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9

[유성운의 역사정치]"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 중앙일보2018

[유성운의 역사정치]"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 중앙일보

[유성운의 역사정치]"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중앙일보
입력 2018.09.15 

[유성운의 역사정치]㉗ "너희들은 하지 마라"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문장(文章)이 일찍 성취되었고… 오로지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는 그것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그 교훈대로 따랐다…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끗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3년 12월 1일)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평가받는 퇴계 이황의 졸기(卒記)입니다. 그가 사망하자 사관(史官)이 인물평을 실록에 남긴 것을 보면 이황이 당대에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죠. 졸기를 보면 이황의 생애가 대략 상상이 되지 않나요?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고 하니 한 겨울에도 냉랑한 방 안에서 허름한 옷차림이나마 의관을 정제한 채 경전을 읽는 딸깍발이 선비 같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 기록대로만 이황의 이미지를 연상했다면 오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황은 자산 규모가 꽤나 컸던 지역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본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를 쌓은 사례였죠.




천원 지폐에 삽입된 퇴계 이황의 초상 [중앙포토]


조선 선비들은 재산 증식에 관심 없었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사대부들은 이재(利財)를 쌓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구분에서도 상인을 가장 아래에 놓았던 이유입니다. 부를 쌓고 이재를 중요시하면 인간의 본성을 잃고 도리를 어지럽힌다며 상공업의 발달을 억눌렀습니다.

이황도 『성학십도』를 통해 세속의 이익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진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전경.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 이황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하던 도산서당이다. [중앙포토]

그렇다고 이들이 재산 증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닙니다. 자신들이 억누른 상공업에 투자하거나 이를 운영할 수는 없으니 눈을 돌린 것은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00년 전에 살았던 이황의 재산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열쇠는 ‘분재기(分財記)’입니다. 조선 시대에 소위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대부분 분재기를 남겼습니다. 분재기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기록인데요. 향후 유산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작성됐죠.


녹천 이유의 조부인 장영공 이회가 재산을 분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분재기. [중앙포토]

현재 이황이 남긴 분재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황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아들 이준의 분재기가 남아있어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준이 자녀들에게 분재기를 남긴 것은 1586년인데, 이황이 죽은 1570년으로부터 불과 16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선 이준이 남긴 분재기에 기록된 재산 내역이 이황이 남긴 재산 규모와 거의 같을 것으로 봅니다.


30만평의 땅을 소유한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

그러면 이준의 분재기를 볼까요. 아래 표는 이수건 영남대 명예교수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이준의 분재기를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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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아들 이재가 다섯명의 자녀에게 남긴 재산 내역. 이수건 『퇴계 이황 가문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를 토대로 재정리

일단 토지부터 보겠습니다. 두락(斗落)이라는 단위가 지금의 면적 단위와는 달라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공부했던 20년 전만 해도 조선의 토지 면적은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대동법에 따르면 세금으로 토지 1결(結) 당 쌀 12두(斗)를 거뒀다고 하는데 ‘1결’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이라는 단위가 지금처럼 면적이 아니라 당시엔 곡식의 수확량이나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내면 바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근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황의 아들 이준의 분재기 중 토지 내역. 이수건 『퇴계 이황 가문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를 토대로 재정리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경북 안동과 고령 일대의 각종 데이터를 통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의 밭 1두락은 119.2평, 논 1두락은 105.8평입니다. 이황이 소유한 토지도 영천, 의령 등 경북에 있었으니,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 적용하면 이황이 남긴 땅은 약 36만 3542평 정도 입니다.

다음엔 노비를 보겠습니다. 이황의 손자녀들이 나누어 가진 노비는 367명(노 203명, 비 164명)인데 이 가운데 88명(노 44명, 비 44명)은 이황의 손자녀들이 결혼 때 받은 노비와 그 자식입니다. 또한 33명(노 20명, 비 13명)은 이황의 아들 이준이 처가에서 받은 것인데 이를 감안하면 이황은 대략 250~300명 안팎의 노비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황의 아들 이준의 분재기 중 토지 내역. 이수건 『퇴계 이황 가문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를 토대로 재정리

당시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만 전념했던 지방 지주들의 재산이 평균 전답 300~500두락, 노비 100여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답 3000두락에 노비 250여명 가까이 거느린 이황은 꽤 잘 사는 축에 속했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여담이지만 표를 보면 다섯 자녀에 대한 재산 상속이 거의 고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만 하더라도 균분 상속이 큰 흐름이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노비는 양인과 결혼 시켜라"

앞서 말했듯이 이황은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각종 서찰을 보면 그가 재산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노비 규모를 늘리는 데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노비는 토지보다 더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죠. 개간을 통해 전답으로 바꿀 수 있는 황무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비를 많이 갖고 있다면 토지는 늘리기가 수월했던 거죠.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서찰을 보면 그가 자신의 노비들을 양인(良人)과 결혼시키려고 무척 애썼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쓰여진 노비 매매 문서.

”범금(范金)과 범운(范雲) 등을 불러다가 믿을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어 생업을 의탁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시집을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도산전서(陶山全書)』 中)

이황이 노비들을 양인(百姓)들과 적극적으로 맺어주려고 했던 까닭은 당시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천즉천’(一賤卽賤〮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고 합니다. 노비끼리 결혼시키는 것보다 이처럼 양천교혼(良賤交婚)을 시키면 노비를 손쉽게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퇴계 이황 [중앙포토]

예를 들어 17세기 경상도 재령이씨 가문의 기록을 보면 자식을 많이 둔 노비가 아들을 모두 양인과 결혼시키자 그 공을 높게 평가해 노역에서 풀어주는 한편 상속 대상에서도 제외해 줍니다.

