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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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威儀] 의 뜻: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의심스러움.,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 예법에 맞는 몸 [국어 사전]

위의   뜻: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의심스러움.,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 예법에 맞는 몸 [국어 사전]

 위의의 의미

1 위의 危疑 :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의심스러움.
2 위의 威儀 :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
3 위의 威儀 : 예법에 맞는 몸가짐.
4 위의 威儀 : 불자(佛者)가 지켜야 할 규범.
5 위의 威儀 : 장사(葬事)에 쓰는 항오(行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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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위의(威儀)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8.

수행자의 위의(威儀)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요즘은 카톡과 밴드의 시대이다. 손안의 컴퓨터라는 스마트폰을 늘 휴대하며 들여다 보는 것은 SNS이다. 밴드에서 어느 법우님이 이런 글을 남겼다.

 

 

과거에도 종교인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한 예로 타종교는 논하고 싶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일생 동안 많이 공부해온 스님들의 일탈행위를 보면서 내가 저 스님만큼 공부하려면 한없이 해야 하는 데 그분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내가 불교를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저에게 적합한 처방을 부탁합니다.

(L법우님)

 

 

스님들의 잘못된 행태를 보면서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의문은 충분히 가질 수 있다. 타종교인이거나 불교인이라도 경계에 있는 분들이라면 스님의 막행막식과 범계, 파계 등의 일탈행위를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왜 삭발하는가?

 

불교인들은 출가자를 스승처럼 따른다. 심지어 어떤 이는 부처님처럼 우러러 보기도 한다. 이는 스님을 승보로 보는 이유도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안다. 그런 환상을 심어 주는 것은 출가자만의 독특한 모습에 기인한다. 삭발과 승복을 입은 것이 대표적이다.

 

삭발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 아니면 하기 힘들다. 이는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삭발하고 출가 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태어남’으로 비유한다. 현재의 나는 삭발함으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삭발하는 순간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비록 얼굴모습은 삭발전이나 삭발후나 변함이 없지만 삭발 하는 순간 현재의 나는 죽고 새로운 태어남으로 본다. 출가를 하면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는다고 하는데 아마 삭발함으로 인하여 거듭 태어난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출가자들은 거듭 태어난 자들이다. 이전 세상과 이후 세상으로 갈리는 것이다. 출가전에는 부모형제 등 세상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 왔다면 이후 세상에서는 관계가 끊어진 것처럼 살아 간다. 그 경계가 삭발의 순간이라 볼 수 있다. 출가자들은 정신적으로 거듭 태어난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독각승처럼 독살이 하는 스님

 

출가자들은 출가자들끼리 모여 산다. 모여 산다는 것은 공동체생활을 의미한다. 이를 ‘승가’라 한다. 그런데 공동체 생활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출가공동체라면 율장정신에 따른 계목을 지켜야 한다. 포살일에 모여서 빠띠목카(patimokkha, 계율)를 함께 낭송하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드러내어 참회를 하고, 또한 상대방의 허물을 지적하여 함께 바른 길로 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승가공동체가 붕괴 된 것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 왔던 자자와 포살이 사라진 것이다. 일부 복원되어 지켜지고 있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국불교 스님들은 ‘독살이’를 한다. 개인 토굴이 있어서 나홀로 사는 것이다. 개인토굴이라 하여 산중의 외딴집을 연상하는 것은 오판이다. 요즘 토굴은 도시의 단독주택이나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 사는 것도 개인토굴로 보기 때문이다.

 

개인토굴에서 독살이를 하면 승가로 볼 수 있을까? 승가의 성립조건이 있다. 최소한 4인 이상 모여 살아야 한다. 율장에 따르면 승가의 최소단위를 4명으로 보고 있다. 4인 이상 모여 살며 자자와 포살을 하면 승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토굴에서 독살이를 한다면 이를 승가라 볼 수 있을까?

 

독살이를 하면 포살과 자자가 있을 수 없다. 나홀로 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러도 누군가 지적해 줄 사람이 없다. 막행막식하는 원인이 된다. 또 나홀로 살면 게으르고 나태해지기 쉽다. 사람의 심리는 서 있으면 앉아 있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 더구나 홀로 있으면 온갖 잡생각으로 인하여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기 쉽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어서 마음대로 내키는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빅쿠라 볼 수 없다. 빅쿠는 비구계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비구계가 단지 스님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고 비구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빅쿠라 볼 수 없다. 더구나 개인토굴에서 독살이를 한다면 빅쿠라 볼 수 없다.

