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9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olfhart Pannenberg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출생 1928년 10월 2일
독일 슈체친
사망 2014년 9월 5일 (86세)
독일 뮌헨
국적 독일
분야 조직신학
소속 부페르탈 신학대학원, 마인츠 대학교
뮌헨 대학교
출신 대학 베를린 대학교 신학 학사
지도 교수 칼 바르트
주요 업적 계시론
그리스도론

종교 개신교(루터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년 10월 2일 ~ 2014년 9월 5일)은 독일개신교 공교회주의인 루터교회 신학자이다. 현대 기독론 연구의 새로운 접근으로 아래로부터 그리스도론을 체계화하였다. 대우재단의 초청으로 국내에도 방문하였다.


목차
1가족과 성장 배경
2학업과 활동
3신학적 활동
3.1신학적 교류
3.2신학적 성과
4저서
4.1한국어 번역
5어록
6참고문헌


가족과 성장 배경[편집]

판넨베르크는 슈체친에서 세관원이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루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아버지의 세관원 직업 특성상 잦은 이사로 인해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다. 1942년에 베를린으로 왔고, 16살 되던 해인 1944년에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하였다. 1945년에는 영국군의 전쟁포로였다가 독일로 귀국해 학업을 계속하였다. 1944년에 나중에 "빛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는 강렬한 종교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하여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 사상가들을 공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백교회 신자였던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이 판넨베르크에게 기독교에 대해 연구하라고 권했다. 이를 계기로 "지적 회심"을 하게 된 판넨베르크는 기독교가 현재 최선의 종교적인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를 계기로 그는 개신교 신학자가 된다.

학업과 활동[편집]

판넨베르크는 베를린, 괴팅겐, 바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바젤 대학교에서 칼 바르트의 제자로 신학을 연구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에드문트 슐링크 교수 지도로 둔스 스코투스의 예정론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해 1956년 하이델베르크의 루터교 교회인 성베드로 교회에 목사로 파송받아 사역하였다.

판넨베르크는 1958년부터 부페르탈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근무하였고, 1961년부터는 마인츠대학교에서 개신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7년부터 은퇴하는 1994년까지 뮌헨 대학교에서 개신교 신학부 조직신학교수로 활동하였다. 뮌헨대학교 재직시에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의 교류를 위해 기초신학과 교회일치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하였다. 특히 개신교회인 루터교와 천주교 사이의 신학적 교류에 공헌하였다. 판넨베르크는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독일 개신교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신학적 활동[편집]
신학적 교류[편집]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경력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신학학문으로 볼 수 있다는 옹호이며, 이는 철학, 역사, 자연과학과 교류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대표작은 "예수: 신이자 인간"일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그리스도론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구축한다. 나사렛 예수의 생애에서부터 교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칼케돈 공의회의 두 본성론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자 참된 인간인데, 그분의 인성과 신성의 일치 문제에 관하여 그리스도부활의 맥락에서 본다. 그는 부활그리스도의 자기정체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그는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뿐만 아니라 비 기독교 사상가들이 널리 토론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중심에 계시의 한 형태로서 역사에 대한 그의 개념을 포함하여 현대 신학에 많은 공헌을 했다.

신학적 성과[편집]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카를 바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바르트가 제시한 신론 체계 안에서 신학을 세워나갔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공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완전한 포괄성과 보편성을 추구하였다. 바르트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유기도 부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보편성도 주장하였다.[1]

저서[편집]
1968. Jesus: God and Ma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Basic Questions in Theology. Westminster Press
1969.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Westminster Press.
1970. What Is Ma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2. The Apostles' Creed in Light of Today's Questions. Westminster Press.
1977. Faith and Reality. Westminster Press.
1988-1994. Systematic Theology. T & T Clark

