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9

알라딘: 맑스를 읽자 2010 부커진 R 시리즈 3

알라딘: 맑스를 읽자


맑스를 읽자 - No.3, 2010 | 부커진 R 시리즈 3
이진경,고병권,박정수,오선민,윤여일,정정훈,김우자,신지영,박채은,조정환,오하나,현민 (지은이)그린비201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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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책소개
2007년 발간된 1호 이후로 꾸준히 소수성을 이야기하며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내온 <부커진 R>의 이번호 주제는 다름 아닌 ‘맑스’다.

맑스에 대한 독해, 맑스를 통한 현재의 독해와 더불어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 인터뷰나 이진경의 백남준론, 일본의 코뮤니스트 시인 다니가와 간의 글을 통해 

코뮨주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예술과 정치> 파트,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한 병역거부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병역거부 소견서와 용산사태 이후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에세이까지 <부커진 R> 3호는 기본 논지나 논조가 조금씩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공통된 것의 생산, 코뮨적 관계의 구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목차


편집인의 말 04

[특집: 맑스를 읽자]
칼 맑스 -혁명적 삶의 어떤 유형_ 고병권
우리 시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물음_ 고병권
맑스의 코뮨주의적 인간학 -『경제학 철학 초고』를 중심으로_ 박정수
민주주의와 공안통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맑스의 민주주의론_ 정정훈
절대지대에서 절대민주주의로-공통되기의 존재론을 위하여_ 조정환


[예술과 정치]
백남준: 퍼포먼스의 정치학과 기계주의적 존재론_ 이진경
해체와 정치_ 우카이 사토시 | 이진경 옮김
‘정치의 원점’으로서의 텐트 - 사쿠라이 다이조 씨 인터뷰
다니가와 간-이족들의 마을, 그 원점의 에너지_ 다니가와 간 | 신지영 옮김

[에세이]
다음 세대를 위한 병역거부 길라잡이- 현민의 병역거부 소견서_ 현민
용산, 폐허의 땅에서 희망을 만든 사람들_ 박채은

『부커진 R』 3호 필진소개


책속에서


“나는 잠정적이지만 맑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혁명가의 한 유형을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다. 그것은 귀족적이고, 공공연하며, 무자비하고, 소속 없는, 그리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그래서 희망적인 삶이다. 맑스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혁명가는 복종과 예속, 한마디로 노예적인 것을 거부하며, 미래에 대해서 오직 공공연하게 선포된 음모만을 ... 더보기
“화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국가라는 이념 공동체는 개별성을 인륜적 보편성으로 매개하는 소외된 삶의 형식이다. 맑스가 말한 인간의 유적 본질은 그러한 추상적 매개를 통한 보편성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적 공통성에 의해 실현되는 감성적 특이성의 앙상블이다. 그것은 어떤 보편적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감성 능력이 직접적... 더보기
“이처럼 존재의 평등성을 수립하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백남준은 기계와 인간, 기계와 생명을 가르는 깊은 심연을 넘어서 ‘기계주의적’ 일관성의 평면에 도달한다. 이는 TV나 비디오를 이용한 이후의 작업들과 초기의 퍼포먼스를 이어 주는 어떤 공통의 철학적 지반이었다. 또 그것은 백남준의 비디오 작업이 통상적인 관념과 매우 다른 존재...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진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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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 연구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인문사회교양학부 교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쓴 책들이 《맑스주의와 근대성》《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수학의 몽상》《철학의 모험》《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등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새로운 혁명의 꿈속에서 니체,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사유하며 《노마디즘》《자본을 넘어선 자본》《미-래의 맑스주의》《외부, 사유의 정치학》《역사의 공간》《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등을 썼다. 《코뮨주의》《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삶을 위한 철학수업》《파격의 고전》 등을 쓰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바닥없는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이진경 장병탁 선을 넘는 인공지능>,<불교를 철학하다>,<바깥의 문학> … 총 96종 (모두보기)
SNS : //twitter.com/solaris00

고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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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 ‘읽기’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읽기의집’에서 일명 ‘고집사’로 살림하며 지내고 있다. 주로 국가, 자본, 인간의 한계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1991년 마르크스의 《자본》을 처음 읽었고, 그 후 여러 번 다시 읽었으며, 다양한 공부 모임에서 《자본》 읽기 강의를 진행한 바 있다. 2016년 어느 공부 모임에서 열두 번에 걸쳐 이뤄진 《자본》 강의가 이 책의 뿌리가 되었다.
니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담은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삶과 철학의 관계를 고민한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살아가겠다”》, 《철학자와 하녀》, 《묵묵》, 대의제와 민주주의, 정치참여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다양한 책을 썼다. 접기

최근작 : <문화과학 115호 - 2023.가을>,<너머학교 열린교실 1~20 세트 - 전20권>,<뉴래디컬리뷰 2022.겨울> … 총 75종 (모두보기)

