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7

자산어보(영화)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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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영화)

최근 수정 시각: 
이준익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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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2021)
玆山魚譜 The Book of Fish
자산어보 런칭 포스터2
장르
감독
각본
김세겸
제작
김성철
출연
촬영
이의태
조명
유혁준
편집
김정훈
미술
이재성
음악
음향
정민주
의상
심현섭
분장
조태희
촬영 기간
제작사
대한민국 국기 (주)씨네월드
배급사
개봉일
화면비
2.39:1
스트리밍
상영 시간
126분
제작비
45억원
대한민국 총 관객 수
338,567명
월드 박스오피스
$2,615,780

1. 개요2. 포스터3. 예고편4. 시놉시스5. 등장인물6. 줄거리7. 평가8. 흥행9. 수상 내역10. 명대사11. 여담
11.1. 역사 탐구
12. 관련 문서13. 외부 링크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준익 연출, 설경구변요한 주연의 영화.

2. 포스터[편집]

자산어보 해외 포스터

해외 포스터
개봉 포스터

3. 예고편[편집]

1차 예고편[1]
2차 예고편
Play: Video
파이널 예고편

4. 시놉시스[편집]

“이 양반은 대역 죄인이니 너무 잘해줄 생각들 말어”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책을 쓰기로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그러던 중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결심하는데...

5. 등장인물[편집]

6. 줄거리[편집]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801년(순조 1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는 배에서 과거의 일들을 떠올린다.

정약전의 기억은 그가 선왕인 정조대왕을 알현하던 때에서 시작된다. 정조는 정약전에게 자기 밑에서 벼슬을 살고 있는 정약전과 정약용 두 형제가 서학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이 다른 벼슬아치들에게 약점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과 벼슬을 사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온갖 음해에도 버티는 것이라는 조언을 해 준다.

정조 사후,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를 하게 된다. 정조의 우려대로 정약용, 정약전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던 신하들은 서학을 믿는 정약용과 정약전이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관되었다[5]는 이유로 순조에게 이들을 벌할 것을 요구한다. 순조는 선왕이 아끼던 두 신하를 처벌하는 것을 원치 않지만 어린 나이의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이들을 처벌하기로 한다.

결국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는 의금부로 끌려가 심문을 받는다. 정약종은 서학을 버리지 않아 이후 잡혀온 황사영과 함께 처형[6]당하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정약전의 적극적인 변호 덕분에 자신들이 황사영과 뜻이 다르다는 점[7]이 참작되어 처형을 면하고 유배를 가게 된다. 본래 정약용이 흑산도, 정약전이 강진으로 유배를 갈 예정이었지만 정약전이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신하들은 둘의 유배지를 바꾼다. 이후 두 형제는 나주에서 헤어져 각자 유배길에 오른다.

흑산도에 도착한 정약전은 가거댁[8]이라는 과부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서 정약전은 장창대라는 마을 청년을 알게 되는데, 창대는 과거 장 진사가 흑산도에 머물다 마을 여성과 정을 통해 얻은 서자로, 이후 장 진사는 창대가 어릴 때는 흑산도에 가끔 들르고는 하였으나 지금은 발길이 끊긴 지 오래라 섬에 그대로 버려진 상태였다. 그래서 창대는 어릴 때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이후에는 출세를 하고 싶어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섬에 책이 얼마 없는데다[9] 글공부를 해도 출세를 할 수 없어서 섬의 다른 주민들처럼 고기잡이나 하고 있는 신세였다.

정약전은 강진에서 저서 활동과 제자 양성에 힘쓰는 정약용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저서에 대해 논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해 어류도감을 쓰기로 결심하고 창대에게 접근해 자신은 글을 가르칠 테니 창대에게 물고기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한다. 나름대로 성리학 공부를 한 창대는 처음에는 서학을 배운 대역죄인에게 배우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정약전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 덕분에 정약전은 창대의 도움으로 어류도감을 쓰게 되고, 정약전의 어류도감은 주민들이 먹는 고기로 보지 않았던 아귀나 짱뚱어 등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 흑산도 주민들의 구휼에 도움을 주는 등 실제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한편, 정약전을 사사한 창대 또한 마을 사람들을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갖춘다. 이윽고 창대는 마을 처녀 복례와 혼인을 하고, 정약전도 동거하던 가거댁과 깊은 관계가 되어 둘 사이에 자식을[10]보게 된다.