한국어 번역[편집]
일부 저작은 판넨베르크 연구자 정용섭 박사에 의해 《믿음의 기쁨》(독일어: Freude des Glaubens), 《사도신경 해설》 등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일부 설교는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 2, 3.(양장본 HardCover) 새물결플러스


어록[편집]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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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아래 글은 개신교 신학자인 정용섭 목사가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 연재하는 판넨베르크 신학묵상글을 발췌한 글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흔적을 제거하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자주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 지불해야만 할 대가이다. 그런 고통을 통한 변혁은 크게 환영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그런 결과들을 볼 것이다. 설교, 교육, 교리에 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선교활동과 교회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그리고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그런 결과들을 볼 것이다.
— 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35 쪽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흥미를 보이고 있다. 전문적인 신학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교사가 되어서 이 흥미를 유발시켜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문제들에 관해 독자적이고 성숙한 차원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모든 판단은 목사나 신학자의 도움 없이도 내려진다. 그러나 직업적인 신학자의 일은 공동체가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성숙한 방법으로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신학자가 한 교구 목사인 경우에 그는 이 책임을 수락함으로써 자기가 자기의 학문적 연구를 이용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위치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목사인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전문교육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여러 가지 활동에 그들의 지적 기능을 낭비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점들과 현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더 그들은 설교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
— 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36 쪽

기독교 선교도 똑같이 권위주의적 전통의 흔적이 제거되어야만 오늘날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기독교의 선교를 광범위하고 맹렬하게 거부하는 현상이 이 사회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거부는 대부분 과거에 많은 선교사들이 행한 권위주의적 방법 탓이다. 그들은 모범과 논증으로 납득시키는 대신 개종을 강요했다. 대부분의 경우 오늘의 선교적 과제는 에큐메니컬적인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정한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들은 그 사회에서 인간 존엄의 진보적 모범이 되고, 또 그것에 동의하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 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38 쪽

참고문헌[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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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Bradshaw, Timothy, 1988. Trinity and ontology: a comparative study of the theologies of Karl Barth and Wolfhart Pannenberg. Edinburgh: Rutherford House Books.
Case, Jonathan P., 2004, "The Death of Jesus and the Truth of the Triune God in Wolfhart Pannenberg and Eberhard Jüngel," Journal for Christian Theological Research 9: 1–13.
Fukai, Tomoaki, 1996. Paradox und Prolepsis: Geschichtstheologie bei Reinhold Niebuhr und Wolfhart Pannenberg. Marburg
Grenz, S. J., 1990. Reason for Hope: The Systematic Theology of Wolfhart Pannenberg. New York: Oxford.
--------, "Pannenberg on Marxism: Insights and Generalizations," The Christian Century (30 September 1987): 824–26.
--------, "Wolfhart Pannenberg's Quest for Ultimate Truth," The Christian Century (14–21 September 1988): 795–98.
Lischer, Richard, "An Old/New Theology of History," The Christian Century (13 March 1974): 288–90.
Don H. Olive, 1973. Wolfhart Pannenberg-Makers of the Modern Mind. Word Incorporated, Waco, Texas.
Page, James S., 2003, "Critical Realism and the Theological Science of Wolfhart Pannenberg: Exploring the Commonalities," Bridges: An Interdisciplinary Journal of Philosophy, Theology, History and Science 10(1/2): 71–84.
Shults, F. LeRon, 1999. The Postfoundationalist Task of Theology: Wolfhart Pannenberg and the New Theological Rationality. Grand Rapids, MI: Eerdmans.
Tipler, F. J., 1989, "The Omega Point as Eschaton: Answers to Pannenberg's Questions for Scientists," Zygon 24: 217–53. Followed by Pannenberg's comments, 255-71.
--------, 1994. The Physics of Immortality: Modern Cosmology, God and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New York: Doubleday.
--------, 2007. The Physics of Christianity. New York: Doubleday.
Tupper, E. F., 1973. The Theology of Wolfhart Pannenberg.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Woo, B. Hoon (우병훈), 2012. “Pannenberg’s Understanding of the Natural Law”. 《Studies in Christian Ethics》 25 (3): 346–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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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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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블로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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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소개 | 
한아름 2018. 2. 20. 23:31http://blog.daum.net/7gnak/pages/hello
소개 ( 난, 이런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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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박윤선, 김홍전, 박영선 목사님을 멘토로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은혜가 되었던 자료들을 이 블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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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성이란 ?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구약성서에서 ‘靈’은 히브리어로 ‘ruach'로 나타난다(희랍어로는 ονευμα, 라틴어로는 anima). 이는 숨, 바람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생명의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히브 1,7; 요한 3,8). 창세기에서 ‘ruach’는 하느님께서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드신 후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다는 데서 나오며, 이는 인간 생명의 근원임을 드러내 준다. 또 이 입김은 인간의 감정, 의식, 정신,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입김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마음을 영혼의 기능들의 집합이라 할 때 마음은 자연 생명이 갖는 자연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엇에 의해 지배받느냐야 따라 그 표출 방식이 달라진다. 즉 마음이 欲情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靈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하는 문제이다.

