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3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열린논단]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2012년 2월 16일 열린논단
[0호] 2012년 02월 17일 (금)박경준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 대한 곡해가 적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곡해는 업보윤회설을 신비주의적 혹은 숙명론적 사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업보윤회설은 3세윤회설로 이해된다. 예컨대, 영화 「리틀 붓다」의 내용 중에 나오는 ‘환생’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정통 윤회설의 내용과 조금 다르지만, 불교의 기본적 윤회사상으로 이해되면서 대중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를 확산시켜 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누구는 전생에 왕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든가, 누구는 업장이 두터워 금생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등의 대화는 모두 윤회를 전제로 한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윤회관 역시 불교를 신비주의적 또는 숙명론적 종교로 곡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 다음의 오해는 아마도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으로 철저한 동기론이라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불교 업설은 행위의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디지털화된 상황에서 동기론적 윤리사상만으로는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불교 업설에 결과론적 내용은 없는 것인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해는 불교 업설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라는 편견이다. 불교 업설은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설해지지만,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共業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불교 공업설이 우리의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은 올바른 불교이해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바탕이 되는 근본 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업과 윤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윤회를 변증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에서 행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無我와 輪廻의 모순을 ‘無我輪廻說’로 봉합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다 보니 업설과 윤회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새로운 해석 작업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업과 윤회의 내용이나 사상사적 전개 과정보다는 업설과 윤회설의 의의에 대해 초점을 맞춰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업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요즈음은 명상의 시대라 할 만큼 명상이 유행인 바, 이것은 결국 행복의 기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과업보를 심리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 업설과 윤회설의 기본 의의

1.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

불교 업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苦와 樂, 행복과 불행,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신(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불교 업설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의 교설로서 ‘善因善果 惡因惡果’ 또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칙을 주장한다. 그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경전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릇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대로 그 열매를 거둔다. 善한 행위에는 선의 열매가, 惡한 행위에는 악의 열매가 맺는다. (그 사람이) 씨앗을 심어 그 사람이 (자신의) 과보를 받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위와 같은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역사나 개인의 운명이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각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스스로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기도나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휴거 등을 믿는 종말론자가 되어 건강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전생에 스스로가 지은 숙명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다.

걸핏하면 철학관을 찾고 점을 치며, 사주나 점괘가 좋지 않을 때에 자꾸 굿에 의지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박의 노예가 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에 빠지며 향락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

인과응보를 믿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렇게 불교 업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이자 기초인 것이다.

2.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을 돌아보면,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인간 해방’을 넘어 ‘동물 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한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석존은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 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法과 律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자유와 책임’의 민주주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류가 일구어 낸 역사의 아름다운 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과 의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결의 원리 때문에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최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그 대안이 없는, 적어도 차선의 정치제도라 할 만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권사상의 발전에 방해가 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불교는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막스 베버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원천적으로 베버가 불교 업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숙명론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불교 업설은 ‘자유와 책임’의 원리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 싶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석존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러한 ‘자유와 책임’만이 아니라, 나아가 ‘권리와 의무’의 정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불교는 국가와 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일종의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와 함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업설에서 ‘자유와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정신과 통한다. 불교 업설은 이렇게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라는,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요건과 정신을 가르쳐 준다.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바탕한 도덕적 행위와 창조적 노력을 설하는, 상식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함의한다.

Ⅲ. 불교 共業說의 사회적 의의

근대 인도에서 불교개종운동을 이끌었던 암베드까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위에서 언급한 막스 베버처럼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과거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학대와 잘못된 사회계급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현실사회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별업보약경(分別業報略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성인을 뵈옵고 기뻐하지 않으면
날 적마다 언제나 어리석어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으리.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절제 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그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다가
나중에는 까마귀의 몸을 받으리.

