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5

무명 (불교) - 위키백과, 無明(むみょう、梵: avidyā)とは、仏教用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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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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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idyā의 번역
한국어무명, 치,
어리석음, 어둠, 막힘
無明, 癡,
愚癡, 闇, 障

(로마자mu myeong)
영어ignorance,
delusion,
bewilderment,
confusion,
stupidity,
naivety
산스크리트어avidyā
(Dev: अविद्या)
팔리어avijjā
버마어အဝိဇၨာ
(IPA: [əweɪʔzà])
중국어無明
(한어 병음wú míng)
일본어無明
(mumyō)
티베트어མ་རིག་པ
(Wylie: ma rig pa;
THL: ma rigpa
)
태국어อวิชชา
베트남어vô minh
불교 용어 목록
 12연기
혹: 주황
업: 파랑
고: 노랑
 
① 무명
② 행
③ 식
④ 명색
⑤ 6입
⑥ 촉
⑦ 수
⑧ 애
⑨ 취
⑩ 유
⑪ 생
⑫ 노사
v • d • e • h

무명(無明) 또는 (산스크리트어avidyāmohamūdha팔리어avijjā영어ignorancedelusion)는 다음의 분류, 그룹 또는 체계의 한 요소이다.

무명(無明)은 어리석음어둠막힘미혹(迷惑), (癡), (闇), (障), (迷), 우치(愚癡), 무지(無知),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24][25][26][27][28][29][30][31][32][33] 이들 중 미혹(迷惑)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또는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인데,[34] 불교 사전들에서의 정의에 따르면 (迷)는 (事)와 (理)에서 잘못이 있는 것을 말하고, (惑)은 (事)와 (理)에 밝지 못한 것을 말한다.[33][35]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根) · (境) · (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業)으로 인해 해당 (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36][37][38][39])가 일어나며 이 부정사유로 인해 [해당 (境)과 그 이치에 대한, 즉 (事)와 (理)에 대한] (癡) 즉 어리석음이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고 있다.[40][41] (아래 인용문 참조)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세친의 《구사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癡)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어리석게 하는 마음작용으로, 우치(愚癡: 어리석음),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 무지(無智)는 마음이 (事: 사물, 현상)와 (理: 이치, 본질)를 밝게 결택(決擇: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무현(無顯)은 (事: 사물, 현상)와 (理: 이치, 본질)가 은폐되어 마음에 밝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24][25][26]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 등의 《성유식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理: 이치, 본질)와 (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지혜로움)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다.[27][28][29]

현대 학자의 견해들 중 하나에 따르면, 무명(無明)은 산스크리트어 아비드야(avidyā)와 모하(moha)의 번역어로서 명지(明知, vidyā)가 없는 것, 즉 [理: 진실한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 [事: 사물]에 통달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무명(無明)이 12연기(十二緣起)의 제1지분을 이루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명은 미혹된 존재가 겪는 괴로움[苦]의 근본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추구하는 대상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불만족(不滿足)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갈애(渴愛) 즉 탐욕(貪欲) 또는 집착(執著, 執着)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8][42]

정의[편집]

초기불교[편집]

고타마 붓다[편집]

잡아함경》에는 무명(無明)에 대한 정의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번뇌성의 마음작용(특히, 부정사유와 무명과 갈애(집착, 애욕))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래에 인용된, 고타마 붓다의 설법이 있다.

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根) · (境) · (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業)으로 인해 해당 (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36][37])가 일어나며, 즉 구체적으로는 악욕[欲, 惡欲: 불선한 욕구, 원함, 희망, 특히 탐욕· (恚, 瞋: 성냄) · (害: 해치려 함) 등의 번뇌성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며,[38][39][43] 이 부정사유로 인해 [해당 (境)과 그 이치에 대한, 즉 (事)와 (理)에 대한] (癡) 즉 어리석음이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8정도의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다시 무명은 갈애(집착, 애욕)의 원인이 되며, 다시 갈애(집착, 애욕)는 염오(染污)한 의 원인이 되며, 염오(染污)한 은 오염된 마음, 즉 3계에 속박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지만, 이렇게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는 다시 [더 큰 또는 더 오염된]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云何有因.有緣.有縛法經。謂眼有因.有緣.有縛。

何等為眼因.眼緣.眼縛。謂眼業因.業緣.業縛。

業有因.有緣.有縛。何等為業因.業緣.業縛。謂業愛因.愛緣.愛縛。

愛有因.有緣.有縛。何等為愛因.愛緣.愛縛。謂愛無明因.無明緣.無明縛。

無明有因.有緣.有縛。何等無明因.無明緣.無明縛。謂無明不正思惟因.不正思惟緣.不正思惟縛。

不正思惟有因.有緣.有縛。何等不正思惟因.不正思惟緣.不正思惟縛。謂緣眼.色。生不正思惟。生於癡。

緣眼.色。生不正思惟。生於癡。彼癡者是無明。癡求欲名為愛。愛所作名為業。

如是。比丘。不正思惟因無明為愛。

無明因愛。愛因為業。業因為眼。耳.鼻.舌.身.意亦如是說。是名有因緣.有縛法經。

—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한문본

무엇을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 · 有緣 · 有縛法經)〉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안식[眼]에는 (因)이 있고 (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안식[眼]의 (因), 안식의 (緣), 안식을 속박시키는 자[縛]인가? [지금까지 쌓은] (業, 즉 염오(染污)한 )이 안식의 이고, 이 안식의 이며, 이 안식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이다.

(業, 즉 염오(染污)한 )에도 (因)이 있고 (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의 의 을 속박시키는 자인가? 갈애[愛, 집착, 애욕]가 의 이며, 의 이며, 을 [즉, 안식의 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이다.

갈애[愛, 집착, 애욕]에도 (因)이 있고 (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갈애(집착)의 갈애(집착)의 갈애(집착)를 속박시키는 자인가? 무명(無明)이 갈애(집착)의 이며, 갈애(집착)의 이며, 갈애(집착)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이다.

무명(無明)에도 (因)이 있고 (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무명의 , 무명의 , 무명을 속박시키는 자인가?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의 이며, 무명의 이며, 무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이다.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에도 (因)이 있고 (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부정사유의 부정사유의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인가? 안식[眼]과 색경[色]을 인연[緣]하여 부정사유가 생기고 그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어리석음[癡]이 다시 부정사유의 이며, 부정사유의 이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이다.

안식과 색경을 인연하여 부정사유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을 일으킬 때, 그 어리석음[癡]이 바로 곧 무명(無明)이다. 바로 이 어리석음을 바탕하여 구하고 원하는 것[求欲]을 갈애[愛, 집착, 애욕]라 하며, 갈애[愛, 집착, 애욕]에 바탕하여 짓는 것[所作]을 (業, 즉 염오(染污)한 )이라 한다.

이와 같이[如是], 비구들이여,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는 무명(無明)을 원인[因]으로 하여 갈애[愛, 집착, 애욕]가 된다[不正思惟因無明為愛].

[이와 같이]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집착, 애욕)가 생기고[無明因愛], 갈애(집착, 애욕)를 원인으로 하여 (業, 즉 염오(染污)한 )이 생기고[愛因為業], (염오(染污)한 )을 원인으로 하여 [갖가지로 오염된, 즉 갖가지 번뇌에 물든, 즉 3계의 색경에 속박된] 안식[眼]이 생긴다[業因為眼]. 이식[耳] · 비식[鼻] · 설식[舌] · 신식[身] · 의식[意]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일러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緣 · 有縛法經]〉이라 한다.

—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한글본

사리불[편집]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에서는 염부차(閻浮車)가 사리불(舍利弗)에게 무명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끊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있으며, 이에 사리불은 무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명을 끊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소경(小經)에서 염부차는 사리불의 설명을 통해 무명이란 '어둠이 크게 쌓이고 모인 것[大闇積聚]'으로 이해하며, 그리고 사리불은 8정도(八正道)가 무명을 끊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閻浮車問舍利弗。所謂無明者。云何為無明。

舍利弗言。所謂無明者。於前際無知。後際無知。前.後.中際無知。佛.法.僧寶無知。苦.集.滅.道無知。善.不善.無記無知。內無知.外無知。若於彼彼事無知闇障。是名無明。 
閻浮車語舍利弗。此是大闇積聚。
復問。舍利弗。有道有向。修習多修習。斷無明耶。 
舍利弗言。有。謂八正道。正見。乃至正定。

—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 한문본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무명(無明)이라고 말들 하는데, 무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무명이라는 것은 과거[前際]에 대하여 이 없고[無知], 미래[後際]에 대하여 이 없으며, 과거[前際] · 미래[後際] · 현재[中際]에 대하여 이 없고,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僧寶)에 대하여 이 없으며, 괴로움[苦] · 괴로움의 발생[集] · 괴로움의 소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이 없고 (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에 대하여 이 없으며, [內]에 대해서도 이 없고 [外]에 대해서도 이 없으며, 혹은 이러저러한[彼彼] [事: 개개의 사물, 특히 앞에 나열한 이치들과 관련된 개개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앎이 없고[無知] 어둡고[闇] 막히면[障],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어둠이 크게 쌓이고 모인 것[大闇積聚]이겠군요.

또 물었다. 사리불이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무명을 끊게 되는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있습니다. 이른바 8정도(八正道)이니, 즉 바른 소견[正見]과……(내지)……바른 선정[正定]입니다.

—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 한글본

부파불교[편집]

학자들은 설일체유부의 논서들이 세 단계의 발전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는데, 주요 논서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44][45][46]

아래 단락들은 이러한 아비달마 논서들의 발전 순서에 의거하여 배열되어 있으며, 해당 아비달마 논서들에서 나타나는 무명(無明) 즉 (癡)에 대한 정의를 기술한다.

아비달마집이문족론[편집]

사리자(舍利子)는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3법품(三法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우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癡不善根者。癡云何。答謂於前際無知。後際無知。前後際無知。於內無知。外無知。內外無知。於業無知。異熟無知業異熟無知。於善作業無知。惡作業無知。善惡作業無知。於因無知因所生法無知。於佛無知法無知僧無知。於苦無知集無知滅無知道無知。於善法無知不善法無知。於有罪法無知無罪法無知。於應修法無知不應修法無知。於下劣法無知勝妙法無知。於黑法無知白法無知。於有敵對法無知。於緣生法無知。於六觸處如實無知。如是無知無見非現觀。黑闇愚癡無明盲冥。罩網纏裹頑騃渾濁障蓋。發盲發無明發無智。滅勝慧障礙善品令不涅槃。無明漏無明暴流無明軛。無明毒根無明毒莖。無明毒枝無明毒葉。無明毒花無明毒果。癡等癡極癡改等改極改。癡類癡生改類改生。總名為癡。

—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삼법품(三法品)〉. 한문본

(문) "우치의 불선근[癡不善根]"이라 했는데, 우치[癡]란 어떤 것인가?

(답) 전제(前際)에 대하여 이 없고[無知] 후제(後際)에 대하여 이 없고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이 없으며, [內]에 대하여 이 없고 바깥[外]에 대하여 이 없고 안팎[內外]에 대하여 이 없으며, (業)에 대하여 이 없고, 이숙(異熟)에 대하여 이 없고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이 없으며, (善)을 지을 업[善作業]에 대하여 이 없고 (惡)을 지을 업[惡作業]에 대하여 이 없고 무기[善惡, 無記]를 지을 업[善惡作業]에 대하여 이 없는 것이다.

원인[因]에 대하여 이 없고 원인으로 생긴 업[因所生法]에 대하여 이 없으며, (佛)에 대하여 이 없고 (法)에 대하여 이 없고 승가[僧]에 대하여 이 없으며, 괴로움[苦]에 대하여 이 없고 괴로움의 원인[集]에 대하여 이 없으며, 괴로움의 소멸[滅]에 대하여 이 없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도(道)에 대하여 이 없으며, 착한 법[善法]에 대하여 이 없고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에 대하여 이 없으며, 죄 있는 법[有罪法]에 대하여 이 없고 죄없는 법[無罪法]에 대하여 이 없는 것이다.

닦아야 할 법[應修法]에 대하여 이 없고 닦지 않아야 할 법[不應修法]에 대하여 이 없으며, 하열한 법[下劣法]에 대하여 이 없고 훌륭한 법[勝妙法]에 대하여 이 없으며, 검은 법[黑法]에 대하여 이 없고 흰 법[白法]에 대하여 이 없으며,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인연으로 생긴 법[緣生法]에 대하여 이 없으며, 6촉처(六觸處)를 사실대로 모르는 것이다[如實無知].

이와 같이 이 없고[無知], 소견이 없으며[無見], 현관이 아니고[非現觀], 몹시 어두우며[黑闇], 어리석고 못났으며[愚痴], 밝음(총명)이 없고[無明], 눈이 멀었으며[盲冥], 가리워 갇혔고[罩網], 감아 싸였으며[纏裏], 미련하고[頑騃], 혼탁(渾濁)하며, 가리고 덮여서[障蓋], 소경이 되고 무명(無明)을 일으키며, 무지(無智)를 일으켜서 뛰어난 지혜[勝慧]를 없애고,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또 무명(無明漏)와 무명폭류(無明暴流)의 무명의 멍에[軛]와 무명의 독 뿌리[毒根]와 무명의 독 줄기[毒莖]와 무명의 독 가지[毒枝]와 무명의 독 잎사귀[毒葉]와 무명의 독 꽃[毒花]과 무명의 독 열매[毒果]와 치(癡), 등치(等癡), 극치(極癡)와 개(改), 등개(等改), 극개(極改) 등 치(癡)의 종류와 치로 생기는 것과 개(改)의 종류와 개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서 우치[癡]라 한다.

—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삼법품(三法品)〉. 한글본

아비달마법온족론[편집]

 12연기
혹: 주황
업: 파랑
고: 노랑
 
① 무명
② 행
③ 식
④ 명색
⑤ 6입
⑥ 촉
⑦ 수
⑧ 애
⑨ 취
⑩ 유
⑪ 생
⑫ 노사
v • d • e • h

목건련(目乾連)은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또한, 목건련은 무명연행(無明緣行), 즉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있다[無明緣行]'는 12연기(十二緣起)의 제1지분인 무명(無明)과 제2지분인 (行)의 연기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무명연행(無明緣行)이란 무명을 인연하여 (貪) · (瞋) · 치(癡)의 불선근이 생기는 것과 8정도(八正道)의 반대인 8사(八邪) 또는 8사행(八邪行)이 생기는 것을 포괄한다고 말하고 있다.