그렇다면 노비는 어느 정도의 재산 가치를 갖고 있었을까요. 이황이 죽고 10여년이 지난 1593년의 한 기록을 보면 28세 여성 노비는 목면 25필이었습니다. 당시가 임진왜란 중이라 노비의 가격이 폭락했었음을 고려하면 이황 당대에는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30대 장정을 구입할 경우엔 소 한 마리 외에도 목면이나 곡식을 더 얹어줘야 했습니다.

이황은 노비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간혹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연동(連同)에게 절대 방매(放賣)하지 말라고 지시해 놓았으니 너도 이에 따라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다. 부득이 방매한다면 내년에 가서 네가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할 만한 형편이 아니니 어쩌겠느냐.”
연동은 이황이 소유한 영천 토지에 거주하던 노비였는데 이황은 그가 토지를 팔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꼭 팔아야 한다면 이황 집안에게 팔도록 강권했던 것이죠.


경북 안동, 퇴계 이황 고택 [중앙포토]

이황은 목화 농사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곡식보다 수익성이 좋고 재산 가치도 높았기 때문이죠. 목화로 만든 면포는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해주는 옷감의 원료이면서 동시에 화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장을 관리했던 아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목화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하곤 했습니다.

“목화 파종하는 일은 물이 불어서 분전(糞田)을 하지 못했다. 모레쯤 할 계획이다…목화는 요긴히 써야 할 곳이 있으니 먼저 딴 것을 지금 가는 사람에게 모두 부쳐 보내거라.” (『도산전서(陶山全書)』 中)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장이다 [중앙포토]

또한 이들은 재산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많은 애를 썼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가문끼리 혼인 관계를 맺은 것도 부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이황만 하더라도 2차례 결혼 과정에서 전처와 후처가 처가에서 가져온 영천(382두락), 풍산(148두락), 의령(687.5두락)의 토지 덕분에 가산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황의 재산 증식은 아주 특별한 사례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중기 정계에 진출해 '도학 정치'를 주창했던 조광조 등 사림들은 대부분 지방에 이같은 물질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생계에 대한 걱정을 덜고 안정적인 학문-정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이죠.


전남 화순 능주 조광조의 영정. [중앙포토]

한 가지 첨언하면 이황은 생전에 자신이 늘 넉넉치 않다고 여겼으며,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면 경제적 곤궁함을 토로한 적도 많았습니다. 중상층 이상의 재산을 소유했던 그의 이런 '결핍' 의식은 재산 증식의 당위성과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너희는 꼭 ‘인 서울’을 지켜라”

조선의 학자들은 가문의 위세를 지키기 위해 재산 증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조선 후기엔 서울 거주의 중요성도 두드러집니다. 이황이 살던 16세기만 해도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입신양명이 가능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서울 거주 여부가 출세의 관건이 됐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왼쪽)과 그가 18년 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

이는 ‘경제 민주화’와 ‘토지 공개념’의 선구자인 정약용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 한 뒤 ‘우물 정(井)’자로 나누어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전제를 주장했죠. 그는 전남 해남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며 아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자식에게만큼은 뉘앙스가 다소 달라집니다.

변변히 물려줄 토지도 없다는 점을 미안하게 여기는 그는 아들에게 학문 정진을 당부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인 서울’입니다. 폐족이 된 가문의 형편 때문에 당분간 과거를 볼 수 없지만 어렵더라도 서울 생활을 고수해야 하며 서울이 어렵더라도 10리 밖을 벗어나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하던 때 부인 홍혜완이 보낸 치마에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은 서첩, '하피첩' [중앙포토]

“혹여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한양(漢陽) 근처에서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이다…내가 지금은 죄인이 되어 너희를 시골에 숨어 살게 했지만, 앞으로 반드시 한양의 십 리 안에서 지내게 하겠다…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가버린다면 어리석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칠 뿐이다.”
각종 개혁적 주장을 펼친 그도 자녀의 장래와 성공을 고민하는 '아버지'였던 것이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 유적지 내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전익진 기자]

최근 여권 인사들의 ‘사다리 걷어차기’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서울 부동산 문제를 언급하다가 “모두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 내가 강남에 살기에 드리는 말씀”이라고 발언해 많은 비판을 받았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법시험 폐지를 옹호하며 “모두가 용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습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사진 기획재정부]

소위 '금수저' 집안 출신으로 강남에서 시가 20억원이 넘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장 실장이나 조 수석이 입에 담기엔 부적절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어용 지식인’을 자처한 유시민 작가도 “외고와 자사고를 폐지해야 한다”며 “제 딸이 외고를 다닐 때 어떠냐고 물어보자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졸업하니까 ‘외고를 없애야 해’라고 말하더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자기 딸은 외고를 보내놓고 이제와서 폐지하자는 건 이중적 태도’란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장하성 정책실장 주거하는 송파구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변선구 기자]

