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7

Venerable Yongsu(Ngawang Ludrup) Sunim - 국제포교사회 International Dharma Instructors Association

제 92차 월례법회(MDT 92) 공지 - 법회부 / MDT - 국제포교사회 International Dharma Instructors Association

▪ Dharma Teacher: Venerable Yongsu(Ngawang Ludrup) Sunim
▪ Topic: Living by our True Nature

▪ Abstract:

Practice is about learning to live by our true nature. This means to live by our heart not our head.

Our head is full of thoughts which are deceptive, negative, self-centered, and delusional.

Meditation is to become free from such thoughts and get used to our true nature, which is pure awareness.

This awareness is endowed with wisdom and compassion. It is infinitely peaceful, powerful, loving and wise.

We have to learn how to abide in our true nature and live by our true nature. If we can do so, our lives will

become so rich, joyful, carefree, and meaning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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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ography:

- Venerable Yongsoo Sunim was born in Korea and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at the age of nine in 1978.
- Sunim completed undergraduate courses in the Department of
Jounalism and Broadcasting at the University of Utah in 1997.
- In America, Sunim met His Holiness the Dalai Lama in his home
state of Utah.

- Thereafter, Sunim studied Buddhism intensively and in 2001 became
a Buddhist monk in the Nyingma tradition of Tibetan Buddhism.
- Following, Sunim did a four-year intensive meditation retreat in France.
Now he teaches Tibetan buddhist meditation in Korea.






- Sunim has also brought many great Tibetan teachers to Korea including his holiness Sakya Trizin.
- Sunim gave lectur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Wonkwang University, Seoul University of Buddhism, Buddhist Broadcasting System and so on.



법회부 / MDT앱으로보기


제 92차 월례법회(MDT 92) 공지작성자대성 이홍열 22기|작성시간19.07.10|조회수163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제92차 월례법회(MDT) 공지











일시: 2019년 7월 20(토) 오후 4:00~6:00

장소: 전법회관 지하 선운당



초청 법사: Yongsu(Ngawang Ludrup) Sunim(용수스님)

법문 제목: Living by our True Nature



7월 월례법회에 용수스님(Shechen Korea, 세첸명상센터)을 모셨습니다.

이번 법회는 영어로 진행되니 두루 참석하시어 좋은 법문을 함께 듣고 나누었으면 합니다.



월례법회 참석은 국제포교사로서의 자긍심을 제고하고, 소속감을 드높이는 지름길입니다.

국제포교사님들의 많은 참석을 바라며, 주변의 관심 있는 분들께 홍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법회부장

대성 이홍열 합장










* 자세한 내용은 아래 안내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Invitation to the




92nd MONTHLY DHARMA TALK






▪ Date & Time: Saturday, 20 July 2019, 16:00–18:00




▪ Venue: 전법회관 지하1층 선운당 (Jeonbeobhoegwan B1 , directions below)




▪Dharma Teacher: Venerable Yongsu(Ngawang Ludrup) Sunim




(Abbot of Shechen Meditation Center, Korea)




▪ Topic: Living by our True Nature




▪ Language: English




The International Dharma Instructors Association (IDIA) is a non-profit organization under the support and

supervision of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대한불교조계종). Our mission is to help people find

inner peace and true happiness by sharing Buddha’s teachings. MONTHLY DHARMA TALKS are given by

eminent Seon(Zen) masters and venerable Buddhist Sunims. Anyone interested in Buddhism is welcome

to join!















프레시안 김지하를 추도하며 [1-11]

관점    김지하를 추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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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김지하를 추도하며]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김지하를 추도하며]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김지하를 추도하며]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김지하를 추도하며] 6

황석영 소설가  |  기사입력 2022.06.22.

이제 우리 나이 팔십이 되었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주위의 경조사에 참례하지 않게 되었다. 수년 동안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글 쓰며 은거했고, 칠십대 중반쯤에 부모님 유해를 납골당에 모시고 제사도 폐하면서 저절로 남의 장례식장에도 발길을 끊게 되어버렸다. 옛사람들도 늙은이가 되면 인편으로 부조나 보내면서 바람결에 지인들을 떠나보내던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다. 눕고 싶구나.