박정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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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하며 프로이트, 푸코, 들뢰즈를 즐겨 읽었다. 지적인 성과보다 요리, 농사, 가드닝에서 뚜렷한 소질을 보였으며, 그래피티나 현장인문학을 통해 활동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동안 쓴 저서로는 《현대 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 《매이데이》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How To Read 라캉》,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등이 있다.
2015년 수유너머 연구자 생활을 마감한 후 ‘장판’(장애운동판)으로 들어왔다. 2016년부터 인터넷 언론사 ‘비마이너’ 기자로 활동했고, 2017년 ‘노들장애학궁리소’ 창립 후 장애학 연구 활동가로 지내고 있다. 또한, ‘노들장애인야학’의 철학 교사, 노들야학 백일장 심사위원,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심사위원,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활동감사 위원으로 활동했다.
최근 관심사는 ‘장판’에서 ‘그리스 비극’ 읽기다. 노들야학 철학 수업 때 두 학기 동안 그리스 비극을 강독했다. 〈오이디푸스 왕〉을 강독할 때, 다리 개수로 ‘인간’을 정의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평생 두 다리로 걸어본 적 없는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생각이 많아졌다. ‘비극’에 담긴 디오니소스적 운명애가 장애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몇 번 더 수업하면서 탐구해볼 생각이다.
생계활동으로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현대문화론’ 강의를 하고 있으며, 아내에게 임금을 받으며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최근 ‘안양’으로 이사 와서 생애 처음 경기도 주민으로 지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장판’에서 푸코 읽기>,<매이데이>,<쉽게 읽는 꿈의 해석> … 총 20종 (모두보기)

오선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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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자. ‘인문공간 세종’ 연구원. 대학원에서는 한국근대문학을 전공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며 위대한 작가가 되려고 했으나 실패!^^ 모든 글은 시도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이치 하나를 얻고 근대문학의 산에서 하산했다. 그때부터 어딘가에 있을 훌륭한 진리를 찾아다니는 대신 발밑의 작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인문공간 세종’에서 만난 친구들과 동화, 전설, 민담 등 옛이야기를 읽으며 밥하고 청소하기의 인류학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책(『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과 카프카에 대한 책 두 권(『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 카프카를 읽는 6개의 키워드』와 『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을 냈으며, 『그림 동화』를 인류학적 시선으로 읽은 책(『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 『그림 동화』의 인류학』)을 시작으로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을 펴내는 등 ‘인류학’을 모험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신화의 식탁 위로>,<[큰글자책] 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 총 18종 (모두보기)

윤여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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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교토에서 체류했다.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물음을 위한 물음』,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전3권)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으며,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전2권),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다케우치 요시미―어느 방법의 전기』, 『루쉰 잡기』, 『사상이 살아가는 법』, 『일본 이데올로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의 틈새에서』, 『사상으로서의 3·11』,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을 옮겼다. 지키는 연구를 하고 싶다. 접기

최근작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경계’에서 본 재난의 경험>,<공동자원의 영역들> … 총 44종 (모두보기)

정정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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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인문사회연구실》연구원이자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인권과 인권들』(2014), 『군주론―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2011),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공저, 2016) 등 다수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장애여성운동, 교차하는 억압에 저항하는 횡단의 정치 : 장애여성공감 20주년 선언문《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에 대한 교차성 페미니즘적 독해」(『인권연구』),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과 인권규범으로서 정치적 주체화」(『민주법학』), 「감금의 질서, 수용시설의 권력기술―형제복지원과 인권의 재맥락화」(『도시인문학연구』)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문화과학 115호 - 2023.가을>,<인권의 전선들>,<문화과학 110호 - 2022.여름> … 총 17종 (모두보기)

김우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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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3세. 전공분야는 사회학이며, 식민주의, 젠더 연구, 소수자 연구이고 한국의 국민/민족주의와 재외 '동포'를 둘러싼 문제에 관심이 있다. 『異鄕の身?-テレサ·ハッキョン·チャをめぐって』(人文書院、2006), 『?きながら問う―?究空間「スユ+ノモ」の??』(インパクト出版?, 2008)을 썼고, 『폭력의 예감』을 공역했다.

최근작 : <맑스를 읽자> … 총 3종 (모두보기)

신지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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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부교수. 한국·동아시아 마이너리티 코뮌의 형성·변화를 1945년 전후 기록/문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면서, 현재의 난민·장애·비인간 존재의 곁/뒤에 설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꾼다. 저서로는 『不부/在재의 시대』(2012), 『마이너리티 코뮌』(2016), 『난민, 난민화되는 삶』(2020, 공저), Pandemic Solidarity (2020, 공저), 『動物のまなざしのもとで』(2022, 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난민, 난민화되는 삶>,<모빌리티 시대 기술과 인간의 공진화>,<마이너리티 코뮌> … 총 12종 (모두보기)

박채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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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 of the voiceless" 목소리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미디어운동을 하고 있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풀뿌리미디어, 공동체미디어에 대한 연구와 네트워크 일을 해오다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촛불방송국 레아 활동을 했다. 마을마다 공동체미디어가 활발해지는 시점을 상상하며 운동하고 있다.

