における社会的実践の系譜,大谷大学研究年報                                                                         23,

1970.

追塩千 , における密教の意義, 日本歴史 343, 1976. 山田和夫, 文殊会の成立とその実施, 立正史 41, 1977.

吉田靖雄, 文殊信仰の展開-文殊会の成立まで, 南都仏教                                                     38, 1977.

吉田靖雄, 霊異記 の行基文殊化身説をめぐって, 日本仏教                                                       46, 1978.

追塩千 , の諸信仰と慈善救済事業, 南都仏教 40, 1978.

追塩千 , 忍性の宗教活動について, 仏教史学研究   22-2, 1980.

奈良弘元, 我が国における菩薩号の下賜について, 日本仏教学会年報                                                      51,

1986.

吉田靖雄, 文殊信仰の歴史,大法輪 536, 1986.

上田純一, 平安期諸国文殊会の成立と展開について,日本歴史                                                                 475, 1987.

宮城洋一, の文殊信仰について,仏学 36-1, 1987.

内田啓一, 西大寺叡 及び西大寺流の文殊信仰とその造像,美術史研究                                      26,

1988.

米山孝子, 「行基説話伝承 」, 密教文化 168, 1990.

松本昭彦, 五台山獅子の跡の土,     国語国文       68-10, 1999.

沢隆子, 文殊菩薩像造立の一系譜上, 東海女子大学紀要                                                19, 1999.

松尾剛次, 「에이존의 생애」, 일본불교사 공부방      1, 2005.

崔福姫, 「五台山文殊信仰における化現」, 佛教大學大學院紀要 33, 2005. 최복희(오인), 「교키와 일본의 오 산문수신앙」, 일본불교사연구 5, 2011.

 

Abstract

Historical Development and Characteristics of Japan Mt. Wu Tai

Manjusri Belief

Choi, Bok-hee(Ven. O-in)

(Professor, Joong-Ang Sangha Univ.)

Mt. WuTai Manjusri Belief in Japan started from Kyoki(行基), who was called the incarnation(化身) of Manjusri Bodhisattva in the 7th century. This is due to Kyoki's popular and diverse social projects, and it is an important character of Japan Mt. WuTai

Manjusri Belief.

After Kyoki, in the Heian era, two lines of Mt. WuTai Manjusri

Belief including Mount Hiei(比叡山) and southern Buddhism, were unfolded. Among them, the Manjusri society established by Gonjyo(勤操) of southern Buddhism inherited the tradition of Kyoki's popular Manjusri Belief.

In the era of Kamakura, the Manjusri Belief of nonhuman salvation became popular by Eizon( ) and Ninsho(忍性). The significance of Eizon's the Relief Work for Hinin(非人救濟), while inheriting the ideas of the Manjusri society of southern Buddahism, was that Eizon did his own interpretation and devoted much of his relief to the nonhumans whom the monks in the Kamakura era regarded as no subjects of their mission, which has a big significance. In other words, Manjusri society simply referred to the remedies called ‘paupers’ or ‘solitary men’ as ‘nonhuman’ including persons with disabilities and lepers.

The characteristic of Japan Mt. WuTai Manjusri Belief is that the traditional academic Manjusri Belief of hieizon is succeeded, but on the other hand it is understood that the Manjusri Belief of the people originated from Kyoki is running parallel to the Kamakura era.

Key words

Mt. WuTai Manjusri Belief, Kyoki, Saicho, Eizon, Manjusri society, the Relief Work for Hinin.

논문투고일 : ’17. 8. 7.

심사완료일 : ’17. 11. 13.

게재확정일 : ’17. 11. 13.

 



[1] )         문수루원의    안치불의    내용은      山門堂舎記     483( 群書類従       15,

p.491)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 ) 入唐新求聖教目錄 (大正藏55, 1085,b), “五臺山土石二十丸(立石各十丸) 右件教迹等 於大唐代州五臺山大華嚴寺經夏寫得 謹具錄如前 然立石等是大聖文殊師利菩薩住處之物 圓仁等因巡禮五頂取得” 44) 前唐院은 엔진(円珍)이 인화4(888)에 엔닌을 하여 창건하 다.