復次無明緣行者。云何無明。謂於前際無知。後際無知。前後際無知。於內無知。外無知。內外無知。於業無知。異熟無知。業異熟無知。於善作業無知。惡作業無知。善惡作業無知。於因無知。因所生法無知。於佛法僧無知。於苦集滅道無知。於善不善法無知。於有罪無罪法無知。於應脩不應脩法無知。於下劣勝妙法無知。於黑白法無知。於有敵對法無知。於緣生無知。於六觸處如實無知。如是無知無見非現觀。黑闇愚癡。無明盲冥。罩網纏裏。頑騃渾濁。障蓋發盲。發無明。發無智。發劣慧。障礙善品。令不涅槃。無明漏。無明瀑流。無明軛。無明毒根。無明毒莖。無明毒枝。無明毒葉。無明毒花。無明毒果。癡等癡極癡。欣等欣極欣。癡類癡生。總名無明。



云何無明緣行。謂世尊說。苾芻當知。無明為因。無明為緣。故貪瞋癡起。此貪瞋癡性。是名無明緣行。

復次如世尊說。苾芻當知。無明為前行。無明為[巾*票]幟。故起無量種惡不善法。謂無慚無愧等。由無慚無愧故起諸邪見。由邪見故起邪思惟。由邪思惟故起邪語。由邪語故起邪業。由邪業故起邪命。由邪命故起邪勤。由邪勤故起邪念。由邪念故起邪定。此邪見邪思惟邪語邪業邪命邪勤邪念邪定。是名無明緣行。

—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 한문본

또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있다[無明緣行]'고 함에서 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



이른바 전제(前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후제(後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內]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外]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안팎[內外]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이숙(異熟)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과 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착하게 짓는 업[善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악하게 지은 업[惡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착하거나 악하게 짓는 업[善惡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因)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으로 생기는 법[因所生法]에 대하여도 아는 것이 없다.

또 부처님[佛] · 가르침[法] · 승가[僧]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괴로움[苦] · 괴로움의 원인[集] · 괴로움의 소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착하고 착하지 않은 법[善不善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죄가 있고 죄가 없는 법[有罪無罪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마땅히 닦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할 법[應修不應修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하열하고 승묘한 법[下劣勝妙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희고 검은 법[白黑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緣生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6촉처(六觸處)에 대하여 사실대로 아는 것이 없는 것[如實無知]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없고[無知] 보는 것이 없으며[無見], 현관이 아니고[非現觀] 몹시 어둡고[黑闇] 어리석고[愚癡] 밝음(총명)이 없고[無明], 눈이 멀었고[盲冥] 우리에 갇혔고[罩網] 감아 싸였고[纏裏] 미련하고[頑騃] 혼탁하고[渾濁] 가리고 덮였으며[障蓋], 소경이 되게 하고 밝음(총명)이 없게 하며[發無明], 지혜가 없게 하고[發無智] 하열한 지혜를 일으키며[發劣慧],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을 증하지 못하게 하며, 무명루(無明漏) · 무명폭류(無明暴流) · 무명액(無明軛)과 무명의 독 뿌리[無明毒根] · 무명의 독 줄거리[毒莖] · 무명의 독 가지[毒枝] · 무명의 독 잎[毒葉] · 무명의 독 꽃[毒花] · 무명의 독 열매[毒果]와 어리석고[癡] 평등하게 어리석고[等癡] 극히 어리석으며[極癡], 사납고[欣] 평등하게 패려궂고[等欣] 극히 패려궂으며[極欣], 어리석음의 종류[癡類]와 어리석음[癡]으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 무명(無明)이라 한다.

어떤 것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行)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알아야 한다. 무명을 인(因)으로 하고 무명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이 일어나느니라"고 하셨다. 이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의 성품을 바로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기는 것이라[無明緣行]'고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을 앞의 행[前行]으로 하고 무명을 표치[幟]로 삼기 때문에 한량없는 종류의 악한 법[惡不善法]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무참(無慚) · 무괴(無愧) 등이다. 이 무참 · 무괴로 말미암아 모든 삿된 소견[邪見]을 일으키고 삿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삿된 생각[邪思惟]을 일으키며, 삿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삿된 말[邪語]을 일으키고 삿된 말로 말미암아 삿된 행위[邪業]를 일으키며, 삿된 행위로 말미암아 삿된 생활[邪命]을 일으키고 삿된 생활로 말미암아 삿된 노력[邪勤]을 일으키며, 삿된 노력으로 말미암아 삿된 기억[邪念]을 일으키고 삿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삿된 선정[邪定]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 삿된 소견 · 삿된 생각 · 삿된 말 · 삿된 행위 · 삿된 생활 · 삿된 노력 · 삿된 기억 · 삿된 선정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한다.

—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 한글본

아비달마품류족론[편집]

세우(世友)는 《아비달마품류족론》 제3권 제4품〈변칠사품(辯七事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無明云何。謂三界無知性。


무명(無明)은 무엇인가? 3계(界)에 아는 것이 없는 성품[無知性]이다.

— 《아비달마품류족론》 제3권 제4품〈변칠사품(辯七事品)〉. 한문본 & 한글본

아비달마발지론[편집]

가다연니자(迦多衍尼)는 《아비달마발지론》 제1권 제1잡온(雜蘊) 제3〈보특가라납식(補特伽羅納息)〉에서 다음과 같이, 고타마 붓다의 무명(無明) 즉 치(癡)에 대한 언급을 빌어서 무명(無明)을 정의하고 있다.

此業緣。世尊說一煩惱。謂無明。


이 [과거세의] [此業]을 인연하여 각각의 번뇌(煩惱)가 일어난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즉, 이러한 상황을, 즉 과거의 업에 바탕하여 탐 · 진 · 해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 《아비달마발지론》 제1권 제1잡온(雜蘊) 제3〈보특가라납식(補特伽羅納息). 한문본

아비달마구사론[편집]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세친(世親)의 《구사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癡)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어리석게 하는 마음작용으로, 우치(愚癡: 어리석음),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24][25][26]

무지(無智)는 마음이 (事: 사물, 현상)와 (理: 이치, 본질)를 밝게 결택(決擇: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무현(無顯)은 (事: 사물, 현상)와 (理: 이치, 본질)가 은폐되어 마음에 밝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24][25][26]

대승불교[편집]

현대의 학자들에 따르면 인도불교의 유식학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뉘는데, 제1기는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의 유식학이고, 제2기는 세친(世親)의 유식학이고, 제3기는 호법(護法)과 안혜(安慧) 등의 10대 논사의 유식학이다.[47]

아래 단락들은 이러한 구분에 의거하여 배열되어 있으며, 해당 유식학 논서들에서 나타나는 무명(無明) 즉 (癡)에 대한 정의를 기술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잡집론[편집]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무착(無着)의 《대승아비달마집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3계(三界)에 대해 무지(無知)해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29][30][31]

그리고, 무명(無明) 또는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온갖 (法)에 대해 잘못된 결정[邪決定]을 내리게 하고, 의심[疑]을 일으키게 하고, (雜: 잡염)을 일으키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다.[29][30][31]

대승아비달마집론》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안혜(安慧)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위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의 정의에서 '3계(三界)에 대한 무지(無知)'라 표현된 것을 '3계(三界)에 대한 무지(無智)'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 따르면, 위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의 정의에서, 잘못된 결정[邪決定]이란 전도된 지혜[顛倒智]를 말하며, 의심[疑]은 유예(猶豫)하는 것을 말하며, (雜)은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을 말한다. 그리고 발동근거[所依]가 된다는 것은 우치(愚癡: 어리석음)로부터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30][31]

대승오온론·광오온론[편집]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세친(世親)의 《대승오온론》과 그 주석서인 안혜(安慧)의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업과(業果), 즉 과 그에 따른 과보, 즉 인과의 법칙과, 4성제[諦, 四聖諦]와, 3보[寶, 三寶]에 대해 무지(無智: 밝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할 수 없음)해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32][48]

또한, 《대승오온론》과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무명(無明)에는 구생기(俱生起)와 분별기(分別起)의 2종이 있다. 즉, 전생(前生)의 에 합당하게 태어날 때 타고난 무명이 있고, 이번 생에서 잘못된 스승[邪師]이나 잘못된 가르침[邪敎] 또는 자신의 사사유(邪思惟, 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잘못된 생각이나 논리 또는 추리)에 의해 후천적으로 생긴 무명이 있다.[32][48]

성유식론[편집]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護法) 등의 《성유식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理: 이치, 본질)와 (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27][28][29]

그리고,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지혜로움)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다.[27][28][29]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 T.99, 제9권 제252경 〈우파선나경(優波先那經)〉. p. T02n0099_p0061a26 - T02n0099_p0061b17. 3독(三毒)
    "佛即為舍利弗而說偈言。
    ... 貪欲瞋恚癡  世間之三毒
    如此三毒惡  永除名佛寶
    法寶滅眾毒  僧寶亦無餘
    破壞凶惡毒  攝受護善人
    佛破一切毒  汝蛇毒今破"
  2.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 K.650, T.99, 제9권 제252경 〈우파선나경(優波先那經)〉. p. 333 / 2145. 3독(三毒)
    "부처님께서 곧 사리불을 위하여 게송을 말씀하셨다.
    ...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이 세간의 세 가지 독,
    이러한 세 가지 악하고 독한 것
    영원히 없앤 자를 불보(佛寶, 깨달은 자, 부처)라 하네.