최근작 : <맑스를 읽자>

조정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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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을 연구했고, 1980년대 초부터 <민중미학연구회>와 그 후신인 <문학예술연구소>에서 민중미학을 공부했다. 1986년부터 호서대, 중앙대, 성공회대, 연세대 등에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와 탈근대사회이론을 강의했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월간 『노동해방문학』 주간을 거쳐 현재 다중지성의 정원[http://daziwon.com] 대표 겸 상임강사,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비판』(연구사, 1989), 『노동해방문학의 논리』(노동문학사, 1990), 『... 더보기

최근작 : <뉴래디컬리뷰 2021.겨울>,<개념무기들>,<까판의 문법> … 총 56종 (모두보기)

오하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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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N>에서 공부하며 통역과 번역을 하고 있다. 사카이 다카시(酒井隆史)의 『자유론』을 번역했다.


최근작 : <휘말림의 정치학>,<맑스를 읽자> … 총 3종 (모두보기)

현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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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와 동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수유너머’의 일원으로 보냈다.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나를 위해 공부하라』,『우정은 세상을 돌며 춤춘다』 등을 함께 썼고 『남성성/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작 : <감옥의 몽상>,<맑스를 읽자>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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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거대한 낯섦>,<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게으르게 읽는 제로베이스 철학>등 총 643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2위 (브랜드 지수 183,800점), 여성학/젠더 11위 (브랜드 지수 33,035점), 고전 22위 (브랜드 지수 157,304점)





후생가외(後生可畏)

후생가외(後生可畏), 그 너머

by조우성 변호사Nov 20. 2015


후배들이 뛰어난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흔히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자기보다 먼저 태어나서 지식과 덕망이 나중에 태어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선생(先生)이고,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 즉 후배에 해당하는 사람이 후생(後生)입니다.

그런데 이 후생은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것인데, 이 말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옵니다.

(공자가 후생가외라고 한 것은 그의 제자 중 특히 재주와 덕을 갖추고 학문이 뛰어난 안회(顔回)의 훌륭함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청출어람(青出於藍)

청출어람 (r366 판)

푸를 청
날 출
어조사 어
쪽 람

1. 개요2. 예시
2.1. 원래 예시
2.1.1. 현실에서의 사례2.1.2. 가상에서의 사례
2.2. 반대 또는 반어적 예시
2.2.1. 현실에서의 사례2.2.2. 가상에서의 사례
3. 정도에도 사도에도 해당되는 경우4박찬욱박찬경 감독의 단편 영화

1. 개요[편집]

푸른색 염료는 [1]에서 얻지만 쪽보다 푸르다는 의미. 원 문장은 《순자(荀子)》 권학(勸學)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청취지어람이청어람(靑取之於藍而靑於藍)'[2]이지만 사자성어에 맞게 축약, 변조되었다. 더 줄여서 출람(出藍)이라고 하기도 한다.

비슷한 말로 얼음은 물에서 나오지만 물보다 차다는 말(氷水爲之而寒於水(빙수위지이한어수))도 있다.[3]

이 말의 원래의 의미는 부지런히 노력하면 원래의 본성보다 훨씬 뛰어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착한 본성을 지켜나가라는 맹자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본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경우를 비유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원작초월도 이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명불허전과 마찬가지로 반어적인 의미에서 청출어람이라고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자로만 남으면,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Man vergilt einem Lehrer schlecht, wenn man immer nur der Schüler bleibt)(의역: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스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또한 청출어람과 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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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青出於藍)
청출어람(青出於藍)
소요유 : 2015. 11. 13. 19:37


청출어람(青出於藍)



이 말은 흔히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날 때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이런 의문을 일으켜본다.



선진양한(先秦兩漢)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때,

이와 유사한 문장이 등장하는 예는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을 들 수 있다.


君子曰:學不可以已。青、取之於藍,而青於藍;冰、水為之,而寒於水。木直中繩,輮以為輪,其曲中規,雖有槁暴,不復挺者,輮使之然也。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智明而行無過矣。



군자 왈,

배움을 그칠 수 없다. 

푸른 물감은 쪽에서 취하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

얼음은 물에서 이뤄지지만 물보다 더 차다.

나무가 곧아서 먹줄과 맞아도, 

구부려 수레바퀴 테를 만들면,

그 구부러진 곡률이 컴퍼스(compass)로 그린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비록 햇빛에 다시 말린다한들, 곧게 펼 수 없음은,

이미 구부려졌기 때문이다.

고로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와진다.

군자는 배움을 널리 미치게 하고, 날마다 자기반성을 해야,

지혜가 밝아지고 행실에 허물이 없어진다.



여기 而青於藍이란 것이,

오늘날처럼 제자가 스승보다 더 특출하다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저 글에 보이는 여러 비유는,

배움으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이끌어진 것이다.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더욱 이 뜻을 확고히 하고 있다.



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干、越、夷、貉之子,生而同聲,長而異俗,教使之然也。 



고로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의 높음을 알 수 없고,

깊은 골짜기에 임하지 않으면 땅의 두터움을 알지 못한다.

선왕의 남기신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학문의 대단함을 알지 못한다.

간, 월, 이, 맥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는 같은 소리를 내지만,

자라면서 풍속이 달라지는 것은,

가르침이 그러하게 한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지만,

교육으로써 이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함이니 애초, 

而青於藍이라는 것이,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의는,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선천적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한즉 공부가 깊어지면 혹간 스승을 앞지를 수도 있기는 하겠다.

하지만 스승을 앞지르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작은 자기 자신의 성숙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일(李謐)과 공번(孔璠)은 청출어람을 두고 말할 때,

흔히 인용되는 사제지간의 이야기다.

