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1

근대 일본의 치명적 발명품, 무사도 : 한겨레21

[제838호]근대 일본의 치명적 발명품, 무사도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근대 일본의 치명적 발명품, 무사도

군국주의 필요에 의해 ‘전근대 유산’이 ‘위대한 전통’으로 둔갑…
근대의 군주가 되려던 박정희가 ‘선비정신’ 강조한 맥락도 비슷

제838호
등록 : 2010-12-01 10:41 수정 : 2010-12-0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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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어느 나라를 봐도 국민국가에 유리한 쪽으로 ‘전통’의 이미지를 조작하지 않는 곳은 없다. 대한민국부터 그렇다. 박정희와 박종홍(1903∼76)이 반동적이고 복고적인 민족주의로 어용적 사상 흐름을 틀었던 1970년대 초반부터 ‘선비정신’과 같은 표현이 유행했는데, 이런 표현이야말로 ‘전통의 날조’치고 가장 심한 편에 속한다. ‘정신’ 같은 일본제 근대 용어들이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선비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선비정신이라기보다는 그저 성리학이었다.
집권 초기엔 폄하했던 선비정신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주군을 위한 복수’는 중요한 테마였다. 주군의 적을 죽이고 전원이 할복자살한 47명의 사무라이 이야기를 그린 일본 민화.한겨레 자료
선비들이 ‘이발기수’(理發氣隨·우주의 원리인 ‘이’가 먼저 발하고 물질의 본질인 ‘기’가 이에 따른다)와 같은 고급 관념론을 줄줄 외웠다고 해서 과연 그렇게까지 고매했던가? 고매한 이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세계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조선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이 일차적으로는 고매한 ‘선비’라기보다는 소유욕과 승부욕, 출세욕을 불태울 수밖에 없는 ‘지배자’였다. ‘상것’들의 재산을 빼앗는 데 정신이 없던 양반 지방관과 재지(在地) 사족들을 “흡혈귀와 같은 존재”라고 부른 유명한 영국 여류 탐험가 비숍(1831∼1904)의 의견은 오만한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적 속단이라고 치자. 하지만 조선 후기의 양심적 지식인들도 당대 선비들의 ‘정신 상태’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컨대 평생 벼슬을 멀리해온 성호 이익(1681∼1763)은 선비들의 불같은 출세욕을 거의 망국적 질환으로 봤다.
“본래부터 우리나라는 토지는 좁고 관원은 많다고 이르는데, 토지가 좁으면 재물이 넉넉하지 않고 관원이 많으면 토색질이 성행되어 백성은 더욱 곤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권귀(權貴)의 자제들은 천치 바보를 막론하고 벼슬 없는 자가 없고, 그 연인 족척들과 문객들도 벼슬에 오르지 않는 자가 없어, 한 번 사모를 썼다 하면 수령은 떼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오히려 지체됨을 꺼리어 만기도 되기 전에 미리 엽등할 것을 도모한다.” (<성호사설> 제14권, ‘파용관’)
조선 후기의 선비들의 타락은, 구한말의 계몽주의자부터 식민지 시대나 그 후의 진보·보수를 막론한 다수의 근대적 지식인들의 한탄과 비판의 표적이었다. 박정희 자신도 집권 초기에 <국가와 혁명과 나>(1963)와 같은 ‘강령’ 격의 책에서 ‘선비문화’를 위시한 ‘전통시대 역사’를 “퇴영, 조잡, 침체의 연쇄사”라고 싸잡아 폄하했다.
그러면 1970년대 초반부터 관 주도로 선비정신이 선양되고 율곡과 퇴계 등이 새로운 지폐 문양에까지 등장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서구식’ 민주주의와 결별하고 김일성의 종신집권을 빼닮은 영구적 권력을 누리려 했던 박정희에게 근대 이전의 ‘충효’ 전통이 그 의도를 합리화하는 기제로 급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반동화가 관 주도 사상 흐름의 복고화를 부르고, 복고적 민족주의 차원에서는 선비문화에 전통의 후광을 입히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박정희는 그렇게 해서 ‘선비나라’의 새로운 ‘군주’ 노릇을 하려 했다. 그 자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절대다수의 국민은 선비의 자손이라기보다는 선비에게 착취와 토색질, 무시를 당해온 ‘상것’들의 자손이었으며, 선비정신 등은 전통시대에는 물론 일제시대나 그 직후에도 잘 쓰이지 않던 새롭게 발명된 표현이었다.
‘부국강병’을 메이지 일본에서 배운 박정희는, 선비정신 같은 전통 날조의 기술도 거기에서 배웠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박정희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선비를 역사 속에서 불러내고 싶었다면, 메이지 말기 군국 일본의 지배자들은 무사(武士)의 유효성을 높이 사서 동시대 일본인들에게 무사도(武士道)가 일본의 ‘위대한 전통’임을 믿게끔 하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일본을 피상적으로만 아는 이는 분명히 “일본 전통사회는 사무라이들의 ‘칼’ 문화에 정말로 젖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고, “무사도가 왜 근대적 발명품이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향반 등 중간 계층을 제외한 양반 사대부들이 조선 사회의 다수를 차지할 수 없었듯이, 에도시대(1603∼1868) 일본에서도 사무라이, 즉 사족(士族)이 많이 잡아봐야 총인구의 1할에 불과했다. 그들의 ‘무도’(武道) 문화에 나머지 90%의 인구가 영향을 받았느냐 하면 그것도 결코 아니었다. 사족들과 달리 나머지 90%의 주민들은 칼을 차고 검술을 배울 권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전후 ‘무사도 폭발’
주군의 원수를 갚고 자살한 47명의 사무라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기묘한 이야기 - 사무라이 휴대폰>. 한겨레 자료
그렇다면 사족들의 교육은 과연 ‘무덕(武德) 수양’ 위주였던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외전(外戰)이 없었던 에도막부의 장기적 평화 시대에 지배층에게는 검술보다 유교경전과 문장 익히기가 훨씬 더 중요시됐다. 예컨대 나카쓰(中津)번의 하급 사족 아들로 태어난 유명한 계몽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만향당(晩香堂)이라는 번의 학교에서 <좌전>(左傳)과 같은 경전을 11차례나 읽어 다 외울 정도로 한학에 열을 올렸지만, 이렇다 할 만한 ‘무사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칼잡이 사무라이의 나라’라는 에도시대 일본의 통상적 이미지는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고 봐야 한다.
물론 관료적·학구적 분위기가 강한 에도시대라고 하더라도 유교와 다른 ‘무사의 덕목’에 유념하는 지식인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예를 들어 변방인 규슈섬 사가 지역의 고급 사족인 야마모토 쓰네토모(1659∼1719)가 먼저 돌아간 번주(藩主)와의 대화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가쿠레>(葉隱)라는 책을 남겼다. 그런데 “무사도라는 것은 죽는 일에서부터 발견된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책은, 에도시대에 널리 읽히지 않았으며 근대에 와서야 빛을 보게 된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순사(殉死) 찬양’ 이외에는 유교나 불교에서 따낸 자비, 성(誠), 간언(諫言), 예의에 대한 설파로 가득 차 있다. 불명예를 씻기 위한 죽음에 대한 강조의 정도는 조금 달라도,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사실 조선 성리학자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근세의 일본은 ‘무사도의 나라’라기보다는 점차 유교화돼가던 농업관료제 사회였다. 단, 막번(幕藩) 체제라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독특한 조합만이 중국이나 조선과 판이하게 달랐을 뿐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일본이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눌러 동북아의 군사적 패권국가로 돌연히 등장한 뒤였다. 박정희가 초기에 한국 전통문화에 무관심하고 적대적이었듯이, 1890년대 이전까지 근대 일본의 주류는 에도시대 사무라이 문화를 ‘전근대의 유산’이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점차 징병제를 확대하고 학교 교육까지 군사화하는 시점에서는 군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전통’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시점에서는 에도시대 사람들도, 메이지 초기의 사람들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무사도’가 갑자기 중요해졌다. 1890년대 이전까지 제목에 ‘무사도’가 들어간 책이 거의 나오지 않았는데, 1890년대에는 거의 해마다 한 권씩 나오고 1901∼05년에만 해도 47권이나 나와 ‘무사도 폭발’을 이루었다. 일본보다 훨씬 강해 보였던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한반도의 식민화를 일본 주류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준비’했던 셈이다.
이커 교도까지 무사도 찬양
‘무사도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제작·보급한 영화 <망루의 결사대>.한겨레 자료
당시 무사도를 입에 올리고 다니던 이들 중에는 당대 지식계의 거물들도 포함됐다. 예컨대 동경제국대학의 철학과 원로이며 ‘가족국가’로서 천황제 국가의 이념적 틀을 준비한 핵심적 관(官)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1855∼1944)는 육군사관학교에서 특강한 내용을 중심으로 무사도에 대한 소책자를 따로 냈다. 이노우에가 본 무사도는 아예 ‘일본 정신’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일본사를 관통하는 핵심적 ‘국민도덕’이었다. 극단적 보수주의자 이노우에는 “천황보다 하나님을 우위에 두는” 기독교를 ‘비일본적 종교’라고 생각하고 애써 배격했는데, 무사도 찬양에는 기독교인도 열심히 한몫했다. 대표적 사례는 최근까지만 해도 일본의 5천엔 지폐를 장식한 퀘이커 신자 니토베 이나조(1862∼1933)였다. 물론 그 얼굴을 5천엔 지폐에 등장시킨 것은 무사도와 관계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한 저명한 학자이자 저술가인 그는, 1920년대에 국제연맹 등에서 중역을 맡는 등 일본의 ‘국제주의’와 ‘자유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는 탁월한 영어 실력을 국제주의를 위해서만 발휘하지 않았다. 1900년 한반도와 남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이 점차 심해지는 민감한 시기에, 그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로 <일본의 영혼, 무사도>라는 책을 발표한다. 특히 영미권에서 히트를 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애독서가 된 이 책은 무사도를 유럽의 ‘기사도’와 유사한 것으로 묘사해 외국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한편, 청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를 ‘무사도 덕분’으로 돌리기도 했다. 전쟁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퀘이커 신자인 니토베였지만, 그는 무사도야말로 기독교가 일본에 이식될 수 있는 ‘좋은 토양’이라고 결론 내렸다. 상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병역거부를 최초로 보편화한 초기 기독교(퀘이커)와 <하가쿠레>류의 ‘전사(戰死) 찬미’가 양극단처럼 보이지만, 전쟁 열풍에 휩쓸린 지식인들의 관심은 거기까지 미치지 않았다. 국가를 위한 살인은 그들에게 예수의 자기희생처럼 고귀하게 보였다.
천황주의적 극우부터 기독교적 자유주의자까지, 전쟁 열기의 히스테리적 분위기에서 ‘무사도는 일본인의 고유 정신’이란 테제에 반대할 사람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 이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함석헌(1901∼89)의 스승이 된 전쟁 반대론자인 우치무라 간조(1861∼1930)마저 일찌감치 1894년의 영문 저서 <일본과 일본인>에서 ‘전형적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1828∼77)의 “충성, 용기, 결단력, 헌신”을 “일본 민족의 대표적 덕목”으로 봤다면, 그보다 더 온건한 지식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되살아난 무사도
‘칼의 도덕’에 대한 지식인들의 찬양을 글로 읽을 수 있는 식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1910∼20년대 일본에서 영화가 대중적으로 보편화됨에 따라 칼부림이 난무하는 ‘시대극’은 무사도를 민초 사이에 인기 있는 담론으로 만드는 새로운 매체가 됐다. 에도시대 사무라이들을 등장시키는 시대극 중에는, 1701년 주군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주군의 적을 죽였다가 정부의 명령으로 전원 할복자살한 47명의 충실한 사무라이 이야기인 <주신구라>(忠臣藏)가 단연 1위의 인기를 누렸다. 1908년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약 130편의 다른 영화로 나왔다. 이런 영화로 인해 대중 사이에서 관료로서의 사족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다스렸던, 꽤나 유교화된 에도시대의 일본은 적의 머리를 멋지게 베고 할복을 쿨하게 하는 ‘용감무쌍의 무사 나라’로 비치게 된 것이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등장한 무사도 담론은 전후 한때 혹독한 비판을 받아 그 자취를 감춘 듯했다. 1960년대에 무사도를 여전히 찬양했던 미시마 유키오(1925∼70)와 같은 심미주의적 극우파들은 비주류 중에서도 한참 비주류였다. 그런데 경제성장이 멈춘데다 포스트모던의 광풍으로 선과 악의 구분선이 흐려진 1990년대 이후의 일본에서는 무사의 ‘멋진’ 칼이나 주먹이 또다시 상당수의 노골적 숭배 대상이 되는 것 같다. <흉기의 벚나무>(2002) 같은 영화에서는 도심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네오나치가 거의 낭만적 ‘협객’처럼 보일 정도다. 인간의 해방과 궁극적으로 모든 폭력이 정지될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좌파의 꿈들이 좌절되고 모든 것이 상대화된 포스트모던의 반동적 시대에는, 관객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운 청년 배우가 화면에서 상대의 가슴에 ‘시원하게’ 칼을 꽂거나 몸을 ‘쾌활하게’ 풀어 상대를 ‘멋있게’ 때려눕히는 등 폭력을 낭만화·미화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왜 나쁜지 설명하기 힘들어졌다. 상대주의 시대에는 구태의연한 도덕론적 무사도는 인기를 끌지 못해도, ‘눈요깃감’으로서 영상 폭력은 난무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소비 대중의 거부감을 조금씩 무력화해 전쟁을 흉악한 범죄가 아닌 ‘아름다운 일’로 다시 한번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성호사설> 이익 지음, 최석기 옮김, 한길사, 285∼291쪽, 1999
<국가와 혁명과 나> 박정희, 상문사, 11쪽, 1963
Kiyooka Eiichi (transl.),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p.8, 1960
<武士道> 이노우에 데쓰지로, 東京: 兵事雜誌社, 1901
‘The Apocryphal Suicide of Saigo Takamori’ Mark Ravina, , 69/3, pp.691∼723, 2010
Inazo Nitobe, NY: G.Putnam, 1905(www.sacred-texts.com/shi/bsd/index.htm)
<일본 영화와 내셔널리즘> 김려실, 책세상, 94∼96쪽, 2005

