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5

김태완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네이버 블로그



183. 김태완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네이버 블로그

3학년

183. 김태완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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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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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강 2012-3-10 전국

 

[2012-3-10 전국]

[40~4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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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과거는 왕이 유교적 정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과거는 여러 단계로 진행되는데, 시험의 최종 단계인 전시(殿試)에서는 왕이 직접 등용될 인재들에게 당대의 현안들을 책제(策題)로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묻는 시험을 치렀다. 책제로 제시된 현안은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 시험에서 예비 관리들은 현안 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책들을 글로 썼는데, 이 글을 ⓑ책문(策文)이라 한다.


책문은 왕이 제시한 책제에 답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에 따라 짓는다. 


책문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라는 말로 시작하여 “식견이 부족한 저희를 불러, 조금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될 말을 들을까 하며 시험을 내시니, 죽을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와 같이 장황하면서도 공손하게 왕에 대한 찬사와 자신을 낮추는 겸사(謙辭)를 한다. 


본문에서는 다양한 근거를 들어 책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말들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솔직한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식의 겸사를 반복하면서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臣謹對].”라는 예를 갖춘 말로 마무리한다.


또한 책문을 작성할 때 글쓴이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서 근거를 찾아 답한다. 선비들에게 유교 경전은 보편적 이념을 제시한 문헌이었고, 역사서는 그 이념의 현실적 성패를 기록한 문헌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문헌들을 인용하여 이상적인 사회는 어떠해야 하며, 왕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었다.


조선 선비들은 유학을 익히고 인격을 수양하면서 경륜을 쌓고, 때가 되면 과거를 통해 자신의 포부를 세상에 펼치고자 하였다. 당시 지식인 계층이었던 선비들의 출사(出仕)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책문은 출사의 최종 단계에서 왕에게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학식과 포부를 마음껏 펼치는 장이었다. 따라서 책문은 때로는 당대의 시대적 현안을 고민하고, 때로는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려는 ㉠선비들의 포부가 담긴 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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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위 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책문의 개념과 형식을 설명하고 책문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② 책문에 반영되어 있는 다양한 시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③ 책문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변천되어 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④ 책문의 유래를 언급하며 책문이 출현한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⑤ 책문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그 한계를 언급하고 있다.

 

 

 

41.<보기>는 책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위 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보 기 >

 

 

 

 

 

 

(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

 

 

전하께서는 즉위하기 전부터 어질다는 명성과 소문이 자자해, 인심에도 부합하고 하늘의 명령도 받았습니다.

 

 

(다)

 

 

마음을 간직하는 요령은 경건에 있고, 경건의 요령은 혼자 있을 때 조심하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 소공(召公)은 성왕(成王)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경건하게 일을 처리하십시오. 경건하게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경고는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

 

 

저처럼 어리석은 시골 선비가 어찌 가르침을 구하는 전하의 뜻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꼴꾼이나 나무꾼의 말도 성인은 가려서 썼다고 합니다.

 

 

(마)

 

 

전하께서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 1507년 과거에서 제출된 책문 -

 

 

① (가):책문의 서두에 나오는 표현으로, 앞으로의 내용이 왕의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의미해.

② (나):책문을 읽게 될 왕에게 찬사를 하고 있어.

③ (다):역사적인 사례를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어.

④ (라):식견의 부족함을 들어 자신을 낮추면서 자신의 의견이 가질 한계를 보여주고 있어.

⑤ (마):왕에 대한 예를 갖추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어.

 

 

 

42. ⓐ와 ⓑ가 <보기>와 같은 의미 관계에 있다고 할 때, 이와 유사한 관계로 볼 수 없는 것은?

 

< 보 기 >

 

 

 

 

ⓑ=ⓐ의 내용을 담아낸 글

 

 

① 감상 : 감상문   ② 여행: 기행문

③ 탐방: 탐방기    ④ 토막: 토막글

⑤ 회의: 회의록

 

 

 

43.‘책문’을 ㉠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근거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책문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② 책문에는 글쓴이의 공손한 태도가 잘 드러나기 때문에

③ 책문은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④ 책문은 권위가 있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 근거하여 쓴 글이기 때문에

⑤ 책문에는 유교적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선비들의 구상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해설]

(인문) 김태완,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전시에서 제출했던 글로, 왕이 제시한 책제에 대한 해결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 책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0. [출제의도] 글의 서술상 특징을 파악한다.

제시문은 1단락에서 책문의 개념, 2단락과 3단락에서 책문의 형식을 설명한 후 4단락에서 책문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41. [출제의도] 정보를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한다.

2, 3단락의 내용을 보면 책문을 짓는 일정한 형식이 언급되어 있다. 책문은 처음과 끝 부분에 왕을 높이는 찬사와 신하인 자신을 낮추는 겸사를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책문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 책문에 표현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이 자신의 부족한 식견이나 경륜으로 인해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2. [출제의도] 어휘의 의미관계를 파악하고 적용한다.

ⓐ와 ⓑ의 관계는 현안 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책’과 그 대책을 내용으로 쓴 ‘책문’의 관계이다. ‘토막’은 ‘크고 덩어리진 도막’ 또는 ‘말·글·노래 등의 짤막한 부분’을 의미한다. 그런데 ‘토막글’은 ‘토막’을 어떤 내용으로 한 글이 아니다. 따라서 ④는 적절하지 않다.

 

43. [출제의도] 내용을 추리하여 근거를 파악한다.

㉠은 책문이 조선의 지식인 계층이었던 선비들이 유교적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안을 쓴 글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유교적 이상이란 선비가 안으로는 인격을 수양하여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왕을 보필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정답] 1445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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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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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과거는 왕이 유교적 정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과거는 여러 단계로 진행되는데, 시험의 최종 단계인 전시(殿試)에서는 왕이 직접 등용될 인재들에게 당대의 현안들을 책제(策題)로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묻는 시험을 치렀다. 책제로 제시된 현안은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 시험에서 예비 관리들은 현안 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책들을 글로 썼는데, 이 글을 책문(策文)이라 한다.


책문은 왕이 제시한 책제에 답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에 따라 짓는다. 


책문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라는 말로 시작하여 “식견이 부족한 저희를 불러, 조금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될 말을 들을까 하며 시험을 내시니, 죽을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와 같이 장황하면서도 공손하게 왕에 대한 찬사와 자신을 낮추는 겸사(謙辭)를 한다. 


본문에서는 다양한 근거를 들어 책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말들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솔직한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식의 겸사를 반복하면서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臣謹對].”라는 예를 갖춘 말로 마무리한다.


또한 책문을 작성할 때 글쓴이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서 근거를 찾아 답한다. 선비들에게 유교 경전은 보편적 이념을 제시한 문헌이었고, 역사서는 그 이념의 현실적 성패를 기록한 문헌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문헌들을 인용하여 이상적인 사회는 어떠해야 하며, 왕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었다.