이러한 가르침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숙명론으로 곡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세의 업뿐만 아니라 현세의 업도 현실을 규정한다고 설한다. 더욱이 불교업설은 과거의 업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업에 더 비중을 둔다. 󰡔대승열반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佛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이어서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보이며, 이 사례는 업설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에 제동을 건다. 이 사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업의 과보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국왕의 원수를 제거하여 상을 받고, 왕자를 살해하여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상벌제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현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인과업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과응보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선업을 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함께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그것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응보의 법칙은 사회 정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불교 업설의 외연은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설에 대한 󰡔대승열반경󰡕의 이러한 관점은 「교진여품」의 다음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가르침은 업설에 대한 통념을 극복하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 준다. 사람들의 고통과 안락의 문제를 과거의 개인적인 근본 업[本業] 뿐만 아니라 현재의 4대, 시절, 토지, 인민과 관련시켜서 바라본다. 여기서 4대와 토지는 자연 환경을, 시절은 시대 상황을, 인민은 사회 환경을 의미한다. 과거의 본업이 因이라면 자연 환경, 시대상황, 사회 환경은 緣이다. 이러한 인과 연이 결합하여 고통 또는 안락의 과[果報]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경』「교진여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연 환경, 시대 상황, 사회 환경은 모두 器世間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기세간은 자연 환경의 의미로 정의되지만, 사회 환경도 기세간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이 인간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회[또는 문화] 역시 인간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세간은 인간의 업과 무관한 것일까. 불교는 놀랍게도 기세간은 共業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공업(Sādhāraṇa-Karma)’이라는 용어는 대체적으로 초기 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부파불교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업’은 아마도 2세기 무렵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들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공업은 일체 중생의 집단적 또는 공동의 업으로서 자연환경[기세간]의 성립과 파괴, 그리고 상태를 규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업 사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불교의 공업 사상은 원론적으로 현대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공동의 공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반드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공동선의 추구가 이루어질 때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컨대 환경문제는 우리 인간의 공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류의 팽창주의 경제가 초래한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은 어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시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하고 ‘절제 자본주의’와 같은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경 위기, 생태 위기는 개인적인 경제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 지구적 합의를 통한 제도적, 정책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당위성은 초기 경전의 하나인 『구라단두경(Kūṭadanta-sutta)』의 내용 중에 제시된 바 있다. 이 경의 요지는, 범죄자를 아무리 강력하게 처벌하더라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한, 범죄는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경제 정책이 시행되어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 국가는 안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빈곤을 사회악의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사회악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선보다도 사회적 선에 더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공업 사상은 현대인에게 시민사회운동이나 NGO 활동, 공공질서 준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버스의 예를 들어 보자. 버스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승하차시 등에 우선 개인적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전기사의 노동 환경, 버스 정비 시스템, 신호체계, 도로 사정 등의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른 차량들도 모두 교통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 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점검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공업설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업설의 결과론적 측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과 구조를 지니며 인간관계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조직에 바탕한 대형화, 대량화, 집단화의 사회로서, 그만큼 사회적 리스크도 높다. 이러한 리스크 사회에서는 윤리적 동기론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일정 정도 윤리적 결과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마음’과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철저한 동기론으로 비판해 왔다. 자이나교의 한 경전[The sūtrakṛtāṅga sūtra]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쌀자루를 사람인 줄 알고 쇠꼬챙이로 찔렀다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사람을 쌀자루로 착각하여 쇠꼬챙이로 찔러 죽였더라도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며, 불교를 無作用論(Akriyavāda)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불교는 이처럼 극단적인 동기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자이나교에서 비판하는 정도의 동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밝힌다.

첫째, 故意性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이 『賢愚經』에 나온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 스님(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스님을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생에는 죽은 비구 스님이 아들이었고 사미승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결과론에 해당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둘째, 『中阿含』「思經」에서, 석존은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不必受報)”라고 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不必受報’는 문법적으로 분명히 부분부정인데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라고, 완전부정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면 불교는 동기론과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셋째, 10악업 가운데 意業의 하나인 愚癡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10악업 중, 의업에 속하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셋이다. 이 마지막 ‘치’가 바로 우치다. 종종 邪見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의 해석에 의하면 사견은 ‘선과 악 그리고 그 업보 등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심지어 무시하는 견해’이다. 우치든 사견이든, 여기에는 분명 ‘고의성’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악업이기에 거기에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리석음, 즉 고의성이 없는 악업에 대한 과보를 설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결국 결과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넷째, 석존은 제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늘 가르친다는 점이다. 석존 재세시에, 어느 날 투라난타 비구니가 실수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려 잠자던 아이를 죽게 했을 때, 석존은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 바라이죄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이죄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죄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단 내의 행동 규범과 일반 사회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존은 투라난타에게 “그러나 남의 방아 공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주의 의무’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현행 형법에서는 고의범보다는 가볍지만 과실범에게도 ‘주의 의무 위반(Verletzung der Sorgfaltspflicht)’이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업무상과실범에게는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석존의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Ⅴ. 인과응보의 심리적 해석