[3] ) 松本昭彦, 「五台山獅子の跡の土」,     国語国文     68-10, p.16.

[4] ) 上坂泰山, 「五台山随想記」,     聖地五台山 , p.105.

[5] ) 곤죠는 다이안지(大安寺)가 본사이지만, 후에이와부      데라 곤죠(石淵寺




=====

〈오대산 노송〉 < 출판 < 금강신문 2020

〈오대산 노송〉 < 출판 < 뉴스 < 기사본문 - 금강신문

〈오대산 노송〉
기자명 이강식 기자
입력 2020.03.26


월정사 현해 스님 삶·수행 회고록
현해 스님/민족사/19,500원


1958년 평창 월정사에서 희찬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60년이 넘게 전법교화와 수행에 매진한 구순을 바라보는 노승이 있다.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사장과 조계종 종회의원을 역임했고, 2007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된 현해 스님이다.

현해 스님이 자신의 삶과 수행의 발자취를 기록한 회고록 〈오대산 노송〉을 펴냈다. 책 제목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자신이 마치 구부러진 오대산의 병든 노송(老松)과 같다.’는 스님의 말에서 따왔다.

이 책은 △기독교 집안에서 피어난 법연(法緣)의 꽃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하다 △만행과 운수 행각의 길 △동국대 종비생 1기, 희망의 꽃을 품다 △나의 스승 나의 은사 △만학도, 현해탄을 건너다 △회향, 수행자로 사는 법 △낙엽귀근(落葉歸根), 돌아갈 자리를 생각하며 등 8장으로 이뤄져 있다.


‘기독교 집안에서 피어난 법연(法緣)의 꽃’은 스님의 출가 전 이야기로 △해방 이전 어려운 생활상과 가족 △학교 진학의 어려움과 공부에 대한 열망 △기독교에 대한 회의를 품고 방황하는 청년기의 삶 등이 담겨 있다.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하다’에는 희찬 스님을 만나 출가자의 삶을 살게 된 이야기, ‘만행과 운수 행각의 길’에는 절도와 강도 사건 경험담과 인근 초등학교 교장과 빚은 마찰 등이 수록됐다.

‘동국대 종비생 1기, 희망의 꽃을 품다’에는 출가 후 제1기 종비생(宗費生)으로 동국대에 입학한 뒤 학업에 정진하는 모습, ‘나의 스승 나의 은사’에는 은사 희찬 스님을 비롯해 현해 스님 자신의 삶과 수행의 길잡이가 되었던 범룡·석주·청담·벽안 스님 등에 관한 이야기가 담겼다.

‘만학도, 현해탄을 건너다’에는 일본 유학 생활 당시의 상황과 고민,
‘회향, 수행자로 사는 법’에는 10·27법난의 아픔 등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 수행자로서의 삶에 대한 깨달음과 가르침 등을 수록했다. 끝으로 ‘낙엽귀근(落葉歸根), 돌아갈 자리를 생각하며’에서는 불교계의 원로로서 한국불교의 나아갈 바를 조언하고 있다.

한국불교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5-문수 신앙 < 연재 - 불교신문 2004

한국불교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5-문수 신앙 < 연재 < 기획연재 < 기사본문 - 불교신문

한국불교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5-문수 신앙   
연재
입력 2004.02.13 


화엄경 근거… ‘오대산에 진신상주’ 믿어
사진설명: 문수보살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오대산 상원사. 문수신앙의 성지답게 수많은 설화가 전해온다.
==
중국 당나라 시대 화엄종의 선사인 무착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위해 문수보살의 영지(靈地)인 중국 오대산 금강굴에서 용맹정진 했다. 하루는 양식이 떨어져 마을로 가서 탁발을 하고 오다가 한 노인을 만나 법거량을 했는데 노인의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라는 공안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노인은 간곳없고 허공에서 게송 한 구절이 들려왔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口裏無瞋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心裏無瞋是珍寶)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無染無垢是眞常)

무착선사는 문수보살을 직접 뵙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앙산(仰山) 선사의 법을 받아 깨치고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무착스님이 동지팥죽을 쑤는데 김이 나는 죽 속에서 문수보살의 모습이 거룩하고 장엄하게 나타났다. 그러자 무착스님은 팥죽 젓던 주걱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문수보살은 “내가 바로 자네가 그리도 만나고자 했던 문수라네 문수” 라고 말했다. 무착스님은 “문수는 문수고 무착은 무착이다.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겠다” 하니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 유명한 문수동자게와 팥죽 주걱 맞은 문수보살에 얽힌 이야기다.