정약전이 섬에 온 지 14년 후, 정약용의 유배가 풀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만 정약전의 유배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11] 결국 정약전은 유배가 풀리기 전에 흑산도보다 육지에서 더 가까운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창대에게 같이 따라갈 것을 권한다. 한편, 창대의 학식이 높아졌다는 것을 안 창대의 아버지 장 진사는 창대에게 과거를 보게 할 기회를 줄 테니 따라갈 것을 요구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대로 세상을 바꾸길 원했고 부양할 처자식이 생긴 창대는 결국 장 진사를 따라가기로 하고 정약전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지만, 정약전은 창대의 뜻이 세상에 출세하는 데에 있다[12]는 것을 깨닫고 분노한다. 결국 창대는 가족과 육지로 가고, 정약전은 가거댁과 자식들을 이끌고 우이도로 가서 어류도감을 마저 집필한다. 하지만 오랜 유배 생활 탓인지 정약전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과거에 합격[13]한 창대는 장 진사의 추천으로 나주 목사 밑에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창대가 겪은 현실은 매우 가혹했다. 벼슬아치들은 아전들과 백성들의 비참한 삶에는 관심도 없이 세금만 걷어갔고, 아전들은 벼슬아치들에게 녹봉 하나 받지 못해 자기들 몫까지 뜯어가려고 백성들을 더 가혹하게 수탈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은 군포와 같은 경우 갓난아기나,(황구첨정)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매겨지고,(백골징포) 먹고 살기 위해 나라에서 빌리는 곡식(환곡)에 모래가 잔뜩 섞이는 등(분석) 가혹한 징세에 고통받고 있었다.[14] 창대는 이에 분노하지만 나주 목사와 장 진사는 이를 알면서도 외면했고, 아전들은 기생집에서 앞으로 이런 일도 익숙해질 거라는 말을 하며 백성들을 아무렇지 않게 수탈할 뿐이었다. 장 진사는 어디 현감이나 하겠냐며, 나주 목사는 너무 착해서 그런 것이라는 반응. 이 때 정약전이 작성하는 갑오징어 먹물 관련 내용이 겹쳐 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뜯길 것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재산인 소까지 뜯기게 된 가족 중 남편이 관아 앞에서 자기는 군포를 내느니 차라리 남자 구실을 포기하겠다며 낫으로 성기를 자르고, 아내는 잘린 성기를 들고 아전들 앞에서 통곡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창대는 아내를 끌어내려는 아전의 행동에 분노해 결국 그의 목을 졸라 죽일뻔 했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아 참수형은 면한다.

정약전은 갈수록 나빠지는 몸을 겨우 추스리며 어류도감을 작성하던 도중 소라 껍데기를 보고 창대가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소라 껍데기가 스스로 소리를 낸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후 백성들의 원성을 상징하듯 창대가 수많은 소라껍데기 위에 누워 있고 소라 껍데기들이 소리를 내는 장면이 지나간다. 이후 정약전은 어류도감을 집필하다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난다.

결국 창대는 아전을 죽일 뻔한 일로 인해 옥에 갇힌다. 장 진사는 자식 둔 죄로 구명에 돈을 바치느라 자기도 손해를 많이 봤다며 왜 그랬냐고 따지고, 창대는 이에 '배운 대로 못 살면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고 답하고 흑산도로 돌아간다.

이때 창대가 성게의 입 속에서 파랑새가 나왔다고 하는 설명이 겹쳐 나오는데, 성게 입에서 파랑새가 나올 때에는 시종일관 흑백이던 화면 속에서 파랑새만이 파란 색을 유지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 흑산도로 가던 도중 스승이 있는 우이도에 들른 창대는 정약전의 장례식에 참석해 조문을 하게 된다. 창대는 그가 남긴 어류도감, 자산어보와 그가 남긴 편지를 가지고 돌아간다.

다시 흑산도로 가는 배에서 복례는 '역시 나는 흑산도가 가장 살기 좋더라' 라는 말을 하고, 창대는 이에 '흑산도가 아니라 자산도' 라는 말을 한다. 이후 흑백으로 보이는 흑산도 전경이 컬러 화면으로 바뀌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7. 평가[편집]


흠뻑 취했다, 섬에서만
박평식 (★★★)
정치, 과학, 철학의 방향에 관한 고민. 일단 잘 찍는 것에서 시작
- 김현수 (★★★★)
약용보다, 흑산의 약전을 기억하리라
이용철 (★★★☆)
거대한 역사를 쉽고 선명하게 꿰어내는 솜씨
- 이주현 (★★★☆)
이분법의 세상을 벗어나 자연 그대로 조화하는 세계로
- 허남웅 (★★★☆)
사건보다는 사람에, 화려함보다는 선명함에 주목하라
- 심규한 (★★★☆)
바다가 아닌 길에 대한 이야기
- 이은선 (★★★☆)
바람과 파도로그린 수묵담채화
- 이지혜 (★★★☆)
영상으로 쓴 수묵화
- 정시우 (★★★☆)
재료를 잘 알고서 담백하고 든든하게 끓여낸 생선국을 대접 받은 듯.
- 이동진 (★★★☆)
유교, 서학, 실학은 모두 본래 백성을 위한 것이지.
- 김종언 (★★★★☆)

기존의 대부분의 다른 사극 영화, 드라마 등 매체에서는 '귀족이나 양반은 이상이나 명분 탁상공론 허례허식', '하층민이나 서민 등은 실용이나 현실'과 같은 이분법적인 묘사가 많았다. 반면 이 영화의 특징은 상류층이지만 현실적인 정약전, 하층민이지만 이상적인 창대의 대비를 통해 그런 뻔한 구도를 깨버린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기존 사극의 역할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개혁적이고 탈보수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정약전조차 창대한테 "상놈 상놈"거리는 '전근대적 신분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눈여겨볼 특이점이다.

