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3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11 조국(祖國)의 구원(救援)을 교육(敎育)으로

새역사를 위하여 - 11.조국(祖國)의 구원(救援)을 교육(敎育)으로

유달영

11.조국(祖國)의 구원(救援)을 교육(敎育)으로

이상으로 나는 국민 고등 학교의 교육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천되어 거둔 바 그 두드러진 성과의 일부를 소개하였다. 북 유럽의 스웨덴, 노르빠이, 핀란드, 독일의 여러 나라에서 국민 고등 학교식의 교육이 국가 면목올 일신하였고, 또 국난 (國難)을 극복한 역사도 찾아 볼 수가 있었다.

어느 나라이고 초기에 있어서 선구자들이 한결같이 가시밭을 걸었으나 보람없는 수고를 한 사람은 없었다. 또 반드시 어느 기간올 지나면 국민들은 각성하여 이를 국가적 인 사업 으로 발전시켜 가게 되었고, 이 교육 사업의 발전에 따라서 국민의 퇴폐상은 일소되고 문화, 정치, 산업, 경제 등의 건실한 발전을 예외없이 성취한 사실을 여러 나라의 역사가 한결같이 실증하였다.

영국은 노동자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자 착수하였으나 국가의 협력이 없었고, 미국도 이민한 덴마아크 사람들에 국한되었다. 또 일본에도 선각자들이 그 우수성을 깨닫고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 만일 국책으로 적극적인 발전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전전(戰前)과 같이 편협하여 국민 고등 학교의 토양과 근간이 되는 종교 교육을 거세하고 다만 그 형식적인 제도만을 수입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라, 장차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이같은 의구는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추측된다.

스웨덴의 선각자들이 국민 고등 학교와 농학교를 병설하여 그 수학 기간(修學期間)을 늘리고 유기적으로 두 학교를 능률적으로 활용하여 성과를 거둔 것은 새로운 시험으로 주목 할만한 일이다. 독일이 1차 대전에 패배한 후에 형언하기 어려운 핍절속에서 국민 고등 학교를 교육의 1대 사업으로 하고 단결과 인내의 힘을 길러 갱생의 토대를 만든 것도 우리가 지내쳐 볼 바가 아니다. 국민 고등 학교의 도입으로 큰 성과를 거둔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 국가가 큰 고난 속을 헤매면서 단결되지 못하였거나, 국민의 교육 수준의 차이가 심히 커서 문맹이 많았거나, 국민 정신의 불통일로 역사의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경우들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도 이상의 여러 요소를 지니고 있다. 전 국민 들은 이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시련 속에서 각 부면으로 새로운 비역이 없이는 살 길이 없다고 절감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해방 직후의 상태대로 살아나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한다. 국민들은 문화, 정치, 경제의 각 부면에 위대하고 청신한 인물을 대망하고 있다. 국민의 종교적 신념, 높은 도덕,광범한 지식, 단결과 협동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히 얻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의 새 교육 운동의 전개로 이를 성취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현실 아래서 덴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의 진수를 소화하여 우리의 것으로 하는 것 이 가능하냐 하는 문제는 중대하고도 절실한 문제라 할 것이다. 필자는 덴마아크의 교육의 연구와 도입을 주장한다. 이 교육 은 확실히 우리 나라의 새 교육사의 전개에 있어서 큰 구실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첫째로 덴마아크의 문화가 농업 문화로서 최고 수준에 도달한 점이다. 우리는 과반수의 국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의 나라이지만 우리가 농촌에 발을 들여 놓고 검토해 보면 농업의 경영은 그대로 원시적이다. 농업을 과학적으로 경영하는 사람은 매우 드믈다. 그러므로 그밖의 것은 더도 못된다. 이들을 최단시일에 교육하여 세계와, 국가와, 민족과, 인생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정도에까까지 시급히 끌어올려야 하고 또 그들의 근로와 정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방법으로는 정신과 지식을 단기에 교육하는 멘마아크의 교육이 최적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우리 민족의 큰 결합의 하나는 정신적 기반 결함이다. 국민의 정신적 기반이 없이 번영을 누릴 수 없음은 역사의 법칙이다. 우리 나라가 동방의 하나의 문화국으로 역사를 가져왔던 것도 빈약하나마 국민의 정신적인 중추와 기반이 있었던 까닭이다. 삼국시대의 불교와 조선 시대의 유교와 같은 것이 곧 그것이었다. 오늘 우리의 수난은 전쟁이 없었다 할지라도 역시 다른 형대로 혼란에 빠졌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불교도 유교도 이것을 고도로 소화시키지 못하여 그대로 낡아 버렸고 기독교는 아직 우리 국민 전체의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상(砂上)의 건축같이 국가는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게 된 것이다. 모래밭을 기반 으로 한 거대한 건축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20 전후의 청년을 바라보라. 그들에게 정신적인 무엇을 우리가 주었나? 무엇을 도덕의 기준으로 넣어 주었나? 고귀한 인생관과 정신적인 민족의 유산도 없이 허덕이는 청년들이 얼마나 가엾은가? 해방 후에 자유는 방종(故縱)과 혼돈되고,전제는 진보적 민주주의로 오신(誤信)되었다. 본성이 선하다고 자타가 믿고 있던 이 동방의 예의의 민족이 동족상잔의 흘린 피속에 둥둥 떠서 흐르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정신의 중추의 결여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부동 하는 정신의 기반이 있었던들 이렇게 참혹한 비참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엔,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신의도 도덕도 헌 신짝과 같이 주저하지 않고 버리는 현상이다. 소위 지식 계급은 더 한층 무력하고 교활하다.