전체 댓글 수 2

당시 일본의 신분제에서 무사계급은 최상위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에 신분상승하려는 평민들도 무사가 되려고 적지 않았고 전국시대에 그런게 유행하였지요 그러나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일본을 통일한 임진왜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검 몰수령을 내려 평민들의 신분상승을 봉쇄했고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신분제도를 엄격하게 확립하여 평민들의 신분상승을 가로 막았지요 그리고 일본의 유교는 중국 조선의 유교와 그 성격이 다르지요 일본의

    박노자 교수의 글을 잘 읽으면서 일본의 무사도가 약간 후대에 의해 부풀려질수도 있지만 그러나 에도시대 당시 무사들의 인구수를 근거없이 섣부르게 단정하는 내용은 약간 성급한 면이 있습니다 무사들이 일반 평민들 수보다 적었는지 많았는지를 에도시대 당시 인구문서같은 기록을 통해 규명해야 할것인데 박 교수는 이런 근거없이 너무 자의적으로 단정지어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주장할때에 최소한 자료근거에 임해주시지요 일반적 사실과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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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제628호
    2006년09월19일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
    불교적 신념이 강한 내가 한국 종단의 ‘신도’가 되길 거부하는 이유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동아시아 종단의 치부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의 내면적 신앙이 어떻게 돼도 어떤 조직적 종교의 신도로 칭하지 않으려 한다. 종교 조직을 멀리할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이라는 야만의 극치에 대한 종교들의 무력함에 따르는 환멸이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을 해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국가가 자행하는 전쟁 행위에 대한 종교 집단들의 협력은 구미 지역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었다.

    △ 샤쿠 소엔(왼쪽)은 메이지 시대 선불교의 최고 고승이자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근대 학문을 배운 개화 인사였다. 그는 ‘기독교 국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물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제동을 걸지 못한 구미 지역의 주류 교단들에 면죄부를 줄 일은 없지만, 구미 지역에서 전쟁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비주류 교단들마저 놀랍게도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의 협력자로 돌변하곤 했다.

    일본 퀘이커의 변절

    예컨대 구미에서 병역거부·반전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아온 퀘이커들을 생각해보자.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모든 일본인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국가와 천황에의 보은’을 앞세워 ‘전쟁 지지’와 ‘적극적인 협력’을 밝혔다. 결국 일본 퀘이커들은 세계 퀘이커 공동체와 일시적으로 관계를 끊어야 했다. 또한 일본인 퀘이커로서 가장 유명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 박사는 1898년에 영문으로 일본 무사도의 찬양론을 쓰는 등 군국 일본의 대외 홍보에 일익을 담당하게 됐다. 여호와의 증인 등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퀘이커와 같은 정통 평화 교단들마저도 병역 거부를 선언하지 못한 게 근대 동아시아의 현실이다. 성경책에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나오지 않았던가?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국민 총동원’을 상시적으로 실시하는 후발 근대화 사회에서, 내가 살인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이 아닌 시저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그 제자 함석헌(1901~89) 같은 위인들을 자랑할 수 있다. 서구에서 지금도 ‘전쟁 반대의 종교’로 인식되는 나의 신앙, 즉 불교는 과연 어떤가? 지난 백수십 년 동안 일본·한국의 불교 교단사를 보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합리화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전쟁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불교의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종교적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컨대 일본 민초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커 정권에 이용가치가 높았던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오타니파(大谷派)라는 한 교파의 지도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으로서 당연히 용감하게 싸워야 하지만 특히 우리 신도로서 국가에의 충성이 부처님의 절대 진리에 상응되는 세속적인 진리라는 점을 자각하여 국은(國恩)을 갚는 데에 마음을 다 바치라”는 교시까지 내렸다. 그 지도자를 비롯한 오타니파의 성직자들이 ‘국가의 은혜’를 갚느라고 전선에 빈번히 왕래하면서 ‘군인 위안 방문’을 했고 병사의 사기를 고취하는 전쟁 선전의 책자도 만들어 배포했다. “전장에서 쓰러지면 곧 정토 왕생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전사자를 위한 추도회까지 현지에서 열곤 했다. 그런데 그들을 비롯한 불교의 여러 교파들이 부처님의 교리를 총알받이들을 전장에 보내기 위한 정신적인 마약으로 변조하면서까지 열을 올렸음에도, 일본의 상류사회로부터 “기독교인에 비해 전쟁 협조를 덜 열심히 했다”고 빈축을 샀다.


    △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오른쪽)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외래 계통의 소수파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그 당시의 일본 기독교인들의 ‘전쟁열’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는 이야기다.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중생을 살려라?

    청일전쟁 때만 해도 일본의 종군 승려들은 전사자 추도회를 할 때 중국 병사들의 유해까지 함께 장례 치르는 등 ‘적병’에 대한 나름의 ‘예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 러시아’를 상대로 한 러일전쟁에서는 불교계 석학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1858~1919)의 말대로 “부처님의 원수”였던 러시아에 대한 적대심은 광풍 그 자체였다. 주요 종단들이 징병 대상자에 대한 격려와 군영의 위문 방문, 군승 파견을 한 것은 물론,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참전했던 군승들이 “적들을 무수히 죽여버렸다”고 불교 언론에서 자랑할 정도였다. 선불교의 주요 종단인 임제종(臨濟宗)의 최고 고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미국에서 포교에 큰 역할을 맡았던 샤쿠 소엔(??宗演·1860~1919) 스님의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종군 포교사로 파견 중이던 그는 불교에 긍정적이었던 톨스토이가 “교전 중의 양국 대표자로서 반전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자 “공생이 불가능한 존재들 사이의 융화에 도달하자면 전쟁과 살인이 필수적”이라고 대답했다. 승려에게 참전은커녕 칼 찬 사람에의 설법까지 엄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생각해본다면, 속인 톨스토이의 제안에 “노”를 외쳐대는 ‘고승’의 모습은 괴이하게만 보인다.


    △ 화폐 개혁 전 5천원권에는 니토베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이미 그때에 불교계는 대량살인을 ‘일살다생’(一殺多生)이라 불렀다.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중생을 살린다는 편하기 짝이 없는 논리다. “저 해로운 벌레를 죽임으로써 아시아 평화를 도달케 하는 우리 병사”들을 “보살행의 수행자”라 칭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르러서는 “천황 폐하는 여래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가 명하는 전쟁이란 크나큰 자비의 실천”이라는 주장으로 진일보했다.

    일본 불교에 거의 편입된 식민지 조선의 주류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이후에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친일 불교의 거두 권상로(1879~1965). 그는 전쟁 때의 명령이 바로 “성전에 임하는 병사의 계율”이라든가 “완벽한 지혜를 얻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전선에서 살인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망발을 계속했다.

    동국대 초대 총장 권상로의 발언

    오늘날의 한국 주류 불교 종단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불교의 군사주의를 그대로 담은 식민지 말기의 ‘호국을 위한 살생 허용’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종단의 신도증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불교적 신념이 강해도 말이다. 아니, 불교적 신념이 강하기에 마음에 걸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최고 효과의 묘약을 잘못 이용하면 최악의 독약이 되듯이, 가장 고매한 종교의 교리 체계에서 비폭력·반전에 관한 부분을 빼버리면 결국 대중을 국가의 총알받이로 만드는 최강의 마취제로 변하고 만다.

    △ 니토베 이나조는 전쟁에 관한 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천황폐하의 선량한 신민’으로서의 입장을 택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불교·기독교는 평화의 성현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각각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 ‘박노자의 동아시아 남녀’는 이번호부터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으로 문패를 바꿉니다. 글의 소재를 동아시아 근현대로 확장해 독자 여러분의 역사적 안목을 더욱 높여 드리려고 합니다. 지속적인 성원 부탁드립니다.

    참고 문헌:
    1. <논집 일본불교사 8: 메이지 시대>, 이케다 에이(池田英俊) 외 엮음, 도쿄: 유잔가구(雄山閣)출판, 1987, 225~269쪽.
    2. , Notto R. Thel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169~174쪽.
    3. , Brian Victoria, Weatherhill, 1997.
    4. <친일불교론> 상·하, 임혜봉, 민족사, 1993.

    한국인의 탄생 : 네이버 매거진캐스트

    한국인의 탄생 : 네이버 매거진캐스트





    한국인의 탄생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저

    미지북스

    2013.10.10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미지북스, 2013)는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을 망라한 한국의 대표적 소설들을

    자료로 삼아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

    다. 이 글은 <한국인의 탄생>에 대한 국문학자의 서평이지만, “국문학자의 관점에서

    정치학자의 국문학 연구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 융합 시대에 다른 분야에 대

    한 연구를 시도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며, 최 교수의 책은 국문학을 재료로 했을

    뿐 실제로 목표로 하는 것은 “정치사상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왜 한국의 소설을

    이용해 정치사상사를 집필하려는 “비정통적인” 방법을 쓴 것일까? 그 사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는 서구의 경우와 같이 사상사로 읽고 분석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저서들, 텍스트가 거의 없다. 말하자면 이론적, 철학적으로 자신이 살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그런 체계적인 저술이 거의 없다.

    (...) 이 책은 한국 근대 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우리의 근대 소설

    문학에서 창조되어 나타난 일련의 인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 이런 식의 비정통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는 까닭은 우리의 근현대 사상사가

    정통적인 방법론으로는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런 방법

    론을 선택한 것은 여러 차례의 좌절을 겪은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 방법론의

    아름다움으로 학문 연구의 결과를 예단하는 것은 실증주의 사회과학, 특히 현재

    미국 학계의 지배적인 흐름이 낳은 심각한 병폐다. (19~29면)



    이 책은 오로지 “한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identity) 주제에 집중하고 있으

    며, 소설이라는 것은 그러한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짐작된다. 하지

    만 어떤 연구자가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좌절”을 겪은 끝에 어떤 책을 내놓았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그것이 “지난 20여 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학부인

    모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느껴온 것(10면)”의 결과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의 탄생>을 “해방 70년이 되어가는 한국학문의 자기반성”으

    로 읽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서평자는 이러한 저자의 연구태도가 깊은 학자적 양

    심과 창의성, 열정의 결과라고 직관한다.

    최 교수의 이 책은 국문학자들에게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국문학계에는 몇 가지 불합

    리한 관행들이 있는데,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연구가 지나치게 분리돼 있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최 교수는 문학이 아닌 사상사를 바라보고 있는만큼, 이러한 구별을 인



    정하지 않고 허균의 <홍길동전>부터 홍명희의 <임꺽정>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맥

    락 속에서 작품을 분석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상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던 만큼, 소설 속의 “인물”을 분석하는 데에 치중한다. 그래서 홍길동, 성춘향, 신소설의 다양한 인물군, 이광수 <무정>의 이형식, 신채호 <꿈하늘>의 한놈, 김동

    인 소설의 여러 주인공들, 이광수 <유정>의 최석, 홍명희 <임꺽정>의 임꺽정을 선

    정해 분석하고 있다.



    서평자는 일단 한국의 소설을 이용하여 정치사상사를 이끌어내려 한 최 교수의 시도

    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인문학의 위기, 나아가 “국문학의 위기”가 심심찮게 언급되

    고 있는 시점에서, 국문학에 대한 외부의 관심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에는 분명 위험성도 따른다. 그럼에도 저자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뜨거운 관심 때문에 “어렵게 이 책을 내게 되었다(11면)”고 고백하였다. 동시에 이러

    한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데서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셨던 듯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

    된 결과가 다른 방법론으로 산출된 결과물보다 더 훌륭하고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할

    근거가 부족하다(29면)”고 인정한다. 서평자는 최 교수의 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바, 즉 “분석결과를 진리에 가깝게” 하는 데 필요한 바를 밝히는 방식으로 논

    의하려고 한다.

    2

    최 교수가 연구 자료로 소설을 선택한 것은 속된 말로 “소설이 예뻐서”가 결코 아니

    다. 짐작컨대 저자는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

    을 철학적 이론적으로 논술해간 사상사적 저술을 먼저 검색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

    교수도 지적했듯이 그런 저술들 가운데 학술적으로 권위있는 작품이나 고전의 반열

    에 든 것은 거의 없다. 예컨대 우리는 미국인 하면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독

    일인 하면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프랑스인 하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이탈리아인 하면 몸젠의 <로마사>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한국인” 하면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 저술이 없는 것이다. 서양 각국의 경우에는 위에 언급한 고전들을 제외

    하고도 세부적인 연구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주제로 한 탁월한 저술이 없는 까닭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설령 문제의식이 있었을지라도 중화(中華) 사상과 한문 글쓰

    기의 압력 때문에 “한국인(조선인, 혹은 고려인)의 정체성”을 주제로 글을 쓰기가 어

    려웠을 것이다. 민족 주체성을 다룬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나 일연의 <삼국유사>

    등은 고려 후기에 나타났으나, 학문적 논술은 아니었다. 한국적(조선적)인 것에 대한

    분과 학문(역사, 지리)적 관심조차 조선 후기에야 겨우 빛을 볼 수 있었다(안정복의

    <동사강목>;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인간 집단”으로서 한국인 자체에 대한 관심

    은 근대에 이르기 전에는 나타나기 힘들었다.