    법보(法寶)는 온갖 독을 소멸해 없애고
    승보(僧寶)도 또한 흉악한 독을
    남김이 없이 모두 쳐부수고는
    착한 사람을 거두어 보호하네.
    깨달은 자(부처)는 모든 독을 쳐부수니
    너 뱀독도 이젠 부수어졌느니라."
  3.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 T.99, 제24권 제613경 〈불선취경(不善聚經)〉. p. T02n0099_p0171c23 - T02n0099_p0171c26. 불선근(不善根)
    "爾時。世尊告諸比丘。有不善聚.善聚。何等為不善聚。謂三不善根。是名正說。所以者何。純不善積聚者。謂三不善根。云何為三。謂貪不善根.恚不善根.癡不善根。"
  4.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 K.650, T.99, 제24권 제613경 〈불선취경(不善聚經)〉. p. 956 / 2145. 불선근(不善根)
    "그 때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착하지 않은 무더기[不善聚]와 착한 무더기[善聚]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무더기인가? 세 가지 착하지 않은 뿌리[不善根]이니 이것은 바른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순전히 착하지 않은 무더기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 가지 착하지 않은 뿌리란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탐욕의 착하지 않은 뿌리[貪不善根]와 성냄의 착하지 않은 뿌리[恚不善根]와 어리석음의 착하지 않은 뿌리[癡不善根]이니라."
  5.  星雲, "三毒". 2012년 10월 30일에 확인
    "三毒: 指貪欲、瞋恚、愚癡(又稱貪瞋癡、淫怒癡、欲瞋無明)三種煩惱。又作三火、三垢。一切煩惱本通稱為毒,然此三種煩惱通攝三界,係毒害眾生出世善心中之最甚者,能令有情長劫受苦而不得出離,故特稱三毒。此三毒又為身、口、意等三惡行之根源,故亦稱三不善根,為根本煩惱之首。"
  6.  세친 조, 현장 한역 & T.1558, 제13권. p. T29n1558_p0071b05 - T29n1558_p0071b07. 자성불선(自性不善)
    "自性不善。謂無慚愧三不善根。由有漏中唯無慚愧及貪瞋等三不善根。不待相應及餘等起。體是不善猶如毒藥。"
  7.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 K.955, T.1558, 제13권. p. 625 / 1397. 자성불선(自性不善)
    "자성불선(自性不善)이란 무참·무괴와 세 가지 불선근을 말한다. 즉 유루법 중에서 오로지 무참·무괴와 아울러 탐·진·치 등의 세 가지 불선근은 [다른 불선법과] 상응하거나 다른 어떠한 법에 의해 등기될 필요 없이 그 자체가 바로 불선이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독약과도 같다."
  8. ↑ 이동:  星雲, "根本煩惱". 2012년 10월 30일에 확인
    "根本煩惱: 梵語 mūla-kleśa。又作本惑、根本惑。略稱作煩惱。與「隨煩惱」對稱。指諸惑之體可分為貪、瞋、癡、慢、見、疑等六種根本之煩惱。"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3723DTITLE根本煩惱 根本煩惱]". 2012년 10월 30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9.  星雲, "六隨眠". 2012년 10월 31일에 확인. 6수면(六隨眠)
    "六隨眠: 謂貪、瞋、癡、慢、疑、見等六種根本煩惱,此乃俱舍家之說。隨眠即根本煩惱之異稱,根本煩惱隨逐有情,行相微細,故稱隨眠。"
  10.  세친 조, 현장 한역 & T.1558, 제19권. p. T29n1558_p0098b18 - T29n1558_p0098c03. 6수면(六隨眠)
    "前言世別皆由業生。業由隨眠方得生長。離隨眠業無感有能。所以者何。隨眠有幾。頌曰。   隨眠諸有本  此差別有六
      謂貪瞋亦慢  無明見及疑
    論曰。由此隨眠是諸有本故業離此無感有能。何故隨眠能為有本。以諸煩惱現起能為十種事故。一堅根本。二立相續。三治自田。四引等流。五發業有。六攝自具。七迷所緣。八導識流。九越善品。十廣縛義。令不能越自界地故。由此隨眠能為有本。故業因此有感有能。此略應知差別有六。謂貪瞋慢無明見疑。頌說亦言。意顯慢等亦由貪力於境隨增。由貪隨增義如後辯。及聲顯六體各不同。"
  11.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 K.955, T.1558, 제19권. pp. 853-854 / 1397. 6수면(六隨眠)
    "앞(권제13 초)에서 세간의 차별은 모두 업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업은 수면(隨眠, anusaya)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장할 수 있으며, 수면을 떠난 업은 유(有, 욕계·색계·무색의 3유)를 초래할 만한 공능을 갖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이며, 수면에는 몇 가지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면은 모든 '유(有)'의 근본으로,
      이것의 차별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탐(貪)·진(瞋)과, 역시 만(慢)·
      무명(無明)·견(見), 그리고 의(疑)이다.
      隨眠諸有本 此差別有六
      謂貪瞋亦慢 無明見及疑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수면은 바로 모든 '유'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떠난 업은 유를 초래할 만한 어떠한 공능(功能)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수면이 능히 '유'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번뇌는 현기(現起)하면 능히 열 가지 사업[事]을 행하기 때문으로, 첫 번째는 근본(根本)을 견고하게 하며,1) 두 번째는 [번뇌의] 상속을 일으키며, 세 번째는 자신의 소의신[自田]이 번뇌를 일으키기에 적합하게 하며, 네 번째는 등류(等流)[인 수번뇌(隨煩惱)]를 인기하며, 다섯 번째 업유(業有) 즉 후유를 초래하는 업을 일으키며, 여섯 번째는 자구(自具)를 포섭하며,2) 일곱 번째 [정혜(正慧)를 손상시켜] 소연에 대해 미혹하게 하며, 여덟 번째 식(識)의 흐름을 인도하며,3) 아홉 번째는 선품(善品)을 어기게 하며, 열번째는 널리 속박하는 것이니, [유정을 속박하여] 자계·자지를 초월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수면은 이러한 열 가지 사업으로 말미암아 능히 '유'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업은 이것에 의해 비로소 '유'를 초래할 공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수면의 차별에는 간략히 여섯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탐(貪, raga)과 진(瞋, pratigha)과 만(慢, mana)과 무명(無明, avidya)과 견(見, dṛṣṭi)과 의(疑, vicikitsa)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역시'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만' 등도 역시 탐의 힘으로 말미암아 경계에 수증(隨增)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탐으로 말미암아 수증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뒤에서 분별하는 바와 같다. 또한 [본송에서] '그리고'라고 하는 말은 여섯 가지 수면의 본질[體]이 각기 동일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1) 여기서 '근본'은 번뇌의 득(得)을 말한다. 즉 번뇌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번뇌의 득이 더욱더 견고해져 끊을래야 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 여기서 '자구'는 번뇌 자신의 자량이 되는 비리작의(非理作意) 즉 참답지 못한 사유를 말한다.
    3) 식의 흐름에는 다음 생을 받을 때 부모에 대한 애념(愛念)을 일으키는 속생(續生)의 식과, 소연의 경계에 대해 촉(觸)을 일으키는 촉연(觸緣)의 식이 있다. 곧 번뇌는 후유의 소연에 대해 능히 속생의 식을 일으키며 소연에 대해 능히 염오식을 낳기 때문에 '식의 흐름을 인도한다'고 말한 것이다."
  12.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1b15 - T31n1585_p0031b18. 번뇌심소(煩惱心所)
    "煩惱心所其相云何。頌曰。   12煩惱謂貪瞋  癡慢疑惡見
    論曰。此貪等六性是根本煩惱攝故。"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1b15 T31n1585_p0031b15 - T31n1585_p0031b18]. 번뇌심소(煩惱心所)"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3.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304-305 / 583. 번뇌심소(煩惱心所)
    "번뇌심소의 양상은 어떠한가? 게송(『삼십송』의 제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뇌심소는 탐(貪)·진(瞋)·
      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이다.124)
    논하여 말한다. 이 탐 등 여섯 가지는 체성이 근본번뇌에 포함되기 때문에 번뇌심소라고 이름한다.
    124) 번뇌심소 여섯 가지를 밝힌다. 모든 번뇌의 근간인 근본번뇌를 일으키는 심소이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제6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304 304-305 / 583]. 번뇌심소(煩惱心所)"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4.  星雲, "". 2012년 12월 28일에 확인. 9결(九結)
    "結: (一)梵語 bandhana 或 sajyojana。又作結使。即使煩惱。結,為繫縛之義;蓋煩惱繫縛眾生於迷境,令不出離生死之苦,故有此異稱。諸經論所說結之類別有多種,略舉如下:... (五)九結。雜阿含經卷十八、阿毘達磨發智論卷三、辯中邊論卷上等列舉愛、恚、慢、無明、見、取、疑、嫉、慳等九種煩惱為九結。此係六種根本煩惱(將「見」分身、邊、邪三見,稱為見結;見取見與戒禁取見合併為取結)加上嫉結、慳結,而成九結。大毘婆沙論卷五十說九結之體(自性)共有一百種。〔雜阿含經卷三十二、大毘婆沙論卷四十六、卷四十九、成實論卷十雜煩惱品、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六〕(參閱「九結」、「四結」) "
  15.  세우 조, 현장 한역 & T.1542, 제1권. p. T26n1542_p0693b15 - T26n1542_p0693b16. 무명결(無明結)
    "無明結云何。謂三界無智。"
  16.  세우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 K.949, T.1542, 제1권. p. 7 / 448. 무명결(無明結)
    "무명결(無明結)이란 무엇인가? 3계(界)에서 지혜가 없는 것[無智]이다."
  17.  운허, "十二緣起(십이연기)".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十二緣起(십이연기): 또는 십이인연(十二因緣)ㆍ십이유지(十二有支)ㆍ십이지(十二支)ㆍ십이인생(十二因生)ㆍ십이연문(十二緣門)ㆍ십이견련(十二牽連)ㆍ십이극원(十二棘園)ㆍ십이중성(十二重城)ㆍ십이형극림(十二荊棘林). 3계에 대한 미(迷)의 인과를 12로 나눈 것. (1) 무명(無明). 미(迷)의 근본인 무지(無知). (2) 행(行). 무지로부터 다음의 의식 작용을 일으키는 동작. (3) 식(識). 의식 작용. (4) 명색(名色).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형체가 있는 물질. (5) 육처(六處).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의 5관(官)과 의근(意根). (6) 촉(觸). 사물에 접촉함. (7) 수(受). 외계(外界)로부터 받아들이는 고(苦)ㆍ낙(樂)의 감각. (8) 애(愛).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함. (9) 취(取). 자기가 욕구 하는 물건을 취함. (10) 유(有). 업(業)의 다른 이름. 다음 세상의 결과를 불러올 업. (11) 생(生). 이 몸을 받아 남. (12) 노사(老死). 늙어서 죽음. 또 어떤 때는 연기를 해석할 적에 1찰나(刹那)에 12연기를 갖춘다는 학설과, 시간적으로 3세(世)에 걸쳐 설명하는 2종이 있음. 뒤의 뜻을 따르면 양중인과(兩重因果)가 있음. 곧 식(識)으로 수(受)까지의 5를 현재의 5과(果)라 하고, 무명ㆍ행을 현재의 과보를 받게 한 과거의 2인(因)이라 함(過現一重因果). 다음에 애ㆍ취는 과거의 무명과 같은 혹(惑)이요, 유(有)는 과거의 행과 같은 업(業)이니, 이 현재는 3인(因)에 의하여 미래의 생ㆍ노사의 과(果)를 받는다 함(現末一重因果). ⇒노사(老死)"
  18. ↑ 이동:  星雲, "十二因緣".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十二因緣  梵語 dvādaśāvgapratītya-samutpāda。十二種因緣生起之意。又作二六之緣、十二支緣起、十二因緣起、十二緣起、十二緣生、十二緣門、十二因生。即構成有情生存之十二條件(即十二有支)。  (一)阿含經所說根本佛教之基本教義,即:無明(梵 avidyā)、行(梵 sajskāra)、識(梵 vijñāna)、名色(梵 nāma-rūpa)、六處(梵 sad-āyatana)、觸(梵 sparśa)、受(梵 vedanā)、愛(梵 trsnā)、取(梵 upādāna)、有(梵 bhava)、生(梵 jāti)、老死(梵 jarā-marana)。據長阿含卷十大緣方便經載,緣癡有行,緣行有識,緣識有名色,緣名色有六入,緣六入有觸,緣觸有受,緣受有愛,緣愛有取,緣取有有,緣有有生,緣生有老、死、憂、悲、苦惱大患所集,是為此大苦陰緣。即此十二支中,各前者為後者生起之因,前者若滅,後者亦滅,故經中以(大一‧六七上)「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中略)此無故彼無,此滅故彼滅」之語,說明其相依相待之關係。即一切事物皆具有相依性,皆由因、緣所成立,故說無常、苦、無我。
     在阿含經典中,除十二緣起說之外,另有十支、九支、八支、七支等緣起說,廣義而言,彼等皆含攝於十二緣起說中。又雜阿含經卷十二謂,緣起法乃永恆不變之真理,佛觀察此真理而開悟,並為眾生開示此法。又若自有情生存之價值與意義方面觀察十二緣起之意義,則指人類生存之苦惱如何成立(流轉門),又如何滅除苦惱而至證悟(還滅門)。即有情之生存(有)乃由識(精神之主體)之活動開始,識之活動成為生活經驗(行),復由活動之蓄積形成識之內容。然識之活動乃識透過感覺器官(眼、耳、鼻、舌、身、意六處)接觸認識之對象(即一切心、物〔名色〕),此係主觀上感受之事。凡夫之識以無明(對佛教真理無自覺)為內相,以渴愛(求無厭之我欲)為外相,渴愛即識之根本相,且發展而取一切為我,成為我執(取),故由此染污識之活動所薰習之識,必應經驗生、老、死等所代表之人間苦、無常苦。反之,聖者因滅無明及渴愛,故人間苦亦滅。 "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1653DTITLE十二因緣 十二因緣]". 2012년 11월 6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9.  세친 조, 현장 한역 & T.1558, 제4권. p. T29n1558_p0019b28 - T29n1558_p0019c03.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大煩惱法地名大煩惱地。此中若法大煩惱地所有名大煩惱地法。謂法恒於染污心有。彼法是何。頌曰。   癡逸怠不信  惛掉恒唯染"
  20.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 K.955, T.1558, 제4권. p. 168 / 1397.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나아가 대번뇌법(大煩惱法)의 '지'를 대번뇌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대번뇌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대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항상 염오심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치(癡)·일(逸)·태(怠)·불신(不信)과
      혼(惛)·거(擧)는 오로지 항상 염오한 것이다.
      癡逸怠不信 惛掉恒唯染"
  21.  운허, "大煩惱地法(대번뇌지법)".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大煩惱地法(대번뇌지법): 【범】 kleśa-mahābhūmika 악심(惡心)과 유부무기(有覆無記)와 상응하는 정신작용. 치(癡)ㆍ방일(放逸)ㆍ해태(懈怠)ㆍ불신(不信)ㆍ혼침(惽沈)ㆍ도거(掉擧)의 6법."
  22.  星雲, "五位七十五法".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五位七十五法: ... (3)大煩惱地法(與一切不善心,及雖非惡非善,卻有礙於道的心相應之心所),有癡、放逸、懈怠、不信、惛沈、掉舉等六種。"
  23.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4, p. T31n1614_p0855b23 - T31n1614_p0855c06. 심소유법(心所有法)
    "第二心所有法。略有五十一種。
    分為六位。一遍行有五。二別境有五。三善有十一。四煩惱有六。五隨煩惱有二十。六不定有四。
    一遍行五者。一作意二觸三受四想五思。
    二別境五者。一欲二勝解三念四定五慧。
    三善十一者。一信二精進。三慚四愧。五無貪六無嗔七無癡。八輕安九不放逸十行捨十一不害。
    四煩惱六者。一貪二嗔。三慢四無明。五疑六不正見。
    五隨煩惱二十者。一忿二恨。三惱四覆。五誑六諂。七憍八害。九嫉十慳。十一無慚十二無愧。十三不信十四懈怠。十五放逸十六惛沈。十七掉舉十八失念。十九不正知二十散亂。
    六不定四者。一睡眠二惡作。三尋四伺。"
  24. ↑ 이동:    세친 조, 현장 한역 & T.1558, 제4권. p. T29n1558_p0019c04 - T29n1558_p0019c05. 치(癡)
    "癡者。所謂愚癡。即是無明無智無顯。"
  25. ↑ 이동: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 K.955, T.1558, 제4권. p. 168 / 1397. 치(癡)
    "치(癡)란 이른바 우치(愚癡)를 말한다. 즉 이는 바로 무명(無明)이고, 무지(無智)이며, 무현(無顯)인 것이다.35)
    35) 무지는 밝게 결택(決擇)할 수 없는 상태이고, 무현이란 일체 사리(事理)의 경계가 은폐되어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26. ↑ 이동:    권오민 2003, 69-81. 치(癡)쪽
    "'치'란 어리석음으로, 무명無明 혹은 무지無智라고도 한다."
  27.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1b23 - T31n1585_p0031b26. 치(癡)심소
    "云何為癡。於諸理事迷闇為性。能障無癡一切雜染所依為業。謂由無明起疑邪見貪等煩惱隨煩惱業。能招後生雜染法故。"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1b23 T31n1585_p0031b23 - T31n1585_p0031b26]. 치(癡)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28.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305-306 / 583. 치(癡)심소
    "무엇을 ‘치(癡)심소’127)라고 하는가? 모든 본질과 현상에 대해서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무치(無癡)심소를 장애하고 모든 잡염법의 의지처가 됨을 업으로 삼는다. 무명에 의해서 의(疑) · 삿된 견(見) · 탐(貪) 등의 번뇌와 수번뇌 업을 일으켜서 능히 다음 생의 잡염법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127) 치(癡, moha, avidhya)심소는 ‘어리석음’, 즉 특히 현상계[事]와 그 본질[理]의 진리(연기 · 무아 · 중도 등)를 모르는 무명의 심리작용이다. 여기서 의(疑) · 사견 · 탐(貪) 등 여러 번뇌들이 일어난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제6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305 305-306 / 583]. 치(癡)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29. ↑ 이동:      황욱 1999, 61. 치(癡)심소쪽
    "‘無明’은 진실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分別起나 俱生起로써 바르게 헤아리는[正了] 것을 장애하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諸法의 理事에 迷闇한 것을 그 性用으로 하고, 無癡을 장애하며 一切雜染法의 所依가 되는 것으로써 그 業用으로 삼는다.208)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삼계에 대한 無知를 體로 하고, 諸法 가운데 삿된 결정을 내리거나 의심으로 잡된 생각이 일어남에 의지가 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209)
    208) ‘無明’의 性用은 모든 理事에 대하여 迷闇하는 작용을 말하고, 그 業用은 無癡를 장애함으로써 모든 雜染法이 이것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작용을 말한다. 즉, 無明은 참된 실재와 모든 현상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 無明은 모든 번뇌의 선두에 서서 그 번뇌를 이끄는 작용을 한다.
    209)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T31n1605_p0664b27 664中). “何等無明。謂三界無知為體。於諸法中邪決定疑雜生起所依為業。”"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황욱199961. 치(癡)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30. ↑ 이동:    무착 조, 현장 한역 & T.1605, 제1권. p. T31n1605_p0664b27 - T31n1605_p0664b29. 치(癡)심소
    "何等無明。謂三界無知為體。於諸法中邪決定疑雜生起所依為業。"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무착 조, 현장 한역T.1605제1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05_p0664b27 T31n1605_p0664b27 - T31n1605_p0664b29]. 치(癡)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31. ↑ 이동: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8a06 - T31n1606_p0698a09. 치(癡)심소
    "無明者。謂三界無智為體。於諸法中邪決定疑雜染生起所依為業。邪決定者。謂顛倒智。疑者猶豫。雜染生起者。謂貪等煩惱現行。彼所依者。謂由愚癡起諸煩惱。"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안혜 조, 현장 한역T.1606제1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06_p0698a06 T31n1606_p0698a06 - T31n1606_p0698a09]. 치(癡)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32. ↑ 이동: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9a19 - T31n1612_p0849a22. 치(癡)심소
    "云何無明。謂於業果及諦寶中無智為性。此復二種。所謂俱生分別所起。又欲纏貪瞋及欲纏無明。名三不善根。謂貪不善根。瞋不善根。癡不善根。"
  33. ↑ 이동:  운허, "迷惑(미혹)". 2012년 11월 10일에 확인
    "사(事)와 이(理)의 잘못됨을 미(迷)라 하고, 사리에 밝지 못한 것을 혹(惑)이라 함."
  34.  "미혹(迷惑) Archived 2016년 3월 6일 - 웨이백 머신",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1월 10일에 확인.
  35.  星雲, "迷惑". 2012년 11월 10일에 확인
    "迷惑: 謬於事理,稱為迷;不明事理,稱為惑。佛菩薩之境界無迷惑,凡人則常迷於事理,起煩惱之業。〔唐譯華嚴經卷五、法華經方便品〕"
  36. ↑ 이동:  운허, "正思惟(정사유)".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正思惟(정사유): 8정도(正道)의 하나. 무루의 지혜로 4제의 이치를 깊이 사유하여 관(觀)이 더욱 향상하게 하는 것."
  37. ↑ 이동:  운허, "邪思惟(사사유)".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邪思惟(사사유): ↔ 정사유(正思惟). 불교의 진정한 도리에 어긋나는 사고(思考)."
  38. ↑ 이동:  星雲, "正思惟".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正思惟:  梵語 samyak-sajkalpa,巴利語 sammā-savkappa。又作正思惟道支、正志。八正道之一。即思考真實之道理,亦即遠離貪欲、瞋恚、害念等邪思惟,而對無貪、無瞋、不害等生起思惟。"
  39. ↑ 이동:  星雲, "思惟". 2012년 11월 6일에 확인. 부정사유(不正思惟)
    "思惟:  梵語 cintanā。即思考推度。思考真實之道理,稱為正思惟,係八正道之一;反之,則稱邪思惟(不正思惟),乃八邪之一。據長阿含卷八眾集經(大一‧四九下):「復有二法,二因二緣生於瞋恚,一者怨憎,二者不思惟。復有二法,二因二緣生於邪見,一者從他聞,二者邪思惟。復有二法,二因二緣生於正見,一者從他聞,二者正思惟。」又大智度論卷十九載,菩薩於諸法空無所住,如是正見,觀正思惟相,知一切思惟皆是邪思惟,乃至思惟涅槃、思惟佛皆亦如是。而斷一切思惟分別,是名正思惟。又思惟有種種分別,長阿含卷八眾集經舉出少思惟、廣思惟、無量思惟、無所有思惟四種。顯揚聖教論卷二列舉正思惟有離欲思惟、無恚思惟、無害思惟三種。瑜伽師地論卷十一則舉出不正思惟有我思惟、有情思惟、世間思惟三種。此外,轉識論中,將思惟喻如騎者,作意喻如馬之直行,而明思惟與作意之別。〔雜阿含經卷二十八、六十華嚴經卷十一、觀無量壽經、大品般若經卷二十六平等品〕"
  40.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 T.99,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p. T02n0099_p0092b21 - T02n0099_p0092c11.
  41.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 K.650, T.99,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 pp. 503-504 / 2145.
  42.  세계사상 > 사 상 용 어 > 동양사상 관계 > 불교 관계 > 무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무명 無明: 범어 아비드야의 번역어로서 명지(明知)가 없는 것, 즉 진실한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 사물에 통달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12연기(十二緣起)의 최초에 두는 것처럼 우리의 미고(迷苦)라는 존재의 근본이라 하였으며, 불평 불만의 형체로 나타나서 갈애(渴愛)와 표리의 관계를 이룬다."
  43.  星雲, "八邪行". 2012년 11월 7일에 확인. 사지(邪志) 또는 사사유(邪思惟)
    "(二)邪志,又作邪思惟,指欲、恚、害等之思惟。"
  44.  권오민 2003, 29–42쪽.
  45.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 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해제. pp. 1-12 / 57.
  46.  임기영 (1998). 《『아비달마집이문족론』의 법수체계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학위 논문. pp 1-2.
    "일반적으로 설일체유부의 문헌을 3단계에 걸쳐서 발전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초기의 논서로는 《阿毘達磨集異門足論》과 《阿毘達磨法蘊足論》을 들고, 중기의 논서로는 《施設足論》·《阿毘達磨識身足論》·《阿毘達磨界身足論》·《阿毘達磨品類足論》·《阿毘達磨發智論》·《阿毘達磨大毘婆沙論》·《阿毘曇甘露味論》·《入阿毘達磨論》등을 들고, 후기의 논서로는 《阿毘曇心論》·《阿毘曇心論經》·《雜阿毘曇心論》·《阿毘達磨俱舍論》·《阿毘達磨順正理論》·《阿毘達磨藏顯宗論》등을 들고 있다.1)
    이렇게 볼 때 《阿毘達磨集異門足論》(이하 《集異門足論》으로 약칭)과 《阿毘達磨法蘊足論》은 유부 문헌의 3단계 발전 과정중 초기논서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 근거로 두 논서가 아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즉 《集異門足論》은 《長阿含經》에 속하는 經의 하나인 〈衆集經〉(동본이역으로는 《大集法門經》이 있음)의 내용을 부연 · 해석한 것이라 하고, 《阿毘達磨法蘊足論》은 특정한 한 경에 대해 주석하는 형태가 아니라 21가지 주요한 교설을 선정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한 《集異門足論》과 《阿毘達磨法蘊足論》은 論母(mātṛkā)를 제시하고 이를 주석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1) 후치타 코타츠 外, 권오민 譯,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민족사, 1992. pp.246-252 참조. 塚本啓祥 · 松長有慶 · 磯田熙文 編著, 《梵語佛典の 硏究》Ⅲ 論書篇, 平樂寺書店, 1990, 《入阿毘達磨論》은 후기 논서로 파악되고 있어 앞의 책과 차이가 난다. 또한 《成實論》도 후기 논서로서 언급된다.(pp.58-104 참조). 유부 7론은 다시 세단계의 발전과정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초기 논서로는 《阿毘達磨集異門足論》과 《阿毘達磨法蘊足論》과 《阿毘達磨施設足論》을 들고, 중기 논서로는 《阿毘達磨識身足論》과 《阿毘達磨界身足論》을 들고, 후기 논서로는 《阿毘達磨品類足論》과 《阿毘達磨發智論》을 들고 있다. (水野弘元 著, 김현 譯, 《原始佛敎》, 벽호, 1993. p.23)"
  47.  황욱 1999, 16–17쪽
    "유식학에서는 그 학설의 내용에 따라 인도의 유식학을 3기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제1기는 미륵과 무착의 유식학을 말하고, 제2기는 세친의 유식학을 말하며, 제3기는 護法[Dharmapāla]과 安慧[Sthitamati] 등 十大論師들의 유식학을 의미한다. 한편 제1기와 제2기를 합쳐서 初期唯識學이라고도 부른다.45)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처음으로 유식학의 이론적 체계를 세운 무착이 유식학에 끼친 공헌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미륵이 실존인물인지 아니면 무착 자신인가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그가 유식학의 주창자로 자리매김 되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식사상은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미륵이 始祖이지만,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무착이 시조라 해도 틀림이 없는 것이다.
    45) 吳亨根, 「初期唯識의 心意識思想과 八識思想 硏究」, 《唯識과 心識思想 硏究》(서울: 佛敎思想社, 1989), pp.14~15 참조. 이에 의하면 “제1기의 유식학은 초창기의 유식학으로서 후세의 발달된 유식학에 비하여 원시적인 학설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유식학을 原始唯識期라고도 하며 이때의 주요 논서는 《유가사지론》과 《섭대승론》·《현양성교론》과 《대승아비달마집론》 등을 들 수가 있다. 다음 제2기의 유식학은 세친논사가 무착과 미륵의 유식학을 잘 정리하고 조직화한 것을 말하는데 이때의 유식학을 組織唯識學이라고도 한다. 이 組織唯識學의 대표적인 논서는 《대승백법명문론》과 《유식삼십론송》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다음 제3기의 유식학은 세친논사 이후에 호법과 안혜 등 십대논사들이 세친의 《唯識三十論》을 훌륭한 이론으로 주석하여 유식학을 크게 발달시킨 시기로 이때의 유식학을 發達唯識期라고 한다. 이때의 대표적인 저술로 《유식삼십론송》을 주석한 《成唯識論》을 들 수 있으며, 《성유식론》은 중국에서 번역되어 法相宗의 宗學에 크게 이바지한 논서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48. ↑ 이동:  안혜 조, 지바하라 한역 & T.1613, p. T31n1613_p0852c15 - T31n1613_p0852c21. 치(癡)심소
    "云何無明。謂於業果諦寶。無智為性。此有二種。一者俱生。二者分別。又欲界貪瞋。及以無明。為三不善根。謂貪不善根。瞋不善根。癡不善根。此復俱生。不俱生。分別所起。俱生者。謂禽獸等。不俱生者。謂貪相應等。分別者。謂諸見相應與虛妄決定。疑煩惱所依為業。"
분류: 심소법
근본번뇌
불교 용어
불교 사상
불교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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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むみょう、梵: avidyā)とは、仏教用語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불교 용어
무명
파리어avijjā
Dev : अविज्जा)
산스크리트어avidyā
Dev : अविद्या)
티베트어མ་རིག་པ
Wylie : ma rig pa;
THL : ma rigpa
 )
버마어အဝိဇ္ဇာ
IPA:  [əweɪʔzà] )
중국어무명
늑대음 :  wú míng )
일본어무명
로마자 : mumyō )
한국어(한글) 익명
(한자) 익명

