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1

元暁 - Wikipedia

元暁 - Wikipedia

元暁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元暁
元暁の画像
各種表記
ハングル원효
漢字元暁
発音:ウォニョ
日本語読み:がんぎょう、げんぎょう
ローマ字Won hyo
English:Won hyo
テンプレートを表示
薛思
各種表記
ハングル설사
漢字薛思
発音:ソルサ
日本語読み:せっし
ローマ字Sul sa
English:Seol Sa
テンプレートを表示

元暁がんぎょう[1]、或いはげんぎょう[2]ハングル表記 원효、本名:薛思、 諡号:和諍国師617年 - 686年[1])は新羅華厳宗僧侶である。新羅浄土教の先駆者。俗姓は、名前は誓幢、新幢である。

新羅の押梁郡(現在の慶尚北道)に生まれ、29歳のときに皇龍寺で出家[3]興輪寺の法蔵に華厳を学ぶ。教学と論争に優れた人物であった[3]。650年, 義湘と共にに渡ろうとしようとしたが、高句麗軍に阻まれ失敗した[1]。661年また義湘と唐に渡ろうとしようとしたが、党項城の古塚にとどまっているときに喉の渇きを覚え、偶然に枕元にあった水を飲んだ。よく見ればその水は骸骨に溜まったものだった。そこで元曉は「真理は遠くにあるものではない。枕元で甘く飲めた水が、起きた後に骸骨に溜まっていたことを知った時、気に障り吐きたくなった。だが、世の中への認識は心にこそある」と悟って帰って来た[1]。その後は華厳学の研究に専念し、240巻もの著作を成した。

ある日、元曉が街で「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という歌を歌った。誰も意味が分からなかったが, 武烈王だけは意味を理解し未亡人だった瑤石宮の公主を嫁がせ、彼女は薛聡を生んだ。その後、元曉は「小姓居士」と名を変えて、芸人が与えた瓠に「無碍」[注 1]という名を付けて、歌を作って仏教を庶民に普及させた[4]

弟子の審祥日本に華厳宗を伝えたため、東大寺を始めとする南都の諸寺院でもてはやされるようになり、高山寺にある『華厳縁起』には、元暁にまつわる様々な伝説が語られている。

著作リスト[編集]

  • 『大慧度経宗要』
  • 『法華宗要』
  • 『華厳経疏』
  • 『大涅槃経宗要』
  • 『解深密経疏』
  • 『大乗起信論疏』
  • 『大乗起信論別記』
  • 『大無量寿経宗要』
  • 『阿弥陀経疏』
  • 『弥勒上生経宗要』
  • 『菩薩瓔珞本業経疏』
  • 『梵綱経菩薩』
  • 『戒本私記』
  • 『菩薩戒本持犯要記』- 本書については、関連資料を網羅的に紹介している研究がなされている[5]
  • 『中辺分別論疏』
  • 『大乗六情懺悔』
  • 『発心修行章』
  • 『十門和諍論』
  • 二障義
  • 判比量論
  • 金剛三昧経論
    • 『元暁大師全集』(寶蓮閣、1979年)
  • 遊心安楽道』- 本書は、近年の研究で元暁仮託の偽撰書である可能性が指摘されている[6]

脚註[編集]

注釈[編集]

  1. ^ 華厳経の「一切無碍人」から取った名。

出典[編集]

  1. a b c d 「元暁」 -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2014、Britannica Japan
  2. ^ 「元暁」 -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平凡社。
  3. a b 木村清孝「元暁」 -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小学館。
  4. ^ 三国遺事』巻第四義解第五元曉不覊
  5. ^ 金炳坤「『菩薩戒本持犯要記』の基礎的硏究」『身延山大学仏教学部紀要』第19巻、身延山大学仏教学部、2018年、15-61頁、doi:10.15054/00001712NAID 1200066425912021年2月21日閲覧
  6. ^ 恵谷隆戒「新羅元暁の遊心安楽道は偽作か」『印度學佛教學研究』第23巻第1号、日本印度学仏教学会、1974年、16-23頁、doi:10.4259/ibk.23.16NAID 1300040234262015年6月19日閲覧

参考文献[編集]

  • 金素天「韓国史のなかの100人」明石書店 2002年

関連項目[編集]



전 새벽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전 새벽
전 새벽 이미지
각종 표기
한글 :원효
한자 :전 새벽
발음:워뇨
일본어 읽기:암교, 겐쿄
로마자 :원효
영어:원효
템플릿 보기
쉬에 시
각종 표기
한글 :설사
한자 :쉬에 시
발음:솔사
일본어 읽기:세시
로마자 :술에
영어:지옥사
템플릿 보기

元暁암교 [1] , 혹은 겐쿄 [2] , 한글 표기 원효, 본명 : 薛思, 諡号 : 和諍617년 - 686年[1] ) 은 신라 의 화엄종 승려로 있다. 신라 정토교의 선구자. 속성은 맹목 , 이름은 맹세, 신환이다.

신라의 압양군(현재 경상북도 )에서 태어나 29세 때 황룡사에서 출가 [3] . 흥륜사 의 법장에 화엄을 배운다. 교학과 논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3] . 650년, 요시오 와 함께 당나라 에 건너려고 했으나 고구려군에게 막혀 실패했다 [1] . 661년 다시 요시오 와 당나라에 건너려고 했지만, 당항성의 후루츠카에 머무르고 있을 때 목의 갈증을 기억하고 우연히 베개에 있던 물을 마셨다. 잘 보면 그 물은 해골에 모인 것이었다. 거기서 모토키는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베쿠모토에서 달콤하게 마신 물이, 일어난 후에 해골에 쌓여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경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세상에의 인식 는 마음이야말로 있다”고 깨달아 돌아왔다 [1] . 그 후는 화엄학의 연구에 전념해, 240권의 저작을 이루었다.