문수는 지혜상징… ‘부처님의 어머니’

조선 세조 때 문수동자 치료 설화 ‘유명’



문수보살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처럼 스님들의 수행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무착선사 앞에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듯 문수보살은 자장율사 앞에 남루한 차림의 거사로 화현했는데 자장은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문수보살에 얽힌 사연들은 관음이나 미타 지장 등 다른 대승의 보살들과는 내용이 약간 다르다. 이들이 주로 일반 서민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반면 
문수보살은 스님들의 수행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문수신앙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지혜란 세속에서는 명석한 두뇌를 가리키지만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루는 혜안을 말한다. 

지혜와 행원은 불교의 두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측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 우측에는 행원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모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깨달음의 핵심적 내용인 지혜를 상징하다 보니 문수보살은 주로 수행자들의 공부를 경책하는 역할을 많이 맡는다.


자장율사가 우리나라 처음 소개

사진설명: 상원사 문수동자상.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인 문수는 산스크리트어로 만주슈리(Ma─ jushri)이다.
==
‘만주’는 달다(甘),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福德)이 많다는 뜻이다. 묘길상(妙吉祥)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 역시 지혜가 뛰어난 공덕을 지닌 보살이라는 의미다.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으며, 경권(經卷)을 들고있다.


문수보살이 타고 있는 사자는 짐승중에 가장 지혜롭다고 한다. 산 전체가 문수도량인 강원도 평창 오대산 중대를 사자암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혜의 말씀’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음(法音)이나 선종 조사들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한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앉는 좌석을 사자좌(獅子座)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토속적인 산악 신앙과 결합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를 포함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諸佛之母=毘盧遮那)며 모든 보살의 스승으로 불린다. 이는 지혜(반야바라밀)가 부처님을 이루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선종에서 제7불(佛) 즉 석가모니의 조사라고 하는데 이는 조사선의 법통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현세에는 석가불의 좌보처로 석가모니부처님을 도와 중생을 제도하고 미래에는 보현여래(普現如來)가 되어 문수정토인 보현불국정토를 주재하는 분으로 신앙되고 있다. 

문수신앙을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화엄경〉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동북방의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 이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는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서 기도를 드렸던 중국 산시성(山西省) 청량산(淸凉山, 일명 五臺山)으로 알려져 있다.

오대산은 보현보살이 상주한다는 아미산(峨眉山),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보타낙가산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영산으로 꼽힌다.

사진설명: 문수동자상을 모신 상원사 청량선원.신라 오대신앙은 중국에서 연유했다.

이 땅에 문수신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신라의 자장율사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화현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정골사리, 가사, 발우 등을 얻으면서부터 강원도 오대산은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으로 믿게 됐다.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머문다는 믿음은 7, 8세기에 이르면 오류성중(五類聖衆)이라 하여 오만보살신앙으로 발전된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 효명 두 태자는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오만보살에게 일일이 참배하였다고 한다.

동대 만월산(滿月山) 관음암에는 일만의 관음보살, 남대 기린산(麒麟山) 지장암에는 일만의 지장보살, 서대 장령산(長嶺山) 미타암에는 일만의 대세지보살, 북대 상왕산(相王山) 나한당에는 오백 나한, 중대 지로산(地爐山) 진여원에는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한다는 것이다.

문수신앙이 오대산 자체가 문수정토라는 오대산 신앙으로 발전한 것은 화엄이 밀교와 융합한 것으로 보인다.