조선 선비들은 유학을 익히고 인격을 수양하면서 경륜을 쌓고, 때가 되면 과거를 통해 자신의 포부를 세상에 펼치고자 하였다. 당시 지식인 계층이었던 선비들의 출사(出仕)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책문은 출사의 최종 단계에서 왕에게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학식과 포부를 마음껏 펼치는 장이었다. 따라서 책문은 때로는 당대의 시대적 현안을 고민하고, 때로는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려는 선비들의 포부가 담긴 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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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4

송시열/평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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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평가
최근 수정 시각: 2023-10-10 00:43:21





 상위 문서: 
송시열
1. 개요2. 교조적이었다?3. 인간성 문제
3.1. 수이강 사건3.2. 술이부작 사건4. 허목 윤휴와 의견 대립

1. 개요[편집]
송시열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

2. 교조적이었다?[편집]
사대와 소중화는 당시 포악한 불의에 대한 의로운 저항이자 미개한 오랑캐와 구분되기 위한 사상적 정통성을 의미하는 중대한 것이었다. 국가 이념의 기초로 세운 성리학은 명말청초에 이르러서는 오랑캐에 대한 원한과 혈맹으로 맺어진 명나라와의 관계등이 융합되어 단순히 그 이전의 사상적 학문적 성격만의 성리학으로만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본래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일갈했던 당시 송시열이 문제시했던 것은 윤휴의 중용장구에 대한 해석 그 자체였다기 보다는 주자라는 인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공자의 도통을 이은 것으로 여기고 칭송해 마지않는 존재였다. 반면 윤휴는 주자를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이라기 보다는 학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고, 이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남송의 그것에 겹쳐보고 있던 송시열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오활(迂闊)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성리학 영향이 강해서 육상산의 학설까지 받아들이는 혼합된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주륙화회론에 입각한 이기일물론이다. 그런데 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나온 인물이 바로 이황과 이이다. 이 둘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여 이기일물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이는 《율곡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서경덕의 이기일물론을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였다. 또한 이 둘은 남인과 서인의 사상적인 뿌리가 되는 조선 후기 사상계를 지배하는 거두였다.

또한 이단과 관련된 논쟁은 붕당의 대립 과정에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이이와 성혼 문묘 종사 운동이 숙종 때 마무리 될 때까지 남인은 이황의 적통이자 성리학의 주류로 자부하면서 이이의 학통을 이단으로 치부하였다. 특히《효종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영님남인이 서인의 문묘 종사 운동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이이의 주장이 육상산과 같고 폐해가 불교와 같다고 강하게 비판하여 서인의 학통을 사실상 부정하였다. 게다가 숙종 초기 영남남인의 산림인 이현일이 이이를 공세적으로 비판한 것은 기존 영남남인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형태였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조선의 사상계가 교조화되고 상대의 학설과 학통을 이단으로 부정하는 흐름이었음을 봐야한다. 이는 송시열 이전부터 있었고, 송시열과 대립하던 남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를 온전히 송시열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면 과연 송시열만 그랬는지, 당대의 흐름이 어땠는지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송자대전》을 보다보면 송시열이 성리학을 절대화한 수구 꼴통, 반개혁적 인물이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른 멘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아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으며 출근, 외출과 집에 왔을 때는 아내에게 서로 맞절로 큰절을 했다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여 여자도 사람답게 살려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야 된다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자학을 가르치고자 했는데 송시열이 남자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말을 따르라고 했으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고 오히려 남자들에게 가르치는 주자학을 여자들에게도 가르친, 꽤나 선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권에서 '여자는 무학이 상덕'이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고, 이는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화되었을망정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참작해 볼 때 당대 송시열의 사상은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도 있다.[1] 그는 시집간 딸들과 손녀딸들, 며느리, 손자 며느리, 조카 며느리 등에게도 이러한 책을. 그것도 읽기 쉬우라고 한글로 손수 써서 보냈다.[2]

심지어 "서북 지방의 여자들은 매우 건강하고 민첩하니, 이들에게 포를 쏘는 연습을 시켜... 성을 지키게 한다면 남자 병사만 못지 않을 것이다"[3]라며 여군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단순히 주장 수준이 아니었고 현종 대에는 실제로 여포수 제도가 실제로 존재했다.[4][5]

송자대전을 보면 송시열은 서북 지방의 백성들이 다른 지방의 백성들보다 군사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당시 서북 지방은 징병을 폐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군사적으로 다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다시한번 말하지만 송시열은 여인들이 문 밖으로 나와서 그것도 전투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물론 이를 현대적인 남녀 평등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시열이 남녀 유별로 인해 일어난 당시 조선의 사회적인 통념, 즉 이러한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서얼들에게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과부의 재혼을 법으로 막아놓는 건 너무 잔인한 처사이므로 부녀자들의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6]#

또한 송시열은 동시에 이이, 김육으로 내려오는 제도 개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수사[7]를 혁파하기를 주장하고, 노비 제도를 노비 종모법으로 완화(적어도 당시엔 완화다.)를 주장했다. 송시열의 이미지로 흔히 알려진 "대동법 반대"도 초기엔 스승(김집)의 영향으로 반대하던 입장이었지만[8] 실질적 효과를 보고는 적극 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김집이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론도 지주층의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기 상조론이나 징세액이 오히려 늘 수가 있다거나,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9] 그리고 송시열은 대동법보다는 내수사 폐지와 공납의 양을 축소하는 등을 통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일 것을 권고했다. 쉽게 말해서 송시열은 작은 정부, 세금을 줄이고, 정부의 규모를 축소를 주장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되고 효과가 좋자 가장 찬성한 사람도 송시열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김집은 김육이랑 무척 잘 교류하는 사이였다.

또한 관리의 녹봉을 금전으로 지급하자는 의견도 앞장서서 찬성했으며, 관리의 녹봉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수탈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남긴 적도 있다.[10] 게다가 호포제를 주장, 사실상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송시열의 호포제 시행에 대해서는 흔히 부정적이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 좋게 봐주어도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본래는 찬성론자는 아니었으나 다만 자신의 라이벌 윤휴가 호포법을 적극 관철하자 이에 영향을 받아선지, 그 이후 자신의 제자 김수항을 필두로 하여 호포법 실시를 관철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족들의 끊임없는 반발로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호포제 시행론은 서인 산림이 먼저다. 산림의 유계 등이 사족출포론을 처음으로 논의 제안한 것은 효종 10년 무렵이었고, 김수항과 박세당, 유계 등이 호포론 등 군역제 대변통론을 제시했으나 논의 미숙과 대사헌 강백년 등 대간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 또한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 윤휴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상태였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유계의 호포론 논의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의 호포론 논의는 숙종 초년에 출사한 그가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통해 라이벌 의식에 기인,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이루어진다면 도리어 윤휴가 서인계 산림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더 적합할 것이다. #관련글 다만 유계와 산림의 호포론이 송시열, 송준길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 하는 견해도 있다. 송시열이 적극 호포제 도입에 나섰다면 김육의 대동법처럼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포제는 일단락하고, 이외에도 송시열은 청나라를 본받아 수차(물레방아)를 활성화 하자는 말도 있었고,[11]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여 포를 많이 구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과의 궁술 시험을 포병 시험으로 바꾸자고 주장했으니, 이완보다도 시대를 앞서 본 셈.

