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5

알라딘: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노길명,박형신 (지은이) 2017

알라딘: [전자책]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eBook]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노길명,박형신 (지은이)이학사2017-02-28




Sales Point : 17

8.0 100자평(0)리뷰(1)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사회참여와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묵묵히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분석한 책이다. 또한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등 여러 종교의 사회운동을 돌아보면서 한국 종교사회운동의 전체 지형도를 그려내는 작업을 최초로 시도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제1부 한국 종교사회운동의 역사적 전개’에서는 한국 종교사회운동 일반을 총괄적으로 개괄한다.
 ‘제2부 현대 한국의 종교사회운동’에는 한국의 종교가 사회 각 영역에서 벌인 사회운동의 사례를 분석한 5편의 글이 실려 있고, 
‘제3부 한국 종교계의 사회복지운동’에는 현재 한국 종교계가 벌이고 있는 사회복지운동을 검토하고 평가한 5편의 글이 수록됐다.


목차


책머리에
서론: 한국의 종교문화와 종교운동_노길명

제1부 한국 종교사회운동의 역사적 전개

천주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특성_추교윤
개신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유형_전명수
불교 사회운동의 교리적 근거와 역사적 전개_박수호
소태산의 세계관과 원불교의 사회 활동_한내창

제2부 현대 한국의 종교사회운동
'천주교도시빈민회'를 통해 본 천주교 빈민운동_박보영
불교와 환경운동: '불교환경연대'의 생명운동_김명숙
'풍경소리'를 통해 본 불교문화운동: 평가와 제언_박형신
원불교 시민사회운동: '평화의 친구들'을 중심으로_이한메
개신교의 '좋은 아빠 되기' 운동: '두란노 아버지학교'의 경우_이진희

제3부 한국 종교계의 사회복지운동
'엠마우스'를 통해 본 천주교의 장애인복지운동_박형진
천주교의 노인복지 활동: J군 '프란치스꼬의 집' 사례를 중심으로_이동우
기독교 아동복지운동: 홀트아동복지회의 입양사업을 중심으로_김준환
기독교 관련 단체의 노숙인 구호 활동: 평가와 전망_정수남
'아가페 소망교도소'를 통해 본 기독교 교정복지운동_이혁승

책을 편집하고 나서
알리는 글
필자 소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노길명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고려대학교 사회학 박사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한국의 종교운동』(2012), 『민족사와 천주교회』(2005), 「개벽사상의 전개와 성격」(2008)

최근작 : <한국 신종교 지형과 문화>,<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한국의 종교운동> … 총 9종 (모두보기)

박형신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간 고려대학교에서 초빙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연구교수 등으로 일했다. 지금은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사회이론, 감정사회학, 음식과 먹기의 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정치위기의 사회학』,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공저), 『에바 일루즈』, 『탈사회의 사회학』(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탈감정사회』, 『민주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가』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탈사회의 사회학>,<향수 속의 한국 사회 (반양장)>,<[큰글씨책] 에바 일루즈 > … 총 9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 종교사회운동의 전체 지형도

종교와 관련된 통계치를 살펴보면 한국의 종교 인구는 점점 늘어나 2005년에는 전체 인구의 52.1%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종교인이라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이 어떤 형태로든―자신의 구원이든 아니면 자신의 삶의 지표로서든―종교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우리 한국 사회가 20세기 후반에 압축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노정된 여러 정치, 사회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민주 사회로 이행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바로 종교가 개인의 구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신적 중심으로서 시민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렇게 그동안 한국 사회 발전에 견인차가 되었던 한국의 종교사회운동을 조명한 책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인이 세상에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회적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그동안 한국 종교계는 인권운동, 정의구현운동, 반독재투쟁운동, 사회복지운동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이러한 한국 종교계의 활동은 세계적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 책은 바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사회참여와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묵묵히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분석한다. 또한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등 여러 종교의 사회운동을 돌아보면서 한국 종교사회운동의 전체 지형도를 그려내는 작업을 최초로 시도한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본 종교의 사회참여와 복지 활동

그간 한국의 종교인들은 많은 정치적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회의 불의에 항거해왔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보듬어왔다. 이는 종교의 사회참여 논쟁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종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안주의 길을 택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조용히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사회 속에서 실천해왔다. 이 책은 종교의 사회참여와 사회복지 활동이 종교의 본질적 활동이며, 이것이 건전한 종교문화 형성의 기본 조건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인식은 대표 저자인 노길명 교수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하나의 종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이념과 메시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과 메시지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의 산물이며,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처절한 체험과 인간애의 소산이다. 이것은 결코 변화될 수 없는 종교의 본질적인 핵이다. 필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이것을 재조명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창교 이념의 본질과 그 실존적 의미를 되묻는 작업이고, 창교 이념의 화석화(化石化)를 방지하는 작업이며, 자신의 존재 의미와 시대적 사명을 밝히는 길이다. 또한 그것은 종교의 자기 갱신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애에 바탕을 둔 종교의 사회참여와 사회복지 활동은 종교의 부차적인 업무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며 존재 가치를 구현하고 재확인하는 본질적 활동이다. 또한 그것은 건전한 종교문화의 형성을 위한 기본이다.
- 본문 31쪽

이 책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간 우리 사회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걸고 사회문제를 극복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더불어 살기를 실천해온 종교단체들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적 평가와 전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종교단체들의 실천에 대한 소개는 우리 사회의 종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불식시키고,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에 실린 종교단체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세상에 알리는 동시에 자기 점검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종교 사회 활동을 준비하는 단체들에게는 이 책이 하나의 유용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

평생 종교사회학을 연구해온 노길명 교수와 그의 후학?제자들은 선생의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이 책 각 장을 나누어 집필했다. 노길명 교수는 서론에서 한국의 종교문화와 종교운동을 일괄하고 있으며, 이 책의 세부 논의는 3부에 걸쳐 전개된다.

「제1부 한국 종교사회운동의 역사적 전개」에서는 한국 종교사회운동 일반을 총괄적으로 개괄한다. 특히 한국의 4대 종교 각각의 교리 속에서 사회운동의 논리적 고리를 찾아내고, 이에 근거하여 개별 종교의 사회운동을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제1부에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사회운동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다룬 4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제2부 현대 한국의 종교사회운동」에는 한국의 종교가 사회 각 영역에서 벌인 사회운동의 사례를 분석한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각 글은 '천주교도시빈민회'의 빈민운동, '불교환경연대'의 생명운동, '풍경소리'의 불교문화운동, 원불교 '평화의 친구들'의 시민사회운동, 그리고 개신교 '두란노 아버지학교'의 좋은 아빠 되기 운동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

「제3부 한국 종교계의 사회복지운동」에는 현재 한국 종교계가 벌이고 있는 사회복지운동을 검토하고 평가한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각 글은 천주교 '엠마우스'의 장애인 복지 활동, 천주교 '프란치스꼬의 집'의 노인복지 활동, 기독교 '홀트아동복지회'의 입양사업, 기독교 단체들의 노숙인 구호 활동, 그리고 이제 막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아가페 소망교도소'의 기독교 교정복지운동을 사회복지의 차원에서 분석한다. 접기

마이리뷰


한국에서의 종교와 사회운동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도구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종교’는 꽤나 매력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겠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한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숭배하며 의지하는 행위는 완벽해지고자 하는 인간 욕심의 한 맥락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또한 길고 긴 역사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종교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이며 그 나름의 설득력있고 탄탄한 교리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종교가 한 나라의 국교로서 존재하면 그 사회를 알아가기 위해서 그 나라의 종교를 아는 것 또한 필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며 몇몇의 대표적 종교 이외에도 수많은 신흥종교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한국이라는 국가의 이해에 종교가 비교적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는 현재의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고, 한국의 역사에서는 외래문명의 수용 이전에는 불교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서구 문물의 유입과 함께 전해진 다른 종교가 큰 역할을 했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의 많은 종교단체들은 그들 나름의 종교의 교리를 사회속에서 실천하며 신도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많은 사회적 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신흥종교가 존재하기에 많은 종교단체에서 그들 종교를 사회 구성원에게 알리고 그 교리를 전파하며 또 홍보하기 위해서 종교 그 자체의 교리에만 충실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맥락에서 종교와 사회운동을 접목시켜 보았을 때 특히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종교단체에서 행하는 사회운동은 꽤나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그 취지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책은 그런 맥락에서 한국의 천주교, 개신교, 불교 및 원불교의 사회운동의 역사와 현재의 실태 그리고 각 운동에서의 한계와 문제점 및 대안에 대해서 모색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종교단체의 사회운동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고, 각각의 운동에는 그 나름의 역사와 또 몇몇 단체들은 주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굳건히 신도들의 신념을 지키고 또 그 단체를 지키기 위해 노력 한 흔적을 알 수 있었다.