석가모니의 마지막 장면이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 마셨던 우유 한 잔과 죽음의 원인이었던 버섯 몇 개는 똑같은 타인의 공양물이었다.

죽음은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저 모퉁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청년 김영일을 만난 것은 그의 외삼촌 정일성이며 조동일 등이 연출을 하고 나의 고교 동창 친구들 몇이 배우가 되어 연극을 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유진 오닐의 연극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결핵성 미열을 가진 문예반 청년이었다. 나는 남도를 떠돌다 베트남 전쟁을 거쳐 다시 글쓰기로 돌아왔고, 그는 조태일이 꾸려가던 시인지를 거쳐 김지하 시인이 되어 있었다. 시대는 마침 박정희의 유신시대였고 우리는 한없이 목마르고 거칠었다. 이용악, 백석이 그랬듯이 김지하는 모던에서 토박이로 차림새를 갖춘다. 이는 이미 우리가 60년대에 6.3 투쟁을 통과하며 습득한 문화체험의 결과이기도 했다. '오적'과 '비어'를 거치며 그는 수년간 우리 곁을 떠나있게 된다. 도피 시절 간간히 만나면서 그는 나에게 후배들과 더불어 현장문화운동을 이끌어 줄 것을 당부했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가 김수영을 비판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김수영의 일상을 간과했던 탓이다. 김수영의 일상은 소시민적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살아 돌아온 자'의 치열한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누군들 일상을 견디는 장사가 있으랴. 

팔십년 광주를 거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그는 석방되었고, 감호처분자의 신세로 바깥 세상에 던져졌다. 김지하는 사상가로 성장하여 돌아왔으나 일상을 여전히 간과했던 듯하다. 이는 지식인들의 일종의 투옥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그의 생명사상이나 수운 해월의 가르침들은 김지하의 때와 장소에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김지하는 김영일의 무거운 짐이었다. 시인은 누구나 자기 시대와 불화할 권리가 있으나 또한 그 불운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호통을 치고 나서 분노한 민심의 표적이 되었을 무렵에 나는 마침 평양에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의 연이은 자살투쟁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북의 소설가 홍석중은 그 소식을 보며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말의 뜻은 옳지만, 차라리 침묵하느니만 못하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홍석중이 말했다. 

"김지하니까." 

김지하는 투옥되어 있던 나에게 면회도 왔고,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일산에 살고 있었다. 만날 적마다 그는 뭔가 스스로를 해설하려고 애썼다. 그의 담론은 어느 부분 번쩍였지만 늘 비약의 연속이었다. 미디어와 출판사들은 뭔가 얻어가려고 끊임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말이 미끄러진다고 했던가. 그의 말과 현실은 그래서 어긋나고는 했다.

"시시데기는 령 넘어가고 새침데기는 골로 빠진다." 

라는 옛말이 있지만 그의 외로움은 깊어갔다. 그의 비약적인 담론을 참을 수가 없다고 누군가 불평하면, 시인 최민은 간단하게 타일렀다. 

"그냥 진지하게 들어주면 되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잠자코 들어주면 김지하의 격앙된 정서는 가라앉았다. 

어느 무렵부터인가 그의 잠적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 김영주에게서 내게 급박한 전화가 왔다. 그가 열흘 이상 연락이 없어 어디 갔는지 못 찾겠다고 했다. 사방에 수소문하여 그가 백양사에 있다고 알려주면서야 그가 행려자처럼 이곳저곳 떠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래 전에 그는 심한 환각증에 시달린 뒤에 치료를 받고 술을 끊었다. 물론 그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냥 허전해서 떠돌았을 것이다. 

어느 해 대선 시기에 박근혜에서 비롯된 풍파 역시 그 나름대로의 해원의 뜻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매체들이나 또는 강연회장의 청중들은 내게 김지하를 어찌 생각하는가 벼르듯이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김지하는 아픈 사람이라고, 그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말하곤 했다. 