또 그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자학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 말은 성리학의 거두인 정자가 한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므로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발언으로 어떤 이의 성향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을 깊게 살펴야 한다.
신은 듣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기한(祁寒)과 서우(暑雨)를 무릅쓰고 농부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내가 얻어 먹고 있는데, 이처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니 그야말로 이 천지간에 하나의 좀벌레라 하겠다.’ 하였다 합니다. 신처럼 쓸모없는 자가 천지 가운데 헛되이 살면서 한 가지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농민이 생산한 곡식을 먹으니, 이미 좀벌레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10명 중 1명이 죽어나가는 시절이 있을만큼 사회 경제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식인 등 실제 정치 영역에서 지배 계층의 역할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거나 적극적인 진휼을 통해 백성의 삶을 구제해 주는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이런 맥락에서 송시열은 '외양', 즉 북벌의 전제로서의 '내수', 그리고 그 내수의 전제로서의 '정심'을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송시열의 행보 가운데에서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 대한 추앙, 삼전도의 굴욕과 관련된 최명길[12]과 이경석에 대한 비판, 반청사상을 근거로 한 북벌 등을 두고 송시열을 수구적인 친명사대주의자라는 주장도 있다.

옹호 측에서는 당시 반청사상의 보편성을 들어 송시열을 옹호한다. 효종대의 북벌론 기조는 숙종 때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실제로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위적으로 언젠가는 행해야 하는 것이었고, 청은 그로 인해 어쨌든 운명적으로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 그만큼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화라는 가치는 소중했다.

숭정제에 대한 추앙은 당시 유별날 것 없는 행보였다. 명이 사라진후 당파불문하고 조선 지식인들에게 깊숙히 자리잡은 '조선중화 사상'에서 중국, 중화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요순의 정치와 공맹의 학문이 자리한 문명에 가까운 개념이다. 조선에게 명은 중화의 원류인 중국땅의 마지막 문명국이었고 멸망후 중화를 대표하는 기제로 남았다. 망한 명의 후광을 사용해서 청은 야만이자 오랑캐의 나라로, 조선은 문명이자 중화의 나라로 보는건 어느 사대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중화의 마지막 황제가 숭정제다. 실학자들도 반청사상을 강하게 드러낸 경우가 많다.

비판 측에서는 "당대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당대의 일반인의 수준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평가대상의 과로 볼 수 없다"는 식의 잣대는 전혀 변호의 대상이 될수 없으며 당대의 반청사상과 북벌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이용한 것은 분명 서인과 그 필두 송시열이고 이것은 심각하게 비합리적이고 시대착오적 과오로 조선의 발전에 심각한 저해를 가져온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실학자라고 해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애초에 실학자도 유학자이다. 다만 실학이 등장하게 된 시초를 따져보면 서인 위주의 일당 독재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인 송시열 중심의 주자 성리학 교조주의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부터이다.

수구 꼴통 성리학자 이미지는 송시열의 생전 시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길 송시열이 상경하자 송시열이 화폐와 돼지 사육을 폐지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했다. 그 때 송시열은 상경해서 그것은 오해이며, 오히려 상업을 발전을 위해 화폐 유통을 촉진해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조세의 금납화를 제시했다. 거기에 더해, 돼지 사육 역시 소를 죽이는 폐단을 감소시키므로 오히려 권장해 마땅하다는 주장을 했다. #

위에서 언급된 여성에 대한 교육은 분명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논어나 맹자에 여자를 교육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없다.[13]

또한 송시열이 조선 조정에서 했던 말의 상당수가 수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대동법 도입에 대해서 논의했을 때, 송시열은 왕이 덜먹고 덜쓰면 된다고 말하면서 내수사 폐지를 건의했다. 내수사는 왕의 금고이다. 왕의 금고를 폐지하자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걸 보고 오 송시열도 사실운 진보적이었구나!라고 감탄하는 것은 무리다. '왕이 아껴쓰면 된다'는 조선시대 내내 유학자들이 입에 달고 살아온 소리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조선의 재정 문제와 불산공물 문제는 단순히 왕실이 절약하고 내수사를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데 있었다. 당시 대동법 도입 논의가 나온 것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로 인해 더 이상 과거의 법제도가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왕이 덜먹고 덜쓰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다.

3. 인간성 문제[편집]
정치적, 학문적 위치와 별개로 당시의 대유학자라는 지위를 가졌지만 처신에 있어서는 졸렬하고 옹색했다. 이경석에게 저지른 수이강 사건과 윤선거 묘갈명의 술이부작 사건이 대표적이다.[14][15] 두 사건 모두 타인을 비난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 비난을 대놓고 한 게 아니라, 치졸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돌려 까거나 아예 죽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실상 욕설 비문을 써줘서 문제가 되었다. 번번히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생전의 송시열은 자신과 뜻이 맞지 않은 사람들을 대부분 적으로 만들었고 갈등은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조정을 양분시켰다.

하지만 송시열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숙종한테 저지른 비난. 숙종이 태어날 때는 그의 탄생을 신하들 중 혼자서만 축하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오죽하면 숙종의 아버지 현종이 송시열은 숙종이 종묘에 제향되고 자손이 보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 있다며 대놓고 그를 깔 지경이었다. 급기야 경종이 태어났을 때는 같은 서인들조차 몸을 사리는 가운데 그의 원자책봉을 혼자서만 반대하며, 이미 숙종이 종묘에 고한 일을 뒤집어 엎으려 할 정도로 날뛰다가 결국 사사당했다.[16] 그나마 경종은 장자라고는 하나 후궁 소생으로 트집을 잡을 명분이 있었다지만, 숙종은 현종의 적장남이자 유일한 아들로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정통성을 가진 임금이였다. 그런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지 못할만정 사소한 트집을 잡은 건 확실히 신하로서 오만한 모습이다.

3.1. 수이강 사건[편집]
이경석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시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게 이경석이었다.[17] 송준길과 송시열이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경석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관련기사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이경석과 윤선도 처벌에 이론이 생겼다 하여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경석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몰래 가졌고, 한편으로는 삼전도 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18] 이경석이 궤장을 받을 때 글을 구하니 "오래 살고 건강했다(壽而康)"라고 써주었다.