차제에 이를 좀 더 새겨보자.



李謐,字永和。初師事小學博士孔璠。數年之後,璠還就謐請業。同門生為之語曰 青成藍,藍謝青,師何常,在明經。 (太平御覽)



이일은 자(字)가 영화이다.

처음 선생으로 소학박사 공번을 섬겼다.

수년이 지나자 공번이 외려 이일에게 물었다.

(※ 請業 : 스승으로 모신다는 뜻이 있음.)

동문생이 이를 두고 말하다.



‘청(青)이 남(藍)이 되니, 남(藍)이 청(青)에게 감사하다.

(※ 여기서 청은 제자, 남은 스승 또는 각기 그 성취의 수준을 가리킴.)

선생이 어디 하나로 상시 고정된 것이랴?

다만 경전의 도리를 밝히는데 있음이니.’



이 글을 대할 때,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는 사실에 한눈을 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무엇이든 자기의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데,

집중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青出於藍而青於藍。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



여기서 青出於藍보다 而青於藍에 집중하면,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는 자극적 사건에 빠져버릴 우려가 있다.

학문한다는 것이 연예활동이 아닌 한,

선정적(煽情的)인 일에 마음을 빼앗기며, 

입을 벌리고 놀랄 일은 아니다.



하니까,

而青於藍에 빠지면,

青出於藍이란 본질을 잊게 된다.

青出於藍이란 곧 스승을 구하고, 학문을 갈고 닦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 而青於藍, 스승을 앞지르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허나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공부가 진전되고, 학문이 깊어진다는데 그 의의가 있을 뿐이다.



是故古之聖王未有不尊師者也。尊師則不論其貴賤貧富矣。

(呂氏春秋)



그런고로 옛 성왕치고 스승을 존숭하지 않은 경우는 아직 없다.

스승을 존숭함엔 그 귀천이나 빈부를 따지지 않았다.



知不足者好學,恥下問者自滿。



앎이 적다고 느끼는 자는 배움을 좋아한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자만한 이다.



이제 청출어람의 뜻새김에 있어,

다만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는 것보다는,

순자의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으리란 생각이다.

이에 그 부분을 다시금 음미해본다.



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智明而行無過矣。



고로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와진다.

군자는 배움을 널리 미치게 하고, 날마다 자기반성을 해야,

지혜가 밝아지고 행실에 허물이 없어진다.



學者必求師,從師不可不謹也。



학자는 반드시 스승을 구해야 한다.
스승을 섬김에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이 갖춘 지식과 경험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고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도도처처 이르는 곳마다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러함인데 예전 제자에게 배움을 구한다한들,

그게 어찌 부끄러운 노릇이겠음인가?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고 놀라기에 앞서,

내 공부가 과연 얼마큼 철저한가 점검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다.

18세기 조선 성리학, 여성 주체를 일깨우다-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이은선 2022 주간기독교

<한국信연구소 오늘, 22.07.01(금)>
-한국페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13-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드디어 18세기 임윤지당에게 왔습니다. 임윤지당과 더불어 다음 편 강정일당의 삶과 사유를 해석하면서 저는 '사유하는 집사람'이라는 언어를 썼고, 특히 이들 여성의 삶을 통해서 조선 성리학의 도학적 정신과 그 성속일여적 종교성이 지극한 수준에서 체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얼마전 한국 헤겔학회에서 오구라 기조 교수의 저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사>에 대한 이해가 다루어졌는데(이종철 교수), 저는 그 논평자로서, 오구라 기조교수가 놓친 조선 유교 종교성과 영성의 진면목은 그 도덕적 理추구가 명예와 돈과 함께 가는 상승적 理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겸비와 자기하강, 자기비움의 그것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도학의 진정한 理지향성이고, 하학이상달적 유교 종교성이며, 18세기 조선여성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도 고유하게, 아니 더 진실된 모습으로 체현되어 왔다고 밝혔습니다.

매우 예민한 해석이고, 특히 오늘 서구 페미니즘 시각에서 볼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 서구적 시각과 한국 유교 영성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저의 오랜 시도 속에서 오늘 21세기 모두에게, 여남의 구분을 떠나서 긴요한 '집의 회복'과 '사유와 삶의 하나됨'의 예시가 저는 조선 성리학 여성들의 삶에서 18세기 이후로 가능해지는 과정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 중층적이고 예민한 물음이 두 편의 짧은 글에 잘 나타났는지 여러분들의 일독과 질정을 기다립니다.


[오구라 기조 인터뷰]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2014

[오늘의 세상]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오늘의 세상]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韓·日관계 전문가' 오구라 기조 교토大 교수 인터뷰]

-韓·中 잘나가자 '아시아와 결별'
타자를 포용하려는 힘 없어져
기세 드센 이들과 엮이지 말고 우리끼리 잘살자는 심리 팽배

-혐한엔 '日헤게모니 비판' 포함
韓·日우호 내세운 아사히 등 좌편향·중도 논리가 힘 잃자
혐한파, 日 주도권 바꾸려 해

-日 바꿀 힘은 한국에 있다
'韓·日화합의 노력' 인정 않고 한국인들이 日비판만 한다면 아베정권에 에너지 공급하는 것
최원석 기자
입력 2014.11.25.