어느 날, 모토이가 거리에서 '누구 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불렀다. 아무도 의미를 몰랐지만, 무열왕 만은 의미를 이해하고 미망인이었던 고이시노미야의 공주를 며느리가 시켜 그녀는 장작을 낳았다 . 그 후, 모토키는 「소성 거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연예인이 준 瓠에 「無碍」 [ 주 1] 이라는 이름을 붙여, 노래를 만들어 불교를 서민에게 보급시켰다 [4] .

제자의 심상 이 일본 에 화엄종을 전했기 때문에, 도다이지를 비롯한 남도 의 제사원에서도 상당하게 되고, 다카야마 데라 에 있는  화엄 연기」에는, 전 새벽에 얽힌 다양한 전설이 말해지고 있다 .

저작권 목록 편집 ]

  • "위대한 지혜와 구주의 필수품"
  • "화화종파"
  • 『화엄경집』
  • "위대한 열반의 핵심"
  • "비밀을 밝히다"
  • 『대승기신론집』
  • 『대승기신론별기』
  • "위대하고 무한한 생명의 필수 요소"
  • 『아미타 경선』
  • "미륵상성종야오"
  • "원천보살목걸이"
  • "반간강보살(Vangangang Bodhisattva)"
  • "Jie Ben의 개인 메모"
  • 『보살계본 지범요기』 - 본서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를 망라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5] .
  • "중비의 구별에 대한 논평"
  • 『대승육정 참회』
  • 『발심 수행장』
  • "10개의 조화의 문"
  • 두 가지 장애물 "
  • 판단이론 "
  • 바즈라삼매(Vajra Samadhi)의 이론 "
    • "원치스승의 전집"( 보련관 , 1979)
  • 유심안락도』 - 이 책은 최근 연구에서 暁暁仮託의 偽撰書일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6] .

다리 편집 ]

주석 편집 ]

  1. 화엄경 의 「일절 무조한 사람」으로부터 취한 이름.

출처 편집 ]

  1. d "전 새벽" - 브리타니카 국제 대백과 사전 소품 항목 사전 , 2014, Britannica Japan
  2. ↑ 「원효」 - 세계대백과사전 제2판 , 평범사.
  3. b 기무라 키요타카 , 「전효」 - 일본대백과전서(닛포니카) , 쇼가쿠칸.
  4.  삼국유사 " 제4권, 다섯 번째 뜻의 해석, 원효부지
  5. 김병우「『보살계본지범요기』의 기초적 연구」『미노베야마대학 불교학부 기요』 제19권, 미노베야마대학 불교학부 2018 년, 15-61쪽, doi : 10.15054/ 0000171 120006642591 , 2021년 2월 21일에 확인함 . 
  6. 에타니 다카지에, " 신라원교의 여행심 안락도, 유사 저작 " "인도불교교육에 관한 연구" 제23권 제1권, 일본교육학회 , 1974년, pp. 16-23, doi : 10.4259/ ibk. 23.16 , NAID 130004023426 , 2015년 6월 19일 확인 .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동양포럼(58) /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2 < 가타오카 류 - 동양일보 2018

동양포럼(58) / 동양포럼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2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58) / 동양포럼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2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8.01.14 

청주와 안동과 센다이의 사이에서 생각한다
성스런 동경’에 의한 이어짐

가타오카 류(片岡龍) 일본 토호쿠대(東北大) 교수

‘연애’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최근에 거의 사어(死語)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어떨까? 여기에서 말하는 연애란 단순히 이성과의 연애뿐만 아니라, 좀 더 막연하게 뭔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 그리움, 사모를 말한다.

괴테가 노래한 ‘성스러운 동경’(서동시집)이라고까지 하면 지나칠지 모르겠지만, 이 시에 나오는 “머나먼 여정도 힘들다 하지 않고/뭔가에 홀린 듯이 날아와서/마침내 빛을 갈망하여/나비여, 그대는 불처럼 타올랐다”라는 구절은 역시 ‘연애’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이런 ‘연애’가 사어가 된 세계, 이런 ‘연애’조차도 상품화되어 소비되고 할인되는 세계, 인간은 이런 세계에서 정말로 살아갈 수 있을까?

2017년 8월에 청주와 안동에서 개최된 일련의 동양포럼에 참가한지 5개월이 지났다. 저 눈부셨던 여름의 빛은 아련해지고, 생명감에 충만한 신록은 빨강과 노랑으로 물든 후에 지금은 푸석한 낙엽이 됐다.

태평양연안의 도시에서 쓸쓸한 겨울의 풍경을 창밖으로 내다보면서 여름의 한반도를 생각한다. 이 생각도 ‘연애’이다. 센다이, 청주, 안동.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스러운 동경’에 의해 이어져 있다. 그런 세계가 공창(共創)되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아직 겨울의 추위에 닫혀 있지만 -.

일본의 동북지방에 있는 센다이(仙台)에서 인천행 비행기에 동승한 사람은 카네비시 키요시(1975~) 교수와 오오사와 시노부(大澤史伸·1966~) 교수. 카네비시 교수는 ‘영성의 재난학’이라는 책으로 단숨에 일본사회의 주목을 받은 신진 사회학자이고, 오오사와 교수는 사회복지학이 전공으로, 풍부한 현장 경험을 토대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두 명 다 센다이의 유서 깊은 그리스도교대학(東北學院大學)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카네비시 교수는 주로 이론 쪽을, 오오사와 교수는 주로 실천 쪽을 맡은 공저도 간행하였다.