인간에게 입김을 불어넣는다 함은 자연적 인간 안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7에서는 ‘입김’을 하느님의 현존, 창조의 기원으로 제시하고 있다(창세 6,17; 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안 땅에 정착하여 이민족과 많은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 때 백성의 지도자로 나타나 민족을 구한 판관들은 일시적으로 야훼의 靈을 받아 초인적인 지혜와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볼 때 靈이란 인간 안에 들어가서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해주는 야훼의 靈이다.

또 야훼의 靈을 받은 사람은 도유의식을 통해 신성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기름을 바르는 순간 그는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삶을 산다는 정신을 갖게 된다. 즉 야훼의 靈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 잡고 온 존재를 감싸주는 것이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이 靈은 충격적인 예언활동을 가능케하는 힘으로 등장한다. 또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윤리적으로 형성시킨다. 야훼의 靈은 참회와 겸손과 덕성과 평화를 주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지혜를 준다(지혜 9,17). 야훼의 靈은 이스라엘을 淨化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에제 36,26-27), 백성 전체에게 야훼의 靈이 주어진다. 또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靈은 하느님의 힘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靈에 따라 사는 삶을 靈性生活이라 할 수 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영’이란 무엇인가 ?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의 靈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계하고(루가 1,5-25), 마리아의 예수 잉태 사건에도 관계된다(루가 1,35). 또 세례자 요한은 靈의 도우심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지하게 된다(요한 1,32-34).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메시아는 聖靈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며(마태 3,11), 예수의 세례 때에도 靈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마태 3,13-17). 즉 예수의 세례는 그가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아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루가 4,14). 또 예수는 靈의 힘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마귀를 쫓으셨다(마태 4,11). 이는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외적 표징으로 이해된다. 즉 惡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靈이 작용하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모든 말씀은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 능력은 야훼의 靈에서 나온다.

이러한 靈은 지금 우리 안에서도 現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협조자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靈이 제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4,16). 부활한 예수는 인간성의 나약함을 초월하여 성령으로 사는 靈이 되셨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時空의 제한에서 초월함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겁에 질러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신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요한 20,19-23). 이는 곧 육체적 제한을 벗어남을 의미하며, 동시에 시간적 제약을 초월해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계심을 뜻한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힘에 의해 부활하신 후 이제는 당신 자신이 그 靈을 주는 자로 변신하신다. 승천과 함께 빠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신다. 이는 지상적 現存樣式을 바꾸심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통해 그 인간 안에 그리스도께서 居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는 생명을 주는 자로서 성령의 부여자가 되신다(1고린 15,45).