문명대 교수는 “오대산 문수신앙은 구산선문 중 하나인 명주 굴산파의 창건주 범일 국사의 제자 낭공대사가 오대산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성행했다. 그는 당나라 유학때 오대산 대화엄사에서 징관의 새로운 화엄 밀교적 문수신앙 즉 문수정토신앙을 배웠고 이를 우리의 오대산에서 실천했다. 그 결과가 월정사를 중창하고 중대 등 오대신앙을 크게 진작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오대산 문수신앙은 조선 세조 때 다시 크게 일어난다. 문수의 감응을 받아 병이 완쾌된 세조는 중대 상원사를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현재 국보로 지정된 문수동자상을 조성하는 등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이외 문수동자의 경책을 들은 환우화상 이야기, 땡추로 변화한 문수보살, 하동 칠불암의 문수동자 설화 등 많은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어 한국에서 문수신앙이 풍미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말 오대산 문수신앙 본격화

사진설명: 북한산 문수사의 동굴법당.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문수신앙은 거의 흔적이 없다.
==
그 이유는 문수신앙이 타력보다 자력신앙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병조 교수는 “문수신앙은 기복적 측면보다 이지적 현학적인 면이 강하다.
관음이나 미타 신앙에 비해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엔 약하다. 지금 보이는 문수신앙도 대부분 영험과 구복적이다”고 말했다. 법인스님(대흥사 수련원장)도 “문수보살의 가피력에는 관세음보살이나 미타불처럼 사지에서 구해주는 내용이 없다.

중생들의 보편적 염원이 없는 것이다. 반면 수행자의 지혜를 강조한다. 문수보살과 관련된 설화의 대부분이 스님의 수행과 관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수신앙은 기복성이 강한 한국불교계가 앞으로 권장해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정병조 교수는 “문수신앙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 강조했던, 허망한 현실에 대한 깨우침, 이율배반적 현실에 대한 이해가 현재 한국불교계가 새롭게 조명해야할 신앙적 내용”이라고 말했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문수도량으로는 오대산 외에 삼각산 문수암, 김포 문수암, 옥천 문수사, 서산 문수사, 고성 문수암, 울산 문수암, 김제 문수사, 익산 문수사, 고창 문수사, 춘천 청평사 등이 있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에 부처님의 좌측에 봉안하고 대적광전에서도 비로자나불 좌측에 앉는다. 특별히 문수신앙이 강한 사찰에는 문수보살상만을 모신 문수전을 따로 두기도 한다.



/ 문수는 왜 동자상인가

화엄경소에 나오는 동자형서 근거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보듯 문수보살은 보통 동자형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문명대 교수는 이에 대해 710년 중국어로 번역된 불설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佛說文殊師利法寶藏陀羅尼經)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이 경에는 동북방 대진나(大振那=神州)에 있는 오정산(五頂山)에 문수사리동자(文殊師利童子)가 유행하여 거주하면서 설법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경을 기초로 한 징관의 화엄경소에서는 문수는 머리에 5불관(五佛之冠)을 썼는데 정수리에는 5방으로 상투를 나누었다고 한 말에서 상투 동자형이 나왔다고 한다.



/ 문수보살의 십대원

중생제도 위해 세운 10가지 원력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신앙의 대상으로 숭상받는 것은 다른 불보살처럼 중생을 제도하기위한 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를 문수보살십대원(十大願)이라고 한다.


①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게 하고 갖가지 방편으로 불도에 들게 한다.

② 문수를 비방하고 미워하고 죽음을 주는 중생이라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③ 문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깨끗한 행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④ 문수를 속이거나 업신여기거나 삼보(三寶)를 비방하며 교만한 자들이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⑤ 문수를 천대하고 방해하며 구하지 않는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⑥ 살생을 업으로 하는 자나 재물에 욕심이 많은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⑦ 모든 복덕을 부처님의 보리도에 회향하고 중생이 모두 복을 받게 하며, 모든 수행자에게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⑧ 육도(六途)의 중생과 함께 나서 중생을 교화하며 그들이 보리심을 내게 한다.