"한국에서는 재특회(在特会·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모임)로 대표되는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증오 발언) 세력과 혐한파(嫌韓派)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엄연히 다릅니다. 헤이트스피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통 일본인들 사이에서 혐한파가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오구라 기조(小倉紀 ·55) 교토(京都)대 종합인간학부 교수는 24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재특회 중심의 헤이트스피치 세력은 언행이 저급하고 과격해 이들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거의 없고 한·일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제한적"이라면서도 "일본에 일반인 혐한파가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국도 객관적 시각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서울대 일본연구소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23일 한국을 찾았다.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24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구라 교수는“1980년대와 비교하면 지금의 일본은 심리적으로 좁아지고 타자(他者)에 대한 포용력도 줄었다”며“여유가 줄고 고독감이 일본 사회를 지배하면서 혐한(嫌韓) 정서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혐한파의 주장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면 '한국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50년간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어 왔는데, 일본인 시각에서 보면 '일본과 더 이상 사귀지 말자'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을 배척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중국 쏠림 현상을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본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매력이 많은 중국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일본이 지금까지 한국과 우호적으로 지내온 오랜 과정이 있는데, 어떻게 한국이 중국 쪽으로만 가버리느냐는 서운한 마음이 일본인들에게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혐한 감정을 더 부추긴다."

―계속 확산되고 있나?

"자신을 혐한파라 부르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혐한파로 분류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꽤 많아졌다."

―왜 늘어나나?

"일본 사회가 심리적으로 좁아지고 있다. 타자(他者)를 포용하려는 힘이 줄어들고 있다. 1980년대 일본과 비교하면 지금의 일본은 완전히 달라졌다. 총체적인 자신감 상실, 고독감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혐한파는 동아시아를 사절(謝絶)하고 싶어 한다. 과거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일본이 19세기 중·후반 근대적 통일국가를 형성해나간 과정) 당시의 대표적 정치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아시아와 결별하겠다는 '탈아(脫亞)론'을 내세웠을 때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한국이 앞서가니까 '기세 드센 이들과 엮이지 말고 우리끼리 조용히 살자'는 심리다. 메이지유신 때와 정반대인 '역(逆)후쿠자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도 혐한 현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나?

"아베 정권의 경우는 혐한파와 또 다르다. 혐한파는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는 순진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성향이 달라질 수 있지만,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 하는 확신범에 가깝다."

―한국에서는 혐일 서적이 눈에 안 띄는데, 일본에서는 왜 그렇게 혐한 서적이 잘 팔릴까.

"한국인들의 경우 일본에 대한 정보가 축적돼 있다. 일본 역시 최근 10년간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지만, 보통의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아직 낯설다. 한류가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고, 한국을 제대로 알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일 우호를 주장했던 친한(親韓) 일본인들이 그렸던 모습과 다르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에 대한 존재를 부각시킨 것이 2005년부터 본격화된 혐한파들이었다."

―한류의 반동(反動)인가?

"한국의 좋은 면, 안 좋은 면을 두루 접하면서 종합적인 정보를 흡수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혐한 서적이 거의 모두 비슷한 내용에 수준도 낮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곧 다음 단계의 한국을 보는 과정으로 넘어갈 것이다. 내가 한국에 유학했을 당시인 1990년대 한국에서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왔다. 기성세대로부터 지금까지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말만 들었는데, 직접 접해보니 '그런 일본은 없더라'는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혐한 서적들은 기존의 친한파 일본인들이 말했던 한국은 '실제 접해보니 없더라'는 식의 내용을 좀 더 수준 낮고 과격한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혐한 현상의 다른 성격은 없는가.

"혐한 현상은 한국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전후(戰後) 일본의 헤게모니(주도권·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일본의 혐한은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혐한파들은 전후 일본의 언론·학계 등이 전부 좌편향 혹은 중도에 치우쳐 있다고 본다. 매스컴의 경우 아사히(朝日)신문을 대표로 하는 한·일 우호 주장 세력이 지금까지 주도권을 잡아왔고, 한국을 연구하는 학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조선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라고 하는 식의 풍조가 지배해 왔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아사히로 대표되는 좌파 논리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 혐한파의 주된 목표 중 하나다. 최근 '아사히 배싱(때리기)'은 단순히 아사히의 위안부 강제 동원 기사 철회 및 사과 문제뿐 아니라 이 같은 의도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이 어떻게 일본에 접근하고 또 일본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 일본이 변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도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양국이 함께 축적해왔던 화합의 노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측의 그런 노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제스처를 취한다면, 일본 사회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질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을 비판만 한다는 인식을 주면 혐한파와 아베 정권에 성장 에너지를 계속 공급해주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의 한·일 사회를 보면 일본보다 한국이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다. 혐한파를 친한파로 돌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 한국에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오구라 기조 교수

오구라 교토대 교수(종합인간학부)는 도쿄대 졸업 후 일본 최대 광고 회사 덴츠(電通)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중 한국에 왔다가 당시 일본과 달리 다이내믹한 사회 분위기에 매혹됐다. 1988년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대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석·박사를 수료했다. 1992년 이후 현재까지 한·중·일 관련으로 20여권의 책을 썼으며 10여권을 편저 또는 일본어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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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출