우리가 하느님의 靈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자연적 생명안에 靈의 부여로 말미암아 자연적 조건들이 완성되기 시작됨을 의미한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은총이 인간을 완성한다고 표현하였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靈을 받아 사는 사람을 신앙인이라 한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靈(그리스도의 뜻)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3)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

요한 복음 3장 6절에 보면 “肉으로부터 난 것은 肉이고 靈으로부터 난 것은 靈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肉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로 이기적이다. 그리고 肉의 원천은 원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肉의 열매(행실)로는 “음행, 부정,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한, 싸움, 시새움, 분노, 모략, 불목, 분열, 질투, 술주정, 폭음 폭식”(갈라 5,19-21) 등이 있고, 靈의 열매로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23) 등이 있다. 肉을 따라 사는 데는 충만성과 여유가 없는 반면, 靈을 따라 사는 사람은 충만함과 여유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영성, 즉 靈을 따라 사는 삶은 신앙인의 본질적 요소이다. 일반적 영성이란 인간 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을 뜻하지만, 가톨릭적 영성 개념은 인간을 신앙인으로 살게 하는 정신, 즉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신비 전체(하느님의 靈)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聖三位에 이르는 것이다. 聖三位의 삶에 일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에서 완성된 생명의 원리인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이 靈은 씨앗의 형태로 우리 안에 풍성하게 존재하게 되며 그럴 때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진 이 靈의 씨앗은 구체적으로 信望愛를 통해 배양된다. 이는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두며, 그분만을 사랑하는 생활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참고로 聖化恩寵에는 주부덕과 성령의 은사가 포함되고, 주부덕에는 向主三德과 윤리덕이 포함된다.




2. 영성신학이란 ?


1) 영성신학의 발전과 용어적 의미

영성신학이란 신앙인들의 초자연적 생명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도록 그 원리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다. 처음에는 客觀的 靈性과 主觀的 靈性으로 구분되었다. 객관적 영성이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믿음과 인식의 측면에서 다룸을 말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계시, 구원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성서학, 성사론 등의 학문이 포함되며 모두 하느님께 대한 이해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에 비해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이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다룬다. 즉 삶을 통해 신앙 안에서 키워나가며,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다룬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식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으로서 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이 따라야 한다. 또 한 영혼이 정상적 발전을 위해서는 이 두 영역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의신학에서 배우는 모든 것을 습득했다고 해서 조화로운 영혼이라 볼 수 없고, 반대로 이것을 모르고 봉사만 한다면 이는 인간적 봉사의 차원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과 삶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12,3세기까지는 객관적인 영성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교의신학으로 발전하였다. 주관적 영성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응답할 수 있는 인간?? 내면적 정신에 의해 처음에는 심리학적 영역에 치중했다. 그러다가 트렌트 공의회 이후 이단설에 대항하여 진리의 깊은 연구 필요성에 따라 전문영역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8세기에 와서 주관적 영성은 修德神學과 神秘神學으로 구분되었다.

여기서 수덕신학이란 개인적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完德을 추구하는 삶을 의미한다. 신비신학은 은총의 작용하에 영혼이 수동적으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가는 삶을 말한다. 이 둘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前後를 구별할 수 없는데 이는 끊임없이 교차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수덕 차원의 과정 안에서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함께 할 때만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어상으로 수덕적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askeein’에서 유래한다. 이는 어떤 기술, 특히 운동 기술을 숙달하기 위하여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용어를 철학연구나 덕행실천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크리스찬 생활의 덕행을 위한 노력에 이 용어를 사용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덕행실천과 운동연습을 자주 비교하며 설명하였다(1고린 9,24-27; 필립 3,13-14; 2디모 4,7).