RR : mu myeong )
영어ignorance, spritual ignorance [1]
크메르어អវិជ្ជា
(Avichea)
신하라어අවිද්යා
태국어อวิชชา
베트남어vô mi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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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む明,avidyā )이란 불교 용어 로 무지의 [2] [3] [4] [1] . 특히 불교의 설법 ( 진리)에 어두운 것을 말한다 [1] .

이 개념은 형이상학적인 세계의 성질, 특히 세계가 무상하고 무고 하다는 교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3] [5] [6] . 무명은 고통의 근원이며 첫 번째 인연 의 고리에 묶여 반복되는 환생 의 시작이된다 [7] .

무명은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 다양한 문맥에서의 무지·오해로 다루어지고 있다.

개요 편집 ]

"무고한 것에 상을 받고, 괴로운 것에 편하게 하고, 무아한 것에 나를 주고, 불순한 것에 정을 받는다. [11]"

무명이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뿌리깊은 부분에서의 오해"라고 피터 하베이는 말했다 [8] . 십이인연 에서는, 모든 고통 은, 무명(망설임)을 원인으로 하는 번뇌로부터 발생해, 지혜 에 의해 무명을 깨는 것으로 소멸한다고 말한다.

우리 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견해( 유신견 )도 무명이다. 무상 인 것을 상주로 보지만, 그것이 잃어버리면 고통을 일으킨다. 모든 고통은 이 무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설득한다. 이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은, 초기 경전에는 정형 불평으로서 사포, 팔정도 라고 설명 되고 있다 [12] . 이 사기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하지 않다 [13] .

사기에 대한 무지 편집 ]

무명의 멸종에 의해 고통의 멸종이 있다고 설한다 [1] .

Yaṃ kho bhikkhu, dukkhe aññāṇaṃ, dukkhasamudaye aññāṇaṃ, dukkhanirodhe añ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ññāṇaā ca avijjāgato hoti.

히오카들여, 고통에 대한 무지, 고의 집에 대한 무지, 고의 멸에 대한 무지, 고의 멸에 이끄는 길에 대한 무지. [주석 1]히오카
들여, 이들을 무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을 가지고 무명에 이른 자라고 할 수 있다.

— 파리 불전 , 경장 상응 부도 상응 무명품 무명경 Avijjāsuttaṃ, Sri Lanka Tripitaka Project [1]

우리는 "시는 괴로움"이라고 여실히 지견하고, "시는 괴로움의 모임"이라고 여실히 지견하고, "시는 괴로움의 멸망과 여실히 지견하고, "시는 괴로움으로 이끄는 길 나리」라고 여실히 알리며. 「시등은 누설」이라고 여실히 지견하고, 「시는 누의 모임」이라고 여실히 지견하고, 「뒤는 누의 멸해」라고 여실하게 지견하고, 「시는 누의 멸로 이끄는 길 나리」라고 여실히 알리며.

우리는 시와 같이 알고 시와 같이 보지만, 마음은 욕루보다 해탈하고 유루보다 해탈하고 무명루보다 해탈하고, 「해탈에 있어서 해탈하라」의 지를 생기고, 「생은 장미 , 범행은 고쳐지거나, 버려야 하는 것은 버려지거나, 더욱 삶을 받는 일 없음”이라고 알렸다. 범라문, 이날 밤의 후각에 있어서, 아, 제3의 지혜를 추득하고, 무명은 떠나 명을 얻고, 어둠은 떠나 명을 얻게 된다.