센다이는 2011년 3월 11일,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사고에 의한 대재난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보이는 건 온통 건물 잔해의 황야뿐. 세상의 끝을 보는듯한 광경을 눈앞에 두니 기존의 모든 언어가 허위로 느껴졌다. 청주행 비행기를 함께 탄 세 사람은, 그 때는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이 근원적인 경험이 이후의 세 사람의 연구 활동의 근저에 있게 된다.

2016년 9월에 ‘동일본대지진과 세월호사건 이후의 사람들의 연대’를 테마로 한 센다이포럼에서 세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 때 기조강연자로 초대한 분이 동양포럼의 김태창 주간이다. 이때의 인연으로 올 여름에 청주에 가게 된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 9시. 공항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북청주의 숙소에 도착한 때는 이미 날이 바뀌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택시로 ‘꽃동네영성원’으로 향했다. 심산(深山)에서 뿜어나오는 생기가 차안에까지 흘러들어 온다. 이 산의 청정한 고지대에 영성원이 있었다. 거대한 여름 구름이 주위에 떠다니는 것이 마치 천상세계에 온듯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공공하는 영성’을 둘러싼 논의가 3일 동안 진지하게 오갔다.

꽃동네시설 견학을 포함한 포럼의 전체 모습은 ‘동양일보’ 2017년 11월 12일자에 실린 조성환의 ‘다시 개벽을 찾아 나선 열흘간의 공공여행-공공영성·외천활리·탈식민지 포럼에 다녀와서’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나 나름대로 깨달은 점만을 말하면 ‘영성’을 반드시 종교적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영성을 종교가 독점에 온 것이 오히려 영성을 소원하게 하거나 역으로 물신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영성은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있는 우리 삶에 필요한 그 무엇이다. 또한 우리의 삶이 각자가 다른 이상, 영성도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이 있어서, “이것은 A, 이것은 B”라고 딱 잘라 나눌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영성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지진을 경험한 카네비시·오오사와 교수의 생각과도 상통한다. 카네비시 교수는 생과 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행방불명자(사자)와 유가족(생자)을 어어주는 것을 영성이라고 보았고, 오오사와 교수는 그러한 이분법적 가치고정화(서열화)에 동반되는 차별과 편견이 사회복지의 실천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오오사와 교수는 ‘사랑’이나 ‘영성’이라는 말조차 고정화로 이어지기 쉽다는 입장이다. 꽃동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실천되고 있는, 강자도 약자도 없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풍요로운 연대, 그것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모든 언어는 가치 고정화(서열화)를 낳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실천도 그때, 그 장소에 한정된 덧없는 현상으로 지나가 버린다. 위험은 있지만 현장의 실천이 파급되기 위해서는 모종의 이론화도 필수불가결하다. 카네비시 교수와의 이인삼각(二人三脚)의 활동 자체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성에 개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김태창 주간이 일본적 영성을 습합적 영성, 중국적 영성을 동화적 영성, 한적 영성을 ‘접화군생’이라고 분석한 점이 흥미로웠다. ‘습합’이란, ‘신불습합(神佛習合)’과 같이 일본이 외래의 고도의 문명을 수입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말에 근거하고 있다. ‘동화’가 모든 것을 중국문명 속으로 흡수하는 것에 대해서, ‘습합’은 일본적 핵심을 남기면서 외래의 고도의 문명을 도구화하여 최대한 이용한다. ‘화혼양(한)재’(和魂洋(漢)才)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지 모른다.

그에 반해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접’은 양자의 중심이 진실하게 ‘접(接)’한다고 하는 직접성을 의미하고, 그것에 의해 삶의 방향으로의 변‘화(化)’가 생기며, 그것이 파급되어 다수의 타자(群)의 ‘삶(生)’이 활성화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확실히 한국에서의 불교·유교·그리스도교 등의 수용 방식에는 그런 특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심과 중심이 진실하게 접한다”, 이 말은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말이 가치고정화(서열화)되기 쉬운 것도 그 말이 “중심과 중심이 진실하게 접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영성’을 하나의 정의에 수렴시키고 고정화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영성’이라는 말을 공통화제로 삼아서 각자 개성있는 영성체험을 바탕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대화한 것이다.

그런 대화중에서 역시 나의 혼을 강하게 요동치게 한 것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영미 선생이 소개한 정지용의 ‘향수’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포럼이 끝난 후에, 이번 포럼에 참가한 최다울 학생과 함께 김영미 선생의 안내로 옥천에 있는 정지용 생가에 다녀왔는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풍경과 너무도 흡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향수’는 나에게 쓰나미로 모든 것이 휩쓸려가기 이전의 토호쿠(東北)의 해안가 마을의 정경을 떠올리게 하였다.

꽃동네에서 직접 인천공항으로 향한 카네비시 교수, 오오사와 교수는 무사히 센다이에 돌아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창동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이미 김태창 주간과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이 기다리고 계셨다.

버스 안에서는 ‘동양일보’ 8월 7일자에 실린 유성종 운영위원장의 ‘조명희 선생의 아호, 포석(抱石)의 뜻’을 둘러싸고, 포석이라는 호의 함의, 그리고 포석과 마찬가지로 ‘석(石)’ 자가 호에 들어 있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본명은 킨노스케金之助)의 호의 의미 등이 화제가 되었다.