신비적이란 용어 역시 그리스어의 ‘mystik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직 신입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는 은밀한, 혹은 감추어진 전례를 가리킨다.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비밀 - 어떤 이야기 속의 숨겨진 상징적 의미, 혹은 그 작용이나 능력이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 - 을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비신학이란 용어는 6세기 초 「신비신학에 관하여」의 저자인 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에 의해 서방신학에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그 개념이 神에 관한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후 이 단어는 점차로 관상이라는 뜻과 동일시되었다. 현대에 와서 도미니꼬회 회원인 레지날드 가리구-라그랑즈(Garigou Lagrange)는 크리스찬 完德이 수덕과 신비의 단계를 포함하지만, 完德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신비적 생활은 비상한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세례 때 모든 크리스찬이 받게 되는 은총의 정상적인 발전과 완성이라고 정리하였다.

결국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모두를 영성신학이라고 말한다. 구분을 하자면, 수덕은 입문에서 관상 전까지, 신비는 주입적 관상에서 수동적 정화, 일치까지를 취급한다. 이는 실존적인 차원에서 영성생활이 어느 순간에든 수덕적인 면이나 또는 신비적인 면이 우세하기 때문에 둘의 구분이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성신학에서는 이 수덕과 신비 둘을 구별없이 포함한다. 왜냐하면 신비현상은 수덕현상 없이 이해될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수덕현상은 그 자체 안에 신비 체험의 씨앗을 이미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영성과 신학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고 신학은 자연신학과 초자연적 신학으로 구분된다. 자연신학이란 인간의 이성으로만 하느님을 깨닫고 탐구하는 신학을 의미하고, 초자연적 신학이란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서 그 내용을 고찰하고 신앙의 진리에 대한 결과를 연역하는 신학이다. 초자연적 신학은 흔히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으로 구분된다. 교의신학은 계시된 신비들, 특히 삼위일체, 말씀의 강생, 구속, 성체성사와 다른 여러가지 성사들, 그리고 미래의 삶 등을 취급한다. 윤리신학은 인간의 행위, 계시된 교훈과 권고들, 은총, 신학적 및 윤리적인 크리스찬의 덕행들, 계시로써 알려진 초자연적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원리인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한다.

이와같이 이해된 윤리신학은 분명히 인간을 최상의 성덕으로 인도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을 포함한다. 영성신학은 이렇게 광범위한 윤리신학을, 인간이 하느님과 더욱 밀접하게 일치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위해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수덕신비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크리스찬 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본질과 특성에 관해 가르치는 바를 전제하고, 完德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적 덕행의 발전법칙과 조건을 연구한다.

수덕신비신학은 최고의 덕행실천과 성령께 대한 완벽한 순종을 가르치고 하느님과의 일치생활로 인도하기 위해 교의신학과 윤리신학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다. 이리하여 전자는 후자를 최대한으로 응용하고 후자의 왕관이 된다.

영성신학이 포함하고 있는 요소로는 첫째 영성체험의 심리학적 자료, 둘째 신학원리의 적용, 셋째 크리스찬 完德의 관점에서 본 영성생활의 진보에 관한 실천적 지침 등이다. 이러한 자료가 신학원리와 통합될 때 영성생활의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교 完德의 실천적 지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종말론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이 그것이다. 종말론적 영성이란 이 세상을 죄와 고통으로 보고 여기서 구원될 방법으로 언제 도래할지 누구도 모르는 종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에 합당한 준비를 늘 갖추도록 강조한다. 다분히 현세 이탈적이기에 침묵과 관상을 강조하고 자기성화와 完德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와 죽음에 동참하도록 권고한다. 이는 교회의 전통적 영성으로 수도회의 경우 관상수도회가 포함된다. 여기서는 특히 하느님의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다음으로 육화적 영성이란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신 것은 죄와 고통, 죽음의 세계에 오셔서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세상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신적 질서로 바로 잡아 구원시킬 대상으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세상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성화시키고 구원시키도록 촉구한다. 결국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육화적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는 영성이다. 따라서 사랑과 봉사활동, 노동의 가치, 사회생활 등을 강조하고, 신앙 안에서 행동하는 실천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강조된다.