⑨ 삼보를 비방하고 악업을 일삼는 중생들이 모두 보리심을 내어 위없는 도를 구하게 한다.

⑩ 자비희사(慈悲喜捨)와 허공같이 넓은 마음으로 중생을 끊임없이 제도하여 보리를 깨닫고 정각을 이루게 한다.



바로잡습니다
2005호 나한신앙 편에서 불영사 나한전을 북한 성불사 응진전으로 바로잡습니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006호/ 2월17일자]

천상천하유아독존 - Google 검색

천상천하유아독존 - Google 검색



사전: Oxford Languages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
/-쫀/


불교우주 간에 나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는 말.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7보를 걷더니, 한 손을 하늘로 쳐들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외친 말이었다고 함. [준]유아 독존.
===

유아독존

최근 수정 시각: 
오직 유
나 아
홀로 독
높을 존

1부처의 절대적인 위치를 상징하는 말
1.1. 탄생게의 해석
2. 자기만 최고인 양 자부하는 독선적 태도를 비유하는 말3우에키의 법칙에 등장하는 4성 신기4. 만화 제목
4.1. 줄거리4.2. 평가4.3. 등장인물
5유아독존(TV 프로그램)6. 한국 영화

1. 부처의 절대적인 위치를 상징하는 말[편집]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가 마야부인 옆구리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뒤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외쳤다는 말.

더 자세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도 알려져있지만 이 또한 뒤 문장이 잘린 말이다. 전부 이어붙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고
삼계가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
원래는 이런 문장이다.

이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은 '디가 니카야(Dīgha Nikāya)와 맛지마 니카야(Majjhima Nikāya)[1]'인데 이를 한역해서 일부가 장아함의 대본경으로 한역 되었고 대본경의 번역은 현재의 한문 구절의 모태가 된다. 이를 팔리어 원어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ggo hamasmi lokassa,
Setto hamasmi lokassa,
Jetto hamasmi lokassa,
Ayamanthima jathi[2]
Natthidani punabbhavo’thi"

"세상의 우두머리는 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는 나.
세상의 가장 앞선 존재는 나.
이것은 나의 마지막 생이다.
더 이상의 환생은 없다."

위에서 말한 대본경, 즉 장아함경에는 “천상천하 유아위존 요도중생 생로병사(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대정장 T1, 4중)라고 나와있다. 이는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요컨대 나는 중생들을 생로병사에서 건질 것이다.’라는 뜻이다.[3]

이 탄생게는 부파별 이념 차이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상좌부 불교에서는 당시 아라한의 자격과 동시에, 이전 생에서의 끝없는 보살행을 통한,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덕까지 충족한 자는 자신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선언이며, '더 이상의 환생이 없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아라한의 권위를 부처와 동일선상에 놓지 않는 대승 불교에서는 '중생을 육도윤회에서 건지는 자로서의 부처의 정체성 선언'으로 탄생게를 해석한다. 이어질 세부 설명은 대승 불교의 관점에 입각한 서술이다.

석가모니의 전생을 서술한 불경에서 석가모니는 자신의 전대의 부처에게 네가 다음의 부처가 되어 천하를 평안케 하리라는 수계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이 말은 석가모니가 천하에 던지는 일종의 선언으로도 볼 수 있지만, 불교의 기본 이념의 선언으로 폭넓게 해석한다.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직역할 경우에는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인데, 이는 진여, 불성 차원의 선언이다. 석가모니라는 개체적 인간으로서 홀로 존귀하다는 말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라는 종족을 대표하여 존귀하다고 일컫는 것도 아니다. 현상세계 모든 것은 이미 불성의 현현으로서 이미 부처임을 전제로 하고 개체적 인간인 석가모니가 이러한 가르침을 대중에게 설파하여 고통 속에서 해방되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다. 의역하자면 "남들은 고통에 허덕이는 와중에 자신만 편한(존귀한) 상태이므로 남들 또한 자신처럼 편해질 수 있도록 하겠다." 고 해석할 수 있을 듯.

그러나 평안케 한다는 것은 현상세계에서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 도달하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부처임을 모르는 무명을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러한 무명을 벗어나게 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바로 연기법이라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통해서 펼쳐진다.