자신들이 누리는 위치에 도달하는 ‘사다리’를 “필요 없다”, “별 거 없다”며 치워 버리는 것이나 조선 지도층이 백성들의 이재(利財) 축적은 막아 버리고, 자신들은 노비와 토지로 재산을 불려 나간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혹시나 일반 국민들을 ‘교화 대상’인 백성으로 내려다보는 것은 아닐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 김건태 『이황의 가산경영과 치산이재(治産理財)』, 2011
  • 이수건 『퇴계 이황 가문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 1990, 역사교육학회
  • 문숙자 『退溪學派의 經濟的 基盤-財産 形成과 所有 規模를 중심으로』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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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의 가산경영(家産經營)과 치산이재(治産理財) = The Aspects of Family Fortune and Property Managed by Yi Hwang

저자
김건태 ( Kuen Tae Kim )

발행기관  퇴계학연구원

학술지명  退溪學報(The Journal of T`oegye Studies)

권호사항  Vol.130 No.- [2011]

발행연도  2011

주제어
전답집적 노비증식 농장경영 지주 주자성리학 aggregation fields and paddies proliferation of the Nobi the management of the Nongjang(agricultural estates) the Landlords Chu Hsi`s Neo-Confucianism

발행기관 URL
http://www.toegye.org

수록면
159-204(46쪽)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16세기 士族의 경제활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주자성리학 확산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해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이황의 家書를 분석하여 전답집적, 노비증식, 농장경영에 쏟은 이황의 열정, 그리고 財物에 대한 그의 인식 등 사회경제활동, 나아가 經濟觀念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황은 단순히 많은 노비와 전답을 소유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농장경영도 효율적으로 하려고 했고, 노비신공도 적극적으로 수취했다. 재산증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분별하게 재산을 모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농장경영에 적극성을 보인 사족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사족들 가운데 다수는 한양이나 지방의 邑治에 거주하면서 科田法 통해 많은 곡물을 수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황처럼 농촌에 거주하면서 농장경영을 진두지휘한 사족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이 사족들이 농촌에 거주하면서 地主的 학자로서 생활하게 된 것과 주자성리학 확산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주자성리학은 지주제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향촌질서를 구축하려는 16세기 지주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해주는 사유체계였던 것이다.

접기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aim of this article revolves around economic activities of the literati which provide the clue to explore the socio-economic backgrounds on expansion of Chu Hsi`s Neo-Confucianism in the sixteenth century. To obtain this purpose, I analyzed the letters from Yi Hwang family enumerating the passions of Yi Hwang for aggregation fields and paddies, proliferation of Nobi, and Nongjang (agricultural estates). In addition, the letters gave opportunity to search for his recognition for the property based on socio-economic activities and a sense of economy as well. Yi Hwang was not simply satisfied with ownership of lots of the Nobi and fields and paddies, but he also tried to manage the Nongjang effective as well as to enthusiastically acquire Nobi`s fee paid to him (奴婢身貢). By the way, there were not so many literati in the fifteenth century paying much more attention to the management of the Nongjang as Yi Hwang did, because they mainly lived in Hanyang or in provincial Eupchi and received lots of the grains from the Rank Land Law. In other words, it was in the sixteenth century when the literati paid much more attention to the management of the Nongjang by themselves. The reason why the literati in the sixteenth century were inclined to live in rural area as a scholastic landlord was correlated with the expansion of Chu Hsi`s Neo-Confucianism in the whole area. It was likely that Chu Hsi`s Neo-Confucianism was the systematic thought to support the interest of the landlord who wanted to establish the villages in new order. Therefore, my finding in this article is that the existence of the scholastic landlords in rural area triggered the expansion of Chu Hsi`s Neo-Confucianism in all across th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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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學派의 經濟的 基盤 : 財産 形成과 所有 規模를 중심으로
財産 形成과 所有 規模를 중심으로 2001

On the Economic Background of Toegye School: Especially on the course of enlarging their properties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학술저널
정신문화연구 2001 겨울호 제24권 제4호 (통권 85호)
2001.12 75 - 96 (24page)
저자 문숙자

Toegye School is the one of the two scholars' group. It was very famous for the research of Neo-confucianism with Nammyung School in Youngnam province during the middle period(16-17C) of Chos?n Danasty. The members of Toegye School were the decendants of the leading aristocrats(Yangban family). They had been survived until late 19th Century in Kyoungsang province, such as Andong and Yean.
(1)The basis of economical power : They had left much records related to their property. According to the records, they lived hermit lives at the rural, mountainous areas, with cultivating and enlarging their lands, saving their properties. The reason why they had moved to those areas was generally related to the 'son-in-law custom' of Chos?n Dynasty. They improved their properties, on the one hand by way of inheritance from their parents and wife's parents, on the other hand by cultivating wasted lands. Furthermore they improved their properties by purchasing lands and slaves. The volume of their properties was as much as 100 slaves and 300-500 doorak's lands.
(2)Social background : Toegye school had constructed the special 'marriage leaneage'. It was very popular for them to make marriage among their families and they all prefer to making marriage with rich family. In the end, they could sustain close family relationship and 'master-disciple relationship'
Those two are considered as the most important reasons why Toege school had survived so long time since 16th century in Chos?n Dynasty.

목차
Ⅰ. 머리말
Ⅱ. 財産 形成
Ⅲ. 財産 所有 規模
Ⅳ. 맺음말
English Abstract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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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맑스를 읽자 2010 부커진 R 시리즈 3

알라딘: 맑스를 읽자


맑스를 읽자 - No.3, 2010 | 부커진 R 시리즈 3
이진경,고병권,박정수,오선민,윤여일,정정훈,김우자,신지영,박채은,조정환,오하나,현민 (지은이)그린비2010-06-30


































미리보기

정가
책소개
2007년 발간된 1호 이후로 꾸준히 소수성을 이야기하며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내온 <부커진 R>의 이번호 주제는 다름 아닌 ‘맑스’다.