甲이 형편이 어려운 乙을 도와주었는데 을이 훗날 성공하여 갑에게 은혜를 갚았다든가, 병이 정을 구타하였는데 정에게 다시 구타당했다든가, 누군가가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인과응보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러한 구체적인 개별 행위에 의한 인과응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업이나 악업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자의 경우를 기계·물리적 인과응보라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생물·화학적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木村泰賢은 전자를 업의 반동적 현현이라 부르고, 후자를 업의 능동적 현현이라 부른다. 그는 업의 능동적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慈善心에 의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결과로서 자기의 성격이 점점 유연하게 되고, 드디어 자선 박애의 사람, 더 나아가 절대적 愛他心의 권화인 보살로까지 재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업의)능동적 방면의 현현이고 소위 同類因果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생각컨대 우리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성격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석존의 眞諦的 견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격과 인격은 (유전자 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업의 창조적 역동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설은 숙명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계물리적인)윤리학적 인과응보보다 (생물화학적인)심리학적 인과응보가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미래 불교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의 하나로 양심에 입각한 인과응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선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사람이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양심의 감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악을 행하고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죄인의 마음이 결코 평안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심리적 인과응보의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명상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직접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도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것은 절대 빈곤을 극복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관, 인생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자 성공이고, 마음의 고통이 불행이자 실패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연작들이 계속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명상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현대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과업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적절하고 유용해 보인다.

Ⅵ. 윤회설의 의의

정세근은 최근 그의 저서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한국불교에 고한다.

하나, 불교를 힌두교와 구별하라. 우리 불교는 인도의 전통 힌두교와 지나치게 뒤섞여 있다.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은 다르다. 불교를 인도철학으로 죽이지 마라. 나아가, 불교와 자이나교를 구별하라. 윤회가 있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르지 않다.…(중략)…
넷, 윤회를 부정하라. 윤회는 힌두교의, 자이나교의 것이다. 윤회가 설명하는 것이 계급질서이고 태생의 한계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런 관념은 일찍이 버릴수록 좋다. 나도 모르는 윤회의 법칙은 거짓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앞서, 그의 책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에서, 윤호진, 정승석, 김진, 한자경, 최인숙, 조성택 등의 주장과 논평,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비교 분석 비판을 통해 이른바 불교의 ‘무아윤회설’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는 이 문제를 무아윤회와 유아윤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무아연기의 철칙 아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는 연기를 非有非無의 中道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無 또는 무아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기설은 유무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것이므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체적인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我’는 크게 實我(실체아, ātman), 假我, 眞我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實我가 없다’는 의미지 假我와 眞我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연기무아설은 나를 온통 부정하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설의 무아도 ‘나’는 없지만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지 않다는 그러한 뜻을 담은 중도적인 무아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이러한 나를 ‘거짓 나(假我 prajñaptyātman)’라고 하고, 그러한 ‘나’는 실로는 없지만 거짓으로는 있음이 허용되며, 이러한 거짓 ‘나’의 허용은 지혜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은 모순 관계에서 벗어난다.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윤회는 가능하다. 가아(오온)는 존재하고, 하나의 가아가 지은 업이 남긴 업력이 다음 가아를 형성하면, 그 가아들 간의 연속성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는 오온(가아)과 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무아윤회론은 바로 이 점을 밝히는 것이라고 본다.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윤회’의 난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아의 윤회방식은 여전히 궁금하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윤회설은 불교 사상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수많은 전생담은 말할 것도 없고 붓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인 宿命通 또는 宿命明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해탈의 가르침도 윤회를 떠나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윤회를 단순히 교화방편설로 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윤회’는 3세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일어나고, 한 찰나에도 일어난다고 종종 해석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또한 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生滅이 없지만 세속제의 범부중생에게는 死後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특히 신체적으로나 삶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뭔가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얻고 싶어 하여 윤회를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도 대개는 생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 윤회론은 이러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있다. 윤회에 대한 확신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도덕적, 정서적으로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윤회설은 신비주의라기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한 적극적 신념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더러 우연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인 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3세윤회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선을 행하고 악을 그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기 때문이다.

Ⅶ.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의의가 여간 크지 않다.
첫째,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karma)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귀천 역시 오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바, 이것은 곧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며,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민정신이라고 하겠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공동의 노력은 물론, 그 무엇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일깨운다.

셋째, 불교 업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결과론적 윤리 사상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글로벌 리스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불교 업설은 단선[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평면[사회]적 차원, 그리고 공간[심리]적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심리적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불교 업보윤회설은 이미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과학의 발전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창조적 해석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善과 惡의 개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졌을 때, 업보윤회설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윤회는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윤회론 해악 허점

 윤회론 해악 허점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7.03.21 18:10
  •  댓글 22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43.