2014.11.25 07:01:29
한국을 중국 쪽으로 가버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이 한국을 이웃으로 취급하기 보다 침략의 대상으로 생각하는데 환멸을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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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애

2014.11.25 08:33:07
일본이 언제는 한국인을 존중한적 있는가? 과거엔 조용히 차별했고 현재는 들어내 놓고 무시 할 뿐이다.. 한국 탓하지 말고 못된 일본종자의 본성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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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찬일

2014.11.25 08:20:05
독일 정부는 유태인 피해자들에게 무려 20조원 이상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그런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역사적 사실, 양심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라는 거다. 사람 죽여놓고, 내가 언제 그랬대? 하는 사람과 피해자가 악수를 나눌 수 있다고 보는가? 일본은 그만한 능력과 지성을 갖춘 나라인데 왜 그렇게 하는 행동은 멍청할까? 답답할뿐

이은선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1) 이은선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3.1운동백주년이... | Facebook


이은선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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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3.1운동백주년이 다가오면서 한일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자주 올라온다. 그 중에서도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가 종종 인용되고 그에 대한 평가들이 눈에 뜨인다. 나는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가로서 오구라 교수의 한국 이해가 많은 것을 밝혀주고 시사해주지만 큰 맹점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래의 글은 1년전 대학을 떠나면서 묶어냈던 <세월호와 힌국여성신학>의 서문으로도 썼고, 이후 4월의 한나아렌트학회 월례회에서도 한 번 읽었던 것을 약간 축약한 것이다. 한국적 '생물'(生物, 만물을 낳고 살리는)여성영성의 시각에서 오구라 교수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그가 한국의 고유한 '한국혼'을 놓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오구라교수의 책이 다시 계속 회자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나의 입장을 다시 밝히고자 한다.

1.
 
일본의 귀한 한국학 연구가 오구라 기조 교수의『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오구라 교수는 지난 1980-90년대 한국에 유학 와서 8여 년 동안 한국 철학을 공부한 뛰어난 지한파이고, 최근에는 한국의 ‘영성’에 대한 관심까지 폭을 넓혀서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바른 상을 세우려고 분투하는 소중한 한국학 학자이다. 이 책의 글들은 원래 오구라 교수가 199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한류 붐이 막 일어나는 시점에 일본의 한 잡지사 독자들을 위해서 쓴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들을 모아서 낸 문고판의 후기를 보면 저자는 한 때 한국에 살 때 “한국인이 되자”는 결심까지 하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싶다”라고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일본에서의 한국 인식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또한 거기에 더해서 한국인들조차도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인식이 매우 조악하고 허위에 찬 것임을 보고서 자신이 발견한 한국을 ‘놀람’과 ‘찬탄’,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한 마디로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밝힌다.
 
그러한 저자에 따르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그것도 특히 유교, 그중에서도 뼛속까지 유교 주자학의 '리(理)'로 체화된 나라로서 그것은 한국이 이웃 일본 등과는 달리 항상 하나의 '도덕'을 지향하는 “도덕 지향성 국가”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거기서 도덕 지향성이란 삶에서 그렇게 도덕과 명분(理)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을 통해서 현실적 삶에서의 성공과 번영(氣)까지도 함께 얻으려는 한국 사회의 “상승을 향한 열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한국 사회를 계속 역동적이게 하고, 지치지 않게 하는 젊음과 패기, 뛰어난 천재의 나라로 만들지만 거기에 바로 한국인들의 깊은 피로(恨)와 외부지향성, 극심한 경쟁 사회의 각축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이 그처럼 리와 도덕지향의 나라인 것을 드러내는 좋은 일례로 한국에서는 운동선수들조차도 도덕성을 갖추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일을 지적하는데,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에 대한 소개와 칭찬에도 여지없이 그들의 좋은 인성과 도덕성이 수없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
 
지난 여름 안동 도산서원 퇴계학회에서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던 오구라 교수의 이 지적과 성찰을 읽고 탁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과 학문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많이 있고, 어쩌면 남들보다 먼저 교수직에서 떠나려 하는 것도 그들보다 더 ‘먼저’, 또는 더 ‘많이’ 다시 한 번 ‘도덕성’(理)을 성취하려는 상승열망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서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오구라 교수는 한국인의 이 理 지향성을 단지 지향성 그 자체에서만 평가하면서 거기서의 지향의 내용이나 방향성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국에서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이완용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을 들어서 그러한 일은 한국에서 민족주의적 ‘리’가 여전히 승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그들(친일파)도 “그 나름의 ‘리’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오구라 교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추구(理)했다는 것 자체이지 거기서의 내용(氣)이나 방향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관점은 나에게는 오히려 한국 사상(유교)이 끊임없이 넘어서고자 했던 ‘리’(理) 또는 ‘기’(氣) 일원론에 머문 것이고, 그런 면에서 오히려 그가 참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한국적인 특성, ‘리기불이’(理氣不二) 또는 ‘리기묘합’(理氣妙合)의 특성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3.
 