 

한국의 스님들은 대부분 함께 모여 살지도 않고 자자와 포살도 하지 않는다. 독살이를 하다 보니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총무원장스님도 함께 모여 살지 않는다. 장학재단 건물에서 독살이를 하고 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불교 최고 책임자부터 대중생활을 하지 않고 개인토굴에서 보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출가자에게서 ‘위의(威儀)’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앗사지 존자의 경행장면을 보고

 

출가수행자라면 ‘위의’가 있어야 한다. 위의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에 대한 좋은 일화가 있다. 율장대품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이야기에 나오는 앗사지 존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Tena kho pana samayena sañcayo [sañjayo (sī. syā.)] paribbājako rājagahe paṭivasati mahatiyā paribbājakaparisāya saddhiṃ aḍḍhateyyehi paribbājakasatehi. Tena kho pana samayena sāriputtamoggallānā sañcaye paribbājake brahmacariyaṃ caranti.

 

Tehi katikā katā hoti – yo paṭhamaṃ amataṃ adhigacchati, so itarassa ārocetūti.

 

Atha kho āyasmā assaji pubbaṇhasamayaṃ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rājagahaṃ piṇḍāya pāvisi pāsādikena abhikkantena paṭikkantena ālokitena vilokitena samiñjitena pasāritena, okkhittacakkhu iriyāpathasampanno. Addasā kho sāriputto paribbājako āyasmantaṃ assajiṃ rājagahe piṇḍāya carantaṃ pāsādikena abhikkantena paṭikkantena ālokitena vilokitena samiñjitena pasāritena okkhittacakkhuṃ iriyāpathasampannaṃ.

 

Disvānassa etadahosi – ‘‘ ye vata loke arahanto vā arahattamaggaṃ vā samāpannā, ayaṃ tesaṃ bhikkhu aññataro. Yaṃnūnāhaṃ imaṃ bhikkhuṃ upasaṅkamitvā puccheyyaṃ – ‘ kaṃsi tvaṃ, āvuso, uddissa pabbajito, ko vā te satthā, kassa vā tvaṃ dhammaṃ rocesī ’’’ ti?

 

 

한 때 유행자 싼자야가 라자가하 시에서 이백오십 명의 크나큰 유행자의 무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때 싸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유행자 싼자야에게서 청정한 삶을 닦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약속했다.

 

[싸리뿟따와 목갈라나]

‘먼저 불사에 도달하는 자가 다른 자에게 알려주자.’

 

그때 존자 앗싸지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라자가하 시로 탁발하러 가는데, 나아가거나나 물러서거나 바라보거나 돌아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단정하게 눈을 아래로 향하고 위의를 갖추고 들어 갔다. 그때 유행자 싸리뿟따가 존자 앗싸지가 탁발을 하면서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바라보거나 돌아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단정하게 눈을 아래로 향하고 위의를 갖추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

 

[싸리뿟따]

‘세상에 거룩한 님이나 거룩한 경지로 가는 길을 갖춘 님이 있다면, 이 수행승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이 수행승에게 다가가서 ‘그대는 누구에게 의지하여 출가했고, 그대의 스승은 누구이고, 누구의 가르침을 좋아하는가?’라고 물어 보면 어떨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이야기, 율장대품 Vin.I.40, 전재성님역)

 

 

 



 

Dhammapada_37

 

 

사리뿟따는 앗사지의 탁발모습에 크게 감동하고 있다. 앗사지의 모습을 보고서 ‘거룩한 님’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님’은 번뇌가 다한 아라한(arahanta)을 의미한다. 앗사지는 오비구 중의 하나로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미 아라한이 되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오비구가 제자가 됨으로 인하여 승가가 형성되었다. 일년이 지나자 60명의 아라한 생겨 나서 교단으로서 체제를 갖추어 갔다. 이에 전도선언을 하고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부처님도 전도하러 떠났다. 그 과정에서 큰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우르벨라의 깟사빠 삼형제를 신통으로서 제압하고 교단에 편입 시켰다. 이렇게 큰 교단이 형성된 시점에서 사리뿟따가 앗사지의 탁발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위의란 이런 것

 

사리뿟따는 앗사지의 경행장면을 보고서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나아가거나나 물러서거나 바라보거나 돌아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단정하게 눈을 아래로 향하고 위의를 갖추고”라 표현 하였다. 위의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게 해주는 말이다. 이를 빠알리 원문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Atha kho āyasmā assaji pubbaṇhasamayaṃ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rājagahaṃ piṇḍāya pāvisi pāsādikena abhikkantena paṭikkantena ālokitena vilokitena samiñjitena pasāritena, okkhittacakkhu iriyāpathasampanno.