남전대장경 률장 오이타별 제일 불정계 p.8

환생의 시작 편집 ]

 십이인연 
무명 (무지)
지식
명색
육처
받다
사랑
잡다
있음 (존재)
 (탄생)
老死)
 

십이 인연 에서 첫 번째 요인 [15] . 청정도론 에 있어서는, 십이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위치설정이며, 시간적으로 최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부다고사는 주목하고 있다 [ 15 ] . 무시 (Anamataggo)는 "시작이 알 수 없다"라는 의미 [15] .

Anamataggoyaṃ bhikkhave saṃsāro. Pubbākoṭ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

히오카들여, 이 윤회  무시(Anamataggo)이다. 무명이라는 뚜껑이 있어 갈증 과 묶여 유전하는 중생 들의 윤회의 끝은 알 수 없다.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paṇḍit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ayaṃ kāyo samudāgato. 히오카들아
,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무명이라는 뚜껑이 있고, 갈증 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런 신체(kaya)

Na hi bhikkhave, bālo acari brahmacariyaṃ sammā dukkhakkhayāya. Tasmā bālo kāyassa bhedā kāyūpago hoti. So kāyūpago samāno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maraṇena sokehiide khasmā'ti vadāmi. Hioka, 어리석은 사람은 제대로 고통을 멸망시키기 위해
청정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보는 신체가 붕괴해도 새로운 신체가 존재하고 새로운 신체에 이르기 때문에 생·노사·비·비탄·고·우·괴로움보다 해방되지 않고, 고통보다 해방되지 않으면 나 말한다.

번뇌의 하나로서 편집 ]

불전에서는, 숙어화된 번뇌로서 기재된다 [1] .

  • 일곱 수면 중 하나, 무명 수면 (avijja-nusaya) [1]
  • 십결의 하나, 무명  (avijja-saṃyojana) [1]
  • 4대 중 하나, 무명한 (avijja-yoga) [1]
  • 사폭류 의 하나, 무명폭류 (avijjogha) [1]
  • 삼루 의 하나, 무명  (avijjasava) [1]

각주 편집 ]

  1.  이 일문, 사포 에 대한 「무지」를 「지」로 대체한 것은, 정견 을 드러낸다 [14]

출처 편집 ]

  1. n 핫토리 히로유키 "원시 불교의 무명 (avijja)의 어의 뜻에 취해" 111쪽.
  2. ↑ Keown 2013 , p. 73.
  3. b Trainor 2004 , p. 74.
  4. ↑ Robert Buswell & Donald Lopez 2013 , pp. 1070.
  5. ↑ Dan Lusthaus (2014). Buddhist Phenomenology: A Philosophical Investigation of Yogacara Buddhism and the Ch'eng Wei-shih Lun . Routledge. pp. 533–534. ISBN  978-1-317-97342-3
  6. ↑ Conze 2013 , pp. 39–40.
  7. ↑ David Webster (31 December 2004). The Philosophy of Desire in the Buddhist Pali Canon . Routledge. p. 206. ISBN 978-1-134-27941-8 
  8. b Harvey 1990 , p. 67.
  9. ↑ 파리 불전 , 경장 상응 부도 상응 , 무명경 Avijjāsuttaṃ, Sri Lanka Tripitaka Project
  10. ↑ 파리 불전 , 상응부 46. 각지 상응 폭류 품, Sri Lanka Tripitaka Project
  11. ↑ 파리 불전 , 증지부 4집 적마품 , 학도경, Sri Lanka Tripitaka Project
  12. ↑ 초전법륜 , 파리 불전 , 대선도, Sri Lanka Tripitaka Project
  13.  Ajahn Sucitto (2010). Turning the Wheel of Truth: Commentary on the Buddha's First Teaching . Shambhala, Kindle Locations 1125-1132.
  14. ↑ 파리 불전 , 상응부도 상응 무명품 8. 분별경, Sri Lanka Tripitaka Project
  15. c 사사키 현순 「「무시시래」의 원어와 사상--anamatagga 과 anādikāla」『오타니 학보』1978년.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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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문학과지성사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
허우성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5월 8일 | ISBN 9788932011608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547쪽 | 가격 20,000원


분야 서남동양학술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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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독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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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 책은 ‘생명’과 ‘논리’ 두 개념을 평생 화두로 사유를 전개한 니시다 철학의 본격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의 철학,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 역사·정치철학을 니시다 철학의 세 가지 발전 단계로 상정하고 그 단계를 대변할 일련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읽어 정리하였다.

[책머리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정말로 미운 대상이라면 쳐다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법이다. 우리의 뿌리 깊은 반일 감정 앞에 일본은 그와 같은 대상일까. 하지만 그런 감정에 충실하여 그저 모른 채로 지나칠 수 없으리만큼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고 무시하기에는 더욱 난처한 존재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바로 이웃일 뿐 아니라, 역사·정치·외교·경제의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으며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국이 이웃으로 지내는 것은 운명이리라. 국제 사회가 한국과 일본을 2002년 월드컵 대회의 공동 주최국으로 정해준 일에도 이와 같은 역사적 운명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운명적으로 저렇게 가까운 나라인 일본을 모르고서야 어찌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본을 그중에서도 특히 근대 일본을 철학이나 사상의 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수많은 철학자 중 누구를 제일 먼저 알아두어야 할까? 근대 일본을 대표하고 그 복잡다단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철학자는 누구인가? 그건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가 아닐까. 그의 철학이 독창성과 보편성뿐 아니라 국적성까지 보이고 있음을 감안하고, 20세기 일본이 배출한 가장 탁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일본 내외에서 널리 인정받아왔음을 고려하면, 이 주장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니시다 철학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아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먼 얘기였다. 서양의 그 어떤 철학자보다 우리에게 멀었다. 그에 비하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베르그송은 물론이고, 심지어 데리다, 들뢰즈, 료타르도 우리에게 훨씬 가깝다. 하지만 멀찌감치 두고 보아왔던 니시다의 삶과 철학에 대한 얘기는 동아시아 근대사 전체의 정열과 파멸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니시다는 철학사의 면에서 보면 단순히 일본 철학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서양 철학의 지평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곳곳으로 헤집고 돌아다녔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베르그송 등을 읽으며 배운 바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항상 서양 철학에 대하여 비판의 태도를 견지했다. 그 비판에서 예외가 된 자로는 독일의 역사철학자 랑케 정도일 것이다. 니시다는 서양 철학에 대한 발언과 비판을 통하여 서양 철학사 내부 깊이 침투하고 있고, 연구자와 독자에게 그 정당한 자리매김을 요구하고 있다.

니시다는 생명의 창조적 약동의 한 순간을 확인하고, 그것을 구원의 순간이라고 여기고, 이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니시다 철학은 생명의 약동 하나하나, 하나의 생명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을 존재론의 중심에 두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사건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니시다는 생명 사건의 극치에서 생명의 진수가 실현된다 하고, 이 생명 사건에 대한 정치한 논리를 치열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대표 정도가 아니라 세계의 일류 철학자로 볼 수 있다. 생명이 선(禪) 수행이나 베르그송 같은 서양 철학자에서 온 것이라면, 논리 부여는 생명철학을 보편화하겠다는 철학자로서의 소명 의식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서양 철학서를 깊이 읽으며, 그가 서양의 대표 논리로 간주했던 ‘일(一)의 다(多)’라는 논리를 비판하고, ‘일즉다(一卽多)’라는 생명의 논리를 창안하여 그걸 부단히 벼려 나갔다.

니시다는 처음 생명을 찾아 외부로 나가지 않고 내심으로 들어갔다. 그의 초기 철학이 보이고 있는 내향성은, 그가 패기에 찬 청년으로 출발했으나 곧 실직과 혈육의 죽음 등 인생의 여러 난관에 부딪혀 깊은 좌절과 비애를 맛보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 수행을 하게 되었다는 점과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었다. 청·장년기에 경험했던 이와 같은 비극의 경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순수 경험과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기에 돌입하게 되자 조국 일본의 운명에 깊이 공감하며 역사철학을 전개해나갔다.

니시다는 역사적 생명의 구현을 추구한 역사철학에서, 천황과 국체 그리고 전쟁을 옹호함으로써 일본 국민으로서의 국적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후기 여러 역사적·정치적 논문을 통해서 일본 국민은 어떤 역사적 환경에서도 창조적 응전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1943년 ‘역사철학’이란 주제로 쇼와 천황에게 어전(御前)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동아 공영권 이념을 철학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류 제국주의에 빠지게 되고, 중국과 조선인의 불행한 운명을 못보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노와 혐오를 일으키는 얘기를 듣게 되고,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을 절대화하고 보편화하려는 일즉다(一卽多)의 일(하나)이 낳은 폭력을 목격하게 된다. 니시다 철학이 단순히 일본의 것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것이라고 부른 연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철학자로서의 열정뿐 아니라, 일편단심 천황을 섬기고 민족을 위한다는 애국심도 분명 발휘했을 것이다. 그의 철학과 교토(京都) 학파의 철학은, 종전(終戰) 이전에는 도사카 등의 마르크시스트로부터, 이후에는 마루야마 등의 정치학자로부터 각각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 비판이 초기의 생명철학에까지 적용될 수 있을는지 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그리고 역사철학에만 국한한다고 해도 그 비판이 니시다 역사철학의 용도 폐기나 완전 실패를 의미하는지,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모호하다.

니시다는 우리 한국인에게 한편으로는 생명력과 위안을,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와 분노를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철학자다. 개인의 개성, 자유와 창조 행위 그리고 생명의 용출(湧出)을 주창한 생명철학에서, 우리는 상실된 생명을 회복하는 길을 확인하고 생명의 기운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천황과 국체를 옹호하는 역사철학 앞에서 우리 대다수는 혐오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니시다 철학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적어도 두 얼굴로 다가온다. 한 얼굴에서는 생명의 약동을 보고, 또 다른 얼굴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을 본다. 역사철학에 실망했다고 해서 약동하는 생명의 얼굴을 외면하려 해서도 안 되고, 생명철학에 도취하여 제국주의 일본의 얼굴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니시다는 한 순간 한 순간의 생명, 우리의 행위에서 가장 고양된 순간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걸 우리는 생명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생명 사건을 포착하기 위하여 때로는 힘의 이미지를 때로는 빛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는 그래서 한때 19세기의 서양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의 화폭에 담아내려고 했던 태양의 빛과 힘 그리고 생명을 좋아했다. 그가 절대 의지의 정점에서 노에시스(‘봄’)로 나간 것도 빛의 이미지를 따라간 결과일 것이다. 절대무의 자각 철학의 중앙에 있는 그 빛은, 불교로 말하면 심광(心光)이나 적광(寂光)을 닮아 있다. 그의 역사철학은 일장기로 상징되는 제국의 태양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국의 태양에 논리의 힘까지 실어주자마자, 그는 제국주의 철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여기에서 보편 진리 주장과 제국주의, 달리 표현한다면 진리와 생존, 이 양자의 관계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니시다를 읽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과제다. 니시다가 믿었던 지애(知愛) 일치설에 따르면, 사랑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없으면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은 필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존재였을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존재이니만큼 공감이나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중앙에 모신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세상이 하나)라는 슬로건은 조선과 중국의 타자성을 근원적으로 박탈하고 말았다. 필자는 하지만 이 책에서 일본인 니시다에 대하여 그가 다 못 한 지애설을 실천에 옮기면서, 알기 위해서 사랑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이해가 나와 우리에 대한 자기 이해를 심화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일본 철학자를 알아야 하는가? 일본이라는 타자를 알기 위해서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자기 이해의 일부다. 타자 이해 없는 자기 이해는 원리상 불충분할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오해와 폭력을 동반하기 일쑤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일본의 어떤 대학에 한국학을 설치하지 않는 한, 우리도 일본학을 개설할 수 없다고 하는 목소리가 국내의 일부 대학에 있다. 이와 같은 목소리에는 일본을 쉽게 문화적·철학적 상국(上國)으로 대접해주고 싶지 않은 거부감이 깊이 배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거부감이 서양 학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역사적 기억 때문인가? 서양이 정의로운 상국으로 보여서 그런가? 서양이 전달해주는 내용이 좀더 근사한 보편으로 보여서 그런가? 아니면 애당초 보편이 생존과 생육에 관계된 것이라 미리 이해하고, 배울 것이라면 보다 진보한 것으로부터 최후의 승자로 보이는 서양으로부터 배우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일까? 우리가 서구와 일본을 차별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본을 잘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조국 일본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니시다 같은 사상가를 연구할 때, 한국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많이 다른, 때로는 상반된 역사적 기억을 물려받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1909)의 죽음이 그와 같은 예에 속한다. 이토는 일본 최초의 내각 총리대신, 추밀원(樞密院) 초대 의장, 한국 통감을 역임한 자로,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대표적 정치가,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 일본 입헌 정치를 확립한 정치가 등등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뇌리에는 주로 일본 제국주의의 수괴, 침략의 원흉,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주범으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의사(義士) 안중근(1879∼1910)의 의로운 행위를 통하여 이토를 민족의 원수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안중근은 흉악범이고 사형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역사적 기억 아래서 한국인이 일본인 철학자를 공정하게 연구할 수 있을까? 일본에 대한 우리 한국인의 연구와 발언에, 기억과 전통의 힘이 어느 정도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고, 또 그 힘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을까? 이런 여러 문제가 미제의 것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최소한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억에 짓눌려서 또는 단순한 민족 감정에서 이 책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책의 제목에서 ‘니시다 철학 비판’이라고 하는 대신에 단순히 ‘니시다 철학’이라고 했다.

생명과 논리의 니시다 철학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의 철학이고, 다음에는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이며, 마지막으로 역사·정치철학이다. 필자는 이들 세 시기를 삼부로 나누고, 각 부의 중심에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 진정한 자기를 찾아서」(3장),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 빛 중심의 의식 다차원론」(5장), 「역사철학」(7장)이란 제목의 장을 각각 배치해두었다. 그것들 이외에도 「삶과 철학」(1장), 「두 생명과 하나의 논리」(2장), 「예술론과 신체론, 그리고 서양 예술가들」(4장), 「역사철학 이전의 ‘역사’와 전회」(6장), 그리고 「역사철학 비판」(8장)의 장을 넣어두었다.