공이 관직에 있는 동안의 시말(始末)에 대해서는 성상(聖上)의 교서(敎書)에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경인년(1650년, 효종 1년) 2월에 있었던 일은 은미(隱微)하여 명확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때는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이 순간에 결정되는 판이라, 비록 임시로 국란을 모면하는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해(利害)를 따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수수방관하여 아무런 상관도 하지도 않았으니 그 표정이 마치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사람 보기보다 더 심하였다. 그런데 오직 공만이 한 몸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이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함으로써 나라가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주상(主上)께서 공을 알아주는 마음이 더욱 융숭해졌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공을 붙따르게 된 것이니, 그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고(壽而康) 마침내는 우리 성상에게 그런 융숭한 은례(恩禮)를 받은 것이 이유가 있다 하겠다. 내가 이 때문에 앞에서 이미 성덕(聖德)을 칭송하고 끝에 와서는 곧 훌륭함을 공에게 돌렸으니, 아, 여기에서 군신(君臣)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훌륭하다.
숭정 무신년(1668년, 현종 9년) 계동일(季冬日)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처음엔 그냥 좋은 표현인 줄 알았지만, 현종이 온천 여행 갈 때 조정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안 가자 낙향해 있던 이경석이 이들을 까는 상소를 올렸고,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송시열이 반박 상소를 올리면서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수이강'의 정체가 드러난다.[19] 수이강은 송나라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당시 손적은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 살고 건강하겠구나(壽而康)"라고 비아냥 거렸다는 고사를 들어 이경석이 삼전도비의 비문을 쓴 것이 손적과 같은 아첨행위라고 매도한 것이다. 삼전도비 항목에 나와있지만 당시 청 태종은 비문 내용을 조선이 어떻게 짓는지 봐서 조선을 다시 손봐줄 꼬투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비문을 써야 했던 것이니, 절대 손적과 이경석이 같은 평가를 받을수는 없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이경석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음에서 미루어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유학자로써 수치스러운 일을 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경석이 이 사건을 가지고 얼마나 대인군자의 자세를 보였는지는 이경석의 이후 대처에도 나오는데 이경석의 문집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백헌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 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이경석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참으로 군자의 자세였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이경석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이경석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실록의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 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의 뜻이 이와 같다면 상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이원익과 김상헌의 일로 말 뜻을 모호하게 하여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곧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더구나 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시열의 말 한 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 시열은 참으로 경석을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 단지 ‘오래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씀이겠는가.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실록

대체로 이·김 양공(兩公)은, 혹은 훈덕(勳德)으로 혹은 절의(節義)로 세상의 존경받는 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양 조정에서 예우가 특별하여 이같은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래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었다. 경석은 시열의 뜻을 몰랐으므로, 힘껏 사양하지 못하고 끝내 성대한 예전을 받아들였다.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청하자, 시열이 서문을 지어 주었는데, 대체로 비꼬는 뜻이 없지 않았다.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개수실록

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이었는데, 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소를 올려 오지 않으면서 손적(孫覿)에 빗대어 경석을 모욕했다. 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대제학으로서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기 때문에 시열이 소에서 언급한 것이었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현종 10년 4월 14일,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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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술이부작 사건[편집]
평생지기였던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죽겠다고 해놓고 혼자 살아남은 일[21]과 남인 윤휴사문난적으로 지목한 송시열의 태도를 비판했던 일 때문에 송시열은 그를 사후에 배척했다.[22] 송시열의 큰형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전사했고 형수 김씨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다 뒤따라갔다. 아버지 송갑조는 국치를 당한 슬픔에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상처가 더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종형 송시영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목숨을 끊었다. 호란으로 가족을 잃은 송시열 입장에선 죽자고 결의하고 다른 선비들과 부인까지 죽었는데 아버지 핑계대고 살아나온 윤선거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당하게 교류를 끊거나 하는것도 아니고 평생을 친하게 지내놓고서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묘갈명으로 불만을 표시하는것은 치졸하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윤선거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교류할 때 송시열은 윤선거가 혼자 살아나온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정말 그게 곱게 안보인게 원인이라면 교류를 처음부터 거절하는 것이 옳은 방식이지, 죽은 다음에 고인을 뒤에서 씹는 건 명색이 대유학자라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즉, 윤선거를 곱게 안 보았다던 송시열은 정작 윤선거 생전에는 아무 소리 안하고 친구로 지냈을뿐더러, 그 아들인 윤증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수제자 위치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윤선거가 죽자 고인 아들이자 자기 제자의 뒤통수를 때린 셈인데, 결코 좋은 소리 들을 만한 행위는 아니다. 그리고 거물 정치인이나 국회의원이 살아 생전에 서로 사이가 안 좋았더라도 장례식에 참석 할 때는 예의를 지키며 유가족을 위로해주고 조문문과 조서에 생전의 오점과 약점을 집필하는 건 무례의 극치이며, 위로의 말과 생전에 업적과 장점을 집필하는 게 예의이다.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였을 때, 죽은 친부에 대한 묘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윤선거와 송시열이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40년이나 되는 데다, 송시열이 윤증 자신의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만큼 이런 부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송시열은 분명 윤선거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묘비문을 지어주는 것을 허락했다. 망자의 묘비문에는 좋은 말만 써주는 것이 관례였다. 좋지 않은 말을 쓸 정도로 사이가 안 좋거나 망자를 나쁘게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묘비문 짓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수락하고서,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인용했다. 문제는 인용하면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이란 말을 썼다는 것이다.[23] 이는 "망자의 묘비문인 만큼 박세채의 글이 참 좋으니 옮겨서 인용은 해주겠지만(述而) 내 생각으로 지은 글은 아니다(不作)." 라는 뜻이 된다. 즉, 내 생각으로는 이 양반은 이런 말을 들을 정도는 못된다라고 망자를 돌려까며 조롱하는 내용을 써 준 것이다. 오늘날에도 죽은 사람 평판 갖고 장난치는 건 욕먹을 짓인데, 하물며 유교 윤리가 최고로 교조화(그것도 송시열 본인이 주도한)되는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패륜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아버지의 묘비문에 이런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윤증은 이후 몇 번이고 송시열에게 묘비문을 고쳐줄 것을 요청했다. 지은 사람만이 수정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결국 이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이는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가 틀어지는 이유가 되었고, 회니시비의 단초가 되었으며, 장차 서인노론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송시열과 윤증이 절연하게 된 전말을 아뢰고 스승인 윤증을 옹호한 최석문 등의 상소문
비문(碑文)을 지을 때에 평생을 두루 서술하였으나 총론(總論)하는 말에 있어서는 평소에 칭찬하던 것으로 하지 않았고, 논저(論著)한 것은 단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의 말을 빌려서는 박화숙(朴和叔)이 말하였다고 끝맺었습니다. 화숙은 박세채의 자(字)입니다. 명(銘)에 있어서는 다시 구설(舊說)을 전하여 기술할 뿐이고 새로 짓지 않은 채 질질 끌었습니다. 진실로 그 마음에 불평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그 말이 소략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신의 스승이 여러 번 왕복하여 고쳐주기를 바랐더니 송시열은 단지 두세 자를 점철(點綴)하고 말 뿐이었으므로, 신의 스승이 비로소 다시 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내버려 두었습니다.
숙종 42년 3월 3일, 숙종실록