윤회론을 믿으면 오히려 해가 된다. 지금의 기억이 까마득히 지워질, 다음 생에 대한 매력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말로는 윤회론을 믿는다 해도, 무의식적으로는 무시한다. 죽을 때 기억이 다 사라진다면 새로 태어나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윤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사나, 윤회를 믿는 사람들은 이생에 복을 쌓아 내생에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회개혁에는 별로 또는 전혀 흥미가 없다. 게임의 규칙을 바꿀 필요를 못 느낀다. 영원한 게임규칙인 '윤회와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윤회를 통해 실현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세월 동안 무한히 윤회하는 동안, 선업만 쌓으면 어떤 규칙하에서건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왕정을 민주정으로 고치지 않더라도, 선행을 쌓아 다음 생에 왕이나 귀족으로 태어나면 될 일이다. 왕정하에서 인구의 40프로가 노비신세가 되더라도(조선이 그랬다), 그건 제도의 탓이 아니라 노비가 된 자들의 전생의 악업이 문제이다. 제도는 그들이 지은 악업을 해소할 수 없으므로, 제도를 고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노비제도하에서 고생함으로써 그들의 악업이 해소되므로, 노비제도는 좋은 제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비인간적인 일이 벌어져도, 다 당하는 사람 탓이다. 다 그 사람이 전생에 지은 업 탓이다. 그러므로 제도를 고칠 일이 아니다. 제도를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된다. 그 과정에서, 전생의 업을 씻기는커녕, 오히려 새 업만 더 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벌주려고 내리는 질병과 벼락을 방해한다면서, 백신과 피뢰침 발명을 반대한 것과 같다.

당신이 전생에 죽도록 노력해서 가축 신분을 탈출해서 지금 인간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금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이 게으르고 염세적인 것은 그래서일 수 있다. 전생만 기억할 수 있다면, 부지런하고 낙천적으로 변할 것이다. 전생에 노력해서 금생에 복을 받았으므로, 금생에 노력해서 내생에 더 멋진 생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 결과 매사에 낙천적이고 긍정적이 될 것이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과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 내생으로의 윤회를 믿는 국가들은 활력이 없고 침체되어 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극소수의 예를 들어도 소용없다. 당신을 포함한 99.9999999프로의 사람들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이 내생에 현생을 기억할 확률은 자동차 사고를 당해 죽을 확률보다 십만 배나 작다. 후생에 동물로 태어나면 문자 그대로 '0'이다. 대다수 동물은, 일 년 전 일은 고사하고, 한 달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의 수는 인간의 수보다 조 배는 많다. 사고로 죽을까봐 두려워 자동차 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불교신도들이 스님들이 아무리 겁을 줘도 윤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이해가 간다. 자동차 사고사보다 십만 배나 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즉 내생에 현생을 기억하는 일을, 어떻게 두려워하겠는가? 살인범이 감옥에 가는 대신 10년간 마취형을 당하고 10년 만에 깨어날 때 늙기는커녕 오히려 더 젊어진다면, 이건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다. 사람이 벌을 받고 지렁이로 태어나는 게 이런 일에 해당한다.)

인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보라. 과학은 발달하지 못하고 점술·풍수·사주·미신·부적·점성술 등 온갖 사이비가 판을 친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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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2
해주 2017-04-22 14:29:26
윤회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께서 "육도윤회"를 가르치셨는지는 의문이라는 뜻입니다.
십이연기론이 이미 윤회설을 품고 있는데 기존 인도종교들에서 이미 회자되던 윤회론을 여섯가지 세계를 구체적으로 적시해 가시면서 가르쳤겠느냐는 의문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불교의 윤회설이 초기에는 아수라가 없는 "오도윤회"로 설명되다가 나중에 "육도윤회"로 발전되었다는 점도 저를 의아하게 합니다.

물론 쌍윳타 니까야 등 초기경전부터 부처님께서 전생얘기를 하시는 가운데 윤회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전이나 대승경전이 모두 불멸 300-500년 이후에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육도윤회설"은 불교 교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보다 체계화를 거친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정도의 생각입니다.
 