    또한 근대 이후에는 최 교수의 말씀대로 우리 민족이 그러한 체계적인 저술을 할 시

    간적 여유가 없었다. 최 교수는 책 속에서 실용적 지식만을 숭상하고 기초적인 지적

    작업을 경시하는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매우 열렬한 어조로 비판하는데, 한국인들

    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저술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

    가 그러한 “반지성주의”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한국인의 탄생>은 그러한 반지성

    주의의 주류적 흐름을 뚫고 나온 첫 성과인 셈이다.

    그러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우리에게 이러한 사상사적 저술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에게 그런 문제의식이 없어서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특별히 게을러서도 아닐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앞서 말한 사정 때문

    에 자기정체성에 대한 저술을 하기가 어려웠고, 근대 이후에는 한국인의 삶이 급격히

    근대화(이는 일본화 또는 서구화를 뜻함)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났다. 또한, 당

    연한 이야기지만, 저술이란 언어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좋은 저술이 나오려면 한국어

    가 학술어로서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近代化)는 특히 초기에

    일본의 식민통치와 일본어 이식이라는 기형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서 학자들조차 한국

    어로 글쓰는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한국어가 “학문의 언어”로 인정된 것조차

    얼마 되지 않으며, 자연과학을 포함한 많은 학문적 관행에서는 아직까지도 한국어가

    학술어로서 불신받는 것이 현실이다.

    서구에서 국민 정체성에 대한 이론이나 저술이 활발한 것은 그들이 독자적 방식으로

    일찍부터 학문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학문은 그저 책읽기나 글쓰기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학문은 물적 인프라(출판산업, 도서관, 대학, 실험실, 연구지

    원기관)들을 필요로 하며, 학문의 성과는 대체로 그 나라의 국력과 정비례한다. 특히

    “국민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국가의 경영방침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제국의 통치

    경험이 있는 국가에서 발달하게 마련이다. 위에서 언급한 저술들을 보더라도 <갈리

    아 전쟁기>는 로마 제국 최고 권력자의 프랑스인론이며, <게르마니아> 역시 로마제

    1)

    국 최고 지식인의 독일인론이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나폴레옹 제국의 경험을 생

    생히 기억하고 있던 프랑스 지식인의 미국론이며, 몸젠의 <로마사>는 19세기에 세

    계를 향해 제국을 선포한 독일인의 이탈리아인론인 것이다.

    로마인은 제국 통치 경험 탓에 프랑스인, 독일인에 대해 대략 2천 년 이전부터 관심

    을 가져 왔으며, 이후 힘의 균형이 변하면서 정반대 방향의 연구도 이루어졌다. 즉 고

    대에는 이탈리아인(로마인)들이 프랑스나 독일에 관심을 가졌다면, 근대에는 프랑스

    인(토크빌)이나 독일인(몸젠)이 외국(미국, 이탈리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몸젠의

    경우 신생 제국 독일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로마사를 연구한 측

    면도 있을 것이다. 상호 연결되어 있는 유럽 각국의 지정학적 특질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 각국이 14세기 르네상스 이후 엄청난 노력을 들여 자국어 글쓰기를 발

    달시켰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 내내 중국문화와 한문 글쓰기의 압력에 시달리며, 성리학 등 중

    국 학술의 일부만을 편향적으로 수용하던 한반도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20세기 이

    후 한국이 일본의 영향 하에서 근대화를 겪고 서구화된 지금에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너무나 많은 요소가 개입하게 되었고, 이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

    는 동서의 여러 문헌(언어를 포함한다)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굳건한 학문적 인프라

    로 뒷받침된, 한국어 혹은 외국어 글쓰기를 할 수 있는 한국인 학자들이 나와야 한

    다. 최 교수께서는 이러한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의 부진을 비관하시는 듯한

    데,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보다 조금 덜 중요한 문제로서, 서평자가 현재 더욱 궁금한 것은 “소설을 선정하는

    편법”을 최 교수가 감행한(?) 것이 어느 정도 적실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다. 얼핏

    보아도 최 교수가 <한국인의 탄생>에서 자료로 삼은 소설의 선정기준은 그다지 분

    명치 않다. 그러나 저자는 연구의 필요성을 시급하게 느꼈고, 학문적 정합성보다 일

    단 발언의 공론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소설이다. 저자가 소설을 사상사적 연구 대상으로 주목하게 된 과정을 서평자 나름대로 추론해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1)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사상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2) 한국인들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사상사적으로 깊이 있는 저술을 하지 못했다.

    (3) 한국인의 실제 모습과 의식을 한국인의 손으로 자세하게 그려낸 자료는 소설

    뿐이다.

    (4)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소설들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추출해 연구한다면 한국

    인의 정체성에 대한 사상사적 접근이 가능하다.

    필자는 위의 추론에 대체로 공감하지만,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위와

    같은 방법론으로 소설을 활용할 경우 검열이 문제의식을 왜곡한 작품은 제외하거나

    제한적으로 다뤄야 한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대부분 작품은 저자와 검열자의 공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약이 많았다. 저자는 그 문제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검열이란 단순히 완성된 텍스트를 첨가, 삭제, 편집하는 것만을 뜻하

    지 않는다. 검열 제도가 작동하는 전제에서 창작의 자유가 위축된 사실 자체가 문제

    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자가 선정한 여러 작품들은 텍스트 해석만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곧 언급할 이광수의 <유정>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경

    우이다.

    국문학계에서는 대체로 한국소설의 원형을 세속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고려

    시대의 벼슬인 “패관(稗官)”의 기록에서 찾는다. 세속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온갖

    번잡하고 시시하며 때로는 저속하고 음란하기까지 한 이야기들이 이른바 “소설”의

    감이 되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작고 사소한(小) 이야깃거리(說)”란 뜻

    아닌가. 나는 최 교수의 정치학적 소설 연구가 “시정(市情)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라 경영의 기본”이라고 믿었던 고려시대 지도층들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믿는

    다.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패관의 이야기가 사소하고 저속한 것은 상관이 없다. 단 거기에는 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진실성이 포함돼야 한다. 진실되지 않으면

    아무리 고상한 것도 소용없다는 것, 그것이 “소설(小說)”의 정신이라고 서평자는 믿

    는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소설이 허구(fiction)라는 것 때문에 “소설=거짓말”이라고 이해

    하고, 소설가를 무슨 거짓말쟁이, 말재주꾼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소설의

    본모습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소설이 실제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

    러나 “좋은” 소설은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이 소설은 참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구나”라는 평가를 받을 때에 그 소설은 성공한 것이다. 단순히

    이것은 흔히 말하는 현실주의(사실주의, 리얼리즘) 소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논픽션이나 자서전, 회고록 같은 것을 쓰지 않는 이상, 아니 어쩌면 그 경우에

    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과학에서도 정치가의 회고록을

    100% 믿지는 않을 것이다. 회고록 저자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의도적

    2)

    으로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며, 저자의 의식이나 세계관 자체가 편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문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은 “진정한 현실은 영원히 개별적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있다”는 상대주의의 금언(金言)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근대

    소설의 발생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의 근대 소설가들이 “허구(거짓)” 장르로서 소설

    을 개발한 데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강력한 개인적 의지

    가 작용하였다. 공산주의자 엥겔스가 반동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경향의 작가인 발자

    크의 소설을 격찬하며 “어떤 역사서보다 프랑스 19세기 초반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었던 것도 소설의 이러한 마력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

    러한 진실성이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부족한 소설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추려

    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역

    사에 대한 전망과 전체 사정을 고려하는 안목을 필요로 하는 매우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3

    <한국인의 탄생>이 이 시대에 갖는 여러 가지 미덕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과는 신소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를 촉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

    다. 최 교수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와 <은세계>(1908) 등을 분석하면서, 조선시대 말기에 대한 우리의 역사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 또한 이 시대는 조선

    왕조의 운영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하여 마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요약되

    는 “홉스적 자연상태”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특히 첫 번째 지적에 완전

    히 공감한다. 한국인의 국사지식이 미흡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하기

    까지 하지만, 특히 조선 말기에 대한 역사 지식의 부족은 거의 참담할 지경이다. 그리

    고 이것은 개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다. 서평자는 한국 근대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

    한데도 크게 먹칠이 된 두 구간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1894~1904년이고, 다른 하

    나는 1938~1945년이다. 첫째 기간은 청일전쟁으로부터 촉발된 일본 주도의 국

    가 시스템 개조기간인 “갑오개혁”부터 러일전쟁까지의 기간이며, 둘째 기간은 중일

    전쟁부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기까지의 기간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첫

    째 기간이 <한국인의 탄생> 초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신소설이 잉태, 성숙되고 있던 시기였다.

    최 교수의 설명대로 신소설은 이상하고 기괴한 느낌을 주기까지 하는 소설이다. 문학

    적으로 미흡할 뿐만 아니라, 살인 납치 강간 등 온갖 음모와 협잡이 난무하는 지옥과

    같은 세계다. 최초의 신소설이라 할 <혈의 누>가 나온 것은 1906년이므로 앞에서

    내가 말한 이른바 “먹칠구간”은 벗어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1906년에 갑

    자기 <혈의 누>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일전쟁(1894년)으로 인해 부

    모를 이별하고 생고아가 된 평범한 조선의 소녀를 “납치하여 미국 유학을 보내고 마

    는” 가혹한 내용의 이 소설은 짐작컨대 이인직의 머릿속에서 “첫 번째 먹칠구간” 내

    내 잉태되고 자라났을 것이다. 1906년은 이인직이 그것을 손으로 옮겨 종이 위에 옮

    겨 적은 해일 뿐이다.

    이인직은 흔히 말하는 “골수 친일파”로서, 1910년에 있었던 조선병합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어떻게 보면 “한일병합의 실행자”였다. 이런 사람이 최초의 신소설 작가라는

    것은 솔직히 말해 누구라도 직시하기 언짢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인직은 이토록 대한

    민국의 전사(前史) 속에서는 기억하기조차 고통스러운 배신자였음에도 “최초의 신소

    설 작가”로 남아 21세기의 우리들한테까지 “나를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에

    게는 “나는 기억될 만한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러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근대사의 첫 번째 먹칠구간의 비밀이다.

    이인직의 <혈의 누>는 1894년 평양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평양 사는 일곱 살 여자

    애 옥련이가 조선 땅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에 휘말려 부모와 생이별한다. “착한 일본

    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가고, 거기서 4년간 심상소학교를 다니며 신교육을 받는

    다. 그후 다시 6~7세 연상의 조선 청년 구완서를 우연히 만나 함께 미국유학을 떠난

    다. 옥련은 미국 워싱턴에서 고등소학교를 우등졸업하고 그 소식이 현지신문에 실려

    생이별했던 부모와 연락이 닿는다. 그것이 1902년이고, 옥련의 나이는 15세였다. 최 교수는 <혈의 누>를 한마디로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공부의 노예로 만들어

    일본으로 미국으로 보낸(124면)” 이야기로 규정하셨는데, 참으로 정곡을 찌른 평가

    이다. 이 소설은 결코 정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현실의 이야기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근대소설의 이념은 “삶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허구를 도구로 사

    용”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실제 있었던 역사적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묘사는 작품

    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인직이 구완서가 아닌 김옥련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능력이 떨어지거나, 작가로서 역량이 부족한 결과라고 볼

    3)

    수밖에 없다.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가 1894년에 미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진실성

    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 교수는 이러한 사실 지적에 머무르지 않

    고,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소설들이 집중적으로 창작되어야 했는지 하는 물적 조건을

    묻는다. 최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독특한 종류의 소설이라는 판단과 분류를 떠나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이

    러한 독특한 작품들이 어쩌다, 왜 이 시대에, 이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

    는 것이다. (...) 사실 구한말 역사에서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던 시점부터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에 이르기까지의 시기 동안 어떤 일이 벌어

    졌는지,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이 시대

    는 기본적인 역사가 전혀 씌어지지 않은 암흑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72면)

    참으로 적실한 문제제기이자, 국문학계의 연구관행에 대한 사회과학자의 정당한 비

    판이다. 나 또한 최 교수의 이러한 문제제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 교수는 이 시기

    에 "신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런 특이한 소설들이 나오게 된 이유를 우리

    역사의 첫번째 먹칠구간(1894­1904) 초기에 공동체의 붕괴와 홉스적 자연상태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최 교수가 파악한 신소설의 특징을 인용한다.

    공동체가 개인으로 분해되어 모든 사람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다투며

    공포에 떠는,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범죄도 마다하지 않고 여유만 있으면 자신

    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그런 공간, 모든 사람들이 아귀가 되어 버린 그런 세상

    을 (신소설은­인용자) 그리고 있다. (89면)

    이 시기를 다루는 3장 2절 <자연상태의 삶과 죽음>은 이 책에서 가장 읽기 고통스

    러운 부분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좋든 싫든 한반도의 오백 년 역사

    를 이끌었던 조선왕조의 처참한 몰락과정과 그 속에서 겪었던 백성들의 비정상적 행

    태들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사실 이것이 더 큰 문제인데) 우리 학계가

    이러한 상태의 원인을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의 자기고백 때문이다. 서평을 쓰

    기로 마음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크게 저자께 놀란 것 중 하나는 학자적 양

    심이라는 말로 단순히 말하고 말 수 없는 어떤 솔직함과 자기진단을 발견했기 때문이

    다.