책에 다루어진 많은 종교들이 그 역사와 교리는 다를지언정 인간을 사랑하는 박애주의만은 하나의 공통된 기틀로 다루어졌기에 사회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본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종교에 비해 비교적 생소했던 원불교에 대해서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원불교는 우리나라에서 생성되어서 험난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종교이기에 그만큼 사회운동 또한 활발했다고 본다.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히 원불교라는 종교가 있었다는 것과 그 종교에서 설립한 대학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었는데, 이에 대한 글을 읽으니 사회 곳곳에 설립한 여러 대안학교 및 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특이한 점은 시설들이 주로 전라도 지방에 많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원불교가 주류 종교가 아니기에 사이비 종교의 하나라는 편견을 많이 가졌었는데,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의 은(恩) 사상을 교리를 축으로 하고 그 실천과 의례에 있어서도 쉽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종교라는 점에서 전에 가졌었던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자연히 가지게 된 하나의 의문점은 한국 사회 내에 존재하는 무수한 종교들이 하나같이 그럴듯한 윤리적 규범을 갖고 있을까라는 의문이며 만약 사회적 통념과 배척되는 규범이나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라면 왜 그 종교를 사이비로 판단하느냐이다. 이는 명백히 그 근거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며 단지 그 역사가 짧고 신도수가 적다는 이유로 신흥종교가 아닌 무조건적인 사이비로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경험상에 비추어보았을 때 내가 외국 생활을 하며 함께 지냈던 분이 한 신흥종교의 열렬한 신도였고, 그분의 설득으로 나도 매주 그 종교의 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군대 및 수혈문제로 사회 규범과 많이 부딪쳤고, 나름의 충격적인 그 종교상의 규범으로 한국 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교에 매주 참석해보고 그 종교의 신도들 및 종교 내에서 배부되는 책자를 접해보니 사회에 용인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종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종교에서 내세우는 내세에 대한 진실 및 다른 여러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또한 신도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이 이 종교에 많이 전도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다른 많은 신흥종교들이 겉만 보았을 때는 그 교리들이 모두 선하며 많은 이들에게 유익할 수 있지만 깊이 알게 되었을 때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원불교 또한 이 책 속의 논문에서 다루어진 부분은 책의 취지에 알맞게 사회운동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교리를 면밀히 분석해보았을 때 그 교리가 모두 합리적이며 공감을 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는 내게 비단 원불교 뿐만이 아닌 다른 주류 종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의 아동복지단체로서 홀트아동복지회가 책에서 다루어졌는데, 매우 귀에 익숙한 이름이었고 한국 내에서 많은 입양이 이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 주변에서 입양에 관련된 사례는 접해보지 않은데다가 요즘엔 입양이 예전에 비해서는 비교적 드물기 때문에 어쩌다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입양된 한국인들이 친부모를 찾을 때 가끔 등장했기에 그 이름만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또한 입양의 날이 있는지도 몰랐고, 이 입양의 날이 홀트아동복지회의 입법 청원과 관련이 있는지도 알리 만무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입양에 있어서 자연스레 한국 사회내에서 이 단체의 영향력이 상당함을 의미함을 알 수 있지만, 이는 즉 이 분야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력 또한 자연스레 커질지는 의문이었다. 한 분야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야가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와 관련이 되어 있다면 이는 그 종교에 있어서는 상당한 프로모션 역할을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조건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다수의 신흥종교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종교는 더 이상 내세의 영역만을 다루고 교리에만 충실할 수 없다. 마치 상업분야에서 생산자가 소비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여러 전략을 이용하듯 현대사회에서 종교 또한 이에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일단 신도수가 많다는 것은 자연스레 그 종교의 이미지 또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쉽고, 많은 신도들이 타인에게 전도를 한다면 자연스레 그에 비례하여 더욱 신도수가 팽창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사회운동을 접목시켜서 생각해본다면 사회운동은 이런 종교의 기능에 아주 효과적인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종교단체에서 이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많은 종교단체들의 사회운동을 조사하면서 부딪친 한계는 항상 그 종교의 색채가 사회운동을 함에 있어서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였다. 이는 절로 전도의 의미가 될 수 있기에 아주 조심스레 다루어질 수 밖에 없으며 각각의 종교운동에서 많은 한계상황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박애를 중심으로 하였다는 운동에는 그 의미가 상통하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 각각의 종교의 교리를 수혜자에게 자연스럽지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전해주는 것은 겉으로만 그럴듯하지 결코 종교 홍보에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책에서 다룬 사회운동 중 가장 흥미로운 운동중의 하나가 바로 개신교의 ‘좋은 아빠 되기’운동이었다. 나 또한 아버지에게 다정한 딸이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그런 우리 가정과 같은 많은 가정에서 노력하는 아버지들을 개신교에서 도와주고 있고, 생각보다 쾌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많은 종교에서 각각의 사회운동을 하는 것에 종교 교리와 접목하여 의의를 두고 있는데, 좋은 아버지 되기 운동 또한 좋은 아버지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의로 하여 시행하고 있었다. 좋은 아버지의 의미가 매우 모호할 수 밖에 없는데, 개신교의 운동에서 내세우는 좋은 아버지란 바로 그 의의에 충실할 수 밖에 없었기에, 문제는 많은 아버지들이 이런 아버지상에 공감을 할지였다. 혹 다른 종교 신도로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아버지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교리와 아무런 관련 없이 하고 있는 운동도 있다고 하니 매우 건설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다른 종교보다도 불교는 환경운동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의 여러 개발 정책에 항상 부딪칠 수 밖에 없는 환경 파괴 문제에 특히 불교단체에서 반발하는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 많이 접해서 알 수 있었다. 주로 절이 산 속에 많이 위치해있고 이는 환경과 밀접해질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데다가 스님들의 하안거와 같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하기 위한 의식 등을 보았을 때 환경 운동에 있어서 불교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불교환경연대에 대해서 다룬 글을 보았을 때 불교가 환경운동에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여러 정치적인 방향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운동을 하는 등 여러 운동을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이는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비록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앞으로의 대안과 평가가 불교적 입장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아이러니가 있었지만, 환경운동에 있어서 불교의 지대한 역할과 공헌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의 삶에 종교가 큰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종교를 택하는 것과 특정 종교의 신도가 되는가는 철저히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종교에서 행하는 사회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고, 이 역할이라 함은 그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고 종국에는 신도수의 확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종교에서 행하는 사회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종교를 믿게 되는가에 대한 결과는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내게 있어서 진정한 사회운동이란 그 취지와 실천에 있어서 모두 투명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단체에서 사회운동을 하던 그 운동의 뿌리 깊은 의미는 그 단체의 색깔이 입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정치단체와 종교단체는 이를 수혜자에게 절대로 강압적으로 내세워서는 안 되며, 이에 충실한 종교단체의 사회운동이 실로 진정한 사회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며 그 어떤 단체도 이에 충실한 단체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모두 자선이라는 명목하에 각 종교의 홍보에 은근히 많은 의미를 부여함을 알게 되었다. 결국 씁쓸함만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운동에 있어서 사회적 약자는 어딘가에 의지하기 쉽고 이는 즉 그 종교에 쉽게 영향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특히 책의 가장 마지막에 다루어진 기독교의 소망교도소를 통한 교정복지운동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흔히 보았던 기독교의 재소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이런 기관의 설립을 통해 한 분야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여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불교에서의 환경운동의 영향력처럼 말이다. 이를 보았을 때 종교와 사회운동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도의 목적이 아닌 그리고 분야의 구분을 통해 시행되어서는 결코 그 취지의 올바른 실천이 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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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10-07-0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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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명 교수 ‘한국의 종교운동’ 펴내

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152673



노길명 교수 ‘한국의 종교운동’ 펴내

발행일 | 2005-10-09 [제2469호]


다종교 문화 속 종교가 나아갈 길은?

“종교 문화도 양적성장에 따른 질적성장 이뤄져야”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한국 사회는 유교가 그 권위와 영향력을 상실한 뒤, 바야흐로 다양한 종교들이 경쟁하는 다종교 상황을 맞게 됐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거쳐오면서 종교 시장은 대폭 활성화됐고,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든 삶을 해석할 의미 체계를 모색함으로써 종교적 열기가 높게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양적인 팽창은 바로 그러한 상황들에 기인하며, 그리스도교와 불교 등 기성 종교 외에도 수많은 신종교, 특히 최근 들어서는 개인 삶의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추세에 따라 신흥영성, 혹은 유사영성운동의 바람도 거세게 불어왔다.

한마디로 한국의 사회 상황 안에서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이러한 종교계의 넘치는 활력과 활성화라고 할 수 있다.


오랫 동안 신종교현상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이론만 아니라, 현장에서 탐구해온 노길명 교수(고려대학교 사회학과)가 펴낸 ‘한국의 종교운동’은 바로 이러한 한국의 종교 상황, 그리고 이 종교와 종교인들이 형성해온 종교 문화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의 기본적인 시각은 한국 사회의 종교계가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그것이 곧 바람직한 종교 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전한 종교 문화를 형성해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종교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사회 발전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도 증대된다.

저자는 이에 따라, 양적 성장에 맞는 건전한 종교 문화의 형성은 한국 종교계의 큰 과제임을 지적한다. 이 책은 그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종교계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책은 모두 9개장으로 나눠진다. 조선조 종교문화의 성격과 종교운동의 분화 과정을 일별하는 제1장에서부터, 미륵신앙운동, 비결신앙운동, 그리스도교계 천년왕국운동 등을 분석하며, 천주교와 개신교 신앙의 도입과 전개, 그 성격을 살펴본다.

아울러 최근 들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영성운동에 대해 살펴보며, 말미에 한국 종교문화의 성격을 훑고 종교계의 과제, 즉 건전한 종교 문화의 형성을 위한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시대적 변화의 물결, 그리고 다종교 상황이라는 한국적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데, 이는 종교간 이해와 협력, 보편적 가치와 윤리의 제시, 세속적 가치와의 거리 유지, 종교 문제의 공론화 등을 올바른 종교문화 형성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출판부/319쪽/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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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종교의 성격과 가톨릭 신앙 노길명 2013

교회와신앙


한국 신종교의 성격과 가톨릭 신앙


2013년 12월 02일 (월) 
노길명 교수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노길명 교수 /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1. 한국 신종교의 현황

한국의 신종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 까닭은 많은 신종교들이 교리나 의례 또는 조직체의 체계화가 미흡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으로 간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분명한 조직체계와 명칭을 가졌다 하더라도 기성종교와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거나 00회, 00협회, 00학회, 00연구회 등과 같이 일반 사회단체나 학술단체로 오인할 수 있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밀교(密敎)의 형태로 은밀히 전파되는 경우가 많으며, 생멸성쇠(生滅盛衰)의 흐름도 빨라 그 실태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신종교의 수효는 조사기관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동안의 실태조사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사회에서 등장한 신종교의 수효는 600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 중 상당수는 이미 소멸되었지만, 아직도 300개 내외의 신종교들이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의 신종교들은 크게는 4가지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민족종교계열 신종교들이다. 한국 전통종교인 불교나 유교에서 분파된 종단들과 함께 한국의 전통종교사상을 나름대로 수렴하여 체계화시킨 동학계, 정역계, 증산계, 단군계, 각세도계, 찬물교계, 무속계 종단들이 이에 포함된다. 둘째는 그리스도계 신종교들이다. 개신교에서 분파된 신종교들과 가톨릭 신자가 만든 신종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외래계 신종교들이다. SGI한국불교회, 여호와의증인, 국제도덕협회 등과 같이 일본이나 미국 또는 중국 등 외국에서 들어온 신종교들이 이에 포함된다. 넷째는 탈현대성에 따라 확산되는 뉴에이지운동, 정신세계운동, 기수련문화운동 등과 같은 신영성운동이다.