안동의 포럼에 이어서 청주대학에서 개최된 포럼에서는 한국의 포석, 일본의 소세키와 중국의 루쉰을 다루었다. 루쉰(이것은 필명. 본명은 쪼우슈런周樹人)은 140개가 넘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석(石)’이 들어간 것은 없는 것 같다. 다만 나중에 조사해보니 흥미로웠던 것은, 루쉰이 토호쿠대학의 전신인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유학했을 때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은 의학이 아니라 문학으로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뜻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애초에는 지질학을 공부하려고 일본으로 유학왔다는 사실이다. 루쉰이 센다이에 오기 전의 동경시대에 쓴 ‘중국지질학약론(中國地質略論)’(월간 ‘浙江潮’ 제8호, 1903년 11월)에서는, 자국의 과학이 뒤쳐져서 망국의 위기(외국이 광산자원을 노려 중국의 분할을 꾀하고 있는 것)가 초래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어떤 문명이든 ‘강석화’(=화석화) 되면 멸종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만년의 글에서도 “혁명은 끝이 없다. 만약에 이 세상에 진실로 ‘지선(止善)에 이르게’ 되는 일이 있다면, 인간세계는 곧바로 응고되고 말 것이다”(‘而已集’ 黃花節的雜感), “불만은 향상의 수레바퀴다. 자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류를 태우고, 사람의 도를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자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많은 종족은 영원히 전진하면서 영원히 희망이 있다. 다른 사람을 탓할 뿐 반성할 줄 모르는 많은 종족은 반드시 화가 미친다(‘熱風’ 隨感錄六十一)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이 과거의 자신에 만족하여 반성할 줄 모른다고 한다면, 중국은 과거의 망념을 완전히 끊고 영원히 전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는 안동에서의 포럼에 참가하게 되었다. 회의장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고, 주최는 영남퇴계학연구소(후원은 동양포럼)이며, 테마는 ‘외천활리(畏天活理)의 인문학’이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지금까지도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과거가 현재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과거가 화석화되어 현재에 남아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가 미래를 향해 현재를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영남퇴계학연구소의 이동건 이사장은 이퇴계의 제15대 후손으로, 대구의 삼화건업 회장이기도 하다. 이동건 이사장은 퇴계의 성학(聖學)을 ‘자기혁신’(Self-Innovation) 사상으로 재해석하였다. 이 ‘자기혁신’은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천활리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에는 일부러 ‘영성’이라는 말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 공자 이래의 유교의 전통을 존중하여, 안이하게 유교와 신비주의를 연결시키려는 논의로 흐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것이다. 나도 16세기 한반도와 이베리아반도를 공시성(共時性)이라는 관점에서 대조해 보는 모험을 시도했는데,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로부터 그 위험성을 지적받고, 발표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여 오해를 피하는 배려가 부족했음을 반성했다.

대항해시대에 예수회의 신대륙 등에 대한 포교가 얼마나 폭력적인 식민지지배와 맞물려 있었는지, 아울러 동시대의 한반도의 평화가 일본이나 중국의 군대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는 생각은 결코 없었다. 다만 ‘영성’이라는 관점에 한정시키면, 퇴계의 ‘리발(理發)’과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동(靈動)’ 사이에는 불가사의한 공시적 유사성이 있고,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다산 사상의 ‘종교성’을 반드시 그리스도교의 영향이라고만 볼 필요는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만한 ‘종교성’이 한반도에는 이미 있었다는 것으로, 그것이 그리스도교와 같은 ‘종교’와는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 보다 중요하다. 인문학과 영성은 공존할 수 있다. 위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영성을 종교가 독점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해명해 둔다.

‘외천활리’라는 주제에서 중심적으로 다룬 것은 퇴계의 ‘리발(理發)·리동(理動)· 리도(理到)’의 문제이다. 로고스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 실로 인문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리’라는 말에서 영성적 요소를 읽어내려고 한 점,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젊은 학자와의 오랜 시간에 걸친 공개토론을 거친 결과이고, 더 나아가서 그 과정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다는 점은 16세기 한반도의 놀랄만한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리’가 사리(死理)가 되어 영성을 잊으면 그것은 ‘하늘(天)’도 ‘두려워하지(畏)’ 않는 인간의 소행이 될 것이다. 원전사고에 의한 재해는 그것을 경고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외경을 넘어 공포가 되어 버리면, 비합리적인 힘(폭력·권력·금력)의 논리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만다.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외천활리의 인문학’의 의의가 아닐까?

이번 포럼에서는 퇴계의 ‘천’이나 ‘리’를 서양의 신화나 철학과의 비교를 통해 고찰하는 젊은 여성연구자들의 발표가 여럿 있었다는 점도 인상에 남았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하늘신과 ‘시경’, ‘서경’, ‘논어’ 등에 나오는 고대 중국의 ‘천’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서 퇴계의 ‘천’을 고찰한 장영란 교수(한국외국어대), 스피노자나 플라톤의 우주론과의 비교를 통해서 퇴계의 ‘리’를 고찰한 이원진 박사(국민대)의 발표가 그것이다. 또한 퇴계의 “사단(四端)을 통한 리자도(理自到)”를 일상의 영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사회를 성화시키는 사회적 영성, 공동체적 영성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 황상희 박사(성균관대)의 발표는, 명시는 하고 있지 않지만 17세기 감리교운동의 사상 등과의 연관성이 의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안동포럼은 꽃동네포럼과 청주에서의 조명희·나츠메 소세키·루쉰 포럼의 일환이다. 언젠가는 퇴계의 영성을 사회복지나 근대문학 등에서의 영성과 연결시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과거의 학문전통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중심과 중심이 진실로 접하면 과거의 학문전통도 다시 그것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이다.

