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4

알라딘: 함양과 체찰 조선의 지성 퇴계 이황의 마음공부법 ; 말 함양, 체찰

알라딘: 함양과 체찰


함양과 체찰 - 조선의 지성 퇴계 이황의 마음공부법 
신창호 (지은이)미다스북스2010-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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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자성록에서 본 ‘마음 공부법’ < 이코노믹리뷰 2011

퇴계 이황의 자성록에서 본 ‘마음 공부법’ < 전문가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이코노믹리뷰

퇴계 이황의 자성록에서 본 ‘마음 공부법’
마음 집중해야 세상 이치 본다

기자명 문화전문기자 권동철
입력 2011.06.01 




<함양과 체찰〉
-신창호 엮고 지음
-미다스북스 펴냄
-1만7000원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생애와 철학을 ‘마음 공부의 중요성’ 측면에서 엮은 책 <함양과 체찰>이 주목받고 있다. 함양(涵養)이란 학식을 넓혀 심성을 닦는 것이고 체찰(體察)은 몸으로 익혀 실천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자성록(自省錄)은 퇴계가 율곡 이이(李珥) 등과 같은 후배 유학자들과 주고받은 말년에 엮은 편지모음 서간집인데, 이 책은 자성록을 뼈대로 퇴계의 가르침을 재구성한 것이다.

저자인 신창호 교수(고려대)는 “여기에는 선생이 제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매우 겸손하면서도 상호문답을 통해 소통하며 열정적인 멘토(Mentor)가 되어 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책에는 오늘의 CEO들이 마음으로 담을 만한 ‘의사소통과 진정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새로운 상황에 대비하여 다양한 채널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리더십을 고양한 퇴계의 자세는 성공과 성취감에 매몰되기 쉬운 것을 경계하는 귀중한 마음 공부의 한 대목이다.

퇴계 철학을 응축한 글귀는 ‘경(敬)’으로 ‘한 곳에 몰입하여 다른 쪽으로 마음을 쓰지 않는 공부법’이다. 이른바 ‘몰입’이나 ‘마음의 집중’은 퇴계가 간파한 공부의 핵심으로 이를 집중해야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제대로 된 공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은 그래서 심오한 퇴계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당연해 보이면서도 심오한 보편적 진리다.

인간 퇴계의 일면도 재미있게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이황 선생의 가장 인간적 매력에 대해 ‘겸손’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면서 삶을 합리적으로 펼쳐가기 위한 마음 공부를 한 분이지요. 제자들은 물론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모습은 성스럽고 맑은 영혼을 지닌 분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자신을 뒤로 할 줄 아는 자기 충실과 타자 배려에 몰입한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의 거룩한 생명정신”이라고 말했다.


퇴계 말년 10 여년은 학문의 원숙기였다. 제자들과 공부에 몰입함은 물론, 전국 각지의 선비들과 편지로 교유(交遊)하며 학문을 논의한 것은 조선 지성인들의 열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학문과 연구에 몰입하고 자신이 거두는 삶에 최선을 다한 만년의 그의 행보는 오늘날에도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퇴계가 지은 시편과 ‘활인심방’ ‘수신십훈’ 등 공부법과 맥이 닿아있는 내용도 함께 실었다.

도를 넘어선 경쟁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 버린 현대사회에서 저자는 “퇴계 선생의 함양과 체찰을 통한 자기 공부는 바로 살림의 사유와 행위를 유도할 수 있는 교육이자 학습법”이라고 강조했다.

서원이나 향교 등 교육문화유산 답사를 수시로 하며 전통 교육의 가치를 성찰하는데 몰입하고 있는 저자는 “‘자성록의 이치를 깨우치는 법’은 마음 공부를 빼곤 설명되지 않는다”며 “그의 생각이 녹아 있는 문구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고 말했다.

권동철 문화전문 기자 kd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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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영_종가이야기]퇴계종택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박장영_종가이야기]퇴계종택 박장영