2. 한국 신종교운동의 전개과정

한국의 신종교운동은 ‘근대’(近代)의 충격에 대한 대응운동으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밀어닥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충격은 오랜 동안 외부세계와 단절되어왔던 한국사회를 세계사의 흐름 속으로 편입시켰지만, 이러한 외적 충격은 조선 후기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내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한국사회를 급속한 위기상황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은 두 가지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하나는 지배계급이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함으로써 계급간의 차이와 갈등을 수반하는 계급모순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사가 민족의 자주적 결단보다는 외세 열강의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는 민족모순이었다. 이 두 가지 사회적 모순의 심화는 민중에게 고통을 부여하는 한편, 민족문화와 국가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신종교운동은 이와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 등장하였다. 신종교의 창교자들은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는 한편, 이로 인해 고통 받는 민중의 해방과 구원, 밀려오는 외래문화의 충격 속에서 훼손되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그리고 위기를 맞고 있는 국가정체성의 확립 등을 약속하면서 신종교를 창교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신종교운동은 그 자체가 민중과 민족문화 그리고 민족국가의 정체성 위기에 대한 대응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민족종교계열뿐 아니라 그리스도계 신종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계 신종교의 발생에는 서구 선교사들의 신앙유형과 선교정책도 크게 작용하였다. 선교사들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미국선교사들의 신앙유형은 성속이원론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족사에 대한 대응보다는 초월적이고 내세 중심적이며 개인중심적인 신앙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들은 철저한 정교분리정책을 표방하고 반일운동에 대한 참여를 금지시키면서 개교회중심주의 정책을 지켜나갔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신앙유형과 선교정책은 신학적 이단종파운동, 반선교사운동, 반교권운동, 무교회주의운동, 신비신령주의운동, 환상적 애국적 종파운동 등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종파운동은 한국 그리스도계 신종교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 활동 중인 대부분의 그리스도계 신종교들은 이러한 종파운동과 상당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3. 신종교운동의 창교자와 참여자

대체로 본다면, 신종교 창교자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그 하나는 자신이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거나 극도의 고통을 체험한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 또는 타인이 겪는 고통에 나름대로 고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나 타인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였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해결방안이나 해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에는 종교를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성종교를 통해서도 해답이나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였을 때, 이들은 여러 종교에서 얻게 된 수련방법을 통해 나름대로의 종교적 체험을 갖게 되고,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인정하고 따르는 추종자를 얻어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게 된다.

신종교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빈곤자,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자, 영성적 갈증이나 도덕적 결핍을 느끼는 자,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연대성을 상실한 자 등 다양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억눌리거나 상처받거나 고통 받는 자들이다. 또한 이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위로받기 위해 기성종교를 다녔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종교성이 낮은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사이비종교, 사교, 유사종교, 이단 등으로 불리면서 지탄받는 신종교를 자신의 첫 번째 종교로 택하지 않는다. 신종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이고 나름대로는 기성종교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성종교에서 마저도 소외되거나 상처받은 ‘이중의 실패자들’이 대부분이다. 신종교가 기성종교에 대해 강한 비판과 배타를 나타내는 것은 이러한 점과도 관련된다.

신종교의 창교자들은 단순한 종교지도자가 아니다. 그들의 대다수는 ‘낡고 사악한’ 이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할 ‘메시아’로 신봉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종교 참여자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로부터 삶의 분명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받는다. 또한 유사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동료신자들과의 강력한 연대의식과 응집성을 통해 ‘삶의 기반’을 찾는다.

4. 신종교의 전교방법

신흥종교들은 기성종교보다 역사가 짧다. 따라서 그들의 교리나 의례나 조직체계는 기성종교보다 미약하다. 이들이 하나의 종교집단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서로 모여 의지하면서 위로받을 수 있다는 이들의 공동체적 특성, 또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불안감을 지닌 사람들이 무한한 권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는 창시자나 교주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함으로써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신흥종교의 전교방식은 교리나 의례를 강조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삶에 호소하는 방식이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이 포함된다.

그 첫째는 강력한 집단공동체의 구조적 성격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유사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동질적인 집단구조와 새로운 종교로서의 소공동체적인 성격은 집단에 대한 적응력과 충성심을 높여줌으로써 친족집단이나 지연집단과 같은 삶의 공동체적 기반을 상실하거나 사회적 적응에 실패한 경험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삶의 새로운 터전과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친밀한 인간관계의 형성이다. 최근 상당수의 신종교들은 설문조사형식을 빌어 상대방의 인적사항과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파악하거나, 문화예술 동아리나 성경공부 반에 가입을 권유하면서 전교대상자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한 다음에는, 주로 전교대상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슴 속에 맺혀 있는 상처나 응어리를 털어놓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위로하면서 자신도 유사한 처지와 경험을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자신의 종교를 통해 그러한 문제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음을 약속한다.

셋째는 현세 기복에 대한 약속이다. 이들은 내세 구원을 별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믿으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축복을 받게 된다고 강조하면서 접근한다. 특히 치병은 많은 신종교들이 강조하는 주요 전교방법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와서 안수를 받거나 기도회에 참여하거나 헌금을 하게 되면 어떠한 불치병이나 난치병도 치유될 수 있다고 약속함으로써 고통 받는 병자들과 그 가족들의 관심을 촉발한다.

넷째는 신비체험의 약속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집회에 참여하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되거나,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집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우환들은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영혼이 평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들을 편한 곳으로 보내드리는 천도제(遷都祭)를 드려야 한다며 많은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섯째는 성경에 대한 자구적 해석이다. 신종교는 역사가 짧기 때문에 교리나 신학의 체계성이 기성교회보다 미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계 신종교들은 성경의 배경이나 문맥은 무시한 채, 성경구절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낮은 기성교회 신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그리스도계를 포함하여 대다수의 신종교들은 가톨릭신자들을 우선적 전교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신종교 참여자들 가운데는 가톨릭신자 출신이 대단히 많다. 또한 가톨릭에서 신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시 가톨릭신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적극적인 전교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신종교의 집단응집력은 대단히 강하다. 신종교가 지닌 구성원들의 유사성과 집단의 소규모성,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상처와 열망을 풀어내는 열광적인 집회, 메시아로 간주되는 교주의 강력한 카리스마, 간단하고 분명하면서도 쉬운 교리와 주장, 임박한 종말론과 심판에 대한 강조, 자신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저주받고 심판 받을 사람들’이라는 이원론적 대립구도, 그리고 늘 함께 기도하고 전도하는 공동생활양식 등은 집단에 대한 참여와 응집성을 강화시키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도와 수련 그리고 교육에 따른 환상이나 환청 또는 신체적 이상과 같은 신비스러운 체험은 이러한 분위기와 응집력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5. 한국 신종교의 공통교리와 사상

한국에서 발생한 신종교는 대단히 많다. 또한 그들의 계보, 경전, 조직, 규모, 활동 내용은 저마다 다양하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 신종교의 교리나 사상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경전이나 각종 출판물 그리고 설교의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대단한 공통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한국의 신종교들이 동일한 역사적 체험과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발생하였으며, 현실 사회 상황에 대한 민중의 진단과 종교에 대한 욕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한국 신종교의 교리나 사상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기본 바탕은 종말론이다. 민족계열 신종교에서는 이를 ‘개벽’(開闢)이라 하고, 그리스도계 신종교에서는 ‘말세론’이라고 한다.

종말론은 신종교 신자들의 사회적 배경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신종교들은 현실의 세계는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는 장소이며, 악의 세력들이 지배하는 장소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악의 세계, 낡은 질서는 하루 속히 타파되고 정의가 실현되는 지상천국(地上天國), 후천선경(後天仙境), 천년왕국(千年王國)과 같은 새로운 세계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오늘날은 이와 같은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대전환의 시기, 즉 ‘말세(末世)’ 또는 ‘개벽(開闢)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이 시기에는 삼재팔란(三災八亂)과 괴질(怪疾)이 엄습하게 되며 ‘대 심판’이 있게 되는데, 그동안 권력과 부(富)를 향유하던 자들은 모두 멸망하고 억눌려 있던 약자(弱者)들만이 새로운 이상세계에 참여하여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재난과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비법으로 주문(呪文)을 암송하거나, 부적(符籍)이나 증표를 지니게 하거나 또는 특정 지역으로 도피하도록 가르치기도 한다. 이러한 교리에는 인간존엄에 대한 강렬한 신념과 함께, 그동안 억눌리고 고통받아온 민중의 한(恨)을 해소하려는 강한 열망이 내재된 것으로 보여 진다.

개벽이나 말세 교리에는 메시아에 관한 교리가 따르게 된다. 신종교에서는 ‘말세’ 또는 ‘개벽의 시대’에는 이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펼쳐 줄 ‘심판주’나 ‘구세주’ 또는 ‘미륵불’이라 불리는 메시아가 출현하게 된다고 강조하면서, 그는 바로 자기 종교의 창시자 또는 교주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종교의 창시자나 교주들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이며,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창시자나 교주에 대한 신앙은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연결된다. 한국 신종교의 교주나 창교자가 메시아라면, 한국은 하느님이나 절대주로부터 선택받은 나라이고 한민족은 메시아를 영접한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상을 비출 ‘새 진리’, ‘새 진법(眞法)’, ‘새 원리’는 한국에서 나오게 되고, 앞으로 전 세계는 한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통합되며, 한국이 세계역사를 주도하는 상등국(上等國)이 되고, 한국어가 세계의 ‘조국어’ 또는 ‘모국어’가 되며, 후천선경이나 지상천국도 한국에서부터 실현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연결된다. 또한 이러한 믿음은 한민족은 하늘로부터 특수한 소명을 받은 민족이라는 신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선민의식에는 그동안 외세열강에 의해 손상되어온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강한 열망이 내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신종교들은 계보나 연원에 관계없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우선, 한국의 신종교들은 한국인의 사유형식인 조화와 융합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교리체계를 구성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종교적 유산들을 수렴하고 새롭게 체계화하려는 강한 열의를 나타낸다. 이들은 전통종교의 교리나 사상은 물론 민중에 의해 전승되는 재래의 민간신앙을 배척함이 없이 거의 모두 수렴하고 있다.