1장은 니시다 철학이 형성되는 전기(傳記)적·역사적 배경을 다루는 장이다. 생명과 논리를 다루고 있는 2장 ‘두 생명과 하나의 논리’에 대해서는 약간 긴 설명이 필요하다. 2장은 니시다 철학의 정수이고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개론은 아니다. 이 장을 읽고 이해하게 되면 나머지 모든 부분의 윤곽이 짐작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론적인 성격이 있다. 하지만 그 난해성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개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 위치에 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니시다 자신이 인생의 아주 초기부터 죽을 때까지 생명과 논리라는 두 개념들을 중심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왔다는 점이다. 이 두 개념은 따라서 그의 철학적 흐름을 관통하는 평생 화두에 해당한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필자에게 있다. 2장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니시다 철학 전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필자는 2장을 뒤로 보낼 수도 없었고 빼기는 더욱 난감했다. 그리고 보다 쉬운 말로 바꿔보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그걸 들어줄 수 없었던 것이 반드시 시간의 제약 때문만이 아니다. 2장의 난해성은 오히려 니시다 철학의 난해성이다. 2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니시다 철학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독자 여러분도 필자처럼 한 번 그 이해에 도전해보라는 뜻이다.

니시다의 철학적 언어와 사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2장을 건너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무리하게 읽다가 도중 하차하게 되면 독자와 필자 모두의 손실이기 때문이다. 3장, 4장, 그리고 7장을 읽은 후에, 아니면 최소한 예술론을 다룬 4장을 읽은 후에 2장을 읽기를 권한다. 예술가의 행위를 설명하는 말 속에서 ‘생명과 논리’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술로 통하는 길은 니시다가 상당 기간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간 경로이기도 하고, 필자가 그의 철학을 이해하면서 밟아나간 길이기도 했다.(각주 1, 내용: 이 책이 출판되기 전 서남재단은 이 책에 대하여 두 분 전문가의 심사 의견을 얻어서 필자가 참고로 삼을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두었다. 심사자 한 분은 서강대 종교학과의 길희성 교수고, 다른 한 분은 역사 전공자라는 것만 알 뿐 그 이상은 모른다. 두 분의 의견에 필자가 일일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원고를 읽고 의견을 주시고 여러 가지 개선할 점들을 지적해주신 일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린다. 특히 길희성 교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의견을 주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반영하도록 힘썼다. 길교수는 특히 ‘생명과 논리’의 장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과 더불어 대안까지 제시해주었다. 2장이 이 책에서 가장 불만족스럽고 난해한 부분이라고 하고, 책으로 출판할 경우 빼어버려도 무방하며, 아니면 다시 써서 책의 결론 부분에 두든지, 현 위치에 두려면 대폭 수정·보완하기를 바란다는 의견이었다. 필자 스스로 뺀다는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뒤로 보낼까, 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제시한 세 길 중 아무 길도 따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설명한 대로다. 또 한 분의 심사자인 사학자는 주로 일본 역사에 대한 필자의 기술에 주목하고 있었다. 인명·역사적 사건에 대한 명칭의 오류 또는 불일치를 지적해주었는데, 그건 감사한 마음으로 금방 수용했다. 일본사가 이 책의 주제는 아니지만, 필자는 스스로 취약한 분야라고 느끼는 부분이다. 그분은 니시다 철학이 동시대 식민지 조선에 미친 영향과 그 현대적 연관성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주었다. 당장 검토에 착수할 수는 없지만 니시다가 국내 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과제로 남겨둔다. 그런데 이 사학자는 필자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과 논리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니시다식으로 말하자면, 그분은 평생 시간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데 전념하고, 인격의 시간 또는 질적·내용적 시간의 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사학도의 특성 때문이리라. 하지만 특성은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6장에서는 전회 이전의 역사에 대한 니시다의 이해와 전회의 과정을 추적해볼 것이다. 8장은 니시다 역사철학에 대한 다른 이의 비판을 다루는 장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일본 내부의 세 가지의 비판적 시각과 함께, 메이지 유신에 대한 한·일 사학자들의 긍정적 태도를 검토하고, 이 긍정적 태도가 니시다 역사철학에 대한 평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해보고, 마지막으로 그의 역사철학이 제기하는 최대의 문제가 보편 진리 추구와 집단의 생존 사이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킬 것이다.

니시다는 『선의 연구』를 출판한 1911년부터 1945년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글을 썼다. 한창 기운이 왕성한 시절에는 매년 3∼4편의 논문을,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여 수백 매에서 천여 매 이상에 달하는 무게 있는 논문을, 주로 철학전문 잡지에 발표했다. 본 연구의 기본 자료로 삼았던 『니시다 전집』은, 발표된 논문들이 일정 분량 모여서 생전에 책의 형태로 출판한 것을 니시다 사후 다시 정리하여 발간한 것이다. 그는 생명·논리·개물·일반·행위·역사·시대 등의 핵심 주제들을 반복하여 다루고 있다.(각주 2, 내용: 가령 『선의 연구』(1911)는 수년에 걸쳐(1906∼1909) 발표된 네 편의 논문을 단행본의 형태로 출판한 것이다. 그 이후 7년에 걸쳐(1911∼1917) 발표한 10여 편의 글을 모아 『사색과 체험』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약간 내용을 달리하며 세 차례 출판했다. 이와나미 서점이 1665년 전집 발간시 『선의 연구』와 『사색과 체험』 둘을 하나로 합해 전집 1권으로 삼았다. ) 그 반복은 하지만 종전 입장의 되풀이가 아니라 차이와 새로운 변화를 담아나갔다. 부단히 자신의 입장을 수정·보완·발전시켜간 니시다 철학에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최후·최종의 입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가 종전 이후까지 살아 남았다면 달라진 역사적 환경에 따라 상당히 다른 철학을 전개해 갔을 것이다.

니시다의 논문 하나하나는 대체로 자기 완결적이거나 ‘자기 동일적’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개물(個物)이다. 동시에 그 논문이 집필 당시의 니시다 사유 전체의 모습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전체다. 논문 한 편이 하나의 논문이면서 전체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개물즉일반(個物卽一般)’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 방식은 ‘불변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유의 중점에 ‘불변’의 핵심 같은 것을 두고 부단히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여 새롭게 형성해가는 것이 그의 글쓰기 방식이었다. 자기 동일을 유지하면서도 왕성한 철학적 창조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부단히 변화해갔으므로, 한 논문과 다음 논문 사이에 불연속의 연속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동일의 유지 부분이 연속이고 변화의 부분이 불연속이다. 그 변화의 동력은 니시다의 철학적 창조력과 집요한 성찰과 더불어 시대 상황에 대한 민감한 반응, 그리고 서양 철학서 읽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니시다 철학에 대한 최선의 연구 방법은, 전집에 포함된 모든 논문을 몽땅 읽고 논문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간파하여 적시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매우 더딘 방식일 뿐 아니라, 니시다 철학에 대한 한글 최초의 연구서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주요 주제를 선별한 다음, 그 주제에 따라 여러 논문을 통하여 변화해가는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며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개별 논문이 가지고 있는 자기 완결성을 깰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의 개념이 변화해나간 궤적을 모든 논문 안에서 확인하는 일 자체가 현실적으로 매우 고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취한 방법은 니시다 철학에 세 개의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그 단계를 대변할 만한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일련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읽어 정리하는 식이었다.

니시다의 언어는 매우 생경하고 난해하다. 첫째 이유는 그에 대한 국내 연구가 거의 없고, 번역 또한 『선의 연구』를 제외하면 전무한 형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그의 창조와 독창이 빚어낸 수많은 철학적 신조어들 때문이다. ‘개물즉일반’도 그런 신조어 중 하나다. 니시다는 질적으로 가장 고양된 한 순간의 생명 사건을 ‘개물즉일반’이란 말로 그 성격을 규정했다. 개물과 일반은 각기 서양 철학이 말해온 존재론의 기초 개념인데, 의미상 ‘개물즉일반’이란 개념을 사용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런데 니시다가 개물과 일반이 상호 한정적으로 ‘즉’의 관계에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낭패와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표현 이외에도 영원이면서 찰나, 찰나이면서 영원 등과 같이, 언뜻 보면 형용모순의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런 신조어들을 이해하려는 결심과 인내가 없다면 니시다 철학의 연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시다 언어가 갖고 있는 생경함과 난해함을 완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의 글을 직접 읽어 서서히 친숙해지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직접 인용의 방식을 다소 사용하였다. 국내 니시다 철학의 연구 여건이 아직 미숙하다는 점에 비춰보면, 원문을 읽는 것 자체가 이미 훌륭한 니시다 공부가 될 수 있다. 독자는 이러한 직접 인용을 읽음으로써 필자의 해석과 주장의 타당성을 점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하나의 장 안에서 짤막한 소제목을 달아둔 것도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것만 읽더라도 전체 내용의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보았다. 니시다 철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이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는 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다. 하와이 대학 박사학위 취득 논문이 니시다를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그건 이미 십일 년 전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니시다 철학 연구를 지원 과제로 선정해준 일, 그 이후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의 중간 과정을 성실하게 밟아준 일, 등등에 대하여 재단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2000년 4월, 허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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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

허우성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0년 5월 8일 | ISBN 978893201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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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1부 생명과 논리
제1장 삶과 철학
1. 역사적 환경
2. 니시다의 삶과 일기
3. 전쟁의 간접 체험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
4. 니시다 철학의 동기

제2장 두 생명과 하나의 논리
1. 생명과 논리
2. 왜 논리인가?

제2부 내적 생명의 철학
제3장 자각주의와 순수 경험
1. 자각주의
2. 순수 경험

제4장 예술론과 신체론 그리고 서양 예술가들
1. 예술론
2. 신체론
3. 모네, 고흐 그리고 로댕
4. 미의 세계를 넘어서 도덕과 종교 그리고 역사의 세계로

제5장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
1. 절대무의 신비 세계
2. 자유 의지
3. 역사적 행위와 역사적 자기: 제3위
4. 예지적 직관의 세계: 지정의(知情意)의 세계
5. 정적 예지적 직관
6. 지적 예지적 직관: 의식 일반의 단계
7. 지각적 직관과 의미 요해
8. 종교적 입장을 넘어서 철학적 입장으로

제3부 역사철학과 그 비판
제6장 역사철학 이전의 ‘역사’와 전회
1. 역사철학 이전의 ‘역사’
2. 이행기와 전회 그리고 니시다 자신의 태도
3. 전회에 대한 니시다의 태도
4. 표현: 역사철학으로 넘어가는 매개

제7장 역사철학
1. 주체와 환경의 상호 작용론
2. 행위적 직관
3. 역사적 신체론
4. 시대론과 랑케
5. 정치철학: 국가·천황·국체 그리고 동아 공영권
6. 역사철학의 예술론: 피들러로부터 리글로

제8장 역사철학 비판
1. 자기 한정의 폭력성
2. 나카에 초민과 우치무라 간조, 도사카 준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
3. 메이지 유신 불가피론
4. 니시다 철학이 던진 문제

<결론> 두 얼굴의 니시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주요 인명 색인>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 디지털문명과 불교 < 불교평론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 디지털문명과 불교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디지털 시대의 선정성과 폭력성 / 허우성
기자명 허우성   입력 2012.09.06

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 붉은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

허우성
경희대 교수


서론
고타마 붓다의 출현 이후 2천여 년이 흘러서 21세기가 되었지만, 중생은 삼독과 십악을 줄이는 일에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시장경제가 과학과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디지털 시대, 정보의 시대, 또는 컴퓨터 시대는 도래했다. 이 시대의 특성은 전에는 불가능했거나 어려웠던 정보에 즉각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의 소형화, 개인용 컴퓨터의 출현, 생활 전 분야에 걸친 신속한 기술의 진보, 그리고 범지구적 통신과 네트워킹과 함께 정보의 시대 곧 정보사회는 왔다.

정보사회는 경제활동에서 이윤의 창출이나 증대 수단으로서의 지식과 정보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정보화에 대해 가장 빨리 반응하는 행위자 집단에는 이윤 창출을 노리는 기업과 정보를 게걸스럽게 받아먹는 일반 사용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정보사회는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 광고, 시장 등의 개념들이 서로 얽혀 있는 사회이다. 그 사회는 범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일부, 곧 풍요, 성장, 소비와 경쟁을 앞세우고 상당한 정도의 폭력성까지 안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일부이다.

이 글은 5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2천 년 전 중생이 가진 삼독과 십악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들을 없애면 바로 열반에 이른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제시하며, 2장에서는 현대 한국의 폭력적 상황이 2천 년 전에 비해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추정하고, 3장에서 초기불교의 경전이 말하는 폭력의 원인들을 논의하고, 4장에서 디지털 시대는 감각적 쾌락 최다라는 사실을, 그리고 넷의 사용으로 우리가 잃은 것이 무언가를 검토한 다음, 이 시대의 특성을 붉은색과 검은색을 이용하여 상징적으로 표시해 본다. 5장에서는 현대 소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판을 소개하고 이를 불교와 관련지어서 논의한다.

디지털 사회에 대한 필자의 진단과 전망은 어둡다. 폭력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감각적 쾌락(까마)을 즐길 개인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쾌락의 향유에서 오는 일탈 행위를 법으로 다스리면서, 소비사회가 가져오는 폭력은 상당 부분 견뎌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교적인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교육일 것이다.  

 1. 2천 년 전 중생의 삼독과 십악

초기불교의 경전은 탐욕(rāga), 욕망(lobha, chanda), 증오(dosa)와 미망(moha)과 같은, 나쁜 행위의 뿌리(akusalamūla)들을 지적하면서, 이것들이 서로 엉켜 있는 것으로 다룬다. 탐욕을 채우는 데 실패하면 쉽게 분노나 증오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증오와 분노, 폭력이 온 세상에 퍼져 있는데도 한국의 출가자들을 포함하여 불교학자들은 이런 사회 현상을 종종 무시해왔다. 초기불교의 《법구경(Dham-mapada)》 〈분노품(kodha-vaggo)〉에서 다음 한 구절을 살펴보자. 