 

그때 존자 앗싸지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라자가하 시로 탁발하러 가는데,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바라보거나 돌아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단정하게 눈을 아래로 향하고 위의를 갖추고 들어 갔다.

 

 

여기서 위의라는 말은 ‘mādāya’이다. Mādā에 대하여 영어로는 ‘pride; intoxication; conceit; sexual excess’의 뜻이다. Mada에 대하여 한자사전을 보면 ‘憍, 憍慢, 慢心’으로 되어 있다. 자만도 일종의 위의라 볼 수 있다. 영어 프라이드(pride) 역시 자만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는 일종의 자만이다. 그러나 앗사지 존자에게서 볼 수 있는 위의는 자만과는 거리가 멀다. 왜 그런가? 앗사지 존자는 이미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무학도 단계의 아라한이 되면 자만도 없어진다. 자만(mama) 아라한 단계어서 소멸된다. 

 

위의와 관련된 여덟 가지 행위

 

위의를 뜻하는 mādā와 관련하여 ‘pattacīvaramādāya’라 되어 있다. 이 단어는 ‘patta(an alms bowl) +cīvara(the yellow robe) +mādāya(pride)’의 뜻이다. 이는 ‘발우와 가사를 수한 아만’으로 직역할 수 있다. 발우와 가사를 수하였다는 것 자체가 수행자를 의미 하기 때문에 수행자상을 나타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자만이 위의로 바뀐다. 그것은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바라보거나 돌아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단정하게 눈을 아래로 향하고 (pāsādikena abhikkantena paṭikkantena ālokitena vilokitena samiñjitena pasāritena, okkhittacakkhu iriyāpathasampanno)”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의 모습은 남루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위의가 있다. 그것은 늘 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의 위의에 대하여 “마라의 군대를 항복받기 위해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왕족처럼 빛난다.(청정도론 2장 두타행)”라 하였다.

 

발우와 가사를 입은 앗사지 존자는 보기에 위의가 있었다. 그런 위의를 가능하게한 것은 가사와 발우이지만 기본적으로 행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여덝 가지로 표현 하였다. 여덟 가지에 대한 문자적 풀이를 해 보았다.

 

 

1) pāsādikena :

[adj.] pleasing; lovely; amiable. 浄心の, 浄信の, 清浄の, 喜心の, 端正の: 깨끗한 마음으로

 

2) abhikkantena:

[pp. of abhikkamati] gone forward; past, 過ぎたる, 去れる, 出発せる, 進める: 나

 

3) paṭikkantena:

[pp. of paṭikkamati] stepped backwards; gone back or aside. もどった, 退いた, 減退した. : 물러서거나

 

4) ālokitena:

[pp. of āloketi] looked at or before. (nt.) looking at or forward. 看住, 前視, 眺めること: 바라보거나

 

5) vilokitena:

[pp. of viloketi] looked at; inspected. 顧視, 観見 : 돌아보거나

 

6) samiñjitena:

Samiñjana= doubling up, bending back : 굽히거나

 

7) pasāritena: 

[pp. of pasāreti] stretched out. 伸ばしたる, さし出された. : 펴거나

 

8) okkhittacakkhu :

 okkhitta= [pp. of okkhipati] thrown or casted down; dropped.。cakkhu=the eye  : 눈을 아래로 향하고

 

 

앗사지 존자가 탁발할 때의 모습이다. 수행자는 탁발할 때 두리번 거리지 않는다. 만일 눈을 두리번 거리며 탁발한다면 걸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수행자는 눈을 항상 아래로 향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자의 눈 높이에 대하여 “눈을 내려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내다보며”라 하였다. 여기서 멍에의 길이는 어느 정도일까?