물론 극중에서는 상놈이 창대를 인격적으로 비하하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결국에는 아무리 당대 기준에서 깨어있다는 지식인이라도(더군다나 천주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태생적 이데올로기(성리학적 신분관념)'마저 극복하는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치로 파악된다.

극중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시점에서 임금도 상놈도 구별없는 천주교적 평등세상을 바라고 있다. 때문에 그가 신분질서에 따라 창대를 하대하기 위해 상놈이라고 했다면 이는 오류가 될 것이다. 정약전은 무심코 남녀관계에서 남자를 중심으로 보고 이야기하다가 가거댁의 일침을 듣고 그녀에게서 크게 배웠다고 말할만큼 깨인 인물이다.

오히려 첩의 자식인 창대가 스스로 신분제 안에 갇혀 있으며, 출세를 통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펼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따라서 정약전의 상놈 소리는 창대가 지닌 신분적 자격지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대는 상놈이다. 벼슬에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시를 못지을 것이다 등 이야기에 상처받는다.

자신을 무시하고 하대하던 정약용의 제자에게 시 짓는 솜씨로 되갚아 주고, 스승에게도 왜 동생처럼 품위있고 학술적인 책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 장면은 창대가 진사시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기 전까지 가졌던 유교적 이상이 굳건한 점을 보여준다. 이는 극 초반, 정조 임금에게 출사하며 포부를 밝히던 스승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둘은 영화 내내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이는 스승이 죽고, 제자의 믿음이 무너진 후에야 하나로 합쳐진다. 스승이 말했던 것처럼, 흑산이 아니라 자산이라고 말하는 창대의 마지막 대사가 그 합일을 의미한다.

영화에서는 둘이 지닌 생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성리학적 사회 안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두 인물을 과하지 않고 담백하게 재조명하고 있다. 이 점에서 또다른 이준익 표 명작 사극 영화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8. 흥행[편집]

국가
개봉일
총수입 (단위: 미국 달러)
기준일
전 세계
(최초개봉일)
$(세계누적)
(기준일자)
개별 국가 (개봉일 순, 전 세계 영화 시장 1, 2위인 북미, 중국은 볼드체)
미정
미개봉
미정
미정
미개봉
미정



개봉 첫날 3만명대를 동원하며 고질라 VS. 콩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고질라 VS. 콩이 국내에서는 관심도가 덜한 괴수물이며, 전작들의 성적이 안좋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하락세가 크지 않고, 한동안은 이런류의 액션형 블록버스터 라이벌이 없어서 일정기간 동안은 어느정도 성적을 유지할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고질라 VS. 콩과의 경쟁 속에서 어느 정도 하락세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에 따라 흥행 성적이 좌우될 것으로 보였다.

개봉 후 이틀간은 고대콩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으나, 3일차부터 다시 1위를 빼았겼다. 하지만 그 아래 순위들은 장기 상영중인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과 4주차를 넘겨 끝물인 미나리 등 딱히 흥행 경쟁작은 없고, 영화 자체의 이야기도 근래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충분히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성격이다. 이 점에서 그나마 흥행력이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 모탈 컴뱃이 개봉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순항을 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평가도 괜찮고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면서도 코로나 19 여파 및 이로 인한 극장 관람비를 2번이나 올리는 것에 대한 반발도 거세 영화 전체 관객이 팍 내려가면서 평일관객이 4~5천명 수준으로 내려가 개봉 보름을 맞은 4월 14일까지 고작 27만 7천명 관객을 기록했다. 박스오피스 1위인 이 영화 뿐 아니라 박스오피스 전체적으로 관객수가 저 정도이기에 개봉 시기도 안 좋았고, 비교적 잔잔한 영화라는 점과 흑백 영화라는 이유로 관람을 꺼리는 관객들도 많았다. 결국 극장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손익 분기점은 120만명인데 관람객은 33만 8,567명 이였다.


10. 명대사[편집]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않는 자산(玆山)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설경구 배우가 뽑은 명대사. "정약전이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반영된 대사여서 선택."

"물고기를 알아야 물고기를 잡응께요.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앙께요."
변요한 배우는 창대 캐릭터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대목으로 선정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정약전)
"배운대로 못살면 생긴대로 살아야지."(창대)
이준익 감독 선정. 정약전과 창대 캐릭터의 가치관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두 사람이 나이와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고 벗이 되어가는 과정을 잘 표현하는 대사"

"씨만 중허고 밭 귀한 줄은 모르는 거 말이여라. 씨 뿌리는 애비만 중하고 배 아파가꼬 낳고 기른 애미는 뒷전인디. 인제 자식들도 애미 귀한 줄 알아야 써."(가거댁)
이정은 배우. 배운 것 없어도 사람된 도리를 본능으로 깨친 여인. 잘 먹이고, 편히 재우고, 아궁이 불처럼 은근히 타오르는 남도 사랑꾼의 돌직구.실제론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 속 강진 동문주막 일화를 가거댁의 입을 빌어 녹여낸 대사
자산어보 명대사1
자산어보 명대사2

11. 여담[편집]