    우리가 그토록 나락에 빠졌던 이유에 대해서 밝히는 것은 앞으로 과제이지만, 그 결

    과에 대한 최교수의 진단은 정곡을 찔렀다. 그는 조선말기 홉스적 자연상태에 빠진

    한반도의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구원의 길을 일본과 병합하는 데서 찾았고, 그러한

    대안에 대한 반발이 근대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다고 분석한다(162면). 이제, 서평자

    가 앞서 언급한 한국 근대사의 첫번째 먹칠구간이 형성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한국을 일본에 진상(進上)한” 이른바 친일파 1세대가 형성된 기간인 것이

    다. 친일파의 기원에 대한 최 교수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우리가 인정하기 고통스러

    울지라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이제 그것을 딛고 넘어서야 할 때가 왔음을 선언하

    고 있다.

    아마 그때 조선 땅이 살만한 곳이었다면 이용구도 송병준도 (이인직도 물론 포함된

    다­인용자)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애국자가 나왔

    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

    그토록 많던 친일파를 용서까지는 못해 주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168면)

    다시, 이인직의 <혈의 누>로 돌아가보자. 이인직은 대체 이 작품을 왜 썼을까? 이

    작품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의 물리적 역량이 조선인들에게 충분히 인식된

    1906년에 나온 작품이다. 내용 자체에는 거의 현실성이 없지만, “일곱 살 난 여자애

    가 일본과 미국으로 탈출하는 것만이 희망”이라는 비현실적인 내용의 소설이 나왔다

    는 사실 자체가 시대의 진실이 되어 버리는 기막힌 작품이었다. 즉 "소설 내용:개별

    적 현실사건"의 대응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엥겔스가 발자크 소설을 분

    석할 때 말한 바 리얼리즘의 과제이다), "작품의 존재:작품을 낳은 시대"의 대응이

    문제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문학연구의 과제를 넘어선 것이며, 문학을 사회과학적

    으로 분석하는 <한국인의 탄생>이 성립하는 지점이다.

    4

    지금까지 나는 책의 전반적 특성과 장점, 전체적 한계, 그리고 한국학계는 물론이거

    니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 책이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주로 언급하였다. 이제는

    세부적인 문제점(그러나 상당히 중요한)을 지적하고자 한다. 저자는 책 7장에서 "새

    로운 전사의 창조"라는 제목으로 이광수의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 <유정>을 분석한

    다. 이 부분은 국문학계의 원로 김윤식 교수와 큰 견해 차이를 빚고 있어 논쟁의 여지

    가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다. 필자는 국문학자의 관점이 아닌, 가능하면 최 교수 본인

    의 방법론에 입각해서 작품의 선정과 분석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짚으려 한다.

    저자는 이미 책 서두 부분에서 "이 책에서 우리 근대문학사의 명작들을 읽는 방식은

    국문학에서 시도하는 방식과 상당히 다를 것(26면)"이라고 밝혔다. 당연한 이야기

    다. 국문학에서는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 자체의 특성이나, 언어표현과 사회현실의 관

    계를 연구한다. 반면 신소설에 대한 분석을 우리가 살펴봤듯이 저자는 사회현상, 사

    상사적 현상으로서 문학작품을 본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의 사회과학적 의미를 찾으

    려고 한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국문학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최 교

    수의 독법이 국문학연구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평자가 판단하기에는, 유감스럽게도 최 교수께서 이러한 "사회과학적 분석

    방법"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그러하며, 이

    는 결론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예컨대 7장에서 저자는 이광수의 <유정>을 국문학

    자들이 반성해야 할 정도로 세밀하게 독해하고, 그 결과를 해석으로 내놓고 있다. 그

    러나 서평자가 보기에 이러한 세밀한 독해는 (분명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저자 본인

    이 표방한 방법론과 배치된다. 최 교수는 분명히 문학을 사상사, 사회사적으로 접근

    한다고 밝혔음에도, 유독 <유정>을 다룰 때만은 언어 텍스트 자체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평자는 주관화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7장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이 장은 1933년 10­12월에 걸쳐 춘원 이

    광수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유정>에 대한 분석이다. 작품 내용은 최석이라는 독

    립운동가이자 교육자가 유부남임에도 동료의 딸이자 제자인 남정임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고, 주변의 시기와 비난을 견디지 못해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 가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 작품을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

    하는데, 그것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해설에서 잘 드러난다.

    최석은 이광수가 자신의 시대, 일제 강점기에 만든 '강한 인간'의 최신 모델이었

    다. (...) 그의 강함의 핵심 요인은 정임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지키겠다는 이성이

    모두 최석 안에서 뜨거운 대결과 갈등을 통해 강화되었다는 데 있다. 최석의 죽음

    은 목숨을 대가로 사랑과 이성의 진정성과 위대함을 증명하는 순교였다. (419면)

    춘원이 살아있다면 매우 기뻐할 만한, 과연 작품의 가치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고 생

    각된다. 서평자는 저자의 이러한 평가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고 싶지만, 굳이 말하라

    고 한다면 비판적이다. 단, 서평자는 이것이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 개인적 선호의 문

    제가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 근대사의 두 번째 먹칠구간인

    1937­45년의 기원과 관련된 것으로, 일부러 무게 잡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지극히 엄중한"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근대소설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그것이 허구를 통해 성취하려는 진

    실"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기준은 분과학문의 영역을 넘어선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혈의 누>를 다시 생각해 보자. 전통적으로 국문학계에서는 이 작품을 비

    판적으로 다뤄 왔다. 작가도 극렬 친일파고, 우리가 앞에서 분석했듯이 역사적 사실

    과도 맞지 않고, 사건들은 우연이 반복되고, 일본인은 좋게 묘사된다. 그럼 이 작품이

    아무 가치가 없는가? 아니다. 전통적인 문학연구의 방식, 그러니까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와 구조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저열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

    리가 이 작품의 “존재 자체”를 그 사회가 낳은 일종의 현상으로 본다면, <혈의 누>

    는 그 시대의 불구성과 아픔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제목부터

    생각해 보자! 피눈물이면 “피눈물”이지 왜 “혈의 누(血の涙)”란 말인가? 이는 이인직

    이 최소한 구어가 아닌 문자언어에서는 한국어보다 일본어에 더 익숙했다는 것을 보

    여주는 증거다. <혈의 누>는 언어예술이 아닌 사회 병리현상의 일부로 다루어야 하

    는 것이다.

    최 교수께서 연구의 설득력을 높이려면, 이광수의 <유정>을 분석하는 데서도 이와

    같은 사회과학적 잣대를 적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 교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작품의 내용을 세밀하게 독해하여 결론을 유도하는 데 그쳤다. 저자의 <유정>에 대

    한 호감은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 최석은 이성 제자를 육체적으로 사랑하려는 동물

    적 본능을 초인적 이성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인한 인간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살과 도피의 유혹을 벗어났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최석은 이길 수 없는 싸움

    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418면)"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강한 인간(전사)” 창조의

    모델은 심훈의 <상록수>로 계승됐고, 이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사랑은 “좋아하는

    이성과 결합하는 행복한 감정”이 아니라 “강한 인간을 단련하는 진지한 일”이 되었다

    고 저자는 결론짓는다(427면).

    서평자는 저자의 이런 결론을 수긍하기 어렵다. 먼저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서평자

    가 보기에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내세운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따른 것이 아니다. 저자가 그렇게 했듯이 <유정>의 내적 언어에만 주목하면, 이 작품은 제자에게 마음

    이 흔들린 지식인의, 그다지 공감가지 않는 내적 독백으로 읽히는 것이 당연하다. 최

    교수는 국문학계의 원로 김윤식 교수가 <유정>을 "방랑의 광증의 분출"이라고 평한

    것에 대해 강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지만(374면), 서평자가 보기에 김 교수의 평가는

    작품을 보는 또다른 시선으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유부남인 민족지도자가 불륜의 유혹을 극복하면 강인한 인간

    이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정상적인가? 저자도 이것이 “잔인하고 변태적인

    길(428면)”이라고 적시하였다. 저자께 정중히 여쭙고 싶다. 이러한 잔인하고 변태적

    인 길을 “강자가 되고 전사가 되는 진정한 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냐고. 이것은

    “불륜의 유혹을 극복하지만 그로 인한 내적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는 남성”은 매우 강

    인한 존재가 된다는 말인 셈인데, 과연 이런 논리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신소설

    을 분석할 때 나타났던 날카로운 사회과학적 시선이, <유정> 앞에서는 갑자기 무뎌

    지는 이유를 서평자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저자의 충분한 보충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기를 원한다.

    지금의 상태로서는 저자가 “전사의 창조”라는 자신의 결론을 위해 작품을 끼워 맞췄

    다는 느낌을 준다. “허구를 통해 진실을 추구한다”는 근대소설의 기준에서 볼 때, <

    유정>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가져다 주었는가? 어쩌면 이광수 본인은 이렇게 생각

    했는지도 모르겠다. “민족 지도자로서 고결한 도덕성은 유지하고, 사랑의 이상도 놓

    치지 않으려면, 처절한 내적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결론은 삶의 포기가 아닌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죽음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던 최 교수가 이러한 춘원의 논리를 비판하지 않

    는 데서 서평자는 놀라움을 느낀다.

    춘원의 위와 같은 논리는 조금만 살펴보아도 소영웅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며, 역

    사와 현실에 대한 관심을 거세당한 정신주의(精神主義)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

    한 정신주의, 정신의 승리가 공허한 것임을 통렬히 비판한 작품이 <유정>보다 12년

    전에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내놓은 소설 <아큐정전>이었다. 여기서 루쉰은 냉철한

    현실인식과 실력이 갖춰지지 않은 “긍정하는 정신”은 결코 약자들이 취해서는 안되

    는 길임을 설득력 있게 말했다. 설령 춘원이 제시한 최석의 길이 진짜로 “강자(전사)

    로 단련되는 길”이라고 한들, 이는 대다수의 백성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아닌 것이다. 최대한 높이 평가한들 그것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지도자가 취해야 할 높은 정신

    적 극기의 사례”일 뿐이다. 우리는 차라리, 이인직이 <혈의 누>와 같은 “병리적 신

    소설”을 쓴 이유를 탐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광수가 왜 <유정>과 같은 “병리

    적 근대소설”을 썼는지 물어야 한다.

    5

    저자인 최 교수도 모르지 않겠지만, 국문학계의 춘원 이광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간단하지가 않다. 말년의 친일행각 때문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부정적 평가는 이광수 소설의

    가치가 실제로 낮다는 판단의 결과다. 여기서 “가치”란 언어예술의 완성도를 뜻하기

    도 하고, “허구를 통해 진실을 탐구한다”는 근대소설의 정신에 미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인직의 신소설이 그러하듯, 이광수의 작품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사회적

    증거” 정도의 뜻을 지니는 것 같다. 이러한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는 인색한 국문학자

    들은, 이광수 소설을 과도한 도덕주의로 인해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한 변태적

    시각의 산물로 처리하기까지 한다.

    서평자 역시 이광수 소설의 문학적 가치는 별로 없다고 보지만, 사회과학적 시각에

    입각한 역사적 가치의 평정(評定)은 엄밀하고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다. 그가 변태적인 소설을 썼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왜 이광수는 그런 소설밖에 쓸

    수 없었는지, 그가 살았던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것

    은 조상에 대한 후손의 의무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발

    견할지도 모른다. 마치 <친일인명사전>이 우리 조부와 부친 세대의 모습이자, 우리

    의 자화상인 것처럼 말이다.

    이광수가 <유정>을 썼던 1930년대 초반은 이인직이 <혈의 누>를 쓰던 시대와 많

    이 달랐다. 일단 이 시대는 최 교수가 “홉스적 자연상태”라고 규정했던 역사의 먹칠

    구간이 아니었다. 일본의 힘일지언정 강력한 치안(治安)과 내정질서가 확립되어 있

    었고, 많은 사료들도 확보돼 있어 한국인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지냈는지 꽤 심도있

    게 알 수 있다. 1926년의 만세운동,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총독부 통치가 상당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인들 중에서도 포기

    4)

    5)

    6)

    할 사람은 포기했으며, 저항할 사람은 이미 외국으로 가서 거점을 잡은 상태였던 것

    이다. 문학사적으로 보아도 이 시대를 준비했던 1920년대는 한국어로 된 상당수의

    문학이 축적되는 첫 10년간이었다. 춘원 이광수(1892년생)만 해도 한국어로 된 선

    배의 글을 읽고 문학수업을 할 수 없었던 불행한 세대였다. <무정>(1917)을 통해

    조선 전체에 문명(文名)을 널리 떨친 춘원의 글을 읽으면서 “문학”을 배웠던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였고, <유정>은 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정>을 읽을 때, <혈의 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잘 모르는

    시기에 접근하기 위한 열쇠로서 작품에 접근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어느 정도 알려진 시대의 특성과 <유정>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춘원은 대체로 사회 현실을 폭넓게 묘사하기보다 자기의 분신과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내적 갈등을 즐겨 그렸다. <무정>(1917)의 이형식

    이 그랬고, <유정>(1933)의 최석이 그러했으며, <사랑>(1938)의 안빈이 그러했

    다. 특히 <유정>과 <사랑>은 사회 지도층 인사인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이라는 제

    재(題材)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어, 얼핏 보면 똑같은 작품처럼 헷갈릴 정도이

    다.

    루쉰은 자기 작품의 주인공인 아큐(당시 어리석은 중국민중의 전형)의 정신주의를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풍자, 비판했지만, 이광수는 풍자나 자기비판과는 거

    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진지하고 고지식했으며, “진심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믿음은 본인의 성향에도 기인하겠지만, 그러한 성향을

    결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은 도산 안창호(1878~1938)의 영향이었다. 흔히 도산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방식으로 준비론 내지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고, 이광수는 충

    직한 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유명한 “흥사단 입단문답”에서 알 수 있듯이, 도

    산이 우리 민족에게 요구했던 것은 “진실된 마음”과 “거짓없음”이었다. 그리고 그것

    은, 오늘날 사람들이 얼핏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가르침

    이었다. 흥사단 입단문답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문: 군은 어느 나라 제품을 안심하고 사시오?