 

멍에란 소나 말의 어깨에 씌워 쟁기를 달아 끌기 위해 나무로 구부러지게 만든 기구를 말한다. 약 60센티미터 정도 된다. 일미터가 채 안되는 것이다. 눈을 내리뜨고 걷는다면 코 바로 아래 발끝 조금 앞을 말한다.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수행자가 탁발할 때 눈의 위치가 중요하다. 걸인처럼 먹을 것이 찾아 두리번 거리는 것이 아니라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다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에서도 볼 수 있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탁발하는 모습을 높은 다락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경에 따르면 빔비사라왕은 신하들에게 “그대들은 저 사람을 보아라. 아름답고 건장하고 청정하고 걸음걸이도 우아할 뿐 아니라 멍에의 길이만큼 앞만을 본다.(stn410)”라 하였다. 왕의 눈에 탁발하는 모습에서 위의를 본 것이다. 이어지는 빔비사라왕의 말에 따르면 “눈을 아래로 뜨고 새김을 확립하고 있다. 그는 천한 가문 출신이 결코 아니다. 왕의 사신들이여, 그를 쫓아가라. 저 수행승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Stn411)”라 하였다. 마치 앗사지를 존자를 대하는 사리뿟따의 눈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탁발할 때 위의 있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탁발(Takuhatsu ,托鉢), Laos ・Luang Prabang

 

 

 

 

왜 늘 깨어 있어야 하는가?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탁발한다고 하여 위의가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의는 매 순간 깨어 있을 때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문구가 ‘iriyāpathasampanno’이다. 이 말은 ‘iriyā+patha+sampanno’로 구성된 복합어이다. 여기서 iriyā는 ‘movement of the body; posture’의 뜻으로 몸의 움직임이다. Patha는 ‘path; way; road (in cpds.) range of, e.g. gaṇanapatha = range of calculation’의 뜻으로 ‘범위’의 뜻이다. 。 sampanno는 sampanna의 뜻으로 ‘succeeded; prospered; happened; become’의 뜻으로 ‘구족한다’ 또는 ‘성취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iriyāpathasampanno’의 뜻은 ‘몸의 움직임의 범위를 알아차림’을 말한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이 말이 빠져 있다.

 

알아차림과 관련하여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에서는 “그는 감관을 수호하여 잘 다스리고,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 차례로 탁발을 빌면서(Stn413)”라 하였다. 이 구절이 ‘iriyāpathasampanno’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 보여진다. 중요한 것은 “올바로 알아채며, 새김을 확립하고(sampajāno patissato)”라는 말이다.

 

먼저 올바로 알아챔을 의미하는 삼빠잔나(sampajāa)가 있다. 이는 삼(sam)과 빠잔나(pajāna)의 결합어이다. 맛지마니까야 각주에 따르면 따라서 빠잔나는 ‘분명한 앎’ 또는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올바른’ 뜻의 삼(sam)이 앞에 붙으면 삼빠잔나(sampajāna)는 ‘올바로 분명히 알아차림’이 된다. 지금 여기에서 올바로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어떤 경우에 적용될 수 있을까? 사념처에 따르면 “대변 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올바른 알아차림이 삼빠잔나인 것이다. 똥을 싸면 똥을 싼다고 알고, 오줌을 누면 오줌을 눈다고 아는 것이다.

 

새김의 확립이라는 뜻의 patissato 가 있다. 이는 ‘Recollecting, thoughtful’의 뜻이다. 염처경에서는 satimā가 사용된다. 사띠를 의미하는 patissato 와 satimā 를 같은 의미로 본다. 둘 다 ‘새김을 확립하여’ 라고 번역된다. 사띠에는 ‘기억’의 의미가 내포 되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집착하였을 때 재난을 불러 올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면 대상을 볼 때마다 이 말을 되새겼을 때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사띠와 삼빠잔나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항상 함께 쓰인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sampajāno patissato’ 또는 ‘sampajāno satimā’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을 붙여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지금 여기에서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

 

수행자가 위의 있어 보이는 것은 늘 깨어 있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든지 깨어 있는 삶이다. 그것은 대상을 대상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것이다.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런 앎은 가르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한다.

 

필기구도 노트도 없던 시절 오로지 말씀에 의지 한 빅쿠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되새겼을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이 구전 되어 왔다. 구전 된 것을 문자화 한 것이 빠알리니까야이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니까야는 빅쿠들이 가르침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하여 끊임 없이 기억하고 되새긴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수행자는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해야 한다. 부처님 당시 제자들의 일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되새기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사성제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면 그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것을 사띠(sati)라 볼 수 있다.