안동에서 청주로 돌아올 때 줄기차게 내렸던 비도 점차 맑게 개였다. 청주포럼의 테마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이다. 지금까지의 포럼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포럼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만의 대화섹션이 마련된 점이 특징적이다. 이퇴계는 아무래도 젊은 학생들의 대화소재로는 무거운 감이 있다. 젊은 감성들이 자유롭게 발상하기 쉬운 한중일을 대표하는 20세기 문학가를 테마로 선택한 것에서 미래공창을 바라는 포럼 주최자의 염원이 느껴진다.

포럼 내내 한쪽 벽에는 신진여성화가인 김선우씨가 조명희·나츠메 소세키·루쉰의 작품을 읽고 얻은 인상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세 사람의 문학의 개성, 즉 한중일의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에 대한 이미지가 멋지게 형상화되고 있다. 그래서 참가자는 이것을 보면서 대화하면 된다. 작품의 세세한 문헌적 고증 따위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발제도 논문을 읽는 형식이 아니라 각자가 동양일보에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기만 하면 된다.

포럼을 시작하기에 앞서 김태창 주간은, 그런 진행방식과 포럼취지를 설명하면서, 이 자리에서의 모든 발언에는 정답도 오답도 없고, 포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개의치 않으며, 다만 미래를 함께 열기 위해 새로운 것을 함께 시작하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는 결의를 피력했다. 그러자 회의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조여졌다.

그 긴장감은 처음으로 좋아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와 같은, 처음으로 동경하던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와 같은, 처음으로 이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실제로 나는 포럼의 서두에서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영감을 얻은 김영미선생의 시를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가 밤새 일본어로 번역한 손글씨 원고(안동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김태창 주간으로부터 건네받았다)를 낭독하는, 인생의 첫 경험을 했다.

센다이, 청주, 안동을 잇는 ‘성스러운 동경’, 이런 말을 첫머리에 쓴 것도 청주포럼에서의 긴장감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면이 다했기 때문에 청주포럼의 내용은 다른 분에게 맡기고자 한다. 꽃동네, 안동, 청주에서의 포럼을 관통하는 테마는 ‘영성’인데, 여기에서의 ‘영성’이란 괴이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생명이 불타는 것에 대한 자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빛과 열이 3.11 대지진 이후의 태평양 연안의 어두운 겨울밤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 번역:조성환(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박사

동양포럼(58) /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1 < 김용환 - 동양일보 2018

동양포럼(58) / 동양포럼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1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58) / 동양포럼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1
기자명 김용환

입력 2018.01.14 

동양포럼 밖의 영성론과 영성인문학 전망
국가 의존성 탈피 ‘동아시아 시민성’으로

김용환 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지난 한 해 동양포럼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한·중·일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동아시아 시민성 함양의 기반을 다졌다. 동양포럼에서 다룬 주제들은 미래공창을 위한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성’은 신령스러운 성능(性能)을 말하지만, 그 이외의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 특히 동양포럼의 대화에서 동양의 정신문명을 아우를 필요성이 나타났다. ‘중용(中庸)’의 밝힘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영성반조를 통해 ‘근원적 생명력’으로 회귀되기에 동양의 정신문화를 탐색하며 동서회통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동양고전, ‘중용(中庸)’에서는 우주생명력을 바탕으로 진실무망(眞實無妄)하게 만물을 낳고 키우는 ‘성자 천지도(誠者 天地道)’와 함께 ‘성(誠)’을 성실하게 받들고 따르는 ‘성지자인지도(誠之者人之道)’를 언급했다. 이에 따라 ‘만물을 낳고 키우는 에너지의 근원인 하늘과 그 하늘도리를 성실하게 믿고 따르고 행하는 사람도리’를 살릴 때,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 ‘만물병육(萬物竝育)’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우주생명과 개체생명이 상관 연동되어 영성의 ‘자기(自己)’와 혼의 ‘자아(自我)’가 육체와 결합하여 ‘영혼의 육신’을 이룬다. 그런데 욕망대상을 쫓다보면, 욕망대상을 ‘참나’로 착각하는 ‘영혼의 식민지화’가 발생하고, 욕망대상을 쫓아 사물화로 이루는 가운데, 전도몽상(轉倒夢想)의 ‘영혼의 영토화’가 일어나 다양한 사회병리 현상을 초래하므로 새로운 영성인문학 정립에 따른 진단과 해법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영(靈)을 망각하고, 혼(魂)이 이기적 편협성으로 치닫는 ‘식민지화’와 끊임없는 사물화로 확장되는 ‘영토화’는 근원적 해결책을 요청한다. ‘영성자기’로서의 ‘참나’ 또는 ‘한얼’에 상응하는 ‘영(靈)’은 근원적 생명력과 연계되어 혼을 깨어나게 하거나, 영적 무지를 자각하게 한다. 동양포럼의 영성인문학은 지방 간·세대 간·남녀 간 사이를 아우르며 영혼을 느끼는 전문가 대화로 발전하여 과거 고립된 인문지식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동아사이 시민성 함양을 위한 미래공창으로 자리매김 했다.