그렇게공부&책을 많이보신분이? 2017-03-27 06:46:27
부처님께서 제세시에 직접 육도윤회를 가르쳐셨는지는 불명확 하지만?
,,
~~~
부처님은 진정으로 무수히 많이 강조하시면서 말씀 하시었는데도
그것을 안보셨는지 아님?
어느 가르침을 믿고?부처님 제자로써 그리 말하셔도 되는지?
진정 궁금 합니다만?

어느 부처님 가르침을 보시었고 교리는 무엇이라 보시는지?
불교공부를 ?어느 경전을 보셨는지?
~~
부처님 바른법의 경전 내용에는 이런게 두루 너무나도 많이 있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핵심 교리는 바로
인연법 & 윤회론 이라고

~~

따라서 인연법&윤회법은 불가분의 관계로써
부처님 가르침 교리의 뼈대 즉 중심 핵심이자
대부분 전체 가르침 교리가 됩니다
~~
이것을 빼고 불교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의 경전 대부분에는

하늘등 천상 이야기 인간세상 이야기 지옥이야기
축생 아귀 아수라등의 이야기가 많이 설명 하시면서
경각심과 복덕등 만드는 수행과 교훈등도 함께 설명 하시었죠

부처님은 그래서 무상 무아 일체고의 육도윤회 세계인
이생에서 받은 사람 몸 또 받기 힘드니

현생에서 부지런히 수행하여 복밭을 만들고
착한 선업의 인연과를 만들어 라는게 가르침
 

해주 2017-03-27 02:10:07
강교수님의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읽은 독자로서
강교수님이 부정하시는 윤회는 힌두교식 윤회 즉 변치 않는 나,
또는 자기동일성이 유지되는 영혼같은 나, 소위 Atman의 윤회인
걸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B.C 6세기 우파니샤드식 윤회관은
부처님의 무상, 무아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니까 당연히
불교의 윤회관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제세시에 직접 육도윤회를 가르쳐셨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불교에서의 윤회는 변치 않는 영혼의 윤회가 아니라 no-self의 윤회,
무아(Anatta)의 윤회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재육화 reincarnation)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명색(名色)이 업력에 따라 재탄생(rebirth)된다는 윤회를 가르치고
있다고 봅니다. 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뿐만 아니라 수상행식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의 영역에 속해 있으니까요.

그런데 강교수님이 윤회론을 사회개혁론과 결부시켜 윤회론을 전적으로
부정하신 것은 좀 지나친 주장인 것 같습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인
慈悲喜捨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
전생의 업 때문에 저렇게 되었으니 동정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
할 수 있을까요?
윤회론을 업에 의한 운명결정론으로 받아들이는 일부 불교도가 있을 수
있지만 인과응보 가르침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제도개혁에 반기를 들게 할까요? 저는 불교의 윤회론과 현실
사회의 개혁론이 상호배반적인 관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힌두교 윤회론은 부정하지만 객관적 검증을 거친 극소수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신기한 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행위, 선업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굳이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각의 반대가 환각인가요 2017-03-26 17:49:20
그렇다면 각이 없으신 님의 비불교 견해들이 환각일 겁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불자들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낮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강교수님처럼.

윤회를 믿지 않으면 불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중생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정으로는 윤회를 보지 못한답니다. 부처님 말씀이시니 잘 살피기 바랍니다.
 