이 두 측면은 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종말론적 영성만을 강조한다면 현세를 부정하게 되고, 육화적 영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느님과 자신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둘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3) 영성신학의 정의

용어적인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내적 생활, 초자연적 생활, 수덕신비신학, 完德 신학 등 다양한 말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향점은 동일하다. 내용적 측면에서 영성신학은, 신적인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며, 영성생활의 시초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영혼들의 진보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와같이 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영성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순수 이론신학과는 다른 실천 혹은 응용신학을 택하고, 주제에 있어서는 크리스찬의 完德과 기본 원리들을 대상으로 한다.

신학은 초자연적 신앙의 눈을 통해 계시진리를 이성적인 추리과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탐구한 신학의 내용은 심리학적 자료들이 계시진리의 영역을 언급할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될 때는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다.

영성신학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영성신학이 실천적 응용신학이기에 영성신학의 법칙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이용하게 된다. 따라서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자는 특히 심리학을 비롯해서 자연과학의 많은 자료들을 직접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체험의 본질과 현상을 연구할 때에는 신학의 교도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성신학을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는 신학이라 정의하는데, 여기서 신학자는 계시진리와 교회의 가르침 및 조직신학의 결론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한다. 따라서 크리스찬 完德의 본질과 은총생활, 주입덕행 및 성령의 은사의 작용 등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두고 탐구해야 한다.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의 성장과 발전을 다루는 법칙과 지침을 규정하기도 한다. 영성신학은 경험적 자료보다는 계시진리 및 신학적 결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만큼 그 연구방법이 경험적이고 서술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이고 사변적이다.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법칙들이 밝혀지고 설명될 때 비로소 평신도의 영성과 사제의 영성, 수도생활의 영성, 혹은 전례적 영성 같은 특수형태의 영성을 논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분야(지침)는 죄악과 유혹, 능동적 및 수동적 정화, 성사, 선행 및 기도의 단계 등의 내용을 취급한다.

또 영성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시초부터 그 完德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으로 거쳐 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렇게 영성생활의 진보 과정을 설명해 줄 때 구도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별력을 터득하게 된다.




최민순 신부님에 의하면, 영성신학은 영성생활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성세 때 받은 하느님의 생명, 즉 사랑을 가꾸어 완전하게 만드는 학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끝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며, 창조되지 않은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이 초자연적 덕인 생명의 덕은 영혼의 능력인 지성과 의지, 기억에 가해져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도록 빛을 준다. 이 하느님의 생명은 만약에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상실하게 되며 그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본성뿐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미칠 수 없는 자연인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범죄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자연법에 따라 덕은 행할 수 있지만 초자연적 덕행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두번째 창조를,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구원은 인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구원이 나의 구원, 즉 주관적인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세례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잃은 은혜가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초자연적 삶에로의 성장이 가능해졌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아 하?윱纛? 생명을 가꾸고 완전케할 능력을 받았다. 여기서 열매를 맺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영성신학이다.

자연인은 영혼의 능력들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지만, 초자연인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은총에 의해 성장하고 영혼의 능력을 완성시킨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성장하는 信望愛를 따라, 은총도 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덕에는 자연덕과 초자연적인 덕이 있다. 자연덕이란 단순한 자연적 습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연덕은 영혼의 여러 기능에 편이함을 줄 뿐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덕은 영혼의 능력에 가해진 습성이요 주입된 덕이다. 이러한 초자연적덕(信望愛)이 주입되어 영혼의 기능들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영혼의 기능을 보완하고 완성시켜 준다.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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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시래기(Hodie Mihi Cras Tibi)
글쓴이 : FireBa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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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修德神學
라틴어 theologia ascetica
영어 ascetical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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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학 수덕신학, 신비신학이라는 용어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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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절제,영성

수덕신학, 신비신학이라는 용어

이인철

2006. 7. 3.