  • 해외 수출 영어 번역은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담당했다.[17]
  • 감독의 전작인 ‘변산’ 각본을 쓴 김세겸이 이 영화의 각본도 맡았다.
  • 설경구의 필모그래피에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영화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 설경구는 본인의 다음 영화인 킹메이커에서도 창대라는 이름의 상대역과 만난다.[18] 배우는 이선균.
  • 영화 기생충의 번역자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달시 파켓이 출연했으나, 최종 편집본에서는 통편집이 되어 등장하지 않았다.
  • 인터뷰에 따르면 기획 초기에는 황사영에 더 마음이 갔으나 주인공이 정약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1.1. 역사 탐구[편집]

  • 창대는 자산어보의 서문 및 본문에 등장하는 실존인물 장창대, 혹은 장덕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고, 극중 대부분의 모습은 제작진의 창작이다.
  • 극중에서 정조를 정조대왕, 영조를 영조대왕이라고 부른다. 이 둘을 종에서 조로 바꿔 추존한 것은 고종 때이므로 시기상 각각 정종과 영종으로 부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 일반 관객들에게 영조, 정조란 명칭이 더 친숙해서 바꾸지 않은 듯 보인다.
  • 정조가 정약전을 독대하는 장면은 전반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창작을 적절히 버무렸다.
    • 정조는 "가까이 보니 형이 아우보다 낫다."고 흡족해한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서 이와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때 연신(筵臣)이라는 표현은 경연하는 신하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원래는 정조가 제삼자에게 했을 말을 영화에서는 독대 자리에서 한 것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정사년 가을에 나는 곡산 도호(谷山都護)가 되어 나갔으나, 공은 여전히 불우하니 상께서 특별히 생각하시어 공을 친정사관(親政史官)으로 6품에 올려 주시고, 다시 전조(銓曹)에 명하여 공을 조용(調用)하라 하시니, 공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하시고, 무오년 겨울에 공에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게 하셨으니 공에 대한 총애가 옅지 않았다.
      다산시문집 제15권, 선중씨의 묘지명
    • 정조는 정약전을 증광별시로 뽑았다고 언급한다. 별시(別試) 혹은 증광시(增廣試)란, 과거시험 중에서도 3년마다 치르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와 달리 국가의 경사 등이 생기면 추가로 치르는 비정기 시험이다. 다산시문집에서는 정약전이 경술년(1790) 여름에 순조의 탄생으로 치러진 중광별시에 합격했다고 전하는데, 이 해에 정약전이 급제한 것은 조선왕조실록과도 교차검증된다.
    • 독대 장면에서 정조는 정약전에게 "너희 집안이 서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 일로 관리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정조는 개혁 군주라는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규정하고 조선에 주자학적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 한 복고주의자에 가까우며, 그의 치세에서는 문체반정과 같이 반동적인 사상적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여, 정학인 주자학이 바로 서고 나면 그 밖의 이단적인 교설은 교화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판단하였다. 정조의 복잡한 인물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점에서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 있는 대사.
  • 정약전 형제를 탄핵하는 조정 대신으로 심환지가 등장한다. 극중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정약전 형제를 국문하는 관료 중 가장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는 인물인데다가 이영석 배우가 초상화 속 심환지의 모습과 매우 닮게 나와서 쉽게 특정할 수 있다.
    • 심환지는 정약종 형제를 심문하는 장면에서 영남 방언을 미묘하게 섞어 쓰는데, 청송 심씨가 경상북도 청송군을 본관으로 두기는 하나 심환지는 한성부 태생이므로 정말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했을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심환지의 영남 방언 사용이 노론의 기반이 영남이라는 인식 하에 의도된 디테일인 경우[19], 이는 종래의 역사 연구 결과와 크게 상충한다.
  • 스탭롤에 따르면 이시수이병모서용보가 등장한다. 이들은 이름이 극중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으나, 모두 순조 초의 고관들이므로 심환지와 함께 등장한 관리들일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순조 초의 천주교 옥사에 관여했다.
  • 정순왕후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맡으며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중적으로는 정순왕후가 천주교 박해의 주동자로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천주교 박해 자체에는 동의했음에도 정약용을 처형하는 데에는 반대했다.
  • 정약종은 배교하지 않아 죽고 정약전과 정약용만 살아남게 된 것은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순조실록 1년 2월 25일 순조 1년 2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영부사 이병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천주교에 깊게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어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장면 뒤에 정약전이 강진, 정약용이 흑산도로 유배 가려던 것을 심환지의 경계로 유배지가 서로 바뀌는데, 문헌상 확인되지 않는 창작의 영역에 속한다.