(cultureline@naver.com)2017-05-22     박장영     

 종택이 있는 곳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번지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택은 도산면 도산파출소 맞은편 육산문학관 방면으로 접어들어 개천을 따라 2.6㎞ 들어가면 있다. 또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새로 난 도로를 따라 가도 된다.   당호의 유래 종택의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추월한수(秋月寒水)라는 말은 송나라의 주자가 "공경히 생각건대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 하여 옛 성인의 마음을 말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퇴계선생의 제자인 고봉 기대승이 선생을 일러󰡐선생지신(先生之心) 여추월한수(如秋月寒水)󰡑라 하여 퇴계선생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이 건물은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 이안도 공이 지은 집으로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715년(숙종41)에 정자인 추월한수정을 건축하였다. 이 정자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창설재 권두경 공이 퇴계 선생의 도학을 추모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 후 퇴계 선생의 10대 손인 고계 이휘녕 공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는데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다 불타버렸다. 지금의 종택은 1926에서 1929년 사이에 13대손 하정 이충호 공이 이곳에 세거하던 임씨들의 종택을 매입하여 이건하였으며 ‘추월한수정’도 옛 건물처럼 재건하였다. 야산을 등지고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동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이 종택은 5칸의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이 있고, 우측에 5칸 솟을대문과 한수정이 있으며 뒤에 사당이 있다.           1) 사랑채와 안채 본채인 ㅁ자형 정침은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가 전면에 있고 뒤에 안채부분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안채부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좌익사는 앞에서부터 중문간, 광, 방, 문간이 각각 1칸이고 우익사는 창고, 방, 방, 문간이 각각 1칸이다. 이 건물에서 중문을 전면에 내지 않고 우측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통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반가에서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설치하는 내외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정침은 총 34칸으로 민도리집이고 기둥은 방주를 세


  • [박장영_종가이야기]퇴계종택
  • 박장영(cultureline@naver.com)2017-05-22

 

 

박장영

 

 

종택이 있는 곳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번지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택은 도산면 도산파출소 맞은편 육산문학관 방면으로 접어들어 개천을 따라 2.6㎞ 들어가면 있다. 또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새로 난 도로를 따라 가도 된다.

 

당호의 유래
종택의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추월한수(秋月寒水)라는 말은 송나라의 주자가 "공경히 생각건대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 하여 옛 성인의 마음을 말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퇴계선생의 제자인 고봉 기대승이 선생을 일러󰡐선생지신(先生之心) 여추월한수(如秋月寒水)󰡑라 하여 퇴계선생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이 건물은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 이안도 공이 지은 집으로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715년(숙종41)에 정자인 추월한수정을 건축하였다. 이 정자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창설재 권두경 공이 퇴계 선생의 도학을 추모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 후 퇴계 선생의 10대 손인 고계 이휘녕 공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는데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다 불타버렸다.

지금의 종택은 1926에서 1929년 사이에 13대손 하정 이충호 공이 이곳에 세거하던 임씨들의 종택을 매입하여 이건하였으며 ‘추월한수정’도 옛 건물처럼 재건하였다. 야산을 등지고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동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이 종택은 5칸의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이 있고, 우측에 5칸 솟을대문과 한수정이 있으며 뒤에 사당이 있다.

 

 

 

 

 

1) 사랑채와 안채
본채인 ㅁ자형 정침은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가 전면에 있고 뒤에 안채부분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안채부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좌익사는 앞에서부터 중문간, 광, 방, 문간이 각각 1칸이고 우익사는 창고, 방, 방, 문간이 각각 1칸이다.
이 건물에서 중문을 전면에 내지 않고 우측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통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반가에서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설치하는 내외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정침은 총 34칸으로 민도리집이고 기둥은 방주를 세웠으며 5량가에 제형판대공을 올렸다.

 

2) 추월한수정
계단이 좌우에 설치된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앉아 있는 추월한수정은 정면이 5칸 반이고, 측면이 2칸 반인데 5량가에 제형판대공을 올린 민도리집이다. 이 현판은 향산 이만도 선생의 손자인 이고 이동흠 공의 글씨이다.

 