따라서 신흥종교의 교리는 강한 혼합주의를 타나낸다. 이러한 점은 그리스도계 신종교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통일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계 신종교의 교리 속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은 물론 음양사상, 태극사상, 주역사상, 무속신앙, 단군신앙, 정감록신앙과 함께 경우에 따라서는 춘향전과 심청전의 내용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이와 같은 전통 문화들을 계승하고 체계화함으로써 외래문화의 충격으로 손상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시도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한국의 신종교운동은 민족문화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한국의 신종교들은 억눌리고 수탈당해온 민중을 해방하려는 ‘민중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과 함께, 외세열강에 의해 손상되어온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정체위기를 맞고 있는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민족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6. 신종교와 일탈행동

신종교가 지닌 비판적 성향과 급진적 성격 그리고 교주를 중심으로 한 강한 응집성과 열광성은 때때로 일탈행동이나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 사회 체제와 기성종교에 대한 태도가 비판적일수록, 또한 새로운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이 강할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시한부종말론을 강조하는 집단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선, 신종교가 나타내는 교주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는 집단 응집성, 기존의 가족관계나 인간관계 및 사회질서에 대한 정면 거부와 그에 따른 외부세계와의 차단 등은 때때로 일탈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가정, 직장 또는 직업의 포기, 재물수탈, 혼음과 성폭력, 노동력 착취, 등은 신종교에서 일어나는 일탈행위의 흔한 사례들이다. 또한 ‘여호와의 증인들’이 병역의무는 물론 애국가 부르기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고 헌혈과 수혈을 거부하는 것도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종교나 이단 종파의 일탈행동은 흔히 도피적 행동이나 공격적 행동 또는 집단 히스테리나 광란적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도피적 행동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새로운 질서를 펼칠 수 없다고 느낄 때 특히 나타난다. 도피적 행동은 기존 사회와의 접촉을 단절하고 자기들만의 독특한 집단적 삶을 영위하면서, 구세주나 심판주가 출현하여 새로운 질서를 펼쳐줄 때를 기다리는 형태로 나타난다. 많은 신종교들은 한국의 계룡산이나 모악산을 심판 때 구원받을 피난처나 또는 지상천국이 건설될 복지(福地)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신앙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신종교의 도피적 행동 사례로서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전도관의 ‘신앙촌’을 비롯하여, 1989년 가정주부 74명이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가출하여 야영생활을 하였던 것,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한국에서 크게 성행했던 소위 1992년 휴거론을 신봉하는 종파들의 집단생활 등을 들 수 있다.

신종교에서 흔히 나타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전면적 거부와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대한 조급성은 광조성(狂操性)을 일으켜, 기존질서 타파를 통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앞당기려는 공격적 행동을 촉발하기도 한다. 기존의 정치제도나 경제제도, 교육제도, 가족제도 등을 낡고 사악한 제도라고 규정하여 거부하는 행위나, 자신들을 비판하는 대상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하는 행위 등도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사회의 지도층이나 물리적 시설을 공격하는 행위를 새로운 세계에 동참하도록 ‘선택받은 자’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성스러운 행위로 간주하기도 한다.

한편,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신종교집단에서의 이탈은 다른 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쳐 집단응집력의 약화를 가져오거나 집단내부의 비밀을 외부세계로 알릴 위험성을 높이게 된다. 이러한 경우, 충성도가 낮아지거나 이탈하는 신자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나 보복이 따르기 쉽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신도를 처단하는 사례들도 나타난다. 1930년대에 있었던 백백교에서의 신도 350여명 살해 암매장사건이나 1980년대 이후 발생한 영생교의 신도 살해 암매장 사건, 그리고 소위 ‘구원파’에 속한 ‘오대양’에서의 신도 32명 살해사건 등은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또한 신종교의 조급성과 광조성도 광란적인 집회나 소란 또는 집단나체예배나 혼음 등과 같은 집단 히스테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자살과 같은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1978년 남미 가이아나(Guyana)에서 발생한 ‘인민사원’(The People’s Temple) 신도 909명 집단 자살사건, 1997년 미국에서 발생한 ‘천국의 문’(The Heaven’s Gate) 신도 39명의 집단 자살사건, 2000년 3월 우간다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십계 회복운동’에서의 1천여 명의 집단 자살사건 등은 신종교 집단 자살사건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7. 신종교와 가톨릭 신앙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결단이며 투신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 행위에 속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집단에서 보여 지는 바와 같이, 교리체계가 논리적으로 맞지 아니하고 많은 사회문제를 유발하는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그러한 종교집단에 빠지게 되면 이성적 판단이나 합리적 사고방식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신종교에 대한 대응은 사후 치료보다는 사전예방에서 찾아야 한다.

신종교는 ‘병든 사회’와 그러한 사회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성종교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종교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건전해야 하고 기성종교들이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특히 기성종교의 역할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8:20)고 하신 예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 11:28)고 하신 말씀처럼, 교회가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리고 상처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피난처’, 또는 ‘구원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 그들은 ‘사이비종교’, ‘유사종교’, ‘이단’, ‘사교’ 등으로 불리는 신종교보다는 교회를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교회의 사회사목과 신자들 간의 나눔의 실천, 그리고 교회 내에서의 소공동체의 활성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신종교로 개종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신앙이 건전해야 한다. 기복적인 신앙이나 신비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몰두는 신종교의 선교전략에 쉽게 따를 가능성을 높인다. 가톨릭 신앙의 목적은 물질적인 축복과 같은 현세에서의 복락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사회 안에 실현하는 것이다(마태오 6:33). 또한 가톨릭 신앙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피하거나 해탈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 의미를 묵상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시켜 결국에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종교생활에서는 신비체험을 가질 수 있지만, 건강한 신앙이란 신비체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비체험을 통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심령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 조화를 이룰 때, 즉 기적이나 계시에 못지않게 성서와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을 때 신종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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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성 운동이란 무엇인가? -뉴에이지와 정신세계 운동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신영성 운동이란 무엇인가? -뉴에이지와 정신세계 운동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신영성 운동이란 무엇인가? -뉴에이지와 정신세계 운동
기자명 한상봉
입력 2011.04.26
 

[교회를 떠나야 교회가 산다-7]

지금은 논란이 많이 잦아든 상태이지만, '신영성운동'(뉴에이지)이 주는 실제적 파급력은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특히 기성 교회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제도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신앙, 대중의 영적 갈증에 응답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게 드리운 그늘 속에서 그나마 희망을 한끝에 잡게 하는 까닭이다. 이런 개인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영성운동은 공동체 상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상업주의와 연계되어 '웰빙' 바람과 궤를 같이 한다. 이를테면, 중산층 중심으로 불어오는 신영성운동을 중심으로 기성 교회가 여기서 배워야 할 점과 신영성운동의 한계 역시 짚어볼 것이다.

지금부터 신영성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헛갈리는 분들을 위하여 먼저 한국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가 밝힌 신영성 운동에 대하여 규정한 내용을 간략히 알려주는 게 도리일 것 같다.

신앙교리위원회에서는 신영성 운동을 서양에서 시작된 뉴에이지 운동, 일본에서 시작된 정신세계 운동, 기(氣)수련 운동으로 분류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일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건강과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변용을 이루며, 그 결과 새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여기에는 단전호흡, 마인드 컨트롤, 요가, 초월명상, 염력 등이 속한다. 이를 두고 교리위원회에서는 초감각적 초월적 존재와 교감을 추구하는 사탄 숭배, 귀신 숭배, 강신술이며, 비술이나 영술을 통해 영적 세계나 조상의 영과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무속이나 연금술이나 불교에서 많이 행하는 좌선 명상 등도 포함될 수 있겠다.

한편 뉴에이지 운동은 자연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자연에 대한 정복보다는 조화와 합일을 추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자연의 무한한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생태학주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녹색평론>이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잡지를 비롯하여 태교음악 등 뉴에이지 음악 등이 여기에 포함되며, 현대물리학이 주장하는 양자물리학이나 ‘지구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본 가이아 이론 등 모든 게 이 부류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뉴에이지 운동은 서구종교의 사상이나 수련방법에 동양의 사상이나 수련방법을 접합시키려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사상을 동양의 범재신론, 윤회사상, 기 이론으로 해석하고, 하느님 체험 역시 동양적 수련방법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른바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초월성, 내재성, 과정성에 대한 통합적 성찰이 뉴에이지적 사고로 단죄 받을 수 있겠다.