곧, 이미 모두가 부처의 자격과 성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석가모니가 스승으로서 제시한 수행들을 통해 다들 스스로 부처임을 깨닫고 불성을 얻게 되어 모두가 '나 홀로 존귀해진다', 곧 '깨달음을 얻은 자'가 된다는 뜻이다.

1.1. 탄생게의 해석[편집]

혹자는 ‘어떻게 아기가 옆구리로 나오느냐, 어떻게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말도 하느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는 신화성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곰이 삼칠일간 쑥과 마늘만 먹어서 사람이 됐다는 등의 신화들은 말 그대로 상징적인 것이며, 그것을 직역하여 받아들이면 안 된다.

우선 석가모니가 탄생 때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인도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브라만교의 최고신 '브라만(Bráhman)'이 인간을 창조할 때 승려인 브라만 계급은 자신의 머리로 낳고,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은 자신의 옆구리로 낳고, 평민인 바이샤 계급은 자신의 배, 그리고 천민인 수드라 계급은 발로 낳았다고 한다. 베다 경전에서는 브라만을 입으로, 크샤트리아를 손 또는 팔로, 바이샤는 무릎 또는 허벅지로 낳았다고 한다.

즉 카필라 왕국의 왕자인 석가모니가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뜻은 그가 크샤트리아, 왕족으로 태어났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견해가 있는가 하면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이 중도(中道)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https://news.joins.com/article/21473552

그리고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은 것은 우주 만물의 윤회의 여섯 길인 '육도(六道)'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을 상징한다. 육도윤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도달하는 것이 열반이다. 즉 석가모니가 부처임을 상징하는 바이다.

오대산에서 기철학을 < 명경대 < 오피니언 강원도민일보 2010

오대산에서 기철학을 < 명경대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강원도민일보



오대산에서 기철학을
기자명 이광식
입력 2010.04.12






기생 황진이는 자신을 높이는 일을 좋아했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 그러하다. 30 년 면벽 수도한 지족선사를 파계시켜 놓고 황진이는 “나와 박연폭포와 서화담이 송도의 삼절이다”고 기염을 토한다. 이 말은 곧 화담 서경덕이 당대에 상당한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음을 드러낸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계곡에 물이 빠진 뒤에 찾아가 보았더니 솥에는 이끼가 가득했으나 서화담은 태연히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한다.

화담 서경덕은 ‘기철학(氣哲學)’과 관련된 세 편의 글을 쓴다. 화담의 기철학은 스승도 없이 예의 지독한 가난과 절대 고독 속에서 터득한 것이기에 매우 독창적이다. 그 때까지 성리학은 ‘기(氣)’ 곧 ‘감각적 경험 세계’와 ‘이(理)’ 즉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설명해 왔다. 주자도 그랬고, 화담 이후 이퇴계나 이율곡도 그랬듯이 성리학의 주류는 ‘이’를 중심에 놓고 사유한다.

하지만 화담은 ‘기’를 중심에 놓는다. 세상 모든 것이 ‘기’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만물이 이루어지기 전의 혼돈의 맑고 형체가 없는 태허(太虛)를 일컬어 만물이 이룩되기 전의 선천(先天)이라 한다. 선천의 이 맑고 비고 고요한 것이 기의 근원이다. 선천이 열리는 것이 이가 발휘된 때다.” 화담은 이렇게 기의 근원을 명쾌히 밝히고, 기에서 음양 두 개의 기가 나와 만물을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기철학의 선배라 할 중국의 소강절이나 장횡거 등이 중국 철학사에서 이단시되었듯 화담도 후학들로부터 진정한 선비로서 존경받았지만, 그의 학문은 정상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기철학은 김시습에게서 발견되고 최한기에서 일시 번성하다가 조선 말기 언더그라운드 철학자에게서 시대의 변혁과 함께 다시 분출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오대산 일대를 기 논의 및 수행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계획이 추진 중이다. 
불교적 기는 물론 풍수적 기, 요가적 기 등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는 가운데 
철학적 기 얘기도 해야 한다 생각하여 
한국적 기철학의 태두인 화담 서경덕 선생의 기 이야기를 잠시 떠올려 본 것이다.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
R Kwak 저술2018 — 그동안 신라 오대산문수신앙 형성 시기와 구조 둘러싸고 많은 논의 ... 흥미로운 것은 오대산에서 행하는 예참 신앙 대상  의례 내용에도 두 . 록이 차이가 ...
페이지 24개
===
율곡연구원, 오대산 국립공원과 기록유산 활용방안 모색
송고시간2021-09-07
(강릉=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율곡연구원은 오대산 관련 기록유산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오대산국립공원과 업무협약을 했다고 7일 밝혔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찾은 명산으로서 
  • 율곡 이이 선생의 '유청학산기'
  • 김창흡의 '오대산기' 등의 유산기(유람기)가 전해진다.