맑스에 대한 독해, 맑스를 통한 현재의 독해와 더불어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 인터뷰나 이진경의 백남준론, 일본의 코뮤니스트 시인 다니가와 간의 글을 통해 

코뮨주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예술과 정치> 파트,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한 병역거부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병역거부 소견서와 용산사태 이후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에세이까지 <부커진 R> 3호는 기본 논지나 논조가 조금씩 다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공통된 것의 생산, 코뮨적 관계의 구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목차


편집인의 말 04

[특집: 맑스를 읽자]
칼 맑스 -혁명적 삶의 어떤 유형_ 고병권
우리 시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물음_ 고병권
맑스의 코뮨주의적 인간학 -『경제학 철학 초고』를 중심으로_ 박정수
민주주의와 공안통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맑스의 민주주의론_ 정정훈
절대지대에서 절대민주주의로-공통되기의 존재론을 위하여_ 조정환


[예술과 정치]
백남준: 퍼포먼스의 정치학과 기계주의적 존재론_ 이진경
해체와 정치_ 우카이 사토시 | 이진경 옮김
‘정치의 원점’으로서의 텐트 - 사쿠라이 다이조 씨 인터뷰
다니가와 간-이족들의 마을, 그 원점의 에너지_ 다니가와 간 | 신지영 옮김

[에세이]
다음 세대를 위한 병역거부 길라잡이- 현민의 병역거부 소견서_ 현민
용산, 폐허의 땅에서 희망을 만든 사람들_ 박채은

『부커진 R』 3호 필진소개


책속에서


“나는 잠정적이지만 맑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혁명가의 한 유형을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다. 그것은 귀족적이고, 공공연하며, 무자비하고, 소속 없는, 그리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그래서 희망적인 삶이다. 맑스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혁명가는 복종과 예속, 한마디로 노예적인 것을 거부하며, 미래에 대해서 오직 공공연하게 선포된 음모만을 ... 더보기
“화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국가라는 이념 공동체는 개별성을 인륜적 보편성으로 매개하는 소외된 삶의 형식이다. 맑스가 말한 인간의 유적 본질은 그러한 추상적 매개를 통한 보편성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적 공통성에 의해 실현되는 감성적 특이성의 앙상블이다. 그것은 어떤 보편적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감성 능력이 직접적... 더보기
“이처럼 존재의 평등성을 수립하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백남준은 기계와 인간, 기계와 생명을 가르는 깊은 심연을 넘어서 ‘기계주의적’ 일관성의 평면에 도달한다. 이는 TV나 비디오를 이용한 이후의 작업들과 초기의 퍼포먼스를 이어 주는 어떤 공통의 철학적 지반이었다. 또 그것은 백남준의 비디오 작업이 통상적인 관념과 매우 다른 존재...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진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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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 연구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인문사회교양학부 교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쓴 책들이 《맑스주의와 근대성》《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수학의 몽상》《철학의 모험》《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등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새로운 혁명의 꿈속에서 니체,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사유하며 《노마디즘》《자본을 넘어선 자본》《미-래의 맑스주의》《외부, 사유의 정치학》《역사의 공간》《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등을 썼다. 《코뮨주의》《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삶을 위한 철학수업》《파격의 고전》 등을 쓰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바닥없는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이진경 장병탁 선을 넘는 인공지능>,<불교를 철학하다>,<바깥의 문학> … 총 96종 (모두보기)
SNS : //twitter.com/solaris00

고병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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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 ‘읽기’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읽기의집’에서 일명 ‘고집사’로 살림하며 지내고 있다. 주로 국가, 자본, 인간의 한계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1991년 마르크스의 《자본》을 처음 읽었고, 그 후 여러 번 다시 읽었으며, 다양한 공부 모임에서 《자본》 읽기 강의를 진행한 바 있다. 2016년 어느 공부 모임에서 열두 번에 걸쳐 이뤄진 《자본》 강의가 이 책의 뿌리가 되었다.
니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담은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삶과 철학의 관계를 고민한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살아가겠다”》, 《철학자와 하녀》, 《묵묵》, 대의제와 민주주의, 정치참여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다양한 책을 썼다. 접기

최근작 : <문화과학 115호 - 2023.가을>,<너머학교 열린교실 1~20 세트 - 전20권>,<뉴래디컬리뷰 2022.겨울> … 총 75종 (모두보기)

박정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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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하며 프로이트, 푸코, 들뢰즈를 즐겨 읽었다. 지적인 성과보다 요리, 농사, 가드닝에서 뚜렷한 소질을 보였으며, 그래피티나 현장인문학을 통해 활동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동안 쓴 저서로는 《현대 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 《매이데이》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How To Read 라캉》,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등이 있다.
2015년 수유너머 연구자 생활을 마감한 후 ‘장판’(장애운동판)으로 들어왔다. 2016년부터 인터넷 언론사 ‘비마이너’ 기자로 활동했고, 2017년 ‘노들장애학궁리소’ 창립 후 장애학 연구 활동가로 지내고 있다. 또한, ‘노들장애인야학’의 철학 교사, 노들야학 백일장 심사위원,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심사위원,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활동감사 위원으로 활동했다.
최근 관심사는 ‘장판’에서 ‘그리스 비극’ 읽기다. 노들야학 철학 수업 때 두 학기 동안 그리스 비극을 강독했다. 〈오이디푸스 왕〉을 강독할 때, 다리 개수로 ‘인간’을 정의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평생 두 다리로 걸어본 적 없는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생각이 많아졌다. ‘비극’에 담긴 디오니소스적 운명애가 장애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몇 번 더 수업하면서 탐구해볼 생각이다.
생계활동으로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현대문화론’ 강의를 하고 있으며, 아내에게 임금을 받으며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최근 ‘안양’으로 이사 와서 생애 처음 경기도 주민으로 지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장판’에서 푸코 읽기>,<매이데이>,<쉽게 읽는 꿈의 해석> … 총 20종 (모두보기)