윤증의 문인인 전 세마 최석문의 상소에 대한 논평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인 전(前) 세마(洗馬) 최석문(崔錫文)이 상소하여 운운 【위에 보인다.】 하였다. 최석문 등이 제 스승이 무함받는 것을 목격하고 망극(罔極)하여 임금에게 신리(伸理)를 호소한 것은 비록 고도(古道)가 아니기는 하나 근세의 관례를 따라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만을 말하지 않고 신유년의 의서(擬書)를 곧바로 발론한 것은 제 스승의 마음과 어그러진다. 왜냐하면 그때에 있어서 윤증은 스승·제자의 본분을 아직 끊지 않았으나 송시열(宋時烈)은 혈기(血氣)의 흠이 점점 심술(心術)의 병통이 되어 도(道)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으면서도 다만 범하지 않는다는 의리만 지켰고, 또 그가 쓴 묘문(墓文)에서 조종(操縱)한 것도 하나의 음양(陰陽)의 수단이므로 중간의 곡절이 상정(常情)이 미치는 바가 아니었다. 윤증이 이미 경험으로 겪어서 깨달은 것이 더욱이 몸소 간절하였기 때문에 의혹이 더욱 심하여졌고, 그래서 진실로 차마 그가 속여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의서(擬書)를 지어서 충고(忠告)하고 스스로 비간(比干) 이 간쟁(諫諍)하다가 죽은 일을 좇아 따랐다. 비록 그 처지로서는 경계하는 듯한 혐의가 있고 그 입설(立說)은 절박한 흠이 있기는 하나, 원래 그 뜻은 또한 아닌게 아니라 충애(忠愛)에서 나왔으니, 정녕 반복하여 다행히 한 번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을 도의(道義)의 교분에서 헤아려 생각하면서 그 시의(時義)를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무명 상자 가운데에 숨겨둔 채 일찍이 자제나 문생에게 널리 퍼뜨리지 않았으니, 윤증의 뜻을 또한 알 만하다.

최석문으로서는 변명하여야 할 무함만을 변명하고 이것에까지는 소급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우리를 편들고 저들을 배척한다고 생각하여 이 기회를 타서 이 글을 드러내서 임금이 송시열의 병폐를 환히 알게는 하였으나 그것이 제 스승이 평소에 숨겨둔 깊은 뜻에 어그러짐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침내는 임금의 마음이 따라서 변하게 되고 국시(國是)가 전도되어 장래의 화(禍)가 저승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일을 헤아리는 것이 사정(事情)에 어둡고 말을 내는 것이 망령됨이 심하구나. 아! 이 글을 소 가운데에 베껴서 아뢴 것이 본디 큰 잘못이거니와, 그 남겨 간직했던 것을 드러내어 끝내 숨기지 않은 것은 또한 윤가(尹家) 자제의 허물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숙종 42년 3월 3일, 숙종실록보궐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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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술이부작 사건으로 서인이 분열되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소론 쪽에서는 윤증 같은 일부를 빼면 대체적으로 애증의 대상이었는지 소론에 의해 편찬된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는 유림의 종주이자 문하에서 재상과 어진 선비를 많이 냈다는 극찬과 학문이 허술하고 패도에 치우쳤다는 혹평이 뒤섞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4. 허목 윤휴와 의견 대립[편집]
일단 예송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의 주장을 이견으로 접수는 했다.[24] 그러나 윤선도가 자신을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으로 규탄한 뒤, 윤휴가 이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허목은 아예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을 조성한뒤 허목 자신도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여러번 올리게 되면서 송시열의 태도와 행동은 경직되고 만다.

그래서 송시열의 후학들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25] 허목은 독물(毒物), 독극물, 연인(漣人), 또는 연한(漣漢), 지비공(紙鼻公) 또는 지비옹(紙鼻翁)이라 불렀다.[26]