희한한 분이시네요 2017-03-26 17:33:16
유전은 생식에 의해 부모의 DNA가 후손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부모의 신구의 선업-불선업이 DNA 속에 담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그 후손이 부모의 선업의 과보 또는 불선업의 과보를 겪게 된다는 말인가요?
또 나의 행복과 불행은 부모의 선업과 불선업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렁가요?

輪廻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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輪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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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サンサーラ」はこの項目へ転送されています。その他の用法については「サンサーラ (曖昧さ回避)」をご覧ください。


 この項目では、インドの伝統的な転生観である輪廻(サンサーラ)について説明しています。その他の用法については「輪廻 (曖昧さ回避)」をご覧ください。


六道輪廻をあらわしたチベット仏教の仏画。恐ろしい形相をした「死」が輪廻世界を支配している

輪廻(りんね[1])とは、サンスクリット語のサンサーラ(संसार saṃsāra)に由来する用語で、命あるものが何度も転生し、人だけでなく動物なども含めた生類として生まれ変わること[1]。漢字の輪廻は生命が無限に転生を繰り返すさまを、輪を描いて元に戻る車輪の軌跡に喩えたことから来ている[要出典]。日本語読みのリンネは、連音によるものである[1]
インド圏以外における生まれ変わりの思想の総論については「転生」を参照

インド哲学において生物らは、死して後、生前の行為つまりカルマ: karman)の結果、次の多様な生存となって生まれ変わるとされる。インドの思想では、限りなく生と死を繰り返す輪廻の生存をと見、二度と再生を繰り返すことのない解脱を最高の理想とする。


目次
1ヴェーダの宗教における輪廻
2仏教における輪廻
2.1仏教における輪廻思想の発展
2.2仏教内における輪廻思想の否定
3ジャイナ教における輪廻
4注釈
5出典
6参考文献
7関連項目
8外部リンク
ヴェーダの宗教における輪廻[編集]

食物連鎖と五火二道説。

ヒンドゥー教の前身であるバラモン教において、はじめて断片的な輪廻思想があらわれたのは、バラモン教最終期のブラーフマナ文献[注 1]ないし最初期のウパニシャッド文献[注 2]においてである。ここでは、「輪廻」という語は用いられず、「五火」と「二道」の説として現れる。『チャーンドーギヤ』(5-3-10)と『ブリハッドアーラニヤカ』(6-2)の両ウパニシャッドに記される、プラヴァーハナ・ジャイヴァリ王の説く「五火二道説」が著名である。

五火説とは、五つの祭火になぞらえ、死者はにいったんとどまり、となってに戻り、植物に吸収されて穀類となり、それを食べた精子となって、との性的な交わりによって胎内に注ぎ込まれて胎児となり、そして再び誕生するという考え方である。二道説とは、再生のある道(祖霊たちの道)と再生のない道(神々の道)の2つを指し、再生のある道(輪廻)とはすなわち五火説の内容を示している[2]

これが、バラモン教(後のヒンドゥー教)における輪廻思想の萌芽である。そして様々な思想家や、他宗教であるジャイナ教、仏教などの輪廻観の影響も受けつつ、後世になってヒンドゥー教の輪廻説が集大成された。すなわち、輪廻教義の根幹に、信心と(カルマ)を置き、これらによって次の輪廻(来世)の宿命が定まるとする。具体的には、カースト(ヴァルナ)の位階が定まるなどである。

行為が行われた後、なんらかの結果(: phala)がもたらされる。この結果は、行為の終了時に直ちにもたらされる事柄のみでなく、次の行為とその結果としてもまた現れる。行為は、行われた後に、なんらかの余力を残し、それが次の生においてもその結果をもたらす。この結果がもたらされる人生は、前世の行為にあり、行為(カルマ)は輪廻の原因とされる。

生き物は、行為の結果を残さない、行為を超越する段階に達しない限り、永遠に生まれ変わり、生まれ変わる次の生は、前の生の行為によって決定される。 天国での永遠の恩寵や地獄での永劫の懲罰といった、この世以外の来世は輪廻のサイクルに不均衡が生じるため、ありえないことと考えられた[3]

これが、業(行為)に基づく因果応報の法則(善因楽果・悪因苦果・自業自得)であり、輪廻の思想と結びついて高度に理論化されてインド人の死生観・世界観を形成してきたのである。なお『マヌ法典』では、女性はどのヴァルナ(身分)であっても、輪廻転生するドヴィジャ(二度生まれる者、再生族)ではなく一度生まれるだけのエーカジャ(一生族)とされていたシュードラ(隷民)と同等視され、女性は再生族である夫と食事を共にすることはなく、祭祀を主催したり、マントラを唱えることも禁止されていた[4]
仏教における輪廻[編集]
仏教用語
輪廻、サンサーラ
パーリ語 saṃsāra
サンスクリット語 saṃsāra, sangsara (Dev: संसार)
チベット語 འཁོར་བ་
(khor ba)
ベンガル語 সংসার (sôngsarô)
ビルマ語 သံသရာ
(IPA: [θàɴðajà])
中国語 生死, 輪迴, 流轉