한편 정신세계 운동은 1970년대에 물질적 풍요와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근면이나 절제, 또는 집단과 국가를 강조하는 ‘일본정신’보다는 개인의 안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평화를 추구하게 되면서 나타난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명상, 요가, 신비주의, 오컬티즘, 초능력, 신비체험을 강조하며 “가족이나 혈연집단, 국가, 사회의 안녕이나 평화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내면적인 세계에 대한 몰입을 중요시한다.” 한국의 ‘정신세계사’에서 발행되는 모든 책이 이 정신세계 운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신앙교리위원회에서 정신세계 운동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차동엽 신부가 <사목> 2004년 4월호에 게재한 글 중에서 뉴에이지 운동이 1960년대 미국의 반(反)문화운동 때문에 확산되었다는 설명과 운동의 기원에서 비슷하다. 차 신부는 “이들은 성장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반발을 넘어, 오랜 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기존의 가치, 제도, 권위, 규범, 신앙 등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갔다. 1960년대에 서구사회를 휩쓸었던 히피 운동, 프리섹스 운동, 여성해방 운동, 반전 운동, 학생 운동, 자연 운동 등은 이와 같은 일련의 저항문화 운동들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저항문화 운동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 글을 읽다보면, 마치 뉴에이지 운동이 군사적 폭력과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모든 운동을 바탕으로 해서 확산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말 그대로라면 뉴에이지 운동의 바탕에 모성적 평화주의가 깔려있다는 반증도 되는 것이다. 실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기 마련인 ‘프리섹스 운동’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뭘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종류로 히피문화 역시 최근에 교회안팎을 막론하고 각광을 받고 있는 무소유적 ‘공동체 운동’을 낳은 산파라는 점에서 복음적 측면을 간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정신세계 운동 역시 일본의 집단주의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행복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일본의 전통적 ‘군국주의’를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 오히려 축복할만한 경향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국가주의는 안일한 개인보다 더 파괴적임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

뉴에이지운동의 본격적 전개 시점에서 본 기독교.. : 네이버블로그

뉴에이지운동의 본격적 전개 시점에서 본 기독교.. : 네이버블로그

뉴에이지운동의 본격적 전개 시점에서 본 기독교 성찰 뉴에이지운동과 기독교 성찰 / 소논문

2016. 8. 2. 11:51

https://blog.naver.com/csw5270/220777550359

뉴에이지운동의 본격적 전개 시점에서 본 기독교 성찰
최 석 우

(2011.12. 제3권. 한영연구논문)


서 론

기독교적 입장에서 뉴에이지는 환영 받을 수 없는 운동임은 확실하다. 이 운동의 핵심적 사항들이 기독교의 중심적 교리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뉴에이지 운동은 하나님의 자리에 피조 된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꿔 말하여 이 운동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거센 항의를 받아 왔다. 기독교의 뉴에이지에 대한 비판은 결국 교리적 측면이며 이것을 밝히기 위해 거시적 방법을 사용했다.

뉴에이지 운동은 현대에 이르러 필연적으로 자리를 굳건히 잡고 있다. 우리는 이쯤에서 뉴에이지가 기독교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을 만큼 기독교에 대한 독소적 요소가 풍성함에도 굳건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시각으로는 해악적일지 모르지만 비기독교적으로는 환영받을 만한 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뉴에이지의 태동과 진행을 함께 연구함이 현재 자리 잡고 있는 뉴에이지의 정체를 완전하게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연구 방법에 있어 시기적으로 뉴에이지의 태동과 관련하여, 특별히 그것이 두각을 나타나게 된 때를 중점으로 연구를 하려 한다. 물론 과거의 것을 들춰내어 현대에 적용시키려는 작업이 촌극과 같은 것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비편일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수호하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에 필자는 오히려 성찰을 염두에 두려 한다. 즉 시대적 책임이 기독교에도 있음을 상기하여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본 연구는 먼저 뉴에이지의 시작점을 살펴보고 이어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배경을 조명할 것이다. 여기에는 뉴에이지가 환영받을 이유가 있었고, 또한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이것들을 대치할 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에이지 운동의 태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통해 자성하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Ⅰ. 뉴에이지의 태동

뉴에이지의 움직임은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중심이 된 초월론은 진리를 찾는 도구로 직관력을 우위에 두었다. 그러므로 에머슨에게 있어서 신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러셀 챈들러(Russell Chandler)는 초월론자들이 동양의 경전을 절충적으로 빌려 왔고, 그것들이 자율성과 개인적 결정을 미국적 기준에 적합하도록 혼합시켜서 130년 후 각광을 받게 하였고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자리를 잡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에머슨 사후 100년 뒤 매릴린 퍼거슨(Marilyn Ferguson)은 직관을 초월적 논리로 해석하고 에머슨의 뒤를 잇고 있음을 공식화했다.

또 다른 움직임이 19세기 말 헬레나 블라바츠스키(Helena Petrovna Blavatsky)에 의해 설립되어진 신지학회를 통해 등장한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신지학은 초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연구되어온 대 지식으로 일종의 계시라고 주장한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지혜의 대사라는 초인은 진화하여 인간 이상의 단계, 즉 영통한 단계에 도달하고 동시에 자연의 창조자와 합체하여 자연을 보게 된다는 것이며 바로 이런 견해 속에서 신지학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필수적인 사안은 진화다. 신지학의 존재 가치도 이것으로 설명하는데, 만물형태의 진화를 통해서 생명진화의 학설을 제공하는 희망찬 진화설을 설명하는 것이 신지학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들의 주장에서 신의 개념은 비인격적인 것이 되며 모든 피조된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물활론을 주장한다. 이것을 통해 오컬트(Occult) 부흥의 전기가 예고되었다.

뉴에이지 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블라바츠스키는 심령술사로 신지학협회 3대 회장이었던 앨리스 베일리(Alice Bailey)에게 심령술의 영향이 전가되었다. 앨리스 베일리는 매우 활발한 활동으로 뉴에이지의 실질적 기초를 수립했다. 19권에 이르는 책을 지었으며 심령과 비술적 명상에 기반을 둔 아르카나(arcana) 학파를 창설했다. 1922년에는 루시퍼 출판사(Lucifer Trust)를 설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월드 굿 윌(World Good Will)이라는 유엔 산하 비정부조직을 이끌어 내었다. 이 기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 준비를 도우는 선한 이들의 협력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베일리의 의도는 뉴에이지의 세계적 시민권으로 단일의 세계 정부를 꿈꾸고 있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1913년 신지학에서 파생되어진 인지학 역시 신비학과 관련이 있다. 인지학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에 의해 생겨났는데, 인지학을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라고 하였으며 사람 안에 있는 정신을 우주 안에 있는 정신으로 이끌고자 한다고 하면서 사람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바람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감각-인식이 끌고 간 경계에서 인간 영혼 자체를 통하여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뉴에이지는 과학을 또한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는데, 19세기 발생하여 인류와 세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견해를 불신케 함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론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은 부패하거나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진보하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이런 인본주의 바탕의 진화 과학이 피조 된 세계의 궁금증을 해결함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필요성은 자연히 감소되었다. 소위 이적이란 유(類)가 비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설명되기 시작하였다. 뉴에이지 과학은 이성 밖 분야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처럼 뉴에이지는 중세 후기 르네상스 이후 더욱더 보강된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직관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 등을 기반으로 점차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0년대 세계적 혼잡의 기류 틈새 속에서 뉴에이지는 새로운 대체적(代替的) 세계관으로서 마치 시식거리와 같이 제공되었으며 1970년대 드디어 본모습을 가지고 당찬 활기를 띠고 활동하게 된다.



Ⅱ. 뉴에이지의 성격



뉴에이지의 확산 일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1960년대 반문화 운동의 즈음 무렵에 거의 일치하고 있다. 1960년대의 세계적 상황은 김외식의 말을 빌리자면 ‘혁명’ 이란 한 단어로 소개될 수 있다.



1. 대체종교

뉴에이지의 종교적 성격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궁극적 삶을 위한 문화운동이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초자연적 절대자로의 회귀라는 면에서 그러했다. 실제로 마약 복용으로 인한 황홀 경험은 중세 수도사들이 고행으로 얻은 경험과 같은 대아(大我)와의 합일 체험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대두되면서 초탈의 방법으로 동양종교에 눈길을 돌렸다. 비틀즈의 단윈 중 한사람은 “동양종교가 나에게 신 중의 하나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라고 하였다.

뉴에이지는 반문화운동에서 요구하는 새 의식에 대한 대답에 적극적이었다. 뉴에이지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타파하려는 민중들의 요구에 전인적 세계관으로 답했다. 뉴에이지는 조각나고 분리된 문화를 융합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주었다.

이런 차로 뉴에이지는 대체종교로서의 만족스러운 변환기능과 함께 사회, 문화, 정치적으로도 평화추구의 목적을 강하게 지님으로 인해 기존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일탈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만들어주었다.



2. 사회운동

반문화운동의 사회운동으로서의 문화적 특성으로 먼저 종래의 적자생존이란 다윈의 자연관을 거부하고 모든 생물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개념적인 지식보다 감각적인 경험을 중요시하고 있으며, 육체적으로 자연에 밀착한 생활양식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합일을 갈망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핵가족 같은 인위적인 사회단위보다 원시사회처럼 집단적 공동생활을 주장하며, 경제적인 성장이나 기술적 발전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연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뉴에이지는 이것들을 동양의 종교들과 혼합하여 대중문화화 하였다. 사회학적으로는 이것을 변형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하였다. 즉 사회와 개인을 변용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자기 변용을 이루는 다양한 운동들은 초능력 개발을 위한 기공, 단전, 초월명상, 요가, 초감각적 지각, 마인드 컨트롤 같은 것들이 있다.

비록 이것들이 사회운동의 결과로 이어진 대중적 성격을 가진다고 하지만 이 운동에 포함된 중심적 사상은 신과의 합일을 위한 비의적(秘儀的) 인본주의 사상이다. 즉 인간 안에 있는 초월적 재능을 개발, 고양하여 우주와의 합일이 되는 것, 곧 어떤 조물주와 같은 신적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Ⅲ. 뉴에이지와 반문화 운동의 관계



뉴에이지를 사회 운동적 성격으로만 한정한다면 굳이 반박하거나 비판 받아야할 내용들이 포함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이번 장에서 논의되어질 주제들은 일반적으로 악의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있듯이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이 주제들도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 치명적이다. 이들 주제들 모두의 근저에는 동양 종교의 비의적 요소와 비성서적 정서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 반문화운동

1960년대 세계는 매우 암울한 시기였다. 프랑스에서는 5월 혁명으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쿠바의 위기 속에 나타난 핵전쟁 위협, 동남아의 베트남 전쟁 등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1960년대를 대표하는 굵직한 사건들이다.

이미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 1차 전쟁 그리고 미소간의 냉전 같은 상황 속에서 세계는 지쳐있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은 민족주의의 정치적 개념이 그 중심에 있었다. 가장 참혹한 제2차 세계대전도 이념적 갈등과 경제위기가 만들어낸 참상이었다. 여기서 발생된 문화적 특징은 비트세대(The Beat Generation)의 등장이다. 이들 역시 기성세대의 주류 가치관을 거부하였다. 이들을 통해 1960년대 자유분방한 청년 문화의 시대가 문을 열게 된다.