    (전략) 정약종(丁若鍾)은 국정(鞠庭)에서 엄중하게 추문(推問)하는 아래에서도 죽어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은 당초에 사학에 오염되고 미혹되어 빠져 들었을 때에 죄범(罪犯)을 논하였어도 애석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사학을 버리고 정도(正道)에 돌아가겠다고 스스로 그의 입으로 발명(發明)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약종의 적발된 문서 가운데 사당(邪黨)의 서찰(書札)에, ‘너의 아우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었고, 정약종이 스스로 쓴 문적(文蹟) 가운데 또, ‘형제와 함께 서학(西學)을 익힐 수 없으니, 자기의 죄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여러 죄수들과 구별됨이 있으니, 차율(次律)을 시행하는 것이 관대한 은전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 스탭롤에 따르면 달시 파켓이 '그라몽 신부'라는 배역으로 출연했으나 최종 편집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라몽 신부(Jean-Baptiste-Joseph de Grammont, 1736-1812?)는 베이징 교구에서 관리국장(procurator)으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로,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집전한 인물이다. 등장이 불확실한 이승훈, 아예 스크린에서 볼 수 없던 '북경사람1' 및 '북경사람2'의 배역도 보이는데, 베이징을 공간적 배경으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이 촬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대신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천 명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못 죽이면 아무도 못 죽인 거나 마찬가지요."라며 전전긍긍해한다. 역시 정약용이 쓴 정약전의 묘비명에 거의 유사한 말이 등장한다. 그 말을 한 사람으로 기록된 것은 홍희운이라는 이인데, 이 사람의 이름은 스탭롤에 없다.
    • "조카사위 황사영은 아직 안 잡혔소?" 하고 골치아파하는 대사도 역사적 사실과 들어맞는다. 정약전 형제가 수사망에 올라 심문이 진행된 것은 순조 1년 초의 일인데, 그 뒤에도 황사영은 잡히지 않아 4월에는 전 함경 감사 이병정이 다른 사람을 황사영이랍시고 보고하는 사기극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기사) 황사영은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서야 붙잡힌다.
  • 정약전 형제가 유배 과정에서 나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간다. 간혹 사극에서 유배형에 처해진 죄인이 소달구지 같은 수레에 실려가는 묘사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사형수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자산어보 쪽의 묘사가 더 사실에 가깝다. 유배되는 당사자가 관직자일 경우 압송관이 동행하지 않을 정도로 편한 길인 경우도 있었지만[20] 작중에서는 그렇게까지 편한 귀양길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 유배 가는 정약전은 여지도서의 내용을 기억해 내며 흑산도의 제반 환경을 줄줄 떠올린다. 이때의 수치는 실제 여지도서 내용을 그대로 따 왔다.
  • 흑산도를 다스리는 인물의 직책이 '별장'으로 언급된다. 관객들에게 두루 익숙할 원님, 사또, 현감 등의 직책 대신 별장이라는 직함으로 나온 이유는 이 당시 흑산도에 군진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흑산도는 군사기지로서 무관이 방비 책임을 맡고 다스렸는데, 흑산도처럼 외딴 섬에 위치한 군진 등을 담당하는 종9품 하급 군관의 명칭이 바로 별장(別將)이므로 매우 적절한 고증이다. 1665년(현종 6) 전 병조 좌랑 민시중이 흑산도를 비롯한 섬 네 곳에 군진을 설치하자고 상소를 올리는데, 이미 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저런 상소를 올릴 이유가 없으니 흑산도에 군진이 생긴 것은 적어도 저 때 이후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영조 때 법전인 속대전에도 흑산도에 별장이 설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 때 법전인 대전통편에서는 비록 직접 언급되지는 않으나 정조 시기의 실록 기사들에서는 흑산도가 전라우수영 소속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정약전이 유배 중이던 순조 시기에도 흑산도는 마찬가지로 별장이 다스렸다.
  • 세금 감면 혜택을 노리고 정약전을 자기 집에서 모시겠다는 흑산도 주민이 몇 명 나온다. 이렇게 죄인에게 주거지를 제공해 주고 관리를 책임지는 인물을 보수 주인(保授主人)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현지인들 입장에선 보수주인 노릇도 그다지 환영할 바가 못 되었다. 살 곳을 죄인에게 하나 할당한다는 것도 경제적 부담이지만, 혹여 죄인이 잘못되면 덤터기를 쓰기도 하니 득은 없고 실이 훨씬 많은 직책이었다. 그렇다고 유배자가 유리걸식하게 둘 수는 없으니 관에서는 어떻게든 누군가를 지정해 강제로 보수주인으로 삼아야 했기에 보수주인 입장에서는 유배자들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나마 작중 풍헌의 경우, 고을 내에서는 배운 인물이었기에 정약전과 같은 학자에게 호의적으로 대우해 준 것이 다행이다.
  • 소나무 수취의 폐단에 대해 정약전이 지은 송정사의는 자산어보와 의외의 인연이 있다. 송정사의의 원문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으나, 현산어보를 찾아서의 저자 이태원 씨가 자료조사 과정에서 전문을 찾아냈다.
  • 별장에게 밉보인 창대는 장 5대를 맞는다. 조선의 형법체계상 장형은 대명률에 입각해 60대-70대-80대-90대-100대의 다섯 등급으로 나뉘므로 5대 단위로 장을 때리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흑산도와 같은 벽지 섬마을에서까지 FM대로 형벌이 집행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전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기는 좀 뭣하다. 굳이 따지자면 장형보다 한 단계 아래이면서 가장 경미하게는 딱 10대만 맞을 수도 있는 태형[21]을 5대 맞았다고 했다면 장형보다는 훨씬 그럴듯했을 것이다.
  • 정약용과 관련한 사건들의 시간 관계가 역사와 상당히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단순 착오가 아니라 극의 진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듯하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시점과 목민심서 강진본의 초고가 다 쓰여진 시점은 모두 1818년으로, 정약전이 죽은 시점이 1816년이니 중후반부의 중요한 전개들은 창작에 해당한다.