탐욕(rāga, 婬)만 한 불길은 없고, 증오(dosa)만 한 포수(捕手)도 없고 무지(moha)에 비할 그물도 없고, 갈애(taṇhā) 같은 격류도 없다.(Dhp.251)
 
이 시구에 나오는 ‘라가’는 보통 탐욕, 욕정, 흥분, 열정의 뜻이면서 동시에 색깔, 색조, 색칠하기, 염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역 《법구경》은 이를 음(婬)으로 옮겨서 특히 욕정의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다. ‘라가’ 즉 음란을 상징하는 색이 있다면 붉음일 것이다.

《법구경》에 〈몽둥이품(daṇḍa-vaggo)〉이 있는데, 이 품은 초기불교 내에서 폭력이 갖는 중심적인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 한 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몽둥이를 두려워한다. 생명은 모든 이에게 귀중하다.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생각하여, 남을 죽이지도 말고 남에게 누군가를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Dhp.130) 

이 시구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폭력을 두려워한다는 점이고, 둘째 생명(jīvita)은 모든 존재에게 귀중하므로, 타인을 자신으로 여겨서 죽여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을 부추겨 누군가를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고 권유한다.

삼독과 떨어질 수 없는 십악(十惡)은 장아함의 《소연경(小緣經)》에 나온다. 이 경에 따르면, 선을 수행하지 않는 중생(衆生, puthujjana)은 흔히 열 가지 악행[akusala]을 범한다. 그것들은 살생, 훔치기[盜竊], 음란(淫亂, kāmesu micchā-cāri), 거짓말[欺妄],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綺語], 인색과 탐욕[慳貪], 질투(嫉妬, vyāpanna-citta), 사견(邪見)이다. 십악에는 물리적 폭력, 언어폭력, 음란 행위, 부정적 감정, 잘못된 견해 등이 들어있다. 카스트를 이루는 모든 중생은 각자 자신들의 행위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질투’를 의미하는 빨리어 ‘브야빤나 칫따’가 진에심(瞋恚心)으로도 한역된 것을 보면, 질투 안에는 이미 분노와 증오가 있어서 그것은 언제든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 《소연경》의 입장에서 보면 십악의 치유 방법으로서 왕을 세워서 왕으로 하여금 분노, 처벌, 추방을 통해서 중생을 다스리게 하는 것보다, 열반으로 안내하는 지계와 선정 수행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일 것이다.

《법구경》 134는 “열반(nibbāna)을 얻게 되면 어떤 적대감(sārambha)도 네 속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적대감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초기불교의 최고선인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금생에 아라한이 성취한 열반계(nibbānadhātu)를 “탐욕의 지멸(rāgakkhaya), 증오와 미망의 지멸”이라고 설명한 곳도 있다.

그런데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승가라는 공동체로 출가하여, 계(戒), 정(禪定, jhāna, samādhi), 혜(paññā)의 삼학을 닦아야 한다. 붓다는 공동체의 유지에 계율이 필수라고 보았는데, 이 계율의 주요 목표의 하나는 감각적 쾌락을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심신 안에서 작동하는 모든 인과 연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기능이 바로 반야 지혜이다.

2. 현대 한국의 폭력적 상황

한국 시민은 2천여 년 전 인도의 중생과 비슷하게 삼독이 있고 십악 중 하나 이상에 쉽게 빠지므로, 시민의 대다수는 중생이다. 이들 ‘시민 중생’은 도덕적으로 진보하기는커녕 고대 인도의 중생보다 더 사나워 보인다. 그리고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뒤 1천 수백 년이 지났건만 우리 민족에게서 분노의 기질이나 폭력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폭행,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와 더불어 욕설과 막말을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2012년 3월 15일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범죄 발생건수는 2000년 이후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2010년 발생한 형사범죄(재산범죄, 강력범죄, 위조범죄, 공무원범죄, 풍속범죄 등)는 45만여 건으로 지난 2000년보다 58%, 20년 전인 1990년과 비교하면 무려 248% 급증했다. 형사범죄 중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살인은 2000년 964건에서 2010년 1,262건, 강간은 2000년 6,982건에서 2010년 19,939건으로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다. 폭행상해는 2000년 49,838건에서 2010년 180,365건으로 증가하여 10년 전보다 360% 이상 폭증했다(〈헤럴드경제〉 2012. 3. 15). 영국 경찰이 2009~2010년 10만 명당 강력범죄 발생률을 국가별로 분석한 자료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국 중 살인은 6위, 강간은 11위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은 살인 33위, 강간은 34위로 안전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살인은 멕시코가 월등하게 1위였고, 미국은 3위였다(〈중앙일보〉 2012. 6. 1).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세계 1위이다.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공격이 좀 다르지만 양자가 흔히 공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고의 자살률은 강력범죄의 증가와 함께 우리 사회에 폭력이 널리 펴져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위증과 무고(誣告)가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백 배 많다는 통계 앞에 대한민국은 ‘거짓말 공화국’이 되었다.

한국인의 형사범죄는 대개 십악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이다. 십악의 하나인 절도는 재산범죄로 되고, 살생은 살인으로 되고, 거짓말은 심하면 사기죄로 변하며, 이간질과 욕설은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될 수 있고, 음란 행위는 강간을 낳는다. 강력범죄인 살인, 강간, 폭행상해는 쾌락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탐욕이나 공격과 깊이 관련된 경우가 많다.

3. 초기불교의 경전이 말하는 폭력의 원인:     감각적 쾌락, 느낌, 분별

고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군주제는 그때, 그곳에도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구조적 폭력’은 평화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평화연구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요한 갈퉁(Johan Galtung, 1930~  )이 주로 유통시킨 개념인데, 그는 “구조적 폭력의 부재는 우리가 사회 정의로 불렀던 것이고, 사회 정의를 긍정적으로 정의하면 ‘권력과 자원의 공평한 분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초기불교도들은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 정의가 아니라, 주로 개인적, 의도적, 물리적 폭력에 주목했다. 다만 그들은 출가와 새로운 공동체 설립을 통하여 나름대로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필자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폭력의 원인은 감각적 쾌락(까마, kāma)이다. 까마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종종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고, 우리 시대는 까마가 아주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 《중부경전》에 나오는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큰 경》에서 붓다는 감각적 쾌락에서 온갖 종류의 폭력 행위가 일어난다고 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릴 것을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원인(hetu)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조건(nidāna)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바탕(karaṇaṃ)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왕들은 왕들과 싸우고(vivadanti), 귀족들은 귀족들과 다투고, 브라만은 브라만과 싸우고, 주인은 주인과 싸우고, 어머니는 아들과 싸우고, 아버지가 아들과 싸우고…… 친구는 친구와 싸운다.
그때에 그들은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고, 서로 주먹으로, 흙덩이로, 몽둥이로, 칼로 싸운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본다.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칼과 방패를 들고, 활과 화살통을 몸에 차고, 화살이 쏟아지고, 창이 날아다니고, 큰칼이 번쩍이는 가운데 양쪽으로 진을 치고 있는 전장으로 돌진한다. ……또한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도둑질하고, 매복했다 습격하고, 남의 부인을 폭행한다. 그러면 왕들은 그들을 붙잡아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한다. ……감각적 쾌락을 원인으로 하여, 몸(kāya)으로, 말(vācā)로, 마음(manas)으로 악행(duccaritaṃ)을 범한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함(chandarāgavinaya)이고, 그 욕망과 탐욕의 버림(chandarāgappahānaṃ)이다.  

이 인용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 때문에 중생의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과 싸우고, 갖가지 폭력을 낳는다. 폭력에는 전쟁, 살인, 가택 침입, 약탈, 도둑질, 매복 공격, 남의 부인 폭행하기 등이 포함되고, 폭력의 도구는 수없이 많다. 주먹, 흙덩이, 몽둥이, 칼, 화살, 창 등이 그것들이다. 이에 왕들은 폭력 행위자를 붙잡아 처벌한다.

우리는 감각적 쾌락을 향유할 때마다 폭력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인용문이 말하는 대로 감각적 쾌락은 느낌(受, 또는 감정)에서 오고, 사람이 느끼기 위해서는 접촉할 사물이나 사람을 반드시 소유해야 하고, 그 소유를 위해서 경쟁이 필수적이라면, 쾌락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이해된다.

 2) 아래 대화는 붓다와 아난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느낌에서 출발하여 온갖 종류의 악행으로까지 나아가는 인과적 연쇄(連鎖)를 설명하고 있다.

아난다여, 이처럼 느낌(vedana)을 조건으로 갈애(taṇhā)가,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pariyesanā)가, 추구를 조건으로 획득(lābha)이, 획득을 조건으로 판별(vinicchaya)이, 판별을 조건으로 욕망(욕탐, chanda-rāga)이, 욕망을 조건으로 탐착(ajjhosāna)이, 탐착을 조건으로 소유(pariggaha)가,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macchariya)이, 인색을 조건으로 수호(ārakkha)가, 수호를 조건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pāpakā akusalā dhammā)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수호가 ……수많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이 대화에 나오는 인과 연쇄는 느낌에서 출발한 중생이 몽둥이질로 나가는 순서를 보여준다. 먼저 느낌에서 갈애로, 갈애에서 추구로 나가고, 획득, 판별, 욕망, 탐착, 소유, 인색, 수호를 거쳐서 마침내 무기를 드는 데까지 나간다. 그런데 12연기설에 따르면 느낌은 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난다. ‘좋다[快]’는 느낌이 생기면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나 물건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소유하고 수호하는 일은 흔히 폭력이 동원된다. 그래서 소유, 소비, 풍요와 경쟁을 기본 원리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폭력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3) 다음 인용은 개념이나 판단을 수반하는 사량분별과 생각 안에 이미 폭력의 씨앗이 있다고 밝히고 있어서, 말을 해야 하는 인간에게 폭력은 거의 숙명적임을 논한다. 〈삭까(인드라)의 질문〉(《帝釋問經》)에서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존자시여,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그 외의 모든 무리들은 비록 ‘증오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고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살리라’고 하지만(averā adaṇḍā asapattā abyāpajjā viharemu averino’ti) 무엇에 속박되어 증오하고 몽둥이를 들고 적을 만들고 적대감을 품고 원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증오나 폭력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묻는 질문에 대해, 경전은 증오심과 폭력(몽둥이질)을 낳는 최초의 원인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 papañca)을 지적하고, 사량분별에서 증오심과 폭력에 도달하기까지 몇 단계를 더 설정한다. 사량분별에서 생각(vitakka)이 나오며, 생각에서 의욕(chanda)이, 의욕에서 호오(piya-appiya)가 나오며, 호오에서 질투와 인색(issā-macchariya)이 나온다. 질투와 인색은 증오, 적대감과 폭력 행위에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질투로 번역된 ‘issā’는 질투 이외에, 선망, 악의, 분노로도 번역되고, 질투가 종종 분노를 낳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량분별 역시 대상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사량분별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되는 아래 구절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각과 색(色)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眼識]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사량분별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시각, 색(대상), 안식, 셋이 있어서 접촉이 되고, 느낌, 지각, 생각, 그리고 사량분별이 순서대로 생긴다. 보통 접촉이나 느낌까지는 언어 이전의 단계이고 지각에서부터 이미 언어가 동원된 상태로 보인다. 이 경전이 사량분별에서 몽동이질을 하는 단계까지 설정한 것을 보면, 불교는 언어 사용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아주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없다면 세속 생활도 출가수행도 불가능하지만, 붓다는 언어 행위는 정기적인 명상에 의해서 순화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터이다.

색성향미촉법: 감각적 쾌락(kāma)의 대상

폭력에 이르는 세 가지 경로 중에서, 첫 번째는 감각적 쾌락을 폭력의 핵심 원인으로 꼽았고, 두 번째는 느낌이 온갖 악행의 출발점이었다. 세 번째는 말하기를 수반하게 되는 사량분별에서 시작하여 증오심과 폭력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었다. 세 경로 모두 시청각 자극이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경전에는 자극을 낳는 여섯 감각 대상들이 가진 위험에 대한 경고가 곳곳에 나온다. 예를 들면, 《상응부경전》의 〈육처품(Saḷāyatana-vagga)〉에서 붓다는 여섯 감각 대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까마와 연결된(kāmūpasaṃhita)’, 애타게 하는 형상들[色], 시각에 의해 알려지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자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귀에 의해 알려지는 냄새가 있는데 ……코로 의해 알려지는 맛들이 있는데 ……혀에 의해 알려지는 맛들이 있는데 ……신체에 의해 알려지는 감촉들이 있는데 ……마음에 의해 알려지는 법들이 있는데……] 만일 ……시각에 의해 알려지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지 않고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라고 불린다.

우리는 모양(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촉각 대상(觸), 법(法)으로 된 육처 또는 육진(六塵)들로 둘러싸여 살아간다. 이것들은 각각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근의 대상이다. 중생에게 육처는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까마와 연결된’, 애타게 하는” 대상이다. 육처는 우리를 유혹하고 악마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욕망, 경쟁, 획득과 수호가 폭력으로 나간다는 통찰은 반드시 불교만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홉스, 프로이트, 콘라드 로렌츠 등의 서양학자들에게도 충분히 보인다.

4. 감각적 쾌락 최다의 디지털 시대:     깊은 생각, 공감, 동정심의 상실

디지털 시대 즉 정보사회는 인류 역사상 색성향미촉이라는 감각적 쾌락 대상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시대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는 아주 산만하게 되었고, 문화는 선정적이고 외설적으로 변했다. 이런 시대의 단초는 20세기 중반에 미디어 혁명이 열었고, 인터넷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의 《천박한 자들(The Shallows)》에 따르면, 이와 같이 산만한 시대는 중세 이래 지난 550년 동안 우리의 지적 생활의 중심을 차지해 온 책조차 이제 변두리로 내몰고 있다.

이 변화는 20세기 중반 라디오, 영화, 오디오, 텔레비전 등 초기 전기전자 미디어가 제공하는 오락물에 우리의 시간과 주의를 빼앗기면서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미디어 혁명은 데스크톱, 노트북, 휴대용 기기 등 컴퓨터가 우리의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고, 인터넷이 글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고 공유하는 수단이 되면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카는 말한다. “넷은 텔레비전, 라디오, 조간신문보다 훨씬 강력하게 우리의 주의를 지배한다.”라고.