오선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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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자. ‘인문공간 세종’ 연구원. 대학원에서는 한국근대문학을 전공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며 위대한 작가가 되려고 했으나 실패!^^ 모든 글은 시도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이치 하나를 얻고 근대문학의 산에서 하산했다. 그때부터 어딘가에 있을 훌륭한 진리를 찾아다니는 대신 발밑의 작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인문공간 세종’에서 만난 친구들과 동화, 전설, 민담 등 옛이야기를 읽으며 밥하고 청소하기의 인류학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책(『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되찾은 시간 그리고 작가의 길』)과 카프카에 대한 책 두 권(『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 카프카를 읽는 6개의 키워드』와 『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을 냈으며, 『그림 동화』를 인류학적 시선으로 읽은 책(『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 『그림 동화』의 인류학』)을 시작으로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을 펴내는 등 ‘인류학’을 모험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신화의 식탁 위로>,<[큰글자책] 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 총 18종 (모두보기)

윤여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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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교토에서 체류했다.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물음을 위한 물음』,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전3권)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으며,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전2권),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다케우치 요시미―어느 방법의 전기』, 『루쉰 잡기』, 『사상이 살아가는 법』, 『일본 이데올로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의 틈새에서』, 『사상으로서의 3·11』,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을 옮겼다. 지키는 연구를 하고 싶다. 접기

최근작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경계’에서 본 재난의 경험>,<공동자원의 영역들> … 총 44종 (모두보기)

정정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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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인문사회연구실》연구원이자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인권과 인권들』(2014), 『군주론―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2011),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공저, 2016) 등 다수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장애여성운동, 교차하는 억압에 저항하는 횡단의 정치 : 장애여성공감 20주년 선언문《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에 대한 교차성 페미니즘적 독해」(『인권연구』),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과 인권규범으로서 정치적 주체화」(『민주법학』), 「감금의 질서, 수용시설의 권력기술―형제복지원과 인권의 재맥락화」(『도시인문학연구』)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문화과학 115호 - 2023.가을>,<인권의 전선들>,<문화과학 110호 - 2022.여름> … 총 17종 (모두보기)

김우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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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3세. 전공분야는 사회학이며, 식민주의, 젠더 연구, 소수자 연구이고 한국의 국민/민족주의와 재외 '동포'를 둘러싼 문제에 관심이 있다. 『異鄕の身?-テレサ·ハッキョン·チャをめぐって』(人文書院、2006), 『?きながら問う―?究空間「スユ+ノモ」の??』(インパクト出版?, 2008)을 썼고, 『폭력의 예감』을 공역했다.

최근작 : <맑스를 읽자> … 총 3종 (모두보기)

신지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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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부교수. 한국·동아시아 마이너리티 코뮌의 형성·변화를 1945년 전후 기록/문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면서, 현재의 난민·장애·비인간 존재의 곁/뒤에 설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꾼다. 저서로는 『不부/在재의 시대』(2012), 『마이너리티 코뮌』(2016), 『난민, 난민화되는 삶』(2020, 공저), Pandemic Solidarity (2020, 공저), 『動物のまなざしのもとで』(2022, 공저) 등이 있다.

최근작 : <난민, 난민화되는 삶>,<모빌리티 시대 기술과 인간의 공진화>,<마이너리티 코뮌> … 총 12종 (모두보기)

박채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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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 of the voiceless" 목소리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미디어운동을 하고 있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풀뿌리미디어, 공동체미디어에 대한 연구와 네트워크 일을 해오다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촛불방송국 레아 활동을 했다. 마을마다 공동체미디어가 활발해지는 시점을 상상하며 운동하고 있다.

최근작 : <맑스를 읽자>

조정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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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을 연구했고, 1980년대 초부터 <민중미학연구회>와 그 후신인 <문학예술연구소>에서 민중미학을 공부했다. 1986년부터 호서대, 중앙대, 성공회대, 연세대 등에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와 탈근대사회이론을 강의했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월간 『노동해방문학』 주간을 거쳐 현재 다중지성의 정원[http://daziwon.com] 대표 겸 상임강사,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비판』(연구사, 1989), 『노동해방문학의 논리』(노동문학사, 1990), 『... 더보기

최근작 : <뉴래디컬리뷰 2021.겨울>,<개념무기들>,<까판의 문법> … 총 56종 (모두보기)

오하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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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N>에서 공부하며 통역과 번역을 하고 있다. 사카이 다카시(酒井隆史)의 『자유론』을 번역했다.