    답: 독일 것, 미국 것. 문: 우리나라 제품은 신용 못하시오?

    답: (쓴웃음을 지으며) 신용 못합니다. 문: 어떤 나라의 상공업이 신용을 못 받고서 그 나라가 부(富)할 수 있겠소?

    답: 상공업에 신용 없이는 그 나라가 부할 수 없습니다. (이광수, <도산 안창호>, 하서, 2000, 171면)

    믿음이 없으면 경제도 발전할 수 없다는 도산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외제차를 선호

    하는 분위기가 불식되지 않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에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춘원이 그토록 정신주의에 깊이 기울게 된 까닭도 여기

    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춘원의 작품 경향은 언제나 일관되다. 심지어 1941년에 나

    온 친일소설 <그들의 사랑>에서도 춘원은 “진심으로 일본에게 충성을 다해야 일본

    인으로부터 차별받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여 동료 조선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

    하는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조선인 마키하라(본명 이원구)를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춘원 정신주의(精神主義)의 위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

    대로 <유정>의 위험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될 수

    없지만, 진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자명한 진리다. 생각

    해 보자. 왜 독일차가 좋은가? 오늘날 벤츠 본사가 있는 독일 남서부 슈투트가르트

    지방 사람들은, 예로부터 “고지식하고 검소하며 놀 줄 모르는 일벌레”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광수도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다. 춘원은 문사들치고는 특이하게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

    자세와 개인적 성품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뛰어난 자연과학 기술, 그러한 기

    술을 산업화할 수 있는 물적 인프라, 그리고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금융산업의 발달

    없이, 진심만으로 독일차가 나올 수 있었을까? 준비론 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도산의 가르침은 단순히 진실하라는 것이 아니었고, “진심을 다해

    물적 토대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우리 민족에게 더 큰 시련을, “유

    부남의 불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시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6

    이광수가 <유정>을 쓰고 있던 1933년 내내, 도산은 차디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

    어 있었다. 1932년 김구의 기획에 따른 윤봉길 의사(義士)의 상하이 폭탄 테러로 인

    해 마침 그곳에서 한국독립당 활동을 하던 중 애꿎게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 국내로

    압송되었던 것이다. 도산(준비론자)은 당시 이승만(외교론자), 김구(무력행동론자)

    등과 함께 국외 독립운동 세력의 한 중추였고,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중에 강

    제로 입국한 셈이다. 연구자들은 이광수가 도산의 체포를 슬퍼하고 자주 면회를 갔다

    고 기록한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와중에 쓴 소설이 유부남의 정신

    적 불륜을 정신적 투쟁으로 승화시킨 <유정>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1938년

    3월 감옥에서 얻은 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도산이 경성제대병원에서 숨을 거두신

    직후에도, 춘원은 <유정>과 매우 비슷한 분위기의 정신적 불륜소설 <사랑>을 썼

    다. 물론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자유가 있고, 자기가 모시던 어른이 돌아가신다고 해

    서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창작에 임하는 이광수의

    이런 행태가 아름답거나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광수는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어떤 연구자의 말대로 고아였던 탓에 “애정 기갈증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일까?

    이 자리에서 해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어쩌

    면 이광수만이 답할 수 있는,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서평자가 말하고 싶은

    취지는, 이토록 엄중한 시기에, 왜 민족의 스승을 자처한 이광수는, 그토록 사랑놀음

    과 관련된 주제밖에 (물론 단순한 쾌락의 사랑놀음은 아닐지언정) 다루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또한 일종의 병리현상일 수 있다는 가설을, 우리는 진지하게 검토해

    야 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설 수준에서나마, 당시의 정세와 관련지어 찾고 싶다. 이광수가 <사랑>을 내놓은 1938년은 한국 근대사의 두 번째 먹칠구간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때 국문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어

    조차 쓰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한국문학이 멸절될 상황에 놓였고, 그러한 시기가 있

    었다는 것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러한 이름을 붙이게 했을 것이다. 실

    제로 거의 모든 문인들이 친일작품을 지었고, 그 부끄러운 역사는 실제로 1950~60

    년대에 걸쳐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먹칠되었다. 그것을 다시 복원하여 그 시대의 맨

    얼굴을 드러낸 책이 임종국의 <친일문학론>(1966)이며, 그 성과를 이어받아 사학

    계의 성과로 이뤄낸 것이 <친일인명사전>(2009)인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이때 이런 암흑기가 시작된 것일까?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은 당시의

    정세 변화다. 1937년 7월 관동군이 북경을 공격함으로써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그

    보다 한달 앞선 6월에 온건한 준비론을 표방하던 동우회를 친일화하기 위한 공작으

    로 이광수와 안창호 등 동우회 간부가 수감되었던 것이다(안창호는 1932년 수감되

    었다가 35년에 가출옥했고 망명을 준비하다가 서두르지 못해 재수감됨). 안창호 선

    생의 육신은 이 두 번째 수감을 견디지 못해 죽음을 맞이했고, 춘원도 6개월이라는

    비교적 긴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이광수는 출감한 뒤(1937.12), 흥사단과 동우회의

    큰 어른인 도산을 잃고(1938.3),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나서며, 일본 사법부의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가공할 만한 “진실된 친일(親日), 겉과 속이 같은 친일(親日), 불쌍한

    우리 민족이 살길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친일(親日)”의 길을 가게 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면, 우리는 <유정>에서 춘원이 제시했다는 이른바 “전사

    의 길”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섣불리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진정한 강자(强者)일까? 춘원 이광수라는 사람은 도

    산의 1차 검거의 원인이 되었던 1932년의 윤봉길 의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침묵했다. 그의 세계관(준비론, 민족개조론)에 따르면 윤의사의 행동은 진정한

    강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객기의 분출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객기의 분출이었을

    까? 윤봉길 의거가 없었다면,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장개석이 연합국 수뇌

    들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까? 1945년 9월

    미국 군함 미주리 호의 함상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일본의 서명

    대표는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였다. 그는 다리를 절고 있

    었는데, 미주리 호 함상의 그 수많은 미군들 가운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

    으리라. 그는 윤봉길 의거의 현장에 있었으며, 윤의사가 던진 폭탄에 다리가 절단되

    었던 것이다.

    윤의사의 행동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이광수가 던진 “강자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의

    깊이를 그와 다르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탄생>은 우리 학계에서 최초로

    이 문제를 제기한 책이지만, 너무 많은 사정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지적함으로써 이광수식 “강자 만들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다. 한국인 가운데

    저항시인 윤동주(1918~1945)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광수가

    친일행각에 열중하던 1941년 당시,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그러

    나 그는 “시를 쓰려거든 일본말로 쓰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서슬퍼런 압박에 굴복하

    지 않았고,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마치 <유정>의 최석이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대신 끓어오르는 욕망의 보복으로 스트레스성 죽음을 맞이했듯이. 그

    러나 차이도 있다. 윤동주의 죽음은 “실제 상황”인 반면, 최석의 죽음은 허구인 것이

    다. 그것도 그냥 허구가 아니라 “그것의 진실성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허

    구”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누가 진정한 강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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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는 이미 <한국인의 탄생>에 대한 서평으로 시작하여 너무나 많은 말을 내뱉고 말

    았다. 글을 쓰는 내내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고, 실천 없는 글쓰기의 무력감을 절

    감하며 말을 조심해야 했다. 정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 다만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되겠기 때문에, 저자께 드리고 싶은 몇 마디의 말씀과 함께 마무리를 지어야 하겠

    다.

    <유정>이외의 다른 작품들에 섬세한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한다. 힘과 권력이라는

    주제는 사회과학의 주요 테마인 것이 분명하고, 그 점에서 “강자가 되는 길”을 제시

    한 한국소설들을 찾아 분석한 취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유정>말고도, 이광수 말고도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고민한 작가와 작품들이 있다. 여성적 섬

    세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강경애(1905~1943)의 처절한 강인함, 황무지 같은

    식민지의 황야를 관통하며 사회주의자가 되어간, 그리고 결국은 북한의 애국열사릉

    에 묻힌 이기영(1895~1984)의 품위 있는 강인함, 그리고 어떠한 논리와 협박으로

    도 자기 말을 잃은 민족의 독립은 있을 수 없다는 자명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윤동

    주의 순교자적 강인함을 기억하고, 이들이 현대 한국인들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바

    까지 탐구해야 최 교수의 작업은 완성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이신 최 교수의 저술에 깔린 문제의식으로서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

    판”을 언급하겠다. 우리 사회에서 순수한 학문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공부는 출

    세의 수단이 된지 오래이다. 이때 “출세”라 함은 결국 <한국인의 탄생>에서 누차 이

    야기했던 “강자 되기”의 다른 말일 뿐이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가, <혈의 누>의 배

    경이 되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즉 홉스적 자연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빼앗기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학문이고 뭐고

    간에 그 절대원칙의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IMF 사태 이후 그러한 흐

    름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서평자가 생각하기에 이광수가 진실된 정신을 그

    토록 강조하고, 술도 마시지 않고,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하면서 지낸 이유도 바로 이러

    한 “급박한 생의 요구”였을 것이다.

    최 교수의 취지가, 우리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반지성주의”의 근원에

    이광수의 <유정> 같은 작품들이 놓여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라면, 서평자는 전적으

    로 동의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광수의 “진실된 정신”은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 생존

    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1938~1945)에, 생존이라는 더 큰 명제 앞에서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민

    족”이라는 가치를 지켜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반면, 서평자가 보기에 안창호 선생

    이나 윤동주의 “진실된 정신”은 반지성주의(생의 욕구를 위해 지적 작업의 가치를 후

    순위로 미루는 것)를 벗어나 있다. 거기에는 생존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의

    근원은 국제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품위(안창호)이거나, 탁월한 수준의 민족교

    육과 보편적 기독교 정신(윤동주)이었다.

    서평자는 이러한 진지하고 엄청난 문제를 고민할 기회를 주신 저자 최정운 교수께 깊

    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열띤 토론과 폭넓은 연구가 이어져, 진정으로 이 사회가 반지

    성주의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

    ------

    발행 2014년 2월

    '아포리아북리뷰'시리즈보기(37/39)

    주석

    제공 [아포리아 북리뷰] Vol.2, No.2, 2014.02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www.aporia.co.kr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 변화와 연속의 서사

    학교 속의 문맹자들 ­ 공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명의 지배영역 ­ 생명의 법철학적 판단기준

    문화로 본 종교학 ­ '종교' 너머의 종교 연구를 꿈꾸며

    전쟁은 속임수다 ­ 리링의 병가론과 중국의 전통

    자살의 전설 ­ 분노와 상처, 사랑과 그리움으로 빚어 낸 아버지의 초상들

    매거진 전체 기획/단행본 한국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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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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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고로 말하면 “한국인이란 누구인가(혹은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진지하고 급

    박하고 심각하게 질문한 이들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식민통치의 주체였던 일본

    인들이었을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 강의했던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무속고나

    다카하시 토오루가 조선학술사 같은 것들이 그 증거다. 물론 이런 저술들은 오늘

    날 부분적으로 인용 없이 이용되거나, 혹은 식민사관으로 매도되면서 잊혀져 발

    전적으로 극복되지 못했다.

    2

    이때 언어는 한국어이면 가장 좋겠지만, 정체성론은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을

    독자로 하기도 해야 하므로 굳이 한국어가 아니라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극단

    적으로 말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영어로 쓰고, 필요하면 번역을 해도 된다. 예컨대

    퀘이커교도였던 일본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는 1899년에 무

    사도(Bushido ­ the Soul of Japan)를 영어로 써서 미국에서 출간했고, 베스트셀러

    가 되었다. 이는 그와 연배가 비슷한 서재필(1864~1951)이 한국에서 독립신문 영

    문판 원고를 직접 썼던 일과 상응한다. 다만 니토베는 초기의 제국적 통치경험과

    물적 인프라,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자기 국가에 대한 자부심 덕에 학문

    적 저술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서재필은 그러한 것들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몽과 언론활동에 먼저 손을 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이 시기가 왜 먹칠구간이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

    다. 1894년은 갑오개혁이 있었고, 1895년 을미사변,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대

    한제국 선포, 1898년 만민공동회 운동 등 최소한 이 시기의 전반부만큼은 상당히

    많은 역사적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 번째 먹칠구간은 두 번째 먹

    칠구간에 비해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그

    실제 내부 정황에 대해 섬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컨대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본군의 경복궁 포위라는 무력시위로 인해 강제된 것임을 우리는 학

    교에서 가르치는가? 1898년의 만민공동회 운동이 한국사에서 최초의 공화주의

    (共和主義) 운동이었으며, 그것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이승만(대한민국 초대 대통

    령)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우는가? 그리고 1898년 이후 러일전쟁이 일

    어나는 1904년까지의 침묵 기간이 서양사에서 말하는 일종의 왕정복고(王政復

    古)에 해당하는 반동(反動) 시기라는 것을 우리는 아는가? 더 나아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는 배우는가? 서평자가 보기에 한국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섬세함의 부족이며, 그 문제의 원인은 고통스런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와 솔직함

    의 부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역사왜곡에 못지 않은 역사인식의 왜곡, 역사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인 “과거에서 배우는 미래를 위한 교훈 찾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4

    서평자는 김윤식 교수를 두둔하거나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김윤식 교

    수의 평가는 춘원문학에 대한 단순한 폄하가 아니라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김 교수는 춘원의 성격과 작품세계의 발전 과정 전체 맥락에서 <유정>에 대해 가

    치를 매긴 것이고, 실제로 김윤식 교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 문학현상을 사

    회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최 교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5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친일에 이르는 내적 과정을 그 자체로 살피고,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비판적 평가를 내리는 연구도 있다. 국문학자

    로서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국문학계의 면모도 꽤 다양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대표적인 연구로 심원섭, <이광수와 아베 미츠이에, 일본어 시 창작의 문제

    >, {일본 유학생 문인들의 대정­소화체험}(소명출판, 2009) 참조.