3) 사당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전 벽면은 반 칸이 약간 넘게 뒤로 물려 전퇴를 두었다. 기단은 화강석이고 지붕은 팔작기와 이며 내부에는 퇴계 선생의 불천위 신위를 비롯하여 4대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관련인물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은 조선중기의 대유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진성이며,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다. 예안 온혜의 노송정 종택에서 진사 식(埴)의 제7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춘천박씨가 공자가 대문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하여 태실이 있는 노송정 큰 댁 대문을 ‘성림문’이라 한다.
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속에 자랐다. 6세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2세 때는 숙부인 송재(松齋)에게 논어를 배웠다. 20세 무렵에 주역 등을 공부하였는데 침식을 잊으며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23년(중종 18)에 성균관에 들어가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어 박사, 전적, 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 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에는 성균관사성에 이르렀다. 이 때 낙향하려고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546년 예안 하계의 동암 곁에 양진암을 짓고 토계의 지명을 퇴계로 고치고 아호로 삼았다. 그 후 대사성, 형조·병조참의, 부제학, 공조판서를 거쳐 1568(선조 1)에는 우찬성을 역임하고 양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정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고사하고 귀향하여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관직에 무려 140여회나 임명되었으나 79회를 사임하였으며 높은 관직보다는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봉행하였다.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성(誠)’을 기본으로 하고, 일생동안 ‘경(敬)’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키고 이기호발설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였다. 선생은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건립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선생의 학풍은 뒤에 문하생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의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이는 이이의 기호학파와 사상적으로 대립된다. 후일 선생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직자로, 학자로, 교육자로 선생의 일생은 만세의 사표가 되었으며, 선생이 모신 중종, 명종, 선조로부터도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76(선조 9)에 문순공의 시호를 받았다.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도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모셔졌다.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에『퇴계전서: 수정천명도설, 성학십도, 자성록, 심경석의, 주자서절요, 상례문답, 사칠속편』외 많은 저술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도산십이곡』, 글씨에『퇴계필적』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
1) 퇴계와 두향
퇴계 선생은 매화를 매우 사랑해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데는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 두향(杜香) 때문이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선생은 당시 48세였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그러나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고매한 유학자라 두향의 애간장만 녹았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매화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는 일이 잦아졌고, 앞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보낸 선생은 한 떨기 설중매와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자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이 났다. 두향은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이 이별은 1570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이어진다.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로 마음을 달랬다. 특히 매화 화분은 퇴계 선생에게 큰 기쁨으로, 선생은 평생 동안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선생의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고 한다. 한편, 선생이 떠나자 두향은 간곡하게 청하여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선생을 그리며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이토록 애달픈 두 사람의 사랑은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남겼던 한 마디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매화에 물을 주어라." 고 했다 한다. 두향을 그리는 선생의 집에는 매화향이 가득하고, 선생의 가슴에는 두향이 가득했으리라.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선생의 집으로 오고, 모퉁이를 돌면 상갓집이나 순간 자신이 나타나면 선생께 누가 될까 눈물을 삼키며 다시 단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 상이 끝나던 날, 선생만 생각하며 지내던 두향은 저승에서 다시 모시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유해를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가 강선대(降仙臺) 아래에 묻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26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언에 따라 400여 년 동안 그 곳에 묻혀 있다가 충주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퇴계의 후손들이 두향의 묘를 단양팔경중의 하나인 옥순봉(玉荀峰) 맞은편 제비봉 기슭에 이장하고 두향지묘(杜香之墓)라는 오석 묘비를 세웠다.


2) 퇴계 선생에 얽힌 풍수 전설
옛날에 퇴계 선생의 5대조가 진보현 아전으로 있을 때, 풍수에 밝은 원님이 아전인 5대조를 대동하고 산천을 둘러보다가 감람골[청송군.파천면.신기리]의 지세를 눈여겨보고 돌아와 아전에게 말하기를 "달걀을 가지고 가서 봉우리 위에 파묻고 자시까지 기다려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라"고 하였다. 

 

아전은 원님이 시키는 대로 했고, 자시가 되자 정말 달걀이 병아리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병아리를 보고 놀란 것도 잠시, 아전은 이내 다른 생각을 품었고, 그는 그곳에 일부러 썩은 달걀을 묻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원님께 아뢰었다. 다음날 원님은 감람골에 자신이 지시했던 봉우리에 올라가 직접 땅을 파 보았다. 땅속에서 썩은 달걀을 꺼낸 원님은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썩은 달걀이니 이내 수긍하고는 그 일을 잊어 버렸다. 후에 원님은 임기가 끝나 승진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어 나온 자리라는 사실을 혼자서만 알고 있던 아전은 훗날 부친상을 당하자 그 시신을 그 산 그 자리에 안장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관을 묻고 돌아서면 관이 땅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깊이 파고 다시 묻어도 관이 자꾸만 땅 밖으로 튀어 올랐다. 관을 묻으면 다시 관이 튀어 오르고, 묻고 나면 또 튀어 오르기를 여러 번, 관을 묻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때야 아전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아전은 그길로 한양에 있는 옛 원님을 찾아가 죽을죄를 지었다며 그 때의 사실을 이실직고 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원님은 ‘그러면 그렇지.......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거늘 이것도 인연인가.’하며 자신이 입었던 헌 관복을 내어 주면서,󰡒그 터는 대인이 묻힐 곳이니 당상관의 관복을 입혀서 묻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전은 원님에게 조아려 백배 감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의 장례를 치루니 과연 아무런 탈이 없고, 명당의 음덕인지는 몰라도 당대에 발복을 받아 본인은 안사공신 송안군이 되었고, 6대만에 퇴계 선생 같은 훌륭한 대학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3) 며느리 재가시킨 이야기
퇴계선생의 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늘 걱정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퇴계 본인의 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 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몰래 며느리의 방을 엿보니,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다. 기이한 모습에 퇴계 선생은 방문 쪽으로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며느리는 인형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고, 인형 앞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여보, 한 잔 잡수세요.󰡓라고 하고,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이 장면을 본 퇴계 선생은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인가?  젊은 저 아이를 수절시켜야 하다니... .' 하고 탄식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렀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사돈을 향해 말을 건넸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아니,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지만,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 것이기에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보게 거 다짜고짜 데려가라니..이게 무슨 소린가? 안되네! 한번 짝을 지어 원앙금침을 함께 썼으면 죽어서도 그 집 혼이 되는 일이 당연한 일이거늘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 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자네 지금 내 딸을 데려가는 것이 나와 어떻게 될 일인지 알고 하는 얘긴가?"