이들 유산기는 오대산의 옛 등산로 발굴의 기초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선인들의 산수 유람 문화를 복원하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율곡연구원은 이번 협약을 계기로 강원 도내 국학진흥사업 차원에서 이들 유산기와 관련 문화유적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정리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오대산을 자연과 인문이 융합된 힐링 공간으로 오대산을 새롭게 꾸며나가는 데 힘을 합칠 예정이다.
===


===


===

氣哲學(기철학)의 형성한 徐敬德(서경덕) 선생

청남 권영한 홈페이지입니다

氣哲學(기철학)의 형성한 徐敬德(서경덕) 선생


徐敬德(서경덕)선생은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였다.
불교에도 홀로 깨달은 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那般尊者(나반존자)이다.
흐르는 물, 날라 가는 구름, 변하는 萬象(만상) 등을 보며 혼자 깊은 산 속에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다 깨친 분이라고 한다.
ㄱ와 마찬가지로 徐敬德(서경덕)선생도 혼자서 진리를 깨진분이라 한다.
徐敬德(서경덕)은 송도(지금의 개성시) 사람이었는데 조상 때부터 집안이 별로 변변치 못했다.
서경덕의 아버지는 원래 德望(덕망)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덕을 숨기고, 비록 가난한 살림살이 엇지만 마음을 항상 편안 하게 가졌기에 이웃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했다.
서경덕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 공자의 사탕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10달 뒤에 태어난 아기가 바로 서경덕이었다고 한다.
서경덕은 태어 날 때부터 보통 아이와는 달리 매우 영특했다. 자라면서 스스로 글 읽는 것을 알았고 한번 본 것이면 죄다 외워버렸다.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또한 많은 것을 기억했다.
어느 날 서경덕은 「書經(서경)」을 읽고 있었다.
‘1년은 366일이 된다.’라는 내용에 대해 해석을 해놓은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을 거듭 생각해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경덕은 경서에 통달했다고 하는 노인이 개성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갔다.
“1년은 366일이 된다. 이 구절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서경덕이 말했다.
“여기에 적힌 해석은 비록 늙은 스승이나 나이 많은 선비라 하더라도 아는 사람이 적어 나 또한 배우지 못했다
네.”
노인이 말했다.
서경덕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통달한선비가 없으니 우리 儒學(유학)의 도는 사라졌구나.”
서경덕이 탄식했다.
서경덕은 「서경」의 그 구절을 베껴서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잠자고 밥 먹는
것도 잊고 깊이 파고 들어갔다.
드디어 보름 만에 비로소 깨닫게 되어 그 가지를 가르고 실마리를 풀려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이때 서경덕의 나이 17세였다.
“聖賢(성현)의 도의는 모두 책에 실려 있으니 다른 데서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그 뒤로도 많은 고전을 읽어 그 속에 적힌 뜻을 모두 이해하고 또한 발전시켜 세상에 빛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 진리는 바로 책 속에 있는 것이다.
독서를 많이 그리고 精讀(정독)하는데에 萬象(만상)의 본질과 통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9/27/23, 12:32 AM 청남 권영한 홈페이지입니다