    6

    대표적인 것이 {한국문학통사}에서 보여주는 조동일 교수의 평가이다.

    11

    제공

    출판사 편집후기 및 추천도서

    -----

    0/500

    BEST의견 전체의견

    jssa**** 저는 본 저서의 미흡한 부분을 다루는 최정운 교수님의 후속 저서가 곧 출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본 저서를 읽고 "장군의 아들 1편"만 본 것 같은 찝찝함이 느껴져서

    요. 하지만 "장군의 아들"처럼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곧 "장군의 아들 2편"이 나오길 기

    대하겠습니다^^*

    2014­02­14 10:56 신고

    답글

    한국인의 탄생 : 네이버 매거진캐스트

    한국인의 탄생 : 네이버 매거진캐스트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 씨알의소리(1970-1981) | 바보새함석헌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 씨알의소리(1970-1981) | 바보새함석헌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작성자 바보새 14-05-18 01:54 조회5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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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퀘이커 세계대학생들과 이야기
    아침 예배 모임에 참석하려고 버스를 탔을 때 나는 언젠지 모르게 또 전날 밤부터 하던 생각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전날이란 10월 30일 토요일인데, 그날 오후 2시부터 일본 동경서 온 퀘이커 세계대학 학생들이 만나자고 해서 신촌에 있는 퀘이커 모임 집에서 만났었다. 인솔자가 한 사람 있었고 학생은 여덟이었는데 그중 둘은 일본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서양 사람들이었다.
    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난 곳은 반도의 서북 구석 압록강 어구에서 가까운 농사와 어업을 겸한 지극히 외진 곳이었지만, 외졌기 때문에 인심은 순박했고,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있으면서도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자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화로운 전통적인 농촌자치 생활 속에 거의 “제력(帝力)이 하유어아재 (何有於我哉)리오.”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위기 속에 살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실 그때에 벌써 일본의 정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약장사라고 하며 종종 오는 일본 사람들이 있었고, 이따금 파선했노라고 하면서 표착했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게 다 지금 와서 보니 우리나라를 먹으려고 나라 형편을 살피러 왔던 것이다. 그 증거로는 내 집안에 아저씨 되는 분이 하나 한학자였는데 어느 때 일본 중이라는 사람이 하나 찾아와서 필담으로 이야기를 하고 간 일이 있었는데, 후에 청일전쟁이 나자 일본 군대가 의주로 지나가게 됐는데 그 진중에서 편지를 보내면서 아무 때에 갔던 중 아무개가 지금 장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노라고 한 일이 있었다.

    또 내가 난 그 촌락에서, 바다 가운데로 한 10리만큼 나가면 조그만 섬이 있는데, 거기가 부동항(不凍港)이 될만하다 하여서 벌써 합병이 되기 여러해 전부터 매년 겨울이면 일본 사람들이 와서 압록강의 얼음 흘러내리는 상황을 조사하 곤 했다. 이런 따위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런 외진 곳에 보잘게 없지만 이상하게도 일찍부터 기독교가 들어와서 그 교회를 통해 기독교와 겸해 민족주의와 서양 문명과 세계 형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생각의 기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어떻게 해서 퀘이커가 됐느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가던 이야기, 유영모 선생님한테 우치무라(內村) 선생의 일화 하나를 얻어들은 것이 깊이 인상에 박혔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성경연구회에 나가게 됐던 이야기, 그와 한 학교 출신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 稻造) 박사는 일본 퀘이커 창시자라는 이야기, 내가 무교회 신앙이다가 퀘이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7년 봄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온 현동완(玄東完) 선생으로부터 첨으로 양심적 거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전쟁은 죄악이란 것을 알게 됐고, 퀘이커에 대해 처음에는 주로 평화사상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간디에 대해 고쳐 읽기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너희가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것 아니냐
    그리고 난 다음 어느 학생이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에 좀 내 생각하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서 1962년 펜들힐에 갔을 때에 했던 말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책임으로 알고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야 한다는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으나, 또 다른 한편 6.25 전쟁 때에 미국의 도움이 컸던 것을 모르는 것 아니나, 미국인으로서는 자연 그럴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르지만, 한국 문제에 대한 자기네의 책임은 너무 모르는 듯이 느껴지는 때가 많다. 그래서 퀘이커만한 사람들은 솔직히 말을 하면 알겠지 하는 생각에 어느 날, 학생과 선생 앞에서 아주 찔러서 말을 한 일이 있다. 한국지도를 봐라! 남북으로 등뼈 산맥이 있는데다가 38선을 그으니 그것이 십자가 아니냐? 소련은 두 팔을 잡고 미국은 두 다리를 잡고 중공은 옷을 벗겨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 아니냐? 그리고 그 ‘시크렛 플레이스’를 너희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38선이 어찌 우리 국경이냐? 너희 국경 아니냐? 이제 잘린 허리를 다시 고치지 못한다면 너의 데모크라시, 너의 서양문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던 일이 있는데, 그날은 그 이야기를 다는 아니하고 다만 민주주의가 둘은 아니니 너희가 정말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한국 원조한다는 심리로는 아니 된다, 언제나 너희 일로 알거든 그대로 해라, 지금 군사원조 말이 있지만, 군사원조는 참 원조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물건도 들어오면 산 관계를 그르친다, 나라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다. 군사원조도 있으면 그것은 물질이 한 원조지 미국인이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인간 미국 씨이 이 나라의 씨을 참으로 이웃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의 말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해가 저물었다. 그런데 다 헤어지고 나서 생각을 하니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물론 언제나 사람을 의심하면서 예배는 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요 비밀이 있어 가지고는 참 사회운동은 될 수 없다는 주의이므로 언제나, 내 속에 확신하는 바를 사람 차별을 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로 노력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예배드리려 할 때 형제가 네게 대해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우선 가서 화해부터 하고 오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힘을 쓰고 있고, 간디가 암살당할 직전에 주위의 사람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오니 몸 검색을 하자고 했을 때 사람의 몸 검색을 하면서 예배가 무슨 예배냐고 반대했던 것을 과연 장한 일이라고 흠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하여도 마음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여야 하는 우리 사회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사람이서 무슨 모임을 해도 거기는 반드시 이질분자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차 누구도 빠짐없이 생각하는 사회, 이것은 무슨 사회냐? 생각할수록 슬프다. 일본의 정탐이 끊임없이 오던 그 망국기에도 우리는 그런 일은 없었다. 합병이 되어 그 말기에는 다소 그런 걱정도 했지만도 오늘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없다. 살기를 그만둘 생각도 없다. 메뚜기도 아니하는 생각을 사람인 내가 어찌 할 수 있을까?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런 생각을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하다 잤고 아침에 깨어서도 아니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날만 아니라 근래는 이것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공산당이 들어오면 버티다 죽게 되면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고치느냐? 그래서 아침에도 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신촌을 가려고 버스를 타니 자연 또 그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쩐지 모르게 명상에 빠졌다. 버스를 타기만 하면 나는 그 소위 음악인가 뭔가 때문에 신경을 쓰는 일이 많아서, 한 두 주일 전에도 성경모임에서 명상에 때한 주의를 말해주며 명상은, 적어도 훈련이 되기 전에는, 사람 많은 데서는 하지 말라 했다. 왜냐하면 사람 많은 데서 명상을 하려면 자연 남이 이상하게 보지 않나 하는 등등 생각으로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혹시는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신경조직에 이상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더러 그런 데서는 하지 말라 한 나인데, 어떤지 나 자신이 음악을 했는지 아니했는지, 사람들이 잡담을 하는지 아니하는지, 모르고 나는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문득 쑥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다, “네 할 것을 어서 해라!” 하시는 그 말씀이다.
    그러니 마음이 참 시원했다. 기뻤다. “이것이 절대 승리법이다”했다. 그래서 모임에 가서 예배 시간에 그것을 증거 했고 오후 모임에서도 다시 그 말을 했고, 장자 모임에서도 노자 모임에서도 했다. 이 한 주일은 그 말씀으로 살았고 이 앞으로는 또 그 얼마 동안 양식이 되겠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감히 나 같은 것이 입에 올릴 수도 없지만, 길을 가노라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셨던 것을 조그마치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상한 것은 왜 늘 유다와 관계가 될까? 1970년 이맘 때, 이보다 조금 더 늦어 펜들힐에 첫눈이 내리던 저녁, 나의 이성은 아닌 줄을 뻔히 아는데도, “저기 쭈그리고 앉은 것이 가롯 유다 아니냐” 하는 속봄을 하다가 얻은 말씀이 일찍이 「대화」(펜들힐의 명상)라는 제목으로 쓴 글인데, 또 유다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게 됐다.
    그때에 내게 알려주신 것은 열둘이 하나인 문제인데, 왜 제자들이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만 생각을 해서 “주님 저입니까?” 하기만 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은 그렇게 여지없이 깨어진 하나 됨을 예수께서 어떻게 다시 회복하셨나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간 데마다 유다가 있다. 그 의미에서 죽은 사회다. 몸은 여럿이지만 영은 하나다. 그 하나가 깨지면 죽는다. 그것을 살려야한다. 목사님, 신부님, 신학자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나 나는 「요한복음」13장 21절에 “마음이 몹시 산란해지셔서”란 말은 이 깨어진 하나 됨 때문이라고 밖엔 해석할 도리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주셨다는 것과 당신이 하나님께로 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것을 아시는” 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물론 아니지만, 유다 하나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본래 열둘의 의미는 열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 하나인 생명체를 이룬 데 있었다. 이제 그것이 깨졌다. 유다 하나가 문제 아니다. 물론 그 개인도 불쌍히 여기지만 그로인해 열 하나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상태를 놓고는 자기 가실 길을 갈수 없다. 그러므로 몸소 제자의 발을 씻으신 것은 단순히 봉사정신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이는 그 산산 부서짐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다시 씻어 깨끗이 하기 위해서다. 상처는 씻지 않고는 합창이 아니 된다. 독성균을 씻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발을 씻음으로 그것을 상징하신 것이다.
    직감으로 유다의 속을 아시지만 사랑에는 버리는 사람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내쫓을 수는 없다. 모든 벌은 인간이 스스로 제가 받는 것이다. 스스로 하는 생명의 법칙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최후까지 참는다.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시는 말씀도, “너희 중 하나가 나를 잡아 줄거다” 하시는 것도, “빵을 적셔서 주신 것”도 다 이제라도, 이제라도 하고 기다려서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빵을 먹지 못하고 나가는 데 스스로 자기 벌을 받는 길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가 어둠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간 뒤에 예수의 태도는 일변한다. 마치 막혔던 동이 터지고 폭포가 쏟아지듯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됐다”는 말로 시작되는 은혜의 말씀이 쏟아진다. 이제 다시 하나 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간 곳마다 유다가 있는 사회라면,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하지 못하고 의심의 독균이 끼어 죽게 된 것이라면, 그것이 살아나는 것도 최후 만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결이 회복되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만드는 결정적인 말이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말씀이다.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너 할 것”이라 해서 생명의 근본원리인 스스로 함을 자극하신다. 죽어도 네가 죽고, 살아도 네가 산다. 선도 네가 하는 선이요, 악도 네가 하는 악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은 사람 속에 자유의 정신을 넣어주신 하나님이다. 벌하는 권위는 하나님께 있으나 그것을 취하는 것은 인간 제게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이요, 도덕을 기초로 하지 않은 위에 영은 자라지 못한다. 우리끼리는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 사람을 내쫓을 권리는 없다. 내쫓으면 나 자신이 죄다. 얼마나 많은 죄가 교회라는 이름, 나라라는 이름, 진리라는 이름 아래 지어질까? 모든 혁명은 거짓 혁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독립의 기초를 거의 다 놓고도 정권을 쥐지 않은 간디가 과연 참을 찾는 이 답게 한 것이다. 예수는 유다를 정죄하시지도, 회개하라 책망하시지도 않으시고 그보다 더하신 것을 했다. 악은 거기 못 견디어 스스로 저 갈 곳으로 갔다. 만일 제자들이 의분을 발해 내쫓았다면 세상적 혁명은 됐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 됨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 크리스천이라는 모두가 잘못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하는 일이 악과 싸우는 것인 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참으로 정결을 회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영의 힘의 모자람 때문 아닐까?