 

사띠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 (A5.14)”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기억을 강조 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은 기본적으로 암기하고 있으라는 말과 같다. 연필도 노트도 녹음기도 없던 시절 가르침에 대하여 오로지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빠잔나는 사띠와 함께 페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sampajāno patissato’ 또는 ‘sampajāno satimā’라 한다. 사띠가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의미 하는 것이라면 삼빠잔나는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지금 저기 여자가 걸어 갈 때 사띠와 삼빠잔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눈길을 계속 주면서 따라가고푼 유혹에 끄달릴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Kāmesvādīnavaṃ disvā, Stn424)”라는 말이 있듯이,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보아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가르침의 힘이고 사띠의 힘이라 볼 수 있다.

 

큰 의미에서 본다면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것이 것이 사띠라 볼 수 있다. 늘 가르침을 기억하며 새기며 산다면 어떤 대상이 나타나도 분명하게 알아 차릴 것이다. 그런 알아차림은 다름 아닌 모든 대상이,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이 삼빠잔나이다. 그래서 사띠와 삼빠잔나는 항상 페어로 사용된다.

 

탁발을 금지시킨 한국불교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탁발을 볼 수 없다. 스님이 탁발하는 것에 대하여 위의가 없다고 금지 시킨 것이다. 이는 남방 테라와다불교와 정반대이다. 남방불교에서는 현재도 탁발전통이 남아 있다. 그런데 불교인들은 탁발하는 모습에서 출가자의 위의를 본다는 사실이다.

 

발우를 들고 가사를 입은 수행자가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걷는 모습을 저절로 경외감이 생겨난다. 더구나 늘 대상을 알아차려 깨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고 이는 수행자와 승가의 위의로도 직결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탁발장면에 대하여 위의 있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외도 이었던 사리뿟따존자가 앗사지존자의 탁발 모습에 감동 되어 불교와 인연이 되었고, 빔비사라왕 역시 부처님의 탁발 모습에 감동 받아 후원자가 되었다. 이렇게 탁발하는 모습 하나만 보아도 불자들에게 신심을 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탁발의 전통이 실종된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위의를 보기 힘들다. 더구나 독살이 하는 스님들이 많아 홀로 어떻게 사는지 알 수도 없다. 최소한 네 명이 모여 살아야 승가라 할 수 있고, 자자와 포살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져야 승가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는 탁발도 없을 뿐더러 탁발의 정신도 실종되었다. 그래서일까 독각승처럼 홀로 사는 스님들이 많다. 홀로 살기 때문에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종종 터져 나오는 각종 범계 또는 파계 행위에 대한 뉴스를 들었을 때 출가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그런 모습을 타종교인이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또 불교에 갓 입문한 불자들이 접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하거나 덜 완성된 것이라고 오해 받을 수 있다. 가르침을 접하면 접할수록 타락한다면 어느 누구도 불교를 종교로 갖지 않을 것이다.

 

홀로 사는 스님들은 함께 살아야 한다. 최소한 네 명 이상 함께 살며 자자와 포살을 행할 때 불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 탁발까지 행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탁발환경이 열악하여도 한달에 한번 정도 공개적으로 탁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위의가 생겨 날지 모른다. 사리뿟따존자가 앗사지 존자의 위의 있는 탁발모습을 보고서 발심했던 것처럼.



2015-06-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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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천안] 위의(威儀)

기자명선행스님 논설위원·통도사 한주 
  
선행스님

평소 몸가짐과 외모, 곧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을 위의(威儀)라 한다. 이에 여법하다면 승가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겠다.

여태껏 풀먹여 다린 승복을 입은 지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첫 철 선원 방부에 앞서 구참 납자로부터 당부 겸 조언의 말씀을 들었다. 포행할 때는 혼자서 하고, 좌복에 앉는 시간 외에 무명 옷을 손수 풀 먹여 다림질하다 보면 여러모로 유익할 거라는. 해서 그때 이후로 줄곧 풀먹여 다린 승복을 입게 되었다. 심지어 줄기차게 비오는 날에도 어김없이 풀한 승복을 입고는, 외골수적인 융통성 없는 모습으로 보일까 싶어 “풀해서 다린 승복밖에 없어서요!” 사실이 그러면서도 겸연쩍어 자진해서 이해를 구하곤 한다.