서양의 레이몽 파니카(R. Panikkar: 1918-2010)는 가톨릭 수도사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대학 교수로서, ‘종교대화(The Intra-religious Dialogue)’, ‘신비표상의 신체험(The Experience of God: Icons of the Mystery)’, ‘존재리듬(The Rhythm of Being)’등에서 영성을 언급했다.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인정하고 상호존중의 대화 가능성에 대한 근거를 ‘우주신인론 영성’에서 찾았다. 파니카에 의하여 정초된 ‘우주신인론 영성’은 ‘신적인 것(Theos)’과 ‘하느님의 영(Spiritus Dei)’, ‘인간적인 것(Anthropos)’과 ‘사람의 생명(Vita Hominis)’, 그리고 ‘우주적인 것(Kosmos)’과 ‘땅의 생기(Anima Mundi)’를 함께 연동하여 유기체적 실재로서 다루었다. 이러한 실재는 형이상학적 측면의 초월적 측면과 지적 요소의 의식과 사유, 그리고 경험적이며 물질적인 요소를 공유한다.

우주신인론 영성은 실재의 세 차원들이 실재 궁극성을 이루는 필연적 삼원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땅은 살아 있으며, 어머니이다. 우주는 그 생명력이 전 우주로 확장되는 신적 생명의 창조자이자 후예이다. 김진 교수(울산대)는 ‘철학논총’ 52집에서 레이몽 파니카의 사상으로 다석 유영모를 분석한 ‘다석(多夕)의 종교다원주의와 파니카의 우주신인론’을 다루었고, 김경재 교수(한신대)는 ‘생태계 위기와 종교적 영성의 각성-우주·신·인간적 영성과 생태학적 중추신경계 비유론’을 신학연구 46집에서 발표했다. 여기서 밝혀진 다석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그리스도가 가능하며 영성을 자각한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파니카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석도 하느님의 존재는 하나이면서 모든 것인 절대인 동시에 절대적인 ‘빔’의 무로 보았으며, 한사상의 ‘한’ 개념과 상통한다고 햇다. 파니카는 인도 힌두교를 정점으로 하는 동양사상과 로마 가톨릭사상을 정점으로 하는 서양사상이 회통함으로써 인간과 우주와 신이 상즉상입(相卽相入: 우주생명이 대립하지 않고 융합해 작용하여 무한히 상관연동 관계를 유지함)하는 파노라마를 연출한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얼, 또는 영이 주관하는 나는 얼나(靈我)이고 참나(眞我)이다. 얼의 생명을 얻은 자들은 바탈(性)을 살려낸 ‘얼나’로서, 하느님의 영(靈), 또는 법신불의 불성(佛性)과도 상통한다.

파니카는 우주생명을 우주신인론적 영성의 관점에서 자연과 우주를 고립된 물질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에너지로 파악하였다. 우주생명은 단순한 물질이나 전환 가능한 에너지가 아니며, 세계 역시 단순한 거주지나 실재의 확장된 일부분이 아니다. 모든 외부실재나 초세계적인 것까지도 시공차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외부성이나 초세계성조차도 세계적인 것 또는 세속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신적 차원이나 인간이 없는 우주차원은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메시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예수이다.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의 그리스도는 예수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그리스도는 예수가 아니다’라는 파니카의 명제를 정식화할 수 있다. 역사적 예수를 넘어서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여러 종교전통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구원역사를 펼친다 한다. 파니카의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에 적용될 수 있는 ‘우주신인론적 영성의 현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니카의 영성도 지방 간·세대 간·남녀 간의 사이를 아우르는 간주관적 밝힘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공하는 영성작용’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하였다. 이들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청주 발 영성인문학에 대한 정유년의 동양포럼의 성과를 살펴본다.

동양포럼은 한 해 동안 동아시아 시민성 함양에 초점을 맞추었다. 지금의 생활지형은 저성장·저출산·고령화·양극화·세계화의 추세가 뚜렷함에 따라, 새로운 시민성 함양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유럽연합(EU)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체감하였다. 한·중·일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상생을 이루어오면서도 대립과 갈등의 상극상황을 올바르게 극복하지 못했다. ‘국민’이라는 개념이 국가의존·종속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한·중·일 삼국은 국민감정으로 말미암아 상호 배타적인 상극상태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이제는 지나친 국가의존성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시민성(East Asian Citizenship)’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시민성’은 동아시아 시민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과 실천을 요하는 인간 파악이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시민공동체 구성원을 양성하는 동아시아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한·중·일은 동아시아 시민공동체 토양을 다지면서 문화교류를 이어왔지만, 동아시아 시민공동체에 관한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성립되지 못하고 상생보다 상대적 우월감을 과시하거나 상대국민을 정복대상으로 삼았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국민형성에 중점을 둔 국민윤리 교육이 실시되었고, 일본에서는 대화교를 통한 일본국의 세력화를 이루었고, 중국에서는 신실학운동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민 계몽을 획책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동아시아 시민의식 함양이 요청되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동아시아의 대량생산제조업을 지탱하게 하는 수요자로서 시장역할을 했다. 앞으로 한·중·일이 이러한 역할을 이행하지 못하면 동아시아의 미래공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공창을 위한 ‘동아시아시민성’은 동아시아시민성의 회원자격에 합당한 ‘행위표준’으로서 자질이나 품성을 가진 미래형 인간이 요구된다. 동아시아시민의 ‘행위표준’에는 동아시아 공동체 삶을 중시하고 동아시아시민의 행위자 중심의 성품이나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는 대화를 중시하면서 동아시아의 미래지향적 삶의 비전을 함께 모색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동아시아 시민에 대해 상호존중과 상호배려가 전제되며 국가횡단매개의 관점에서 자국중심에서 벗어나 배려범위를 동아시아시민성 함양 수준으로 확대하고 동아시아 시민이라는 자각에 토대를 둔 공공인식이 정착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동아시아 시민성 함양을 위한 공감담론의 콘텐츠도 개발되어야 한다. 텍스트에 나타난 상호배타적 담론을 과감하게 해체하는 비판교육도 이루어져야 한다. 동아시아 생태공통체가 파괴되면 동아시아시민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공감교육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한·중·일이 과거의 국민국가 공동체에서 벗어나 21세기를 새롭게 열기 위한 동아시아시민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는 상호존중과 배려 그리고 소통을 실천하는 가운데 상호고통을 경감시켜가는 개신방안이 구체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실심실학(實心實學)’과 중국의 ‘실리실학(實理實學)’, 그리고 일본의 ‘실용실학(實用實學)’의 인문학을 서로 이어주고 매개하는 영성인문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한·중·일을 함께 살리는 국가횡단매개의 합당성으로 동아시아시민성 함양교육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정유년 한 해 동안의 동양포럼에서는 무심개신(無心開新)에 의한 영혼식민지화 치유방안이 끊임없이 모색됐다. 무심개신은 고려 말 백운선사께서 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개체생명의 집착에서 벗어나 무심의 존재성을 깨닫는 자유로운 생명개신의 방향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사주당 이씨는 활명개신(活命開新)에 의한 영혼영토화 치유방안이 모색되면서 근원적 생명력을 태교에 활용함으로 21세기 군자 양성을 위해 새 밝힘하였다. 태교가 현대판 군자공동체 형성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기회였다. 아울러 의암 손병희 선생이 ‘무체법경(無體法經)’에서 제안한 ‘체천개신(體天開新)’으로 하늘영성을 자각함으로 청정하늘의 자성을 회복하는 ‘인내천(人乃天)’을 체화함으로 인간존엄성을 회복하는 인존시대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낳았다.