(拼音: shēngsǐ, lúnhuí, liúzhuǎn)
日本語 輪廻
(ローマ字: rinne)
韓国語 윤회생사유전
(RR: Yunhoi, Saengsayujeon)
英語 cycle of existence, endless rebirth, wheel of suffering
クメール語 សង្សារ , សង្សារវដ្ដ , វដ្ដសង្សារ
(Sangsa, Sangsaravord, Vordsangsa)
モンゴル語 ᠣᠷᠴᠢᠯᠠᠩ, орчлон
(orchilang, orchlon)
シンハラ語 සංසාරය (sansāra)
タイ語 วัฏสงสาร
ベトナム語 Luân hồ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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仏教においても、伝統的に輪廻が教義の前提となっており、輪廻をと捉え、輪廻から解脱することを目的とする。仏教では輪廻において主体となるべき、永遠不変の魂は想定しない(無我[5]。この点で、輪廻における主体として、永遠不滅のアートマン)を想定する他のインドの宗教と異なっている。


dukkhā jāti punappunaṃ.

繰り返し行われる (ジャーティ)は苦(ドゥッカ)である—  パーリ仏典ダンマパダ 11 Jarāvaggo, Sri Lanka Tripitaka Project, (原文)



akuppā me 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わが解脱は達成された。これが最後の生まれであり、もはや二度と生まれ変わることはない。—  パーリ仏典聖求経 26 Ariyapariyesana Sutta, Sri Lanka Tripitaka Project, (原文)

無我でなければそもそも輪廻転生は成り立たないというのが、仏教の立場である[6]。輪廻に主体(アートマン)を想定した場合、それは結局、常住論(永久に輪廻を脱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断滅論(輪廻せずに死後、存在が停止する)に陥る。なぜなら主体(我)が存在するなら、それは恒常無常のどちらかである。恒常であるなら「我」が消滅することはありえず、永久に輪廻を続けることになり、無常であるなら、「我」がいずれ滅びてなくなるので輪廻は成立しない。このため主体を否定する無我の立場によってしか、輪廻を合理的に説明することはできない[5]

仏教における輪廻とは、単なる物質には存在しない、認識という働きの移転である。心とは認識のエネルギーの連続に、仮に名付けたものであり[7]、自我とはそこから生じる錯覚にすぎないため[7]、輪廻における、単立常住の主体(霊魂)は否定される。輪廻のプロセスは、生命の死後に認識のエネルギーが消滅したあと、別の場所において新たに類似のエネルギーが生まれる、というものである[8]。このことは科学のエネルギー保存の法則にたとえて説明される場合がある[9]。この消滅したエネルギーと、生まれたエネルギーは別物であるが、流れとしては一貫しているので[注 3]、意識が断絶することはない[注 4]。また、このような一つの心が消滅するとその直後に、前の心によく似た新たな心が生み出されるというプロセスは、生命の生存中にも起こっている[8]。それゆえ、仏教における輪廻とは、心がどのように機能するかを説明する概念であり、単なる死後を説く教えの一つではない。
仏教における輪廻思想の発展[編集]

原始仏典では基本的に畜生餓鬼地獄の五道輪廻が説かれる。経典によっては阿修羅身(: asurakāya)が説かれることもあるが、この阿修羅餓鬼(: peta-asura)[10]、天人(: deva-asura)[注 5]のいずれかに分類される。もしくは阿修羅道としてひとつの道と看做し六道を説く場合もある。 これら天・人・修羅・畜生・餓鬼・地獄を、併せて六道と称するようになった。

後代になり大乗仏教が成立すると、輪廻思想はより一層発展し、六道に声聞縁覚菩薩を加え、六道と併せて十界を立てるようになった。
仏教内における輪廻思想の否定[編集]

一方、現代では「ブッダの教説は輪廻の存在を否定するものである」という主張が主に近代仏教学の学者によってなされ、学者間でその是非についての議論が行われている。 現代日本の仏教者、僧侶、仏教研究者の中には、「ブッダは輪廻の存在を否定した」とする主張が少なくない[12]。このような言説を包括的かつ批判的に扱った学者として松尾宣昭がいる[13]。松尾によれば、「輪廻の否定」には、ブッダが(1)「そもそも輪廻は存在しない、と考えた」という見解と、(2)「人は輪廻に留まるべきではない、と考えた」という見解があり、両方とも輪廻を否定しているものの、その意味内容は全く異なるとする[14]。この二つの考えは二律背反に見えるが、(1')「ブッダは輪廻の存在を否定していたが、当時の人々が輪廻の観念に縛られていたため、仮に是認した」だからこそ(2')「輪廻という想念に留まるべきではないと説いた」として意味を読みかえる場合に、両立する。このような立場を松尾宣昭は「輪廻想念説」と呼び、このような立場を支持する記述はパーリ聖典には見出されず、「修業未完成者は死後輪廻する、ゆえに修行を完成させて輪廻から解脱せよ」という趣旨の、「輪廻は存在しない」という説とは反対の言葉が多く見出されると述べる[14]。一方で、パーリ聖典の「決定的資料性」を否定し、ある種の「仏教の本質」を想定することで、そこから帰結的に輪廻否定が導出されるとする立場もあるとする。松尾によれば和辻哲郎は「仏教の本質」として無我説を用い、自らの輪廻否定説の根拠としているという[15][14][注 6]。さらに「仏教の本質」を後代に明確化されたの教説に見出し、(1)と(2)の両立性を二諦説によって説明する見解もある[14]。松尾によると、空を用いた輪廻否定は、実質的には無我説を用いたものと同じであり、この場合は「龍樹がブッダの真意を説明した」テキストである『中論』を根拠として提示することができると述べている[注 7]