탄식과 한숨은 한갖 무력 한 존재 일 뿐이 다. 칸트가 2대 경이 (二大驚異)로 느낀 도덕은 오늘에는 아무런 경이도 되지 못한다. 도덕의 낡은 줄은 오히려 광란의 춤에 걸려대는 장애가 될 뿐이다. 도덕을 잃어 버린 인류의 손에 쥐어진 고도의 과학은 무어을 거두게 할 것인가 실로 공포와 전율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 교육의 중심을 영원의 생명과 도덕의 기반 위에 두고 또 전 농민올 무지의 골짜기에서 구해내는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통일과 번영으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첩경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당면한 여러 가지 모순점을 해결하는데 서광을 가져올 열쇠가 될 것이다.

덴마아크에도, 스웨덴에도, 노르웨이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지금도 없지 않으며, 또 토지 정책, 대기업 국영, 개인부(個人富)의 제한 등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올 위하여 사회주의적 정책을 현명하게 채택하여 높은 문화와 산업 경제의 발전을 이루어가되, 혁명의 미명 (美名)을 빙자(憑籍)하고 최대의 죄악인 살육을 행하는 야만적인 방법을 취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종교 교육과 도덕 교육으로 튼튼한 기반을 만들어서 민중들이 어떠한 선동에도 뇌동(雷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체는 한 사람을 위하여, 한 사람은 전체를 위하여]의 투철한 이념을 우리 생활의 기반으로 만들어야 한다. 민족과 국가의 먼 앞날을 추호도 생각함이 없이 오직 목전의 이익만 을 위하여 분주하는 무리들은 마치 제 손가락과 제 다리를 잘라 먹으면서도 이익을 거두는 것으로 착각하는 무지한 자 들이라고 하겠다,

미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미국의 문화와 번영의 근원을 찾아 볼 때 그 근저가 기독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기독교를 미국의 역사에서 제거 하고 본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기독교가 미국에 없었더라면 그 풍부한 자원과 눈부신 과학은 미국의 역사를 오늘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우리가 미국에 가서 화려한 고층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등의 겉 허울만을 둘러 보고 돌아온다면 과연 우리 나라 현실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합중(合衆)의 나라가 유례 없는 자유를 향유하면서 오늘의 통일과 질서와 발전을 이루는 근저에 착안하는 현명이 필요할 것이다.

제2차 대전 후에 광대한 영토를 분리당한 영국의 노제국(老帝國)은 무력한 존재가 되어 쇠퇴 일로를 밟을 것으로 생각한 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강인한 저력으로 역사의 주동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역시 그들의 교육의 힘이요,종교의 힘인 것이다. 오래고 높은 문화의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도 가부는 차지하고 공산주의의 일정한 이념으로 국민을 무섭게 훈련하고 교육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최대의 결점 정확히 파악하여 근본적인 기초를 세워 나가지 않으면 번영을 향하여 역사의 바퀴가 결코 굴러가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덴마아크의 교육 정신올 거세함이 없이 스웨덴의 장점까지를 아울러 수입하여 교육 구국의 운동을 전개 함이 무엇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확신한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착안하기 쉬운 덴마아크의 협동 조합의 사업도 국민 교육의 기초 공작이 없이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요, 정상배들에게 이용만 될 것이다. 조직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요, 생명이 일을 하는 것이다,

조직은 일의 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거듭하여 조직을 뜯어 고쳐 보더라도 부패한 국민의 정신으로서는 바라는 성과를 거둘 수는 없다. 국민의 갈 방향을 분명하게 정하라. 청년들을 시급히 교육 계몽하여 정신적 기반을 만들어라. 이것이 우리 나라 새 역사 창조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온 인류가 친형제처럼 상부 상조(相扶相助)하여 복지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유일한 평화의 길 일 수밖에 없다. 이 주장에 그릇됨이 없다면 직업 종교가들에 의하여 흐려지지 않은 순정(純正)한 종교심에 의해서만 모래 같은 인류가 콘크리트처럼 굳게 뭉칠 수 있을 것이다. 덴마아크의 교육이 기독교 신앙 위에 서지 않았던들 그들도 일시적 성과는 거두었올지 모르나 독일과 일본이 걸어간 편협한 국수주의의 길을 피할 수 는 없었을 것이고 또 그로 인한 역사의 필연의 심판을 벗어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도산(島山)도 말년에 덴마아크에 큰 흥미를 가지고 구국의 길을 덴마아크의 역사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가 강서군(江西 郡) 청태 (靑苔)에서 이 운동을 실현해보고자 분투한 것은 과연 도산 안 창호 선생다운 현명한 일이다.