최근작 : <휘말림의 정치학>,<맑스를 읽자> … 총 3종 (모두보기)

현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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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와 동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수유너머’의 일원으로 보냈다.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나를 위해 공부하라』,『우정은 세상을 돌며 춤춘다』 등을 함께 썼고 『남성성/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작 : <감옥의 몽상>,<맑스를 읽자>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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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거대한 낯섦>,<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게으르게 읽는 제로베이스 철학>등 총 643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2위 (브랜드 지수 183,800점), 여성학/젠더 11위 (브랜드 지수 33,035점), 고전 22위 (브랜드 지수 157,304점)





후생가외(後生可畏)

후생가외(後生可畏), 그 너머

by조우성 변호사Nov 20. 2015


후배들이 뛰어난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흔히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자기보다 먼저 태어나서 지식과 덕망이 나중에 태어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선생(先生)이고,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 즉 후배에 해당하는 사람이 후생(後生)입니다.

그런데 이 후생은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것인데, 이 말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옵니다.

(공자가 후생가외라고 한 것은 그의 제자 중 특히 재주와 덕을 갖추고 학문이 뛰어난 안회(顔回)의 훌륭함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청출어람(青出於藍)

청출어람 (r366 판)

푸를 청
날 출
어조사 어
쪽 람

1. 개요2. 예시
2.1. 원래 예시
2.1.1. 현실에서의 사례2.1.2. 가상에서의 사례
2.2. 반대 또는 반어적 예시
2.2.1. 현실에서의 사례2.2.2. 가상에서의 사례
3. 정도에도 사도에도 해당되는 경우4박찬욱박찬경 감독의 단편 영화

1. 개요[편집]

푸른색 염료는 [1]에서 얻지만 쪽보다 푸르다는 의미. 원 문장은 《순자(荀子)》 권학(勸學)편의 첫머리에 나오는 '청취지어람이청어람(靑取之於藍而靑於藍)'[2]이지만 사자성어에 맞게 축약, 변조되었다. 더 줄여서 출람(出藍)이라고 하기도 한다.

비슷한 말로 얼음은 물에서 나오지만 물보다 차다는 말(氷水爲之而寒於水(빙수위지이한어수))도 있다.[3]

이 말의 원래의 의미는 부지런히 노력하면 원래의 본성보다 훨씬 뛰어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착한 본성을 지켜나가라는 맹자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본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경우를 비유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원작초월도 이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명불허전과 마찬가지로 반어적인 의미에서 청출어람이라고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자로만 남으면,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Man vergilt einem Lehrer schlecht, wenn man immer nur der Schüler bleibt)(의역: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스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또한 청출어람과 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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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青出於藍)
청출어람(青出於藍)
소요유 : 2015. 11. 13. 19:37


청출어람(青出於藍)



이 말은 흔히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날 때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이런 의문을 일으켜본다.



선진양한(先秦兩漢)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때,

이와 유사한 문장이 등장하는 예는 순자(荀子)의 권학(勸學)편을 들 수 있다.


君子曰:學不可以已。青、取之於藍,而青於藍;冰、水為之,而寒於水。木直中繩,輮以為輪,其曲中規,雖有槁暴,不復挺者,輮使之然也。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智明而行無過矣。



군자 왈,

배움을 그칠 수 없다. 

푸른 물감은 쪽에서 취하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

얼음은 물에서 이뤄지지만 물보다 더 차다.

나무가 곧아서 먹줄과 맞아도, 

구부려 수레바퀴 테를 만들면,

그 구부러진 곡률이 컴퍼스(compass)로 그린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비록 햇빛에 다시 말린다한들, 곧게 펼 수 없음은,

이미 구부려졌기 때문이다.

고로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와진다.

군자는 배움을 널리 미치게 하고, 날마다 자기반성을 해야,

지혜가 밝아지고 행실에 허물이 없어진다.



여기 而青於藍이란 것이,

오늘날처럼 제자가 스승보다 더 특출하다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저 글에 보이는 여러 비유는,

배움으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이끌어진 것이다.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더욱 이 뜻을 확고히 하고 있다.



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干、越、夷、貉之子,生而同聲,長而異俗,教使之然也。 



고로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의 높음을 알 수 없고,

깊은 골짜기에 임하지 않으면 땅의 두터움을 알지 못한다.

선왕의 남기신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학문의 대단함을 알지 못한다.

간, 월, 이, 맥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는 같은 소리를 내지만,

자라면서 풍속이 달라지는 것은,

가르침이 그러하게 한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지만,

교육으로써 이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함이니 애초, 

而青於藍이라는 것이,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의는,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선천적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한즉 공부가 깊어지면 혹간 스승을 앞지를 수도 있기는 하겠다.

하지만 스승을 앞지르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작은 자기 자신의 성숙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일(李謐)과 공번(孔璠)은 청출어람을 두고 말할 때,

흔히 인용되는 사제지간의 이야기다.

차제에 이를 좀 더 새겨보자.



李謐,字永和。初師事小學博士孔璠。數年之後,璠還就謐請業。同門生為之語曰 青成藍,藍謝青,師何常,在明經。 (太平御覽)



이일은 자(字)가 영화이다.

처음 선생으로 소학박사 공번을 섬겼다.

수년이 지나자 공번이 외려 이일에게 물었다.

(※ 請業 : 스승으로 모신다는 뜻이 있음.)

동문생이 이를 두고 말하다.



‘청(青)이 남(藍)이 되니, 남(藍)이 청(青)에게 감사하다.

(※ 여기서 청은 제자, 남은 스승 또는 각기 그 성취의 수준을 가리킴.)

