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1

[책과 삶]경연, 왕의 공부 김태완 2011-

[책과 삶]조선 왕들에게 ‘권력의 공공성’을 일깨우다


[책과 삶]조선 왕들에게 ‘권력의 공공성’을 일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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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성균관 대성전에서 알성례를 치른 뒤 유생들의 공부를 살피기 위해 경서에 대한 강론과 문답을 실시하는 장면을 그린 ‘성균관친림강론도’(왼쪽)와 저자가 탁월한 경연관으로 뽑은 정암 조광조의 초상. 아래사진은 경연에서 애용돼 역대 왕들의 교과서라고 불릴만한 ‘대학연의’.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 역사비평사

임금은 새벽 5시쯤에 일어났다. 미음이나 죽 등 자리끼조반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웃전에 문안을 여쭙는 것이 먼저 할 일이었다. 웃전으로 생존해 있던 인물은 대개 어머니(대비)와 할머니(대왕대비)였다. 그 다음에 신하들과 만나 아침 조회인 상참(常參)을 열고 경연(經筵)을 펼쳤다. 경연이란 학문이 뛰어난 신하들과 철학·역사를 논하고 국가 정책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임금은 그것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아침을 들었다.

아침 경연은 조강(朝講)이라 한다. 정오에는 주강(晝講), 오후 2시에 석강(夕講)이 열렸다. 삼시강(三時講)이라고 불린 이 세 차례의 경연이 공식적인 법강(法講)이었다. 물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소대(召對)도 있었다. 특히 밤에 열리는 소대를 야대(夜對)라 불렀다. 소대는 임금이 아무 때나 신하를 불러 경연을 펼치는 것이었는데, 특별히 학식이 깊은 신하나 은퇴 원로가 초빙돼 왕과 더불어 담론했다. 하지만 임금의 바쁜 일정 탓에 삼시강과 소대가 날마다 열리진 못했다. 실제로는 며칠에 한 번 열리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서너달을 거르는 일도 있었다. 임금의 성향과 입장에 따라서도 빈도가 달라졌다. 세종과 성종은 경연을 애호한 반면, 세조와 연산군은 그렇지 않은 축에 속했다.

저자 김태완에 따르자면, 경연은 권력세습에 대한 제도적 보완책으로 등장했다. “불필요한 비용 지불과 희생을 막기 위해 권력 세습을 인정”하면서도 “군주가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곧 권력은 공기(公器)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세습 군주의 자질이 고르지 않았던” 까닭에 “군주의 교육은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잡았다. 임금은 “유교적 덕치 이념을 교육하는 세미나”였던 경연을 통해 “사적 이익을 제한하고 절제하는 수련, 다시 말해 욕망을 억제하고 공공의 선을 지향하는 것”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임금에게 강론했던 경연관은 어떤 자질을 갖춰야 했을까? 저자는 조선 말기의 학자 최한기의 <강관론(講官論)>에서 경연관의 자질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인용한다. “경연관을 뽑아 쓰거나 내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학문이 발전하고 쇠퇴하는 것, 정치와 교육의 수준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과 결부된다. 그러므로 큰일을 하려는 군주는 먼저 경연관을 잘 뽑아야 한다. (중략) 그러나 경연관이 직책을 수행함에도 우열이 없지 않다. 기색이 온화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조리가 분명하고 왕에 대한 충성과 사랑이 넘치는 자가 으뜸이다. 능란한 말솜씨로 변론에 힘쓰고 이전의 언설을 갖다 붙여서 담론을 즐기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 자가 그 다음이다. 지나치게 자중하여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로지 재능과 덕을 숨기는 것만 일삼는 자가 그 다음이다.”

저자는 특히 “조선시대 학자관료의 상징적 존재”였던 조광조를 탁월한 경연관으로 뽑길 주저하지 않는다. “유교적 지치주의(至治主義) 이념을 꿋꿋이 지키다가 장렬히 순교”한 사람이라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지치주의란 중국 성리학의 한국적 변용쯤으로 볼 수 있겠다. ‘천인무간(天人無間)’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인간은 하늘과 연결돼 있는 존재이며, 사람의 일과 하늘의 뜻은 별개가 아니라는 이상주의 철학을 일컫는다. 37세에 홍문관 부제학, 38세에 대사헌에 올랐던 조광조는 당시의 군주였던 중종에게 순정한 이상주의 사회를 설파했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삿된 것들을 강력하게 물리쳐야 한다고 주창했다. 결국 당대 기득권자들과 갈등을 빚다가 사약을 받는 운명에 처한다. 하지만 저자는 “조광조는 죽어서 영원히 산 사람이 되었다”며 “조선 정치이념의 좌표를 설정하는 방향타”의 역할을 했다고 칭송한다.