공자는「시 3백은 일언이 페지(一言而蔽之)하고 사무사(思無邪)j라 하였다. 우리의 현실 타개는 일언이폐지하고 건전한 국민 교육으로 그 기초를 삼아야 할 것이다. 특히 청소년의 교육은 시급을 요한다. 청년은 시뻘겋게 달은 철과 같은 것이다. 식기 전에 때려서 연단(鍊鍛)해야 한다. 이 시기에 잘 못 다루면 재교육은 극난한 것이다. 마치 철이 식은 후에는 이것을 목적하는 형으로 만들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 철은 달굴 수가 있으나 사람은 다시 달구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청년 교육, 신과 민족과 가정을 뜨겁게 사랑하는 정신과 광범위한 지식을 부여하여 진리 만을 사랑하고 진리에서만 살고자 하는 부동의 인생관과 분명한 이상을 목표로 삼는 교육만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 낼 수 있음을 덴마아크의 역사는 밝게 우리에게 입증하여 주는 것이다.

옛 성인도「3군은 오히려 빼았을 수 있으나 필부(西夫)라도 그 뜻은 빼앗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정신 교육이 얼마나 튼튼한 국가와 민족의 기초이며 방패 인가를 가르쳐 주는 금언이라 하겠다.

우리가 덴마아크의 번영을 말하면 소위 식자(識者)들은 누구나 그 원인을 영국의 좋은 시장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 시장이 덴마아크의 생산품을 잘 소비해 주는 까닭에 번영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천박을 들어내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덴마아크의 조합 조직과 판매 기구에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덴마아크의 농촌의 내실(內實)이 다른 나라들과 크게 다른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덴마아크의 농촌은 도회지의 낙오자나, 폭리위주의 배금주의자(拜金主義者)나,정치 세력에 밀려난 자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덴마아크의 농촌을 세계 제1로 만들어 보자는 야심가들의 집단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국토를 제몸처럼 사랑한다. 신념과 이상 위에서 자연과 인생을 즐기며 근로하는 사람들의 농촌인 것이다. 그들은 독립 자존(獨立自尊)의 정신으로 스스로 갈고,스스로 뿌리고,스스로 거두고, 스스로 팔아서 넉넉하되 검박 건실한 생을 영위하고 있는 국민들이다.

아름다운 농장과 목장과 화원과 숲과 마을은 모두 교육으로 배양된 것이다. 그리고 건전한 인간성은 해마다 기름져 가는 그 국토에서 자라가고 있는 것이다.

[덴마아크의 국토는 비록 좁지 만 덴마아크 청 년들의 머 리 와 가슴 속에는 경작하기에 족한 넓은 토지가 있다.]고 한 말은 덴마아크의 본질율 잘 표현한 말이다. 덴마아크 영국에서 얻는 경제적 가치는 막대하다. 그러나, 유럽대륙에서는 덴마아크만이 농업을 한느 것도 아니며또 국토가 최적의 자연조건을 구비한 것도 아니다.

어찌하여 영국에 더 가깝고 더 광대하고 더 비옥한 국토를 가진 나라들이 영국의 시장을 약소한 덴마아크에게 양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원인을 뚫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덴마아크의 농민들은 햄과 베이컨과 라이드를 위한 돼지만의 축산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돼지 가공품을 가장 많이 사가는 영국이 이것을 사가지 않는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덴마아크의 모피는 제3의 산업으로서 뉴욕시장을 점령하고 있고, 디젤 엔진은 세계 시장의 4분의1을 공급하고 있다. 모래까지 외국서 실어다 만드는 미술 도자기는 결코 영국시장으로만 팔려가는 것이 아니다. 항상 꾸준하게 새로운 지혜로 세계 시장을 스스로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덴마아크가 지닌 좋은 점의 어느 것이던지 그 근원올 찾아 올라가면 반드시 같은 하나로 돌아가 그치게 될 것이다. 그 것은 곧 청년 교육이다.

20세기의 [참 사람]인도의 간디로 하여금「이 세계에 살아봄직한 나라는 오직 덴마아크 뿐이다]라고 감탄한 것이 결코 영국으로부터의 외화 획득이 아닐 것이다. 누가 덴마아크적 노선이 우리의 전도를 열어가는데 부적하다 할 것인가?