이같이 반문화운동은 전통적 제도들의 약속이 쇠퇴하고 부패하는 징조를 보임에 따라 소외와 이탈 현상이 힘을 얻으면서 자라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모습을 헌팅턴은 “저항의 시대”, “분노의 시대”, “폭로의 시대”라는 세 가지로 묘사했다. 반문화운동의 중심에는 인간성 회복의 요구가 짙게 깔려있었으므로 반문화의 중심내용은 내적 자유, 내적 풍요 같은 자신의 의미 확대였으며, 종교적 투사, 문화적 억압, 기술만능 같은 여러 비인간화적 요인들로부터의 회복에 있었다. 그리고 일시성, 다양성의 기술문명 특징으로부터 인간의 내면 개발추구도 중심에 있었다. 초월이라는 단어도 반문화와 관계가 깊다. 그것은 미래적 초월, 인간 내부적 초월을 강조했다. 김외식도 반문화운동의 핵으로 초월주의를 말하고 있으며 황홀 체험운동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반문화운동은 정치, 문화, 집단 등과 관련하여 나타난 의식 혁명이었으며 사회 운동이었다. 이것은 또한 대중문화와 만나면서 기술진보와 물질문명을 거부하는 진영과 이것을 인정하여 더욱 개발시키는 진영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거부하는 것은 탱크, 최루탄, 이데올로기, 기계화, 경제개혁, 컴퓨터 같은 것들이며 의식의 혁명적 도구로는 록음악, 공동체 생활, 동양적 신비주의, 마약, 여성해방 등이었다.

여기서 나타난 반문화운동의 결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뉜다. 전자는 기존 자유주의의 가치가 재평가되었다는 결과이다. 즉 개인의 욕구와 희망, 개인의 주도력, 창의력, 시장의 자유경쟁 같은 자유주의에서의 가치들이 새삼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게 된다. 따라서 사회 전체 이익을 강조하는 공동체 의식으로 등한시된 개인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기존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입지는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반문화운동 후 미국은 이른바 ‘미국병’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한다. 이 항의의 시대, 폭력의 시대 후 미국은 전통적 가족제도의 혼란을 야기했다. 이혼율의 증가, 방만한 성생활 만연, 특히 이것은 에이즈의 급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빈곤층의 증가, 범죄의 동반적 상승이 있는데 범죄의 다른 특징은 마약과의 밀착과 관련이 있었으며, 환경오염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반문화운동의 세대들이 바라보는 기독교는 매우 우울했다. 로버트 존슨(Robert L. Johnson)은 라이히의 말을 빌려 반문화 세대가 바라보는 기독교는 인간을 새롭게 하는 종교로서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다른 곳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교회는 예언적 사명, 신비적 사명, 목회적 입장 모두를 실패했다.” 그루두이스(Douglas R. Groothuis)는 좀 더 강도 높은 비판을 한다. “잠자는 교회의 앉은뱅이 영성과 지쳐빠진 세속 인본주의, 물질주의 둘 다 ‘새의식’의 문책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장 베르네트(Jean Vernette)도 뉴에이지의 급속 확산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같이 급속히 확산된 결과의 이유로서 사회나 교회가 제공하는 모델은 인간의 욕구나 필요성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결책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발버둥 쳤다고 지적한다.



2. 강화된 인본주의

인도의 구루(Guru)인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는 자기에 대한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상태를 죄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 그 자체를 신성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에게서의 신성은 인간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부분을 일컫는다. 라즈니쉬에게 있어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공동체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책 『기독교와 선』8장에서 다루는 가족에 대한 의견에서도 그는 가정을 공동체로 바꿀 것을 강조한다. 가족은 서로의 이기주의로 인해 행동의 제한이 주어지지만, 공동체는 자신의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원만한 구성이라는 것이다.

계몽주의 이래 발전되어 온 인본주의는 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음에 분노했다. 1960년 이래 나타난 반문화는 카프라(Fritjof Capra)의 지적처럼 융합보다는 자기주장을, 종합보다는 분석을,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을, 종교보다는 과학을, 협동보다는 경쟁을, 보전보다는 확장에 편중한 결과 사회적, 생태계적, 도덕적,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된 것으로 보았다.

반문화의 요구는 산업화된 그들 삶의 불만족에 대한 해결이었다. 뉴에이지는 이것을 상호의존, 불가분의 관계라는 도식으로 만족을 주었다. 맥클레인(Shirey MacLaine)은 그의 저서 『빛 안에서 춤』에서 주장하기를 천국은 스스로에게 주어졌으며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자유가 주어진다 하였으며, 또 주장하기를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기에 저마다의 자신들은 우주가 된다는 것이었다.

카프라는 과학과 동양 종교를 하나로 묶어 해답을 제시했는데,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답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유기적, 전일적, 상대적의 용어들로 그의 물리학을 피력한다. 그의 이런 입장은 우주를 수많은 물체로 이루어진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진 분할할 수 없는 역동적인 전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 또는 모든 피조물과 창조자는 하나가 된다.

뉴에이지 이론의 기초는 “만물은 하나”라는 사상이다. 여기서 만물은 신이라는 이론도 도출된다. 그 결과 인간이 곧 신이 되는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오직 의식의 변화에서만이 가능하므로 서구 문화에서 제한되고 억눌린 참된 정체성을 계몽, 즉 명상이나 요가, 마인드 콘트롤 같은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삶에서 이런 방법들을 통하여 그리고 계속되는 진화적 윤회의 삶을 통하여 완전한 신의 경지인 브라만(Brahman)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달라이라마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철인이라고 칭송한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ti)는 종교가 한계를 주장하면서 서로를 분리시키는 기능으로 한정하고, 우리가 믿는 신에 대해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미지이며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이미지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신성의 축복이 주어진 사람은 내적으로 철저하게 혼자일 수 있는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존재 가능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뉴에이지는 이 세계의 모든 혼잡이 과학적 계몽으로 점철되어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파편화된 것으로 진단하고 오직 모든 것을 하나로 합체시킴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대립과 갈등이 해소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 새롭게 강화된 인본주의는 유일한 신개념조차도 대립적 요소로 간주했다. 과학과 이성은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도출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신을 부정했지만, 뉴에이지는 인간 삶의 풍요를 위해 신을 희생시키고 있다. 이제 인간의 과학적 이성과 직관적 감각은 하나가 되어, 인간 스스로 만들어 빠졌던 함정을 하나님에게로 책임을 떠안기고 새로운 신 부정의 길을 개척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한계상황에 대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허무주의라는 약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뉴에이지는 간과하고 있다.



3. 생태보호 이론

뉴에이지는 만물이 하나이며, 그러므로 만물이 신이 되는 사상 속에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된 것들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본다. 뉴에이지는 이렇듯 범신론적 일원론을 주장한다. 카프라의 저서들이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뉴에이지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호 의존성, 상호 보완성의 관계로 규정했다. 이것은 가이아론(Gaia theory)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요점은 “지구 전체의 생물권이 하나의 단독적인 생물 조직으로 자체의 계속적인 존재와 진화를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함께 협력하여 작용한다.”는 것이다.

반문화운동과 뉴에이지운동의 일치점은 세속적 세계관의 좌절에서 출발이라는 것이다. 세속적 세계관은 철저한 인본주의로 모든 우주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 따라서 모든 자연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할 이유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실패한 사실로 드러나자 인간은 새로운 세계관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1962년 스코틀랜드 북부에 핀드혼 공동체(The Findhorn Foundation)가 설립되었다. 이들의 강조는 상호연결성의 신비적 연합으로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은 에너지로 말미암은 가시적 실현체가 되는데, 이들에게 우주는 에너지 집합체이므로 모든 것을 신성화하며, 여기서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정령의 세계를 믿도록 유도하여 신적 실체와의 접촉을 최우선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신적 실체는 기독교의 창조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인간중심에서 자연중심의 세계관으로 변이 과정은 범신론으로 말미암는 자연스런 귀결이 될 소지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중심의 변화 경향성은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이나 지혜를 복원하고 복귀하려는 흐름을 워하게 되는데 이것이 갖는 영향력은 자못 크다. 대게 미지의 원주민들은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 매우 친밀하다.

뉴에이지는 창조자와 피조물을 혼합한 일체사상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환경 보호적 측면과 생명 경시에 대해 이것은 환영받을 만한 이론이다. 그러나 물질의 기원이나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충분한 해석을 보증하지 못한다. 뉴에이지는 지금 현 상태에서의 존재에 대한 답만 제공해주므로 일시적 쾌락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성경은 인간은 창조주의 청지기로서 자연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4. 단일적 세계정부

라즈니쉬는 국가, 종교, 인종의 구분에 대한 철폐를 요청한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상,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신성함만이 있다”고 한다. 뉴에이지의 본격적 활동이 혼란한 세계의 정황 속에서 자리 잡았음을 유추해 볼 때, 라즈니쉬 구루의 주장은 세상에 대해 설득력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뉴에이지의 세계관이 유기적 세계관이고 일원론의 개념을 가지므로 단일의 세계 정부 요청은 억지가 아닐 것이다. 이들의 합법적 활동은 UN과 함께 일하는 것에서 보장된다. 데이빗 주니어 차(David Jr. Cha)는 그의 책 『The Final Sign』에서 미국의 카터 행정부 당시 안보고문을 역임했던 쯔비그뉴우 브르제진스키(Zbigniew Kazimierz Brzezinski)의 직접적 인용을 통해 UN의 성격을 진단했다. 그는 “UN은 세계정부의 집권부가 되고 정치와 종교와 경제를 단일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모든 나라들은 핵무기를 축소 또는 감축시키고 대신에 각 나라의 군대를 UN군으로 편입시켜서 결국은 UN군이 보안을 담당하게 한다.”고 하였다. 실로 UN은 향후 단일의 세계 정부를 이루는 도구의 기능을 감당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시키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반 기독교적이어서 신경이 쓰이게 된다. UN의 정치, 경제를 통합하는 방법으로서 구체화시킨 것이 있는데 이른바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것이다. 이것의 라틴어 의미는 “Novos ordo seclorum”으로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는 자유, 곧 하나님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단일적 세계정부는 과거의 중단된 바벨탑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매우 우려가 된다.