나는 그렇게 된 이유가 오구라 교수가 한국 사상 또는 유교 사상에서의 ‘종교적(영적)’이고 ‘여성적’인 특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고 하면서 그 철학을 특히 ‘유교’ 철학, 주자학적 ‘도덕’(리)지향성으로 보면서, 그러나 거기서의 도덕은 그 “최고 형태”를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21쪽). 다시 말하면 오구라 교수는 한국 유교를 철저히 하나의 “현세주의적인” ‘도덕 철학’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한국 유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현세적 도덕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그가 말하는 ‘도덕․권력․부’의 삼위일체를 넘어 그것이 깨지더라도 그 모순과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삶을 지속하려는 정신의 노력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을 말한다. 나는 한국 유교에서의 이와 같은 특성-어떻게든 삶과 존재에서 ‘리기 불이성’(理氣 不二性)과 그 통합성을 함께 담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그 ‘종교성’(religiosity)내지는 ‘영성’( spirituality)으로 이름 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측면은 일본인 오구라 교수뿐 아니라 사실 한국 사상가들도 지금까지 크게 주목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영성적 특성을 특히 조선 유교여성들의 지난했던 삶에서 관찰하고, 그것을 오늘 한국적 여성신학과 영성의 구성을 위한 의미로 잘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19세기 조선 여성선비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 )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에 대한 연구가 그 한 예이고, 오늘의 상황에서도 곳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 특성에 대한 연구를 나는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수행하였다.
오구라 교수의 한국 사상 이해에서는 ‘상승’이나 ‘지향’, ‘열망’ 등의 성공의 이야기만 있지 ‘자기희생’이나 ‘비움’(謙虛), ‘겸비’(孝)나 ‘인내’ 등의 이야기는 드물다. 그렇게 그의 이해는 ‘철학’과 ‘도덕’, ‘자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나는 한국적 유교가 하나의 ‘영성’으로서 단순히 어떤 성취의 상승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고(捨己從人), 스스로가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을 통한 이룸(求仁成聖)의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명제보다는 이미 우리가 함석헌 선생 등에게서 들었던 ‘한국은 하나의 뜻이다’라는 명제가 한국적 삶의 특성을 훨씬 더 적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
 
2천 년대 와서 나의 이러한 유교적 여성신학 언어가 다시 서구 여성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 1906-1975)의 것과 많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이나 『정치의 약속』, 『인간의 조건』등에서 나타나는 궁극과 현실의 연결, 전통과 현재의 새로운 관계, 전통과 과거에 대해서 참으로 급진적이고 전복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견실한 보수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 사고의 불이성(不二性)이 내가 유교 영성과 종교성의 핵심으로 바로 여기․이곳의 적나라한 관계의 현실 속에서 그 궁극성(聖․性․誠)을 실현하려는 노력(聖學之道, to become a sage)이라고 본 관점과 매우 잘 상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생각이 적실하다는 것을 최근에 다시 한 하이데거 전기 연구에서 발견했는데, 그 전기 연구가(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아렌트가 나중에 서양철학의 집대성이라고 하는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사상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전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죽음으로 달려감”의 ‘사멸성’(死)을 말하는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탄생성’(生)으로 응답했으며, 하이데거가 이 세계에서 지향하는 개방성을 “각자의 본래성”이라고 본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타자와 함께 하는 행위 능력”(acting in concert)의 ‘다원성’과 ‘공공성’을 강조했고,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세인(Man)의 세계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는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세계사랑”(amor mundi)을 제시했다고 밝히는 것이다(『하이데거』,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243쪽).
 
여기서 서술된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에서 드러난 대로 나는 하이데거를 서구 철학 또는 기독교적 사고의 종말로 보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아렌트에게서 보여지고, 그 아렌트적 사고가 한국 전통 여성들의 ‘천지생물生物지심’(천지의 낳고 살리는 마음)의 영성과 잘 연결되며, 인간의 관계와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다원성’과 ‘공공성’에 대한 강조(仁), 그리고 바로 이 낮은 세계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는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과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한국적 유교 영성의 추구가 아렌트의 ‘세계사랑’과 잘 연결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탐색은 그리하여 그 이후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종교聖․여성性․정치性의 한몸짜기(2011)>나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관계 속에서(2013)> 등으로 묶여졌고,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2016)>의 탐색 등으로 지속되었다.
 
5.
 
이번 저서(『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2018』는 이상과 같은 생각에 있던 내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를 맞아서 어떻게 그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물음들 속에서 그 시간들을 지나왔는가를 보여주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사를 겪은 후 이명박 대통령의 시간을 지내고 박근혜 대통령을 맞아서 일어난 참사 속에서 온 국민은 너무나 엄청나고 끔찍한 일이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했고, 특히 당시 그 참사 앞에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유족들과 한국 사회에 보여준 행태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 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 아렌트의 시각들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세계 제1,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제국주의와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겪었고, 그러한 끔찍한 재앙들이 어떻게 인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서구 유럽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찰을 통해서 밝혔기 때문에 그러한 통찰들이 21세기 신제국주의 시대, 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과 철저히 사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에 일어난 우리의 일들을 파악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한국 교회와 신학이 그러한 종말적 상황과 비극 앞에서 보여준 비신앙적 행태와 무기력, 무능력은 우리가 신앙을 계속해서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세상의 삶과 정치와 경제가 저세상의 삶과 교회와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의 물음을 묻게 해서 앞에서 언급했던 아시아 유교전통과 대화하면서 나온 ‘聖․性․誠의 여성신학’과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이 어떻게 대안을 제안할 수 있는지를 더욱 고민하도록 했다.
 