덴마아크의 교육은 결코 세계 각국의 장점을 이것 저것 주워 모아 논것이 아니다. 덴마아크의 흙과, 덴마아크의 사람과,덴마아크의 역사와, 덴마아크의 예술을 열렬히 사랑하는 덴마아크에서 움터 나온 덴마아크 정신의 교육인 것이다. 편협한 애국심에서가 아니라 깊고 넓은 기독교 정신의 반석(盤石) 위에 세워진 교육인 것이다.

우리는 구덩이를 파고 샘물을 길어다 붓는 식의 모방을 해서는 안된다. 덴마아크의 번영의 샘물의 근원을 확실히 찾아 보고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신의 샘물을 자신이 파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덴마아크와 통하는 근본적 원리를 파악하여 이를 우리 것으로 하기에 힘쓴다는 것은 더없는 슬기가 될 것이다.

다음의 노래는 대한 교육 연합회가 제정한 교육의 노래로 교육자들의 이념과 사명감을 확고히하기 위하여 필자가 지은 것이다. 아침 수업 전에 교사들이 한데 모여 이 노래를 우렁차게 합창하고 각각 교실로 들어가는 학교들이 있다. 날마다 교육의 이념과 역사적 사명감을 새로이 다짐해 두는 것은 참 으로 중요하다 하겠다.

교육의 노래

반만년 오랜 역사 민족 삼천만

오 ! 눈부신 세기의 흥망의 날에

재우고 가르치는 타는 정열은

구국의 밝은 횃불 높은 등화대

우리는 찬란한 새 역 사의 창조자

곤을 모르는 불사조(不死鳥)의 날개라

삼천리 아름다운 강과 산위에

오! 높고도 푸르른 조국 하늘은

배우고 가르치는 우리의 가슴

진리의 꽃이 피어 무궁하리라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이 없어

오 ! 가슴에 빛나는 태양을 안고

배우고 가르치는 거룩한 사랑

생명의 영광이어 영원하여라.

교육은 분명히 새 역사를 창조하는 근본적 요소이다. 교육자들은 역사적 자각 아래 무거운 사명을 분명히 느끼고 피곤을 모르는 페닉스의 날개가 되어야 한다.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10 덴마아크 교육의 빛은 다시 국외에서

 새 역사를 위하여 -10.덴마아크 교육의 빛은 다시 국외에서

1)스웨덴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멘마아크의 오늘의 농업 문화 건설은 20세기의 일대 경이 (一大驚異)이다. 그 문화의 근저인 독특한 교육은 덴마아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싹터서 발전한 것인데 이같은 교육이 다른 나라에서도 적응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우리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를 조사 검토 하여 실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앞날의 개척도 교육으로 출발해야 할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덴마아크틀 구원한 그 교육이 우리 자신도 구원할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의문에 대하여 확증을 얻고자 함은 우리 겨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이 아닐 수 없다.

맨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 제도는 1864년에, 국가 사정 이 대단히 다른 노르웨이의 산악 지대에 이식되었고, 1868년에 는 다소 형태를 바꾸어 다시 스웨덴에 수입되어 농촌의 발전에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다시 핀란드로 옮겨지고, 1909년에 는 보수적이며 문화의 자존심이 강한 영국 에도,1874년에는 미국에도 수입되고, 그 밖에 독일과 일본에도 수입되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또 그 앞날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독일은 2차 대전 전에 이 교육 제도를 국가적으로 힘써 활용했었다.

약 백 년 전 18세 기 중엽까지의 스웨덴의 농촌 사회는 말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교육을 받을 길이 없었고 마라서 일반 민중은 우매(愚味)하였으며 빈곤과 단조한 생활올 영위하 였다. 또 당시의 농민들은 선거권조차 세금액에 의하여 결정 되는 것이었다.

어거스튼 소르만 박사는 스웨덴의 정부가 국민 대중을 교육하기에 힘쓰지 않고, 교육기관들이 모두 일부의 특권 계급에 전용되어 국민들은 암흑에서 헤어날 길이 없음을 통탄하여[학교는 국민 전체를 교육하기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편협하게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국가는 국민 전체를 모름지기 평등히 교육하라. 우리는 종래에 교육의 일대 혁명 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것이며, 이를 위하여서 필연적으로 새 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라고 부르짖고 덴마아크식의 국민 고등 학교의 설립을 주장하여 크게 여론을 일으켰다.