스승이 젊은 소리꾼에게 물었다. 

"소리도 좋고 기량도 좋고 재간도 뛰어난데 그것만 좋은 놈을 머라고 하는지 아냐?" 

"그것만 좋다뇨?" 

"소리든 머든 다 사람이 하는 거 아녀?" 

하고 나서 스승은 말했다. 

"소리에 그늘이 있어야 한다고. 그늘이 없는 재간꾼을 노랑목이라구 그러지." 

"그늘이 무엇인데요?" 

"그게 살아가면서 아프게 곡절을 겪다보면 생기는 거지." 

스승이 막걸리 한 잔을 주욱 들이키고 나서 다시 말했다. 

"헌데 그늘이 너무 짙어지고 바닥까지 갈아 앉으면 소리가 넘어갔다구 그런다. 소리가 넘어가 버리면 쓰잘데기 없는 소리가 되어버려. 할 필요두 없구 들을 필요두 없는 소리가 되지."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흰 그늘이 되어야 쓰지." 

"흰 그늘이란 무엇인가요?" 

"그건 그믐밤에 널린 흰 빨래 같은 것이니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달도 없는 그믐밤에 흰 이불 홑청이 널려 있다.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그것은 어둠 속에서 희부연 하게만 느껴질 정도일 것이다. 누군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겨워 몇 날 몇 밤을 실컷 울고 나서 피시식 하고 저절로 나오는 희미한 웃음 같은 것. 그리고 그 웃음의 시초는 차츰 서슴지 않게 되고, 까짓 거 다시 살아내자 하는 신명을 타고 일상으로 자신을 끌어내어 줄 것이다." 

"흰 그늘이 소리의 끝인가요?" 

젊은 소리꾼이 물었더니 스승은 머리를 흔들었다. 

"더 있지. 남을 여, 소리 향, 여향이라는 게 있다네." 

"여향은 또 어떤 것입니까? 

"먼 산사에서 범종을 칠 때 마지막으로 당목을 때리고 나서 그치면 뎅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잔음이 길게 여운을 끌며 퍼져 나간다. 데에에엥 하며 소리의 여운은 길게 아주 천천히 사라져 간다. 그리고 어느 결에 사방은 고요한 정적에 이른다. 그 고요한 정적이 여향이니라." 

소리꾼은 모든 소리가 그친 정적이 어째서 소리의 최고 경지가 되는가를 묻지 못했다. 스승도 여향이 무엇인지 똑똑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은 아주 조금씩만 나아져 간다. 그래서 세월이 답답하고, 지난 자취는 흔적도 없이 잊혀 가고, 먼지 같은 개인은 늙고 시들고 사라져 간다. 

우리가 김지하를 그냥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기억을 더듬는 것은 아직도 시절이 마뜩치 않고 남은 안타까움이 많아서다.

이것이 남루하지만 숙연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정동칼럼] 존엄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결정 - 경향신문

[정동칼럼] 존엄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결정 - 경향신문

정동칼럼
존엄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결정
입력 : 2022.06.23 03:00 수정 : 2022.06.23 03:03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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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2월에 말기암 선고를 받고 11월에 돌아가셨다. 그사이에 제일 크고 ‘잘 본다’는 병원 세 군데에서 진단과 항암치료를 받았고, 고향의 한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다.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첫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는 여명이 6개월 정도라 했지만, 60대 중반의 나이였고 진단을 받기 전에는 건강한 편이었기에 환자 본인도 가족들도 ‘최선’을 찾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치료의 방향이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에 대처하는 일은 매일 혼란일 수밖에 없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처음에는 환자 본인에게 암 진단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리고 친지들로부터 온갖 묘방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 용하다는 소개에 솔깃해서, ‘카드 결제는 절대 안 된다’는 당찬(?) 선언과 함께 진료를 시작하는 서울 종로구의 모 한의원에서 폐 전이에 좋다는 약을 지은 일도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이때는 2004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법)도 없었다. 호스피스 병원이 뭔지도 잘 몰랐다. 뭔가 상당히 ‘미개’했지 않은가? 그때에 비하면 한국사회의 ‘죽음의 질’은 많이 나아졌을까?