輪廻転生を理論的基盤として取り込んだインド社会のカースト差別に反発してインドにおける新仏教運動を主導したビームラーオ・アンベードカルは、独自のパーリ仏典研究の結果、「ブッダは輪廻転生を否定した」という見解を得た。この解釈はアンベードカルの死後、インド新仏教の指導者となった佐々井秀嶺にも受け継がれている[16][17]。一方で釈迦が死後の世界について述べた内容が釈迦の経典一切経の中に数多く残されているのも事実である。その一つに仏説阿弥陀経がある。
ジャイナ教における輪廻[編集]
詳細は「サンサーラ (ジャイナ教)」を参照

ジャイナ教において輪廻とは、様々な存在領域への再生・復活が繰り返されることを特徴とする、この世での生活のことを言う。輪廻は苦痛・不幸に満ちたこの世の存在であり、そのため望ましくない、放棄するべきものだとされる。輪廻には始まりがなく、魂は悠久の過去からカルマに縛られていたことに気付くのである。モークシャ(解脱)は輪廻から解放される唯一の手段である。
注釈[編集]

^ ブラーフマナは、ヴェーダのシュルティ(天啓文書)のひとつで、ヴェーダの祭式を解説するいくつかの注釈書。紀元前900年頃から紀元前500年頃にかけて成立したとされ、この時代をブラーフマナ時代という。
^ 紀元前800年頃以降にサンスクリットで書かれた哲学書で「奥義書」と称される。
^ 南方上座部アビダルマ教学では、二つのエネルギーの因果関係が距離の影響を受けるとは考えない。[8]
^ 南方上座部アビダルマ教学では完全な意識(路心 vīthi-citta)と無意識(有分心 bhavaṅga-citta)を区別し、どちらも意識(viññāṇa)と見做す。[7]
^ 地神に依止している堕処の阿修羅 (bhummassita-vinipātikāsura)[11]
^ 松尾はこの説に詳細な批判を行っている。
^ ただし松尾は、『中論』がそのように読めるとは思われないとする。[14]
出典[編集]

a b c 「輪廻」 - 大辞林 第三版、三省堂。
^ 『南アジアを知る事典』(1992)[要ページ番号]
^ 中村元『原始仏教:その思想と生活』日本放送出版協会〈NHKブックス〉2007年、第69刷、ISBN 4140011114 p.101.
^ 森本 2003, pp. 191-192.
a b 石飛道子 『仏教と輪廻(下)ブッダは輪廻を説かなかったか』
^ アルボムッレ・スマナサーラ 『無我の見方』 サンガ、2012年、Kindle版,Q&A。ISBN 978-4905425069
a b c V.F Gunaratna 『仏教から見る死(中)』
a b c V.F Gunaratna 『仏教から見る死(下)』
^ A.スマナサーラ; 藤本晃 『業(カルマ)と輪廻の分析』 サンガ〈アビダンマ講義シリーズ〈第5巻〉〉、83頁。
^ ウ・ウェープッラ、戸田忠=訳註『アビダンマッタサンガハ [新装版]』、中山書房仏書林、p.125
^ 「堕処の阿修羅(…)地神(…)2神とも四大王天に属する天衆である」(ウ・ウェープッラ、戸田忠=訳註『アビダンマッタサンガハ [新装版]』、中山書房仏書林、pp.133-134)
^ 和辻哲郎『原始仏教の実践哲学』岩波書店、望月海慧『ブッダは輪廻思想を認めたのか』日本佛教学會年報第六十六号、並川孝儀『ゴータマ・ブッダ考』大蔵出版など
^ 「輪廻転生」考(一)~(四) NAID 110007172137 NAID 110008721186 NAID 110008747101 NAID 110009675250
a b c d e 松尾宣昭「「輪廻転生」考(三) : 一つの論点をめぐる補足] 龍谷大學論集」『龍谷大學論集』第476巻60-75、龍谷大学、2010年10月1日、 NAID 110008747101
^ 松尾宣昭「「輪廻転生」考(一) : 和辻哲郎の輪廻批判]」『龍谷大學論集』第469巻、2007年1月、 62-80頁、 NAID 110007172137
^ アンベードカル『ブッダとそのダンマ』光文社田中公明『性と死の密教』春秋社山際素男『破天 インド仏教徒の頂点に立つ日本人』光文社
^ 「アンベードカルを知らないと仏教がわからない。(...)アンベードカルを全部勉強することによって初めて本尊である仏陀がわかる。」世界遺産級の遺跡発掘に成功: インド仏教僧  佐々井秀嶺(2004)
参考文献[編集]
『サンガジャパン Vol.21 特集・輪廻と生命観』 サンガ、2015年8月、ISBN 978-4-86564-024-3
森本達雄『ヒンドゥー教―インドの聖と俗』中央公論新社中公新書〉、2003年。ISBN 4-12-101707-2
ミルチア・エリアーデ著、島田裕巳訳 『世界宗教史3 ゴータマ・ブッダからキリスト教の興隆まで(上)』 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2000年5月、ISBN 4-480-08563-7
辛島昇・前田専学・江島惠教ら監修 『南アジアを知る事典』 平凡社、1992年10月、ISBN 4-582-12634-0
関連項目[編集]
転生
六道
死と再生の神
死生観
輪廻転生
復活 (キリスト教)
外部リンク[編集]
森章司死後・輪廻はあるか--「無記」「十二縁起」「無我」の再考」 東洋学論叢 (30), 180-158, 2005-03 東洋大学文学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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