    둘째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시는 데서 그 사람과 행위를 구별하셨다. 우리는 “그 행위를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를 이론으로는 알지만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님은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셨으므로 그 다음 잡으러 왔을 때 “친구여” 하실 수가 있었다. 자기를 잡아주는 행동이 죄인 것은 아시나 그것으로 유다를 미워하시지도 벌을 선언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고 사회국가가 어찌 되어 갈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점이 믿음 없는 데다. 이 세상이 이 세상대로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의 하는 일이 늘 피를 피로 씻는 일에 그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뽑으려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셨다. 우리 생각에는 꼭 뽑아야 할듯한데 그러면 곡식까지 해친다고 했다. 노자(老子)도 벌하는 것은 하늘에 있지, 사람에 있지 않다 했다. 사람에 있지 않기 때문에 최후에 제가 자연과 역사의 법칙에 의해 스스로 벌의 길을 자취할 때까지 참으신다. 인간의 고통을 지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제 뜻으로 판단해서 죽이고 나서는, 이것은 하늘이 하신 것이다 하는 것은 거짓이요 교만이다.
    우리가 사탄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게는 말할 자격이 없다. 신학으로 설명해도 망발이다. 그것은 영원한 신비로 둘 것이다. 하나님이 아신다. 무엄하게도 나는 하나님이 돌아서시면 사탄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고 말해본 일도 있지만, 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잠잠한 것이 가장이다. 사람이 지혜를 내어 선악 시비의 판단을 한 결과가 오늘의 세상 되지 않았는가? 요순(堯舜)에서부터 천년 후에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일이 시작됐다 하는 장자(莊子)의 말이 옳지 않은가?
    그러므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속에는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네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너를 사랑한다 하는 뜻이 있다. 이 세상이 만일 악한데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어딘지 한 마음이 무한히 용서하며 무한히 참으며 믿는 싸움이 하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것이 속는 길이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많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도 그것을 믿으려고 한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으면 몰라도 믿는 이상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이 군비 없는 헌법을 제정했다가 실지로 군비를 두지 않은 까닭으로 적국에게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자기는 만일에 그런 일이 있다면 차라리 일본 전체를 번제로 드리면서라도 그 헌법을 지지하고 싶다고 한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 박사를 나는 흠모하고 싶다. 그런 정신이 있으면 나라 절대로 망하지 않을 거다. 나라 망하는 근본원인은 적국 때문이 아니고 스스로 제 국민 사이에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 불신풍조다. 믿지 못하면 서로 죄를 만들어내어서 싸운다. 다른 사람은 모르나 내가 감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설혹 누군지 모르는 유다가 거기 있다 하더라도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겁이 없어진다. 선악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겁이 없어지는 일이다. 상당한 분별력과 경험이 있으면서도, 또 아주 선의의 사람이면서도, 무력해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불의의 세력을 보고 겁을 집어먹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있어야 겁을 대지 않기도 하지만 또 겁을 내지 않도록 힘을 써야 정신의 힘이 자라기도 한다. 지일즉기동(志一則氣動)이요, 기일즉지동(氣ᅳ則志動)이다. 그러므로 힘쓰려 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기도, 기도 아니다. 저절로 겁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하나님을 믿고 겁을 내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노력해야 정말 기도다. 그런데 겁을 내지 않으려면 “그래 무슨 일을 네가 하거나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어서 하라. 내가 다 당하마” 하고 결정을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서 겁을 제해 버리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마음이 평안하면 점점 더 깊은 명상과 기도에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전보다 좀 더 분명한 말씀을 듣게 된다. 나는 지난 3월 이래 과거 70년 동안에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고.

    우리가 또 혹하는 것의 하나는 행동의 결과다. 유다가 배반하는 생각을 가지지만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감은 유다의 재주나 힘으로 되는 것 아니다. 배신한 것과 십자가에 돌아감은 외면으로 원인 결과같이 보이나 그것은 이 둔한 육신의 생각이고, 인간이 선악간 무슨 생각을 했거나 그 결과는 결코 그 사람이 만들지 못한다. 나폴레옹이 일찍이 잘못 계획한 일도 잘못 싸운 일도 없었지만 비 몇 방울 온 것 때문에 패했고 그래서 유럽 역사가 달라졌던 것같이 언제나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결코 급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사람이 수십 백 천이 무고히 고생을 하는데 어떻게 끝없이 기다리느냐 하겠지만 참과 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스케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의미는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이 지나간 날의 모든 선한싸움 싸운 이들의 증거하는 것이다. 씨 한 알을 심어서 열매를 얻으려 해도 몇십 년이 필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의 혼, 한 민족의 역사일까? 모든 악은 다 수천만 년 나이 먹은 악이다. 오늘날 내가 당하는 억울은 몇 백 년 자란 악의 힘이다. 그것이 이 조그만 나의 며칠 몇 해의 기도나 노력으로 쉽게 없어질 리가 없다. 우주는 법칙이 있는 우주이므로 그 법칙에 순종해야 한다. 농사가 사시 법칙에 순응하고야 되듯이 역사의 농사도 나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새 본 책에 있는 좋은 말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는 이 말의 끝을 맺자.
    “사티아그라하의 목적은 대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대적을 개심시킴에도 있기 때문이다. (The aim of Satyagraha is not only to confront but also to convert the enemy)” 조지 우드코크

    씨알의 소리 1976. 11,12월. 59호
    저작집; 15- 31
    전집; 3- 351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 씨알의소리(1970-1981)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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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작성자 바보새 14-05-18 01:54 조회541회 댓글0건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퀘이커 세계대학생들과 이야기
    아침 예배 모임에 참석하려고 버스를 탔을 때 나는 언젠지 모르게 또 전날 밤부터 하던 생각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전날이란 10월 30일 토요일인데, 그날 오후 2시부터 일본 동경서 온 퀘이커 세계대학 학생들이 만나자고 해서 신촌에 있는 퀘이커 모임 집에서 만났었다. 인솔자가 한 사람 있었고 학생은 여덟이었는데 그중 둘은 일본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서양 사람들이었다.
    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난 곳은 반도의 서북 구석 압록강 어구에서 가까운 농사와 어업을 겸한 지극히 외진 곳이었지만, 외졌기 때문에 인심은 순박했고,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있으면서도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자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화로운 전통적인 농촌자치 생활 속에 거의 “제력(帝力)이 하유어아재 (何有於我哉)리오.”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위기 속에 살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실 그때에 벌써 일본의 정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약장사라고 하며 종종 오는 일본 사람들이 있었고, 이따금 파선했노라고 하면서 표착했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게 다 지금 와서 보니 우리나라를 먹으려고 나라 형편을 살피러 왔던 것이다. 그 증거로는 내 집안에 아저씨 되는 분이 하나 한학자였는데 어느 때 일본 중이라는 사람이 하나 찾아와서 필담으로 이야기를 하고 간 일이 있었는데, 후에 청일전쟁이 나자 일본 군대가 의주로 지나가게 됐는데 그 진중에서 편지를 보내면서 아무 때에 갔던 중 아무개가 지금 장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노라고 한 일이 있었다.
     
    또 내가 난 그 촌락에서, 바다 가운데로 한 10리만큼 나가면 조그만 섬이 있는데, 거기가 부동항(不凍港)이 될만하다 하여서 벌써 합병이 되기 여러해 전부터 매년 겨울이면 일본 사람들이 와서 압록강의 얼음 흘러내리는 상황을 조사하 곤 했다. 이런 따위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런 외진 곳에 보잘게 없지만 이상하게도 일찍부터 기독교가 들어와서 그 교회를 통해 기독교와 겸해 민족주의와 서양 문명과 세계 형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생각의 기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어떻게 해서 퀘이커가 됐느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가던 이야기, 유영모 선생님한테 우치무라(內村) 선생의 일화 하나를 얻어들은 것이 깊이 인상에 박혔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성경연구회에 나가게 됐던 이야기, 그와 한 학교 출신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 稻造) 박사는 일본 퀘이커 창시자라는 이야기, 내가 무교회 신앙이다가 퀘이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7년 봄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온 현동완(玄東完) 선생으로부터 첨으로 양심적 거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전쟁은 죄악이란 것을 알게 됐고, 퀘이커에 대해 처음에는 주로 평화사상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간디에 대해 고쳐 읽기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너희가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것 아니냐
    그리고 난 다음 어느 학생이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에 좀 내 생각하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서 1962년 펜들힐에 갔을 때에 했던 말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책임으로 알고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야 한다는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으나, 또 다른 한편 6.25 전쟁 때에 미국의 도움이 컸던 것을 모르는 것 아니나, 미국인으로서는 자연 그럴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르지만, 한국 문제에 대한 자기네의 책임은 너무 모르는 듯이 느껴지는 때가 많다. 그래서 퀘이커만한 사람들은 솔직히 말을 하면 알겠지 하는 생각에 어느 날, 학생과 선생 앞에서 아주 찔러서 말을 한 일이 있다. 한국지도를 봐라! 남북으로 등뼈 산맥이 있는데다가 38선을 그으니 그것이 십자가 아니냐? 소련은 두 팔을 잡고 미국은 두 다리를 잡고 중공은 옷을 벗겨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 아니냐? 그리고 그 ‘시크렛 플레이스’를 너희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38선이 어찌 우리 국경이냐? 너희 국경 아니냐? 이제 잘린 허리를 다시 고치지 못한다면 너의 데모크라시, 너의 서양문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던 일이 있는데, 그날은 그 이야기를 다는 아니하고 다만 민주주의가 둘은 아니니 너희가 정말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한국 원조한다는 심리로는 아니 된다, 언제나 너희 일로 알거든 그대로 해라, 지금 군사원조 말이 있지만, 군사원조는 참 원조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물건도 들어오면 산 관계를 그르친다, 나라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다. 군사원조도 있으면 그것은 물질이 한 원조지 미국인이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인간 미국 씨이 이 나라의 씨을 참으로 이웃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의 말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해가 저물었다. 그런데 다 헤어지고 나서 생각을 하니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물론 언제나 사람을 의심하면서 예배는 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요 비밀이 있어 가지고는 참 사회운동은 될 수 없다는 주의이므로 언제나, 내 속에 확신하는 바를 사람 차별을 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로 노력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예배드리려 할 때 형제가 네게 대해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우선 가서 화해부터 하고 오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힘을 쓰고 있고, 간디가 암살당할 직전에 주위의 사람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오니 몸 검색을 하자고 했을 때 사람의 몸 검색을 하면서 예배가 무슨 예배냐고 반대했던 것을 과연 장한 일이라고 흠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하여도 마음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여야 하는 우리 사회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사람이서 무슨 모임을 해도 거기는 반드시 이질분자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차 누구도 빠짐없이 생각하는 사회, 이것은 무슨 사회냐? 생각할수록 슬프다. 일본의 정탐이 끊임없이 오던 그 망국기에도 우리는 그런 일은 없었다. 합병이 되어 그 말기에는 다소 그런 걱정도 했지만도 오늘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없다. 살기를 그만둘 생각도 없다. 메뚜기도 아니하는 생각을 사람인 내가 어찌 할 수 있을까?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런 생각을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하다 잤고 아침에 깨어서도 아니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날만 아니라 근래는 이것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공산당이 들어오면 버티다 죽게 되면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고치느냐? 그래서 아침에도 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신촌을 가려고 버스를 타니 자연 또 그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쩐지 모르게 명상에 빠졌다. 버스를 타기만 하면 나는 그 소위 음악인가 뭔가 때문에 신경을 쓰는 일이 많아서, 한 두 주일 전에도 성경모임에서 명상에 때한 주의를 말해주며 명상은, 적어도 훈련이 되기 전에는, 사람 많은 데서는 하지 말라 했다. 왜냐하면 사람 많은 데서 명상을 하려면 자연 남이 이상하게 보지 않나 하는 등등 생각으로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혹시는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신경조직에 이상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더러 그런 데서는 하지 말라 한 나인데, 어떤지 나 자신이 음악을 했는지 아니했는지, 사람들이 잡담을 하는지 아니하는지, 모르고 나는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문득 쑥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다, “네 할 것을 어서 해라!” 하시는 그 말씀이다.
    그러니 마음이 참 시원했다. 기뻤다. “이것이 절대 승리법이다”했다. 그래서 모임에 가서 예배 시간에 그것을 증거 했고 오후 모임에서도 다시 그 말을 했고, 장자 모임에서도 노자 모임에서도 했다. 이 한 주일은 그 말씀으로 살았고 이 앞으로는 또 그 얼마 동안 양식이 되겠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감히 나 같은 것이 입에 올릴 수도 없지만, 길을 가노라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셨던 것을 조그마치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상한 것은 왜 늘 유다와 관계가 될까? 1970년 이맘 때, 이보다 조금 더 늦어 펜들힐에 첫눈이 내리던 저녁, 나의 이성은 아닌 줄을 뻔히 아는데도, “저기 쭈그리고 앉은 것이 가롯 유다 아니냐” 하는 속봄을 하다가 얻은 말씀이 일찍이 「대화」(펜들힐의 명상)라는 제목으로 쓴 글인데, 또 유다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게 됐다.
    그때에 내게 알려주신 것은 열둘이 하나인 문제인데, 왜 제자들이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만 생각을 해서 “주님 저입니까?” 하기만 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은 그렇게 여지없이 깨어진 하나 됨을 예수께서 어떻게 다시 회복하셨나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간 데마다 유다가 있다. 그 의미에서 죽은 사회다. 몸은 여럿이지만 영은 하나다. 그 하나가 깨지면 죽는다. 그것을 살려야한다. 목사님, 신부님, 신학자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나 나는 「요한복음」13장 21절에 “마음이 몹시 산란해지셔서”란 말은 이 깨어진 하나 됨 때문이라고 밖엔 해석할 도리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주셨다는 것과 당신이 하나님께로 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것을 아시는” 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물론 아니지만, 유다 하나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본래 열둘의 의미는 열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 하나인 생명체를 이룬 데 있었다. 이제 그것이 깨졌다. 유다 하나가 문제 아니다. 물론 그 개인도 불쌍히 여기지만 그로인해 열 하나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상태를 놓고는 자기 가실 길을 갈수 없다. 그러므로 몸소 제자의 발을 씻으신 것은 단순히 봉사정신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이는 그 산산 부서짐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다시 씻어 깨끗이 하기 위해서다. 상처는 씻지 않고는 합창이 아니 된다. 독성균을 씻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발을 씻음으로 그것을 상징하신 것이다.
    직감으로 유다의 속을 아시지만 사랑에는 버리는 사람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내쫓을 수는 없다. 모든 벌은 인간이 스스로 제가 받는 것이다. 스스로 하는 생명의 법칙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최후까지 참는다.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시는 말씀도, “너희 중 하나가 나를 잡아 줄거다” 하시는 것도, “빵을 적셔서 주신 것”도 다 이제라도, 이제라도 하고 기다려서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빵을 먹지 못하고 나가는 데 스스로 자기 벌을 받는 길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가 어둠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간 뒤에 예수의 태도는 일변한다. 마치 막혔던 동이 터지고 폭포가 쏟아지듯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됐다”는 말로 시작되는 은혜의 말씀이 쏟아진다. 이제 다시 하나 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간 곳마다 유다가 있는 사회라면,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하지 못하고 의심의 독균이 끼어 죽게 된 것이라면, 그것이 살아나는 것도 최후 만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결이 회복되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만드는 결정적인 말이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말씀이다.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너 할 것”이라 해서 생명의 근본원리인 스스로 함을 자극하신다. 죽어도 네가 죽고, 살아도 네가 산다. 선도 네가 하는 선이요, 악도 네가 하는 악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은 사람 속에 자유의 정신을 넣어주신 하나님이다. 벌하는 권위는 하나님께 있으나 그것을 취하는 것은 인간 제게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이요, 도덕을 기초로 하지 않은 위에 영은 자라지 못한다. 우리끼리는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 사람을 내쫓을 권리는 없다. 내쫓으면 나 자신이 죄다. 얼마나 많은 죄가 교회라는 이름, 나라라는 이름, 진리라는 이름 아래 지어질까? 모든 혁명은 거짓 혁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독립의 기초를 거의 다 놓고도 정권을 쥐지 않은 간디가 과연 참을 찾는 이 답게 한 것이다. 예수는 유다를 정죄하시지도, 회개하라 책망하시지도 않으시고 그보다 더하신 것을 했다. 악은 거기 못 견디어 스스로 저 갈 곳으로 갔다. 만일 제자들이 의분을 발해 내쫓았다면 세상적 혁명은 됐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 됨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 크리스천이라는 모두가 잘못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하는 일이 악과 싸우는 것인 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참으로 정결을 회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영의 힘의 모자람 때문 아닐까?
     