 

퇴계 선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퇴계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다.
몇 년 후 퇴계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한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선생이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퇴계 선생은 상을 물리고는 배부른 저녁식사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다. 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 올라온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내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퇴계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 며 주었다. 신어보니 퇴계선생의 발에 꼭 맞았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퇴계 선생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 퇴계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퇴계선생은 이렇게 며느리를 재가 시켰다.
 

 

 

 

 

 

글쓴이 : 박장영
현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전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콘텐츠연구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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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지은이),고산 고정일 (옮긴이)

退渓李滉と日本 < 世論 < 아시아문화경제신문 2017

退渓李滉と日本 < 칼럼 コラム < 世論 < 기사본문 - 아시아문화경제신문



退渓李滉と日本
기자명 아시아씨이뉴스
입력 2017.04.04
 

広島大学講師 教育学博士金炫勇(キム・ヒョンヨン)

日韓思想史において一番大きな影響を与えた人物の一人は、退渓李滉(トェグェ イ・ファン1501-1570)であろう。李滉(李退渓とも)は、朱子(1120-1200)が集大成した儒学を継承・発展させ、独自的な哲学を樹立した学者であり、「東洋小朱子」、あるいは「東洋の聖人」とも称されている。彼は朝鮮王朝時代の十八賢の一人として成均館大成殿に奉安されている。また、現在韓国の千ウォン紙幣の表には李滉の肖像が描かれており、裏には彼が建てた陶山書院が印刷されている。
李退渓の著書とその思想は、朝鮮(韓国)だけではなく、日本の江戸時代から現代に至るまで数多くの学者や文人たちに影響を与えた。江戸時代の政治、経済、社会、文化、教育など、社会全般の土台を整えたのは儒教であり、その儒教の中身は退渓朱子学だ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また、退渓が人格形成の具体的な実践方法として示した「敬」と「礼」は、日本の武道思想の成立にも大きく寄与している。たとえば、日本の武道伝書にみられる敬思想と「礼に始まり礼に終わる」という日本武道特有の礼法は、退渓思想を受容した結果である。
退溪李滉(韓国学中央硏究所蔵)

これだけではない。退渓思想は日本の近代化を導いた熊本実学や明治維新にも影響を与えており、また近代化期に日本の教育の原動力であり、精神的な柱となった「教育勅語」の成立にも寄与している。このように、退渓思想は、日本文化史の形成に大きく貢献したにもかかわらず、現代の日本人は退渓について、特定の人以外はあまり知らない。


朝鮮朱子学の伝来
日本に朝鮮朱子学(退渓学)が伝来したきっかけは、対馬藩の文書偽造事件がそのスタートである。宣祖23年(1590)、秀吉は対馬を通して「明国を服属させるつもりなので,朝鮮はその案内役をせよ(仮道入明)」という脅迫文書を朝鮮に渡すように命じる。しかし、朝鮮との貿易を重視していた対馬藩主の宗義調(1532-1589)と義智(1568-1615)の父子は、新政権樹立・祝賀使節団派遣を要請する内容に改作した。結局、宣祖23年(1590)、正使黄允吉(ファン・ユンギル)と副使金誠一(キム・ソンイル)などの朝鮮使節団が来日し、同年12月3日、秀吉に会った。このとき、金誠一が日本に朝鮮朱子学(退渓学)をはじめて紹介することになる。金誠一は、李退渓門下の三傑中の一人と呼ばれた人物である。
藤原惺窩(東京国立博物館所蔵)