파니카의 ‘우주신인론의 영성’의 골격과 일맥상통하지만, 동양포럼에서는 청주지역을 토대로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영성가치로서 재조명하였기에 음양합덕으로 회통하는 영성인문학의 새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아시아의 공동가치를 모색하기 위한 ‘그리운 인물’ 시리즈와 ‘잊을 수 없는 도서’ 시리즈를 구성하기 위한 좌담회가 연속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좌담회에서는 ‘청주인’·‘충북인’·‘한국인’·‘세계인’의 범주를 설정하여 서로를 아우르며, ‘문학’·‘철학’·‘종교’· ‘영성’을 아우르며 서로 잇고 매개하고 살리는 가운데 한국인의 영성의 멋과 맛을 생동적으로 구조화하였다.

먼저 ‘그리운 청주인’으로 민병산 시인을 다루면서, 사주당 이씨와 같이 ‘활명개신(活命開新)’의 연장선에서 파악하였다. 근원적 생명력에서 우러나온 호롱불 서체로 글을 써서 주변에 보시하는 보시바라밀의 즐거움, 고향 청주에 부치는 ‘으능나무와의 대화’ 등에서 으능나무와 함께하는 우주생명력의 이치를 지혜바라밀로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근본악과 끊임없이 저항하며 근원적 생명력 가치를 노래한 신동문 시인도 근원적 생명력이 시인의 양심활동으로 조명하였다. 양심에 뿌리를 두고 정치적 참여의식을 태동한 신동문의 시에서는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아픔을 근원적 생명력 차원에서 노래하며 행동파 시인으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시 세계에 융해시켰다. 특히 ‘낙동강’이라는 작품을 통해, 4.19 데모를 하면서 받은 흥분을 되살려 민주주의가 생명가치로 정착되기를 염원하였다.

또한 ‘무심개신’의 정신을 살려 장사로 자금을 모아, 교육사업에 봉헌한 석정 김영근 옹에 대해서 청주 얼, 무심천을 배경으로 ‘활상개신(活商開新)’ 기치의 상인정신을 기림으로 상인도를 청주에 정착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청주대 설립자로서 거금을 쾌척하였지만, 그 흔적에서 자유로운 육바라밀 실천의 보살자로서 그의 인품을 기릴 수 있었다. ‘수기상인(修己商人)’에서 체용불이의 참 마음을 일깨웠다.

일제 치하에서 청풍명월을 노래한 만해 한용운 선생은 저항한 항일투사로서 겨레얼을 지켜낸 저항시인으로, 근원적 생명력을 ‘그리운 님’으로 노래하였다. ‘님의 침묵’을 통해, 조국이 일제의 계박에서 벗어나 해방을 누리기 위한 희망을 절규하였고, 동북아 시민성 함양에서 근대화와 사회진화에 대해서 깊은 사색을 이어갔다. ‘복종’이라는 시에서 근원적 생명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향유할 때 비로소 자유가 성취된다는 에토스를 살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운 한국인’의 고운 최치원 선생은 당시 당나라에 가서 최고문물을 접한 사상가로서, 미래공창의 표상이다. ‘포함삼교 접화군생’을 통한 풍류도에는 동인의식이 나타났고, 광명의식의 근원적 생명력 인식은 한국인의 영명(靈明)을 밝히는 지표로서 공공하는 영성작용을 구체적으로 살렸다.

동양포럼에서 ‘그리운 세계인’으로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근원적 생명력으로서 무한자와의 연결고리가 타자윤리 의식으로 조명되었다. 서양윤리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와 그 이후 전개된 사상이 이성중심의 주체성 모색에 역점을 둔 것이라면, 레비나스는 이를 해체시켜 영성가치를 모색하여, 타자본위의 윤리로 대위시켰다. 이러한 타자의식으로 정지용 시인의 시 세계를 바라볼 때, ‘향수’에서 드러난 ‘흙에서 자라난 내 마음의 파란 빛’이 무한을 지향하는 영성가치의 현 주소임이 확인됐다.