한편 노길명의 논문 중 사람들이 뉴에이지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를 밝히는 아홉 가지 내용 중 하나가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경향에 부응하여,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열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안식, 치유, 통합, 존엄성, 조화, 평화 등과 같은 가치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이런 해법은 상당한 매력을 지닌다. 뉴에이지의 시나리오라면 세계 평화는 당연한 것이다.

뉴에이지는 국가적, 민족적, 이념적, 종교적 대립을 방지하는 것으로 변형을 다룬다. 개인의 변형뿐 아니라 사회의 변형을 위한 사회운동이 뉴에이지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뉴에이지의 윤리성이 나타나는데, 뉴에이지에 있어 선과 악의 기준은 우주적 영과의 합일이 되는가, 불화가 되는가이다.

뉴에이지에게 있어 세계 평화는 단일의 정부를 통해서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 개인의 변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변형은 인간 자신의 신성을 깨닫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타인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과 유기적인 관계임을 알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뉴에이지의 신념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신성을 위한 환생의 과정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악은 실제로 존재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기독교의 절대적 윤리의식을 비판하고 윤리적 상대주의를 격찬한다.

세계평화를 위해 상대주의적 윤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 자율성에 대한 극찬이며 동시에 인권 침해의 보호막이다. 절대 윤리를 부정하려 했던 옛 공산주의의 결말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보고 판단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결과로 이어지는 국경, 민족, 이념적 초월만이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Ⅳ. 기독교의 자성



20세기에 반문화로 탄력 있게 일어난 뉴에이지는 당대뿐 아니라 21세기의 현대에 이르러 대중문화 속에서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두고 많은 경계를 해왔다. 뉴에이지의 만물이 하나라는 기본이념은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인 유일신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한 뉴에이지가 종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므로 더더욱 기독교는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을 조금 수정해서 살펴보았다. 뉴에이지를 두둔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의 위치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얻기 위해 뉴에이지를 활용해 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뉴에이지는 기독교와 또한 사회문화적으로도 수정되어야할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에 대해 반감을 품지 않았다. 기독교는 여기서 그것이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한 대처로 활동할 때 기독교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아야 한다. 반문화운동도 문화라고 간주할 때, 이 신문화에 대한 복음주의 진영의 대처는 배격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재고해보아야 한다. 기독교는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더 나아가서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상 밖에서 존재하는 비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니버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그리스도는 문화와 사회에 몸담은 인간을 회심시키시는 분으로서 문화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인간을 회심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주제들로 세속문화와의 긴장 속에서 기독교가 검토해야할 사항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뉴에이지의 기본이념인 만물이 하나라는 사상은 인본주의를 강화시켰고, 생태보호 이론으로 세인의 환심을 받았으며, 세계적 단일정부 구성에 박차를 가하는 구실을 만족시켰다. 이것들을 조목조목 조직신학적으로 다루어 그것들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도 유익하겠지만 이미 다른 책들이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뉴에이지의 기본이념을 상대로 기독교의 나아갈 좌표를 수립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정체성 확립

뉴에이지 태동 시기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가지 기독교 진영은 전통적인 핵심 교리를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와 현대 철학으로 전통을 수정하려는 신학 자유주의로 나누어진다. 1920년에는 가히 전투적이라 불릴 수 있는 보수주의인 근본주의가 등장한다. 이처럼 교회 내부는 사회문제보다 전통적 교리 확보를 주목적으로 활동한 보수주의(또는 근본주의)와 복음의 윤리성과 종교적 체험을 강조한 자유주의 진영 간의 논쟁으로 세계 도처에 나타난 문제들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앞서 그루두이스를 통해 밝힌 대로 기독교는 시대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을 뉴에이지에게 내어준 것이 된 셈이다.

과거 뼈아픈 경험을 전통적 교리 수호, 윤리적 삶, 종교적 체험의 분쟁 속에서 살펴보았다. 실상 이들 모두는 기독교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을 통해 기독교는 문화를 개혁하는 작업을 이제 시도해야 한다.

강화된 인본주의로 뉴에이지는 세상에 만족을 주었다. 태초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켰던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대한 기독교의 해결 방안은 신개념을 바로 잡는 일이다. 기독교 강요 1권의 주제와 같이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구속주가 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주인이셨으나 인간은 그런 하나님에게 반역을 했다.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죄책이 주어졌으며 영원한 부패를 그 후손들에게 가져왔다. 이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는 길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어두움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들에게 빛을 비추셨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십자가 구원의 방법을 사용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의 정체성은 이신칭의와 성화된 삶이다. 개혁교회 신학자 칼빈(John Calvin)도 이미 기독교강요를 통해 이것을 거론했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믿음으로 신자는 성화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졌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어질 수 없는데, 결국 개혁주의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은 성화가 된다. 여기서 성화는 거룩함의 완성을 뜻하지 아니하고 완성을 향한 목적이 된다. 신자의 성화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며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된다.

기독교의 믿음은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근거를 둔다. 여기서 지식은 신적인 뜻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화는 믿음을 고백한 중생한 성도에게 나타나는 신적 작용이다. 바꿔 말하여 중생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또한 거룩한 수행이 증대되게 하는 영혼 안에서의 신적 작용인 것이다.



2. 올바른 종말사상

뉴에이지는 진화를 거듭하는 환생으로 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윤회의 삶은 그러므로 끝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염세에 대한 도피라는 허무주의의 맹점을 지닌다. 현대에 이르러 자살의 증가 추세를 보이는 현저한 이유도 결코 이런 사상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뉴에이지의 인본주의는 그들 식의 단어를 빌려 나타낸다면 차안의 세계뿐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서도 인간은 주인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이 하나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종말사상이 뉴에이지나 윤회를 말하는 동양 종교들과 다른 점은 수평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보상과 징벌이 뉴에이지 사상과 차이를 가진다. 삶에서의 절제를 요구하는 기독교와 무질서하더라도 인간 자신의 잠재력 개발을 위한 목적이라면 선하다고 보는 뉴에이지를 비교할 때, 인본주의를 기초로 하는 뉴에이지의 주장은 기독교의 종말 개념을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독교에서 죽음의 의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벌콥(Louis Berkhof)의 견해를 빌리자면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 백성의 성화를 위해 정해 두신 형벌의 극치이며 교만한 자들을 겸비하게 하며, 육욕을 억제케 하며, 세속적인 마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영적인 마음을 촉진시킨다.” 벌콥은 계속하여 신자의 죽음을 “신자의 믿음의 힘에 대한 최고의 시험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듯이 외관상 패배처럼 보이는 시간에 오히려 승리를 의식하게 되는 눈부신 현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으며, 신자의 죽음은 영혼의 성화를 완성하는 완전한 생활의 시작이 된다.”고 보았다. 비록 죽음이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영원한 이별에 대한 아픔과 때론 두려움으로 다가 올지라도 이것은 신자들의 경우 삶에 큰 유익을 가져온다. 성화의 완전의 신비인 신자의 종말은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의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서 늘 긴장 상태 속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말사상은 현실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가져가는 것에 활력을 준다. 성경은 인생의 일회성을 말하고 있으며 죽은 후 모든 이에게 나타날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 신앙 속에서의 신학

기독교가 반문화운동 세대에게 호감을 주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세속화였다.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 존재했고 사회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고 못했다. 따라서 세속적 인본주의에 지친 자들을 향해 기독교는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기독교 신학이 교리만을 유산으로 간직한다면 다음 세대에 나타날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유기적 힘을 소유하고 있다. 복음의 인도가 없다면 신자는 하나님에게 나가는 바른 길을 취할 수 없다. 믿음과 말씀은 분할 불가한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은 말씀을 근거로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 또한 함께 작용하는데, 성령은 믿음의 원천이 되며 오직 성령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인격 공동체를 실현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어 성령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공동체여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신자는 거룩한 삶의 변화와 함께 완전한 성화를 도약하며, 복음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하는 능력과 은사들로서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게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종교적 체험의 신앙 속에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기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올바른 신학이 수립된다. 이런 신학이 전파될 때 세상에서 가치 있는 지혜로, 사람을 바꾸는 능력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뉴에이지로 말미암아 나타난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곽용화는 예배의 회복을 제시한다. 예배의 회복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야 한다. 성령운동은 인간이 이루는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 활동하도록 자리를 내어줌이다. 성령은 뉴에이지에서 불확실하게 주장하는 신비적 요소를 말끔하고 확실하게 처리해 주는 구체적 능력이다. 여기서 성령은 뉴에이지와 같은 어떤 신비스런 단순한 신적 능력이 아니라 ‘인격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 된다. 성령은 신자들을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설득하신다. 따라서 성령의 구체적 활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로 심령을 변화시키고, 심령이 변화되는 순간 사랑하는 대상을 바꾸게 되고, 삶의 모습이 바뀌고, 자진하여 영적 훈련을 실천하는 가운데 사회적으로는 모범적 시민이요, 교회적으로는 친절한 봉사자가 된다.

성령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병든 영과 육을 치유할 수 있으며, 은사를 통해 교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함에 있어서 개인적 체험과 주변에도 간접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결론

반문화운동 속에서 뉴에이지는 새로운 대체문화로 선을 보였다. 이것은 기독교와 같이 체계적 조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가진 매력이었다. 뉴에이지의 주된 사상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완전히 부정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 윤리적 삶의 정의 까지도 바꾸었다. 이로 인해 비록 기독교 일각의 비판을 면하지 못했지만 성장주의, 물질주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실증을 느낀 반문화 세대들에게 만족을 주었다는 것과 인간의 고질적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소외와 무기력이 있는 곳에 교회가 요구되어야 하며, 아노미 상황에서 교회는 해답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 사회변혁의 책임을 무한히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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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4

단군 신화(檀君 神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군 신화(檀君 神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군 신화 (檀君 神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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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 초기국가시대 우리 민족의 시조이고 고조선의 창업왕인 단군에 관한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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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초기국가시대 우리 민족의 시조이고 고조선의 창업왕인 단군에 관한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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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은 7개의 이야기토막으로 엮어져 있다. ① 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삼대에 걸친 가계.