その後、朝鮮朱子学の第二次伝来は、朝鮮出兵(韓国では任辰倭乱)である。 朝鮮朱子学を日本に伝えた人物として姜抗(カン・ハン)が有名である。宣祖30年(1597)9月、姜抗は眷族10余名と一緒に日本の藤堂高虎の捕虜となった。姜抗は伏見城に移監されたが、そこで、後で日本近代儒学の開祖者となる藤原惺窩(1561-1619)に出会う。そもそも惺窩は禅宗の僧侶であったが、朝鮮朱子学、特に退渓学に接し、儒学者へと改宗した。また、惺窩が受け入れた退渓学は、惺窩の門人の林羅山(1583-1657)を通して、江戸社会の文化発展に大きく寄与することになる。羅山は、江戸文化を開いた人物として評価されている。その後、退渓学は、江戸初期から中期にかけて江戸および京都を中心に朱子学を広めた山崎闇斎(1618-1682)、土佐と熊本で実学を開いた大塚退野(1678-1750)、明治維新後の新政権に参与した横井小楠(1809-1869)、そして日本の教育の原動力になった「敎育勅語」を制定した元田東野(1818-1891)などに継承された。このように、退渓の思想は、日本に西洋文物が流入される以前まで日本社会の文化および思想的基盤になっている。

退渓の著書『自省錄』
宣祖23年(1590)、朝鮮使節団を通して朝鮮朱子学をはじめて接した日本の学者たちは退渓の著書を入手しようと努力した。退渓の著書は、朝鮮出兵を通して一部入手したが、そのほとんどは江戸初期に対馬藩を通して日本に入った。退渓の著書の中、特に『自省錄』は、藤原惺窩と林羅山の改宗に直接影響を与えたものである。『自省錄』は、門人や友人に与えた約二百通の書簡中から退渓自身が選んで、自身の考えや反省を加えた備忘録である。興味深いことに、『自省錄』は、母国の朝鮮より日本の儒学者の間で重んじられ、訓点を付けた和刻本が日本で先刊行された。このような理由から、一般的に『自省錄』は日本語版が底本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また、『自省錄』は江戸時代から明治維新期にかけて日本全国で朱子学の教材として重んじられた。最近、李退溪著・難波征男校注,『自省錄』,平凡社(2015)が出版されている。江戸時代の日本の禅僧と陽明学者が自分の道をかえるほど、大きな霊感と悟りの感動を感じたいと思う方は一読をお勧めしたい。

退渓学の現代的な価値
われわれは、「儒教」というと古くて、非現実的な考えであると思いがちである。一体、退渓学の現代的な価値は何だろうか。退渓李滉の魅力は、退渓自身終始一貫して自分の考えと生き方が一致できるように努力・実践したところにある。すなわち、退渓学は理論と実践、量と質、技と心、自然科学と人文科学をともに志向すること、また偏らないことを強調しており、普遍的な課題を述べている。今日の社会は、量的成長、成果主義、自然科学に偏り、質的成長、心の修養、人文科学などを軽視する傾向が顕著にみられる。退渓学は、われわれの社会とその構成員たちが正しく成長する方法として、とこにも偏らないこと、均等な成長を志向するべきであると教え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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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과 일본
기자명 아시아씨이뉴스   입력 2017.04.04 16: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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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대학 강사 교육학 박사 김희용(김현영)
한일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은 퇴계이황(토계이환 1501-1570)일 것이다. 李滉(이퇴계 모두)는 주자(112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을 계승·발전시켜 독자적인 철학을 수립한 학자이며, '동양 코주자' 혹은 '동양의 성인' 모두 칭한다. 그는 조선왕조시대의 18현의 한 사람으로 성균관 대성전에 봉안되고 있다. 또 현재 한국의 천원지폐 표에는 이황의 초상이 그려져 있으며 뒤에는 그가 지은 도산서원이 인쇄되어 있다.
이퇴계의 저서와 그 사상은 조선(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에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에도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의 토대를 정돈한 것은 유교이며, 그 유교의 내용은 퇴계주자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퇴계가 인격형성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나타낸 '경'과 '예'는 일본의 무술사상의 성립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무술전서에서 볼 수 있는 경사상과 ‘예로 시작하여 예로 끝난다’는 일본 무도 특유의 예법은 퇴계사상을 수용한 결과이다.