  • 작중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작물은 쌀, 고구마옥수수 세 종류인데, 이 중 쌀이 쌀 상인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매우 간접적으로만 지나가는 것을 빼면 실질적으로는 고구마와 옥수수만 다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물은 모두 외부에서 전래된 구황작물이다. 특히 옥수수가 등장하는 장면은 가거댁이 여성의 공헌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씨가 중요한 줄은 아는데 밭이 중요한 줄은 모른다"고 이야기하자 정약전이 깨달음을 얻는 부분으로, 이 말은 이질적인 사상과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중요하다는 해석과도 연결되어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옥의 티는 '고구마'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다. 고구마와 감자는 국내에 소개되어 들어올 무렵 둘 다 감저(甘藷)로 알려져 있었으며 고구마는 일본어 어휘가 음차된 표현이다. 따라서 가거댁이 '고구마 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 작중 정약전과 흑산도 사람들이 창대가 과거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안타까워하거나 놀리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원칙적으로 조선의 양천제 하에서 과거 시험은 양인이라면 전부 응시 가능한 시험이었으므로 양반뿐 아니라 중인, 상민도 볼 수 있었다. 단, 창대는 서얼이므로 태종 이래로 서얼금고법에 의해 서자(양인 첩실의 아들)와 얼자(천민 첩실의 아들)는 문과 응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무과 내지 잡과 응시만이 가능하다.[스포일러]
  • 문순득이 자신의 여로를 설명하면서 쓰는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 이걸 문순득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 문순득이 종2품 가선대부임을 증명하는 공명첩을 자랑스레 꺼내 놓는 장면이 나온다. 문순득이 여송국 사람들의 표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1809년(순조 9), 그 일로 공명첩을 받은 것은 1835년(현종 원년)의 일이기에 이 시점에서 극중 문순득의 발언이 성립할 수는 없다.
  • 창대 어머니는 창대가 부엌일을 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남성들이 요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가 꽤 많기 때문에 이 시대 흑산도에서도 부엌일이 성 역할 고정관념을 의미하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한 예로 정약용도 정약전에게 편지를 써 개고기 요리법을 보내주는데, 그 조리법은 원래 박제가가 알려준 것이라고 편지에서 첨언했다.
  • 흑산도 별장이 정약전에게 청탁을 또다시 시도하는 장면에서, 정약전은 "신임 전라 우수사 윤기수 영감이 내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어."라고 천연덕스럽게 별장을 낚는다. 그런데 윤기수라는 사람이 전라 우수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 기록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실록을 통틀어 윤기수라는 이름의 인물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순조 시기 전라 우수사로 확인되는 인물만 두자리수이기 때문에 실존인물을 넣으려면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사이버 인명을 정성스럽게 넣어놓은 것은 정약전의 뻔뻔한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래서 사람이 문자를 배워야 한다
  •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아이를 본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가거댁이 일반 백성처럼 묘사되는 것과 달리, 호장의 딸과 결혼했다고 하였으므로 혼인 상대가 되는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영화에서보다 높았을 것이다.
  • 정약용이 백련사에서 승려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실제로 정약용은 강진에서 불교 승려들과 자주 교류했으며, 차 문화에 대해 함께 논한 초의선사가 유명하다. 이때 정약용의 제자를 자처한 스님은 혜장으로, 유배 온 다산과 교분을 맺고 제자가 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1811년에 사망했다.
  • 정약용의 제자 중 앞서 흑산도에 방문해 창대를 상놈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창대를 상대로 시 짓기 대결을 벌였으나 망신을 당하는 이는 크레딧에서 배역명이 이강회로 기재되어 있다. 이강회는 실제 역사상에서도 정약용의 제자였던 실학자로, 정약전의 사망 후 우이도로 들어가 유고를 정리하고 저술 활동에 힘썼다. 영화에서 직접 표현되진 않았으나, 그도 창대와 정약전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정신적 성장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 창대와 이강회가 시 대결을 하며 지은 시는 정약용의 시 독소(獨笑, 혼자 웃다)이다. 천하다며 얕잡아 보던 창대가 엄청난 수준의 대구를 선보이자 이강회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데, 원본 시에서는 월만빈치운(月滿頻値雲)인 것을 '만월'빈치운(滿月頻値雲)으로 순서를 바꿔 잘못 말하고 만다(자막은 그대로 月滿으로 출력).
  • 극의 후반부에 정약전은 왕도 신하도 필요 없는 세계를 꿈꾸며 평등을 논하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불온한 발언에 창대는 정약전을 두고 떠나 버린다. 이 장면은 상당히 논쟁적인 장면으로, 정약전의 사상을 유추할 만한 연구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음에도 그가 이렇게나 파격적인 사상의 소유자였음은 증명하기 어렵다. 이준익 감독 인터뷰를 빌려 말한다면, 감독 스스로는 이 장면을 왜곡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장면이 과연 왜곡인지 날조인지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 나주 아전들이 각종 비리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아전에겐 녹봉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아전에겐 실제로 녹봉이 없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당연히 아전들 스스로 먹고살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장부 조작이나 횡령 등 화이트칼라 범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것이 습속이 되어 근절할 수 없었다. 더 윗선의 관료들도 박봉이긴 마찬가지라 지역 네트워크를 통한 비리 커넥션에 한번 코가 꿰이면 벗어나기 힘들었는데, 심지어 고상안의 효빈잡기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감사가 감영의 아전을 거느린다는 것만 알고 감영 아전이 감사를 거느리는 줄은 모른다."라는 구절도 나온다. 극중 등장하는 늙은 나주 목사의 경우 썩어빠진 전형적 탐관오리로 그려졌지만, 그보다 덜 부패했다고 해도 청백리 정신이 어지간히 투철하지 않은 지방관이라면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12. 관련 문서[편집]