선생이 어디 하나로 상시 고정된 것이랴?

다만 경전의 도리를 밝히는데 있음이니.’



이 글을 대할 때,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는 사실에 한눈을 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무엇이든 자기의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데,

집중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青出於藍而青於藍。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



여기서 青出於藍보다 而青於藍에 집중하면,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는 자극적 사건에 빠져버릴 우려가 있다.

학문한다는 것이 연예활동이 아닌 한,

선정적(煽情的)인 일에 마음을 빼앗기며, 

입을 벌리고 놀랄 일은 아니다.



하니까,

而青於藍에 빠지면,

青出於藍이란 본질을 잊게 된다.

青出於藍이란 곧 스승을 구하고, 학문을 갈고 닦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 而青於藍, 스승을 앞지르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허나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공부가 진전되고, 학문이 깊어진다는데 그 의의가 있을 뿐이다.



是故古之聖王未有不尊師者也。尊師則不論其貴賤貧富矣。

(呂氏春秋)



그런고로 옛 성왕치고 스승을 존숭하지 않은 경우는 아직 없다.

스승을 존숭함엔 그 귀천이나 빈부를 따지지 않았다.



知不足者好學,恥下問者自滿。



앎이 적다고 느끼는 자는 배움을 좋아한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자만한 이다.



이제 청출어람의 뜻새김에 있어,

다만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는 것보다는,

순자의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으리란 생각이다.

이에 그 부분을 다시금 음미해본다.



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智明而行無過矣。



고로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와진다.

군자는 배움을 널리 미치게 하고, 날마다 자기반성을 해야,

지혜가 밝아지고 행실에 허물이 없어진다.



學者必求師,從師不可不謹也。



학자는 반드시 스승을 구해야 한다.
스승을 섬김에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이 갖춘 지식과 경험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고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도도처처 이르는 곳마다 스승을 찾아야 한다.

그러함인데 예전 제자에게 배움을 구한다한들,

그게 어찌 부끄러운 노릇이겠음인가?



제자가 스승을 앞질렀다고 놀라기에 앞서,

내 공부가 과연 얼마큼 철저한가 점검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다.

18세기 조선 성리학, 여성 주체를 일깨우다-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이은선 2022 주간기독교

<한국信연구소 오늘, 22.07.01(금)>
-한국페미니스트신학자의 유교읽기13-임윤지당의 삶과 사유-

드디어 18세기 임윤지당에게 왔습니다. 임윤지당과 더불어 다음 편 강정일당의 삶과 사유를 해석하면서 저는 '사유하는 집사람'이라는 언어를 썼고, 특히 이들 여성의 삶을 통해서 조선 성리학의 도학적 정신과 그 성속일여적 종교성이 지극한 수준에서 체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얼마전 한국 헤겔학회에서 오구라 기조 교수의 저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사>에 대한 이해가 다루어졌는데(이종철 교수), 저는 그 논평자로서, 오구라 기조교수가 놓친 조선 유교 종교성과 영성의 진면목은 그 도덕적 理추구가 명예와 돈과 함께 가는 상승적 理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겸비와 자기하강, 자기비움의 그것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도학의 진정한 理지향성이고, 하학이상달적 유교 종교성이며, 18세기 조선여성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도 고유하게, 아니 더 진실된 모습으로 체현되어 왔다고 밝혔습니다.

매우 예민한 해석이고, 특히 오늘 서구 페미니즘 시각에서 볼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 서구적 시각과 한국 유교 영성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저의 오랜 시도 속에서 오늘 21세기 모두에게, 여남의 구분을 떠나서 긴요한 '집의 회복'과 '사유와 삶의 하나됨'의 예시가 저는 조선 성리학 여성들의 삶에서 18세기 이후로 가능해지는 과정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 중층적이고 예민한 물음이 두 편의 짧은 글에 잘 나타났는지 여러분들의 일독과 질정을 기다립니다.


[오구라 기조 인터뷰]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2014

[오늘의 세상]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오늘의 세상] "자신감 잃은 日本人, 한국이 중국으로 쏠리자 嫌韓(혐한) 감정 거세져"

['韓·日관계 전문가' 오구라 기조 교토大 교수 인터뷰]

-韓·中 잘나가자 '아시아와 결별'
타자를 포용하려는 힘 없어져
기세 드센 이들과 엮이지 말고 우리끼리 잘살자는 심리 팽배

-혐한엔 '日헤게모니 비판' 포함
韓·日우호 내세운 아사히 등 좌편향·중도 논리가 힘 잃자
혐한파, 日 주도권 바꾸려 해

-日 바꿀 힘은 한국에 있다
'韓·日화합의 노력' 인정 않고 한국인들이 日비판만 한다면 아베정권에 에너지 공급하는 것
최원석 기자
입력 2014.11.25.

"한국에서는 재특회(在特会·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모임)로 대표되는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증오 발언) 세력과 혐한파(嫌韓派)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엄연히 다릅니다. 헤이트스피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통 일본인들 사이에서 혐한파가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오구라 기조(小倉紀 ·55) 교토(京都)대 종합인간학부 교수는 24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재특회 중심의 헤이트스피치 세력은 언행이 저급하고 과격해 이들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거의 없고 한·일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제한적"이라면서도 "일본에 일반인 혐한파가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국도 객관적 시각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서울대 일본연구소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23일 한국을 찾았다.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24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구라 교수는“1980년대와 비교하면 지금의 일본은 심리적으로 좁아지고 타자(他者)에 대한 포용력도 줄었다”며“여유가 줄고 고독감이 일본 사회를 지배하면서 혐한(嫌韓) 정서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혐한파의 주장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면 '한국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50년간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어 왔는데, 일본인 시각에서 보면 '일본과 더 이상 사귀지 말자'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을 배척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중국 쏠림 현상을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본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매력이 많은 중국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일본이 지금까지 한국과 우호적으로 지내온 오랜 과정이 있는데, 어떻게 한국이 중국 쪽으로만 가버리느냐는 서운한 마음이 일본인들에게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혐한 감정을 더 부추긴다."