퇴溪李滉
이것만이 아니다. 퇴계 사상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구마모토 실학이나 메이지 유신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또한 근대화기에 일본의 교육의 원동력이며, 정신적인 기둥이 된 「교육 훈어」의 성립 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처럼 퇴계사상은 일본문화사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인은 퇴계에 대해 특정인 이외에는 별로 모른다.


조선 주자학의 전래
일본에 조선 주자학(퇴계학)이 전래한 계기는 쓰시마 번의 문서 위조 사건이 그 시작이다. 선조 23년(1590), 히데요시는 쓰시마를 통해 “명국을 복속시킬 생각이므로, 조선은 그 안내역을 하라(가도 입명)”라는 협박 문서를 조선에 건네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조선과의 무역을 중시했던 쓰시마 번주의 종의조(1532-1589)와 요시토모(1568-1615)의 부자는 신정권 수립·축하사절단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개작했다. 결국 선조 23년(1590) 정사 황윤길(황윤길)과 부사금 성일(김성일) 등 조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해 같은 해 12월 3일 히데요시를 만났다. 이때 김성일이 일본에 조선주자학(퇴계학)을 처음 소개하게 된다. 김성일은 이퇴계문 아래 삼걸 중 한 명으로 불린 인물이다.


후지와라 히나와(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이후 조선주자학의 제2차 전래는 조선출병(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다. 조선 주자학을 일본에 전한 인물로 강항이 유명하다. 선조 30년(1597) 9월 강항은 민족 10여명과 함께 일본의 도도 타카토라의 포로가 되었다. 강항은 후시미성으로 이감되었지만, 거기서, 나중에 일본 근대 유학의 개조자가 되는 후지와라 히나와(1561-1619)를 만난다. 원래 오와와는 선종의 스님이었지만 조선 주자학, 특히 퇴계학에 접해 유학자로 개종했다. 또, 오와가 받아들인 퇴계학은, 오와의 문인의 임라산(1583-1657)을 통해서, 에도 사회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나산은 에도문화를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퇴계학은, 에도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에도 및 교토를 중심으로 주자학을 전파한 야마자키 암사이(1618-1682), 토사와 구마모토에서 실학을 연 오오츠카 퇴노(1678-1750), 메이지 유신후 의 신정권에 참가한 요코이 코쿠스(1809-1869), 그리고 일본의 교육의 원동력이 된 ‘소육장어’를 제정한 모토다 히가시노(1818-1891) 등에 계승되었다. 이처럼 퇴계의 사상은 일본에 서양문물이 유입되기 이전까지 일본사회의 문화 및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다.

퇴계 저서 '자성녹'
선조 23년(1590) 조선사절단을 통해 조선주자학을 처음 접한 일본 학자들은 퇴계 저서를 입수하려고 노력했다. 퇴계의 저서는 조선 출병을 통해 일부 입수했지만, 대부분은 에도 초기에 쓰시마번을 통해 일본에 들어갔다. 퇴계의 저서 속, 특히 '자성 녹'은 후지와라 사와와 임라산의 개종에 직접 영향을 준 것이다. '자성 녹'은 문인이나 친구에게 준 약 2백통의 서한 중에서 퇴계 자신이 골라 자신의 생각이나 반성을 더한 비망록이다. 흥미롭게도 '자성 녹'은 모국의 조선보다 일본 유학자들 사이에서 무거워지고 훈점을 붙인 일본 각본이 일본에서 선간행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적으로 '자성 녹'은 일본어판이 저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자성 녹'은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기에 걸쳐 일본 전국에서 주자학 교재로 중점을 받았다. 최근 이퇴계저·난바 정남교주, '자성 녹', 평범사(2015)가 출판되고 있다. 에도시대의 일본 선승과 양명학자가 자신의 길을 바꿀수록 큰 영감과 깨달음의 감동을 느끼고 싶은 분은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퇴계학의 현대적인 가치 우리는
, 「유교」라고 하면 낡고,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도대체 퇴계학의 현대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퇴계 이황의 매력은 퇴계 자신의 시종 일관되게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실천한 곳에 있다. 즉 퇴계학은 이론과 실천, 양과 질, 기술과 마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함께 지향하는 것, 또 치우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보편적인 과제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양적 성장, 성과주의, 자연과학에 치우쳐 질적 성장, 마음의 수양, 인문과학 등을 경시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보인다. 퇴계학은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제대로 성장하는 방법으로서 사촌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균등한 성장을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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