소르만 박사의 활동은 결실하여 1867년 11월 1일에 동방 코트란드의 헬례스타트와 스카네의 온네스타트에 최초의 국민 고등 학교가 일시에 개교되고, 또 하루 늦어서 서 남쪽 아카르브 근처에 유명한 피 일란(Hvilan)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스웨덴 사회의 깊은 잠을 깨우는 새벽종이었다. 스웨덴의 어두운 사회는 이 새 학교로 말미 암아 도덕의 앙양, 지식의 향상은 물론, 근린 상조(近隣相助)의 협동 정신이 급속히 높아갔다. 스웨덴의 교과서 만능의 형식 교육은 도덕과 실용적 지식 교육의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고 또 농촌의 모든 학교에는 설비를 완비한 농업과를 설치하기에 진력하였다 .

스웨덴에 있어서의 국민 고등 학교의 성과는 예기한 바 이상이었으므로 국가는 크게 각성(覺醒)하여 1882년에 비로소 국민 고등 학교의 일부의 혁신과 확충에 힘쓰고 또 자유 급비 제도를 만들어 급속히 많은 학생을 수학시키기 시작하였다.

스웨덴에 있어서 국민 고등 학교의 일부 혁신이라고 하는 것은 덴마아크의 링그비 농학교에서처럼 국민 고등 학교와 농학교률 한 구내에 두고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 한 관리자 아래 모든 시설율 서로 공동 이용하는 제도이다. 이 것은 여러 가지 점으로 경제적이요 또 능룰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에 정부가 인정한 국민 고등 학교는 44개교이었고 빈곤한 학생에게 주는 급비액은 80만 크로녀 에 달하였다.

그 후 스웨덴은 이 국민 고등 학교 교육을 기반으로 문화,정치, 경제,산업의 각 부면에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되어 오늘에는 덴마아크와 아울러 유럽의 이상 국가군의 하나로 손 꼽히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수단을 거치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부(富)의 균형과 자유 평등의 권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들의 정신 문화와 협동 조합의 운영 발달은 일대 장관(一大壯觀)으로 인류사에 특기할 만한 바가 있다.

국민 정신의 초석은 참된 정신 문화 위에 두어서 공포 없는 평화와와 참 자유 평등의 행복을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사실을 우리는 스웨덴에서 또 다시 찾아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스웨덴의 국민 고둥 학교는 86개 교로 불어 났다.

2)노르웨이 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세로 쪼개어 서반부에 자리잡은 나라로 첩첩한 산악의 나라이다. 이 산악들이 깊은 협강(狹江)들로 말미암아 쪼개져서 다시 다수한 산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지형에 의하여 자연히 많은 지방들이 생기고 또 각 지방들은 각기 독특한 방언과 풍속과 관습을 가지고 있어 문화 운동이 대단히 곤란한 나라이다. 이 자연의 장벽들을 돌파하고 여러 곳의 산악 지방의 민족적통일 이루어 문화를 향상시키지 않으면 이 나라의 진정한 번영과 발전을 가져올 길이 없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수많은 장벽들을 깨뜨리고 오늘 복지국가 노르웨이를 이룩한 것은 국민 고등 학교의 공적이 지대 한 구실을 한 것이다. 덴마아크의 그룬트비히의 사상을 그 처음으로 노르웨이에 수입한 것은 례오 핏히이다. 핏히는 교육자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이 나라에 명망이 높은 애국자였다. 그는 현명하게도 노르웨이를 구하기 위하여 덴마아크의 생명의 불씨를 조국으로 옮겨다 점화시킨 것이다. 크리스니아의 레디마의 묘지 에는 모든 노르웨이의 국민이 잠시도 잊지 못하여 하는 선각자 핏히의 묘비가 서 있다.

생명과 말씀의 광명이

동포를 깊은 잠에서 깨웠네

높고 귀한 보람있는 삶이어

핏히의 이름은 노르웨이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1850년으로부터 십년 동안 핏히의 감화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각 방면으로 동포와 조국을 위하여 큰 공적을 쌓았다.

종교 운동에 와그셀과, 국어 정리에 아젠, 국사 정리에 문호, 민족 전설 정리에 제르젠과 모에, 민요에 린데만 등은 국가적 인 교육 사업 에 그 공적이 뚜렷한 사람들이다.

핏히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선구자적 열정에 감격하여 직접으로 국민 고등 학교를 노르웨이에 이식한 것은 젊은 대학생이었던 헤르만 안카와 오라운 아르베젠의 두 청년이었다. 핏히의 지성과 그 현명에 움직인 그들은 대학 졸업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큰 포부를 안고 졸업 즉시로 덴마아크로 건너가 학교의 모든 실정을 상세히 연구하고 또 조합운영의 방법울 파악한다음 귀국하였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노르웨이를 구원할 교육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안카는 부호이었으므로 스스로 자금을 부담하면서 알페젠의 계획을 주로 하여 사업 을 촉진시켜 노르웨이의 통일과 번영의 기초를 만들었다. 첫 국민 고등 학교는 1864년 10월에 개교하여 역사적인 제 1회 8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해가 지날수록 발전하여 노르웨이의 국민 고등 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오늘날 노르뤠이의 무제에젠 호숫가의 유서깊은 사가룬 (Sagatun) 국민 고등 학교는 노르웨이의 자랑이 되었다. 이 학교는 우리 조국의 갈 길을 지시하는 한 개의 등대처럼 느껴진다.