영성 또는 영성신학이라는 용어의 유래는 캐톨릭의 수덕신학,신비신학이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카톨릭 전통에서 수덕적 또는 신비적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 개념들

수덕적; 숙달을 위한 연습과 훈련의 의미, 덕행의 실천

신비적; 신자들에게만 알려진 전례. 위 디오니시우스 이후 초자연적인 체험적 지식, 관상의 의미. 신비신학은 비상한 은총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받는 은총의 정상적 발전과 완성.




2. 수덕적과 신비적의 의미와 사용례

- 용어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 수덕신학은 입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입적 관상의 문턱에 이르기까지의 영성생활을 말하고, 신비신학은 주입적 관상과 수동적 정화 및 변형일치의 단계를 취급한다.

- 수덕신학은 정화,조명,일치의 길을 다룬다. 신비신학은 초자연적 은총의 결과인 주입적 관상과 주입적 관상에 따르는 수반현상을 다룬다.

- 수덕신학은 정화기,조명기를 다룬다. 신비신학은 일치기를 다룬다.

- 수덕신학은 습득덕행과 주입덕행이 우세하나, 신비신학은 성령의 은사가 우세하다.

- 개신교신학에서 수덕주의는 금욕의 의미. 신비주의는 초감각적 체험적 지식을 의미





결론; 영성신학은 수덕적 면과 신비적 면 양자를 다룬다.




출처; 조던 오먼, 영성신학, 제1장에서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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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신비신학
최근 수정 시각: 2021-01-01 01:37:51


분류 기독교신학
라틴어 : Theologia Mystica, Theologia Ascetica
영어 : Mystical Theology, Ascetical Theology
한자 : 神秘神學, 修德神學
한국어 : 신비신학, 수덕신학

1. 개요[편집]
2. 사상적 발전[편집]
* 이 항목은 서강대학교 교수 김산춘의 <감각과 초월>, 논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 사상-에펙타시스와 에클레시아-" 을 토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신학자로 오리게네스와 닛사의 성 그레고리우스가 있다.

오리게네스는 에페소서 4장 17-24절[2]을 토대로 사막교부들에 의해 처음 논의되어 전해져오던 "영적 감각"론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새 피조물이라 부름받은 새 육신을 입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보고(시각), 듣고(청각), 냄새를 맡고(후각), 맛을 보며(미각), 피부로 느끼는( 촉각) 오감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며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존재, 즉 신화(新化)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구약의 「아가」해석을 통해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과의 만남을 신랑을 그리워하며 찾아가는 신부의 모습, 사랑의 화살로 중상을 입은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다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탈자적 사랑의 지향을 의미하는 ‘에펙타시스’의 개념인데, 이는 신 인식이 정적인 그리스적 본질인식이 아니라, 역동적인 히브리 그리스도교적 청종(聽從) 즉 타자 관계적 인식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에펙타시스는 신비가들의 하느님과의 순간적 합일일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으로서 끊임없는 전진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하느님은 무한하시므로 전진 또한 무한한 것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에펙타시스의 모범은 다름 아닌 모세의 생애였다. 마지막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에펙타시스라고 하는 초월에로 열린 역동성은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다(多)이면서도 전체로서는 일(一)인 영적인 공동체의 형태로 이 유한한 세계에 구체화하며 생기한다. 즉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신비사상에서, 초월ㆍ개인ㆍ자기의 에펙타시스는 그 날줄이, 내재ㆍ보편ㆍ타자의 에클레시아는 그 씨줄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연상시킨다. 산의 정상에 그대로 머물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세상으로 내려가길 권하는 것이다. 이 ‘세계와 타자에로의 귀환’이야말로 구체적 역사적 인간 안에서의 ‘존재의 현성(現成)’인바, 이로써 인간의 참다운 자기 성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의 주장들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만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이전의 사막교부들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사막교부들은 육체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삶을 당장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성 안토니오의 생애>만 읽더라도 당시 사막교부들이 악과 정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도운동의 정신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한 신학으로 형성되었고 비잔틴 신학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는 이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서방 가톨릭에서 영성신학으로 불릴 만한 것은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의 수도원이 그나마 켈트 신앙과 결합된 영성신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라틴지역은 동방교회에서 수입된 영성신학이 주이며, 성 베네딕토 또한 동방교회의 영성을 연구한 교부 존 카시안의 제자였기에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신비신학 (Theologia Mystica)[편집]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숨은 교류 현상을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부문.