    둘째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시는 데서 그 사람과 행위를 구별하셨다. 우리는 “그 행위를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를 이론으로는 알지만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님은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셨으므로 그 다음 잡으러 왔을 때 “친구여” 하실 수가 있었다. 자기를 잡아주는 행동이 죄인 것은 아시나 그것으로 유다를 미워하시지도 벌을 선언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고 사회국가가 어찌 되어 갈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점이 믿음 없는 데다. 이 세상이 이 세상대로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의 하는 일이 늘 피를 피로 씻는 일에 그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뽑으려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셨다. 우리 생각에는 꼭 뽑아야 할듯한데 그러면 곡식까지 해친다고 했다. 노자(老子)도 벌하는 것은 하늘에 있지, 사람에 있지 않다 했다. 사람에 있지 않기 때문에 최후에 제가 자연과 역사의 법칙에 의해 스스로 벌의 길을 자취할 때까지 참으신다. 인간의 고통을 지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제 뜻으로 판단해서 죽이고 나서는, 이것은 하늘이 하신 것이다 하는 것은 거짓이요 교만이다.
    우리가 사탄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게는 말할 자격이 없다. 신학으로 설명해도 망발이다. 그것은 영원한 신비로 둘 것이다. 하나님이 아신다. 무엄하게도 나는 하나님이 돌아서시면 사탄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고 말해본 일도 있지만, 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잠잠한 것이 가장이다. 사람이 지혜를 내어 선악 시비의 판단을 한 결과가 오늘의 세상 되지 않았는가? 요순(堯舜)에서부터 천년 후에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일이 시작됐다 하는 장자(莊子)의 말이 옳지 않은가?
    그러므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속에는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네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너를 사랑한다 하는 뜻이 있다. 이 세상이 만일 악한데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어딘지 한 마음이 무한히 용서하며 무한히 참으며 믿는 싸움이 하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것이 속는 길이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많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도 그것을 믿으려고 한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으면 몰라도 믿는 이상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이 군비 없는 헌법을 제정했다가 실지로 군비를 두지 않은 까닭으로 적국에게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자기는 만일에 그런 일이 있다면 차라리 일본 전체를 번제로 드리면서라도 그 헌법을 지지하고 싶다고 한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 박사를 나는 흠모하고 싶다. 그런 정신이 있으면 나라 절대로 망하지 않을 거다. 나라 망하는 근본원인은 적국 때문이 아니고 스스로 제 국민 사이에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 불신풍조다. 믿지 못하면 서로 죄를 만들어내어서 싸운다. 다른 사람은 모르나 내가 감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설혹 누군지 모르는 유다가 거기 있다 하더라도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겁이 없어진다. 선악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겁이 없어지는 일이다. 상당한 분별력과 경험이 있으면서도, 또 아주 선의의 사람이면서도, 무력해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불의의 세력을 보고 겁을 집어먹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있어야 겁을 대지 않기도 하지만 또 겁을 내지 않도록 힘을 써야 정신의 힘이 자라기도 한다. 지일즉기동(志一則氣動)이요, 기일즉지동(氣ᅳ則志動)이다. 그러므로 힘쓰려 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기도, 기도 아니다. 저절로 겁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하나님을 믿고 겁을 내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노력해야 정말 기도다. 그런데 겁을 내지 않으려면 “그래 무슨 일을 네가 하거나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어서 하라. 내가 다 당하마” 하고 결정을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서 겁을 제해 버리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마음이 평안하면 점점 더 깊은 명상과 기도에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전보다 좀 더 분명한 말씀을 듣게 된다. 나는 지난 3월 이래 과거 70년 동안에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고.
     
    우리가 또 혹하는 것의 하나는 행동의 결과다. 유다가 배반하는 생각을 가지지만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감은 유다의 재주나 힘으로 되는 것 아니다. 배신한 것과 십자가에 돌아감은 외면으로 원인 결과같이 보이나 그것은 이 둔한 육신의 생각이고, 인간이 선악간 무슨 생각을 했거나 그 결과는 결코 그 사람이 만들지 못한다. 나폴레옹이 일찍이 잘못 계획한 일도 잘못 싸운 일도 없었지만 비 몇 방울 온 것 때문에 패했고 그래서 유럽 역사가 달라졌던 것같이 언제나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결코 급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사람이 수십 백 천이 무고히 고생을 하는데 어떻게 끝없이 기다리느냐 하겠지만 참과 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스케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의미는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이 지나간 날의 모든 선한싸움 싸운 이들의 증거하는 것이다. 씨 한 알을 심어서 열매를 얻으려 해도 몇십 년이 필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의 혼, 한 민족의 역사일까? 모든 악은 다 수천만 년 나이 먹은 악이다. 오늘날 내가 당하는 억울은 몇 백 년 자란 악의 힘이다. 그것이 이 조그만 나의 며칠 몇 해의 기도나 노력으로 쉽게 없어질 리가 없다. 우주는 법칙이 있는 우주이므로 그 법칙에 순종해야 한다. 농사가 사시 법칙에 순응하고야 되듯이 역사의 농사도 나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새 본 책에 있는 좋은 말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는 이 말의 끝을 맺자.
    “사티아그라하의 목적은 대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대적을 개심시킴에도 있기 때문이다. (The aim of Satyagraha is not only to confront but also to convert the enemy)” 조지 우드코크
     
    씨알의 소리 1976. 11,12월. 59호
    저작집; 15- 31
    전집; 3- 351

    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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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함석헌

    바른믿음

    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함석헌

    "함석헌의 생애와 한국 근대사 내용입니다. 간단히 서술한 것 가져 왔습니다.

    1923년 함석헌은 동경에 도착합니다. 그의 동경 생활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집 한 칸 구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지만,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을 보면 "빠가야로,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욕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당시 동경고등사범에는 약 50명 정도의 조선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비공산주의계 기독교 학생으로서 급진적인 좌익계 학생 그룹으로부터 질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함흥농업학교 졸업생 김교신(1901~1945)을 만나게 됩니다.
    김교신은 1919년에 동경으로 유학을 와서 1920년 11월부터 1927년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우치무라 간조'가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2년에 이곳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김교신은 석헌에게 우치무라의 성경 공부 모임과 일본 무교회 운동 모임을 소개했습니다. 뒤이어 석헌은 우치무라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 기독교 사상가이자 비평가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에 대해 개방 정책을 취하고 근대화 운동을 추진할 당시에 그는 이미 일본에서는 유명한 성서 해석자였습니다.
    젊은 날의 우치무라는 언론인으로 일하며 기독교 평화주의의 입장에서 러일전쟁을 비판하고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우치무라의 그 추종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교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우치무라는 스스로는 무교회 원칙에 입각한 기독교도라고 자신의 모임을 칭하였습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 운동은 표면적 형식주의와 교회만의 경건함을 부인했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운동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도적인 기성 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인 고정 관념을 부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치무라는 교회가 건물이나 제도는 아니라고 아님을 주장하며, 어떤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성서의 믿음대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열망했습니다.
    함석헌은 이러한 우치무라와 무교회 운동 사상에 깊이 감화를 받았습니다. 석헌은 우치무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우치무라와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와 더불어 일본에 있는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퀘이커 모임에서 석헌은 별로 뚜렷한 인상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두고 나중에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동경 유학 시절 우치무라가 이끌었던 것과 같은 성경 공부 모임, 무교회 운동 모임을 서울에 만들었습니다.

    함석헌도 역시 무교회 기독교인으로서 이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1927년 7월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잡지의 이름에서처럼 <성서조선>은 성서와 조선, 즉 하나님의 말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자 한 잡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경찰로부터 <성서조선>은 검열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서조선>에 실린 함석헌의 글들을 삭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의 황국신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 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 학계의 최고 두뇌들을 총동원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합니다.
    1925년 6월에는 그 이름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기에 이릅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총 35권, 전체 2만 4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16년에 걸쳐 제작하였습니다. 제작 비용으로는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였습니다. 이 일은 일제에 있어서 조선 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의 국가사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제의 계략 아래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를 다시금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저술하게 됩니다. 석헌은 한국 역사 속에 나타난 절대자의 섭리를 찾으려 했고, 그 섭리를 통해서 조선인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아들 예수와 같이 세계사의 모든 짐을 지고 가는 수난의 여왕으로 보려 했습니다.

    함석헌이 저술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한국 역사를 일제의 무력사에 대항해 정신사를 중심으로 재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역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씨알들에게 낙관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는 지혜와 눈을 뜨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대에 함석헌은 이 책을 통해 조선인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보여 줌으로써 한반도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적이고 서사적으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일제는 1938년부터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직하여 일왕을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드는 '신도주의'를 조선의 기독교인들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 일제는 한반도의 모든 학교와 교육기관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사 교육을 금지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교사 자리를 사임해야 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사임한 함석헌은 한동안 오산학교 인근의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40년 3월 함석헌의 후배인 김두혁은 자기가 경영하던 평양 근교 송산 농사학원의 경영 및 관리를 함석헌에게 부탁합니다.
    석헌은 이를 받아들여 교육, 경영, 관리, 농사일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모두 밖에 나가 농사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세 가지 분야에 특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육, 기독교 신앙, 농사일' 그런데 1940년 8월 김두혁이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경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이 일하던 농사학원 역시도 일본 경찰로서는 공산주의 성격의 학교로 인식되었습니다. 게다가 함석헌은 1940년 2월부터 일제의 의해 시행된 '창씨개명'에도 협조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1940년 8월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함석헌을 대신해 김교신, 송두용 두 친구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결국, 1년의 옥고를 치르고 함석헌은 석방됩니다. 그러나 그 후 1942년 3월 <성서조선>은 158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을 당합니다. 그리고 두 달여 후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성서조선의 발행 관계인으로 다시금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기려, 유달영 등을 포함한 <성서조선>의 독자들 역시도 붙잡혀 구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감옥 내에서 많은 독서를 하면서 지식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특히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 반야경, 법화경, 무량수경, 금강경 등 다양한 불경들을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도관에게 읽을 만한 책을 달라고 하니 그 교도관이 불교도였던 터라 불교 서적 등을 건네주어 불교 서적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감방 대학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 근본에서 하나라는 나름의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년의 감옥 생활에서 석방된 이후에도 '노자'와 '장자'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점차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함석헌은 이후 1940년대 초반에 와서 자신의 생각과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크게 3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였습니다.

    △ 첫째 그는 무교회 모임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화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함석헌이 보기에 무교회 운동에서 회원들은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현실 세계나 세속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홀했습니다.

    △ 둘째,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관한 이해가 '우치무라 간조'의 시각과 달랐습니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 우치무라의 속죄론이었습니다. 반면 함석헌은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즉 속죄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의 인격적 일치 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신앙의 대상으로 주님을 그저 믿기만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으로 내적인 신앙심을 길러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어떤 종교적 규칙이나 특정 종교 지도자의 생각을 그저 따라가거나 의지하지 않고 사람마다 스스로 예수와 독창적인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셋째, 함석헌은 식민지 백성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점령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우치무라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동경 대지진 직후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관이 무교회 운동과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당시 함석헌이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고전 철학은 노장사상이었습니다.
    특히 석헌은 노장사상의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정념의 순화 같은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노장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장사상의 영향인지 함석헌은 종교 혹은 사상의 지나치게 기교적인 체계화 그리고 첨예하게 조직화한 힘이나 제도화된 인위적 권위를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한 힘이나 첨예화된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습니다.
    ( 독자 비평 ; 그러나 한민족은 조직화가 안되서 힘이 없엇고 그것이 당파싸움으로 이어져 침략을 받는 동기가 됬습니다 )
    그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고 인류의 모든 주요 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 힘썼습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서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석헌에게 노장사상, 그리고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노장사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경향과 정치권력의 간섭에서 각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1945년까지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네 번에 걸쳐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