[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26436[2] 다만 당대에 한글이 상층 사대부 사회에서 부녀자들의 소통 수단으로 널리 쓰이고 있었고 남편이 부인이나 딸에게 편지를 쓰거나 소설을 지어줄 때도 한글을 쓴 것을 고려하면, 한글로 편지를 쓴 것 자체가 특출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 송자대전 제131권[4] 현종개수실록 12권 5년 12월 30일 1번째 기사[5] 광해군때 난정과 사르후 전투 파병, 인조대의 이괄의 난과 호란을 거치면서 서북 지방 방위 상태가 너무 심각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현종대의 여포수 제도는 인력손실을 성인 남성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내놓은 궁여지책에 가깝다. 이후 경신대기근이 발생하여 현종때까지도 복구를 못했고, 경신대기근보다 더한 참사였던 을병대기근이 발생한 숙종때도 외형적으로 대충 맞춰놓기만 한채 복구를 못하다 영조 재위 중반에나 가야 겨우 복구된다.[6] 과부들의 재혼은 허용은 되어있다시피하나 재가녀자손금고법(재가한 여자의 자손을 등용하지 않는 법)에 의해서 거의 불가능했다.[7] 왕실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기관으로, 내수사는 기본적으로 조선왕실의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그래서 국고는 메말라가도 내수사는 메마르지 않았을 정도. 송시열은 대동법 관련 논쟁이 발생했을 때, 주장했던 것 중 하나가 내수사 폐지이다. 당연히 현실정치 논리상 폐지되지는 않았다.[8] 다만 송시열 본인이 반대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다른 김집의 문하생인 유계와 송준길은 대동법에 찬성하였다.[9] 공납을 쌀과 무명으로 걷는것이 대동법인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수송이다. 당시에는 세금 납부란 서울로 수송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냥 관아에 쌀냈다고 끝이 아니다. 그래서 쌀과 무명을 걷는 대동법은 백성을 더 힘들게 할수있는데, 예를들어 한 지역의 공납품이 꿩 5마리라 하고 토지가 100결이 있다고 하자. 공납제에 의하면 꿩 5마리를 수송할 사람 한명이면 되지만 대동법을 시행하면 200말(=20가마)을 수송할 사람 네다섯명은 필요해지고 백성들의 수송부담이 높아진다.[10] 일차적으로 녹봉이 늘어나면 수탈이나 부정부패에 대한 유혹에 덜 흔들릴 것이고, 또 걸렸다가는 좋은 보수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덜 감수하려 할 것이므로. 이는 훗날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한 주장과 똑같다.[11] 이는 훗날 박제가도 주장하게 된다.[12]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 윤3월 16일 병진 3번째기사[13] 논어에 여자와 소인을 양육하는 것은 어렵다.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라고 적혀있지만 양육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 가르치지 말아라가 아니다.[14] 회니시비 문서를 참고할 것.[15] 이 밖에도 자신의 고향인 옥천이 자신의 세력이 아닌 동인이 주도하는 지역이자 이 지역을 서인이 강성한 지역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지역 동인이 추앙하는 인물을 비난하며 인신공격까지 하기에 이르는데 심지어 그 근거는 거짓이었다. 즉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학자라는 지위의 사람이 자신의 세력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거짓말까지 하며 비난을 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삼계서원 문서 참고[16] 물론 경종의 원자책봉은 원칙상 송시열에게도 명분이 있었다. 오늘날에야 숙종이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한걸 알지만 이 당시 숙종의 나이는 27세였고 인현왕후는 21세였다. 시대기준으로는 경종이 숙종의 늦둥이 아들 격이긴 했어도 나이상 숙종과 인현왕후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가능성은 아주 많이 있었고 이 상황에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아버리면 인현왕후 소생의 적자와 장희빈 소생의 원자가 대립하여 왕위 계승 구도를 크게 꼬이게 만든다. 적어도 전례대로 몇년쯤 지났다가 책봉한다면 숙종에게도 할말은 있겠지만 27세밖에 안 되었는데도 태어난지 100일도 안 된 갓난아기를 원자로 책봉하는건 무리수다. 이와 비슷하지만 납득가는 케이스는 영조인데 영조는 사도세자를 태어난 그날로 원자에 봉하고 다음 해에 세자에 봉했지만 사도세자가 태어난 당시 영조는 무려 42세였으며 첫아들인 효장세자를 25세때 얻은데다 그마저도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에 죽어서 아들을 더 볼 가능성은 낮고 당시로서는 설마 영조가 그로부터 40년 넘게 살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장에 숙종 이전까지 왕이 18명이 지나갔지만 42세를 넘긴 왕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 총 9명 뿐이었다. 반면 27세를 못넘긴 왕은 고작해야 단종과 예종 뿐이었다. 이러니 송시열로서도 할말이 있는 것.송시열: 아니, 전하께서 오늘내일 하시는 분도 아니고 선왕들께서도 웬만하면 30을 넘기셨어요. 게다가 중전마마께서 왕자를 낳으시면 광해군 VS 영창대군 재탕된다고요,[17] 일찍부터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김집이나 십여세나 아래인 서인 산림들인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던 이경석은 인조 반정 이후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등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리고 적극 천거하여 관직에 등용하게 했다. 이로써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반정 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백헌은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18] 송시열은 호란 때 가족을 잃어 청나라를 증오하는 마음이 강했다.[19] 당시 송시열은 온양 근처에 살았는데 이경석이 자기를 깐 줄 알고 쓴 것이라고도 한다.[20] 참고로 현종개수실록은 숙종 시기, 서인 집권기(숙종 6년~숙종 15년)에 쓰여진 것으로 개수실록이니 수정실록이니 하는게 다 그렇듯 붕당간의 대립의 산물 중 하나로 상대 당파의 기록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현종개수실록은 서인이 썼다는 의미인데 그런데도 똑같이 수이강 사건을 두고 같은 의견을 냈으니 서인쪽에서도 안좋게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다.[21] 윤선거는 평생 이 일을 부끄러워하여 이후 다시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22] 윤휴와의 문제에서 송시열이 처음부터 아주 강경하게 나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윤휴가 그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를 윤선거가 중간에서 주재하려고 했으나, 윤휴의 주장이 주자의 견해에 대한 비판(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이니, 공자의 생각과 주자의 견해가 차이가 있다면 말할 필요가 없지만, 공자와 여러 유학의 선배들에 기록을 가지고 해석하는 측면에서 사람에 따라서 견해의 차이가 생긴다. 이것까지 좋은데, 자신의 해석으로 공자의 기록을 살펴보니 주자의 견해가 틀리다고 주장하는 윤휴의 주장을 성리학적 관점에서 수용이 되겠는가? 다만 주자와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이 수용이 안되는 점 자체가 조선 후기 사상계의 배타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긴 하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주자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맹종하고, 주자와 다른 의견을 낸다고 남에게 절교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다)을 하는 것이었기에 사실 윤선거의 어중간한 태도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다행히 생전에는 잘 숨겼으나, 하필이면 송시열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둘 사이에서의 어중간한 태도와 절교하겠다고 해놓고 실은 교류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송시열이 알게 되면서 문제가 터졌다. 그러나 윤선거 입장에서는 양쪽 다 친구였고, 잘 지내왔는데 송시열이 윤휴와의 절교를 요구해왔으니 상당히 난처했을것이다. 이를 '이중적인 태도'라고 봐야할지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봐야할지는 각자 생각해볼 문제다.[23] 망자를 추모하며 쓰는 묘비문의 경우, 다른 사람의 평을 인용할 수는 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더 좋은 평을 인용함으로써 추모와 함께 저자의 겸손을 드러내는, 말 그대로 술이부작의 정신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자의 묘비문에 다른 사람의 망자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글을 인용해 놓고, 술이부작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24] 계모가 전처 소생의 장자가 죽은 이후에 대우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처 소생의 차자 내외가 사망했을 때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례가 거의 처음이였다. 禮曹의 관원들이 몰라서 당시 禮學의 최고권위자라는 송시열에게 물었던 것이고, 송시열은 소현세자를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기에 '체이부정'을 이유로 1년복을 주장하였다. 서인 내에서도 3년복을 주장한 사람들이 여럿이였으니 이견이 많았다. 송시열도 단순히 학문적인 것으로만 이야기했다면 그 주장을 틀리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대통을 승계했으니, 남인들이 주장하는 3년복이 말도 안되는 괴이한 것은 아니였다.)[25] 이중 적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26] 지비공이나 지비옹이란 송시열과 송시열의 제자들 중 허목을 부를 때 그나마 비교적 온건한 표현이었는데, 이는 허목이 평소에 축농증이나 비염 증세가 있어 코에 종이나 휴지를 붙였던 것을 두고 비꼰 것이다.

한기범 "우암 송시열은 우리시대 멘토" 2014

한기범 "우암 송시열은 우리시대 멘토" < 디트NEWS24

한기범 "우암 송시열은 우리시대 멘토"
기자명임연희 기자
입력 2014.07.11 1


업적·자취 모은 일대기 '우암 송시열의 생거지와 적거지' 출간



동춘당 송준길 연구,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 등 동춘당과 우암 선생에 대한 연구서를 다수 발간한 한기범 교수(한남대)가  지난 2010년 문화재청이 보물 209호 '회덕 동춘당'의 명칭을 '대전 동춘당'으로 바꾸려한 적이 있다. 문화재 명칭에 대한 통일된 기준을 만든다며 회덕 동춘당은 대전 동춘당으로, 수덕사 대웅전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으로, 마곡사 대웅보전은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등으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문화재 명칭 앞에 현재 지명을 붙임으로써 문화재의 위치나 소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했지만 지역 학자들과 대덕구 주민들 사이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고려 태조 때부터 1000년 이상 사용해온 회덕(懷德)이라는 지명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지역 학자와 주민, 문화재 모임, 시민단체들은 주민 의견조사를 실시하는 등 여론을 모아 문화재청에 '대전회덕동춘당'으로 해달라고 재심을 청구해 결국 회덕 동춘당을 지켜냈다.

동춘당이 소재한 대덕구 주민들이 이처럼 회덕이란 지명과 동춘당에 애정을 갖게 된 것은 '대덕학' 강좌 때문인데 주민들에게 회덕의 역사, 동춘당과 우암 선생의 사상을 가르친 사람이 한남대 사학과 한기범 교수다.

한 교수는 “대덕의 지명적 연원은 회덕(懷德)인데 마음에 덕을 품는다는 뜻의 회덕은 군자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장"이라며 "군자는 덕을 품고 소인은 자기 자신(흙)만을 생각한다(君子懷德, 小人懷土)는 말처럼 회덕은 1000여년의 역사적 숨결이 살아있는 대전의 발원지이자 뿌리"라며 회덕의 역사와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교수는 "이런 이유로 회덕은 학문은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같은 대학자를 배출한 예학과 선비의 고장”이라고 했다.