이 개념은 중세 가톨릭에 자리잡은 것으로, 4세기에 마르첼루스 안치라누스에 의해서 사용되어, 5~6세기의 위 디오니시오 문서에서는 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가리켰다.

후에 실천적 신비신학과 사변적 신비신학으로 나뉘어 지고, 15세기의 제르송의 저작에서는 이 구별이 확실히 나타났다.

실천적 신비신학의 근거는 신약성경 중 예수의 삶의 방식에 이미 나타나며, 바오로의 서간 중에 전개되고 있다. 3번 항목 참고.

중세를 통해서 실천적 신비신학이 항상 교의신학에 생명을 주었던 것은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자의 깊은 기도와 신비체험이 수반된 사실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에서 신비가가 배출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신비신학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예수회 개혁의 시대를 통해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여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의신학과 실천적 신비신학은 분리되는데 후자의 근대의 본격적인 창설자로서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나 십자가의 요한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신비신학은 의화된 영혼 중에서의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과 현현의 최고도의 단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생각되며, 관상기도, 성령의 끊임없는 은총, 그에 따른 초자연적인 신비적 현상 등이 연구된다. 그러나 신비적 상태와 그 작용에 관해서는 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신학처럼 안 보이는 주제에 대놓고 완벽히 신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는데, 대개는 수덕의 3단계인 정화·조명·일치를 거쳐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른다고 본다.

20세기의 사제이자 신학자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은 그의 책 <주님의 영광> 에서 신비신학의 궁극적인 토대가 되는 역사적 접근로로서 12가지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리옹의 이레네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스, 켄터베리의 안셀모, 보나벤투라, 단테, 십자가의 요한, 블레즈 파스칼, 하만, 솔로비에프, 홉킨스, 페귀이다.


4. 수덕신학 (Theologia Ascetica)[편집]

수덕의 이론과 그 실천방안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

영성신학이라고도 한다. 17∼18세기에 신학의 각 분과가 독립될 때 분류되었다. 이 학문의 주 목표는 완덕, 즉 자유의지에 의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하는 수단으로서의 개개인의 구체적·능동적인 행위를 분석하는 데 있다.

실천적이기는 하나 원리적인 고찰에만 그치는 윤리신학과, 구체적이기는 하나 하느님의 작용에 완전히 수동적으로 응하는 신비적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신학과의 중간에 위치한다.

윤리신학은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행위의 선악 가치를 판단하는 신학이며, 신비신학은 위에 나와있듯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려는 신학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자기 극복의 훈련부터 시작하여, 기도, 성사생활 등으로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여 자기 구원으로 전진하는 중간 단계가 수덕학이며, 성인학, 영성학, 완덕학이라고도 한다.

수덕신학은 그리스도교적 수덕의 실행을 최초의 단계에서 능동적인 관상생활의 문턱까지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래서 수덕신학은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덕을 쌓아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는 수덕을 연구하는 영성신학의 학문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덕신학은 다른 신학과 마찬가지로 성서와 성전(Sancta Traditio)을 학문 원칙으로 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D.알바레스와 A.로드리게스가 대표적인 수덕신학자이다.

5. 성서적 근거[편집]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복음서 1장 14절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제 1장 1-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서간 제 1장 3-4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코린토 1서 13장 12절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코린토 2서 3장 18절
[1] 사실 필로칼리아만 읽어도 충분하긴 하다
[2]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