서로의 주체성을 강조하기보다 타자지향의 시인의 마음으로 이웃과 일상에 다가갈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을 선사하였다. 자기본위 양식의 삶으로 찌들고 고뇌하는 지식인의 삭막함에서 정지용 시인의 시를 살리기 위해서는 생명의식에서 타자본위의 자유로운 영혼을 살려낼 필요성을 깨닫게 한 영성인문학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고된다.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라는 책도 잊을 수 없는 도서로 다루면서, 하이데거의 ‘죽음에로의 존재’와 정면 승부한 초월지향의 가치를 탐색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세계구성 요인으로써 자기정립과 타자와 만남은 치명적인 분열상을 낳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열은 역설적이게도 초월지평을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초월지평에서 체화되는 타자의 ‘가까움’은 윤리적 의미와 함께 ‘수동의 수동성’을 경험하는 실존체험이 된다. 이는 곧 타자고통을 직면하는 감수성을 촉발시켜 타자의 윤리적 부름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실천하는 일종의 타자본위의 ‘사로잡힘’의 계기로 작동하게 한다.

꽃동네 대학에서 이뤄진 ‘영성과 사회’ 주제의 국제회의에서는 영성 조명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꽃동네 영성’과 ‘마더 테레사’의 영성, ‘아라이 오오수이(新井奧邃)’ 영성, 남아프리카의 ‘우분투’, 러시아 영성, 조선의 퇴계 영성, 기학(氣學)과 동학(東學)에 나타난 영성 등에 대해 발표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영성의 독특성이 드러났다. 아울러 꽃동네 대학의 오웅진 이사장과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령이 방언으로 나타나 생명과 생명 사이를 이어주는 가능성이 모색되었다. 동경대학 명예교수, 미야모토 히사오(宮本久雄)는 마더 테레사의 영성을 말하면서 자기를 무화하는 케노시스(Kenosis)에서 암흑의 영성가치를 부각시켰다. 일본 가톨릭신학회 이사 아베 나카마로(阿部仲麻呂)는 호흡에 주목하고 호흡으로 인간이 근원적 생명력과 연결되기에 근원적 생명력으로서 신에 대한 통찰을 강조하였다.

‘나’에서 ‘참나’에 이르는 길은 가까우면서도 먼 길이다. 오감? 생각? 감정의 굴레의 ‘나’를 깨어나게 하여 근원적 생명력의 ‘참나’, 순수한 양심의 존재로 반조되는 길은 쉬우면서도 지난한 여정이다. 한·중·일의 미래공창을 위한 도덕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청주시민과 충북도민과 함께하며 생명과 태양의 땅을 새롭게 탈바꿈하고 고령화 사회를 대비하는 개신의 새밝힘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그동안 공공철학을 제창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을 두고 생각하는 심학 패러다임으로부터 삶-살림-삶앎(생명의 자각)에 초점화하는 영성(=근원적 생명에너지) 패러다임으로의 패러다임전환을 모색해 왔다.

내년에는 영성 패러다임으로 저출산·고령화·저성장의 삼중고에 얽매어 있는 사회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미래공창 철학운동을 더 활발하게 추진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관련기사동양포럼(58) / 동양포럼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2
김용환 dynews@dynews.co.kr
다른기사 보기

사필귀정(事必歸正)

사필귀정 - 나무위키

사필귀정(事必歸正)

- 처음에는 시비(是非) 곡직(曲直)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감.
- 무슨 일이든 반드시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
사필귀정(事必歸正)
---
사필귀정(事必歸正)은 처음에는 그릇된 것처럼 보였던 일도 결국에는 모두 바르게 돌아온다는 뜻의 고사성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올바르지 못한 것이 임기응변으로 기승을 부린다 해도 결국에는 올바르지 못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바른 것이 이기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
세진:  뜻은 한자 만으로 대강 짐작되는데, 이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이고, 일종의 믿음이다. 어머니 일선님이 좋아하는 <positive thinking>


==

세계는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다양한 변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 제약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무역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 등 글로벌 정세 불안과 이상기후 등으로 인한 식량문제와 
원부자재 가격 급등 등의 문제는 우리 농산업에도 많은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순간이고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내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갖고 각자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해의 첫날이 밝았습니다.
토끼[卯]는 예로부터 영리한 동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또한 새끼를 여러 마리 낳는다고 해서 번창과 풍요의 상징으로 삼아왔습니다. 
특히 올해는 인간의 지혜를 상징하는 검은색[癸]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끼[卯]가 만나는 해입니다.
올해는 어떠한 변칙이나 편법이 아닌 옳은 지혜와 정도(正道)를 바탕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풍요로운 내일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

 

2023년 1월 1일  농기자재신문 임직원 일동

Namgok Lee -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미움이 없다." 苟志於仁矣無惡也(4/4) 공자의 말이지만, 그가... | Facebook

 Namgok Lee -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미움이 없다.

Namgok Lee
8 h  ·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미움이 없다."
苟志於仁矣無惡也(4/4)

공자의 말이지만, 그가 이 벽 앞에서 이 벽을 넘어서기 위해 바쳤을 노력을 생각한다.
 성聖의 경지에 들어서는 관문이다.
나는 과연 '그 사람'을 미움이 아니라,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을 체득하고 실천한 '사람의 아들들'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인간의 목표로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돈오頓悟'의 순간이 나에게도 가능할까?



===
논어 4편 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