②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 지금의 백두산)으로 내려오는 것. ③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된 일.

④ 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사람 여자로 화신한 것. ⑤ 그리고 이 여인, 곧 웅녀(熊女)가 사람의 몸으로 현신한 환웅과 혼인한 것.

⑥ 그 부부가 낳은 아기를 이름지어 단군왕검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 것. ⑦ 그가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산에 숨어 산신이 된 것 등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지하고 있지만,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와는 다소간의 변화가 있다. 실제로 ①에서 ③까지는 별로 다를 바 없으나, ④와 ⑤ 사이에서 크게 달라진다.

즉, ≪삼국유사≫의 웅녀가 사라지고 그 대신 환웅의 손녀가 등장한다. 환웅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갖추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한다. 이어 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했고, 그가 조선의 지경에 의지해서 왕이 되었다고 ≪제왕운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④∼⑤에서는 크게 변화가 일어났다가 ⑥∼⑦에서는 다시 이들 문헌 사이에 크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변화가 많은 ④∼⑤부분을 두고 이들 문헌의 기록을 대비시켜보면, 적어도 주어진 겉문맥상으로는 매우 심각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단군의 어머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인물인데도 한쪽은 곰이 화신한 여인이고, 다른 한쪽은 신이 화신한 여인이다. 단적으로 ‘동물(곰)/신’의 대립이 두 기록 사이에 있게 된다. 이 ‘동물/신’의 대립은 다시 ‘지상/하늘’이라는 양분적 대립을 함축할 수 있다. 또한 다 같이 단군의 어머니이면서도 ≪삼국유사≫에서는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부계(남계)의 가통(家統)에 혼인해 들어온 여성임에 비해, ≪제왕운기≫에서는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부계 그 자체의 혈통에 딸린 여인이다.

전자가 가통 바깥이라면 후자는 가통 안이다. 말하자면, 양자 사이에는 ‘바깥 존재/안의 존재’라는 대립이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어머니가 지닌 ‘안/밖’의 대립을 존중한다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단군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도 당연히 서로 다른 대립성을 보이게 된다.

곧 ≪삼국유사≫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의 뒤를 이은 부계의 3대인 데 비해, ≪제왕운기≫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가계로서는 4대째에 속하는 여인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왕운기≫는 단군을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가통의 5대째 외손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들 문헌 사이에서 ‘3대 부계/5대 모계’라는 대립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삼국유사≫에서는 부계(남계)를 따른 3대에 걸친 일종의 신통기(神統紀), 곧 신족보(神族譜)가 기술되고 있음에 비해, ≪제왕운기≫에서는 모계(여계)를 따른 5대에 걸친 신족보가 기술되어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이들 문헌 사이에는 이야기토막 ④와 ⑤를 두고 ‘동물(곰)/신’, ‘안/밖’, ‘부계 3대/모계 5대’라는 대립적인 양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제왕운기≫는 ≪삼국유사≫보다 불과 십여 년 늦게 간행된 책이다. 그 짧은 시기 사이에 이만큼 큰 변화를 지닌 신화가 전승되어 있었다는 것은 고려 때 와서 이미 단군신화의 서사구조상의 안정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 ‘곰(동물)/신’, ‘안/밖‘, ’부계/모계‘라는 대립은 보통 차이가 아니며, 의미작용이 거꾸로 뒤집힐 만큼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겹의 대립 가운데서 ’곰/신’ 사이의 대립은 비교적 쉽게 조정될 수 있다. ≪삼국유사≫의 “곰이 약을 먹고 사람 몸을 얻어 여자가 되다.”와 ≪제왕운기≫의 “신의 손녀가 약을 먹고 사람몸을 얻어 여자가 되다.”라고 하는 이 두 표현 사이에는 기층적인 공질성이 있는 듯이 보인다. 공질성은 곰도 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착안함으로써 얻어내게 된다.

이로써 양 기록의 문제된 부분에 담겨 있는 공통의 기층을 요약하면, “사람 아니던 존재가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얻어 여자가 된다.”와 같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공질의 기층을 가진 게 사실이라면 ‘곰/신’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 아닌 다른 존재가 약을 먹고 변신해서 혼인함으로써 단군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두 기록 사이에 차이가 없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및 극동의 북부지방에 깔려 있던 이른바 곰신앙을 고려한다면 ‘곰/신’의 대립의 조정은 더욱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두 기록 사이의 대립의 조정은 여기서 그치고 만다. ‘안/밖’, 그리고 ‘부계/모계’의 조정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의 전설에 부계와 모계가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될만하나, 어떤 직접적인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편 단군신화가 전승된 기록으로 평가되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에 관한 기록 중에서, 문제된 ④와 ⑤의 이야기토막은 ≪제왕운기≫를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변이에도 불구하고 단군신화는, 첫째, ‘하늘에서 하강한 천신이 비로소 나라를 열고 왕의 자리에 나아간다.’라는 서사진행에 있어서, 둘째, 신맞이굿의 절차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셋째, 신화·전설의 복합체라는 점에서 나머지의 이른바 ‘건국신화’ 또는 ‘왕권신화’라고 일컬어지는 신화들과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공통성을 기반으로 해서 시베리아의 무속적 서사시 및 일본의 일부 왕권신화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단군신화를 가장 오래된 신화로 잡게 된다면 단군신화가 지닌 세 유형상의 특질을 우리 나라 건국신화들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단군신화의 기본적인 이야기의 축은 ‘하늘에서의 내림’과 ‘왕국의 건설’에 있음을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이 두개의 기본축에 ‘씨족의 건설’을 대입한다면 신라 6촌장의 씨족신화, 기타 여러 후대의 씨족신화의 기본적인 유형이 잡히게 된다.

≪삼국유사≫ 혁거세왕조의 기록으로 보아 씨족신화의 바탕 위에 왕권신화가 형성되었다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왕권신화와 씨족신화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나라/집(가문)’의 대립이 말해주는 차이밖에 없다.

‘하늘에서의 내림’과 ‘왕국의 건설’을 기본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단군신화도 그 밖의 건국신화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단군신화는 하늘에서 내린 제1세대가 직접 왕국을 건설하지 않고, 제2세대가 건설하게 된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두 세대 위에 하늘의 세대가 군림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신인 첫 세대는 보내는 사람(파송자) 구실을 하면서 하강하는 자를 도와준다.

첫 세대와 둘째 세대 사이에는 ‘천상의 신/지상의 신’, ‘파송자/파송되어 하강한 존재’라는 대립성이 있게 된다.

이 가운데 둘째 대립은 ‘과업을 위임한 자/과업을 맡은 자’라고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강한 신인 제2세대와 제3세대 사이에는 ‘천왕/왕검’, ‘산 위 신단수 아래의 신시/평양 도읍의 왕국’이라는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천왕/왕검’ 사이에는 ‘하늘/땅’, ‘신성/세속’ 등의 대립이 끼어 있음직한 것이다. 그것은 ‘산 위의 신단수/평양이라는 도읍’ 이외에 ‘신시/왕국’이라는 대립에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환웅은 종교성 짙은 무속적인 통치자였고, 단군은 세속과 관련된 무속적 왕이었다고 구별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자쪽에 무당 내지 샤먼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더 강하게 투영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삼국유사≫의 “바람의 신[風神], 비의 신[雨神], 구름신[雲神]등을 거느리고는 곡식과 목숨과 질병과 형벌제도와 선악의 구별 등을 다스리면서 인간세상의 삼백예순 일들을 갈무리하였다.”고 하는 기록대로라면 환웅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이른바 ‘문화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며 제도를 비로소 창조해 ‘자연/문화’의 대립을 인간들에게 주면서 그 대립을 조절한 최초의 존재가 환웅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곳의 중심은 신시라고 불렀다. 종교적 성역이었던 셈이다. 환웅은 천신으로서 다스리되, 산 속 신단수 주변의 성역을 중심으로 한 특정 공동체의 신령이자 제사장이자 통치자였던 셈이다. 그로부터 직접신인 복합관념을 찾아내기는 힘든 일이 아니다.

이러한 환웅에 의해 고조선의 기틀은 이미 잡혀진 것이다. 하늘에서 하강한 제1세대가 직접 지상의 통치자가 된다는 점에서 환웅은 오히려 혁거세나 수로왕에 견주어져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이야기할 때 이와 같은 기초를 놓은 자로서의 환웅의 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환웅과 단군 사이에는 ‘부/자’, ‘예비자/완성자’, ‘천신/지상원리에 감염된 신격’이라는 세 겹의 대립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3세대는 ‘과업을 위탁한 자·과업을 예비적으로 수행한 자·과업을 마무리지은 자’라는 연속성을 보인다.

나머지 건국신화에서는 단군신화와 같은 하늘의 세대가 보이지 않고, 단군신화에서의 제2·3세대의 기능이 하늘에서 직접 천강한 제1세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나타나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는 그 서사구조나 등장인물의 성격에 있어 나머지 건국신화들의 규범형식을 다 갖추고 있거니와, 그것은 고조선이 최초의 왕국으로 인식되어 있는 사실과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군신화는 우리 나라 서사문학 일반의 3대기의 원형이 되고, 아울러 후대의 각종 마을굿의 원형으로서 마을굿을 통해 되풀이 반복, 실연되면서 이 땅 민속신앙의 지배적 이념구실을 다해온 것이다.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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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단군신화의 신연구』(김재원, 탐구당, 1976)
『단군』-그 이해와 자료-(윤이흠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단군과 고조선』(이형구 엮음, 살림터, 1999)
「단군신화와 토테미즘」(김정학, 『역사학보』 7, 1954)
「단군신화의 한 연구」(황패강, 『백산학보』 3, 1967)
「무속상으로 본 단군신화」(김태곤, 『사학연구』 20,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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