카의 이러한 분석이 옳다면, 넷의 반복적 사용은 폭력의 확산에도 기여하는 것 같다. 그것에 따르면, 웹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다 보니, 사람들은 시각적인 초점을 바꾸는 속도가 빨라지고,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감소하고, 건너뛰며 읽는 습관이 배양되었다. 결과적으로 “훑어보고, 건너뛰고, 멀티태스킹을 하는 데 사용되는 신경 회로는 확장되고 강해지는 반면, 깊고 지속적인 집중력을 가지고 읽고 깊이 사고하는 데 사용되는 신경 회로는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카는 추측하고 있다.

인터넷과 SNS 매체에 대해 사용자들은 습관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고요하고 주의력 깊은 마음을 상실하고, 사람됨과 인간성을 서서히 침식당하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카는 이와 같은 고차적인 감정이 ‘본질적으로 느린’ 신경 처리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의 설명에 깊이 공감한다. 사람의 뇌는 물리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빨리 반응하지만, 상대방의 심리적이며 도덕적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카는 여기에서 “인터넷이 우리의 도덕감을 훼손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고 하면서도 넷이 성찰의 힘을 감소시킨다는 점은 시인했다. 넷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깊은 생각이나 성찰의 힘, 공감과 동정심이 줄어든다면,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개연성은 높아질 것이다. 한국의 시민 중생이 보여주는 세계적 수준의 악성 댓글은 세계 최고 수준의 IT 산업, 세계 제1위의 가구 인터넷 보급률(96.8%, 2010년)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봐서 카의 우려는 미국보다 한국에 훨씬 더 잘 맞는 것 같다.

검붉은 세계

‘까마와 연결된’ 행위 중에 가장 위험한 행위는 무엇일까? 색과 소리 등의 자극에 대해 우리의 반응이 가장 뜨거운 행위, 곧 뇌의 수많은 뉴런(신경세포)에 불꽃이 가장 많이 이는 성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초기 율장의 하나인 《십송률》에서는 성행위를 “결박근본부정악업(結縛根本不淨惡業)”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결박하고 더럽게 만드는 행위 중에 성행위가 근본이라는 뜻이다. 

열반은 쾌락이나 증오심에 의해서 뉴런이 흥분되는 것이 최소화된 상태이고, 오관에 자극이 전혀 없는 ‘맑은 의식’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서 성취된다고 해보자. 열반을 가져다주는 명상의 관점에서 보면, 명상에 비교적 가까운 것이 경청이나 독서이고, 그다음이 말하기, 그보다 더 먼 것이 인터넷에 몰입하는 것, 가장 먼 것은 성행위일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누리꾼들이 시청각 이미지를 즐겨 받아먹고, 흥분하고 취하여 뉴런에 불꽃이 많이 일면 일수록, 이는 욕정을 자극하는 선정적(煽情的)인 것이 되면서 성적 쾌락을 닮아간다. 말하기는 독서보다 사람의 공격성을 더 쉽게 자극하는 것 같다. 그래서 크게 신장된 언론 자유와 인터넷 사용의 증가는 거짓말 유포, 욕설과 막말의 확산과 관계가 깊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반드시 평화적인 인격일 것이다. 성관계의 색이 새빨간 색이라면, 명상 상태는 붉음이 최소화된 상태일 것이다.

앞에서 탐욕이나 음란(라가나 까마)에 색이 있다면 붉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지극히 역동적인 한국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붉음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 역사학자이면서 서양의 상징 전문가인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1947~ )는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를 다룬 책에서 맨 먼저 빨강의 상징적인 의미를 논하고 있다. 그는 빨강이 거의 언제나 피와 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기독교 문화에서 피의 빨강은 생명을 부여하고, 더러움을 정화시키며, 영혼을 성스럽게 한다고 한다. 반대로 나쁜 피의 빨강은 불순, 폭력, 죄의 상징이고, 분노, 더러움, 죽음의 상징이다. 적어도 서양에서 빨강에는 성령의 빨강과 같이 태양처럼 휘황찬란함, 따뜻함, 비춤을 나타나는 것도 있고, 그 반대로 악마의 빨강, 즉 불태우고 상처 주고 파괴하는 지옥의 불꽃 같은 빨강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聖)과 생명의 빨강이 아니라 대립과 분노, 폭력, 죽음의 빨강을 생각해보자.

대립과 폭력을 상징하는 붉음은 동지와 적을 선명하게 나누는 ‘정치색’이다. 애국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 가진 분열의 열정은 우리 편이나 우리 민족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다른 민족에게는 배타성과 편협성을 보이면서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다. 수많은 나라의 국기에 붉음이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국민, 국가는 국민이나 민족의 붉은 피와 열정을 먹고 산다. 열정이 너무 뜨거우면 우리는 이기고 싶은 적의 정체, 책략, 계산법도 파악하지 못한다.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은 빨간색, 민주통합당은 노란색, 통합진보당은 보라색을 상징색으로 각각 선택했지만, 색깔과 관계없이 분열, 대립, 열정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까마의 붉은색을 닮아 있다.

이러한 붉음과 상반되는 색이 있다면 파랑일 것이다. 파스투로의 설명에 따르면, 파랑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색이고 우주, 하늘, 대기의 색이다. 성모 마리아의 색, 공격성이 없는 애정의 색이고 평화의 색이며, 따라서 대규모 국제조직을 상징하는 깃발의 색이다. 그런데 열반의 색은 무슨 색일까? 무색일까, 아니면 파랑이나 회색이나 흰색에 가까울까? ‘색즉시공’은 붉음에서 파랑과 같은 색으로 가자는 주문으로 볼 수 있다.

5. 현대 소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비판

디지털 시대는 현대 소비사회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소비사회를 지극히 비관적으로 보는 사상가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있다. 그에 따르면,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잘 보호받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인간의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은 사라지고 사물과 같은 것만 남게 되고, 폭력은 널리 퍼져 있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 그 신화와 구조》의 마지막 장을 〈풍요 사회의 아노미〉로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소비사회, 그것은 배려의 사회인 동시에 억압의 사회이며, 평화로운 사회인 동시에 폭력사회이다.” 그에 따르면, 이 폭력은 풍요와 나란히 가고,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함께 분석해야 한다. 풍요와 연결된 폭력은 ‘목표도 없고 대상도 없는데(sans fin et sans objet)’ 스톡홀름의 청년 집단 사건, 몬트리올의 폭동, 로스앤젤레스의 집단살인 사건 등을 그 사례로 제시한다. 그는 풍요와 성장 자체가 이미 강제와 억압을 낳는다고 본다.

만일 풍요(성장)가 강제라면 이 폭력도 저절로 이해될 수 있으며 풍요의 논리적 귀결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폭력이 거칠고, 대상이 없고, 무형식인데, 그 이유는 그 폭력이 도전하는 강제들 자체가 무형식이고, 무의식적이고, 막연하기 때문이다. 그 강제들은 ‘자유’라는 강제, 관리된 행복을 획득하도록 하는 강제, 풍요라는 전체주의적 윤리의 강제이다.

이와 같이 풍요라는 강제가 모든 유형의 폭력을 낳고, 아노말리, 우울 상태, 또는 도피 등의 간접적인 증상도 낳는다. 보드리야르는 풍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풍요 사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은 “빈곤, 궁핍화, 착취에서 생겨나는 폭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데, “이 폭력은 필요(besoin)가 가진 철저한 긍정성에 의해서 생략되고 은폐되고 검열당한 욕망(désir)의 부정성이 행위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밖에 없는 필요는 욕망의 부정성을 생략하고 은폐하고 검열하지만, 이 부정성은 어느 순간 행위로 나타나서 폭력이 되고 만다. 이 폭력은 “생산성과 소비성이라는 지상명령을 거부하는 파괴성(죽음의 충동)이 드러난 것”이고, 이를 떠맡을 관료기구는 없다. 삼독이라는 불교 술어를 빌리면, 우리 사회에 널리 펴져 있는 필요, 생산, 소비, 풍요에 대한 욕망[貪]은, 지상명령이나 강제가 되어서 폭력[瞋]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눈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아노미 현상 이외에도 미국에 나타난 LSD 환각제, 플라워 파워(히피족), 선(禪), 팝 뮤직 등이 이런 풍요와 안정,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사회의 거부로 비쳤다. 하지만 이것들은 현대 사회 질서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변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는 소비사회의 진정한 대안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소비사회의 풍요는 우리 사회에 아래와 같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아래 인용에서 ‘사물’이라는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사물(또는 객체, objects), 서비스 및 물적 재화의 증가에 의해 이루어진 소비와 풍요라는 놀랍도록 선명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인류의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풍요 시대의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시대와도 달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인간들의 일상적인 교류는 더 이상 동료 인간들과의 교류가 아니라, 통계상으로는 증가곡선을 그리면서 재화 및 메시지의 수용과 조작과의 교류가 되고 있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는 이 ‘사물’은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분 좋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쾌락과 연결된, 애타게 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다.

보드리야르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소비사회를 더욱 철저히 비판하면서, 소비 위주의 포스터모던 사회를 사물(또는 객체) 패권(supre-macy of objects)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사물의 패권〉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우리는 항상 주체(subjects)의 영광과 객체(또는 사물 objects)의 빈곤에 의지해서 살아왔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주체이고,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도 주체이다. 개인적 주체 또는 집단적 주체, 의식의 주체, 무의식의 주체, 그리고 모든 형이상학의 이상은 세계 주체의 이상이다. 주체성으로 가는 왕도에서 객체는 오로지 우회 도로에 불과하다. ……욕망에 대한 우리의 철학에서는, 주체는 절대적 특권을 보유한다. 욕망하는 것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을 생각하게 되면, 만사가 역전된다. 욕망하는 것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유혹하는 것이 객체이다. 만물이 유혹에서 시작하므로, 만물은 객체에서 와서 객체로 돌아간다. 주체의 태곳적부터의 특권은 전복되었다.
 
디지털 시대는 ‘사물의 패권’ 시대이고, 사물이라고 부르든 객체라고 부르든 쾌락의 대상이 강력하게 횡행하는 시대이다. ‘사물 패권’의 시대에 주체는 “세계를 일관성 있게 표상할 수 없고” “오늘날 어느 누구도 세력, 지식, 역사의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가능한 유일한 입장은 사물의 입장이고, 유일한 책략은 사물의 전략”인 국면에 도달했다고 한다.

불교의 무아설은 욕망의 주체나 쾌락의 향유자로서의 주체를 부인한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사물 패권론은 사물의 유혹 앞에 지식의 주체나 역사의 주체 같은 것을 부정하고, 동시에 세계를 표상하고 역사를 선도하는 행위자로서의 주체를 내세우는 모든 형이상학을 버렸다. 이제 포스트모던의 극치에 이른 것이다.

 결론: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
 
붓다는 중생의 일상생활에 폭력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주요 원인으로 감각적 쾌락, 느낌, 사량분별을 지목했고, 삼독의 불을 줄이거나 끄기 위해 계율과 명상을 처방했으며, 그 최종적인 수행 목표로 열반을 제시했다. 오늘날 인도 당시보다 쾌락의 대상은 무한정 늘어났다. 쾌락과 폭력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초기불교의 통찰은 우리 사회의 범죄와 자살의 증가, 심각한 학교폭력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소비사회,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곳,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쾌락의 대상을 무수히 생산하는 곳이다. 메시지, 정보, 패션, 여행, 하이퍼리얼리티와 같은 사물들이 색성향미촉법의 모습을 하고 TV, 인터넷, SNS 매체, 영화, 신문 등 온갖 종류의 매체를 통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취하게 하고 흥분시키고 마침내 붉게 물들이는 곳이다.

현대의 정보사회는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수많은 사물들이 강력한 힘으로, 항상 인간의 의식을 위협하고 수시로 침투해 온다. 세계의 저편에서 일어난 일도 정보고속도로를 통하면 오늘,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상의 모든 정보는 나에게 잠재적인 유혹자이고 권력자이다. 정보사회의 목표가 미디어를 무한히 확장하여 우리의 의식 공간을 온갖 정보로써 가득 채워,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까마의 대상을 무한히 공급하여 소비하게 하는 사회라면,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진보라고 하기 어렵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고, 예외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면서 우리의 두뇌까지 변화시키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크게 훼손한다고 했다. 그래서 넷 시대는 디스토피아(dystopia)로 보인다. 개개인이 더욱 사악해졌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PC, 인터넷, 휴대전화, 태블릿 PC 등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탐욕이나 증오심을 표출할 기회는 더 많아지고 그 수단은 아주 편리해졌다는 의미에서이다.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은 소비사회에서 인간 주체의 모든 기획이 불가능해졌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대로 지식의 주체도 역사의 주체도 사라졌다면, 갈퉁이 ‘권력과 자원의 공평한 분배’로 이해한 사회 정의를 이룩할 길이 없음은 물론 구조적 폭력의 전모를 파악할 수조차 없게 된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붉은 까마와 검은 폭력을 줄일 수 있을까? 소비사회와 정보사회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쾌락의 감소, 법치의 확립, 자기 교육 등이 있다. 쾌락의 감소는 엄격한 사회 통제와 자유의 제한을 의미하므로, 이는 정치경제학의 영역이고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남은 방법의 하나는 쾌락의 탐닉에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끊는 것, 즉 수범수제(隨犯隨制)의 정신으로 법을 제정하는 길이 있다. 하지만 불교도로서 더 중요한 일은 자기를 교육하는 것, 즉 명상을 통하여 감각적 자극을 줄이고, 사물의 유혹을 극복하고 말도 순하게 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 역사의 유연한 주체로서 내 안에 먼저 평화를 이루고 그것을 세상에 돌려주는 일이다. 이렇게 자기를 교육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파랑이나 하양을 평화와 순진무구의 색이라고 해보자. 어린 시절 다음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잃어가며 점점 오염된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입시 경쟁이 주는 강제와 스트레스 그리고 넷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연애라도 하게 되면 본격적인 쾌락을 맛보면서 심신은 더 붉어지고, 어른이 되면 돈벌이, 선명한 정치적 이념과 일편단심 애국심으로 새빨개진다. 여름엔 파란 하늘을 보고 겨울엔 하얀 눈을 보자.

“세상을 파랗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세상과 자신의 해방이 가능한가의 질문이다. ■
 

허우성 /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철학과현실》 편집위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

 허우성 woohu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