생거지와 유배지 따라가며 삶과 업적, 자취 담은 우암 일대기

그동안 동춘당 송준길 연구,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 등 동춘당과 우암 선생에 대한 연구서를 다수 발간한 한 교수가 이번에는 '우암 송시열의 생거지와 적거지'를 펴냈다.

이 책은 우암의 생거지와 적거지(유배지)를 차례로 따라가며 그 곳에 담긴 우암의 삶과 업적, 자취를 꼼꼼히 모은 우암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한 교수가 낸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에 이은 새로운 버전의 '우암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암의 생거지로는 ▲옥천 구룡촌 ▲회덕 송촌 ▲영동 황간 ▲진잠 성전 ▲회덕 소제 ▲공주 원기 ▲여산 황산 ▲수원 만의 ▲서울 송동 ▲괴산 청천 ▲회덕 남간이 소개되고 있다.

또 적거지로는 ▲함경도 덕원 ▲경상도 장기 ▲경상도 거제 ▲제주 유배길(논산~강진) ▲전북 정읍(후명)이 꼽힌다.

책을 쓴 계기에 대해 한 교수는 "선비가 그리워지는 세상"이라며 "우암의 생거지와 적거지를 따라 그 행적과 자취를 돌아다보면 우암은 가정과 향당, 조정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실천한 참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암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는 긍정 부정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암의 진면목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어떤 인물을 바로 보려면 부분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물연구에서 평전(評傳)이 중시된다"고 설명했다.

큰 눈으로 보면 우암이 추구한 세상은 의리가 존중되고 예의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문명(文明)의 세상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주류 조선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이상 세계였으며,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 역시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가치와 도리가 중시되고 예의가 존중되는‘문명의 세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우암 직(直, 곧 정직)으로 무장해 올곧은 선비 길 걸은 ‘대로(大老)’



한남대 한기범 교수.한 교수는 "우암이 오늘의 우리에게 멘토가 될 수 있는 지적 자산은 결코 적지 않다"면서 "우암은 직(直, 곧 정직)의 정신으로 무장해 올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고, 학자로서 송자(宋子)에 이르렀고, 학덕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한 시대 산림(山林)의 종장이었고, 북벌(北伐). 예치(禮治)를 국가대의로 내걸고 시대를 이끌어 간 ‘대로(大老 : 나라의 큰 어른)’였다"고 소개했다.

한 교수는 현재 우리사회를 '위기'로 규정했는데 "내적으로는 심각한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로 사회기강과 질서가 크게 위협을 받고 있고, 외적으로는 일본의 재무장과 북한의 핵무장이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우리가 이러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고 ‘안전 대한민국’, ‘문명 대한민국’, ‘복지 대한민국’, ‘통일 대한민국’을 시대적 과제로 내세운다면, 큰 선비 우암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시사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한다"면서 "전통과 현대의 접맥이라는 차원에서 이 책에 실린 우암의 행적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라고 했다.

한기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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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생거지와 적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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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 율곡학프로젝트

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 율곡학프로젝트



2019, 스토리텔링, 율곡학사업
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2019-12-03 ADMIN

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송시열 관련 기사는 생전에 2,000회, 사후에 1,000회에 육박해서 그는 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송시열이 받는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송시열이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인물이라며 비난을 퍼붓고, 누군가는 그가 조선을 ‘친명사대주의’의 나라로 만들어 멸망의 길을 걷게 했다며 개탄한다. 심지어 한편에서는 그를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 우리 동방)의 주자(朱子)’라며 우리나라 인물로는 유일하게 이름에 ‘자(子)’를 붙여 ‘송자(宋子)’로 극존칭을 쓰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의 골수 신봉자’라며 ‘송자(宋者)’라고 낮추어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서로 다르게 평가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퇴계 이황은 16세기가 열리던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타계했고, 율곡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타계했다. 퇴계와 율곡이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였다면 17세기를 대표하는 선비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선조 말년에 태어나 광해군과 인조, 효종과 현종대를 거쳐 숙종대에 죽었으므로 무려 여섯 왕과 인연을 맺었다. 퇴계와 율곡의 초상이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라면, 송시열의 초상은 강직하다. 굳게 다문 입술, 깊게 팬 주름, 흰 수염, 당당한 풍채가 사람을 압도한다. 49세의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아깝게 유명을 달리한 율곡과 달리 송시열은 83세에 타계했으므로 드물게 장수한 선비다. 하지만 매화에 물을 주라는 부탁을 하고 명을 달리한 퇴계와 달리 송시열은 임금이 주는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문하에 들어가 배울 스승이 없었던 퇴계나 율곡과 달리 송시열은 스승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12세의 송시열에게 부친 송갑조(宋甲祚)는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을 가르쳤다. 이를 다 배운 송시열은 “이 글처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한다. 비록 어리지만 강직하고 단호한 언명이 인상적이다. 부친의 훈계는 일생 학문의 정초(定礎)가 되었다.

24세의 청년 송시열은 율곡의 수제자로 명성이 자자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었다. 80세가 넘는 노선생 김장생은 말년에 자신의 명성을 넘게 될 후계자를 만난 셈이다. 송시열이 그에게 배운 기간은 1년 남짓, 스승이 타계한 후에는 그의 아들 김집에게 배웠다. 김장생은 율곡에게 공부한 서인의 대표 주자이고, 송시열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공부했으니 당대 최고의 학맥을 쌓은 셈이었다. 송시열이 17세기를 대표하는 서인의 영수로 부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차지한 비중을 견주어 보면 송시열이 조정에 머문 실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문과를 통하지 않고 학식으로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傅)에 임명된 것이 그의 첫 출사였다. 그때가 1635년(인조 13)이었는데 29세의 송시열은 열두 살 연하의 대군을 약 8개월 정도 가르쳤다. 그러나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병자호란의 충격을 ‘머리에 신발을 쓰고 발에 모자를 쓰게 된 사건’, 즉 기존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 사건으로 생각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르친 봉림대군은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기에 그의 자책과 좌절은 더욱 심했다. 송시열은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인조가 붕어하고 효종이 즉위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였다.

효종은 사부 송시열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효종은 즉위하자 원로들을 초빙했고 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의 뜻을 밝혔다. 송시열은 그 유명한 〈기축봉사〉로 화답했다. 북벌이야말로 국가의 대의라고 천명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의 나라 청을 배격하며 인조가 당한 치욕을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효종과의 인연은 짧았다. 스승 김집과 함께 출사했던 송시열은 조선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압박하는 청나라와 국내 친청파의 준동을 목격하고는 8개월여 만에 다시 낙향했다. 효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불렀지만 출사를 사양하고 학문에 열중하면서, 서인학맥의 도통을 정리하는 등 서인의 이념적 결집을 위해 노력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극진했다. 왕이 사관을 멀리한 채 독대한 신하가 송시열이었다. 한번 낙향한 송시열은 한사코 임금의 부름을 거절했다. 이유는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구애는 계속되었다.