1877년에 크리스토파 브룬은 판하임 국민 고등 학교를 설립하였고 십 년 간에 설조르드를 비롯한 20교의 국민 고등학교 개교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외 국민 고등 학교의 발전은 결코 처음부터 순조로이 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대부분이 경영난으로 허덕이었고 교사는 셋집을 얻어 이리 저리로 옮겨다녔으며 때로는 수많은 산악 지대를 찾아 이동하면서 가르치기도 하였다.또 어떤 때에는 큰 농원의 빈 방을 얻어 몇 달씩 교육받기도 하었다. 이 가시밭 길을 걸으면서 선각자들은 낙심 하지 않고 역사를 창조하여 갔다. 민중들은 차차로 그들의 정신을 찬양하고 그 수고에 감사하게 되었다.

노르웨이에서 국민 고등 학교의 사업은 그 초창기에 근시안적 편협 한 관리들이 이 사업 을 백안시 (白眼視)하였으며 정부도 전혀 협력하여 주지 않았었다. 그 당시의 교육기관은 특수계급들의 독점한 바 되었고 또 관료적이며 귀족적이며 학구적인 경향으로 치우쳐 있었다. 지방민의 교육 기관인 보습학교(補習學校)는 그 본래의 사명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고등 교육의 예비교로 되어 버렸고, 또 학교 출신들은 전원 생활(田園生活)을 꺼려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실로 노르웨이 교육도 그룬트비히의 평한바 그대로「사(死)의 학교」로서 생명이 없는 교육이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이웃 나라들이 새 교육으로 말미 암아 급진적으로 번영함과 국내의 애국 청년들이 분투한 가시밭에서 교육의 꽃이 피어남을 보고서야 뒤늦게 새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고 보조의 제도를 만들어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 노르웨이의 국민 고등 학교는 본 궤도에 올라 1955년 에는 기개교에 학생 수는 약 4천 명 으로 불어 났다.

오늘 노르웨이의 국어의 통일과 음악, 무용, 의상 등의 민족적 정화와 재흥(再與)이며,정치,경제,산업 둥의 비약적 발전은 참으로 볼만한 바가 있다.

3)핀란드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핀란드는 스웨덴 동쪽에 있는 인구 4백만 남짓한 작은 나라로 동양 민족이 유럽에 건설한 유일한 독립국가이다,그 들은 올림픽에서 그들의 체육의 실력을 발휘하여 널리 알려 졌다. 그리고 1939에서 1944년의 6년 동안을 강대한 소련에 항거 하여 싸웠을 때에 그 용감한 국민성은 전 세계의 동정과 찬사를 받은 나라이다.

핀란드의 최초의 국민 고등 학교는 1889년에 소피아 하그만이라는 여성의 손으로 란메르폴스 근처의 캉가살라에 설립 되었다. 그 당시에는 수공과에 상당히 주력하고 종교, 역사,음악,체육 등이 중요시되었다.

민요집 카례바라 편찬으로 이름난 시인 린로트와 수공 교육을 시작한 시그네우스 등은 모두 이 새 교육 사업을 개척한 공로자들이다. 이어서 시인 루네베르그의 감화와 활동으 로 각지에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고 1901년에는 벌써 41개교로 늘고, 근래에는 83개교로 증가하게 되었다.

패전 후 소련에 빼앗긴 동부 지방 카렐리아로부터 서부로 여섯 개의 국민 고등 학교가 이전되었고 1894년에 창설된 핀란드의 아스코브라고 불리워지던 칸델야르비 국민 고등 학교 는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핀란드에서도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이 겨울 동안은 남녀 공학으로 하고 여름에도 여 성들만의 학교를 운영한다. 주요 과목은 국어, 역사, 음악이다. 사회 문제, 지방의 역사, 목공 특히 체육을 열심으로 하고 있다. 큰 학교에서는 일층 높은 정도로 교육하기도 한다. 학생은 여자가 약 70% 를 차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도 초기에는 정부가 상당히 소극적이 었으나 1905년부터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날로 융성의 일로를 걷게 되었다. 6백 년 동안 식민지가 되었던 핀란드는 독립 후에 참으로 눈부신 발전올 거 듭하고 있다.

4)영, 미, 독, 일 세계 각국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

영국 시찰단 일행이 1905년에 덴마아크를 방문하였다. 그들이 발킬메 국민고등학교에 들렸을 때에 이 학교의 팔메말벤니카 교수는 국민거등하교의 목적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그는 덴마아크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아스칼의 초상을 감개 깊이 응시하면서 국민 고등학교의 목적에 대하여 정열적인 강연을 하였다.