―계속 확산되고 있나?

"자신을 혐한파라 부르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혐한파로 분류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꽤 많아졌다."

―왜 늘어나나?

"일본 사회가 심리적으로 좁아지고 있다. 타자(他者)를 포용하려는 힘이 줄어들고 있다. 1980년대 일본과 비교하면 지금의 일본은 완전히 달라졌다. 총체적인 자신감 상실, 고독감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혐한파는 동아시아를 사절(謝絶)하고 싶어 한다. 과거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일본이 19세기 중·후반 근대적 통일국가를 형성해나간 과정) 당시의 대표적 정치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아시아와 결별하겠다는 '탈아(脫亞)론'을 내세웠을 때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한국이 앞서가니까 '기세 드센 이들과 엮이지 말고 우리끼리 조용히 살자'는 심리다. 메이지유신 때와 정반대인 '역(逆)후쿠자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도 혐한 현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나?

"아베 정권의 경우는 혐한파와 또 다르다. 혐한파는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는 순진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성향이 달라질 수 있지만,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 하는 확신범에 가깝다."

―한국에서는 혐일 서적이 눈에 안 띄는데, 일본에서는 왜 그렇게 혐한 서적이 잘 팔릴까.

"한국인들의 경우 일본에 대한 정보가 축적돼 있다. 일본 역시 최근 10년간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지만, 보통의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아직 낯설다. 한류가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고, 한국을 제대로 알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일 우호를 주장했던 친한(親韓) 일본인들이 그렸던 모습과 다르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에 대한 존재를 부각시킨 것이 2005년부터 본격화된 혐한파들이었다."

―한류의 반동(反動)인가?

"한국의 좋은 면, 안 좋은 면을 두루 접하면서 종합적인 정보를 흡수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혐한 서적이 거의 모두 비슷한 내용에 수준도 낮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곧 다음 단계의 한국을 보는 과정으로 넘어갈 것이다. 내가 한국에 유학했을 당시인 1990년대 한국에서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왔다. 기성세대로부터 지금까지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말만 들었는데, 직접 접해보니 '그런 일본은 없더라'는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혐한 서적들은 기존의 친한파 일본인들이 말했던 한국은 '실제 접해보니 없더라'는 식의 내용을 좀 더 수준 낮고 과격한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혐한 현상의 다른 성격은 없는가.

"혐한 현상은 한국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전후(戰後) 일본의 헤게모니(주도권·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일본의 혐한은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혐한파들은 전후 일본의 언론·학계 등이 전부 좌편향 혹은 중도에 치우쳐 있다고 본다. 매스컴의 경우 아사히(朝日)신문을 대표로 하는 한·일 우호 주장 세력이 지금까지 주도권을 잡아왔고, 한국을 연구하는 학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조선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라고 하는 식의 풍조가 지배해 왔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아사히로 대표되는 좌파 논리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 혐한파의 주된 목표 중 하나다. 최근 '아사히 배싱(때리기)'은 단순히 아사히의 위안부 강제 동원 기사 철회 및 사과 문제뿐 아니라 이 같은 의도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이 어떻게 일본에 접근하고 또 일본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 일본이 변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도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양국이 함께 축적해왔던 화합의 노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측의 그런 노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제스처를 취한다면, 일본 사회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질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을 비판만 한다는 인식을 주면 혐한파와 아베 정권에 성장 에너지를 계속 공급해주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의 한·일 사회를 보면 일본보다 한국이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다. 혐한파를 친한파로 돌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 한국에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오구라 기조 교수

오구라 교토대 교수(종합인간학부)는 도쿄대 졸업 후 일본 최대 광고 회사 덴츠(電通)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중 한국에 왔다가 당시 일본과 달리 다이내믹한 사회 분위기에 매혹됐다. 1988년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대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석·박사를 수료했다. 1992년 이후 현재까지 한·중·일 관련으로 20여권의 책을 썼으며 10여권을 편저 또는 일본어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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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출

2014.11.25 07:01:29
한국을 중국 쪽으로 가버리게 한 장본인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이 한국을 이웃으로 취급하기 보다 침략의 대상으로 생각하는데 환멸을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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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애

2014.11.25 08:33:07
일본이 언제는 한국인을 존중한적 있는가? 과거엔 조용히 차별했고 현재는 들어내 놓고 무시 할 뿐이다.. 한국 탓하지 말고 못된 일본종자의 본성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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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찬일

2014.11.25 08:20:05
독일 정부는 유태인 피해자들에게 무려 20조원 이상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그런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역사적 사실, 양심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라는 거다. 사람 죽여놓고, 내가 언제 그랬대? 하는 사람과 피해자가 악수를 나눌 수 있다고 보는가? 일본은 그만한 능력과 지성을 갖춘 나라인데 왜 그렇게 하는 행동은 멍청할까? 답답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