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한 달 만에 쓰인 맨 처음의 글을 시작으로 해서 이번 참사에서 제일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월호)의 사실적 진실과 정치의 충돌 이야기는 바로 아렌트가 나치 전체주의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대참사에 직면해서 어떻게 정치와 권력에 의해서 사실이 왜곡되고, 은폐․조작되며, 폐기되면서 인간 함께함의 삶이 불가능해지는가의 과정을 살핀 논리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인간 상식과 모든 인간 공동 삶의 생명줄과 토대가 되는 사실과 말이 부패하고 왜곡되었을 때 다시 그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거기서 종교와 정치, 교육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우리 시대의 한 평범한 여성의 삶을 통해서 조명해보기도 하였다. 이런 우리의 질문들은 근본적으로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물음과 죽음과 부활, 용서와 약속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다음에 이어지는 질문들은 바로 한국 기독교와 교회, 신학이 전통의 화석화된 신이야기와 부활 이야기 등에 사로잡혀서 이런 대참사의 시기에 오히려 유족들을 교회와 신앙 밖으로 내몰고 여전히 자신들이 견고하게 쌓은 아성 속에서 남아서 자기 것을 지키려는 시도들을 근본에서 흔드는 물음들을 제기한 것이다. 에티 힐레줌이라는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어간 여성의 신앙과 인간적 삶의 모습을 살피면서 세월호 이후의 한국 교회와 유족들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할 까를 물었고, 또 이렇게 어린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제일 직면하게 된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물은 것이 세월호 1주기 이후의 글들이다. 2주기를 맞아서도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오히려 유족들이 억압받고 조롱받고 정말 코너에 몰려서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가야할지를 몰라서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부활의 물음을 더욱 급진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7.
 
세월호 2주기가 지나면서 떠났던 산티아고 기행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삶의 질문을 인터뷰 형식으로 고백한 글이 있고, 결국 세월호 유족들의 삶도 포함해서 이런 모든 신앙과 정치와 의식의 물음들은 이 세상에서의 신앙을 지키는 ‘소수자’(pariah)의 물음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상상'(imagination)과 연관되는 것을 말하는데,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즉 너희들의 잘못된 상상을 금하라는 이야기와 그러나 동시에 다시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너희 상상으로 언어와 내러티브에 그려진 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믿고 신뢰하며 살라는 두 차원의 ‘믿음’과 ‘상상’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제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와 관건은 바로 ‘믿음’과 ‘신뢰’(信)의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우리 신학(神學)은 ‘신학’(信學), 즉 ‘믿음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싶었다. 즉 오늘 세월호와 같은 것을 겪고 난 사회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사이에 신뢰와 믿음이라는 것이 다시 가능한 것인지, 무슨 방식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우리 공동 삶의 토대가 되는 말과 사실이 왜곡되고 거짓과 폭력과 고립만이 난무한 세상에서 다시 서로를 관계시키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이제 하나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지, 우리 공동 삶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용서하고 약속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지, 이러한 ‘믿음’(信)과 관계되는 것들을 물어가고 탐구하는 것이 나는 세월호 이후의 신학, 특히 한국 여성신학이 몰두해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8.

한나 아렌트는 이 세상이 새로워지는 두 가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에 따르면 이 세상의 새로워짐은 이 세상에 ‘늦게 도착한’(belated) 새로운 세대의 새 탄생과 창조에 의해서인데, 그러한 ‘늦게 온 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 늦게 온 자들에게 기성세대의 대변인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안내해주고, 늦게 온 세대가 이 세상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성세대의 ‘세계에 대한 사랑’(amor mundi)을 말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참으로 염려하고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세계를 계속 새롭게 하고 책임져나갈 늦게 온 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성세대의 세계사랑이라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미투운동’이 크게 번지고 있고, 한국 여성신학이 일찍이 시작하고 탄생시켰던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의 성폭력문제와 성평등의 물음을 어떻게 더 전개시켜나가야 할지의 과제 앞에 다시 섰다. 오늘 교회와 신학이 한없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맛 잃고 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던져짐을 당하는 현실에서, 그리고 오늘 매일, 매 순간에 절박하고 긴급하게 만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큰 난제 앞에서 한국 여성신학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의 물음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고, 그것을 체화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희생’이나 ‘비움’, ‘겸비’(謙虛)와 ‘용기’, ‘인내’ 등의 이야기가 우리 것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덕과 철학과 과학의 길옆에서 그들과 함께, 아니면 앞서서 신앙과 믿음과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이 한국 여성신학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 모여 함께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로 나눌 때 그 무게와 짐이 감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안다. 그것을 아는 믿음 속에서 함께 그 길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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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un-joo Lee

"늦게 온 세대에 대한 사랑"이 곧 우리 기성세대가 행하여야 할 '세계사랑'이라~ 가슴을 울립니다.

이은선

Myun-joo Lee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