[ 이학교의 목적은 각종의 필요한 지식을 많이 전달해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정신적인 시야를 넓혀서 그 들에게 올바른 생활 의욕을 북돋아 주는데 있는 것이다.]

시찰단의 한 사람인 돈톤(J.I. Thornton)은 영국에 돌아가서 덴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를 열심히 신문과 잡지에 소개 하였다. 그는 무려 20여 차례나 북해를 건너서 스칸디나비 아의 국민 고등 학교를 시찰 연구하고 여러차례 교육 연구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여러 동지들을 격려하여 덴마아크 의 교육을 시찰시켰다.

1909년에 꿰이커 교도 죠지 캐드버리 (George Cadbury)에 의해 영국 최초의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는 버어밍감 근처 실리오크에 설립된 퍼어크로프트(Fircroft) 학교이 다. 돈톤은 이 학교의 간행지를 통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 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사람에게 도의적인 생존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교육은 단지 소극적 사실의 추구도 아니요, 이에 유사한 산만한 지식의 전달도 아니다. 실로 전 생애의 확충적 사업이다. 퍼어크로프트의 성공은 이런면의 발전을 가지고서만 측정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각지로부터 노동자, 사업가,교사,농부, 광부, 직공,점원들이 모여서 다투어 수학했다. 주요 학과는 성경 연구,정치 사회사, 경제학, 산업사, 영국 문학, 자연 과학, 사회 문제, 시사 문제,원예학이고 매주일 한 번씩 각계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청하여 특별 야간 강의를 듣는 것이 관례다.

영국의 대표적 신문 런던 타임스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퍼어크로프트 학교에 입학하여 더 넓은 사랑파 지식의 세 계로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다시 자기의 직업 으로 들아왔을 때에, 전보다 한층 예리한 관찰의 눈과 한층 높은 능력을 가지고 세계에까지 공헌할 추 있는 것튼 확실하다. 이 학생들은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치는 학구와 반성의 분위기 속에 유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 퍼어크로프트 학교의 교장 톰 부라이 안은 락월한 교육 자로서 크리스텐 콜의 예찬자인데 꿰이커 교도와 그룬트비히 계통의 사람들과의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을 인식하였다. 꿰이 커 교도?로은 인간의 정신적 교육에 있어서 덴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에 많은 기대를 가졌었고 반면에 덴마아크 사람들 은 또한 퀘이커 교도들의 그 실천적 인도주의(人道主義)에 대하여 많은 예찬을 보내게 되었었다.

우리는 옛날에 그룬트비히가 런던에 가서 덴마아크롤 구원 할 국민 고등 학교 교육의 기본 이념을 착상한 것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야말로 이 교육과 인연이 깊은 나라라 할 것이다. 많은 덴마아크의 국민 고등 학교 출신들이 퍼어 크로프트는 물론 죠지 캐드버리에 의해서 우드부르크에 세워 진 퀘이커 학교와 또 북부 웰스에 세워진 콜렉할레크(Coleg Harlech) 학교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덴마아크의 아스코브 국민 고등 학교를 방문한 영국인의 다음과 같은 술회는 우리들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다.

『우리 영국 사람들은 무엇인가롤 덴마아크의 당신들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크나큰 역사를 소유했으나 우리 국민의 대부분이 이와 관계가 없다. 우리는 또한 풍부한 문학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도 대부분의 일반 국민에 게는 사장(死藏)된 보옥(寶玉)이다. 우리는 이 민중과 그들의외 역사 및 문학과의 사이에 있는 큰 간격을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기 위하여 국민 고등 학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 다.』

미국에는 19세기 중엽부터 덴마아크 사람들의 이민이 많았다. 또 그들 이민 가운데는 국민 고등 학교의 출신들도 상당히 있었다. 그들은 자연의 광막한 토지를 따라 미시간, 아이오와 지방의 서쪽으로 태평양 쪽을 향하여 가며 개척하였다. 1870에서 1890년의 20년간에 그수는 십만을 돌파하였다. 그들은 새로 개척한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자기들이 국민고등학교 시절에 존경하던 교사를 초빙하여 교회와 함께 학교를 세우고 자신들과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1878년에 아이오와주의 일크 혼(Elk Horn)에 주재하고 있던 덴마아크 사람 오라프키르케베르히에 의하여 미국 최초의 국민고등 학교가 창설되었다. 이 사람은 노르웨이의 국민고등학교의 유명한 지도자 크리스토파 브론의 제자이다.