13. 외부 링크[편집]

14. 둘러보기

[1] 사용된 음악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카미유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 13악장 백조.[2] 정약용의 제자.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대신해 우이도로 가 문순득을 만나게 하기도 했다.[3] 류승룡은 우정출연이라고는 하나 실제 분량은 조연급이다.[4] 우정출연이지만 2010년 평양성 이후 11년 만에 이준익 감독 작품에 출연했다. 2010년까지 정진영은 이준익 영화 다섯 편에 출연해 그의 페르소나로 꼽혔다.[5] 황사영은 정약용 형제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였다.[6] 실제 역사에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으나 영화 내에서는 황사영과 정약종이 전부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7] 황사영은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을 정벌하기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과격한 인물이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이미 교황이 제사를 금지하는 명을 내리자 이에 동의할 수 없어 배교한 상태였다.[8]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흑산도보다 먼 가거도에서 시집을 왔으나, 시부모와 남편을 모두 여의고 밭 하나를 의지해 먹고 살고 있었다.[9] 섬 바깥으로 왕래하는 배를 통해 겨우 대학을 구해 왔는데, 전 단계인 논어도 못 뗀 데다 첫 구절도 옥편을 뒤져가며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10] 아들 둘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정약전은 유배 생활 도중 흑산도 호장(이장)의 딸과 관계를 맺어 정학소라는 서자를 가졌으며, 정약전의 적자 정학초가 혼인 이후 후사를 잇지 못하고 요절하자 아내, 며느리, 정약용과 함께 정학소에게 후사를 잇는 것을 편지로 논의한 적도 있다.[11] 실제 정약용의 유배는 정약전이 죽고도 오래 이어졌다.[12] 정약용은 나름대로 개혁 의지가 있어도 어느 정도는 기존 임금/성리학 중심 체제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정약전의 사상은 (비록 본인이 창대를 상놈 취급하는 등 여전히 계급 의식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양반도 상민도 차이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급진적인 사상가였고, 본인도 성리학으로 서학과 기하학을 받아들였다거나, 바다에 떠내려 온 지구의를 보고 세상이 둥글다는 것을 인정하는 등 매우 깨인 모습을 보였다. 정약용이 수많은 저서를 남긴 것과 다르게 정약전이 어류도감이나 쓰고 있던 이유도 본인이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표현하면 남은 가족들도 무사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13] 다만 소과는 거뜬히 붙어 진사가 되었지만 한양에서 본 대과는 떨어졌다. 나주 목사는 그런 창대에게 어차피 과거제도가 세도가 자제들 합격시키는 데 급급한 마당에 대과 급제가 쉬운게 아니라며 위로를 해준다.[14] 사실 아전들이 녹봉이 없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으며, 이곳 아전들은 먹고사는걸 넘어 첩까지 여럿두며 호의호식한다. 애초에 녹봉은 쥐꼬리 수준이라 그것만으로 먹고사는 벼슬아치는 없다시피했고, 나주 목사 등 고위 관료들은 어차피 민란이 일어나도 분노는 아전들에게 집중되므로 자기 이익을 위해 부담없이 부패를 조장했다.[15] ~ 2021/06/12 기준[16]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 이외에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후보에 오른 변요한은 한표 차로 수상을 하지 못했다.[17] 김용옥은 이전에 이준익의 영화 중 왕의 남자를 영어로 번역한 바 있다. 장군의 아들과 취화선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18] 자산어보에서는 창대, 킹메이커는 창대로 성이 다르다[19] 이준익 감독은 전작 황산벌에서 방언의 사용을 통해 풍자성을 강화하는 기법을 활용했으므로, 단순한 삑사리가 아니라 정말 의도된 부분이라고 추론해도 무리는 아니다.[20]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 참조.[21] 이쪽은 10대-20대-30대-40대-50대의 다섯 등급 체계다.[스포일러] 그러나 영화에 나온 창대는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이는 애초에 창대의 존재 자체가 족보에 기록되지 않아, 족보에 창대를 서얼이 아닌 양인으로 써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대의 아버지인 장 진사에게 다른 아들이 없거나, 사망했거나, 후계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전제 하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2023/10/05