특히 선원에서 풀먹인 승복을 입는 것은, 순간적인 수면이 몰려와 깜빡할 때 ‘바스락’하는 소리에 퍼뜩 알아차리라는 의미가 있다. 어느 때는 동안거 한겨울인데도 풀하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던 납자들이 한철 내 동참한 일도 있었다. 사실 손길이 많이 간다. 풀을 쑤어 말리고 밟아, 속을 먼저 다리고 다시 뒤집어서 재차 겉을 다리기까지 번거로이 생각하면 마음 내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내겐 일상이 되었기에 손수 옷 손질이 나태함을 덜어 주어 내심 위안이 된다. 더구나 포행길에 간간이 듣는다. “풀먹인 승복이 너무 멋있습니다!” 지난해 포교국 소임 볼 때 불교대학에 입문하게 된 소감으로 “스님의 포행하는 모습이 너무 맘에 들어 입학했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일전에 낯선 보살님의 인사말을 들었다. “요즘도 방송하세요?” 사실은 지난해 연말부터 준비한 원고가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방송되었을 것이다. 의욕이 앞섰나 보다. 거기에 선택한 교재가 독해로는 무난한 듯 싶었는데, 막상 방송을 해보니 청중이 두루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느껴져 다음을 기약했다. 어쩌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 인사말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참에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불교신문 3719호/2022년6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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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7장 - 4. 핵심적인 예와 세부적인 예
건방진방랑자 2021. 9. 21. 04:49


27장 4. 핵심적인 예와 세부적인 예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많고도 많도다! 기준이 되는 의례가 삼백가지요, 세부적인 의례가 삼천가지도다!
 
優優, 充足有餘之意. 禮儀, 經禮也. 威儀, 曲禮也. 此言道之入於至小而無間也.
우우(優優)는 충족되면서도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예의(禮儀)는 큰 줄기가 되는 예법이다. 위의(威儀)는 세세한 일상의 예이다. 여기서는 도가 지극히 작아 사이가 없는 데로 들어감을 말하였다.
 
주자 주에 “우우(優優)라는 말은 충분하여 넉넉하다는 뜻이다[優優 充足有餘之意].”라고 했죠? 우리가 우등생이라 할 적에도 이 優 자죠. 넉넉하고 크다는 뜻인데, 역시 이것도 앞의 ‘양양호(洋洋乎)’처럼 잘 번역이 되지 않는 감탄사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주자는 여기서 ‘양양호 발육만물 준극우천(洋洋乎 發育萬物 峻極于天)’이라는 절하고 ‘우우대재 예의삼백 위의삼천(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이라는 절을 둘로 나눴죠. 그래가지고 혜시의 말을 빌어, 전자는 ‘지대이무외(至大而無外, 지극히 커서 바깥이 없는 세계)’, 후자는 ‘지소이무내(至小而無內,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세계)’로 대비시켰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성인지도의 매크로한 세계, 천지가 하나로 통하는 거대한 세계, 인간의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봤고, 후자는 같은 큼이지만 성인지도의 마이크로한 세계, 일상생활의 개별적인 사소한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봤습니다.

 
예의(禮儀)와 위의(威儀)의 의(義)란 무엇이죠?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지켜야 할 질서이며 의례, 즉 제식(ritual)이예요. 그런데 주자는 예의(禮義)를 ‘경례(經禮)’라고 했고 위의(威義)를 ‘곡례(曲禮)’라고 했습니다. 경(經)이란 기준이 되는 핵심적인 큰 것을 말하고, 곡(曲)이라는 것은 경(經)에 상대되는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것을 말해요. 옷감을 짠다면은 기준이 되는 씨줄이 경(經)이고, 그것에 따라 세부적으로 짜들어 가는 것이 곡(曲)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도올 서원에서 강의를 시작하고 끝낼 때 서로 맞절을 하는 것이 경례라면 그 때 죽비를 한번 치면 맞절을 하고, 또 한 번 치면 일어나고, 마지막 한 번 치면 반절을 하는 것은 곡례(曲禮)에 해당됩니다. 경례(經禮)가 있으면 곡례(曲禮)가 있고, 예의(禮義)가 있으면 위의(威義)가 있게 마련이죠. 여기서 위의(威義)라는 말의 위(威)자를 위엄을 갖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기 쉬운데, 본문의 예의삼백(禮儀三百)과 짝하는 것으로 봐야 하므로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매사에 경례(經禮)와 곡례(曲禮)의 감각이 다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디테일(Detail)로 들어가면 한이 없어요. 삼천 가지가 아니라 삼만 가지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장의 구조를 보면 ‘양양호 발육만물 준극우천(洋洋乎 發育萬物 峻極于天)’이라고 말하고, 이에 짝하며 ‘우우대재! 예의삼백 위의삼천(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이라고 말하여, 매크로한 세계와 마이크로한 세계를 대비시키고 있으며, 이 후에도 쭉 계속하여 이 장의 주요 테마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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