1844년에는 위스콘신의 웨스트 덴마아크에 또 그 다음에는 네브라스카의 부레이아에, 다시 아이오와의 데스모이네스에 설립되었고 1911년에는 멀리 서부의 캘리포니아주에 솔뱅 국민 고둥 학교가 세워졌다.

미국에서 잘 알려진 국민 고등 학교는 아이오와의 엘크 혼 과, 네브래스카의 니스넷드와, 미네소타의 덴보트 국민 고등 학교 들이다. 이 학교들은 모두 덴마아크의 국민 고둥 학교 의 졸업생들이 덴마아크인의 이민 지역에 세운 것들이다.

독일에 있어서도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큰바 있었다. 1890년에 베를린 에서 사회정책(社會政策)에 관한 회의가 진행 중에 덴마아크의 유명한 실업가인 타이트겐(C. F. Tiettgen)이 독일 황제의 초청을 받아서 국민 고등 학교 에 관하여 상주(上奏)한 일이 있었다. 1891년 코펜하겐에 독일 공사관 관원으로 가있던 홀만(A.H.Hollmann)박사가 이 교육의 중요성에 크게 주목하고 국민 고등 학교에 관한 책을 쓰게 되었는데 그 책이 1909년에 출판되었다.

제 1차 대전 후에 수많은 국민 고등 학교가 각지에 설립되었다가 그 대다수는 직공들을 위한 야간 학교로 변모되어 도시에 설립되었다. 시골에도 합숙하면서 배우는 많은 단기 학교가 설립되었다. 독일의 수많은 신문들이 이 교육을 찬양하고 격려해 주었다. 이 교육 사업은 일시는 나찌에 의해서 저지 당하기도 했으나 막대한 경비를 국가가 보조하여 청년교육의 수단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그릇된 지도자들에 의해서 극단적 국수주의(國幹主義)교육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 후에 국민 고등 학교 교육의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 순수화하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는 바르덴바일러 (Dr. Frtiz Warten Weiler)가 교육외 창시자이다. 그는 1910년에 젊은 학생으로서 덴마아크를 방문했다가 리슬링게 국민 고등 학교의 교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이 방면에 천품올 타고난 우수한 교사로서 대단히 정열적 인물이었다. 스위스로 돌아가서 그룬트비히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스위스 국민고등학교를 창설하였다.

초기에 푸라우엔필드에서 귀중한 경험으르 쌓은 그는 농촌 사람들을 이끝어 주(週)를 단위로 하는 국민고등학교 과정을 실시하여 큰 교육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큰 지침이 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1925년에는 국민거ㅗ등학교 협회가 창립되었고 카소야(Casoja)와 하임(Heim)에는 여자만을 위한 국민 고등 학교가 창성ㄱ되었다.스위스는 지금도 이 교육을 위하여 덴마아크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폴란드에는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십 여개의 국민 고등학교가 설치되었다.수많은 덴마아크 유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종종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정치 밖에서 서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최초의 학교는 달키 (Dalki)에 천주교 신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러나 순수하게 폴란드 사람에 의해서 착상되고 창설된 것은 1930년 경에 이그나시 (Ignacy), 조피 아솔라쓰(z?fia Solarz) 둥에 의해서 가씨 (Gaci)에 세워진 학교이다. 폴란드는 그 복잡한 정치적 복선 속에 온갖 설움과 천대를 받고 있으면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르헨티나(Argentina)에는 덴마아크 사람들이 이민해 가 서 산지 오래 되었다. 1908년에 덴마아크인 학교 협회가 생겼으나 정식의 국민 고등 학교는 1917년에 부에노스아이례스 주에 있는 카스칼레스에 설립되었다. 이 고장에 가장 성과를 거 둔 것은 주단위(週單位)의 코오스였다고 한다. 이 곳에 덴마아크에서 강사들이 비행기로 출장하여 그 곳 덴마아크 청년들을 위해서 강의도 했었다.

오스트리아, 험가리, 불가리아, 에스토니아에도 흉미롤 가진 교육자들에 의해서 국민 고등 학교가 설립되었다.

네델란드(和蘭)에는 많은 훌륭한 국민 고등 학교들이 있으 나 2주일 과정을 단위로 하는 단기 강습형의 것이 대부분이다.

프랑스에서도 이 교육 제도에 큰 자극올 받았다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와 실험시기에 있다. 일본 사람들은 홋카이도를 덴마아크식으로 개척하고자 꾀하기도 하였고또 이바라기현(安城蘇)의 카토오(加藤寬治)씨의 교육의 ’개척자적 기개 (氣槪)로 설립한 국민 고등 학교를 비롯하여 롯토리현(鳥取蘇)의 야마게(山陰) 국민 고등 학교,시즈오카현(靜言縣)의 흥농(興農)학원,토오료오의 농사 학교들은 모두 주목 할만한 학교들이 며, 또 이에 자극을 받아 설립 된 보습학교 상당한 수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