[김조년] 깊은 숨을 쉬고 < 금강일보2023.10.04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깊은 숨을 쉬고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깊은 숨을 쉬고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3.10.04 10:1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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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작년부터 나는 이상스럽게 진정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글을 자꾸 쓰게 된다.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슬픔이고 비극이다. 나에게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우리의 현실 역시 내가 판단하기에 슬프고 비극스럽다. 나는 정말로 정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지 않다. 불평과 불만과 비판 대신에 희망과 긍정의 말들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다. 때로는 깊은 시를 읊고 싶고, 깊은 사상을 음미하면서 나도 그렇게 깊게 들어가고 싶다. 달라지는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고 있는 우리의 정치상황을 볼 때 내 생각의 실마리는 그런 것으로 가지 않고, 자꾸 정치현실 문제로 치달린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 일선에 나서겠다거나 어느 정치가를 지지하면서 자문하고 싶은 맘은 조금도 없다. 다만 정치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이기에 그것들에 무관심하고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벌써 한 해 반에 가까워온다. 그 동안에 무엇이 달라졌나? 입법부가 무기력해졌고, 대통령실은 입과 귀를 막아버린 것처럼 보이고, 행정부도 소통이 없어졌다. 여야 정치가들의 대화나 논쟁이 없다. 정치가 달라지려면 법을 만들거나 고쳐서 제도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당이 입법부에서 소수라는 것 때문에 법개정이나 제정을 통한 제도 개편은 전혀 시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야당이 주도한 법은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린다. 누가 보아도 꼼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시행령을 통하여 법제정의도와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들이 많다. 대다수 국민들이 바란다는 검찰개혁은 행정명령을 통하여 무력하게 되었다. 오히려 검찰국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더 강력하거나 살벌한 검찰권력이 모든 분야에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찰출신 대통령을 정점으로 굉장히 많은 분야를 검찰 출신으로 채웠다는 비판을 받는 지경이 됐다. 검찰권력은 정점을 이루고 있다. 정점에 다다른 흐름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돼 있다. 높을수록 흘러내리는 속도와 힘은 강하고 빨라 깊은 곳으로 빠진다.

한일관계를 부드럽게 했다고 하지만, 한미일 군사동맹을 새롭게 하면서 북한, 러시아, 중국과 대척하는 갈등관계를 고조시키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세계의 강대국, 또는 선진국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하면서 지나친 미국 중심의 외교와 국방관계에 빠진 형국이다. 더 깊은 미국 중심의 종속국가체제로 들어간 상황이다. 이렇게 되니 국가 원수라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평화를 말하지 못하고 신냉전과 전쟁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갈등구조를 강화하게 하였다. 핵무기보유와 핵전쟁의 위협에 대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최근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여 도발할 경우 그 정권 자체가 위험하게 될 것이란 말을 하였다. 우리 한반도에서 남과 북 중 어느 측이 먼저 핵무기를 쓴다는 것은 남북 모두 전멸할 것을 각오한 악한 행위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먼저 쓰고 나중에 응징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핵개발과 핵무기사용 자체가 없도록 하는 평화체제로 나가는 정책이라야 옳다고 본다. 그런데 화해와 상생의 이야기와 정책은 없고, 오로지 군사우위와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살벌한 말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폭넓은 대외무역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물가는 수시로 오르고, 소상공인들의 가게들이 문을 닫는 것이 높아진다. 서민경제는 어렵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동화하면서 사람들의 일자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부자감세정책으로 세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른 재정긴축으로 축소된 부분들이 너무 많다. 특히 내년 예산에 반영될 기초연구분야의 광범위한 예산감축은 깊고 지속되는 연구와 기초학문을 어렵게 만들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 특히 연구인력을 지원하는 정책이 사라질 때는 새로운 인력을 기를 수가 없고, 유능한 연구자를 지속하여 지원할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유능한 인력들은 다른 나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한 두 번의 그런 정책의 실수는 굉장히 장구한 세월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어 회복과 갱생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정책실현은 관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언제나 민과 관과 기업과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작업이 아니고는 원활하게 사회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서 민과 시민단체들과 공동작업이나 연대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민주사회에서 퇴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마 이런 형태로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진영의 협력단체들을 인위로 만들게 될지 모른다.

이러다 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대통령은 자기 자신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는 듯하다. 학습능력이 떨어지거나 상생의 소통을 차단한 듯이 보인다.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이 늘지 않으면 그의 동력은 사라진다. 그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흔히 나오듯이 극노했다거나 대노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린다. 불안하고 불편하다. 들리는 말에는 그에게 참을 말하는 참모가 없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자신도 불행하고, 사회도 국가도 불행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그의 퇴진을 외치는 집회를 이어가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까? 어찌해야 할까? 그래서 깊은 숨을 쉬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숨을 깊이 쉬는 것, 그것은 성찰이요, 연구요, 다짐이요, 자기변혁이다. 능력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앉은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넘어 전체 역사를 생각하는 간절한 맘을 모으는 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검찰권력을 버리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민생경제를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겸손히 배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