1658년(효종 9)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마침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담비로 만든 털옷을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신임했다. 은밀히 독대한 일도 그 시기였다. 효종은 일편단심 북벌이었다. 북벌만이 아버지의 치욕을 갚는 효행이었다. 북벌만이 인질 생활 9년 동안 형과 동생이 겪었던 모욕에 대한 복수였다. 효종은 즉위 원년에 와신상담할 것을 포고했고 약속을 지켰다. 효종은 군대를 확대했고, 군사 훈련을 다그쳤다. 북벌의 그날만 기다린 왕이 효종이었다. 효종이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낸 것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추진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실상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명과 조선의 군신 관계는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국시로 정해진 명분이었고, 임진왜란 때 명의 구원병 파견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므로 송시열에게 있어 명을 멸망시킨 청은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는 군부(君父)의 원수였다. 그러나 송시열의 존명배청 감정은 《춘추(春秋)》의 원리에 의해 관념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송시열은 “아픔을 참고 억울함을 머금지만 사세가 절박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자의 입장을 늘 강조했다. 즉 송시열의 북벌론은 실제적인 부국강병책으로 군사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유교정치의 보편적인 이념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효종의 북벌론은 양병(養兵)에 치중되어 있었고, 송시열의 북벌론은 양민(養民)에 치중되어 있었다. 송시열은 군사 양병과 군비 확장을 추구하는 효종에게 양병보다는 민생 안정을, 무력보다는 군덕을 닦을 것을 종용했다. 효종과 송시열은 이렇듯 ‘북벌’이라는 이념에서는 생각이 일치했지만 방법론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동상이몽일 뿐이었다. 게다가 효종이 얼마 안 가 갑자기 죽었고 결국 북벌론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현종이 즉위하고 1차 예송(기해예송)이 일어나 남인과의 예론이 격화하자 송시열은 1661년(현종 2)에 다시 낙향했다. 현종 대에도 그는 거의 정계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1668년(현종 9)과, 1673년 좌의정으로 임명되어 잠시 출사했을 따름이었다. 현종이 죽고 2차 예송(갑인예송)이 일어나자 그는 예를 그르쳤다는 공격을 받아 1675년(숙종 1)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어 약 5년을 보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 정권이 성립되자 송시열은 적극적으로 출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서 많은 논쟁에 관여했는데, 특히 스승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훈을 옹호한 일로 서인 소장파의 불만을 샀다. 또 자신의 수제자 윤증과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장기간 논쟁했는데, 두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결국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숙의 장씨(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일에 반대한 서인을 내치고 남인을 등용했다. 당시 서인 영수였던 송시열은 원자의 정호(定號)를 미루자고 상소했다가 유배당하고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송시열의 행적과 공과에 대한 논쟁은 사후에도 생전처럼 뜨거웠다. 1689년(숙종 20) 서인이 집권하자 그는 바로 복관(復官)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를 제사하는 서원이 각처에 건립되었고 1756년(영조 32)에 드디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남인이나 소론 일각에서의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으나 점차 그의 공적이 인정되는 형편이었다.
송시열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정조대가 절정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송시열이 공자, 주자의 의리 정신을 계승했다고 평가해 그를 기리는 다양한 추승사업을 펼쳤다. 그에 힘입어 노론 측에서는 1787년(정조 11)에 기존의 문집과 별집 등을 망라한 234권의 거질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했다. 《송자대전》은 분량뿐만이 아니라 명칭과 체제부터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유학의 성인(聖人), 현인(賢人)에 붙는 ‘자(子)’라는 영예로운 호칭에 《주자대전》을 본뜬 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방대한 《송자대전》을 관통하는 핵심은 주자의 학문 완성과 그 지향하는 바의 실현이었다. “주자의 일점일획도 고치면 안 된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송시열은 주자를 철저히 존숭했다. 그에게 주자의 언설은 시대에 맞추어 재해석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그대로 적용해야 할 교리에 가까웠다. 주자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봉은 주자에 대한 흠모로 이어졌다. 어느 날 송시열이 안질과 각질에 걸렸는데, 그는 주자도 같은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병을 번거로워하기보다는 영광으로 여겼다. 또한 생일날 받은 선물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준 것도 주자를 따른 것이었으며, 약혼한 손녀가 혼사 전에 죽은 것 역시 슬퍼하는 한편으로 주자에게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을 정도로 송시열의 주자와 주자학에 대한 존숭은 맹목적이었다.

송시열이 후대에 더욱 인정받은 근거는 ‘의리 정신을 계승’한 삶 자체였다. 의리가 전도(顚倒)된 현실에서 ‘세상의 도리[世道]’를 지켰다는 평가가 있었기에 그는 공자, 주자를 잇는 후인(後人)이 될 수 있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정통인 주(周) 왕실이 추락하고 힘을 앞세운 패자(覇者)들이 천하를 좌우했다. 그가 인(仁)을 강조했던 것은 정통에 의한 질서를 회복하자는 현실성 있는 외침이기도 했다. 공자는 비록 생전에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유학자들은 공자의 외침이 있는 한 세상의 바른 질서는 언제든 회복될 수 있다고 여겼다.
주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자는 금(金)에 의해 송(宋)이 남쪽으로 밀린 시대에 살았다. 정통인 송은 쇠퇴하고, 오랑캐인 금이 패권을 쥐었다. 하지만 주자는 희망을 가졌다. 가치가 전복된 세상에서는 공자처럼 도리를 보전해야 한다. 현실은 가변적이기에 세상은 언젠가는 불변의 도리에 힘입어 다시 밝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 주자는 어지러운 시대에 유교문화의 정수를 창달하거나 계승했다. 정통이 뒤바뀌거나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밝힌 문화와 이념이 있는 한 세상은 다시 밝아진다. 그것이 유학자들의 세도관이었다.
송시열이 후대에 높이 평가받은 것은 그 정신을 계승, 실천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조선이 청에게 무릎 꿇고 명이 망해버린 시대를 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교 국가인 조선은 유교문화의 명맥을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송시열이 주자와 책임감을 동일하게 느끼고, 주자의 말 하나하나를 실천하려 한 데는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무너진 세도를 지킨다는 원칙을 평생 견지했고 결국 조선은 그것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송시열의 후인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붕당은 18세기에 접어들어 집권 주류로 부상했고, 그의 행적은 국가를 지탱한 일로 칭송받았다. 영조대의 문묘 배향과 그를 주자의 후인으로 인정한 정조 대의 평가가 그 절정이었다.

송시열은 이념의 실천자였고, 단연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자 방식대로’를 외치며 사문시비(斯文是非)를 벌였던 그의 노력이 21세기를 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고 거북살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송시열의 죽음도 일면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칙과 고집을 내세우며 극단을 치닫는 성격 때문에 정쟁의 비극에 휘말린 것이니 그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민하고 과단성 있으며 기력이 뛰어났던 유림의 종사(宗師) 송시열. 현재에 이르러서도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그가 조선 후기의 정치 사상계를 휘어잡았던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2019 스토리텔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