장인은 뇌졸중 발병 후 10년쯤 투병하다 요양원을 거쳐 요양병원에서 2018년에 돌아가셨다. 면회 가서 본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풍경을 잊기 어렵다. 특히 경기도 신도시의 대형빌딩 10층의 크고 환한 병실에 중증뇌질환 또는 뇌수술 후 연명치료를 받는 환자들 수십명이 고요히 줄지어 누워 있던 모습과, 중·고생들 다니는 학원, 카페와 식당, 손톱·피부 미용업체 등등이 함께 입주해 있는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통해 시신이 옮겨지던 모습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었다. 욕망과 생존경쟁의 전장에서 죽어라 뛰다, 결국 쓰러져 억지로 사는 (또는 죽는) 육신들이 병치된 광경은, ‘도시 지옥도’로서는 부족한 데가 없었다.

한국은 ‘제3세계’의 부자들뿐 아니라 버젓하게 잘 사는 외국 교포들도 ‘의료 쇼핑’을 오는 의료 선진국이며 세계 최장수 국가다. 그러나 속내는 공허하고 비통하다. 한국사람들의 상당수는 길고(고용불안과 빠른 퇴직), 외롭고(1인 가구의 급증), 아픈(건강수명과 기대수명의 차이) 노년을 겪다가 쓸쓸하고 비인간적인 죽음을 맞는다.

요즘은 부고를 들으면 고인의 마지막 날들이 궁금하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투병하다 누구 앞에서 숨을 거뒀는지. 혈액 투석이나 기관지 절제는 하셨는지. 유서나 유언을 어떻게 남기셨으며, 연명의료 여부를 (가족들이) 어떻게 결정했는지. 이는 한 인간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또 이 사회가 어떤 덴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물론 한국에서 그것은 ‘돈’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치열한 경험과 지식의 공유와 토론이 필요한 일 아닌가.

와중에 노년자살, 고독사, 간병살인 같은 극단적 비극도 계속 벌어진다. 출생률이나 자살률과 비슷하게, 한국사회와 국가는 문제를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기득권과 일부 종교세력의 힘에 맥없이 진다. K연명치료와 돌봄체계의 수준은 젠더, 노동, 이주의 현실을 여실히 반영한다. 이 문제에서도 우리 중산층은 가련한 헛똑똑이다.

‘시설’에 갇혀 손발이 묶이고, 콧줄 소변줄 달고, 수백 수천만원을 쓰며 ‘벽에 ○칠하도록’ 명줄을 늘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길게 산 진지한 노인들은 누구나 ‘자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 한다. 이 소망은 애처롭고 절실하다. 그러나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 인간은 죽음을 조절할 수도, 연습할 수도 없다. ‘자다가 죽고 싶다’는 소망은 내 목숨을, 초라한 현행 연명의료법과 가진 돈의 액수에 따라 맡기고 수동적으로 요행을 바란다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조력존엄사법’을 발의했다. 상당히 진일보한 내용을 담은 법이며, 근래 급격히 변한 존엄사와 웰다잉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와 의사들은 존엄사법이 시기상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돌봄 체계와 죽음문화의 수준이 엉망진창인데 존엄사법부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다. 예컨대, 임종과정과 연명의술에 대한 가장 온건한 형태의 자발적 의사 표시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기도 매우 어렵게 돼 있다. 필자가 사는 서울 은평구 인구는 약 48만명인데, 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기관은 딱 세 곳이다. 직접 가서 해야 한다.



그러니까 돌봄체계의 재구축과 연명의료법 개정은 상보적이며, 둘 다 시급해보인다.

조력존엄사법연명의료법 개정돌봄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