이 밖에도 저자는 “사림이 득세한 선조 때 개성있고 탁월한 경연관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쟁명했다”며 ‘김우웅, 유희춘, 기대승, 이이’ 등을 “도도한 학식을 뽐내고 원대한 경륜을 다투며 폭넓은 교양을 과시”했던 뛰어난 경연관들로 손꼽는다.


그러면 조선의 임금들은 무슨 책을 주로 읽었을까? 역대 왕들이 경연에서 사용했던 교재들은 유가의 거의 모든 경전을 망라한다. 역사서로는 <자치통감> <자치통감강목> 등 통감류와 <십팔사략> <사기> <한서> 등 중국의 책,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등 우리나라 책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용했던 교재는 <대학연의(大學衍義)>였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태조실록>에 따르자면 이 책은 “군주가 마땅히 알아야 할 이치와 해야 할 일을 상세히” 제시함으로써 “격물치지·성의정심의 학문을 연구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효과”를 이루게 한다는 것인데, 저자는 이 책을 “조선시대 제왕학의 교과서”라고 매김한다.

이와 더불어 “동양적 덕치의 정치이념을 가장 잘 표현한 경전”인 <서경>, 
“유비의 촉한을 정통으로 기술한” 주희의 역사서 <자치통감강목>도 핵심 교재였다. 
성리학 연구의 기본 학습서였던 <근사록>은 “진리가 형이상학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디딘 현실에 있음”을 밝히면서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진리를 인식해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교재였다.

또 <심경>은 책의 제목처럼 “마음수양”에 관련한 왕의 필독서였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심경>은 “욕심을 없애고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 군자가 되는 것을 가르쳤던” 책으로, 퇴계 이황에 의해 “경연의 주요 교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황은 이 책에 대해 “신명(神明)과 같이 믿고, 엄한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하였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조선의 경연 기록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기대승의 <논사록>이이의 <경연일기>에서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기대승은 명종 19년(1564) 주강에 참석한 이래 선조 5년(1572)까지 총 31회에 걸쳐 경연에서 진강했다. 그의 강론은 매우 직설적이다. 상황에 대해 이러저러한 설명을 배제한 채 곧바로 과녁을 조준한다. 기대승은 처음 참석한 경연에서 “언로는 국가에서 매우 중대합니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가 편안하고, 언로가 막히면 위태로워집니다”라고 토로한다. 선조 즉위년 소대에서는 “임금은 이익을 독점하지 말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해야 합니다. 임금이 정치만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근본이 없는 것이고, 마음만 있고 백성에게 균등히 분배하는 정사가 없으면 혜택이 아래에 이르지 않습니다”라고 왕을 계도한다.

반면에 율곡 이이가 남긴 내용들은 “사건의 배경과 상황 설명이 상세하고 짜임새 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이이는 명종 20년(1565)부터 선조 14년(1581)까지 경연에 참석했으며, <율곡전서> 중 <경연일기>가 바로 그 기록이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기대승의 <논사록>과 달리, “당시의 중요한 정치적 쟁점과 정계의 동향, 정책의 득실과 정치인의 인물평을 기록한 일종의 정치평론집으로서의 성격을 띤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이이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선조에게 폐정 개혁을 아뢰는 장면은 사뭇 격하다. “전하께서는 무조건 긍정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마음을 갖지 마소서. 근래의 규례로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개혁하여 제거하며,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살릴 새로운 계책이 있으면 강구하여 시행하소서. 그렇지 않고 다만 두려워하고 수양하고 반성한다는 명분만 있고 실상이 없으면 어떻게 위로 천심(天心)에 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원망을 위로하겠습니까?”

저자가 보기에 경연은 “왕에게 권력의 공공성을 각인하는 것”이었다. “왕은 경연에 참여함으로써 권력의 본질을 성찰하고, 권력의 사용을 반성하며, 권력의 성패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습득”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와 같은 경연의 본질을 “단지 과거의 사실로 묻어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경연은 정말 조선의 왕에게만 필요했던 건지, 오늘 우리가 다시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