기철학에서 본 똥의 가치와 의미 - 학지사ㆍ교보문고 스콜라

기철학에서 본 똥의 가치와 의미 - 학지사ㆍ교보문고 스콜라

기철학에서 본 똥의 가치와 의미
The Value and Meaning of Poop in Ki Philosophy

김교빈(Kyobin Kim) 
한국종교교육학회 종교교육학연구 제67권
등재여부 : KCI등재
2021.12 65 - 80 (16 pages)
인문학 종교학
이용수 57 인용하기 공유하기
원문저장 원문보기 구매하기
초록
 
목차
 
참고문헌
 
해당 권호 수록 논문
국문초록

기(氣)는 동양에서 수천 년 동안 자연과 사회,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며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쓰여 왔다. 이 논문은 사이언스 월든의 ‘똥본위화폐’ 연구 프로젝트에서 똥의 순환과 가치 정립에 대한 인문학적 이론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이다. 특히 이 논문은 화담 서경덕의 기철학을 중심으로 똥의 가치와 의미를 논하고 있다. ‘똥본위화폐’ 프로젝트가 기철학에서 얻을 수 있는 사고는 첫째 순환적 사고이다. 특히 장자, 장횡거, 서화담은 만물의 변화를 기의 취산으로 설명하면서 모든 존재가 거대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둘째로 기철학이 주는 시사점은 만물 평등의 관점이다. 장자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써 만물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끌어냈다. 장횡거 또한 만물이 기로 이루어져 있고 기의 취산을 통해 순환 과정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만물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서경덕은 그런 사고를 확장하여 현실에서의 실천으로까지 나아갔다. 셋째로 기철학은 똥을 더럽다고 보는 인식의 전환을 가능케 하며 이를 바탕으로 만물일체론을 끌어낸다. 만물이 하나라는 장자와 장횡거의 생각, 그리고 기의 질서가 수의 질서로 환원되며 수의 질서는 소리의 질서로 환원된다고 보고 대자연의 하모니로 어우러지는 대화해(大和諧)의 세상을 꿈꾼 서경덕의 생각이 모두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똥본위화폐’ 프로젝트가 현대사회의 소득불균형과 인간 소외, 세대 갈등, 학점과 학위에 따른 교육 격차 등의 문제 해결을 목표로 삼는다면 이 같은 사고를 기반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분리와 투쟁이 아니라 공감하고 소통하는 감통(感通)의 세계관으로 바꿔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문초록

several thousand years ago in the East asia, ki has been used as a concept to explain the change in all things, encompassing nature and society, matter and spirit. This thesis is a study to prepare a humanistic theoretical basis for the circulation and value establishment of poop in Science Walden s ‘feces Standard Money’ research project. In particular, this thesis discusses the value and meaning of poop, focusing on the philosophy of Hwadam Seo Gyeong-deok. The first thought that the ‘feces Standard Money’ project can be obtained from the Ki philosophy is cyclical thinking. In particular, Zhuang-tzu, Jang-jae, and Seo Hwa-dam explained the change of all things as gathered and scattered, all beings could not escape from the great cycle. Second, the point of preview of Ki philosophy is the perspective of equality in all things. By relativizing everything, Zhuang-tzu drew on the idea that all things are equal. Jang-jae also developed the idea that all things are equal in that all things are made of qi and the cycle repeats the cycle through the extraction of qi. And Seo Kyung-duk expanded such thinking and moved on to practice in reality. Third, Ki philosophy enables a change in the perception that poop is dirty, and based on this, draws out the unity of all things. The idea of &#8203;&#8203;Zhuang-tzu and Jang-jae that all things are one, and the idea that the order of Qi is reduced to the order of numbers and the order of numbers is reduced to the order of sound, and is the story of Seo Kyung-deok, who dreamed of a world of dialogue and harmony in harmony with nature. All thoughts make such a transformation of perception possible. If the ‘feces Standard Money’ project aims to solve problems such as income inequality, human alienation, generational conflict, and educational gap according to grades and degrees in modern society, then based on this thinking, the separation of human to human and human to nature is It should be possible to change to a worldview of sympathy and communication, which is not a struggle, but a feeling of empathy and communi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